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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쓰리 빌보드 아웃사이드 에빙, 미주리'에 나온 이 노래의 정체는 ? -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가사

by nasica 2020. 5. 14.

 

최근에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는 한줄 요약하면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혼한 아빠가 엄마를 찾아와 이야기를 하다가 성질이 나니까 탁자를 엎어버리고 엄마를 두들겨 패려하는 상황에서 엄마를 보호하려는 아들이 아빠 목에 식칼을 들이대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감히 친부의 목에 칼을...' 하며 손사래를 칠 내용이겠습니다만, 가정 폭력에서 엄마를 지키려는 용감한 아들의 믿음직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기서 아들로 나오는 배우는 Lucas Hedges인데, 요즘 인상 깊게 본 영화에는 다 저 젊은 배우가 조연으로 나오더군요.  Manchester by the Sea, Lady Bird, Ben is back 등등)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미국 남부는 원래 좀 괴상한 곳이라는 점이 한 몫 했습니다.  저는 직장 때문에 텍사스에 자주 가봤고 가끔씩은 몇 달씩 체류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텍사스를 포함한 남부에는 뭔가 좀... 그런 면이 좀 있습니다.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한번도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텍사스는 유별나서 자동차 범퍼 스티커 등을 통해 자신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것을 뽐내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의 각 주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지만, 텍사스의 '텍부심'처럼 자기 고장에 대한 자랑이 유별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면 '아니, 난 텍사스 출신인데'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지요. 

 

영화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도 토니 스타크가 피터 퀼에게 '너 지구 출신이냐 ?' 라고 물으니 '아닌데, 난 미주리 출신인데' (“I'm not from Earth I'm from Missouri")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그런 이상한 '남부심'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난 지구 출신이 아니라 미주리 출신인데"   "그래 그게 지구에 있다구, 이 멍청아.")

 

 

 

미국 남부가 저같은 외국인들에게 기괴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특히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북부놈들에게 졌다는 자격지심과 함께 그래도 자신들이 더 정당했다는 정신승리가 복합된 묘한 정서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가령 전에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Austin) 주청사를 방문했을 때 보니, 사방의 역사적 기념물과 관공서 건물 등에 남북전쟁 때 북군에 맞서 싸운 자랑스러운 남부 동맹군 관련 동상과 전쟁화 등을 잔뜩 치장해 놓았더군요.  그러나 그런 동상이나 기념비들은, 노예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우리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는 자기합리화 구호로 도배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남부 애들은 나찌 독일의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로부터는 한 2만 광년 떨어져 있고 일본은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는 일본 바로 옆동네 정도 되는 곳인 셈입니다.

 

이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라는 영화 속에서도 아직 50~60년대에 살고 있는 남부 미주리 사람들의 정서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런 동네에서도 '용서'의 미덕을 찾는 사람들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쓸데없는 눈물과 억지 감동이 아니라 비아냥과 냉소, 쿨함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고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것이니 생략하겠습니다.

 

 

 

 

(꼴통 남부 레드넥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딕슨(Sam Rockwell 분)입니다.  이 사람과 주인공 밀드레드(Frances McDormand 분)와의 갈등과 용서가 이 영화의 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샘 락웰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프랜시스 맥도먼은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다음 번에 다루려고 하는 영화 '조조 래빗'에서도 샘 락웰은 정말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유색인종과 동성애자를 극혐하는 꼴통으로 나오는데 조조 래빗에서는...)

 

 

 

