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11.11 19:33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전투 내내 나폴레옹의 옆을 지키며 전투 현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던 사바리 장군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킬 정도로 잘 싸웠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전투의 승패는 어느 쪽의 사상자가 더 많았는가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꼬리를 말아쥐고 물러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데, 보통 등을 보이며 후퇴하는 측의 대오가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그 뒤를 추격하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패자의 사상자 수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바그람 전투에서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대오를 굳게 지켰고, 결국 프랑스군은 평소 하던 대로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재정난을 일으킬 정도로 군비를 투입하여 카알 대공이 열심히 육성한 상비군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굳센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대 스파르타에 전해지는 격언 중에 '한 국가와 반복하여 자주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유는 잦은 전쟁 경험은 상대국에게도 군사 역량의 강화를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겪은 바가 딱 그랬습니다.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에 의한 징집군의 편성, 기동력을 중시한 전술, 자율성과 유연성을 잘 살려주는 군단제 운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지고 있던 상대적 우월성은 어느 틈엔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어느 정도 복제되어 있었고, 이는 전투력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또 카알 대공의 근본적인 전략도 오스트리아군의 비교적 질서있는 후퇴에 일조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전쟁 시작 전부터 개전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요.  그는 어차피 오스트리아 혼자 싸우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꺾을 수는 없으며, 만약 싸우더라도 최후의 일인까지 다 죽어 쓰러지는 결전보다는 적당히 싸우다 패배가 분명해지면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더라도 군사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상태여야 나폴레옹과의 종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그런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2~3시 경에 이미 후퇴를 결정했고,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힘을 좀 남겨둔 채로 후퇴를 시작하여 군사력을 보존한 채, 심지어 프랑스군 포로 수천 명까지 끌고 후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 새벽, 나폴레옹이 혹시 오스트리아군이 어제에 이어 다시 도전해올 것인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건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그람 전투가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꽤 순한 전투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바그람 전투는 이긴 프랑스군이나 진 오스트리아군이나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상자 수를 낸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양측의 참전 병력이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17만, 오스트리아군도 요한 대공의 병력까지 합해서 약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되어 있지요.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군대는 언저리까지만 오고 총 한방 쏘지 않았으니 전투 참전 병력 수에서는 빼는 것이 맞겠고, 또 프랑스군도 로바우섬을 지키던 보병들은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일부 빠지겠습니다만, 아무튼 양측이 무려 3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는 유사 이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이 한 자리에 집결하여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참전 병력이 많으니 당연히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상자 수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고, 또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대내외 과시를 위해 적의 사상자 수를 부풀리고 아군의 사상자 수는 양심도 없이 작게 조작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 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서는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전사 1,500에 부상 3~4,000으로 경미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실제 사상자 수는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혹자는 4만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도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약 20% 가까운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승자 측의 사상율이 약 10%, 패자 측은 약 20%가 상식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바그람 전투는 양측 모두 패배였던 셈입니다.  


양측의 피해가 모두 컸던 이유는 이 바그람 전투는 유례없는 대규모 포격전을 동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488문, 오스트리아군도 414문이나 되는 전례없는 막강한 화력을 총동원했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특히 이 전투의 주무대였던 마르히펠트의 평원이 지형과 지질 탓이 컸습니다.  이곳은 땅 표면이 비교적 단단하고 매우 평평한 지역인지라, 대포알들이 땅에 처박히지 않고 통통 튀며 먼거리까지 날아가면서 많은 병사들의 팔다리와 허리를 꺾어놓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전투가 끝난 뒤, 이 전투는 포병에 의한 승리라며 휘하 포병들의 노고를 칭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병대에게 영광을 더해주고자 전체 포병단 총사령관인 라리부아지에르(Jean Ambroise Baston de Lariboisière) 장군의 아들 페르디낭(Ferdinand Baston de La Riboisière)을 뽑아 이 승전보를 파리로 전하게 했습니다. 





(이 그림이 드물게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이 한꺼번에 나온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초상입니다.  바그람 전투 당시 27세였던 페르디낭은 카라비니에, 즉 총기병대 소속 장교였는데, 역시 나폴레옹의 과도한 욕심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1812년 보르디노 전투에서 전사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너무나 슬픔에 젖은 나머지 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1812년 겨울을 못 넘기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낭이 들고간 승전보에는 파리 시민들이 기대했던 화려한 전과는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그런 전과는 노획한 적의 군기와 대포, 그리고 많은 포로의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이 좀 부실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10폭의 군기와 20문의 대포, 그리고 약 7,500의 포로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빼앗긴 것은 군기 12폭, 대포 21문에 포로도 약 7천 이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적자를 보았던 셈이지요.   그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이 계산서를 받아든 나폴레옹은 '전쟁이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노획한 대포도 포로도 거의 없구나, 아무 결과가 없군'이라며 한탄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전투 다음날인 7월 7일 아침 잠에서 깬 나폴레옹은 혹시 카알 대공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도전해오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날 아침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의 막사를 찾은 막도날드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주고는 그를 '프랑스 제국의 원수'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즉, 영광스러운 원수의 계급으로 승진을 시켜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디노와 마르몽에게도 원수 계급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병사들은 막도날과 우디노는 그렇다치고, 마르몽은 뭔일래냐 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파르퀑(Parquin)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아예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막도날은 프랑스가 지명했고, 우디노는 군이 지명했는데, 마르몽은 우정이 지명한거라네"

(La France a nommé Macdonald, l'armée a nommé Oudinot, l'amitié a nommé Marmont)


사실 마르몽 달마시아(Dalmatia) 군단을 이끌고 최후의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아무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원수 임명장과 함께 별도의 개인 편지를 함께 마르몽에게 보내,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지만, 넌 이 계급에 어울리는 전공을 올린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갈구기도 했습니다.





(마르몽은 배신의 대명사로서, 라구사 공작이었던 그를 따서 Raguser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현대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봐도 정말 raguser는 trahir, 즉 배신하다라는 말의 동의어라고 설명이 나옵니다.  당대에는 더 심해서, 1830년 7월 혁명 당시 그가 시위 진압을 주저하자, 부르봉 왕가의 앙굴렘 공작은 그에게 "그를 배신했듯이 우리도 배신하려는거냐 ?" 라며 맹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갈굼을 당한 마르몽에게 '승진을 정당화시켜줄 전공을 세우라'는 말과 함께 카알 대공을 추격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의 달마시아 군단은 1만1천 정도로 매우 빈약한 편이었지만 전날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아 체력 고갈이 없는 유일한 부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 마르몽은 3일 후인 7월 10일 츠나임(Znaim)에서 카알 대공의 잔존 병력 약 5만을 포착했습니다.   1만대 5만의 대결이었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마르몽은 바로 뒤를 나폴레옹의 본대가 따라올 것이므로 적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지는 전법을 썼습니다.  결국 양측이 하루를 넘겨가며 수천 명씩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다음날 저녁 무렵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하자, 카알 대공은 휴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카알 대공 인생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후 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는 이 휴전 협정을 맺으며 총사령관직을 비롯한 모든 관직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카알 대공은 이 휴전에 대해 월권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프란츠 황제의 승인없이 이렇게 휴전 요청을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병사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존을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과 그의 가족입니다.  그가 나폴레옹급의 천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현실 감각이 없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래도 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사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처음부터 옳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Jean_Ambroise_Baston_de_Lariboisi%C3%A8re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articles/oudinot-en-1809-1810-les-lauriers-de-la-gloire/

https://en.wikipedia.org/wiki/July_Revolution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21 22:28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해있는 꽤 큼직한 예비 병력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의 아스페른-에슬링 공격이 실패했거나, 최소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지요.  클레나우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지금 나폴레옹 사령부에 저렇게 많은 예비대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대가 없었으므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패배가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이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버텼던 것은 아직 한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동생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었습니다.  


실제로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던 오후 4시 30분 경, 요한 대공의 전위대를 구성하는 일단의 기병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바로 동쪽인 운터지벤브룬(Untersiebenbrunn)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인마가 일으키는 먼지와 총포의 화약 연기로 인해 사방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마르히펠트 평원에는 프랑스군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모두가 두려워하던 요한의 군대가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스도르프의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난데 없이 동쪽 평원에서 벌어지는 소란 소리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참모 장교들은 물론이고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임시 사령부 밖으로 튀어나와 망원경을 들고 요한 대공의 병력을 포착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습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이번 전투의 승리가 요한 대공의 도래로 인해 막판에 패배로 둔갑하는 것이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전투 막판의 이 소동에는 꽤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요한 대공이 주둔하고 있던 브라티슬라바는 윗 그림 속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1741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가 즉위식을 올린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저 그림 속의 성은 브라티슬라바 성, 독일어로 Pressburger Schloss라는 곳인데, 아래 사진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브라티슬라바 성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1809년,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한 외젠의 군대가 결국 이 성에 포격을 가하는 등 이 성은 프랑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1811년, 이 성에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 성은 폐허가 되었지요.  지금의 이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건한 것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7월 4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카알 대공은 서둘러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Bratislava,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 Pressburg)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오스트리아 내부군을 이끌고 서둘러 마르헤크(Marchegg)로 달려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그는 상황이 급하므로 무거운 짐마차 등은 다 버려두고 최소한의 군장으로 강행군을 하라고 지시했지요.  마르헤크는 바그람으로부터 동쪽으로 대략 7시간 정도의 행군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 바그람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는 사람이 (쉬지 않고) 걸어서 가도 10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카알 대공은 그 정도면 충분히 일찍 전령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특별히 전령으로 제4 군단장 로젠베르크의 아들을 골라 보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대공이 있던 브라티슬라바부터 도이치-바그람까지의 거리는 현대적 도로를 따라 걸을 때 약 10시간 거리입니다.  물론 이건 전혀 쉬지 않고 빈 몸으로 가볍게 걸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을 넘던 7월 4일 밤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졌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랑스군은 그런 악천후에 대해 '잘 됐다 ! 오스트리아군이 모르는 사이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라며 재빨리 수만 명이 불안한 부교를 건넜지요.  그러나 로젠베르크의 아들은 같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무렵엔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 소환 명령은 카알 대공이 전령을 보낸지 무려 23시간 후인 7월 5일 아침 6시, 이미 나폴레옹의 대군이 마르히펠트 평원에 전개한 다음에야 요한 대공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자신의 늦은 명령서 전달로 인해 초조해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요한 대공은 그 급보를 받아들고도 반응이 무척이나 심드렁했습니다.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아니 뭐야, 뭐 브라티슬라바를 견제하고 있는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를 공격하라더니...'라는 불평이었습니다.  실제로 카알 대공은 바로 전에 전달한 명령서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외젠이 남겨두고 떠난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 즉 엔가라우(Engerau)에 주둔한 세베롤리(Severoli) 장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고, 요한 대공은 지엄하신 형님의 명령을 집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 앞에 위치한 적을 습격하는 것과 먼 지역으로 행군하는 것은 분명히 준비할 것이 다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 변경이 하루 종일 걸릴 일은 분명히 아닐 것 같은데, 요한 대공의 부대가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진영 밖으로 걸어나간 것은 무려 19시간 후인 7월 6일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이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느린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대공에게는 다 설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베롤리 장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여기저기에 배치시켜 놓았던 부대를 다시 다 불러들이고, 밤새 공격 대기를 기다리며 야전에서 대기한 병사들에게 행군용 배낭을 챙기게 하고, 긴 행군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하는 일에는 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가 백주대로에 보무도 당당하게 마르헤크로 출정하면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세베롤리가 그걸 목격하고는 재빨리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요한이 움직이니 대비하십쇼'라고 알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그는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든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행군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긴 그 덕분에, 나폴레옹은 감시를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7월 6일 저녁 무렵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출발이 늦었다고 해도,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거운 짐도 다 놓아둔 채 결연한 의지로 야간 행군을 했다면 7월 6일 오후 12시 경에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 도착하여 다부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 옆에서 함께 말을 몰았던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보기에, 요한 대공의 부대는 빨리 행군하려는 의지도, 싸움에 도움이 되려는 각오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시키니까 움직인다는 식의 천하태평한 행군이었던 모양입니다.  왜 요한 대공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다면 요한 대공은 군법회의에 회부감이었다는 것입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마르헤크까지는 불과 4시간 반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한 대공의 군대는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네요.)



