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9 15:47

기구 중대가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지 1년 후인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설 때 그의 함대에는 이 기구 중대가 필요한 장비와 함께 탑승해 있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주르당이나 오슈 등이 다 꺼렸던 기구 중대를 특별히 싣고 갔던 것일까요 ?  군사 천재인 그는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정보 병기로서의 기구의 특성을 대번에 알아본 것이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기구 중대를 데려간 것은 이들을 선전용 심리전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끌고 출발한 13척의 전함, 7척의 프리깃함, 그리고 300척 이상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대함대에는 수병들 외에도 보병 3만, 기병 2천8백, 야포 60문과 공성포 40문, 그리고 공병 2개 중대가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무척이나 독특한 젊은이들과 중년 남자들이 167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수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기계 기술자 또는 학자라고 자부하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사실 학자가 아니라 화가 등 예술가도 섞여 있었는데, 군인들을 그들 중 이공계가 아닌 예체능계 예술가들을 기가 막히게 구별해내고는 그들을 학자(savant 지식인이라는 뜻) 대신 반쪽 학자(demi-savant)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들 학자들이 이집트에서 과학 실험과 관측 등을 할 때 기구가 꽤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현지 주민들에 대해 프랑스의 위대함을 알려주고 복속시키는데 있어 '프랑스인들을 하늘도 날아다닌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수단도 없다고 생각했지요.  나폴레옹이 학자들을 이집트에 데려가는 이유 중 하나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에 서구에서 시작된 계몽 사상과 혁명 정신을 다시 이집트에 되돌려 준다'라는 것도 있었거든요.  확실히 루소의 사회 계약론을 이집트인들을 앉혀 놓고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태운 기구가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수천 명의 이집트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 제국이라는 브랜드 파워를 선전하는데 훨신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이집트 원정을 통해 문화가 전파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유럽 문화가 이집트에 전달되었다기 보다는 이집트의 찬란한 고대 문화에 매료된 학자들이 그 문화를 유럽에 들여놓기에 바빴습니다.  이 원정을 계기로 이집트학 Egyptology 라는 학문이 새로 생겨날 정도였으니까요.   나폴레옹의 말메종 저택에도 이집트 관련 물건들과 문양 등이 잔뜩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길은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그 뒤를 쫓아온 넬슨의 영국 함대가 아부키르 만에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프랑스와의 교통로가 끊긴 것은 전체 프랑스군에게도 물론 재난이었지만 특히 기구 중대에게는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카이로를 점령할 때까지는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안전한 전함에 기구 본체와 수소 생성 장치를 포함한 주요 장비 전체를 두고 왔던 것이지요.  물론 그 모든 것이 군함들과 함께 아부키르 만 바닥으로 가라 앉았습니다.  기구가 없는 기구 중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전투 부대가 아니어서 싸움에는 재능이 없었고 대신 손재주가 좋았으므로 이런저런 잡역에 동원되었습니다.  쿠텔도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학자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캐러번들을 따라 시나이(Sinai) 반도를 탐험하기도 했고, 룩소르(Luxor)의 오벨리스크(obelisk)들을 프랑스로 운송해올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833년 이 오벨리스크를 프랑스로 가져올 때 그 방법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833년 이집트의 지배자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프랑스에게 선물한 3천년 묵은 룩소르 오벨리스크를 실어나르는 증기선 스핑크스 Sphinx 호의 모습입니다.  워낙 길고 무거운 물건이다보니 스핑크스 호를 직접 부두에 접안시켜 싣지는 못하고 프랑스가 오로지 이 목적으로 특수 제작한 평저선 룩소르 Louqsor 호에 싣고 그 배를 예인하는 방식으로 가져 왔습니다.)



(오벨리스크를 세우기 위한 준비 작업도입니다.  이렇게 오벨리스크를 눕히고 수송하고 다시 세우는 일은 당시로서는 정말 대단한 기술적 업적이었습니다.  철제 도구도 없던 이집트인들이 3천년 전에 이런 일을 해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지요.)



(지금도 파리 콩코드 광장에 서있는 룩소르 오벨리스크입니다.  파리 시내에는 오벨리스크가 이것 말고도 여러 개 서있습니다.  대부분은 진짜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라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룩소르 오벨리스크입니다.)




이들이 이집트에서 기구를 띄운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다만 그 일의 주역은 쿠텔이 아니라 기구 중대 학교장이었던 콩테(Nicolas-Jacques Conte)였습니다.  콩테는 1798년 12월, '이집트인들에게 프랑스의 과학 문명을 과시하라'는 나폴레옹의 취지에 따라 기구를 띄웠습니다.  아니, 띄우려 했는데 기구에 불이 붙으며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인들이 하늘을 나는 기계를 보여준다는 말을 듣고 몰려왔던 이집트인들은 '아마 프랑스인들이 적 진지를 불태우는 기계를 만든 모양'이라고 오해했다고 합니다.  체면을 구긴 콩테는 다시 더 큰 기구를 준비하여 마침내 10만의 이집트인들이 보는 앞에서 마침내 카이로 하늘에 기구를 띄우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구를 본 이집트인들은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달리 별로 대단한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인 학자인 알-자바르티(Abd al-Rahman al-Jabarti al-Misri)는 이 광경을 보고 '프랑스인들이 말하는 기구라는 것은 명절에 카이로의 노예들이 띄우는 연과 비슷한 것으로서, 이걸 타고 다른 나라까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꼭 기구 시연의 실패 때문은 아니겠습니다만 결국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의도했던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서구 기독교 세력에 대한 이슬람의 증오 뿐이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1802년 영국군과 협상하여 프랑스로 철수해온 이집트 원정군 중에는 기구 중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구 중대의 해산 소식이었습니다.  프랑스 국내에 남아 있던 제2 기구 중대는 이미 1799년 1월에 해산된 뒤였고, 그들도 도착 즉시 해산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긴 몇 년 동안 국방 예산만 까먹고 아무 활약이 없었으니 쿠텔이나 다른 기구 중대원들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상 기구 중대의 종말이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야전에서 기구를 쓰지 않았을까요 ?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구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수소를 생성해야 했는데, 당시 사용되던 라브와지에-므니에 공법은 가열로와 강철관 등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필요로 했습니다.  또한 라브와지에-므니에 공법으로 수소를 만들어 커다란 기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주로 정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장군이었다면 기구가 큰 도움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무엇보다 기동력을 중시하는 공격 위주의 지휘관이었습니다.  효과도 불분명한 기구를 띄우자고 그런 짐더미를 떠매고 다닐 사람도 아니었고, 기구에 수소를 채우는 것을 기다리느라 전투 개시를 미룰 사람도 아니었지요.  쿠텔이 플뢰뤼스로 앙트프레낭 호를 끌고 갔듯이 기구를 주입한 상태로 끌고 다니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작전 스케일은 주르당이 좁은 벨기에에서 펼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으니까요.  2~3일에 걸쳐 50km 정도야 둥둥 뜬 기구를 끌고 다닐 수 있었겠지만, 몇 달에 걸쳐 수백 km를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비단으로 만든 당시 기구의 재질은 100% 기밀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전에 나폴레옹과 잠수함 편에서도 다루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은 군사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의한 신무기 개발에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음 편 주제가 되겠습니다만) 그는 설탕 제조법 같은 경제 발전을 위한 산업 기술 개발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과연 나폴레옹을 피에 굶주린 전쟁광으로 보는 것이 맞는 평가인지 심각한 의문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최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 와이프도 하더군요.  어느날 묻더라고요.  "나폴레옹이 정말 신무기 개발에 소극적이었냐?" 라고요.  이 책에 그렇게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이 책에 따르면 산업 혁명 이전에는 군사 기술 발전이 전쟁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소리를 들으면 전국의 밀덕들이 발끈해서 들고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산업 혁명 이전인 18세기 중반에 머스켓 소총과 전장식 대포로 무장한 유럽 군대가 천진에 상륙한다면 과연 19세기 중반처럼 중국을 유린할 수 있었을까요 ?  또 플레이트 아머와 등자, 석궁으로 무장한 중세 군대가 로마 군단병들과 맞짱을 뜬다면 과연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요 ?  그런 생각을 하면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공군을 창설하고 거기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03년 5월 아미앵 조약에 의한 짧은 평화가 깨진 직후, 나폴레옹은 대대적인 병력과 자금을 동원하여 영국 침공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공군 비슷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총책임자로 소피라는 이름의 30대 여성을 임명했습니다.  영국 침공의 선봉을 맡은 공군 지휘관이 가냘프고 아름다운 프랑스 여성이라니, 얼마나 로맨틱한 일입니까 ?  