이 영화에서는 제 귀에 무척 반가운 음악이 삽입되어 더욱 즐거웠습니다.  전형적인 남부 레드넥인 딕슨 경관이 어느 술집에서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 쥬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바로 존 바에즈(Joan Baez)의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입니다.  저는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그 멜로디와 후렴부를 듣고는 그냥 '미국 남부를 자동차로 여행하는 이야기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곡조는 경쾌한 컨트리 뮤직 같고 가사는 다소 해학적이라서 그냥 얼핏 들으면 분위기 띄울 때 좋은 신나는 노래 같거든요.  그러나 바에즈가 골라서 부른 노래 중에 그냥 신나는 곡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 노래 역시 바에즈 오리지널 곡이 아니라 원래 The Band라는 밴드의 리더인 Robbie Robertson이 작사작곡한 것입니다.  이 노래는 한줄 요약하면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인의 시각에서 남부 동맹 최후의 순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꽤 심오한 역사적, 군사적, 철학적인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먼저, 1절 가사에 나오는 65년이라는 것은 당연히 1865년을 뜻하는데, 이 해에 리치몬드가 함락되고 전쟁이 끝났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부분이 'Til so much cavalry came and tore up the tracks again 이라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바에즈가 이 노래를 취입할 때 제대로 된 악보와 가사집을 넘겨 받아서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The Band의 오리지널 곡 레코드를 듣고 받아 적어서 부르는 바람에 '잘못' 받아적은 것입니다.  (같은 영어권 사람들끼리도 딕테이션 100점 받기가 어려운가 봐요.)  원곡은 아래와 같이 'Til Stoneman's cavalry came and tore up the tracks again 입니다.  바에즈가 Stoneman이라는 단어를 잘못 듣고 So much라고 적은 것이지요.

 

Virgil Caine is the name

And I served on the Danville train

'Til Stoneman's cavalry came

And tore up the tracks again

In the winter of '65, we were hungry, just barely alive

By May the tenth, Richmond had fell

It's a time I remember, oh so well

 

 

 

 

(노래 가사 속에 나오는 영광을 얻은 조지 스톤맨입니다.)

 

 

 

원 가사에 나오는 '스톤맨의 기병대' 라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서, 북군 기병대를 이끌고 남부에 몇차례 우회 침투하여 주요 수송 철도를 반복적으로 파괴한 북군 장교 조지 스톤맨(George Stoneman)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노래 가사에 나오는 댄빌(Danville)에서 리치몬드(Richmond)에 이르는 철도는 남부군의 주요 수송로였습니다.  이 노래는 전쟁에 관한 노래이지만, 대전투 이야기는 없고 수송로 파괴와 그에 따른 패전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 노래는 정말 전쟁의 본질에 대해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장군의 애국심과 병사들의 용기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보급으로 이기는 것이거든요.  

 

 

 

 

(이건 1882년의 지도이긴 합니다만, 리치몬드와 댄빌을 연결하는 철도의 지도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핵심 보급선이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나오는 로버트 E 리 장군을 만나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주인공 버질의 와이프는 남부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로버트 E 리 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행군하는 것을 보고 남편보고 빨리 와서 보라고 하지만, 버질은 시큰둥합니다.  이미 패배하고 있던 당시 남부 동맹군은 무척 절박한 상황이라서 가는 곳곳마다 물자를 징발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돈이 쓸모가 없다'라는 부분은 그렇게 물건을 다 가져가고 그 물건값으로 두고 가는 돈이 사실상 부도수표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당시 북부나 남부나 지폐를 잔뜩 찍어서 전쟁 비용을 댔지만, 특히 그건 남부가 훨씬 심했습니다.  북부에서는 세금도 많이 올려서 비용을 충당했으나 남부는 세금보다는 지폐 발행에 더 많이 의존해서, 북부가 지페 공급량을 2배로 늘린 것에 비해 남부는 20배나 늘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돈이 아무 쓸모가 없지요.

 

 

 

 

(남북전쟁의 진행에 따라 남부의 물가 상승률을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돈을 그렇게 찍어대니 당연히 인플레가 생기는 것입니다.)

 

 

 

3절이 핵심이지요.  아무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전쟁과 복수, 그런거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용감한 척, 심각한 척,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지만, 정말 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전쟁 따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미국 남북 전쟁에 대해서는 영화도 많고 소설도 많습니다만 많은 부분이 용기와 희생 자유 따위에 대해서 미화를 할 뿐입니다.  전쟁의 추악함에 대해 그린 남북전쟁 영화를 보시고 싶으신 분께는 주드 로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2003년 영화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을 추천드립니다.  진짜 명작입니다.  

