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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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_- 2019.07.01 0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주일의 시작을 새 글과 함께! 매번 포스팅이 월요일 6시 30분이네요.
    주말동안 글 정리 해 놓으시고 월요일 새벽 포스팅 예약 걸어놓으시는 건가 보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보니666 2019.07.01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항상 좋은글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을 여쭤보고 싶은데, 나시카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나폴레옹의 패망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지난 글에서 1810년의 나폴레옹은 더이상 전쟁을 개인적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는 대륙봉쇄령 포기와 영국정복을 완전 포기한다는 뜻이고...유럽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를 만만하게 여기고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 다시 침략했을 것 같고...그렇게 되어도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나시카님의 생각이 정말 궁금합니다. 고견 부탁드려요~^^

    • nasica 2019.07.01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러시아와 전쟁 회피는 결국 대륙봉쇄령의 붕괴로 이어졌겠습니다만, 그래도 나폴레옹 정권은 유지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은 없습니다.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 러시아가 굴복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인 불만은 터져나왔을 것이고, 그때문에 전쟁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총칼은 절대 황금을 이기지 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 저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요 ? 고매한 왕가의 선조도 따지고 보면 힘깨나 쓰는 조폭단 두목일 뿐입니다.

  3. 푸른 2019.07.01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종일관 진지한 글이다가, 마지막에 "yo, say love"하는 예수님과 "No nercy~"하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드시네요ㅋㅋ 그 장면을 상상할수록 웃음이 나오네요ㅋㅋㅋ

  4. 최홍락 2019.07.01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서구 사상에 관용적인 왕과 그렇지 못한 귀족들의 구도로 보기에는 당시 18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언어가 프랑스어었다는 사실과는 배치가 되는 듯 합니다. 표트르1세의 친서구정책도 한몫했지만 그래서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1635년 언어 표준을 만들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창설한 이래 프랑스어는 통일된 표준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첫 언어라는 인식이 러시아 상류사회에 널리 퍼졌거든요. 프랑스어가 서서히 라틴어를 몰아내고 외교가에서 널리 쓰인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고요. 프랑스 대혁명 직후 프랑스를 탈출한 프랑스 귀족을 불러 과외교사로 삼는 러시아 귀족들 덕분에 프랑스 망명귀족들의 인기가 치솟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러시아의 것을 지키고 러시아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가 되서야 가능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일반 민중들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백안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할정도로 말이지요.

    2. 러시아의 황제와 귀족 간의 대립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배경과 유사하게 경제적인 갈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들어 영국과 러시아 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래 러시아의 대외교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영국의 해군력을 뒷받침하는 아마, 철광석, 석탄 그리고 러시아의 농노들이 생산하는 밀이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영국은 면직물을 포함한 귀족들의 사치품을 수출했죠. 문제는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러시아의 제조업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불공정무역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앨리자베타 여제부터 알렉산드르 2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황실은 농노제를 없애고 농노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변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지요. 그리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세율을 높이고 영국에 치중한 무역루트를 다변화시키려고도 하고요. 물론 농토를 가진 지주 계층들은 반발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존 제도의 유지, 자유무역의 고수를 주장하게 되고요. 마치 남북 전쟁 전의 북부와 남부처럼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북부가 전쟁을 통해 남부를 제압한 반면, 러시아는 황제(파벨1세의 죽음에는 그의 교역 다변화 정책이라는 배경도 존재합니다.)가 암살되는 등 저항이 상당히 거셌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제품의 수요처로서 영국을 대신할 수 있었다면 대륙봉쇄령이 의외로 오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고 이는 러시아 왕실과 귀족 모두 프랑스에 적대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스페란스키가 평민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황제의 최측근인 것과는 별개로 그의 정책이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ᆢ 앞에서 언급한 교역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1811년 중립국 무역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미국과의 교역 확대를 시도했으나 이는 결론적으로 미국을 통해 우회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되어 나폴레옹의 진노를 사서 러시아 원정을 촉발하게 되지요. 그가 친프랑스파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외교 상태를 가져온 정책의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이 스페란스키의 고문 해촉이 된 것이고요.

    스페란스키는 나중에 니콜라이1세 (알렉산드르1세의 동생으로 형 다음 왕위를 계승합니다.)에 의해 재기용되는데 이때 러시아의 법전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이는 일정한 규범 없이 수행 되어온 국가 통치 질서에 명확한 기준과 원칙을 제공함으로써, 법에 의한 국정 운영을 가능케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광무개혁의 러시아 버전. 즉, 그 질서의 목포가 전제정 및 기존 봉건질서를 강화한 것이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근대적인 기술 투자, 교육제도, 화페 통일 등이 이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화되 러시아의 군사력은 유럽의 헌병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럽에서 불거진 각종 혁명을 진압하는데 쓰이고 맙니다.

  5. 궁금한 사람 2019.07.01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파벨 1세의 사망원인은 뭔가요?

    어디서는 목이 졸려 죽었다
    어디서는 칼에 찔려 죽었다
    어디서는 금속상자에 맞아죽었다 하는 데 정확한 사인을 명시한 곳은 없네요

    죽은 건 확실한 거 같은데..

  6. 백군파 2019.07.0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통치에 긍정적인 점이 많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스페인 지식인들까지 거기에 동의할줄은 상상도 못했네요.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쓴맛을 본 이후 프랑스식으로 군제개혁을 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것처럼,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침공 전에 정편과 개편을 통한 근대화를 추진한 적이 없나요?