결국 사방에서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며 초조하게 요한 대공의 군대를 기다리던 카알 대공에게, 오후 2시경 날아온 소식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10시 30분에 씌여진 요한 대공의 편지가 카알 대공의 손에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강행군을 한 끝에 명령대로 마르헤크에 도착했고, 지친 병사들을 좀 쉬게 한 뒤에 다시 오후 1시경에 행군을 다시 시작할테니 늦어도 오후 5시까지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 남동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인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라니 !  그것도 바그람도 아니고 레오폴즈도르프라니 !  새벽 1시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핑계를 댈 폭풍우도 없었으니 정상적으로 행군을 해도 아침 7시에는 마르헤크에 무리없이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릿느릿 도착한 뒤에도 쉬었다가 점심 먹고 오후 1시에 출발하겠다 ?  그래서 오후 5시에 도착할 것 같다 ?  오후 5시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시간이면 프랑스군이 저항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둘러싸고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없어진 카알 대공은 2시 30분경 결국 후퇴 명령서를 작성하여 각 군단장에게 뿌렸습니다.


각지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며 조금씩 밀려나던 오스트리아 군단장들에게는 이 후퇴 명령서가 꼭 가뭄 끝에 단비 같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승리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달려드는 적군과 싸우면서 무너지지 않고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것입니다.  후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자칫하면 공포에 질려 진형을 깨고 무질서하게 패주해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적의 기병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알 대공이 지난 3년간 개혁해놓은 오스트리아군은 확실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군단들이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뒤에 바짝 붙은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포병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괴롭혔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포탄과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에서도 끝내 대오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 배후 깊숙이 침투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그 뒤를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대의 용감무쌍 광기병 라살(Antoine Charles Louis de Lasalle) 장군이 오스트리아 보병 방진을 공격하다 머스켓 총탄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라살의 뒤를 이어 기병대를 지휘하던 마륄라즈(Marulaz)도 치열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저녁 8시 경 그의 말이 죽고 자신도 부상을 입으면서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광기병 라살 장군입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르고 항상 기병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렸는데, 종종 검이 아닌 긴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쥐고 돌격을 지휘하곤 했답니다.  이 그림에서도 큼직한 파이프를 쥐고 있지요.  그런 라살도, 이번 전투에서는 뭔가 군인 특유의 직감이 있었나 봅니다.  로바우 섬에서 도강할 때, 주변 인물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군이 혈투를 벌이며 전선은 조금씩 북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원래의 전장이던 마르히펠트와 루스바흐 언덕에는 전사자들의 시신,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낙오병들, 그리고 그들을 약탈하려는, 또는 도우려는 종군 상인들 및 군인 가족 등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되었지요.  요한 대공의 선두 부대에 딸린 정찰 기병들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 즉 오후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서쪽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나자, 이제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던 프랑스군 낙오병들과 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오스트리아 정찰병들의 눈에 들어온 대혼란은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현장 상황이 한눈에 잘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찰병들은 저 멀리 북서쪽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 소리를 통해, 이미 전선은 저 먼 쪽으로 밀려난 상황이고, 뜨거웠던 전투 현장에 프랑스군 낙오병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된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대로 돌아가 요한 대공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요한 대공은 카알 대공과 연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쿨하게 그냥 마르헤크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되돌아가면서 요한 대공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  조금 더 서두를 걸 하는 후회였을까요 ?  이제 패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을까요 ?  다 아니었습니다.  참모진들에게 투덜거린 요한 대공의 푸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카알 형님은 이 패배의 원인을 내게 뒤집어 씌우시겠구만."


이 소동에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주변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전투 태세를 취했고, 즉각 여러 장교들이 요한 대공의 정세를 탐지하러 말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곧 튀렌느(Henri Amedee Mercure de Turrenne)라는 장교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습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것처럼 2~3만의 병력이 아니라 고작 1만 몇천의 수준이고, 그나마 마르헤크 쪽으로 후퇴 중이라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굳이 그들을 추격하려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바그람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바그람 전투의 에필로그 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8.06 16:56

전날 밤 카알 대공도 나폴레옹과 생각하는 것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좌익과 중앙에서 잽을 날리며 적의 시선을 끈 뒤, 강력한 우익의 우회 진격을 통해 적의 측면을 관통하여 끝장을 본다는 것이었지요.  차이는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공격자였던 나폴레옹은 방어자 입장인 오스트리아 측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카알 대공이 한두 시간 먼저 공격을 해들어온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이 베르나도트의 아더클라 무단 이탈과 마세나가 지휘하는 제4 군단의 아더클라 쪽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준비한 회심의 라이트 훅, 클레나우의 진격 방향이 파란색 화살표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와 직각을 이루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붉은색 화살표가 프랑스군 마세나의 제4 군단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이루고 있던 것은 전날 낮에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클레나우(Klenau)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삼베르크(Bisamberg)로 이어지는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의 새벽 작전에 대한 지시를 너무 늦게 통보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출격은 카알 대공이 의도한 것보다 무려 3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어, 공격 시작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아침 8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늦어진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이때 즈음 마세나의 주력 사단들은 모두 아더클라 방면으로 몰려간 뒤였던 것입니다.  특히 르그랑(Legrand)의 사단은 아더클라로의 행군 도중 측면에서 들이닥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의 습격을 받고 대경실색 했습니다.


하지만 르그랑의 사단보다 더 큰일이 난 것은 마세나가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두 마을을 지키라고 남겨두고 간 부데(Boudet)의 사단이었습니다.  마세나는 '뭐 어차피 이쪽은 별 일이 없을테니까'라며 태평하게 달랑 부데의 1개 사단만 남겨두고 갔고, 어쩌면 그렇게 뒤에 남겨진 부데와 그의 부하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을지도 몰랐겠습니다.  부데 사단은 약 한달 전의 에슬링 전투에서 에슬링의 곡물 창고를 지키며 그야말로 혈전을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었고, 그 수도 고작 5천명 정도로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아마 한숨 돌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궃게도, 부데의 사단을 다시 그 곡물 창고로 쳐박아 넣게 됩니다.


아스페른으로 진격을 개시한 클레나우의 제6 군단 약 1만4천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갔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포병대를 전개시켜 포격을 가하자 부데도 10문의 포병대를 동원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 경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프랑스 포병들을 베어넘기고 대포들을 나포했습니다.  이대로 대포들을 잃을 수 없었던 프랑스 보병들이 우르르 물려나와 오스트리아 기병들을 쫓아내고 이 대포들을 다시 탈환했지만, 그 사이에 방열을 마친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해 다시 프랑스군의 대포들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전으로 시작된 부데의 방어전은 결국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대포들을 잃고 버티기가 어려웠던 부데는 결국 아스페른을 포기하고 정들었던(?) 에슬링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슬링으로 물러난다고 해서 뭐 딱히 사정이 더 좋아질 것도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허둥지둥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아주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요하게 추격해왔고, 에슬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려 애쓰던 부데는 결국 오전 10시 경, 거기서도 밀려나야 했습니다.




(부데 사단에 딸린 프랑스군 포병대를 유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모습입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후퇴하는 부데의 사단이 밀려난 곳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였습니다.  여기 다음은 어제 새벽 프랑스군이 대거 도나우강을 건넌 교두보였습니다.  즉, 여기에서마저 밀려나면 이제 16만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기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대포를 방열하고 로바우섬으로부터 보급품을 나르고 있던 종군 민간 상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으나, 그러나 병력도 화력도 미약했던 부데 사단은 뭘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던 부데 사단을 향해 마침내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그람 전투 내내 프랑스군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북쪽 아더클라에서는 전선 중앙을 돌파당한데다, 남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교두보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뜻 밖의 방향으로부터 왔습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해 들어오던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로바우 섬으로부터 불벼락이 날아온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이후 약 1달 넘게 나폴레옹은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지요.  그 준비 중 하나가 로바우 섬 전체의 요새화였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에는 약 124문의 각종 대포 및 박격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1급 전함 1척이 강변에 닻을 내린 것 같은 효과였습니다.  아니, 전함은 양측에 포를 나눠 설치해야 했으므로 그에 비해 모든 포를 북쪽 강변으로 향해 놓을 수 있었던 로바우 섬은 1급 전함 2척이 나란히 강변에 정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일제히 오스트리아군을 강타했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대포가 조잡한 화력만을 낼 수 있다고 해도, 탁 트인 강변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밀집 대형으로 행군하는 보병대에게 날아든 무지막지한 대포알들은 끔찍한 살육을 일으켰습니다.  로바우 섬의 포병대는 신나게 대포알을 날려보냈고,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공포에 질려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밀려난 클레나우는 일단 숨을 돌리고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로바우 섬의 프랑스 포병대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재빨리 진격하여 몇 천 밖에 안 되는 프랑스 보병들을 밀어낸다면 최소한 프랑스군의 소중한 다리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방향을 이제 북쪽으로 틀어 프랑스군의 노출된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레나우는 두가지 방안 모두 택하지 않고,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결정합니다.  왜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은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는 것이었을까요 ?