하지만 이 여성, 그러니까 처녀적 이름은 소피 아르망 (Marie Madeleine-Sophie Armant)이었다가 기구 모험가인 장-피에르 블랑샤르(Jean-Pierre Blanchard)와 결혼하면서 소피 블랑샤르(Sophie Blanchard)로 알려진 이 여성은 사실 아름답지도 않았고, 성격도 무척 소심했으며, 결정적으로 공군 책임자도 아니었습니다.  이집트 원정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폴레옹은 기구를 어디까지나 행사용/축제용 유흥거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1804년 당시 영국 신문 잡지에 나오던 프랑스군의 영국 침공 작전 그림입니다.  프랑스군은 함대는 물론 공중을 뒤덮은 기구 군단을 타고 올 뿐만 아니라, 아예 도버 해협 밑에 땅굴을 파고 쳐들어오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소피 아르망은 영국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대규모 기구 군단을 이끄는 장군이 아니라, 행사용 기구를 타는 서커스 자영업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67 회의 기구 비행을 수행했는데, 그녀의 비행 목적 중 가장 큰 것은 같은 기구 비행사였다가 기구 사고로 일찍 사망한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소피 아르망이 1804년 공군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은 "공식 축제 비행사"(Aeronaute des Fetes Officielles)로 임명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소문에 이 여성이 정말 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영국을 침공할 계획의 초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는 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은 사실 프랑스보다는 영국에 더 떠들썩하게 퍼져서, 바다 위에 성채를 띄우고 하늘 위에 기구를 띄워 대대적으로 영불 해협을 건너는 프랑스군의 모습을 그린 신문 잡지가 영국에서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공포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소피 블랑샤르의 남편인 장-피에르 블랑샤르는 이미 1785년 1월 7일에 영국의 도버 캐슬(Dover Castle)에서 프랑스의 귄(Guines)까지 2시간 30분 만에 기구를 타고 영불 해협을 건너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국과 프랑스가 편서풍 지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범선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것은 쉬워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것은 (적어도 기구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실제로도 로지에(Pilatre de Rozier)라는 사람이 블랑샤르의 성공을 흉내내어 시도했던,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영불 해협 횡단은 1785년 6월 15일 추락으로 끝나 로지에가 사망하는 비극을 빚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렇게 풍차와 수차로 추진력을 얻는 대형 선박은 정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에 주로 나오던 것들이지요.  라퓨타 생각이 나네요.)




남편 블랑샤르가 기구 사고로 추락사한 이후에도 소피 아르망은 나폴레옹 밑에서 기구 책임자로 여러번 비행을 했습니다.  그녀는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의 결혼식 때도 축하 비행을 했고, 나중에 그 둘 사이에 로마 왕이 태어나자 역시 축하 비행을 하며 그 탄생을 알리는 포고문을 공중 살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축하 비행은 편을 가리지 않아서, 나폴레옹 몰락 직후 1814년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파리에 복귀할 때도 축하 비행을 했습니다.  루이 18세는 그녀의 기구 비행을 보고 너무나 감동하여, 그녀에게 "왕정 복위 공식 비행사"라는 이상한 칭호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손과 얼굴에 고드름이 어는 고생을 해가며 알프스를 기구로 넘는 등 수많은 비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비행사도 있고 늙은 비행사도 있지만 용감한 늙은 비행사란 없다'라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그렇게 많은 비행을 한 베테랑 비행사 소피 블랑샤르도 결국 1819년 파리 티볼리(Tivoli) 공원에서 비행을 하다 수소 기구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41세의 나이에 추락사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유럽 전역에서 애도되었고, 쥘 베른느와 도스토예프스키도 각각 자신의 작품에서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티볼리 공원 입장객들이 기부한 돈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묘비에는 "victime de son art et de son intrepidite", 즉 "그녀 자신의 기술과 용기로 인한 희생자"라는 문구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소피 아르망, 즉 블랑샤르 부인의 비극적 죽음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모금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묘비에도 불타는 기구를 묘사해놓았다고 하는데, 그건 좀 부적절한 추모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27Intr%C3%A9pide

https://en.wikipedia.org/wiki/Observation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leurus_(1794)

https://en.wikipedia.org/wiki/Hot_air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ilitary_ballooning

https://vistaballoon.com/blog/2014/10/the-history-of-ballooning/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gas-vs-hot-air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history-2

http://www.pbs.org/wgbh/nova/space/short-history-of-ballooning.html

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25354/http://www.centennialofflight.gov/essay/Lighter_than_air/Napoleon%27s_wars/LTA3.htm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Jacques_Cont%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Louis-S%C3%A9bastien_Lenormand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Cont%C3%A9,_Nicolas_Jacques

https://fr.wikipedia.org/wiki/Compagnie_d%27a%C3%A9rostiers

https://en.wikipedia.org/wiki/Ch%C3%A2teau_de_Meudon

http://www.strangehistory.net/2011/02/06/lavoisier-blinks/

https://en.wikipedia.org/wiki/Sophi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Napoleon%27s_planned_invasion_of_the_United_Kingdom

Posted by nasic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starlight 2018.04.29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사적인 효용이 굉장했다면 당시 각국에서 도입해 전력화했겠지요. 그렇지만 정찰부대로 꾸준히 활용했으면 전투에 상당히 도움이 되지않았을까 싶습니다.

