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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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18 23:41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레옹 섬(L'ile de Napoleon)이라고 별명을 붙인 로바우 섬에서의 준비는 6월 말 다리가 준비되면서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회전 부교(pivoting bridge), 즉 작전이 시작되면 로바우 섬의 강변에 고정된 한쪽 끝을 축으로 회전하여 도나우 강 좌안에 붙게 되어 있던 다리는 나폴레옹의 공병단장 베르트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서, 약 800m에 달하는 긴 다리가 놀랍게도 하나의 통판(single span)으로 만들어진 걸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작센 왕에게 이 회전 부교가 엘베 강변의 작센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다리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다리'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끝났는데 시간을 더 끌 나폴레옹이 아니었지요.  그는 7월 5일을 도강 날짜로 잡고,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으로 향했고, 보급과 숙영 등의 문제로 인해 주변에 분산 배치했던 각 군단들에게도 이 날짜에 맞춰 로바우 섬 맞은 편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는 장면입니다.)



로바우 섬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도강을 하리라는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명약관화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로바우 섬이 꽤 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넓은 강변 중 어느 쪽을 통해 강을 건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실은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이 구축한 방어 진지도 로바우 섬의 북안 쪽에만 펼쳐진, 상당히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넓은 강변을 다 지킬 수 없었으니까요.  이때 즈음해서는 카알 대공은 마르히펠트에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미 루스바흐 고원 지대로 물러난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평원을 텅텅 비워두고 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봤는지, 클레나우(Johann von Klenau)의 제6 군단과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의 2개 부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조치는 그다지 좋은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들이닥칠 나폴레옹의 공세를 막거나 시간을 끌기에는 너무 작은 병력이었고, 나폴레옹군의 병력 이동을 감시 및 보고하기 위한 정찰 병력으로는 너무 많은 병력이었던 것입니다.  좀더 규모가 큰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아스페른-에슬링 지역에 전개했고, 더 작은 규모였던 전위대는 에슬링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의 예측으로는, 아무래도 나폴레옹이 지난번과 동일하게 로바우 섬의 북안을 통해 넘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의 예측을 정반대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7월 2일 르그랑(Legrand) 장군의 지휘 하에 소규모의 부대를 로바우 섬 바로 북쪽의 도나우 강 좌안에 상륙시켜 오스트리아군을 긴장시켰습니다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진지가 없던 로바우 섬 동쪽을 통해 도나우 강을 건널 생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7월 4일 밤 10시, 보트를 이용해 로바우 섬 동쪽을 마주한 도나우 강 좌안의 돌출부인 한젤-그룬트(Hansel-Grund)를 점령하고 준비한 부교 3개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북쪽으로도 마세나 휘하의 병력이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넌 뒤, 재빨리 5분만에 회전 부교를 놓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내려준 폭우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고, 한젤-그룬트를 점령했던 프랑스군은 새벽 2시 경 부교를 완성하고 제2, 제3 군단을 도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7월 5일 오후에 이 부교를 건넜던, 외젠의 이탈리아군 소속 프랑스군 포병 대위인 노엘(Jean-Nicolas-Auguste Noel)에 따르면 이 다리 위로 대포가 지나갈 때 그 무게에 짓눌려 다리의 판자가 무려 50cm나 가라앉았다고 하니, 여전히 부교는 불안했고 또 따라서 대군이 그 많은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강을 건너는데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추가적인 부교도 몇 개를 동시에 놓도록 하여, 7월 5일 아침 7시 경에는 이미 마세나(André Masséna)의 제4군단과 다부(Louis-Nicolas Davout)의 제3 군단은 이미 도강을 완료한 상태였고, 우디노(Nicolas-Charles Oudinot)의 제2 군단이 다리를 한창 건너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들의 도강을 밤 사이에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몰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기에 대해서 변명거리가 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으로도 귀로도 이 대부대의 이동을 포착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로바우 섬 일대에 설치된 프랑스군의 포대가 아스페른과 에슬링 방향으로 빗발 같은 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이 곧 로바우 섬 북쪽 강변으로 건너올 모양이라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이미 로바우 섬 동쪽으로 프랑스군이 개미떼처럼 넘어 온 상황이라는 것을 해가 뜨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우디노의 제2 군단이 강변에서 정비를 마칠 때 즈음에는 비가 그치고 상쾌한 태양이 떠올라 병사들의 군복을 말려주기 시작했고, 우디노는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로막고 선 오스트리아군은 재수없게 이 쪽을 맡고 있던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 뿐이었습니다.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던 노르드만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는데, 작센강(Sachsengang)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 마을에 배치해 두었던 수비대는 그냥 내버려 둔 채 후퇴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체시키는 임무를 준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도 그다지 오래 버티지는 못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그 바로 동쪽에 있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 마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직접 현장에 도착해 오스트리아군 2개 대대, 즉 1천이 넘는 병력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이 마을을 둘러 본 뒤, 로바우 섬에 설치된 22문의 대포와 14문의 박격포, 10문의 곡사포에게 이 마을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입니다.  이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약 1천발의 포탄과 폭발탄을 퍼붓자 이 마을은 화재에 휩싸였고, 이들은 400명의 포로를 내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난 1달간 로바우 섬을 중무장 요새로 변모시킨 보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클레나우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제6 군단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 수비대를 지원하려 했으나 마세나의 제4 군단 소속 기병대에게 저지당했고, 결국 그들도 미리 정해진 제2 수비선인 북서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오전 10시 경, 프랑스군은 상륙 지점과 그 인근 마을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도강 자체는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패인이었던 어설픈 도강을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끝낸 나폴레옹이 스스로 뿌듯해 하는 동안, 프랑스군에게 밀려 북쪽과 북서쪽으로 각각 후퇴하던 노르드만과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입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작센강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수비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고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보병이었던 이들은 프랑스군의 추격에서 충분히 빨리 후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와 이들을 위협했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병대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보병 방진을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 상태로 후퇴하자니 후퇴는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 프랑스군의 보병과 포병이 이들을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밀집 대형의 보병 방진 앞에 적 포병이 나타나면 그건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애초에 카알 대공이 마르히펠트 평원을 포기하고 루스바흐 고원에 방어선을 친 주된 이유가 프랑스군의 강력한 기병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5개 군단, 약 2만5천의 보병을 그 넓은 마르히펠트에 경계 병력으로 남겨둔 것은 결국 과히 좋은 판단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경계 병력을 둘 것이었다면 차라리 소수의 기병대만 배치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따라 잡은 프랑스 포병대에게,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는 정말 최상의 타겟이었습니다.  아군 기병대가 주변을 맴돌며 이들을 위협하여 한덩어리로 잘 뭉쳐주고 있었으며, 혹시 적 보병들이 포병들을 향해 돌격해 올 위협에 대해서는 바로 옆에는 아군 보병들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요.  이들은 신나게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속절없이 볼링 핀처럼 뭉텅이로 쓰러져야 했습니다.  오후 1시 경이 되자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이미 많은 보병들이 쓰러졌는데, 이젠 아예 적에게 퇴로까지 끊길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모습을 고원 지대의 방어선 뒤에 있던 카알 대공은 모두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루스바흐 고원의 저지선 밖으로 나가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는 일은 피하겠다고 작정했던 카알 대공조차도, 눈 앞에서 2만의 아군이 전멸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심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도 무척 존중했던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군이 강력한 보-기-포병의 조합을 완성한 모습을 보자, 그도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군은 좌익은 마세나의 제4 군단, 중앙은 우디노의 제2 군단, 우익은 다부의 제3 군단을 제 1진으로 하여 마르히펠트에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이어 제2진으로는 좌측에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중앙에 마르몽의 제11 군단과 근위대, 그리고 우측에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전개되었고요.   제1진의 군단들이 2만명 이상의 규모로 강력했던 것에 비해 제2진의 군단들은 1만명 정도로 상당히 약한 편이었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은 여기저기에 휘하 사단을 다 떼어주고 고작 1개 사단 9천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제2진까지도 노르드만의 전위대를 따라 잡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3시가 넘자,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이판사판의 정신으로 후퇴를 멈추고 프랑스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들을 도우러 프랑스 망명 귀족 출신인 두르발(Nicolas-François Roussel d'Hurbal)이 약 1천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뛰어 나왔으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기병대의 요격을 받고 혼전 끝에 결국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 끝에, 결국 원래 1만2천으로 시작했던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무려 절반인 6천의 전사, 부상, 포로를 내고서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의 방어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나우의 군단은 비교적 적은 피해만을 입고 카알 대공의 방어선 중 서쪽 측면인 바그람-게라스도르프(Wagram-Gerasdorf) 전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투의 시작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무척이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카알 대공의 원대한 계획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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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6.11 14:14

손자병법에 따르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었습니다.  이건 결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시기과 지형과 병력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은 서로 이 세가지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병력은 양측 모두 최선을 다해 끌어 모아서 얼추 쌍방이 비슷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시기와 지형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도권이 뚜렷했습니다.  시기는 카알 대공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반대로 지형은 카알 대공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투 시기를 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격은 나폴레옹이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공격을 나폴레옹이 한다고 해서 전투 시기를 꼭 나폴레옹이 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다른 곳, 그러니까 보헤미아나 헝가리로 또 후퇴한다면 전투 시기는 카알 대공이 원하는 시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입장에서 빨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으므로, 그렇게 카알 대공이 더 깊숙한 후방으로 후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도 더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전쟁에 승산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 그도 이기든 지든 빨리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더 유리하다고 보았거든요.


