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뜯어냅니다.  그러나 이때가 나폴레옹 제국이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은 1810년에 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우디노의 군단을 동원하여 추가로 타국을 정복했고 그 땅을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했거든요.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알려졌는데, 그런 한가한 시기에 나폴레옹의 먹이가 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침공할 때 당시 네덜란드의 국왕은 용감하게도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저항을 지시했는데, 그 국왕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끼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왜 네덜란드 축구팀의 상징이 오렌지색인지도 아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를 뒤져보아도 저 유니폼 색깔과 오렌지공 윌리엄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왜 애초에 네덜란드 귀족이 오렌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안나오더군요.  아무튼 이번 월드컵에서는 오렌지 군단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아쉽게도요.)




유아기에 사망한 형제들을 빼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는 본인 제외하고 모두 7명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맨 위가 조제프 (Joseph), 둘째가 나폴레옹, 세째가 유능했던 루시앙(Lucien), 그 다음이 존재감 없던 엘리자(Elisa), 다섯번째가 오늘의 주인공 루이(Louis), 그 다음이 아름다운 폴린(Pauline), 탐욕스러운 캐롤린(Caroline), 그리고 막내 제롬(Jérôme)입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독립 운동에서 어설프게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야반도주하여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부장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툴롱 포위전 이후 신분이 상승하자, 당연히 자신의 식구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닦아주기 바빴고, 특히 남자 형제들에게는 출세길을 열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이와 제롬이었지요.  제롬은 워낙 어렸으므로 일단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지만, 루이 같은 경우는 당시 국방장관이던 카르노(Carnot)에게 청탁을 넣어 포병 부대에 장교로 임관을 시켰습니다.  루이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은 물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원정까지도 따라가 위대한 형의 부관 노릇을 했습니다.  물론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했던 형 덕분에 전공을 세울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형이 프랑스 제1통령이 되자, 그 여세를 몰아 25살이라는 새파란 나이에 장군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낙하산을 타게 됩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 재벌 2세, 3세와도 같은 행보였지요.  다만 우리나라 재벌 2,3세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높은 계급에 부당하게 올랐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입니다.  둘째 형보다는 다소 못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눅이 든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장군으로 승진하기 1년 전인 1802년, 하늘 같은 둘째형인 나폴레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의붓딸이자 형수 조세핀의 딸, 즉 촌수로 치면 바로 자신의 의붓 조카딸인 오르탕스(Hortense de Beauharnais)와 결혼하라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손을 얻어야 했고, 조세핀은 어떻게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의 입지를 굳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략 결혼을 결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루이는 다른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들처럼 보아르네 가문 사람들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오르탕스도 늘상 우울하고 주눅이 들어보이고 루이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르탕스는 당시 다른 남자와 열애 중이었지요.  그러나 지중해성 가부장인 나폴레옹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행한 결혼은 이 두 젊은 남녀에게는 그야말로 실패작이었습니다만, 나폴레옹과 조세핀에게는 대성공작이었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그것도 둘다 아들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 아이의 탄생에 대해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뻐하며 그 아이에게 나폴레옹(Napoléon Louis Charles Bonaparte)이라는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실은 둘째에게도 Napoléon Louis Bonaparte라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선사했고, 훨씬 나중인 1808년에 태어난 세째에 대해서도 같은 이름 Louis-Napoléon Bonaparte을 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나폴레옹 루이 샤를입니다.  나폴레옹이 하도 이 아이를 각별히 여겨, 항간에는 저 아이가 나폴레옹과 오르탕스의 근친상간으로 나온 아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이 여자 문제가 난잡하기는 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날조라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가들의 의견입니다.)




그러나 첫째는 5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아, 나폴레옹은 물론 전체 보나파르트 가문에게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둘째인 루이 나폴레옹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저항하는 북부 이탈리아의 지하 조직 카르보나리(Carbonari) 활동을 하다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병에 걸려 동생의 팔에 안긴 채 27살의 나이로 죽은 것입니다.  루이와 오르탕스가 잠깐 화해한 1807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잉태된 세째는 이탈리아 경찰의 추적을 뿌리치고 어머니 오르탕스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 청년이 훗날 나폴레옹 3세가 됩니다.  그 이야기는 훨씬 훗날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루이-나폴레옹입니다.  어릴 때 그려진 그림 밖에 없네요.  6살의 나이에 1주일 뿐이지만 네덜란드의 왕을 역임한 소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행한 결혼에 우울해하던 루이에게 형 나폴레옹은 1806년,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라는 것이었지요.   루이가 네덜란드 왕으로 즉위하게 되기까지는 무척 복잡한 정치외교적인 역사와 사건이 얽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왕가들의 결혼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결과로 1581년에 7개 지방의 연합체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을 stadtholder, 네덜란드어로는 stadhouder(스타트하우더, stadt는 영어로 city, town 등을 뜻하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부관이나 중위를 뜻하는 불어 단어 및 거기서 파생된 동일 스펠링의 영어 단어 lieutenant(루테넌트, 불어로는 류뜨낭)와 동일한 뜻으로 '왕이 없는 동안 왕을 대리하는 직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네덜란드 저지대에는 합스부르크 왕들이 직접 거주하지 않았으므로, 그 지방의 귀족을 대리인으로 지정해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보게 했는데, 그 명칭이 독립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지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휘한 것도 네덜란드의 스타트하우더인 오라녜-나사우(Oranje-Nassau) 가문의 빌렘( (Willem van Oranje, 영어로는 William of Orange) 1세였습니다.  이 직위는 세습되는 것이었으므로, 외국에서는 이 스타트하우더 관직을 왕이나 뭐 그에 준하는 것인 모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패망 이후 실제로 이 가문의 수장을 왕으로 하는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으니, 그 오해가 꼭 틀린 것은 아니었지요.





(이 씩씩하게 생긴 양반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나사우의 빌렘 1세입니다.)




참고로, 이 오라녜-나사우는 원래 네덜란드와는 상관없는 곳입니다.  오라녜(네덜란드어로 오라녜이고, 프랑스어로는 오랑쥐)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ngon) 인근에 있는 곳이고, 나사우는 독일에 있는 지방입니다.  이 두 지방의 귀족들이 결혼 및 상속을 통해 합쳐진 것이지요.   네덜란드가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연결된 것은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Engelbert II)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플랑드르의 스타트하우더로 임명되면서부터였습니다.  또,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이름과 과일 오렌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색깔도 주황색에 대해서는 그저 노란 빨강(yellow-red) 또는 샤프란(saffron) 색 정도로 불려질 뿐, 오렌지 색이라는 색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오렌지는 중국 남부의 감귤류가 조상인 과일이라서, 유럽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동남아와 인도를 거쳐 아랍 쪽에 전해졌지요.  유럽에까지 이 과일 나무가 전해진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고, 유럽에 오렌지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세기 중반 경이었습니다.  이 과일의 이름이 오렌지로 정해진 것도 오랑쥐 또는 오라녜와는 전혀 무관한, 이 과일의 아랍 이름인 나랑쥐 (naranj)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가문의 영지 이름과 과일 이름이 비슷하여 어리둥절했을 오라녜-나사우 가문에서 이 오렌지 색을 자기 가문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 즈음 해서였다고 합니다.  즉, 네덜란드 국가대표축구팀이 오렌지 색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 남부의 오랑쥐라는 지명은 과일과는 전혀 무관한, 고대 켈트족의 물의 신인 Araisio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 서민들이나 한다는 직접 찍은 유럽 여행 사진 자랑...  스페인에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많은데, 오렌지 향기를 좋아했던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세비야에서 찍은 것입니다.  가봤던 스페인 도시 딱 하나에 다시 가보라고 한다면 저는 세비야를 택하겠습니다.  좋더라구요 !)




아무튼 그 오라녜 공을 수장으로 하던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는 달리 발달된 상공업 덕분에 시민 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 확산이 매우 왕성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이미 오라녜 가문에 대해 무장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오라녜 가문과 친척이던 프로이센 왕의 군대가 이를 진압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지요.  그러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이 네덜란드 자체 혁명 세력은 프랑스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오라녜 가문을 내쫓고 새로운 정부인 바타비아(Batavia) 공화국을 세웁니다.  그러나 프랑스 자신이 공안 위원회의 공포 정치나 부패한 총재 정부 등 혼란을 겪으면서 네덜란드의 혁명 정부도 많은 혼란과 내부 갈등, 거기에 힘세고 거친 이웃인 프랑스의 간섭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도 네덜란드의 독립성을 유지시켜 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무력보다는 네덜란드의 은행가들이었습니다.  아시냐 지폐의 혼란 등 재정 붕괴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부유한 네덜란드에게 차관을 요구했고, 네덜란드에서는 특혜에 가까운 저이율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프랑스를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일단 중2병 환자였던 나폴레옹은 민주 정권을 쿠데타로 뒤엎은 인간답게, '민주 공화국'이라는 네덜란드를 무척 고깝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뒤 당장 돈이 없어서 쩔쩔 매던 나폴레옹도 전임 총재들처럼 네덜란드 은행가들에게 대출을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그 태도와 조건이 마치 뭐 맡겨 놓은 돈을 인출하는 고객처럼 무이자 대출을 거만한 태도로 요구했다는 것이지요.  네덜란드 은행가들이 이 신용평가가 떨어지는 반란군 수괴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네덜란드의 독립은 이미 반쯤 날아간 것이었지요.  게다가 트라팔가 해전 이후 영국 침공의 꿈이 완전히 좌절되자 네덜란드에서는 당장 '영국 침공 망했으니 그거 한답시고 빌려간 불로뉴의 대형 보트 함대 돌려주세요'라고 눈치도 없고 시의부적절한 반환 요구를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불로뉴에 대규모로 집결시켰던 이 대형 평저선들은 알고 보면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들....)