  2. 0_- 2018.04.29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휘황찬란한 최초의 공중작전 부대 이런게 아니고, 볼거리 제공해주는 서커스 취급에 책임자는 빚쟁이 과부...
    뭔가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그리고 여기저기 공군 밀덕들 마음이 산산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만 같습니다 ^^;;;

  3. 최홍락 2018.04.30 0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작인 사피엔스를 읽으셨네요..ㅎ

  4. 유애경 2018.04.30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신무기 개발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는건 바꿔 생각하면 자기 자신(의 머리를)을 너무 믿었기 때문일지도요...

  5. TheK2017 2018.04.30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왓! 멋진 세계사의 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기대 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

  6. 수비니우스 2018.04.30 0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군인이 아니라 관료나 정치인을 했어도 상당한 성과를 올렸을거라는 얘기도 있더군요 ㅎㅎ

  7. 모바일 정보창고 2018.04.30 0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옮기는 기술력이 아주 뛰어나네요 ㅎ

  8. reinhardt100 2018.04.30 1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고로 저 외륜선박이 실제 전투에 처음 투입된 시기는 아편전쟁입니다. 당시, 본국 해군에서는 측면 함포수가 극단적으로 감소된다고 사용을 꺼렸지만, 웰즐리 이후 동인도회사의 총독들은 폴턴형 증기선을 개선한 형태의 외륜증기기선의 채용에 꽤나 적극적이었고, 이를 회사 해군에 적극 채용합니다. 회사 내 주주 중 다수를 차지하는 해운족들이나 인도족들 역시 외륜기선의 승무원 감소에 의한 인건비 절감 효과에 주목, 이를 적극 지지합니다.

    흔히 아편전쟁이 본국 정규 육해군만으로 치렀다고들 오해하는데, 실제로는 전력의 상당수를 동인도회사의 육해군이 동원되었고, 특히 상당수의 외륜증기기선이 동원되어 청군과의 해전에서 풍향에 상관없는 기동성을 보여주면서 본국 정규해군의 전열함들보다 더 많은 유효탄을 갈겨버리자 본국에서도 전열함 개조 및 대규모의 외륜증기군함 발주가 개시됩니다. 다만, 발주하자마자 스크류식 증기추진방식이 우월하다는 게 입증되면서 거의 모든 발주가 취소, 스크류식으로 변경됩니다.

  9. 음의기사 2018.04.30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갑니다.뜬금없을 듯 한 질문이 있는데요..나폴레옹 전쟁 시대 때 전쟁에서 불구가 되버리면...그러니까 상이군인들은 어떤 보상이나 복지가 있었나요??나폴레옹 시대 때는 의학의 한계로 뭐 부상당했다 하면 팔 잘라내고 이랬던게 흔한거 같던데....(물론 총이나 대포도 충분히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수 있는 무기입니다만..)제가 게을러서 그런 가 상이군인의 처우에 대해선 포스트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요....상이군인들이 어떻게 생계를 꾸려갔는지 궁금합니다..

    • nasica 2018.05.01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귀족 출신의 장군이나 장교들은 두둑한 연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아주 오래 근무한 일부 병사들도 쥐꼬리만한 연금을 받기도 했고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냥 원래 고향 마을로 돌아가 그 가족 또는 그 교구 전체의 부담이 되어야 했습니다. 언제 한번 관련 포스팅을 올리겠습니다.

  10. 2019.05.21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18.04.22 18:53

프랑스 기구 중대의 역사적 시작이 주르당과 함께였던 것처럼, 그 몰락의 시작에도 주르당이 있었습니다.  