    • 수비니우스 2019.07.01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이부분 관해서 아는게 없는데 추측으로는 웬지 없었을것 같네요. 오스트리아하고 프로이센이 본진을 몇번 탈탈 털리고서야 프랑스식으로 개혁했던걸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 전에는 본진이 당한 적은 없고 원정 때 모스크바는 함락됐지만 이후에 승리를 거듭했으니까 원정 전후로 딱히 개혁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것 같습니다. 러시아 근대화 추진이 크림전쟁때 털린 뒤지 않나요?? 언제 들어도 좋은 나시카님의 자세한 설명이 기다려집니다.

    • 최홍락 2019.07.01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스페란스키의 개혁이 반쪽짜리라고 평한 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요. 인적 자원 측면에 있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고 법률학교와 기술전문학교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가 없었던 관계로 농민 내지 농노의 자녀들이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군대나 산업이나 전술 내지 기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실력있는 하사관이나 초급장교들이 충분한 숫자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됬던거죠. 시위 진압이나 약탈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동시대의 서구 국가의 정규군과 상대하는건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네요. 여기에 기술력이 뒷받침이 안되다보니 크림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도 도입했던 강선식 야포 대신 청동제 활강포를 쓸 정도였던 것도 한몫을 했고ᆢ

    • nasica 2019.07.02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딱히 뚜렷한 것은 없었다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1810~1812년 사이 드 톨리(de Tolly)와 볼콘스키(Volkonskii) 등의 주도 하에 프랑스식 편제를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의 군단 편제처럼 획기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 최홍락 2019.07.04 0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볼콘스키 공작이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티브가 된 농민공작 세르게이 볼콘스키가 맞는지요?

    • nasica 2019.07.04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말씀하시는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당시 계급이 아직 대위인가 그래서 아닐 것이고, 이 양반이 그 양반일 겁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yotr_Mikhailovich_Volkonsky

  7. 웃자웃어 2019.07.02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일라우 전투를 통해 광활한 동유럽에서는 자신의 전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는데도 쳐들어간 이유가 뭐죠?

    • nasica 2019.07.02 1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그때 경험을 되살려 엄청난 군수품을 준비하고 치중대를 편성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 기술로는 그런 대군에게 장기간 군수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지요. 특히 한가지, 꼭 필요하지만 전혀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다다음번에 본편으로 다루겠습니다.

  8. 중산 2019.07.02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밌게 구독하고있습니다. 나시카님 혹시 괜찮다면 나시카님의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저는 꼭 명시해 놓겠습니다

  9. 웃자웃어 2019.07.14 1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러시아가 절대왕정체제의 전제군주정 이라곤 해도 귀족 여러명 족치는건 가능해도 귀족집단 전체를 족치는건 불가능하단겁니까?

    • nasica 2019.07.14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그게 그때그때 달랐겠지요.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귀족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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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

하지만 본격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아카르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빌헬름 3세가 알고보니 멍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입만 살았던 강경파의 주장대로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빌헬름 3세에게 혹독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정제소까지 집어 삼켰습니다.  1806년 밀물처럼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공장을 불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아카르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잠겼습니다.  사탕무 정제소가 사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온 나라가 탈탈 털렸고, 나폴레옹에게 알짜배기만 골라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기고 덤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습니다.  프로이센에게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러시아까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과 손을 잡으면서, 프로이센은 영원히 유럽의 3류 국가로 전락하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르트의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잔치집,  누군가에게는 초상집.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의 1807년 틸지트 조약 장면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법입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멸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뒤인 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영국 선박이 실어오는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유럽 대륙에 발붙이는 것이 어려워졌지요.  이에 대응하여 영국도 추밀원 명령을 통해 프랑스 및 그 동맹국 해안을 역봉쇄했는데, 그러자 나폴레옹도 질세라 더 강력한 조치인 1807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원산지가 세탁된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중립국 선박을 통해서나마 유럽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막히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가지 현상과 문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지역의 일부 산업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영국이 시장에서 사라지면서 부흥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로 인해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특히 설탕 ! 사람을 중독시키는 음식은 많습니다만, 술이나 커피나 담배나 홍차나 김치나 치즈나 첫맛은 '뭐 이런 맛이 다 있어 ?'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설탕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음 한번 맛을 보자마자 모두 좋아하게 된 음식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동안 설탕에 중독되었던 유럽인들은 설탕이 식탁에서 사라지자 그저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절실한 갈증과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런 중독 현상에서 오는 갈증과 욕망은 자연스럽게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유럽 내 설탕 값이 치솟으면서, 다시 아카르트에게 지원이 쇄도하며 1810년 그는 작은 규모나마 다시 사탕무 설탕 정제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공장은 곧 보헤미아와 아우크스부르크 등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아카르트라는 프로이센 사람이 무에서 설탕을 뽑아낸다는 신기한 소식은 곧 나폴레옹의 귀까지 들려왔습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학자로 여겼던 그는 곧 과학자들로 구성된 파견단을 슐레지엔으로 파견하여 아카르트의 정제소를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돌아와서 그 복제판인 작은 정제소 2개소를 파리 인근에 지었는데, 이들은 아무래도 재료 품질이나 경험치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는지 상용적인 성공을 거둘 정도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빌어먹을 영국놈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설탕을 뽑아낼 수 있다는 증거를 본 나폴레옹은 크게 흥분했습니다.  바로 다음해인 1811년 나폴레옹은 칙령을 내려 100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160억원)을 들여 설탕 학교를 세우고 프랑스에서도 2만8천 헥타아르의 농토를 사탕무 재배에 할당하여 대대적으로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제 새롭게 태동하는 프랑스 설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태까지 면허장 제도 및 일부 중립국을 통해 수입하던 카리브산 설탕의 수입을 1813년부터는 완전 금지했습니다.  




