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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봉쇄령5

1812년 - 왜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갔을까 (하)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 2019. 7. 1.
가짜 뉴스, 전쟁을 일으키다 - 1810년 12월 31일 짜르의 칙령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 2019. 1. 28.
달콤씁쓸한 결말 - 설탕과의 전쟁 (마지막편) 하지만 본격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아카르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빌헬름 3세가 알고보니 멍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입만 살았던 강경파의 주장대로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빌헬름 3세에게 혹독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정제소까지 집어 삼켰습니다. 1806년 밀물처럼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공장을 불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아카르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잠겼습니다. 사탕무 정제소가 사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온 나라가 탈탈 털렸고, 나폴레옹에게 알짜배기만 골라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기고 덤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내.. 2018. 5. 21.
위기의 대륙봉쇄 - 설탕과의 전쟁 (1편) 1810년 이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위가 된 나폴레옹의 권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도나우 강변에서 피를 쏟으며 싸운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엘베(Elbe) 강과 베저(Weser) 강 하구 북유럽 해안에 분산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영국과의 무역 전쟁인 대륙봉쇄령의 엄격한 집행을 위해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들을 감시하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북부 독일 해안에 이런 감시를 집중했을까요 ? 이는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의존해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삶과 문화는 농작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북부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문화는 .. 2018. 5. 7.
교황과 무역 - 포르투갈의 전운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바친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칭호는 단지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나폴레옹에게 공치사로서만 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로마는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로마 및 그 주변은 원래 세속 군주로서의 로마 교황이 가지는 교황국(the Papal States)에 속하는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눈 앞에는 고양이는 커녕 생쥐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오 7세(Pius VII)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다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1809년 5월 17일, 나폴레옹은 빈에서 칙령을 내려 로마 교황의 세속 군주로.. 2018.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