클레나우가 멈추기로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오스트리아군의 경직성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카알 대공은 물론이고 클레나우 본인도 이렇게 쉽게 프랑스군 교두보까지 일사천리로 돌파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기고 있는 편이 약간 당황한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운좋게 적의 중앙부 뒤쪽까지 잘 뚫고 왔다고 해도,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고작 1만4천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10만 단위의 대군이 밀집한 적진 한 가운데에 막상 뛰어들고나니, 불안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왜 달랑 1개 군단을 적진 뒤쪽으로 찔러 넣었느냐고요 ?  그러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분명히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을 찔러 넣었거든요.  클레나우도 바로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  


클레나우보다 좀더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던 콜로브라트는 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더클라를 향해 북진하던 르그랑의 프랑스 사단과 딱 마주쳤습니다.  군단 대 사단의 만남인데다 공격 준비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행군 중에 생각하지 않은 내습을 당한 셈이어서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유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콜로브라트의 행동은 복장이 터질 정도로 굼뜨고 느린데다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의 임무가 프랑스군 후방으로의 기습 침투라는 것을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헷갈릴 정도의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일단 원래의 진지인 비삼베르크 언덕에 1개 여단을 뚝 떼어놓고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르그랑 사단을 가볍게 밀어내고 로바우 섬이건 마세나의 뒤통수이건 심지어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까지도 별 저항 없이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전면은 탁 트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르그랑 사단과 마주치자 콜로브라트가 첫번째로 내린 명령은 공격 명령이 아니라 후방 퇴로 확보였습니다.  그나마 빈약한 르그랑 사단에게조차 과감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먼저 포병대를 내세워 대포알만 날려보내는 소극적인 지휘로 초지일관 했습니다.  




(이 분이 콜로브라트 백작 Johann Karl, Graf von Kolowrat-Krakowsky 이십니다.  이분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패전인 호헨린덴 전투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등에서 모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그의 빛나는 승리가 100% 자신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라고는 말 못 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분의 무능함은 빛났는데, 그럼에도 이 분이 연달아 주요 군단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 오스트리아가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패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양반이 혁혁한(?) 활약을 한 바그람 전투 직후, 이 60이 넘은 노장은 무려 원수(Feldmarschall)로 승진합니다.)




아무리 카알 대공이 작전이 훌륭하다고 해도 무엇하겠습니까 ?  그의 작전을 수행할 장군들은 여전히 낡은 교리에 묶인,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 없던 무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능한 귀족들이 핵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운 좋게 손에 들어온 승리의 기회를 날려 먹고 말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18 23:41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레옹 섬(L'ile de Napoleon)이라고 별명을 붙인 로바우 섬에서의 준비는 6월 말 다리가 준비되면서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회전 부교(pivoting bridge), 즉 작전이 시작되면 로바우 섬의 강변에 고정된 한쪽 끝을 축으로 회전하여 도나우 강 좌안에 붙게 되어 있던 다리는 나폴레옹의 공병단장 베르트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서, 약 800m에 달하는 긴 다리가 놀랍게도 하나의 통판(single span)으로 만들어진 걸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작센 왕에게 이 회전 부교가 엘베 강변의 작센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다리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다리'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끝났는데 시간을 더 끌 나폴레옹이 아니었지요.  그는 7월 5일을 도강 날짜로 잡고,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으로 향했고, 보급과 숙영 등의 문제로 인해 주변에 분산 배치했던 각 군단들에게도 이 날짜에 맞춰 로바우 섬 맞은 편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는 장면입니다.)



로바우 섬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도강을 하리라는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명약관화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로바우 섬이 꽤 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넓은 강변 중 어느 쪽을 통해 강을 건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실은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이 구축한 방어 진지도 로바우 섬의 북안 쪽에만 펼쳐진, 상당히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넓은 강변을 다 지킬 수 없었으니까요.  이때 즈음해서는 카알 대공은 마르히펠트에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미 루스바흐 고원 지대로 물러난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평원을 텅텅 비워두고 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봤는지, 클레나우(Johann von Klenau)의 제6 군단과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의 2개 부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조치는 그다지 좋은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들이닥칠 나폴레옹의 공세를 막거나 시간을 끌기에는 너무 작은 병력이었고, 나폴레옹군의 병력 이동을 감시 및 보고하기 위한 정찰 병력으로는 너무 많은 병력이었던 것입니다.  좀더 규모가 큰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아스페른-에슬링 지역에 전개했고, 더 작은 규모였던 전위대는 에슬링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의 예측으로는, 아무래도 나폴레옹이 지난번과 동일하게 로바우 섬의 북안을 통해 넘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의 예측을 정반대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7월 2일 르그랑(Legrand) 장군의 지휘 하에 소규모의 부대를 로바우 섬 바로 북쪽의 도나우 강 좌안에 상륙시켜 오스트리아군을 긴장시켰습니다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진지가 없던 로바우 섬 동쪽을 통해 도나우 강을 건널 생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7월 4일 밤 10시, 보트를 이용해 로바우 섬 동쪽을 마주한 도나우 강 좌안의 돌출부인 한젤-그룬트(Hansel-Grund)를 점령하고 준비한 부교 3개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북쪽으로도 마세나 휘하의 병력이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넌 뒤, 재빨리 5분만에 회전 부교를 놓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내려준 폭우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고, 한젤-그룬트를 점령했던 프랑스군은 새벽 2시 경 부교를 완성하고 제2, 제3 군단을 도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7월 5일 오후에 이 부교를 건넜던, 외젠의 이탈리아군 소속 프랑스군 포병 대위인 노엘(Jean-Nicolas-Auguste Noel)에 따르면 이 다리 위로 대포가 지나갈 때 그 무게에 짓눌려 다리의 판자가 무려 50cm나 가라앉았다고 하니, 여전히 부교는 불안했고 또 따라서 대군이 그 많은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강을 건너는데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추가적인 부교도 몇 개를 동시에 놓도록 하여, 7월 5일 아침 7시 경에는 이미 마세나(André Masséna)의 제4군단과 다부(Louis-Nicolas Davout)의 제3 군단은 이미 도강을 완료한 상태였고, 우디노(Nicolas-Charles Oudinot)의 제2 군단이 다리를 한창 건너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들의 도강을 밤 사이에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몰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기에 대해서 변명거리가 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으로도 귀로도 이 대부대의 이동을 포착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로바우 섬 일대에 설치된 프랑스군의 포대가 아스페른과 에슬링 방향으로 빗발 같은 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이 곧 로바우 섬 북쪽 강변으로 건너올 모양이라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이미 로바우 섬 동쪽으로 프랑스군이 개미떼처럼 넘어 온 상황이라는 것을 해가 뜨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우디노의 제2 군단이 강변에서 정비를 마칠 때 즈음에는 비가 그치고 상쾌한 태양이 떠올라 병사들의 군복을 말려주기 시작했고, 우디노는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로막고 선 오스트리아군은 재수없게 이 쪽을 맡고 있던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 뿐이었습니다.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던 노르드만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는데, 작센강(Sachsengang)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 마을에 배치해 두었던 수비대는 그냥 내버려 둔 채 후퇴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체시키는 임무를 준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도 그다지 오래 버티지는 못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그 바로 동쪽에 있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 마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직접 현장에 도착해 오스트리아군 2개 대대, 즉 1천이 넘는 병력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이 마을을 둘러 본 뒤, 로바우 섬에 설치된 22문의 대포와 14문의 박격포, 10문의 곡사포에게 이 마을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입니다.  이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약 1천발의 포탄과 폭발탄을 퍼붓자 이 마을은 화재에 휩싸였고, 이들은 400명의 포로를 내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난 1달간 로바우 섬을 중무장 요새로 변모시킨 보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클레나우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제6 군단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 수비대를 지원하려 했으나 마세나의 제4 군단 소속 기병대에게 저지당했고, 결국 그들도 미리 정해진 제2 수비선인 북서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오전 10시 경, 프랑스군은 상륙 지점과 그 인근 마을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도강 자체는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패인이었던 어설픈 도강을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끝낸 나폴레옹이 스스로 뿌듯해 하는 동안, 프랑스군에게 밀려 북쪽과 북서쪽으로 각각 후퇴하던 노르드만과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입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작센강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수비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고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보병이었던 이들은 프랑스군의 추격에서 충분히 빨리 후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와 이들을 위협했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병대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보병 방진을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 상태로 후퇴하자니 후퇴는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 프랑스군의 보병과 포병이 이들을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밀집 대형의 보병 방진 앞에 적 포병이 나타나면 그건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애초에 카알 대공이 마르히펠트 평원을 포기하고 루스바흐 고원에 방어선을 친 주된 이유가 프랑스군의 강력한 기병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5개 군단, 약 2만5천의 보병을 그 넓은 마르히펠트에 경계 병력으로 남겨둔 것은 결국 과히 좋은 판단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경계 병력을 둘 것이었다면 차라리 소수의 기병대만 배치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따라 잡은 프랑스 포병대에게,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는 정말 최상의 타겟이었습니다.  아군 기병대가 주변을 맴돌며 이들을 위협하여 한덩어리로 잘 뭉쳐주고 있었으며, 혹시 적 보병들이 포병들을 향해 돌격해 올 위협에 대해서는 바로 옆에는 아군 보병들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요.  이들은 신나게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속절없이 볼링 핀처럼 뭉텅이로 쓰러져야 했습니다.  오후 1시 경이 되자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이미 많은 보병들이 쓰러졌는데, 이젠 아예 적에게 퇴로까지 끊길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모습을 고원 지대의 방어선 뒤에 있던 카알 대공은 모두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루스바흐 고원의 저지선 밖으로 나가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는 일은 피하겠다고 작정했던 카알 대공조차도, 눈 앞에서 2만의 아군이 전멸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심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도 무척 존중했던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군이 강력한 보-기-포병의 조합을 완성한 모습을 보자, 그도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군은 좌익은 마세나의 제4 군단, 중앙은 우디노의 제2 군단, 우익은 다부의 제3 군단을 제 1진으로 하여 마르히펠트에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이어 제2진으로는 좌측에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중앙에 마르몽의 제11 군단과 근위대, 그리고 우측에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전개되었고요.   제1진의 군단들이 2만명 이상의 규모로 강력했던 것에 비해 제2진의 군단들은 1만명 정도로 상당히 약한 편이었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은 여기저기에 휘하 사단을 다 떼어주고 고작 1개 사단 9천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제2진까지도 노르드만의 전위대를 따라 잡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3시가 넘자,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이판사판의 정신으로 후퇴를 멈추고 프랑스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들을 도우러 프랑스 망명 귀족 출신인 두르발(Nicolas-François Roussel d'Hurbal)이 약 1천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뛰어 나왔으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기병대의 요격을 받고 혼전 끝에 결국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 끝에, 결국 원래 1만2천으로 시작했던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무려 절반인 6천의 전사, 부상, 포로를 내고서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의 방어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나우의 군단은 비교적 적은 피해만을 입고 카알 대공의 방어선 중 서쪽 측면인 바그람-게라스도르프(Wagram-Gerasdorf) 전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투의 시작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무척이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카알 대공의 원대한 계획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11 14:14

