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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빵과 금화 - 나폴레옹 시대의 징발 이야기

by nasica 201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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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던 1805년 11월, 린츠(Linz)로부터 빈(Wien)을 향해 전진하던 란의 제5 군단은 (전투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심각한 보급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진흙투성이 길로 강행군을 하는데다 추운 늦가을에 노숙을 하는 것도 고달픈데, 먹을 것까지 부족하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지요.  그때 란의 개인적인 형편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아팠거든요.  란은 아픈 상태에서도 부하들이 겪고 있던 보급 부족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이런 것이었지요.


"어떤 병사 또는 부대라도, 약탈, 사사로운 싸움 및 위협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장교를 구타할 경우 즉각 총살될 것이다.  집행 권한은 사단장이 행사한다."


이에 따라 실제로 일부 병사는 총살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약간 혼란에 빠지실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원래 보급이란 것이 없고 그저 현지 약탈에 의존해서 먹고 사는 것 아니었던가요 ?  그런데 느닷없이 약탈하면 총살을 하겠다니요 ?


여기서 우리는 사사로운 약탈과 징발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탈은 영어로 pillage, 불어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pillage(피야쥬)라고 합니다.  징발은 영어로 requisition, 불어로도 역시 réquisition(레퀴지시옹)이라고 하지요.  짐작하시다시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전해진 말입니다.  약탈이나 징발이나 군대가 주민들의 사유 재산을 강제로 가져가는 행위라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약탈은 주민들에 대한 아무 보상 없이 이루어지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에 비해서 징발은 군대가 필요에 의해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 수행하는 공식 행위이고, 그에 대해 즉각적인, 혹은 향후에 보상이 이루어집니다.



(자신들과 군마들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입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감자가 밭에 없는 계절에 작전을 펼치는 것은 병사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라고 할 만큼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의존도는 높았습니다.)



보상이라고요 ?  설마 주민들에게서 빵이나 밀가루, 와인 같은 것을 가져올 때 돈을 주고 사오는 것인가요 ?  예 맞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현장에서 즉각 돈을 지불하고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도로 각 연대에는 민간인 신분인 병참 장교(commissariat)가 할당되어 금화나 은화를 담은 튼튼한 돈 궤짝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할 경우의 이야기였고, 대부분의 부대들은 현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돈 궤짝 속에 든 돈은 병사들의 급료를 주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거든요. 


결국 대부분의 징발 댓가는 병참 장교가 무성의하게 쓱쓱 휘갈려 써준 징발 영수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액수보다는 주로 징발된 물품이나 서비스의 물량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령 밀가루 몇백 파운드, 와인 몇 통, 옷감 몇 평방 미터, 구리솥 몇 개 뭐 그런 식이었지요.  이런 영수증은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 시장 가격으로 징발 대상자에게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아마 제 값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징발 대상이 된 주민들은 그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징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본인이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러시아와 제3차 대불동맹전쟁을 준비 중이던 1805년 9월 22일, 북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있던 양아들 외젠(Eugene)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가 데려온 새 아빠를 만나보니 나폴레옹이었다는 행운의 소년 외젠 보아르네입니다.  그는 나폴레옹 패망 후에도, 나폴레옹 덕에 얻은 장인어른인 바이에른 국왕 덕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한 곳에 집결한 8만 대군을 먹이기 위해서는 지방민들로부터 밀과 와인, 사료, 귀리, 밀짚을 징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야.  우린 군 편성도 잘 되어 있고 파리로부터의 자금 조달도 용이한 프랑스령 알사스(Alsace)에서도 이 조치를 취해야 했지.  모든 물자의 가격이, 준비해둔 거액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버렸거든.  우리가 훨씬 이전부터 물자 집적소를 준비해 둔 곳에서는 징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징발은 필수조치였어.  오스트리아군도 독일과 베네치아에서 징발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대군을 먹일 방법이 없었겠지.  그런 징발에 대해 지방민들은 적절한 가격을 지불받을 것이야."


