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뜯어냅니다.  그러나 이때가 나폴레옹 제국이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은 1810년에 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우디노의 군단을 동원하여 추가로 타국을 정복했고 그 땅을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했거든요.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알려졌는데, 그런 한가한 시기에 나폴레옹의 먹이가 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침공할 때 당시 네덜란드의 국왕은 용감하게도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저항을 지시했는데, 그 국왕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끼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왜 네덜란드 축구팀의 상징이 오렌지색인지도 아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를 뒤져보아도 저 유니폼 색깔과 오렌지공 윌리엄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왜 애초에 네덜란드 귀족이 오렌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안나오더군요.  아무튼 이번 월드컵에서는 오렌지 군단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아쉽게도요.)




유아기에 사망한 형제들을 빼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는 본인 제외하고 모두 7명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맨 위가 조제프 (Joseph), 둘째가 나폴레옹, 세째가 유능했던 루시앙(Lucien), 그 다음이 존재감 없던 엘리자(Elisa), 다섯번째가 오늘의 주인공 루이(Louis), 그 다음이 아름다운 폴린(Pauline), 탐욕스러운 캐롤린(Caroline), 그리고 막내 제롬(Jérôme)입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독립 운동에서 어설프게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야반도주하여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부장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툴롱 포위전 이후 신분이 상승하자, 당연히 자신의 식구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닦아주기 바빴고, 특히 남자 형제들에게는 출세길을 열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이와 제롬이었지요.  제롬은 워낙 어렸으므로 일단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지만, 루이 같은 경우는 당시 국방장관이던 카르노(Carnot)에게 청탁을 넣어 포병 부대에 장교로 임관을 시켰습니다.  루이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은 물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원정까지도 따라가 위대한 형의 부관 노릇을 했습니다.  물론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했던 형 덕분에 전공을 세울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형이 프랑스 제1통령이 되자, 그 여세를 몰아 25살이라는 새파란 나이에 장군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낙하산을 타게 됩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 재벌 2세, 3세와도 같은 행보였지요.  다만 우리나라 재벌 2,3세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높은 계급에 부당하게 올랐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입니다.  둘째 형보다는 다소 못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눅이 든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장군으로 승진하기 1년 전인 1802년, 하늘 같은 둘째형인 나폴레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의붓딸이자 형수 조세핀의 딸, 즉 촌수로 치면 바로 자신의 의붓 조카딸인 오르탕스(Hortense de Beauharnais)와 결혼하라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손을 얻어야 했고, 조세핀은 어떻게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의 입지를 굳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략 결혼을 결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루이는 다른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들처럼 보아르네 가문 사람들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오르탕스도 늘상 우울하고 주눅이 들어보이고 루이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르탕스는 당시 다른 남자와 열애 중이었지요.  그러나 지중해성 가부장인 나폴레옹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행한 결혼은 이 두 젊은 남녀에게는 그야말로 실패작이었습니다만, 나폴레옹과 조세핀에게는 대성공작이었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그것도 둘다 아들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 아이의 탄생에 대해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뻐하며 그 아이에게 나폴레옹(Napoléon Louis Charles Bonaparte)이라는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실은 둘째에게도 Napoléon Louis Bonaparte라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선사했고, 훨씬 나중인 1808년에 태어난 세째에 대해서도 같은 이름 Louis-Napoléon Bonaparte을 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나폴레옹 루이 샤를입니다.  나폴레옹이 하도 이 아이를 각별히 여겨, 항간에는 저 아이가 나폴레옹과 오르탕스의 근친상간으로 나온 아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이 여자 문제가 난잡하기는 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날조라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가들의 의견입니다.)




그러나 첫째는 5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아, 나폴레옹은 물론 전체 보나파르트 가문에게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둘째인 루이 나폴레옹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저항하는 북부 이탈리아의 지하 조직 카르보나리(Carbonari) 활동을 하다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병에 걸려 동생의 팔에 안긴 채 27살의 나이로 죽은 것입니다.  루이와 오르탕스가 잠깐 화해한 1807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잉태된 세째는 이탈리아 경찰의 추적을 뿌리치고 어머니 오르탕스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 청년이 훗날 나폴레옹 3세가 됩니다.  그 이야기는 훨씬 훗날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루이-나폴레옹입니다.  어릴 때 그려진 그림 밖에 없네요.  6살의 나이에 1주일 뿐이지만 네덜란드의 왕을 역임한 소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행한 결혼에 우울해하던 루이에게 형 나폴레옹은 1806년,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라는 것이었지요.   루이가 네덜란드 왕으로 즉위하게 되기까지는 무척 복잡한 정치외교적인 역사와 사건이 얽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왕가들의 결혼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결과로 1581년에 7개 지방의 연합체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을 stadtholder, 네덜란드어로는 stadhouder(스타트하우더, stadt는 영어로 city, town 등을 뜻하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부관이나 중위를 뜻하는 불어 단어 및 거기서 파생된 동일 스펠링의 영어 단어 lieutenant(루테넌트, 불어로는 류뜨낭)와 동일한 뜻으로 '왕이 없는 동안 왕을 대리하는 직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네덜란드 저지대에는 합스부르크 왕들이 직접 거주하지 않았으므로, 그 지방의 귀족을 대리인으로 지정해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보게 했는데, 그 명칭이 독립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지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휘한 것도 네덜란드의 스타트하우더인 오라녜-나사우(Oranje-Nassau) 가문의 빌렘( (Willem van Oranje, 영어로는 William of Orange) 1세였습니다.  이 직위는 세습되는 것이었으므로, 외국에서는 이 스타트하우더 관직을 왕이나 뭐 그에 준하는 것인 모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패망 이후 실제로 이 가문의 수장을 왕으로 하는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으니, 그 오해가 꼭 틀린 것은 아니었지요.





(이 씩씩하게 생긴 양반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나사우의 빌렘 1세입니다.)




참고로, 이 오라녜-나사우는 원래 네덜란드와는 상관없는 곳입니다.  오라녜(네덜란드어로 오라녜이고, 프랑스어로는 오랑쥐)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ngon) 인근에 있는 곳이고, 나사우는 독일에 있는 지방입니다.  이 두 지방의 귀족들이 결혼 및 상속을 통해 합쳐진 것이지요.   네덜란드가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연결된 것은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Engelbert II)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플랑드르의 스타트하우더로 임명되면서부터였습니다.  또,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이름과 과일 오렌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색깔도 주황색에 대해서는 그저 노란 빨강(yellow-red) 또는 샤프란(saffron) 색 정도로 불려질 뿐, 오렌지 색이라는 색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오렌지는 중국 남부의 감귤류가 조상인 과일이라서, 유럽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동남아와 인도를 거쳐 아랍 쪽에 전해졌지요.  유럽에까지 이 과일 나무가 전해진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고, 유럽에 오렌지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세기 중반 경이었습니다.  이 과일의 이름이 오렌지로 정해진 것도 오랑쥐 또는 오라녜와는 전혀 무관한, 이 과일의 아랍 이름인 나랑쥐 (naranj)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가문의 영지 이름과 과일 이름이 비슷하여 어리둥절했을 오라녜-나사우 가문에서 이 오렌지 색을 자기 가문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 즈음 해서였다고 합니다.  즉, 네덜란드 국가대표축구팀이 오렌지 색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 남부의 오랑쥐라는 지명은 과일과는 전혀 무관한, 고대 켈트족의 물의 신인 Araisio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 서민들이나 한다는 직접 찍은 유럽 여행 사진 자랑...  스페인에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많은데, 오렌지 향기를 좋아했던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세비야에서 찍은 것입니다.  가봤던 스페인 도시 딱 하나에 다시 가보라고 한다면 저는 세비야를 택하겠습니다.  좋더라구요 !)




아무튼 그 오라녜 공을 수장으로 하던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는 달리 발달된 상공업 덕분에 시민 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 확산이 매우 왕성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이미 오라녜 가문에 대해 무장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오라녜 가문과 친척이던 프로이센 왕의 군대가 이를 진압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지요.  그러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이 네덜란드 자체 혁명 세력은 프랑스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오라녜 가문을 내쫓고 새로운 정부인 바타비아(Batavia) 공화국을 세웁니다.  그러나 프랑스 자신이 공안 위원회의 공포 정치나 부패한 총재 정부 등 혼란을 겪으면서 네덜란드의 혁명 정부도 많은 혼란과 내부 갈등, 거기에 힘세고 거친 이웃인 프랑스의 간섭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도 네덜란드의 독립성을 유지시켜 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무력보다는 네덜란드의 은행가들이었습니다.  아시냐 지폐의 혼란 등 재정 붕괴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부유한 네덜란드에게 차관을 요구했고, 네덜란드에서는 특혜에 가까운 저이율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프랑스를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일단 중2병 환자였던 나폴레옹은 민주 정권을 쿠데타로 뒤엎은 인간답게, '민주 공화국'이라는 네덜란드를 무척 고깝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뒤 당장 돈이 없어서 쩔쩔 매던 나폴레옹도 전임 총재들처럼 네덜란드 은행가들에게 대출을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그 태도와 조건이 마치 뭐 맡겨 놓은 돈을 인출하는 고객처럼 무이자 대출을 거만한 태도로 요구했다는 것이지요.  네덜란드 은행가들이 이 신용평가가 떨어지는 반란군 수괴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네덜란드의 독립은 이미 반쯤 날아간 것이었지요.  게다가 트라팔가 해전 이후 영국 침공의 꿈이 완전히 좌절되자 네덜란드에서는 당장 '영국 침공 망했으니 그거 한답시고 빌려간 불로뉴의 대형 보트 함대 돌려주세요'라고 눈치도 없고 시의부적절한 반환 요구를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불로뉴에 대규모로 집결시켰던 이 대형 평저선들은 알고 보면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들....)




게다가 네덜란드 공화국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가령 세금이 재산세 위주가 아니라 소비세 위주라서 서민들에게 불리했는데, 이를 바로 잡고 빈민들을 구제하자는 개혁 세력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기득권 세력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부 갈등 때문에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자 원래 혁명을 지지했던 많은 네덜란드인들도 혁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나라 전체가 영국과의 교역으로 먹고 살던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지엄하신 대륙 봉쇄령을 몰래 깨고 영국과 밀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그냥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렇다고 수십년간 독립 전쟁을 벌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아귀로부터 기어코 독립을 쟁취했던 만만치 않은 성깔의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꼭두각시 왕이 다스리는 허수아비 왕국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그 적임자로 지명된 것이 루이였습니다.  이미 조제프는 나폴리 왕이었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 가문 출신이 아닌, 사위일 뿐인 뮈라를 먼저 왕으로 앉힐 수도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나파륜 황제가 결정한 이상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데다 내부 갈등에 지친 네덜란드도 반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타협에 응합니다.  즉, 루이와 그의 후손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프랑스 왕위와 합쳐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든지, 네덜란드에는 징집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현실적인 조건으로 나폴레옹의 명에 따르게 됩니다.





(1807년 루이 치하의 네덜란드 왕국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루이는 네덜란드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 노릇을 바라던 형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으로 행동합니다.  루이는 1806년 6월 네덜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프랑스식 이름인 루이(Louis)를 네덜란드식으로 로더베익(Lodewijk)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열심히 네덜란드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형이 붙여준 프랑스 출신 관료들에게도 모두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함은 물론,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인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는 왕비인 오르탕스에게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버리도록 강요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1807년 라이덴(Leiden)에서 발생한 화약 화물선 폭발 사고와 1809년 홍수 상황에서, 루이는 네덜란드 시민들의 구호에 온 힘을 기울여 국민들의 큰 칭송을 받아 '선량왕 로더베익'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오르탕스는 젊고 아름다운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보아르네와 이혼한 뒤 갈 곳이 없었던 어머니 조세핀을 따라 어머니의 고향인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흑인 노예들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소울을 키웠기 때문에, 춤과 음악에 무척 재주가 있는 활기찬 아이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의 그런 점을 높이 보았고, 나폴레옹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히틀러처럼 나폴레옹도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지요.)




왕비 오르탕스는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라는 지시에 정말 크게 반발하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머니 조세핀이 있는 아름다운 파리를 떠나기 싫어했고, 또 끔찍하게 싫은 남편인 루이와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네덜란드에 도착해 보니, 시민들이 (이건 루이의 공이 컸는데) 왕비인 자신을 무척 좋아하고 환영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조금씩 네덜란드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와의 관계는 역시 전혀 좋지 못하여, 이 부부는 될 수 있으면 서로를 피했고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는 식사에서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오르탕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루이 왕의 그런 통치는 결코 나폴레옹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루이에게 그동안 프랑스가 네덜란드 은행가에서 꿔온 대출금을 1/3 수준으로 일괄 탕감하도록 조치하라고 시켰으나, 독립국가 네덜란드 왕국의 수장으로서 네덜란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야 했던 루이는 그런 터무니 없는 형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공화국을 폐지시켰던 가장 큰 이유인 대륙 봉쇄령의 엄격한 시행이었는데, 사랑하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루이는 그 단속에 대해 열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사고를 칩니다.  1809년 영국이 앤트워프(Antwerp, 네덜란드어로는 안트베르펜 Antwerpen)과 플러싱(Flushing, 네덜란드어로는 블리싱헨 Vlissingen)을 침공한 것입니다.  이 대규모 상륙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총 4만의 대군이었습니다.  당연히 루이는 이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루이의 독립 왕국 네덜란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한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와의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나폴레옹 눈 밖에 나서 프랑스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였습니다.  그는 고작 2만명 규모의 병력을 끌고 가서 네덜란드에 상륙한 뒤 네덜란드 저지대 특유의 풍토병으로 끙끙 앓고 있던 영국군을 쓱쓱 밀어내버린 것입니다.





(이 안트워프/플러싱 침공을 영국에서는 왈체런 Walcheren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작전을 지휘했던 캐텀 백작, John Pitt, 2nd Earl of Chatham 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말 안 듣는 배은망덕한 동생 루이에게 '자기 왕국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라며 차라리 퇴위를 명했습니다.  루이는 그를 거부했지만 사실 오래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1810년 여름, 나폴레옹은 우디노를 앞세워 동생의 왕국을 침공할 태세를 취했고, 루이는 감히 무서운 형에 맞서 자신의 네덜란드군에게 저항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무리 루이를 좋아했다고 해도 가망없는 싸움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기엔 너무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왕위가 보잘 것 없는 허울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이는 7월 1일 왕위를 아들 나폴레옹 루이에게 넘기고 도주했습니다.  우디노의 부대는 7월 4일 네덜란드를 무혈 침공했고, 당시 6살이던 어린 루이 2세를 잘 타일러 큰 아버지 댁, 즉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로써, 루이의 네덜란드 왕국은 불과 4년 만에 사라지고, 7월 9일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되어 버립니다.  


왕위를 잃은 루이의 행방은 처음에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우디노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루이가 대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지 못했고, 동생의 안위가 살짝 걱정되었던 나폴레옹이 행방불명된 루이를 찾아 '잘 타일러 파리로 보내라'고 각지에 편지를 써보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 루이가 뜻 밖에도 오스트리아로 도주하여 망명한 것이 알려져 나폴레옹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인어른 댁으로 도망친 것이니까요.  아마 무시무시한 사위를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도 이 망명객이 무척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차마 파리로 압송하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차마 장인에게 신병 인도를 요청하지는 못했습니다.


루이나 프란츠, 나폴레옹보다 더 곤란해진 것은 당연히 네덜란드 시민들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에 자신의 동생을 왕으로 앉힐 때의 조건은 절대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통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루이가 쫓겨난 지금 네덜란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네덜란드 시민들은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하천이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 도시로 흘러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자연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통합해버렸습니다.  


특히 이건 네덜란드의 상징적 독립성 못지 않게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공포의 징집제였지요.  네덜란드에서는 징집제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의 나폴레옹의 동생을 국왕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젠 아예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징집제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1811년부터 네덜란드에도 징집제가 적용되었고, 20세 이상의 청년들이 프랑스군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1812년 러시아로 향했던 나폴레옹의 군대 속에는 약 1만5천의 네덜란드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소국의 설움이었지요.  


그러나 최소한 1810년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 네덜란드인들은 크게 동요하며 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주요 전쟁이 나폴레옹의 승리로 다 끝난 뒤인 평화 시기였고, 러시아와의 비극적 전쟁이 예고된 바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되면서 네덜란드 경제를 괴롭히던 불확실성이 제거된데다 프랑스라는 큰 시장에 대한 관세도 사라진 셈이 되어, 많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합병 조치에 씁쓸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장사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루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망명 이후 루이는 오스트리아에서 조용한 망명 생활을 하며 문필 활동에 전념합니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 네덜란드가 결국 오라녜 가문의 빌렘 1세를 왕으로 하는 왕국으로 독립하자, 그는 나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를 방문하게 해달라고 빌렘 1세에게 여러번 요청했지만 계속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빌렘 2세가 1840년 그의 방문을 '익명으로 여행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합니다.  그가 이렇게 익명으로 네덜란드의 어느 호텔에 묵었을 때, 그래도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그 호텔 방 창문 아래 모여 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웅성이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잠깐이지만 네덜란드를 진심으로 대하며 다스려준 전왕에 대한 네덜란드 시민들의 환호화 갈채였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벌이던 아들들과는 달리 별다른 정치 활동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1846년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루이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결과는 바로 이 남자입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www.erfskipterpdoarpen.nl/documents/Engels/SoldiersNapoleon/SoldiersNapoleonIntroduction.htm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Hortens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the_Si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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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6.14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 있습니다. 예전에 나폴레옹시대의 징발편에서 대량으로 물자를 징발했다는 이야기를 봤었는데요,
    1)그러면 나폴레옹이 징발을 한 이유는 돈이 많이 들어서이고,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적지에서 무자비한 징발을 한 것이겠군요?
    2)그러면 적에게 강요한 전쟁배상금은 액수는 징발을 하지 않았다면 더 늘어날 수도 있겠군요?
    3)적국의 무기고를 턴것도 일종의 징발이라고 봐도 되나요?

    • nasica 2018.06.14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Yes
      2) 그럴 수도 있겠네요
      3) 영수증이 없으므로 징발은 아니겠지만 차후 종전협상시 배상금에 포함되거나 반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다.

    • 웃자웃어 2018.06.14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고맙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영국 육군이 돈을 많이 쓴 이유도 사실상 전쟁물자 상당수(예: 식량)등을 징발시 제값을 치뤘기 때문이겠군요.

  2. 웃자웃어 2018.06.14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없죠. 2012년 당시의 박근혜 당선만 봐도 말이죠.

    • 알키비아데스 2018.06.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 다음은 희극으로.

      1870년 프랑스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은 146년이 늦었죠.

    • 웃자웃어 2018.06.15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밝혀지면서 국민들 상당수가 1848년도 프랑스인들보다 미개했단게 밝혀졌죠.

  3. 김똑딱 2018.06.14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게도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는 진짜 루이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아들은 아닙니다.

    나폴레옹과 그 후손들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손)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 검사는 하플로그룹 E1b1b였는데 루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후손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검사는 I2a2가 나왔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라면 나폴레옹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와 y 염색체가 동일하니까 하플로그룹이 동일하게 E1b1b가 나와야 하는데, 결국 오르탕스가 바람피운 결과물이 루이 나폴레옹이게 된 것이죠.

    어차피 루이 나폴레옹의 가계 역시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같은 가문으로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결과물은 아니네요 ^^

  4. 유애경 2018.06.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 보나파르트, 시대만 잘타고 났다면 (?)아주 훌륭한 왕이 될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원치않는 결혼을 어쩔수없이 받아들인 오르탕스-게다가 루이와 사이도 안좋았기에 더욱 불행했을-의 불륜이 용납 받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는 되네요.

  5. 알키비아데스 2018.06.15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르크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코미디언이 등장하는군요^^

  6. reinhardt100 2018.06.15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입장에서는 해괴한 논리는 아닙니다. '라인강-쥐라 산맥-알프스 산맥-지중해와 가론 만-비피레네 산맥-비스케이 만과 영불 해협 안의 모든 육지'는 '신이 프랑스에게 내려주신 자연적인 영토'라는 논리가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있던 것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부르봉 왕조 기간 내내 이 국경을 실현하기 위해 몇 차례나 전쟁을 치렀고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가면서까지 유럽 대륙 영토의 영속성을 더 중시해왔습니다. 특히 북프랑스-플랑드르-저지대 네덜란드를 연결한 단일경제권을 실현하는 것이 역대 프랑스 지도자들의 꿈이었으니까요. 이 기회가 세 번 있었는데 한 번은 1477년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이 낭시전투에서 패사하면서 루이 11세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것이고 두번째 기회가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세번째가 프랑스 혁명기였습니다. 앞선 두 번은 최종적으로 실패했지만 후자는 혁명전쟁 승전으로 실현시켰고 프랑스의 네덜란드 합병이 이를 최종적으로 실현시켜주었던 겁니다.

