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4.23 21:43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나 오스트리아군에게나 전례없이 길고도 치열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양측은 거의 48시간 동안 잠도 거의 먹지도 못 자고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거나 싸웠지요.  5월 22일 오후 5시 이후 이 대규모 살륙전이 서서히 잦아든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양측의 상황은 이틀 전과 사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스페른에서는 마세나의 제4 군단이 힐러와 벨가르드의 2개 군단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면서도 조금씩 후퇴하며, 결국 이때 즈음엔 아스페른이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로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세나의 군단은 여전히 맹렬하게 저항할 병력과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힐러와 벨가르드의 군단들은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후퇴는 무질서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오스트리아군은 그 뒤를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마세나의 제4 군단 잔여 병력은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고 아스페른 외곽에서 로바우섬으로의 철수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대편의 에슬링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비록 에슬링 전체가 포격과 화재로 쑥대밭이 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적어도 이 곳에서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랍의 근위대에게 축출된 이후, 두번 다시 에슬링을 상대로 반격을 꾀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우월한 포병 전력을 내세워 프랑스군을 계속 두들겼고, 이는 란을 비롯한 많은 프랑스군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포병 화력은 장거리에서 적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기에는 너무 약한 편이었고,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이틀전 전투 시작 이전과 비슷한 전선으로 되돌아온 셈이 되었지요.  그 많은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


해가 지자, 카알 대공은 애써 손에 넣은 아스페른에 수비대를 남겨놓고는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먼 곳으로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고, 최소한 이 날 전투는 여기서 끝이 난 것 같으니, 프랑스 포병의 포격 사정권 밖으로 최소한 보병과 기병은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볼 필요는 없고, 혹시 다음날 또 치열한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니 병사들을 먹이고 재워 재충전시키는 것이 더 급하다고 본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르쉐펠트의 벌판으로 철수한 뒤, 그 자리에 털썩 무너져 쓰러졌습니다.  정말 길고도 힘든 전투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로바우섬으로 질서있는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의 교두보에는 이미 든든한 토루를 쌓아 방어 진지를 구축해 두었는데, 이 곳에는 여전히 일부 병력을 남겨 지키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에서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강변까지 쫓아나와 밤새도록 대포알(roundshot)과 폭발탄(bomb, shell)을 쏘아댔다면, 로바우섬에 빽빽히 집결한 프랑스군은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조잡한 포병 화력으로는 프랑스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밤새도록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라는 공포심을 프랑스군에게 안겨주어,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전투를 위한 체력 보충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카알 대공은 그런 집요함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카알 대공의 그런 결정은 이틀 동안, 특히 5월 22일 당일날 카알 대공 자신이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웠다는 점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오스트리아군 최고 지휘관인 왕족들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지휘관 타이틀만을 쥐고 더 멀리 후방 안전한 텐트에서 펜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전에는 비슷했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5월 22일 란이 직접 이끈 중앙 공격에 오스트리아군 전선이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알 대공은 패주하는 병사들을 가로 막고 돌려세우는 등, 자신의 몸을 적탄에 노출시켜가며 현장 지휘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의 맹장 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카알 대공의 이런 헌신적인 지휘의 공이 컸습니다.  5월 22일의 지휘는 카알 대공의 인생 지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만큼 카알 대공 자신도 기진맥진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부하들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공감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카알 대공입니다.  이 양반의 인생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이틀 간의 전투 내내, 안전한 로바우 섬이나 강변 등 후방에서 지휘했습니다.  근위병 쿠아녜(Coignet)의 수기에 따르면, 5월 22일 아침 나폴레옹이 강변에서 전투 현장으로 이동하려 할 때,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적의 대포알에 맞아 쓰러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쿠아녜를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이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으신다면 우리 근위대는 한발짝도 전진하지 않겠다'라고 나폴레옹의 후퇴를 강요했기 때문에 나폴레옹도 어쩔 수 없이 후방으로 물러났다고는 합니다만... 글쎄요.  확실한 것은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아르콜레(Arcole) 다리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며 싸우던 나폴레옹은 1809년 도나우 강변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1796년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입니다.  저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기가 깃발을 들고 앞장 서서 다리 위로 돌격한 것처럼 저런 그림을 그리게 했지만, 정작 저 장면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의 부하 오쥬로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병력을 물린 덕분에, 더 이상의 퇴로가 끊긴 로바우 섬의 프랑스군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가득찬 부상병들도 아무 치료를 못 받았고 후송도 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 없이 살아남은 병력들도 아무런 보급품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벽 1시가 되어 더 이상 소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폴레옹은 쪽배를 타고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남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건너갔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 장교 1명을 함께 쪽배에 태워 후송시키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의문이 드는 것은 그의 절친 란조차도 깨끗한 물 한모금 없이 담요 한장 덮지 못하고 로바우 섬에 방치된 상태였는데, 적군 장교에게는 그런 인도주의적 아량을 베풀었다는 점이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패전 속에서도 '인도주의자 나폴레옹'이라는 허명을 얻을 선전거리를 만드려는 계략이 아닌가 의심도 듭니다만, 캄캄한 밤 수많은 병사들과 부상병들이 뒤엉킨 상황에서 부상을 입은 란을 금방 찾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바우 섬에는 비축된 식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르보의 수기에 따르면 그날 밤 많은 병사들은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많이 있던 죽은 군마의 고기를 잘라내어 흉갑 기병의 갑옷을 냄비 삼고 화약을 소금 삼아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화약을 고기에 넣는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고 건강에 해로울 것 같긴 합니다만, 어차피 당시 화약은 황과 숯, 그리고 질산칼륨으로 되어 있었고 질산칼륨 덕분에 화약은 짠 맛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당시 머스켓 소총 장전 방식은 병사들의 입 안에 화약이 항상 조금씩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니 병사들은 화약으로 짠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1815년 대포알 구멍이 뚫린 프랑스 흉갑기병의 가슴받이 갑옷이라고 구글에 나옵니다만... 진짜 그런 물건치고는 너무 상태가 좋네요.)


(흑색화약은 75%의 초석과 15%의 숯, 그리고 10%의 유황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석은 영어로 saltpeter라고 하지요.  짠맛이 난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맛을 본 적은 없습니다.)


5월 23일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트들을 이용한 부상자들의 소개가 시작되었고, 다리를 절단한 란도 이때서야 도나우 남안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는 하루 뒤인 24일에야 다시 연결되었지만, 많은 병사들은 결국 로바우 섬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공격하겠다고 결심하여 즉각 그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 이곳저곳에 보루와 포대를 설치하여 군사 요새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에라도 카알 대공이 강변으로 대포들을 끌고 와 로바우 섬에서 무쇠와 화약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벌였다면 어땠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재정비가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도나우 강 좌안으로의 재도강 준비를 방해받지 않고 착실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분명히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였습니다.  왜 카알 대공이 이 값진 승리를 100% 활용하여 22일 밤 프랑스군을 더 몰아 붙이지 않았는지, 또 왜 23일~24일에 로바우 섬에 포격이라도 가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마치 승리가 간절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의 후속 작전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이틀간의 전투가 너무나 치열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너무 컸고 또 병사들이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어지간한 전투에서 패배한 측의 (포로를 제외한) 전상자 비율은 총병력 대비 10~15% 정도가 상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은 왕가끼리의 영토와 세수를 위한 비즈니스의 연장일 뿐, 뭐 불구대천 원수지간끼리의 너죽고나살자식의 살육전은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면 물러나는 것이 상식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포로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총병력의 20% 넘는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비율이 무려 23%였습니다.  사상자 비율로만 본다면 아마 참담한 완패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장교들과 병사들의 충격은 말할 나위 없이 컸을 것이고, 그런 참극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본 카알 대공도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이 더 공격하지 않은 것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전례없이 승패가 뚜렷하게 드러났던 아우스테를리츠,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여기서 전상자 비율 계산할 때 포로는 제외했습니다.)


이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그 정도였는데, 진 프랑스군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입니다.  전투 후 전상자 숫자에 대해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상세히 포로를 합해 23,34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애매모호한 표현만 쓰며 정확한 전상자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개 오스트리아군과 비슷한 2만3천 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적은 병력을 동원했는데 적과 비슷한 수의 사상자를 냈으니, 프랑스군이 더 효율적으로 싸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측면에서 보면 무려 35%에 달했습니다.  함께 전장으로 나간 전우 3명 중 1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히 부대 단위로서의 기능을 잃을 정도의 대참패였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이긴 측이나 진 측이나 예전에 비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측이나 패배한 측이나 왜 이렇게 큰 인명 피해가 났는가에 대해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실 명백하고 단순합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 나폴레옹 전술의 요체는 기동전이었습니다.  적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하여 병력의 이동과 집결을 자유자재로 펼쳤고, 그를 통해 전체적인 병력은 적보다 더 적을지라도, 정작 전투 현장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 그 승리의 비결이었지요.  그러나 다리가 끊긴 도나우 강변에서는 그런 전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 적은 병력으로 무리하게 정면 중앙 돌파를 노렸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일방적인 전투가 아닌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결국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흔히 전장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야말로 천재에 가까운 인간이었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나이가 들면서 명민함이 떨어지고, 또 관록이 쌓이고 신분이 높아지면서 교만함이 커진 것이 이런 참극을 불러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돋보인 전투는 4월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1812년 러시아 원정때까지 나폴레옹의 지휘는 평범한 물량전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809년 4월 19일 이후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입니다.  베르티에의 실수로 인해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나폴레옹은 도착하자마자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단번에 뒤집고 카알 대공으로 하여금 대대적 후퇴를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전투가 1813년 이전까지는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보여준 거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양측의 피해가 커진 원인은 또 있습니다.  아마 1805년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스페른-에슬링 두번째 날, 란이 직접 지휘한 프랑스군 생-일레르 사단의 공격에 중앙을 돌파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평범한 정면 공격이라도 큰 전과를 거둘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잠깐 동안은 거의 돌파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까지 갔지만) 결국 버티어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이를 카알 대공의 개인적 용기와 리더쉽에 의한 승리라고 떠벌였지만, 수천 수만명의 병사들이 뒤엉키는 전장터에서 개인 하나가 발휘하는 용기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버티어낸 것은 오스트리아 병사 개개인이 1805년 패전 이후 카알 대공의 대대적 군 개편에 의해 많이 바뀐 상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오스트리아군은 일부 상비군 외에는 필요할 때마다 징집되어 동원되는 군대였고, 따라서 당시 전장에서 요구되는 복잡한 대형 변환 등이나 개인 전술 등에 숙련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전국민 개병제에 의해 징집되는 상비군 형태였으므로 훨씬 더 많은 훈련을 받고 또 많은 전쟁으로 인해 숙련된 군대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군 개혁은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즉 헝가리나 세르비아 등을 제외한 독일계 영토)에서의 전면적 징집제 실시 및 군단 제도의 도입 등 프랑스군을 거의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비록 귀족들로 구성된 지휘부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했으나, 병사들 하나하나의 자질 면이나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 사병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나 발칸 반도, 네덜란드나 체코 등에서 프랑스군과 싸울 때, 대체 자기들이 왜 이런 이역 만리에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에 맞서 마르쉐펠트에 펼쳐진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4년 전 비엔나를 점령할 때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를 톡톡히 털어가는 것을 본 뒤인지라, 여기서 또 그런 피해와 굴욕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동기 부여가 된 상태였지요.  나폴레옹은 이번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프랑스군의 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자체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을 시작하며, 나폴레옹은 '내 군대가 이렇게 잘 정비되고 수가 많았던 적이 없다'라고 스스로 자랑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닌 것처럼 프랑스군도 더 이상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는 불로뉴(Boulogne) 병영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영국 방면군을 모체로 하는 대부대로서, 그야말로 정예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들을 끊임없이 전장으로 끌고 다니며 소비하다, 결국 1807년 동프로이센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1809년 도나우 강변에 도착한 이들은 더 이상 다년간의 전투로 다져진 고참병들이 아니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신병들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또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동원된 나폴레옹 휘하 부대 중에는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 등 많은 독일 소국들의 군대와 북부 이탈리아군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강제로 동원된 동맹군들이 과거의 그랑 다르메처럼 열정적으로 싸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라이플 소총을 든 바이에른 유격병입니다.  이런 병사들은 특히 1812년 러시아로 떠나면서 대체 왜 자기가 머나먼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섞여, 결국 나폴레옹은 모두가 인정하는 나폴레옹 개인의 첫 패배가 이곳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적 신화를 자랑하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첫 패배 소식은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은 이미 이곳저곳에서 많이 패배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아일라우 전투도 사실상 나폴레옹의 개인적 패배였고, 과거 1797년 만토바 구원 작전에서 알빈치(József Alvinczi von Borberek)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패배한 적도 있었고, 시리아 아크레에서의 패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패배들은 황제가 되기 전의 일이거나, 저 머나먼 동유럽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럼프 못지 않게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조작질에 익숙한 선동가였으므로 아일라우 전투 같은 것은 '베니히센이 물러났으므로 나의 승리'라는 식으로 포장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수도 빈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진 이 대규모 전투의 승부는 도저히 숨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체면을 구긴 나폴레옹은 '최전선에서 먼저 물러간 것은 카알 대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승리다'라든가 '내가 진 것은 도나우 강에게 진 것이다, 오스트리아군 따위에게 진 것이 아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성질을 부렸습니다.  대체 이겼다는 것인지 졌다는 것인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스스로도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에게 졌다'라고 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나폴레옹이 과거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것은 운을 바라고 도박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수한 지휘관들이 통솔하는 잘 훈련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치밀한 지리 연구와 엄밀한 행군 속도 계산에 의해 병참과 병력 이동 계획을 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809년 5월 22일 아침, 그는 이미 여러번 끊어진 바 있는 로바우 섬 남단의 위태로운 부교가 언제든 또 끊어질 확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자만심과 내가 펼치는 작전인데 뭔가 당연히 행운이 따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부교는 또 끊어졌고, 나폴레옹은 그 댓가를 란의 목숨과 패배로 치루어야 했습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5에서 악당 솔로몬 레인이 이단 헌트(톰 크루즈)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지요.