즉, 나폴레옹은 정상적인 군수품 구매 계약이 가능한 경우에도, 때로는 강제로 물품 구매가를 깎기 위해 징발을 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규모 작전 수행 준비 중이거나 한창 전쟁 중에는 모든 물자의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각 부대들이 장기간 원정에 대비해 미친 듯이 물자를 사모을테니, 공급이 뻔한데 수요가 많아지면 물가가 오르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가격을 강제로 통제하기 위해 구매보다는 일부러 징발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징발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나폴레옹은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민중은 툴툴거리기 마련이지만, 그 불평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단다.  오스트리아군도 같은 주민들에게 비슷한 규모로 징발을 했고,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더 많이 했다.  게다가, 주민들은 만약 징발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군대가 무력으로 물자를 빼앗아 갈 것이므로 상황이 더 안 좋아질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


이런 징발은 자국 영토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적국 영토에서도 마찬가지 원칙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즉, 적국 마을에서 보급품을 조달한다는 것이 산적처럼 무자비하게 주민들로부터 사유 재산을 강탈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참 장교의 꼼꼼한 물품 확인 및 영수증 발행 작업 하에, 나름 조직적으로 징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지 신사다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측면 뿐만 아니라, 군 전체의 효율적인 보급과 작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적국 마을을 점령한 병사들이 장교들의 지휘가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배고픔 혹은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 주민들을 약탈한다고 하면, 그렇게 빼앗은 빵이며 감자, 와인 등을 옆 부대 병사들과 사이 좋게 나누어 먹겠습니까 ?  절대 그럴 리 없지요.  아마 직접 약탈에 참가한 병사들끼리 배터지게 먹고 취하도록 마실 것입니다.  금화나 은접시 같은 값나가는 물건은 장교들 몰래 배낭 속에 숨겨질 것이고요.  그런 식으로 무질서한 약탈이 일어나면 절대 전체 병력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운 좋은 병사들의 무절제한 낭비로 이어져 식량의 균등하고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할테니까요.  또한 그런 약탈은 피점령 주민들의 저항과 반란으로 이어져 괜히 불필요한 유혈 사태만 불러오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징발 활동은 반드시 체계적으로, 장교의 감독 하에 이루어져야 했지요.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피같은 곡식과 와인, 말과 수레를 빼앗긴 주민들에게 던져진 프랑스군의 징발 영수증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 시골 농민들이 손에 그런 영수증을 들고 머나먼 파리의 육군성으로 찾아와 번쩍이는 금화를 받아갔을까요 ?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기 마을 반경 10마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19세기 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eBay에 올라온 1809년 오스트리아 문서입니다.  가격은 3장 모두 해서 $276.10로서, 생각보다는 비싸지 않네요.  여기 올라온 것은 복제품일까요 ?  그렇다면 생각보다는 너무 비싸고요.)



그런 징발 영수증의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를 구글링하다가 찾았습니다.  화려한 캘리그래피로 쓰여져 알파벳도 알아보기 힘든 이 독일어 문서는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바그람(Wagram) 전투에 의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뒤 맺어진 평화 협상 문서 중 일부로 보입니다.  독일어로 된 것을 보면 아마 오스트리아 측에서 작성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Das kaiserliche fraenzoesische Gouvernement hat eine neue Requisition..."   (프랑스 제국 정부는 새로 징발을 한다...)


그 밑으로 나오는 것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져가는 물품과 그 물량을 적은 것입니다.  밀, 밀짚, 브랜디, 식초 등등이지요.  이건 다소 뜻 밖입니다.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 비용을 패전국에 막대한 배상금 형태로 전가시켰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일종의 보호무역주의자라서, 전쟁 승리 후 패전국으로부터 상품 형태로 배상금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1809년 9월,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 궁전에서 당시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던 푸셰(Fou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해당 부서에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짐이 비엔나로 밀고 들어온 전과를 활용하여 프랑스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더 많은 직물과 도자기 등의 상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도록 독려했을 걸세.  이전에 그런 상품들은 오스트리아에게 엄청난 관세를, 가령 직물만 하더라도 무려 60%의 관세를 내고 있었네.  당연히 나의 승리를 이용하여 거의 무관세로 비엔나의 창고들이 터질 정도로 프랑스 상품을 판매해야 하네.  그런데 관련 부서에서는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군."  이렇듯,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현금, 그것도 가능하면 금이나 은으로 된 경화(specie)였습니다.  그런 그가 밀가루나 브랜디 같은 상품을 배상금으로 받아올 리가 없었습니다.