그에 비해 어디서 싸우느냐는 카알 대공의 결정 사항이었습니다.  쳐들어오는 나폴레옹을 어느 지점에서 막아서느냐의 문제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과연 카알 대공이 그 위치를 어디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훗날 사람들은 카알 대공이 멍청하게도 강변에서 도강을 막지 않았다고 떠들어댔지만 카알과 그의 참모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나름 신중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의 어느 곳에서 도강할 지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전체 병력을 강변 가까이에 바싹 붙여 놓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랬다가 나폴레옹이 엉뚱한 곳에서 도강한다면 제대로 대응을 못할 뿐더러, 강변 옆의 막사는 병사들의 건강에도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도나우 강변 뒤로 펼쳐진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여긴 강변에서 가까우니까 나폴레옹이 강변 어느 쪽에 상륙하든지 신속성과 공간적 유연성의 잇점을 모두 가지고 프랑스군을 요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도 여기서 싸워서 마침내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바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과 그의 참모들은 여기도 병력 전개의 적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싸워보니, 일단 마르히펠트는 평원답게 기병대가 활약하기에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지금도, 기병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크게 우위에 있는 병종이었습니다.  바로 4년 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완패한 오스트리아는 전쟁 배상금의 일부로 많은 수의 말을 빼앗겼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크게 강해졌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만큼 약해졌던 것입니다.  덕분에 지난 전투에서도,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 공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막혀 전과 확대를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마르히펠트 평원은 완전히 탁 트인 벌판은 아니었고, 여러 마을과 작은 숲, 그리고 시냇물이 얽혀 있는 곳이어서, 대규모의 보병대가 밀집 진형을 이루며 싸우기엔 다소 까다로운 곳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보병들은 부분적으로 산개하여 전투를 벌여야 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숙련된 프랑스 보병들의 장기였고, 경직된 밀집 전열에 대한 훈련만을 받아온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그런 산개 전투에서 무척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문에 에슬링에서 고작 1개 사단에 불과한 부데 사단이 에슬링의 커다란 곡물 창고를 근거지로 저항하자, 무려 3대1의 숫적 우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이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었지요.  


여기도 안된다 저기도 곤란하다... 그러면 결국 어디에서 싸워야 한단 말입니까 ?  거기에 대해 카알 대공의 참모인 빔펜(Maximilian von Wimpffen) 장군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과 비삼베르크(Bisamberg) 언덕을 추천했고, 긴 고민 끝에 카알 대공도 그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르히펠트를 위에서 틀어막는 두 고지대, 북서쪽의 비삼베르크와 북동쪽의 루스바흐입니다.)



카알 대공은 선택한 루스바흐 고원은 마르히펠트 평원의 북동쪽에, 그리고 비삼베르크는 북서쪽에 있었고, 마르히펠트 평원을 북쪽에서 감싸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지막한 높이에 불과하여, 루스바흐 고원은 고원이라는 명칭이 부끄럽게도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고작 10m 정도 더 높은 평원 지대로서, 마르히펠트와는 나름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경사면 경계선을 따라 고원과 같은 이름인 루스바흐 시냇물이 흘렀는데, 이 경사면 지대의 이름이 바그람(Wagram)이었고, 이 고원의 남쪽 경계면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이었습니다.  이 루스바흐 고원 지대에는 마르히펠트처럼 마을이 많았습니다.  도이치-바그람 남동쪽으로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이 있었고 고원의 동쪽 끝 부분에는 레오폴츠도르프(Leopoldsdorf)가 있었습니다.  이 루스바흐 고원 지대와 마르히펠트 평원과의 경사면을 따라서는 고원과 같은 이름인 루스바흐라는 이름의 시냇물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루스바흐의 고지대는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기점으로 해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비삼베르크 언덕과 연결되었는데, 그 연결 부위는 고지대가 아니라 평지였습니다.  


루스바흐 고원은 길쭉한 북서쪽의 비삼베르크 언덕과 함께 마르히펠트 평원 북쪽을 대략 반원형으로 감싸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고지대면을 점거한다면 남쪽에서 올라올 프랑스군을  크게 벌어진 집게 모양으로 양측에서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루스바흐 쪽을 공격한다면 비삼베르크 쪽의 오스트리아군에게 측면을 노출하게 되고, 비삼베르크를 쳐도 루스바흐 쪽에서 위협받게 되는 것이지요.  결정적으로, 평평한 도나우 강변에서, 비록 10m 높이지만 루스바흐나 비삼베르크의 높이는 결정적인 전술적 잇점을 주었습니다.  항공기가 없는 시대에 10m 높이를 점거한다는 것은 3가지 측면에서 크게 유리했습니다.  먼저, 인간은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인지라, 보병이든 기병이든 아래에서 위로 돌격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둘째, 고지에 위치한 보병이나 포병은 아래쪽에서 쏘아붙이는 사격과 포격으로부터 엄폐될 수 있었습니다.  세째, 아군은 아래 쪽의 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적의 관측으로부터는 완전히 은폐될 수 있었습니다.    


이 여러가지 잇점 중에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세번째 것이었습니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휘관이 적과 아군의 위치 및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필요한 곳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때도 나폴레옹은 전황 파악에 큰 애로 사항을 겪었습니다.  도나우 강변이 모두 평지이다 보니, 좀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아스페른의 교회 탑에서 그게 가능했는데, 그 지점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그럴 수도 없었지요.  결국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의 큰 나무가지에 줄사다리를 걸고 거기에 임시로 만든 그네 같은 것에 앉아서 전황을 파악하려고 애 썼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큰 나무가 필요한 지점마다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그 점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묵고 있던 쇤브룬(Schönbrunn) 궁전 정원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냅니다.  정원사가 높은 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때 사용하는 A자 모양의 사다리였지요.  실제로 나폴레옹이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에 사령부를 설치할 때, 그의 짐 중에는 정원사의 사다리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다리 높이는 기껏해야 2m 정도였고, 카알 대공 이하 전체 오스트리아군이 누릴 10m 높이가 주는 잇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지인 중에 하늘(시기)과 사람(병력)의 잇점은 나폴레옹이, 땅(지형)의 잇점은 카알 대공이 가진 상황에서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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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6.06 12:58

피아베 전투에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막도날드 장군의 실질적인 지휘 하에 신속하게 북상하여 오스트리아 침공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행선지는 빈,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의 다시 한번 도나우 도강을 계획하고 있던 로바우 섬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나름 많았습니다.  곳곳의 고개길과 도시들을 지키는 요새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이미 카알 대공과 요한 대공,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에 차출된 마당에 그런 요새들을 지키는 병력은 충분치 않았습니다.  가령 5월 17일 타르비스(Tarvis) 전투에서 말보르게토(Malborghetto) 요새는 방어하기 아주 좋은 고지에 위치한 튼튼한 요새였으나, 6천의 오스트리아군으로 2만의 이탈리아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5월 30일, 그라츠(Graz) 같은 도시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은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차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고 무저항으로 도시를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곳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쾌속 질주를 계속했습니다.  