손자병법에 따르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었습니다.  이건 결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시기과 지형과 병력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은 서로 이 세가지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병력은 양측 모두 최선을 다해 끌어 모아서 얼추 쌍방이 비슷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시기와 지형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도권이 뚜렷했습니다.  시기는 카알 대공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반대로 지형은 카알 대공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투 시기를 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격은 나폴레옹이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공격을 나폴레옹이 한다고 해서 전투 시기를 꼭 나폴레옹이 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다른 곳, 그러니까 보헤미아나 헝가리로 또 후퇴한다면 전투 시기는 카알 대공이 원하는 시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입장에서 빨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으므로, 그렇게 카알 대공이 더 깊숙한 후방으로 후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도 더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전쟁에 승산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 그도 이기든 지든 빨리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더 유리하다고 보았거든요.


그에 비해 어디서 싸우느냐는 카알 대공의 결정 사항이었습니다.  쳐들어오는 나폴레옹을 어느 지점에서 막아서느냐의 문제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과연 카알 대공이 그 위치를 어디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훗날 사람들은 카알 대공이 멍청하게도 강변에서 도강을 막지 않았다고 떠들어댔지만 카알과 그의 참모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나름 신중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의 어느 곳에서 도강할 지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전체 병력을 강변 가까이에 바싹 붙여 놓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랬다가 나폴레옹이 엉뚱한 곳에서 도강한다면 제대로 대응을 못할 뿐더러, 강변 옆의 막사는 병사들의 건강에도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도나우 강변 뒤로 펼쳐진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여긴 강변에서 가까우니까 나폴레옹이 강변 어느 쪽에 상륙하든지 신속성과 공간적 유연성의 잇점을 모두 가지고 프랑스군을 요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도 여기서 싸워서 마침내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바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과 그의 참모들은 여기도 병력 전개의 적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싸워보니, 일단 마르히펠트는 평원답게 기병대가 활약하기에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지금도, 기병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크게 우위에 있는 병종이었습니다.  바로 4년 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완패한 오스트리아는 전쟁 배상금의 일부로 많은 수의 말을 빼앗겼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크게 강해졌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만큼 약해졌던 것입니다.  덕분에 지난 전투에서도,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 공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막혀 전과 확대를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마르히펠트 평원은 완전히 탁 트인 벌판은 아니었고, 여러 마을과 작은 숲, 그리고 시냇물이 얽혀 있는 곳이어서, 대규모의 보병대가 밀집 진형을 이루며 싸우기엔 다소 까다로운 곳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보병들은 부분적으로 산개하여 전투를 벌여야 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숙련된 프랑스 보병들의 장기였고, 경직된 밀집 전열에 대한 훈련만을 받아온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그런 산개 전투에서 무척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문에 에슬링에서 고작 1개 사단에 불과한 부데 사단이 에슬링의 커다란 곡물 창고를 근거지로 저항하자, 무려 3대1의 숫적 우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이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었지요.  


여기도 안된다 저기도 곤란하다... 그러면 결국 어디에서 싸워야 한단 말입니까 ?  거기에 대해 카알 대공의 참모인 빔펜(Maximilian von Wimpffen) 장군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과 비삼베르크(Bisamberg) 언덕을 추천했고, 긴 고민 끝에 카알 대공도 그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르히펠트를 위에서 틀어막는 두 고지대, 북서쪽의 비삼베르크와 북동쪽의 루스바흐입니다.)



카알 대공은 선택한 루스바흐 고원은 마르히펠트 평원의 북동쪽에, 그리고 비삼베르크는 북서쪽에 있었고, 마르히펠트 평원을 북쪽에서 감싸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지막한 높이에 불과하여, 루스바흐 고원은 고원이라는 명칭이 부끄럽게도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고작 10m 정도 더 높은 평원 지대로서, 마르히펠트와는 나름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경사면 경계선을 따라 고원과 같은 이름인 루스바흐 시냇물이 흘렀는데, 이 경사면 지대의 이름이 바그람(Wagram)이었고, 이 고원의 남쪽 경계면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이었습니다.  이 루스바흐 고원 지대에는 마르히펠트처럼 마을이 많았습니다.  도이치-바그람 남동쪽으로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이 있었고 고원의 동쪽 끝 부분에는 레오폴츠도르프(Leopoldsdorf)가 있었습니다.  이 루스바흐 고원 지대와 마르히펠트 평원과의 경사면을 따라서는 고원과 같은 이름인 루스바흐라는 이름의 시냇물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루스바흐의 고지대는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기점으로 해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비삼베르크 언덕과 연결되었는데, 그 연결 부위는 고지대가 아니라 평지였습니다.  


루스바흐 고원은 길쭉한 북서쪽의 비삼베르크 언덕과 함께 마르히펠트 평원 북쪽을 대략 반원형으로 감싸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고지대면을 점거한다면 남쪽에서 올라올 프랑스군을  크게 벌어진 집게 모양으로 양측에서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루스바흐 쪽을 공격한다면 비삼베르크 쪽의 오스트리아군에게 측면을 노출하게 되고, 비삼베르크를 쳐도 루스바흐 쪽에서 위협받게 되는 것이지요.  결정적으로, 평평한 도나우 강변에서, 비록 10m 높이지만 루스바흐나 비삼베르크의 높이는 결정적인 전술적 잇점을 주었습니다.  항공기가 없는 시대에 10m 높이를 점거한다는 것은 3가지 측면에서 크게 유리했습니다.  먼저, 인간은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인지라, 보병이든 기병이든 아래에서 위로 돌격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둘째, 고지에 위치한 보병이나 포병은 아래쪽에서 쏘아붙이는 사격과 포격으로부터 엄폐될 수 있었습니다.  세째, 아군은 아래 쪽의 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적의 관측으로부터는 완전히 은폐될 수 있었습니다.    


이 여러가지 잇점 중에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세번째 것이었습니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휘관이 적과 아군의 위치 및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필요한 곳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때도 나폴레옹은 전황 파악에 큰 애로 사항을 겪었습니다.  도나우 강변이 모두 평지이다 보니, 좀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아스페른의 교회 탑에서 그게 가능했는데, 그 지점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그럴 수도 없었지요.  결국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의 큰 나무가지에 줄사다리를 걸고 거기에 임시로 만든 그네 같은 것에 앉아서 전황을 파악하려고 애 썼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큰 나무가 필요한 지점마다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그 점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묵고 있던 쇤브룬(Schönbrunn) 궁전 정원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냅니다.  정원사가 높은 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때 사용하는 A자 모양의 사다리였지요.  실제로 나폴레옹이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에 사령부를 설치할 때, 그의 짐 중에는 정원사의 사다리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다리 높이는 기껏해야 2m 정도였고, 카알 대공 이하 전체 오스트리아군이 누릴 10m 높이가 주는 잇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지인 중에 하늘(시기)과 사람(병력)의 잇점은 나폴레옹이, 땅(지형)의 잇점은 카알 대공이 가진 상황에서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06 12:58

피아베 전투에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막도날드 장군의 실질적인 지휘 하에 신속하게 북상하여 오스트리아 침공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행선지는 빈,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의 다시 한번 도나우 도강을 계획하고 있던 로바우 섬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나름 많았습니다.  곳곳의 고개길과 도시들을 지키는 요새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이미 카알 대공과 요한 대공,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에 차출된 마당에 그런 요새들을 지키는 병력은 충분치 않았습니다.  가령 5월 17일 타르비스(Tarvis) 전투에서 말보르게토(Malborghetto) 요새는 방어하기 아주 좋은 고지에 위치한 튼튼한 요새였으나, 6천의 오스트리아군으로 2만의 이탈리아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5월 30일, 그라츠(Graz) 같은 도시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은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차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고 무저항으로 도시를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곳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쾌속 질주를 계속했습니다.  