게다가 네덜란드 공화국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가령 세금이 재산세 위주가 아니라 소비세 위주라서 서민들에게 불리했는데, 이를 바로 잡고 빈민들을 구제하자는 개혁 세력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기득권 세력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부 갈등 때문에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자 원래 혁명을 지지했던 많은 네덜란드인들도 혁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나라 전체가 영국과의 교역으로 먹고 살던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지엄하신 대륙 봉쇄령을 몰래 깨고 영국과 밀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그냥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렇다고 수십년간 독립 전쟁을 벌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아귀로부터 기어코 독립을 쟁취했던 만만치 않은 성깔의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꼭두각시 왕이 다스리는 허수아비 왕국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그 적임자로 지명된 것이 루이였습니다.  이미 조제프는 나폴리 왕이었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 가문 출신이 아닌, 사위일 뿐인 뮈라를 먼저 왕으로 앉힐 수도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나파륜 황제가 결정한 이상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데다 내부 갈등에 지친 네덜란드도 반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타협에 응합니다.  즉, 루이와 그의 후손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프랑스 왕위와 합쳐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든지, 네덜란드에는 징집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현실적인 조건으로 나폴레옹의 명에 따르게 됩니다.





(1807년 루이 치하의 네덜란드 왕국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루이는 네덜란드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 노릇을 바라던 형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으로 행동합니다.  루이는 1806년 6월 네덜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프랑스식 이름인 루이(Louis)를 네덜란드식으로 로더베익(Lodewijk)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열심히 네덜란드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형이 붙여준 프랑스 출신 관료들에게도 모두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함은 물론,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인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는 왕비인 오르탕스에게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버리도록 강요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1807년 라이덴(Leiden)에서 발생한 화약 화물선 폭발 사고와 1809년 홍수 상황에서, 루이는 네덜란드 시민들의 구호에 온 힘을 기울여 국민들의 큰 칭송을 받아 '선량왕 로더베익'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오르탕스는 젊고 아름다운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보아르네와 이혼한 뒤 갈 곳이 없었던 어머니 조세핀을 따라 어머니의 고향인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흑인 노예들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소울을 키웠기 때문에, 춤과 음악에 무척 재주가 있는 활기찬 아이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의 그런 점을 높이 보았고, 나폴레옹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히틀러처럼 나폴레옹도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지요.)




왕비 오르탕스는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라는 지시에 정말 크게 반발하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머니 조세핀이 있는 아름다운 파리를 떠나기 싫어했고, 또 끔찍하게 싫은 남편인 루이와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네덜란드에 도착해 보니, 시민들이 (이건 루이의 공이 컸는데) 왕비인 자신을 무척 좋아하고 환영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조금씩 네덜란드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와의 관계는 역시 전혀 좋지 못하여, 이 부부는 될 수 있으면 서로를 피했고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는 식사에서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오르탕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루이 왕의 그런 통치는 결코 나폴레옹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루이에게 그동안 프랑스가 네덜란드 은행가에서 꿔온 대출금을 1/3 수준으로 일괄 탕감하도록 조치하라고 시켰으나, 독립국가 네덜란드 왕국의 수장으로서 네덜란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야 했던 루이는 그런 터무니 없는 형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공화국을 폐지시켰던 가장 큰 이유인 대륙 봉쇄령의 엄격한 시행이었는데, 사랑하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루이는 그 단속에 대해 열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사고를 칩니다.  1809년 영국이 앤트워프(Antwerp, 네덜란드어로는 안트베르펜 Antwerpen)과 플러싱(Flushing, 네덜란드어로는 블리싱헨 Vlissingen)을 침공한 것입니다.  이 대규모 상륙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총 4만의 대군이었습니다.  당연히 루이는 이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루이의 독립 왕국 네덜란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한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와의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나폴레옹 눈 밖에 나서 프랑스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였습니다.  그는 고작 2만명 규모의 병력을 끌고 가서 네덜란드에 상륙한 뒤 네덜란드 저지대 특유의 풍토병으로 끙끙 앓고 있던 영국군을 쓱쓱 밀어내버린 것입니다.





(이 안트워프/플러싱 침공을 영국에서는 왈체런 Walcheren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작전을 지휘했던 캐텀 백작, John Pitt, 2nd Earl of Chatham 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말 안 듣는 배은망덕한 동생 루이에게 '자기 왕국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라며 차라리 퇴위를 명했습니다.  루이는 그를 거부했지만 사실 오래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1810년 여름, 나폴레옹은 우디노를 앞세워 동생의 왕국을 침공할 태세를 취했고, 루이는 감히 무서운 형에 맞서 자신의 네덜란드군에게 저항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무리 루이를 좋아했다고 해도 가망없는 싸움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기엔 너무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왕위가 보잘 것 없는 허울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이는 7월 1일 왕위를 아들 나폴레옹 루이에게 넘기고 도주했습니다.  우디노의 부대는 7월 4일 네덜란드를 무혈 침공했고, 당시 6살이던 어린 루이 2세를 잘 타일러 큰 아버지 댁, 즉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로써, 루이의 네덜란드 왕국은 불과 4년 만에 사라지고, 7월 9일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되어 버립니다.  


왕위를 잃은 루이의 행방은 처음에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우디노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루이가 대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지 못했고, 동생의 안위가 살짝 걱정되었던 나폴레옹이 행방불명된 루이를 찾아 '잘 타일러 파리로 보내라'고 각지에 편지를 써보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 루이가 뜻 밖에도 오스트리아로 도주하여 망명한 것이 알려져 나폴레옹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인어른 댁으로 도망친 것이니까요.  아마 무시무시한 사위를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도 이 망명객이 무척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차마 파리로 압송하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차마 장인에게 신병 인도를 요청하지는 못했습니다.


루이나 프란츠, 나폴레옹보다 더 곤란해진 것은 당연히 네덜란드 시민들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에 자신의 동생을 왕으로 앉힐 때의 조건은 절대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통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루이가 쫓겨난 지금 네덜란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네덜란드 시민들은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하천이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 도시로 흘러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자연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통합해버렸습니다.  


특히 이건 네덜란드의 상징적 독립성 못지 않게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공포의 징집제였지요.  네덜란드에서는 징집제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의 나폴레옹의 동생을 국왕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젠 아예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징집제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1811년부터 네덜란드에도 징집제가 적용되었고, 20세 이상의 청년들이 프랑스군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1812년 러시아로 향했던 나폴레옹의 군대 속에는 약 1만5천의 네덜란드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소국의 설움이었지요.  


그러나 최소한 1810년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 네덜란드인들은 크게 동요하며 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주요 전쟁이 나폴레옹의 승리로 다 끝난 뒤인 평화 시기였고, 러시아와의 비극적 전쟁이 예고된 바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되면서 네덜란드 경제를 괴롭히던 불확실성이 제거된데다 프랑스라는 큰 시장에 대한 관세도 사라진 셈이 되어, 많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합병 조치에 씁쓸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장사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루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망명 이후 루이는 오스트리아에서 조용한 망명 생활을 하며 문필 활동에 전념합니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 네덜란드가 결국 오라녜 가문의 빌렘 1세를 왕으로 하는 왕국으로 독립하자, 그는 나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를 방문하게 해달라고 빌렘 1세에게 여러번 요청했지만 계속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빌렘 2세가 1840년 그의 방문을 '익명으로 여행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합니다.  그가 이렇게 익명으로 네덜란드의 어느 호텔에 묵었을 때, 그래도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그 호텔 방 창문 아래 모여 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웅성이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잠깐이지만 네덜란드를 진심으로 대하며 다스려준 전왕에 대한 네덜란드 시민들의 환호화 갈채였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벌이던 아들들과는 달리 별다른 정치 활동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1846년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루이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결과는 바로 이 남자입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www.erfskipterpdoarpen.nl/documents/Engels/SoldiersNapoleon/SoldiersNapoleonIntroduction.htm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Hortens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the_Silent


(코렝트 주점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배경 1832년 파리 --------------------


6월 5일 아침, 항상 같이 지내는 친구들인 레글과 졸리는 코렝트(Corinthe) 주점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졸리는 지독한 코감기가 걸려 코가 막힌 상태였는데, 레글에게 막 옮기 시작한 상태였다.  레글은 닳아 헤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졸리는 잘 차려 입고 있었다.


그들이 코렝트 주점의 문을 밀고 들어간 것은 대략 오전 9시 경이었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틀로트와 지블로트가 그들을 맞이했다.


"굴, 치즈와 햄 (Huîtres, fromage et jambon)."  레글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주점은 비어 있었다.  그들 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졸리와 레글을 잘 알고 있던 지블로트는 식탁 위에 와인 한 병을 갖다 놓았다.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계단으로 올라오는 바닥의 햇치문에서 머리가 하나 나타나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다 거리에서 냄새를 맡았지, 브리 치즈의 맛있는 냄새말이야.  들어가겠네."


그랑테르였다.  그랑테르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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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학 작품에서 감동보다는 먹을 것 관련 이야기를 즐겨 찾는 편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고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이 짧은 인용 구절에서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나왔거든요.  