(구글 맵에서 찾아본 피아베에서 타르비시오, 그라츠를 거쳐 노이슈타트까지 가는 길의 거리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행군 경로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마침내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와 합류한 것은 6월 4일, 빈 남쪽 50km 지점에 있는 노이슈타트(Neustadt)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라츠에서 노이슈타트까지 130km를 5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26km씩 행군한 셈이고, 이는 당시 그랑 다르메 본진의 수준에 비해서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장 빈과 로바우 섬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뒤를 쫓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곧장 카알 대공 쪽으로 가지 않고 옆 걸음질을 쳐 헝가리 쪽으로 빠졌거든요.  외젠은 강행군을 했던 자신의 군대를 노이슈타트에서 2일간 휴식 시킨 뒤, 다시 그 뒤를 계속 추격해야 했습니다.  외젠은 결국 6월 14일, 노이슈타트 동쪽 약 120km 떨어진 랍(Raab, 헝가리어로는 Győr)에서 요한 대공을 따라잡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둡니다.  패배한 요한 대공은 더 동쪽으로 후퇴한 뒤 도나우 강을 건너 카알 대공 쪽으로 향했고, 승리한 외젠도 다시 서북쪽, 즉 로바우 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외젠은 7월 5일 벌어지는 바그람 전투에 2만3천의 병력으로 참전할 수 있었으나, 요한은 고작 1만2천의 병력을 그것도 전투가 이미 끝난 뒤에나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젠이 곧장 로바우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군대는 여전히 랍 지역에서 요한 대공의 잔존 세력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랍 인근에 주둔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외젠과 막도날드가 나폴레옹의 소환 명령을 받은 것은 7월 1일이었고,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로바우 섬을 면한 도나우 강변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7월 4일 저녁 9시경이 되어서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이런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가장 큰 패착은 도나우 강을 건널 부교를 시간에 쫓겨 너무 부실하게 구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를 뽑자면 결국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 두 문제에 의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처럼 도강지점마다 다리를 한개씩 만들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끝난지 약 1주일 뒤인 6월 1일부터 시작된 이 다리 건설의 책임자는 지난 번에도 다리를 지었던 공병단 지휘관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장군이었습니다.  이는 나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데, 나폴레옹이 아스페른-에슬링 패전의 책임을 최소한 공병대 측에 떠넘기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을 패전이라고 적어도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난 번 다리가 끊어진 책임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요행을 바랐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란이 죽었을 때, 아마 모르긴 해도 베르트랑은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부교 건설의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요.  아마 스페인 세고비아(Segovia)에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 수도교보다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섬으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2개 지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롭그룬트(Lobgrund)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3개나 지었고, 롭그룬트에서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짧은 다리는 훨씬 더 많이 지었습니다.  지난번 끊어졌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아무래도 가장 긴 부분인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단순히 튼튼하게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지난번처럼 자연적으로 떠내려오거나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부목이나 보트 등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철저한 방비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이 부교들 상류 쪽에는 일련의 말뚝을 촘촘히 박아 넣어 일종의 부목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약 30척의 대형 보트에 소형 대포까지 장착하여 상류 쪽을 순찰했습니다.  무거운 보트를 떠내려 보내려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베르트랑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로바우에서 도나우 북안 쪽으로 이어지는 최종 다리 부분이었습니다.  로바우 섬까지는 이미 프랑스군이 확보한 지역이었으나, 도나우 북안은 오스트리아군 장악 지역이었으므로, 도강 순간에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신속하게 다리를 놓은 뒤 일제히 대군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도 지난 번 전투에서 한번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퇴로가 막히는 아찔한 상황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르트랑은 이 부분을 위해 미리 구축된 조립식 부교를 무려 4개나 준비했습니다.  그 4개의 다리 중 하나는 이음매 없이 전체가 단 하나의 통판으로 만들어진 다리로서, 결전의 날이 되면 로바우 섬 강안에 한쪽을 고정시킨 뒤, 강물에 이 다리를 띄워 보내 90도 회전시켜 도나우 북안에 철컥 이어지도록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강습용 다리였지요.  이런 준비는 6월 말일 경 완료되었고, 나폴레옹은 7월 2일자 대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자랑스럽게 '프랑스군에게 도나우 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병력 동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리 건설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취했습니다.  즉,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더라도 거의 돌다리 수준으로 튼튼한 다리를 만반의 준비를 갖춰 준비한 것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는 모든 위험 부담을 다 끌어 안았습니다.  병력 동원을 적게 했냐는 뜻이냐 하면 전혀 반대로서, 다른 전선이 지나치게 취약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이번 전투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는 서쪽, 즉 본국과의 통신로 확보를 위해 후방에 배치해놓았던 병력을 모조리 소환하여 집결시켰습니다.  가령 빈 서쪽,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는 교통의 요지로서 프랑스군이 본국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주요 후방 근거지였습니다.  여기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전에도 한번 카알 대공이 병력을 보내 공격한 바 있고, 또 아스페른-에슬링 이후에도 오스트리아군이 재공격을 고려한 바 있을 정도의 요충지였지요.  이렇게 중요한 이 곳은 베르나도트(Bernadotte)의 제9 군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제9 군단조차 불러 들였습니다.  라구사(Ragusa) 공작으로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몽(Marmont)에게도 1만의 병력을 끌고 올라오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 이야기는 이미 들으셨지요.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모든 조심성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린츠 같은 곳은 너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지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한창 반란이 진행 중이던 티롤의 진압을 위해 투입했던 단치히 공작 르페브르(Lefebvre)의 제7 군단, 사실상 거의 전원이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진 바이에른(Bayern) 군단을 린츠로 소환했습니다.  이 덕분에 티롤 반란의 수장 호퍼(Hoffer)와 티롤 반란군은 티롤의 수도 인스부르크(Innsbruck)를 재탈환하고 기세를 올렸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산골짝 촌놈들이 기세를 올리건 말건, 모든 상황은 바로 이 곳, 도나우 강 건너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서 결판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은 6월 중순 경까지 빈 주변에 무려 24만의 병력을 끌어모았습니다.  물론 이들을 모조리 공세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이중 로바우 섬으로부터 도나우 강을 건너 공세에 나설 병력은 14만 보병에 2만8천의 기병, 그리고 488문의 대포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평생 최대의 병력 규모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준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동안,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탄탄한 기지가 없어서 궁지에 몰린 바가 있었지요.  그 기억을 되살려, 나폴레옹은 대-오스트리아 전선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 전체를 철옹성으로 중무장시키기로 합니다.  6월 말경, 부교들이 준비 완료될 즈음해서는 로바우 섬에는 무려 14개소의 포대가 구축되었고 거기에는 도나우 강 북안으로 건너갈 488문의 대포 외에도 124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설치되었습니다.  여기 뿐만 아니라 도나우 강 내에 있는 이런저런 작은 섬들에도 적절한 위치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중무장을 통해 최악의 경우에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진입로이자 퇴각로가 될 로바우 섬 근처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한 것이지요.  이 조치가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나폴레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국 큰 역할을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런 대대적인 준비를 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바우 섬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 작업을 펼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왜 카알 대공이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의 이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나우 강 북안에서 로바우 섬 대부분의 위치가 포 사정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대포를 대규모로 끌고 나와 화끈한 대포알 세례를 퍼부었다면 로바우 섬을 한폭의 지옥도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그런 방해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병력을 도나우 강 북단에서 후방 멀찍이 후퇴시켰습니다.  로바우 섬에 면한 도나우 강 북단에도 일부 진지선을 구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로바우 섬의 북쪽 강안에만 그랬을 뿐이고, 넓은 로바우 섬을 면하고 있는 다른 측면 대부분은 아무 진지 구축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적을 공격할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때라는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바로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폴레옹을 그런 방법으로 패배시킨 바 있는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불가라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건 추정이 아니라 팩트인데, 카알 대공은 더 이상의 전투를 원치 않았고, 이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체면도 적절한 선에서 살려줘야 했고, 구태어 불필요한 도발을 걸어 확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황제 프란츠 1세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정의 대부분은 철없는 주전파였고, 카알 대공의 이런 계획은 쓸데없이 나폴레옹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또 카알 대공은 이번에도 나폴레옹이 반드시 로바우 섬 쪽에서 지난번처럼 도강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쪽 방면에서 허장성세를 일으켜 오스트리아군을 집중시킨 뒤 다른 지점에서 도하는 것에도 대비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강변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아 고착화된 진지에 대군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더 먼 후방에서 내선 기동의 우위를 유지하며 어느 쪽에서 도강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에 대부대를 유지하지 않으려 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병사들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강가는 필연적으로 습한 지역이었고, 모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는 전투에서 총이나 대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 병사들보다는 이질과 열병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카알 대공의 이런 배려는 꽤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로바우 섬의 진지 구축을 위한 병사들 외에는 대부분의 병력은 빈 인근 3일 행군 거리 내에 포진시켰을 뿐, 강변에 대군을 몇 주씩 주둔시키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카알 대공이 힘을 기울인 것은 병력 집결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된 지역인 보헤미아(체코) 지역을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owrat) 장군의 제3 군단을 소환하고, 제국 내 각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국민방위군(Landwehr, 일종의 예비군 내지는 민병대)까지 휘하로 소집했습니다.  이건 사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젖먹던 힘까지 짜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원래 30~50대의 중산층 시민들을 비상근 형태로 훈련시키고 조직시킨 뒤 어디까지나 거주 지역의 수비대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서, 이들에게 대포알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횡대-종대의 복잡한 대열 변경이나 하루 30km의 강행군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당시 카알 대공의 병력은 약 9만이었는데, 이중 2만 정도가 전사-부상-포로 및 행방불명으로 상실되었으므로 7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3군단 약 1만8천과 국민방위군 등을 끌어모아 약 13만7천, 414문의 대포를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이럴 때 두 동생이 거느린 5만의 병력이었습니다.  개전 초기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뜻하지 않게 완강히 저항하는 폴란드인들 때문에 별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폴란드에서 밀려나 오스트리아령 갈리시아(Galici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3만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마르히펠트에 나타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폴란드라는 벌집을 잘못 건드린 탓에, 바르샤바 공국의 포니아토프스키 왕자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오히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침범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별로 적극적인 공격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동맹국인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국경 인근에 대기 중이었으므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곳을 텅 비워두고 마르히펠트로 내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Inner army of Austria)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던 이 군대는 원래부터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피아베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군세가 더 축소되었고, 결정적으로 요한 대공이 뭔 생각에서였는지 이 군대를 구성하는 2개 군단 중 하나를 그 군단의 본거지인 류블랴나(오늘날의 슬로베니아)로 되돌려 보내는 바람에 2만 정도로 크게 축소된 상태로 헝가리로 되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저 먼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Dalmatia)의 마르몽에게도 '1만명이라도 좋으니 다 끌고 올라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온갖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고 있는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결코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이랍시고 군단 하나를 그쪽으로 떼놓고 온 것은 정말 아쉬운 행동이었습니다.  어차피 류블랴나를 위협할 프랑스군은 외젠의 이탈리아군과 마르몽의 달마시아군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폴레옹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요한 대공의 잔존 2만 병력이라도 무척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요한 대공은 결국 형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군이 바그람에서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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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5.14 23:24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 같은 괴물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전투가 끝난 다음날부터 무려 36시간 동안 아무런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나선 그에게는 어지간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패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인 5월 23일 아침부터 나폴레옹은 이미 이 처참한 패배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된 선전 도구인 육군 회보(Le 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실릴 전투 결과에 대해,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 가야 했고, 프랑스군이 전장의 지배자로 남았다'라고 뻔뻔스럽게 구술했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꽤 먼 선언문이었지요.


휘하 장군들은 아예 비엔나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군단들을 재정비하고 패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단칼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일단 철수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이 비엔나로 철수하면 카알 대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를 것이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비엔나에 집착하지 않고 아예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 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은 둑이 무너지듯 프랑스-독일의 경계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는 그렇게 프랑스군의 후방을 끊는 작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보헤미아(체코)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에 기각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슨 생각을 하건 나폴레옹은 철수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답게 식량과 탄약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프랑스군은 여유있게 재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빈과 린츠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기 전에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 후방을 끊을 목적으로 이미 린츠 점령 작전을 시도한 바 있었지요.  물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군은 당연히 큰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행복과 기쁨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알 대공의 참모들은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 이전과 동일한 상태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알 대공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깔끔하지 않은 승리를 분석해볼 수록 프랑스군과 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군의 수적 우세가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격멸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카알 대공은 이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나폴레옹과의 평화 협상을 벌이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변변한 동맹도 없이 감히 혼자서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것은 혼자 힘으로도 나폴레옹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일단 자신이 불을 당기기만 하면 프랑스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바이에른과 작센, 뷔르템베르크 및 프로이센의 독일 민족이 대거 봉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굳은 동맹인 러시아도 내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이 첫 패배를 겪게 된다면 반-나폴레옹 연합전선에 러시아도 뛰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의 변변한 동맹국이라고는 저 멀리 떨어진 섬나라 영국 하나였는데, 영국은 네덜란드나 북부 독일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켜 프랑스의 뒤통수를 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모두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대로 반-프랑스의 깃발 하에 봉기한 것은 저 티롤 산골짜기 촌놈들 뿐이었습니다.  이 산골짜기 촌사람들은 놀랍게도 잘 싸워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을 묶어두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바이에른이나 작센은 여전히 나폴레옹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그의 깃발 아래 오스트리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프로이센은 드디어 찾아온 복수 기회 앞에서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원래부터 좀 덜 떨어진 편이었던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여전히 기가 죽어 있었지만, 그의 각료들은 모두 이런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되며 당장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심지어 프로이센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까지 던졌습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서 참전해준다면 과거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폴란드 바르샤바 공국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힘이 아직 건재한데다, 설령 오스트리아가 이긴다고 해도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가 기세등등해질텐데, 그건 독일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프로이센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상륙이요 ?  언제나 그렇지만 영국은 세치 혓바닥과 기니 금화만 뿌려댈 뿐, 자신들이 피를 흘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는 그 알량한 기니 금화조차 충분히 뿌리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간곡히 요청한 추가적 전쟁 보조금 지급조차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라인 연방의 지도입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위성국가 베스트팔렌 왕국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계 주민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기대가 완전히 헛된 망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학수고대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땅과 이런저런 독일계 소공국들을 모아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에서는 그 허수아비 왕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Jerome)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베스트팔렌에서도 병력이 대거 징집되어 나폴레옹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파병되자, 무력의 공백 상황에서 반-나폴레옹 정서가 심각하게 무르익었습니다.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 불을 지른 것은 뜻 밖에도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정규 경기병 연대였습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소위로 참전했던 쉴(Ferdinand von Schill) 소령은 당시 베를린에서 경기병 연대 하나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쉴 소령은 제4차 동맹전쟁의 패배 이후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 등의 개혁론자들과 함께 프로이센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 운동이 빌헬름 3세에 의해 불법화되자, 아예 애국적 무장 봉기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5월 초 부대 기동 훈련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경기병 연대를 통째로 끌고 베스트팔렌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규모 베스트팔렌 수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오히려 현지 주민들로부터 자원병을 추가 모집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한 빌헬름 3세가 기대와는 달리 쉴 소령과 그의 경기병 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자 기가 죽었고, 프랑스에 충성하는 네덜란드군과 덴마크군이 쳐들어오자 속절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쉴 소령의 반란군은 5월 말 결국 항구 도시인 스트랄순트(Stralsund)에서 패배했고, 쉴 소령도 전사해버렸습니다.   