 

 

 

 

('콜드 마운틴' 중 한 장면입니다.  전쟁과 무관하게 살고 싶은 민초를 짓밟는 것은 남부군 북부군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캐스팅이 너무 화려해서, 나탈리 포트만이 저렇게 단역으로 나올 정도입니다.)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의 가사는 로비 로버슨이 무려 8개월 간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공부한 끝에 지은 것입니다.  신기한 부분은 곡을 만든 로비 로버슨은 캐나다인으로서 미국 남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심지어 백인과 모호크 인디언의 혼혈이라고 합니다.  다만 밴드 구성원 중 유일한 남부인인 드러머 Levon Helm이 이 곡을 만들 때 도움말을 주었고, 보컬도 남부 사투리가 익숙한 헬름이 맡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오리지널 곡은 별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고, 존 바에즈가 부른 곡은 1971년에 빌보드 차트 3위에 까지 올라서 존 바에즈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리본 헬름은 존 바에즈의 버전을 매우 싫어해서 존 바에즈에게 커버링을 허락해준 로버슨과 불화가 있었고, 결국 The Band는 이 곡을 이후로 전혀 연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존 바에즈의 버전은 아래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rKrdbCbAxZ0

 

이건 존 바에즈의 라이브 공연입니다.  

 

https://youtu.be/nnS9M03F-fA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Virgil Caine is my name and I drove on the Danville train

'Til so much cavalry came and tore up the tracks again

In the winter of '65, we were hungry, just barely alive

I took the train to Richmond that fell

It was a time I remember, oh, so well

 

내 이름은 버질 케인, 댄빌 열차를 몰았지.

그러다가 기병대가 몰려와서 철도를 또 엎어버렸어.

1865년 겨울, 우리는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었지.

난 기차를 함락된 리치몬드로 몰고 갔어.

아,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너무 또렷해.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And all the bells were ringin'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And all the people were singin'

They went,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온 동네 모든 종이 일제히 울렸지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불렀지

이렇게 말이야 "나나나나 나나나나"

 

Back with my wife in Tennessee

And one day she said to me

"Virgil, quick! Come see

There goes Robert E. Lee"

Now I don't mind, I'm chopping wood

And I don't care if the money's no good

Just take what you need and leave the rest

But they should never have taken the very best

 

테네시 우리집에 와이프와 함께 있던 어느날

와이프가 부르더군

"버질, 빨리와서 봐 !

저기 로버트 E. 리 장군이 가쟎아."

난 관심없어  난 장작이나 팰래

그들이 던져주는 돈이 휴지조각이래도 상관없어

그냥 필요한 건 가져가고 나머지는 냅두라고

하지만 가장 소중한 건 가져가지 말았어야지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And all the bells were ringin'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And all the people were singin'

They went,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온 동네 모든 종이 일제히 울렸지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불렀지

이렇게 말이야 "나나나나 나나나나"

 

Like my father before me, I'm a working man

And like my brother before me, I took a rebel stand

Well, he was just eighteen, proud and brave

But a yankee laid him in his grave

I swear by the blood below my feet

You can't raise a Caine back up when he's in defeat

 

내 앞의 아버지처럼 난 노동자야

내 앞의 형처럼 난 반란군 편에 섰지

형은 고작 18살이었지만 건방지고 용감했지

하지만 양키놈이 저승으로 보내버리더군

내 발 밑에 고인 피를 두고 맹세하건데

쓰러진 케인 가문 사람을 도로 살려낼 수는 없어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And all the bells were ringin'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And all the people were singin'

They went,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온 동네 모든 종이 일제히 울렸지

그들이 남부를 무너뜨리던 밤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불렀지

이렇게 말이야 "나나나나 나나나나"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Richmond_in_the_American_Civil_War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Civil_War

https://en.wikipedia.org/wiki/Richmond_and_Danville_Railroad

https://en.wikipedia.org/wiki/The_Night_They_Drove_Old_Dixie_Down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Stoneman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te_war_finance

 

 

댓글14

  • 남부 2020.05.14 08:11

    150년이 넘게 자격지심과 정신승리가 이어지는 것도 참 신기합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답글

  • aaa 2020.05.15 00:30

    용서라...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이번에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도 그동안 막대한 성금과 보조금을 횡령해온 위안부 단체에 더 이상은 이용당하지 않겠다면서, 한일 청년들이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위대한 용서의 뜻을 내비치셨더군요. 물론 정신나간 사람들이 '저 위안부 할머니는 치매에 친일파다'라는 어이없는 프레임으로 공격하고는 있지만 어쨌든 누군가로 인해 돈 10만원만 잃어도 절대 용서못할거 같은 저로서는 정말 용서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답글