(구글 맵에서 찾아본 피아베에서 타르비시오, 그라츠를 거쳐 노이슈타트까지 가는 길의 거리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행군 경로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마침내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와 합류한 것은 6월 4일, 빈 남쪽 50km 지점에 있는 노이슈타트(Neustadt)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라츠에서 노이슈타트까지 130km를 5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26km씩 행군한 셈이고, 이는 당시 그랑 다르메 본진의 수준에 비해서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장 빈과 로바우 섬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뒤를 쫓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곧장 카알 대공 쪽으로 가지 않고 옆 걸음질을 쳐 헝가리 쪽으로 빠졌거든요.  외젠은 강행군을 했던 자신의 군대를 노이슈타트에서 2일간 휴식 시킨 뒤, 다시 그 뒤를 계속 추격해야 했습니다.  외젠은 결국 6월 14일, 노이슈타트 동쪽 약 120km 떨어진 랍(Raab, 헝가리어로는 Győr)에서 요한 대공을 따라잡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둡니다.  패배한 요한 대공은 더 동쪽으로 후퇴한 뒤 도나우 강을 건너 카알 대공 쪽으로 향했고, 승리한 외젠도 다시 서북쪽, 즉 로바우 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외젠은 7월 5일 벌어지는 바그람 전투에 2만3천의 병력으로 참전할 수 있었으나, 요한은 고작 1만2천의 병력을 그것도 전투가 이미 끝난 뒤에나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젠이 곧장 로바우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군대는 여전히 랍 지역에서 요한 대공의 잔존 세력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랍 인근에 주둔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외젠과 막도날드가 나폴레옹의 소환 명령을 받은 것은 7월 1일이었고,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로바우 섬을 면한 도나우 강변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7월 4일 저녁 9시경이 되어서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이런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가장 큰 패착은 도나우 강을 건널 부교를 시간에 쫓겨 너무 부실하게 구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를 뽑자면 결국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 두 문제에 의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처럼 도강지점마다 다리를 한개씩 만들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끝난지 약 1주일 뒤인 6월 1일부터 시작된 이 다리 건설의 책임자는 지난 번에도 다리를 지었던 공병단 지휘관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장군이었습니다.  이는 나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데, 나폴레옹이 아스페른-에슬링 패전의 책임을 최소한 공병대 측에 떠넘기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을 패전이라고 적어도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난 번 다리가 끊어진 책임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요행을 바랐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란이 죽었을 때, 아마 모르긴 해도 베르트랑은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부교 건설의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요.  아마 스페인 세고비아(Segovia)에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 수도교보다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섬으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2개 지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롭그룬트(Lobgrund)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3개나 지었고, 롭그룬트에서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짧은 다리는 훨씬 더 많이 지었습니다.  지난번 끊어졌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아무래도 가장 긴 부분인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단순히 튼튼하게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지난번처럼 자연적으로 떠내려오거나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부목이나 보트 등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철저한 방비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이 부교들 상류 쪽에는 일련의 말뚝을 촘촘히 박아 넣어 일종의 부목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약 30척의 대형 보트에 소형 대포까지 장착하여 상류 쪽을 순찰했습니다.  무거운 보트를 떠내려 보내려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베르트랑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로바우에서 도나우 북안 쪽으로 이어지는 최종 다리 부분이었습니다.  로바우 섬까지는 이미 프랑스군이 확보한 지역이었으나, 도나우 북안은 오스트리아군 장악 지역이었으므로, 도강 순간에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신속하게 다리를 놓은 뒤 일제히 대군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도 지난 번 전투에서 한번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퇴로가 막히는 아찔한 상황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르트랑은 이 부분을 위해 미리 구축된 조립식 부교를 무려 4개나 준비했습니다.  그 4개의 다리 중 하나는 이음매 없이 전체가 단 하나의 통판으로 만들어진 다리로서, 결전의 날이 되면 로바우 섬 강안에 한쪽을 고정시킨 뒤, 강물에 이 다리를 띄워 보내 90도 회전시켜 도나우 북안에 철컥 이어지도록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강습용 다리였지요.  이런 준비는 6월 말일 경 완료되었고, 나폴레옹은 7월 2일자 대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자랑스럽게 '프랑스군에게 도나우 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병력 동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리 건설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취했습니다.  즉,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더라도 거의 돌다리 수준으로 튼튼한 다리를 만반의 준비를 갖춰 준비한 것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는 모든 위험 부담을 다 끌어 안았습니다.  병력 동원을 적게 했냐는 뜻이냐 하면 전혀 반대로서, 다른 전선이 지나치게 취약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이번 전투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는 서쪽, 즉 본국과의 통신로 확보를 위해 후방에 배치해놓았던 병력을 모조리 소환하여 집결시켰습니다.  가령 빈 서쪽,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는 교통의 요지로서 프랑스군이 본국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주요 후방 근거지였습니다.  여기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전에도 한번 카알 대공이 병력을 보내 공격한 바 있고, 또 아스페른-에슬링 이후에도 오스트리아군이 재공격을 고려한 바 있을 정도의 요충지였지요.  이렇게 중요한 이 곳은 베르나도트(Bernadotte)의 제9 군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제9 군단조차 불러 들였습니다.  라구사(Ragusa) 공작으로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몽(Marmont)에게도 1만의 병력을 끌고 올라오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 이야기는 이미 들으셨지요.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모든 조심성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린츠 같은 곳은 너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지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한창 반란이 진행 중이던 티롤의 진압을 위해 투입했던 단치히 공작 르페브르(Lefebvre)의 제7 군단, 사실상 거의 전원이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진 바이에른(Bayern) 군단을 린츠로 소환했습니다.  이 덕분에 티롤 반란의 수장 호퍼(Hoffer)와 티롤 반란군은 티롤의 수도 인스부르크(Innsbruck)를 재탈환하고 기세를 올렸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산골짝 촌놈들이 기세를 올리건 말건, 모든 상황은 바로 이 곳, 도나우 강 건너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서 결판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은 6월 중순 경까지 빈 주변에 무려 24만의 병력을 끌어모았습니다.  물론 이들을 모조리 공세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이중 로바우 섬으로부터 도나우 강을 건너 공세에 나설 병력은 14만 보병에 2만8천의 기병, 그리고 488문의 대포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평생 최대의 병력 규모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준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동안,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탄탄한 기지가 없어서 궁지에 몰린 바가 있었지요.  그 기억을 되살려, 나폴레옹은 대-오스트리아 전선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 전체를 철옹성으로 중무장시키기로 합니다.  6월 말경, 부교들이 준비 완료될 즈음해서는 로바우 섬에는 무려 14개소의 포대가 구축되었고 거기에는 도나우 강 북안으로 건너갈 488문의 대포 외에도 124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설치되었습니다.  여기 뿐만 아니라 도나우 강 내에 있는 이런저런 작은 섬들에도 적절한 위치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중무장을 통해 최악의 경우에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진입로이자 퇴각로가 될 로바우 섬 근처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한 것이지요.  이 조치가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나폴레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국 큰 역할을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런 대대적인 준비를 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바우 섬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 작업을 펼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왜 카알 대공이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의 이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나우 강 북안에서 로바우 섬 대부분의 위치가 포 사정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대포를 대규모로 끌고 나와 화끈한 대포알 세례를 퍼부었다면 로바우 섬을 한폭의 지옥도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그런 방해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병력을 도나우 강 북단에서 후방 멀찍이 후퇴시켰습니다.  로바우 섬에 면한 도나우 강 북단에도 일부 진지선을 구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로바우 섬의 북쪽 강안에만 그랬을 뿐이고, 넓은 로바우 섬을 면하고 있는 다른 측면 대부분은 아무 진지 구축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적을 공격할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때라는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바로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폴레옹을 그런 방법으로 패배시킨 바 있는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불가라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건 추정이 아니라 팩트인데, 카알 대공은 더 이상의 전투를 원치 않았고, 이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체면도 적절한 선에서 살려줘야 했고, 구태어 불필요한 도발을 걸어 확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황제 프란츠 1세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정의 대부분은 철없는 주전파였고, 카알 대공의 이런 계획은 쓸데없이 나폴레옹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또 카알 대공은 이번에도 나폴레옹이 반드시 로바우 섬 쪽에서 지난번처럼 도강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쪽 방면에서 허장성세를 일으켜 오스트리아군을 집중시킨 뒤 다른 지점에서 도하는 것에도 대비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강변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아 고착화된 진지에 대군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더 먼 후방에서 내선 기동의 우위를 유지하며 어느 쪽에서 도강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에 대부대를 유지하지 않으려 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병사들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강가는 필연적으로 습한 지역이었고, 모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는 전투에서 총이나 대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 병사들보다는 이질과 열병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카알 대공의 이런 배려는 꽤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로바우 섬의 진지 구축을 위한 병사들 외에는 대부분의 병력은 빈 인근 3일 행군 거리 내에 포진시켰을 뿐, 강변에 대군을 몇 주씩 주둔시키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카알 대공이 힘을 기울인 것은 병력 집결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된 지역인 보헤미아(체코) 지역을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owrat) 장군의 제3 군단을 소환하고, 제국 내 각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국민방위군(Landwehr, 일종의 예비군 내지는 민병대)까지 휘하로 소집했습니다.  이건 사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젖먹던 힘까지 짜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원래 30~50대의 중산층 시민들을 비상근 형태로 훈련시키고 조직시킨 뒤 어디까지나 거주 지역의 수비대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서, 이들에게 대포알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횡대-종대의 복잡한 대열 변경이나 하루 30km의 강행군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당시 카알 대공의 병력은 약 9만이었는데, 이중 2만 정도가 전사-부상-포로 및 행방불명으로 상실되었으므로 7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3군단 약 1만8천과 국민방위군 등을 끌어모아 약 13만7천, 414문의 대포를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이럴 때 두 동생이 거느린 5만의 병력이었습니다.  개전 초기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뜻하지 않게 완강히 저항하는 폴란드인들 때문에 별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폴란드에서 밀려나 오스트리아령 갈리시아(Galici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3만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마르히펠트에 나타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폴란드라는 벌집을 잘못 건드린 탓에, 바르샤바 공국의 포니아토프스키 왕자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오히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침범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별로 적극적인 공격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동맹국인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국경 인근에 대기 중이었으므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곳을 텅 비워두고 마르히펠트로 내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Inner army of Austria)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던 이 군대는 원래부터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피아베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군세가 더 축소되었고, 결정적으로 요한 대공이 뭔 생각에서였는지 이 군대를 구성하는 2개 군단 중 하나를 그 군단의 본거지인 류블랴나(오늘날의 슬로베니아)로 되돌려 보내는 바람에 2만 정도로 크게 축소된 상태로 헝가리로 되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저 먼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Dalmatia)의 마르몽에게도 '1만명이라도 좋으니 다 끌고 올라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온갖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고 있는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결코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이랍시고 군단 하나를 그쪽으로 떼놓고 온 것은 정말 아쉬운 행동이었습니다.  어차피 류블랴나를 위협할 프랑스군은 외젠의 이탈리아군과 마르몽의 달마시아군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폴레옹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요한 대공의 잔존 2만 병력이라도 무척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요한 대공은 결국 형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군이 바그람에서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5.14 23:24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 같은 괴물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전투가 끝난 다음날부터 무려 36시간 동안 아무런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나선 그에게는 어지간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패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인 5월 23일 아침부터 나폴레옹은 이미 이 처참한 패배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된 선전 도구인 육군 회보(Le 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실릴 전투 결과에 대해,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 가야 했고, 프랑스군이 전장의 지배자로 남았다'라고 뻔뻔스럽게 구술했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꽤 먼 선언문이었지요.


