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신문에서 읽었는데, 중국의 CCTV에는 중국 각지의 소수 민족을 찾아다니며 각 민족 고유의 풍습과 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꼭 나오는 장면이, 그 소수 민족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이 꼭 나온다고 하네요.  그 글을 쓴 필자는, 그것이 소수 민족이 흥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에게, '소수 민족들은 대개 음주가무에 빠져 지내는 열등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안하느냐는 일단 생각하지 말고,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말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도 드뭅니다.  사실 제가 볼 때는 조금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많이 즐깁니다.  우리 스스로가 못느낄 뿐이지, 우리나라는 음주 문제가 사실 심각한 나라입니다.  제가 카투사 시절에 (당연히 미군들하고 사이가 안좋았지요 !)  미군애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1인당 소주 소비량이 1주일에 1병이던가 2병이던가라면서, 한국인들은 모두 알콜중독자라고 씨부렁거리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갓난아기까지 포함한 평균 수치가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다 싶었는데, 찾아보니까 정말 한 1.8병 정도였습니다.  그것에 추가로 맥주도 한 2.3병 정도 소비하더군요.  대체 이 술을 다 누가 마시는 겁니까 ?   

 

(우리나라는 오른쪽 하단 부분에 있습니다.  순수 알콜의 섭취량인데, 우리나라는 딱 아일랜드와 동일하군요.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단연 탑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어떤가 하고 찾아보니까, 우리나라의 1인당 술 소비량은 아시아권에서는 단연 탑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에 속합니다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고 그냥 유럽 중간 정도 갑니다.  다만 유럽인들보다 우리가 체구가 좀 작은 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취하도록 마시는 편이라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특히 유럽인들은 식사 때마다 맥주나 와인 1~2잔을 항상 곁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알콜 섭취량이 많은 것이지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음주 문화가 다소 폭음 쪽으로 잘못 형성되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따지고 보면, 낮에는 멀쩡하게 직장에서 일 잘하고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인 사람이, 밤에 만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것이 별로 크게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는 나라가... 적어도 OECD 국가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폭력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이 오기 전에 소주를 벌컥벌컥 마셔두는 것이 변호사를 부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법적 대응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음주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법 만드는 국회의원들과 사법부 검찰 등에 계신 분들이 술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  저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서양인들은 술의 맛과 향을 즐기려고 마시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는, 경제 수준과도 상관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책에서 읽었는데, 우리나라 유치원에서는 전통적으로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키는 것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미술 교육을 많이 시킨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놓은 것이 약간 뜨아하면서도 그럴싸 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만, 노래 교육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것에 비해, 미술은 소모성 재료가 많이 들어가므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민 소득이 낮은 국가일 수록 미술 교육보다는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킨다고 하네요.  동의하십니까 ?  아무튼,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척박한 사회 환경에서 가장 저비용의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 그것도 소주이기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뭐 스포츠를 하려고 해도 돈이 많이 들고, 미국 애들처럼 집에서 뭔가 뚝딱뚝딱 만들어보려고 해도 차고와 각종 연장, 넓은 공간이 필요하쟎아요.  그러다보니 할 게 술마시는 것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정은, 지금은 그렇게까지 마셔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18~19세기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온 나라가  술에 쩔어 살았습니다.  물론 사회 최고위층 인사들이야 주정뱅이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소위 상류계층인 군 장교들만 하더라도, 주정뱅이가 많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사병은 하루에 1파인트 (0.56리터)의 포도주나 1/3 파인트의 럼주를 배급받게 되어있다고 했었습니다.  우습게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단순히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비토리아(Vittoria)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웰링턴 공작은 부하 병사들의 약탈 행위에 화가 났을 때, 공개적으로 자기 병사들을 '술이나 퍼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색히들'이라고 욕을 해댔다고 하지요.  


 

(1813년의 비토리아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약탈한 온갖 귀중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철수하던 프랑스군을 영국군이 따라잡아 공격한 이 전투는 특히 나폴레옹 전쟁 중의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노획물이 발생한 것으로 유명한데, 웰링턴이 화가 났던 이유는 그런 값진 노획물 중 상당수가 병사들의 배낭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해군 이야기를 그린 Hornblower 시리즈에서도, "Flying Colors" 편을 보면, Hornblower 함장은 긴 항해 끝에 식수가 다 떨어져 가지만, 혼블로워 함장은 물보다도 럼주가 다 떨어져 가는 것을 더 걱정합니다.  수병들은 럼주만 계속 배급이 되면, 식수가 다 떨어져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 맥주는 술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챨스 디킨즈의 "Great Expectations"라는 작품을 보더라도, 12살 정도의 어린 주인공에게 식사꺼리가 제공되는데, 물 대신 독한 ale이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워낙 식수 사정이 안좋아서, 영국인들은 대개 물은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런던의 주 식수원은 템즈 강이었는데, 여기서 물을 길어오면, 인간의 분뇨는 약과이고, 온갖 독성 물질과 가축의 분뇨 등이 다 나왔다고 합니다. 중산층은 샘에서 길어온 물을 사 마셨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이 강물을 식수로 썼습니다.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보더라도, 템즈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빠져죽지는 않았지만 그때 마시게 된 템즈강 물로인해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이미 1900년이었는데요 !   그래서 대신 맥주를 마셨고, 차가 널리 보급된 이후로는, 차를 마셨습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단어가 "영국인이 차와 흰빵을 먹는 동안, 아일랜드인은 물과 감자를 먹었다" 라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야기가 겉돌았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영국군에게 주어지는 술은 거의 100% 럼주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포도주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OTL) 그러므로 제일 값싼 술은 gin 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밀로 만드는 증류주인 진 이라는 술은, 그야말로 최하층 빈민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챨스 디킨즈도 "진을 마시는 것은 영국의 큰 해악이다."라고 썼겠습니까 ?  1730~1740년대에 발전한 진 문화는, 거의 현대 미국 도시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문제와도 맞먹었을 정도였습다.  진이 하류층에서 크게 유행하고, 또 사회악으로 번진 이유는, 너무 가격이 쌌기 때문이었습니다.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죽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통계치가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1740년대에 런던 인구가 마시는 진의 평균치가 1주일에 2파인트(1.12 리터)였습니다. 남자, 여자, 갓난아기 다 합해서요. 이 정도면 요즘 우리나라의 소주 소비량은 저리 가라지요 ?   당시 런던 시내 8가구마다 1곳씩 진을 파는 술집이 있었고, 시내 곳곳마다 진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답니다.  정부에서도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진 금지법을 1743년에 제정하려고 했는데, 폭동이 일어나서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극작가인 헨리 필딩은 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진이야말로, 대도시 인구 수십만명을 해치는 해악이다. 이 독한 술에 접한 사람들은, 지독한 주정뱅이가 되어, 이 술을 다시 사기 위한 돈조차 제대로 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모든 수치심과 공포심도 없애버려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와 뻔뻔스러움을 낳게 한다."

 

 

(윌리엄 호가쓰(William Horgath)의 유명한 1751년 그림입니다.  'Beer Street & Gin Lane'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음주에 찌든 영국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군대에도 진을 공급하는 것이 적당했겠지만, 정부는 이 지긋지긋한 술을 도저히 군대에 공급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다행히, 당시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활발하게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증류주인 럼주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육군이나 해군이나, 대부분 럼주를 공식 주류로 공급했습니다. 

 



럼주는 도수가 최고 75도까지 갑니다. (저는 한때 이게 알코올 농도를 말하는 것인줄 알았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더군요.)  엄청난 독주지요.  당시 공급되었던 럼주가 이렇게까지 정제된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아뭏든 너무 독주였으므로, 당시 해군 제독이던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별명 Old Grog)은 수병들에게 배급하는 럼주에 물을 절반 섞어서 주도록 했습니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록(grog)입니다.  권투에서 말하는 그로기(groggy) 상태라는 단어도, 바로 이 그록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영국 해군 내에서 럼주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에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채찍질 체벌이 있었습니다만, 이와 비슷한 레벨의 체벌은 바로 'grog 배급 중단'이었습니다.  육군은 육군이라는 특성상, 어떻게든 술을 손에 넣을 방법이 꽤 많았습니다만, 해군에서는 배라는 특성상, 배급되는 것 외에는 술을 구할 방법이 진짜 없었거든요.

 

(그록의 창시자이신 Edward Vernon 제독이십니다.  그는 평상시 그로그램(grogram)이라는 천으로 만들어진 코트를 자주 입어 '늙은 그록(Old Grog)'이라는 별명으로 수병들 사이에서 불렸는데, 그로 인해 럼반-물반의 희석 럼주 이름도 그록으로 굳어버렸습니다.) 



럼주는 Hornblower의 입을 빌리면, 그야말로 영국 육해군의 "Life Blood"였습니다. 어떤 인도 세포이 병사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군은 틀림없이 럼주 속에 뭔가 마법약을 집어넣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럼주만 마시면 영국군은 매우 사나와져서 두려움을 모르고 싸웠고, 또 심한 부상을 입고 다 죽어가는 병사도 럼주를 조금 마시면 금방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마법약'을 너무 많이 집어넣으면 병사들이 너무 흥분해서 제풀에 죽어버린다고도 '아주 잘' 관찰했더군요.

1780년에 런던에서,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군중이 가톨릭 수도원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고든 폭동이라는 이 사건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가톨릭 수도원 부속 진 증류장 습격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군중들은 수도원보다는 이 진 증류장을 노리고 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도들은 재빨리 이 증류장의 문을 부수고, 그 중에서 더욱 생각없는 일부 인간이 불을 질렀는데, 이 불길 속을 목숨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갔다고 합니다.  손에는 양동이와 주전자, 심지어 말구유를 들고서요. 곧 뜨거워진 증류기가 터지면서, 진 원액이 길바닥에 쏟아져 나와 하수 도랑으로 흘러들었는데, 군중들은 술에 만취하여 쓰러질 때까지, 이를 땅에 엎드려서 입을 대고 마셨습니다. 나중에 민병대가 출동해서 상황을 정리했는데, 이때 만취해서 쓰러진 사람들 중 4명의 여자를 포함해서 총 20명의 사람들이 과음으로 즉사했다고 하네요.  이 정도면 막장 인정입니까 ?

 

 

(제 글에서 인용된 영국의 당시 음주 행태 사례는 Mark Adkin이라는 현역 영국군 소령이 지은 'Sharpe Companion'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Sharpe 시리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해설서입니다.)

 

# 목요일에 올리는 과거 재탕글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주 입장에서는 포에닉스로 가지 못하면 배와 화물이 파손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때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당연히 화물선은 이때를 놓칠새라 당장 돛을 펴고 바다로 나섰습니다.  물론 이때도 먼 바다로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그냥 크레테 섬의 남해안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바다와 사람의 마음은 한치를 알 수 없는 것이라더니, 포에닉스로 가는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에 사단이 나고 맙니다.  당시 사람들이 에우로클리돈(유라굴로, Euraquilo, Euroclyd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거센 북동풍이 불어닥친 것입니다.  그러자 배는 해안선에서 떨어져 나가 속절없이 남서쪽으로 떠내려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원들은 역풍을 거스를 재주가 없었으므로 그냥 포기하고 배가 폭풍에 밀려 먼 바다로 표류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27:13 ~ 27:15)

 

(성경에 가우도스라고 표기된 섬의 위치입니다.)