1) 생굴인가 요리한 굴인가 ?


저 구절을 읽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저 굴이 생굴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튀기거나 삶는 등 요리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엔 냉장고도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굴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훈제 굴을 만들어 놓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실제로 훈제 굴이라는 음식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저 굴이 생굴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도 굴은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용 구절에서처럼 레글이 그냥 '굴'이라고만 이야기했으므로, 저 굴은 익힌 것이 아니라 생굴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유럽인들은 원래 해산물을 날로 먹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지만 굴만은 예외입니다.  참 의이한 일이지요.  심지어는 생선 외에의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러시아인들조차도 굴은 날 것으로 먹습니다.  체호프(Chekhov)의 소설 '굴'에서는 19세기 후반, 모스크바 길거리의 어느 불쌍한 구걸 소년이 굴이 뭔가 집게 달린 갑각류라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굴이라도 먹겠다고 하자, 신사들이 '꼬마가 생굴을 먹는다고 ?  그거 참 재미있겠네'라며 꼬마에게 굴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짧은 소설은 제가 (요즘 휴가인지라) 번역해서 올려 볼게요.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그 감독인 퍼거슨 경 관련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퍼거슨 경의 엄격한 식단 관리 중 하나로 경기 전에는 절대 조개 종류를 못 먹게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조개 종류는 쉽게 상해서 식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퍼거슨 경의 방침은 결코 무시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익히지도 않은 생굴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요 ?


비결은 간단합니다.  반드시 살아 있는 굴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자면 먹을 때 반드시 아직 살아 있는 굴의 껍질을 자기 눈 앞에서 까서 즉석에서 먹어야 하고요.  아마 레글과 졸리가 주문한 굴도 껍질 째로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라고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원문 구절은 'Comme ils étaient aux premières huîtres' 입니다.  이걸 영어로 번역하자면 'as they were at the first oysters' 입니다.  저는 저 aux (à + les = aux), 영어로 at을 '먹고 있을 때'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굴 껍질을 까느라 애를 쓰고 있을 때'라고 봐도 크게 흠은 없을 듯 합니다.  즉, 껍질 속에 살아있는 생굴을 까먹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굴을 까먹기 위해서는 그냥 일반적인 칼을 써도 되지만 끝이 가늘고 짧은 굴까기 전용 칼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굴 껍질의 뾰족한 쪽이 경첩이인데, 그 곳을 잘 더듬어 보면 좁은 홈 같은 것이 있으니 거기로 칼 끝을 밀어넣고 껍질의 아래 위를 연결하는 관자 힘줄을 끊고 칼을 비틀어 껍질을 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난 다음이 아주 중요한데, 굴 껍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대고 굴을 먹어야 하는데, 굴 껍질 안에 있는 액체도 놓치지 말고 다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굴의 체액은 그냥 바닷물만이 아니라 굴의 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도 마셔야 제대로 굴을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파상의 단편 소설 '쥴 아저씨' (Mon oncle Jules)에 그런 부분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버지는 우아하게 차려 입은 두 숙녀에게 두 신사가 굴을 권하는 장면을 보았다.  누더기를 걸친 늙은 선원 하나가 칼로 굴을 따서 신사들에게 건네주면, 그 신사들이 다시 숙녀들에게 그걸 건넸다.  그 숙녀들은 고운 손수건으로 굴껍데기를 잡고 국물이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입술을 약간 삐죽 내밀어 굴을 아주 우아하게 먹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고 작은 동작으로 국물을 마시고는 껍질을 뱃전 밖으로 던졌다."


문제는 저 '쥴 아저씨' 속의 굴은 항구의 배 위에서 직접 까먹는 것이지만, 레 미제라블 속의 굴은 한참 내륙인 파리 시내에서 까먹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체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파리까지 생굴을 날랐을까요 ? 





2) 어촌에서 파리까지 생굴 운송이 가능했나 ?


레미제라블 시대는 아직 철도가 프랑스 전역에 상용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 어촌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에프(Dieppe)까지의 거리인 170km를 마차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당시 마차가 사람이 걷는 것보다 빠르다고 해도, 기껏해야 짐마차인데 사람보다 2배 이상 빨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시속 8km 정도가 한계였을텐데, 쉬지 않고 달려도 26시간, 하루에 8시간씩 달린다고 해도 3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어선에서 굴을 하역하고 분류해서 마차에 싣는 것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파리 시장에서 하역하고 판매해서 식당에 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 아무리 빨리 먹는다고 해도 레글과 조이가 먹었던 굴은 바닷물에서 건져진 지 최소 5일, 아마 7일은 지난 것이었을 것입니다.  얼음도 없던 시절,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


가능했습니다 !  구글링을 해보니 대합이나 홍합은 빨리 죽어 쉽게 상해버리지만 의외로 굴은 물 밖에 나온 뒤에도 꽤 오래, 심지어 시원한 곳에서 습기만 잘 유지해주면 2~3주 동안이라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껍질은 안 깐 상태에서의 이야기이지요.   현대 미국에서도 굴은 기차 등으로 장거리 수송할 때 얼음을 쓰지 않고 그냥 물에 적신 신문지로 덮어서 층층이 상자에 넣어 수송한다고 합니다.  얼음을 쓸 경우 수돗물을 얼려 만든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 들어가는 물 속의 염소 때문에 굴이 죽는다는 거에요.  아직 비행기나 고속 열차 등이 발명되기 훨씬 전인 19세기 후반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미국 동부 해안 체셔피크 만에서 잡은 굴을 증기 기관차를 통해 미국 중서부 콜로라도 주의 덴버까지도 운반했다고 하네요.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포르투갈로부터 영국으로 선박을 통해 살아있는 생굴을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화물선이 증기선이었을지 범선이었을지 불확실한데, 포르투갈 북쪽의 대표적 항구인 오포르토(Oporto)로부터 런던까지의 약 1600km 항로를 시속 16km의 증기선이라고 해도 4일, 평균 시속 9km의 속도를 내는 범선일 경우 거의 7일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항구에서의 통관 절차 및 상하역, 판매를 위한 대기 시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2주간은 굴이 살아있어야 그런 무역이 이루어졌겠지요.  그런 생굴 무역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868년, 포르투갈산 생굴 60만개를 싣고 영국으로 가던 화물선 르 모를레지엥(Le Morlaisien) 호가 프랑스 지롱드(Gironde) 강 하구에서 폭풍을 만나 대피하고 있었습니다.  폭풍 때문에 발이 묶인 화물선에서는 며칠이 지나자 일부 굴이 죽어 썩기 시작했지요.  화물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남은 굴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한 선장은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 당국의 허가를 받고 죽은 굴 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살아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기존의 프랑스산 토종 굴 대신 더 생명력이 좋았던 이 포르투갈산 굴이 해안에 크게 번성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 어부들이 외래종이라고 이를 매우 싫어했답니다.  그러나 먹어보니 이 포르투갈산 굴이 맛도 좋고 번식력도 좋아서, 1910년대까지 프랑스 굴 산업을 이끄는 주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것처럼 레글과 졸리는 마차로 디에프에서 파리까지 1주일 걸려 운송한 굴을 별 거리낌 없이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3) 19세기 전반 당시 굴의 가격은 ?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마리우스는 가난하여 아침은 자기 방에서 빵과 날달걀 1개로 때웁니다.  저녁에 식사할 때도 와인 대신 물을 마시지요.  그 친구인 졸리와 레글은 시골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넉넉하게 사는 편입니다.  가난한 친구들이라면 아침을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저런 주점에 가서 먹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아침부터 굴을 먹다니요 !  굴 양식이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지금도 굴은 비교적 비싼 음식입니다.  특히 생굴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굴이 상대적으로 싼 음식이라고 하고, 유럽에서는 생굴은 매우 비싼 음식이라고 하지요.  레미제라블 시대인 19세기 전반은 과연 어땠을까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비쌌습니다만, 저 1832년 당시에는 조금 쌌을 수도 있습니다.  육지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키울 수 있는 곡물과 육류와는 달리,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어패류는 잡는 사람이 임자였으므로 아무런 절제 없이 모든 이들이 마구 남획을 했습니다.  가령 어떤 기록에 보면 대구라는 물고기는 먹성이 좋아서 한마리의 뱃속에서 고등어와 가자미가 너댓 마리, 게와 조개가 수십 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상상이 가십니까 ?  대구가 비록 큰 물고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게 컸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다에서 원양 어업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북미 뉴펀들랜드 등에서 대구 어장을 발견한 이래 엄청난 남획이 이루어지면서 대구가 완전히 다 자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요즘 대구가 작아졌을 뿐, 원래는 2m까지도 자라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참조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지금은 어장이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렸지만, 과거 전라도 해안 지방에는 번식기가 되면 참조기들이 바다 속에서 우는 소리에 잠을 설칠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굴도 딱 그랬습니다.  굴은 일라이드(Illiad)에서 파트로클루스가 언급할 정도로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사람이 즐겨 먹던 조개류입니다.  게다가 한번 바위 등에 달라 붙으면 전혀 이동하지 않고 평생을 거기서 지내는 생물이지요.  그러다보니 남획되기 딱 좋았고, 실제로 씨가 마를 정도로 남획되었습니다.  그런 남획에 일조를 한 것이 프랑스 부르봉 왕가였습니다.  이들은 굴을 아주 좋아해서 많이 먹었고, 특히 지금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컹칼(Cancale) 지방의 굴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18세기 초 프랑스부터는 굴을 구경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급기야 1760년대에는 심지어 베르사이유에서조차 캉칼 굴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어 귀족들도 남획의 폐해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족해지면 비싸집니다.  굴 가격은 엄청나게 뛰었을 것입니다.