Ethan Hunt is a gambler. And one day his luck will run out.  (이단 헌트는 갬블러야.  언젠가는 그의 운빨도 끝나게 되어 있어.)



나폴레옹은 톰 크루즈와는 달리 갬블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갬블링을 했고, 그러자마자 운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분명 이 전투는 카알 대공의 승리였고 나폴레옹의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전쟁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 의미있는 승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를 시작할 때 프랑스군의 도강을 중간에 격파하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작전을 쓰지 않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도강을 다 마친 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이려 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시의 국가적 역량으로 볼 때, 프랑스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격차는 너무나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도강 중간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작은 패배를 안겨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럴 경우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더 많은 준비를 해서 다시 전투를 벌이려 할 것이 틀림없으며, 그럴 경우 무의미한 희생만 치를 뿐 오스트리아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알 대공의 목표는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유리했는데, 카알 대공의 생각에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이 패배를 인정할 만한 정정당당한 전투를 벌여, 어떻게든 거기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바우 섬 남단의 부교가 끊어지는 순간,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지게 되었지만 핑계거리를 찾았던 것이고, 카알 대공이 원하던 후회없는 정정당당한 전투는 날아가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카알 대공의 그런 생각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도나우 강 탓으로 돌렸고, 그에게는 구겨진 그의 체면을 세워줄 승리가 간절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바그람에서 마주 서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의 역량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다리부터 튼튼히...)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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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16 23:46

랍의 신참 근위대가 에슬링에서 철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거부하고 분전하여 에슬링을 탈환한 덕분에, 오후 5시 경부터 전투는 육박전에서 포격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대포에서도 폭발탄을 일부 쓰기는 했으나, 도화선에 의한 폭발탄이라 불발탄도 많았고, 또 흑색화약을 쟁여넣은 당시 폭발탄(shell 또는 bomb)은 요즘 수류탄 정도의 폭발력 밖에 없었으므로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포탄은 글자 그대로 대포알(roundshot)이었고, 이것들은 속까지 쇳덩어리로 꽉 찬 것이라 병사들이 이런 것에 목숨을 잃으려면 직격을 당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포탄 종류들입니다.  Chain-shot이나 bar-shot 등은 주로 해군에서 쓰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고폭약을 잔뜩 탑재하여 엄청난 위력의 파편과 화염을 뿌리는 포탄에 비하면 별 것 아닌 대포알이었지만, 당시 병사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장교들의 지휘 하에 촘촘한 대오를 이루고 서 있는데, 어디선가 쐐액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낫이 날아와 바로 옆에 서 있는 친구를 순식간에 피떡으로 만들며 저 뒤로 낚아채가는 것 같았으니까요.  당시 전투에서 부교를 지키고 있던 근위대 소속 쿠아녜(Coignet)라는 이름의 병사의 수기에도 당시의 대포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병사들이 3열 횡대로 서 있었는지, 한발의 대포알에 병사들이 3명씩 나가 떨어졌다고 쿠아녜는 적고 있지요.  무엇보다 대포알들이 주는 공포의 본질은, 그것들이 확실한 죽음을 가져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쿠아녜의 수기에는 그런 두려움에 대해 허세를 부리며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는 근위대 병사들의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쿠아녜의 수기는 '쿠아녜 대위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쿠아녜는 원래 문맹의 농장 일꾼으로 자라났다가 군에 입대한 뒤 글을 배우고 부사관을 거쳐 장교로 승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쓴 수기는 철자나 문법 등이 많이 틀려서, 현대 프랑스인이 봐도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다소 읽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란에게 그런 대포알의 공포가 직접 찾아든 것은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저녁 무렵, 그런 대포알들만 휙휙 날아다닐 뿐 전투 자체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한숨 돌릴 상황이 되자, 그는 가까운 친구였던 푸제(Pierre-Charles Pouzet) 장군과 함께 서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푸제는 란이 이제 막 소위 나부랭이가 되어 군복도 제대로 못 갖춰 입은 혁명군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던 남부 프랑스 미랄(Miral) 시절부터 함께 복무하던 선임 부사관 출신의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그 시절부터 란에게 존경받고 또 란의 사람됨을 알아봐준 오랜 친구였지요.  그런 전도유망한 후배를 둔 덕분에 푸제는 장군까지 승진했고, 평상시에도 란은 고민되는 일이 있을 경우 이 옛친구와 상의를 하곤 했습니다.  푸조의 머리통이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3파운드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것은, 그가 란과 불과 2~3m 거리를 두고 서서 이야기하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옛친구의 피와 뇌 조각은 란의 몸에도 튀었습니다. 




(이건 나폴레옹 시대보다 수십년 앞선, 7년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4-파운드 포의 모습입니다.  같은 4-파운드 포라도 장포신이 있고 단포신이 있었는데, 그 크기와 포탄의 크기는 저 그림에 포함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림 소스는 http://crogges7ywarmies.blogspot.kr/2012/01/7yw-artillery-scale-drawings-part-2.html 입니다.)




란은 정말 많은 전투에서 온갖 끔찍한 광경을 실컷 본 바 있는 역전의 용사였으므로 피나 처참한 시체를 본다고 겁을 먹을 사람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초 전까지 자기와 이야기 중이던 소중한 친구가 바로 눈 앞에서 머리없는 시체가 되어버리는 광경은 란마저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무척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근처에 쓰러진 통나무로 가서 앉았고,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앉아있었습니다.


당시 포병에게 가장 좋지 않은 환경은 비가 와서 질퍽해진 진흙밭이었습니다.  젖은 진흙땅은 포병 특성상 무거운 대포와 탄약차를 이동시키기에도 불리했지만, 적군에게 주는 2차 피해도 최소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포탄은 원시적인 도화선을 붙인 폭발탄과 속까지 쇳덩어리로 된 대포알이었는데, 두 탄종 모두에게 진흙은 최악이었습니다.  폭발탄이 진흙밭에 떨어지는 경우 도화선이 진흙에 파묻히면서 불발탄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포알의 경우, 설령 거리 계산이 잘못 되어 적군의 대오보다 훨씬 앞에 포탄이 떨어져도, 굳은 대지라면 포탄이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며 그대로 적의 대오를 덮쳤습니다.  그런 경우 탄속이 크게 저하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적군의 다리나 허리를 박살내는데 필요한 운동 에너지는 아직 충분했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이유 중 하나로, 포병을 중시했던 나폴레옹이 당장 전투를 시작하지 않고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젖은 땅이 마르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5월 22일 저녁,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그 순간,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의 대지는 말라 있어서 대포알이 튀어다니기에 딱 좋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 시리즈 중 한편에 이런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서 한참 동안 그렇게 대지 위를 튕기며 날아온 프랑스군의 작은 대포알 하나가 눈에 띄게 느린 속도로 통통 튀어오자, 어린 북치기 소년병 하나가 다리를 뻗어 멈춰 세우려고 하다가 그만 발목이 날아가버리지요.  소년병이 고통과 놀라움에 쓰러져 엉엉 울자, 나이든 부사관이 뛰어와 '그런 포탄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라며 야단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그린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박격포탄이 하늘 위로 흔들흔들 날아오는 모습을 독일군 병사들이 보고 있다가 날아오는 방향이 이쪽이다 싶으면 얼른 도망쳐 피하는 장면이 묘사된 것을 보면,  나폴레옹 시대의 포탄 중에서 그렇게 힘을 다한 것들은 통통 튕기며 날아오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5월 22일 저녁, 푸조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것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의 3파운드 포 하나가 에슬링 남서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 방향에서 발사되었습니다.  이 작은 대포알이 애초에 노렸던 목표물이 무엇인지는 알 방법이 없으나, 아마도 에슬링 외곽에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을 노렸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포탄은 너무 높게 조준이 되었는지,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에슬링을 지나 1km 이상을 날아서 도나우 강변의 평탄한 평원을 통통 튀며 가로질렀습니다.  대지 위를 한번 튕길 때마다 포탄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그 운동 에너지가 거의 소진되어 얼마 못가 땅 위에 그냥 떨어져 멈출 때 즈음, 이 포탄은 마침내 거물급 목표물을 찾았습니다.





(저 위에 프랑스군 4-파운드 포의 크기 그림을 올려놓았습니다만, 오스트리아군의 3-파운드 포 및 그 포탄은 얼마나 더 작았는지 이 그림을 보고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역시 그림 소스는 http://crogges7ywarmies.blogspot.kr/2012/01/7yw-artillery-scale-drawings-part-2.html  입니다.)




란은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이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저주받은 3파운드짜리 포탄은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란의 두 다리가 교차하는 무릎 부분을 정통으로 때렸습니다.  운동 에너지가 거의 소진된 상태에서 맞은 포탄인지라 다리가 절단되지는 않았으나 앉아있던 란을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깜짝 놀란 부관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는데, 란은 아직 부상의 심각함을 모르고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부관들에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란의 왼쪽 무릎 윗부분은 심각한 부상을 입어 너덜너덜해진 상황이었고, 오른쪽 다리도 꽤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설 상황이 아니었지요.  당황한 부관들은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구해오고 푸조 장군의 시체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겨와 그것으로 임시 들것을 만들어 란을 강변의 야전 진료소로 데려갔습니다.  란은 그 와중에도 푸조 장군의 시체에서 망토를 벗겨온 것이 불길하다며 몹시 언짢아 했다고 합니다.