이건 제 추론입니다만, 프랑스군이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징발 형태로 가져간 그런 보급품 물자에 대해 위의 문서와 같은 형태로 정산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오스트리아 관리들은 전국 곳곳에서 프랑스군이 물자를 가져가고 발행한 징발 영수증을 모아오고, 나폴레옹은 그것들에 대해 전쟁 배상금 일부를 변제해주는 형식으로 정산을 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물자를 강탈당한 주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어떤 보상을 해주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패전국에 대해서야 이런 식으로 처리가 될 수 있겠지만, 중립국이나 동맹국은 어땠을까요 ?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가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4차 동맹전쟁에서나 제5차 동맹전쟁에서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편에서 싸운 바이에른 등의 동맹국에게는 새로운 영토나 노획품 공여 등으로 두둑한 보상을 해주었으니, 그런 밀가루와 와인, 식초 등의 사소한 물품 대금은 거기에 묻어 처리했을 것입니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가끔 정말 산골 오지에 남겨진 징발 영수증은 정말 처리가 안 되고 남아 있다가 먼 훗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바로 스위스 알프스 산골의 작은 마을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의 경우입니다.  1984년에 프랑스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스위스를 국빈으로 방문할 때, 뜻하지 않게 이 마을 대표가 나폴레옹의 180년 묵은 징발 영수증을 들고 미테랑을 찾아온 것이지요.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제2차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알프스를 넘을 때 이 마을에서 구리 솥과 수천 그루의 통나무 등 물품과 용역을 징발하면서 남겨둔 영수증이었지요.  당시 금액은 약 4만5천 프랑(지금 가치로 약 6억5천만원)으로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습니다.  가령 당시 하루 노임을 3프랑, 현재 가치로는 약 5만원으로 계산했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180년 동안 차곡차곡 이자에 이자를 붙여 계산하니 2천만 스위스 프랑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미테랑의 내각 수석이었던 콜리아르(Jean-Claude Colliard)가 이 마을을 찾아 기념 동판과 함께 원금만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이자에 대해서는 입을 닦았고요.  




(나폴레옹이 184년 전에 진 빚을 현대 프랑스 정부가 갚았다는 훈훈한 (?)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안 갚았다는 조롱조의 구절로 끝맺는군요.)



적국이 아니라 주로 동맹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작전을 펼쳤던 영국군의 경우는 좀더 문제가 까다로왔습니다.  자기 정부의 말도 믿지 않는 현지 주민들에게 뭐라고 적혀 있는지도 모를 영어로 된 징발 영수증을 줘봐야 순순히 식량을 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영국군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징발 영수증이 즉각적으로 현금화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보여주기 위해 영국은 나름 애를 많이 썼습니다.  즉, 본국에서 국채 발행으로 돈을 모은 뒤, 그 돈을 인도 등 전세계에서 긁어모은 금화로 바꿔 선박 편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지속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주조된 금화는 아예 군용 기니화(military guinea)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영국이 주조한 마지막 기니화였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영국 화물선을 약탈하려는 프랑스 사략선(privateer)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이들 중 일부라도 프랑스 사략선에게 나포될 경우 잃어버리는 금화도 아깝지만, 그 액수만큼 프랑스의 군사력을 키워주는 셈이었습니다.  당시 금화 및 은화는 요즘의 석유 못지 않은 필수 전쟁 물자였거든요.




(1813년에 주조된 소위 'Military Guinea' 금화입니다.)



당시 영국군 재무관이었던 헤리즈(John Charles Herries)가 1811년~1815년 사이에 웰링턴의 원정군, 그리고 대륙 동맹국을 위한 보조금으로 지출한 금화 및 은화는 425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금 1g을 대략 5만원으로 계산하면, 이는 무려 13조원이 넘는 거금입니다.  생산력이나 인구, 금융 규모가 요즘과는 크게 차이나는 당시의 대영제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때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부가 손을 벌렸던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 쪽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 곳곳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군과 싸우는 영국군의 군자금을 영국과 말타, 스페인과 시실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은행까지 거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스페인 현지의 웰링턴에게 공급했습니다.  





