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종속된 존재인 주제에, 인간은 항상 미래를 예측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과거를 돌이켜 봄으로써 미래의 일을 조금이라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당장 해볼 수 있는 것이 여러가지 있겠지요.  로또를 사도 되고, 선물시장에서 큰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교통사고나 범죄를 미리 막아 소중한 생명들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몇개 늘어놓고 보니 돈과 생명에 관계된 것들이네요.


미래를 예측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제로 많이 있었고, 또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노력이었고, 또 재산과 인명에 직접 영향이 있고, 지금도 국가적으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붓지만 그다지 신통치 못한 예측을 내는 예언이 있습니다.  바로 일기 예보입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Bic Runga라는 가수가 직접 지은 'Listening for the weather'라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So I'm listening for the weather to predict the coming day

Leave all thought of expectation to the weather man

No it doesn't really matter what it is he has to say

'Cause tomorrows keep on blowing in from somewhere


정말 아름다운 가사 아닌가요 ?  멜로디도 좋고, 무엇보다 저 말레이-중국-마오리 혼혈 가수의 목소리가 정말 매혹적입니다.


전체곡 감상은 https://youtu.be/xEM7v-dh1gE 에서 하세요.)




중국이나 이집트나 고대의 달력 제작자들은 천문을 보고 계절의 변화 패턴을 꽤 정확히 측정해서 달력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따른 천체의 운동은 사실 범우주적인 질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계절 변화는 고대에도 상당히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측정하려는 주된 목적은 농업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계절의 변화가 나일강의 범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으니까 더욱 중요했겠지요.   




(천문학에는 동서양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들 열심히였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비해 날씨의 변화는 농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했고 (내일 폭풍이 분다고 해서 농사 짓던 거 뽑아서 옮길 수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정확한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고고한 별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불안정한 대기 현상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징후를 보고 맞춰야 했으니까요.  따라서 달력 만드는 분들은 고대부터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날씨는 주로 나이든 목동들이나 어부들, 혹은 신경통이 있는 노인들이 경험으로 맞춰야 했습니다.


일기예보가 농부들에게는 그저그런 중요성만을 지녔다면, 어부나 선원들에게는 정말 생사를 판가름짓는 중요성을 지녔습니다.  바다에서, 더군다나 거친 바다에서 인간은 한낱 티끌에 불과하거든요.  정확한 일기예보가 가능하다면, 폭풍이 예상될 때 출어를 하지 않으면 되니까 많은 어부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이미 대양을 항해 중인 상선의 경우 폭풍이 예상되는 해역을 피해서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자기가 직접 저 배위에 올라탔을 경우엔 그렇게 멋있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생사 및 많은 돈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위한 과학적인 노력은 컴퓨터나 인공위성 발명 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나폴레옹 시절 당시 가장 그럴 듯한 방법은 다름 아닌 압력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 다들 기억하시지요 ?)




우리가 중학교에서인가 초등학교에서인가 배웠던 것 중에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가 있지요.  이 수은 기압계는 토리첼리가 17세기 중반에 기압 연구가 아니라 원래 '진공 상태'의 생성을 위해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그 실험 와중에, 토리첼리가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기압과 상관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기압계로 사용되게 된 것이지요.


기압과 날씨와의 상관 관계에 대해 누가 정립을 했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사람들은 고기압이면 날씨가 좋아지고, 저기압이면 날씨가 나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기예보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작은 기압계를 가지고 날씨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괴테입니다.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젊은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배경을 그린 독일 영화를 봤는데 정말 재미있더군요.) 




이것을 널리 보급...이라기보다는, 독일 전역에 널리 알린 사람은 다름아닌 괴테였습니다.  괴테는 문필가, 화가, 과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한 천재였습니다만, 1820년대 초에는 기압 연구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래 그림과 같은 작고 예쁜 유리 기압계가 '괴테 기압계' 또는 '괴테 장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장치를 만든 것은 괴테가 아닌, 무명씨라고 하네요.) 




(와, 이쁜데요 ?)




이 기압계의 원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이렇게 색깔이 든 물을 집어 넣은 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유리병에서, 외부와 통하는 구멍은 좁은 주전자 부리 끝 뿐입니다.  주전자 몸체에 해당하는 큰 유리방의 위는 공기가 아니라 진공 상태입니다.  외부 기압이 높아지면 주전자 부리에 든 물이 압력을 받아 그 수위가 내려가고, 반대면 올라가지요.


이 기압계에는 보시다시피 눈금도 없고, 또 일정한 규격도 없기 때문에, 지금이 1기압 위인지 밑인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날씨 예측에는 어느 순간의 기압 절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압이 높아지고 있는지 낮아지고 있는지, 그 변화량이 중요했거든요.  특히 그 변화 속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약 주전자 부리 속의 수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면, 기압이 신속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는 곧 비나 폭풍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군함의 함장실에도 이런 형태의 기압계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함의 함장이야말로 그런 날씨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요즘도 이런 액체를 이용한 가정용 기압계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는 당연히 아니고요 (수은의 위험성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Amazon 같은 곳에서 weather glass를 검색하면 파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괴테 기압계, 또는 weather glass라고 불리는 물건은 실내 장식용으로도 꽤 괜찮거든요.




(이것이 현재 아마존에서 팔고 있는 weather glass 입니다.  52.5 달러에 팔고 있군요.) 




하지만 이런 물이 든 유리 기압계는 건물 안이나 선박에서 사용하기엔 어떨런지 몰라도, 야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휴대하기엔 너무 불편했습니다.  가령 야전에서 작전 중인 장교나 양떼를 모는 양치기에게는 깨지기 쉽고 물이 새나가기 쉬운 이런 기압계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의 아네로이드 기압계입니다.  Aneroid라는 단어는 정말 처음 듣는 단어군요.) 




그러다가 1843년, 루시앙 비디(Lucien Vidie )라는 프랑스 발명가가 내부가 진공 상태인 금속판의 변화와 스프링의 힘을 이용해서 기압을 눈금으로 나타내주는 장치, 즉 아네로이드 기압계(aneroid barometer)를 발명해냅니다.  이 아네로이드라는 말의 뜻은 '액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장치의 묘미는 그 눈금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뻑뻑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느 순간의 절대 기압 수치보다는, 그 변화량이 날씨 변화에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매시간마다 이 기압계를 꺼내서 읽고 그 수치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압계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좀 뻑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늘이 당장은 움직이 않다가, 기압계를 꺼내들고 탁탁 한번 치면 비로소 바늘이 움직여서, 그 바늘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쉽게 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집마다 온도계는 혹시 있을지 몰라도, 기압계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이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미니 기상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쥘 베른느 소설 카르파티아 성.  내용은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카르파티아 성 (Le Cahteau des Carpathes, 쥘 베른느 작, 배경 19세기 중반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  ------------------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산골에서 양치기 노인과 유태인 행상이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거 말입니까 ?"  유태인은 두 손으로 온도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이건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가르쳐주는 기계랍니다."


"흐음, 그거라면 나는 잘 알고 있지.  내가 홑옷만 입고도 땀을 흘리는지, 외투를 입어도 추운지를 보면 돼."


과학 문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양치기에게는 물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그럼 바늘이 달린 이 시계는 ?" 그는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가리켰다.


"그건 시계가 아니라 내일 비가 올지 날씨가 갤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랍니다."


"정말 ?"


"그럼요."


"그래 ? 하지만 그 값이 1 크로이처 밖에 안 된다 해도 나는 필요없어." 프리크가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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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노인 프리크는 당연히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필요없었습니다.  양치기로 잔뼈가 굵은 노인은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의 모습과 변화만 봐도 날씨를 짐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저 유태인 행상은 사람을 잘못 만난 거지요.


하지만 쥘 베른느(예,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를 쓴 그 사람입니다)의 소설 속에서 나오듯이, 당시로서는 유럽의 시골 깡촌이었던 트란실바니아 촌구석까지 행상들이 시계, 온도계와 함께 기압계를 팔고 다닐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인기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예보와 관련해서는 주로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 프랑스인들이 많은 공헌을 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일기예보 비스무리한 것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프랜시스 보퍼트(Francis Beaufort) 경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그 선조는 원래 프랑스에서 위그노 탄압 때 아일랜드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14살 때 동인도 회사의 상선에서 뱃일을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 해군에 투신, 미드쉽맨을 거쳐 22살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영광의 6월 1일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고, 적 항구에 침투조를 이끌고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해 들어가 적 군함을 탈취해 오다가 큰 부상을 입는 등, 실전 경험도 많았습니다.




(이 온화해 보이는 신사가 한때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과 혈투를 벌였던 보퍼트 경입니다.)




하지만 이 양반은 기본적으로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에 정진했던 사람으로서, 해군 생활에서 가장 큰 업적은 남미 및 터키 등 여러 지역의 수로도/해도를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왕립 학회, 왕립 천문학회, 왕립 지리학회의 위원직을 맡아 여러 과학자들의 후견인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노년에는 제독의 지위에도 오르고,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함장직에 오른 사람은 결국 일찍 죽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무조건 제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배쓰(Bath) 기사 작위도 받는 영예를 누립니다.


하지만 보퍼트 경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보퍼트 경이 바람의 세기를 표시하는 방법을 최초로 고안해서 널리 쓰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보퍼트 풍력 계급 (Beaufort Wind Force Scale)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거 중학교 때 배웠는데, 불행히도 학교 교과서에서는 보퍼트라는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음표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를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들 나시는지 ?)




보퍼트 경의 이름을 역사에 남게 한 두번째 이유는 바로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라는 후배를 양성해낸 것입니다.  이 피츠로이라는 사람도 영국 해군 장교였고 (보퍼트와는 달리 태생이 귀족이었습니다) 바로 찰스 다윈을 태우고 갈라파고스 제도로의 항해를 했던 비글(HMS Beagle) 호의 함장이었습니다.  불행히도 피츠로이 함장은 자기가 초청해서 함께 항해한 과학자인 찰스 다윈이 그런 '신성모독적인' 이론을 발표한 것에 대해 크게 침통해했다고 합니다.




(이 따분하게 생긴 양반이 피츠로이입니다.  다윈은 이 사람이 가끔씩 불처럼 화를 내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좀 더러운 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람 크기 보면 짐작 가시겠지만 비글호는 유명세에 비해 매우 작은 측량선에 불과했습니다.)




피츠로이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비글 호의 함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사람이 일기예보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이 삶은 보퍼트의 후원을 받아 1854년 통상 위원회의 기상 통계관(Meteorological Statist to the Board of Trade)이라는 새로운 부서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현대 영국의 기상청이 됩니다.  특히 피츠로이는 비글 호의 항해 도중에 폭풍 기압계(storm glass)라는 독특한 기압계를 고안했다고 합니다.  이 기압계는 당시 영국의 여러 항구에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폭풍이 예상될 때는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여 많은 어부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피츠로이의 storm glass입니다만, 그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는 좀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기압계라는 물건이 완전히 밀봉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의심스럽지요 ?) 




1859년 영국에 몰아닥친 끔찍한 폭풍의 피해를 겪은 후, 피츠로이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것을 피츠로이는 "forecasting the weather"라고 불렀고, 이것이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는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전보를 통해, 영국 곳곳에 설치된 육상 관측소로부터 수집된 기상 정보를 받아 날씨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결과 1860년 타임즈(The Times) 지에 최초로 일기예보가 발행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일기예보는 수퍼컴퓨터를 이용한 복잡한 수학적 모델링 계산을 거쳐 발표됩니다.  이런 수학적 모델에 의한 일기예보는 1922년에 루이스 리차드슨(Lewis Fry Richardson)이라는 영국 수학자가 최초로 고안되었으나,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던 관계로 실천되지 못했고, 1955년 이후에야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집에 애들이 있다면, 괴테 기압계 같은 것 하나 정도 걸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애들에게 과학 공부도 시키고, 예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애쓰시는 기상청 직원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일기예보도 어차피 그다지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La Famille Bélier' (벨리에 가족)이라는 2014년도 프랑스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국내 케이블 TV에서 '미라클 벨리에'라는 제목으로 방영해줄 때 아무 생각없이 보게 되었지요.  나중에라도 혹시 기회가 된다면 꼭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진짜 재미있습니다.  줄거리를 한 줄 요약하면 '청각장애인 가족 중 유일하게 정상인 사춘기 딸이 노래를 통해 부모와 교감하고 성장한다'라는 것인데, 웃음과 감동이 모두 있는 진짜 가족 영화입니다.


그런데 가족 영화라고 해서 이걸 자녀분과 보시면 그게 또... 좀 민망하실 겁니다.  가족 영화치고는 성적인 내용도 꽤 나오거든요.  저는 관광차 프랑스에 한 일주일 정도 밖에 가보지 않은 프알못에 불과합니다만, 이 영화를 보고 프랑스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해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초딩인지 중딩인지 정도의 어린 남동생이, 누나 친구와 러브러브를 하다가 라텍스 알러지로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사춘기 딸에게 아빠가 '너 때문에 엄마하고 러브러브도 못했쟎아' 라는 핀잔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학예회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도 창녀라는 단어가 나오지를 않나 '그 여자와 10번을 했어' 라는 무용담이 나오질 않나...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어느 장면에서의 엄마의 대사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수화 대사였습니다.)  주인공 소녀인 폴라는 부모 몰래 파리의 라디오 프랑스 오디션을 보기 위해 노래 연습을 하느라 부모 일을 제대로 돕지 못했고, 결국 그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발생하여 가족 모두가 심란한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그때 감정이 북받친 엄마가 울면서 폴라에게 '네가 태어났을 때 너에게는 청각장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울었단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때 '우리 애는 정상이라서 너무 다행이라고 기뻐서 울었나 보다'라고 지레짐작을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이어지는 엄마 대사는 이랬습니다.


"난 청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을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내 딸이 정상인이라니 !"


세상에 !  우리나라 부모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사고 방식 아닌가요 ?  하긴 이 벨리에 가족은 폴라를 제외하고는 남동생까지 모두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또 시골 마을에서 작은 목장을 하며 치즈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서민 가정이지만, 딱히 빈곤에 시달리지도, 전혀 차별을 받지도 않고 또 우울해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아빠는 지역 사회 시장으로 출마까지 합니다.  역시 선진국 프랑스라서 그런가 봐요.




(문제의 그 장면.  여기서 또 놀라운 점은 아빠도 엄마 위로에만 신경을 써서 남편 노릇만 할 뿐, 딸을 야단친다거나 반대로 엄마를 비난하는 등의 소위 가부장적인 모습은 전혀 없다는 것.)



(폴라 옆의 소녀는 그 앞에 앉은 폴라의 어린 남동생과 러브러브를 감행하는 폴라의 친구입니다.)





엄마의 저 대사는 무엇보다 개인을 더 중요시하는 프랑스적인 마인드를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국가나 민족은 커녕 가족이나 자식을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이 없는 모양이에요.  그게 우리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부분이지만, 그게 꼭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제가 살면서 보니까, 이 세상에 진짜 나쁜 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더라구요.  그 누구도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고, 또 희생할 필요도,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사회가 진짜 좋은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개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전에 박통 시절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박통 시절 모든 학생이 외워야했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문구를 보여준다면 '이게 무슨 신박한 개소리인가'라며 비웃음을 당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런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가족이란 그렇게 개인주의만 내세울 수 있는 존재는 아닌가 봐요.  폴라도 가족 중 유일한 비장애인인 자기가 파리로 떠나버리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하나 하며 갈등합니다.  특히 가족들은 모두 청각장애인이니, 폴라가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사가 어떤 것인지 가족은 전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더욱 갈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노래가 꿈인 정상인 딸과 청각장애인 부모와의 본질적 부조화는 학예회에서 가장 극적으로 그려지는데, 이 부분에서 감독의 연출 능력과 대담성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영화 초반부터, 폴라는 어느 남학생과 학예회에서 부를 듀엣곡을 연습하면서 썸을 타는데, 이 노래가 거의 영화의 주제곡입니다.  그런데, 폴라의 엄마아빠가 참석한 학예회에서, 정작 폴라와 남친이 듀엣곡을 부를 때는, 초반 4~5초만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고, 그 뒤부터는 철저하게 엄마아빠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여줍니다.  즉, 무음처리를 해버린 것입니다.  엄마아빠는 딸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없어 답답해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학부모들은 이 한쌍의 노래에 황홀해하고 너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치는데, 엄마아빠는 어리둥절해하며 그저 영혼없는 박수만 따라치지요.  이거 분명히 음악 영화인데, 주제곡이나 다름없는 곡을 무음처리해버리다니, 정말 대담하지 않습니까 ?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주인공 폴라가 라디오 프랑스의 오디션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입니다.  이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은 대부분 70년대의 프랑스 인기 가수 미쉘 사두(Michel Sardou)라는 중년 남자 가수의 히트곡입니다.  오디션에서도 폴라가 사두의 Je vole (영어로는 I fly)이라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자, 심사위원들은 너무 흘러간 노래라고 약간 조소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노래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은 '선곡이 매우 좋았다'라며 칭찬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고요 ?  이 노래를 부를 때 폴라가 어떻게 하는지 아래의 영상을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이 노래 가사를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영화 장면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주인공 폴라 역을 맡은 96년생 여가수 루안(Louane)은 프랑스판 오디션 쇼인 'The Voice'에 출연해서 6~7위 정도를 했습니다.   이 영화에 발탁되어 아름다운 노래 못지 않은 명연기를 펼쳐, 2015년 세자르 상을 수상했습니다.  원래 꽤 복스럽게 생긴 스타일인데 역시 공연용 포스터에서는 날씬해보이는 얼짱 각도로 찍었군요.)