부교 앞에는 프랑스군 수석 외과의사인 라리(Dominique Jean Larrey)가 다른 군의관들과 함께 부상병들의 팔다리를 마구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실려온 이 거물을 보고, 라리는 동료 의사들을 불러 모아 즉석 의료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라리는 나폴레옹의 최측근이자 자신과도 친구 사이인 란의 다리를 다른 일반 병사들처럼 마구 잘라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일부 의사들은 상처를 본 뒤 양쪽 다리를 다 잘라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주장했으나, 라리는 왼쪽 다리만 잘라내도 될 것 같다고 주장했고, 마침내 다른 동료들의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문제는 아무도 집도를 하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태가 위중한 심각한 부상이라, 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다들 속으로 판단했던 것이지요.  결국 라리 본인도 내키지 않는 손을 익숙하게 놀려 1분 30초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해냈습니다.  란은 절단 수술 후 로바우 섬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라리입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앰뷸런스를 전장에서 운용한 사람으로도 유명하고, 워털루에서 웰링턴 공작이 그의 앰뷸런스를 향해서는 대포를 쏘지 말라고 지시하여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 이후 몰래 프랑스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으나, 프로이센군에게 체포되어 즉결 처형될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813년 프로이센군 블뤼허 원수의 아들을 구해주고 치료해준 인연 덕분에 블뤼허 원수에게 특별 사면되어 식사 대접과 함께 여비까지 지급받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집필 활동만 했으나 나폴레옹 사후 다시 의료계로 복귀해서 명성을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역시 의사입니다.  이과생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가세요.)




로바우 섬에서는 나폴레옹이 다른 원수들과 회의를 마무리하던 중에 란의 부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란에게 달려갔고, 그는 란 옆의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란의 손을 잡았고, 란의 피가 나폴레옹의 바지를 적시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두 오랜 친구 사이의 만남은 아마 상당히 감동적인 장면이었을텐데, 정작 말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란이 부상과 수술의 쇼크로 인해 긴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란의 옆에 무릎 꿇은 나폴레옹입니다.  실제 환경은 저것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고 합니다.)




5월 22일 밤 ~ 23일 아침까지, 로바우 섬에서 란은 원수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치료와 간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써놓으니 마치 뭔가 대단하고 숭고한 일 같습니다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전투가 패배로 끝나게 된 이유가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쾌속 진격을 강조하다보니 다부의 병력이 로바우 섬으로 건너오기도 전에 부교가 끊어진 것이었지요.  승리에 필요한 병력조차 못 건너올 상황이었으니, 부상병들을 위한 기본적인 보급품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란이나 일개 졸병이나 모두 공평하게 치료는 커녕 깨끗한 식수조차 얻지 못하고 밤새도록 고통과 갈증, 추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5월 날씨답게 낮에는 상당히 더운 편이었으나 밤이 되자 담요도 없이는 매우 쌀쌀하게 기온이 내려가 담요 없이는 밤을 보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란은 보트 편으로 도나우 강 우안 쪽으로 후송되었습니다.  란의 부관들 대부분은 쾌적한 비엔나로 돌아가 전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크고 작은 부상의 치료를 받았으나, 란은 로바우 섬 건너편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의 어느 양조업자의 집 2층을 병상을 꾸몄습니다.  이는 계속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나폴레옹의 사령부와, 거기 있는 나폴레옹의 수석 외과의인 라리 곁에 란을 두고 보살피려는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려는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양조업자의 집은 지대가 낮고 습기찬 곳이었고, 바로 옆에 마굿간도 붙어 있어서 말똥 냄새가 퀴퀴한 곳이었습니다.  결코 환자에게 좋은 공간이 아니었지요. 


이곳에서 란은 매일 나폴레옹과 라리의 방문을 받으며 집중 간병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양조업자의 집 주변은 충성스러운 그의 척탄병 부하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장사진을 이루었고, 여러 고위 장교들과 친구들이 병문안차 그의 병상을 찾았습니다.  란은 나폴레옹에게 어서 빨리 회복하여 군에 복귀하겠다고 했고, 친구들에게는 향후에는 마차를 타고서 부하들의 돌격을 지휘하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비엔나에는 프랑크(Franck) 박사라는 의족 전문 의사가 있었는데, 란은 어쩌면 그 사람이 만들어준 의족을 달고 걷거나 말을 탈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부하들에게 란의 상태는 희망적이며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치기어린 군인의 허세에 불과했습니다.  란도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양조업자 집에 온지 2~3일이 지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당시 부상자에 대한 의료 기술은 기본적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즉, 화살촉이나 총알 등 이물질을 수술로 뽑아내고 심하게 망가진 팔다리를 잘라낸 뒤, 부상병의 몸이 세균 감염과 싸워 이기길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당시엔 혈관 봉합 수술 기술도 없었고 세균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으므로 수술 도구를 끓는 물이나 알코올로 소독하지도 않았으니, 간단한 수술도 결국 괴저(gangrene) 또는 패혈증(blood poisoning)으로 인한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란의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은 패혈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열이 발생하자, 당시로서는 매우 비싼 약재였던 남미산 기나수 껍질(cinchona bark)로 만든 약, 즉 키니네(quinene)를 투약하는 등 나름 애를 쓰기는 했으나, 키니네는 말라리아로 인한 고열에나 효과가 있었을 뿐 패혈증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기나수 껍질입니다.  당시 영국이 대륙봉쇄정책을 펼치던 프랑스에 대해 유일하게 금수품목으로 정해놓은 것이 바로 목화솜과 이 기나수 껍질일 정도로, 전략 군수품에 해당하는 귀한 물자였습니다.)




란이 나폴레옹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같은 말에 대한 논란은 바로 이 며칠 중 하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책의 형태로 남겨진 것은 가시쿠르(Cadet de Gassicourt)라는 군종 약사가 남긴 회고록에서였는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도 참전했던 이 약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란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과감한 직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부인과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네.  내가 자네를 위해 싸우다 죽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자네의 체면 때문에라도 내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 자네의 의무일테니까 말일세.  지금 내가 하는 비판때문에 자네가 내 가족을 홀대할 까봐 두렵지도 않네.  자넨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어.  그것 때문에 자네는 절친을 잃고 있네.  그래도 자네는 변하지 않겠지.  자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망이 결국 자네를 망칠거야.  자넨 그럴 필요가 있지도 않은데, 신경도 별로 쓰지 않고 후회도 없이 자네를 위해 일하는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자네의 그런 배은망덕이 자넬 존중하는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걸세.  자네 주변에 남은 것은 아첨꾼들 뿐이야.  자네 친구들 중에는 진실을 말하려는 자가 하나도 없다네.  결국 자네는 배신당해 버림받을걸세.  서둘러 이 전쟁을 끝내게.  그게 자네 부하 장군들의 바람이고, 자네 백성들의 바람이야.  그러면 자네의 권력이 더 강해지지는 않겠지만, 더 사랑받는 군주가 될걸세.  내 이런 말들을 용서하게.  이건 자네를 정말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까."


가시쿠르의 회고록은 부르봉 왕가의 복위 뒤에 나온 것이니, 어쩌면 부르봉 왕가의 입맛에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나폴레옹의 명예를 실추하는 내용을 집어넣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란과 함께 하며 그의 병구완을 했던 그의 부관 마르보의 회고록에 따르면 란이 나폴레옹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상체를 부축했던 것이 바로 자기인데, 란이 그런 말을 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하며 다 거짓말이라고, 란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충성스러웠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실제로 란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해도 나폴레옹은 그 충언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걸 끝까지 숨겼을 것입니다.


란은 마지막 며칠 동안은 거의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고통에 시달리다, 부상을 입은지 9일만인 5월 31일 새벽 5시 45분 경 사망했습니다.  란이 사경을 헤매전 며칠 동안에도 나폴레옹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매일 란을 찾았습니다.  5월 30일 저녁, 나폴레옹은 라리로부터 이제 란은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상심하여 다시 란의 병상을 찾았으나, 란은 혼수 상태였으므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나폴레옹은 아침식사를 들기도 전에 다시 란의 곁을 찾았으나, 이미 란은 새벽에 사망한 뒤였습니다. 


그 양조업자의 집을 둘러싼 척탄병들의 통곡이나 란의 친구들의 상심을 묘사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무척 아끼는 것처럼 말했고 또 실제로도 그런 편이었지만, 정작 전장에서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느냐 승리를 거두느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경우 언제나 서슴지 않고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그의 부하 원수들은 나폴레옹을 평가할 때 '무척 유능한 사람이었으나 병력의 보존에는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였지요.  그런 그에게도 란의 상실은 매우 심각한 타격이었습니다.  냉혈한 나폴레옹도 란의 죽음을 알게 된 뒤 사령부로 돌아와 아침식탁에 앉아서는 이렇게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모든 일은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는구나 !"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how-history-is-written-marechal-lannes-last-words-to-napoleon/

https://www.gutenberg.org/files/20483/20483-h/20483-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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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09 18:08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위기에서 건져낸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로서, 그는 투박한 독일 사투리가 들어간 프랑스어를 쓰는 알사스(Alsace) 출신이었고, 그가 그 위기의 순간에서 프랑스군을 하드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덕분이었습니다.


장 랍(Jean Rapp)은 알사스 지방 콜마르(Colmar) 시의 시청 수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카톨릭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소수라고 할 수 있는 독실한 프로테스탄트로서, 그의 아들이 장차 제대로 교육을 받고 목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장 랍은 용기와 열정으로 가득찬 전형적인 군인 체질이었던지라,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17살이 되자 프랑스 기병대에 사병으로 자원 입대해버렸습니다.  그의 군대 생활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었습니다.  입대한지 5년 만인 1793년 처음으로 검상과 총상을 입은 이후 군 생활 내내 25번의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랍의 고향인 콜마르 시에 세워진 그의 동상입니다.  여기에는 'Ma parole est sacrée'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나의 약속은 신성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과 용기를 통해 사병에서 부사관으로, 부사관에서 장교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그로 인해 터진 전쟁 덕분이었지요.  그러던 그에게 출세길을 열어준 것은 바로 드제(Louis Desaix) 장군이었습니다.  독일 전선에서 드제의 눈에 띈 그는 드제의 참모진으로 발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위로 승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이집트까지 드제를 따라 갔었고,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여기서 마멜룩 부대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먼저 귀국한 이후 드제와 함께 뒤늦게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귀국한 그는, 드제와 함께 마렝고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동아줄인 드제 장군의 전사라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랍의 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의 드제를 은혜를 잊지 않았고, 드제와 관련된 인물들을 대거 자신의 심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랍도 그렇게 나폴레옹의 참모진이 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부인인 조세핀의 눈에도 들게 되어 나폴레옹의 궁정에서 더욱 입지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의 인연을 살려 프랑스군에 마멜룩 기병대를 창설하는 일을 주도했었는데, 1805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그는 나폴레옹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그 마멜룩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싸워 승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검과 (또 부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는 머리를 한 채 나폴레옹에게 포로로 잡은 볼콘스키(Repnin-Volkonsky) 대공을 데리고 가 승리를 보고했는데, 그 장면은 제라르(Gerard)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쟁화를 통해 역사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랍에게 돈이 충분했다면 아마 이 그림을 구매하여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왼쪽의 흰 제복을 입은 사람이 볼콘스키  대공이고, 오른쪽의 모자를 쓰지 않은 인물이 랍입니다.  랍의 오른손목에 끈으로 묶어놓은 군도가 부러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5월 22일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끊어진 부교 앞에서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이, 남은 예비 병력 전부인 신참 근위대 2개 대대를 이끌고 갈 지휘관으로 랍을 고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 이때 나폴레옹이 내린 명령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그는 무통 장군이 지휘하는 근위대 5개 대대가 오스트리아군과의 접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여, 그 5개 대대를 무사히 부교 쪽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기병 장교로 살며 이미 몸에 수많은 생선가시 모양의 흉터를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던 랍을 그런 소극적 구출 작전을 수행할 지휘관으로 고른 것은 나폴레옹의 실수였습니다.  