(주르당 원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주르당 법 덕분인데, 그게 또 몹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안이었습니다.  즉, 그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참패를 겪고 그 책임을 진답시고 군에서 물러난 뒤, 정계에 입문하여 만든 법이 바로 주르당 법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르당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얻은 명성은 프랑스 징병제 법안인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에 의한 것일 뿐이며, 정작 그가 독일 전선에서 활약할 때 자주 참패를 겪었다고 했지요.  1795년, 프랑스 기구 제1 중대는 주르당이 사령관으로 있던 상브레-뮤즈(Sambre-et-Meuse) 방면군에 배속되었습니다.  주르당은 이 기구 중대에 대해 조롱과 의심으로 일관된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거둔 승리 중 가장 크고 결정적인 승리가 바로 플뢰뤼스 전투였고, 이 승리는 상당 부분 기구의 정찰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도 그랬습니다.  주르당에게 전입 보고하러 가던 기구 중대원들의 마음은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르당은 이때 즈음해서 기구 중대에 대해 생각이 좀 바뀐 상태였습니다.  전술적 효과는 몰라도 최소한 적에 대한 심리적, 그리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꽤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샹브레-뮤즈 방면군 공식 통신문에 자신의 군대 모습을 프린트할 때 그 위에 기구가 떠 있는 모습을 넣기도 했습니다.  기구 중대원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구 중대의 최후를 가져온 것은 주르당의 편견이 아니라 그의 무능이었습니다.  다음 해인 1796년 8월 24일 독일 바이에른의 암베르크(Amberg)에서 주르당은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관이 바로 명장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주르당은 여기서 속절없이 탈탈 털려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계속 후퇴하던 주르당은 이대로 끝까지 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반격을 꾀했습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Wurzburg) 인근에서 마인(Main) 강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사단 하나가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분리된 상태임을 포착했습니다.  다수의 프랑스군으로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주르당은 9월 3일 자신있게 공격을 개시했으나, 상대는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짙은 안개를 틈타 신속히 부교를 놓고 주르당 몰래 지원 병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주르당은 여기서 다시 한번 참패를 당하고 허겁지겁 후퇴해야 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나폴레옹이라고 할 수 있는 카알 대공입니다.  원래 세습 귀족 가문 사람들 중에 출중한 인물이 나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입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약 2천의 사상자를 냈고, 추가로 7문의 대포와 함께 1천의 포로까지 오스트리아군에게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1천의 포로 중에는 기구 중대원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일망타진 당하여 기구 앵트레피드(L'Intrepide) 호까지 고스란히 오스트리아군에게 나포되었던 것입니다.  주르당의 삽질과 카알의 명지휘의 절묘한 조화가 빛났던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매우 뜻깊은 전투였습니다.  그동안 기세등등한 프랑스 혁명군에게 계속 밀리기만 했으나, 이 전투들을 기점으로 전세가 오스트리아군 쪽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주르당이 속절없이 후퇴하는 바람에 그 우익을 맡아 전진하던 모로(Moreau) 장군도 고립을 우려하여 후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쁜 승전에 프랑스군이 가지고 다니던 악마의 풍선 앵트레피드 호는 아주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이 기구는 오늘날에도 빈에 있는 히에레스게쉬히틀리헤스(Heeresgeschichtliches)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구는 직경이 거의 10m에 달하는데, 나무로 만든 곤돌라 본체는 매우 작아서 직경이 75cm 밖에 안되고 난간 높이도 고작 1m 간신히 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구를 타고 두 명의 장교가 무려 9시간이나 플뢰뤼스 상공을 지켰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사진 속의 기구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비행체 바로 앵트레피드 호입니다.  이건 사실 복제품이고, 진품은 유리 상자 속에 넣어져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참사 속에서도 기구 중대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직 무사한, 쿠텔이 지휘하던 제2 기구 중대가 재편성된 상브레-뮤즈 방면군으로 배속된 것입니다. 상브레-뮤즈 방면군에 도착한 제2 기구 중대에게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은 정말 처절하게 무능하던 주르당이 매우 유능한 장군이던 오슈(Lazare Hoche)로 교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엄격한데다 무자비하고 유능한 군인이었던 오슈가 제2 기구 중대를 정말 풍선쟁이들로 취급하여 자신의 작전 지역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중대장 쿠텔까지 열병으로 인해 중대장직을 내놓고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오슈 장군의 동상입니다.  열병으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 분이 나폴레옹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었을지 참 궁금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구 중대의 최후는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총재 정부의 주전선은 어디까지나 독일 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와의 긴 전쟁을 결판낸 것은 이 독일 전선이 아니었습니다.  총재 정부는 어떤 애송이 장군의 열렬한 청원을 받아들여 제2 전선 정도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 애송이를 이탈리아 전선에 파견했었는데, 그 애송이의 이름이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맹활약에 힘입어 결국 오스트리아는 굴복했고, 그 결과로 맺어진 것이 1797년 레오벤(Leoben) 조약이었지요.  이 조약 후에야 비로소 지난 해에 포로가 되었던 제1 기구 중대가 프랑스로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약 8개월 만에 프랑스로 돌아온 기구 중대원들은 여전히 최첨단 과학 특수 부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몰락한 기구 중대를 되살릴 적임자는 기구 전문가인 쿠텔'이라며, 쿠텔을 다시 중대장으로 임명해달라는 청원을 넣었습니다.  총재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쿠텔을 대령으로, 기존 중대장이던 로몽을 소령으로 승진시키며 다시 기구 중대 지휘관으로 배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포로 신세에서 풀려난 것은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이들이 활약할 무대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실업자 신세가 될 뻔한 이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원래 3편으로 생각했으나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주에 마지막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27Intr%C3%A9pide

https://en.wikipedia.org/wiki/Observation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leurus_(1794)

https://en.wikipedia.org/wiki/Hot_air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ilitary_ballooning

https://vistaballoon.com/blog/2014/10/the-history-of-ballooning/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gas-vs-hot-air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history-2

http://www.pbs.org/wgbh/nova/space/short-history-of-ballooning.html

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25354/http://www.centennialofflight.gov/essay/Lighter_than_air/Napoleon%27s_wars/LTA3.htm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Jacques_Cont%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Louis-S%C3%A9bastien_Lenormand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Cont%C3%A9,_Nicolas_Jacques

Posted by nasic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starlight 2018.04.22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지가 많은 유럽에서 기구를 통한 정찰과 전장분석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텐데요. 무슨 연유로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2. 샤르빌 2018.04.22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아무리 획기적인 신기술이어도 가차없군요.. 왠지 1차대전 당시 탱크가 떠오르네요 탱크는 높은 평가를 받은덕에 많이 부족했던 성능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발전할 수 있었다던 이야깁니다..

  3. 0_- 2018.04.22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굽시니스트 작 공군만화 중에 열기구 이야기가 도입부분에 조금 나왔었는데요, http://afplay.kr/1242
    바람이야 그러려니 했었지만 "총알 한방에 무력화..." 하던 부분에서 저 시대 총 성능이 그정도로 좋았나? 싶더라고요.
    다음주 마지막편 기대하겠습니다 :D

  4. TheK2017 2018.04.22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진진합니다. 다음 편이 기다려 집니다.

  5. 2018.04.23 0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카를대공 2018.04.25 0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 대공 볼 때마다 느끼는건데 이 양반이 나폴레옹 전쟁 마지막까지 꾸준히 참전 했으면 어땠을까,
    글런 생각이 늘 드네요.

    나폴레옹이 탈탈 털리는거야 바뀌지 않겠지만 두 명장의 리턴매치가 어떤 그리을 자아냈을까 궁금합니다.


    혁명기 프랑스엔 나폴레옹편이 아닌 장군들 중에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았네요.

    모로도 그렇고 오슈도 그렇고 나폴레옹과 함께 싸웠으면 어땠을까요.

2018.04.15 20:00

주르당의 어설픈 라임으로 조롱 받으며 파리로 돌아온 쿠텔을 맞이한 것은 서슬퍼런 국민공회 공안위원회(le Comite de salut public)였습니다.  그렇다고 공안위원회가 쿠텔을 단두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고, 정반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당시 국내외 반혁명세력과의 투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으므로, 과학을 통해 구시대의 적을 무찌른다고 하면 뭐든 해줄 기세였습니다.  샤또 드 뫼동(Chateau de Meudon)에서 몇 차례의 기구 기술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진 뒤, 공안위원회는 아예 세계 최초의 공군 무기창인 항공 개발 센터(le centre de developpement aerostatique)를 창설했습니다.  여기서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하고 무엇보다 현대적인 연필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학자 콩떼(Nicolas-Jacques Conte)가 연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이 기관에서 기구의 형태와 재질, 수소 가스 생산의 효율화 등을 연구 발전시켰습니다.  