La famille Bélier 2014  "Je vole" (저는 날아가요)

https://youtu.be/9keP-TJ9Rrk


Mes chers parents je pars

Je vous aime mais je pars

Vous n'aurez plus d'enfants

Ce soir


사랑하는 엄마아빠, 저 떠나요

엄마아빠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저는 떠나요

엄마아빠는 이제 아이를 잃는 거에요

오늘 저녁에요


Je ne m'enfuis pas je vole

Comprenez bien je vole

Sans fumée sans alcool

Je vole, je vole


저는 도망치는게 아니라 날아가는 거에요

제가 날아가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담배도 술도 안하지만

저는 날아가요


Elle m'observait hier

Soucieuse, troublée, ma mère

Comme si elle le sentait

En fait elle se doutait

Entendait


엄마는 어제 날 관찰하며

걱정하고 속상해했지요 우리 엄마

마치 그걸 느낀 것처럼요

사실 엄마는 의심스러웠던 거에요

들으면서도요


J'ai dit que j'étais bien

Tout à fait l'air serein

Elle a fait comme de rien

Et mon père démuni

A souri


저는 제가 괜찮다고

아주 차분하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아빠는 그저 힘없이

미소지었지요


Ne pas se retourner

S'éloigner un peu plus

Il y a gare une autre gare

Et enfin l'Atlantique


돌아보지 말아요

조금 더 멀리 보내요

한 정거장, 또 한 정거장 지나

마침내 대서양까지 왔어요


Mes chers parents je pars

Je vous aime mais je pars

Vous n'aurez plus d'enfants

Ce soir


사랑하는 엄마아빠, 저 떠나요

엄마아빠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저는 떠나요

엄마아빠는 이제 아이를 잃는 거에요

오늘 저녁에요


Je ne m'enfuis pas je vole

Comprenez bien je vole

Sans fumée sans alcool

Je vole, je vole


저는 도망치는게 아니라 날아가는 거에요

제가 날아가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담배도 술도 안하지만

저는 날아가요


Je me demande sur ma route

Si mes parents se doutent

Que mes larmes ont coulés

Mes promesses et l'envie d'avancer


떠나며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요

혹시 엄마아빠가 걱정하는지

내가 울고 있는지

내 약속과 발전하려는 갈망을요


Seulement croire en ma vie

Tout ce qui m'est promis

Pourquoi, où et comment

Dans ce train qui s'éloigne

Chaque instant


오직 내 삶을 믿어요

내게 약속된 모든 것을요

왜,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를요

멀어져가는 이 기차 안에서

매순간마다요


C'est bizarre cette cage

Qui me bloque la poitrine

Je ne peux plus respirer

Ça m'empêche de chanter


이 새장은 참 이상해요

제 가슴을 막거든요

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제가 노래할 수 없게 만들어요


Mes chers parents je pars

Je vous aime mais je pars

Vous n'aurez plus d'enfants

Ce soir


사랑하는 엄마아빠, 저 떠나요

엄마아빠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저는 떠나요

엄마아빠는 이제 아이를 잃는 거에요

오늘 저녁에요


Je ne m'enfuis pas je vole

Comprenez bien je vole

Sans fumée sans alcool

Je vole, je vole


저는 도망치는게 아니라 날아가는 거에요

제가 날아가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담배도 술도 안하지만

저는 날아가요


Lalalalalala

Lalalalalala

Lalalalalala

Je vole, je vole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저는 날아가요




이 노래도 좋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는 아래의 En chantant (노래를 부르며)에요.  이것도 물론 사두의 옛 노래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듣고 '아, 정말 프랑스어는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두가 부르는 원곡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라 그냥 저 루안(Louane)이라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좋은 것이더군요.   꼭 들어보세요.  정말 예쁜 노래입니다.  가사는 좀 충격적인 부분도 있지만요.



En chantant - Louane

https://youtu.be/D4L1_DOnJdQ


Quand j'étais petit garçon,

Je repassais mes leçons

En chantant


내가 어린 소년일때

난 공부를 하며

노래를 불렀어


Et bien des années plus tard,

Je chassais mes idées noires

En chantant.


몇 년 뒤에

나쁜 생각을 쫓아낼 때도

노래를 불렀지


C'est beaucoup moins inquiétant

De parler du mauvais temps

En chantant


훨씬 안심이 되거든

고약한 날씨 이야기할 때도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Et c'est tellement plus mignon

De se faire traiter de con

En chanson.


그리고 훨씬 더 귀여워

바보 취급을 받더라도 

노래 속에서라면 말이야

 

La vie c'est plus marrant,

C'est moins désespérant

En chantant.


인생은 더 즐거워

훨씬 견딜만 해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La première fille de ma vie,

Dans la rue je l'ai suivie

En chantant.


내 인생 첫사랑 소녀를

길거리에서 따라갈때

노래를 불렀어


Quand elle s'est déshabillée,

J'ai joué le vieil habitué

En chantant.


그녀가 옷을 벗을 때

난 익숙한 18번 곡을

노래했었어


J'étais si content de moi

Que j'ai fait l'amour dix fois

En chantant


난 기분이 너무 좋아서

사랑을 10번이나 했지 뭐야

노래를 부르며 말이야


Mais je ne peux pas m'expliquer

Qu'au matin elle m'ait quitté

Enchantée.


하지만 난 자신할 수는 없었어

아침에 그녀가 떠나갈때

내게 홀딱 반했 채였는지 말이야

 

L'amour c'est plus marrant,

C'est moins désespérant

En chantant.


사랑은 더 즐거워

훨씬 견딜만 해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Tous les hommes vont en galère

À la pêche ou à la guerre

En chantant.


사람들은 모두 배를 타고 떠나

어선이건 군함이건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야


La fleur au bout du fusil,

La victoire se gagne aussi

En chantant.


총구에 꽃을 꽂고도

승리를 거둘 수 있어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On ne parle à Jéhovah,

À Jupiter, à Bouddha

Qu'en chantant.


여호와나 주피터, 부처에게

말을 걸 수는 없지만

노래할 때는 가능해


Quelles que soient nos opinions,

On fait sa révolution

En chanson.


우리 사상이 뭐든간에

각자의 혁명을 벌이는 거지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Le monde est plus marrant,

C'est moins désespérant

En chantant.


세상은 더 즐거워

훨씬 견딜만 해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Puisqu'il faut mourir enfin,

Que ce soit côté jardin,

En chantant.


사람은 결국 죽는데

그게 정원 옆이었으면 해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야


Si ma femme a de la peine,

Que mes enfants la soutiennent

En chantant.


내 와이프가 슬퍼하면

내 아이들이 그녀를 부축해주길 바래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야


Quand j'irai revoir mon père

Qui m'attend les bras ouverts,

En chantant,


내가 아버지를 다시 보러 갈 때

아버지는 양팔을 활짝 펴고 날 기다릴텐데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야


J'aimerais que sur la Terre,

Tous mes bons copains m'enterrent

En chantant.


정말 그래줬으면 하는데

내 좋은 친구들이 다 모여 날 묻어주면 좋겠어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야

 

La mort c'est plus marrant,

C'est moins désespérant

En chantant.


죽음도 더 즐거워

훨씬 견딜만 해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Quand j'étais petit garçon,

Je repassais mes leçons

En chantant


내가 어린 소년일때

난 공부를 하며

노래를 불렀어


Et bien des années plus tard,

Je chassais mes idées noires

En chantant.


몇 년 뒤에

나쁜 생각을 쫓아낼 때도

노래를 불렀지


C'est beaucoup moins inquiétant

De parler du mauvais temps

En chantant


훨씬 안심이 되거든

고약한 날씨 이야기할 때도 

노래를 부르면 말이야


Et c'est tellement plus mignon

De se faire traiter de con

En chanson


그리고 훨씬 더 귀여워

바보 취급을 받더라도 

노래 속에서라면 말이야








고대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는 당시 병사들이 어떤 것을 먹고 마셨는지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서사시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BC 3~4세기의 페르시아 전쟁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까마득한 옛날인 BC 11세기 정도의 청동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즉 도리아인들의 침공 이후 형성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양분되는 그리스 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등장 인물들의 갑옷과 투구, 창 등이 모두 청동으로 되어 있지요.  다만 철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까지는 아니고, 철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직 철기시대 초창기라서 당시의 철(iron)에는 탄소 함량이 너무 많아 단단하기는 하지만 깨지기 쉬운 무쇠(cast iron)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철은 무기가 아니라 주로 농기구나 도끼, 사슬 등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무기로도 쓰이기는 했는데, 정교한 검이나 창날이 아니라 큼지막한 철퇴 같은 것으로 썼나 봅니다.  가령 파트로클루스의 장례식에서 여흥으로 벌어진 스포츠 경기에서, 아킬레스가 각 경기의 우승자를 위해 내놓은 상품 중에는 다음과 같이 무쇠덩어리가 나옵니다.  


다음으로 아킬레스는 에에티온(Eetion)이 던지던 커다란 쇳덩어리를 상품으로 내걸었다.  아킬레스는 에에티온을 죽인 뒤 그의 다른 소지품들과 함께 그 쇳덩어리를 빼앗아 배에 실어놓았었다.  이제 그는 다음 경기를 발표하며 참가를 유도했다.  "이 경기의 승자는 5년 간 충분히 쓸 만한 양의 무쇠를 갖게 될 것이오.  이 무쇠 덩어리만 있으면 그의 농장이 아주 외딴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쇠를 구하기 위해 쟁기꾼이나 목동을 마을로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 나오는 병사들의 식사는 주로 육류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나 굴을 따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생선 등의 해산물을 전혀 먹지 않았던 것 같지는 않은데, 확실히 일리아드 시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생선을 즐겨먹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건들의 배경 무대가 모두 바닷가인데도 불구하고, 장군들과 병사들의 식사 장면에 생선이 나오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언제나 돼지나 소를 잡아 그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직화구이로 구워먹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넓적다리 뼈를 잘라내어 두 겹의 비계로 감싸고는 그 위에 날고기를 몇조각 얹었다.  크리세스가 그것들을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포도주를 부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근처에는 손에 끝이 5개의 가지로 갈라진 꼬챙이를 든 젊은이들이 서있었다.  넓적다리 뼈가 다 타자 그들은 먼저 안쪽 고기를 맛보고는 나머지를 작게 잘라 꼬챙이에 꿰어 불에 잘 익힌 후 꼬챙이에서 빼냈다.  일을 마치고 잔치가 준비되자, 그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모두가 배불리 먹도록 충분한 양을 받았다."






원래 적은 고기를 여럿이 나눠먹기 위해서는 주로 고기를 삶아 그 국물까지 먹어야 합니다.  일리아드 내에서 상품으로 주어지는 것들 중에는 큰 솥도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삶아먹는 요리도 분명히 했을 것 같기는 한데, 실제로 이렇게 병사들이 식사할 때 솥을 이용하는 국물 요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지 않는다고 당시 사람들이 그런 국물 요리를 전혀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빵이나 죽 등 곡물로 만든 음식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묘사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아킬레스에게 살해될 위험에 놓인 트로이 측의 리카온이 아킬레스의 무릎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내가 포로로 잡힌 뒤 처음 빵을 쪼갠 곳이 바로 당신의 장막 안에서였다' 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식사를 하는 것을 '빵을 쪼갠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당시 병사들의 주식은 곡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이한 것은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에서 고기를 구운 뒤 그 위에 보릿가루를 뿌려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입맛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별다른 양념이나 향신료가 없던 시절에는 그런 곡식가루도 고기 맛을 내는 조미료 같은 것으로 썼던 모양입니다.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만을 읽은 분들께서는 고전적인 그리스 시대의 생활상이나 전쟁의 양상에 대해 매우 그릇된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헤로도투스의 역사 앞부분에서도 자세히 언급이 되어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헤로도투스 시대에서조차도, 일리아드를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은 우리와는 정말 다르게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실 알고보면 헤로도투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호머에 나오는 아킬레스 등의 인물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지요.   아무튼 여기서는 음식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지요.


먼저, 그리스는 먹을 것 부분에 있어서는 그다지 풍요로운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지형이 대규모의 밀 농사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바다에서 엄청난 어획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흔히 그리스는 해안선이 길기 때문에 수산물이 적지는 않았지만, 사실 어획량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바다의 밀"로 알려졌던 중세의 북해산 청어에 비하면 무척 보잘 것 없는 양의 생선만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그나마 좀 넓은 평야지대이던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애초부터 식량을 자급자족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주로 흑해연안의 비옥한 농업지대로부터의 수입 곡물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먹는 것이 신통치 않았는데, 주로 보리로 만든 마자(maza)라는 이름의, 부풀리지 않은 빵같은 것을 먹었습니다. 이는 빵만드는 방법이 아직 그리스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만들기에 적합한 밀가루가 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밀가루로 만든 이스트로 부풀린 흰빵은 축제 때나 특식으로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자는 대개 보리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확하게 마자는 빵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빵은 가루를 반죽하여 굽는 것인데, 마자는 반대로 보리가루를 불에 볶은 뒤 물로 반죽하여 뭉친 덩어리였거든요.  이건 조금 오래 놓아두면 딱딱하게 굳어 버렸기 때문에, 식사를 할 때는 이걸 포도주나 물 같은 것에 적셔서 거의 죽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우유를 부어 먹는 일종의 시리얼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지요 ?   그러나 이 맛없는 보리빵 마자도 그리스인들은 고맙게 먹어야 했습니다.  맛은 없어도 배를 채울 수 있었거든요.  오죽했으면 페르시아 전쟁 때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군 진영에서 그들의 산해진미를 보고 이렇게 한탄했겠습니까 ?


'이런 욕심장이들을 봤나 ?  이런 산해진미를 먹는 놈들이 우리의 보리빵을 빼앗겠다고 쳐들어 오다니 !'




(보기만 해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보리빵 마자(maza)입니다.)




육류는 정말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육류라는 것은 정말 귀한 것으로, 일반 서민부터 부유층까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었고, 축제 때에나 한번 먹어볼까 하는 음식이었습니다. 전에 인기를 끌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갈리아 인들은 멧돼지 다리를 뜯는 동안 로마인들은 밀가루로 만든 빵과 죽을 선호했다고 씌여있었는데, 정확하게는 로마인들이 고기를 싫어했다기 보다는 없어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대신 생선 종류는 그래도 좀 나은 편으로, 일상적으로 소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맛있는 것, 고기'라고 하면 생선을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전통은 로마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로마인들도 육류는 별로 맛보지 못했고, 생선류를 대신 즐겨 먹었습니다. 케사르가 갈리아 원정의 성공을 축하하며 로마 시민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제공된 음식도 주로 빵과 뱀장어 구이였다고 합니다.




(사진 속의 설명대로 입니다.  식사 때마다 소와 양을 호쾌하게 잡아먹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의 식사 장면과는 달리, 실제 그리스인들에게 고기라는 것은 정말 맛보기 어려운 진미였고, 대개는 물고기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회이든 주어진 자연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스의 경우가 딱 그랬습니다.  그리스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좋든 싫든 무역을 해서 부족한 곡물을 해외에서 사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곡물 값을 치를 만한 것이 뭔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민들이 쫄쫄 굶기에 딱 좋은 지형이었지만 그래도 잘 되는 농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올리브와 포도였습니다.  잘 말리면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한 보리와는 달리 올리브와 포도는 보리보다 맛은 있을지 몰라도 즙이 많고 물러서 장기 보존이 곤란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것들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그리스인들은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내고 포도즙을 발효시켜 포도주를 만들어 수출 상품으로 가공했습니다.  이런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 항아리를 실은 무역선이 부지런히 흑해 연안 지대와 시케리아(지금의 시칠리아), 이집트 등을 오가며 소중한 곡물을 수입해왔습니다.  특히 이미 꽤 많은 그리스 식민지가 형성되어 있던 흑해 북쪽 해안지대는 (지금도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토는 유명합니다만) 지중해 세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서, 이곳과 교역하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헬레스폰트 해협(지금의 다다넬스 해협)은 전체 그리스 도시국가들, 특히 아테네의 밥줄을 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많은 전쟁이 벌어질 운명이었습니다.  현대의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못지 않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곳이었지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주요 경제 활동인 올리브 착유와 포도주 만드는 작업입니다.  'How to survive' 시리즈 그림책을 찍은 거에요.)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인... 아, 우크라이나 땅이라고 하면 안되겠구나...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입니다.  일찍부터 그리스인들은 먹고 살기 어려운 그리스 본토를 벗어나 지중해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변 원주민들을 정복했다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개 주변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습니다.)