랍은 무통 장군이 로젠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에슬링 마을에 도착할 때, 이미 무통 장군의 근위대를 구출해 무사히 후퇴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남자답지 못한 구출 및 후퇴 명령을 정면으로 위배하여 도착하자마자 휘하 병력을 전개하여 치열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랍과 무통의 병력은 신참 근위대 7개 대대로서, 프랑스군의 정예 중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부대였습니다.  비록 패배를 눈 앞에 둔 상황이고, 무통 장군이 받은 명령도 부데 사단의 구출이라는 소극적인 것이라서 부대의 사기가 높은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피끓는 랍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로 맹렬한 공격을 지시하자 상황이 확 바뀌었습니다.  근위대는 왜 자신들이 프랑스군의 꽃이라고 불리는지 당당히 증명을 해보였습니다.  그들은 로젠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을 마구 밀어붙였고, 그 기세에 오스트리아군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도 어이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공격하던 랍이 당황할 정도였지요.


(랍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의리의 사내답게 나폴레옹의 이혼 시에도 자신과 친했던 조세핀 편을 들었고, 급기야 핑계를 대고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의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나폴레옹의 신임을 잃게 되지요.  그럼에도 그는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했고 백일천하 때에도 나폴레옹 편에 서는 등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위대는 정예부대였고 또 랍은 용맹무쌍한 지휘관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오스트리아군을 쉽게 꺾을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알고보면 랍이 이끈 근위대 공격은 그야말로 '나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그 전날 아침부터 고된 행군과 치열한 전투로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도 궁지에 몰린 상태였지만, 도무지 붕괴되지 않는 프랑스군의 저항 때문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몰려온 무통 장군의 근위대에 대해 그나마 잘 싸워준 것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다고 무통의 부대와 싸우는 것도 죽을 맛이었는데 전혀 새로운 사기를 뽐내는 근위대가 추가로 덤벼들자 마침내 오스트리아군도 우르르 무너진 것이었지요.


정말 승리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준다더니, 정말 그랬습니다.  이렇게 뜻 밖에 에슬링을 재탈환하게 되자, 중앙의 란을 압박하던 오스트리아군도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좌우의 아스페른과 에슬링이 프랑스군 손에 있는 이상, 중앙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가면 측면이 프랑스군에게 노출되어 큰 곤경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중앙이나 아스페른에서나, 오스트리아군도 지치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보병을 물리고 포병을 앞세우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로써 프랑스군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쉴사이 없이 날아드는 오스트리아군의 크고 작은 대포알에 프랑스군이 두세명씩 피떡이 되어 날아가버리긴 했지만, 이들은 대오를 유지한 채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부교의 수리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나폴레옹은 잃어서는 안될 것을 잃게 됩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_Rapp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people_rap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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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02 21:19

군인의 목표는 승리와 전진이며, 이는 이룩하기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바로 패배 수습과 질서있는 후퇴입니다.  나폴레옹도 '모든 문제는 승리하면 다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패배할 경우 없던 문제까지 수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5월 22일 11시, 부교가 수리 불가 상태까지 붕괴된 것이 확인되자, 나폴레옹은 공세에 나섰던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합니다.  그 명령에 의해 가장 곤란해진 것은 바로 란의 제2 군단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그들은 벌판으로 진격하지 않고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단 현 상황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란의 제2 군단은 중앙 전선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장 깊숙히 진격해 들어갔었지요.  이제 그들은 진격한 거리만큼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는데, 적에게 등을 보인 채로 허허벌판을 행군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뒤는 도나우강이 가로 막고 있었으므로, 이 후퇴 과정에서 대오가 무너지면 뒤를 쫓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글자 그대로 대학살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란에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은 그다지 거세지 않았습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카알 대공이 파악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린데다,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은 주로 포병에 의한 무자비한 포격에 의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에 거세게 시작되었던 란의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중앙부가 거의 붕괴된 상태였던지라,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의 후퇴를 깨닫고 추격을 할 때도 현장에 있던 호헨촐레른의 보병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의 친위 척탄병 부대를 불러와야 했으므로 추격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틈을 이용해 란의 제2 군단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일단 아침에 출발했던 밭두렁 뒤로 물러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후퇴 과정에서 말에서 내려 자신의 발로 보병들과 함께 걸으며, 호시탐탐 프랑스 보병 연대들의 붕괴를 꾀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했습니다.  란은 침착하게 웃으며 휘하 병사들에게, 9년전 마렝고 전투에서도 자신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해질녘 최후의 승자는 프랑스군이었다면서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중앙부와 에슬링을 방어해야 했던 란은 먼저 휘하 제2 군단의 대부분을 로바우 섬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부교 쪽으로 보낸 뒤, 지휘관을 잃은 생-일레르 사단 하나만 이끌고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를 연결하는 밭고랑을 끼고 방어선을 쳤습니다.  위태위태한 부교 하나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철수해야 하는 전체 프랑스군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아스페른과 에슬링으로 연결되는 전선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스페른은 마세나가 아침부터 틀어쥐고 있었고, 에슬링은 계속 부데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프랑스군을 도나우 강의 물결에 쳐박으려는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좌익인 아스페른의 마세나는 프랑스군 내 제2인자다운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역시 2대1의 수적 열세를 안고 싸웠는데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별로 밀리지 않은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열정과 투지가 보여준 결과였습니다.  그 전날의 일이긴 합니다만, 최근 징집된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유혈이 낭자한 살육전을 보고 겁에 질려 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벌컥 화를 내며 그 특유의 니스(Nice) 사투리로 '그럼 걔들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깃발을 보여줘라'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아군이 밀리는 현장에 귀신처럼 나타나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참된 현장 지휘관이란 어떤 것인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아스페른은 비록 조금씩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는 부분들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저녁 때까지도 프랑스군은 아스페른의 일부나마 끈질기게 붙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지휘를 받지 않고도 전쟁 자체를 지휘할 만한 역량이 있는 인물로서, 나폴레옹 휘하의 1.5인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왕국 소속이었던 니스의 어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상선의 심부름꾼으로서 남미까지 항해를 하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백일천하 때 그는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의 마세나의 모습입니다.)




에슬링에 대한 공격도 치열했습니다만, 거기를 지키는 부데 사단의 방언는 더욱 치열했습니다.  부데와 그의 병사들은 에슬링 마을의 서쪽 끝부분에 있던 거대한 곡물 창고를 주방어선으로 삼고 맹렬히 저항했습니다.  에슬링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로젠베르크가 이끌었는데, 그는 다스프레(Constantine D'Aspre) 장군의 헝가리 척탄병 4개 대대 (사실상 1개 사단)을 투입하여 5번이나 반복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기진맥진하고 수가 줄어든 부데 사단은 이를 5번 모두 격퇴해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헝가리 척탄병들이 공격 명령을 거부할 정도였지요.  결국 로젠베르크는 휘하 군단 전체를 동원해야 했는데, 이 공격에서도 에슬링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부데 사단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사단 하나가 군단 전체를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에슬링 마을 건물들은 하나 둘씩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넘어 갔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최후의 방어 거점이던 곡물 창고쪽으로 점점 밀리게 되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자 중앙부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의 맹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대포알을 신나게 날려보낸 뒤, 압도적인 수의 보병 대오를 파도처럼 흘려보냈습니다.  이를 맞이하는 란은 병력의 열세는 물론이고 탄약까지 충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작부터 열세였던 그의 포병대는 이미 포병들의 사망과 부상으로 와해된 상태였고, 어차피 탄약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밭두렁 뒤에서 침착하게 기다리다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뒤에 갑자기 일제 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했습니다.  그의 뒤 머지 않은 곳에는 나폴레옹 본인이 근위대 병력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란의 병사들은 나폴레옹 버프 효과를 보고 있었지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아마도 나폴레옹 근위대가 일렬로 늘어서서 지키고 있는 교두보 뒤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후퇴하고 있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페르낭 코르몽 Fernand Cormon이라는 화가가 그린 것인데, 이 분은 1845년 생으로서 이 그림은 실제 전투 이후 거의 70년이 지난 1878년에 그려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라는 인간은 자신이 패전한 전투에 대해 그림을 발주할 정도로 팩트를 존중하는 위인은 아니었지요.)




에슬링 마을이 거의 다 함락되고, 부데 사단의 잔여 병력이 마침내 곡물 창고 안에서 포위된 채로 농성 중인 상황이라는 보고가 들어오던 오후 3시 쯤, 엎친데 덮친 격의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과 로바우 섬을 연결해주던 짧은 부교까지도 무너졌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젠 마세나와 란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퇴로까지도 끊긴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침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별의별 경험을 다 겪어본 백전 노장이었으니까요.  그는 로바우 섬으로의 퇴로를 연결해줄 다리 수리는 부교병들에게 맡겼으므로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에슬링이었습니다.  지금 프랑스군이 버티고 있는 것은 부교의 교두보를 좌우에서 지켜주는 아스페른과 에슬링이라는 두 방어 거점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질 경우, 부교의 교두보 지점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자연스럽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에슬링이 무너진다면 부교가 돌다리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조르쥬 무통 장군입니다.  이 분은 그렇게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운 적은 없었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음 해인 1810년 이 양반을 로바우 백작(comte de Lobau)으로 봉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고, 백일천하 때도 나폴레옹 편에 섰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에슬링 구원에 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에슬링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그 쪽 방면의 병력이 질서있는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보통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두는 예비대인 친위대 중 5개 대대를 무통(Georges Mouton) 장군의 지휘 하에 에슬링으로 급파했습니다.  친위대 중 남은 것은 2개 대대 뿐이었으므로 이는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5개 대대라고 해봐야, 당시의 편제상으로 보면 1개 사단이 조금 넘는 병력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통 장군의 공격은 훨씬 수적으로 우세한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막혀 실패로 돌아갔고, 부데 사단은 곡물 창고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부데 사단의 구출은 고사하고, 이젠 무통 장군이 이끄는 친위대 대부분까지 로젠베르크와의 교전에 붙잡혀 철수가 어렵게 된 셈이었으니, 나폴레옹의 모험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습니다.





(루이-프랑수와 르죈 대령입니다.  르죈이라고 하면 '화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 맞습니다.  이 분은 화가이자 군인이었고, 나폴레옹의 후원한 많은 전쟁화 중 여러개가 이 양반 작품입니다.)





(르죈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라미드 전투입니다.  나중에 런던 피카딜리의 Egyptian Hall에서 이 작품을 포함한 그의 전쟁화 몇 편을 전시할 때 그림을 좀더 자세히 보고자하는 사람들이 하도 몰려들어 그림 보호를 위해 접근 제한 레일을 그림 앞에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남은 것은 정말 친위대 2개 대대 뿐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에슬링에 투입한다면 중앙부의 오스트리아군과 부교 사이에는 정말 탄약도 힘도 병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란의 생-일레르 사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겁에 질린 채 철수해온 란의 제2 군단 잔여 병력 중 아직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부 병력 뿐이지요.  나폴레옹은 란에게 르죈(Louis-François Lejeune) 대령을 보내 병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르죈이 란을 찾아냈을 때, 란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아직도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밭고랑 뒤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약 500명 가량의 병사들 뿐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말을 전하는 르죈에게 란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내게 남은 병력은 자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네.  그리고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최후의 1인이 쓰러질 때까지니까, 가서 황제께 그렇게 전하게."


