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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페른-에슬링

아스페른-에슬링 에필로그 - 더 간절한 쪽이 승리한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나 오스트리아군에게나 전례없이 길고도 치열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양측은 거의 48시간 동안 잠도 거의 먹지도 못 자고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거나 싸웠지요.  5월 22일 오후 5시 이후 이 대규모 살륙전이 서서히 잦아든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양측의 상황은 이틀 전과 사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nbs..
아스페른-에슬링 11편 - 소문과 눈물 랍의 신참 근위대가 에슬링에서 철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거부하고 분전하여 에슬링을 탈환한 덕분에, 오후 5시 경부터 전투는 육박전에서 포격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대포에서도 폭발탄을 일부 쓰기는 했으나, 도화선에 의한 폭발탄이라 불발탄도 많았고, 또 흑색화약을 쟁여넣은 당시 폭발탄(shell 또는 bomb)은 요즘 수류탄 정도의 폭발력 밖에 없었으므로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포탄은 글자 ..
아스페른-에슬링 10편 - 하드캐리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위기에서 건져낸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로서, 그는 투박한 독일 사투리가 들어간 프랑스어를 쓰는 알사스(Alsace) 출신이었고, 그가 그 위기의 순간에서 프랑스군을 하드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덕분이었습니다.장 랍(Jean Rapp)은 알사스 지방 콜마르(Colmar) 시의 시청 수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카톨릭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소수라고 할 수 있는 독실한 프로테..
아스페른-에슬링 9편 - "질서있는 퇴진" 군인의 목표는 승리와 전진이며, 이는 이룩하기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바로 패배 수습과 질서있는 후퇴입니다.  나폴레옹도 '모든 문제는 승리하면 다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패배할 경우 없던 문제까지 수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5월 22일 11시, 부교가 수리 불가 상태까지 붕괴된 것이 확인되자, 나폴레옹은 공세에 나섰던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합니다.  ..
아스페른-에슬링 8편 - 우연 또는 필연 5월 22일 오전 8시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의 안색은 상당히 침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영웅다운 침착함이다 아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을 못한 것이다 등등 말이 많습니다만, Harold Parker의 'Three Napoleonic Battles'라는 책의 주석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날 부교는 한번이 아니라 두번 끊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7시에 작은 규모로 끊어졌고 이는 곧 수리..
아스페른-에슬링 7편 - 고민과 선택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
아스페른-에슬링 6편 - 격돌 5월 21일 오전,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2개 마을에 포진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8만4천의 보병과 1만4천이 넘는 기병, 그리고 무려 292문의 대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고작 2만2천의 보병과  3천이 채 안되는 기병, 그리고 고작 52문의 대포를 도나우 강 좌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오스트리아군은 그러나 다소 어정쩡한 진형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nb..
아스페른-에슬링 5편 - 한밤의 멱살잡이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도나우 강 좌안에 발을 내딛은 5월 20일 밤,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저항이 있을까 두려워하던 프랑스 지휘관들은 의외로 조용한 주변의 동정에 다소 놀랐고, 일단 안심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기병대를 이끌고 주변을 한바퀴 돌았던 베시에르는 주변에 적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란은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아마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후위대로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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