(콩테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로 간 학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넬슨에 의해 프랑스 함대가 궤멸되어 프랑스 본토와의 보급로가 완전히 끊어진 뒤에도 프랑스군이 보급품 부족으로 말라죽지 않은 것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70% 정도는 콩테 덕분이었습니다.  콩테는 빵부터 땔감, 탄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현지에서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서 기구를 띄워올리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모든 것에 뛰어난 재주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프랑스로 귀환한 이후 얼마 안되어 1805년 5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 연구기관에서의 성과를 흡족하게 여긴 공안위원회는 1794년 4월 2일,  급기야 세계 최초의 공군인 기구 중대(la Compagnie d'Aerostiers)를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이 중대는 손재주가 좋은 20명의 사병과 2명의 상병, 병장과 상사 1명씩, 그리고 대위와 그를 보좌할 중위 1명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위로는 주르당에게 조롱을 당했던 화학자 쿠텔, 그리고 중위로는 쿠텔의 조수였던 로몽이 임관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첨단 기술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도 첨단 기술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정찰, 신호에 의한 통신, 그리고 선전물 배포였습니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정보전이었지요.




(세계 최초의 공군 비행단장이 된 쿠텔(Jean-Marie-Joseph Coutelle)입니다.  그는 사실 제대로 된 화학자는 아니었고, 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한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과 친했던 덕분에 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엔지니어 정도였습니다.  그가 프랑스에 남긴 공로는 하나 더 있는데, 오늘날 파리 콩코드 광장에 이집트 현지에서 가져온 3천년 묵은 오벨리스크가 서있게 된 것에 그가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새롭게 창설된 이 기구 중대의 사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장교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학 기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하여 공화국으로부터 급여를 받아가며 조국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사병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대에 있으면 적의 총알이나 포탄에 맞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창설 직후, 이 사기충천의 부대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다소 꺼림직한 것이었습니다.  벨가에 접경 지역의 모베르쥬(Mauberge)로 가서 다름 아닌 주르당의 부대에 합류하라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난 번과는 다른 점들이 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주르당에게 대놓고 조롱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쿠텔이 한낱 일반 시민(citoyen)이 아니라 당당한 육군 대위(capitaine)였고, 또 지난 번처럼 현금 5만 리브르를 달랑 들고 온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인상적인 물건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기구였습니다.  이름은 앙트르프레낭(L'Entreprenant) 호로서, 영화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선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호와 유사한 뜻이었습니다.  "진취적, 적극적"이라는 뜻이었지요.  


기구 중대는 도착과 동시에 가열로를 만들어 수소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앙트르프레낭 호의 첫 임무 비행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 6월 2일, 오스트리아군이 포격을 가해오자 그에 대한 정찰을 하기 위해 앙트르프레낭 호가 출격한 것입니다.  쿠텔은 아군 지역인 모베르쥬에서 떠오른 기구를 타고 오스트리아 및 네덜란드군의 동향을 훤히 내려다 보며 지상과 연결된 밧줄을 통해 상세한 보고서를 계속 내려보냈습니다.  기구에서 망원경을 통해 보면 거의 25km 밖의 상황까지 꽤 상세히 볼 수 있었으니 군용 정찰 활동에 있어서는 정말 꿈의 병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날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날의 비행은 최초의 실전 투입으로 기록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측에서는 기구의 등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일이고 전쟁 규칙에 위반되는 일'이라며 프랑스군 측에게 항의하기도 했고, 앙트르프레낭 호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사정거리 훨씬 밖에 있던 앙트르프레낭 호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앙트르프레낭 호의 비행은 뜻하지 않은 효과도 낳았습니다.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장교들의 상당수는 교양 있는 신사 계급 출신이었고 따라서 기구라는 물건의 존재와 그 원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시골 농촌 출신의 문맹자였던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병사들은 프랑스군 상공에 난데없이 나타난 둥근 물체를 보고 '프랑스 놈들이 혁명을 하면서 성당과 신부들을 박해한다더니, 정말 악마가 프랑스 혁명군과 함께 한다'라며 겁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전 측면에서의 효과는 곧 뒤이어 벌어질 플뢰뤼스 전투에서도 크게 발휘되었습니다.


모베르쥬에서의 작전을 끝낸 기구 중대에게 내려진 다음 명령은 샤를르루아(Charleroi)로 이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구는 어떻게 이동을 했을까요 ?  공군답게 모든 장비와 인력을 싣고 가볍게 두둥실 날아서 이동했을까요 ?  물론 아니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수소 가스를 빼서 기구를 납작하게 접은 뒤 트럭으로 실어나르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라브와지에-므니에 공법에 의해 싸고 쉽게 수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수소는 만들기 어려운 가스라서 그렇게 쉽게 버렸다가 재빨리 다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당장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은 과학기술 부대라는 이름이 쑥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즉, 무거운 추를 매달아 고도를 낮춘 기구에 밧줄을 연결하여 둥둥 띄운 채로, 24명의 병사들이 거의 50km에 걸친 거친 벌판을 가로질러 질질 끌고 이동했습니다.




(창공을 지배하는 자랑스러운 혁명의 날개인 공화국 공군의 웅장한 이동 모습입니다.  사실 저 상황에서 굳이 지휘 장교가 칼을 뽑아들고 지휘할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비록 이렇게 공군답지 못한 모양새로 이동하긴 했지만, 쿠텔의 기구 중대는 플뢰뤼스(Fleurus)에서 군사 역사에 있어 빛나는 한 장면을 만듭니다.  1794년 6월 26일,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지던 10시간 내내 앙트르프레낭 호는 전장 상공을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지상의 프랑스군 사령부, 그러니까 주르당에게 전달했습니다.  무선은 물론 유선 전화기도 없던 시절 무엇으로 통신을 했을까요 ?  간단했습니다.  쿠텔과 함께 기구에 탑승한 사단장 모를로(Antoine Morlot) 장군이 직접 망원경을 들고 관찰한 적의 동향을 종이에 적고, 그 쪽지와 작은 추를 담은 주머니를 고정시킨 밧줄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보낸 것입니다.   물론 정말 급한 상황에서는 깃발 신호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설에는 쪽지 주머니를 그냥 지상으로 집어던졌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밧줄을 통해 지상에서 질문을 적은 쪽지를 올려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2가지였습니다.  이 플뢰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벨기에를 포기하고 물러났다는 것과, 쿠텔과 모를로 장군이 적어도 9시간 이상 공중에 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 둘이서 기구에 오를 때 어떤 메뉴의 도시락을 몇 끼 분이나 싸가지고 올라갔을까 하는 것과 화장실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만,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플뢰뤼스 전투 모습을 그린 다른 그림입니다.  물론 기구 아래에서 용맹한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든 채 지휘를 하고 있는 분이 주르당 장군이십니다.  아마 주르당 장군은 자신이 본의 아니게 세계 공군사에 남긴 족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2가지 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과연 앙트르프레낭 호의 정찰 활동이 플뢰뤼스에서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판단은 쿠텔이나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주역이었던 주르당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르당 이 양반은 처음부터 이 괴짜 과학자들이 하는 풍선 놀음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빛나는 승리의 공로를 당연히 미친 과학자들이 아니라 100% 자신의 공로로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르당의 승전 보고서에는 이 기구 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심드렁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적혔습니다.  하늘에 직접 떠있던 모를로 장군도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여타부타 아무 입장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안위원회 출신으로서 전투 내내 현장에 있던 정치인이자 저명한 화학자인 귀통(Louis-Bernard Guyton de Morveau)가 플뢰뤼스 승전에 있어서 기구 정찰의 효과에 대해 극찬을 해주었습니다.  역시 과학자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해주는 것은 같은 동업자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공계 출신이 실험실이나 공장을 떠나 정관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귀통 드 모르보입니다.  이 분이 화학사에 남기신 공로 중 최고의 것은 화합물 작명법, 즉 chemical nomenclature입니다.  가령 탄소 하나에 산소 원자 2개가 붙은 가스를 이산화탄소 carbon dioxide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다 이 분 덕택입니다.)