(그가 전사한 스트랄순트에 건립되어 있는 쉴 소령의 동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희망은 뜻하지 않은 패배에 나폴레옹이 시무룩해진 이 순간에 재빨리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는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판단했습니다.  이건 아마 옳은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카알 대공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체면을 완전히 구긴 상태에서 누군가와 화평을 맺을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화평할 생각이 전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평을 원하지 않는 중요 인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카알 대공의 형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1세였습니다.  


(이건 23년 후인 1832년 그려진 프란츠 1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시민 계급의 혁명으로 끓어오르던 19세기 초 유럽에서 개혁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꼽힙니다.)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있어 카알 대공은 밥만 축내는 여러 동생들 중 믿을 만한 능력을 갖춘 유일한 형제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의 인기를 갉아먹는 잠재적 경쟁자였습니다.  일찌기 조카 프란츠 1세의 교육을 맡았던 전임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는 어린 프란츠 1세에 대해 '자기 한몸 보존이 무엇보다 소중한, 전형적인 마마 보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 프란츠 1세에게 있어 나폴레옹 못지 않게 견제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그는 카알 대공을 오스트리아 전군의 원수(generalissimus)로 임명해놓고도, 카알 대공을 젖히고 그 참모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내리는 등 카알 대공의 군내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었습니다.  


프란츠 1세의 입장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나폴레옹과 화평할 생각을 하지말고 싸워 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다 거기서 죽만 쑤던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가 거기서 물러나 카알 대공과 합류하고, 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도 돌아오면,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에게 맞설 충분한 병력을 갖추게 되는데 왜 화평을 하냐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프로이센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양보하겠다는 등의 굉장한 제안까지 해놓았으므로, 결국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것이 프란츠 1세의 여전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카알 대공의 다소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매파 장군들은 카알 대공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프란츠 1세의 그런 강경한 입장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뜩이나 비관적이었던 카알 대공의 기분을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제 정신 박힌 사람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궁정과 군 수뇌부를 휩쓸고 있던 과도한 자아도취와 근거없는 자신감에 자신까지 휩쓸린다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를 앞두고 있던 6월 말, 그의 삼촌인 테쉔(Teschen) 공작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쓸 정도로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저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왕조를 위태롭게 할 만한 모험은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원래 싸움은 기 싸움이 절반이라고 하는데,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의 2차전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카알이 절반은 지고 들어가는 경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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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4.23 21:43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나 오스트리아군에게나 전례없이 길고도 치열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양측은 거의 48시간 동안 잠도 거의 먹지도 못 자고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거나 싸웠지요.  5월 22일 오후 5시 이후 이 대규모 살륙전이 서서히 잦아든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양측의 상황은 이틀 전과 사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스페른에서는 마세나의 제4 군단이 힐러와 벨가르드의 2개 군단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면서도 조금씩 후퇴하며, 결국 이때 즈음엔 아스페른이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로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세나의 군단은 여전히 맹렬하게 저항할 병력과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힐러와 벨가르드의 군단들은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후퇴는 무질서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오스트리아군은 그 뒤를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마세나의 제4 군단 잔여 병력은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고 아스페른 외곽에서 로바우섬으로의 철수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대편의 에슬링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비록 에슬링 전체가 포격과 화재로 쑥대밭이 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적어도 이 곳에서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랍의 근위대에게 축출된 이후, 두번 다시 에슬링을 상대로 반격을 꾀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우월한 포병 전력을 내세워 프랑스군을 계속 두들겼고, 이는 란을 비롯한 많은 프랑스군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포병 화력은 장거리에서 적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기에는 너무 약한 편이었고,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이틀전 전투 시작 이전과 비슷한 전선으로 되돌아온 셈이 되었지요.  그 많은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


해가 지자, 카알 대공은 애써 손에 넣은 아스페른에 수비대를 남겨놓고는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먼 곳으로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고, 최소한 이 날 전투는 여기서 끝이 난 것 같으니, 프랑스 포병의 포격 사정권 밖으로 최소한 보병과 기병은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볼 필요는 없고, 혹시 다음날 또 치열한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니 병사들을 먹이고 재워 재충전시키는 것이 더 급하다고 본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르쉐펠트의 벌판으로 철수한 뒤, 그 자리에 털썩 무너져 쓰러졌습니다.  정말 길고도 힘든 전투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로바우섬으로 질서있는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의 교두보에는 이미 든든한 토루를 쌓아 방어 진지를 구축해 두었는데, 이 곳에는 여전히 일부 병력을 남겨 지키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에서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강변까지 쫓아나와 밤새도록 대포알(roundshot)과 폭발탄(bomb, shell)을 쏘아댔다면, 로바우섬에 빽빽히 집결한 프랑스군은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조잡한 포병 화력으로는 프랑스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밤새도록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라는 공포심을 프랑스군에게 안겨주어,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전투를 위한 체력 보충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카알 대공은 그런 집요함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카알 대공의 그런 결정은 이틀 동안, 특히 5월 22일 당일날 카알 대공 자신이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웠다는 점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오스트리아군 최고 지휘관인 왕족들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지휘관 타이틀만을 쥐고 더 멀리 후방 안전한 텐트에서 펜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전에는 비슷했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5월 22일 란이 직접 이끈 중앙 공격에 오스트리아군 전선이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알 대공은 패주하는 병사들을 가로 막고 돌려세우는 등, 자신의 몸을 적탄에 노출시켜가며 현장 지휘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의 맹장 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카알 대공의 이런 헌신적인 지휘의 공이 컸습니다.  5월 22일의 지휘는 카알 대공의 인생 지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만큼 카알 대공 자신도 기진맥진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부하들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공감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카알 대공입니다.  이 양반의 인생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이틀 간의 전투 내내, 안전한 로바우 섬이나 강변 등 후방에서 지휘했습니다.  근위병 쿠아녜(Coignet)의 수기에 따르면, 5월 22일 아침 나폴레옹이 강변에서 전투 현장으로 이동하려 할 때,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적의 대포알에 맞아 쓰러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쿠아녜를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이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으신다면 우리 근위대는 한발짝도 전진하지 않겠다'라고 나폴레옹의 후퇴를 강요했기 때문에 나폴레옹도 어쩔 수 없이 후방으로 물러났다고는 합니다만... 글쎄요.  확실한 것은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아르콜레(Arcole) 다리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며 싸우던 나폴레옹은 1809년 도나우 강변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1796년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입니다.  저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기가 깃발을 들고 앞장 서서 다리 위로 돌격한 것처럼 저런 그림을 그리게 했지만, 정작 저 장면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의 부하 오쥬로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병력을 물린 덕분에, 더 이상의 퇴로가 끊긴 로바우 섬의 프랑스군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가득찬 부상병들도 아무 치료를 못 받았고 후송도 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 없이 살아남은 병력들도 아무런 보급품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벽 1시가 되어 더 이상 소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폴레옹은 쪽배를 타고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남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건너갔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 장교 1명을 함께 쪽배에 태워 후송시키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의문이 드는 것은 그의 절친 란조차도 깨끗한 물 한모금 없이 담요 한장 덮지 못하고 로바우 섬에 방치된 상태였는데, 적군 장교에게는 그런 인도주의적 아량을 베풀었다는 점이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패전 속에서도 '인도주의자 나폴레옹'이라는 허명을 얻을 선전거리를 만드려는 계략이 아닌가 의심도 듭니다만, 캄캄한 밤 수많은 병사들과 부상병들이 뒤엉킨 상황에서 부상을 입은 란을 금방 찾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바우 섬에는 비축된 식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르보의 수기에 따르면 그날 밤 많은 병사들은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많이 있던 죽은 군마의 고기를 잘라내어 흉갑 기병의 갑옷을 냄비 삼고 화약을 소금 삼아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화약을 고기에 넣는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고 건강에 해로울 것 같긴 합니다만, 어차피 당시 화약은 황과 숯, 그리고 질산칼륨으로 되어 있었고 질산칼륨 덕분에 화약은 짠 맛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당시 머스켓 소총 장전 방식은 병사들의 입 안에 화약이 항상 조금씩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니 병사들은 화약으로 짠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1815년 대포알 구멍이 뚫린 프랑스 흉갑기병의 가슴받이 갑옷이라고 구글에 나옵니다만... 진짜 그런 물건치고는 너무 상태가 좋네요.)


(흑색화약은 75%의 초석과 15%의 숯, 그리고 10%의 유황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석은 영어로 saltpeter라고 하지요.  짠맛이 난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맛을 본 적은 없습니다.)


5월 23일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트들을 이용한 부상자들의 소개가 시작되었고, 다리를 절단한 란도 이때서야 도나우 남안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는 하루 뒤인 24일에야 다시 연결되었지만, 많은 병사들은 결국 로바우 섬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공격하겠다고 결심하여 즉각 그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 이곳저곳에 보루와 포대를 설치하여 군사 요새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에라도 카알 대공이 강변으로 대포들을 끌고 와 로바우 섬에서 무쇠와 화약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벌였다면 어땠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재정비가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도나우 강 좌안으로의 재도강 준비를 방해받지 않고 착실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분명히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였습니다.  왜 카알 대공이 이 값진 승리를 100% 활용하여 22일 밤 프랑스군을 더 몰아 붙이지 않았는지, 또 왜 23일~24일에 로바우 섬에 포격이라도 가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마치 승리가 간절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의 후속 작전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이틀간의 전투가 너무나 치열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너무 컸고 또 병사들이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어지간한 전투에서 패배한 측의 (포로를 제외한) 전상자 비율은 총병력 대비 10~15% 정도가 상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은 왕가끼리의 영토와 세수를 위한 비즈니스의 연장일 뿐, 뭐 불구대천 원수지간끼리의 너죽고나살자식의 살육전은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면 물러나는 것이 상식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포로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총병력의 20% 넘는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비율이 무려 23%였습니다.  사상자 비율로만 본다면 아마 참담한 완패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장교들과 병사들의 충격은 말할 나위 없이 컸을 것이고, 그런 참극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본 카알 대공도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이 더 공격하지 않은 것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전례없이 승패가 뚜렷하게 드러났던 아우스테를리츠,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여기서 전상자 비율 계산할 때 포로는 제외했습니다.)