(지도 왼쪽에 붉은 표식이 있는 지점이 컹칼입니다.  파리에서 꽤 머네요.)



그 결과, 여태까지는 아무런 법규가 없던 굴 채집에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759년, 굴이 알을 낳는 시기인 여름철을 낀 6개월, 즉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는 굴의 채집을 금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R-달, 즉 영어 이름에 R이 들어가지 않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굴은 배란기에 독성을 띠므로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긴 한데,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잡아 먹으면 굴 씨가 마르겠다'라는 절박함이 저렇게 '굴을 먹으면 안되는 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굴 관련 기사들을 찾다보니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항상 생굴을 후루룩 까먹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건 잘못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식습관을 묘사한 비서들, 즉 부리엔이나 콩스탕의 회고록에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술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다보니 전투 직전에는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려서 나폴레옹 본인도 감자 한 알도 제대로 못 먹고 전투에 임하는 일이 많았는데 내륙인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지에서 생굴을 까먹었다 ?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나폴레옹 본인이 아니라 그 조카인 나폴레옹 3세 때문에 비롯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별나게 굴을 좋아했다고 하며, 심지어 보불 전쟁에 패해 폐위되어 영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굴을, 그것도 가급적 프랑스산 굴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저 먹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 1세와 3세는 둘 다 프랑스 굴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큽니다.  삼촌인 나폴레옹 1세가 잦은 전쟁과 과도한 징집으로 어촌에 남자 씨를 말려버린 결과 굴을 채집할 사람이 부족해졌고,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는 프랑스 해안에 굴이 어느 정도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레글과 졸리도 아침부터 굴을 주문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1830년대 들어 다시 남획이 시작되면서 굴의 씨가 또 마르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좋아하는 굴을 좀더 싸게 많이 먹기 위해 당시 유명한 생물학 교수였던  코스트(Jean Jacques Marie Cyprien Victor Coste)를 불러 굴 양식 방안을 모색하게 했고, 그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코스트는 현대적 굴 양식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었으니,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역사에 긍정적으로 남긴 것이 오페라 가르니에 외에도 또 있긴 한 셈입니다.



(근대 굴 양식의 아버지 빅토르 코스트입니다.)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굴 열풍이 늦게 부는 바람에, 19세기 후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굴을 많이들 먹었다고 합니다.  1842년 미국 뉴욕을 방문한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즈는 거리 곳곳에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으로 생굴을 파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 12가구 당 하나 꼴로 굴 가판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뉴욕 시민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주 거리로 나가 생굴을 까먹었습니다.  특히 한밤중에 출출한 사람들이 즐겨찾는 야식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한밤 중에 차가운 굴이라 !  저도 굴은 좋아합니다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륙인 시카고의 풀턴 시장에도 굴 가판대가 성행했답니다.)



  

4) 분명히 6월인데 굴을 먹을 수 있나 ?


자,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는 분명 6월 5일에 시작되었고, 소설 본문에도 레글과 졸리가 굴을 주문한 날이 6월 5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6월은 R이 안 들어가는 달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프랑스어로도 R이 안 들어가는 달은 영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6월에 생굴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  빅토르 위고가 글을 쓰다보니 실수한 것일까요 ?


불어     영어

janvier     January

février     February

mars     March

avril     April

mai     May

juin     June

juillet     July

août     August

septembre     September

octobre        October

novembre       November

décembre       December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빅토르 위고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산란기에는 굴에 독성이 생기므로 R이 안 들어가는 이름의 달에는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사실 근거가 모호한 말이라고 합니다.  단지 산란기에 굴은 살이 빠지고 마르므로 먹기에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여름철에는 바닷물의 수온이 올라 적조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 때문에 그 물 속에서 사는 굴에도 사람에게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병균이 붙어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고요.  또 무엇보다 생굴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여름철에는 세균 번식이 더 왕성하게 잘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저 'R이 없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라는 전설은 굴의 독 보다는 굴의 생육과 번식을 보호하려는 법령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합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각 지방마다 다릅니다만) 원래 금지령은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였습니다.  9월이나 10월에는 R이 들어가는데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누군가 머리 좋은 공무원이 '그냥 R이 안 들어간 달에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홍보를 한 모양입니다.


특히 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32년에는 굴 보호를 위해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굴을 잡지 말라는 규제의 감독과 집행이 느슨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레글과 졸리가 비교적 싼 가격에 굴을 먹었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Source :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쥴 아저씨, 모파상 작

http://www.telegraph.co.uk/food-and-drink/features/why-we-need-to-celebrate-british-native-oysters/

https://www.pinterest.co.kr/pin/106045766202394053/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11/sep/07/guide-to-eating-oysters

https://www.chowhound.com/post/raw-oysters-long-die-504718

https://ephemeralnewyork.wordpress.com/2017/01/05/everyone-in-19th-century-new-york-loved-oysters/

http://www.oysters.us/history1-usa.html

http://blog.michaelscateringsb.com/cooking_on_the_american_r/2009/12/charles-dickens-on-oysters.html

https://www.thekitchn.com/myth-busting-what-time-of-year-is-it-safe-to-eat-oysters-223123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의 최후는 1871년 보불전쟁, 즉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시작됩니다. 






(보불전쟁의 여러 광경입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열정이나 애국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들들의 목숨, 그리고 여러분 가족들의 눈물로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찬성할 자격이 있는 분들은 그런 것들을 기꺼이 바칠 용자들 뿐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높았으나, 바로 4년 전인 1866년 보오전쟁, 즉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경험을 쌓은 프로이센군과는 병력 동원 자체가 달랐습니다.  프랑스군은 독일과의 국경 지역 약 250km에 걸쳐 약 20만명을 동원하는데에도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습니다.  프랑스 참모부의 엉성한 계획 때문에 국경 지대의 모든 도로와 철도가 교통 체증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군은 좀더 밀집한 120km 전선에 52만명의 병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에게는 신무기였던 크룹(Krupp)사의 8cm 야전포가 있었습니다.  강철제 후장식 야포였던 Krupp C64 포는 프랑스 포병대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른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밀집 보병 대오를 장난감 병정처럼 쓰러뜨렸습니다.    






(1870년, 소집에 응하는 프랑스 예비군들의 모습입니다.)







(Krupp사의 후장식(breech-loading) 8cm 포입니다.  이건 루마니아군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당시 프랑스군은 아직 전장식(muzzle-loading) 포를 썼습니다.)




거기에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폴레옹 3세가 총지휘관으로 있었으니, 뭐든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보불 전쟁 중 가장 큰 전투였던 8월 17일의 그라블로트(Gravelotte) 전투에서, 11만 병력의 프랑스군은 19만의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분전하여 1만2천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프로이센군에게 1만9천의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메츠(Metz)에 포위되면서 사실상 전쟁의 향방을 패배로 굳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는 그야말로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은 본인이었으나, 실제로는 메츠에 포위된 바젠(François Achille Bazaine) 원수, 자신과 함께 있던 막마옹 (Patrice de MacMahon) 원수, 총리였던 팔리카오(Cousin-Montauban, Comte de Palikao) 백작, 그리고 파리에서 섭정으로 있던 황후 외제니(Eugénie)의 4인이 제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결정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스스로의 의견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이 네 사람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었습니다.






(그라블로트(Gravelotte)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로이센 제9 라이플 대대의 돌격 장면입니다.  이 전투에서는 프로이센군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이런 그의 무능력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그와 막마옹 원수가 9월 1일 세당(Sedan)에서 대책없이 포위되어 프로이센군이 고지에 설치해놓은 포대로부터 맹렬하고 무자비한 포격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상황은 막마옹 원수조차 프로이센 포탄 파편에 부상을 당할 정도로 급박했는데, 나폴레옹 3세는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프랑스군 진지 내를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습니다.  그의 의미없는 산책을 따라다니던 수행 장교 중 하나는 포격에 전사하고, 둘은 부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 날 그를 따라다니던 군의관 하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인간이 여기에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 내내 어떤 명령도 내린 것이 없다."


결국 나폴레옹 3세도 결정을 내리긴 내렸습니다.  오후 1시가 되어, 프로이센군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한 것입니다.  2일 뒤인 9월 3일, 이 항복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황후 외제니가 남아 있는 튈르리(Tuileries) 궁 앞으로 성난 군중이 밀려든 것입니다.  궁 직원들이 성난 군중을 피해 하나둘씩 도주하는 사이, 황후 외제니도 이런 말을 남기고 몰래 뒷문을 통해 영국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황제가 잡혀 가고 황후가 달아난 파리에서는 시민들이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항복이라고 ?  그럴리가 없어 !  황제는 항복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  황제는 죽었어 !  사람들이 내게 그 사실을 숨기려 드는 거겠지.  왜 그 양반은 자살을 하지 않은 거지 ?  이게 무슨 망신인지 그 양반은 모르는 건가 ?"






(외제니 황후입니다.  스페인 그라나다 출신이었던 이 귀부인이 상당히 미인이라고 느껴지시나요 ?)