  7. 루나미아 2018.06.15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프리슬란트가 홀란트왕국 영역에 있군요. 전엔 프로이센 땅이었는데 즉위 선물로 준 걸까요?

  8. 마스터 2018.09.13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째 루이 나폴레옹의 그림을 보고 =ㅅ=;
    그림 전공한 이의 한마디 화가가 나빠요!!


(코렝트 주점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배경 1832년 파리 --------------------


6월 5일 아침, 항상 같이 지내는 친구들인 레글과 졸리는 코렝트(Corinthe) 주점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졸리는 지독한 코감기가 걸려 코가 막힌 상태였는데, 레글에게 막 옮기 시작한 상태였다.  레글은 닳아 헤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졸리는 잘 차려 입고 있었다.


그들이 코렝트 주점의 문을 밀고 들어간 것은 대략 오전 9시 경이었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틀로트와 지블로트가 그들을 맞이했다.


"굴, 치즈와 햄 (Huîtres, fromage et jambon)."  레글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주점은 비어 있었다.  그들 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졸리와 레글을 잘 알고 있던 지블로트는 식탁 위에 와인 한 병을 갖다 놓았다.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계단으로 올라오는 바닥의 햇치문에서 머리가 하나 나타나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다 거리에서 냄새를 맡았지, 브리 치즈의 맛있는 냄새말이야.  들어가겠네."


그랑테르였다.  그랑테르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



저는 문학 작품에서 감동보다는 먹을 것 관련 이야기를 즐겨 찾는 편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고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이 짧은 인용 구절에서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나왔거든요.  





1) 생굴인가 요리한 굴인가 ?


저 구절을 읽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저 굴이 생굴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튀기거나 삶는 등 요리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엔 냉장고도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굴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훈제 굴을 만들어 놓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실제로 훈제 굴이라는 음식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저 굴이 생굴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도 굴은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용 구절에서처럼 레글이 그냥 '굴'이라고만 이야기했으므로, 저 굴은 익힌 것이 아니라 생굴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유럽인들은 원래 해산물을 날로 먹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지만 굴만은 예외입니다.  참 의이한 일이지요.  심지어는 생선 외에의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러시아인들조차도 굴은 날 것으로 먹습니다.  체호프(Chekhov)의 소설 '굴'에서는 19세기 후반, 모스크바 길거리의 어느 불쌍한 구걸 소년이 굴이 뭔가 집게 달린 갑각류라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굴이라도 먹겠다고 하자, 신사들이 '꼬마가 생굴을 먹는다고 ?  그거 참 재미있겠네'라며 꼬마에게 굴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짧은 소설은 제가 (요즘 휴가인지라) 번역해서 올려 볼게요.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그 감독인 퍼거슨 경 관련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퍼거슨 경의 엄격한 식단 관리 중 하나로 경기 전에는 절대 조개 종류를 못 먹게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조개 종류는 쉽게 상해서 식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퍼거슨 경의 방침은 결코 무시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익히지도 않은 생굴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요 ?


비결은 간단합니다.  반드시 살아 있는 굴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자면 먹을 때 반드시 아직 살아 있는 굴의 껍질을 자기 눈 앞에서 까서 즉석에서 먹어야 하고요.  아마 레글과 졸리가 주문한 굴도 껍질 째로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라고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원문 구절은 'Comme ils étaient aux premières huîtres' 입니다.  이걸 영어로 번역하자면 'as they were at the first oysters' 입니다.  저는 저 aux (à + les = aux), 영어로 at을 '먹고 있을 때'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굴 껍질을 까느라 애를 쓰고 있을 때'라고 봐도 크게 흠은 없을 듯 합니다.  즉, 껍질 속에 살아있는 생굴을 까먹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굴을 까먹기 위해서는 그냥 일반적인 칼을 써도 되지만 끝이 가늘고 짧은 굴까기 전용 칼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굴 껍질의 뾰족한 쪽이 경첩이인데, 그 곳을 잘 더듬어 보면 좁은 홈 같은 것이 있으니 거기로 칼 끝을 밀어넣고 껍질의 아래 위를 연결하는 관자 힘줄을 끊고 칼을 비틀어 껍질을 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난 다음이 아주 중요한데, 굴 껍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대고 굴을 먹어야 하는데, 굴 껍질 안에 있는 액체도 놓치지 말고 다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굴의 체액은 그냥 바닷물만이 아니라 굴의 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도 마셔야 제대로 굴을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파상의 단편 소설 '쥴 아저씨' (Mon oncle Jules)에 그런 부분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버지는 우아하게 차려 입은 두 숙녀에게 두 신사가 굴을 권하는 장면을 보았다.  누더기를 걸친 늙은 선원 하나가 칼로 굴을 따서 신사들에게 건네주면, 그 신사들이 다시 숙녀들에게 그걸 건넸다.  그 숙녀들은 고운 손수건으로 굴껍데기를 잡고 국물이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입술을 약간 삐죽 내밀어 굴을 아주 우아하게 먹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고 작은 동작으로 국물을 마시고는 껍질을 뱃전 밖으로 던졌다."


문제는 저 '쥴 아저씨' 속의 굴은 항구의 배 위에서 직접 까먹는 것이지만, 레 미제라블 속의 굴은 한참 내륙인 파리 시내에서 까먹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체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파리까지 생굴을 날랐을까요 ? 





2) 어촌에서 파리까지 생굴 운송이 가능했나 ?


레미제라블 시대는 아직 철도가 프랑스 전역에 상용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 어촌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에프(Dieppe)까지의 거리인 170km를 마차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당시 마차가 사람이 걷는 것보다 빠르다고 해도, 기껏해야 짐마차인데 사람보다 2배 이상 빨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시속 8km 정도가 한계였을텐데, 쉬지 않고 달려도 26시간, 하루에 8시간씩 달린다고 해도 3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어선에서 굴을 하역하고 분류해서 마차에 싣는 것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파리 시장에서 하역하고 판매해서 식당에 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 아무리 빨리 먹는다고 해도 레글과 조이가 먹었던 굴은 바닷물에서 건져진 지 최소 5일, 아마 7일은 지난 것이었을 것입니다.  얼음도 없던 시절,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


가능했습니다 !  구글링을 해보니 대합이나 홍합은 빨리 죽어 쉽게 상해버리지만 의외로 굴은 물 밖에 나온 뒤에도 꽤 오래, 심지어 시원한 곳에서 습기만 잘 유지해주면 2~3주 동안이라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껍질은 안 깐 상태에서의 이야기이지요.   현대 미국에서도 굴은 기차 등으로 장거리 수송할 때 얼음을 쓰지 않고 그냥 물에 적신 신문지로 덮어서 층층이 상자에 넣어 수송한다고 합니다.  얼음을 쓸 경우 수돗물을 얼려 만든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 들어가는 물 속의 염소 때문에 굴이 죽는다는 거에요.  아직 비행기나 고속 열차 등이 발명되기 훨씬 전인 19세기 후반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미국 동부 해안 체셔피크 만에서 잡은 굴을 증기 기관차를 통해 미국 중서부 콜로라도 주의 덴버까지도 운반했다고 하네요.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포르투갈로부터 영국으로 선박을 통해 살아있는 생굴을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화물선이 증기선이었을지 범선이었을지 불확실한데, 포르투갈 북쪽의 대표적 항구인 오포르토(Oporto)로부터 런던까지의 약 1600km 항로를 시속 16km의 증기선이라고 해도 4일, 평균 시속 9km의 속도를 내는 범선일 경우 거의 7일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항구에서의 통관 절차 및 상하역, 판매를 위한 대기 시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2주간은 굴이 살아있어야 그런 무역이 이루어졌겠지요.  그런 생굴 무역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868년, 포르투갈산 생굴 60만개를 싣고 영국으로 가던 화물선 르 모를레지엥(Le Morlaisien) 호가 프랑스 지롱드(Gironde) 강 하구에서 폭풍을 만나 대피하고 있었습니다.  폭풍 때문에 발이 묶인 화물선에서는 며칠이 지나자 일부 굴이 죽어 썩기 시작했지요.  화물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남은 굴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한 선장은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 당국의 허가를 받고 죽은 굴 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살아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기존의 프랑스산 토종 굴 대신 더 생명력이 좋았던 이 포르투갈산 굴이 해안에 크게 번성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 어부들이 외래종이라고 이를 매우 싫어했답니다.  그러나 먹어보니 이 포르투갈산 굴이 맛도 좋고 번식력도 좋아서, 1910년대까지 프랑스 굴 산업을 이끄는 주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것처럼 레글과 졸리는 마차로 디에프에서 파리까지 1주일 걸려 운송한 굴을 별 거리낌 없이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3) 19세기 전반 당시 굴의 가격은 ?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마리우스는 가난하여 아침은 자기 방에서 빵과 날달걀 1개로 때웁니다.  저녁에 식사할 때도 와인 대신 물을 마시지요.  그 친구인 졸리와 레글은 시골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넉넉하게 사는 편입니다.  가난한 친구들이라면 아침을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저런 주점에 가서 먹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아침부터 굴을 먹다니요 !  굴 양식이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지금도 굴은 비교적 비싼 음식입니다.  특히 생굴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굴이 상대적으로 싼 음식이라고 하고, 유럽에서는 생굴은 매우 비싼 음식이라고 하지요.  레미제라블 시대인 19세기 전반은 과연 어땠을까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비쌌습니다만, 저 1832년 당시에는 조금 쌌을 수도 있습니다.  육지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키울 수 있는 곡물과 육류와는 달리,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어패류는 잡는 사람이 임자였으므로 아무런 절제 없이 모든 이들이 마구 남획을 했습니다.  가령 어떤 기록에 보면 대구라는 물고기는 먹성이 좋아서 한마리의 뱃속에서 고등어와 가자미가 너댓 마리, 게와 조개가 수십 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상상이 가십니까 ?  대구가 비록 큰 물고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게 컸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다에서 원양 어업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북미 뉴펀들랜드 등에서 대구 어장을 발견한 이래 엄청난 남획이 이루어지면서 대구가 완전히 다 자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요즘 대구가 작아졌을 뿐, 원래는 2m까지도 자라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참조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지금은 어장이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렸지만, 과거 전라도 해안 지방에는 번식기가 되면 참조기들이 바다 속에서 우는 소리에 잠을 설칠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굴도 딱 그랬습니다.  굴은 일라이드(Illiad)에서 파트로클루스가 언급할 정도로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사람이 즐겨 먹던 조개류입니다.  게다가 한번 바위 등에 달라 붙으면 전혀 이동하지 않고 평생을 거기서 지내는 생물이지요.  그러다보니 남획되기 딱 좋았고, 실제로 씨가 마를 정도로 남획되었습니다.  그런 남획에 일조를 한 것이 프랑스 부르봉 왕가였습니다.  이들은 굴을 아주 좋아해서 많이 먹었고, 특히 지금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컹칼(Cancale) 지방의 굴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18세기 초 프랑스부터는 굴을 구경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급기야 1760년대에는 심지어 베르사이유에서조차 캉칼 굴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어 귀족들도 남획의 폐해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족해지면 비싸집니다.  굴 가격은 엄청나게 뛰었을 것입니다.




(지도 왼쪽에 붉은 표식이 있는 지점이 컹칼입니다.  파리에서 꽤 머네요.)



그 결과, 여태까지는 아무런 법규가 없던 굴 채집에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759년, 굴이 알을 낳는 시기인 여름철을 낀 6개월, 즉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는 굴의 채집을 금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R-달, 즉 영어 이름에 R이 들어가지 않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굴은 배란기에 독성을 띠므로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긴 한데,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잡아 먹으면 굴 씨가 마르겠다'라는 절박함이 저렇게 '굴을 먹으면 안되는 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굴 관련 기사들을 찾다보니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항상 생굴을 후루룩 까먹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건 잘못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식습관을 묘사한 비서들, 즉 부리엔이나 콩스탕의 회고록에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술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다보니 전투 직전에는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려서 나폴레옹 본인도 감자 한 알도 제대로 못 먹고 전투에 임하는 일이 많았는데 내륙인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지에서 생굴을 까먹었다 ?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나폴레옹 본인이 아니라 그 조카인 나폴레옹 3세 때문에 비롯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별나게 굴을 좋아했다고 하며, 심지어 보불 전쟁에 패해 폐위되어 영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굴을, 그것도 가급적 프랑스산 굴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저 먹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 1세와 3세는 둘 다 프랑스 굴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큽니다.  삼촌인 나폴레옹 1세가 잦은 전쟁과 과도한 징집으로 어촌에 남자 씨를 말려버린 결과 굴을 채집할 사람이 부족해졌고,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는 프랑스 해안에 굴이 어느 정도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레글과 졸리도 아침부터 굴을 주문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1830년대 들어 다시 남획이 시작되면서 굴의 씨가 또 마르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좋아하는 굴을 좀더 싸게 많이 먹기 위해 당시 유명한 생물학 교수였던  코스트(Jean Jacques Marie Cyprien Victor Coste)를 불러 굴 양식 방안을 모색하게 했고, 그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코스트는 현대적 굴 양식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었으니,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역사에 긍정적으로 남긴 것이 오페라 가르니에 외에도 또 있긴 한 셈입니다.



(근대 굴 양식의 아버지 빅토르 코스트입니다.)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굴 열풍이 늦게 부는 바람에, 19세기 후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굴을 많이들 먹었다고 합니다.  1842년 미국 뉴욕을 방문한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즈는 거리 곳곳에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으로 생굴을 파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 12가구 당 하나 꼴로 굴 가판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뉴욕 시민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주 거리로 나가 생굴을 까먹었습니다.  특히 한밤중에 출출한 사람들이 즐겨찾는 야식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한밤 중에 차가운 굴이라 !  저도 굴은 좋아합니다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륙인 시카고의 풀턴 시장에도 굴 가판대가 성행했답니다.)



  

4) 분명히 6월인데 굴을 먹을 수 있나 ?


자,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는 분명 6월 5일에 시작되었고, 소설 본문에도 레글과 졸리가 굴을 주문한 날이 6월 5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6월은 R이 안 들어가는 달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프랑스어로도 R이 안 들어가는 달은 영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6월에 생굴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  빅토르 위고가 글을 쓰다보니 실수한 것일까요 ?


불어     영어

janvier     January

février     February

mars     March

avril     April

mai     May

juin     June

juillet     July

août     August

septembre     September

octobre        October

novembre       November

décembre       December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빅토르 위고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산란기에는 굴에 독성이 생기므로 R이 안 들어가는 이름의 달에는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사실 근거가 모호한 말이라고 합니다.  단지 산란기에 굴은 살이 빠지고 마르므로 먹기에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여름철에는 바닷물의 수온이 올라 적조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 때문에 그 물 속에서 사는 굴에도 사람에게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병균이 붙어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고요.  또 무엇보다 생굴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여름철에는 세균 번식이 더 왕성하게 잘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저 'R이 없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라는 전설은 굴의 독 보다는 굴의 생육과 번식을 보호하려는 법령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합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각 지방마다 다릅니다만) 원래 금지령은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였습니다.  9월이나 10월에는 R이 들어가는데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누군가 머리 좋은 공무원이 '그냥 R이 안 들어간 달에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홍보를 한 모양입니다.


특히 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32년에는 굴 보호를 위해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굴을 잡지 말라는 규제의 감독과 집행이 느슨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레글과 졸리가 비교적 싼 가격에 굴을 먹었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Source :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쥴 아저씨, 모파상 작

http://www.telegraph.co.uk/food-and-drink/features/why-we-need-to-celebrate-british-native-oysters/

https://www.pinterest.co.kr/pin/106045766202394053/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11/sep/07/guide-to-eating-oysters

https://www.chowhound.com/post/raw-oysters-long-die-504718

https://ephemeralnewyork.wordpress.com/2017/01/05/everyone-in-19th-century-new-york-loved-oysters/

http://www.oysters.us/history1-usa.html

http://blog.michaelscateringsb.com/cooking_on_the_american_r/2009/12/charles-dickens-on-oysters.html

https://www.thekitchn.com/myth-busting-what-time-of-year-is-it-safe-to-eat-oysters-22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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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cchi 2017.12.27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도 재미있지만 오늘은 더욱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2. 유애경 2017.12.27 1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나폴레옹이 굴을 아주 좋아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나폴레옹이나 카사노바나 남성을 튼튼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굴을 즐겨 먹었었다고 책에서 읽은적이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도 생굴은 참 좋아합니다.
    굴은 역시 날로 먹어야 제일 맛있는것 같아요!(개인적인 취향입니다)
    R이 들어가는 달에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독성 보다는 보호차원 이라는 또다른 사정이 있었군요! ^_^
    여러가지 배우고 갑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3. nasica 2017.12.27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체호프의 '굴'이라는 작품은 아래 URL에서 잘 번역된 것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Yz8sdODDOqcC&pg=PT6&lpg=PT6&dq=%EC%B2%B4%ED%98%B8%ED%94%84+%EA%B5%B4&source=bl&ots=OYVgqFoJMm&sig=3XBvC1kTBQInAneL-NTSkHfeNNA&hl=ko&sa=X&ved=0ahUKEwjo_JPylqrYAhVILpQKHct8AZIQ6AEIUzAJ#v=onepage&q&f=false

  4. ㅎㅎ 2017.12.28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국요리사가 한국 수산시장에 들렀다가 아지매들이 귀한 생굴을 산처럼 쌓아놓고 반은 까서 담고 반은 까서 먹는걸 보고 기겁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자기들 나라에선 몇십만원어치를 그냥ㅎㅎ

  5. durandal 2017.12.30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곳곳에 포장마차가 많던 시절. 겨울 야근 마치고 지하철 내리면 역 입구에 큰 석화를 쌓아놓고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의자도 없이 다들 서서 간단히 소주랑 한두개 먹는 분위기(그땐 잔술도 팔던 시절이었죠)가격은 기억 안나는데 소주 반병에 굴 네다섯개 먹어도 큰 부담은 없었네요.
    유난히 추운 이번해 12월 그때 먹던 굴이 생각나네요. 굴은 뭐니뭐니해도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죠.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의 최후는 1871년 보불전쟁, 즉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시작됩니다. 






(보불전쟁의 여러 광경입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열정이나 애국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들들의 목숨, 그리고 여러분 가족들의 눈물로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찬성할 자격이 있는 분들은 그런 것들을 기꺼이 바칠 용자들 뿐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높았으나, 바로 4년 전인 1866년 보오전쟁, 즉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경험을 쌓은 프로이센군과는 병력 동원 자체가 달랐습니다.  프랑스군은 독일과의 국경 지역 약 250km에 걸쳐 약 20만명을 동원하는데에도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습니다.  프랑스 참모부의 엉성한 계획 때문에 국경 지대의 모든 도로와 철도가 교통 체증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군은 좀더 밀집한 120km 전선에 52만명의 병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에게는 신무기였던 크룹(Krupp)사의 8cm 야전포가 있었습니다.  강철제 후장식 야포였던 Krupp C64 포는 프랑스 포병대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른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밀집 보병 대오를 장난감 병정처럼 쓰러뜨렸습니다.    






(1870년, 소집에 응하는 프랑스 예비군들의 모습입니다.)







(Krupp사의 후장식(breech-loading) 8cm 포입니다.  이건 루마니아군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당시 프랑스군은 아직 전장식(muzzle-loading) 포를 썼습니다.)




거기에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폴레옹 3세가 총지휘관으로 있었으니, 뭐든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보불 전쟁 중 가장 큰 전투였던 8월 17일의 그라블로트(Gravelotte) 전투에서, 11만 병력의 프랑스군은 19만의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분전하여 1만2천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프로이센군에게 1만9천의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메츠(Metz)에 포위되면서 사실상 전쟁의 향방을 패배로 굳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는 그야말로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은 본인이었으나, 실제로는 메츠에 포위된 바젠(François Achille Bazaine) 원수, 자신과 함께 있던 막마옹 (Patrice de MacMahon) 원수, 총리였던 팔리카오(Cousin-Montauban, Comte de Palikao) 백작, 그리고 파리에서 섭정으로 있던 황후 외제니(Eugénie)의 4인이 제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결정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스스로의 의견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이 네 사람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었습니다.