(1865년 런던에서 설립된 리빅 고기 수프 액기스 회사 Liebig Extract of Meat Company의 불어판 기념 엽서입니다.  다소 엉뚱하지만, 여기에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 정제소의 모습이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아마 같은 식품 회사들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시리즈물이었나 봅니다.  설명에는 Fondation de la première fabrique de sucre de betterave par Achard 즉 아카르트에 의한 최초의 사탕무 설탕 제조 공장 설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가능케 만든 아카르트에게는 어떤 금전적 혜택이 주어졌을까요 ?  당시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프랑스에 이미 특허권 제도가 도입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레종도뇌르 훈장과 함께 그에 따른 두둑한 연금이라도 주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때 당시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한 동맹국으로서 우방국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프로이센은 어디까지나 견제 대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카르트에게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하지 않았고, 아카르트는 계속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에게 보상을 제시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영국 설탕 상인들이었습니다.  카리브산 설탕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만끽하던 영국의 거대 설탕 상인들은 아카르트가 사탕무로부터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이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돈이 궁하던 아카르트에게 무려 20만 탈러(현재 가치로 약 21억원)의 금전적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훨씬 더 생산성이 좋은 카리브 해의 노예 설탕 농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왜 사탕무 특허권을 사려 했을까요 ?  그들이 원했던 것은 특허권이나 독점 생산권이 아니라, 아카르트에게 '사탕무 실험은 대실패였다, 역시 유럽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발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카리브산 설탕의 경쟁자를 없애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요즘의 유전과도 같은 부의 창출원이었거든요.  17세기 말 기준이긴 합니다만, 영국령 바베이도스(Barbados)의 81 헥타아르(24.5만평)의 사탕수수 농장과 그에 딸린 정제소면 영국 본토의 백작 가문과 맞먹는 부를 쏟아낸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영국이 값싼 설탕을 카리브해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태양과 쏟아지는 비 외에도 흑인 노예 덕분이었습니다.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잔혹한 조건에서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묘사하자면,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실어다 카리브해에 갈아넣으면 그것이 설탕이 되어 나오는 셈이었습니다.)  



(그런 설탕 무역의 비윤리적인 면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자국의 설탕 상인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컸고, 설탕없이 홍차를 마시자는 운동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풍자화에서 영국 왕과 여왕이 공주들에게 '설탕 없이 차를 마시니 아주 맛이 좋구나' 라고 이야기하는데, 공주님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하네요.)



(17~18세기 영국에서 카리브해의 설탕 농장을 통해 떼돈을 번 사람들을 sugar barons 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것도 원래 밑천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장사였고, 실제로 귀족인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설탕 귀족으로는 이 그림 속 주인공인 William Beckford와 함께 James Drax, Christopher Bethell-Codrington 등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인 벡포드는 말년에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크리스토퍼 코드링턴 같은 경우는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며 거듭된 노예 폐지 법안에 집요하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아카르트의 고결함이 가장 빛났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설탕이 부유한 상인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온 인류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탐욕스러운 영국 자본의 유혹을 거절하고, 사탕무 재배법과 설탕 제조법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폴레옹이 파견한 과학자들도 아카르트로부터 그 제조법을 그대로 배워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의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나폴레옹 재위 기간 동안에 카리브산 설탕을 압도할 만한 규모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의 농업 생산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유럽은 굶주림이 존재하던 곳이었거든요.  사탕무보다는 당장 배를 채울 밀과 감자를 키우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사탕무 재배에 많은 토지를 할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 비료 등에 의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탕무 재배와 사탕무 설탕 생산량도 크게 늘었습니다.  1840년 사탕무 설탕은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5% 정도만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880년 경에는 그 비율이 무려 50%로 늘어났습니다.  사탕무의 전성시대가 끝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습니다.  유럽 대륙이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아무래도 당장 군인들을 먹일 밀과 콩, 가축 사료용 옥수수 등의 재배가 더 시급했던 것이 원인이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20%는 사탕무 설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프랑스, 미국과 독일 등에서는 사탕무 재배가 활발합니다.




(현대 전세계의 사탕무 생산량입니다.  아카르트 덕분에 추운 지방인 러시아에서도 설탕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유럽의 농업과 설탕 생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카르트는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행복한 말년을 보냈을까요 ?  항상 그렇지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법을 채택한 유럽 각지에서 사탕무 설탕 정제소가 계속 늘어났지만, 유럽인들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개한 아카르트 소유의 정제소들은 그와 반비례하여 계속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카리브산 설탕이 영국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의 사탕무 정제소들은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1815년, 그의 공장은 결국 파산을 선언해야 했고, 다시 6년이 지난 1821년 아카르트는 그가 사탕무 사업에 인생을 바친 슐레지엔 볼라우(Wohlau)에서 빈곤 속에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en.wikipedia.org/wiki/Sugar_beet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media/File:Liebig_Company_Trading_Card_Ad_01.12.005_front.tif

https://janeaustensworld.wordpress.com/2011/03/14/cesar-picton-wealthy-merchant-and-freed-man-the-regency-era/

https://www.economist.com/node/21525808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Bethell-Codr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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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푸냐옹 2018.05.21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나시카님의 글 감사히 잘보고 있습니다
    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모바일 정보창고 2018.05.21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날씨가 엄청 좋네요. ^^
    멋진 하루 되세요~

  3. 투팍아마르 2018.05.21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해군 봉쇄하에 유럽대륙에서 사탕수수 대신 시도한 사탕무우 농사는 실패라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것 같네요. 어째든 이 아카르트라는 분은 인격에 있어서도 고귀한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4. franken 2018.05.21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일담이 참으로 가슴아프군요.

  5. zxc 2018.05.22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고귀한 인품과 신념을 가진 사람은 빈곤속에 사는것같네요..