  • ㅇㅇ 2020.05.15 17:56

    물지 않으면 짖지도 말라는 말이 있듯 피해자가 가해자한테 왜 반성하지 않느냐 따지는 것도 웃긴겁니다. 인간이란 원래 간사해서 타인의 사정따윈 아무런 관심이 없거든요. 상대에게 말로 자발적 반성을 요구하면 그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선택의 하나일 뿐입니다. 즉 필수가 아니죠. 진정한 반성이란 힘으로 무릎을 꿇려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겁니다. 법의 집행이란 것도 그런 힘에 의해서 작동합니다. 근데 한국인들은 정의를 집행할 힘이 없기에 이뤄질 수 없는 가짜 정의를 신봉할 수 밖에 없어서 일생을 고통속에서 보내고 있죠. 그게 한이되서 한의 민족이라 생각함.
    답글

  • 웃자웃어 2020.05.16 23:29

    나시카님 근데 1807년의 하일스베르그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가 러시아군 사상자보다 더 많이 나온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일라우 전투는 이탈리아나 독일지역이였으면 러시아군이 프랑스군의 숫적 우위에 짓눌려서 괴멸되었을것이 폴란드의 열악한 식량사정과 낙후된 도로망 때문에 러시아군 괴멸에 실패하고 쌍방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낸것(프랑스가 좀 더 많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 저는 하일스베르그 전투가 러시아군이 보루의 은엄폐를 받으며 싸운걸로 알고 있습니다.
    답글

    • nasica 2020.05.17 10:51 신고

      그 전투는 장 란이 저지른 대표적 실수 중 하나였습니다. 러시아군이 훨씬 막강한 상태였는데도 무리해서 공격하다가 괜히 쓸데없는 손실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최홍락 2020.05.17 08:05

    1. 남부의 자격지심과 정신승리의 기원은 남북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남부인들이 가졌던 일종의 ‘북부를 위해 희생한다’는 피해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남북전쟁 직전 남부와 북부의 소득 격차는 79 대 100. 독립전쟁 직후에는 51대 31로 남부가 훨씬 잘살았으나 산업화와 서부 개척이 진행되면서 북부의 경제력이 3.2배 크는 동안 남부는 1.5배 성장에 그치게 되는데요.

    소득세나 재산세가 없어 연방 수입의 대부분이 관세에서 나오던 시절, 미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수출입에 고율 관세를 매겼는데, 이는 남부인들에게 불리한 측면이 있는 것이, 면화와 담배를 수출하면서 고율 관세를 내고 남부에서 인기가 높은 유럽산 사치품 등에도 고율 수입 관세가 붙어 이중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이 높았습니다. 이는 1791년에서 1845년까지 남부 노예주들이 낸 관세는 7억 1,100만 달러. 같은 기간 중 북부가 낸 관세는 2억 1,000만 달러에 머물렀다는 것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는게 연방 재원의 활용에 있어 관세로 거둬들인 연방 예산이 4 대 1의 비율로 북부에 더 많이 배정됐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이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튼과 헨리 클레이 중심으로 제조업이 많은 북부에 투자가 몰린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경제적으로 남부가 받은 차별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긴 했지요.

    2. 남북전쟁 이전에 쌓여온 불만은 남북전쟁이 끝났다고 해소된 것도 아닌 것이, 남부는 1960년에 이르러서야 1인당 소득에서 전쟁 전의 수준을 가까스로 회복했다고 합니다. 거의 100년이 걸린 셈이지요. 전쟁 기간동안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의 '바다로의 진군'을 통해 조지아주의 서배너로 진격하면서 지나치는 곳마다 민간인을 빼고 전쟁 수행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였습니다. 아예 1860년 인구조사 기록을 토대로 조지아 주에서 식량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들을 일부러 골라 지나갔고, 진짜로 약탈을 체계적으로 잘 했습니다. 특히 철도의 경우 노래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철도와 레일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확실하게 못 쓰게 하려고 녹여서 나무에다가 둘러놓았는데 이것을 보고 남부인들은 셔먼의 넥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남부가 입은 손실은 그 당시 1억 달러. 이를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0억 달러(10조 원 이상)에 가까웠습니다.