(그라블로트(Gravelotte)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로이센 제9 라이플 대대의 돌격 장면입니다.  이 전투에서는 프로이센군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이런 그의 무능력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그와 막마옹 원수가 9월 1일 세당(Sedan)에서 대책없이 포위되어 프로이센군이 고지에 설치해놓은 포대로부터 맹렬하고 무자비한 포격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상황은 막마옹 원수조차 프로이센 포탄 파편에 부상을 당할 정도로 급박했는데, 나폴레옹 3세는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프랑스군 진지 내를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습니다.  그의 의미없는 산책을 따라다니던 수행 장교 중 하나는 포격에 전사하고, 둘은 부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 날 그를 따라다니던 군의관 하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인간이 여기에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 내내 어떤 명령도 내린 것이 없다."


결국 나폴레옹 3세도 결정을 내리긴 내렸습니다.  오후 1시가 되어, 프로이센군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한 것입니다.  2일 뒤인 9월 3일, 이 항복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황후 외제니가 남아 있는 튈르리(Tuileries) 궁 앞으로 성난 군중이 밀려든 것입니다.  궁 직원들이 성난 군중을 피해 하나둘씩 도주하는 사이, 황후 외제니도 이런 말을 남기고 몰래 뒷문을 통해 영국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황제가 잡혀 가고 황후가 달아난 파리에서는 시민들이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항복이라고 ?  그럴리가 없어 !  황제는 항복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  황제는 죽었어 !  사람들이 내게 그 사실을 숨기려 드는 거겠지.  왜 그 양반은 자살을 하지 않은 거지 ?  이게 무슨 망신인지 그 양반은 모르는 건가 ?"






(외제니 황후입니다.  스페인 그라나다 출신이었던 이 귀부인이 상당히 미인이라고 느껴지시나요 ?)



 


(화가의 붓끝은 정무적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사진기는 눈치가 없어 그렇지 못합니다. 예, 저 그림 속 외제니가 이 사진 속 외제니와 동일 인물입니다.)




나폴레옹 3세는 굴욕적인 항복 후, 다음 해인 1871년 3월 19일까지 독일 빌헬름쇠허(Wilhelmshöhe) 궁에서 편안한 포로 생활을 하며 어떻게든 전쟁 이후 권좌에 복귀하려는 계략을 획책했습니다.  그가 프로이센 재상인 비스마르크(Bismarck)와 비밀 회담을 해가며 꾸민 계획을 한줄로 요약하면, 프로이센군이 파리의 혁명 공화국 정부를 무찔러 주면 나폴레옹 3세의 부하들이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을 새 군주로 하여, 프로이센에게 고분고분한 보수 정권을 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완강한 저항과 독일이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대한 영국 및 러시아의 반감으로 인해 그 계획은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범털 포로 생활을 했던 독일 카셀의 빌헬름쇠허(Wilhelmshöhe)입니다.)



파리 공화국 정부가 프로이센과 휴전 협약을 맺은 이후에도 나폴레옹 3세는 어떻게든 권력을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3 공화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는 불과 5석을 얻는 참패를 겪으면서 그의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종전이 되면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그의 호화로운 감옥 아닌 감옥으로부터 석방했고, 갈 곳이 없던 그는 젊은 시절 망명 생활을 했던 영국으로의 망명길을 택했습니다.  파리에 남겨둔 그의 자산 대부분은 몰수된 이후였으므로, 그는 금전적으로 궁색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휴대하고 있던 보석류를 팔아 망명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그는 런던에서 기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치즐허스트(Chislehurs)라는 마을의 3층짜리 저택에 정착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방문을 받는 등 나름 예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별로 가치없는 글을 쓰거나 에너지 효율이 좋은 난로를 개발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바로 다음해인 1872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873년 1월 병사했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세당에서 겁장이는 아니었다는 거 사실이쟎아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프랑스 국민에게 끼친 피해보다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그의 개인적 명예가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담석 제거 수술 후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한 희대의 코미디언 루이 나폴레옹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1848년 2월 혁명으로 피를 흘려가며 기껏 루이 필립 왕을 내쫓은 뒤 가진 대통령 선거에서, '위대하신 나폴레옹의 조카라는데 뭘 묻고 따지고 그러냐'라며 멍청한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프랑스인들이 받아들여야 했던 결과였습니다.  역사는 자꾸 반복됩니다.  2번이면 이미 충분히 당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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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혼불 2016.12.19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그 틈에; ㅁㄴㅇㄹ;;;;;;;;;;;;

  3. smeb 2016.12.19 0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람 피에 나폴레옹1세 dna가 눈꼽만큼도 없다는것도 코미디죠.

  4. ㅇㅇ 2016.12.19 0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반복될 것 같은데요
    201X 년에도 어느 나라에서

  5. 프로이센군 2016.12.19 0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손이 조상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피가 안 섞였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6. 흐음.. 2016.12.19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제니 황후의 사진과 그림은 눈 처진 거 말고는 닮은 부분이 없네요....
    슈퍼 미인 공주, 왕비들 초상화들도 현실은 저랬을 거 같다는...

  7. starlight 2016.12.19 1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번이면 정말 차고 넘치도록 충분합니다.

  8. 최홍락 2016.12.19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나폴레옹1세 시절인 1800년대초 프랑스의 인구는 29백만으로 18백만의 독일에 비해 배 이상 많았습니다. 그후 프랑스의 순 인구 증가율(출생자-사망자)은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체된 반면 독일의 경우 (+)를 유지하여 1870년 보불 전쟁 당시 독일의 인구가 39백만으로 프랑스의 38백만을 역전하였습니다. 전체 동원가능한 병력 수준은 프랑스가 106만명 정도이고, 독일은 120만 정도였지요. 여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프랑스는 당시 크림전쟁, 멕시코 내전 등 갖가지 해외 원정에 병력이 분산된 반면 독일은 이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이전부터 프랑스를 미래의 적으로 간주하고 계획을 세워둔 상황이라 병력 동원에서 이미 프랑스는 독일에 한 수 지고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정예도 측면에서 볼 때 프로이센 군이 오스트리아 전쟁을 통해 경험을 쌓은 정예병들이었지만, 프랑스군도 크림전쟁, 알제리 전쟁, 멕시코 내전, 이탈리아 전쟁 등 경험 측면에서는 만만치 않다고 할 수 있고요.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압도했던 것은 크루프사의 대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철도를 이용한 기동력 및 병력 운용으로 단순간에 프랑스군을 압도한 점, 그리고 이들을 이끈 리더의 수준으로 압축될 수 있겠네요. 결국 셋 중 둘은 후방 병참 또는 전쟁에 대비된 국가의 경제적 역량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2.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엠스 전보 사건을 접하고 나서도 전혀 선전포고할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수십년간 유럽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감각이 있어서 독일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1860년대 후반부터 혹시 모를 실전에 대비해 보고 받은 결과 프랑스군의 실상을 알고는 더더욱 그랬지요. 물론 현실은 이렇게 알고 있다 한들 격렬하게 들끓는 국민 감정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선전포고를 하긴 했지만, 적어도 한 국가의 리더라면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하면 안되는거였습니다.

    3.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담을 통해, 프로이센군이 파리의 혁명 공화국 정부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한 것과는 별도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을 분쇄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는 독일에 프랑스군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독일이 이를 수락하여, 공화국 정부가 파리코뮌을 100일도 안되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생각과는 또 별도로 주 프랑스 독일 대사인 해리 폰 아르님 백작. 빌헬름 황제를 중심으로 보나파르트 제정 복고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이어야 군주국들의 대불 동맹이 유지될 수 있다고 프랑스 공화국의 유지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 수비니우스 2016.12.20 0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충분히 비스마르크라면 할만한 주장이네요. 추가로 프랑스 내의 왕정복고세력은 보나파르트파의 기세가 팍 꺽였음에도 공화세력보다 셌지만 부르봉정통파와 오를레앙공파가 싸우느라 결국 공화세력이 승리하게 되었다죠. 30년전 우리나라 6월혁명 직후하고 비슷한 현상인것 같아요.

    • 최홍락 2016.12.20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딱히 한국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은 국민들의 투표로 선택한 결과이고, 프랑스의 공화제 유지는 국회의 결정이었으니까요. 정통복고주의자들과 온건 오를레앙파 간에는 넘을 수 없는 의견차이가 많았고, 정통주의자들의 대안이라 여겨졌던 앙리5세의 태도 역시 왕위에 오르는 것에 부정적이라...공화정으로 국가체제를 규정한 헌법의 승인을 위한 투표에서 공화파와 온건 오를레앙파의 연합이 정통복고주의자와 오를레앙파의 연합을 1표차로 앞선 것이 공화제로 가게된 원인이었다고 보네요.

      물론 헌법 제정 및 제3공화정 탄생 이후로도 왕당파의 우세가 계속된 것이 사실이었고, 이에 따라 초대 대통령인 아돌프 티에르(파리 코뮌을 해산한 그 대통령)를 축출하고, 새 대통령으로 파트리스 마크마옹 전 원수(스당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 그 마크마옹입니다. 파리 코뮌 진압 시 사령관이기도 하였습니다.)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마크마옹은 왕당파로 1875년 선거의 결과로 공화주의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 하원과 충돌을 빚은 끝에 77년 의회를 해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시 공화파의 승리. 결국 마크마옹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점차 왕당파는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게 되고요.

  9. 유애경 2016.12.20 0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대하신 x대통령의 따님이신데 뭘묻고 따지고 그러냐...웃음만 나오는 작금의 현실입니다^_^.
    부디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하루빨리 진정한 민주국가로 거듭났으면 싶습니다.
    그나저나 외제니황후님 엄청 미인인줄 알았는데 사진으로는 좀 아닌것 같네요.
    붓빨덕좀 보셨네...

    • 최홍락 2016.12.20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딱히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표를 준것으로 보기엔 어려운 것이 당시 대선에 나왔던 인물들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당시 임시정부 수반), 루이 외젠 카베르냑(2공화국 국방장관)이 1848년 6월 폭동 당시 노동자들의 항쟁을 가차없이 진압한 책임자들이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차악을 선택하는 심정으로 루이 나폴레옹에 몰표를 던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여기에 덤으로 농민들의 몰표까지 더해진 결과가 루이 나폴레옹의 집권이지요. 유권자들의 선택을 졸로 보기엔 그 기저에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 점이 간과된 듯 합니다.

    • 나삼 2016.12.24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님 글에 동의 합니다. 또 나시카님은 역사에 빗대어 현 정치시국을 바라보신것 같은데 국민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나시카님이 비꼬실려고 하는 박근혜 당선도 들여다 보면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의 대북정책과 여러 가지 실정에 피로가 누적된 국민들이 차악으로 선택한 경우가 그분 따님이니깐 하면서 뽑아준 케이스보다 많았을 겁니다. 각종 앙케이트에서 중도층으로 표현 되는 계층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고 보는데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 bru 2016.12.24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민 멍청한 거 맞는데요.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아무리 실정이 있었어도 그 뒤의 9년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그럼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 맞지요. 차악이랍시고 최악을 골랐는데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요.
      애초에 군주정이든 민주정이든 인간의 선택은 당연히 어리석을 수 있고, 민주정은 다수의 선택으로 그 리스크를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할 뿐이지 어리석은 선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지난 9년간의 한국은 중우정치의 수많은 예 중 하나를 역사에 추가했을 뿐이지요.

    • 최홍락 2016.12.25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러려고 답글을 달았던 것이 아니었는데 논지가 산으로 가버렸네요. 정치적 선택은 선택 주체의 인센티브와 시스템적 제약이라는 배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이러한 모든 주체들의 합리적 선택의 합이 선거 결과로 표출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는데 말이죠.

      최근에 좌우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국민의 의식수준을 개탄하고 중우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인 특징이 1) 자신들의 주장과 배치되는 다수의 선택을 어리석음으로 치부한다는 점, 2) 재미있게도 자신들이 지지를 얻을 때는 위대한 국민의 힘을 들먹이며 상대방을 상종못할 인간들로 매도한다는 점이지요.

      국민의 정치적 지향점은 한가지가 아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의의 대변은 각각의 민의를 대신하는 여러 정당과 시민단체 등은 각각의 민의를 대변하는 도구입니다, 그런 다양한 여론을 대표하는 각각의 단체들이 그 다양성 간의 간극을 줄이고 토론과 토의를 통해 합일점을 도출해 나가는 과정, 그 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고요. 국민 개개인의 정치 지향점의 다양성과 그 다양성 간의 차이를 줄이는 과정은 생략한 채 모든 민의를 다 하나의 실체로 규정하여 이것이 국민의 뜻이네, 국민의 수준이네 얘기하는 것 자체가 중우정치와 포퓰리즘의 시작이지요.

    • bru 2016.12.25 0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참 예리하고 수준높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한국의 노인들에게는 의미없는 고매한 댓글이었다는 아쉬움이 있군요.
      저를 포함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한국의 노인들은 계속 최악의 선택을 하겠지요. 이나라의 문제의 원인을 헛다리짚지 마시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시면 좀 읽을 가치가 생길것같습니다.
      한마디로, 조실부모해서 불쌍하니 대통령시켜줘야 한다느니, 내 고향이 대구라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새누리당 찍는다는 유권자들이 득실거리는 나라에 맞는 수준의 논의를 부탁드립니다. 합리적 선택의 합이 선거 결과 어쩌고 하는 현실과 비춰보면 실소가 나오는 이상론 말고 말이죠.

    • 최홍락 2016.12.25 1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의 저서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는 진보에서 보수성향으로 변화한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다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진보 진영은 가난한 사람들이 반공주의와 같은 보수 세력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포섭되어 계급의식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여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추진하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게 된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심층 인터뷰 결과 이들은 진보 세력보다 보수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계급 이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빈곤층은 진보 세력의 선의도 알고, 보수 세력이 특권층에 속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정치적 리더십이 약한 진보 세력의 한계로 인해 (매번 야권 연대를 역설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사례중 하나이지요.) 실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반면 서민들의 표를 의식하는 보수 정치 세력은 일정 정도 친서민적 정책을 취하게 된다고 인식하게 된다고합니다. 지금은 갈라지고 있지만 보수 정치 세력은 강한 조직적 기반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보 세력보다는 선의가 부족하다고 해도 실제 자신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결과물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흔히 ‘뭘 해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35% 콘크리트층’이라는 말이 진보진영에서 상식처럼 회자되는데, 그것은 역으로 악마를 만드는 논리입니다. 다시 말해 35%는 말이 안 통하는 비합리적·비이성적인 집단으로 규정해놓고 그들을 배제한 채 전략을 세우는 것이 그동안의 야권의 지지층 및 당직자들이 가졌던 고질적인 문제였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형편없다는 50대 이상의 노장층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인 국가 체계 내에서 4.19와 87년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요.

    • bru 2016.12.25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s://www.youtube.com/watch?v=d0QmtoBGLZY
      악마가 이미 많이 있는데 그 존재를 부정해서 뭐하겠습니까. 이정희가 박근혜 당선의 1등공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보면 참 어이가 없더군요. 왜 원인과 결과의 연결도 안되는걸까 하고요. 저와 님이 뭐라고 하든 말든 콘크리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서 1번 찍습니다. 나이많아서 젊은 사람들처럼 바쁘지도 않으니 투표율도 끝내주죠. 존재하는 걸 없다고 해서 서로 에너지 낭비를 하지 말고, 투표권을 뇌없이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정도는 서로 인정해야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참고로 저는 아파트 한채 정도는 있으면서 새누리당 찍는 사람들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폐지 줍는 노인들이 새누리당 찍는 게 중우정치가 아니면 뭘까요?
      그리고 419야 워낙 옛날 일이고, 87민주화항쟁을 한 건 세대 전체가 아니었죠. 결국 그렇게 전두환을 물러나게 했더니 노태우를 뽑은 걸 보면 아시겠죠. 아, 이것도 결국 야권의 분열로 원인을 돌리시려고요? 왜 그렇게 한쪽에게만 엄격해야 하는지 저는 전혀 이해가 안되지만, 하여간 50대 이상은 남이야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죽건말건 자기보신하면서 독재정권을 살아남은 부류가 더 다수이고 그 부류들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해석이 더 논리적이지요.

    • 최홍락 2016.12.25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이 사람들의 정치관을 가지고 악마라고 말하는 것은 님의 자유지만, 그것은 반대편에서도 반대 성향의 유권자들을 상대로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도층의 반감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서구 선진국인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계급과 상관 없이 하나의 정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요. 오히려 이번 총선에서 여당 야당 우세 지역에서 선전을 펼친 상대당 후보들이 많아서 어느 당 어느 후보든 진정성과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어려워진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 조차 민도가 낮네 뇌가 없네 외치는 것은 요새 자유경제원 강사들이 주장하는 천민민주주의 주장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봅니다.

      계급과 반대되는 투표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욕하고 싶으시면 똑같은 비판의 잣대를 소위 말하는 강남좌파에도 똑같이 적용시켜야 맞을 것 같고요. 그리고 서민들이 왜 보수 정당에 표를 주는가에 대해서는 앞서 제가 언급한 장신기 연구원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으니 책을 한번 보시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너선 화이트는 그의 저서인 "바른 마음"에서 진보주의자는 피해와 공평성에만 반응하는데 반해, 보수주의자는 다섯 가지 피해,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에 모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도덕성 기반을 놓고 볼 때 진보 대 보수의 스코어는 2:5니까 보수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바, 다시 말해 '순진한' 노동자 농민들이 우파에게 속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미국이나 한국이나 유권자의 보수적 성향을 깨고 승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거죠. 일개 국가의 정치, 경제 정책, 문화의 경로 의존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고 강력한것이고요. 특히 한국과 같이 빠르게 성장한 국가에서는 세대의 경험이 그만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의 간극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요. 이정도 상황에서 일본과 같이 야당이 거의 전멸한 수준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다당 체제의 구축에 기여한 한국 유권자들이 변화를 이끌어낸 결과는 나름 선방한것으로 평가받아야 할텐데 말이죠.

      그래도 앞날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드신다면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m.blog.daum.net/nasica/6862529?categoryId=560794

      "패배주의에 젖은 시민들만큼 다루기 쉬운 물건이 없거든요." 이 구절이 참 멋있더라고요.

    • 최홍락 2016.12.25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건 몰라도 좋게 얘기드린것에 대해 욕설로 응답하셨으니 그에 대해선 삭제하시는게 좋을듯 싶습니다.

      정치관이 다른 사람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해야한다는 사람들이 과연 님이 말씀하신 뇌없는 늙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다를게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중도층이 이탈하든 말든 비웃으며 살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정치는 자신의 지적우위를 자랑하기 위한 경연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겠죠. 자신의 정치관을 확산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무능한 것이고 무능한 자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요.

      난 그분들의 정치관을 미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그런 현실이 있다는 점을 그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결정과 의식이 형성된 배경도 감안해야 하고요. 그 현실을 더럽다고 갈아 엎으려면 혁명 및 인민재판인데 이런걸 바라십니까?

      불리한 정치 지형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전한 수많은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님처럼 유권자만 탓했다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진 못했겠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교조주의자라고 한다면 현실을 극복해낸 야권의 지도자였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모두 교조주의자의 아류일 수 밖에요.

    • nasica 2016.12.25 1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bru님 댓글 중에는 욕설이 일부 들어있는 관계로, 최홍락님 말씀대로 삭제했습니다.

    • bru 2016.12.25 1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뭐 최홍락님과는 더 이야기할 건 없고, 욕설이 어느 부분인지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저능아 또는 무뇌아 부분이라면 어쩔 수 없죠. 저능아에게 저능아라고 하는 건 실례긴 하니까요. 하지만 '좆같은게 좆같은거지'는 서울대 총학 선본의 슬로건이었고 그 슬로건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 인용한 말로 삭제되었다면 억울해서요.
      그리고 저능아든 좆같은 거든 최홍락님을 겨냥한 건 당연히 아닙니다. 저능아를 저능아라고 부르지 못하고 좆같은 걸 좆같은 거라고 하면 안된다는 교조성을 한심하게 본 건 맞습니다만.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얼마 전에 한 말이 있었죠.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물을 가르고 온 것 같다고요. 한번 교조주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실을 직시했다면 그렇게 안타깝게 떠나진 않았을거고, 그래서 전 더더욱 교조주의를 혐오합니다.