르죈의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란을 믿었나 봅니다.  그는 참모들 중 랍(Jean Rapp) 장군에게 남은 2개 대대의 친위대를 맡기며 에슬링에 가서 거기 묶인 부데 사단과 무통 장군의 친위대를 빼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남은 패잔병들과 함께 그야말로 도나우 강변 좁은 돌출부에 옹기종기 몰린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합니다만, 전투가 종료된 이후 카알 대공은 프란츠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생애 처음으로 전투에서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발버둥쳤다'라고 썼는데, 최소한 이때의 상황에서는 카알 대공의 과장된 보고도 그렇게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s://en.wikipedia.org/wiki/Louis-Fran%C3%A7ois_Leje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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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26 21:14

5월 22일 오전 8시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의 안색은 상당히 침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영웅다운 침착함이다 아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을 못한 것이다 등등 말이 많습니다만, Harold Parker의 'Three Napoleonic Battles'라는 책의 주석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날 부교는 한번이 아니라 두번 끊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7시에 작은 규모로 끊어졌고 이는 곧 수리될 수 있었으나, 곧 이어 9시에는 도저히 그날 중으로는 수리가 안 될 지경으로 크게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전 8시 경 나폴레옹이 받은 보고는 그 첫번째의 대수롭지 않은 파손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책과 인터넷 사이트마다 몇 시 경에 다리가 끊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각기 다른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도 제각기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교, 정확하게는 프랑스군의 도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도나우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을 연결하는 긴 부교가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교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그다지 튼튼한 물건이 아닌데다, 든든한 부교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품, 즉 닻이 없는 상황에서 포도탄과 어부들의 통발로 대충 만든 대용품으로 건설한 부교이다보니, 그냥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슈바르츠발트에서 예년보다 일찍 눈이 녹으면서 평소라면 6월에나 있을 도나우 강의 범람이 일찍 시작되어 물결이 무척 거셌고, 또 뿌리 뽑힌 나무나 나무가지 더미 같은 잡동사니들도 많이 떠내려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닻이라는 물건은 자동차에서 브레이크처럼 중요한 물건입니다.  특히 부교처럼 항해보다는 정박이 중요한 임무인 보트에게 있어서, 닻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품이었습니다.  잔잔한 물결에서는 어부의 통발에 쇳덩이를 대충 쟁여 넣은 것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센 물결에서는 튼튼한 닻이 꼭 필요했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부교가 끊어진 것은 카알 대공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말려든 결과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적이 절반 정도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이 양분된 상태에서 각개격파하는 것은 모든 지휘관이 꿈꾸는 일인데, 강이 그렇게 적을 양분해주니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적이 부교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는 경우 그 부교를 끊어놓는다면 이미 강을 건넌 적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카알 대공이 일부러 도나우 강 좌안을 비워둔 뒤, 미리 준비해둔 통나무나 무거운 돌을 실은 보트들을 급류에 떠내려 보내서 부교를 파괴했다는 것이 무척 그럴싸한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5월 22일 운명의 아침에 부교가 크게 부서진 것은 확실히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대형 보트 때문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보트에 큼직한 물레방아를 통째로 실은 보트 하나가 급류에 떠내려 와 프랑스군의 부교를 들이 받았고, 이로 인해 부교를 구성하던 여러 척의 바지선이 떠내려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카알 대공의 작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부교를 끊어서 다부의 제3 군단이 도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카알 대공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 달갑지 않은 전쟁은 카알 대공이 애써 키워놓은 군단들을 재정 문제로 인해 해체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국 땅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불리한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에서 바라는 바는 나폴레옹과 건곤일척 후회없는 일전을 벌여 망하든 흥하든 추가적인 전투가 없도록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교가 끊어져 다부의 제3 군단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나폴레옹은 패배한다고 해도 부교 핑계를 대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다시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희생을 동반하는 제2, 제3의 전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을 텅 비워놓았던 것은 뭔가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폴레옹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안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설령 오스트리아군이 의도적으로 보트를 떠밀어 보냈다고 해도, 많은 섬이 얽혀 여러 개의 지류로 나누어지는 넓은 도나우강에서, 그것도 우안이 아니라 좌안에서 떠내려보낸 보트가 주변 섬 모래톱에 좌초하지 않고 정확하게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 사이의 지류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부교를 끊는 것에 전체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보트 한두 척만 떠내려 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당한 크기의 대형 보트를 대규모로 떠내려 보냈을텐데, 프랑스군의 기록에도 오스트리아군의 기록에도 그런 대형 보트의 대규모 함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상류에 있던 일부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부교를 보고 즉흥적으로 떠내려보낸 보트 몇 척 중 하나가 럭키 스트라이크를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좌안에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우안에서 보트 한 두척을 떠내려 보내면서 그것이 정확하게 로바우섬 서쪽 지류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요행수를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말이 있지요.  1931년에 발행된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라는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통계치에서 비롯된 이 법칙은, 산업 현장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생기는 큰 사고가 하나 생길 때, 평균적으로 300여건의 부상자없는 작은 사고와 29건의 작은 부상만 따르는 작은 사고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뭔가 작은 부주의와 소홀함이 쌓이고 쌓여 큰 재난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법칙이 1809년 5월 22일 아침의 부교 붕괴 사건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부교를 하나만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놓았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빈의 대장간에서 닻 수십개를 두들겨 만들었더라면, 여러 가닥의 긴 밧줄이나 목책 구조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방어물을 부교의 상류 쪽에 설치했더라면, 아니, 아예 다부가 로바우 섬으로 건너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했더라면, 이 날 프랑스군의 참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날의 비극은 날씨, 혹은 물결로 인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결국 나폴레옹의 안이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필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입니다.  인명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부교가 끊어진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작전 때문이든 도나우 강의 급류에 떠내려 온 통나무 때문이든,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접한 나폴레옹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의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겠다는 백업 플랜 따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그는 전령 둘을 불렀습니다.  한 명에게는 즉시 강변으로 나가 책임 공병 장교에게 부교 수리에 얼마나 걸릴지 알아보라고 했고, 나머지 하나에게는 란 원수에게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전령이 도착했을 때 란의 상황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일레르 사단을 앞세워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었는데, 카알 대공의 지원 부대가 나타나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난데 없이 나폴레옹의 전령이 나타나 다짜고짜 더 공격하지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 이건 지키기 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대포알이 채찍질처럼 날아드는 허허벌판에서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요 !


설상가상이라고, 란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 보병 사단이 무너지자, 카알 대공은 전술을 바꾸어 포병을 전면에 내세워 무차별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멈추려 했습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 전력은 프랑스군을 4배 정도로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란 휘하 사단장 중 가장 용맹했던 아우스테를리츠의 영웅 생-일레르 장군도 발목에 적 포탄을 직격 당하고 로바우 섬의 야전 병원으로 실려간 뒤였습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연상이었던 생-일레르의 full name은 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으로서, 기병 대위였던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후보생으로 군에 들어갔었고, 혁명 이후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승진을 할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29세의 나이에 이미 장군이었던 그는 1795년 북부 이탈리아의 로아노 전투에서 손가락 두개를 잃을 정도로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용기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발목을 잃은 그는 결국 괴저로 인해 15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어정쩡한 명령을 내린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교가 끊겼다면 다부의 지원 병력은 고사하고 탄약 부족으로 인해 마세나와 란은 당장 철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세나와 란의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즉각 로바우 섬으로 후퇴를 명령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위태위태했던 다리는 급류니 통나무니 하는 것들로 인해 여러번 끊겼었고, 그때마다 몇 시간 만에 수리가 된 바 있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한두 시간 안에 수리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대로 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한 공병 장교가 처음부터 '매우 심한 손상으로 인해 수리에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릴 듯'이라고 명쾌한 보고를 했다면 이렇게 상황 파악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하들은 상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자세히 보고하는 것을 꺼리기는 하지요.  덕분에 란과 그의 부하들은 1시간 동안 허허벌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격 연습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은 카알 대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프랑스군의 공격이 멈춰진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어쨌거나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반격을 위해 보병 사단들을 재규합했습니다.  또한 그는 포병을 내세운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하고는 보병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포병대를 더 전진시켜 프랑스군에게 집중 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당시 포병대는 1발 발사하는데 2~3분이 걸릴 정도로 발사 속도도 느렸고, 또 그렇게 애써서 쏜 포탄도 불꽃과 함께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폭발탄이 아니라 그냥 쇳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밀집 보병 대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날 중으로 부교 수리 불가능'이라는 현실적인 보고가 날아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철수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은, 도나우 남단의 이미 끊어진 부교보다 많이 짧긴 하지만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엉성한 부교 하나 뿐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과 란의 제2 군단 중 살아남은 병력 전체, 거의 4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이 다리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퇴하는 그들의 등 뒤로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의 오스트리아군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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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3.19 21:24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에슬링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느슨했는데, 그 두 마을 사이의 중앙 평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중앙을 돌파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항상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던 란이 다시 한번 그 중앙부를 돌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난 뒤, 란은 크게 좌향좌를 하여 오스트리아 주력인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3개 군단을 측면으로부터 돌돌 말아올릴 예정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란이 이끌고 돌격할 제2 군단이 강을 무사히 건너야 했는데, 새벽 3시가 되어 그 도강이 완료되었습니다.  즉, 작전 실행 준비가 끝난 셈이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머리 속에 그려지던 5월 22일, 둘째날 전투의 전개도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다부의 제3군단은 로바우 섬은 커녕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란이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릴 때, 란의 측면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가 역으로 들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즉, 이미 전날 밤 9시에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제3 군단을 도나우 강 우안의 부교 시작점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소환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밤새 행군하면 아침 나절에 거기에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도강시켜 란이 자리를 비운 중앙 지점으로 밀고 나가면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부의 군단은 란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과하여 란과는 반대 방향인 우향우를 한 뒤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의 옆구리를 들이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의 핵심인 란의 김밥말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군단들을 잘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뒤엉켜 있던 마세나의 제4 군단이 그들을 먼저 평원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 11시까지 아스페른을 손에 넣으려는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이다, 골목 하나를 경계로 지쳐 쓰러져 잠든 마세나의 병사들은 불과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다시 부사관들의 재촉을 받으며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 4시, 마세나의 병사들이 아스페른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두번째 날이 시작된 것이지요.  잠을 자다 기습을 당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는데, 그래도 아침 7시 경에는 결국 아스페른 마을 대부분에서 프랑스군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한편, 마침 자욱하게 안개까지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은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평원에 있는 밭두렁 뒤로 조용히 행군하여 포진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아스페른으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곧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전면 평원에 자리를 잡은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안개와 어둠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평원을 휩쓰는 포격을 개시한 것입니다.  란의 병사들은 밭두렁 뒤에 납작 엎드려 있긴 했습니다만, 점점 날이 밝아오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가려주던 안개마저 아침 7시가 되자 걷히기 시작하면서 슬슬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벌써 3시간 째 적의 포격에 노출된 채로 밤이슬을 맞으며 나폴레옹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자니 죽을 맛이었겠지요.  차라리 어떻게 되건 간에 빨리 돌격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습니다.