 



바람이 거세어질 것 같으면 그때라도 재빨리 항로를 돌리든가 하면 되지 않았을까 라고들 생각하시겠지만 아마 당시 상황은 꽤 급박했던 모양입니다.  그 화물선에는 해안으로 짐을 옮기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할 쪽배를 한척 고물에 밧줄로 묶어서 끌고 다녔던 모양인데, 이 쪽배를 끌어들여 갑판에 올려놓을 틈도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거센 바람에 떠밀려 표류하던 화물선이 간신히 한숨 돌릴 계기는 원래 목적지인 포에닉스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가우도스(Clauda, Cauda, Gavdos)라는 작은 섬 남쪽까지 떠내려온 다음에야 생겼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그냥 '작은 섬 남쪽까지 밀려왔을 때'라고만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As we passed to the lee of a small island called Cauda...'라고 되어 있습니다.  Lee라는 단어는 항해 용어로서 '바람이 없는 곳' 또는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라는 단어인데, 당시 북동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는데 섬의 남쪽에 배가 있다는 것은 뱃사람들에게 2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먼저, 최소한 배가 섬과 그 인근 암초로 떠밀려가서 부딪힐 일은 없다는 뜻이고, 또한 섬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서 다소 바람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원래 육지 근처에 배가 떠있는데 바람이 바다 쪽에서 육지 쪽으로 불어가는 것, 즉 배가 섬의 windward(우리 말로는 풍상) 쪽에 있는 것은 뱃사람들에게는 바람이 순풍일 경우에조차 매우 신경쓰이는 일이었거든요.  아무튼 이 가우도스 섬의 lee에 들어가서 파도가 다소라도 잔잔해진 다음에야 선원들은 이 쪽배를 끌어당겨 갑판 위에 올려놓고는 쪽배가 다시 바다에 떨어질까봐 밧줄로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27:16)

 



그러나 그건 쪽배 하나를 구한 것일 뿐, 당장 화물선 자체는 여전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원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시르티스(Syrtis, 오늘날 리비아의 벵가지(Benghazi)와 트리폴리(Tripoli) 사이 해안가에 있는 암초와 모래톱이 많은 얉은 해역)까지 떠밀려가서 모래톱에 좌초라도 할까 전전긍긍했습니다.  거센 바람 속에서 좌초할 경우 배가 산산조각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배들도 종종 모래톱에 좌초되는 일이 가끔 발생합니다만, 같은 모래톱에 좌초하더라도 배가 천천히 항진하다가 좌초되는 것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좌초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인 18~19세기의 범선들만 해도 약한 바람 속에서 서서히 나아가다 부드럽게 좌초되면 별 피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배가 죄초된 건지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 https://nasica1.tistory.com/237 참조)  이런 경우는 그냥 노젓는 보트들을 내려서 배를 뒤로 잡아당겨 배를 다시 띄우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돛에 바람을 잔뜩 받으며 전속력으로 달리던 배가 갑자기 모래톱에 덜컥 걸리면 그 충격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로 큰 충격이 있게 됩니다.  18~19세기의 떡갈나무로 단단하게 만든 전열함이 그럴 정도라면 1세기 경의 조그만 화물선 따위는 아마 산산조각이 났을 겁니다.  언제 모래톱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원들은 어떻게든 배의 속도를 줄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문판 성경에는 꽤 전문적인 항해용어가 나옵니다.  Sea anchor, 또는 drag anchor라는 단어가 나오더라고요.  한글판 성경에는  "그대로 가다가는 모래톱에 걸릴까 두려워 돛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녔다"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정도로 간단히 번역을 해놓았는데, 영문판 성경에도 lower sea anchor나 lower drag anchor 대신 그냥 lower the sails (돛을 내리다) 라고 써놓은 버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문인 헬라어 버전도 한글판의 '연장'처럼 다소 애매모호하게 적은 모양입니다.  하긴 사도행전 원문을 적은 사람도 헬라어를 쓰던 유식한 유대인 의사 누가(Luke)라고 하니까 아마 뱃사람들의 용어나 전문 항해 용어를 정확히 적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sea anchor, 또는 drag anchor라는 것은 도저히 닻을 내려 배를 고정시킬 상황은 아니자만 어떻게든 배의 속도를 줄이고 배를 안정시켜야 할 상황에서 내리는 일종의 브레이크 같은 도구입니다.  이건 닻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일종의 물주머니 또는 낙하산처럼 생긴 물건인데, 배 뒤에 끌고 다니면 물에 저항을 일으켜 뭔가 큰 힘이 배를 뒤에서 끌어잡아당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화물선에도 이미 이와 비슷한 물건이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7:17)



(Sea anchor 또는 drag anchor라는 것은 이렇게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폭풍이 계속되는 가운데 드디어 선체에 물이 새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배들은 목재를 이어 만든 것이라서 당연히 물이 샜습니다.  목판과 목판 사이는 삼베 등의 섬유류 찌꺼기를 망치와 끌로 박아넣어 메웠는데, 이 정도의 방수 처리로는 평상시에도 물이 조금씩 샜지만 특히 파도가 거세어 선체에 무리가 가면 물이 콸콸 샜거든요.   선창에 물이 차면 배가 더 무거워지므로 침수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집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드디어 화물을 바다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폭풍이 계속 되자, 이젠 당장 불필요한 배의 장비들(tackle and rigging)까지도 내다버렸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비를 버렸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아마 돛의 가로 활대, 도르레, 예비 돛과 밧줄 등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27:18~27:19)

게다가 더 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어디쯤까지 떠밀려왔는지 현재 위치를 알 길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벌써 며칠 동안이나 해와 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엔 시계는 커녕 아직 나침반이나 육분의 등의 위치 계산을 위한 진보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시계와 육분위를 이용한 위도경도 계산에 대해서는 https://nasica1.tistory.com/118 참조)  그래도 대략 달력과 해의 높이, 별의 위치를 보면 대충이라도 배의 위치를 알 수 있었는데 먹구름 때문에 해와 별을 못 보니 이곳이 크레테 섬 남쪽인지 시칠리아 섬 남쪽인지 혹은 아예 리비아 해안가인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다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선원들은 이제 살 가망이 없다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27:20)

이때 다시 당대의 오지라퍼이자 투머취토커인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먼저 '내 말대로 했으면 이런 피해를 입지 않았을터인데 ㅉㅉ ㅋㅋㅋ' 라고 운을 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때 로마군이나 선원들에게 바울이 맞아죽지 않은 것이 정말 신의 돌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어젯밤 내 곁에 서서 '너는 로마에 가서 케사르 앞에 서야 하므로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리고 너와 항해하는 사람들도 모두 너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도 죽지 않고 배만 부서질 것이다, 우린 어느 섬에 가서 닿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또 맞아죽지 않은 것은 정말 신의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지중해 사람들은 이런저런 다양한 세계의 신들을 많이 접하고 있었으므로 신박한 이야기를 하는 예언자들이 그리 낯선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또 최소한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으니 '이 배의 모든 사람들은 이제 너의 것'이라는 소리만 애써 못들은 척 하면 꽤 기분 좋은 예언이었지요.  (27:21~27:26)

 

그러나 그 뒤로도 10일간 더 시련이 계속 되었습니다.  14일째 되던 날 밤에도 이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인 아드리아 해를 표류하고 있었는데, 이때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선원들은 육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럴 때 당장 해야 할 일은 수심을 재는 것입니다.  (음향 수심 측정기가 없던 시절의 수심 측정에 대해서는 https://nasica1.tistory.com/284 참조)  수심을 재어보니(took soundings) 약 120 피트(37m)가 나왔는데, 조금 후 다시 재어보니 90 피트(28m)가 나왔습니다.  즉 육지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육지 인근에는 암초나 모래톱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까딱 하다가는 그런 곳에 부딪히 배가 산산조각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선원들은 즉각 고물 쪽으로 닻을 4개나 던져 일단 배를 멈춰 세웠습니다.  날이 밝아야 육지가 어디쯤에 있는지 볼 수 있으므로 일단 새벽이 될 때까지는 정지해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27:28~27:29)

그런데 이때 왜 이물 쪽에는 닻을 던지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일부 선원들이 이물 쪽에서도 닻을 던지려 하면서 갑판 위에 있던 쪽배를 슬그머니 바다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던 이가 있었으니 그 배의 오지라퍼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 선원들은 닻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쪽배를 타고 육지로 달아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이 부분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쪽배를 타고 육지로 향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일이거든요.  제가 선원이라면 일단 그냥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바울의 눈에 그들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곧장 로마군에게 선원들의 행동을 고자질했습니다.  "저것들이 자기들끼리만 살려고 쪽배를 타고 도망치려 합니다.  저것들이 없으면 배를 몰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 모두 물에 빠져 죽습니다 !"  그 신고를 받은 로마군들은 선원들을 제압하고는 그 쪽배와 연결된 밧줄을 끊어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마 이때 선원들의 심정은 바울을 정말 찢어죽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27:30~32)

 



날이 밝을 때 즈음 바울은 또 나섰습니다.  벌써 14일쨰 다들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힘이 없는데, 이제 살아남으려면 다들 음식을 들라고 권하며 스스로도 빵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뒤 쪼개어 먹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무리 폭풍이 불어닥친다고 해도 왜 선원들 뿐만 아니라 승객들조차도 다들 아무 것도 안 먹고 쫄쫄 굶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없습니다.  당시 항해가 굉장히 긴 것도 아니었으므로 배에는 신선한 빵과 포도주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을 것이거든요.  가능한 설명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폭풍이 거세어 승객들이 뱃멀미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설명은 좀 더 복잡합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3단노선의 경우엔 배 위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좁은 배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므로 배에서는 취사를 하고 식사를 할 공간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이든 저녁이든 식사를 하려면 배를 해안가에 끌어올리고 그 옆에서 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3단노선이 아니라 돛으로 운항하는 화물선이었습니다.  아무튼 선상에 화덕을 갖추고 고기를 삶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빵과 포도주 정도의 간단한 식사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하루짜리 항해를 생각하고 빵을 넉넉히 싣지 않고 출항했다가 배가 폭풍에 떠내려가는 상황이 되자 얼마나 표류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선주나 키잡이가 '나중에 비상식량으로 먹을 수 있도록 빵을 먹지 말고 아껴두라'고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 성경 학자들은 바울이 파선을 앞두고 빵을 쪼개어 먹은 이 행위를 일종의 성찬식(eucharist)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여기서는 패스하겠습니다.  