    • 복잡한 세상 2016.12.25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만, 님이 말씀하신데로 유권자가 진보와 보수를 선택하는 이론을 적용하기에는 한국정치가 너무 비정상적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국개론 등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가 극단적으로 흘러 독재와 권위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말은 확실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새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솔직히 그 이전에 독재와 매카시즘의 광기의 시대를 살아왔던 이전의 유권자들이 딱히 어떤 합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권력자를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한 정황아닌가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무려 5%나 지지를 받고 있는 현정부인데, 만약 그게 박근혜가 아니었다면 그 수치가 나오지도 않았을겁니다. 어찌보면 시간의 흐름으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고도 볼수 있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의 1/20이란 밀이
      되겠죠. 그리고 대개 이들이 고령층일 확률이 높은거도 사실이며, 지지의 이유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애국과 반공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죠

      그리고 그나마도 최순실 사건 전에는 흔히 콘크리트롣 알려진 30% 이상을 유지한건데, 중요한건 그때도 국정교과서로 시끌시끌헸엇죠. 무려 독재자가 아버지란 이유로 이를 정당화시키려고 한 행동인데 말이죠. 솔직히 진짜 합리적인 민주시민이면 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동에 반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죠? 하지만 이상과 다르게 이 사안이 사람들을 움직이진 못했죠. 순실이 아니었음 여전히 사회는 mb때처럼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었을겁니다.

    • 최홍락 2016.12.26 0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몇번이고 말씀드립니다만 합리적인 기준의 선택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른 법입니다. 금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현 여당을 지지해온 많은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위에 나삼님과 같이 야권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그들이 비합리적이다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야권이 두차례의 집권 경험을 제외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국가주의와 강력한 리더십이라는 가치와 그를 이용해 성공했던 경험은 그렇게 쉽게 바뀌기는 어렵고요. (물론 저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진 않지만...)

      예를 들어 만약 일부 야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 모두를 일종의 부역자들이다라는 식으로 적대적으로 대했다면 탄핵에 협조했던 비박계 국회의원들의 협조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 야권에서 제기했던 현실론에 근거한 협상안도 이걸 감안했던 것이고요.) 또다른 예로 야권의 집권이 가능했던 시기에 두 지도자들 역시 김종필과 정몽준 같은 보수 세력과 손을 잡아야 간신히 집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정의만으로 정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한 것이지요. 디바이드 앤 룰(Device & Rule)의 교과서 같은 사례이고요.

      한국 정치가 비정상적으로 흘러간다는 언급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정치 혐오를 부추긴 결과가 무엇을 낳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엔 그러한 인식이 "모든 정치 세력들이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인식을 낳게 되고 입법부를 불신하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발목잡기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 이런걸 원하신 건 아니겠지요?

      아직도 지지율이 5퍼센트나 된다고 불만을 가지신 모양인데 여론이 원사이드로 형성되는 민주주의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5퍼센트는 통계적인 오차 범위 내에 있는 수치라서 사실상 제로라고 봐도 무방한 수치이고요.

      국정교과서와 같은 정책적 사안이나 정치적 이슈를 두고 이것이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책적 사안에 있어 적합과 부적합을 따질 문제이지 이것을 비민주주의적이다라고 논하기엔 좀 부적합한 것은 아닌지...

      얘기가 길어졌는데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결론은 이거에요.
      1. 모든 정치적 지향점은 인센티브, 제약조건, 과거의 경향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한 결과이며 이를 비합리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바꾸기란 대단히 어려우며 더욱이 인간이 가진 보수주의적 성향 때문에 이를 바꾸려면 매우 속터지는 상황을 감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억울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주장하는 정치적인 올바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이익이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2. 그래도 이것이 정의다. 이것이 민주주의다라는 것을 관철시키려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결국 선거에서 이기는 것 외에 방법은 없습니다.
      3. 그런데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구제불능의 악으로 규정해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지지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어도 이를 바라보는 부동층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면 선거에서 지고 또 국민 수준을 탓하다 또 지고 악순환을 반복하겠지요.

    • 야채 2016.12.26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bru/ 만약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요?

      > 참 예리하고 수준높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의미없는 고매한 댓글이었다는 아쉬움이 있군요.

      특정 정당 지지자들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닌다면 전라도 사람들은 눈에 핏발이 오를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라도 사람들은 절대 그들에게 표를 주려고 하지 않겠지요. 아니, 그 반대 세력을 집권시키기 위한 열성을 보일 겁니다.

      그러면 그게 전라도 사람들이 우매한 것일까요,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우매한 것일까요?

      자칭 진보 지지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진보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지지하기보다는 반대 세력을 모욕하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습니다. 단순히 지지자들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노무현은 등록금 문제의 대책을 주문하는 박근혜에게 서울대 학생의 60%가 강남 학생인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느냐고 반문했고 (물론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정동영은 노인들은 투표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대놓고 말했었지요.

      모욕에 분노하는 것은 전혀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진보측 지지자라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국민이 개돼지라거나 하는 종류의 발언에는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정작 본인들 스스로도 국개론을 설파하고 다니면서 그런다는 게 괴상하기는 합니다만.) 상대방이 자기들의 발언에 분노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발상조차 떠올리지 못합니다. '강남'에서 몰표가 나오면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으로 똘똘 뭉쳤다"고 말하고, 노인들이 새누리당에 표를 주면 "아무 생각이 없이 무조건 1번만 찍는다" 라고 말합니다. '보수'는 신기하게도 자기 이익에 기가 막히게 민감한 사람들과 자기 이익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 모이기라도 한 것일까요?

      자칭 '진보'라면서 '민주주의'를 떠드는 사람들 입에서 국개론이 나오고 반대파는 '투표를 하기에 너무 어리석다'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한심한 일입니다. 박근혜가 한심합니까? 친박이 한심합니까? 물론 한심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상대측 지지자들을 친북이라고 비난은 했을지언정 투표권을 박탈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박근혜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 야채 2016.12.26 1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복잡한 세상/ 그게 '사실'이라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대체 어떻게 당선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당선될 때는 똑똑하게 그들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 이후에는 바보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노무현이 수돗물에 독이라도 탄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니면 지금은 '독재와 매카시즘의 광기의 시대를 살아왔던 이전의 유권자'들이 숫자가 더 많고 그 때는 적었을까요? 상식적으로 말해서 그 반대겠지요.

      복잡한 세상님의 결론도 딱히 어떤 합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내린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었던 건 불과 9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고작 10년 전의 일을 존재조차 잊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 복잡한 세상 2016.12.26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채/ 김대중씨는 당시 보수쪽 내에서 후보를 둘 냈던거 컸던건 누구나 아실테고 노무현씨는 현재 박근혜 대통령 때랑 마찬가지로 위기감 느낀 386세대의 결집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그리고 이후 진보의 분열과 지도자의 부재 등등과 혁신을 표어로 내건 보수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기에 진보 지지자들 중 정치무관심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믾이 등장했음도 감안함이 맞는게 아닌가 싶군요

      물론 여전히 보스 중심의 정치와 지역감정도 큰 영향을 주었겠죠. 근데 김대중때나 노무현때나 지역감정과 반공주의에 기초했던 보수 해바라기층의 투표는 늘 계속되었다는건 분명한 사실이죠. 그리고 그 둘이 뽑힌건 그 당시에도 아주 이변으로 받아들인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시나보군요. 똑똑한 국민들이 그 둘을 선택한게 아닙니다. 그 말이야 말로 국민이라는 다양한 개인의 모임을 하나의 존재로 일체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거죠.

      저도 현재의 대한민국 유권자들에 실망하는 점도 있지만, 지난 10년간의 진보의 집권과 현재와 같은 대대적인 결집을 등등처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의 선택이 언제나 정당하고 옳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거에는 동의하긴 좀 힘드네요. 그렇게 본다면 민중의 선거로 집권한 나치도 정당화되고 박정희도 정당화되겠죠.

      마찬가지로 민주화 운동이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일일수도 그저 아무의미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을수도 있고, 누군가는 일베의 누군가들처럼 적성세력의 사주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한장ㅇ 투표로서 나타나게 되겠죠. 똑같이 한표를 행사하는거지만 안에 든 생각은 합리적 민주일편이 아니라 천차만별로 다르죠. 이는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담론이 여전히 분분한 것과 같습니다.

      단지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지난 2번의 진보의 집권은 보수의 분열이라는 기적과 진보의 결집이 만들어 낸거죠. 하지만 그 사실이 존대하는 콘크리트를 부정할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인제를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괜히 있는게 아니죠. 마찬가지로 내년에 진보측에서 우려하는게 이런거고여

      여전히 제 의견이 비이성적인 계몽주의에 속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어쩔수야 없겠죠. 물론 그 콘트리트 설이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허상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와 기록으로 남아있는 여러 인터뷰 등등으로 미루어봤을때 그것이 우물의 독을 푼 xx같이 근거 없는 소리라고 보진 않습니다

    • 최홍락 2016.12.27 1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 14대 대선에서 880만여표의 득표를 하여 990만표의 김영삼에 패한 후 다음 대선인 15대 선거에서 1000만표 대 990만표로 승리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단순히 이인제가 보수 표를 분산하였기 때문에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당시 여당의 지지층의 숫자나 퍼센티지는 그 전 선거 대비 줄어들지 않았고 김대중 대통령이 보수층인 김종필과 손을 잡고 지지세 확장을 펼친 것이 주효하였지요.) 노대통령의 경우도 보수층인 정몽준과의 통합을 통해 지지세를 확장한 것이 주효하였고요. 그것을 야권이 온전히 자칭 깨어있는 유권자만의 힘으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다가 깨진 것이 2012년 총선과 대선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감히 넘겨집는 것 같지만 야권을 지지한 유권자들을 똑똑한 사람들로 여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로 도식을 해놓으시고 유권자가 모두 똑똑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신 것이 이 기나긴 토론이 끝나지 않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몇번이고 말씀드리는데 정의가 독점될 수 있다는 그 착각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유경제원에서 요새 밀고 있는 천민민주주의론 같은 담론처럼 말이지요. 어느 유권자건 콘크리트같이 단단한 유권자들이 이유없이 생긴 것이라 포기하면 2012년의 야권의 실패를 반복하겠다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 야권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지요.) 콘크리트 지지율 조차 나름의 합리적 결정일수도 있고 그것을 풀어내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이 정치 앨리트의 의무인 것이지요. 수요자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겸손하지 못한 정치 생산자가 어떻게 선택받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야채 2016.12.27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복잡한 세상/ 우선 근본적인 전제 자체의 문제가 있습니다. 진영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만약 진보진영 쪽의 정당에서 부정부패나 개인의 전횡 같은 문제가 나온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중도파 내지 부동층들은 진보진영 자체에 등을 돌리고 새누리당에 투표하는 경우도 많겠지요. 하지만 진보측 지지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상당수, 아니 대부분은 새누리당으로 달려가기보다는 다른 진보정당들 중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할 겁니다. 놀라운 일은 아니죠. 부정이 있었다는 것은 정치인들 개개인의 문제이지 진보라는 노선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복잡한 세상님 같은 많은 진보측 인사들은 보수 쪽도 마찬가지로 보수라는 노선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인정은 고사하고 과연 인식은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잡한 세상님같은 많은 '진보'측 사람들의 태도는 "내가 진보에 대한 지지를 계속하는 것은 '굳은 신념'이지만 반대쪽 사람들이 '보수'에 대한 지지를 계속하는 것은 '콘크리트'다" 라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수 쪽에 보수라는 노선 자체에 대한 강한 지지세력이 있는 건 당연히 사실입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이 당선된 점은 '진보' 쪽만이 아니라 '보수' 쪽도 그런 굳건한 지지자들 만으로는 당선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복잡한 세상님은 그런 지지자들의 존재와 그런 지지자들만으로 당선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뒤섞고 있습니다. 그런 굳건한 지지자들에 대해서라면, 진보측은 어떻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새누리당은 찍지 않고 진보진영의 정당들 가운데서만 대안을 찾는 굳건한 지지자들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보다 중요한 점은, 과연 복잡한 세상님은 그렇게 진보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봅니까? 둘 다 아니잖습니까.

      노무현이 막판에 지지율이 얼마나 바닥을 쳤고 당시 한나라당이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고 할 정도로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른바 '콘크리트'였다면 김대중도 노무현도 대통령 당선은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이명박의 압승은 상당수의 부동층이 노무현과 진보진영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크게 잘못 기억하시는 것 같은데, 김대중은 대선 당시 당선 가능성이 제일 높은 후보였고, 이회창은 이에 맞서기 위해서 조순을 끌어들이는 등 동분서주했습니다. 노무현도 많은 여론조사에서 앞섰을 뿐 아니라 뒤쳐질 때도 이회창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CIA에서 "R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고요. 대체 '당시'라는 말씀이 언제를 기준으로 잡으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물론 그것을 이변으로 받아들였건 말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김대중과 노무현이 실제로 당선되었다는 점이고, 그 결과와 그 이후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 결과 자체가 양쪽 진영의 굳건한 지지자들만으로는 당선이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과를 잘 예상했는지 잘못 예상했는지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민중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전 노무현이 당선된 것부터 좋은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노무현이 당선된 건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덮어놓고 친북 노선만 지지하는 빨갱이들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건 아주 다른 이야기입니다. 선거의 기본은 누군가는 선택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박근혜를 선택한 사람들은 다들 박근혜에 충성을 바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문재인과 이정희가 당선되는 게 더 나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남 이야기 할 것도 없이, 이명박이 당선될 때는 어땠습니까? 많은 진보측 사람들이 정동영을 찍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습니다. 이명박은 나쁜 놈이고, 한나라당은 악당들이고, 우리의 '노짱'은 소중하니까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동영 본인이 대통령감이라면서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아니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선거인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이명박이 당선된 대선에서 '보수'쪽 사람들이 "정동영이 대통령으로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계몽'하려고 들면 그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보 쪽에서 정동영을 숭배해서 지지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진보 쪽에서 새누리당이 얼마나 안 좋은 집단인지를 '계몽'하려 드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 **를 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 라는 식의 힐문 또한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결과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동영이나 문재인 등이 대통령이 되어 쳤을지도 모르는 사고'와의 비교를 통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국민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도 합니다. 정치 세력은 "왜 국민들은 우리를 지지하지 않고 저 놈들을 지지할까? 바보라서?" 라고 묻는 게 아니라 "왜 우리는 저 놈들보다도 국민의 지지를 못 받을까?" 를 물어야 하는 겁니다.

      "왜 국민들은 우리를 지지하지 않고 저 놈들을 지지할까? 바보라서?" 라고 말하는 정치세력은 "왜 소비자들이 우리 제품을 사지 않고 품질이 나쁜 저 회사 제품을 살까?" 라면서 자기 회사의 제품이나 마케팅에서 문제를 찾는 대신 "소비자들이 멍청해서 그렇다" 라는 결론을 내리는 기업과 같습니다. 실제로 제품이 좋건 나쁘건 그런 기업은 망해도 싼 것 아니겠습니까?

    • 복잡한 세상 2016.12.27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

      '수요자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겸손하지 못한 정치 생산자가 어떻게 선택받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은 정치에 대해서 유권자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또한 말씀하신거처럼 김대중씨의 당선은 10만표 정도의 차이로 당선되었다고 하셨는데, 이는 이인제와 이회창의 나눠먹기 및 말씀하신 김종필과의 연합 등의 노력을 하는 운과 노력이 전부 뒷받침 되었음에도 그 정도 차이에 그쳤다고 보는게 더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인제가 무려 약 20%의 득표를 했으니까 말이죠. 따라서 15대 대선에서 보수의 분열을 떨어뜨려놓고 결과를 논하자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이 드네요.

      또한 말씀드린것처럼 당과 정책에 관한 의견은 크게 두가지이지만, 양자를 선택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다양하다고 말씀드린 점에서, 제 정치관을 이미 말씀드린거 같습니다만... 저는 보수나 진보 양쪽에 모두 유권자마다 각양각색의 지지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콘크리트에 집중되어서 좀 희석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보수 지지층은 모두 콘크리트이기에 멍청하다'라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는거죠.

      이미 제 가족중에 심각한 양비론자이신 아버지도 계시고, 빨갱이 싫어하고 박근혜를 불쌍하게 여기시는 할머님도 계시는등 이미 다양한 유형을 유권자를 봐왔죠. 당연히 정치에 밝은 사람이 보수를 지지하는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무작정 진보를 지지하는것도 보았겠죠?

      저는 정의가 독점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상대적 정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그 누구도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않다고 어떻게 비판하겠습니까? 물론 어디에나 비리는 있겠죠. 그래서 양비론자나 무관심자처럼 시크하게 '정치하는 놈들 다 똑같다!'라고 손가락질도 할 수 있겠죠. 근데 그게 옳은 유권자가 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다르게 생각하실수 있지만,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의를 기준으로 봤을떄 지난 10년은 그 지난 진보의 10년보다 더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의견이 분분할수는 있겠지만, 저는 특별히 그 민주적 정의에 다른 가치를 주입한 적은 없습니다. 만약 이게 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극단적 계몽주의로 비판받는다면, 님 역시도 그 비판에서는 자유롭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결국 님도 극단적인 상대적 가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님의 생각을 주장하는것이니까요. 마치 이전의 지식의 권위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 포스트모던주의가 그 내용에 권위를 부여하는 오류를 저지른 것처럼요.

    • 복잡한 세상 2016.12.28 0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채 / 어째서인지 저를 극단주의자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현실적인 정치의 대안은 거의 2종류 뿐이고 때문에 같은 안건을 선택하지만 그 유권자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저는 보수 지지자들 모두가 콘크리트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진보지지자가 모두 깨시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3그룹의 비중중에 '왠만하면 진보'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많이 낮아서 상대적으로 보수가 이득을 보는 추세가 요즘 많이 변화중이라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과거같이 여전히 진보에 올인하는 전라도와 다르게 부산, 울산, 경남쪽은 더 이상 보수의 무한한 표밭이라고 하기도 묘한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요즘은 부산과 대구에서 민주당의 자리를 주기도 했죠. 아직 지역감정과 반공의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부분은 오늘날의 유권자들이 더 성숙해졌음을 긍정해야 할 부분이겠군요. 그렇다고 콘크리트의 존재까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말씀하신것처럼 만약 진보가 보수만큼 강한 고정세력이 있었다면, 이회창도 무소속으로 난입해준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에게 20% 이상의 참패를 하진 않았겠죠.

      저는 합리적이던 비합리적이던 어떠한 이유로던지 '철새'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란 그들을 공략하는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님은 이것이 각 부동층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해석하기 나름이겠군요. 뭐 결국은 서울, 경기권 싸움이란 말이 되지만요. 어쨌든 정치적 철새 비중의 증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기준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이 말씀하신것과 다르게 저는 역사와 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조차없이 정치적 신념을 갖는 것을 매우 혐오합니다. 그것은 솔직히 맹목적 신앙같은거라서 언제든 이유없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단지 결과적으로 같은 배를 탔다는 이유로 같다고 하는 것은 오산이죠. 보수든 진보든 그를 지탱하는 신념은 어느정도 합당한 지지대가 필요하다는게 제 의견입니다. 원숭이가 찍은 종목이 올랐다고, 그것이 위대한건 아닌것처럼요. 결론은 신념의 뼈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유사종교와 같은 것이 아니라요.

      소비자와 기업의 논리가 유권자와 정당의 논리에 100% 대입은 안된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최홍락님을 향한 답변에서 말씀드린것처럼, 이는 극단적으로는 유권자들은 정치의 책임이 없다는 위험한 논리로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유권자는 민주정을 이루는 일부로서 그들의 한표를 올바르게 행사할 책임이 있는데 말이죠. 이는 권리만 행사하고 책임은 나몰라라 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괜히 플라톤이 중우정치 드립쳤으며, 일각에서 그나라의 정치인은 국민에 수준에 맞는 사람이 당선된다고 하겠습니까?

      왜 국민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민주정을 할 이유도 없으며, 독일과 일본등 2차대전의 전범국들에게 책임을 요구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 최홍락 2016.12.28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민에게 정치적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은 자칫 위험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작금의 사태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다른 정부에서 있었던 수많은 정책적 오류를 문제삼아 그를 선택한 유권자의 잘못이니 책임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어느 정치세력처럼 똑같은 부역자일뿐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적용시키면 민주주의나 절대적인 가치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끝없는 만인과 만인 사이의 투쟁을 낳을 뿐입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지금 촛불을 들고 나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만든 대통령이니 당신도 공범이라며 침묵을 강요하거나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민주주의의 집회의 자유나 저항권은 애초에 물건너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쁜 정책 내지는 정부의 부작위로 인한 피해를 감내한 것은 유권자인데 이를 넘어 책임까지 져야 하는가라면 저는 그런 계몽주의에 동의 못하겠습니다.