휘하 장군들은 아예 비엔나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군단들을 재정비하고 패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단칼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일단 철수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이 비엔나로 철수하면 카알 대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를 것이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비엔나에 집착하지 않고 아예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 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은 둑이 무너지듯 프랑스-독일의 경계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는 그렇게 프랑스군의 후방을 끊는 작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보헤미아(체코)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에 기각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슨 생각을 하건 나폴레옹은 철수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답게 식량과 탄약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프랑스군은 여유있게 재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빈과 린츠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기 전에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 후방을 끊을 목적으로 이미 린츠 점령 작전을 시도한 바 있었지요.  물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군은 당연히 큰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행복과 기쁨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알 대공의 참모들은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 이전과 동일한 상태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알 대공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깔끔하지 않은 승리를 분석해볼 수록 프랑스군과 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군의 수적 우세가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격멸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카알 대공은 이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나폴레옹과의 평화 협상을 벌이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변변한 동맹도 없이 감히 혼자서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것은 혼자 힘으로도 나폴레옹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일단 자신이 불을 당기기만 하면 프랑스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바이에른과 작센, 뷔르템베르크 및 프로이센의 독일 민족이 대거 봉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굳은 동맹인 러시아도 내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이 첫 패배를 겪게 된다면 반-나폴레옹 연합전선에 러시아도 뛰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의 변변한 동맹국이라고는 저 멀리 떨어진 섬나라 영국 하나였는데, 영국은 네덜란드나 북부 독일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켜 프랑스의 뒤통수를 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모두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대로 반-프랑스의 깃발 하에 봉기한 것은 저 티롤 산골짜기 촌놈들 뿐이었습니다.  이 산골짜기 촌사람들은 놀랍게도 잘 싸워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을 묶어두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바이에른이나 작센은 여전히 나폴레옹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그의 깃발 아래 오스트리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프로이센은 드디어 찾아온 복수 기회 앞에서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원래부터 좀 덜 떨어진 편이었던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여전히 기가 죽어 있었지만, 그의 각료들은 모두 이런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되며 당장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심지어 프로이센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까지 던졌습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서 참전해준다면 과거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폴란드 바르샤바 공국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힘이 아직 건재한데다, 설령 오스트리아가 이긴다고 해도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가 기세등등해질텐데, 그건 독일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프로이센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상륙이요 ?  언제나 그렇지만 영국은 세치 혓바닥과 기니 금화만 뿌려댈 뿐, 자신들이 피를 흘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는 그 알량한 기니 금화조차 충분히 뿌리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간곡히 요청한 추가적 전쟁 보조금 지급조차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라인 연방의 지도입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위성국가 베스트팔렌 왕국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계 주민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기대가 완전히 헛된 망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학수고대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땅과 이런저런 독일계 소공국들을 모아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에서는 그 허수아비 왕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Jerome)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베스트팔렌에서도 병력이 대거 징집되어 나폴레옹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파병되자, 무력의 공백 상황에서 반-나폴레옹 정서가 심각하게 무르익었습니다.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 불을 지른 것은 뜻 밖에도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정규 경기병 연대였습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소위로 참전했던 쉴(Ferdinand von Schill) 소령은 당시 베를린에서 경기병 연대 하나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쉴 소령은 제4차 동맹전쟁의 패배 이후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 등의 개혁론자들과 함께 프로이센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 운동이 빌헬름 3세에 의해 불법화되자, 아예 애국적 무장 봉기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5월 초 부대 기동 훈련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경기병 연대를 통째로 끌고 베스트팔렌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규모 베스트팔렌 수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오히려 현지 주민들로부터 자원병을 추가 모집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한 빌헬름 3세가 기대와는 달리 쉴 소령과 그의 경기병 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자 기가 죽었고, 프랑스에 충성하는 네덜란드군과 덴마크군이 쳐들어오자 속절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쉴 소령의 반란군은 5월 말 결국 항구 도시인 스트랄순트(Stralsund)에서 패배했고, 쉴 소령도 전사해버렸습니다.   




(그가 전사한 스트랄순트에 건립되어 있는 쉴 소령의 동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희망은 뜻하지 않은 패배에 나폴레옹이 시무룩해진 이 순간에 재빨리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는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판단했습니다.  이건 아마 옳은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카알 대공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체면을 완전히 구긴 상태에서 누군가와 화평을 맺을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화평할 생각이 전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평을 원하지 않는 중요 인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카알 대공의 형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1세였습니다.  


(이건 23년 후인 1832년 그려진 프란츠 1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시민 계급의 혁명으로 끓어오르던 19세기 초 유럽에서 개혁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꼽힙니다.)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있어 카알 대공은 밥만 축내는 여러 동생들 중 믿을 만한 능력을 갖춘 유일한 형제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의 인기를 갉아먹는 잠재적 경쟁자였습니다.  일찌기 조카 프란츠 1세의 교육을 맡았던 전임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는 어린 프란츠 1세에 대해 '자기 한몸 보존이 무엇보다 소중한, 전형적인 마마 보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 프란츠 1세에게 있어 나폴레옹 못지 않게 견제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그는 카알 대공을 오스트리아 전군의 원수(generalissimus)로 임명해놓고도, 카알 대공을 젖히고 그 참모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내리는 등 카알 대공의 군내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었습니다.  


프란츠 1세의 입장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나폴레옹과 화평할 생각을 하지말고 싸워 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다 거기서 죽만 쑤던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가 거기서 물러나 카알 대공과 합류하고, 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도 돌아오면,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에게 맞설 충분한 병력을 갖추게 되는데 왜 화평을 하냐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프로이센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양보하겠다는 등의 굉장한 제안까지 해놓았으므로, 결국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것이 프란츠 1세의 여전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카알 대공의 다소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매파 장군들은 카알 대공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프란츠 1세의 그런 강경한 입장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뜩이나 비관적이었던 카알 대공의 기분을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제 정신 박힌 사람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궁정과 군 수뇌부를 휩쓸고 있던 과도한 자아도취와 근거없는 자신감에 자신까지 휩쓸린다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를 앞두고 있던 6월 말, 그의 삼촌인 테쉔(Teschen) 공작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쓸 정도로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저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왕조를 위태롭게 할 만한 모험은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원래 싸움은 기 싸움이 절반이라고 하는데,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의 2차전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카알이 절반은 지고 들어가는 경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23 21:43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나 오스트리아군에게나 전례없이 길고도 치열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양측은 거의 48시간 동안 잠도 거의 먹지도 못 자고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거나 싸웠지요.  5월 22일 오후 5시 이후 이 대규모 살륙전이 서서히 잦아든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양측의 상황은 이틀 전과 사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스페른에서는 마세나의 제4 군단이 힐러와 벨가르드의 2개 군단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면서도 조금씩 후퇴하며, 결국 이때 즈음엔 아스페른이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로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세나의 군단은 여전히 맹렬하게 저항할 병력과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힐러와 벨가르드의 군단들은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후퇴는 무질서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오스트리아군은 그 뒤를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마세나의 제4 군단 잔여 병력은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고 아스페른 외곽에서 로바우섬으로의 철수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대편의 에슬링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비록 에슬링 전체가 포격과 화재로 쑥대밭이 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적어도 이 곳에서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랍의 근위대에게 축출된 이후, 두번 다시 에슬링을 상대로 반격을 꾀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우월한 포병 전력을 내세워 프랑스군을 계속 두들겼고, 이는 란을 비롯한 많은 프랑스군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포병 화력은 장거리에서 적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기에는 너무 약한 편이었고,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이틀전 전투 시작 이전과 비슷한 전선으로 되돌아온 셈이 되었지요.  그 많은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