이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그 정도였는데, 진 프랑스군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입니다.  전투 후 전상자 숫자에 대해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상세히 포로를 합해 23,34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애매모호한 표현만 쓰며 정확한 전상자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개 오스트리아군과 비슷한 2만3천 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적은 병력을 동원했는데 적과 비슷한 수의 사상자를 냈으니, 프랑스군이 더 효율적으로 싸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측면에서 보면 무려 35%에 달했습니다.  함께 전장으로 나간 전우 3명 중 1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히 부대 단위로서의 기능을 잃을 정도의 대참패였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이긴 측이나 진 측이나 예전에 비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측이나 패배한 측이나 왜 이렇게 큰 인명 피해가 났는가에 대해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실 명백하고 단순합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 나폴레옹 전술의 요체는 기동전이었습니다.  적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하여 병력의 이동과 집결을 자유자재로 펼쳤고, 그를 통해 전체적인 병력은 적보다 더 적을지라도, 정작 전투 현장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 그 승리의 비결이었지요.  그러나 다리가 끊긴 도나우 강변에서는 그런 전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 적은 병력으로 무리하게 정면 중앙 돌파를 노렸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일방적인 전투가 아닌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결국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흔히 전장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야말로 천재에 가까운 인간이었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나이가 들면서 명민함이 떨어지고, 또 관록이 쌓이고 신분이 높아지면서 교만함이 커진 것이 이런 참극을 불러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돋보인 전투는 4월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1812년 러시아 원정때까지 나폴레옹의 지휘는 평범한 물량전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809년 4월 19일 이후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입니다.  베르티에의 실수로 인해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나폴레옹은 도착하자마자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단번에 뒤집고 카알 대공으로 하여금 대대적 후퇴를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전투가 1813년 이전까지는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보여준 거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양측의 피해가 커진 원인은 또 있습니다.  아마 1805년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스페른-에슬링 두번째 날, 란이 직접 지휘한 프랑스군 생-일레르 사단의 공격에 중앙을 돌파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평범한 정면 공격이라도 큰 전과를 거둘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잠깐 동안은 거의 돌파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까지 갔지만) 결국 버티어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이를 카알 대공의 개인적 용기와 리더쉽에 의한 승리라고 떠벌였지만, 수천 수만명의 병사들이 뒤엉키는 전장터에서 개인 하나가 발휘하는 용기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버티어낸 것은 오스트리아 병사 개개인이 1805년 패전 이후 카알 대공의 대대적 군 개편에 의해 많이 바뀐 상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오스트리아군은 일부 상비군 외에는 필요할 때마다 징집되어 동원되는 군대였고, 따라서 당시 전장에서 요구되는 복잡한 대형 변환 등이나 개인 전술 등에 숙련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전국민 개병제에 의해 징집되는 상비군 형태였으므로 훨씬 더 많은 훈련을 받고 또 많은 전쟁으로 인해 숙련된 군대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군 개혁은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즉 헝가리나 세르비아 등을 제외한 독일계 영토)에서의 전면적 징집제 실시 및 군단 제도의 도입 등 프랑스군을 거의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비록 귀족들로 구성된 지휘부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했으나, 병사들 하나하나의 자질 면이나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 사병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나 발칸 반도, 네덜란드나 체코 등에서 프랑스군과 싸울 때, 대체 자기들이 왜 이런 이역 만리에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에 맞서 마르쉐펠트에 펼쳐진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4년 전 비엔나를 점령할 때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를 톡톡히 털어가는 것을 본 뒤인지라, 여기서 또 그런 피해와 굴욕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동기 부여가 된 상태였지요.  나폴레옹은 이번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프랑스군의 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자체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을 시작하며, 나폴레옹은 '내 군대가 이렇게 잘 정비되고 수가 많았던 적이 없다'라고 스스로 자랑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닌 것처럼 프랑스군도 더 이상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는 불로뉴(Boulogne) 병영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영국 방면군을 모체로 하는 대부대로서, 그야말로 정예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들을 끊임없이 전장으로 끌고 다니며 소비하다, 결국 1807년 동프로이센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1809년 도나우 강변에 도착한 이들은 더 이상 다년간의 전투로 다져진 고참병들이 아니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신병들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또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동원된 나폴레옹 휘하 부대 중에는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 등 많은 독일 소국들의 군대와 북부 이탈리아군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강제로 동원된 동맹군들이 과거의 그랑 다르메처럼 열정적으로 싸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라이플 소총을 든 바이에른 유격병입니다.  이런 병사들은 특히 1812년 러시아로 떠나면서 대체 왜 자기가 머나먼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섞여, 결국 나폴레옹은 모두가 인정하는 나폴레옹 개인의 첫 패배가 이곳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적 신화를 자랑하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첫 패배 소식은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은 이미 이곳저곳에서 많이 패배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아일라우 전투도 사실상 나폴레옹의 개인적 패배였고, 과거 1797년 만토바 구원 작전에서 알빈치(József Alvinczi von Borberek)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패배한 적도 있었고, 시리아 아크레에서의 패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패배들은 황제가 되기 전의 일이거나, 저 머나먼 동유럽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럼프 못지 않게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조작질에 익숙한 선동가였으므로 아일라우 전투 같은 것은 '베니히센이 물러났으므로 나의 승리'라는 식으로 포장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수도 빈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진 이 대규모 전투의 승부는 도저히 숨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체면을 구긴 나폴레옹은 '최전선에서 먼저 물러간 것은 카알 대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승리다'라든가 '내가 진 것은 도나우 강에게 진 것이다, 오스트리아군 따위에게 진 것이 아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성질을 부렸습니다.  대체 이겼다는 것인지 졌다는 것인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스스로도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에게 졌다'라고 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나폴레옹이 과거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것은 운을 바라고 도박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수한 지휘관들이 통솔하는 잘 훈련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치밀한 지리 연구와 엄밀한 행군 속도 계산에 의해 병참과 병력 이동 계획을 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809년 5월 22일 아침, 그는 이미 여러번 끊어진 바 있는 로바우 섬 남단의 위태로운 부교가 언제든 또 끊어질 확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자만심과 내가 펼치는 작전인데 뭔가 당연히 행운이 따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부교는 또 끊어졌고, 나폴레옹은 그 댓가를 란의 목숨과 패배로 치루어야 했습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5에서 악당 솔로몬 레인이 이단 헌트(톰 크루즈)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지요.


Ethan Hunt is a gambler. And one day his luck will run out.  (이단 헌트는 갬블러야.  언젠가는 그의 운빨도 끝나게 되어 있어.)



나폴레옹은 톰 크루즈와는 달리 갬블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갬블링을 했고, 그러자마자 운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분명 이 전투는 카알 대공의 승리였고 나폴레옹의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전쟁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 의미있는 승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를 시작할 때 프랑스군의 도강을 중간에 격파하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작전을 쓰지 않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도강을 다 마친 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이려 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시의 국가적 역량으로 볼 때, 프랑스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격차는 너무나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도강 중간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작은 패배를 안겨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럴 경우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더 많은 준비를 해서 다시 전투를 벌이려 할 것이 틀림없으며, 그럴 경우 무의미한 희생만 치를 뿐 오스트리아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알 대공의 목표는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유리했는데, 카알 대공의 생각에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이 패배를 인정할 만한 정정당당한 전투를 벌여, 어떻게든 거기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바우 섬 남단의 부교가 끊어지는 순간,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지게 되었지만 핑계거리를 찾았던 것이고, 카알 대공이 원하던 후회없는 정정당당한 전투는 날아가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카알 대공의 그런 생각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도나우 강 탓으로 돌렸고, 그에게는 구겨진 그의 체면을 세워줄 승리가 간절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바그람에서 마주 서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의 역량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다리부터 튼튼히...)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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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26 21:14