      애초에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의 전제 자체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것이며 다수의 여론을 견제하는 삼권분립과 대의제 등 여러가지 시스템이 합쳐져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 복잡한 세상 2016.12.28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

      현재 말씀하시는건 유권자들의 정치적 책임을 변호하기 위해서 유권자를 아무런 주체성도 없는 개돼지로 만드는 행위라고 보여지는군요. 이건 주체성을 가진 개체의 존엄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보여지네요. 정말로 가축마냥 이를끌면 이리가고 저리끌리면 저리가는 존재가 국민이자 유권자라면, 민주주의를 할 이유도 없죠. 오히려 그게 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모순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나향욱 마냥 그런 생각을 하신건 아니실거라 생각합니다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미 유권자는 선택을 할 권리가 있죠. 결정을 만드는데 많은 부분 지분이 있다는 말인데, 이는 권리는 좋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지긴 싫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현세대가 '전쟁은 우리 세대의 책임이 아냐!' 혹은 '일본국민은 군국주의의 피해자일뿐이다!'라고 주장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국민이 정치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게 명목적인 처벌을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그 책임의 소재가 유권자들에게 전부 주어진다고 말한적도 없습니다. 다만 분명히 유권자도 결정에 기여한 만큼 책임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국민의 저항권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뒤돌리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있으면 움직여야죠. 오히려 손을 놓고 있는것이 더 무책임한것 아닙니까? 왜 일본의 정치를 비판합니까? 움직이지 않거든요.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니, 이들이 순응하는지 불만이 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렇게 피드백이 없으니, 일본정치에 변화가 없는거겠죠.

      민주주의와 독재는 동전의 양면같다고 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그랬고 프랑스의 역사가 이를 말하고 있죠. 그렇기에 저는 같은 이름의 민주주의라도 상대적으로 올바르게 작동하는 정도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름만으로 정치체제를 구분한다면 극단적으로는 북한도 민주주의죠. 하지만 그들이 정치적 매카니즘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을 민주공화국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이가 크지만 민주주의에는 비합리, 비민주적 요소가 섞인 경우가 현실에는 꽤 많이 존재하는 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겁니다.

      저는 이것은 유권자들의 의식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이 해결해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인위적 개입이 민주정신을 깨고 절대자나 신격화되는 인물을 낳는다고 보기에, 누군가를 별로 계몽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시다시피 정치적 신념은 계몽한다고 해서 계몽도 안됩니다. 이는 프랑스 혁명시기에 왕권을 긍정했던 이를 거부했던 구세대 사람들에게도 보여졌던 부분이고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건 결정을 하는 유권자들의 의식수준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이미 많이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결정에는 절대적 정의가 없죠. 유권자들이 이를 합리적으로 구분하고 결정할 능력을 다수가 갖췄을때 민주주의는 의미가 있는 셈이죠.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도 다른 소수정과 마찬가지로 권력자의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 민주정에 대한 견해가 다소 계몽주의로 비쳐서 계몽주의를 말하시는것 같은데, 저는 언제까지나 유권자의 성숙을 말했을 뿐입니다. 이건 민주정의 이론에 대한 상식이고 기본이죠. 근데 그것도 계몽을 말하는게 아니냐고 반문하신다면, 그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교육이라는게 왜 필요하겠습니까?

      현재의 대한민국에 대한 견해는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아직 대한민국의 민주정이 완벽한 성숙단계라고 보진 않습니다. 다만 성숙을 향해 전진의 관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은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견해에 대한 오해는 풀렸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님과 저의 현재의 시국에 대한 견해는 다른 것은 분명하네요. 이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좁혀지기 힘들겠지만요.

    • 최홍락 2016.12.28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민들을 계몽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 역시 유권자의 성숙도에 따라 좌우된다는 의견에 따로 이견 없습니다. 각론에 대해서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씀만 드립니다.

      우선 시민들의 성숙도 문제입니다. 성숙도가 높으냐 낮으냐의 판단기준은 무엇입니까? 문자해독률, 경제적인 수준, 평균 학력, 부패인식 지수, 언론이나 정책 피드백에 대한 접근도 등이 상위에 있다면 그 사회의 유권자 수준도 그만큼 높아질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북한이나 고대 국가를 비교 케이스로 넣고 한국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논하는 것은 좀 핀트가 안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의 비교도 그렇습니다. 일본도 꽤나 무능한 시점은 있고, 현대국가 이후 민중에 의한 '저항'도 임팩트는 떨어지거니와, 화족 출신의 정치인들의 성분 때문에 세습 정치라는 오명도 받는 것도 있지요.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일본의 복지 제도나 사회 시스템 구성을 보면 적어도 민중의 먹고 사니즘은 충실히 해결해왔지요. 그 우익의 총리인 아베가 철저히 국익 중심 외교전을 펼치고, 여자 신입사원의 자살 문제에 대해서도 '과로사'라고 명명하는 등 사회 여론에 충실히 응답은 하고 있는데 이런 민주주의가 수준 낮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상기 기준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 군정 및 독재 정부 종식과 정권 교체의 역사 등 한국 국민들의 수준 및 성숙도는 어느 정도 기반이 갖처져 있으며 이제는 앞으로 어떤 국가의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단계에서 의견을 조정해 나가는 단계라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올바르게 작동하는 민주주의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공동체안전과 질서가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평등과 박애가 또 누군가에게는 자유와 부가 소중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겐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인 서구 선진 사회도 누군가에게는 복잡하고 더딘 관료주의 사회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대의제 민주주의 기본 질서 체계가 통으로 잘못된 대형 스캔들 문제가 아니고서야 정치적 이슈나 사안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으며 이를 조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해야할 일입니다. 그를 위해 당연히 인정되어야 할 전제가 모든 유권자의 정치적 결정은 그의 배경하에서 그가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점을 깔고 접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대통령도 미국의 트럼프도 요새 인기를 얻고 있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깨닫지 못한 그 생각말이지요.

    • 야채 2016.12.28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복잡한 세상/ 극단주의자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문장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 솔직히 그 이전에 독재와 매카시즘의 광기의 시대를 살아왔던 이전의 유권자들이 딱히 어떤 합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권력자를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한 정황아닌가요?

      만약 '이전의 유권자들'을 "인터넷에 쉽게 영향을 받는 어린 유권자들" 이라고 바꿔놓는다면 동의하시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하게도 모든 청년층 진보 지지자들이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고 진보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보 지지자들을 '인터넷에 쉽게 휘둘린 생각 없는 콘크리트'로 묘사한다면 동의할 수 없을 겁니다.

      두 가지 고려하셔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민주주의는 논리와 근거로 무장한 사람들만으로 정치를 굴리는 체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모든 순간에 이유를 찾아가면서 정치세력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치노선의 큰 줄기를 선택했을 때도 이유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복잡한 세상님은 그들의 '이유'를 자기 스스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단지 그 이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 대개 이들이 고령층일 확률이 높은거도 사실이며, 지지의 이유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애국과 반공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죠.

      복잡한 세상님은 '반공'을 '신앙'이라고 간단히 치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복잡한 세상님은 '진보'와 '북한'을 연결시키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순전한 신앙의 영역으로 보이실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진보'를 북한의 위협과 실제로 연결시킬 이유는 충분합니다.

      우선 '진보' 내부에 정말로 친북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건 진보 내에서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갈라져 나올 때 공인된 바이기도 하며, nasica님의 Daum 블로그에도 김일성 정권이야말로 한반도의 정통성 있는 정부였다는 댓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극히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진보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숫자의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런 친북적인 사람들을 감싸기 때문입니다. 명백히 친북적인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진보에는 친북은 없고 전부 보수 세력이 뒤집어씌운 이미지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저 정도는 친북이 아니다" 이외의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는 정말 친북적이라기보다 단순히 같은 '진보'라는 이유로 어거지로 감싸는 사람이 더 많은 듯 합니다만, 친북으로 여겨지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한다면 본인들에게 있다고 할 수밖에요. 목수정 사건 때 수많은 진보진영 지지자들이 목수정을 옹호하는 동시에 "진보는 목수정처럼 행동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라는 건 누명이라고 억울해한 일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생각이 없어 보이냐고 한다면 그것도 진보 쪽입니다.

      더구나 이석기 등의 국가전복 모의가 적발되었을 때 한겨레신문이나 많은 진보측 인사들은 "우리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니! 그런 사람들이 드러나서 다행이다"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라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한겨레신문 같은 경우는 제보자의 정보를 이름만 빼놓고 이력을 통째로 공개하다시피 했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 친북적인 집단이 진보진영 내에서 정말 소수에 불과한지 의심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진보진영 전체를 놓고 보면 정말 소수일 가능성이 높아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진보를 친북과 연결시키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신앙'의 영역이라고 매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이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그걸 단지 지지자 일부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없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단지 북한과 화해하는 정책을 추구했지 안보를 위험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노무현은 균형자론을 설파하며 한미동맹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미국 정부에 북한의 핵을 인정하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간첩과 접선하다 체포된 이석기를 사면 복권시킨 것도 노무현입니다. 참고로 체포한 것은 김대중 정부였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나열해도 이 정도의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에 비해서 경제에 대해서는 대체 뭘 했단 말입니까? 경기가 침체되는 와중에 돈을 풀어서 집값만 올린 것 말고 대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기 이후의 경제에 대한 영향까지 고려하면 한미 FTA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진보' 쪽에 흔히 기대할 만한 경제정책은 아닙니다. 진보측 정치세력들을 '복지'나 '서민'과 연결시키는 것보다 '친북' 및 '안보불안'과 연결시키는 쪽이 더 논리가 탄탄하면 탄탄했지 아무 이유없는 맹목적 신념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유권자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라면

      > 이는 극단적으로는 유권자들은 정치의 책임이 없다는 위험한 논리로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유권자는 민주정을 이루는 일부로서 그들의 한표를 올바르게 행사할 책임이 있는데 말이죠.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인 및 정치세력은 국민 앞에 책임을 지지만, 국민은 정치세력 앞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국민이 바로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일부'일지는 몰라도 결코 다른 '일부'들과 대등하거나 비슷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유권자는 물론 스스로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자연인으로서 유권자들의 책임을 묻고 비난할 자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 세력이나 그 지지자로서 국민을 비난하는 것은 한심한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별로 어려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 소비자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견일 뿐이지만 기업의 임원으로서 우리 제품을 사 주지 않는 소비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복잡한 세상님이나 bru님, 그리고 국개론을 들고 나오는 수많은 진보 지지자들이 국민들을 비난하는 모습이 '자연인으로서 유권자로서의 일반적인 행태를 비난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정치세력의 지지자로서 우리 쪽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인지를 본다면 명백하게 후자 쪽입니다. 양자를 구별하지 않고 '유권자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뭉뚱그려서 '우리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 복잡한 세상 2016.12.28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채 /

      님이 보수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안보에 대해서는 저도 기무사였던 친구에게서 친북단체에 대한 이야기 질리도록 들었고, 80년대 북한이 대학생 사회에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등등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진보 진영에 그때 학생운동 했던 사람들도 많이있고, 그 중에서 과거 진짜 북한에 충성했던 이석기로 대표되는 인간들이 남아있음도 알고 있죠. 흔히 386세대라고 불리는 세대에 북한은 많이 스며든 셈이죠. 현재 진보 진영에 운동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축이기 때문에 내부에 스파이가 많은 진보는 위험세력으로 인지해야 한다는 말도 그런 부분에서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보에 대해서는 보수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진보를 커버치는게 아닙니다. 안보라는 측면은 보수던 진보든 어디든 자랑스럽게 떠벌리기 힘든 영역이라는 겁니다. 당장 군부시절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대표적으로 북한에 총 쏴달라고 했던게 걸렸던건 누굽니까? 그리고 mb때는 그 안보란 이름의 권위 아래 얼마나 많은 불통으로 악명을 떨쳤습니까? 그건 군중 아래 숨어든 북한추종세력이 나쁘니까, mb정권이 했던 행동이 정당화 됩니까? 그리고 국방개혁 2020 예산도 결정적으로는 mb정권아래서 정확히 4대강 예산인 22조만큼 삭감되었죠. 결국은 보수에서 말한 안보로 제대로 믿음을 주었던 적이 한번이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왜 저는 그 안보를 정치적 무기로 밖에 삼지 않았다고밖에 안 느껴질까요? 그 안보 운운한 박근혜 정부의 안보상태는 대체 어떤지요. ‘진보 = 안보불안’의 안티테제로 보수를 지지한다는건 감정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설득력 있다고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님 말대로 진보측 집권시기에 안보문제로 말 많았던거 인정합니다. 그런데 왠지 님은 그 삽질을 강조하고 그 반대쪽의 실정을 덮을려는 느낌이네요. 오히려 저는 님의 시각이 님이 말하신 '특정 정치세력의 지지자로서 우리 쪽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으로 생각됩니다만.. 저더러 계몽주의에 빠져있는 편향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거 같으신데, 사실 제 입장에서도 님도 크게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지는건 아닙니다. 뭐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결국 님도 중립이 아니라 보수를 지지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둘러대는건 똑같지 않습니까?

      또한 [우선 민주주의는 논리와 근거로 무장한 사람들만으로 정치를 굴리는 체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셨는데, 유권자들이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면 안된다고 말하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라고 보기엔 '나는 해도 되고, 너는 안 됨'이라고 밖에 안 느껴지네요. 그런 논리라면 제가 무슨 생각을 하던 님과 제가 여기서 이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시장논리를 정치논리로 가져오시는데, 몇 년에 한번 치러지는 선거랑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시장경쟁을 동일화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소비자가 제품이 어떤지 아는 방법은 매우 많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지만, 유권자가 정권이 어떤지 아는 방법은 그들을 당선시켜주는 방법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실체화된 가치가 아닌 예상과 느낌에 의존하고 표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는 공격적인 블러핑에 가까운 마케팅만 있고 실체는 부실했던 스베누 같은 기업도 잠깐 세를 얻고 사라지지만, 정치는 그런 정권이 인기를 얻고 세를 얻는다면 어지간하면 임기를 통째로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 결과가 최악으로 나온 독일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갔었죠. 시장은 실시간으로 지배자가 바뀌지만 정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였을때와는 다르게 유권자로서의 국민은 그 결정을 신중히 해야할 책임이 작게나마 있기는 있는거죠. 작은 일부면 그만큼의 지분만큼 작은 책임 말입니다.

      [국개론을 들고 나오는 수많은 진보 지지자들이 국민들을 비난하는 모습이 '자연인으로서 유권자로서의 일반적인 행태를 비난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정치세력의 지지자로서 우리 쪽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인지를 본다면 명백하게 후자 쪽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니 저러니해도 솔직히 위와같이 말씀하시는거 보면 결론은 저를 '진영논리'로 모든것을 구분하려는 사람으로 매도하려는것이라고 약간 생각이 드는군요. 솔직히 제가 뭐라하던 이미 님이 생각하는 저는 ‘진보 아니면 다 바보들로 보는 사람’으로 정해져 있는거 같군요. 이미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적어도 저는 콘크리트에 대한 제 의견을 조금이나마 정정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쓴 댓글로 말꼬리를 잡으면서 계속 저를 매도하는 논조를 이어나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를 계속 매도하는듯한 답변을 하신다면, 저도 더 논쟁을 계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 야채 2016.12.29 0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복잡한 세상/ 오해하시기 쉽게 글을 쓴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제 논점을 다시 정리하자면

      우선 저는 진보는 안보 면에서 위험하다는 곳을 인정하고 안보가 중요하다면 보수를 선택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안보를 이유로 보수를 선택하는 것이 충분히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쪽에서 '이유'로 삼는 부분만을 골라서 이야기한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안보가 보수를 선택할 이유가 못 된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고 그 근거도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그게 틀렸으니까 고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지나간 세대'의 입장에서는 6.25라는 대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진보쪽 사람들이 전쟁을 신경쓸 필요조차 없는 과거 문제로 치부하지만, 그보다 더 옛날 일인 일제시대 문제는 지금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까? 위안부 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6.25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크고 중요한 일이었냐고 한다면 6.25 쪽이고, 현재 시점에서 북한과 일본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위협이냐고 한다면 그것도 북한 쪽입니다. 따라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이유로 삼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 일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입장에 꼭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유권자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유권자 전체 내지는 큰 집단의 책임을 묻는 것과 개개인의 언행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르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정치적 주장을 하는 것은 개인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지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국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단지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뿐이지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또한 사회 현상의 책임과 개개인의 책임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미군이 자신의 변태적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단으로 장갑차를 끌고 나가서 여자아이들을 깔아죽였다는 괴이한 주장이 쉽게 퍼진 것은 사회적 현상이고, 단순히 그걸 믿는 사람들이 우매하다고 비웃는 건 단견이며 왜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쉽게 믿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믿고 퍼뜨린 개개인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건 자기가 책임질 일이지, 사회 현상 탓을 하며 책임회피를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전 그게 모순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10. 블랑 2016.12.20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뻐꾸기가 이름하나는 기똥차게 잘 팔았으니

  11. 박종필 2016.12.23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고로 저 외제니 황후는 오래 장수하셔서 1920년 7월까지 살아 끝내 독일 제2제국이 1차대전에서 망하는 꼴은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ㅎㅎㅎ 역시 죽으면 모든게 끝이지만 삶은 언제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살고 볼일입니다. ㅎㅎㅎ

  12. 석공 2016.12.24 0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13. ㅁㄴㅇㄹ 2016.12.26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국내의 민주화 세력이 아닌 외세라.....이거 혹시 설마??

  14. 방랑자 2016.12.27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쥔장님께서 티스토리 주소 올려주신데로 갈아탔더니( www월드와이드웹)
    글은 보이는데 사진이 안보여서 엄청 고생했는데
    구글 크롬에 해당주소 ctrl+c, v로 붙여넣기하니까 문제없이 잘 보이네요.
    혹시 저처럼 컴맹이어서 사진안보이시는 분들은
    구글 크롬에 붙여넣기하세용!(나만 모르는 건지 모르겠넹^.^)
    글구 나폴레옹 3세가 포로생활했다던 빌헬름쇠허(Wilhelmshöhe)성 인터넷에서 자세히 좀 찾아보려는데
    "빌헬름쇠허(Wilhelmshöhe)"로는 찾기가 어렵네요.
    "빌헬름스회헤(Wilhelmshöhe)"로 검색해 보시면 더 많은 사진검색가능하구요
    얼마전 해당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네요 요기 들어가 보시면 www.germany.travel/unesco (독일관광청)
    독일의 보존 가치가 높은 교회, 수도원, 고성과 정원, 산업유산, 자연 등을 이미지, 비디오 및 360˚ 파노라마 등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하네요.

  15. Ark 2016.12.27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사족이지만, 최순실 사태로 인해 더이상 '차악 논쟁'은 무의미 해졌다고 봅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놈을 뽑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원칙을 어긴 놈을 처벌하려고 할때 수사를 방해하고,
    비호하고, 위증을 모의하고, 증거인멸시간을 벌어주는 '놈들을 뽑아주면 안되는' 겁니다. 차악선택 유무에서
    '원칙수호 유무'로 한단계 더 발전한 셈이죠.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배신투표 현상'도 최순실사태로 설명이 되는데, '최순실 사태 이전까진' 정치의 승리공식은
    "잘 나눠먹는것" 이였습니다. 국개론을 피던 유권자가 가장 국개스러운 이를 뽑아주는 이유는, 그사람이 어떻게
    되던 결국 이길꺼란걸 알기 때문입니다. 나눠먹기를 못하는 정치인은 시간이 갈수록 세력이 정체/축소되지만,
    잘하는 정치인은 갈수록 세력이 커지기 때문이죠.

    우습게도, 이때문에 세력이 커져가는 정치인은 어떻게든 '책임감있게?' 사정라인과 언론을 장악해야만 하는거고
    (안그러면 나눠먹기 과정에서 저지른 온갖 비리/청탁/강요/압력 등이 드러나 세력전체가 풍비박산 날테니),
    권력/세력이 약한 나머지에겐 "진실에 가까워지려 하면, 엄중한 책임(=보복)이 따른다." 는 원칙을 강제해야만 하죠.

    결국 최순실사태는 위에서 말한 '차악과 나눠먹기, 진실과 떨어진 중립 강요' 에 의해 발생했고, '인사권'을 누구에게
    쥐여주느냐에 따라 나라가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도 알려줬습니다. 실제로 정당지지율이나 대선후보지지율도,
    차악선택/나눠먹기를 부르짖던 쪽은 큰폭으로 하락하고, 원칙수호/불의와 타협않는 의로움을 외친 쪽이 상승한걸
    볼수있었죠.