  6. 몽생 2018.05.23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1810년 이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위가 된 나폴레옹의 권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도나우 강변에서 피를 쏟으며 싸운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엘베(Elbe) 강과 베저(Weser) 강 하구 북유럽 해안에 분산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영국과의 무역 전쟁인 대륙봉쇄령의 엄격한 집행을 위해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들을 감시하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북부 독일 해안에 이런 감시를 집중했을까요 ?


이는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의존해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삶과 문화는 농작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북부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문화는 지중해 연안 남부 프랑스 사람들의 것보다는 독일 사람들의 것과 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름입니다.  남부 프랑스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그리스처럼 올리브유를 많이 쓰는 것에 비해 북부 프랑스는 독일이나 영국처럼 버터를 많이 쓰지요.  



(최근 boredpanda.com이라는 사이트에서 게재했던 유럽의 분류 지도입니다.  이런 분류의 가장 큰 영향은 위도의 높낮이와 그에 따른 일조량의 차이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국민성이니 민족의 우수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미미한 인간들의 개소리일 뿐이고, 우리 모두 거대한 우주 속에서 그저 바람 따라 흩날릴 뿐인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 남부는 불만투성이 속에서도 그런대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령 미국에서 수입하던 목화솜은 아마(flax)와 나폴리산 목화솜으로 대체가 가능했습니다.  인도에서 들여오던 고급진 파란색 인디고(indigo) 염료는 좀 촌스럽지만 유럽 자생의 대청(woad)으로도 흉내를 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커피도 볶아서 가루를 낸 치커리(chicory) 뿌리로 최소한 맛과 향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설탕은 좀 문제였습니다.  햇빛이 잘 내리쬐는 남부 유럽에서는 포도즙을 졸여 만든 시럽으로 설탕을 대체했습니다.  실제로 설탕을 넣지 않은 과일잼으로 인기가 있는 생달푸르(St Dalfour) 잼만 해도, 설탕 대신 포도즙과 대추야자즙을 사용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달다고 해서 다 설탕의 대체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설탕의 그 아무 향 없는 순수한 단맛은 특히 커피와 홍차, 코코아 등 마실 것에 있어 대체 불가였습니다.  



(대청이라고 불리는 woad 잎입니다.  이걸 가공하면 푸른색의 염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인디고의 그 눈부신 새파란 색깔과는 비교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인도 원산지의 콩과 식물의 잎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 가공된 인디고 염료 덩어리입니다.  당시 영국의 인도 무역선들 즉 indiaman들이 실어오는 주요 귀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인디고였습니다.)



(코스트코에서 싸게 살 수 있는 생-달푸르 잼입니다.  '설탕이 들지 않은 좋은 잼'이라는 것이 특장점 중의 하나인데, 솔직히 맛은 뭐 그저 그렇습니다.  또 설탕 대신 포도 시럽을 쓴다고 건강에 더 좋은 것인지도 그닥...)




그나마 남부 유럽에서는 어렵게나마 이런 식으로 대체재를 구할 수 있었으나, 북부 유럽에서는 그마저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불만족스러운 대체재의 가격마저 비쌌던 발트해 연안의 북유럽 지역에서는 영국과의 밀무역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친인척인 네덜란드 왕 루이나 베스트팔렌 왕 제롬은 형 나폴레옹으로부터 밀무역 단속을 전쟁처럼 삼엄하게 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인 부하들과 자주 접촉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동생들은 형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밀무역을 은연 중에 눈감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에 대한 나폴레옹의 무역 전쟁은 조금씩 패배로 뒷걸음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설탕은 무역 액수에 있어서나 상징적인 면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동물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또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결국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18세기 말 19세기 초반의 유럽은 이미 설탕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이건 특히 영국에서 심했습니다.  영국은 홍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거든요.  


17세기 중반에 중국에서 녹차 형태로 맨 처음 차가 들어왔을 때는 차에 설탕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수십년이 흐르는 사이 어느덧 홍차에는 설탕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어떤 사건을 통해 홍차에 설탕을 넣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도적인 설이 없습니다.  일부 설에 따르면 그건 영국 선원들 영향이라고 합니다.  즉, 인도에서는 설탕 종주국답게 홍차에 설탕을 넣어서 마셨는데, 영국 선원들이 그런 습관을 배워서 영국으로 가져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국 선원들이 럼주나 진, 맥주 등을 두고 과연 홍차 같은 것을 마셨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이 남습니다.  확실한 것은 17세기 말엽에는 이미 유럽 대부분에서는 홍차에 설탕을 넣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홍차 뿐만 아니었습니다.  17세기부터 중산층 이상의 영국인들의 식생활에서 설탕은 뺄 수 없는 요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1603년 영국을 방문한 스페인 파견단 일행이 영국인들이 후식 뿐만 아니라 메인 코스의 고기 요리에도, 심지어 와인에도 설탕을 듬뿍 쓰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유럽 대륙에서는 설탕을 그렇게까지 많이 소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점박이개 즉 spotted dog 또는 spotted dick이라고 불린 푸딩입니다.  삶아서 만드는 푸딩이라 오븐을 쓰기 어려운 군함에서 특히 즐겨 만들어 먹던 영국 해군의 디저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탕을 잘 먹지 않던 스페인인들이나 프랑스인들도 설탕을 대량으로 써야만 했습니다.  바로 후식과 커피 때문이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설탕 값은 1파운드에 약 6펜스 정도로 싸졌습니다.  이는 현재가치로 약 6000원 정도로서, 당시 우표값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파운드당 약 1200원 정도에 비해서는 크게 비싼 것이지만 중세 시대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싸진 것이었습니다.  중세 시절에는 파이 껍질에 덜덜 떨면서 아껴가며 뿌리던 것을 이젠 아예 파이 껍질을 반죽할 때 듬뿍 넣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17세기 들어서면 빈곤층이 아닌 이상 하루 식사 중 최소한 한번은 푸딩이든 파이든 타르트든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후식이 식탁에 올라와야 했습니다.  달콤한 후식이 없는 식사는 당연히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다른 오락거리가 별로 없어 손님을 초대한 식사를 자주 즐기던 중산층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가 초연된 짐머만 커피하우스입니다.  라이프치히에 있었는데, 1943년 연합군의 대공습 때 파괴되었습니다.)