지금처럼 비료나 농기계가 없던 시절, 당연히 곡물 생산량은 적었고 가격은 비쌌습니다.  더군다나 증기기관은 커녕 갈레온선도 없던 시절 먼 흑해에서 실어오는 곡물은 더욱 비쌌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는 곡물 가격의 안정을 위해 많은 규제를 두었습니다.  아테네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곡물 수출이 절대 금지되었습니다.  또 절대 다량의 곡물이 수입품이니만큼 일부 곡물만 사재기를 하거나 입항을 지연시키기만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상인들에게는 그게 자유시장경제에 따라 아테네에 부를 가져올 '투자'일 수 있었지만 아테네 민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곡물은 국가가 사들여 공공 곡물 창고에 보관했으며, 또 한번에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곡물은 '50명이 나를 수 있는 분량'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또 이렇게 사들인 곡물을 사적으로 거래하는 것도 엄격하게 제한하여, 어느 누구라도 곡물을 매입한 가격보다 1오볼 이상의 차익을 남기고 되팔수 없도록 했습니다.  당시 가난하고 재주없는 사람들이나 하던 3단 노선의 노젓는 사람이 받는 하루 일당이 2오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느 누구도 곡물 거래로 큰 돈을 벌 수 없게 만들겠다는 '곡물 공개념'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이런 규제가 없었다면 아테네의 많은 시민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을 것이고, 아테네는 지중해의 패권은 커녕 생존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 교역로입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는 그때도 유명했는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나는 곡물이 그리스를 먹여 살렸습니다.)




특이할 만한 점으로, 그리스인들은 포도주에 항상 물을 타서 마셨습니다.  이렇게 포도주에 물을 타마시는 풍습은 특이한 것은 아니고, 중세에도 이렇게 물을 탄 포도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도 샹베르텡 와인에 물을 타서 마셨거든요.  물과 포도주의 비율은 사람마다 틀렸지만 그리스 당시엔 대략 50:50의 비율이었습니다.  어떤 프랑스 학자는 그리스의 포도주는 진득진득할 정도로 진했기 때문에 물로 희석시켜 마셨다고 하지만, 그건 프랑스인들의 포도주에 대한 집착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야기같고, 실제로는 아껴 마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제공할 때, 포도주에 물을 얼마나 탈 것인가는 손님 취향에 따라 각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정했습니다.  그때 포도주에 물을 너무 많이 타면, 손님들은 주인이 너무 인색하다고 비웃곤 했습니다.  또 그리스인들이 물로 희석한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 중 하나는 취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흔히 술을 취하려고 마신다고 하지만, 원래 술에 취하는 것은 매우 볼썽 사나운 일이고 절대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추태입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홍차나 커피, 코카콜라 등 다른 음료가 없었으니 포도주를 자주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포도주 원액 100%를 그대로 마시면 취하는 것도 피할 수 없고 또 건강에도 해로왔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의 어떤 왕은 스키티아인들과 교류하다가 포도주를 물로 희석하지 않고 그대로 마시는 풍습을 배워 그렇게 포도주 원액을 그대로 마시곤 했는데, 결국 미쳐버렸다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의 향연은 저렇게 모두 비스듬히 누워서 노예들이 따라주는 와인을 마시며 주로 수다를 떠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스식 향연을 συμπόσιον라고 하는데, 이는 '함께 마신다'라는 뜻으로서 현대 영어에서는 심포지움(symposium)이라고 합니다.)





(저 손가락에 걸고 돌리고 있는 듯한 접시는 kylix라고 하는데, 납작하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뒤, 저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다가 그 원심력을 이용하여 잔에 약간 남은 포도주 방울을 뿌려 목표물을 맞추는 것이 향연에서의 흔한 게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그리스인들의 향연 모습입니다.  손님들이 손가락에 납작한 술잔 kylix의 손잡이를 걸고 빙빙 돌리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병사들은 무엇을 먹고 마셨을까요 ?  가장 구체적인 묘사는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에 나옵니다. 아나바시스는 1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 용병들이 페르시아 키루스 왕자에게 고용되어 키루스의 형이자 페르시아의 왕인 아르타크세륵세스에 대한 반란에 참전했다 쿠낙사(Cunaxa)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오늘날 이라크 중심부에서 흑해 연안으로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어렵게 어렵게 그리스 접경 지역까지 왔을 때, 당장 먹을 식량이 부족해졌습니다.  여태까지는 어차피 적대 지역이랍시고 약탈로 먹을 것을 구하며 뚫고 왔는데, 이제 페르시아 제국을 빠져 나오니 예전처럼 마구 약탈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용병 중의 한 명이 스스로를 뛰어난 전술가로서 장군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며, 전체 용병단에 대한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해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 '지휘관 취준생'은 정말 먹을 것을 구해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식량을 어깨에 짊어진 짐꾼들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그때 이 '지휘관 취준생'이 마련해온 식량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무명이 보리가루를, 스무명이 포도주를, 세명이 올리브를, 한명은 마늘, 나머지 한명은 양파를 각기 들 수 있는 만큼씩 들고 왔다'




(흔히 키루스의 1만명이라고 불리던 그리스인 용병단의 진격 및 후퇴로입니다.  이들이 도착한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 트라페주스(Trepezus)는 오늘날의 터키 트라브존(Trabzon)으로서,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 가끔 등장하는 터키 축구 클럽 트라브존스(Trabzonspor)의 홈 도시입니다.)




뭔가 상당히 빈약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이 '지휘관 취준생'이 가지고 온 식량은 약 8~9천에 달했던 이 용병단 병사들에게는 1일치 식량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지휘관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그 양이 아니고, 목록입니다. 이 병사들은 행군 중에 빵을 구울 화덕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므로, 이 보리가루로 마자(maza)라는 부풀리지 않은 빵을 만들어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념으로 올리브와 마늘과 양파를 넣었겠지요.  현대적인 식단에서 보자면 채소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도 채소는 별로 먹지 않았답니다.  채소는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들만 먹었으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채소를 싫어했고 건강에도 나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별로 많이 재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로 지방과 전분 위주의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로마군의 식량 목록을 보더라도, 주로 밀과 콩, 포도주, 그리고 양념으로 양파와 식초 이야기만 나오고, 채소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는 물론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병사들은 신선한 채소를 거의 보급받지 못했습니다.  신선한 채소는 병사들이 알아서 '구해서' 먹는 것이지 군대에서 보급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당시 병사들의 특별한 식단이 나옵니다.  일종의 해군용 전투 식량이지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미틸레네(Mytilene) 시를 아테네 함대가 무력으로 점령한 뒤, 그 함대 지휘관은 아테네에 미틸레네 시민들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지 묻기 위해 전령선으로 삼단노선(trireme) 한척을 보냅니다.  이 전문을 받은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답게 민회에서 미틸레네 주민들의 우명을 결정했는데, 비정한 아테네 시민들은 미틸레네의 남자 시민들을 모조리 처형해버리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리라는 명령을 가결한 뒤 현장으로 전령선을 돌려 보냅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 그건 너무 심한 결정이었다는 후회가 뒤늦게나마 몰려온 시민들은, 다시 민회를 열어 앞서 내린 명령을 취소한다는 전령선을 새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 두번째 전령선이 도착이 늦으면 미틸레네 시민들은 모조리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아테네 민회에서는 이 뒤쫓아가는 두번째 전령선에게 특별 보너스까지 걸고 쾌속으로 항해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레스보스 섬에 위치한 미틸레네 시와 아테네와의 거리는 345km로서,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최소 48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삼단노선은 좁고 가벼운 선체에 노수까지 포함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타는 구조라서 24시간 항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어번씩 반드시 근처 해안가에 배를 끌어올려놓고 모닥불을 피워 밥도 지어 먹고 잠도 잤지요.  그래서 항상 해안가에 붙어서 항해했으며 먼 바다로는 어지간해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텔레네로 향한 두번째 삼단노선은 비상 상황에 따라 식사 시간은 물론 밤에도 배를 해안에 대지 않고 교대로 노를 저었습니다.  또 첫번째 삼단노선의 선원들도 자신들이 들고 가는 잔인한 명령서가 꺼림직하여 별로 열성적인 항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두번째 삼단노선이 미틸레네에 도착했고, 미틸레네는 몰살의 참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잠은 그렇다치고, 두번째 삼단노선의 선원들은 어떤 식사를 했을까요 ?  이때 선원들은 배 위에서 보리가루와 올리브유, 포도주를 반죽한 것을 먹으며 노를 저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미숫가루 또는 생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  수천 명의 사람 목숨을 구한 매우 거룩한 식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ource :

Iliad by Homeros (Penguin books)

Anabasis by Xenophon (Penguin books)

How would you survive as an ancient Greek ?

빵의 역사 (하인리히 야콥, 우물이 있는 집)

먹거리의 역사 (마귈론 투생-사마, 까치글방)

https://passtheflamingo.com/2017/05/24/ancient-recipe-maza-ancient-greek-ca-2nd-millennium-bce/

https://en.wikipedia.org/wiki/Olbia_(archaeological_site)

http://gluedideas.com/content-collection/cyclopedia-of-knowledge/Ancient-Corn-Trade.html

https://en.wikipedia.org/wiki/Kylix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111/1095-9270.12144






Bernard Cornwell이 지은 Sharpe 시리즈는 1799년 영국군이 인도 중부 마이소르(Mysor) 지방을 침공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그로부터 3년 정도의 안정기를 지나, 마이소르 지방의 수도인 셰링가파탐이 영국군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인도 군주 하에서 안정화되자, 영국은 다시 더 북부의 마라타 연합이 지배하는 지역을 노립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이 인도 전체를 식민지화하는데는 무려 1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로버트 클라이브가 7년 전쟁 도중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인도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보한 것이 1757년이었으니까, 정말 오랜 세월에 걸쳐 야금야금 먹어들간 셈이지요.  인도 대륙이 정말 크긴 큰가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인 무렵, 영국은 아직도 인도 대륙 일부만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이 이렇게 인도라는 블루 오션을 아무 경쟁없이 야금야금 파먹어가는 동안, 나폴레옹은 해군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도가 영국에게 있어 거저먹기인 블루 오션이었을까요 ?  그렇게 표현한다면 인도 사나이들을 너무 모욕하는 셈이지요.  당시 인도는 정말 수많은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왕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문물, 특히 군사 기술을 많이 받아들여 유럽식 무장을 상당히 갖춘 편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렇게 잘 무장된 왕국들을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이간질로 차례차례 각개격파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어쨌든 압도적인 숫자의 인도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가 비슷하더라도, 영국군의 훈련 및 전술 전략이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아더 웰슬리도 군 생활 초기는 인도에서 시작합니다.  아래 묘사되는 전투는 훗날 웰링턴 공작에게 누군가 '공작께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투는 어느 전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웰링턴이 망설이지 않고 뽑은 아사예 전투입니다.  여기서 웰슬리가 이끄는 영국 정규군 스코틀랜드 연대와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세포이 연대들은 인도 중북부의 마라타(Maratha) 연합군과 혈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의 묘사를 보면, 당시 보병과 포병이 어떤 식으로 전투를 벌였는지 실감나게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Sharpe's Triumph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3년 인도) -------------------------------------


스코틀랜드 연대는 이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관목 그루터기를 짓밟으며 나아갔고, 이제 곧 언덕 능선을 넘어서면 또 다시 인도군 포병대에 노출되면서 대포 사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인도 포병대에게 처음으로 관측되는 것은 두 개의 연대 깃발일테고, 다음으로는 말을 탄 장교들, 그리고는 붉은색, 흰색, 검은색으로 치장된 전체 연대들이 머스켓 소총에 장착된 총검을 햇빛에 번쩍이며 인도군의 시야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는 신의 도움이 필요할테지'라고 샤프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앞쪽에 있는 망할 놈의 대포들은 그 사이에 모두 재장전을 마쳤을 것이고, 이제 표적물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첫번째 대포알이 바로 몇 발자욱 앞에 쾅하고 떨어졌다가 튕겨올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머리 위로 넘어갔다.


"저 자식은 너무 일찍 쐈군." 바클리가 한마디 했다.


"이름을 적어 두지 그러나. (전투 중 잘못을 저지른 병사의 이름을 적어두었다가 체벌하는 관습에 대한 농담임 : 역주)"


샤프는 오른쪽을 보았다. 모두 세포이 용병으로 구성된 그 쪽 4개 연대는 아직 언덕 능선에 가려져서 대포의 포격으로부터는 안전한 사각지대에 있었고, 오록 대령의 초계병력과 제74 연대는 계곡 북쪽의 숲 속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하니스 대령의 스코틀랜드 연대가 가장 먼저 언덕 능선을 넘을 것이고, 적어도 한순간은 전체 적 포병대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될 것이었다. 몇몇 하이랜더(스코틀랜드인의 별칭 : 역주)는 마치 이왕 맞을 매를 빨리 맞겠다는 듯이 서두르고 있었다.


"천천히 !" 하니스 대령이 고함을 질렀다.


"이게 뭐 술집을 향한 달음박질인 줄 알아 ?  이 빌어먹을 놈들아 !"


엘시.  갑자기 샤프의 머리 속에 자기가 양조장 골목에서 도망친 이후 숨어들었던 웨더비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왜 그 여자 이름이 기억나지 ? 그리고는 그 술집 내부의 광경이 떠올랐다.


'겨울비에 젖은 남자들의 코트에서 김이 올라오고, 엘시를 비롯한 여급들이 쟁반 위에 에일을 나르는 동안, 벽난로에서는 불이 타닥 소리를 내고 있겠지. 눈이 먼 목동은 술에 취했고, 개들이 식탁 밑에서 자고 있는 그 때, 내가 장교의 장식띠를 매고 칼을 찬 모습으로 그 검댕투성이 술집으로 걸어들어가는거야'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샤프는 요크셔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렸고, 그 사이에 제778 연대는 웰슬리 장군의 참모진을 오른쪽에 끼고, 적 포병대의 코 앞의 평지로 올라섰다.


샤프가 우선 놀란 점은 적 포병대가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저지대를 통과하는 동안, 제778 연대는 적 포병대로부터 150보 전방까지 접근해 있었다. 샤프가 두번째로 놀란 것은, 인도군이 정말 멋지게 정비가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적 포병대는 마치 검열을 받듯이 정열해 있었고, 그 뒤로는 인도 마라타 연합군의 연대들이 4줄의 밀집 대형으로 깃발 아래 정렬해 있었다.  샤프가 '아마도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긴 모양이다'라고 생각할 때, 그 멋진 적군의 대형이 한꺼번에 모두 포연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 포연은 물결치듯이 밀려나왔는데, 그 속에서 불과 몇 야드 간격으로 포화의 번쩍임이 보였다. 쏟아져 나오는 포연 바로 앞의 곡식들이 포화의 바람에 휩쓸려 넘어지는 동안, 무거운 대포알들이 하이랜더들의 대오를 찢어놓으며 날아왔다.


사방에서 피가 튀었고, 박살이 난 병사들이 대살육 속에서 쓰러지거나 뒤로 휩쓸려 날아갔다. 어디선가 병사 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었지만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백파이프 연주병 하나가 다리가 날아간 채 쓰러진 병사에게 악기를 내던지고 달려갔다. 몇 야드 간격마다 죽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이 뒤엉켜 쓰러져서, 전체 대열 중 어디를 대포알이 휩쓸고 지나갔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 젊은 장교가 놀라서 눈을 뒤집고 머리를 흔드는 자기의 말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니스 대령은 자기 앞에 창자가 터져나온 채 쓰러져 있는 병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말을 그 옆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사관들은 대열에 빈틈이 생긴 것이 마치 하이랜더들의 잘못이라는 듯이 화를 내며 곳곳에 생겨난 간격을 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갑자기 어색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웰슬리 장군은 옆을 보며 바클리에게 뭐라고 말을 했지만 샤프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제서야 샤프는 적의 포격으로 자기의 귀가 멍멍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웰슬리의 예비마인 디오메드가 샤프의 손아귀로부터 고삐를 당기며 옆으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샤프는 그 회색말을 다시 자기 쪽으로 당겨야 했다.  피 위로는 온통 파리떼가 들끓었다. 한 하이랜더가 자기를 놔두고 행진해 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엄청난 욕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 병사는 무릎과 팔꿈치를 땅에 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상처는 전혀 없어 보였지만, 샤프를 한번 쳐다보면서 마지막으로 욕 한마디를 지껄이고는 푹 쓰러져 버렸다.


병사들의 배에서 터져 흘러나온 퍼런 창자 위로 더 많은 파리떼가 모여들었다. 다른 병사 하나는 머스킷 소총을 멜빵으로 질질 끌면서 관목 그루터기 사이를 기어갔다.


"이제 침착하게 !" 하니스 대령이 외쳤다.


"서두르지마 이 자식들아 !  지금 달리기 경주하는 줄 알아 ?  니들 에미를 생각해 !"


"에미 ?"  블래키스턴 소령이 물었다.


"간격을 메워라 !" 하사관 하나가 외쳤다.  "간격을 메워 !"