    한가지 걱정되는 점은, 종편에 오래노출된 사람은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놈들이 전부 뒷감당을 해야한다'는 원칙을
    갖게된다는 겁니다. 최순실사태와 박근혜 탄핵소추이후, 2년넘게 묻혀있던 세월호 진상조사에도 이제나마 힘이
    실리고 있는데, 이전까지 나왔던 다양한 조사방해 정황(해경 검찰수사 외압정황, 고의적 선체훼손 정황, 고질적인
    자료제공 거부 등) 에 대해 침묵하는 주제에, '수천억원짜리 교통사고'가 왜 정부 잘못이냐며, 뒷감당 운운하는게
    정말 한심해 보이더군요...

    p.s. 정부의 초동대처가 개판이였던건 다들 아는 내용이고, 무엇보다 교통사고로 한명만 죽어도 '가해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사건정황은 어떻게 되는지' 빠짐없이 조사하는게 검찰의 의무이자 원칙인데,
    300명 넘게죽은 세월호의 인양조사를 못마땅해하고 관련자 처벌을 방해한 정부가 아무책임 없다는게 우습네요.

    • 나삼 2017.01.03 07: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월호 인양을 방해한것은 유족측 이었습니다. 그리고 관련자 처벌은 제일 큰 책임이 있던 선장과 항해사들...그리고 선주 및 회사에 대해서 처벌을 내렸는데요..처벌을 방해했다?? 어떤 처벌을 방해했는지 알고 싶네요.

    • 수비니우스 2017.01.04 0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삼님 같은 분들은 체육관에서 공개투표를 해도 일단 어쨌든 투표를 했으니 민주주의 아니냐고 하실것 같네요. 처벌은 이미 했다, 어쨌든 인양하려는거 반대했다... 일본이 "우린 이미 사과를 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네요.

  16. Due 2017.01.03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칭 '진보'라면서 '민주주의'를 떠드는 사람들 입에서 국개론이 나오고 반대파는 '투표를 하기에 너무 어리석다'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한심한 일입니다. 박근혜가 한심합니까? 친박이 한심합니까? 물론 한심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상대측 지지자들을 친북이라고 비난은 했을지언정 투표권을 박탈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박근혜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라는 말씀은 맞지 않습니다. "상대측 지지자들을 친북이라고 비난 했을지언정 투표권 박탈하고자 제안하지 않은" 이유는, 친북이라고 비난만 하면 너무도 쉽게 더 많은 표를 얻을수 있는, "언제나 이기는 게임" 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힘도 없는 놈들, 그냥 종북 놀이나 하면서 박근혜와 사진이나 찍어대면 당선되고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고, 언론은 탄압하여 박살내고, 실제로 그렇게 했고요, 또 블랙리스트라든가 통진당 해체, 국정원 개입등등등 '투표권 박탈'보다 더한 악랄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데도 "투표권 박탈은 안한다"라면서 무슨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대인배"인양 보수를 옹호하는거 정말로 말이 안됩니다.

    박근혜와 친박 + 새누리가 한심하냐고요? 아니요, 전혀 한심하지 않습니다.
    저는요 . 정말 정말 정말 무섭습니다.
    한심하다 뭐하다 하면서 무슨 구름위의 신선처럼 떠있느냥 평가해봤자, 힘없는 버러지 백성들 아닌가요?
    그럼에도 좋다고 네네 하면서
    무슨 "그래도 투표권은 안빼았다" 라는 방패막을 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은 살아날겁니다. 뭐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냥 카운트 다운이나 하고 있는거에요. 언제쯤 다시 해먹을수 있을까.....

    그리고 그다음 어떻게 짖밟아 버리면 될까???

    잠시만 참자~~~ 라구요.

    참여정부 실정에 대한 선택??? 그래서 요즘 경제와 국방이 그모양이요?

    참여정부의 실책으로 박근혜를 뽑았나?

    "이명박 이 엉망이나 박근혜로 정권교체 해야한다"라는

    아주 절망적인 국민들의 "선거권을 박탈하지 않는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정~~~~~말 똑똑하고

    현명하기 그지없는 선택이 었었던게 아니라???




  17. Due 2017.01.03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채님, 그래서 주장하시는 바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 정도 문제가 있으니 보수가 최고다!!! 인가요?

    지금 보수가 해놓은 꼴을 보고도 그런말씀을 하십니까? 이명박 각하 이후로 안보, 경제, 외교등 뭐가 잘된게 있지요?

    뭐 강대국이 아니니 나라밖 사정에 따라서 경제든 뭐든 바뀔수 있다는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뭘 잘한게 있다는거에요? 보수정부가 지금? 거기에 부패에 대하여 한번

    답변을 해보세요

    그러니깐 야채님의 글은

    진보가 "1만큼"의 잘못을 한 무능력 자들에 불가하니

    "100 만큼"의 잘못을 하는 보수가 더 옳고 훌륭하다 라고 방패막이를 하는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 최홍락 2017.01.04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상대측 지지자들을 친북이라고 비난 했을지언정 투표권 박탈하고자 제안하지 않은" 이유는, 친북이라고 비난만 하면 너무도 쉽게 더 많은 표를 얻을수 있는, "언제나 이기는 게임"에서 두 차례의 대선을 이기고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이긴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요. 그리고 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굳건했던 것인지 의문이 드네요.

      상대방이 끝까지 없어져야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고 없어지지 않는한 제대로된 민주주의는 없다고 믿는건 자유지만 그렇게 하면 앞서 말씀하신 악랄한 정치세력들의 사고 방식이 딱 그런거였죠. 반대파에 대한 탄압, 자기 세력 외의 다른 세력과 그 가치관은 악이며 방해물일 뿐이라는 사고방식. 바로 21세기에 아직도 정치권에 남아있는 박정희식 사고 방식이지요. 그리고 그 가치관의 기초위에 선 국정운영방식의 결과가 지금 이모양이고요.

      그럼 이걸 앞으로도 계속할거냐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죠. 이는 어느 세력이 더 선하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체제를 정상적으로 끌고갈 수 있는가의 문제에요.



    • 최홍락 2017.01.04 18: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드릴 말보다 더 잘 정리된 칼럼이 있어 소개합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지 않는다.

      1. 권력 쟁탈전의 패자에게 승복은 아주 값비싸고 위험한 선택이다. 어떤 권력 쟁탈전, 예를 들어 전쟁이 방금 막 끝났고, 전멸하지는 않을 정도로 우리가 졌다고 하자. 이제 우리는 승복과 불복 중에 선택해야 한다. 권력을 저자식이 지금부터 독점할 것이고 그 힘으로 우리를 몰아세울 것이므로, 우리와 승자의 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크게 벌어진다. 아예 죽일 수도 있고.

      고로 패배자인 우리는 즉시 불복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패배한 직후가 다음 전쟁을 일으키기 가장 좋은 시점이다. 물론 방금 박살난 우리가 다음 전쟁을 이길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권력이 넘어갔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승률은 더 떨어진다. 승자에게 온전히 운명을 내맡기느니 이판사판 재도전이 그나마 낫다. 이렇게 하여 권력 쟁탈전은 끝없는 투쟁의 연쇄로 빠져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 쟁탈전이 ‘전부 아니면 전무’ 게임이어서 ‘승리 배당’도 ‘패배의 비용’도 너무 크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지도에서 사하라 이남 국가 몇곳을 골라서 구글링을 해 보면, 높은 확률로 내전 소식을 볼 수 있다. 내전을 겨우 진정시키고 선거를 치르면, 진 쪽이 대단히 합리적이게도 즉시 불복하고 다시 내전으로 간다. 이걸 끝도 없이 반복한다.

      이 투쟁의 연쇄는 승자에게도 썩 반갑지 않다. 이겨 봐야 통치는 불가능하고, 내전으로 황폐해진 영토에서 권력의 수익률도 나빠진다. 만일 투쟁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다면 승자도 어느 정도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승리 배당을 어느 정도는 포기하는 게 오히려 남는장사가 된다.

      2. 민주주의란 이 승리 배당을 낮추는 시스템이다. 선거의 승자는 헌정 체제와 법치주의에 구속을 받고, 잡은 권력을 언제고 내려놓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승리 배당이 크게 떨어진다. 반면 패자는 안전과 재도전 기회를 보장받으므로 패배의 비용이 제한된다. 이제 승복이 불복보다 합리적인 선택으로 바뀐다.

      민주주의는 승리 배당과 패배 비용을 둘 다 낮춤으로써 승패 마진을 좁힌다. 그렇게 해서 승자는 헌정 체제에 구속되고 패자는 결과에 승복하도록 유인한다. 민주주의는 승자와 패자가 모두 만족할 배당 제한을 제도로 보장해 주므로, 일정 소득 이상인 국가에서는 안정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므로, 승패 마진을 지나치게 키우는 시도는 민주주의 원리에 반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지 않는다. 사람의 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비용이다(저 문장을 전경과 으쌰으쌰 하다가 피부 좀 찢어지자 정도로 쓰신다면야 논외이다마는, 그런 의미로는 안 쓰는 게 좋다). 한 번 쟁탈전에 거는 비용이 커질수록 승패 마진이, 따라서 배당이 커진다. 배당을 낮춰서 쟁탈전이 끝나도 피 흘릴 일이 없도록 하는 게 민주주의다.

      배당이 임계점을 지나 높아지면 게임의 법칙은 다시 ‘전부 아니면 전무’에 가까워진다. 이러면 승자도 헌정 체제와 법치의 구속을 벗어버리고픈 유혹에 더 강하게 노출된다. 그러므로 배당이 높아지기 시작하면 게임의 법칙에 따라 연쇄 반응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지 않지만, 피는 민주주의를 먹고 자란다.

      3. 물론 현 시국이 ‘배당 증가의 연쇄 반응’을 걱정해야 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계엄령에서 이어지는 친위 쿠데타 시나리오는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배당 증가 시도인데, 이런 게 지금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주장도 진지한 실천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답답함의 표현에 가까워 보인다. 정색할 필요 없이 웃어넘길 얘기기는 하다.

      다만, 지금은 피를 흘릴 상황이 아니지만, 저 말 자체는 맞는 말이라는 분들은 제법 많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한 판 싸움이 아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가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과정이라는 의미로도 사실이지만, 민주주의는 한 번 쟁탈전에 거는 배당을 낮추는 시스템이라는 의미로도 진실이다.

      좀 벗어나는 얘기지만, 정권을 잡으면 종북좌파를 다 쓸어버리자거나 친일파 잔재를 싹 청산하자는 식의 주장도 같은 이유로 민주주의에 이롭지는 않다. 둘 다 게임의 배당을 좀 과하게 높이는 것 같다.

      4.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출처가 약간 애매하다. 아마도 토마스 제퍼슨의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로 매순간 새로워진다”에서 따온 말이지 싶은데, 1960년 5월 <사상계>에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한다. 4.19 때다.

      전제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기에는 이 말이 성립할 수도 있다. 체제변동은 큰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며 달성되는 경우가 적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수준의 국가가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거나 헌정 체제를 복원하는 작업에서라면, 피는 좋은 징후가 전혀 아니다. 상황에 걸맞지 않게 고비용이다.

      그래도 무언가 민주주의에 대해 멋있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저 말과는 정반대이면서 몇배는 훌륭한 대안을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가 내놓았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서로 죽이지 않도록 하는 체제다.” 나는 이 말이 배당 제한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절묘하게 포착할뿐더러 멋으로만 따져도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 수비니우스 2017.01.04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님 인용하신 칼럼 출처가 어디인가요?? 궁금해요. 칼럼 내용 꽤 괜찮은것 같아요.
      인용하신 칼럼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합리적이게 하는 것은 저항인데, 우리나라는 저항이 부정적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한번에 터져서, 결국 평소의 저항이 모인 값보다 더 큰 희생을 치루게 되는 것 같아요.

    • 최홍락 2017.01.05 0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146076662136128&id=100002014156359

      링크주소입니다.

      시사인 천관율 기자의 페이스북입니다. 이 내용을 시사인에서 볼 수 있을까 검색해봤는데, 기사로는 안나왔습니다. 그래도 천관율 기자의 좋은 글이 많이 있으니 시사인에서 천관율을 검색하셔서 좋은 글 많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항이 부정적으로 취급된다기보다는 윗선의 명령에 '왜'라는 질문과 피드백이라는 다소 힘든 과정을 싫어하는 문화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 하네요. 윗사람의 말이니 따라야 한다는 문화(또는 그 사람의 체면을 지켜줘야 하니 들어주자는 온정주의)가 기저에 깔려있는데, 이게 좋은 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지요. 다만 이 문화의 좋은 점은 윗 대가리가 취하고 나쁜 점은 밑의 사람이 덮어쓰는 문화가 누적이 되면 결국 님이 말씀하신 저항권의 상황까지 가는 것 같네요.

    • 야채 2017.01.11 0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Due/
      "보수에 속하는 정치세력은 언제나 더 옳고 훌륭하다"

      "보수라는 노선을 지지하는데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제가 Due님 같은 많은 진보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진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보라는 노선을 지지한다"

      "진보에 속하는 정치세력은 무조건 옳다"
      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저는 진보라는 노선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폭력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며 북한의 간첩과 접선하는 세력도 '진보'라는 이유로 무조건 감싸안는 것은 반대합니다. 보수층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 운운하는 주장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Due님이 무섭건 한심하건 분노하건 그런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진보가 선거에서 이기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구름 위로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눈을 뜨면 됩니다. 진보측 인사가 대통령으로 연달아 재임한 것은 채 1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것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고, 그래서 국회에서 여소야대가 실현된 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물론 이런 여소야대가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ue님은 선거가 "무조건 그들이 이기는 게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더민주와 국민의당도 모두 '그들'이고, 김대중과 노무현도 모두 '그들'이었을까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새누리당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이 정말로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십니까? 어떻게든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가려고 우왕좌왕하는 악다구니가 아니고 말입니까? 그건 사실 지난 대선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당내에 박근혜라는 '이명박과 공개적으로 대립각을 세워 온' 명백한 대안이 있었기 때문에 이명박이라는 배에서의 탈출 과정이 조용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 때의 한나라당도 과거 열린우리당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진보 내에는 과거 선거에서 '진보'가 승리한 것은 진보 지지계층이 많아서가 아니라 보수가 삽질을 했기 때문이라는 회의론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삽질을 박근혜가 아주 거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총선의 시점에서도 그 삽질은 이미 야당의 승리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는데, 이후 드러난 삽질은 그보다도 훨씬 거대합니다. 다음 선거에서 진보가 (스스로 맹렬하게 삽질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불리할 이유도 없고, 대통령 탄핵안도 가결되었고, 특검의 조사나 헌재의 판결이나 박근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정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체 이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정의가 실현된다고 축제라도 벌일 만한 상황 아닙니까?

    • 수비니우스 2017.01.11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님이 말씀해주신 맞는 말 같아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저항이 부정적으로 취급된다고 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고 보장받으려고 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쉽게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개인주의로서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고 보장받으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서 받을 이익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죠. 사실 그건 처음부터 부당한 이익이었는데 말이에요.

      야채/ 문제는 많은 나이든 사람들이 박근혜는 비판해도 박정희는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다리 자체를 끊어버리고 어거지만 부립니다. 박근혜가 탄핵가결로 불명예퇴진해도 '박정희 보수의 진정한 후계자'를 내세운 사람은 또 나올 것이고 거기에 많은 나이든 사람이 생각없이 투표할겁니다.
      또 진보 중 일부만 타락한 종자들임에도 진보 전체가 쓰레기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여기서 섣불리 일부의 타락을 인정하면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일부의 타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인정하고 자정해야 하겠고 그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무적이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요. 잘했다고 정당화해도 된다는게 아니라 정말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 야채 2017.01.12 0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비니우스/ 글세요. 수비니우스님은 진보 쪽에서 '타락한 종자들'을 감싸안는 것은 진보 전체의 몰락을 염려한, 명백한 계산과 의도에 따른 행동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그대로 긍정하고 계시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수비니우스님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지칭하신 보수 쪽 사람들도 바로 그런 종류의 계산과 의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박근혜가 밀리면 빨갱이들이 집권한다" 라면서 박근혜의 문제에 대해 무조건 눈을 감으려는 태도는 진영만 바꾸면 수비니우스님이 진보진영에 대해서 묘사하신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이건 '계산과 의도'라기보다 감정적인 '두려움'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진보 쪽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진보의 몰락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외부에서 봐서는 선뜻 이해는 가지 않습니다. 진보는 이미 6공화국에서 두 차례나 대통령을 배출했고, 현재 총선에서 압승한 세력이 아닙니까? 총선에서 패했을 때조차도 존폐를 걱정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북한과 연계된 부분만 끊어버리면 그 밥에 그 나물인 보수 정치세력에 신물이 난 중도층 내지 보수층 일부까지도 충분히 끌어안을 수 있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척 보기에도 지금 보수 쪽에는 인물이 없지 않습니까.

      '박정희 보수의 진정한 후계자'를 말씀하시는 것도 좀 의아합니다. 그건 박근혜 개인만의 타이틀이지 보수 후보의 일반적인 타이틀이 아닙니다. 6공화국에서 보수쪽 대통령은 (김영삼까지 포함시키면) 4명인데, 노태우도 김영삼도 이명박도 '박정희 보수의 진정한 후계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취급되지도 않았습니다. 후보였던 이회창이나 이인제도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박근혜를 제외하면 누군가의 후계자로 취급되지도 않았습니다. 박근혜의 몇 년 안 되는 임기가, 그것도 박근혜의 평가가 이 정도 땅에 떨어진 시기에 왜 이렇게 역사의 철칙이나 되는 듯이 취급받는지 모르겠습니다.

  18. 2017.01.27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 란 특집은 안 하나요?

  19. DUE 2017.02.06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채님/

    "삽질" 과 "악행"은 다릅니다

    정책을 하다가 잘 안맞아서 크게 나라가 손해를 보았다라든가 하면 그것은 "삽질"

    입니다. 정책이 잘못되어 피해자가 많으면 삽질이지요.

    하지만, "블랙리스트" 같은거 만들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최순실 농단 사건 같은, 나라 전체를 무슨 자기 사유 금고 처럼 여기는

    이정도의 사안이면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고 같이 챙겨 먹은 행동들은

    "삽질"이 아닌 "악행"입니다

    그냥 정책이 실패해서, '삽질'을 해서 선거에서 패배하는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끝끝내 살아 남아 있다는게

    그리고 이렇게 옹호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하지는 않으신지요.......

    이정도 까지의 일을 저질렀음에도

    그냥

    간판만 바꾸면 살아 남을수 있다는것

    그냥 뭐 "개혁쇼" 한번 하면 살아 남을수

    있고 그 사람들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며 지금이 아니더라도 차기에 다시 대선이고 총선이고 할수 있다는게.....

  20. DUE 2017.02.09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UE

    야채님/

    축제라도 벌일만한 상황이라니요, 한국의 정치 상황을 너무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러니깐, 어떤 정책이 (뭐 준비가 부족했건 어쨌건 잘해보려고 했던게)

    실패하여 경제 성장율 등이 안좋아 그런 영향으로 정권이 교체되는데

    진보쪽으로 교체될것 같다더라 라고 하면 축제가 되겠는데

    그게 아니라

    '국정원'을 동원한 선거 개입, 블랙리스트등에서 보여진 파시즘적인 문화, 언론 통제

    언론 장악을 통한 비판 기능 삭제 및 여론 조작

    정관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국정 농단, 부패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려고한 행위들에 대하여 그리

    '열린마음'으로 단순한 '삽질'정도로 이해되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절대 질수 없는 게임이라는것은

    이모양 이꼴의 상황, 그러니깐 정책 실패로 쪽빡 찼다의 수준이 아니라

    아예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려고 한 위의 행위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옹호 받을수 있다는겁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한 이 조직이 그대로 생명을 연장하고

    민주주의의 방법, 선거를 통하여 후대에 다시 대권을 가져가

    다시 같은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한다는것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총선에서 패배하는 수준으로 논평되는것이 아니라

    그런 세력은 없어져야 합니다. 진보/보수의 논의는

    정책의 방향성등으로 결정되어야 하는것이지

    "민주주의 파괴 행위" 역시 무슨 보수의 성향이니 존중 받아야한다는

    그런식의 논리는 위험하고 무책임 합니다

  21. 232 2017.04.08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얼간이가 집권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겪고 이 글을 보니 의미가 더욱 새롭네요. 외새가 아닌 국민의 손으로 이루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 민주주의가 저 당시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IV


병사들의 사격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시민들도 약 15분간 응사하고 있었는데, 양측 모두 사상자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먼저 보병대에서, 이어서 기병대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위협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부대들이 갑자기 뒤돌아 선 것이다.