게다가 커피가 있었습니다.  1735년 짐머만 커피하우스(Zimmermannsches Kaffeehaus)에서 초연된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커피 칸타타(독일어 원제는 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조용, 떠들지 마셈 이라고 합니다)에서도 아버지 쉴렌드리언(Schlendrian)이 딸 리쉔(Lieschen)의 커피 중독을 한탄했듯이, 이미 유럽은 커피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던 커피는 설탕과 마찬가지로 주로 카리브해에서 노예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주요 유통 경로가 영국 해군에 의해 끊긴 뒤에도, 처음 유럽에 소개될 때처럼 이집트와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들어오던 북아프리카산 커피가 여전히 유통되었습니다.  그런 진짜 커피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서민층에서는 치커리 뿌리라도 볶아 우려냈고, 그마저도 구할 형편이 안되는 집에서는 빵가루를 시커멓게 태운 뒤 가루를 내어 우려낸 것을 커피 대신 마셨습니다.  그런 어이없는 대용 커피라도 꼭 마시고 싶었을까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태운 곡식을 물에 우려내어 마시는 습관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숭늉이나 보리차가 다 그런 것이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대용 커피에도 설탕은 넣었다는 것입니다.  



(치커리 식물의 모양새입니다.)



(치커리 뿌리로 만든 대용 커피입니다.  이때 뿐만 아니라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나 제1, 2차 세계대전 등 전쟁 때마다 치커리 뿌리로 만든 대용 커피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모두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




당시 커피와 설탕은 비싼 수입품으로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을텐데, 과연 서민층까지 그렇게 커피와 설탕에 중독된 상태였을까요 ?  예, 그랬습니다.  1663년 독일 여행가 소머펠트(Gustav Sommerfeldt)가 남긴 기록을 보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가 포로로 잡혀 남게 된 투르크인들이 커피와 설탕으로 음료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벌고 있더라'는 소식을 신기하다는 듯이 남겼는데, 그로부터 불과 130년 정도 지난 사이에 유럽은 이미 커피와 설탕에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뒤 나일강을 따라 카이로를 향해 행군할 때, 프랑스 병사들이 배를 곪지는 않았습니다.  풍요로운 곡창지대인 나일강변 곳곳에는 밀과 콩, 양파가 잔뜩 쌓여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대군에게 빵을 먹이기에는 밀가루를 낼 맷돌이 부족했던 상황이라, 병사들은 빵을 먹지 못하고 삶은 콩만 질리도록 먹어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불만이 쌓여가자, 나폴레옹은 '카이로에만 가면 너희들이 꿈꾸던 모든 빵을 다 얻을 수 있다' 라고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작 빵을 찾아온 거라면 뭐하러 프랑스에서 이집트까지 온 거냐'라고 병사들이 비아냥거리자, 다음번 연설에서는 '카이로에만 가면 고기와 와인, 설탕과 커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라고 메뉴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이집트는 홍해 쪽에서 수입된 모카 커피를 지중해 쪽으로 유통하는 주요 경로로서, 이집트의 수입원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 관세였거든요.  저 나폴레옹의 연설이 뜻하는 바는 최소한 일반 사병들조차 커피를 알고 있었고, 또 커피에는 설탕을 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설탕을 꽤 자주 먹었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도 나옵니다.  1806년 프로이센과 예나(Jena) 전투를 벌이기 직전, 프랑스군은 인근 창고에서 구한 많은 양의 설탕과 와인으로 10월 중순의 쌀쌀한 밤에 달콤한 뱅쇼(vin chaud)를 끓여 마셨습니다.  또 몇 년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 근처에서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희생된 프랑스 병사들의 집단 매장지가 발굴되었습니다. 치과 의사들이 거기서 발굴된에서 유골의 치아를 검사해보니, 일부 병사들의 치아는 당시 평균 이상으로 충치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고달픈 야전 생활 중에도 생각보다는 자주 설탕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사실이지요.  



(와인에 오렌지 등의 과일 조각과 설탕, 향료 등을 넣고 가볍게 덥힌 뱅쇼 vin chaud 입니다.  글자 그대로 따뜻한 와인이지요.  물론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저렇게 계피 스틱까지 꽂은 예쁜 잔으로 뱅쇼를 마시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유럽인들은 설탕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시장의 수요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공급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 대금은 나폴레옹에겐 피와 같았던 금화와 은화의 형태로 고스란히 가증스러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건 요즘 현대 미국이 그 막강한 군사력과 경찰력을 가지고도 중남미산 마약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계속 패배하는 것과 유사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설탕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영국과의 전쟁은 필패가 뻔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총검이나 대포로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리브해의 사탕수수를 어떻게든 유럽 내에서 길러내지 못하는 한 나폴레옹에게는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폴레옹이 불굴의 의지를 가진 천재라고 해도 프랑스에서 사탕수수를 키워낼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인간은 뭔가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Sugar: A Bittersweet History By Elizabeth Abbott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fr.wikipedia.org/wiki/Caf%C3%A9#/media/File:Cafeine_consommation.png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coffee

https://fr.wikipedia.org/wiki/Caf%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rzy_Franciszek_Kulczycki

https://en.wikipedia.org/wiki/Liebig%27s_Extract_of_Meat_Company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www.boredpanda.com/maps-atlas-of-prejudice-yanko-tsvetkov/

https://yumuniverse.com/meet-roasted-chicory-root-a-health-boosting-caffeine-free-coffee-alternative/

https://en.wikipedia.org/wiki/Chicory

https://en.wikipedia.org/wiki/Isatis_tinctoria

https://www.stdalfour.com.au/products/fruit-spre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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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탕사랑 2018.05.07 1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개이득

  2. 보이져 2018.05.07 1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쉽게 2둥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 연재를 너무나 즐겁게 보고있습니다 나시카님^^

  3. 박종필 2018.05.07 1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탕무가 등장할 시간?