    이 파괴전이 불러온 경제적인 영향은 또 있었습니다, 전쟁 전에는 남부는 흑인 노예 노동력으로 엄청난 면화를 매일 같이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같은 나라들에 수출을 하고 있었습니다.수많은 사람의 이권과 경제적 목숨줄이 미시시피 삼각주에서 출항하는 선박에 의존하고 있던 셈이지요. 그러던 것이 전쟁이 끝나고나니, 농장은 파괴되고, 노동력이었던 흑인 노예들도 떠난데다가, 기존 거래처들은 영국의 경우 이집트와 인도, 프랑스는 아프리카 토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등 대체지를 찾아버려 그야말로 경제가 박살이 나버렸지요.

    3. 남부의 물가상승을 이끌어낸 것은 남부가 전쟁비용을 세금보다는 채권을 통해서 조달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화보증채권이라는 것인데,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화로 매매할 수 있었던 일종의 외화 표시 국채로 채권 보유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면화로 교환이 가능했습니다. 교환 가격은 1 파운드(무게) 당 12센트로 당시 국제 시장 면화 매매가격인 파운드당 48센트보다 훨씬 저렴했지요. 이 채권에 투자한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 수상이 되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있었습니다. 전쟁 후에 면화 공채를 갖고 있던 해외투자자들이 북부, 즉, 미국 연방정부에 부채 승계를 요구하며 상환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해서 손해를 많이 보았지요.

    물가상승곡선이 전쟁 후반에 급격히 상승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가 상승 변곡점이 빅스버그의 함락, 애틀랜타의 함락 이후 급격히 상승한 것이 면화가 손실을 입기도 했지만, 면화를 수송하기 위한 통로가 상실되면서 더 이상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혀버린 것도 원인이었지요. 화폐를 발행해서 (170억달러)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엔 이미 남부의 상황 자체가 최악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남부의 지폐가 조잡한 수준이어서 위조 화폐가 넘쳐난 것은 덤이었고요.
    답글

  • reinhardt100 2020.05.17 16:21

    남북전쟁의 특징은 초기에는 남군의 연속적인 북부에 대한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북군의 지나칠 정도로 막대한 군수보급에 의한 소모전이었지만 빅스버그 공략 이후에는 북군의 대규모 초토화전술을 동반한 동시다발적인 공세와 이를 막기 위한 남군의 기동방어죠.

    최홍락님이 잘 써주셨는데 남부는 채권발행으로 전쟁을 치렀는데 이 채권 때문에 미국이 1879년이 넘어서야 겨우 금본위제로 복귀 할 수 있었습니다. 즉, 17년이나 불환지폐로 경제를 돌렸다는 건데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와는 1900년대 초까지도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았죠. 오히려 이 시기 유럽에서의 미국 최대의 우호국은 프로이센과 후신인 독일제국, 그리고 의외로 러시아였죠.

    남북전쟁에서 한 가지 잘못 알려진 사실이 전체적으로 남군의 질적 수준이 북군보다 높았다고 하지만 그건 과장이 심한 오해입니다. 실제로 전쟁 전 미합중국 육군 장교단 중 장성급 및 영관급의 2/3 가까이는 연방군에 잔류했고 해군은 거의 3/4 이상이 연방군에 잔류했죠. 오히려 정말 문제되었던 것이 하사관인데 이건 당시 군 하사관 학교 중 최대비중을 차지하던 학교가 버지니아에 있었는데 여기가 남부에 가담하면서 상당수 인원이 반쯤 끌려가듯이 남군에 들어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18세기 혁명전쟁과 20세기 러시아 내전 당시와 똑같은 일이 북군에서 있었는데 바로 장교선출제가 시행되었다는 겁니다. 혁명전쟁 초기의 프랑스군, 러시아 내전 초기의 볼셰비키 중심의 적군은 연대장 이하 장교를 병사투표에 의해 선출했는데 남북전쟁 초중기의 북군도 대대장이나 연대장급 장교를 대거 병사투표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장교단을 충원합니다. 이게 재미있는게 세 군대 모두 당시 전사에서 최대급 병력 운용을 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군의 총 병력은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상시 전개병력 100만을 돌파했고 북군 역시 19세기 최대 상시전개 150만을 넘어갔다는 겁니다. 적군은 역사상 처음으로 상시 전개병력 500만을 처음 돌파한 적이 있었죠. 의외로 이 군대들의 전적이 나쁘지 않았던 이유가 장교선출 당시 병사들의 기준이 간단했습니다. '자기들을 얼마나 잘 살아남게 해줄 수 있는가?' 이거 하나였죠.