 


(화가의 붓끝은 정무적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사진기는 눈치가 없어 그렇지 못합니다. 예, 저 그림 속 외제니가 이 사진 속 외제니와 동일 인물입니다.)




나폴레옹 3세는 굴욕적인 항복 후, 다음 해인 1871년 3월 19일까지 독일 빌헬름쇠허(Wilhelmshöhe) 궁에서 편안한 포로 생활을 하며 어떻게든 전쟁 이후 권좌에 복귀하려는 계략을 획책했습니다.  그가 프로이센 재상인 비스마르크(Bismarck)와 비밀 회담을 해가며 꾸민 계획을 한줄로 요약하면, 프로이센군이 파리의 혁명 공화국 정부를 무찔러 주면 나폴레옹 3세의 부하들이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을 새 군주로 하여, 프로이센에게 고분고분한 보수 정권을 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완강한 저항과 독일이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대한 영국 및 러시아의 반감으로 인해 그 계획은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범털 포로 생활을 했던 독일 카셀의 빌헬름쇠허(Wilhelmshöhe)입니다.)



파리 공화국 정부가 프로이센과 휴전 협약을 맺은 이후에도 나폴레옹 3세는 어떻게든 권력을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3 공화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는 불과 5석을 얻는 참패를 겪으면서 그의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종전이 되면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그의 호화로운 감옥 아닌 감옥으로부터 석방했고, 갈 곳이 없던 그는 젊은 시절 망명 생활을 했던 영국으로의 망명길을 택했습니다.  파리에 남겨둔 그의 자산 대부분은 몰수된 이후였으므로, 그는 금전적으로 궁색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휴대하고 있던 보석류를 팔아 망명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그는 런던에서 기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치즐허스트(Chislehurs)라는 마을의 3층짜리 저택에 정착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방문을 받는 등 나름 예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별로 가치없는 글을 쓰거나 에너지 효율이 좋은 난로를 개발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바로 다음해인 1872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873년 1월 병사했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세당에서 겁장이는 아니었다는 거 사실이쟎아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프랑스 국민에게 끼친 피해보다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그의 개인적 명예가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담석 제거 수술 후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한 희대의 코미디언 루이 나폴레옹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1848년 2월 혁명으로 피를 흘려가며 기껏 루이 필립 왕을 내쫓은 뒤 가진 대통령 선거에서, '위대하신 나폴레옹의 조카라는데 뭘 묻고 따지고 그러냐'라며 멍청한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프랑스인들이 받아들여야 했던 결과였습니다.  역사는 자꾸 반복됩니다.  2번이면 이미 충분히 당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IV


병사들의 사격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시민들도 약 15분간 응사하고 있었는데, 양측 모두 사상자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먼저 보병대에서, 이어서 기병대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위협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부대들이 갑자기 뒤돌아 선 것이다.


쿠데타를 기록한 역사편찬가들은 상티에 가(Rue du Sentier) 모퉁이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병사들에게 총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노트르-담-드-르쿠브랭스 가(Rue Notre-Dame-de-Recouvrance)와 푸와소니에르 가(Rue Poissonnière)의 어떤 집 지붕으로부터 발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자그랑 가(Rue Mazagran)의 모퉁이의 높은 집 지붕에서 발사된 권총 사격이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총탄의 발사 장소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은 이 문제의 탄환, 어쩌면 문을 꽝 닫는 정도의 소음을 냈던 이 탄환이 옆 집에 살던 치과의사에게 맞았다는 점이다.  질문은 결국 이것으로 귀결된다.  그 대로변 집들 중 하나에서 발사된 권총이나 머스켓 소총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가 ?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  많은 증인들은 그 점을 부인한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주요 도로명입니다.)




만약 총탄이 정말 발사되었다면,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그것이 원인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신호였는가 ?


어쨌건 간에, 이미 언급한 대로, 갑자기 기병과 보병, 포병들이 길가 인도에 늘어선 구경꾼 인파들을 향해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고 또 예상하지 못 했지만, 아무런 동기 없이, 아침의 그 악명 높은 경고장에 쓰인 것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육은 짐나즈 극장(Gymnase Theatre)으로부터 뱅 시누아(Bains Chinois, 중국 목욕탕이라는 뜻)까지, 그러니까 파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파도 많은, 가장 번화한 거리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뱅 시누아(Bains Chinois)는 1787년 지어진 파리의 유명 공중 목욕탕입니다.  1852년에 매각된 뒤, 그 다음해에 다른 투자용 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습니다.)




군대는 시민들을 근접 거리에서 쏘아 쓰러뜨렸다.


그건 무시무시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비명소리, 하늘을 향해 치켜든 팔들, 그 경악과 공포, 사방으로 달아나는 군중, 보도에 부딪힌 뒤 집 지붕까지 튀어 오르는 수많은 총알들, 순식간에 거리에 가득 쓰러진 시체들, 입에 시가를 문 채로 쓰러지는 젊은이들과 벨벳 가운을 입은 채 총을 맞은 여자들...  서적 판매원 두명은 자신들의 서점 문간에서 자신들이 뭔 일을 저질렀길래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해되었다.  그 속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죽어버리라고 지하실 환기창에 대고도 사격이 가해졌으며, 시장은 포탄과 총알로 난장판이 되었다.  살랑드루즈 호텔(Hôtel Sallandrouze)은 폭발탄 포격을 받았고, 메종 도르(Maison d'Or, 황금의 집이라는 뜻)는 포도탄 포격을 받았으며,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병사들이 난입했다.  대로에는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리셜리외 가(Rue de Richelieu)에는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카페 Tortoni는 당시 파리 시내 문인들과 멋장이들이 모이던 명소였습니다.)




나레이터는 여기서 이야기를 잠깐 멈춰야겠다.


이 이름없는 행위들의 존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을 기록관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범죄를 기록하고, 사건의 당사자를 호명한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나는 루이 보나파르트를 소환한다.  나는 생-타르노(Saint-Arnaud), 모파(Maupas), 모레(Moray), 마냥(Magnan), 카를레(Carrelet), 캉로베르(Canrobert), 그리고 레벨(Reybell), 즉 보나파르트의 공모자들을 소환한다.  나는 그 처형자들, 그 살인자들, 그 증인들과 희생자들, 달아오른 대포와 김이 나는 군도, 술에 취한 병사들과 유족들, 죽어가던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 그 공포, 그 유혈, 그리고 그 눈물들을 모두 문명 사회의 법정으로 나오라고 소환한다.


단지 나레이터일 뿐인 이 사람의 말을, 그 나레이터가 누구이든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생한 사실들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사실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하게 하자.  우리는 그 증언을 듣도록 하자.





(생-타르노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습니다.  권력 장악을 위해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이 반란 공모자는 불과 3년 뒤 크리미아 전쟁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다 위암으로 병사했습니다.)




V


우리는 증인들의 이름을 인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이미 밝혔다.  하지만 독자들은 진실의 진지하고 신랄한 억양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증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인도 위를 세 발자욱 걷기도 전에, 그 옆으로 행군해가던 부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남쪽을 향해 돌아섰고, 머스켓 소총을 들어올리고는 즉각 공포에 질린 군중들에게 발포했어요.


그 사격은 20분 정도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가끔씩 훨씬 더 우렁찬 대포 포성도 울렸어요.


첫번째 일제 사격 때, 저는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는 인도 위를 마치 뱀처럼 기어서 아무 문이나 열려 있는 첫번째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건 와인 가게였어요.  산업 시장(Bazaar de l'Industrie) 바로 옆의 180번지였지요.  저는 거기 들어간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사격은 계속 되고 있었고요.


거기에는 약 5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자 5~6명과 아이 2~3명도 있었고요.  세명의 불쌍한 친구들은 들어올 때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중 2명은 약 15분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고, 나머지 1명은 제가 4시에 가게를 나올 때도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결국 그 남자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군 부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발포한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가게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엔 여자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 중 2명은 그 구역에 저녁거리를 사려고 나온 것이었어요.  변호사의 어린 서기도 있었는데, 그는 고용인의 심부름을 나왔다가 거기 오게 된 것이었지요.  증권거래소(Bourse)의 주식 중개인 2~3명, 그리고 집 주인도 2~3명 있었습니다.  초라한 셔츠 차림이거나, 혹은 아무 셔츠도 입지 못한 일꾼 몇 명도 있었습니다.  그 가게로 대피한 불행한 사람들 중 하나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약 30세 정도 되는, 회색의 짧은 외투를 입은 금발의 남자였습니다.  그는 포부르 몽마르트르(Faubourg Montmartre)에 있는 그의 가족과 식사를 하러 그의 아내와 함께 가던 중에 군 부대가 거리를 가로질러 행군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었지요.  처음에 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와 그의 아내 둘 다 쓰러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그 와인 가게로 끌려 들어왔지만, 그의 아내는 옆에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달래봐도 그는 계속 아내를 찾으러 달려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고집했지요.  밖의 거리는 포도탄 포격이 휩쓸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1시간 동안 그를 우리와 함께 있도록 붙잡아 두는 것 뿐이었어요.  다음 날, 저는 그 사람의 아내가 결국 살해되었고 그 시신은 시테 베르제르(Cité Bergère)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약 20일 뒤에, 저는 그 불쌍한 남편이 보나파르트에게 복수하겠다고 협박했다가 체포되어 브레스트(Brest) 항구로 보내진 뒤, 결국 카이엔(Cayenne)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와인 가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왕정주의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저는 공화주의자라고 밝힌 사람은 딱 2명을 보았는데, 하나는 전에 레폼(la Réforme, 개혁이라는 뜻)이라는 곡을 작곡한 므니에르(Meunier)라는 나이든 작곡가와 그의 친구 딱 둘이었습니다.  약 4시 쯤 되어, 저는 그 가게를 나왔습니다."