마라타 포병대는 미친 듯이 재장전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통의 쇠로 된 포탄이 아니고 속에 소총탄이 가득 든 깡통으로 된 산탄을 준비하고 있었다.  포연이 산들바람에 걷히고 있었고, 샤프의 눈에 포구를 쑤시며 화약을 운반하는 적병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른 적병들은 아까의 포격으로 뒤로 밀려갔던 포신들을 지렛대로 다시 스코틀랜드 연대에게 조준하고 있었다.


웰슬리는 그의 숫말이 하이랜더들의 대열 앞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포이 용병들은 아직 언덕 능선 밑의 사각지대에 있었고, 우익은 북쪽의 숲과 구릉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순간에는 하니스 대령의 하이랜더들 600명이 10만 명의 인도 마라타 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상자와 전사자를 뒤에 내버려두고 자기들의 죽음을 장전한 채로 기다리는 적의 대포를 향해 탁 트인 벌판을 걸어갔다.  백파이프 연주병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고, 그 사나운 음악이 하이랜더들의 발걸음에 새로운 힘을 주는 듯 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완벽한 대오를 이루고 있었고 아주 평온해 보였다.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해 노래를 만든게 거저 만든게 아니군' 하고 샤프는 생각했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뒤에서 들려 돌아보니 캠벨 대위가 아까의 전령 임무로부터 돌아오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캠벨 대위는 아메드누거 성벽 위에 맨 처음 기어오른 공으로 1계급 특진하며 웰슬리에게 발탁된 바로 그 실존 인물 캠벨 대위입니다.  : 역주)


대위는 샤프를 보고 씩 웃었다.


"난 내가 너무 늦었나 싶었지."


"시간에 딱 맞게 오셨습니다, 대위님. 정말 딱이요." 샤프는 말했다. 그리고는 황당해했다. '죽을 시간에 딱 ?'


캠벨은 웰슬리 장군에게 다가가서 보고를 했다.  장군은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다시 앞쪽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는데, 이번에는 아까처럼 일제히 쏘지 않고 재장전을 마친 순서대로 개별적으로 발사했다.


각각의 포성은 끔찍하게 커서 귀를 멍멍하게 울렸고, 산탄은 스코틀랜드군의 바로 앞에서 수많은 먼지 연기와 함께 튀어올라 병사들을 뒤로 낚아채듯 휩쓸어버렸다.


각각의 포탄은 속에 둥근 머스킷 소총탄이나 쇳조각, 돌조각이 가득 든 금속 깡통이었고, 포구를 떠나자마자 깡통이 찢어지며 그 내용물을 마치 거대한 산탄총처럼 쏟아붓는 것이었다.


차례차례 또 다른 대포가 불을 뿜었고, 각각의 포격이 대지를 강타하며 각각에게 할당된 스코틀랜드인을 저승으로 보내거나 혹은 고향 교구에게 부담이 될 불구자로 만들거나, 나중에 군의관의 무자비한 손에 고통을 당하도록 만들었다.  북치는 소년들은, 비록 하나는 다리를 절고 있었고 또 하나는 자기 북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아직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백파이프 연주병들은 적의 대군 속으로의 행진이 마치 뭔가 축하할 일인 것처럼 좀더 쾌활한 음악을 연주했고, 몇몇 하이랜더들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라 !" 하니스 대령이 외쳤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 !" 그는 큼직한 칼자루가 달린 클레이모어(스코틀랜드 식 대형 검)를 손에 들고 자기 병사들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서 가고 있었는데, 마치 병사들을 헤치고 말을 달려서 자기 연대를 박살내고 있는 적의 포병들에게 그 거대한 칼날을 들이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산탄에 곰가죽 모자가 날아갔는데, 그걸 쓰고 있던 병사는 멀쩡했다.


"이제 침착해라 !" 소령 하나가 외쳤다.


"간격을 메워라 !  간격을 메워 !"  하사관들이 외쳤다.


"대오의 간격을 메워라 !"


대오의 간격을 메우는 임무를 띤 상병들이 대열 뒤에서 바삐 움직이며 병사들을 좌우로 끌어다가 포탄이 휩쓸어간 자리를 메웠다. 이제 그 빈 자리를 더 넓어졌는데, 그 이유는 이전의 보통 대포알은 한번에 한개 열의 병사를 날려버렸지만, 지금의 산탄은 네다섯 열의 병사를 한꺼번에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네 문의 대포가 불을 뿜더니 이어서 다섯 번째, 그리고는 나머지 전체 대포들이 연달아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샤프 주변의 공기는 거센 포탄이 일으키는 바람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하이랜더들의 대열은 그 폭풍 속에서 뒤틀리는 듯 했다.  그 뒤에 피를 흘리고, 토하고, 울부짖고, 동료 혹은 어머니를 부르는 병사들을 남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남은 자들은 대오의 간격을 좁히며 굳건하게 계속 전진했다.  더 많은 대포들이 불을 뿜으며 적진을 포연으로 감쌌다.  샤프는 산탄이 연대의 병사들에게 날아와 꽂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하듯, 하이랜더 병사들은 개머리판이 사타구니를 가리도록 소총을 들고 있었는데, 한방 한방의 포화로부터 수많은 머스킷 총탄이 쏟아져나와 병사들의 소총을 따닥 때리는 소리를 냈다.  이제 병사들의 대오는 처음보다 많이 짧아져 있었지만, 이제 적 대포가 뿜어낸 자욱한 포연의 가장자리까지 거의 도달했다.


"778 연대 !" 하니스 대령이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정지 !"


웰슬리 장군은 말의 고삐를 당겼다.  샤프가 오른쪽을 보니, 계곡으로부터 세포이 용병들이 한줄의 긴 붉은 선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선은 세포이들이 관목으로 가득찬 계곡을 통과하면서 조각조각 끊어져 있었다. 연이어 마라타 연합군의 북쪽 대오에서도 포격을 시작했고 세포이들의 대오는 더욱 더 조각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좌측의 스코틀랜드인들처럼, 세포이들도 포화를 무릅쓰고 전진했다.





(당시 영국군 정규병보다 세포이가 좋았던 점은 2가지 -  채찍질 체벌이 없었다는 것과 반바지)




"조준 !" 하니스의 구령 속에는 약간의 흥분감이 섞여있었다.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머스킷 소총을 들어올려 조준했다. 이제 그들은 적 포병들로부터 겨우 60야드(54m) 떨어진 상태였고 활강총신을 가진 머스킷 소총도 그 정도의 거리에서는 상당히 정확했다.


"높게 쏘지 마라, 이 개새끼들아 !" 하니스가 경고했다.


"높게 쏘는 놈들은 한놈 한놈 채찍질을 할거다.  발사 !"


소총의 일제사격 소리는 거대한 대포 소리에 비하면 빈약하게 들렸지만 그 소리가 주는 안도감은 대단했고, 하이랜더들의 일제사격이 그루터기 너머를 휩쓰는 것을 보며 샤프는 하마트면 환호성을 올릴 뻔 했다.  적 포병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몇몇은 죽었을테지만, 나머지는 그저 큰 포가 뒤에 숨어있었다.


"재장전 !" 하니스가 소리쳤다.


"우물쭈물하지마라 !  재장전 !"


여기서 그동안 하이랜더들이 받았던 훈련이 그 성과를 발휘했다.  머스킷 소총은 재장전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물건이었고, 특히나 17인치(43cm)짜리 총검이 착검된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 삼각형 칼날은 총구에 탄약을 밀대로 밀어넣는 것을 까다롭게 했기 때문에, 몇몇 병사들은 총검을 떼내어 재장전을 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병사들은 고향에서 몇주간 힘들게 훈련받은 그대로, 신속하게 재장전했다.  탄약을 넣고, 밀대로 밀어넣고, 뇌관 화약을 집어넣고, 다시 밀대를 총신 홈에 집어넣었다. 총검을 떼어냈던 병사들은 서둘러 다시 착검했고, 다시 세워총 자세로 돌아갔다.


"지금 장전한 총알은 적 보병을 위해 남겨둔다 !" 하니스 대령이 외쳤다.


"이제 전진이다 ! 저 이교도 개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안식일 학살이 뭔지 보여줘라 !"


이건 복수였다.  이건 그 동안의 분노의 고삐를 풀어준 것이었다.  적 대포는 아직 재장전되지 않은 상태였고, 적 포병대는 일제 사격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포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백병전 거리에 들어올때까지 재장전할 시간이 없을 것이었다.  몇몇 적 포병은 도주했다.  샤프의 눈에 말을 탄 마라타 장교 하나가 도주하는 포병들을 잡아들여 칼등으로 다시 원위치로 몰고 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색칠이 된 거대한 대포를 두 명의 적 포병이 장전을 끝내고 옆으로 돌아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우리가 받게 될 것에 대해서도... (뒤에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 당시 일제 사격을 받기 전 병사들이 외우는 일종의 기도 : 역주)" 블래키스턴 소령이 중얼거렸다.  이 공병 장교도 적 포병이 재장전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 포구로부터 몰아쳐닥친 포연이 장군 일행을 삼켜버렸다. 한순간 샤프는 희미한 연기 속에서 웰슬리 장군의 키 큰 윤곽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보이는 것은 피바다 속에 쓰러지는 장군의 모습이었다.  산탄 조각들이 샤프 주변을 휩쓸고 나서 한 박자 뒤에 그 포격의 열기와 폭풍이 그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지만, 그는 웰슬리 장군의 바로 뒤에 있었으므로 포격을 정통으로 맞은 것은 바로 웰슬리였다.


실은 장군이 아니고 그의 말이었다.  그 종마는 십여발의 산탄을 맞았지만 웰슬리는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없었다.  그 큰 말은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  말이 쓰러지기 전에 웰슬리가 발을 등자에서 빼면서 안장에 손을 대고 몸을 빼내는 것이 샤프의 눈에 들어왔다.  웰슬리는 오른발이 먼저 땅에 닿자, 종마의 몸무게가 그의 다리 위를 덮치기 전에 비틀거리며 펄쩍 뛰어 몸을 피했다.  캠벨 대위가 장군 쪽을 돌아다 보았지만, 장군은 그에게 그대로 전진하라고 손짓을 했다.  샤프는 타고있는 암말에 박차를 가하며 벨트에서 디오메드의 고삐를 풀어내었다.  먼저 죽은 말에게서 안장을 벗겨야 하나 ?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한 샤프는 먼저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죽은 종마에게서 안장을 벗겨내는 동안 암말과 디오메드는 어떻게 하지 ? 






모든 전쟁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흔히 미국이 30년대의 대공황에서 빠져나온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불황이 생길 때마다 네바다 사막이든 태평양 한가운데든 가상 표적을 세우고 거기에 병력과 함대를 동원해서 맹폭격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그렇게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이고, 미국도 전후 20년 정도 최고 세율 90% 정도의 엄청난 소득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1913-2008 기간 중 미국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역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모두 누군가는, 정확하게는 결국 국민 전체가 전쟁 비용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영국은 빚을 더 냈고, 프랑스는 세금을 더 걷었다"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프랑스 측이 훨씬 더 건실한 재정 정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국채를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신용불량의 전력 때문에 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세금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돈이 과다하게 많이 들어가는데, 그걸 모조리 세금으로 충당하려면 국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고 해도 세금을 4~5배로 올려버리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긴 한데 당장 그럴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  보통 카드 할부로 구입합니다.  말이 좋아서 할부지 사실은 카드사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빚을 지는 것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전선의 부대들과 바다 위의 함대들, 그리고 동맹국들이 돈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그렇게 빚을 내야 합니다.  


대대로 유럽의 모든 정부들은 전쟁을 위해 빚을 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국은 이미 100년도 전인 17세기 말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설립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전쟁 금융에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국채 발행이 잘 되었던 것은 금융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가 꼬박꼬박 채권 상환을 잘 하여 신용을 쌓아왔던데다, 결정적으로 왕실이 아닌 의회가 국채 발행과 상환을 책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정이야 언제 무슨 정변이 나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토지와 무역회사 등 주요 자산을 소유하고 있던 대주주들로 구성된 의회는 글자 그대로 주식회사 영국 그 자체였거든요.  따라서 의회가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채권은 전쟁치고는 꽤 낮은 이자로도 잘 팔렸습니다.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의 경우 전체 전비의 51%를, 그리고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경우 81%를 국채 발행으로 메꿀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전시에도 급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국 국채의 신용도가 괜찮았던 것은 영국 재무부에게 결정적인 여유를 주었습니다.  잠정적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채권 뿐만 아니라 지폐도 추가로 찍어내어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일정 수준의 인플레를 유발시킴으로써 기존 국채 가치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이걸 인플레 세금(inflation tax)라고 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짧은 평화가 있던 시기에, 무일푼이던 혼블로워 중위는 보직 해임 상태가 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결국 혼블로워는 고급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4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 때 부족한 머리 숫자를 채워주는, 일종의 타짜 노릇을 해서 먹고 삽니다.)


그는 혼블로워가 가슴 안주머니로 지폐를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패리 제독이 말했다. "예전 화폐를 다시 부활시킨다면 더 좋지 않겠소 ?  정부가 이런 지저분한 지폐를 없애고 예전의 멋진 기니 금화로 되돌아간다면 말이오."


"그거 정말 좋겠군요." 대령이 말했다.


램버트가 말했다.  "그 놈의 육지 상어(순진한 뱃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모조리 상대한다오.  1기니당 23실링 6펜스를 주니, 틀림없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받을 수 있을거요."  (원래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합니다: 역주)


패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에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니(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칭:역주)는 옛날 프랑스 화폐를 부활시켰소.  보시오." 그는 말했다.  "이 금화를 나폴레옹라고 부른다오. 그 친구가 이제 종신 제1통령이니 말이오.  이 금화 한닢에 20 프랑이라오.  예전에는 우린 이걸 루이 금화(louis d'or)라고 불렀지요."


"나폴레옹, 제1통령," 대령은 호기심을 가지고 금화를 보며 읽고는, 뒷면을 돌려 읽었다. "프랑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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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라면 모양 빠지게 지폐 같은 것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40 프랑짜리 금화 정도는 누구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게 12.91g, 순도 90%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빚으로는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빚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카드 할부로 자동차를 산 경우에 몇 년에 걸쳐 월급 절약하여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도 세금을 좀 더 걷든가 나라 살림을 좀 줄이든가 해서 국채를 결국 갚아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감채기금(sinking fund, 장기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별도로 적립해두는 기금)을 설립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세수 잉여분을 여기에 적립함으로써 국채를 꾸준히 상환했습니다.  


영국도 마냥 빚만 낸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금도 더 걷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소(小)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income tax)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세금이란 사람 머릿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토지 등의 재산에 따라 내는 재산세, 그리고 관세와 부가세, 소비세 등의 형태였거든요.  사람이 일을 해서 번 소득 자체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소 피트가 도입한 소득세는 누진세(progressive tax)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즉 소득이 더 많을 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이 부과되는, 꽤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60파운드 이하의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고, 6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0.83%부터 시작하여, 200 파운드가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10%까지 세율이 올라갔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부과했던 세금은 모두 단일 세율의 재산세와 소비세 등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의 소득세에 대한 당시의 풍자 만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없지요.)




한편,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했던 영국과는 국가 권력 구조와 산업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달랐으니까요.  부르봉 왕정 시절, 아직 중앙은행도 없던 프랑스는 그냥 정부가 민간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하는 형태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귀족과 교회가 쥐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으니 그때 쌓였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금을 늘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설프게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터진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국민공회는 몰수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자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금 대신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표적인 실패작 아시냐 지폐입니다.)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회의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미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 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미국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 지폐 발권력이 있는 금융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국채와 지폐에 대한 국민들의 신용이 이렇게 바닥을 친 상태인지라, 총재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르봉 왕가나 국민공회처럼 채권이나 지폐를 찍어 재정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이름 자체가 프랑스 왕 '루이의 땅'이지요)를 미국 정부에게 매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는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는 등 시장의 통화와 정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은 복본위제(bimetallic standard)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통치 기간 중에는 절대 새로운 지폐를 추가로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나폴레옹의 발언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기존 정권에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해 (이미 기존 채권의 가치를 크게 절하시킨 뒤이기는 했지만) 이자를, 그것도 금화나 은화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처럼 감채기금을 마련하여 장기 국채의 상환을 위한 안정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처럼 프랑스도 국가 신용을 끌어올려, 전쟁 비용을 빚으로 충당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Bimetallic standard를 보통 복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와는 달리 복본위제에서는 은도 지폐의 교환 대상이 되는데, 다만 금과 은의 교환비를 정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럽은 금의 많이 나는 대륙이 아니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할 정도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쌓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신용이거든요.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비용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권력의 근거를 둔 황제였습니다.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올렸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과는 달리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쟁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전쟁 배상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패전국에게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1807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에는 무려 1억2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하여 프로이센을 나락으로 빠드렸고, 1809년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뒤에는 그나마 좀 양보하여 8천5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매우 수지맞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분명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모두 무찌르고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지만, 대체 이것들이 항복을 하지 않으니 배상금을 뜯어낼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는데도 그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다른 돈줄은 이탈리아와 폴란드, 네덜란드와 독일 소공국 등 위성국가들로부터의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네 양아치에게 보호비조로 돈을 바치는 것처럼 나폴레옹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중한 배상금과 세금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늘어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 국민들까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어 지지율이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적으로 맺은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무려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배상금은 연리 5%의 프랑스 국채로 지불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할 때는 못하던 것을, 패배 후에는 해낸(?) 것입니다.  