    남북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철도전쟁의 시작을 보여주었던 것과 전열보병의 확실한 종언, 연대 및 사단단위의 상설포병 배치 등입니다. 빅스버그 공략전이 시작한 1862년 이후 북군은 대규모 철도망을 통한 포토맥군과 서부군, 해군의 3개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남군의 기동전 공간을 최대한 중립주(켄터키, 미주리, 워싱턴, 메릴랜드) 및 서부버지 니아, 펜실베이니아 등으로 묶어버렸습니다. 1862년~1864년 당시 미국 총 제조업 생산량의 40% 이상을 포토맥 군 단 1개군이 소비할 정도로 거대한 보급을 받쳐준 게 바로 북부의 철도망이었는데 이걸 막아내기 위해 남군이 할 수 있던 건 다수의 기병부대를 통한 철도망 습격이 고작이었습니다. 북군 역시 철도망 유지를 위해 전선 전개병력 기준 1/3 이상을 항상 철도망 주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남군의 습격을 방어했죠. 의외로 중립주 및 전장이 된 연방소속 주민들이 철도유지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건 이 철도가 주민들 밥줄과 직결되어 있었으니까요.

    또 초기 남군의 전투방식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피로써 북군의 물량을 막아낸다.'는 방식인데 물자가 상시 부족했던 남군은 상대적으로 북군에 비해 전열보병 혹은 산개 후 각 제대에 의한 대규모 강습돌격으로 북군의 전열을 붕괴시키는 식의 전투양상을 의도했는데 이게 점차 안 먹히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북군 역시 초기에는 전열보병에 의한 전투를 주도했지만 자신들이 남군의 방어선에 연속 총검돌격을 감행했다가 무려 12만의 사상자가 나서 포토맥군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이게 안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게 결정타였죠. 이후 안티덤에서는 두 배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남군의 총검돌격으로 전열이 붕괴 직전까지 갔는데도 막아내어 전열유지에 성공했고 게티즈버그에서 마침내 호각의 전력으로도 남군의 피케트 사단장이 지시한 2만에 가까운 대규모 총검돌격을 화력전으로 붕괴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남군에게는 전술적 역량이 이제 남지 않는 상태까지 됩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와 안티덤 전투, 첸슬러스빌 전투 등을 통해 북군이 얻은 가장 큰 전훈은 바로 대규모 화력투사만이 남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죠. 초창기 포토맥군 사령관이던 멕클레란이 반쯤 강제로(?) 목이 날아간 상황에서 비록 무능했지만 보급전에 대한 감각은 있었던 후임 사령관이던 후커는 대규모 포병전력을 이원화하는 방식으로 개편했습니다. 즉, 연대 및 사단포병이 상설화된 것인데 기존 군 사령관 직할 포병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대규모 포병 전력을 증원한 것이다보니 남군이 직면한 화력 수준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후커가 잘린 후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포토맥군 사령관이던 미드가 남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남군의 피케트 공세를 군 사령관 직할 포병전력으로 남군의 포병전력과 대포병전을 벌이는 사이 연대 및 사단포병을 동원한 화력투사로 남군 주력 1/3을 두 시간만에 붕괴시켜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이후 남군은 북군을 상대로 다시는 대포병전을 걸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셔먼의 초토화공세, 이게 미군 전사에서 엄창나게 중요한 이유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의 전략폭격이 여기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략폭격이란 걸 해 본 국가는 미국, 독일, 영국 그리고 의외지만 일본 정도밖에 없는데 모두 폭격기 전력이 나름(?) 충실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독일, 영국, 일본의 폭격기 전력 수준은 미국에 비해 전쟁 전에도 한참 떨어졌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전간기 미군의 전쟁수행방식이 '본토에 접근하는 적군 주력을 장거리 폭격기 전력으로 한 번 감쇄시킨다'는 것이었는데 이 방식의 원조가 바로 셔먼의 초토화공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에 따라 독일과 일본이 전쟁 당시 얻어맞은 폭격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했죠. 그나마 독일에서는 주간폭격 중심이었고 캄후버 라인이나 다른 방공망이 나름 튼실해서 세계 최대의 방공전력을 가진 국가답게 1944년 루프트바페 주력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텼지만 일본은 말 그대로 1944년 사이판 함락 직후, 아니 1945년 이오지마 전투 이후 말 그대로 내지와 외지, 심지어 만주에 있던 안산공업지대까지 미군 폭격사정권에 들어가면서 그대로 초토화가 됩니다.