  4. 수비니우스 2018.05.07 1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청... 90년대 후반에 나온 전략시뮬레이션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에서 켈트족 특수보병으로 대청특공대를 생산할 수 있었는데, '대청에서 뽑아낸 파란 색을 몸에 칠해서, 보는 적이 심리적으로 압도되는, 기괴한 모습을 한 전사들'이라는 설명이 기억나네요. 인디고 같은 색깔은 안난다고 하신거보면 생각보다 파랗진 않은가봅니다.

    • 유애경 2018.05.07 1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 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긴데,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아포칼립스에서 인신공양에 쓰일 제물로 포획된(?) 포로들이 온몸에 파란 물감,염료?를 발리우고 나오는데 색감이 주는 강렬함이 뭔가 섬뜩했던 기억이...
      (제물로서의 용도를 확실히 하기위해서 였을거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만.)

  5. 투팍아마르 2018.05.07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씬보다는 이런 종류의 글들이 더 재밌고 배울게 많은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박종필님한테 한발 늦었습니다...ㅎㅎ

  6. 설탕사랑 2018.05.07 2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청특공대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에이지오브엠파이어2에서 크게 참고했을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대청을 바른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사실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얘길 본 것 같네요
    그건 고대시절이고 윌리엄 월레스 당시엔 여느 중세 전사들 복장이었다고..ㅈ

  7. 0_- 2018.05.08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하실 때 나폴레옹 시대 전투관련 역사쪽이 사료 교차검증 등등 해서 고생은 더 하실 것 같은데, 역시 재미나 배울 점은 이런 내용이 더 많은 듯 합니다 ^^;;; 전쟁사는 초반에는 그나마 잘 봤던 것 같은데, 이제 나폴레옹의 내리막이랄까,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보다도 슬슬 망해가는게 아무래도 눈에 띄여서 그런걸까요.

    그나저나 설탕, 커피와 염료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재미있네요. 염료는 포스팅에 첨부된 사진만으로는 실제 염료색이 상상이 안 되어서 색깔이 얼마나 다르겠거니 하며 "indigo vs. woad" 로 검색해 봤는데, 생각보다 많이 차이가 나네요. 대청은 말이 파란색이지 청록색이라고 부르는게 맞을 정도군요! 다만 이쪽은 말씀하신 대로 그냥 촌스럽더라도 색상 안 쓰고 견딜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설탕과 커피는... 매일 작업하다가 한모금씩 홀짝거리는 낙을 빼앗긴다면 정말 생활이 상상도 안됩니다 ㄷㄷㄷ

  8. 최홍락 2018.05.09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네치아인들이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 베네치아 영토였던 크레타섬과 키프로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지중해 섬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텐데ᆢ

    • reinhardt100 2018.05.10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설탕이 중세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키프로스등에서 제배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노예노동력 수급에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흑해 시장이 4차 십자군에 의해 이탈리아 해상도시국가들에게 열리면서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도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 (?)해서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설탕산업. 이거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대는 노동집약적 산업입니다.

      중세 말, 마데이라 군도가 설탕산지로 각광받으면서 키프로스 등지의 베네치아 설탕 산업은 가격 경쟁력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서아프리카산 노예를 맘껏 쓸 수 있는 마데이라보다 3배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 바람에 쇠퇴하게 됩니다.

      19세기 초반에는 지중해 지역 전체적으로 지력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지중해지역, 특히 레반트나 남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연안 지역은 장기간의 삼림파괴와 2포제 농업의 악영향, 심경의 상대적 미비로 인해 지력이 중세시절보다 많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설탕 한 번 제배하면 인삼이나 옥수수 저리가라 급으로 지력 완전히 박살납니다. 한 10년 정도는 그 땅 방치한채로 지력회복작물 심거나 화전으로 억지로 지력 회복시켜야 작물 제배가 가능하니까요.

  9. mip 2018.05.10 0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당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바친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칭호는 단지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나폴레옹에게 공치사로서만 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로마는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로마 및 그 주변은 원래 세속 군주로서의 로마 교황이 가지는 교황국(the Papal States)에 속하는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눈 앞에는 고양이는 커녕 생쥐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오 7세(Pius VII)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다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1809년 5월 17일, 나폴레옹은 빈에서 칙령을 내려 로마 교황의 세속 군주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당연히 비오 7세는 거부했지만, 뮈라가 파견한 프랑스군을 막을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교황에게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휘두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파문이었지요.



(비오 7세입니다.  비오 7세의 전임자인 비오 6세가 나폴레옹에게 시달리다 죽을 정도였으니, 비오 7세는 일평생 나폴레옹에게 시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폴레옹을 언제나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을 안 듣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이라고 했다는군요.)