 

또 약간 의아한 점은, 37절에야 비로소 이 배에 탑승한 인원의 수가 밝혀지는데 그 수가 무려 276명입니다.  이 정도 인원수는 19세기 초의 영국 해군 제5급 프리깃함, 즉 1000톤 급의 상당히 큰 군함에서나 가능한 인원수입니다.  그나마 원래 군함은 전투원과 예비 승조원 등 화물선에 비해 굉장히 많은 수의 인원을 태웠기 때문에 300명 가까이 태웠던 것이고, 민간 화물선의 선원 수는 훨씬 적었습니다.  훨씬 크기가 작은 로마 시대의 500톤급 화물선에 그렇게 많은 선원이 필요할 리는 없고, 또 설령 백인대장 휘하 병사 수가 정말 100명 꽉 채워서 다 있었다고 해도 너무 많은 인원수입니다.  아마도 이 화물선에는 로마군 이외의 승객들도 꽤 많이 태웠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것도 설명이 안 되는 것이, 걸어서 가도 되는 거리인 '아름다운 항구'에서 포에닉스로의 여행을 굳이 위험한 바닷길로 가고자 하는 승객이 100명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일부 헬라어 원전에서는 이 수를 69명 또는 70명이라고 기록한 것도 있는 모양이던데, 사실 이 숫자가 더 말이 되는 숫자이긴 합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누가복음 원전에서는 276명으로 나옵니다.  (27:33~27:38)

자, 이제 빵까지 먹은 이들의 눈 앞에 드디어 날이 샙니다.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요 ?  저는 뭐 더 재미있게 쓸 이야기가 없으므로 그 결말이 궁금하신 분들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27장 38절부터 44절까지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끝~!

 




Source :  https://www.simplybible.com/dmaps.htm
https://graceofourlord.com/tag/mysia/
https://www.conformingtojesus.com/charts-maps/en/paul%27s_journey_to_rome_map.htm
https://www.jw.org/en/publications/books/bearing-thorough-witness/preaching/paul-shipwreck/
https://www.jw.org/en/publications/magazines/watchtower-no5-2017-september/did-you-know/
https://www2.rgzm.de/navis/Themes/Commercio/CommerceEnglish.htm
https://en.wikipedia.org/wiki/Rating_system_of_the_Royal_Navy
https://en.wikipedia.org/wiki/Sea_anchor
http://bibleencyclopedia.com/goodsalt/Acts_27_Paul%27s_Shipwreck.htm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Acts+27&version=TPT



Uncharted 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차트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령 의사들도 환자 기록을 보면서 '차트'라고 부르고, 저같은 직장인은 프리젠테이션용 도면이나 표를 차트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원래 차트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은 해도라는 뜻입니다.  즉, 육지에서의 지도는 map이라고 부르지만, 바다에서의 지도는 chart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uncharted라는 말의 뜻은 '해도가 작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흔히 미지의 영역을 뜻할 때 uncharted waters라고 합니다.  해도가 작성되지 않은 바다라...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경쟁이 전혀 없는 블루 오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uncharted라는 형용사는 기본적으로 '위험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는 겉에서 보면 그냥 끝없는 소금물로 이루어진, 평면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길도 없어 보이고, 당연히 지도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바닷물이 푸르다고 하지만, 사실 지역이나 날씨에 따라서 바닷물의 색깔은 다 다릅니다.  영어로 된 해양 소설을 보면, 바다를 표현할 때 grey sea (잿빛 바다)라든가 wine dark sea (검붉은 바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뜻하는 바는, 대부분의 바다는 몰디브같은 특수한 곳을 빼고는, 그 바닥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다 속이 다 저렇게 훤히 들여다보인다면 해도는 필요없겠지요)



위에서 말한 차트, 그러니까 해도에는, 해안이나 섬의 모습 뿐만 아니라, 주요 항로의 바닷속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해양 활동이 왕성하지 않은 곳에서는 이렇게 바닷속 깊이가 묘사된 해도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있는데 제가 모르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은 기껏해야 수면 아래 깊이가 1~2미터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라면, 굳이 해도가 없어도 어떤 곳은 위험한 항로인지 대략 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의 대양 항해선은 그보다 더 깊은 홀수선 아래의 깊이가 더 깊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전함인 74문의 함포를 장착한 3급 전함의 경우, 홀수선 아래 깊이가 약 7~9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간혹 가다 있을 수 있는 암초나 얕은 모래톱이 선박의 항해에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1913년에 최초로 특허 등록된 바 있는 음향 수심측정기(echo sounding) 등의 신기술을 이용하여 해도가 매우 정밀하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GPS를 이용해서 선박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의 대형 상용 선박이 얕은 모래톱에 덜컥 좌초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18~19세기의 군함에서는 어떻게 해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바다를 헤쳐나갔을까요 ?



(원래 echo sounding이라는 기법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막기 위해 독일에서 개발된 것인데, 결국 빙산 탐지에는 무용지물이었지만 수심 측정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증명되었고, 이미 1920년대에 대서양 해저 지도 작성에 이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인간 수심측정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름하여 leadsma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lead는 리드라고 읽는 것이 아니고 레드라고 읽습니다.  즉, 납덩어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수심측정원, 측연수(測鉛手)라고 번역됩니다.  이 leadsman은 힘든 군함 생활에서도 매우 힘든 역할이었습니다.  항해 중에 항상 수심 측정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므로, 따로 leadsman의 역할만 수행하는 병사가 따로 있지는 않았고, 주로 midshipman 같은 초급 장교나 믿을만한 수병 중에서 돌아가며 이 고역을 수행했습니다.

이 측연수라는 역할이 왜 고역인지는 혼블로워 시리즈 중 'The Commodore' 편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Commodore 초판본의 표지입니다)

 


Commodre by C.S. Forester (배경 1812년 발틱해) --------------

"깊은 14 (By the deep fourteen) !" 측연수가 외쳤다.

혼블로워는 측연수가  쇠사슬에 매달린 채 숙련된 강도로 납덩이를 저 앞으로 던지고는, 전함이 그 위를 통과하면서 거기에 달린 줄이 수직으로 될 때 깊이를 읽어내고, 줄을 끌어당겨 다시 새로 던질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작업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쉴 틈 없이 계속되는 고된 노동이었다.  게다가 측연수라는 직책은 100피트 (약 30m) 길이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밧줄을 계속 당겨야 했으므로, 온몸이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혼블로워는 하갑판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저 남자는 옷을 말릴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는 펠류 함장의 프리깃함 인디퍼티거블(Indefatigable)호가 비스케이(Biscay, 스페인의 대서양 쪽 만입니다 : 역주) 만의 거친 파도 속을 뚫고 들어가 프랑스 군함 드롸 드 롬므 (Driots de l'homme, 인권이라는 뜻입니다 : 역주) 호를 파괴하던 날 밤, 당시 사관후보생이던 자신이 수심 측정 작업을 하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뼈 속까지 얼어붙어 손가락에 감각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측정 밧줄에 묶어놓은 표시의 감촉, 그러니까 하얀 캘리코 면포나 구멍 뚫인 가죽, 그 밖의 직물들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젠 해보려고 해도 저렇게 납덩이를 던질 수 없을 것 같았고, 밧줄에 묶어놓은 표시의 임의적인 순서를 기억해낼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부시 함장에게 측연수를 적절한 간격으로 교대시켜 주고, 그들이 옷을 말릴 수 있도록 특별한 시설을 배려해 줄 정도의 인간미와 상식이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코모도어(임시 제독 정도의 계급입니다 역주)인 그가 그런 일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 전함의 내부 살림은 부시 함장의 개인적인 책임이었고, 누구라도 간섭한다면 부당하게 여길 것이 당연했다.  코모도어의 직책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10 (By the mark ten) !" 측연수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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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리깃함에서의 측연수의 작업. 1844년의 그림입니다)



당시에 측연수가 수심을 측정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항해 중인 배에서, 끝에 큼직한 납추를 매단 긴 밧줄을 배의 진행 방향으로 힘껏 집어던지고는 다시 슬슬 잡아 당겨 팽팽함을 유지시킵니다.  배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바닥에 가라앉은 납추에 달린 밧줄이 측연수의 손에서 수직이 되는 순간, 밧줄에 표시된 길이를 읽는 것입니다. 간단해 보이지요 ?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바닷속 지형은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저렇게 던지고 읽고 당기고 하는 중노동을 쉴 틈 없이 계속 해야 했습니다.  괜히 뱃밥 먹는게 힘들다는 것이 아니지요.

둘째, 밧줄이 수직이 되는 순간에 밧줄의 어디까지가 물에 잠겼는지 순간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줄자처럼 밧줄에 길이가 눈금과 숫자로 표시된 것도 아니고, 또 표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칠흑처럼 어두운 야간에는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 위에 혼블로워 회상 속에서 처럼, 길이 표시는 밧줄 중간중간에 특색있는 직물을 묶어서 했습니다.  즉 가죽, 캘리코 면포(calico), 서지(serge, 능직물의 일종)를 2, 3, 5, 7, 10, 13, 15, 17, 20 패덤(fathom, 약 1.83m)의 일정한 간격으로 묶어두어,  밧줄을 당기면서 표시 매듭을 만져보고 그 촉각으로 무슨 직물이 몇번째 간격으로 묶여 있는지만 알면, 지금의 깊이가 몇 패덤인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그 직물의 순서와 그 각각의 간격을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혼블로워가 지금은 못 외운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순서입니다.

 



그렇게 측정할 때, 만약 수심이 정확히 10 패덤이면 "By the mark 10 !" 이라고 외치고, 만약 13과 15 사이면 "By the deep 14 !" 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측연수는 몸도 힘들고, 젖고, 손바닥도 아픈데다 목청까지 아팠겠지요.  정말 고된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만화 기억들 나시는지... 저 뒤의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독특한 페리선에서도 수심 측정을 해야 했습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샙니다만, 미국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배에서는 이렇게 외치는 수심의 깊이 중 일부 숫자는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색다르게 불렀습니다.  마치 테니스 점수에서 0을 love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 숫자 2는 two라고 부르지 않고 twain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심이 정확히 2 패덤 (약 3.6m)일 경우, "By the mark twain")하고 외치는 소리가 강변까지 들렸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라는 것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 그 이름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아셨지요 ?