(카이엔은 적도 인근 남미 프랑스령 식민지인 기아나에 있는 일종의 감옥섬으로서, 흔히 악마의 섬(Île du Diable)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한 1852년,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개설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의 그 드레퓌스 대위도 여기서 복역했습니다.  사진 속의 오두막이 드레퓌스가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영화 빠삐용의 배경도 바로 카이엔입니다.)




마자그랑 가(Rue de Mazagran)에서 권총 발사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증인 하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 권총 소리는 병사들에게 모든 가옥과 그 창문에 일제 사격을 퍼부으라는 신호였습니다.  그 무차별 사격은 최소한 30분간 계속 되었어요.  사격은 생-드니 대문(Porte Saint-Denis)부터 카페 그랑 발콩(Café du Grand Balcon)까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곧 포격도 시작되었지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3시 15분 경,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생-드니 대문을 향하고 서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짐나즈 쪽 집들과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 철교의 집이라는 뜻), 그리고 생-파르 호텔(Hôtel Saint-Phar)을 향하더니, 생-드니 가(rue Saint-Denis)부터 리셜리외 가(rue Richelieu)까지의 반대 편에 있는 군중들에게 즉각 연속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불과 몇 분만에 인도 위는 시체들로 가득했어요.  가옥들은 총알 구멍이 무수히 나 있었고, 군 부대는 약 45분간 미친 듯이 계속 총을 쏘아댔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첫번째 포격은 본느-누벨(Bonne-Nouvelle)의 바리케이드에 가해졌는데, 이것이 다른 부대들에 대한 신호가 되었어요.  군 부대들은 머스켓 소총 사정거리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어떤 말로도 그런 야만적 행동을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말로 표현 못 할 행위의 진실에 대해 증언하려면 그 현장을 목격했어야만 해요.


병사들은 수천발을 -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지만 - 아무 짓도 하고 있지 않던 군중들에게 쏘았어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요.  아주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지요.  그게 전부였어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전반적인 흥분이 고조에 달했을 때, 전열 보병대에 이어 기병대와 포병대가 대로에 도착했어요.  부대 중 누군가가 머스켓 소총을 발사했는데, 화약 연기가 수직으로 솟은 것으로 보아 그것이 공중을 향해 발사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 경고없이 군중들에게 발포하고 총검으로 찌르라는 신호였습니다.  이것은 군부가 학살을 시작하는 계기를 원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 다른 증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포도탄(mitraille, 산탄)이 장전된 대포가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예언자라는 뜻)라는 상점부터 몽마르트르 가(Rue Montmartre)까지의 상가 전면을 찢어놓았습니다.  본느-누벨 대로로부터 메종 비으코크(Maison Billecoq)에도 포격을 가한 것이 틀림없었어요.  포탄이 오뷔송(Aubusson) 쪽의 벽 모퉁이를 때리고 벽을 관통한 뒤 집 내부까지 뚫었거든요."






(포도탄 또는 캐니스터탄이라고 불리는 이 대포알은 사진처럼 깡통 속에 작은 쇠구슬 수십개를 담은 것입니다.  대포에서 발사하면 마치 대형 산탄총을 쏜 것처럼 그 앞에 있는 적군 수십명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런 증언들이 끝도 없이 계속 됩니다...)


"계속 가세요." 보호를 요청한 선량한 시민들에게 장교들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시민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가던 길을 재빨리 걸어갔지요.  하지만 그건 죽음을 뜻하는 암호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총에 맞아 쓰러졌거든요."


다른 증인이 말한다.  "대로에서 사격이 시작되던 순간에, 카펫 창고 근처에 있던 한 서점 주인이 서둘러 서점 문을 닫고 있었어요.  그때 피할 곳을 찾던 몇 명의 군중들이 거기로 들어가려 했고, 전열 보병인지 헌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쏜 사람이 그 중에 있지 않나 의심했어요.  군인들은 서점에 난입했고, 서점 주인은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는 혼자 그의 서점 바로 앞으로 끌려 나왔고, 그의 아내와 딸은 그가 막 총에 맞아 쓰러질 때에야 그와 군인들 사이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고, 그 딸은 코르셋의 살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그의 아내는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들었어요."


이제 소름 없이는 묘사할 수 없는 세 건의 증언으로 마무리를 짓자.


"이 공포스러운 사건의 시작 부분의 15분간, 사격의 격렬함이 잠깐 다소 느슨해졌는데, 이때 부상당해 쓰러진 사람들 중 몇몇은 일어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앞에 쓰러진 사람들 중 2명이 일어났습니다.  한 명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상티에 가(Rue du Sentier)를 통해 달아났어요.  그가 달아나는 중에도 총알이 빗발쳐서 그 중 하나는 그의 모자를 날려버렸지요.  다른 한 사람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만 성공했습니다.  그는 손을 꼭 쥐고 병사들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요.  하지만 그는 즉각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음날, 르 프로페트의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베란다 옆면에 1백발 이상의 총알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출처 : http://www.napoleontrois.fr/dotclear/index.php?post/2006/04/04/115-le-coup-d-etat )




"샘이 있는 몽마르트르 가의 끝 부분에서 약 60보 정도 떨어진 곳에, 남자와 여자, 엄마와 아이들, 어린 소녀들의 시체가 60구 정도 있었어요.  이 불행한 시신들은 대로 맞은 편에 배치된 군 부대와 헌병들이 발사한 첫번째 일제 사격의 희생자들이었지요.  그들은 첫번째 사격이 시작되자마자 모두 달아났지만, 불과 몇 발자욱 못 가서 쓰러졌지요.  젊은 남자 하나는 관문 안으로 피해서 대로 쪽으로 튀어나온 벽 뒤에 숨으려고 했어요.  그는 몸을 꼿꼿이 세워 몸이 벽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최소화하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약 10분 정도 조준이 형편없는 사격을 받던 끝에, 그도 결국 총에 맞고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또 다른 증인이다.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의 판유리와 창문은 모두 깨졌습니다.  그 마당에는 공포에 질려 미쳐버린 남자 하나가 있었어요.  지하실에는 거기로 대피한 여자들이 가득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가게와 지하실 환풍창에 대고 총을 쐈습니다.  토르토니(Tortoni)부터 짐나즈(Gymnase) 극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1시간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짐나즈 극장(Théâtre du Gymnase Marie-Bell)은 1820년 설립된 파리의 유서깊은 극장입니다.  지금도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고 합니다.)



***

파리 같은 세계 문명의 중심 도시에서도 저런 흉악하고 야만적인 쿠데타와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진상을 숨기려는 음모도 뻔뻔스럽게 실행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저런 비극을 겪었고, 그 진상을 왜곡하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런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합시다.


II


아침 이른 시간부터 - 여기서는 미리 획책된 것이 분명한데 - 모든 거리의 모퉁이마다 이상한 플래카드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플래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옮겨적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걸 기억할 것이다.  가끔씩 파리 시내에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부가 아주 절박한 조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60년 동안에도, 이런 플래카드는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집회는 아무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무력으로 해산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문명의 대도시인 파리 시민들은 인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그런 극단적인 선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고문은 그저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협박용이라고 간주되었고,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들 얕보았다.


하지만 대중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체 계획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 경고는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12월의 인간에 의해 준비되고 저질러진, 이 전대미문의 드라마의 무대가 된 장소에 대해서 한마디 첨언하겠다.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글자 그대로 성 마틴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듯이,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 북쪽에 있습니다.)



마들렌(Madeleine)에서 포부르 푸아소니에르(Faubourg Poissonniere)에 이르는 대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짐나즈(Gymnase) 극장에서 포르트 생-마르텡(Porte Saint-Martin)까지의 부분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고, 봉디 가(Rue de Bondy), 네슬레 가(Rue Neslay), 륀 가(Rue de la Lune)도 마찬가지였으며, 생-드니(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에 접하거나 연결된 모든 거리가 다 막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틴 너머의 대로는 샤또 도(Chateau d'Eau) 반대편에서 시작된 바리케이드 하나만 빼고는 다시 바스티유(Bastile)까지 그냥 뚫려 있었다.  포르트 생-드니(Porte 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7~8개의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텡의 위치를 보여주는 구글 지도입니다.  그 바로 서쪽으로 포르트 생-드니가 있습니다.) 






(구글 덕분에 앉아서도 파리 시내 구경이 가능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길 한복판의 두 대문 중, 왼쪽의 좀더 큰 것이 포르트 생-드니, 오른쪽 것이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때, 포르트 생-드니 주변 4개 도로가 모두 시민들이 쌓은 바리케이드로 막혔습니다.)