프랑스 점령군이 로마를 점거하고 교황의 지배권을 몰수한다고 발표한 6월 10일 밤, 교황은 나폴레옹과 그 추종자들을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건 과거 카노사의 굴욕을 이끌어낼 정도로 카톨릭 세계에서는 매우 무시무시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11세기가 아니라 19세기였습니다.  비오 7세는 '이 파문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것이며 이 파문이 육신의 공격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라고 소심하게 덧붙였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교황이 누굴 파문하건말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으니까요.  이미 프랑스 내에서의 카톨릭 교회에 대한 인사권은 모두 나폴레옹에게 넘어간 뒤였거든요.  레미제라블 제1장을 보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선물한 미리엘 주교가 우연히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고 그 짧은 만남에서 나폴레옹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주교로 승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미 정교협약(Concordat)에서 그렇게 협의가 되었기 떄문에 교황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카톨릭 신부를 임명하고 해임했던 것이지요.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 좀 더 정확하게는 조세핀과의 이혼은 나폴레옹과 로마 사이에 더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카톨릭에서 이혼은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도 허락했던 이혼을 예수님께서는 '시대가 바뀌었다'라시며 명시적으로 금지하셨으니까요.  이혼 문제 때문에 영국이 카톨릭에서 떨어져나와 영국 국교회를 따로 세울 정도였지요.  나폴레옹은 권력자답게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했는데, 이미 로마에서 체포되어 사보나(Savona) 등지를 전전하며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비오 7세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식에는 무엄하게도 추기경들이 모두 불참하여 나폴레옹을 격분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덕분에 비오 7세의 비서였던 콘살비(Consalvi) 추기경을 포함한 13명의 추기경들이 모두 파면되어 유럽 여기저기에서 빈곤 속의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콘살비 추기경입니다.  나폴레옹이 그를 파리로 산 채로 잡아오게 한 뒤 직접 만난 자리에서 '연금 3만 프랑을 줄 테니 자신에게 협력하라'고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랭스로 귀양을 갔다고 합니다.  그는 나폴레옹 폐위 때까지 빈곤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나폴레옹은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원래 교황의 소유였던 로마와 그 주변 영토는 이미 나폴레옹이 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된 상태였습니다만, 1810년 2월에 아예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린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나폴레옹의 미래의 황태자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에게 로마 왕이라는 작위를 주려면 로마가 프랑스 영토인 것이 모양새가 좋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제국은 날로 넓어지고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나폴레옹에게는 골치거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이후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Blocus Continental)을 통한 영국 말려죽이기에 들어갔었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잘 돌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국도 대륙과의 통상이 약 50% 정도 줄어 고통을 겪고는 있었습니다만, 영국은 대신 제해권을 바탕으로 미국과 남아메리카에 대한 통상을 증가시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중립국 상선과 밀무역을 통해 대륙과 여전히 50%의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대륙봉쇄령 하에서도 영국의 연간 통상액은 무려 2천5백만 스털링 파운드(sterling pound)에 달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우리 돈 6조3천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1809년 쇤브룬 조약에서 결정된 오스트리아의 전쟁 배상금이 8천5백만 굴덴, 현재 가치로 6300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당시 영국이 얼마나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굽시니스트 굽본좌가 justoon.co.kr에서 수요일에 연재 중인 웹툰 '한중일 이웃나라 흥망사'에서 다룬 영국 산업혁명 과정입니다.  출처  http://www.justoon.co.kr/content/home/09qh02k1cc6e/viewer/09rf2ms1bbd7 )




하지만 1810년 당시 가장 많은 밀무역을 하던 곳은 네덜란드와 독일 북부 한자 동맹 도시들이었습니다.  과거부터 대서양을 통한 무역이 활발했던 그 도시들의 번영은 전적으로 해외 무역에 의존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 간의 무역 전쟁으로 인해 영국과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과의 통상마저 어렵게 되자, 이 상인들의 도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정부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시들어 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지요.  이 도시들은 그 살 길로 밀무역을 택했고, 도시의 번영과 무관할 수 없는 공무원들은 그런 밀무역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친동생이자 네덜란드 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조차도 펄펄 뛰는 형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번영을 위해 그런 밀무역을 어느 정도 용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네덜란드와 독일 항구를 통해 들어온 영국 제품들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잘 팔렸습니다.  워낙 값이 싸고 질이 좋았거든요.  심지어 프랑스군의 군복도 영국산 직물로 만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은 나폴레옹에게 유서 깊은 합스부르크라는 근사한 브랜드를 가져다 주었지만, 반대로 러시아의 분노도 갖다 주었습니다.  1810년부터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에서 사실상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과의 교역이 끊겨 경제가 어려워지자, 짜르 알렉산드르로서도 더 이상 국내의 불만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던 상태였는데,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가 혼인 관계를 맺자 더 이상 강력한 항구 단속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얄미운 중립국, 특히 미국 국적의 상선들이 영국산 제품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것도 얄미웠지만, 러시아의 항구로는 아예 영국 화물선들이 활발하게 화물을 실어날랐습니다.  


이런 통상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당장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산업 생산성은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던 영국의 공업력을 당해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즉, 쥐노가 정복했다가 영국군이 탈환하여 주둔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재정복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한 노력은 이미 180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그람 전투 준비에 한창이던 1809년 6월 중순,  나폴레옹은 술트와 네, 그리고 모르티에의 군단(corps)들을 하나로 합쳐 약 5~6만 병력의 하나의 군(armee)을 편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포르투갈 방면군의 목적은 단 하나, 영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의 지휘관으로 그 3명의 군단장 중 가장 선임자였던 술트를 지명하며, 절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움직이지 말고 반드시 한덩어리로 뭉쳐서 전진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내륙 교통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지형의 특성상 부대간의 통신을 유지할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여러 모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먼저,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의 특성상, 그리고 척박한 포르투갈-스페인 특성상 그런 대군이 한 곳에 집결하여 한꺼번에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그게 가능했는데, 그건 수천마리씩 동원 가능했던 막강한 노새 수송 부대 덕분이었습니다.  가난한 프랑스군은 그런 호사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이베리아 반도는 영국산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가난하고 내륙 수송망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이 지역은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영국산 제품을 대량으로 수입하기보다는, 오히려 와인이나 올리브유 정도를 수출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명령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르고 있었으나, 무어 경의 영국군을 축출하고 정비를 마친 술트 군단은 이미 포르투갈 북부의 주요 항구도시인 오포르토(Oporto)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잔혹한 약탈로 쑥대밭을 만든 뒤였습니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겠으나, 이야기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만의 영국군을 끌고 포르투갈로 돌아온 웰슬리(Arthur Wellesley) 장군이 방심하고 있던 오포르토의 술트를 기습, 프랑스군을 산산조각내버린 뒤였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ope_Pius_VII