(우리가 양키 소년 문학 작가라고 무시하기 쉬운 마크 트웨인... 그러나 세계 문학사에서 정말 존경받는 인물이고, 또 다시 읽어봐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측연수가 나서야 할 때는 물론 바다 깊이가 얕다고 알려진 곳을 조심조심 통과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러자면 그래도 어느 정도 바다의 깊고 얕음이 표시된 해도가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드넓고 깊은 바다의 모든 곳에 대해 이런 식으로 해도를 만들 필요는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항구 주변이나 해협 주변, 강의 입구 등에 대해서는 세심한 해도 작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인공위성도 컴퓨터도 없는 시절에 그런 해도가 정확할리 만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수로안내인, 영어로는 파일럿(pilot), 요즘 명칭으로는 도선사입니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인 항구는 당연히 바닥이 얕고, 또 당연히 조석 간만의 차이가 있고, 또 언제 어느 정도까지 물이 차고 빠지는지도 항구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이야기지요.  여러분이 자동차 운전을 배우실 때도, 큰 대로를 운전하는 것보다 주차할 때가 더 위험하고 어렵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특히나 자기가 차를 세우려는 공간의 바로 옆에 엄청나게 비싼 마이바흐 같은 차가 주차되어 있다면 정말 주차할 때 식은 땀이 날 것 같습니다.  선박, 특히 큰 선박도 그렇습니다.  사실 망망대해에서야 바닥이건 다른 배건 걱정할 것 없이 그냥 항해만 하면 되지만, 항구에서는 바닥도 얕고, 예상치 못한 거센 해류가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다른 커다란 배들이 (망망대해에 비하면) 엄청난 밀도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모인 배들은 무척 비싼 것들이고, 배라는 물건에는 브레이크도 없고 선회도 쉽지 않으니까 까딱 잘못하면 대형 사고, 즉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항구에서는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배가 항내에 들어올 때는 의무적으로 수로안내인을 승선시켜 배를 안내하도록 했습니다.  이 수로안내인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아무나 시킬 수는 없었고, 그 항구에서 매우 긴 시간을 보내어 정말 항구 바닥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익숙한 뱃사람에게 면허를 주어 활동하게 했습니다.  수로안내인, 파일럿, 또는 도선사라고 불리는 직업은 자신이 담당하는 항구에 대해 전문가이기도 했지만, 항구를 드나드는 커다란 선박의 운항에 대해서도 전문가여야 했습니다.  작은 어선의 움직임과 커다란 전함의 움직임은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그 항구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정작 도선사 본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움직이는 작은 보트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선박으로 재주껏 올라타는 일이라고 하네요.  이는 18세기나 21세기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가끔 신문에 나오는 직업을 보면, 의사나 변호사가 연봉 킹이 아니고, 항상 변리사, 관세사들과 함께 도선사가 연봉 최상위 직업으로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영업을 하는 해당 사무소 전체의 연봉일 뿐 그 사무소에 고용된 변리사/관세사/도선사 개개인의 연봉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어쨌거나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의 연봉이 그렇게 높았을까요 ?  죄송합니다.  제목은 낚시였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개 도선사는 전직 선장, 그것도 경험 많은 선장 중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일단 분명히 신사 계급에 들어가는 중산층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콧대높은 영국 로열 네이비도 어느 항구건 외국 항구에 들어갈 때는 항상 해당 항구의 도선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고, 또 영국 해군 함장도 도선사에게 예의를 다해야 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 시대에도 상당히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끝으로 도선사에 대해서는 아주 유명한 만화, 즉 캐리커쳐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저런 역사책이나 심지어는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만화입니다.



이 만화는 영국의 전통있는 잡지인 펀치(Punch) 지에 실린 것으로, 기사 작위도 받은 정치 만화가인 존 테니엘(Sir  John Tenniel) 경이 그린 것입니다.  보시면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프러시아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황제 빌헬름 2세와 불화를 일으킨 끝에 재상직을 사임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선장인 빌헬름 1세를 도와 독일 제국이라는 거함을 만들고 운항해온 도선사인 비스마르크가, 철부지 신임 선장 빌헬름 2세의 지휘를 도저히 참지 못해 배에서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었지요.  도선사가 없는 배가 과연 어찌 되었는지는 제1차 세계대전 결과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굉장히 흥미진진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특히 신약의 경우 어떤 사건 발생 이후 10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의 사람들에 의해 씌여 당시의 일상이나 사회상 등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인구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주민들이 출생지로 되돌아가야 했다는 부분 등이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고 논쟁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재판을 위해 팔레스타인 땅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로 호송되던 바울이 난파를 겪은 이야기가 주 내용인 사도행전 27장은 당시 지중해 선박 항해에 대해 많은 부분이 정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만 성경 원저자 혹은 번역자가 너무 밋밋하고 불친절하게 서술을 해놓아서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품이 나올 수준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너무 아쉽지요.  그래서 제가 한번 (불경스러움을 무릅쓰고) 믿음 대신 흥미위주로 풀어서 써봤습니다.

아래는 사도행전 27장을 저처럼 그리스-로마식 표기가 더 익숙한 분들을 위해 인명과 지명을 그리스 역사책에 흔히 나오는 식으로 수정하고 (가령 율리오 --> 율리우스,  아드라뭇데노 --> 아드라미티움) 좀더 이야기식으로 제 임의로 풀어 쓴 것입니다.  사도행전 27 원본은 https://www.bible.com/ko/bible/86/ACT.27.KLB 에서 '현대인의 성경' 버전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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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로마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죄수 몇몇과 함께 로마로 압송되게 됩니다.  로마로 가자면 선박편을 이용해야 했는데, 바울과 죄수들을 로마로 압송할 근위대(the Augustan cohort) 소속 로마군 백인대장(centurion)인 율리우스(Julius)는 케사레아(Caesarea Maritima)에서 배편을 구했습니다.  당시 백인대장 휘하 80여명 정도의 군부대가 이동할 때에는 전세 수송선을 이용하지 않고 그냥 부대장이 알아서 구한 배편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나 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해변의 케사레아는 그다지 번화한 항구는 아니었고, 그래서 이탈리아로 곧장 가는 배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율리우스는 일단 좀더 많은 선박편이 집결하는 에페수스(Ephesus)나 밀레투스(Miletus) 등의 주요 항구가 즐비한 소아시아 쪽으로 가서 배편을 구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구한 것이 아드라미티움(Adramyttium) 시에서 온 어떤 선박이었습니다.  율리우스와 그의 부대는 바울과 죄수들을 이 배에 태우고 출항했습니다.  (27:1 ~ 27:2)

 

(성서에는 '아드라뭇데노'라는 이름으로 나온 Adramyttium의 위치는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 터키 서해안 북쪽 지역입니다.  페르가뭄 바로 위에 있습니다.  다만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바울이 탔던 첫 배인 저 아드라미티움 선박은 거기서 온 배일 뿐 바울이 거기서 출항을 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성서에 '가이사랴'라고 나온 팔레스타인 해안 도시인 케사레아에서 출항했습니다.)

 

 


케사레아에서 시돈(Sidon)까지는 하루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율리우스는 바울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풉니다.  이 항구에 바울을 잠시 내려주고 바울의 친구들을 방문하도록 허락해준 것입니다.  시돈 항에서 출항하여 소아시아 해안, 그러니까 지금의 터키 서해안으로 향하던 이 배는 역풍을 만나게 되어 키프로스 섬과 킬리시아(Cilicia)와 팜필리아(Pamphylia) 앞 바다를 지나 리키아(Lycia) 지방의 미라(Myra) 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백인대장 율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하던 화물선 한 척을 발견합니다.  이 화물선에는 곡물이 실려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나날이 늘어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지중해의 곡창지대인 이집트에서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화물선들이 꽤 많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이집트는 로마에 14만톤의 곡물을 공급했는데, 네로 시대에는 그 양이 42만톤까지 늘어났습니다.  율리우스는 자신의 부대와 바울 등의 죄수를 이 알렉산드리아 곡물 수송선에 옮겨 태웁니다.  (27:3 ~ 27:6)

 

(밤에는 항해를 안 하고 그냥 하루에 12시간만 항해를 한다고 해도, 3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 화물선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범선은 빨라야 5~6노트(약 시속 10km)에 불과했거든요.  이 배는 며칠 동안을 천천히 항진하고 난 뒤에야 고작 300km 떨어진 크니두스(Cnidus) 섬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그나마 여기서 바람이 맞지 않아 곧장 에게 해를 건너 서쪽의 그리스로 향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습니다.  즉 삼모니움(Salmone, Sammonium) 앞을 지나 크레테 섬 남해안의 라사이아(Lasaea, Lasaia, Lisia)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항구’(Kaloi Limenes, Fair Havens)라는 곳에 겨우 닿았습니다.  (27:7 ~ 27:8)


바울과 로마군을 태운 화물선은 여기서 며칠을 보내며 바람의 방향이 유리해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시기가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속죄일(Yom Kippur, the Day of Atonement, 유대인들에게 신성한 날로서 25시간 금식을 행했습니다)까지도 지나버린 다음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지중해는 늦가을부터 겨우내 바다가 거칠어 당시의 원시적인 범선은 항해가 불가능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도 겨울에는 해상 작전이 완전히 중단되곤 했습니다.  4세기 경의 로마인 베게티우스(Vegetius)의 기록에 따르면 지중해는 '몇 달간은 항해하기 매우 좋고, 몇 달간은 위험하며, 나머지는 완전히 불가능'했습니다.  베게티우스에 따르면 항해하기 좋은 기간은 5월 27일부터 9월 14일까지, 그리고 항해하기 위험한 기간은 9월 15일부터 11월 11일까지, 그리고 다음해 3월 11일부터 5월 26일까지였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의 속죄일은 현대적 달력에 따르면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화물선이 '아름다운 항구'에 발이 묶여있던 저 시기는 항해가 불가능한 기간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항해하기 위험한 기간이었습니다.  (27:9)

 

(한글 성경에는 그냥 '금식하는 때도 이미 끝난 시기'라고만 나와 있어서 대체 뭔소리인가 싶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the Day of Atonement, 즉 속죄일이라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욤 키푸르(Yom Kippur)라고 한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달력을 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달력으로는 마치 음력처럼 9월 중순이 되었다 10월 중순이 되었다 왔다갔다 합니다.)

