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848 바이에른의 배신 (10) - 두 개의 봉인이 풀리다 막시밀리안 1세의 맏아들인 루드비히는 1809년 당시 23세 한창 나이였는데, 당연히 실전에서 사단장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의 성향은 원래부터 반(反)프랑스, 친(親)오스트리아이자 낭만적인 민족주의였습니다. 그는 특히 독일 중세 시대에 대한 매니아로서 나중에 왕이 된 이후 상(上) 바이에른(Oberbayern), 하(下) 바이에른(Niederbayern), 슈바벤(Schwaben), 프랑켄(Franken) 등의 옛 지방명을 복원하고 자신의 호칭도 '바이에른 국왕이자, 프랑켄 공작, 슈바벤 공작, 팔츠 백작' 등으로 고치기도 했습니다. 좀 오버스러운 이런 성향은 그가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말더듬이 심했다는 점에 대한.. 2024. 10. 14. WW2의 수정 이야기 (3) - 수정 깎는 노인... 아니 미국인 랑쥬뱅이 독일 U-boat를 잡기 위해 수정 결정판을 이용하여 만들었던 수중 청음기는 곧 다른 나라에도 알려졌고, 수정 결정판의 압전 효과를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어 보자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벌어짐. 그 중 가장 먼저 의미있는 사용처를 찾아낸 것은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자인 캐디(Walter Guyton Cady) 박사. 이 양반도 WW1 기간 중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한 청음기 개발에 투입되었다가, 수정의 압전효과를 알게 됨. (일부에서는 다른 사람이 더 먼저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수정 공명기를 세계 최초로 만든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캐디 박사님. 이 양반의 수정 공명기는 미국과 유럽의 주파수 표준으로 사용되었고 그 공로로 1932년에는 Institute of Radio Eng.. 2024. 10. 10. 바이에른의 배신 (9) - 토지 개혁과 전쟁 1813년 10월에 바이에른이 나폴레옹을 배신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물론이고, 바이에른의 친프랑스 정책을 주도했던 총리 몽겔라스조차도 나폴레옹에 대해 개인적인 충성심이나 존경심 같은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나폴레옹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는 사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함께 해서 더 이상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1813년 9월 말, 나폴레옹의 형세는 누가 봐도 전혀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이에른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에 대해 물론 나폴레옹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바이에른이나 이탈리아, 스위스 등은 물론, 정말 나폴레.. 2024. 10. 7. WW2의 수정 이야기 (2) - 잠수함을 찾는 수정구슬...아니 수정판 1880년, 피에르 퀴리(Pierre Curie)와 그 동생 자끄 퀴리(Jacques Curie)는 압전(壓電) 효과, 즉 piezoelectric effect을 실험으로 입증. 압전효과라는 것은 토파스나 수정, 소금 등의 결정체(crystal)의 전하량이 기계적 응력(stress)에 따라 변화하고, 또 그 역으로도 변화하는 현상. 그러니까 수정 결정체에 압력을 가하면, 그 수정에 연결된 전기선을 통해 신호가 발생하고, 반대로 전기 신호를 주면 수정 결정체의 모양이 변화하며 기계적 압력이 발생하는 것. (압전 성질을 가진 결정체 디스크의 모양이 변화하면서 전압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과장하여) 보여주는 그림) (퀴리 형제가 압전효과를 실험할 때 쓴 것과 비슷한 장치. 저 장치를 Curie comp.. 2024. 10. 3. 바이에른의 배신 (8) - 외젠의 결혼 (하)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의 결과로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몇몇 영토를 할양받아 덩치가 더 커질 뿐만 아니라, 공국에서 벗어나 이제 왕국으로 인정받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확정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참여하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협약이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805년 뮌헨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어느 때보다 기쁜 날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분위기는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심복인 뒤록(Duroc)이 의전을 갖추고 나타나 공식적으로 외젠과 아우구스타의 혼약을 요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그날은 억지춘향으로 이 공식 사절을 접대해야 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 막시밀리안은 병을 .. 2024. 9. 30. WW2의 수정 이야기 (1) - 할시 제독의 불평 전에 언급한 ( https://nasica1.tistory.com/802 참조), 1943년 1월 말의 렌넬 섬(Rennel Island) 해전에서 순양함 USS Chicago (CA-29)가 무선침묵 깨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항공 엄호 없이 일본해군 뇌격기들과 싸우다 격침된 사건에 대해 할시(Halsey) 제독은 보고서에 아래와 같이 무전기 탓을 함. "실전 경험에 기반하여, 초고주파수 다채널 신속 변환 무선통신 장비 (ultra high frequency and multi channel, quick shift radio equipment)의 생산이 1년 넘게 계속 권고되었다. 그러나 실전부대들은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장비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무선침묵과 저 초고주파수 다채널 신속 변환 무선통신.. 2024. 9. 26. 