실은 귀통은 기구 부대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6월 23일, 이미 기구 부대 제2 중대 창설을 위한 법안이 국민공회에서 통과되었던 것입니다.  2기의 신형 기구 에르퀼(Hercule, 헤라클레스)과 엥트레피드(L'Intrépide, 대담하다는 뜻)를 지급받은 제2 중대는 콩테(Conté)에 의해 직접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개월에 걸쳐 훈련을 마친 제2 중대는 1795년 3월 라인 방면군(Armée du Rhin)에 배속되었습니다.  그 지휘관은 역시 전세계에게 유일하게 실전 비행 경험을 가진 기구 중대장 쿠텔이 맡았고, 중위이던 로몽이 대위로 승진하면서 제1 중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활약하는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 스타일이었던 콩테는 기구 학교장이 되어 이 2개 중대에 배속될 병사들의 훈련을 맡았습니다.  


이 제2 기구 중대는 라인 방면군의 진격을 따라 이동하며 독일 전선인 마인츠(Mainz) 전투 및 만하임(Mannheim) 전투 등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프랑스 혁명군의 날개가 되어 전장의 하늘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Posted by nasic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쇼펜하우어 2018.04.15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이 글과는 상관 없지만.... 갑자기 궁금한게 있는데 프랑스가 징병제였는데 그럼 우리나라처럼 의무 복무기간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몇 년 복무하고 제대했나요?

    • nasica 2018.04.15 2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르당 법안에 따르면 20세에서 25세까지, 그러니까 5년이 복무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을 확대해가면서 18세에서 25세, 즉 7년으로 늘어난 것 같습니다.

  2. 수비니우스 2018.04.15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터프라이즈 하면 태평양전쟁 때 대활약한 미국의 항공모함이 생각나는데 앙트르프레낭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프랑스 혁명기에서도 보게 되네요 ㅎㅎ 그런데 마지막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이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흑흑

  3. Gg 2018.04.1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안위원회에서 신무기 개발 지도하는 모습은 소비에트 생각나게 하는군요
    비참한 운명 또한 비슷하게 정치적으로 ?

  4. 쇼펜하우어 2018.04.1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혹독했군요... 왜 목숨걸고 징병을 피하려고 했는지 알겠네요

  5. reinhardt100 2018.04.16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과학적 혁신을 가져온 신무기들이 다른 전쟁들과 달리 그렇게 많이 쓰이지 못합니다. 이유는? 각국의 재정이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했으니까요.

    프랑스야 워낙 유명하니 제쳐놓더라도 영국만 하더라도 국가 최대 기업 중 하나인 동인도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국가가 회사 경영에 개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구제금융을 해 주는 상황이었고,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은 7년 전쟁 당시의 부채 갚는데다 중간에 터진 바이에른 대공위 계승 전쟁 때문에 그 뒷처리 하느라 정신없었죠. 러시아도 터키와의 전쟁 및 계속된 사회 불안 요소 때문에 돈 나올 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덴마크나 스웨덴,에스파냐,포르투갈도 비슷했습니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군소국가들도 자기들 먹고 살기에 바쁜 판이었으니까요.

    이런 판국에 신무기 개발할 돈 대신 기존에 개발된 무기를 대량생산하든지 아니면 노획해서 쓰는 게 더 싸게 먹힐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6. 헤메메 2018.04.19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0대가 '젊은'나이에 '요절'한건 아닌거같아요. 제 학교선생님이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으셔요 ㅋㅋ 나시카님 블로그엔 좋고 재밌는 글들이 많아서 좋아요. 잘 읽고 갈게요!

2018.04.08 20:00

탈라베라 전투에서 빅토르의 복장을 터뜨린 주르당 원수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르당 원수의 몇 안되는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1794년 플뢰뤼스(Fleurus) 전투에 대해서도 언급했지요.  플뢰뤼스 전투 그 자체는 별 의미도 재미도 없는 전투입니다만, 이 전투는 군사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군이 활약한 전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왜 다른 나라들보다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공군이 탄생했을까요 ?  그 효과는 어땠을까요 ?  무엇보다, 왜 불세출의 군사 천재 나폴레옹은 이런 과학 병기를 활용하지 않았을까요 ?  


계몽사상이 싹튼 나라 프랑스에서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일찍부터 이런저런 과학 실험들이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열기구 및 수소 기구도 그런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혁명 전인 1783년 이미 몽골피에 형제들(Joseph-Michel, Jacques-Étienne Montgolfier)이 뜨거운 공기를 이용한 열 기구를 만들어 테스트한 일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테스트 시연 모습입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과학자는 아니었고, 원래 제지업자였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공기가 주변 공기보다 가벼워서 열기구가 위로 올라간다는 원리를 처음에는 몰랐고, 그냥 불을 피울 때 나오는 연기의 힘이 기구를 들어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휴대용 가스 버너가 없어서 철제 난로와 장작을 싣고 날아야 했던 시절, 열기구는 체공 시간과 최대 고도에 있어 제약이 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가벼운 공기에 의해 기구가 뜬다는 원리를 그대로 활용하여, 수소 가스를 기구에 채우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785년 장-피에르 블랑샤르(Jean-Pierre Blanchard)가 1785년 1월 7일에 영국의 도버 캐슬(Dover Castle)에서 프랑스의 귄느(Guines)까지 2시간 30분 만에 기구를 타고 영불 해협을 건너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이때 사용된 기구도 열기구가 아니라 수소 기구였습니다.  물론 뜨거운 공기와는 달리 수소 가스는 일반인들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소를 만드는 방법은 100년도 훨씬 전인 7세기 중반에 발명된, 철에 황산을 들이붓는 것이었습니다.  황산은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재료였으므로 수소 제조 비용은 굉장히 비쌌습니다.