해가 지자, 카알 대공은 애써 손에 넣은 아스페른에 수비대를 남겨놓고는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먼 곳으로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고, 최소한 이 날 전투는 여기서 끝이 난 것 같으니, 프랑스 포병의 포격 사정권 밖으로 최소한 보병과 기병은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볼 필요는 없고, 혹시 다음날 또 치열한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니 병사들을 먹이고 재워 재충전시키는 것이 더 급하다고 본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르쉐펠트의 벌판으로 철수한 뒤, 그 자리에 털썩 무너져 쓰러졌습니다.  정말 길고도 힘든 전투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로바우섬으로 질서있는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의 교두보에는 이미 든든한 토루를 쌓아 방어 진지를 구축해 두었는데, 이 곳에는 여전히 일부 병력을 남겨 지키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에서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강변까지 쫓아나와 밤새도록 대포알(roundshot)과 폭발탄(bomb, shell)을 쏘아댔다면, 로바우섬에 빽빽히 집결한 프랑스군은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조잡한 포병 화력으로는 프랑스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밤새도록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라는 공포심을 프랑스군에게 안겨주어,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전투를 위한 체력 보충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카알 대공은 그런 집요함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카알 대공의 그런 결정은 이틀 동안, 특히 5월 22일 당일날 카알 대공 자신이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웠다는 점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오스트리아군 최고 지휘관인 왕족들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지휘관 타이틀만을 쥐고 더 멀리 후방 안전한 텐트에서 펜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전에는 비슷했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5월 22일 란이 직접 이끈 중앙 공격에 오스트리아군 전선이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알 대공은 패주하는 병사들을 가로 막고 돌려세우는 등, 자신의 몸을 적탄에 노출시켜가며 현장 지휘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의 맹장 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카알 대공의 이런 헌신적인 지휘의 공이 컸습니다.  5월 22일의 지휘는 카알 대공의 인생 지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만큼 카알 대공 자신도 기진맥진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부하들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공감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카알 대공입니다.  이 양반의 인생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이틀 간의 전투 내내, 안전한 로바우 섬이나 강변 등 후방에서 지휘했습니다.  근위병 쿠아녜(Coignet)의 수기에 따르면, 5월 22일 아침 나폴레옹이 강변에서 전투 현장으로 이동하려 할 때,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적의 대포알에 맞아 쓰러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쿠아녜를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이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으신다면 우리 근위대는 한발짝도 전진하지 않겠다'라고 나폴레옹의 후퇴를 강요했기 때문에 나폴레옹도 어쩔 수 없이 후방으로 물러났다고는 합니다만... 글쎄요.  확실한 것은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아르콜레(Arcole) 다리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며 싸우던 나폴레옹은 1809년 도나우 강변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1796년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입니다.  저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기가 깃발을 들고 앞장 서서 다리 위로 돌격한 것처럼 저런 그림을 그리게 했지만, 정작 저 장면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의 부하 오쥬로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병력을 물린 덕분에, 더 이상의 퇴로가 끊긴 로바우 섬의 프랑스군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가득찬 부상병들도 아무 치료를 못 받았고 후송도 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 없이 살아남은 병력들도 아무런 보급품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벽 1시가 되어 더 이상 소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폴레옹은 쪽배를 타고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남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건너갔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 장교 1명을 함께 쪽배에 태워 후송시키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의문이 드는 것은 그의 절친 란조차도 깨끗한 물 한모금 없이 담요 한장 덮지 못하고 로바우 섬에 방치된 상태였는데, 적군 장교에게는 그런 인도주의적 아량을 베풀었다는 점이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패전 속에서도 '인도주의자 나폴레옹'이라는 허명을 얻을 선전거리를 만드려는 계략이 아닌가 의심도 듭니다만, 캄캄한 밤 수많은 병사들과 부상병들이 뒤엉킨 상황에서 부상을 입은 란을 금방 찾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바우 섬에는 비축된 식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르보의 수기에 따르면 그날 밤 많은 병사들은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많이 있던 죽은 군마의 고기를 잘라내어 흉갑 기병의 갑옷을 냄비 삼고 화약을 소금 삼아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화약을 고기에 넣는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고 건강에 해로울 것 같긴 합니다만, 어차피 당시 화약은 황과 숯, 그리고 질산칼륨으로 되어 있었고 질산칼륨 덕분에 화약은 짠 맛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당시 머스켓 소총 장전 방식은 병사들의 입 안에 화약이 항상 조금씩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니 병사들은 화약으로 짠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1815년 대포알 구멍이 뚫린 프랑스 흉갑기병의 가슴받이 갑옷이라고 구글에 나옵니다만... 진짜 그런 물건치고는 너무 상태가 좋네요.)




(흑색화약은 75%의 초석과 15%의 숯, 그리고 10%의 유황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석은 영어로 saltpeter라고 하지요.  짠맛이 난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맛을 본 적은 없습니다.)


5월 23일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트들을 이용한 부상자들의 소개가 시작되었고, 다리를 절단한 란도 이때서야 도나우 남안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는 하루 뒤인 24일에야 다시 연결되었지만, 많은 병사들은 결국 로바우 섬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공격하겠다고 결심하여 즉각 그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 이곳저곳에 보루와 포대를 설치하여 군사 요새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에라도 카알 대공이 강변으로 대포들을 끌고 와 로바우 섬에서 무쇠와 화약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벌였다면 어땠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재정비가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도나우 강 좌안으로의 재도강 준비를 방해받지 않고 착실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분명히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였습니다.  왜 카알 대공이 이 값진 승리를 100% 활용하여 22일 밤 프랑스군을 더 몰아 붙이지 않았는지, 또 왜 23일~24일에 로바우 섬에 포격이라도 가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마치 승리가 간절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의 후속 작전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이틀간의 전투가 너무나 치열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너무 컸고 또 병사들이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어지간한 전투에서 패배한 측의 (포로를 제외한) 전상자 비율은 총병력 대비 10~15% 정도가 상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은 왕가끼리의 영토와 세수를 위한 비즈니스의 연장일 뿐, 뭐 불구대천 원수지간끼리의 너죽고나살자식의 살육전은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면 물러나는 것이 상식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포로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총병력의 20% 넘는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비율이 무려 23%였습니다.  사상자 비율로만 본다면 아마 참담한 완패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장교들과 병사들의 충격은 말할 나위 없이 컸을 것이고, 그런 참극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본 카알 대공도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이 더 공격하지 않은 것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전례없이 승패가 뚜렷하게 드러났던 아우스테를리츠,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여기서 전상자 비율 계산할 때 포로는 제외했습니다.)


이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그 정도였는데, 진 프랑스군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입니다.  전투 후 전상자 숫자에 대해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상세히 포로를 합해 23,34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애매모호한 표현만 쓰며 정확한 전상자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개 오스트리아군과 비슷한 2만3천 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적은 병력을 동원했는데 적과 비슷한 수의 사상자를 냈으니, 프랑스군이 더 효율적으로 싸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측면에서 보면 무려 35%에 달했습니다.  함께 전장으로 나간 전우 3명 중 1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히 부대 단위로서의 기능을 잃을 정도의 대참패였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이긴 측이나 진 측이나 예전에 비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측이나 패배한 측이나 왜 이렇게 큰 인명 피해가 났는가에 대해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실 명백하고 단순합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 나폴레옹 전술의 요체는 기동전이었습니다.  적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하여 병력의 이동과 집결을 자유자재로 펼쳤고, 그를 통해 전체적인 병력은 적보다 더 적을지라도, 정작 전투 현장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 그 승리의 비결이었지요.  그러나 다리가 끊긴 도나우 강변에서는 그런 전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 적은 병력으로 무리하게 정면 중앙 돌파를 노렸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일방적인 전투가 아닌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결국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흔히 전장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야말로 천재에 가까운 인간이었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나이가 들면서 명민함이 떨어지고, 또 관록이 쌓이고 신분이 높아지면서 교만함이 커진 것이 이런 참극을 불러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돋보인 전투는 4월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1812년 러시아 원정때까지 나폴레옹의 지휘는 평범한 물량전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809년 4월 19일 이후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입니다.  베르티에의 실수로 인해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나폴레옹은 도착하자마자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단번에 뒤집고 카알 대공으로 하여금 대대적 후퇴를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전투가 1813년 이전까지는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보여준 거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양측의 피해가 커진 원인은 또 있습니다.  아마 1805년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스페른-에슬링 두번째 날, 란이 직접 지휘한 프랑스군 생-일레르 사단의 공격에 중앙을 돌파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평범한 정면 공격이라도 큰 전과를 거둘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잠깐 동안은 거의 돌파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까지 갔지만) 결국 버티어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이를 카알 대공의 개인적 용기와 리더쉽에 의한 승리라고 떠벌였지만, 수천 수만명의 병사들이 뒤엉키는 전장터에서 개인 하나가 발휘하는 용기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버티어낸 것은 오스트리아 병사 개개인이 1805년 패전 이후 카알 대공의 대대적 군 개편에 의해 많이 바뀐 상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오스트리아군은 일부 상비군 외에는 필요할 때마다 징집되어 동원되는 군대였고, 따라서 당시 전장에서 요구되는 복잡한 대형 변환 등이나 개인 전술 등에 숙련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전국민 개병제에 의해 징집되는 상비군 형태였으므로 훨씬 더 많은 훈련을 받고 또 많은 전쟁으로 인해 숙련된 군대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군 개혁은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즉 헝가리나 세르비아 등을 제외한 독일계 영토)에서의 전면적 징집제 실시 및 군단 제도의 도입 등 프랑스군을 거의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비록 귀족들로 구성된 지휘부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했으나, 병사들 하나하나의 자질 면이나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 사병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나 발칸 반도, 네덜란드나 체코 등에서 프랑스군과 싸울 때, 대체 자기들이 왜 이런 이역 만리에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에 맞서 마르쉐펠트에 펼쳐진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4년 전 비엔나를 점령할 때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를 톡톡히 털어가는 것을 본 뒤인지라, 여기서 또 그런 피해와 굴욕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동기 부여가 된 상태였지요.  나폴레옹은 이번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프랑스군의 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자체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을 시작하며, 나폴레옹은 '내 군대가 이렇게 잘 정비되고 수가 많았던 적이 없다'라고 스스로 자랑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닌 것처럼 프랑스군도 더 이상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는 불로뉴(Boulogne) 병영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영국 방면군을 모체로 하는 대부대로서, 그야말로 정예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들을 끊임없이 전장으로 끌고 다니며 소비하다, 결국 1807년 동프로이센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1809년 도나우 강변에 도착한 이들은 더 이상 다년간의 전투로 다져진 고참병들이 아니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신병들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또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동원된 나폴레옹 휘하 부대 중에는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 등 많은 독일 소국들의 군대와 북부 이탈리아군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강제로 동원된 동맹군들이 과거의 그랑 다르메처럼 열정적으로 싸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라이플 소총을 든 바이에른 유격병입니다.  이런 병사들은 특히 1812년 러시아로 떠나면서 대체 왜 자기가 머나먼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섞여, 결국 나폴레옹은 모두가 인정하는 나폴레옹 개인의 첫 패배가 이곳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적 신화를 자랑하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첫 패배 소식은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은 이미 이곳저곳에서 많이 패배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아일라우 전투도 사실상 나폴레옹의 개인적 패배였고, 과거 1797년 만토바 구원 작전에서 알빈치(József Alvinczi von Borberek)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패배한 적도 있었고, 시리아 아크레에서의 패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패배들은 황제가 되기 전의 일이거나, 저 머나먼 동유럽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럼프 못지 않게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조작질에 익숙한 선동가였으므로 아일라우 전투 같은 것은 '베니히센이 물러났으므로 나의 승리'라는 식으로 포장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수도 빈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진 이 대규모 전투의 승부는 도저히 숨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체면을 구긴 나폴레옹은 '최전선에서 먼저 물러간 것은 카알 대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승리다'라든가 '내가 진 것은 도나우 강에게 진 것이다, 오스트리아군 따위에게 진 것이 아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성질을 부렸습니다.  대체 이겼다는 것인지 졌다는 것인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스스로도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에게 졌다'라고 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나폴레옹이 과거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것은 운을 바라고 도박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수한 지휘관들이 통솔하는 잘 훈련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치밀한 지리 연구와 엄밀한 행군 속도 계산에 의해 병참과 병력 이동 계획을 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809년 5월 22일 아침, 그는 이미 여러번 끊어진 바 있는 로바우 섬 남단의 위태로운 부교가 언제든 또 끊어질 확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자만심과 내가 펼치는 작전인데 뭔가 당연히 행운이 따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부교는 또 끊어졌고, 나폴레옹은 그 댓가를 란의 목숨과 패배로 치루어야 했습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5에서 악당 솔로몬 레인이 이단 헌트(톰 크루즈)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지요.