5월 22일 오전 8시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의 안색은 상당히 침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영웅다운 침착함이다 아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을 못한 것이다 등등 말이 많습니다만, Harold Parker의 'Three Napoleonic Battles'라는 책의 주석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날 부교는 한번이 아니라 두번 끊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7시에 작은 규모로 끊어졌고 이는 곧 수리될 수 있었으나, 곧 이어 9시에는 도저히 그날 중으로는 수리가 안 될 지경으로 크게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전 8시 경 나폴레옹이 받은 보고는 그 첫번째의 대수롭지 않은 파손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책과 인터넷 사이트마다 몇 시 경에 다리가 끊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각기 다른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도 제각기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교, 정확하게는 프랑스군의 도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도나우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을 연결하는 긴 부교가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교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그다지 튼튼한 물건이 아닌데다, 든든한 부교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품, 즉 닻이 없는 상황에서 포도탄과 어부들의 통발로 대충 만든 대용품으로 건설한 부교이다보니, 그냥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슈바르츠발트에서 예년보다 일찍 눈이 녹으면서 평소라면 6월에나 있을 도나우 강의 범람이 일찍 시작되어 물결이 무척 거셌고, 또 뿌리 뽑힌 나무나 나무가지 더미 같은 잡동사니들도 많이 떠내려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닻이라는 물건은 자동차에서 브레이크처럼 중요한 물건입니다.  특히 부교처럼 항해보다는 정박이 중요한 임무인 보트에게 있어서, 닻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품이었습니다.  잔잔한 물결에서는 어부의 통발에 쇳덩이를 대충 쟁여 넣은 것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센 물결에서는 튼튼한 닻이 꼭 필요했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부교가 끊어진 것은 카알 대공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말려든 결과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적이 절반 정도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이 양분된 상태에서 각개격파하는 것은 모든 지휘관이 꿈꾸는 일인데, 강이 그렇게 적을 양분해주니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적이 부교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는 경우 그 부교를 끊어놓는다면 이미 강을 건넌 적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카알 대공이 일부러 도나우 강 좌안을 비워둔 뒤, 미리 준비해둔 통나무나 무거운 돌을 실은 보트들을 급류에 떠내려 보내서 부교를 파괴했다는 것이 무척 그럴싸한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5월 22일 운명의 아침에 부교가 크게 부서진 것은 확실히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대형 보트 때문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보트에 큼직한 물레방아를 통째로 실은 보트 하나가 급류에 떠내려 와 프랑스군의 부교를 들이 받았고, 이로 인해 부교를 구성하던 여러 척의 바지선이 떠내려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카알 대공의 작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부교를 끊어서 다부의 제3 군단이 도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카알 대공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 달갑지 않은 전쟁은 카알 대공이 애써 키워놓은 군단들을 재정 문제로 인해 해체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국 땅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불리한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에서 바라는 바는 나폴레옹과 건곤일척 후회없는 일전을 벌여 망하든 흥하든 추가적인 전투가 없도록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교가 끊어져 다부의 제3 군단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나폴레옹은 패배한다고 해도 부교 핑계를 대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다시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희생을 동반하는 제2, 제3의 전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을 텅 비워놓았던 것은 뭔가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폴레옹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안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설령 오스트리아군이 의도적으로 보트를 떠밀어 보냈다고 해도, 많은 섬이 얽혀 여러 개의 지류로 나누어지는 넓은 도나우강에서, 그것도 우안이 아니라 좌안에서 떠내려보낸 보트가 주변 섬 모래톱에 좌초하지 않고 정확하게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 사이의 지류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부교를 끊는 것에 전체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보트 한두 척만 떠내려 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당한 크기의 대형 보트를 대규모로 떠내려 보냈을텐데, 프랑스군의 기록에도 오스트리아군의 기록에도 그런 대형 보트의 대규모 함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상류에 있던 일부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부교를 보고 즉흥적으로 떠내려보낸 보트 몇 척 중 하나가 럭키 스트라이크를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좌안에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우안에서 보트 한 두척을 떠내려 보내면서 그것이 정확하게 로바우섬 서쪽 지류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요행수를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말이 있지요.  1931년에 발행된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라는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통계치에서 비롯된 이 법칙은, 산업 현장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생기는 큰 사고가 하나 생길 때, 평균적으로 300여건의 부상자없는 작은 사고와 29건의 작은 부상만 따르는 작은 사고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뭔가 작은 부주의와 소홀함이 쌓이고 쌓여 큰 재난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법칙이 1809년 5월 22일 아침의 부교 붕괴 사건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부교를 하나만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놓았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빈의 대장간에서 닻 수십개를 두들겨 만들었더라면, 여러 가닥의 긴 밧줄이나 목책 구조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방어물을 부교의 상류 쪽에 설치했더라면, 아니, 아예 다부가 로바우 섬으로 건너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했더라면, 이 날 프랑스군의 참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날의 비극은 날씨, 혹은 물결로 인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결국 나폴레옹의 안이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필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입니다.  인명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부교가 끊어진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작전 때문이든 도나우 강의 급류에 떠내려 온 통나무 때문이든,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접한 나폴레옹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의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겠다는 백업 플랜 따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그는 전령 둘을 불렀습니다.  한 명에게는 즉시 강변으로 나가 책임 공병 장교에게 부교 수리에 얼마나 걸릴지 알아보라고 했고, 나머지 하나에게는 란 원수에게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전령이 도착했을 때 란의 상황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일레르 사단을 앞세워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었는데, 카알 대공의 지원 부대가 나타나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난데 없이 나폴레옹의 전령이 나타나 다짜고짜 더 공격하지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 이건 지키기 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대포알이 채찍질처럼 날아드는 허허벌판에서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요 !


설상가상이라고, 란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 보병 사단이 무너지자, 카알 대공은 전술을 바꾸어 포병을 전면에 내세워 무차별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멈추려 했습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 전력은 프랑스군을 4배 정도로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란 휘하 사단장 중 가장 용맹했던 아우스테를리츠의 영웅 생-일레르 장군도 발목에 적 포탄을 직격 당하고 로바우 섬의 야전 병원으로 실려간 뒤였습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연상이었던 생-일레르의 full name은 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으로서, 기병 대위였던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후보생으로 군에 들어갔었고, 혁명 이후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승진을 할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29세의 나이에 이미 장군이었던 그는 1795년 북부 이탈리아의 로아노 전투에서 손가락 두개를 잃을 정도로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용기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발목을 잃은 그는 결국 괴저로 인해 15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어정쩡한 명령을 내린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교가 끊겼다면 다부의 지원 병력은 고사하고 탄약 부족으로 인해 마세나와 란은 당장 철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세나와 란의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즉각 로바우 섬으로 후퇴를 명령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위태위태했던 다리는 급류니 통나무니 하는 것들로 인해 여러번 끊겼었고, 그때마다 몇 시간 만에 수리가 된 바 있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한두 시간 안에 수리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대로 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한 공병 장교가 처음부터 '매우 심한 손상으로 인해 수리에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릴 듯'이라고 명쾌한 보고를 했다면 이렇게 상황 파악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하들은 상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자세히 보고하는 것을 꺼리기는 하지요.  덕분에 란과 그의 부하들은 1시간 동안 허허벌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격 연습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은 카알 대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프랑스군의 공격이 멈춰진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어쨌거나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반격을 위해 보병 사단들을 재규합했습니다.  또한 그는 포병을 내세운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하고는 보병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포병대를 더 전진시켜 프랑스군에게 집중 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당시 포병대는 1발 발사하는데 2~3분이 걸릴 정도로 발사 속도도 느렸고, 또 그렇게 애써서 쏜 포탄도 불꽃과 함께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폭발탄이 아니라 그냥 쇳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밀집 보병 대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날 중으로 부교 수리 불가능'이라는 현실적인 보고가 날아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철수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은, 도나우 남단의 이미 끊어진 부교보다 많이 짧긴 하지만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엉성한 부교 하나 뿐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과 란의 제2 군단 중 살아남은 병력 전체, 거의 4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이 다리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퇴하는 그들의 등 뒤로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의 오스트리아군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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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3.19 21:24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에슬링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느슨했는데, 그 두 마을 사이의 중앙 평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중앙을 돌파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항상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던 란이 다시 한번 그 중앙부를 돌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난 뒤, 란은 크게 좌향좌를 하여 오스트리아 주력인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3개 군단을 측면으로부터 돌돌 말아올릴 예정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란이 이끌고 돌격할 제2 군단이 강을 무사히 건너야 했는데, 새벽 3시가 되어 그 도강이 완료되었습니다.  즉, 작전 실행 준비가 끝난 셈이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머리 속에 그려지던 5월 22일, 둘째날 전투의 전개도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다부의 제3군단은 로바우 섬은 커녕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란이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릴 때, 란의 측면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가 역으로 들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즉, 이미 전날 밤 9시에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제3 군단을 도나우 강 우안의 부교 시작점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소환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밤새 행군하면 아침 나절에 거기에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도강시켜 란이 자리를 비운 중앙 지점으로 밀고 나가면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부의 군단은 란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과하여 란과는 반대 방향인 우향우를 한 뒤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의 옆구리를 들이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의 핵심인 란의 김밥말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군단들을 잘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뒤엉켜 있던 마세나의 제4 군단이 그들을 먼저 평원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 11시까지 아스페른을 손에 넣으려는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이다, 골목 하나를 경계로 지쳐 쓰러져 잠든 마세나의 병사들은 불과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다시 부사관들의 재촉을 받으며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 4시, 마세나의 병사들이 아스페른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두번째 날이 시작된 것이지요.  잠을 자다 기습을 당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는데, 그래도 아침 7시 경에는 결국 아스페른 마을 대부분에서 프랑스군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한편, 마침 자욱하게 안개까지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은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평원에 있는 밭두렁 뒤로 조용히 행군하여 포진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아스페른으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곧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전면 평원에 자리를 잡은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안개와 어둠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평원을 휩쓰는 포격을 개시한 것입니다.  란의 병사들은 밭두렁 뒤에 납작 엎드려 있긴 했습니다만, 점점 날이 밝아오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가려주던 안개마저 아침 7시가 되자 걷히기 시작하면서 슬슬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벌써 3시간 째 적의 포격에 노출된 채로 밤이슬을 맞으며 나폴레옹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자니 죽을 맛이었겠지요.  차라리 어떻게 되건 간에 빨리 돌격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습니다.