Source :  British and French finance during the Napoleonic wars by Michael D. Bordo & Eugene N. White 

https://www.businessinsider.com/history-of-tax-rates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tax

https://fr.wikipedia.org/wiki/Aspects_%C3%A9conomiques_et_logistiques_des_guerres_napol%C3%A9oniennes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Paris_(1815)



Bertrand Cornwell의 Sharpe 시리즈 중, Sharpe's Honour 중 제 1장입니다.  맛보기로 한장만 번역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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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바위투성이 골짜기를 휩쓸던 습기찬 어느 봄날, 샤프 소령은 오래된 돌 다리 위에 서서 남쪽의 바위투성이 능선 낮은 쪽으로 향하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인해 언덕들은 어두워보였다.


그의 뒤쪽으로는, 머스켓 소총의 발화장치를 헝겊으로 가리고, 총구에는 빗물이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코크마개를 막아둔 채로, 5개 중대의 보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샤프가 알기로는, 능선까지의 거리는 500야드였다.  (머스켓 소총의 사정거리는 약 60야드입니다.:역주)  곧 그 능선 위로 적군이 나타날 예정이었고, 그들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막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아주 간단한, 군인의 일거리였다.  이 1813년의 봄은 늦게 찾아왔고, 이 국경의 구릉지대에는 비만 줄곧 내렸으므로, 다리 아래의 강물은 깊고 빨라서, 걸어서 건널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그 임무는 훨씬 더 쉬워진 상태였다.  적군은 샤프가 기다리고 있는 다리를 통과하던가, 아니면 강물을 아예 건널 수 없었다.


"소령님 ?" 경보병 중대의 지휘관인 달렘보드 대위는 샤프 소령의 우중충한 기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가, 대위 ?"


"참모 장교가 오고 있습니다."


샤프는 나직히 궁시렁거렸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다가와 속도를 줄이는 것을 들었다. 다음 순간 말이 그의 앞에 나타나 섰고, 흥분한 기병 중위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프 소령님 ?"


단호하고 화가 난 듯한 검은 눈동자가 중위의 금도금이 된 박차와 장화를 거쳐, 진흙이 군데군데 묻었지만 비싸보이는 파란색 울 망토를 지나, 흥분한 참모 장교의 눈과 마주쳤다.  "자네가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 중위." 


"죄송합니다, 소령님."


중위는 서둘러 말을 한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험난한 산길을 돌아, 아주 열심히 말을 달려왔고, 그의 승마 솜씨에 스스로 우쭐해있었다. 그의 암말은 안절부절 못하고 움직이면서, 그 중위의 흥분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프레스톤 장군께서 보내신 전갈입니다, 소령님. 적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나도 능선에 초병을 세워놓았었네." 샤프는 무례한 말투로 말했다. "적병을 30분 전부터 보고 있었어."


"예, 소령님."


샤프는 능선을 쳐다보았다. 중위는 자기가 그저 조용히 사라져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라이플맨(샤프)이 중위를 다시 쳐다보았다. "자네 프랑스말 할 줄 아나 ?"


리처드 샤프 소령을 처음 만난다는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령님."


"얼마나 잘하지 ?"


기병 중위는 미소를 지었다. "Tres bien, Monsieur, Je parle..  (Very well, Mister, I speak...:역주) "


"내가 언제 빌어먹을 시범을 들려달라고 했나 ? 질문에 대답이나 하게 !"


중위는 이 무자비한 힐책에 겁이 났다. "아주 잘 합니다, 소령님."


샤프는 그를 쳐다보았다. 중위는 그 눈길이 마치 포동포동 살이 찌고 한때 잘나갔던 사형수를 대하는 집행인의 눈길 같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뭔가, 중위 ?"


"트럼퍼-존스입니다, 소령님."

"흰 손수건 있나 ?"


이 대화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 하고 중위는 생각했다. "예, 소령님."


"좋아." 샤프는 다시 다리 쪽과, 능선을 넘어 길이 뻗어오는 움푹한 안장모양의 고개길 쪽을 쳐다보았다.


일이 아주 꼬일대로 꼬여 버리고 말았어 라고 샤프는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 국경의 동쪽으로부터 진격로를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거점을 몰아내고 프랑스 수비군을 쫓아내면서 다가오는 여름의 작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치적치적 비가 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에, 5개대대의 영국군이 토르메스 강가의 프랑스 수비대를 공격했다. 프랑스군 후방 5마일 떨어진 곳에, 프랑스군이 퇴각해올 이 길 도중에, 이 다리가 있었다.  샤프는 대대의 절반 정도되는 병력(5개 중대)과 라이플 중대 하나를 거느리고, 그 퇴각을 막기 위해, 밤을 새워 길을 빙 돌아 행군하여 여기에 오게 된 것이었다.  그의 임무는 간단했다. 추격해온 다른 대대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따라잡아 끝장을 볼 수 있도록, 프랑스군의 퇴각을 막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날 오후가 되면서, 샤프의 기분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소령님 ?" 샤프는 위를 쳐다보았다. 중위는 접은 린넨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트럼퍼-존스는 불안한 듯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수건이 필요하시다고요, 소령님 ?"


"내가 코를 풀자는 건 줄 아나, 이 바보야 !  항복을 위한 거야 !" 샤프는 으르렁거리고는 두 발자국을 옮겨갔다.


마이클 트럼퍼-존스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비록 1500명의 프랑스군이 겨우 400명도 안되는 이 작은 부대 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트럼퍼-존스가 리처드 샤프라는 남자에 대해 들은 바로는, 샤프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항복을 하겠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샤프의 명성은 잉글랜드에까지 퍼져 있었고, 극히 최근에야 영국에서 떠나온 트럼퍼-존스가 최전선으로 다가올 수록 그는 그 이름을 점점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샤프는 군인 중의 군인으로서, 그의 칭찬을 듣는 것은 진정한 명예로 간주되었고, 그의 이름은 프로페셔널로서의 뛰어남에 대한 표석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이클 트럼퍼-존스 중위는 그 생각에 어이가 없어, 햇빛과 바람에 검게 그을린 샤프의 얼굴을 몰래 쳐다보았다. 잘 생긴 얼굴이었으나, 샤프의 왼쪽 눈 아래의 긴 흉터(1803년, 인도에서 도드 대령의 칼에 입은 상처입니다.:역주)로 인해, 마치 사람을 비웃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트럼퍼-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샤프가 웃을 때면 그 흉터로 인한 비웃는 듯한 표정은 사라지곤 했다.  트럼퍼-존스가 가장 놀란 부분은, 샤프는 계급장을 전혀 달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장교의 허리띠나 견장도 없어서, 그가 장교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옆에 차고 있는 낡아빠진 기병용 군도 뿐이었다.  트럼퍼-존스 생각에, 그는 정말 영국군이 빼앗은 첫번째 프랑스의 독수리 군기를 탈취한, 그리고 바다호스 요새의 무너진 틈새로 처음 돌격해 들어간, 그리고 가르시아 에르난데스에서 독일 병사들과 함께 그 유명한 기병 돌격을 감행했던, 바로 그 군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만함은, 그가 군 생활을 졸병 계급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총 한방 쏴보기도 전에 숫적으로 불리하다고 항복하려 한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지금 뭘 보는 거야, 중위 ?"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령님." 트럼퍼-존스는 샤프가 남쪽 구릉지대를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샤프는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중위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는 그것이 싫었다. 그는 주목을 받는 것이 싫었고,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싫었다. 요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만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이 젊은 기병 중위에게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중위를 올려다 보았다. "적에게 3문의 대포가 있는 것 같던데, 맞나 ?"


"예, 소령님."


"4파운드 포였지 ?"


"그런 것 같습니다, 소령님."


샤프는 툴툴거렸다. 그는 능선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 두마디 질문이 중위에게 좀 친근한 느낌을 주기를 바랬지만, 사실 그는 요즘 낯선 사람들에게서는 친근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부터 우울해 있었다. (Sharpe's Enemy 편에서 샤프는 크리스마스날 스페인인 아내인 테레사를 잃습니다. : 역주) 그는 격렬한 죄책감과 무자비한 절망감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내가 '신의 대문'이라 불리는 산길의 눈속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에서 흘러내리던 피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는 그 장면을 몰아내기라도 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에, 그녀 몰래 바람을 피웠었고, 그녀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그런 종말을 맞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어린 딸이 이제 엄마없는 아이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그의 죄책감 때문에 무일푼 상태였다. 아직 두살이 채 안된 그의 딸은 그녀의 스페인 삼촌과 숙모 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그가 스페인 정부로부터 훔쳤던 (Sharpe's Gold 편에서 그는 스페인 금화를 빼앗아 오는 임무를 맡았는데, 당연히 그중 일부를 슬쩍합니다.:역주) 그의 저축금 전체를 그의 딸 안토니아에게 보냈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그의 군도와 라이플 소총, 그의 망원경, 그리고 몸에 걸친 낡은 군복 한벌이 전부였다.  그는 값비싼 말을 탄, 금도금이 된 장식 칼집을 차고 새 가죽장화를 신은 이 젊은 중위를 속으로 저주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의 대오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남쪽 능선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샤프는 뒤돌아섰다.


"대대~!" 곧 침묵이 뒤따랐다. "대대~! 차렷 !  (Talion ! 'Shun !)"  (Battalion, Attention ! 을 이렇게 발음하는군요.: 역주)


병사들의 장화가 비에 젖은 바위 위에 철썩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들은 프랑스군의 퇴각로가 될 북쪽길이 놓인 작은 계곡의 입구를 가로막은 채 2줄로 늘어서 있었다.


샤프는 그들의 불안함을 이해했다. 그들은 샤프의 대대에 속한 샤프의 병사들이었다.  또한 그는 이 병사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비록 적군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라고 해도, 그 신뢰에는 변함이 없었다. "헉필드 중사 !"


"소령님 !"


"군기를 올려라 !"


마이클 트럼퍼-존스가 보니, 이런 엄숙한 순간에 어울리지 않게도 병사들은 씨익 웃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군기라는 것은 대대의 정상적인 깃발이 아니라, 껍질을 벗긴 자작나무 줄기에 헝겊조각을 매달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깃발은 비에 젖어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으므로, 먼거리에서는 그것이 병사들 자켓에서 뜯어낸 노란색 헝겊으로 장식한 망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막대기의 끝에는 노란 헝겊을 묶어놓아, 멀리서 보았을 때는 잉글랜드의 왕관처럼 보이게 꾸며 놓았다.


샤프는 이 참모장교가 놀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반편(half) 대대는 군기를 소지할 수 없다네, 미스터 트럼퍼-존스."


"예, 그렇지요, 소령님."


"그리고 프랑스군도 그걸 알지."


"그렇습니다, 소령님."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


"여기에 정규 1개 대대가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


"그렇지."  샤프가 다시 남쪽을 쳐다보는 동안, 트럼퍼-존스는 왜 항복에 앞서 이런 속임수가 필요한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트럼퍼-존스는 샤프에게 묻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샤프 소령의 얼굴을 보면 쓸데없는 질문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리처드 샤프 소령은 남쪽 능선을 쳐다보면서, 여기는 정말 죽을 장소치고는 비참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또 바보같은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그는 죽고 나면 다시 테레사를 만나서, 항상 그를 반겨주던 그녀의 갸름하고 해맑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녀의 얼굴의 자세한 모습은 그의 기억에서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초상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스페인 친척의 집안에서 자라고 있는 그의 딸은 엄마의 초상화도, 아빠의 초상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국군은 언젠가는 스페인 땅을 벗어나 진격해나갈 것이고, 그는 군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러면 그의 딸은 샤프가 어릴 때 고아로 남겨졌듯이, 부모없이 살아가도록 남겨질 것이었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안토니아의 삼촌과 숙모는, 샤프 자신보다는 훨씬 좋은 부모가 되어줄 것이라는 위안감을 느꼈다.


계곡 위로 거센 바람이 비를 몰고와서, 시야를 흐리게 하면서 다리의 돌에 부딪히 휘잉 소리를 냈다. 샤프는 말을 탄 참모 장교를 올려다 보았다. "뭐가 보이나, 중위 ?"


"말탄 사람 6명입니다, 소령님."


"적군에게 기병대는 없지 ?"


"우리가 본 바로는 없었습니다, 소령님."


"그럼 저건 적군의 보병 장교들이겠군. 저자식들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 요리할까 작전을 짜고 있을거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날씨가 개여서, 햇빛이 따뜻하게 비추어 지난 겨울의 아픈 기억들을 날려버릴 수 있기를 바랬다.


그때 길이 걸쳐있는 능선 위가, 갑자기 프랑스군의 파란색 군복으로 가득 메워졌다. 샤프는 적군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동안, 몇개 중대나 되는지 세어보았다. 6개 중대였다. 그들은 전위대였고, 다리를 향해 돌격하여 점령하되, 대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기다리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날 아침, 샤프는 피터 달렘보드 대위의 말을 빌려서 프랑스군의 퇴각로를 10번도 넘게 돌아보았었다. 그는 프랑스군 지휘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고 적군이 어떻게 나올지 확신이 들때까지 혼자서 자기 자신과 토론을 해보았었다. 이제 적군은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는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 대부대가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길에서 벗어나 구릉지대로 피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면 대포를 버리고 가야했고, 그럴 경우 스페인 빨치산의 밥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훼방꾼들을 재빨리 날려버리려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한 도구는 그들의 대포일 것이었다.


능선 아래 150야드 지점에, 길이 계곡 바닥으로 내려오면서 마지막으로 굽이치는 지점에, 대포가 자리잡기에 딱 좋은 바위로 된 넓은 평지가 있었다. 거기서부터 프랑스군 포병은 샤프가 거느린 2열 횡대의 보병들에게 캐니스터(커다란 산탄총같은 포탄의 일종: 역주)를 퍼부어 피떡을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영국군 대오가 산산조각이 나면, 프랑스 보병들이 총검을 들고 다리를 향해 돌격을 해올 것이었다. 그 바위 평지에서라면 프랑스 포병은 자신들의 보병 머리 너머로 대포를 쏘아댈 수 있었다. 사실 그 바위 평지는 바로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샤프는 그날 아침 작업조를 보내 바위 바닥에서 포병들에게 걸리적거릴 만한 것들을 다 치워놓았었다.


그는 프랑스 포병이 바로 그 위치에 있기를 바랬다. 그는 프랑스군이 대포를 거기에 갖다놓으라고 초대장을 보낸 셈이었다.


그는 3대의 대포가 언덕길을 조심스레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병들이 달라붙어 바퀴에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포병들이 다리 건너의 평지까지 내려와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사우스 에섹스 대대의 몇안되는 라이플 사수들을 강둑에 배치시켜 놓았었다. 프랑스군은, 녹색 자켓을 입은 그 라이플 사수들을 보았을 것이고, 라이플 강선에 의해 회전하는 탄환의 정확성을 두려워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군이 라이플 소총의 사정거리 밖에 대포를 위치시키기를 바랬다.


프랑스군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프랑스군 포병이 그 바위 평지로 와서 대포를 말에서 떼어내고, 탄약을 가져오는 것을 보면서 샤프는 속으로 안심했다.


샤프는 뒤돌아섰다. "총구 마개를 뽑아 !" 두줄로 늘어선 붉은자켓의 병사들이 머스켓 소총 총구에서 코르크 마개를 뽀아내고 격발장치를 감쌌던 헝겊을 풀어냈다. "거총 !"


머스켓 소총이 병사들의 어깨로 올라왔다. 프랑스군도 그 움직임을 볼 것이엇다. 프랑스군은 영국군 머스켓 사격의 속도를 두려워했다. 영국군의 잘 훈련된 머스켓 사격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스페인 전장에서 그 위력을 여러번 입증했었다.


샤프는 다시 병사들에게 등을 돌렸다.  "중위 ?"


"소령님 ?" 마이클 트럼퍼-존스는 흠칫 놀라,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좀더 깊은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소령님 ?"


"그 손수건을 자네 군도에 묶어라."


"하지만 소령님...."


"명령에 복종하게, 중위." 이 말은 나직이 말해졌으므로 트럼퍼-존스를 제외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은 무자비하게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예, 소령님."