 

 

(당시 지중해를 항행하던 화물선의 모습을 그린 부조입니다.  저렇게 사각돛 1개와 선수돛만 가지고는 바람을 거슬러 항행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위의 부조를 참조하여 복원한 당시 화물선의 모습입니다.  특히 고물 쪽에 양쪽으로 늘어선 노는 전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기 위한 키 역할을 하는 노입니다.  요즘 같은 방향타는 이때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뜬금없이 오지라퍼가 됩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학자였고, 생업으로 배운 기술은 텐트 직공이었습니다.  항해와는 전혀 무관한 landsman, 즉 뭍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지방으로의 전도 여행을 통해 지중해 바다의 특성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승객으로서의 경험이었을 뿐 바울은 전혀 seaman, 즉 뱃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신분은 한낱 죄수였지요.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호송을 책임진 백인대장 율리우스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지금은 바다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배와 화물은 물론 우리 목숨까지 위험하다'라고 경고했습니다.  (27:10)

하지만 백인대장 율리우스도 로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올 때 걸어온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평생 바다에서 밥벌이를 한 선원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은 확실히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쓴 것이긴 했습니다.  율리우스는 당연히 전문가인 키잡이(pilot, helmsman, kybernetes, kubernetes)와 결정권을 가진 선주(captain, shipowner, naukleros)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이들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짧은 거리의 항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했고, 율리우스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키잡이를 한글 성경에는 '선장'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건 번역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서양 문물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말 잘 된 번역이라고 박수를 칠 만한 번역입니다.  원래 그리스 시대부터 당시 선박들에는 두 명의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의 최종 지휘권을 가진 사람은 보통 '선장'이라고 번역되는 나우클레로스(naukleros)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사실 뱃사람이 아니라 그냥 돈이 많은 사업가로서 그 배의 소유주였습니다.  그에 비해 보통 '키잡이'라고 번역되는 쿠베르네테스(kubernetes)라는 사람은 당시 선박의 방향을 조종하는 선미 방향타를 젓는 뱃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기술적 측면에서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이 키잡이가 요즘 기준으로 볼 때 선장이 맞습니다.  (27:11)

 

(요즘 가장 핫한 컨테이너 기술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구글의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인 쿠버네티스의 이름도 바로 이 키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입니다.   구글에서는 쿠버네티스의 로고를 저런 조타륜으로 정했지만, 실제 그리스의 키잡이들에게 저런 조타륜은 전혀 낯선 물건이었습니다.  저런 조타륜은 훨씬 후대에 발명된 것이고 그리스의 키잡이들은 방향을 바꾸기 위해 고물에 장착된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아름다운 항구'에서 출항하여 포에닉스(Phoenix) 항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성경만 보면 키잡이와 선주가 마치 어리석거나 욕심이 많아서 현명한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기가 쉽습니다만, 사실 키잡이와 선주로서는 매우 합리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은 현재도 큰 항구로 발전하지 못한 그야말로 어촌 정도되는 항구에 불과했습니다.  배가 항구에서 안전하게 있으려면 배를 해변 마른 땅 위에 끌어올려두든가 천연적인 것이든 인공으로 쌓은 것이든 거친 파도를 막아줄 방파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은 현재도 큰 항구로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런 천연 방파제가 없는, 작은 어촌 정도되는 항구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겠습니다만 바울이 탄 화물선에는 많은 곡물 외에도 선원과 승객이 모두 합해 276명이라고 된 것으로 보아, 꽤 큰 배였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18세기 영국 해군 기준으로도 200~300명의 승조원을 태운 배는 적어도 700톤에서 1400톤 정도 되는 제5급함, 즉 대형 프리깃함에 해당하는 배였거든요.  물론 수십 문의 쇳덩이 대포들을 싣고 무보급으로 6개월 이상 대양에서의 작전이 가능했던 18세기 프리깃함과 기껏해야 지중해 연안만을 간신히 기어다녔던 기원후 1세기 경의 화물선을 비교해서는 안 되겠지요.  당시 지중해를 항해하던 화물선들은 대개 배수량이 70톤에서 150톤 정도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큰 배는 “10,000개의 암포라(amphora,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담는 토기 항아리) 수송선” 즉 500톤 정도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탔던 화물선의 배수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뭍 위로 끌어올릴 정도의 작고 가벼운 배는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즉, 겨울의 거친 파도에 그대로 노출된 '아름다운 항구'에 그 배를 놓아둔 채 겨울을 난다는 것은 그 선주에게는 그냥 망하라는 이야기나 똑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키잡이와 선주는 그 근처에서 가장 가깝고 또 그나마 안전한 항구인 포에닉스로 배를 몰고 가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 두 항구 사이의 거리는 고작 160km 정도로서, 바람만 괜찮으면 해안에 바싹 붙어서 가도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27:12)

 

(설마 이 하루짜리 항해에서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얼마나 큰 사고가 생기겠습니까...만은,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결혼을 할 때는 세번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결혼이 그렇게 위험... 헙 !)

(계속)


Source :  https://www.simplybible.com/dmaps.htm
https://graceofourlord.com/tag/mysia/
https://www.conformingtojesus.com/charts-maps/en/paul%27s_journey_to_rome_map.htm
https://www.jw.org/en/publications/books/bearing-thorough-witness/preaching/paul-shipwreck/
https://www.jw.org/en/publications/magazines/watchtower-no5-2017-september/did-you-know/
https://www2.rgzm.de/navis/Themes/Commercio/CommerceEnglish.htm


오늘은 번외편으로,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아래 댓글과 함께 거기에 대한 제 짧은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절대 '원인'님 생각이 틀렸고 제 생각이 맞다는 내용이 아니며, 그냥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글 중 핵심 부분은 아래 부분입니다.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분이 영국 해군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댓글을 다셨고, 거기에 대해 다시 '원인'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일단 다부가 해상 운송에 의존하여 리보니아(Livonia), 즉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하고 거기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원인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다부가 그런 의견을 개진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는 그것이 바다 경험이 없는 뭍사람인 다부가 뭘 잘 몰라서 내놓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다부의 수륙 병진 작전 계획안을 거부한 것은 이집트에 직접 상륙해보고 또 영국 침공 작전을 끝까지 추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육상부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고, 그와 발맞추어 연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는 수송선단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면 보급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

바다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나 파도의 세기가 제멋대로 변할 수 있으므로, 수송선단이 육상부대와 연락을 유지하며 병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 육상부대와 항상 병진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간중간 적절한 지점에서 랑데부하여 보급품을 하역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

접안 시설이 없는 해변이나 작은 어촌 등에 보급품을 내려놓는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말먹이를 빼고도 20만 대군은 하루에 200톤씩의 보급품이 필요했는데, 한번에 1주일치 씩만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1400톤의 물자를 론치(launch) 보트 등의 대형 보트를 이용해 하역해야 합니다.  론치 보트에 3톤의 짐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해도, 1400톤을 내려놓으려면 배와 해안 사이를 467회 왕복을 해야 했습니다.  20척의 수송선단에서 40척의 론치 보트를 이용해서 하역을 한다고 해도, 보트 1척당 12회 왕복해야 합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수송선 선창에 들어있던 3톤의 짐을 보트에 내려놓고, 그걸 다시 해안까지 300~400m를 노를 저어간 뒤 다시 모래톱 해안에 내려놓으려면 2시간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20척이라는 꽤 큼직한 선단이 하루 종일 정지 상태로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영국 해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  더 큰 문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200km가 넘는 항로에 걸쳐서, 이 짓거리를 7번 이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수십 척으로 구성된 대형 선단 대신, 개별적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하루에 2~3척씩 끊임없이 내보내면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국 해군에는 74문짜리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나 28문짜리 프리깃(frigate)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룹(sloop)함, 브릭(brig)함, 커터(cutter)함 등 다수의 소형 함선도 잔뜩 거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형 함선의 주임무가 적국의 연안을 감시하면서 그런 화물선을 나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치히 항구에 프랑스군이 백여 척의 수송선을 모은다는 소식, 그리고 프랑스군이 해안선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은 반드시 간첩 등을 통해 영국 해군에게 알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영국 해군은 당연히 단치히 항구 근처에 그런 소형 함선으로 레이드 파티를 짜놓고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4.  해안가에 기마 포병대를 다수 포진시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지원하게 하면 영국 해군 소형함 정도는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기마 포병대가 수송선을 따라 해안선을 이동해가며 호위해주는 것은 애초에 도로 사정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기마 포병대가 원활히 이동할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존재한다면, 애초에 굳이 수송선을 띄울 필요없이 그냥 그 도로를 따라 보병대와 치중대를 이동시키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시 포병 기술로는 수백 m 떨어진 바다에 떠있는 소형 함선을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명중시킨다고 해도 당시 기마 포병대가 사용한 8파운드 포 정도로는 소형 함선조차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뛰어난 속도로 적함에 근접하여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적의 군함이나 수송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지 원거리 포격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5. 어쨌거나 해안선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항해한다면 영국 해군을 겁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

 

(1807년 이후 본의 아니게 덴마크 해군의 주력함이 된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 즉 포함(gun boat)입니다.)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소위 '포함 전쟁'(Gunboat War)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1807년의 제2차 코펜하겐 전투 이후, 덴마크와 '포함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소규모 해전은 1807년 영국에게 당한 이후 대형 함정을 모두 잃은 덴마크 해군이 탑승 인원수 70~80명 정도의 대형 포함(gunboat)를 대량으로 만들어 영국 해군 소속의 브릭(brig)함이나 커터(cutter)함 등 소형 함정들과 싸웠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투 중 일부는 거포로 중무장된 해안 요새의 사정거리 안쪽에서 벌어졌는데, 그런 와중에도 영국 해군은 꽤 짭짤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가령 스완(Swan)이라는 이름의 커터함은 원래 정규 영국 해군함정이 아니라 민간에서 임대한, 소위 HMH(His Majesty's Hired) 무장 커터함(armed cutter)이었습니다.  이 배는 12문의 4파운드 포와 2문의 9파운드 캐로네이드 포(carronade, 사정거리가 짧은 대구경 저압포)를 갖춘 배수향 약 130톤 가량의 소형함이었습니다.  스완 호는 1808년 5월 24일 덴마크 보른헬름(Bornholm) 섬 인근에서 덴마크 해군의 130톤짜리 커터 사략선 하벳(Habet) 호와 대결을 벌었는데, 이때 스완 호는 하벳 호 뿐만 아니라 보른헬름 섬의 해안포들로부터도 맹렬한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 해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하벳 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한 것에 비해, 스완 호는 부상자 한 명 내지 않았습니다.  1809년 8월 12일에는 영국 해군 브릭함인 멍키(HMS Monkey) 호와 대형 론치 보트가 덴마크 무장 소형선박들 3척이 수심이 얕은 해안에 얼쩡거리는 것을 것을 습격했습니다.  덴마크 무장 선박들은 아예 배를 모래 해안에 좌초시키며 육지로 탈출했고, 영국 해군은 3척을 모두 나포했습니다.  