한편, 이들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로바우 섬에 자리잡고 앉아 망원경으로 전장을 지켜보면서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전령들의 보고를 받고 있던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란의 제2 군단이 진격하고 나면 텅 비게 되는 그 자리를 채워줄 이들이 도착해야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부의 군단은 항상 쾌속 행군으로 유명했는데, 과연 아침 7시가 되자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다부의 군단이 집결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 3만에 달하는 다부의 군단이 3km가 넘는 부교와 섬을 건너 도나우 강 좌안으로 넘어오려면 최소 3시간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저 길고 좁은 위태위태한 부교를 군단 전체가 건너려면 엄청난 병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세나와 란의 병사들이 사용할 예비 탄약도 아직 강의 우안에 그대로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차에 이 포탄과 탄약 상자들을 싣고 부교를 건너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는, 다부의 군단과 예비 탄약이 강 좌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로바우 섬까지는 건너와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다부의 군단이 이제 막 도강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란에게 진격 명령을 전달한 것입니다.  3개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연결된 부교 중 특히 우안과 롭그룬트 섬 사이를 잇는 긴 부교는 이미 두어 차례 끊어진 바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추가 병력과 예비 탄약이 강을 건너지 못한 채로 공격을 시작했다가 부교가 다시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였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그냥 몇 시간만 더 기다려 병력과 탄약이 로바우 섬으로 넘어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전투 현장에서 안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의 비결 중 하나는 '적보다 반박자 빠른 행동'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을 거둘 때도, 전체 작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다부의 군단은 당일 전투 직전까지도 전투 현장을 향해 맹렬히 행군 중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다부의 도착 이후까지 전투를 미루었다면 아우스테를리츠의 완벽한 대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렝고에서도, 프리틀란트에서도,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과감히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반박자 빠른 작전에 대해 그의 적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강점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다음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폴레옹의 원대한 전략은 빌뇌브의 영국 침공 함대로 하여금 도버 해협이 아니라 먼저 대서양 너머의 카리브해로 가서 그 곳의 영국 식민지를 휘젓게 했습니다.  위 그림은 그 중 일환이었던 카리브해의 다이아몬드 암초 공략 작전입니다.  실제로 이때 당시 카리브해에서의 영국 해군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만약 빌뇌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자메이카 공략까지도 가능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저 보잘것 없는 암초 하나를 공략하고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짠 작전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국 트라팔가 해전으로 이어졌던 빌뇌브 제독의 도버 해협 제압 작전이었지요.  이 해군 작전도 오리지널 원작자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는데, 그는 바다에서의 항해는 지휘관의 의지와 병사들과의 다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따라 엄청난 변수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표를 정했지요.  그 결과, 넬슨 함대를 유인한답시고 카리브 해를 향해 대서양을 두 번이나 횡단했던 이 원대한 기만 작전은 결국 트라팔가 해전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이 도나우 강 작전에서도 나폴레옹의 의지와 그의 부하들의 다리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대서양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Schwarzwald)의 눈 녹은 물로 인해 시시각각 물결이 거세지던 도나우 강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런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부의 도강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 개시를 명했습니다.  이 결정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혀 쌍방이 서로의 움직임을 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란의 제2 군단이 상대적으로 텅 빈 중앙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를 오스트리아군도 눈치챌 것이 뻔했습니다.  벌판에 포진한 란의 제2 군단에 대해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그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집중 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공격이 더 늦어지면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대응하여 중앙부로 병력을 집중 배치할 것이고, 그럴 경우 나폴레옹의 작전 전체가 엎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는 아침 7시, 다부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란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대대로 유서 깊은 군사 가문 출신도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전투 지휘 경험은 이미 그를 유럽 제1급 야전 지휘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날 아침 공격 떄 3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좌측부터 타로(Tharreau), 클라파레드(Claparede), 그리고 생-일레르(Saint-Hilaire)의 사단을 포진시켰고, 나폴레옹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장 경험도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생-일레르 사단부터 시간 차를 두고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란의 공격선은 적 전선에 대해 평행선이 아닌, 맨 오른쪽의 생-일레르의 사단이 삐죽 튀어나온 사선 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적 전선 돌파 뒤 크게 좌로 선회하여 적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하려는 제2차 작전까지 감안한 공격 대형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격이었지요.


하지만 란이 뚫으려던 정면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알 대공이 있었습니다.  란의 묵직한 공격을 받고 막 무너져 내리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의 존재와, 그가 끌고 온 지원군의 도움을 받고 간신히 붕괴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저항으로 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란은 생-일레르 사단의 뒤를 따르던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딱 적절한 순간에 투입시켰습니다.  생-일레르 사단과의 총격전을 위해 긴 횡대로 포진했던 오스트리아군 연대들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정예 흉갑기병(cuirassiers)의 돌격에 혼비백산 했습니다.  보병대가 기병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긴 횡대가 아니라 치밀한 방진을 짜고 저항해야 했는데, 허를 찔린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흉갑기병의 갑옷과 장비입니다.  실제로는 흉갑기병이라고 해서 꼭 흉갑을 갖춰 입지는 않았고, 키가 큰 병사와 큰 말을 뽑아 흉갑기병대를 편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보병대에서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척탄병 부대를 편성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림 출처는 https://kr.pinterest.com/marnics/french-cuirassiers-napoleonic/ )



그러나 이때 다시 카알 대공이 나섰습니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연대 쪽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는 기수로부터 그 연대의 군기를 빼앗아들고 병사들의 도주를 제지했습니다.  아무리 패주하는 상황에서라도, 하늘같은 왕족 대공님이 직접 자신이 속한 연대 깃발을 들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다는 것은 당시 병사들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카알 대공의 뒤를 따라 다시 프랑스군을 향해 돌아섰고, 막 무너질 듯 하던 오스트리아 전선은 간신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란의 공격은 여전히 기세등등 했습니다.  카알 대공의 솔선수범이라는 원맨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란이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은 우르르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공격 개시 약 1시간이 지난 아침 8시 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주저하는 유리 멘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날 이 순간만큼은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솔선수범을 통해 그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만천하에 입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몇 km 떨어진 로바우 섬의 나폴레옹에게는 끊임없이 전령들이 오가며 각지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령들 중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짧은 메시지를 전하자, 나폴레옹의 눈썹이 살짝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고, 나폴레옹 주변의 참모들은 방금 나폴레옹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었는지 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전령이 전한 소식은 부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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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3.12 21:34

5월 21일 오전,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2개 마을에 포진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8만4천의 보병과 1만4천이 넘는 기병, 그리고 무려 292문의 대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고작 2만2천의 보병과  3천이 채 안되는 기병, 그리고 고작 52문의 대포를 도나우 강 좌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오스트리아군은 그러나 다소 어정쩡한 진형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즉, 힐러(Hiller)와 벨가르드(Bellegarde), 그리고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이 각각 이끄는 3개 군단이 북쪽으로부터 아스페른을 향했고, 에슬링으로는 데도비히(Dedovich)가 대리 지휘하는 로젠베르크(Rosenberg)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본인은 본인의 군단 중 일부 사단을 이끌고 에슬링 동쪽에 있는 좀더 큰 마을인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는 아예 프랑스군이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병력을 분산시켜 공격해들어간 이유는 카알 대공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부교가 끊어져 프랑스군 대부분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몰랐던 그는 여전히 프랑스군의 본진은 아스페른에서 북진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주된 공세를 3개의 강력한 군단으로 틀어막고, 그 사이 로젠베르크의 군단을 프랑스군의 옆구리인 에슬링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 꽂아넣어 그 부교를 노리겠다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습니다.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사실상 마세나의 제4 군단 하나에,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예비 기병대 뿐이었습니다.  란 본인은 에슬링에 있었으나, 그의 제2 군단은 아직 로바우 섬에 있었으므로 란은 원래 마세나 휘하였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빌려서 에슬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군단 대부분은 아스페른 마을 남쪽에 위치했고,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 1개만 마을 안에 쏙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을이 너무 작았던 것입니다.  몰리토르의 병사들은 마을 건물들과 돌담 뒤에 재주껏 숨어 적의 내습을 기다렸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상태도 비슷했고, 이 두 마을 사이는 사실상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지킬 병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유일한 생명선인 부교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부교 자체는 신참 근위대(Jeune Garde)가 지키도록 하고,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이 두 마을 사이의 평원에 배치했습니다.  여기서 작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란 휘하에는 부데 장군의 1개 사단 밖에 없었는데, 이건 군단장인 란에게는 너무 적은 병력을 준 셈이었습니다.  괜히 부데 사단에 지휘관이 2명 있게 되는 셈이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평원을 방어하는 베시에르의 기병대를 란 밑에 배속시켜 버렸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 란이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을 뻔히 봤으면서도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나폴레옹이 란과 베시에르의 성숙함을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나폴레옹은 역시 란의 편을 들어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건 결국 또 하나의 작은 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정말 느렸습니다.   오전부터 시작한 공격이 아스페른 마을에 당도한 것이 거의 3시가 다 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마을 안에서 강력하게 저항한 몰리토르의 사단에 의해 금방 격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도 자신들의 진격에 맞서 뛰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조심스럽게 전진을 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주공을 맡은 3개 군단이 마을 북쪽에 완전히 포진을 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되어서였습니다.  아스페른 서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마세나의 군단은 용감하게 맞섰고, 오스트리아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마을 안쪽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의 전투는 농가들 사이에서의 밀고 밀리는 혈투가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 되었습니다.  마세나는 그 사이에 증원된 생-시르(Carra Saint-Cyr) 장군의 사단의 도움을 받아 집요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적의 우세가 막강했으므로, 마을의 절반 정도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밤이 되어 전투가 일단락 될 때는 마을의 북쪽 절반은 오스트리아군이, 남쪽 절반은 프랑스군이 점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첫날은 기본적으로 치열한 시가전이었습니다.  그림은 아스페른이 아니라 에슬링에서의 시가전의 모습입니다.)





(1809년 5월 21일, 드디어 격돌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첫날의 상황입니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중앙부의 베시에르도 상황에 비해서는 무척 분전했습니다.  오후 3시반 경 적의 기병대가 몰려오자 몇차례 돌격을 감행하며 꽤 잘 싸웠고, 덕분에 중앙부가 적의 기병대에 의해 돌파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에슬링을 노리는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느릿느릿 나타나자 비로소 베시에르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도랑 뒤편으로 물러났습니다.


에슬링에서의 형편이 어떻게 보면 가장 좋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면 로젠베르크 1개 군단이 2개 대오로 나뉘어 오는 것이었습니다만) 2개 군단급의 오스트리아군을 고작 1개 보병 사단만으로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1대3의 열세였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은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 미숙했습니다.  오후 느직히 에슬링 앞에 나타난 데도비히의 병력만으로도 란의 1개 사단 정도는 가뿐히 제압이 가능했지만, 데도비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스-엔저스도르프를 거쳐 올 예정이었던 로젠베르크의 부대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로젠베르크는 아무 적군도 없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서 꾸물거리다 저녁 6시 30분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이렇게 두 부대가 모였음에도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에슬링 안에 포진한 프랑스군의 병력수를 잘 모르다보니 좋은 말로 조심스러웠고, 막말로 겁이 났던 것이지요.  이들의 공격은 7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는데, 그나마 따로따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데도비히의 공격은 7시에, 로젠베르크의 공격은 8시에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공격을 시작한 이유도 한심했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전황을 파악한 카알 대공이 '뭘 기다리는 것인가 ?  당장 공격 !'이라는 명령을 전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어설픈 공격이라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호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두꺼운 석벽을 가진 곡물 창고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의 돌담 뒤에 숨어 에슬링 전체를 요새화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적의 압도적인 포격에 무척이나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은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를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중앙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에슬링의 거대한 곡물 창고로 돌격하는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의 모습입니다.)