(블랑샤르입니다.  그는 최초로 도버 해협 통과에 성공한 이후,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 앞에서 기구 비행 시범을 보였고, 기구 비행사를 위한 낙하산 연구 및 제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793년 사고로 기구가 터질 때 낙하산을 써서 탈출에 성공하여, 인류 최초로 비행 사고에서 낙하산 탈출에 성공한 인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의 공군 총책임자로 임명된 소피 아르망(Marie Madeleine-Sophie Armant)과 결혼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1808년 헤이그에서 기구 비행 중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기구에서 추락했고, 그 부상으로 인해 1년 간의 투병 끝에 사망했습니다.  결국 그 부인인 소피도 기구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낙하산 시범을 보이는 레노르망(Louis-Sébastien Lenormand)입니다.  이 실험은 1783년 12월, 그러니까 몽골피에 형제의 첫 비행 직후에 이루어졌습니다만, 사실 레노르망은 이 낙하산이라는 물건을 기구 비행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화재가 발생한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위한 용도로 이 우산처럼 생긴 낙하산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 지도부는 중산층 출신의 지식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봉 왕가로 대표되는 특권 귀족층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만, 프랑스를 천년간 지배해온 카톨릭 사제 계급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거든요.  덕분에 많은 카톨릭 성당들이 마굿간으로 변경되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요.  혁명 지도부는 그런 종교적 순종과 대립하는 과학적 이성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혁명 지도부에겐 당장 총칼로 싸워야 하는 적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사르데냐 등등 프랑스 이외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사실상 혁명 지도부의 적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해도 유럽 전체와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깨뜨리고 탄생한 혁명군에게는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신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것이 바로 수소 기구였습니다.  


군사 작전에 있어 정보의 중요성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전까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유럽 대륙처럼 대부분의 전투가 비교적 평탄한 곳에서 치루어진 지역에서는 별로 고지같지도 않은 언덕 하나를 차지하는 측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이 전략적으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양보한 프라첸(Pratzen) 고지의 높이는 고작 12m였습니다.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적진 관측이었습니다.  가령 1809년 바그람 전투에 출정하기 위해 쇤브룬 궁전을 나서던 나폴레옹의 짐 중에는 쇤브룬 궁전 정원사가 사용하던 사다리도 있었습니다.  2m도 안 되는 높이였지만, 그런 정원사용 사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적진 현황이 전체 작전 지휘에 엄청난 차이를 낼 수 있었습니다.  웰링턴이 즐겨 쓰던 언덕 후사면을 이용한 수비 전술의 핵심도 병력을 능선 너머에 은폐시켜 적의 관측으로부터 아군의 현황을 숨기는 것에 있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평원을 제압하는 전략적 고지, 프라첸 고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혀 고지처럼 보이지 않는, 12m짜리 높이의 언덕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유유히 떠있는 기구에 망원경을 든 관측병이 올라타 있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과학 혁신을 중시하던 혁명 정부의 성향에 고무된 프랑스 전국의 과학자와 발명가들은 기구를 이용하는 작전에 대한 온갖 제안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렇듯이 그런 제안들 중 실질적인 것은 많지 않았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기구 활용을 위해서는 수소를 저비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군사 기술의 극적인 발전에는 역시 미친 과학자가 필요합니다.  라브와지에는 존경받아 마땅한 화학자로서 미친 과학자와는 거리가 좀 먼 분이긴 합니다만, '내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난 뒤 눈을 깜빡거릴테니 얼마나 오래 깜빡거리는지 관찰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적어도 과학에 약간 정신이 나간분은 맞는 것 같긴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라브와지에는 목이 잘리고 난 뒤에도 30초 정도 열심히 눈을 깜빡거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프랑스 공군 창설에 핵심이 되는 이 수소 대량 생산 기술은 이미 1784년에 발명된 바 있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프랑스 혁명 정부에 적극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소(hydrogene - 물의 생성자라는 뜻)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프랑스 과학자에 의해서요.  바로 저명한 화학자 라브와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였지요.  그는 수소 대량 생산보다는 당시 과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플로지스톤(phlogiston)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연소란 석탄이나 기름, 나무 등 인화 물질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일으키는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라브와지에는 이 이론을 깨기 위해 '플로지스톤에 대한 고찰'(Réflexions sur le phlogistique)이라는 책까지 썼으나,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을 믿고 있었습니다.  라브와지에는 수학자 므니에(Jean Baptiste Meusnier)의 도움을 받아 이런 테스트를 수행했습니다.  즉, 섭씨 600도로 달군 뜨거운 총열 속으로 수증기를 불어넣었더니, 다음과 같은 반응식에 의해 총구의 다른 끝으로 가연성 기체인 수소가 생성된 것입니다.  



(라브와지에가 수행한 테스트에서 수소가 발생하는 이유는 총열의 주성분인 철과 수증기 속의 산소가 뜨거운 열 속에서 결합하며 수소가 남기 때문입니다.  라브와지에는 자랑스럽게 이 테스트 결과를 발표했으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플로지스톤 이론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793년 10월, 비싼 황산을 쓰지 않고 이 잠깐 잊혀졌던 라브와지에-므니에 방식으로 수소를 대량 생산하는 테스트가 성공리에 시연되면서 관측용 수소 기구에 대한 구상이 급진전되었습니다.  정작 라브와지에는 이 테스트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혁명 정부에서 그가 책임을 지고 있던 세금 징수 및 담배 판매에서의 부정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그 다음해인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수소 생산 테스트 직후에 혁명 정부의 공안위원회는 화학자인 쿠텔(Jean-Marie-Joseph Coutelle)과 그의 조수이자 엔지니어인 로몽(Nicolas Lhomond)을 벨기에 방면을 담당하던 북부군(Armée du Nord)에 파견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맨 몸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겐 공안위원회가 지급한 5만 리브르(현재 가치로 약 5억8천 만원)의 현금이 있었습니다.  즉 현지에서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한 뒤 기구를 제작하여 북부군의 작전을 지원하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북부군 사령관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 사령관이 바로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이었습니다.  주르당은 기구를 이용하여 적진을 공중에서 관측해주겠다는 이 두 명의 민간인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대했습니다.  과학자들을 대하는 군인들의 태도가 어떨 것인지 예상했던 국방부 장관이자 빼어난 수학자였던 카르노(Lazare Carnot)가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함께 보낸 소개장에는 '시민 쿠텔은 결코 협잡꾼이 아닙니다'(Citoyen Coutelle n'est pas un charlatan)라는 다소 옹색하면서도 노골적인 표현이 쓰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이들을 그야말로 협잡꾼 취급을 하며, 이런 말과 함께 그들을 잘 타일러 파리로 돌려보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공격이 임박했으니, 풍선이 아니라 보병 대대가 필요합니다."  