 

 

(물론 반대로 영국 브릭함이 다수의 덴마크 포함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위의 그림은 덴마크 측에서 그린 것이지요.)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Gunboat_War
https://en.wikipedia.org/wiki/Hired_armed_cutter_Swan#The_second_Swan


나폴레옹의 기존 작전들의 특징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딱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문어입니다.  그는 휘하 군단들을 문어발처럼 넓게 펼친채 전진하다가, 적 주력부대의 존재가 그 촉수 중 하나에 걸려들면 정말 먹잇감을 건드린 문어처럼 다른 촉수들이 벼락같이 그 방향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멋있어 보이지만, 이런 작전 형태에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분산된 채 전진하다가 강력한 적을 만날 경우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넓게 펼쳐진 촉수들이 정말 재빨리 움츠러들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각 군단들의 기동력이 매우 좋아야 했지요.  원래 나폴레옹 군단들의 행군 속도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습니다만, 그런 그들에게도 이런 작전은 힘에 겨운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의 전투에서도 주요 부대들이 밤새 행군하여 전투 시작 직전에야 전투 현장에 간신히 도착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약점을 무릅쓰면서 촉수를 펼친 문어처럼 휘하 병력을 넓게 전개한 채 전진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정찰기가 없는 시대에는 적 주력 부대의 위치를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나폴레옹처럼 식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것도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전법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주로 활약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비교적 농업 생산성이 좋은 동네라서 식량이 풍부했다고 해도, 10만 대군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어지간한 동네는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로 전날 우디노의 군단이 한 동네의 빵과 밀가루를 탈탈 털어먹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빅토르의 군단이 또 밀어닥쳐서 먹을 것이 없나 뒤진다면, 그건 단순히 그 동네 주민들만의 분노로 끝나지 않고 빅토르 군단의 굶주림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각 부대가 거쳐가는 주요 마을과 도시로부터 비교적 손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군단별로 세심하게 진격로를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812년 여름, 러시아 침공에 나선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뭉쳐진 모습으로 같은 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군단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중앙군을 형성한 채 무리를 지어 진격했습니다.  그 외에는 단일 군단으로는 가장 컸던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약 7만2천과,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Jérôme)이 이끈 베스트팔렌, 폴란드, 작센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4개 보조 군단 총 7만9천이 서로 다른 길로 남쪽 민스크(Minsk)를 향했습니다.  그나마 이들도 결국은 스몰렌스크(Smolensk)부터는 나폴레옹의 중앙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주로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 병사들로 이루어진 막도날(Macdonald)의 제10 군단 3만2천이 좌측 날개를 맡았고,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정도가 우측 날개를 맡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전과 달리 이렇게 밀집된 형태로 행군하게 된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상대해야 할 적의 주력이 바클레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의 제1 서부군과 바그라티온(Bagration)의 제2 서부군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미 나폴레옹이 파악하고 있던 대로, 어차피 러시아 평원에서는 아무 식량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에 따라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두 독일과 폴란드에서 마차로 실어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정말 유명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궤멸 과정을 시각화시킨 미니아르의 도표 원본입니다.  이 도표는 1896년에 처음 나온 것이지요.  미니아르는 프랑스의 토목 기사로서 현대적인 인포그래픽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 쓰인 프랑스어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12~1813년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 병력의 연속적인 손실에 대한 산술적 지도
1869년 11월 20일, 파리, 교량 및 도로 감사관(은퇴)인 M. 미니아르(M. Miniard)가 작성.

병력 수는 색칠된 구역선의 폭, 즉 10만명당 1mm로 표시했으며, 구역선 가로질러서도 명기했다.  붉은 색은 러시아에 진입한 병력 수를 뜻하고 검은 색은 빠져나온 수를 뜻한다.  이 지도를 그리는데 사용된 정보는 M. M. Thiers, de Ségur, de Fezensac, de Chambray 및 10월 28일부터 프랑스군 약제사로 일한 야콥(Jacob)의 미출간 일지 등에서 얻었다.   원정군의 궤멸 과정을 눈으로 좀더 잘 파악하기 위해, 제롬(Jérôme) 대공과 다부(Davout) 원수의 병력은 실제로는 민스크(Minsk)와 모길레프(Mogilev)에서 갈라졌다가 오르샤(Orsha)와 비텝스크(Vitebsk) 인근에서 재합류했지만, 항상 주력 부대와 함께 행군한 것으로 가정했다.)

 

(위 지도는 미니아르의 도표와 실제 지도를 합성한 것입니다.  미니아르의 도표도 실제 나폴레옹 원정군의 위도 경도를 반영하여 만든 것이므로 잘 들어맞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편에서 설명드렸다시피, 나폴레옹의 수송 계획은 기술의 한계와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빗나갈 운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수송 엔진은 말이었으므로 그 연료는 사료였는데, 나폴레옹은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말 사료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이 무섭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여유있게 작전을 하려면 봄부터 러시아 침공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6월 하순까지 기다렸던 것은 사람이 먹을 곡물 뿐만 아니라 말이 뜯어먹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콩이나 곡물도 아니고 그냥 풀이라면 말은 깜짝 놀랄 만큼의 양을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 부대가 지나간 자리는 정말 메뚜기떼가 지나간 흔적처럼, 사람이 먹을 것은 물론 말이 먹을 풀도 금세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후속 프랑스군의 사람과 말은 정말 그냥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병력의 진격로를 좀더 넓게 분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치중부대에 의한 보급이 어려웠는데, 그렇게 병력을 분산시키면 보급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집결된 적의 주력 야전군을 바싹 추격하는 마당에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실패했던 러시아 정복을 너무나 간단히 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투가 이끈 몽골군이었지요.  믿을 만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몽골군은 대략 4~5만의 순수 기병으로 러시아 전역을 평정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처럼 마차를 주요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식량은 함께 몰고다니는 가축에 의존했습니다.  원정군 전원이 유목민 출신 기병이다보니 넓은 지역에 걸쳐 가축들과 말에게 풀을 뜯게 하면서 장기간 작전을 펼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흉내낼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소수 정예로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군이 무서운 이유는 그 활이 강력함보다도 기동력과 보급에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군대가 저런 활동량을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폴레옹이 병력의 수를 확 줄여서 러시아 침공을 개시했다면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유럽 최강의 무적 군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조금씩 질적으로 하향되어갔습니다.  특히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후로는 그 질적 하향세가 매우 뚜렸했습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는 패배한 오스트리아군 못지 않게 프랑스군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 외에 프랑스군의 질적 저하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고 휘하 병력의 대부분이 어린 신병으로 이루어져 있던 부대 전체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자 분개한 마세나가 '저 풋내기들에게 브랜디를 잔뜩 마시게 하고 군기를 보여줘라' 라고 외친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겁에 질렸던 신병들이 마세나의 그런 지휘에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해 결국 승리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제 40만이 넘는 대군이 된 러시아 침공군은 과연 어떤 병사들로 이루어졌을까요 ?  상당수는 다년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대군을 끌어모으다보니 아무래도 신병들의 비율도 매우 높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내의 인적 자원도 많이 고갈되어, 키나 건강 상태, 나이 등에서 1805년이라면 탈락시켰을 젊은이들까지도 마구 입대시켜 충당한 신병들에 대해 많은 지휘관들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40만 대군 중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 중에는 폴란드인처럼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인들처럼 죽지 못해 끌려나온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같은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도 북부인 이탈리아 왕국 병사들은 상당히 우수한 자원으로 평가받았지만 뮈라의 신민들인 나폴리인들은 프랑스 지휘관들으로부터 '애초에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악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축낼 뿐 실제 전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병력은 제외시키고 알짜배기 정예병력만 투입했다면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일단 바투가 상대해야 했던 러시아는 그야말로 동구의 후진국으로서 인구 8~9백만에 무장 병력도 5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알고보면 바투도 소수 정예로 다수의 러시아군을 무찌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인구 4천만이 넘고 20만이 넘는 야전군을 거느린 강대국이었습니다.  바투의 몽골군은 전원이 경기병이라는 특색이라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남들 다 쓰는 머스켓 소총과 그리보발식 야포를 사용하는 평범한 군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검의 숫자가 승패를 판가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과거에 거두었던 승리는 거의 언제나 전투 현장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기기묘묘한 전법을 사용하는 소수 정예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소수 정예에 의한 결전은 나폴레옹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기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초에 러시아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는 정복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런 황량한 나라를 정복해봐야 딱히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부터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대륙 봉쇄령에 다시 참여하여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걸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필요도 없었고 러시아 야전군과 피투성이 살육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낼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고 협상을 하도록 강요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얼마나 되어있건 충성심이 있건 없건 동원가능한 병력은 다 동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한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그런 대군을 먹여살리기에는 자신의 보급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정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개전 이후 3주 안에 러시아군을 크게 꺾어놓고 평화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원정군에게는 24일치의 식량을 지급하여 3일치는 병사들이 몸에 지니고 나머지 21일치는 마차에 싣고 가도록 하되, 네만 강을 건너기 전에는 절대 그 식량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러시아인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병참 준비에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http://www.historyofwar.org/Maps/maps_russia_1812_to_moscow.html
https://www.reddit.com/r/dataisbeautiful/comments/26jy3t/a_rework_of_minards_map_the_first_data/
https://www.awesomestories.com/asset/view/A-Map-of-the-Great-Retreat-from-Russia//1
http://www.historyhome.co.uk/c-eight/france/moscow.ht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Joseph_Minard
https://patrimoine.enpc.fr/document/ENPC01_Fol_10975?image=54#bibnum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2015년도에 개봉한 '빅쇼트'(The Big Shor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크게 돈 버는 이야기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저처럼 돈 없는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2007년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 때 미국 주택시장 대폭락에 베팅해서 큰 돈을 번 사람들에 대한 반쯤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반쯤 다큐멘터리 영화인 이유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는 있지만 실명이 아니라 가명을 쓰고 또 일부 사실은 적절히 각색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크리스천 베일이나 라이언 고슬링 등의 쟁쟁한 주연들이 맡은 거물들 이야기 대신, 어쩌다 주워들은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부실함에 베팅하여 큰 돈을 번 두 젊은 전업 투자자 이야기에 특히 매료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B급 감성에 충실한 B급 인생이라서 그런가봐요.)  영화 속에서는 찰리 겔러(Charlie Geller)와 제이미 쉬플리(Jamie Shipley)라고 나오는 이 젊은이들은 콜로라도의 시골 동네에서 11만 달러(약 1억3천만원)의 조촐한 자기 자본을 가지고 자기 집 차고에 회사 사무실을 차려놓고 전업 투자 생활을 합니다.  말이 좋아서 투자 회사를 세운 젊은 투자자이지, 흔히 저런 젊은이들을 우린 '백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이 11만 달러를 몇년 안에 무려 3천만 달러로 불려놓습니다.  무려 273배입니다 !   이 영화는 이 젊은이들이 서브프라임 사태를 이용해서 그걸 다시 1억3천만 달러로 불려놓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줍니디만, 사실 저는 1억3천만 달러 필요없습니다.  저는 그냥 3천만 달러, 아니 그냥 3백만 달러만 있어도 너무너무 충분할 정도로 소박(?)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11만 달러를 3천만 달러로 불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  거기에 대해서도 영화는 짧게나마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한글 자막을 읽어보니 대체 뭘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설명이 굉장히 짧게 나왔거든요.  TV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때, 자막에 의존하지 않고 원어로 들어보려고 하니 제 영어가 짧아서 잘 못알아듣겠더군요.  결국 인터넷에서 영화 스크립트를 찾아보니 대략 이런 설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전략은 단순하고도 기발했습니다.  제이미와 찰리가 알아차린 것은 이랬어요.  유가증권 시장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옵션 상품을 아주 싼 값에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판단이 틀렸다면 잃는 것도 작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맞았을 때는 아주 크게 벌었지요.  불과 몇년 안에 그들은 11만 달러를 3천만 달러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뉴욕으로 갈 때가 되었지요."