카알 대공은 오후 늦게서야 비로소 프랑스군이 기어나올 생각이 전혀 없고, 정말 아스페른과 에슬링을 사수하며 버틸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카알 대공도 나름 명장이었으므로, 그렇게 프랑스군이 수비에 치중한다면 좁은 아스페른 정면에 3개 군단이나 집중시켜봐야 효율적인 부대 운용이 안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병을 상대적으로 텅빈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부로 진격시켰습니다.  그 곳은 에슬링에서 고군분투 중인 란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그에게는 따로 병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있긴 있었는데, 그게 베시에르의 기병대였습니다.  란은 오후 한때 잠깐 싸우는 척 하더니 도랑 뒤에 숨어 있는 베시에르에 대한 증오심이 새삼 솟아 올랐나 봅니다.  그는 부관을 베시에르에게 보내면서 "지금 당장 돌격할 것, 그리고 제대로 할 것"이라고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비록 욕설은 섞여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장교 집단이란 신사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급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때도 예의를 갖추어 권고형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독이 일개 중위 하나를 당장 오라고 소환할 때도 연락 장교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The admiral's compliments, sir, and he'd like Mr Hornblower's presence on board the flagship as soon as is convenient."

(제독님께서 안부와 함께 여쭙습니다만, 혼블로워 중위께서 시간이 나시는 대로 기함에 와주셨으면 하십니다.)  


그런데 일개 대위 나부랭이가, 아무리 더 높은 란 원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베시에르 원수에게 '지금 당장, 그것도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전갈을 가지고 간 것은 루이 드 비리(Louis de Viry) 대위였는데, 당연히 무척 순화된 버전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돌아온 드 비리 대위에게 란은 그가 전달한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읊게 했고, 그 내용이 무척 순화되어 전달된 것을 안 란은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는 다시 샤를 라베도예르(Charles LaBedoyere) 대위를 보냈으나, 이 대위도 베시에르 앞에서는 겁을 먹고 드 비리 대위와 비슷한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부하들에게 화가 난 란은, 때마침 도착한 마르보(Marbot) 대위에게 '오쥬로 원수께서 자넨 믿어도 된다고 했네, 그러니 그 말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보게'라는 말과 함께 다시 또박또박 명령을 불러주며 반드시 그 말 그대로 전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르보는 정말로 '지금 당장,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고 베시에르에게 전달했고, 베시에르에게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대위 나부랭이를 봤나'라며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란에 대한 베시에르의 분노는 나름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돌격으로 승화시킨 그는 즉각 도랑을 넘어 중앙부로 몰려오는 적을 향해 돌격하여, 적의 포병대를 제압하고 밀집 대오를 구성한 보병대를 한바퀴 돈 뒤 복귀했습니다.  비록 적 보병대를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기병만으로 적 밀집 보병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의 용감무쌍한 돌격만으로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 공격은 돈좌된 셈이었으므로 상당한 공을 세운 셈이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일대의 전투는 밤 11시까지 진행되다, 양군 모두 병사들이 지치는 바람에 정식 휴전없이 소강상태로 빠져 들게 됩니다.  에슬링에서는 란의 분전, 그리고 베시에르의 분노의 돌격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이 발을 못 붙였으나,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이 시가지 내에서 혈투를 벌이던 아스페른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새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지쳐 쓰러졌지만 지휘관들은 또 다시 모여야 했습니다.  마세나의 사령부로 모인 베시에르와 란은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또 으르렁거렸습니다.  이 둘은 서로 모욕을 퍼붓다 결국 검을 뽑아들었는데,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더 상관이었던 마세나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결투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로바우 섬에서 부교의 수리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이 날의 전황 보고를 받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1대3 이상의 우세를 가지고도 프랑스군을 축출하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은 서툴고 느린 예전 그 모습 그대로임이 틀림없었고, 자신의 공세를 막고 있던 후방의 부교가 마침내 수리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다부의 군단에게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집결하여 도강 준비를 하라고 명령서를 날리고, 란의 제2 군단을 밤새 도나우 강 좌안으로 계속 이동시켰습니다.  그는 란의 제2 군단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취약한 적의 중앙부를 돌파한 뒤 아스페른 쪽으로 선회하여 적의 주력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달콤한 꿈에 젖어 제2 군단 병사들을 밤새도록 도강시키던 5월 22일 새벽, 병사들이 밟고 건너던 그 부교 및의 도나우 강의 물결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Lieutenant Hornblower by C. S. For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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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2.26 14:46

몰리토르(Molitor) 장군의 프랑스군 선발대가 로바우 섬에서 오스트리아군 수비대를 쫓아내고 있던 5월 19일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카알 대공은 나폴레옹이 뉘스도르프 혹은 다른 어디로 도강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스트리아군 사령부에서는 5월 18일 저녁부터 이루어진 프랑스군의 도강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군 본대를 도나우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송양지인은 십팔사략에 나오는 고사로서,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양공의 일화입니다.  http://blog.daum.net/wahnjae/17994302 참조)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중국 고사성어에서도 나오듯이, 강을 건너는 적은 그야말로 상대하기 가장 쉬운 상대였습니다.  아예 적이 도강을 못 하도록 강가에서 막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이 대군 중 약 1/3 정도만 건너온 상태에서 들이치는 것이었습니다.  전투의 기본은 'divide and conquer', 즉 적의 세력을 분산시킨 뒤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는데, 강이라는 천연장벽이 그것을 해주는 절호의 찬스였으니까요.





(명장은 아군의 수가 더 적더라도 어떻게든 혈투를 벌여 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적의 수가 많더라도, 전투 현장에는 아군 수가 적의 수보다 더 많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바로 명장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곧 강을 넘어온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던 이 때에, 왜 카알 대공은 강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저 후방으로 군대를 물려놓은 상태였을까요 ?  그건 카알 대공의 작전 계획이 당장의 전투 결과가 아니라 좀더 큰 전쟁 결과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바보가 아닌지라, 나폴레옹이 어중간하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승률이 높은 작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게 항복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대해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애초에 카알 대공은 1809년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모두 나가 떨어진 상황인지라, 혼자서 싸워야 하는 오스트리아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나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이 헛발질을 하고 있고, 또 애써 편성해놓은 30만 대군을 오스트리아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곧 해체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이면 애초에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제국의 지도자들이라고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라,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지요.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카알 대공은 당장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고 군기 몇 자루 빼앗는 것이 카알 대공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증원 병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더 오래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 양쪽 다 여한이 없을 정도로 거하게 한판 제대로 붙어 나폴레옹을 꺾은 뒤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살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병력이 도나우 강 좌안으로 다 건너온 뒤에 싸워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만 아니면 내가 이겼다'라는 식의 변명거리를 줘서는 안 되었지요.  그랬다가는 나폴레옹이 다시 본국에서 증원군을 받아다 또 도전을 해 올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렇게 싸운다고 해도, 어차피 강을 등 뒤에 끼고 있는 것은 나폴레옹이었으므로 결국 지형은 카알 대공에게 절대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쾌승을 거둔다면, 도나우 강을 등 뒤에 둔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강가에서 멀리 떨어져 로바우 섬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모르고 있던 카알 대공도, 5월 19일 낮이 되자 더 이상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른 오후 비잠베르크(Bisamberg)에 자리잡은 관찰병들이 신호기(semaphore)를 통해 로바우 섬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프랑스군이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왔고, 스파이들이 속속 달려와 나폴레옹의 도하 소식을 전해왔기 떄문입니다.  또한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집결하는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들이 일으키는 먼지는 강 건너에서도 뚜렷이 보였습니다.  곧 힐러(Hiller) 장군이 달려와 적이 도하를 완료하기 전에 속히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카알 대공은 침착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애초에 마음 먹은 대로, 나폴레옹이 전군을 다 건너게 만든 뒤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운명을 걸고 한판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이 결전을 위해 그의 야전군 10만을 5개 대오로 편성하고 별도의 예비대도 준비했습니다.  


제6군단 : 힐러(Johann von Hiller)

제1군단 : 벨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

제2군단 : 호헨촐레른(Friedrich Franz Xaver Prince of Hohenzollern-Hechingen)

제4군단 : 로젠베르크(Prince Franz Seraph of Rosenberg-Orsini)

제4군단 일부 : 호헨로헤(Friedrich Karl Wilhelm, Prince of Hohenlohe)

예비군단 : 리히텐슈타인(Johann I Joseph, Prince of Liechtenstein)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워낙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이다보니, 그 귀족들의 이름도 독일식, 프랑스식, 헝가리식, 크로아티아식, 체코식 등 정말 다양합니다.  저 초상화 속의 인물은 벨가르드 백작이신데, 이 분은 사보이 Savoy 귀족 가문 출신이신지라 가문 이름이 프랑스식입니다.  그러나 이 분 개인은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100%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은 기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신출귀몰한 지휘에 노리개감이 되는 역할을 주로 맡으셨지요.)



그가 도나우 강 좌안인 마르쉐펠트(Marchfeld)의 평원으로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5월 21일 오전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2일 간이나 시간을 줬으면 충분히 전군이 다 건너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척후병들이 프랑스군이 아직 평원에 전개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그는 몹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비장의 각오로 잔뜩 차려 입고 운명의 결투를 하러 나왔는데, 정작 무대에 상대방이 안 나온 셈이었으니까요.  그는 도나우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놓인 부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프랑스군의 도하가 9시간 동안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카알 대공의 기대처럼 운명의 한판 결전을 위해 평원으로 우우 몰려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이라는 두 작은 마을을 점거하고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에 따라 야전에서의 대규모 충돌이 아니라, 이 두 마을 탈환을 위해 병력 전개를 새로 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싸우기는 싸워야 했으니까요.  






(현대의 마르쉐펠트 평원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강건너 빈에게 농작물을 공급하는 농지였고, 구릉지대까지는 아니지만 완전히 평탄한 지역은 아니며 또 이런저런 작은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지형입니다.)




한편, 21일 아침 강을 건너 전장을 둘러본 나폴레옹은 또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저런 시냇물과 그 강둑에 자란 작은 숲들로 인해 완전히 평탄하지는 않았던 마르쉐펠트 평원을 둘러 본 뒤, 옆에 선 마세나에게 '좌측을 움켜쥐고, 우측에서부터 돌돌 말아올린다'라는 작전 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그는 좌측의 아스페른을 모루 삼아 굳게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을 유인한 뒤, 오른쪽 에슬링으로부터 망치같은 강력한 공세로 적진을 돌파한 뒤 오스트리아군을 중앙으로 몰아붙일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강을 등지게 되는 것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었습니다.  아직 절반 이상의 병력이 도나우강 우안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부교가 계속 버티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도나우 강의 물살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망치와 모루 전법은 기병 전술을 중시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쓰던 전법입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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