(웰링턴의 군자금을 책임지고 있던 병참 총감(Commissary-General)이던 헤리즈 John Charles Herries 입니다.  웰링턴이 한창 반도 전쟁을 수행하던 1810년대에는 기껏 해야 30대 초반이었을텐데... 대단하네요.)



1813년 말이 되어 이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침공을 시작한 웰링턴은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고지식하고 배가 불렀던 프랑스 농민들은 낯선 영국 기니 금화를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현지 주민의 지지 확보를 중요시했던 웰링턴은 그에 따라 프랑스 농민들에게 징발 댓가로 지불할 프랑스 금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는 그 어려운 요구조건도 훌륭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프랑스 금화 및 은화를 사들인 뒤 선박 편으로 스페인으로 보낸 것이지요.  물론 이런 금융 거래에는 막대한 이윤이 따랐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전쟁 금융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웰링턴이 평펑 써대던 징발 영수증 및 군수품 구매 계약서를 로스차일드는 스페인 현지에서 헐값에 대량으로 매입하여 런던으로 가져온 뒤 제값을 받아 냈습니다.   훗날인 1834년 로스차일드는 벅스턴 경(Sir Thomas Powell Buxton)에게 말하길 "그 거래가 자신의 일생 중 최고의 비즈니스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네이썬 로스차일드 Nathan Mayer Rothschild 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거대한 부를 이룬 것은 웰링턴의 전쟁 자금 금융을 사실상 대리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렇게 엄청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꼭 생깁니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행위이고, 병사들은 고통과 죽음 속에 신음하게 됩니다.  이렇게 큰 돈이 오가는 와중에도 정작 병사들은 굶기 마련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로 이번 편을 마무리하지요.  


1807년 폴란드 땅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던 때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Louis Constant Wairy)이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행진하는 병사들 옆을 말을 타고 지나치고 있었답니다.  프랑스 병사들은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다보니, 재빨리 폴란드 현지어를 몇 마디씩 배운 상태였는데, 그 중 한명이 용감하게도 황제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Papa, kleba !"  (아빠, 빵이요 !)


그러자 뜻 밖에도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Nie ma !"  (없다 !  There is none !)


이 말에 병사들은 빵 터져서 크게 웃고는 더 이상 배고프다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콩스탕에게는 약간 쑥스럽게도, 폴란드어로 빵은 클레바 kleba가 아니라 흘렙 chleb이라고 합니다.)





출처 :  


Margaret S. Chrisawn.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Contributions in Military Studies) (Kindle Locations 1698-1704). Kindle Edition.

Heckscher, Eli F.  The Continental System: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www.ebay.com/itm/1809-Napoleon-Austria-Napoleonic-France-Requisition-Documents-48901-/371711363946?hash=item568bb94b6a:g:x2kAAOSwHoFXsnoH

http://www.npr.org/sections/thesalt/2015/06/18/414614705/appetite-for-war-what-napoleon-and-his-men-ate-on-the-march

https://books.google.co.kr/books?id=zq8GhdLeK_kC&pg=PA115&lpg=PA115&dq=requisition+napoleon+war&source=bl&ots=4DKmy7f1pY&sig=QpxPMR2WgfRmpe7r8NDbXXYLnNU&hl=ko&sa=X&ved=0ahUKEwicz_T7gMrPAhWCipQKHTVCAT4Q6AEISDAK#v=onepage&q=requisition%20napoleon%20war&f=false

https://books.google.co.kr/books?id=PS4CVCq-70sC&pg=PT56&lpg=PT56&dq=wellington+france+gold+money&source=bl&ots=Y87Pmfkw8V&sig=n0XCX_P2qArtLtgicDcBnyA3hCg&hl=en&sa=X&ved=0ahUKEwjWxZGL8szPAhWCpZQKHWU6BAUQ6AEIJTAA#v=onepage&q=wellington%20france%20gold%20money&f=false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_Mayer_Rothschild 

https://www.the-saleroom.com/en-gb/auction-catalogues/spink/catalogue-id-srspi10011/lot-a905b379-2ad3-45f2-900d-a3f800fbadff

https://en.wikipedia.org/wiki/John_Charles_Her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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