쿠데타를 기록한 역사편찬가들은 상티에 가(Rue du Sentier) 모퉁이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병사들에게 총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노트르-담-드-르쿠브랭스 가(Rue Notre-Dame-de-Recouvrance)와 푸와소니에르 가(Rue Poissonnière)의 어떤 집 지붕으로부터 발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자그랑 가(Rue Mazagran)의 모퉁이의 높은 집 지붕에서 발사된 권총 사격이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총탄의 발사 장소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은 이 문제의 탄환, 어쩌면 문을 꽝 닫는 정도의 소음을 냈던 이 탄환이 옆 집에 살던 치과의사에게 맞았다는 점이다.  질문은 결국 이것으로 귀결된다.  그 대로변 집들 중 하나에서 발사된 권총이나 머스켓 소총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가 ?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  많은 증인들은 그 점을 부인한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주요 도로명입니다.)




만약 총탄이 정말 발사되었다면,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그것이 원인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신호였는가 ?


어쨌건 간에, 이미 언급한 대로, 갑자기 기병과 보병, 포병들이 길가 인도에 늘어선 구경꾼 인파들을 향해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고 또 예상하지 못 했지만, 아무런 동기 없이, 아침의 그 악명 높은 경고장에 쓰인 것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육은 짐나즈 극장(Gymnase Theatre)으로부터 뱅 시누아(Bains Chinois, 중국 목욕탕이라는 뜻)까지, 그러니까 파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파도 많은, 가장 번화한 거리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뱅 시누아(Bains Chinois)는 1787년 지어진 파리의 유명 공중 목욕탕입니다.  1852년에 매각된 뒤, 그 다음해에 다른 투자용 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습니다.)




군대는 시민들을 근접 거리에서 쏘아 쓰러뜨렸다.


그건 무시무시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비명소리, 하늘을 향해 치켜든 팔들, 그 경악과 공포, 사방으로 달아나는 군중, 보도에 부딪힌 뒤 집 지붕까지 튀어 오르는 수많은 총알들, 순식간에 거리에 가득 쓰러진 시체들, 입에 시가를 문 채로 쓰러지는 젊은이들과 벨벳 가운을 입은 채 총을 맞은 여자들...  서적 판매원 두명은 자신들의 서점 문간에서 자신들이 뭔 일을 저질렀길래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해되었다.  그 속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죽어버리라고 지하실 환기창에 대고도 사격이 가해졌으며, 시장은 포탄과 총알로 난장판이 되었다.  살랑드루즈 호텔(Hôtel Sallandrouze)은 폭발탄 포격을 받았고, 메종 도르(Maison d'Or, 황금의 집이라는 뜻)는 포도탄 포격을 받았으며,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병사들이 난입했다.  대로에는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리셜리외 가(Rue de Richelieu)에는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카페 Tortoni는 당시 파리 시내 문인들과 멋장이들이 모이던 명소였습니다.)




나레이터는 여기서 이야기를 잠깐 멈춰야겠다.


이 이름없는 행위들의 존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을 기록관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범죄를 기록하고, 사건의 당사자를 호명한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나는 루이 보나파르트를 소환한다.  나는 생-타르노(Saint-Arnaud), 모파(Maupas), 모레(Moray), 마냥(Magnan), 카를레(Carrelet), 캉로베르(Canrobert), 그리고 레벨(Reybell), 즉 보나파르트의 공모자들을 소환한다.  나는 그 처형자들, 그 살인자들, 그 증인들과 희생자들, 달아오른 대포와 김이 나는 군도, 술에 취한 병사들과 유족들, 죽어가던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 그 공포, 그 유혈, 그리고 그 눈물들을 모두 문명 사회의 법정으로 나오라고 소환한다.


단지 나레이터일 뿐인 이 사람의 말을, 그 나레이터가 누구이든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생한 사실들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사실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하게 하자.  우리는 그 증언을 듣도록 하자.





(생-타르노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습니다.  권력 장악을 위해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이 반란 공모자는 불과 3년 뒤 크리미아 전쟁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다 위암으로 병사했습니다.)




V


우리는 증인들의 이름을 인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이미 밝혔다.  하지만 독자들은 진실의 진지하고 신랄한 억양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증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인도 위를 세 발자욱 걷기도 전에, 그 옆으로 행군해가던 부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남쪽을 향해 돌아섰고, 머스켓 소총을 들어올리고는 즉각 공포에 질린 군중들에게 발포했어요.


그 사격은 20분 정도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가끔씩 훨씬 더 우렁찬 대포 포성도 울렸어요.


첫번째 일제 사격 때, 저는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는 인도 위를 마치 뱀처럼 기어서 아무 문이나 열려 있는 첫번째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건 와인 가게였어요.  산업 시장(Bazaar de l'Industrie) 바로 옆의 180번지였지요.  저는 거기 들어간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사격은 계속 되고 있었고요.


거기에는 약 5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자 5~6명과 아이 2~3명도 있었고요.  세명의 불쌍한 친구들은 들어올 때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중 2명은 약 15분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고, 나머지 1명은 제가 4시에 가게를 나올 때도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결국 그 남자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군 부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발포한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가게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엔 여자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 중 2명은 그 구역에 저녁거리를 사려고 나온 것이었어요.  변호사의 어린 서기도 있었는데, 그는 고용인의 심부름을 나왔다가 거기 오게 된 것이었지요.  증권거래소(Bourse)의 주식 중개인 2~3명, 그리고 집 주인도 2~3명 있었습니다.  초라한 셔츠 차림이거나, 혹은 아무 셔츠도 입지 못한 일꾼 몇 명도 있었습니다.  그 가게로 대피한 불행한 사람들 중 하나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약 30세 정도 되는, 회색의 짧은 외투를 입은 금발의 남자였습니다.  그는 포부르 몽마르트르(Faubourg Montmartre)에 있는 그의 가족과 식사를 하러 그의 아내와 함께 가던 중에 군 부대가 거리를 가로질러 행군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었지요.  처음에 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와 그의 아내 둘 다 쓰러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그 와인 가게로 끌려 들어왔지만, 그의 아내는 옆에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달래봐도 그는 계속 아내를 찾으러 달려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고집했지요.  밖의 거리는 포도탄 포격이 휩쓸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1시간 동안 그를 우리와 함께 있도록 붙잡아 두는 것 뿐이었어요.  다음 날, 저는 그 사람의 아내가 결국 살해되었고 그 시신은 시테 베르제르(Cité Bergère)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약 20일 뒤에, 저는 그 불쌍한 남편이 보나파르트에게 복수하겠다고 협박했다가 체포되어 브레스트(Brest) 항구로 보내진 뒤, 결국 카이엔(Cayenne)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와인 가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왕정주의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저는 공화주의자라고 밝힌 사람은 딱 2명을 보았는데, 하나는 전에 레폼(la Réforme, 개혁이라는 뜻)이라는 곡을 작곡한 므니에르(Meunier)라는 나이든 작곡가와 그의 친구 딱 둘이었습니다.  약 4시 쯤 되어, 저는 그 가게를 나왔습니다."






(카이엔은 적도 인근 남미 프랑스령 식민지인 기아나에 있는 일종의 감옥섬으로서, 흔히 악마의 섬(Île du Diable)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한 1852년,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개설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의 그 드레퓌스 대위도 여기서 복역했습니다.  사진 속의 오두막이 드레퓌스가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영화 빠삐용의 배경도 바로 카이엔입니다.)




마자그랑 가(Rue de Mazagran)에서 권총 발사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증인 하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 권총 소리는 병사들에게 모든 가옥과 그 창문에 일제 사격을 퍼부으라는 신호였습니다.  그 무차별 사격은 최소한 30분간 계속 되었어요.  사격은 생-드니 대문(Porte Saint-Denis)부터 카페 그랑 발콩(Café du Grand Balcon)까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곧 포격도 시작되었지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3시 15분 경,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생-드니 대문을 향하고 서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짐나즈 쪽 집들과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 철교의 집이라는 뜻), 그리고 생-파르 호텔(Hôtel Saint-Phar)을 향하더니, 생-드니 가(rue Saint-Denis)부터 리셜리외 가(rue Richelieu)까지의 반대 편에 있는 군중들에게 즉각 연속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불과 몇 분만에 인도 위는 시체들로 가득했어요.  가옥들은 총알 구멍이 무수히 나 있었고, 군 부대는 약 45분간 미친 듯이 계속 총을 쏘아댔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첫번째 포격은 본느-누벨(Bonne-Nouvelle)의 바리케이드에 가해졌는데, 이것이 다른 부대들에 대한 신호가 되었어요.  군 부대들은 머스켓 소총 사정거리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어떤 말로도 그런 야만적 행동을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말로 표현 못 할 행위의 진실에 대해 증언하려면 그 현장을 목격했어야만 해요.


병사들은 수천발을 -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지만 - 아무 짓도 하고 있지 않던 군중들에게 쏘았어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요.  아주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지요.  그게 전부였어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전반적인 흥분이 고조에 달했을 때, 전열 보병대에 이어 기병대와 포병대가 대로에 도착했어요.  부대 중 누군가가 머스켓 소총을 발사했는데, 화약 연기가 수직으로 솟은 것으로 보아 그것이 공중을 향해 발사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 경고없이 군중들에게 발포하고 총검으로 찌르라는 신호였습니다.  이것은 군부가 학살을 시작하는 계기를 원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 다른 증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포도탄(mitraille, 산탄)이 장전된 대포가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예언자라는 뜻)라는 상점부터 몽마르트르 가(Rue Montmartre)까지의 상가 전면을 찢어놓았습니다.  본느-누벨 대로로부터 메종 비으코크(Maison Billecoq)에도 포격을 가한 것이 틀림없었어요.  포탄이 오뷔송(Aubusson) 쪽의 벽 모퉁이를 때리고 벽을 관통한 뒤 집 내부까지 뚫었거든요."






(포도탄 또는 캐니스터탄이라고 불리는 이 대포알은 사진처럼 깡통 속에 작은 쇠구슬 수십개를 담은 것입니다.  대포에서 발사하면 마치 대형 산탄총을 쏜 것처럼 그 앞에 있는 적군 수십명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런 증언들이 끝도 없이 계속 됩니다...)


"계속 가세요." 보호를 요청한 선량한 시민들에게 장교들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시민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가던 길을 재빨리 걸어갔지요.  하지만 그건 죽음을 뜻하는 암호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총에 맞아 쓰러졌거든요."


다른 증인이 말한다.  "대로에서 사격이 시작되던 순간에, 카펫 창고 근처에 있던 한 서점 주인이 서둘러 서점 문을 닫고 있었어요.  그때 피할 곳을 찾던 몇 명의 군중들이 거기로 들어가려 했고, 전열 보병인지 헌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쏜 사람이 그 중에 있지 않나 의심했어요.  군인들은 서점에 난입했고, 서점 주인은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는 혼자 그의 서점 바로 앞으로 끌려 나왔고, 그의 아내와 딸은 그가 막 총에 맞아 쓰러질 때에야 그와 군인들 사이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고, 그 딸은 코르셋의 살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그의 아내는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들었어요."


이제 소름 없이는 묘사할 수 없는 세 건의 증언으로 마무리를 짓자.


"이 공포스러운 사건의 시작 부분의 15분간, 사격의 격렬함이 잠깐 다소 느슨해졌는데, 이때 부상당해 쓰러진 사람들 중 몇몇은 일어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앞에 쓰러진 사람들 중 2명이 일어났습니다.  한 명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상티에 가(Rue du Sentier)를 통해 달아났어요.  그가 달아나는 중에도 총알이 빗발쳐서 그 중 하나는 그의 모자를 날려버렸지요.  다른 한 사람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만 성공했습니다.  그는 손을 꼭 쥐고 병사들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요.  하지만 그는 즉각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음날, 르 프로페트의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베란다 옆면에 1백발 이상의 총알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출처 : http://www.napoleontrois.fr/dotclear/index.php?post/2006/04/04/115-le-coup-d-etat )




"샘이 있는 몽마르트르 가의 끝 부분에서 약 60보 정도 떨어진 곳에, 남자와 여자, 엄마와 아이들, 어린 소녀들의 시체가 60구 정도 있었어요.  이 불행한 시신들은 대로 맞은 편에 배치된 군 부대와 헌병들이 발사한 첫번째 일제 사격의 희생자들이었지요.  그들은 첫번째 사격이 시작되자마자 모두 달아났지만, 불과 몇 발자욱 못 가서 쓰러졌지요.  젊은 남자 하나는 관문 안으로 피해서 대로 쪽으로 튀어나온 벽 뒤에 숨으려고 했어요.  그는 몸을 꼿꼿이 세워 몸이 벽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최소화하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약 10분 정도 조준이 형편없는 사격을 받던 끝에, 그도 결국 총에 맞고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또 다른 증인이다.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의 판유리와 창문은 모두 깨졌습니다.  그 마당에는 공포에 질려 미쳐버린 남자 하나가 있었어요.  지하실에는 거기로 대피한 여자들이 가득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가게와 지하실 환풍창에 대고 총을 쐈습니다.  토르토니(Tortoni)부터 짐나즈(Gymnase) 극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1시간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짐나즈 극장(Théâtre du Gymnase Marie-Bell)은 1820년 설립된 파리의 유서깊은 극장입니다.  지금도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고 합니다.)



***

파리 같은 세계 문명의 중심 도시에서도 저런 흉악하고 야만적인 쿠데타와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진상을 숨기려는 음모도 뻔뻔스럽게 실행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저런 비극을 겪었고, 그 진상을 왜곡하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런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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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형석 2016.12.18 0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나시카님 블로그의 영광스런 첫 댓글이 되다니... 감격스럽군요.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시국이라는 말이, 과연 언제 사용되는지를 알게 되었던 지난 3개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비록 어둡고 앞을 볼수 없는 절망감이 온 나라를 뒤엎고 있지만 곧 밝은 날이 다시 오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시민들이 있어 옆이 든든합니다.

  2. 칸몬드 2016.12.18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비극 여럿있었는데 프랑스에서의 교훈을 잘 알지 못했나 봅니다. 앞으로는 좋은나라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3. 프로이센군 2016.12.18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시대에 비하면 현재의 민주주의는 많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 쇠몽둥이에 최루탄이 겨눠지는것도 끔찍하게 야만적인데 머스킷 일제사격에 캐니스터라니.... 정말 상상이 안 갑니다. 저렇게 시민들이 쌓아올린 시체들을 밟고 민주주의가 여기까지 온 걸까요?

II


아침 이른 시간부터 - 여기서는 미리 획책된 것이 분명한데 - 모든 거리의 모퉁이마다 이상한 플래카드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플래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옮겨적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걸 기억할 것이다.  가끔씩 파리 시내에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부가 아주 절박한 조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60년 동안에도, 이런 플래카드는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집회는 아무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무력으로 해산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문명의 대도시인 파리 시민들은 인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그런 극단적인 선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고문은 그저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협박용이라고 간주되었고,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들 얕보았다.


하지만 대중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체 계획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 경고는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12월의 인간에 의해 준비되고 저질러진, 이 전대미문의 드라마의 무대가 된 장소에 대해서 한마디 첨언하겠다.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글자 그대로 성 마틴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듯이,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 북쪽에 있습니다.)



마들렌(Madeleine)에서 포부르 푸아소니에르(Faubourg Poissonniere)에 이르는 대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짐나즈(Gymnase) 극장에서 포르트 생-마르텡(Porte Saint-Martin)까지의 부분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고, 봉디 가(Rue de Bondy), 네슬레 가(Rue Neslay), 륀 가(Rue de la Lune)도 마찬가지였으며, 생-드니(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에 접하거나 연결된 모든 거리가 다 막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틴 너머의 대로는 샤또 도(Chateau d'Eau) 반대편에서 시작된 바리케이드 하나만 빼고는 다시 바스티유(Bastile)까지 그냥 뚫려 있었다.  포르트 생-드니(Porte 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7~8개의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텡의 위치를 보여주는 구글 지도입니다.  그 바로 서쪽으로 포르트 생-드니가 있습니다.) 






(구글 덕분에 앉아서도 파리 시내 구경이 가능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길 한복판의 두 대문 중, 왼쪽의 좀더 큰 것이 포르트 생-드니, 오른쪽 것이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때, 포르트 생-드니 주변 4개 도로가 모두 시민들이 쌓은 바리케이드로 막혔습니다.)




포르트 생-드니는 사면이 4개의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 4개의 바리케이드 중 마들렌 쪽을 향한 것은 진압군의 첫번째 공격을 받을 운명이었는데, 그 거리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져 있었고, 그 왼쪽 끝은 륀 가, 오른쪽 끝은 마자그랑(Mazagran)에 접하고 있었다.  4대의 합승마차(omnibus), 그리고 5대의 가구 운반마차, 내던져진 전세 마차(hackney coach) 감독관 초소, 그리고 부서진 간이 공중화장실(Vespasian column), 대로변의 공공 벤치, 륀 가의 계단 판석, 군중들이 통째로 뜯어낸 쇠로 된 인도 가드레일 등이 이 요새의 재료였다.  이런 바리케이드로는 그 넓은 대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도로는 매커덤(macadam) 방식으로 포장된 것이라서, 보도블럭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 바리케이드는 대로 양쪽 끝까지 뻗어 있지도 않아서, 마자그랑 가로 향한 집 한 채를 짓고 있던 쪽으로는 큰 빈 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빈 틈을 본 어느 잘 차려 입은 젊은이가 공사용 비계에 올라가, 혼자 힘으로, 입에 담배도 그대로 문 채로 아주 여유있게, 그 비계의 밧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인근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웃으며 이 청년에게 박수를 보냈다.  한 순간 뒤 이 비계는 큰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틈을 막았고, 이로써 바리케이드가 완성했다.






(마카담(macadam)으로 포장된 도로입니다.  일정한 크기로 잘게 부순 돌을 깐 도로입니다.  그 이름이 혹시 마카다미아 견과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고, 이런 도로 포장법을 최초로 만든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 이름이 존 매커덤(John McAdam)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도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뜯어다 경찰에게 던졌기 때문에, 대학 주변의 도로에서 보도 블럭을 모두 없애고 인도까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원래 공중화장실이라는 것이 파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1770년 경 '신사들을 위한 소변기' 수준이었습니다.  형태도 정말 나무통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30년 경 파리 시 장관이었던 랑뷔토 백작(comte de Rambuteau)이 칸막이가 달린 소변기를 도입했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이를 비웃어 이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랑뷔토 기둥'(la colonne Rambuteau)이라고 불렀는데, 랑뷔토 백작은 이를 맞받아쳐 로마 시내에 최초의 공중 소변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베스파시아누스 기둥'(la colonne vespasien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굳어져, 이런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누스 기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 보루가 완성되는 동안,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대 문을 통해 짐나즈 극장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거기의 옷장에서 찾은 머스켓 소총 몇 자루와 북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은 극장 용어로 '소도구'라 불리던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북을 쥐고 전투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뒤집어 놓은 간이 화장실들과 옆으로 넘어뜨린 마차, 뜯어낸 블라인드와 셔터, 낡은 무대배경 등으로 본느-누벨 대로(Boulevard Bonne-Nouvelle)의 초소 반대편에 일종의 전초진지 같은 작은 바리케이드, 아니 작은 반달 모양의 진지를 지었다.  여기서는 푸아소니에르 대로와 몽마르트르 대로 뿐만 아니라 오뜨빌 가(Rue Hauteville)까지도 관측이 가능했다.  군 부대는 아침에 그 초소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그들은 그 초소의 깃발을 뽑아와 바리케이드에 꽂았다.  그 깃발이 나중에 쿠데타의 신문들이 '붉은 깃발'로 부른 그 깃발이었다.