한편, 이들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로바우 섬에 자리잡고 앉아 망원경으로 전장을 지켜보면서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전령들의 보고를 받고 있던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란의 제2 군단이 진격하고 나면 텅 비게 되는 그 자리를 채워줄 이들이 도착해야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부의 군단은 항상 쾌속 행군으로 유명했는데, 과연 아침 7시가 되자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다부의 군단이 집결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 3만에 달하는 다부의 군단이 3km가 넘는 부교와 섬을 건너 도나우 강 좌안으로 넘어오려면 최소 3시간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저 길고 좁은 위태위태한 부교를 군단 전체가 건너려면 엄청난 병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세나와 란의 병사들이 사용할 예비 탄약도 아직 강의 우안에 그대로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차에 이 포탄과 탄약 상자들을 싣고 부교를 건너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는, 다부의 군단과 예비 탄약이 강 좌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로바우 섬까지는 건너와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다부의 군단이 이제 막 도강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란에게 진격 명령을 전달한 것입니다.  3개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연결된 부교 중 특히 우안과 롭그룬트 섬 사이를 잇는 긴 부교는 이미 두어 차례 끊어진 바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추가 병력과 예비 탄약이 강을 건너지 못한 채로 공격을 시작했다가 부교가 다시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였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그냥 몇 시간만 더 기다려 병력과 탄약이 로바우 섬으로 넘어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전투 현장에서 안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의 비결 중 하나는 '적보다 반박자 빠른 행동'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을 거둘 때도, 전체 작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다부의 군단은 당일 전투 직전까지도 전투 현장을 향해 맹렬히 행군 중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다부의 도착 이후까지 전투를 미루었다면 아우스테를리츠의 완벽한 대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렝고에서도, 프리틀란트에서도,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과감히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반박자 빠른 작전에 대해 그의 적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강점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다음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폴레옹의 원대한 전략은 빌뇌브의 영국 침공 함대로 하여금 도버 해협이 아니라 먼저 대서양 너머의 카리브해로 가서 그 곳의 영국 식민지를 휘젓게 했습니다.  위 그림은 그 중 일환이었던 카리브해의 다이아몬드 암초 공략 작전입니다.  실제로 이때 당시 카리브해에서의 영국 해군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만약 빌뇌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자메이카 공략까지도 가능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저 보잘것 없는 암초 하나를 공략하고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짠 작전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국 트라팔가 해전으로 이어졌던 빌뇌브 제독의 도버 해협 제압 작전이었지요.  이 해군 작전도 오리지널 원작자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는데, 그는 바다에서의 항해는 지휘관의 의지와 병사들과의 다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따라 엄청난 변수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표를 정했지요.  그 결과, 넬슨 함대를 유인한답시고 카리브 해를 향해 대서양을 두 번이나 횡단했던 이 원대한 기만 작전은 결국 트라팔가 해전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이 도나우 강 작전에서도 나폴레옹의 의지와 그의 부하들의 다리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대서양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Schwarzwald)의 눈 녹은 물로 인해 시시각각 물결이 거세지던 도나우 강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런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부의 도강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 개시를 명했습니다.  이 결정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혀 쌍방이 서로의 움직임을 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란의 제2 군단이 상대적으로 텅 빈 중앙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를 오스트리아군도 눈치챌 것이 뻔했습니다.  벌판에 포진한 란의 제2 군단에 대해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그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집중 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공격이 더 늦어지면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대응하여 중앙부로 병력을 집중 배치할 것이고, 그럴 경우 나폴레옹의 작전 전체가 엎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는 아침 7시, 다부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란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대대로 유서 깊은 군사 가문 출신도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전투 지휘 경험은 이미 그를 유럽 제1급 야전 지휘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날 아침 공격 떄 3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좌측부터 타로(Tharreau), 클라파레드(Claparede), 그리고 생-일레르(Saint-Hilaire)의 사단을 포진시켰고, 나폴레옹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장 경험도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생-일레르 사단부터 시간 차를 두고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란의 공격선은 적 전선에 대해 평행선이 아닌, 맨 오른쪽의 생-일레르의 사단이 삐죽 튀어나온 사선 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적 전선 돌파 뒤 크게 좌로 선회하여 적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하려는 제2차 작전까지 감안한 공격 대형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격이었지요.


하지만 란이 뚫으려던 정면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알 대공이 있었습니다.  란의 묵직한 공격을 받고 막 무너져 내리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의 존재와, 그가 끌고 온 지원군의 도움을 받고 간신히 붕괴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저항으로 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란은 생-일레르 사단의 뒤를 따르던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딱 적절한 순간에 투입시켰습니다.  생-일레르 사단과의 총격전을 위해 긴 횡대로 포진했던 오스트리아군 연대들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정예 흉갑기병(cuirassiers)의 돌격에 혼비백산 했습니다.  보병대가 기병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긴 횡대가 아니라 치밀한 방진을 짜고 저항해야 했는데, 허를 찔린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흉갑기병의 갑옷과 장비입니다.  실제로는 흉갑기병이라고 해서 꼭 흉갑을 갖춰 입지는 않았고, 키가 큰 병사와 큰 말을 뽑아 흉갑기병대를 편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보병대에서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척탄병 부대를 편성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림 출처는 https://kr.pinterest.com/marnics/french-cuirassiers-napoleonic/ )



그러나 이때 다시 카알 대공이 나섰습니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연대 쪽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는 기수로부터 그 연대의 군기를 빼앗아들고 병사들의 도주를 제지했습니다.  아무리 패주하는 상황에서라도, 하늘같은 왕족 대공님이 직접 자신이 속한 연대 깃발을 들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다는 것은 당시 병사들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카알 대공의 뒤를 따라 다시 프랑스군을 향해 돌아섰고, 막 무너질 듯 하던 오스트리아 전선은 간신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란의 공격은 여전히 기세등등 했습니다.  카알 대공의 솔선수범이라는 원맨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란이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은 우르르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공격 개시 약 1시간이 지난 아침 8시 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주저하는 유리 멘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날 이 순간만큼은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솔선수범을 통해 그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만천하에 입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몇 km 떨어진 로바우 섬의 나폴레옹에게는 끊임없이 전령들이 오가며 각지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령들 중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짧은 메시지를 전하자, 나폴레옹의 눈썹이 살짝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고, 나폴레옹 주변의 참모들은 방금 나폴레옹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었는지 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전령이 전한 소식은 부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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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3.12 21:34

5월 21일 오전,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2개 마을에 포진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8만4천의 보병과 1만4천이 넘는 기병, 그리고 무려 292문의 대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고작 2만2천의 보병과  3천이 채 안되는 기병, 그리고 고작 52문의 대포를 도나우 강 좌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오스트리아군은 그러나 다소 어정쩡한 진형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즉, 힐러(Hiller)와 벨가르드(Bellegarde), 그리고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이 각각 이끄는 3개 군단이 북쪽으로부터 아스페른을 향했고, 에슬링으로는 데도비히(Dedovich)가 대리 지휘하는 로젠베르크(Rosenberg)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본인은 본인의 군단 중 일부 사단을 이끌고 에슬링 동쪽에 있는 좀더 큰 마을인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는 아예 프랑스군이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병력을 분산시켜 공격해들어간 이유는 카알 대공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부교가 끊어져 프랑스군 대부분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몰랐던 그는 여전히 프랑스군의 본진은 아스페른에서 북진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주된 공세를 3개의 강력한 군단으로 틀어막고, 그 사이 로젠베르크의 군단을 프랑스군의 옆구리인 에슬링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 꽂아넣어 그 부교를 노리겠다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습니다.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사실상 마세나의 제4 군단 하나에,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예비 기병대 뿐이었습니다.  란 본인은 에슬링에 있었으나, 그의 제2 군단은 아직 로바우 섬에 있었으므로 란은 원래 마세나 휘하였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빌려서 에슬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군단 대부분은 아스페른 마을 남쪽에 위치했고,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 1개만 마을 안에 쏙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을이 너무 작았던 것입니다.  몰리토르의 병사들은 마을 건물들과 돌담 뒤에 재주껏 숨어 적의 내습을 기다렸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상태도 비슷했고, 이 두 마을 사이는 사실상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지킬 병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유일한 생명선인 부교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부교 자체는 신참 근위대(Jeune Garde)가 지키도록 하고,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이 두 마을 사이의 평원에 배치했습니다.  여기서 작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란 휘하에는 부데 장군의 1개 사단 밖에 없었는데, 이건 군단장인 란에게는 너무 적은 병력을 준 셈이었습니다.  괜히 부데 사단에 지휘관이 2명 있게 되는 셈이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평원을 방어하는 베시에르의 기병대를 란 밑에 배속시켜 버렸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 란이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을 뻔히 봤으면서도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나폴레옹이 란과 베시에르의 성숙함을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나폴레옹은 역시 란의 편을 들어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건 결국 또 하나의 작은 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정말 느렸습니다.   오전부터 시작한 공격이 아스페른 마을에 당도한 것이 거의 3시가 다 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마을 안에서 강력하게 저항한 몰리토르의 사단에 의해 금방 격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도 자신들의 진격에 맞서 뛰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조심스럽게 전진을 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주공을 맡은 3개 군단이 마을 북쪽에 완전히 포진을 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되어서였습니다.  아스페른 서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마세나의 군단은 용감하게 맞섰고, 오스트리아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마을 안쪽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의 전투는 농가들 사이에서의 밀고 밀리는 혈투가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 되었습니다.  마세나는 그 사이에 증원된 생-시르(Carra Saint-Cyr) 장군의 사단의 도움을 받아 집요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적의 우세가 막강했으므로, 마을의 절반 정도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밤이 되어 전투가 일단락 될 때는 마을의 북쪽 절반은 오스트리아군이, 남쪽 절반은 프랑스군이 점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첫날은 기본적으로 치열한 시가전이었습니다.  그림은 아스페른이 아니라 에슬링에서의 시가전의 모습입니다.)





(1809년 5월 21일, 드디어 격돌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첫날의 상황입니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중앙부의 베시에르도 상황에 비해서는 무척 분전했습니다.  오후 3시반 경 적의 기병대가 몰려오자 몇차례 돌격을 감행하며 꽤 잘 싸웠고, 덕분에 중앙부가 적의 기병대에 의해 돌파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에슬링을 노리는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느릿느릿 나타나자 비로소 베시에르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도랑 뒤편으로 물러났습니다.


에슬링에서의 형편이 어떻게 보면 가장 좋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면 로젠베르크 1개 군단이 2개 대오로 나뉘어 오는 것이었습니다만) 2개 군단급의 오스트리아군을 고작 1개 보병 사단만으로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1대3의 열세였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은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 미숙했습니다.  오후 느직히 에슬링 앞에 나타난 데도비히의 병력만으로도 란의 1개 사단 정도는 가뿐히 제압이 가능했지만, 데도비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스-엔저스도르프를 거쳐 올 예정이었던 로젠베르크의 부대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로젠베르크는 아무 적군도 없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서 꾸물거리다 저녁 6시 30분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이렇게 두 부대가 모였음에도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에슬링 안에 포진한 프랑스군의 병력수를 잘 모르다보니 좋은 말로 조심스러웠고, 막말로 겁이 났던 것이지요.  이들의 공격은 7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는데, 그나마 따로따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데도비히의 공격은 7시에, 로젠베르크의 공격은 8시에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공격을 시작한 이유도 한심했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전황을 파악한 카알 대공이 '뭘 기다리는 것인가 ?  당장 공격 !'이라는 명령을 전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어설픈 공격이라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호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두꺼운 석벽을 가진 곡물 창고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의 돌담 뒤에 숨어 에슬링 전체를 요새화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적의 압도적인 포격에 무척이나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은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를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중앙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에슬링의 거대한 곡물 창고로 돌격하는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의 모습입니다.)



카알 대공은 오후 늦게서야 비로소 프랑스군이 기어나올 생각이 전혀 없고, 정말 아스페른과 에슬링을 사수하며 버틸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카알 대공도 나름 명장이었으므로, 그렇게 프랑스군이 수비에 치중한다면 좁은 아스페른 정면에 3개 군단이나 집중시켜봐야 효율적인 부대 운용이 안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병을 상대적으로 텅빈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부로 진격시켰습니다.  그 곳은 에슬링에서 고군분투 중인 란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그에게는 따로 병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있긴 있었는데, 그게 베시에르의 기병대였습니다.  란은 오후 한때 잠깐 싸우는 척 하더니 도랑 뒤에 숨어 있는 베시에르에 대한 증오심이 새삼 솟아 올랐나 봅니다.  그는 부관을 베시에르에게 보내면서 "지금 당장 돌격할 것, 그리고 제대로 할 것"이라고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비록 욕설은 섞여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장교 집단이란 신사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급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때도 예의를 갖추어 권고형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독이 일개 중위 하나를 당장 오라고 소환할 때도 연락 장교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The admiral's compliments, sir, and he'd like Mr Hornblower's presence on board the flagship as soon as is convenient."