 

 



이 젊은이들의 실제 모델은 Jamie Mai와 Charlie Ledley라는 두 사람으로서, 이들은 서브프라임 위기 이전에 이미 11만불을 (영화와는 달리) 1천2백만불로 불려놓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  영화 속 설명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한 옵션이라면 정말 싼 값으로 살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옵션은 결국 휴지조각이 되고 맙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옵션이란 그냥 로또입니다.  정말 운이 좋아서 옵션으로 한두 번 큰 돈을 버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투자 회사 전체의 원금을 273배로 불리는 것은 운만으로는 불가능할 일일 것입니다.  아마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역시 거기에 대해 설명한 글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지만) 두어건 있었습니다.  

https://www.timelessinvestor.com/2016/06/29/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using-value-investment/

위 포스팅에 따르면, 이들이 11만불을 불려나갈 때 첫번째 기회는 신용카드 회사인 캐피털원(Capital One Financial)의 옵션 매수였습니다.  아마 당시 캐피털원은 뭔가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어서 주가 전망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이들은 캐피털원에 대해 상세히 조사를 하고 캐피털원의 부사장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에, 캐피털원 주식을 2년 뒤에 40달러에 매입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한 장기옵션(LEAPS)을 3달러에 구입했습니다.  이때 투자한 돈은 전체 자금 11만불의 거의 1/4인 2만6천불이었지요.  당시 캐피털원의 주가가 30불 정도였으므로, 2년 후에 캐피털원의 주가가 최소 43불 이상으로 올라있어야 (2년간의 이자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본전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모험적인 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캐피털원은 당국 조사 결과 혐의없음이 밝혀졌고, 결국 이들의 투자 2만6천불은 52만6천불로 뻥튀기 되었습니다.  무려 20배의 수익이었습니다.

이들의 두번째 기회도 비슷한 장기옵션이었습니다.  United Pan-European Cable(UPC)라는 회사의 장기옵션을 무려 50만불어치 구입을 했는데, 이것이 대박을 쳐서 550만불이 되었습니다.  세번째 기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정용 환자 산소 공급기 회사에 2만불어치 옵션을 투자한 것이 300만불이 되었지요.  

이렇게만 보면 너도나도 옵션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옵션은 좀 심하게 이야기해서 해당 회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로또입니다.  어떤 권리증이 2년 뒤에 그렇게 큰 가치를 가진 유가증권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애초에 그런 낮은 가격에 팔 리가 없지요.  돈을 딸 확률이 50%나 된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한 사람은 거기에 전재산의 1/4은 커녕 1/40도 넣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체 저 두 사람은 캐피털원이 혐의를 벗고 주가가 크게 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예측했던 것일까요 ?  또 차고에 사무실을 차린 고작 11만불짜리 애송이 투자자를 왜 캐피털원 부사장이 만나주었을까요 ?

여기에 대해 가장 그럴 듯 해보이는 설명은 아래에 나와 있더군요.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그대로 직역한 것은 아니고 주요 부분만 제맘대로 발췌 편집 덧붙이기한 거에요.

https://www.quora.com/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and-then-130-million-by-using-the-value-investment-method

질문 : Jamie Mai와 Charlie Ledley는 대체 어떻게 서브프라임 이전에 11만불을 1천2백만불로 늘렸던 거지 ?

답 : 그거야 Michael Lewis(영화 The Big Short의 원본이 된 'The Big Short: Inside the Doomsday Machine'라는 책을 쓴 작가입니다)가 그렇게 포장을 한 것 뿐이야.  그 사람 글만 읽으면 차고에 사무실 차려놓고 11만불을 그렇게 뻥튀기하는 것이 쉬워보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Jamie Mai는 뉴욕주립대에서 회계석사학위를 받고 컨설팅 회사인 Ernst & Young에 취직한 뒤 대형 투자은행 감사일을 했어.  그 친구 아빠는 미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투자인수 회사들 중 하나를 20년 이상 운영한 사람이고, 그 다음에 리먼(Lehman) 브라더스 경영진에서 일하기도 했어. 그러니까 Jamie는 부잣집 아들이고 그냥 가족들의 돈 일부로 투자를 했던 거야.  초기 투자금 11만불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좁은 의미에서만 맞는' 이야기라구.  그런 푼돈 날려도 후속 투자금 걱정은 없는 거였어.  그러니까 11만불 어쩌고하는 것은 최초 VaR (Value at Risk, 어떤 투자에 대한 risk 산정을 할 때 Monte Carlo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수치 계산을 하는데 그때 초기 투자금으로 정하는 금액) 같은 거였다구.  Charlie Ledely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걔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거야.

 

(VaR 시뮬레이션의 결과입니다.  1년 후에 대략... 최저 -60%에서 최대 +290% 정도의 수익이 예상된다는군요.  저런 수많은 시나리오에 따른 수많은 반복 계산을 하기 위해 투자금융사에서도 컴퓨팅 파워가 많이 필요합니다.  여태까지는 blade server 형태로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해외에서는 GPU를 이용한 CUDA computing으로 훨씬 싸고 빠르게 처리한다는군요.  그러나 국내 퀀트 분들은 여전히 CPU 방식을 선호하신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과감한 옵션 투자는 혹시 투자가 잘못되어 알량한 자본금을 다 날려도 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설명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특히 저 위에서 언급한 이들의 2번째 기회 때문입니다.  캐피털원 옵션에서 벌어들인 50만불을 모조리 UPC 옵션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은 할 수 없는 투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좀 과장하자면 옵션은 정말 로또거든요.  로또처럼 만기라는 것이 있으니 장기 가치 투자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진 전 재산 50만불, 그러니까 5억원어치 로또를 산다 ?  이건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이 실력은 없고 그냥 집이 부자였던 금수저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금수저라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 돈을 순식간에 다 말아먹는 금수저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들은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매우 훌륭한 옵션 투자를 한 것은 확실하고,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출신에 무관하게 매우 훌륭한 투자자입니다.  

이상이 제가 매우 궁금해하던 영화 빅 쇼트에서의 두 젋은이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좀 시시하지요 ?

 

# 결론 :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개백수 젊은이가 옵션 투자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집안이 부자라면 공부 열심히 하고, 집안이 가난하면 공부 열심히 하는거에 플러스로 돈 아껴서 저축하자.



Source : https://www.springfieldspringfield.co.uk/movie_script.php?movie=the-big-short
https://en.wikipedia.org/wiki/The_Big_Short_(film)
https://www.timelessinvestor.com/2016/06/29/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using-value-investment/
https://www.quora.com/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and-then-130-million-by-using-the-value-investment-method


대체 이렇게 병참을 막대한 규모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도 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보급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요 ?  이것도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 때문에 나폴레옹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일까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보급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는 억울한 누명이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준비에 있어서 무엇보다 보급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다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면 혹시 보급품 쌓아놓을 생각만 했지 운송 수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냐고요 ?  여러분도 생각하시는 것을 나폴레옹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그는 의붓아들인 외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폴란드 전쟁(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오스트리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운송 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데 왜 망했냐고요 ?  결국은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단치히에 쌓아놓았다는 식량이 말을 위한 사료를 제외하고도 40만 대군이 50일간 먹을 분량이라고 했지요.  즉 2천만 명분의 식량을 비축해놓은 셈이었는데, 이게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었을까요 ?  원래 원정 작전에 나선 병사들에게 제대로 보급이 안되는 것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보급이 잘 된다는 영국군에게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1인분에 대해서 규정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원래 하루에 건빵 550g, 쌀 30g (또는 건조 채소 60g 여기서 건조 채소란 주로 콩류), 염장 고기 200g, 그리고 포도주 1/4리터 (또는 브랜디 1/6 리터)를 지급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식당 기준으로 삼겹살 1인분이 200g 정도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의 배도 채우지 못해서 결국 1인분 더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결코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요즘 식빵 1봉지가 대략 450g이니, 바싹 말린 건빵 550g이면 그걸로 배는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까지 생각하면 병사 한명이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하루 1kg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단치히 항구에만 2만 톤의 건빵과 밀가루, 염장 고기 및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병사들의 모습입니다만, 건빵, 그러니까 비스킷(biscuit)의 모양새나 맛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스킷을 먹으며 웃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비현실적이네요.  그림 출처는 https://www.artofmanliness.com/articles/how-to-make-civil-war-era-hardtack/ 입니다.  여기 보면 비스킷을 어떻게 굽는지 레시피가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송하느냐인데, 러시아에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강력한 디젤 엔진을 갖춘 트럭들이 즐비하다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은 트럭과 고속도로가 있다고 해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하면 2만 톤의 식량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3.5톤 마이티 트럭이 5,714대 필요합니다.  이 트럭의 길이는 대략 6.7m인데 앞뒤 차간 거리를 1.3m씩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 트럭들이 주욱 한 줄로 주욱 늘어서면 맨 앞차부터 맨 뒷차까지의 거리는 거의 46km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트럭들을 위한 디젤 연료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또 당연히 있게 마련인 고장에 대비해서 수리 차량도 끌고 가야 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니라 진흙구덩이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군대에게는 정말 현대 3.5톤 트럭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입니다.  디젤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기술이 없다면 물량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난 편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치중대를 편성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총 20개 치중대대의 7,848대 마차(문헌에 따라서는 26개 대대 약 9,300대)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4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의 경우 대략 1.36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7~8천대의 마차가 모두 대형은 아니었지만 그냥 모두 4두 대형 마차라고 가정하고, 또 준비된 마차도 7,848대가 아니라 9,300대라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이 치중대가 실어나를 수 있는 무게는 총 12,648톤에 이릅니다.  40만 대군이 50일 먹을 식량의 최소치인 2만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략 필요량의 60%에 달하는 막대한 수송량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러시아가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틀림없이 식량을 일부라도 현지 조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24일에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침공을 시작한 것에는 날씨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곡물 추수기가 대략 8월~10월이라는 것도 고려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전히 프랑스군 병사들은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그래도 굶주림으로 궤멸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의 경우 연료 탱크에 150리터의 경유가 들어가고, 연비는 (적재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빈 차인 경우 대략 7km/리터이니,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조건이면 대략 4km/리터로 잡겠습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쾌속으로 하루 30km씩 진군한다고 하면 하루 8리터의 연료를 써야 합니다.  연료 탱크에 들어있는 연료만으로도 18일간 작전이 가능하고, 나폴레옹이 진격을 시작한지 83일 만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니, 5번의 연료 보급를 더 받으면 됩니다. 이 5번의 보급을 위해서는 약 3560톤의 디젤유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트럭이 1,017대 더 필요합니다.  전체 트럭 5714대의 18%에 해당하는 오버헤드입니다.  생각보다 많기는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디젤을 먹는 트럭 대신 풀과 곡물을 먹는 말의 경우로 계산해보면, 화석 연료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은 하루에 대략 9kg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9,300대의 마차에 딱 4마리씩 37,200마리의 말만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시지요.  (현실적으로는 예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치중대에는 4두 마차 외에도 2두 마차가 꽤 있어서 전체 마차 수는 9,336대, 말은 약 32,500마리가 있었고 예비마가 6천마리 더 있었습니다.)  이 말들은 하루에 335톤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83일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27,788톤의 사료입니다.  잠깐만요.  이 마차들이 실어나를 보급품의 총량이 얼마라고 했지요 ?  예, 맞습니다.  12,648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자신이 실어날라야 하는 무게의 2배가 훨씬 넘는 무게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과제입니다.  게다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저 12,648톤의 보급품은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정량의 60%에 불과한 양입니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식량이라는 짐은 사람이나 말이나 계속 먹어치우는 것이므로 여행을 가면 갈 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젤 엔진으로는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를 사료를 먹는 말로 해결하려 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Sharpe 시리즈 중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면 더욱 공감이 가실 겁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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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났냐 ?"라며 말 사료는 대폭 줄이고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짐승입니다.  인간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도 쉽게 죽지 않고, 원래 걸어야 할 거리의 2배를 무리해서 행군해도 잘 버팁니다.  그러나 말은 먹이 부족과 과로에 견디지 못하고 픽픽 죽어 넘어집니다.  보통 전쟁에 나서는 인간은 지든 이기든 80%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만, 말은 6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인간과는 달리 말은 그냥 들판에 널린 풀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훨씬 이른 시기인 봄에 작전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풀이 잘 자란 여름에 작전을 해야 말의 사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모든 기병대원에게는 말 먹이 풀을 벨 수 있도록 낫이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원래 풀을 뜯어먹는 짐승이니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하루종일 정말 풀만 뜯을 때나 통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강제로 걷게 하다가 길가의 풀을 약간 뜯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하루 종일 중노동 시킨 뒤에 얇은 식빵 2조각 던져주고 '사람은 원래 빵을 먹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나마 수만 마리의 말이 통과하는 길이라면, 그 길가의 풀은 순식간에 씨가 마르게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넌지 1달 만에 별다른 큰 전투도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1만 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 소속의 마부 병사와 말입니다.  병사도 불쌍하지만 말은 더 불쌍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치중부대는 언제나 진흙탕이나 다름 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보병 부대를 따라잡는데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동부 유럽은 사정이 훨씬 나빴습니다.  역사가 리엔(Richard K. Riehn)에 따르면 이런 수준이었답니다.