약 15명의 사람들이 이 전초 진지에 위치를 잡았다.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은 있었으나 탄약이 없었고, 있더라도 매우 적은 양이었다.  그들 뒤에는 포르트 생-드니를 커버하는 큰 바리케이드를 약 100여 명의 전투원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2명의 여자와 한 명의 백발 노인도 목격되었다.  그 노인은 왼손에 든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쥐고 있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어깨에 군도(sabre)를 맨 채로 길 옆 보도의 가드 레일을 뜯어내는 것을 돕다가 쇠막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오른손의 손가락 3개를 베었다.  그 여자는 군중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며 외쳤다.  "공화국 만세 ! (Vive la Republique!)"  다른 여자는 바리케이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위에 꽂힌 깃대에 몸을 기대고는, 머스켓으로 무장한 셔츠 차림의 두 남자가 받들어 총을 해주는 사이 좌익 대표단이 발행한 무장 봉기 호소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군중들은 박수를 쳤다.  


이 모든 일들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일었났다.  바리케이드 이 쪽에서는 대로 양쪽의 보도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곳은 조용했고, 어떤 곳에서는 "술루크 타도 ! 배신자 타도! (à bas Soulouque! à bas le traître!)"를 외치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것은 수염난 남정네가 아니라 저렇게 서민들이 쓰는 붉은 고깔 모자를 쓴 마리안느라는 여성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입니다.) 




가끔씩 애도 행렬이 군중 속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 행렬은 병원 직원들과 군인들이 나르는 밀폐형 가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선두에는 긴 막대를 든 남자들이 행진했다.   그 막대 끝에는 큰 글씨로 '군 병원 활동'이라고 적힌 파란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가마를 덮은 커튼에는 '부상자, 앰뷸런스'라고 적혀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이때 파리 증권 거래소(la Bourse)에는 많은 군중이 있었다.  모든 벽에는 벽보 붙이는 사람들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공문을 붙이고 있었는데, 시장 상승세를 바라던 주식 중개인들조차도 이런 벽보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갑자기, 지난 2일 간 쿠테타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던 잘 알려진 투기꾼이 마치 도망자처럼 하얗게 질리고 숨이 찬 모습으로 나타나 소리쳤다.  "저들이 대로에서 발포하고 있어요 !"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파리의 증권 거래소인 부르즈(Bourse de Paris)입니다.  브롱냐르 궁(Palais Brongniart)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원래 캥캉푸아(Quincampoix) 등 몇몇 곳에서 벌어지던 증권 거래를 통합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가 알렉상드르 브롱냐르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 건물 디자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데, 정작 건축가들의 비평은 고리타분하다는 등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관련 source : http://carolineld.blogspot.kr/2016/08/last-relief.html 

https://en.wikipedia.org/wiki/Macadam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B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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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6.12.03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학교에도 마카담으로 포장된 도로가 일부 있는데, 유지비 측면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얘기가 있었지요.

  2. 장웅진 2016.12.03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도 어릴 때 뱃밥을 만들던 구빈원에서 어른 빈민들은 돌을 쪼았다더니만, 도대체 뭘 하는데 쓴 건지 했는데...

  3. 블랑 2016.12.04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렇게 기동 촘촘하게 세우면 건물이 뭔가 답답한 느낌이던데

    • 장웅진 2016.12.04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질 일은 없겠죠.

      영화 [타이타닉]에서 "미관을 위해 구명보트의 수를 줄였습니다"라는 화이트스타 사 관계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4. 질문 있습니다 2016.12.05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인장님, 전에 다음 블로그에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글에서 '당시 유럽의 도로 상태는 좋지 못했다'는 내용을 종종 보았습니다. 혹시 당시 유럽의 노면 상태와 관련된 자료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편지 내용입니다.)


"조카여, 프랑스 국민들의 피가 흘렀구나.  그 확산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렴.  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국민투표에 대해 언급했던 너의 두번째 선언문을 국민들은 보통 선거권의 재확립이라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에 기여할 의회가 없다면 자유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단다.  군대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제야말로 도덕적인 승리로서 실질적 승리를 완성할 순간이다.  패배한 경우엔 할 수 없는 것을 승리했을 때 해야 한다.  과거 정당들을 해체한 뒤에 국민 전체를 복권시키렴.  보통 선거권이 진지하고 자유롭게 행사되어, 공화국을 구할 대통령과 제헌 의회를 선출할 거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 편지를 너에게 쓰는 것은 내가 형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그가 내전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공감하기 때문이란다.  내 오랜 경험을 믿으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후세가 너의 행동을 평가할 거라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너를 사랑하는 숙부, 제롬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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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Nicolas Fabvier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장교로서 페르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에 사절로 가기도 했습니다.  1851년 쿠데타 당시는 이미 퇴역한 상태였고,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보수파 정당의 일원이었습니다.)

 



마들렌 광장(Place de la Madeleine)에서는 두 대표 파비에(Fabvier)와 크레스텡(Crestin)이 만나 대화했다.  파비에 장군은 크레스텡에게 4문의 대포가 원래와는 반대 방향으로 포구가 돌려져 있는 것을 지적하고는, 즉각 그 대로를 떠나 엘리제 궁으로 말을 달렸다.  "엘리제 궁이 이미 방어 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 장군이 말했다.  크레스텡은 레볼뤼시옹 광장(Place de la Revolution, 혁명 광장,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의 다른 쪽에 있는 의회 의사당의 전면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장군, 내일이면 우린 저기에 있을 겁니다."  엘리제 궁의 마굿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몇몇 다락방에서는 3대의 여행 마차가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싣고 말들을 정렬시킨 뒤, 좌마기수까지 이미 안장 위에 오른 채로 대기 중인 것이 목격되었다.  





(여기서 레볼뤼시옹 광장으로 불린 콩코르드 광장입니다.  광장 북서쪽에는 저 너머에는 대통령 궁인 엘리제 궁이, 그리고 남쪽의 센느 강 너머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의회 의사당이 된 부르봉 궁 Palais Bourbon이 있습니다.)




실제로 충격이 대단했고, 분노와 증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하나만 더 터진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몰락할 판국이었다.  그저 그 날 하루가 그대로 끝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쿠데타는 절망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과연 그는 무얼 할 생각이었을까 ?  그는 뭔가 큼직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것으로 반격을 해야 했다.  그는 이대로 망해버리거나, 공포의 수단을 써서 위기를 벗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엘리제 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두번째 퇴위가 있었던 웅장한 응접실 근처에 있는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가끔 문이 조금 열리고 그의 부관인 로게(Roguet) 장군이 흰머리칼이 무성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이 장군이 문을 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군은 점점 더 경악스러워지는 소식을 들고 왔고, 하던 말을 자주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또는 '일이 꼬이고 있습니다' 등의 말로 끝맺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벽난로를 활활 피워놓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장착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앉아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계속 다음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내 명령대로 실행하라 전하게."  






(Faustin Soulouque는 당시 아이티의 황제였습니다.  184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군이었던 그는 이 시건 바로 2년 전인 1849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독재자였고, 프랑스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로게 장군이 나쁜 소식을 들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선 것은 거의 1시 경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로게 장군 자신이,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침착함과 함께 직접 세세히 묘사를 했다.  그는 왕자(Prince President를 공식 호칭으로 썼던 루이 나폴레옹을 가리킴)에게 파리 중심부의 바리케이드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오히려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거리마다 '독재자 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감히 실제로 외쳐지던 '술루크(Soulouque) 타도'라는 구호를 보고하진 못했다.  그리고 군 부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힐난하는 고함소리가 그들을 맞았고, 주프롸 회랑(Galerie Jouffroy)에서는 어느 소령 하나가 군중들에게 쫓겨다녔으며, 카디날 카페(Cafe Cardinal)에서는 참모 대위 하나가 말에서 끌어내려졌다고도 보고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네 !  생-타르노(Saint-Arnaud) 장군에게 내 명령을 전하게."








(Galerie Jouffroy는 지금도 유명한 파리 시내의 지붕 덮힌 140m 정도 되는 통로입니다.   쿠데타 6년 전인 1845년에 만들어진 이 길은 최초로 유리와 강철로만 만들어진 지붕 회랑으로 유명합니다.) 




이 명령이란 무엇이었을까 ?  우린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필자는 고통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펜을 내려둔다.  이제 우리는 그 서러운 날, 12월 4일의 혐오스러운 위기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쿠데타의 성공을 낳은 그 괴물 같은 행위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미리 획책했던 음모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을 밝히려 한다.  12월 2일을 기록했던 모든 사료 편찬자들이 숨겨왔고, 마냥(Magnan) 장군이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 파리에서조차도 목격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것을 폭로하고, 서술하고, 묘사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무시무시한 것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12월 2일은 어둠으로 덮힌 범죄이고, 침묵 속에 뚜껑이 닫힌 관이며, 그 틈 사이로는 피가 솟구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관 뚜껑을 열려고 한다.





(5.18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네요...  당시에도 그런 학살 사건을 은폐하고 그걸 밝히려는 노력을 탄압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게른제 섬으로 망명가서 쓴 이 '꼬마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반입되어 숨어서들 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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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비니우스 2016.11.23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댓글의 영광을 누리는 행운을 얻었군요.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세계사에서 배울때 교과서든 일반서적이든 보통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짧게 넘어가길래 순조롭게 성공했는줄 알았더니 상당히 어렵고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나보네요. 하긴 5.16과 12.12도 짚어보면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성공한 쿠데타였죠.

  2. 블랑 2016.11.24 0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러고도 성공한거 보면 군은 그래도 강하게 틀어쥐고 있었나보네요.

  3. SISO 2016.11.24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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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0_- 2016.11.24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반란군놈들 대갈통을 다 날려버릴 장 장군님이 시급합니다 ㅠㅠ

  5. apils 2016.11.2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대체 뭐를 하려고! 숨통이 막힙니다.

  6. 게일 2016.11.27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7. ㅇㅇ 2016.12.02 0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8. 정암 2016.12.0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마 블로그에 올리신 내용이 2016년 12월 대한민국에서도 재현되는건 아니겠죠?? ㄷㄷㄷ

요즘 시국에 편승하여,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즉 '꼬마 나폴레옹'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몇 편에 걸쳐 올립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건 보쥬 광장 거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서 제가 찍은 당시 풍자화 사진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오를레앙 왕조가 무너지자, 프랑스는 공화국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동안 억눌린 각계 각층의 요구 폭발로 인한 대혼란에 빠져 듭니다.  이 와중에, 기존 정치인들의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좀 덜 떨어진 인물로 보았던 루이 나폴레옹이 위대한 나폴레옹의 후광을 업고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당시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의 재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1852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851년 말 루이 나폴레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꾀하지만, 의회를 장악한 자신의 정적들이 그를 좌절시키자, 치밀한 준비 하에, 백부인 나폴레옹 1세가 황제에 등극한 날이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벌어졌던 날인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이 저항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수백명의 사망자를 내며 봉기는 실패했고, 1년 후인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폐지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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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의 범죄


"12월 4일"


저항은 예상과는 다른 대규모가 되어 버렸다.  


전투는 매우 위협적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라, 아예 대규모 전투가 되어 버렸고, 사방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엘리제(Élysée)와 다른 지역구에서,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쌓아 올렸다.


파리 중심부는 임시로 만든 보루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길을 막은 구역들은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을 형성했다.  알르(Halles)와 랑뷔토 가(Rue Rambuteau)를 한쪽으로 하고, 대로들을 다른 쪽으로 했으며, 동쪽으로는 탕플 가(Rue du Temple)를, 서쪽으로는 몽마르트르(Rue Montmartre)를 경계로 했다.  그물망처럼 엮인 이 거대한 거리들은 모든 방면에서 보루와 참호로 차단되어 있었고, 매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점점 더 무시무시한 모습을 띠었고, 요새처럼 변해갔다.  바리케이드의 전투원들은 센느 강 부두까지 전초병들을 내보냈다.  


이 사다리꼴 구역 밖에서는 바리케이드가 포부르 생-마르텡(Faubourg Saint-Martin)과 운하 인근까지 뻗어 있었다.  저항 위원회에서 대표자로 드 플로트(Paul de Flotte)를 보내온 학교 구역은 그 전날 저녁 때보다도 더 보편적으로 봉기에 나선 상태였다.  교외 지역에도 불이 붙고 있었다.  바티뇰(Batignolles)에서는 '무기를 들라'는 북소리가 울려퍼졌고, 마디에 드 몽조(Madier de Montjau)가 벨빌(Belleville) 지역을 일깨우고 있었다.  샤펠-생-드니(Chapelle-Saint-Denis)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중이었다.  상업 지구에서 남자들은 머스켓 소총을 날랐고, 여자들은 붕대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  파리가 봉기했어 !"  B---가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저항 위원회에 들어서며 외쳤다.  





(사진 속의 인물은 마디에 드 몽조 Noël Madier de Montjau 입니다.  이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도 이 무장 봉기 이후 망명을 해야 했고,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는 1870년 이전에는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 위원회는 쿠데타가 발생한 12월 2일 밤에 조직된 것으로, Carnot, de Flotte, Jules Favre, Madier de Montjau, Michel de Bourges, Schœlcher, 그리고 Victor Hugo가 대표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각기 다른 지역구의 모든 위원회가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저항 위원회의 위원들은 심사숙고하며 사방의 전투에 대해 명령과 지시를 전달했다.   시민들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던 이 모든 사람들이 열정과 기쁨에 가득차 서로 포옹하기도 했다.  


쥴 파브르(Jules Favre)가 말했다.  "자, 이제 정규군 연대 하나만 우리 편으로 넘어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끝장이야."  미쉘 드 부르쥬(Michel de Bourges)도 말했다.  "내일이면 공화국이 시청(Hotel de Ville)을 접수할 걸세."  모든 것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장 조용한 지역구에서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포고문이 찢겨져 나갔고, 법령 발표문이 훼손되었다.  보부르 가(Rue Beaubourg)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창문에서 "용기를 내세요 !"라고 소리쳤다.  소요 사태는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까지 퍼졌다.  파리 경찰 조직의 중심부였던 제뤼살렘 가(Rue de Jerusalem)의 경찰청 본부는 전체가 벌벌 떨고 있었다.  공화국이 승리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경찰의 고민은 엄청났다.  경찰청 안마당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복도에서, 서기들과 경관들(sergents-de-ville)은 코시디에르(Caussidiere)에 대해 애정어린 후회를 마음에 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Marc Caussidière는 언론인으로서 1848년 7월 혁명 때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다 경찰 본부를 점령한 뒤 임시 정부에 의해 경찰 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 경찰 총장인 모파(Charlemagne de Maupas)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쿠데타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봉기에 대해 험악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그가 뒷걸음질치며 꼬리를 내렸다.  아마도 그는 겁에 질려 거리의 소란과 차오르는 반란, 정의의 편이 일으킨 성스럽고 적법한 반란 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허둥거리며 주저하는 동안 그의 명령도 슬슬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전임자이던 카알리에(Carlier)는 그런 그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저 불쌍한 젊은 친구가 배탈이 난 모양이군."





(Charlemagne de Maupas는 당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 밑에서 경찰 총장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쿠데타의 주요 계획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비상 사태 속에서 모파는 모르니(duc de Morny, 당시 내무부 장관)에게 달라 붙었다.  당시 경찰청과 내무부는 전신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모든 긴박한 소식과 공포와 혼란에 질린 신호들이 경찰청장으로부터 내무부 장관에게 날아들었는데, 모르니는 담대한 인물로서 좀더 침착한 편이었고,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 모든 충격적인 소식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겁에 질린 소식이 처음 날아들자, 모르니는 그저 '모파가 아픈 모양이군'이라고 말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신으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질문이 날아오자, 그는 다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고, 세번째로 같은 질문이 오자, 그도 평정심을 잃고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잠이나 자라니까' 






(Charles de Morny는 탈레랑의 아들과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로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동복 형제였습니다.  당시 내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의 열의도 아주 빠른 속도로 식어 갔고 편을 바꾸기 시작했다.  포부르 생-마르소(Faubourg Saint-Marceau) 구역을 봉기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저항 위원회에서 파견된 어느 용감한 남자가 주머니에 좌익의 선언문과 포고문을 잔뜩 담은 채로 포세-생-빅토르 가(Rue des Fossés-Saint-Victor)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즉각 경찰청 방향으로 끌려갔다.  그는 총살당할 것을 각오했다.  그를 끌고 가던 호송대가 케-생-미쉘(Quai-Saint-Michel)에 있는 시체 안치소를 지나치자, 시테(Cité) 섬 쪽에서 머스켓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초소로 돌아가게.  이 죄수는 내가 처리하겠네."  병사들이 가버리자, 그는 죄수를 묶은 포승을 끊더니 말했다.  "가게나.  내가 자네 목숨을 살려주지.  자네에게 자유를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날 잘 봐 둬.  다시 날 봐도 알아 볼 수 있게 말일세."







(시테 Cité 섬은 파리 한 가운데 있는 센느 강 속의 섬으로서, 노트르담이 여기에 있고 각종 관공서도 있습니다.)




군의 주요 쿠데타 공모자들은 회합을 가졌다.  주요 의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포부르 생-오노레(Faubourg Saint-Honoré)를 즉각 떠나서 엘리제보다는 방어에 더 용이한 두 전략 요충지인 앵밸리드(Invalides) 또는 뤽상부르 궁(Palais du Luxembourg)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앵밸리드를 선호했고, 다른 이들은 뤽상부르 궁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베스트팔렌(Westphalia) 전(前) 국왕이던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가 쿠데타가 실패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다음 날을 걱정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편지를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보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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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또 시간 날 때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ㄴㅇㄴㅇ 2016.11.20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순실봇이 나폴레옹 3세만큼의 지능이 있길 바라는건 무리인가 봅니다...

  2. 응딩이 2016.11.21 04: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모르니 공작은 루이 보나파르트와는 동복형제 정도가 아니라 그냥 형제였다죠... 유전자 검사 결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친부가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3. 알타리무1 2016.11.21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의 경우는 민주주의체제가 들어선뒤 왕정으로 바뀌거나 역혁명이 일어난사례가 없었는데(남북전쟁은 남부연합은 왕정이 아니고 공화국이였지요)
    프랑스의 경우는 역혁명이 일어나는등 민주주의체제안착에 어려움을 겪는데...

    이유는 무엇일런지. 민주주의라는것이 국민의 힘이 세지고 나서야 오는것인데.
    당시 미국의 시민이 프랑스이 시민보다 경제력이 특별히 세지는 않았고.
    교육수준도 비슷하고..
    단 한가지 차이점이라면 시민들의 무장수준이 미국이 매우 높았다는것인데(총기보유와 민병대결성의 자유)
    이것이 영향을 미친것일까요???

    전에 덧글에 보면 어느분이 매우 유익한 동영상을 소개해주었는데. 요즘 그분 블로그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과도 연관이 많이 있어서 제가 다시 한번 링크를 걸께요.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한글자막이 안나올때는 우측하단의 톱니바퀴모양버튼설정버튼을 툴러서 한글자막을 선택하에요)

    http://blog.naver.com/kyw0277/220847067516
    저근데 곧바로 유튜브 주소를 링크를 걸려니까 안걸어지네요 부득히 다른분 블로그 주소를 겁니다 이글안에 제가 소개하고 싶은 유튜브동영상이 있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6.11.21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 님처럼 헛소리와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좋은글 읽기전에 설마해서 댓글란 봤더니 눈만 더럽혀졌네요.

    • 수비니우스 2016.11.21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거 완전 미친 사람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 신들의황혼 2016.11.21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프랑스는 왕정의 전통도 있고 왕족들도 살아있으니까 왕정복고가 가능했겠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왕정이란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었던게 차이 아닐까 합니다

  4. 블랑 2016.11.21 2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인성 논란은 있어도 능력이야 있었는데, 3세는 정말이지.

  5. 안다쏜 2016.11.22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나파르트 가계의 대표는 지금 제롬의 후손이 맡고 있지만..

    나팔륜 1세의 직계도 남아있긴 하죠.
    폴란드의 발레프스카 백작부인 사이에서 본 알렉산더 발레프스키의 후손들..

    유전조사에서 나폴레옹 3세는 보나파르트 가문이 아닌걸로 드러났으나, 발레프스키 백작의 후손은 보나파르트 가의 후손인게 증명되었죠. 정작 알렉산더 백작은 평생 자기 아버지가 나팔륜 1세가 아니라 했지만서도..

  6. 무는개 2016.11.22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도 전에 알타리무가 개소리 싸질러놨을거라 예감햇는데 적중

  7. boribob 2016.11.22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예전 디씨에서 부터 관종을 상대할때는 무관심이 답입니다.
    관종은 관심을 먹고 삽니다.
    이 블로그에서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언급조차 하지 말아주세염ㅋㅋ

  8. 자유행성동맹 2016.11.22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뮤지컬 노스트람 드 파리에 나온 시티섬이 저기여군요 ^0^

  9. ㅇㅇ 2016.12.02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