프랑스군의 6개 공격중대는 250야드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총검을 착검한 채, 종대로 이루어 있었고, 포병대가 일을 마치고 나면 진격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샤프는 식량주머니(haversack : haver는 네덜란드어로 귀리라는 뜻입니다. 역주)에서 망원경을 꺼내어 망원경 튜브를 잡아늘이고 대포를 관찰했다. 거대한 산탄총처럼, 깡통 속에 든 자잘한 소총탄을 죽음의 부채살 모양으로 쏘아대도록 만들어진 캐니스터 포탄이 세문의 대포 포구로 운반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때가 그가 소령으로 진급한 것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소령으로서, 그는 지휘권을 이양하고, 다른 사람들이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들이 대포의 마지막 조준을 마치고 있는 이 순간, 그는 그 날의 진짜 일을 수행하도록 임무를 받은 라이플 중대와 자기가 함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첫번째 캐니스터 포탄이 포구에 밀어넣어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빌 !" 샤프는 큰 소리로 말했다. 마이클 트럼퍼-존스는 자기가 대답을 해야하는 건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길의 왼쪽에, 길을 내려다보는 높은 바위 위에서, 하얀 화약연기들이 픽픽 나타났다. 1~2초 뒤에 라이플 소총 특유의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이미 3명의 포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간단한 매복이었다. 1개 중대의 라이플 소총병들이 대포가 자리를 잡을 지점 근처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 수법은 샤프가 전에 사용했던 것이었고, 또 같은 방법을 썼는데, 언제나 통하는 방법 같았다.


프랑스군은 라이플 소총부대에 도통 익숙해지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사격의 속도를 더 중요시하여 활강총신을 가진 머스켓 소총만을 사용했고, 장전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라이플 소총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녹색 자켓을 입고, 은폐물을 아주 잘 활용하고, 3백~4백보 거리의 유효사거리를 가진 라이플 소총병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전체 포병대의 절반 정도가 쓰러졌고, 바위는 라이플 소총의 화약연기로 자욱해졌다. 하지만 총성은 계속되었고 총알은 이제 대포를 끄는 말들에게 퍼부어지고 있었다. 라이플 소총병들은 자신들의 화약연기에서 벗어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자꾸 위치를 바꿔가면서 말들을 조준하여 쏘았다.  이는 대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포병들을 쓰러뜨려 대포를 발사하지 못하게 막았다.


대포 뒤의 길 위에 있던 적군의 후위부대가 구보로 달려왔다. 그들은 바위 밑에서 진열을 짜고 바위 위로 올라가려 햇지만, 경사는 급했고, 라이플 소총병들은 중무장한 프랑스 보병들보다 훨씬 잽쌌다. 하지만 프랑스 보병들의 공격으로 인해, 최소한 라이플 소총병들이 포병들에 대한 사격을 중단하게 되었고, 이제 살아남은 포병들이 포가 밑에서 다시 포탄 장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샤프는 씨익 웃었다.


저 구릉 지대 속 어딘가에 반은 독일인이고 반은 영국인인 윌리엄 프레데릭슨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샤프가 아는 그 어떤 병사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의 부하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달콤한 윌리엄'이었는데, 아마 그건 그의 애꾸눈 안대와 심한 흉터가 진 얼굴이 너무나 무시무시해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콤한 윌리엄은 살아남은 포병들이 엄폐물로부터 완전히 기어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길의 오른쪽에 숨어있던 라이플 소총병들에게 사격을 개시하도록 했다.


마지막 포병들까지 쓰러졌다. 프레데릭슨의 명령에 따라, 라이플 소총병들은 말을 탄 적의 보병 장교들로 표적을 바꾸었다. 적군은 몇발 되지도 않는, 그러나 정확히 조준된 라이플 총탄에 의해 포병대 전체를 잃고 갑자기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제 샤프가 그의 다른 무기를 뽑아들 차례였다.


"중위 ?"


마이클 트럼퍼-존스는 그의 군도 끝에 묶어놓은 축축한 흰 손수건을 숨기려고 하다가 샤프를 쳐다보았다. "소령님 ?"


"적군에게 가서 내 인사를 전하고, 무기를 내려놓도록 제안해보게."


트럼퍼-존스는 이 키가 크고 검은 얼굴을 한 라이플맨을 쳐다보았다. "저들보고 항복하라고요,  소령님 ?"


샤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우리가 항복하자고 제안을 하는건가 ?  응 ?"


"아닙니다, 소령님." 트럼퍼-존스는 조금 지나치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1500 명의 프랑스군이 불과 400 명의 비에 젖고 고립된 영국군에게 항복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지 황당해했다. "물론 아닙니다, 소령님."


"저들에게 우리가 1개 대대를 예비병력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 그리고 그 뒤에는 6개 대대가 있다고 하고. 또 구릉지대에는 기병대가 있고, 곧 대포가 도착한다고 하게. 아무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라고 ! 하지만 반드시 내 인사를 먼저 전하고, 이미 쓸데없이 많은 병사들이 죽지 않았냐고 말하도록 하게. 그리고 그들의 군기를 폐기할 시간을 주겠다고 말하게."  그는 다리 건너를 쳐다보았다. 프랑스군이 바위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아직도 충분한 숫자의 라이플 총성이 울리고 있었고, 그 뜻은 아직도 이날 오후에 쓸데없이 인명이 살상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어서 가게, 중위 ! 15분 줄 것이고 그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공격하겠다고 하게.  나팔수 ?"


"소령님 ?"


"기상 나팔을 불어라. 중위가 적군에게 도달할 때까지 계속 불어."


"예, 소령님."


나팔 소리로 경고를 받은 프랑스군은 한명의 기병이 그들을 항해 손수건을 묶은 칼을 높이 들고 달려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군은 바위 사이를 잽싸게 뛰어다니는 라이플 소총병들에게 사격을 하던 것을 중단했다.


전투의 화약 연기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 속에서 흩어져갔다. 트럼퍼-존스는 프랑스 장교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샤프는 뒤로 돌아섰다. "편히 쉬어 !"


5개 중대는 긴장을 풀었다. 샤프는 강둑을 쳐다보았다. "하퍼 상사 !"


"소령님 !"  6피트의 키를 가진 샤프보다도 4인치는 더 큰 커다란 사나이가 강둑에서 올라왔다.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샤프와 함께 이 붉은 코트 연대로 흘러들어오게된, 몇안되는 라이플맨 중의 하나였다. 사우스 에섹스 대대는 붉은 코트를 입고 유효사거리가 짧은 머스켓 소총을 사용했지만, 샤프의 예전 중대의 다른 라이플맨들처럼 그도 아직 녹색 자켓을 입고 라이플 소총을 들고 다녔다. 하퍼는 샤프 옆에 섰다. "저 자식들이 굴복할까요 ?"


"저들에겐 다른 도리가 없어. 자기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거야. 저들이 1시간 안에 우리를 제거하지 못하면, 저들은 끝장이야."


하퍼는 웃었다. 샤프에게 친구가 있다면 바로 이 상사가 그 친구였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모든 전투를 함께 했었다. 하퍼가 샤프와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샤프의 죄책감 뿐이었다.


샤프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추위에 손을 비볐다. "차가 마시고 싶군, 패트릭. 차를 끓여도 좋다는 허가를 내리겠네."


하퍼는 미소를 지었다. "예, 소령님." 그는 얼스터(아일랜드의 지방명:역주)의 거센 억양으로 말했다.


샤프가 손으로 감싸고 있던 차가 식기도 전에, 마이클 트럼퍼-존스 중위가 프랑스군 대령과 함께 돌아왔다. 샤프는 이미 엉터리로 만든 가짜 군기를 치우도록 명령해 놓았었다. 그는 절망적인 적군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그는 대령이 항복의 표시로 내미는 군도를 받아들이기를 사양했다. (이는 상대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당시의 예절입니다: 역주) 대포 없이는 다리를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프랑스군 대령은 샤프가 내놓은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 대령은, 샤프 소령같은 명성높은 군인에게 항복한다는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말했다.


샤프 소령은 감사를 표시하고, 차를 권했다.


 


두시간 후, 프레스턴 장군이 그의 5개 대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는 그의 앞에 머스켓 총성이 들리지 않는 것에 당황해하고 있었는데, 도착해보니 1500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가 되었고, 3문의 대포와 함께 마차 4대 분량의 보급품이 노획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의 머스켓 소총은 길가에 쌓여있었다. 그들이 수비하던 마을에서 약탈했던 약탈품들은 이미 샤프의 부하 병사들의 배낭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사우스 에섹스 대대의 병사 전체는 물론, 프레데릭슨 대위의 라이플맨들 모두가 부상조차 당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7명이 전사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축하하네, 샤프 !"


"고맙습니다, 장군님."


장교들이 끊이지 않고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는 그들을 떨쳐냈다. 그는 대포가 없이는 샤프의 부대를 깨뜨릴 수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사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축하가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이런 칭찬이 쑥스러워 샤프는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거센 강물을 건너, 사우스 에섹스의 보급관인, 통통하게 살이 찐 콜립이라는 이름의 장교를 찾았다. 그 보급관은 지난 밤에 샤프의 절반의 대대와 함께 야간 행군을 했었다.


샤프는 바위가 갈라진 틈 사이로 콜립을 몰아 붙였다. 샤프의 얼굴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넨 정말 운이 좋아, 미스터 콜립."


"예, 소령님." 콜립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그는 불과 2달 전에 사우스 에섹스에 합류했었다.


"왜 자네가 운이 좋은지 말해보게, 미스터 콜립 ?"


콜립은 불안한 듯 침을 삼켰다. "아마 처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령님 ?"


"처벌은 절대 없을걸세, 미스터 콜립."


"없다고요, 소령님 ?"


"왜냐하면 그건 내 잘못이었으니까. 자네가 짐을 다 도맡겠다고 했을 때 난 자네를 믿었네.  내가 틀렸지. 자넨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


"정말 죄송합니다, 소령님."


지난 밤에, 샤프와 그의 대위들은 프레데릭슨 대위의 라이플맨들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었다. 그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먼저 떠났었고, 중위들과 함께 콜립이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오도록 했었다. 그가 되돌아 왔을 때, 콜립은 그가 힘들게 건넜던 깊은 계곡 입구에서 있었다. 샤프는 라이플맨들을 이끌고 계곡을 건너, 가파른 강둑을 내려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을 건너, 얼음이 얼 것같은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건너편 강둑을 기어올랐었다.


그가 5개 중대를 데리러 되돌아왔을때, 엄청난 재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급관인 콜립은, 붉은코트의 병사들이 좀더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묘안을 짜냈었다. 머스켓 소총의 어깨끈을 모아 묶어서 밧줄을 만들어, 매우 긴 고리를 만들었다. 이것을 강둑 사이에 걸쳐놓고 거기에 모든 병사들의 무기와 배낭과 수통과 식량주머니를 차례로 매달아서 순환식으로 잡아당겼던 것이다. 마지막 짐을 그런 식으로 건네고 있을 때, 어깨끈의 매듭이 풀리면서 짐이 물 속에 빠졌는데, 그 짐은 사우스 에섹스 대대의 탄약 전체였던 것이었다.


프랑스 군이 샤프가 지키는 다리에 도달했을 때, 탄약이 있었던 것은 샤프의 라이플 중대 뿐이었다. 샤프는 사실상 무기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그저 한번의 일제 사격으로 다리를 점령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절대, 미스터 콜립, 절대 병사에게서 무기와 탄약을 떼어놓지말게. 약속할 수 있나 ?"


콜립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령님."


"자네가 내게 뭔가 한병 사야 한다고 생각하네, 미스터 콜립."


"예, 소령님, 물론입니다, 소령님."


"그럼 이만, 미스터 콜립."


샤프는 걸어나왔다. 그는 갑자기 웃었는데, 그건 아마 서쪽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면서 붉은 석양 빛이 그의 승리의 장면을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패트릭 하퍼를 찾아나서, 그의 옛 라이플맨 부하들과 서서 차를 함께 마셨다. "오늘 아주 수고 많았어들."


하퍼는 웃었다. "그 자식들에게 우리에게 탄약이 없었다는 거 말했어요 ?"


"항상 상대방에게 자존심만큼은 남겨둬야지, 패트릭." 샤프는 웃었다.  그는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로 거의 웃는 일이 없었다.


고대 국가와 근대적 국가의 뚜렷한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정교 분리입니다.  마치 무협지에서 관은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고 무림도 관의 일에 관여치 않는 것이 불문률인 것처럼, 종교는 정치에, 반대로 정치도 종교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정교 분리입니다.  하지만 무림과 관이 서로 상대의 일에 관여치 않기로 한 것은 서로의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좌랭선의 숭산파가 중원 제패의 야심을 품고 타 문파를 무력으로 공격하는 것이 관에서 볼 때는 산적떼들의 난동과 종이 한장 차이일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종교와 정치는 엄격히 구분된 것처럼 말은 하지만 사실은 겹치는 영역이 매우 많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반란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지셨고, 마호멧은 스페인부터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 아시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과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지도부는 법에도 없는 사실상 면세 특혜를 받고 있지요.  이는 그 종교인들이 뻔뻔스러움 뿐만 아니라 선거 때 정치인들의 당락을 좌지우지할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진화론 같은 과학에까지 종교적 논리를 들이대며 참견하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주 창조 이론인 빅뱅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 카톨릭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조르쥬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고대 시절에는 종교와 정치가 사실상 일체화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사장이 곧 우두머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가령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유대인들을 이끌고 나온 세계 최초의 대량 난민 리더인 모세가 대표적인 종교 수장이 국가 수장인 경우입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모세의 아들이 아닌 여호수아라는 점도 초기 고대 사회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즉 아직 수장의 권세가 충분히 강하지 못해 그 신분이 세습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차기 수장도 종교 지도자임과 동시에 군사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사사(士師) 시대에도 사사는 일종의 부족장임과 동시에 종교 및 군사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사사를 영어로는 judge라고 합니다만 이는 고대 히브리어 직위를 번역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일 뿐이고, 사사를 문약한 재판관 정도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가령 천하장사 삼손도 사사거든요.  




(삼손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사들도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가령 이 그림 속의 삼갈(Shamgar)은 소떼를 모는 막대기만 들고 혼자서 불레셋 전사 600명을 때려죽인 무시무시한 무공의 소유자입니다.  동방불패도 그 정도의 무공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세의 삽화에서는 막대기는 그래도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소잡는 칼 같은 것으로 마구 살륙을 벌이고 있군요.)



(생각해보니 무협지에서도 일월신교 교주 임아행이나 명교 교주 장무기, 소림사 방장 등 종교 지도자가 가장 강력한 무공을 갖춘 경우가 정말 많은데요 !  사진 속 인물은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흡성대법의 창시자 임아행입니다.  실제 소설 소오강호에 나오는 임아행은 저런 미치광이가 아니라 정말 문무에 모두 통달한 무림 대종사로 나오는데 참 아쉽더군요.)




그러다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면 결국 세속 권력이 발달하면서 종교 권력을 밀어내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잠깐 신앙심을 접어놓고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갈림길이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사무엘 상편(1 Samuel)입니다.  


사사라는 직위는 그 역할이 약간 불분명하긴 합니다만 제사장이기도 하고 군사 지도자이기도 하면서 또 원칙적으로는 신분이 세습되었던 모양입니다.  사무엘의 전임자인 엘리는 처음에는 제사장(삼상 1:9)이라고 소개되지만 죽을 때는 사사라고(삼상 4:18) 설명되는 인물인데, 그 두 아들은 무척 부패한 인물이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엘리는 그들에게 사사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아들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두 전사해버리지요.   그 뒤를 이은 사무엘은 무척 공정하고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사무엘의 아들들도 사무엘과는 달리 무척 부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그 전임자 엘리처럼 또 그 아들들을 사사로 임명하여 세습을 시도했습니다.  (아, 세습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 반발하여 다른 선진국들처럼 우리도 왕정을 세우자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사로부터 군사권과 사법권, 행정권 등 많은 권력을 빼앗아 왕에게 주는 일이었으므로 사무엘이 이에 대해 (잠시 신앙심을 완전히 접어두고 읽으면) 신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라며 매우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8:1 사무엘은 나이가 들어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습니다. 

8:2 사무엘의 두 아들 이름은 요엘과 아비야였습니다. 요엘과 아비야는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있었습니다. 

8:3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남몰래 돈을 받고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했습니다. 

8:4 그래서 장로들이 모두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왔습니다. 

8:5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십시오.” 

8:6 사무엘은 장로들의 이 말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 기도드렸습니다.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너에게 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어라. 백성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내가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8:8 백성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은 나를 버렸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런데 그들은 똑같은 일을 너에게도 하고 있다. 

8:9 이제 백성의 말을 들어 주어라. 그러나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그들을 다스릴 왕이 어떤 일을 할지 일러 주어라.” 

...중략...

8:19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왕이 필요합니다. 