"24일의 폭풍우는 폭우로 바뀌었다.  덕분에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리투아니아의 통행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짐마차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바퀴 축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말들은 지쳐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군화를 잃었다.  이렇게 퍼져버린 짐마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그 둘레를 빙 돌아가야 했고 보급품 마차와 포병대는 아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 진흙구덩이 속의 바퀴자국들은 햇빛에 바싹 마르자 아주 단단한 계곡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말들의 다리가 부러졌고 짐마차들의 바퀴가 깨졌다."

 

(영어로는 이런 진창 길에 난 바퀴 자국은 rut이라고 하던데, 한자어에 나오는 '전철을 밟는다'라는 단어의 전철(前轍)이 바로 앞서 간 마차의 바퀴 자국을 뜻하는 것이지요.  왠지 130년 뒤에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던 어떤 오스트리아 화가 지망생 생각이 나는 한자어네요.)

 

 

이런 진흙탕 도로 위에 1.36톤의 짐을 싣는 4두 마차를 끌고 가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좀더 가벼운 2두 마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두 마차의 수송량은 4두 마차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더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당 수송량이 떨어지면 그렇지않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료 문제는 더욱 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2두 마차 대신 4두 마차 위주로 마차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의 말과 마차, 사료를 다 끌어모았다고 하더라도 치중부대가 나폴레옹의 배고픈 보병부대에게 건빵을 제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한 4년 전에 썼던 글인데, 이번 일본과의 외교 갈등과 연관된 내용이라서 다시 올립니다.  지금 진행 중인 일본과의 외교 갈등의 시작은 강제 징용 당한 개인이 일제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해 개인적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벌어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한국 대법원은 개인이 소송을 걸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고요.  아래 내용 중 '이제 세계 질서가 무너질텐데 그건 다 저 할머니 때문이라는 이야기냐' 라며 재판정이 웃음바다가 되는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이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는 영화는 아무 사전 지식 없이 보면 몇단계의 오해를 거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술 영화인가?' 라고 시작을 했다가 '알고 보니 법정 영화로군!'이라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비로소 이 영화가 '나찌의 희생양인 척 했던 오스트리아의 추악한 과거를 어떤 식으로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즉 과거 청산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2차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던 유태인 가문의 딸인 마리아는 나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탈출해서 미국인으로 40년간 살아 왔습니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녀는, 역시 오스트리아의 유태인의 후손 출신이자 집안 친구의 아들인 젊은 랜디가 변호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부탁을 하나 합니다.  클림트의 유명한 그림인 'Woman in gold'는 사실 자기 집 거실에 걸려있던 자기 집안의 물건으로서, 자신의 백모를 그린 것인데, 나찌에게 강탈당한 것이니 반환 받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부탁하는 쪽이나 부탁받는 쪽이나 지나가다 무심코 꺼낸 이야기에서 시작했다가, 그림 반환을 둘러싼 오스트리아 정부의 태도와 그 과정에서 되짚게 되는 오스트리아와 나찌의 관계 등에서 랜디가 흥분하게 되면서 집요한 법률 공방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몇년 간의 긴 공방 끝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림을 되찾아 오는 것이 결말입니다.

 



이 영화는 제국주의 시절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입니다.  모든 국가와 단체, 그리고 저를 포함한 개개인 모두에게는 감추고 싶은 어두운 과거가 있습니다.  작은 것도 있겠고 엄청난 것이 있을 수도 있지요.  나찌 독일이나 제국주의 일본의 경우처럼, 그 규모의 정도가 크고 심할 수록 그런 추악한 과거를 그 후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제 어설픈 글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보다는, 영화 중간중간의 인상적 대사를 몇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베로 대표되는, 현재의 일본인들이 과거사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한번씩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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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나찌 약탈 예술품 반환에 대해 비엔나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클림트의 초상화에 관련된 연설을 한 뒤 건물을 나오는데, 어느 오스트리아 중년 남자가 다가와 말을 겁니다.

"알트만 부인, 아주 박력있는 연설을 하셨네요.  그런데 말이죠,  그냥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시는 것이 어때요 ?  당신네 민족은 포기란 걸 모르죠, 그렇죠 ?  모든 일이 홀로코스트로만 귀결되는 아닌데 말이죠."


(젊은 시절, 나찌의 추격을 피해 출국하는 마리아와 그의 남편입니다.)



(어쩌다 클림트가 그린 마리아의 백모 아델의 초상화가 비엔나 벨베데어(Belvedere)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그림들은 당신 집의 벽에서 떼어져 조심스럽게 벨베데어 궁으로 옮겨졌어요.  
몇가지 사실은 고쳐져야 했지요.  당신 백모의 이름과 유태인이라는 배경 같은 것들이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지나, 그녀는 그저 단순히, "황금의 여인 (Woman in Gold)"으로만 알려졌지요.
그러니까 그녀의 정체성도 함께 도둑맞은 거에요.  당신네 가족을 강탈하고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지요."

 

(클림트가 아델 백모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델 백모는 1925년 젊은 나이에 병사하여, 오스트리아가 나찌판이 되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재판이 과연 미국 법정에서 열리는 것이 절차적으로 옳은 일인가에 대한 심리가 미국 대법원에서 열리게 됩니다.  이 심리에 미국 정부 대표가 출석하여, '이런 과거사에 대한 재판을 소급적용하여 하게 되면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일본 등 많은 외국 정부와 소송이 빈발할 것이므로 미국의 외교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며 각하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거기에 대해 대법원 판사가 조롱조로 이야기합니다.)

판사 : "그러니까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알트만 부인이 그림 반환 소송을 하게 되면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그 소송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
미국 정부 대표 : "예, 그런 결과도 가능합니다."
판사 : "알트만 부인, 그러니까 부인의 소송이 제기되면, 세계 외교 관계가 붕괴될 것인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부인이 져야 한다는군요."
(판사, 마리아, 방청객 모두 웃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은 고령인 마리아가 늙어죽을 때까지 소송을 질질 끌 작정입니다.)

랜디 : "그들은 절차적인 이유를 들어 이 사건을 기각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그건 '질질 끄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라는 것을 포장해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마리아 : "이 소송건이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내가 늙어죽기를 바라고 말이지 ?"
랜디 : "바로 그거지요."
마리아 : "흠, 그렇다면 아주 장수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보답해야겠네."


(긴 소송에 지친 랜디와 마리아가 오스트리아 박물관 측에 '협상'을 요청합니다.  내용은 적절한 보상과 함께, 그 그림이 강탈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박물관 측 박사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보상금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비엔나에서 열린 최종 심의회에서, 랜디가 마리아에게 그림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오스트리아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이 나라를 몇차례 방문하는 동안, 저는 2개의 오스트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찌 희생자들에게로의 반환을 거부하는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 내 유태인들에게 저질러진 불의를 인정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오스트리아가 있습니다.
(중략)
신사숙녀 여러분, 그러므로 이 자체로서, 이 순간이 역사의 한 장면이 됩니다.  과거가 현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순간이지요.
오랜 과거에, 바로 이 벽 밖에서, 끔찍한 일들이 행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로 다루지 않고,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아넣고, 전가족을 몰살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훔쳤지요.  재산과, 생명과, 그들에게 소중했던 것들을요.  
그 희생자들 중에는 여기 제 소중한 친구의 가족인 블로흐-바우어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오스트리아 국민이자 인간으로서의 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과거의 과오를 인정해주십시요.  
단지 마리아 알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오스트리아를 위해서요."


(오스트리아의 양심파 기자 후베르투스 역을 맡은 배우는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전에 소개드린 바스터즈 영화에서 여주인공 쇼샤나를 짝사랑하는 독일군 저격병이더군요.  원래 진짜 독일 배우인가봐요.  나중에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제모라는 비운의 악당으로도 출연하지요.)



(후베르투스(Hubertus)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 1인 잡지사 기자가 이 소송 내내 마리아와 랜디를 자원하여 돕습니다.  왜 이렇게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제1급 국보라고 할 수 있는 클림트의 'Woman in glod'를 가져가려고 하는 유태계 미국인들인 자신들을 돕는지에 대해, 후베르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 아버지는 아주 대단한 분이셨어요.  제가 어릴 때, 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배했지요.  커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어요.
제가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나찌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제3 제국의 열렬한 추종자였어요.  
저는 평생,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을 보상하려고 애쓰며 살았어요.  
매일, 제 자신에게 묻지요.  그는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요.  그리고 매일,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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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가 친일파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의 잘못일 뿐, 그 후손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추악한 과거를 감추려 드는 것을 넘어서,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건 마치,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외세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동아 전쟁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 동원 따위는 없었다, 일본은 희생자다' 이런 말들은 일본인 자신들을 당장은 기쁘게 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반성을 모르고 미래를 같이 할 수 없는 믿지 못할 족속이라는 인식을 주변국들에게 주는 자살골이라는 사실을 일본인들도 인식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추악한 일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밝히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추악한 우리의 과거도, 분명히 우리의 일부입니다.  감추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두번 다시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제대로 교육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