    남북전쟁 당시부터 미군의 전쟁수행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보급역량에 근거한 거대한 화력투사' 이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합니다. 전에 제가 쓴 댓글이 있습니다. 조미니의 전쟁술에 근거한 수리적 측면에 근거한 화력투사에 의한 적 전력의 소모야말로 냉전기 서방권과 동구권의 전쟁수행이라고. 지금 미군이 아프간, 이라크 등에서는 인명 피해 때문에 거대한 화력투사 대신 정밀화력투사로 바꾸어서 하고 있지만 본질을 같습니다. '얼마나 효율적인 보급역량 사용인가?' 이거로 압축됩니다.

    남북전쟁 글을 보고 이것저것 생각난 것을 다 적어봤네요. 한동안 이직하느라고 바빠서 글도 잘 안 봤습니다. ^^ 간만에 길게 썼는데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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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홍락 2020.05.17 21:55

      금본위제로 복귀가 1879년이 되서야 이루어진 것은 채권 문제도 문제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865년 전쟁이 끝난 후 금태환을 재개하기 위해서 금본위제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 발발 및 금태환정지 기간 전과 같이 금은본위제를 택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유럽의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금본위제를 택하게 되면 바로 은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이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로 인해 상당기간 금태환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가, 1873년 금본위제의 채택을 위한 전단계 조치로 은화를 폐기하게 되는데, 그 결과 통화량이 줄어들게 되고 물가가 하락하게 됩니다. 물가가 하락하면 소득은 줄어드는데 부채가 많은 경우 상환부담이 더 커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피해를 가장 크게 겪었던 농민들을 중심으로 심한 저항이 일어났으며, 이를 ‘1873년의 범죄’라고 불렀을 만큼 상황은 심각했지요. (물론 당시 비엔나 증시 폐장과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정책의 타이밍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결국 미국정부는 다시 은의 유통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점진적인 폐기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6년이 더 흐른 1879년이 되어서야 금본위제를 채택할 수 있었다. 미국이 1879년에 금본위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채택된 금본위제도 의회에서 서부 은광업자들과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블랜드-앨리슨법'을 제정(연방정부가 일정량의 은을 매입하여 금화와 함께 은화를 발행하는 법.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 복본위제도로 돌아가자는 법입니다.)한 것을 공화당의 러더포드 헤이스 대통령이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고, 바로 그날 의회가 재의결을 통해 이 법을 밀어붙이는 등 정치적으로 굉장히 취약했습니다.

    • nasica 2020.05.18 18:35 신고

      항상 알찬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20.05.18 21:28

      최홍락)간만에 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정치적인 이유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당시 넘쳐나던 금도 금이지만 본격적인 은 채굴이 시작하면서 은의 과잉공급도 있었으니까요.

      미국의 실버맨들이 저 때 이후로도 두차례 크게 들고 일어났었는데 특히 1896년 대선이 매우 중요했었습니다.

  • 수비니우스 2020.05.17 22:45

    "그러니까 미국 남부 애들은 나찌 독일의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로부터는 한 2만 광년 떨어져 있고 일본은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는 일본 바로 옆동네 정도 되는 곳인 셈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이 인상깊네요. 대략 정신이 멍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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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iway 2020.05.18 12:38

    1. "바에즈가 골라서 노래 중에" 여긴 문맥상 오타가 아닌가 싶네요
    2. 최홍락님과 reinhardt100 님의 댓글은 참 좋네요. 분탕종자들 때문에 댓글은 스킵할까 싶다가도 이런 댓글들 때문에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3. 콜드 마운틴은 저도 참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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