(제독님께서 안부와 함께 여쭙습니다만, 혼블로워 중위께서 시간이 나시는 대로 기함에 와주셨으면 하십니다.)  


그런데 일개 대위 나부랭이가, 아무리 더 높은 란 원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베시에르 원수에게 '지금 당장, 그것도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전갈을 가지고 간 것은 루이 드 비리(Louis de Viry) 대위였는데, 당연히 무척 순화된 버전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돌아온 드 비리 대위에게 란은 그가 전달한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읊게 했고, 그 내용이 무척 순화되어 전달된 것을 안 란은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는 다시 샤를 라베도예르(Charles LaBedoyere) 대위를 보냈으나, 이 대위도 베시에르 앞에서는 겁을 먹고 드 비리 대위와 비슷한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부하들에게 화가 난 란은, 때마침 도착한 마르보(Marbot) 대위에게 '오쥬로 원수께서 자넨 믿어도 된다고 했네, 그러니 그 말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보게'라는 말과 함께 다시 또박또박 명령을 불러주며 반드시 그 말 그대로 전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르보는 정말로 '지금 당장,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고 베시에르에게 전달했고, 베시에르에게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대위 나부랭이를 봤나'라며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란에 대한 베시에르의 분노는 나름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돌격으로 승화시킨 그는 즉각 도랑을 넘어 중앙부로 몰려오는 적을 향해 돌격하여, 적의 포병대를 제압하고 밀집 대오를 구성한 보병대를 한바퀴 돈 뒤 복귀했습니다.  비록 적 보병대를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기병만으로 적 밀집 보병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의 용감무쌍한 돌격만으로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 공격은 돈좌된 셈이었으므로 상당한 공을 세운 셈이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일대의 전투는 밤 11시까지 진행되다, 양군 모두 병사들이 지치는 바람에 정식 휴전없이 소강상태로 빠져 들게 됩니다.  에슬링에서는 란의 분전, 그리고 베시에르의 분노의 돌격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이 발을 못 붙였으나,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이 시가지 내에서 혈투를 벌이던 아스페른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새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지쳐 쓰러졌지만 지휘관들은 또 다시 모여야 했습니다.  마세나의 사령부로 모인 베시에르와 란은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또 으르렁거렸습니다.  이 둘은 서로 모욕을 퍼붓다 결국 검을 뽑아들었는데,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더 상관이었던 마세나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결투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로바우 섬에서 부교의 수리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이 날의 전황 보고를 받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1대3 이상의 우세를 가지고도 프랑스군을 축출하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은 서툴고 느린 예전 그 모습 그대로임이 틀림없었고, 자신의 공세를 막고 있던 후방의 부교가 마침내 수리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다부의 군단에게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집결하여 도강 준비를 하라고 명령서를 날리고, 란의 제2 군단을 밤새 도나우 강 좌안으로 계속 이동시켰습니다.  그는 란의 제2 군단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취약한 적의 중앙부를 돌파한 뒤 아스페른 쪽으로 선회하여 적의 주력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달콤한 꿈에 젖어 제2 군단 병사들을 밤새도록 도강시키던 5월 22일 새벽, 병사들이 밟고 건너던 그 부교 및의 도나우 강의 물결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Lieutenant Hornblower by C. S. For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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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05 18:45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도나우 강 좌안에 발을 내딛은 5월 20일 밤,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저항이 있을까 두려워하던 프랑스 지휘관들은 의외로 조용한 주변의 동정에 다소 놀랐고, 일단 안심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기병대를 이끌고 주변을 한바퀴 돌았던 베시에르는 주변에 적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란은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아마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후위대로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밤중에 아스페른 교회 종탑까지 직접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적의 존재는 감지할 수가 없었던 마세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머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위급 지휘관 3명의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므로, 이들은 21일 새벽 2시 일단 로바우 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모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긴 당장 몇 시간 후면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여야 할 수도 있는데, 그 새벽 늦게까지 잠도 못 잤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 했으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란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입니다.  그는 당시 이미 구식 패션으로 치부되던 '흰 가루를 뿌린 긴 장발'을 고집할 정도로 귀족적인 외모를 고집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는 평민 출신에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고, 비록 란처럼 가스코뉴까지는 아니어도 그 근처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덕분에 처음에는 란과 꽤 친한 사이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장이었던 콩스탕(Constant)에 따르면, 이때 작은 난동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앞에서 이 세 원수들이 서로 자기 짐작이 옳을 것이라고 티격태격했는데, 결론이 날 수 없는 이 입씨름에 짜증이 났던 란은 나폴레옹과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마세나와 베시에르를 버려두고 나폴레옹 쪽으로 성큼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때 베시에르가 거의 반사적으로 란과 나폴레옹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황제 폐하께 불손하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나폴레옹은 외모와 옷차림도 근사하고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던 아부꾼 베시에르를 가까이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1807년 러시아 짜르와 만나던 틸지트(Tilsit) 회담 때도 란 대신 베시에르를 데려갈 정도였지요.  란이나 베시에르나 둘다 자신이 나폴레옹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충돌은 시간의 문제였을 뿐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이야기하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다니 !  이걸 참고 넘길 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뜸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꺼져 ! 폐하께서는 너 따위의 호위는 필요 없으시다 !  아주 희한하네 ?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니 말이야 !"


군인에게 있어 최대의 모욕은 싸움을 회피하는 겁장이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나폴레옹 면전에서 그런 비난을 당하다니 !  베시에르는 란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나폴레옹 앞에서 란과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재빨리 나폴레옹이 끼어들어 직접 란의 손목을 꽉 잡으며 말렸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이게 무슨 짓인가, 란 원수"라고 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영리한 그는 "진정하게, 장"이라며 부드럽게 말렸기에 란도 베시에르를 내팽개치고 일단 싸움을 그쳤습니다.  물론 베시에르는 혼자 밤새도록 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분을 삭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란과 베시에르의 마지막 충돌은 아니었습니다.




(5월 21일 아침의 상황입니다.  당시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좌안으로 이어진 부교는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에 딱 1개 있었습니다.)




그 소동이 있은 뒤에도 마세나가 밤새도록 병력을 이동시켰지만, 몇 시간 뒤인 21일 새벽에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온 프랑스군은 마세나의 제4 군단 뿐이었습니다.  워낙 병력이 적었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은 부교 좌우 쪽으로 1.6km 정도씩 떨어진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 두 마을을 점거하고 더 많은 병력이 넘어올 때까지 버티기로 합니다.  아스페른과 에슬링은 둘다 농가 백여채 정도가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어서, 사실 대단한 방어거점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방어 거점으로 쓸만 한 것은 아스페른에 있던 교회와 그에 딸린 돌담으로 둘러싸인 묘지, 그리고 에슬링에 있던 돌로 지은 큼직한 곡물 창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을 모루로 삼고 에슬링으로부터 공격의 쐐기를 박아넣을 생각이었으므로, 마세나로 하여금 부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지키도록 하고 란은 에슬링에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그나마 아직 란의 제2 군단은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 있었으므로, 일단 마세나 휘하에 있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란에게 빌려주고, 그 병력만으로 에슬링을 지키게 했습니다.  





(Jean Boudet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동갑으로서, 혁명 발발 이전에 어린 나이에 소위부터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그는 방데 지방에서의 반란 진압 뿐만 아니라, 황열병으로 인해 모두가 꺼리는 카리브해 식민섬에서의 작전 등 험하고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임무를 잘 수행해낸 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렝고 전투가 있던 1800년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나폴레옹 바로 밑에서 싸웠는데, 그의 가장 빛나는 전공은 바로 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그도 냉정한 나폴레옹 밑에서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과의 전설에 남을 대회전을 꿈꾸며 마르쉐펠트(Marchfeld) 평원으로 전군을 이끌고 나왔던 카알 대공을 기다리던 것은 그저 텅 빈 평원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금쯤은 다 건너와 결전 준비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던 카알 대공은 당황했습니다.  척후들로부터 '병력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프랑스군은 아스페른과 에슬링 두 마을을 점거한 채 웅크리고 있다' 라는 보고를 받은 카알 대공은 혀를 찼습니다.  그렇게 마을 건물 등 복잡한 방어물을 끼고 싸우는 것은, 대부분이 신규로 편성된 연대로 구성되어있다 보니 투지와 용기만 있을 뿐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전술적 융통성이 풍부했던 프랑스군이 선호하는 형태의 전투였지요.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에게 마음껏 도강하시라고 강변을 활짝 열어줬던 것도 오스트리아군이 선호하는, 탁 트인 평원에서 잔재주없이 남자다운 전투를 하고자 함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진을 보니 괜히 강변만 열어줬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작한 공격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좀더 많은 병력이 포진한 것으로 보이는 아스페른 쪽으로 3개 군단을, 에슬링에는 2개 군단을 보내 공격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포성이 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란은 적 2개 군단을 고작 빌려온 1개 사단으로 막아내야 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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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2.26 14:46

몰리토르(Molitor) 장군의 프랑스군 선발대가 로바우 섬에서 오스트리아군 수비대를 쫓아내고 있던 5월 19일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카알 대공은 나폴레옹이 뉘스도르프 혹은 다른 어디로 도강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스트리아군 사령부에서는 5월 18일 저녁부터 이루어진 프랑스군의 도강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군 본대를 도나우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송양지인은 십팔사략에 나오는 고사로서,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양공의 일화입니다.  http://blog.daum.net/wahnjae/17994302 참조)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중국 고사성어에서도 나오듯이, 강을 건너는 적은 그야말로 상대하기 가장 쉬운 상대였습니다.  아예 적이 도강을 못 하도록 강가에서 막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이 대군 중 약 1/3 정도만 건너온 상태에서 들이치는 것이었습니다.  전투의 기본은 'divide and conquer', 즉 적의 세력을 분산시킨 뒤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는데, 강이라는 천연장벽이 그것을 해주는 절호의 찬스였으니까요.





(명장은 아군의 수가 더 적더라도 어떻게든 혈투를 벌여 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적의 수가 많더라도, 전투 현장에는 아군 수가 적의 수보다 더 많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바로 명장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곧 강을 넘어온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던 이 때에, 왜 카알 대공은 강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저 후방으로 군대를 물려놓은 상태였을까요 ?  그건 카알 대공의 작전 계획이 당장의 전투 결과가 아니라 좀더 큰 전쟁 결과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바보가 아닌지라, 나폴레옹이 어중간하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승률이 높은 작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게 항복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대해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애초에 카알 대공은 1809년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모두 나가 떨어진 상황인지라, 혼자서 싸워야 하는 오스트리아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나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이 헛발질을 하고 있고, 또 애써 편성해놓은 30만 대군을 오스트리아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곧 해체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이면 애초에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제국의 지도자들이라고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라,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지요.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카알 대공은 당장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고 군기 몇 자루 빼앗는 것이 카알 대공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증원 병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더 오래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 양쪽 다 여한이 없을 정도로 거하게 한판 제대로 붙어 나폴레옹을 꺾은 뒤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살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병력이 도나우 강 좌안으로 다 건너온 뒤에 싸워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만 아니면 내가 이겼다'라는 식의 변명거리를 줘서는 안 되었지요.  그랬다가는 나폴레옹이 다시 본국에서 증원군을 받아다 또 도전을 해 올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렇게 싸운다고 해도, 어차피 강을 등 뒤에 끼고 있는 것은 나폴레옹이었으므로 결국 지형은 카알 대공에게 절대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쾌승을 거둔다면, 도나우 강을 등 뒤에 둔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강가에서 멀리 떨어져 로바우 섬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모르고 있던 카알 대공도, 5월 19일 낮이 되자 더 이상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른 오후 비잠베르크(Bisamberg)에 자리잡은 관찰병들이 신호기(semaphore)를 통해 로바우 섬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프랑스군이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왔고, 스파이들이 속속 달려와 나폴레옹의 도하 소식을 전해왔기 떄문입니다.  또한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집결하는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들이 일으키는 먼지는 강 건너에서도 뚜렷이 보였습니다.  곧 힐러(Hiller) 장군이 달려와 적이 도하를 완료하기 전에 속히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카알 대공은 침착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애초에 마음 먹은 대로, 나폴레옹이 전군을 다 건너게 만든 뒤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운명을 걸고 한판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이 결전을 위해 그의 야전군 10만을 5개 대오로 편성하고 별도의 예비대도 준비했습니다.  