포르트 생-드니는 사면이 4개의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 4개의 바리케이드 중 마들렌 쪽을 향한 것은 진압군의 첫번째 공격을 받을 운명이었는데, 그 거리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져 있었고, 그 왼쪽 끝은 륀 가, 오른쪽 끝은 마자그랑(Mazagran)에 접하고 있었다.  4대의 합승마차(omnibus), 그리고 5대의 가구 운반마차, 내던져진 전세 마차(hackney coach) 감독관 초소, 그리고 부서진 간이 공중화장실(Vespasian column), 대로변의 공공 벤치, 륀 가의 계단 판석, 군중들이 통째로 뜯어낸 쇠로 된 인도 가드레일 등이 이 요새의 재료였다.  이런 바리케이드로는 그 넓은 대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도로는 매커덤(macadam) 방식으로 포장된 것이라서, 보도블럭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 바리케이드는 대로 양쪽 끝까지 뻗어 있지도 않아서, 마자그랑 가로 향한 집 한 채를 짓고 있던 쪽으로는 큰 빈 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빈 틈을 본 어느 잘 차려 입은 젊은이가 공사용 비계에 올라가, 혼자 힘으로, 입에 담배도 그대로 문 채로 아주 여유있게, 그 비계의 밧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인근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웃으며 이 청년에게 박수를 보냈다.  한 순간 뒤 이 비계는 큰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틈을 막았고, 이로써 바리케이드가 완성했다.






(마카담(macadam)으로 포장된 도로입니다.  일정한 크기로 잘게 부순 돌을 깐 도로입니다.  그 이름이 혹시 마카다미아 견과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고, 이런 도로 포장법을 최초로 만든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 이름이 존 매커덤(John McAdam)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도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뜯어다 경찰에게 던졌기 때문에, 대학 주변의 도로에서 보도 블럭을 모두 없애고 인도까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원래 공중화장실이라는 것이 파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1770년 경 '신사들을 위한 소변기' 수준이었습니다.  형태도 정말 나무통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30년 경 파리 시 장관이었던 랑뷔토 백작(comte de Rambuteau)이 칸막이가 달린 소변기를 도입했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이를 비웃어 이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랑뷔토 기둥'(la colonne Rambuteau)이라고 불렀는데, 랑뷔토 백작은 이를 맞받아쳐 로마 시내에 최초의 공중 소변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베스파시아누스 기둥'(la colonne vespasien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굳어져, 이런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누스 기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 보루가 완성되는 동안,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대 문을 통해 짐나즈 극장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거기의 옷장에서 찾은 머스켓 소총 몇 자루와 북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은 극장 용어로 '소도구'라 불리던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북을 쥐고 전투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뒤집어 놓은 간이 화장실들과 옆으로 넘어뜨린 마차, 뜯어낸 블라인드와 셔터, 낡은 무대배경 등으로 본느-누벨 대로(Boulevard Bonne-Nouvelle)의 초소 반대편에 일종의 전초진지 같은 작은 바리케이드, 아니 작은 반달 모양의 진지를 지었다.  여기서는 푸아소니에르 대로와 몽마르트르 대로 뿐만 아니라 오뜨빌 가(Rue Hauteville)까지도 관측이 가능했다.  군 부대는 아침에 그 초소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그들은 그 초소의 깃발을 뽑아와 바리케이드에 꽂았다.  그 깃발이 나중에 쿠데타의 신문들이 '붉은 깃발'로 부른 그 깃발이었다.


약 15명의 사람들이 이 전초 진지에 위치를 잡았다.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은 있었으나 탄약이 없었고, 있더라도 매우 적은 양이었다.  그들 뒤에는 포르트 생-드니를 커버하는 큰 바리케이드를 약 100여 명의 전투원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2명의 여자와 한 명의 백발 노인도 목격되었다.  그 노인은 왼손에 든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쥐고 있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어깨에 군도(sabre)를 맨 채로 길 옆 보도의 가드 레일을 뜯어내는 것을 돕다가 쇠막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오른손의 손가락 3개를 베었다.  그 여자는 군중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며 외쳤다.  "공화국 만세 ! (Vive la Republique!)"  다른 여자는 바리케이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위에 꽂힌 깃대에 몸을 기대고는, 머스켓으로 무장한 셔츠 차림의 두 남자가 받들어 총을 해주는 사이 좌익 대표단이 발행한 무장 봉기 호소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군중들은 박수를 쳤다.  


이 모든 일들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일었났다.  바리케이드 이 쪽에서는 대로 양쪽의 보도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곳은 조용했고, 어떤 곳에서는 "술루크 타도 ! 배신자 타도! (à bas Soulouque! à bas le traître!)"를 외치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것은 수염난 남정네가 아니라 저렇게 서민들이 쓰는 붉은 고깔 모자를 쓴 마리안느라는 여성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입니다.) 




가끔씩 애도 행렬이 군중 속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 행렬은 병원 직원들과 군인들이 나르는 밀폐형 가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선두에는 긴 막대를 든 남자들이 행진했다.   그 막대 끝에는 큰 글씨로 '군 병원 활동'이라고 적힌 파란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가마를 덮은 커튼에는 '부상자, 앰뷸런스'라고 적혀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이때 파리 증권 거래소(la Bourse)에는 많은 군중이 있었다.  모든 벽에는 벽보 붙이는 사람들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공문을 붙이고 있었는데, 시장 상승세를 바라던 주식 중개인들조차도 이런 벽보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갑자기, 지난 2일 간 쿠테타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던 잘 알려진 투기꾼이 마치 도망자처럼 하얗게 질리고 숨이 찬 모습으로 나타나 소리쳤다.  "저들이 대로에서 발포하고 있어요 !"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파리의 증권 거래소인 부르즈(Bourse de Paris)입니다.  브롱냐르 궁(Palais Brongniart)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원래 캥캉푸아(Quincampoix) 등 몇몇 곳에서 벌어지던 증권 거래를 통합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가 알렉상드르 브롱냐르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 건물 디자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데, 정작 건축가들의 비평은 고리타분하다는 등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관련 source : http://carolineld.blogspot.kr/2016/08/last-relief.html 

https://en.wikipedia.org/wiki/Macadam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Bourse


(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편지 내용입니다.)


"조카여, 프랑스 국민들의 피가 흘렀구나.  그 확산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렴.  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국민투표에 대해 언급했던 너의 두번째 선언문을 국민들은 보통 선거권의 재확립이라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에 기여할 의회가 없다면 자유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단다.  군대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제야말로 도덕적인 승리로서 실질적 승리를 완성할 순간이다.  패배한 경우엔 할 수 없는 것을 승리했을 때 해야 한다.  과거 정당들을 해체한 뒤에 국민 전체를 복권시키렴.  보통 선거권이 진지하고 자유롭게 행사되어, 공화국을 구할 대통령과 제헌 의회를 선출할 거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 편지를 너에게 쓰는 것은 내가 형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그가 내전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공감하기 때문이란다.  내 오랜 경험을 믿으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후세가 너의 행동을 평가할 거라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너를 사랑하는 숙부, 제롬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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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Nicolas Fabvier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장교로서 페르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에 사절로 가기도 했습니다.  1851년 쿠데타 당시는 이미 퇴역한 상태였고,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보수파 정당의 일원이었습니다.)

 



마들렌 광장(Place de la Madeleine)에서는 두 대표 파비에(Fabvier)와 크레스텡(Crestin)이 만나 대화했다.  파비에 장군은 크레스텡에게 4문의 대포가 원래와는 반대 방향으로 포구가 돌려져 있는 것을 지적하고는, 즉각 그 대로를 떠나 엘리제 궁으로 말을 달렸다.  "엘리제 궁이 이미 방어 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 장군이 말했다.  크레스텡은 레볼뤼시옹 광장(Place de la Revolution, 혁명 광장,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의 다른 쪽에 있는 의회 의사당의 전면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장군, 내일이면 우린 저기에 있을 겁니다."  엘리제 궁의 마굿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몇몇 다락방에서는 3대의 여행 마차가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싣고 말들을 정렬시킨 뒤, 좌마기수까지 이미 안장 위에 오른 채로 대기 중인 것이 목격되었다.  





(여기서 레볼뤼시옹 광장으로 불린 콩코르드 광장입니다.  광장 북서쪽에는 저 너머에는 대통령 궁인 엘리제 궁이, 그리고 남쪽의 센느 강 너머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의회 의사당이 된 부르봉 궁 Palais Bourbon이 있습니다.)




실제로 충격이 대단했고, 분노와 증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하나만 더 터진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몰락할 판국이었다.  그저 그 날 하루가 그대로 끝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쿠데타는 절망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과연 그는 무얼 할 생각이었을까 ?  그는 뭔가 큼직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것으로 반격을 해야 했다.  그는 이대로 망해버리거나, 공포의 수단을 써서 위기를 벗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엘리제 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두번째 퇴위가 있었던 웅장한 응접실 근처에 있는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가끔 문이 조금 열리고 그의 부관인 로게(Roguet) 장군이 흰머리칼이 무성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이 장군이 문을 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군은 점점 더 경악스러워지는 소식을 들고 왔고, 하던 말을 자주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또는 '일이 꼬이고 있습니다' 등의 말로 끝맺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벽난로를 활활 피워놓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장착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앉아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계속 다음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내 명령대로 실행하라 전하게."  






(Faustin Soulouque는 당시 아이티의 황제였습니다.  184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군이었던 그는 이 시건 바로 2년 전인 1849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독재자였고, 프랑스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로게 장군이 나쁜 소식을 들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선 것은 거의 1시 경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로게 장군 자신이,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침착함과 함께 직접 세세히 묘사를 했다.  그는 왕자(Prince President를 공식 호칭으로 썼던 루이 나폴레옹을 가리킴)에게 파리 중심부의 바리케이드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오히려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거리마다 '독재자 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감히 실제로 외쳐지던 '술루크(Soulouque) 타도'라는 구호를 보고하진 못했다.  그리고 군 부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힐난하는 고함소리가 그들을 맞았고, 주프롸 회랑(Galerie Jouffroy)에서는 어느 소령 하나가 군중들에게 쫓겨다녔으며, 카디날 카페(Cafe Cardinal)에서는 참모 대위 하나가 말에서 끌어내려졌다고도 보고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네 !  생-타르노(Saint-Arnaud) 장군에게 내 명령을 전하게."