(Une attaque autrichienne est imminente, et qu'un bataillon est nécessaire, pas un ballon)  


즉, 불어로 대대를 뜻하는 바따용과 풍선을 뜻하는 발롱이라는 단어의 라임(rhyme)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조롱이었지요.  엄격히 말해서 ~용과 ~옹은 라임이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요.  과연 프랑스 공군 창설은 이렇게 주르당의 같잖은 라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을까요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27Intr%C3%A9pide

https://en.wikipedia.org/wiki/Observation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leurus_(1794)

https://en.wikipedia.org/wiki/Hot_air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ilitary_ballooning

https://vistaballoon.com/blog/2014/10/the-history-of-ballooning/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gas-vs-hot-air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history-2

http://www.pbs.org/wgbh/nova/space/short-history-of-ballooning.html

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25354/http://www.centennialofflight.gov/essay/Lighter_than_air/Napoleon%27s_wars/LTA3.htm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Jacques_Cont%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Louis-S%C3%A9bastien_Lenormand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Cont%C3%A9,_Nicolas_Jacques

https://fr.wikipedia.org/wiki/Compagnie_d%27a%C3%A9rostiers

https://en.wikipedia.org/wiki/Ch%C3%A2teau_de_Meudon

http://www.strangehistory.net/2011/02/06/lavoisier-blinks/

Posted by nasic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아스페른에슬링 2018.04.08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공군 총책임자가 소피 아르망(Marie Madeleine-Sophie Armant)이란 여성이라니 신기합니다. 그리고 주르당의 실체가 점점 까발려지네요;; 탈라베라 편 보기 전만 해도 나름 실력자인 줄 알았는데

  2. 최홍락 2018.04.08 2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부아지에의 기요틴 관련 일화는 처형 당시 입회했던 사람의 기록에 없는 내용으로 일종의 도시전설에 가깝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이때 처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라부아지에의 제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세계적인 화학회사를 설립하게 되죠.

    • nasica 2018.04.08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정설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무시하고 언급하지 않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이야기라 마침내 쓰고야 말았습니다.

    • 유애경 2018.04.09 0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요틴 일화, 동일 인물인지 기억은 잘 안납니다만, 비슷한 얘기를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목이 잘리고 난후에도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실험으로 친구(내지는 제자? 동료?)에게 잘린목에 말을 걸어주면 의식이 있다는 표현으로 눈을 깜빡이겠다고 했고 결과 몇촌가 몇십촌가 살아있었다(?)는 일화 였는데 정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가 않은거군요.

    • reinhardt100 2018.04.11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듀퐁사 말씀하시는군요.

      이 회사 현재는 말이 화학회사지 지금은 바이오 분야를 몬샨토등의 곡물거래기업들과 같이 분할하는 수준의 기업이죠.

      듀퐁사가 대단한게 항상 100년단위로 산업의 선도주자 중 하나로 존재해왔다는 겁니다. 그것도 19세기에는 아머사의 추격, 20세기에는 I.G 파르벤과 일본 화학기업들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말입니다.

      흔히 말하는 벤처기업들이 영세하다고 하지만, 과거의 코닥, 현재의 듀퐁이나 코닝, 퀼컴, 텍사스인스투르먼트 같은 회사들이 진정한 벤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3. 웃자웃어 2018.04.10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예전에 틸지트 조약 에필로그 편에서 프로이센에서 프랑스가 징발한 금액+전쟁배상금이 프로이센의 13년치 GDP라고 하셨는데, 엘바강 서쪽 영토를 상실전 기준인가요? 아니면 상실후의 기준인가요?

    • nasica 2018.04.11 2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익후,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웃자웃어 2018.04.11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쨌든 그럼 틸지트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가혹하겠군요. 징발로 그나라의 몇년치 GDP꿀꺽+전쟁비용을 전가+영토절반을 꿀꺽하고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 주둔하고 비용또한 프로이센에게 전가했으니.

  4. 정암 2018.04.10 14: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풀턴이 나폴레옹에게 제안했다는 증기선 일화가 생각나네요.
    증기선에 의한 최초의 대륙간 횡단(미국-영국)이 1819년에 있었다는데
    만약 나폴레옹이 증기선의 진가를 알아보고 연구개발에 매진하면서 러시아 침공하지 않고
    내실을 다졌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수도 있었겠네요

  5. 국성야 2018.04.11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모바일 대문의 그림은 어떤 전투를 묘사한겁니까??

  6. reinhardt100 2018.04.11 1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입니다만 혁명전쟁기 프랑스군이 무에서부터 다시 군을 재건, 확장하는데는 카르노라는 걸출한 사람이 전쟁장관으로 앉아 있었다는게 엄청난 행운이었죠. 막말로 중대 대대단위까지 인기투표수준보다야 낫지만 무능력자들이 대거 장교단에 들어온 초기 전쟁 상황에서 그래도 장교단 복구를 겉으로나마 할 수 있었던 데는 카르노를 위시한 전쟁부가 엄청난 인력 및 보급수요를 어느정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전술 및 전략적 부족을 숫자로 보충하는 식의 전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7. 카를대공 2018.04.11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금 없지만 이번 편을 보니까 동서양의 세력(?) 역전에 관한 일각의 주장이 떠오르네요.

    흔히 산업혁명 이전까진 동양이 서양에 앞섰다고 하는데
    그 앞섰다는게 과연 뭘까요?

    철학?과학?물량?

    단순 물량이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이미 산업혁명 이전에도 이런 열기구 실험 같은걸 보면 동양이 물량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뒤쳐진게 사실이라 봅니다.

    당시 유일하게 산업혁명을 성공했다는 영국을 제외하고도 이런 열기구 같은게 나온거 보면 당대 유럽과 동양의 격차는 이미 크지 않았나 싶어요.

  8. 까까님 2018.05.07 18: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양이 물량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화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서양보다 처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그리스 로마문명은 대단했지만 중세의 암흑도 대단했으니까요
    뭐랄까... 뭘 해도 답이 없으니까 그냥 포기하고 신이 정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보는 기준에 따라 판단은 다를 수 있겠지만... 패러다임이라고 할까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그 패러다임의 결정권이 급속도로 서양에 귀속되버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