제6군단 : 힐러(Johann von Hiller)

제1군단 : 벨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

제2군단 : 호헨촐레른(Friedrich Franz Xaver Prince of Hohenzollern-Hechingen)

제4군단 : 로젠베르크(Prince Franz Seraph of Rosenberg-Orsini)

제4군단 일부 : 호헨로헤(Friedrich Karl Wilhelm, Prince of Hohenlohe)

예비군단 : 리히텐슈타인(Johann I Joseph, Prince of Liechtenstein)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워낙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이다보니, 그 귀족들의 이름도 독일식, 프랑스식, 헝가리식, 크로아티아식, 체코식 등 정말 다양합니다.  저 초상화 속의 인물은 벨가르드 백작이신데, 이 분은 사보이 Savoy 귀족 가문 출신이신지라 가문 이름이 프랑스식입니다.  그러나 이 분 개인은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100%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은 기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신출귀몰한 지휘에 노리개감이 되는 역할을 주로 맡으셨지요.)



그가 도나우 강 좌안인 마르쉐펠트(Marchfeld)의 평원으로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5월 21일 오전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2일 간이나 시간을 줬으면 충분히 전군이 다 건너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척후병들이 프랑스군이 아직 평원에 전개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그는 몹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비장의 각오로 잔뜩 차려 입고 운명의 결투를 하러 나왔는데, 정작 무대에 상대방이 안 나온 셈이었으니까요.  그는 도나우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놓인 부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프랑스군의 도하가 9시간 동안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카알 대공의 기대처럼 운명의 한판 결전을 위해 평원으로 우우 몰려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이라는 두 작은 마을을 점거하고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에 따라 야전에서의 대규모 충돌이 아니라, 이 두 마을 탈환을 위해 병력 전개를 새로 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싸우기는 싸워야 했으니까요.  






(현대의 마르쉐펠트 평원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강건너 빈에게 농작물을 공급하는 농지였고, 구릉지대까지는 아니지만 완전히 평탄한 지역은 아니며 또 이런저런 작은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지형입니다.)




한편, 21일 아침 강을 건너 전장을 둘러본 나폴레옹은 또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저런 시냇물과 그 강둑에 자란 작은 숲들로 인해 완전히 평탄하지는 않았던 마르쉐펠트 평원을 둘러 본 뒤, 옆에 선 마세나에게 '좌측을 움켜쥐고, 우측에서부터 돌돌 말아올린다'라는 작전 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그는 좌측의 아스페른을 모루 삼아 굳게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을 유인한 뒤, 오른쪽 에슬링으로부터 망치같은 강력한 공세로 적진을 돌파한 뒤 오스트리아군을 중앙으로 몰아붙일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강을 등지게 되는 것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었습니다.  아직 절반 이상의 병력이 도나우강 우안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부교가 계속 버티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도나우 강의 물살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망치와 모루 전법은 기병 전술을 중시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쓰던 전법입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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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2.19 18:43

포병 전문가인 베르트랑 장군의 계산에 따르면 대포가 건널만 한 부교를 짓기 위해서는 20피트, 즉 약 18미터마다 한 척의 보트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자면 최소 80척의 보트가 필요했는데, 비엔나 일대를 나흘 동안 미친 듯 뒤지니 90척의 보트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부교 건설에 사용될 만한 상태인 것은 70척 뿐이었고 그나마 부교를 위해 보트를 고정시키는데 꼭 필요했던 닻은 정말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속이 탔습니다.  그는 작업 현장에 계속 참모를 파견하여 널빤지가 어쩌고 로프가 어쩌고 하는 지극히 잡다한 보고를 일일이 직접 챙기며 부교 건설을 위한 자재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충분한 수의 보트를 확보하여 5월 19일부터는 부교 건설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닻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도나우 강을 건너는데 쓰이거나 낚시질 등에 쓰이는 보트들이다 보니, 바다와는 달리 평소에 닻이 필요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임시 방편으로 어부들이 쓰는 통발에 포도탄을 재워 넣은 무게추를 닻 대신 쓰기로 했습니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부교병들이 사용하던 평저선, 즉 bateau입니다.  프랑스군이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기 위한 마지막 부교는 바로 이 오스트리아군의 평저선을 사용하여 건설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5월 18일 쇤브룬 궁을 떠나 직접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의 강변으로 갔습니다. 늦은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그는 6척의 대형 보트에 수백 명의 병사와 2문의 대포를 실어 도나우 강 속에 있는 첫번째 섬인 롭그룬트(Lobgrund) 섬에 보낼 때, 병사들에게 탄약이 분배되는 것을 직접 관리 감독하면서 거의 모든 병사 하나하나에게 일일이 격려의 말을 전할 정도로 작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저녁 6시 경에 섬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섬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부교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은 순조로운 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건너야 했던 징검다리 섬들은 정확하게는 2개가 아니라 3개였고, 30m짜리 짧은 다리까지 합하면 총 4개의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롭그룬트 섬과 로바우 섬은 불과 30m 폭의 강줄기로 갈라져 있었으므로, 그 사이의 다리는 매우 짧았습니다.  


도나우 강의 우안 

- 450m -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 225m - 

롭그룬트(Lobgrund) 섬 

- 30m - 

로바우(Lobau)섬 

- 80m - 

도나우 강 좌안  






(지도 아래 부분의 복잡한 섬 그림 중 가장 큰 것이 로바우 섬입니다.  5월 21일의 상황입니다.)



로바우 섬이 상당히 큰 섬이었으므로 좌안에서 우안까지는 총 2.5km 정도에 가까왔습니다.  프랑스군은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을 앞세워 로바우 섬을 지키던 소규모 오스트리아군을 내쫓은 뒤, 로바우 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지키는 좌안까지의 마지막 4번째를 제외한 3개의 다리를 5월 19일 밤 사이에 다 놓고, 5월 20일 새벽에 마세나의 군단을 선두로 병력을 강 좌안으로 쏟아 부을 계획이었습니다.  로바우 섬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적의 대포알이 휩쓸 수 있는 평탄한 섬에 대군을 밀집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베시에르의 기병사단들과 란의 군단은 강의 우안 저 너머에서 대기하다가 5월 20일 아침까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그에 덧붙여, 상크트-푈텐(Sankt-Poelten)에 있던 다부의 군단도 비엔나를 거쳐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달려오도록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4개의 다리는 프랑스 부교 건설대에 의해 밤을 새워가며 동시에 놓아지고 있었습니다.  슈나이더그룬트에서 롭그룬트까지의 두번째 다리는 예정대로 5월 20일 아침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지만, 정작 도나우 좌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까지의 첫번째 다리는 정오가 되어서야 완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병들이 죽을 힘을 다해 놓은 다리들은 여전히 내재된 위험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닻 대신, 포도탄으로 대충 만든 무게추를 대신 써서 고정시킨 것이다보니, 무척이나 불안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첫번쨰 다리가 완성된 5월 20일 이른 오후에 휘하 원수들과 함께 일련의 부교를 건너 로바우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오후 3시쯤 그는 몰리토르가 좌안으로 건너갈 최후의 다리를 놓을 위치를 확인한 뒤, 즉각 부교 건설을 지시했습니다.  다리는 저녁 6시까지는 완료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사이 프랑스군 병력들은 강의 우안, 즉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속속 모여 차례로 부교를 건너 롭그룬트, 이어서 로바우 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교를 건너는 병사들은 불과 하루 사이에 강물이 눈에 띄게 불어난 것과, 부교가 상당히 부실해 보인다는 점을 걱정했습니다.  기병들은 말을 타고 건너지 않고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조심스레 부교를 건너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이런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좌안으로의 최종 부교가 완성되기도 전인 오후 5시 30분 경,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온 무엇인가에 우안에서 롭스그룬트로 이어진 부교 일부가 끊어진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통나무 등의 부유물이라고도 하고, 어떤 기록에는 보트라고도 하고, 또 오스트리아군이 고의로 떠내려보낸 보트라고도 합니다만, 어찌 되었건 이 사고에서 몇 척의 보트가 하류로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부교병(pontonnier)들이 서둘러 수리를 했으나, 임시방편이었던 이 수리조차도 완료되는데 다음날인 5월 21일 새벽 3시까지 걸렸습니다.  보트 등의 자재가 부족하여 이런저런 재료를 임시방편으로 조합해야 했었고, 물살이 점점 거세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살이 거세졌던 것은 1809년 봄, 유난히 따뜻했던 날씨 때문이었습니다.  도나우 강의 수원지라고 할 수 있는 저 서쪽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검은숲)에 쌓인 눈이 평소보다 빨리 녹았던 것이지요.  도나우 강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평년처럼 6월에나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한 나폴레옹에게는 아직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와 닿지 않았겠습니다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후방에서 이런 난리가 벌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저녁 6시 경 좌안으로의 다리가 완료되어 라살(Lasalle)의 지휘 하에 경기병대가 드디어 좌안의 평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규모 정찰대였던 이들은 곧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가로 막혔고, 별 다른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좌안 교두보 바로 코 앞에 오스트리아군이 대규모 포병대를 방열하고 캐니스터탄을 쏘아대며 도하를 막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일단 그런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로바우섬을 통해 도하한다는 것을 오스트리아군이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당장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우안의 부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5월 20일 저녁부터 5월 21일 새벽까지 근 9시간 동안이나 프랑스군의 도하가 중단된 상태라서,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한다면 좌안으로 건너간 소수의 프랑스군은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비잠베르크 Bisamberg 산입니다.  이 비잠베르크는 약 350m 정도의 높이로서, 서울 인왕산 정도입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므로, 카알 대공은 이 곳에 오스트리아군을 주둔시키고 관측병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도하 지점의 좌측에 있던 작은 마을인 아스페른(Aspern)으로 마세나의 부대를 보내 점령하게 했습니다.  마세나는 밤 12시 경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었던 아스페른 교회탑에 올라가 정찰을 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의 캠프 불빛은 저 멀리 비잠베르크(Bisamberg) 산 쪽에서만 보였고, 그 아래부터 펼쳐진 마르쉐펠트의 넓은 평원 어디에도 군대의 숙영 불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평원에 오스트리아군은 없다'라고 나폴레옹에게 보고했고, 나폴레옹은 쾌재를 올렸습니다.


프랑스군이 방해도 받지 않고 도나우 좌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대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AustrianWar/bridges/c_danube.html

https://de.wikipedia.org/wiki/Bisamberg_(Berg)

https://en.wikipedia.org/wiki/Antoine_Charles_Louis_de_Lasal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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