8:20 왕이 있으면 우리도 다른 모든 나라들과 같게 됩니다.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릴 것입니다. 왕이 우리와 함께 나가서 우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등떠밀려 왕을 옹립하게 된 사무엘이 하필이면 가장 빈약한 세력을 가진 벤야민 지파 중에서도 매우 별볼일 없던 가문 출신의 사울(Saul)을 왕으로 세운 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고 씌여있긴 합니다만) 새로 생긴 왕정을 견제하려는 종교 권력의 절박함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덕분에 사울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일부 더 강력한 가문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삼상 10:27) 한동안 평소 하던 대로 직접 황소로 쟁기질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삼상 11:5)  사울이 왕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은 암몬 왕 나하스(Nahash)가 길르앗 야베스(Jabesh Gilead)를 침공했을 때 뛰어난 군사적 역량으로 그를 격파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삼상 11:15)  이건 고대 국가 세속 권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군사 지도자 역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확고해진 왕권도 종교 권력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울과 그를 세운 사무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인 번제를 직접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투란 신의 마음에 그 결과가 달린 무척 중요한 종교적 이벤트였습니다.  따라서 전투 직전에 제사를 드리고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사를 드리기 전에는 전투를 벌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적군이 눈 앞까지 쳐들어와 우리 편 병사들을 마구 쳐죽이는 상황에서도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싸워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는 꼭 이스라엘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흔히 있던 일입니다.  가령 페르시아 전쟁 중인 기원전 479년 벌어진 플라타에아(Plataea)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섭정이자 총지휘관이었던 파우사니아스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의 내장에서 좋은 징조를 얻지 못하자, 좋은 징조가 나올 때까지 계속 희생물을 바치느라 전투 개시를 계속 미루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와 아군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좋은 징조가 나올 때까지 진격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 희생물만 바치고 있었지요. 




(결국 희생물의 내장에서 좋은 징조가 나왔기 때문인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은 마르도니우스의 페르시아군을 완전 궤멸시킵니다.)




사울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무엘 상 13장에는 사울이 불레셋과 전투를 앞두고 무척 불리한 상황에서 불레셋군과 대치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7일 간이나 기다렸는데도 번제를 드리기 위해 온다던 사무엘이 전투 현장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번제를 지내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는데, 불레셋 군은 언제라도 쳐들어올 수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이 이어지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병사들은 개죽음을 피해 대거 탈영에 나섰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울은 오지 않는 사무엘을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뭐 사무엘이 스위스 차장이 운행하는 기차를 타고 오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산적을 만나 죽었는지 불레셋 척후병의 습격을 받았는지 혹은 노령에 병이 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제 생각에 어떤 군사 지휘관이라고 해도 사울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 같은데, 사울은 사무엘 대신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결과는 사무엘의 분노였지요.  제 상식으로는 지각을 한 사무엘에게 사울이 화를 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13:8 사울은 칠 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그 곳에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길갈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3:9 사울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과 화목 제물을 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13:10 사울이 막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쳤을 때, 사무엘이 도착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13:11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하였소?”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군인들은 하나 둘씩 떠나가고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또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모여 있었습니다. 

13:12 블레셋 사람들이 길갈로 와서 나를 공격할 것인데, 나는 아직 여호와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13:13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바보 같은 짓을 하였소.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소.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당신의 나라를 영원토록 세우셨을 것이오. 

13:14 하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제 이어지지 않을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내셨소.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소.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13:15 이 말을 하고 나서 사무엘은 길갈을 떠나 베냐민 땅 기브아로 갔습니다. 나머지 군인은 사울을 따라 싸움터에 나갔습니다. 사울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저주와 직무 유기에도 불구하고, 사사가 아닌 왕이 바친 번제도 효험이 있었는지 결국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용맹에 힘입어, 사울은 제대로 무장도 못한 600명의 병력으로 불레셋의 대군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로도 수십년 간 굳건한 왕정을 이어갑니다.  결국 사무엘은 최후의 사사가 되었고, 사사라는 직위는 왕정에 밀려 사라지게 됩니다.  (신앙심을 완전히 접어두고 읽으면) 누가 봐도 이 사건은 명확히 종교 권력에 대한 세속 권력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종교 권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종교 권력과 불화한 사울이 결국 불레셋에게 패배하여 죽고 다윗이 그 뒤를 잇게 된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종교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을 택하게 만든 사울의 죄라고 해봐야 (1)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을 침범하여 직접 번제를 드린 것과, (2) 아말렉인들을 토벌할 때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들까지 모조리 쳐죽이라 했지만 가축들은 죽이지 않고 백성들과 나누어 가진 것 정도였습니다.  이건 분명히 종교적 의무 대신 백성들의 경제적 이익을 중시한 정당한 통치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무엘은 사울을 저주하고 다윗을 대신 왕으로 세웠으며, 결국 사울은 본인 뿐만 아니라 아들들까지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다윗의 죄는 '위력에 의한 성폭행' 뿐만 아니라 부하의 미녀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충직한 부하를 함정에 밀어넣어 살해한 것으로서, 현대 기준으로 볼 때도 천인공노할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지자 나단(Nathan) 앞에서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미녀 밧세바(Bathsheba)를 정식으로 인정받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까지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는 결국 세속 권력도 종교 권력의 협조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종교 세력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중세 시절에는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과연 근대라고 할 수 있는 나폴레옹 시대에도 그런 관례가 이어졌을까요 ?




(블레셋군에게 패배한 뒤 이교도 블레셋인들에게 당할 치욕을 피하기 위해 검 위에 엎어져 자살하기 직전인 사울 왕입니다.  그 옆에 선 시종도 같은 방법으로 자살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구약에서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약에도 직접적으로 자살을 금한 구절은 없더군요.)



(유명한 다윗 왕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가만 보면 성경은 정말 19금으로 지정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야한 부분이 많습니다.)




나폴레옹은 자타가 공인하는 비종교적 인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에서 구술한 회고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평생 진정으로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브리엔 사관학교에서 소년 시절을 보낼 때, 학교에서의 미사 시간에 카토나 케사르 같은 고대 로마의 영웅들이 하나님이나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지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훌륭한 위인들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불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  나는 그때 이후로 종교를 갖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역사서를 많이 읽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만, 그의 성향으로 볼 때 성경을 열심히 탐독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나폴레옹은 종교 권력에 대해 다윗과 같은 겸허함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울의 길을 택했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왕정과 귀족에 대한 혁명이기도 했지만 많은 특권과 부를 누려온 카톨릭 사제 계급에 대한 혁명이기도 했습니다.  대혁명 기간 중 카톨릭은 많은 재산을 잃었고 많은 사제들이 감옥에 쳐박혔습니다.  그런 소동 후에 나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Pius VII) 사이에 이루어진 1801년 정교협약(Concordat)은 세속 권력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카톨릭으로서는 간신히 체면을 차릴 정도의 협정이었습니다.   카톨릭이 프랑스의 주요 종교로 공식 선포되기는 했으나 국교로서의 지위는 상실했고, 프랑스 내 사제들의 급여는 프랑스 정부가 지급하게 되었지만 정작 그 많던 프랑스 내 카톨릭 자산은 모두 상실했으며, 바티칸에게도 프랑스의 주교를 해임할 권한은 주어졌으나 정작 주교 임명권은 프랑스 정부,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에게 주어졌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멀고 나폴레옹의 총검은 가까왔으니까요.  


이는 분명히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의 영역에 부당하게 침입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세속적인 인간이 카톨릭 사제를 임명하다니요 !  그러나 비오 7세도 분명히 세속 권력의 영역에 발을 딛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의 수장이도 했지만 동시에 세속 권력을 가진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교황령(Papal States, Stato Pontificio)이라고 해서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 직접 통치하는 영토가 꽤 상당했거든요.  물론 이 영토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쉽사리 점령당했습니다.  비오 7세의 전임자인 비오 6세는 나폴레옹의 1차 침공 때 로마가 함락되면서 포로로 프랑스에 잡혀가 거기서 죽기까지 했지요.  1801년 정교협약에 의해 이런 영토 중 일부는 다시 바티칸에 반환되었습니다.




(교황이 영적인 세계 뿐만 아니라 지상의 세계에서도 군주로 통치했던 교황령의 지도입니다.  생각보다 꽤 넓습니다.  교황령이 사라진 것은 1861년 가리발디의 정복 전쟁에 의해서였고, 공식적으로 로마까지 함락된 것은 1870년 이탈리아 왕국군이 포격전을 벌이며 쳐들어온 다음이었습니다.  어차피 아무 승산이 없는 전투였는데도 당시 교황 비오 9세의 고집으로 필요 이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십 명이 전사했습니다.)  



(교황령이 이렇게 넓은 이유 중 하나는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중부에서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를 벌이며 영토 확장에 나섰던 율리오 2세(Julius II) 덕분입니다.  이 사진은 1965년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그린 The Agony and the Ecstasy 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중무장한 율리오 2세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일대는 당연히 모두 카톨릭이었을텐데, 전투 현장에서 갑옷을 입은 교황과 칼을 맞대게 된 적군 병사는 정말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과 비오 7세의 사이가 다시 나빠진 것은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의 상륙을 막는다는 핑계 하에 나폴레옹이 교황령 주요 항구인 안코나(Ancona)를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황령 내에서 나폴레옹의 적국인 영국과 러시아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긴 했습니다.  교황은 편지를 보내 나폴레옹에게 즉각 철수를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를 했고, 나폴레옹도 교황이 '교회의 장자'인 프랑스의 등 뒤에 칼을 꽂는다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나폴레옹은 교황령을 조금씩 잠식해들어가며 자신이 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령으로 편입시켰고, 이런 강탈행위에 대해 교황은 나폴레옹이 임명한 주교들을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 반항으로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돌+아이였습니다.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 쪽까지 대략 정리한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다시 로마를 점령해버리고 이어서 문제의 안코나를 포함한 굵직한 교황령 몇 개를 또 이탈리아 왕국으로 편입시켜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인 1809년에는 아예 로마까지 프랑스령으로 선언해버렸지요.  교황의 세속 영토를 모조리 빼앗아버린 것이지요.  이 정도면 아무리 비오 7세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해도 참기 어려웠습니다.  교황은 나폴레옹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일괄적인 파문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징벌이었지요.  물론 하나님의 벼락이 당장 나폴레옹 머리 위에 떨어지지는 않았고, 나폴레옹은 당시 나폴리 왕이던 매제 뮈라(Joachim Murat)에게 편지를 휘갈겨 '교황을 가두어버려야 한다'라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물론 이는 명령이 아니라 그냥 분풀이용 편지였는데 문제는 그 편지를 받은 뮈라는 상상력이 부족한 대신 실행력은 뛰어난 불꽃남자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뮈라는 야밤에 병력을 보내 정말 비오 7세를 체포해왔습니다.  




(뮈라의 부하 라데(Radet) 장군에게 체포되는 비오 7세입니다. 라데는 훗날 비오 7세를 체포할 때의 순간에 대해 'Dès ce moment là, ma première communion m'est apparue !' (그 순간 내 첫번째 성찬식 장면이 눈 앞에 아른거리더라 !) 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소식에 나폴레옹은 또 복장이 터졌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뮈라에 대해서였지요.  "아니 그걸 시킨다고 진짜 하냐 !!"  그러나 생각해보니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제 와서 교황에게 사과한다고 좋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는 교황을 바티칸에 돌려보내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의 사보나(Savona)에서 3년 간 가택 연금시켰고, 1812년부터는 교황을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끌고 와 퐁텐블로(Fontainbleau) 성에 연금시켰습니다.  특히 퐁텐블로로 교황을 데려올 때 교황은 열병과 변비 등으로 건강 상태가 극히 안 좋았는데도 나폴레옹이 보낸 의사 한명만 동승시킨 채 야간에만 마차로 강행군을 시켜 교황이 거의 요단강을 건널 뻔 했다고 합니다.  야간에만 이동시킨 것은 물론 아직 신앙심이 강한 편이었던 프랑스 남부 주민들이 교황이 그렇게 험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 사람 좋게 생기신 분이 바로 비오 7세이십니다.  그림이 매우 명작으로 보이신다면 눈썰미가 있으신 겁니다.  나폴레옹 전속 화가 다비드가 그린 것이거든요.)




교황의 이런 시련은 1814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패퇴하던 1814년 5월에야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라데츠키 경기병 연대(5th Radetzky Hussars)가 교황을 구출하여 로마까지 호송했습니다.  이때 교황이 감사의 표시로 이 경기병 연대에게 하사한 복잡한 라틴어가 수놓인 군기는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쓰이는 오스트리아 빈의 무기고에 아직도 전시되어있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고, 비오 7세는 영국 정부에게 편지를 써 나폴레옹이 그 섬에서라도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위암으로 죽은 뒤 2년 뒤 사망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보다 먼저 죽었고, 또 죽은 뒤에 혼백으로 사울 앞에 나타났을 때조차도 사울에게 저주를 퍼부은 것(삼상 28:16)과는 꽤 다른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성경에서도 해석에 일부 논란이 있는 사무엘 상 28장에 나오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the witch of Endor)을 통해 사무엘의 영혼과 사울이 만나는 부분입니다.  과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영매를 통해 불러낼 수 있는가가 핵심인데, 특히 사무엘 정도의 선지자는 당연히 천국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재 주된 해석은 진짜 사무엘의 영혼이 불려온 것이 아니라 마녀의 거짓말에 의해 사울이 속는 장면이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nocr.net/index.php?document_srl=23948&mid=koreasy

https://en.wikipedia.org/wiki/Pope_Pius_VII

https://en.wikipedia.org/wiki/Napoleon_and_the_Catholic_Church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napoleon-and-the-pope-from-the-concordat-to-the-excommunication


스파르타는 왜 망했을까 ?

잡상 2019.01.03 06:30 Posted by nasica



몇년 전 영화화되어 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던 영화 300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스파르타 인들의 전설적인 용맹'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오락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불과하며, 많은 허구와 왜곡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줄거리 자체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BC 480년 가을, 바닷가의 협로인 테르모필라에(Thermopylae)에서,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이 곳을 통과하려는 크세륵세스의 수십만 대군을, 수도 훨씬 적고 가난한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상당 기간 저지하다가 결국 옥쇄했던 사건이 이 영화의 배경이지요. 




(테르모필라에를 스파르타가 꽉 틀어막는다고 해도, 바다길이 뚫려 있으니까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본토를 유린할 수 있다고요 ?  사실 그렇긴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원시적인 항해술 수준에서는, 바다로 대규모 원정군을 실어나른다는 것은 백만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으니, 테르모필라에를 돌파하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스파르타 인들의 교육 방식이나 거친 생활상은 거의 대부분 다 사실입니다.  실은 그것보다 더 험악했습니다.  스파르타는 북한을 낙원으로 느껴지게 할 만큼 엄격한 군국주의 국가로서,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피폐했으며, 인권이나 개인의 행복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낸지 오래된 도시 국가였지요.  영화 속에서는, 곱추로 태어난 어느 스파르타 인이, 자신을 버린 조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페르시아 군에게 우회로를 알려주는 바람에 스파르타 군이 전멸을 하게 된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실은 그 지방 농민이 상금을 노리고 알려주었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곱추로 태어난 스파르타 인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그런 배신을 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나치 독일 못지 않은 인권 유린 국가로서, 갓 태어난 모든 아기는 국가에서 검사하여, 만약 불구가 있거나 허약해 보일 경우, 산 속 깊은 구덩이에 내다 버려 죽이는 것이 법제화 되어 있었습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천인공로한 야만 국가였지요.




(배신자라고요 ?  아닙니다.  피해자였을 뿐입니다.)




그리스는 원래 남성 우월주의 마초 국가라서 어차피 여자들에게는 투표권이나 발언권, 재산 소유권 등은 물론 올림픽 관람권조차 모두 거부되었는데, 그나마 스파르타의 여성들에게는 재산권도 있고 또 각종 경기에도 참여할 수 있는 등, 다른 그리스 국가보다는 나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스파르타에서도, 여성들에게 연애 같은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결혼은 약탈혼이라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납치한 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감금한 뒤, 밤에만 (이제는 와이프가 된) 그 납치 여성을 찾아가는 식의 결혼 생활을 상당 기간 유지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와이프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와이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스파르타에 있어서 여자란 튼튼한 아기를 낳기 위한 그릇에 불과했거든요.  따라서 훌륭한 다른 남성 시민의 씨를 받기 위해 와이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고, 거기서 태어난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서 키우는 것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아기는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가혹한 공동 생활을 하며 거의 폭행과 학대에 가까운 공동 교육(agoge)을 받았으니, 아기가 꼭 자기 핏줄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레오니다스 왕의 아내, 즉 여왕 고르고(Gorgo)가 원로원을 설득하여 남편에게 증원군을 보내기 위해 부패한 원로원 의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레오니다스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 뻔한 원정 길을 떠날 때, 그 아내인 고르고가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묻자, 레오니다스는 쿨하게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여 튼튼한 아기를 낳으시오'라고 한마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고 합니다.  최소한 조선 시대처럼 여자들이 정절을 지키거나 청상과부로 늙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부도덕한 일이라고요 ?  동성애가 고상한 취미로 인정되던 시절입니다.  뭐 꼭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적인 가치관과는 많이 다르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며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젊은 미혼 남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젊은 부부 사이에서 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남자들은 15명이 한 조를 이루어 모두 공동 식사(syssitia)를 해야 했으니까요.  어느 스파르타의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집에서 와이프와 함께 먹겠다'며 공동 식당에 사람을 보내 자기 몫의 식사를 자기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가 '개소리 하지 말라'며 면박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먹는 것도 맛없기로 유명한 '검은 국'에 부풀지 않은 보리 빵을 먹는 정도라서, 한마디로 정말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테르모필라에 전투 1년 뒤인 BC. 479년, 스파르타가 이끈 연합군이 플라타에아 (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잔여 병력을 완전 격파합니다.  이때 스파르타의 왕인 파우사니아스 (Pausanias)는 페르시아 진영에서 페르시아 인들이 차려 놓은 산해진미의 식탁을 발견하고는 '이런 욕심쟁이들, 이런 것을 먹으면서도 우리의 보리 빵을 빼앗으려고 쳐들어왔단 말인가' 하고 한마디 할 정도였습니다.