(Galerie Jouffroy는 지금도 유명한 파리 시내의 지붕 덮힌 140m 정도 되는 통로입니다.   쿠데타 6년 전인 1845년에 만들어진 이 길은 최초로 유리와 강철로만 만들어진 지붕 회랑으로 유명합니다.) 




이 명령이란 무엇이었을까 ?  우린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필자는 고통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펜을 내려둔다.  이제 우리는 그 서러운 날, 12월 4일의 혐오스러운 위기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쿠데타의 성공을 낳은 그 괴물 같은 행위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미리 획책했던 음모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을 밝히려 한다.  12월 2일을 기록했던 모든 사료 편찬자들이 숨겨왔고, 마냥(Magnan) 장군이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 파리에서조차도 목격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것을 폭로하고, 서술하고, 묘사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무시무시한 것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12월 2일은 어둠으로 덮힌 범죄이고, 침묵 속에 뚜껑이 닫힌 관이며, 그 틈 사이로는 피가 솟구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관 뚜껑을 열려고 한다.





(5.18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네요...  당시에도 그런 학살 사건을 은폐하고 그걸 밝히려는 노력을 탄압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게른제 섬으로 망명가서 쓴 이 '꼬마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반입되어 숨어서들 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또 다음 기회에...)


요즘 시국에 편승하여,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즉 '꼬마 나폴레옹'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몇 편에 걸쳐 올립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건 보쥬 광장 거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서 제가 찍은 당시 풍자화 사진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오를레앙 왕조가 무너지자, 프랑스는 공화국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동안 억눌린 각계 각층의 요구 폭발로 인한 대혼란에 빠져 듭니다.  이 와중에, 기존 정치인들의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좀 덜 떨어진 인물로 보았던 루이 나폴레옹이 위대한 나폴레옹의 후광을 업고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당시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의 재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1852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851년 말 루이 나폴레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꾀하지만, 의회를 장악한 자신의 정적들이 그를 좌절시키자, 치밀한 준비 하에, 백부인 나폴레옹 1세가 황제에 등극한 날이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벌어졌던 날인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이 저항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수백명의 사망자를 내며 봉기는 실패했고, 1년 후인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폐지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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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의 범죄


"12월 4일"


저항은 예상과는 다른 대규모가 되어 버렸다.  


전투는 매우 위협적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라, 아예 대규모 전투가 되어 버렸고, 사방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엘리제(Élysée)와 다른 지역구에서,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쌓아 올렸다.


파리 중심부는 임시로 만든 보루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길을 막은 구역들은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을 형성했다.  알르(Halles)와 랑뷔토 가(Rue Rambuteau)를 한쪽으로 하고, 대로들을 다른 쪽으로 했으며, 동쪽으로는 탕플 가(Rue du Temple)를, 서쪽으로는 몽마르트르(Rue Montmartre)를 경계로 했다.  그물망처럼 엮인 이 거대한 거리들은 모든 방면에서 보루와 참호로 차단되어 있었고, 매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점점 더 무시무시한 모습을 띠었고, 요새처럼 변해갔다.  바리케이드의 전투원들은 센느 강 부두까지 전초병들을 내보냈다.  


이 사다리꼴 구역 밖에서는 바리케이드가 포부르 생-마르텡(Faubourg Saint-Martin)과 운하 인근까지 뻗어 있었다.  저항 위원회에서 대표자로 드 플로트(Paul de Flotte)를 보내온 학교 구역은 그 전날 저녁 때보다도 더 보편적으로 봉기에 나선 상태였다.  교외 지역에도 불이 붙고 있었다.  바티뇰(Batignolles)에서는 '무기를 들라'는 북소리가 울려퍼졌고, 마디에 드 몽조(Madier de Montjau)가 벨빌(Belleville) 지역을 일깨우고 있었다.  샤펠-생-드니(Chapelle-Saint-Denis)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중이었다.  상업 지구에서 남자들은 머스켓 소총을 날랐고, 여자들은 붕대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  파리가 봉기했어 !"  B---가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저항 위원회에 들어서며 외쳤다.  





(사진 속의 인물은 마디에 드 몽조 Noël Madier de Montjau 입니다.  이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도 이 무장 봉기 이후 망명을 해야 했고,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는 1870년 이전에는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 위원회는 쿠데타가 발생한 12월 2일 밤에 조직된 것으로, Carnot, de Flotte, Jules Favre, Madier de Montjau, Michel de Bourges, Schœlcher, 그리고 Victor Hugo가 대표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각기 다른 지역구의 모든 위원회가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저항 위원회의 위원들은 심사숙고하며 사방의 전투에 대해 명령과 지시를 전달했다.   시민들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던 이 모든 사람들이 열정과 기쁨에 가득차 서로 포옹하기도 했다.  


쥴 파브르(Jules Favre)가 말했다.  "자, 이제 정규군 연대 하나만 우리 편으로 넘어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끝장이야."  미쉘 드 부르쥬(Michel de Bourges)도 말했다.  "내일이면 공화국이 시청(Hotel de Ville)을 접수할 걸세."  모든 것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장 조용한 지역구에서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포고문이 찢겨져 나갔고, 법령 발표문이 훼손되었다.  보부르 가(Rue Beaubourg)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창문에서 "용기를 내세요 !"라고 소리쳤다.  소요 사태는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까지 퍼졌다.  파리 경찰 조직의 중심부였던 제뤼살렘 가(Rue de Jerusalem)의 경찰청 본부는 전체가 벌벌 떨고 있었다.  공화국이 승리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경찰의 고민은 엄청났다.  경찰청 안마당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복도에서, 서기들과 경관들(sergents-de-ville)은 코시디에르(Caussidiere)에 대해 애정어린 후회를 마음에 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Marc Caussidière는 언론인으로서 1848년 7월 혁명 때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다 경찰 본부를 점령한 뒤 임시 정부에 의해 경찰 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 경찰 총장인 모파(Charlemagne de Maupas)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쿠데타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봉기에 대해 험악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그가 뒷걸음질치며 꼬리를 내렸다.  아마도 그는 겁에 질려 거리의 소란과 차오르는 반란, 정의의 편이 일으킨 성스럽고 적법한 반란 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허둥거리며 주저하는 동안 그의 명령도 슬슬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전임자이던 카알리에(Carlier)는 그런 그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저 불쌍한 젊은 친구가 배탈이 난 모양이군."





(Charlemagne de Maupas는 당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 밑에서 경찰 총장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쿠데타의 주요 계획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비상 사태 속에서 모파는 모르니(duc de Morny, 당시 내무부 장관)에게 달라 붙었다.  당시 경찰청과 내무부는 전신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모든 긴박한 소식과 공포와 혼란에 질린 신호들이 경찰청장으로부터 내무부 장관에게 날아들었는데, 모르니는 담대한 인물로서 좀더 침착한 편이었고,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 모든 충격적인 소식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겁에 질린 소식이 처음 날아들자, 모르니는 그저 '모파가 아픈 모양이군'이라고 말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신으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질문이 날아오자, 그는 다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고, 세번째로 같은 질문이 오자, 그도 평정심을 잃고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잠이나 자라니까' 






(Charles de Morny는 탈레랑의 아들과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로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동복 형제였습니다.  당시 내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의 열의도 아주 빠른 속도로 식어 갔고 편을 바꾸기 시작했다.  포부르 생-마르소(Faubourg Saint-Marceau) 구역을 봉기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저항 위원회에서 파견된 어느 용감한 남자가 주머니에 좌익의 선언문과 포고문을 잔뜩 담은 채로 포세-생-빅토르 가(Rue des Fossés-Saint-Victor)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즉각 경찰청 방향으로 끌려갔다.  그는 총살당할 것을 각오했다.  그를 끌고 가던 호송대가 케-생-미쉘(Quai-Saint-Michel)에 있는 시체 안치소를 지나치자, 시테(Cité) 섬 쪽에서 머스켓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초소로 돌아가게.  이 죄수는 내가 처리하겠네."  병사들이 가버리자, 그는 죄수를 묶은 포승을 끊더니 말했다.  "가게나.  내가 자네 목숨을 살려주지.  자네에게 자유를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날 잘 봐 둬.  다시 날 봐도 알아 볼 수 있게 말일세."







(시테 Cité 섬은 파리 한 가운데 있는 센느 강 속의 섬으로서, 노트르담이 여기에 있고 각종 관공서도 있습니다.)




군의 주요 쿠데타 공모자들은 회합을 가졌다.  주요 의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포부르 생-오노레(Faubourg Saint-Honoré)를 즉각 떠나서 엘리제보다는 방어에 더 용이한 두 전략 요충지인 앵밸리드(Invalides) 또는 뤽상부르 궁(Palais du Luxembourg)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앵밸리드를 선호했고, 다른 이들은 뤽상부르 궁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베스트팔렌(Westphalia) 전(前) 국왕이던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가 쿠데타가 실패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다음 날을 걱정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편지를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보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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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또 시간 날 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