https://en.wikipedia.org/wiki/Continental_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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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p 2018.01.07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이 부분 표현이 너무 맛깔나고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2. 카를대공 2018.01.08 0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이 부분 보고 과연 나폴레옹답다,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 그다운 판단이라 생각 했는데
    이거 패착이었군요;;

  3. reinhardt100 2018.01.08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글이 나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털링 파운드'라는 것은 이 당시에는 '영란은행이 직접 발행한 파운드'에 한정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아일랜드가 모두 자체 파운드화를 발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즉, 이 당시 집계된 무역량은 '스털링 파운드로 합계된 가공된 수치'라는 것입니다. 특히, 180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합병은 사실 파운드화 가치 유지를 위한 정화준비를 마음껏 쓰려고 했을 정도로 이 당시 영국은 급박한 상황이긴 했습니다.

    미국과 남미, 인도등 아시아와의 통상 확대로 영국이 대륙봉쇄령에 맞서긴 했지만, 각 지역에 대해 영국이 한 짓은 급하다고 해도 욕먹기 딱 좋은 짓이었죠. 미국을 상대로는 '영란은행이 발행한 것이 아닌 아일랜드나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 발행한 파운드화 지폐나 주면서 무역을 해서 대금 지불 자체에 대한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하는 태도로 일관해서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론을 한껏 격앙시켰습니다. 남미의 에스파냐 혹은 포르투칼 식민지에 대해서는 아예 대놓고 영국산 공업제품을 있는대로 뿌려댔고, 게다가 식민지 상층부에 대하여 독립해서 우리와 직접 교역하면 너네가 본국 눈치 볼거 없이 마음껏 하층민들과 노예들을 쥐어짤 수 있다고 충동질하는 '동맹국들 등 뒤에 총질'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와 동남아, 일본에서는 날강도 수준이었죠. 인도에서 동인도회사가 정부에서 대부를 받는 상황에서도 무리해가면서까지 인도의 토후국, 네덜란드령 자바 및 말레이, 몰루카군도 정벌에 열을 올린 이유가 '각 토후국이 저장해놓은 정화준비용 지금,지은을 확보, 본국 정부에 대하여 우리에게 대부를 해주지 않으면 확보한 정화를 본국에 운송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위함도 있었고 덤으로 노스법안이 발안된 1784년도에 이미 논의가 시작된 대중,대인도무역 독점권도 유지하려는 발악적 성격도 있었습니다. 본국 정부도 동인도회사의 이 따위 억지(?)에 대해 비위를 맞추어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대놓고 네덜란드 데지마를 공격하려했다가 막부에 찍힌 적도 있으니까요.

  4. 유애경 2018.01.08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을 안듣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이다'
    「종교인」으로서의 무한한 자비심과 사랑 이었을까요? 아님 「종교인」으로서의 대외적인 명분이나 허세같은 거였을까요?(웃음)

    재밌게 보고 갑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1.08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양질의 글을 블로그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D
    " 영국군은 그게 가능했는데, 그건 수천마리씩 동원 가능했던 막강한 노새 수송 부대 덕분이었습니다. " ...역시 전쟁은 돈이죠 ㄷㄷㄷ

  6. unik519 2018.01.09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에 비하면 그 프랑스조차 빈곤한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되어버리니 역시 돈만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없지만, 돈 없이는 강한 군대를 만들기가 또한 힘들군요ㅠ
    늘 좋은 글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7. sarada 2018.01.09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본문내용과 직접 상관은 없은데 나폴레옹의 문양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질문 드려도 될까요?

    나폴레옹 황제의 가문 문장은 꿀벌인데요. 보통 가문, 왕가의 상징, 문양은 사자, 호랑이, 독수리 같은 맹수를 쓰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왜 꿀벌을 자신의 상징 문양으로 삼았던 건가요? 꿀벌이 존경, 위험, 힘 같은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여서 그게 좀 의아해서요. 구글에서 "Napoleon bee" 로 검색해봐도 딱히 이유는 잘 못 찾겠네요.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꿀벌과 무슨 연관이 있거나(예를 들어서 나폴레옹 집안이 양봉을 했다던지..) 아니면 당시에는 꿀벌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뭔가 달랐던 건가요?

    궁금한데 검색을 해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나시카님에게 물어봐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nasica 2018.01.09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꿀벌은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문장으로서 풍요와 근면을 상징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조의 문장인 백합보다 더 오래되고 더 뜻깊은 것을 찾다가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꿀벌을 택했답니다.

    • sarada 2018.01.10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내용인데 알게 되서 너무 즐겁네요.

      저는 혼자 머리속으로 소년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섬에서 양봉을 하면서 "내가 나중에 황제가 되면 이 꿀벌을 내 상징으로 삼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훈훈한 광경을 상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재미있는 글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8. 넬슨 2018.02.20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당시 영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