(전형적인 그리스의 만찬 모습입니다.  술잔이 납작한 것이 특징인데, 굳이 스파르타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사람들의 식탁은 그다지 풍성한 편이 못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척 피폐한 나라였습니다.  일단 시민들은 절대 직업을 가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즉,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은 100% 백수였습니다.  이들에게 직업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이들이 항상 신체를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최강의 병사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온나라의 살림살이는 투박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가령 스파르타의 어느 왕이 외국을 방문했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 대들보를 올려다보고는 '이 나라에는 네모난 모양으로 자라는 나무가 있는가 ?'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집은, 왕궁조차도, 그냥 둥근 통나무를 그대로 대들보로 썼던 것이지요.  또 돈이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는 은화를 매개체로 한 상업 활동이 활발했는데, 스파르타는 예외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인 리쿠르구스 (Lycurgus)의 법에 의해, 스파르타에서는 은화는 못 만들게 했고, 오로지 무쇠 동전을, 그것도 뜨거울 때 식초에 담가 '고철 가격도 안 나가도록 만든' 가치없는 동전만을 쓰도록 했으므로, 상업 활동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먼 훗날 사람들이 스파르타의 유적을 파본 다면 스파르타가 전체 그리스를 호령하는 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 시대에 이미 썼을 정도였지요.




(투키디데스의 흉상 보다는 그 어록이 더 마음에 드네요.  "행복의 요건은 자유고, 자유의 요건은 용기이다.")




이렇게 지독하게 살았으니 스파르타가 군사 강국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이런 군사 강국이 대체 왜 망했을까요 ?  신무기가 개발되어 용기와 체력으로 승부하던 스파르타 인들의 전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던 것일까요 ? 


한 나라가 쇠락하는데는 사실 한두 가지의 이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교과서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반목으로 인한 잦은 전쟁과 그에 따른 국력 고갈'을 이야기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면 그 전부터도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해왔던 것이 스파르타입니다.  또,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고, 스파르타와 전쟁을 하던 다른 도시 국가들, 즉 아테네나 테베, 아르고스 등도 전쟁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패배를 맛 본 BC. 371년, 레욱트라 (Leuctra) 전투의 상대는 테베 (Thebes) 군이었는데, 물론 테베 군의 지휘관이 당대의 군사 천재인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이긴 했습니다만, 스파르타 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스파르타 군이 그리스 최강을 자랑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파르타 군의 숫자가 더 많거나 적과 대등할 경우에는 항상 승리했었습니다.  또한, 스파르타의 엄격한 법에 따라, 전투에서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스파르타 군이 보기 흉하게 패퇴하여 방패를 버리고 도주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는데,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은 전사한 자신들의 왕 클레옴브로투스(Cleombrotus)의 시신을 내버려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파르타는 워낙 시민의 수가 적었으므로, 이들을 다 처형할 경우 국가가 끝장 났으므로 이 도망자 처형에 대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의 제갈공명 에파미논다스는 당시 그리스 중장 보병 전술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한 사선 방식의 전열을 이용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도 무적이라는 스파르타 군을 격파해내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또다른 비밀이 있었지요.) 




영화 300을 찍었던 테르모필라에 전투와 이 레욱트라 전투 사이의 불과 100년 사이에, 스파르타에 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길래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일단 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파르타의 인구 감소입니다.  가령 BC. 479년, 플라타에아 (Plataea)로 진격했던 스파르타 인들의 수는 약 5천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썼던 헤로도투스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전체 스파르타의 성인 남자 인구는 8천 정도였지요.  그러나 100년 뒤 레욱트라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인들의 숫자는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에 의하면 고작 700명에 불과했습니다.  동시대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on)의 계산에 따르면 약 1천명 수준이었지요.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는 인구 부족으로 망했다'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제가 중고등학교 때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고 흠뻑 빠져서, 소년 보수가 되었더랬지요. 아마 당시에도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저는 아마 일베의 열성회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스파르타 인구가 그렇게 급격히 줄어든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사이에 전쟁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 사이에 인구가 거의 1/8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흑사병이 돌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스파르타처럼 '건강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적어도 스파르타에서는 사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았으니까, 국민들이 아이 낳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지요.  대체 스파르타에 뭐 운석이 떨어졌거나 조류 독감이라도 번진 것이었을까요 ?


실은 운석이나 조류 독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부로부터 스파르타에 들어오긴 했습니다.  바로 돈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다릭 Daric 금화가 그리스 전체를 망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300만 보면 최후의 승자가 그리스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체적인 그림을 놓고 보면 결국 페르시아가 전체 그리스를 쥐고 놀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케도니아에게 둘다 망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래 스파르타 인들은 100% 백수에 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이 점은 제가 존경하는 신필 김용 선생의 무협지와도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대체 무림의 고수들은 직업도 없는데 어디서 돈이 나서 먹고 마시고 하는 걸까요 ?  아무리 스파르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도, 매일 먹는 보리 빵이나 검은 국, 영화 300 찍을 때 입었던 빤스 같은 것들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물건들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활동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헬로트 (helot)라고 불렀습니다.




(이놈의 세상은 동화나 무협지가 아닌지라, 누군가 영웅 놀이를 하자면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고된 노동을 해서 그들을 먹여살려야 합니다.)




원래 스파르타 인들은 마케도니아 쪽에서 내려온 도리아(Doria) 인이었고, 헬로트들은 라코니아 (Laconia) 지방에 살던 원주민이었습니다.  이 원주민들은 메세니아 (Messenia)라는 국가를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결국 스파르타 인들에게 패배하고 그들의 노예...라기보다는 농노 같은 예속 신분이 되었습니다.  리쿠르구스의 개혁 때, 이들의 토지는 9천개의 일정한 크기로 분할되어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 즉 Spartiates들에게 주어졌고, 그 토지 (이런 영지를 kleros라고 불렀습니다)에서 헬로트들이 농사를 지어다 바치는 것이 스파르타 인들의 경제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는 이렇게 순수 시민권자들, 즉 Spartiates과 그 농노인 헬로트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파르타 주변에는 100여개 마을이 있었고, 여기에는 자유민들, 즉 Perioekoi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처럼 도리아 인이었는데,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엄격한 스파르타 식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 페리오이코이들은 비록 순수 시민권자는 아니더라도, 전장에 나갈 때는 스파르타 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원래 페르시아 전쟁 때까지만 해도 스파르티아테스들과 페리오이코이는 각각 서로 다른 부대로 편성되어 싸웠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이미 하나의 부대 속에 서로 섞여 전우로서 싸웠지요.  전에 언급했던 스파르타 출신 용병 대장 클레아르쿠스(Clearchus)도 사실 스파르티아테스 출신이 아니라 페리오이코이 출신이었습니다. 




(클레아르쿠스에 대해서는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Ananbasis) 에 자세히 나옵니다.  저도 저 펭귄 클래식으로 읽었습니다.)




이들의 경제 생활의 기초 구조는 평등주의였습니다.  원래 스파르타의 성인 시민들을 부를 때 "homoioi"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같은 신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모든 성인 스파르타 시민은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크기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또 특별히 부를 모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씩 빈부의 차이가 있기는 했습니다.  가령 어떤 가난한 집안의 스파르타 소녀가 시집을 갈 때, '지참금으로 무엇을 가져가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제 아버지의 상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들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 인들은 철학적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물질적 부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었을까요 ?  글쎄요, 확실한 것은 다른 도시 국가의 화려한 생활로부터 격리되었다는 점이 스파르타 인들의 검소함의 큰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북한 사람들과 스파르타 인들이 닮은 점 중 하나가,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뭔가 임무를 부여받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용맹함과 고결함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스파르타 인들도, 소수 인원끼리 해외로 나오기만 하면 흥청망청 향락에 빠져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경우가 아주 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시적, 개인적인 일이라서 스파르타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스파르타 인들을 오염시키던 외국의 돈이 스파르타로 물밀 듯이 몰려들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습니다.




(당연히 이것도 읽었지요.  정말 재미있었는데, 다만 자주 나오는 연설 부분들이 너무 길더군요.  이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대중 선동정치가, 즉 데마고그(demagogue)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태였고, 투키디데스도 그런 민회에서 투표 결과 추방당한 몸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씌여져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보수파였던 것은 다 그리스 로마 고전을 탐독한 덕분이었어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시다시피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인데, 전쟁의 양상은 다소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강력한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맹군들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가면, 아테네는 강력한 성벽 뒤에 숨어서 응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워낙 고대라서, 충차나 운제 같은 공성용 병기도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서, 이렇게 농성하는 아테네 군을 공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군이 이렇게 허송세월하는 동안, 아테네 군은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해안, 즉 스파르타의 앞마당에 상륙하여 여기저기를 불지르고 파괴했습니다.  스파르타 인들은 몰라도 그 동맹군들은 원래 직업이 대부분 농부였으므로, 농번기가 되면 결국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지요. 




(이 지도가 보여주는 양상이 초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테네와 그 외항인 피라에우스 항구 사이의 긴 회랑은 긴 장벽으로 완전 요새화되어 있어서, 제해권이 없다면 아테네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아테네의 곡물 수입로인 헬레스폰트 해협, 즉 현재의 이스탄불이 있는 터키 지방의 확보가 매우 중요했지요.  그래서 전쟁은 그쪽 지방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




이런 식으로 몇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자, 스파르타도 아테네를 제대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결국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산층 집안의 시민들이 각자의 갑옷과 방패 등 무장은 물론, 먹을 것까지 각자 부담했던 육군과는 달리, 해군은 돈이 무진장 많이 들어갔습니다.  아테네는 인근에서 개발된 은광을 이용하여 당시의 주력 군함인 3단 노선(trireme)들을 많이 건조했지만, 일부 부자들이 돈을 내어 개인 부담으로 건조된 군함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3단 노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노젓는 노수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노수들은 아테네의 경우 가진 것이 없어서 중장 보병 (hoplites)으로서의 무장을 갖출 수 없는 빈민들이 주로 맡다가, 나중에는 용병으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들에게는 모두 적게나마 급료가 주어져야 했습니다.  또 거친 바다에 나가면 노나 밧줄 등의 소모품도 무척 많이 필요했습니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해군 건설이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주력 군함이던 3단 노선 trireme의 구조입니다.  선체 크기에 비해 승무원 수가 너무 많았으므로, 밤에 잘 때나 식사할 때는 바닷가에 정박해야 했고, 또 선체가 가벼워야 했으므로 그만큼 선체 강도가 약하여, 먼 바다를 항해할 때는 사용하기가 곤란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는 동맹국들로부터 강제로 분담금을 거두어 해군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담금을 거두고 필요한 자재를 구매하고, 노수들을 고용하고 급료를 지불하는 행위는 사실 스파르타 인들에게는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과정에서 많은 스파르타 인이 부패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스파르타는 그리스 각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장군' 1명씩을 여기저기로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현지에서 뇌물을 받아먹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스파르타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었지요.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대전환점이었던,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군을 궤멸시킨 시라쿠사 공방전의 총지휘관이었던 스파르타 인 길리푸스 (Gylippus) 같은 거물급조차도, 동맹국에서 스파르타 본국으로 은화 궤짝을 호송하다가 일부를 착복한 것이 들통나서 외국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30년 묵은 전쟁을 끝낸 스파르타의 명장이자 정치가인 리산드로스의 두상입니다.)




이런 부패는 그나마 작은 문제에 속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돈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눈을 뜨게 된 스파르타 인들이 부의 축적에 나선 것이 스파르타의 몰락을 부추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록 작은 빈부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스파르타 인들은 모두 평등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에 돈 바람이 불면서 결국에는 리쿠르구스 시절부터 내려온 영지(kleros)를 팔아치우는 시민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원래 인간은 평등하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사람들마다 재주와 능력치가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돈 버는 재주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소수인들에게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영지가 집중되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영지를 팔아치운 사람들이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영지를 팔아치운 대부분의 시민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몰락한 시민들은 공동 식사 (syssitia)에 필요한 자기 몫의 비용조차 낼 수가 없었고, 또 자신의 아이를 공동 교육 (agoge) 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는 곧바로 시민권을 가진 순수 스파르타 인, 즉 Spartiates의 지위를 잃는 것을 뜻했습니다.   즉, 스파르타에 전례없던 빈부 격차가 생기면서 스파르타의 전통적 시민 제도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군의 기본 구성 요소는 이 중장보병 hoplites였습니다.  이런 중장보병의 무장은 모두 자비로 마련해야 했는데,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으므로 오직 중산층만이 이런 무장을 감당할 수 있었고, 한 도시 국가의 국력은 도시에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스스로 중장보병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산층이 몰락하여 빈민이 되었다면, 그만큼 도시가 약해졌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몰락한 시민들이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자유인, 즉 페리오이코이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경제적으로 쇠락하여 시민권을 잃은 자들은 자신의 조국 스파르타에 대해 무척이나 분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원래 스파르타에는 웅장한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 도시 방어에 대해 묻자,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인 리쿠르구스가 '벽돌로 쌓은 벽보다 사람으로 쌓은 벽이 더 튼튼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아테네 인이 스파르타 인을 놀리며 '우리들은 에리다노스 (Eridanos, 아테네 인근의 강) 강가에서 너희들을 여러번 무찔렀다' 라고 말하자, 그 스파르타 인은 묵묵히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에우로타스 (Eurotas, 스파르타 인근의 강) 강가에서 너희들을 무찌른 적이 한번도 없군.'  


또, 리쿠르구스는 방어 전략을 묻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하게 살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라."


이는 스파르타의 안보에 있어, 경제적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돈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리쿠르구스의 법제가 꼭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요.  어차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리쿠르구스 체제의 한계가 보였기 때문에 스파르타도 어쩔 수 없이 변화한 것입니다.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알고 보면 결국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를 금전적으로 후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체제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지요.  그 한계는 결국 나중에 '안탈키다스의 평화'라는,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에게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을 팔아넘기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BC. 479년, 플라타에아 (Plataea)로 진격했던 Spartiates 5천명이 BC. 371년, 레욱트라 (Leuctra) 전투에서는 불과 7백명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스파르타의 병력은 훨씬 많았습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동맹군을 합하면 스파르타 측은 무려 1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항하는 테베 군은 6천~7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민 공동체로서의 애국심이 사라진 군대는 백년 전 플라타에아 전투에 참전했던 그 스파르타 군과는 질적으로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날의 패전 이후, 스파르타는 지속적인 쇠락을 거듭하며 평범한 시골 마을로 변모해버렸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스파르타의 패망은 레욱트라 전투의 결과 때문이 아닙니다.  레욱트라 전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고, 그 원인은 스파르타에서 심각해진 빈부 격차였던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군 전법은 매우 단순하여, 중장보병의 밀집 대형, 즉 phalanx들끼리의 충돌에서 어느 쪽이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더 우세한가를 겨루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식 축구의 스크럼 싸움과 비슷했지요.)




세상에 빈부 격차가 없을 수는 없고, 또 적절한 빈부 격차는 경제에 활력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 보수 쪽에서 중시하는 대로 경제적 자유를 그대로 풀어놓아 두면, 반드시 빈부 격차는 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의 능력은 평등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약육강식의 경제 활동 속에서도 빈부 격차를 줄이려는 어느 정도의 조치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PS. 


위에서 언급한 에리다노스 강과 에우로타스 강 이야기처럼, 스파르타 인들은 짧고도 강렬한 경구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이런 촌철살인의 짧은 경구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라코닉 (laconic, 스파르타가 있던 지방의 이름이 라코니아) 하다고 표현하지요.  가령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장 낸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 (Lysandros)가 아테네를 정복한 뒤 본국의 장로들 (Ephor)에게 보낸 편지에는 딱 한줄, '아테네를 정복했음'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에서는 '말이 너무 길다, 그냥 "정복"이라고만 썼으면 충분했을 것을' 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라코닉한 표현 중에 최고의 것은 스파르타의 몰락 이후에 나왔습니다.  바로 다음의 경우였지요.




(영화 알렉산더에서 발 킬머가 열연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입니다.  실제로도 그는 애꾸눈에 광폭한 사내였다고 하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스파르타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만약 내가 라코니아에 들어간다면 스파르타를 평지로 갈아 없애 버리겠다" 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대해 스파르타 인들이 보낸 답장에는 단 한 단어, "αἴκα (If, 만약에 말이지)" 이라는 단어만 씌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은 필립 2세는 스파르타 정복을 포기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스파르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