바이에른의 배신 (7) - 외젠의 결혼 (중) 이 혼담의 주인공인 아우구스타 공주는 1804년 하반기부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매우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1805년 4월, 그녀는 꽤 가까운 사이였던 2살 연상의 친오빠 루드비히(Ludwig Karl August von Pfalz-Birkenfeld-Zweibrücken)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루드비히는 그 시절 유럽 귀족가문 자제들 사이에 유행이던 소위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위해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거든요. "...아빠가 카알과의 약혼을 바라지만, 프랑스를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내 생각엔 주바이에른 프랑스 대사 오토(Otto)는 나를 외젠 보아르네에게 시집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모양이야. 카알 왕자와의 약혼이 확실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 2024. 9. 23. 무선침묵 이야기 (9) - 연합군에는 신기술이, 독일해군에는 대응책이 있다 허프더프를 군함에 설치할 수 있게 결정적인 개선 사항을 만들어낸 사람은 바로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난민. 1904년 생인 폴란드인 바츠워프 스트루신스키(Wacław Struszyński)는 바르샤바 공대에서 석사학위까지만 마치고 폴란드 국영 통신사에서 방향 탐지 기술부에서 일하던 전기공학자. 1939년 나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어렵게 탈출하여 1940년 영국에 도착. 실은 개인 자격으로 알아서 피난길에 나선 것은 아니었고 국영 기업에서 당시 첨단 기술이던 전파 공학을 하던 기술자라고 영국에 의해 소개된 것. 참고로 스트루신스키의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가방끈이 긴 사람으로서, 화학 박사이자 바르샤바 공대 교수였는데 영국에서 화학자는 별로 쓸모가 없었는지 소개시켜주지 않아 나찌 독일 치하에 남아야.. 2024. 9. 19. 바이에른의 배신 (6) - 외젠의 결혼 (상) 프랑스가 독일을 프랑스에 위협적이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일권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두 축으로 자잘하게 분열되어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건 나폴레옹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자잘한 독일 국가들 중 가장 덩치가 컸던 바이에른을 친프랑스 성향으로 굳히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는 몽겔라스가 조종하는 막시밀리안 1세가 바이에른 선제후가 된 것은 나폴레옹에게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나폴레옹이 가부장적인 지중해성 남자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당시는 이제 막 19세기로 접어든 시대였고 그 시대 유럽에서는 동맹을 굳히는 단단한 수단으로 지배 가문끼리의 정략 결혼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2024. 9. 16. 무선침묵 이야기 (8) - 허프더프의 활약 지난 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서양의 U-boat들은 매일 유럽 대륙의 사령부로 타전해야 하는 보고서를 보내는데 있어 쿠어츠지그날(Kurzsignale)을 사용하게 되면서 약 20초 정도만 전파를 발신했으므로, 그런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전파를 이용하여 연합군의 구축함이나 초계기들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음. 그러나 1942년 이후, 유보트들은 보고문을 타전하고 나면 얼마 안 있어 연합군 초계기 또는 구축함이 자기 위치로 득달처럼 달려오는 현상을 자주 발견. 처음엔 우연이겠거니 혹은 저 친구들이 운이 좋아서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전파 방향 탐지에 성공했겠거니 생각했으나,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면서 이건 우연도 운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됨. (이 벨리니-토시 전파 방.. 2024. 9. 12. 바이에른의 배신 (5) - 빛은 프랑스로부터 어떻게 보면 몽겔라스의 친프랑스 정책은 구한말 때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믿었던 김옥균 등의 개화파의 생각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간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당시 조선에게 있어 청나라나 러시아나 일본이나 모두 외국어를 쓰는 이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와 프로이센은 최소한 바이에른과 같은 독일어로 말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회적 관습을 가진 게르만 형제국이었고, 프랑스는 과거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게르만족과 대치하며 게르만족끼리 서로 싸우도록 부추긴 적대적 이민족 국가였습니다. 형제 국가들을 격파하려는 이민족 국가와 굴욕적인 동맹을 맺는 것은 독일 민족에 대한 배신 행위로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가 즉위하던 .. 2024. 9. 9. 무선침묵 이야기 (7) - 뜻밖의 사용례 전파 방향 탐지에 의한 유보트 사냥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다시 영국 공군 이야기를 해야 함. 로열 에어포스는 WW2를 앞두고 압도적인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를 상대하기 위해 비밀리에 레이더, 즉 Chain-home 시스템을 구축. 이 체인-홈 레이더 시스템은 오로지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서 날아오는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을 탐지하여 그쪽으로 아군 요격기들을 보내기 위한 것이다보니, 아예 쳐다보는 감시 구역도 고정되어 있었음. 즉, 해안가에 설치된 레이더들은 바다쪽만 쳐다볼 수 있었고 내륙 하늘은 전혀 볼 수 없었음. (체인-홈 레이더 사이트들의 위치. 모두 해안에 위치했고 또 바다쪽을 향하고 있음.) 그렇게 되니 일단 해안선을 통과한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은 감시망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문제도 있었지.. 2024. 9. 5. 이전 1 2 3 4 5 6 7 8 ··· 7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