Ethan Hunt is a gambler. And one day his luck will run out.  (이단 헌트는 갬블러야.  언젠가는 그의 운빨도 끝나게 되어 있어.)




나폴레옹은 톰 크루즈와는 달리 갬블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갬블링을 했고, 그러자마자 운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분명 이 전투는 카알 대공의 승리였고 나폴레옹의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전쟁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 의미있는 승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를 시작할 때 프랑스군의 도강을 중간에 격파하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작전을 쓰지 않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도강을 다 마친 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이려 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시의 국가적 역량으로 볼 때, 프랑스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격차는 너무나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도강 중간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작은 패배를 안겨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럴 경우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더 많은 준비를 해서 다시 전투를 벌이려 할 것이 틀림없으며, 그럴 경우 무의미한 희생만 치를 뿐 오스트리아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알 대공의 목표는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유리했는데, 카알 대공의 생각에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이 패배를 인정할 만한 정정당당한 전투를 벌여, 어떻게든 거기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바우 섬 남단의 부교가 끊어지는 순간,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지게 되었지만 핑계거리를 찾았던 것이고, 카알 대공이 원하던 후회없는 정정당당한 전투는 날아가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카알 대공의 그런 생각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도나우 강 탓으로 돌렸고, 그에게는 구겨진 그의 체면을 세워줄 승리가 간절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바그람에서 마주 서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의 역량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다리부터 튼튼히...)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26 21:14

5월 22일 오전 8시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의 안색은 상당히 침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영웅다운 침착함이다 아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을 못한 것이다 등등 말이 많습니다만, Harold Parker의 'Three Napoleonic Battles'라는 책의 주석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날 부교는 한번이 아니라 두번 끊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7시에 작은 규모로 끊어졌고 이는 곧 수리될 수 있었으나, 곧 이어 9시에는 도저히 그날 중으로는 수리가 안 될 지경으로 크게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전 8시 경 나폴레옹이 받은 보고는 그 첫번째의 대수롭지 않은 파손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책과 인터넷 사이트마다 몇 시 경에 다리가 끊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각기 다른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도 제각기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교, 정확하게는 프랑스군의 도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도나우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을 연결하는 긴 부교가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교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그다지 튼튼한 물건이 아닌데다, 든든한 부교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품, 즉 닻이 없는 상황에서 포도탄과 어부들의 통발로 대충 만든 대용품으로 건설한 부교이다보니, 그냥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슈바르츠발트에서 예년보다 일찍 눈이 녹으면서 평소라면 6월에나 있을 도나우 강의 범람이 일찍 시작되어 물결이 무척 거셌고, 또 뿌리 뽑힌 나무나 나무가지 더미 같은 잡동사니들도 많이 떠내려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닻이라는 물건은 자동차에서 브레이크처럼 중요한 물건입니다.  특히 부교처럼 항해보다는 정박이 중요한 임무인 보트에게 있어서, 닻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품이었습니다.  잔잔한 물결에서는 어부의 통발에 쇳덩이를 대충 쟁여 넣은 것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센 물결에서는 튼튼한 닻이 꼭 필요했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부교가 끊어진 것은 카알 대공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말려든 결과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적이 절반 정도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이 양분된 상태에서 각개격파하는 것은 모든 지휘관이 꿈꾸는 일인데, 강이 그렇게 적을 양분해주니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적이 부교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는 경우 그 부교를 끊어놓는다면 이미 강을 건넌 적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카알 대공이 일부러 도나우 강 좌안을 비워둔 뒤, 미리 준비해둔 통나무나 무거운 돌을 실은 보트들을 급류에 떠내려 보내서 부교를 파괴했다는 것이 무척 그럴싸한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5월 22일 운명의 아침에 부교가 크게 부서진 것은 확실히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대형 보트 때문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보트에 큼직한 물레방아를 통째로 실은 보트 하나가 급류에 떠내려 와 프랑스군의 부교를 들이 받았고, 이로 인해 부교를 구성하던 여러 척의 바지선이 떠내려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카알 대공의 작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부교를 끊어서 다부의 제3 군단이 도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카알 대공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 달갑지 않은 전쟁은 카알 대공이 애써 키워놓은 군단들을 재정 문제로 인해 해체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국 땅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불리한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에서 바라는 바는 나폴레옹과 건곤일척 후회없는 일전을 벌여 망하든 흥하든 추가적인 전투가 없도록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교가 끊어져 다부의 제3 군단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나폴레옹은 패배한다고 해도 부교 핑계를 대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다시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희생을 동반하는 제2, 제3의 전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을 텅 비워놓았던 것은 뭔가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폴레옹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안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설령 오스트리아군이 의도적으로 보트를 떠밀어 보냈다고 해도, 많은 섬이 얽혀 여러 개의 지류로 나누어지는 넓은 도나우강에서, 그것도 우안이 아니라 좌안에서 떠내려보낸 보트가 주변 섬 모래톱에 좌초하지 않고 정확하게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 사이의 지류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부교를 끊는 것에 전체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보트 한두 척만 떠내려 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당한 크기의 대형 보트를 대규모로 떠내려 보냈을텐데, 프랑스군의 기록에도 오스트리아군의 기록에도 그런 대형 보트의 대규모 함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상류에 있던 일부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부교를 보고 즉흥적으로 떠내려보낸 보트 몇 척 중 하나가 럭키 스트라이크를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좌안에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우안에서 보트 한 두척을 떠내려 보내면서 그것이 정확하게 로바우섬 서쪽 지류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요행수를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말이 있지요.  1931년에 발행된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라는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통계치에서 비롯된 이 법칙은, 산업 현장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생기는 큰 사고가 하나 생길 때, 평균적으로 300여건의 부상자없는 작은 사고와 29건의 작은 부상만 따르는 작은 사고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뭔가 작은 부주의와 소홀함이 쌓이고 쌓여 큰 재난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법칙이 1809년 5월 22일 아침의 부교 붕괴 사건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부교를 하나만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놓았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빈의 대장간에서 닻 수십개를 두들겨 만들었더라면, 여러 가닥의 긴 밧줄이나 목책 구조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방어물을 부교의 상류 쪽에 설치했더라면, 아니, 아예 다부가 로바우 섬으로 건너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했더라면, 이 날 프랑스군의 참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날의 비극은 날씨, 혹은 물결로 인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결국 나폴레옹의 안이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필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입니다.  인명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부교가 끊어진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작전 때문이든 도나우 강의 급류에 떠내려 온 통나무 때문이든,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접한 나폴레옹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의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겠다는 백업 플랜 따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그는 전령 둘을 불렀습니다.  한 명에게는 즉시 강변으로 나가 책임 공병 장교에게 부교 수리에 얼마나 걸릴지 알아보라고 했고, 나머지 하나에게는 란 원수에게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전령이 도착했을 때 란의 상황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일레르 사단을 앞세워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었는데, 카알 대공의 지원 부대가 나타나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난데 없이 나폴레옹의 전령이 나타나 다짜고짜 더 공격하지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 이건 지키기 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대포알이 채찍질처럼 날아드는 허허벌판에서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요 !


설상가상이라고, 란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 보병 사단이 무너지자, 카알 대공은 전술을 바꾸어 포병을 전면에 내세워 무차별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멈추려 했습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 전력은 프랑스군을 4배 정도로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란 휘하 사단장 중 가장 용맹했던 아우스테를리츠의 영웅 생-일레르 장군도 발목에 적 포탄을 직격 당하고 로바우 섬의 야전 병원으로 실려간 뒤였습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연상이었던 생-일레르의 full name은 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으로서, 기병 대위였던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후보생으로 군에 들어갔었고, 혁명 이후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승진을 할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29세의 나이에 이미 장군이었던 그는 1795년 북부 이탈리아의 로아노 전투에서 손가락 두개를 잃을 정도로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용기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발목을 잃은 그는 결국 괴저로 인해 15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어정쩡한 명령을 내린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교가 끊겼다면 다부의 지원 병력은 고사하고 탄약 부족으로 인해 마세나와 란은 당장 철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세나와 란의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즉각 로바우 섬으로 후퇴를 명령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위태위태했던 다리는 급류니 통나무니 하는 것들로 인해 여러번 끊겼었고, 그때마다 몇 시간 만에 수리가 된 바 있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한두 시간 안에 수리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대로 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한 공병 장교가 처음부터 '매우 심한 손상으로 인해 수리에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릴 듯'이라고 명쾌한 보고를 했다면 이렇게 상황 파악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하들은 상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자세히 보고하는 것을 꺼리기는 하지요.  덕분에 란과 그의 부하들은 1시간 동안 허허벌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격 연습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은 카알 대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프랑스군의 공격이 멈춰진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어쨌거나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반격을 위해 보병 사단들을 재규합했습니다.  또한 그는 포병을 내세운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하고는 보병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포병대를 더 전진시켜 프랑스군에게 집중 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당시 포병대는 1발 발사하는데 2~3분이 걸릴 정도로 발사 속도도 느렸고, 또 그렇게 애써서 쏜 포탄도 불꽃과 함께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폭발탄이 아니라 그냥 쇳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밀집 보병 대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날 중으로 부교 수리 불가능'이라는 현실적인 보고가 날아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철수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은, 도나우 남단의 이미 끊어진 부교보다 많이 짧긴 하지만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엉성한 부교 하나 뿐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과 란의 제2 군단 중 살아남은 병력 전체, 거의 4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이 다리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퇴하는 그들의 등 뒤로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의 오스트리아군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