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9.17 01:42

양측의 모든 장군들이 다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만, 프랑스군의 맨 오른쪽을 담당한 다부(Louis-Nicolas Davout)도 새벽부터 바빴습니다.  사실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스타트를 끊은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이 다부의 프랑스군 제 3군단을 습격한 사건이었지요.  이 공격은 이미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해놓았던 다부에 의해 즉각 격퇴되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현장에 달려오는 등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중앙을 버려두고 맨 동쪽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요 ?  당시 39세로서 프랑스군 원수 중에서는 가장 어렸던 다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요 ?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그 능력에 있어서나 충성심에 있어서나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새벽의 그 소동이,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멀리서 당도한 것인지 걱정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이 루스바흐(Russbach) 고원의 지형적 우위를 버리고 평원으로 내려와 감히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지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이번 전투의 승패는 바로 다부의 제3 군단의 활약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은 완만한 반원형으로 굽은, 동서로 길게 뻗은 고지의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진형 때문에 프랑스군이 평야 저지대로부터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역이용하려 한 것이 바그람 전투의 핵심이었습니다.  평야에 배치된 프랑스 군단들이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망치 역할을 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측면에서 납작하게 때리는 역할을 할 것이 다부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부가 먼저 로젠베르크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이 포진한 루스바흐 고원의 동쪽 끝에 올라선 다음, 거기서부터 김밥 말듯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려야 했거든요.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면 두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저 멀리 프레스부르크에서 오고 있다는 요한 대공의 군대가 제때 나타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쪽에 배치해둔 정찰 병력이, 요한 대공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거든요.  둘째 조건은 다부의 측면 공격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측면을 찔러, 분산된 적군을 조금씩 분쇄하며 전진하는 것이 승리의 요소였는데, 만약 적군이 나폴레옹의 작전을 눈치채고 동쪽 고지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한다면 아무리 다부라고 해도 쉬운 승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벌어진 로젠베르크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기습의 요소가 망가져버리자, 나폴레옹은 전체 작전이 흔들릴까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물러가 또아리를 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 뒤, 기습이라는 잇점이 사라진 것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다부에게 하달했습니다.  즉, 공세를 두갈래로 나누어,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정면과 함께 측면으로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둘러본 그 일대 지형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바라보고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남서쪽면은 꽤 급한 경사면으로 되어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쪽 측면은 매우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어 진격이 꽤 수월해보였던 것입니다.  다만, 그 동쪽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력을 루스바흐(Russbach) 개천 너머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대포를 개천 너머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임시 가교를 놓는 등 꽤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습의 요건이 사라진 이상,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나폴레옹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항공 사진에 당시 다부의 공격 방향을 표시한 것입니다.  루스바흐 개천의 모습은 아마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공격 개시 시간이 2~3시간 늦어지더라도, 어차피 처음부터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프랑스 군단들 중 그야말로 최강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프랑스군의 각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포병 연대와 기병 연대까지 합해서 약 2~3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편제였고, 실제로는 전투에 나설 때 2만을 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1만7천 정도의 병력만 갖추고 있었고, 달마시아(Dalmatia) 방면군으로 형성된 마르몽(Marmont)의 제11 군단은 1만에 불과했습니다.  주요 지휘관이 거느린 군단은 규모가 좀더 컸습니다.  나폴레옹이 새벽부터 아스페른부터 아더클라까지의 약 8km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며 조자룡 헌창 쓰듯 부려먹은 마세나의 제4 군단도 2만8천의 병력에 86문의 대포를 갖춘 강력한 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다부의 손에 쥐어준 제3 군단은 무려 3만8천의 병력에 120문의 대포를 가진 진짜 전쟁 기계였습니다.  그에 비해 로젠베르크가 거느린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은 1만9천의 병력에 60문의 대포 뿐이었고, 전날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 장군의 전위대 잔존 세력 6천을 합해도 다부의 제3 군단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화력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나폴레옹은 새벽에 달려온 지원 병력 중 원래 기병 예비군단 소속이던 아리기(Jean-Toussaint Arrighi de Casanova) 장군의 흉갑기병 사단 약 2천을 다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애초에 로젠베르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리기 장군은 나폴레옹과 같은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조카사위 뻘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초기부터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이 전투 뒤에 '다부가 자신의 흉갑기병 부대를 터무니없는 지형 속에 쳐넣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쪼르르 나폴레옹에게 쫓아가 일러바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부가 아리기의 부대를 부적절한 지형에 투입한 것은 맞는 말이긴 했습니다.)




다부의 공격은 오전 10시 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부는 나폴레옹이 명령한 대로 병력과 대포를 반으로 나눠 정면, 즉 그로스호펜(Grosshofen) 쪽으로부터는 구댕(Gudin)과 퓌토(Puthod) 사단을 진격시켰고, 동쪽 측면으로부터는 미리 동쪽에서 루스바흐 개천을 건너 위치를 잡은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나폴레옹 머리 속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프리앙과 모랑의 사단들이 측면을 우회하느라 이동하는 모습을 로젠베르크는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확실히 고지를 점거한 측이 전투 현장에서의 정보 파악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에는 랜드마크 격인 꽤 높은 탑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모두 훤히 보였습니다.  당연히 정면으로 도전해온 구댕과 퓌토은 물론, 측면으로 들어온 프리앙과 모랑 모두가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지금도 서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입니다.  교회는 아니고... 무슨 목적의 탑인지 못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사기만 충천할 뿐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포병대와 기병대의 전력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새벽에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의 선제 공격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숙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훨씬 많았던 프랑스군의 포병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이미 많은 수의 대포를 파괴당한 상태였습니다.  압도적인 프랑스 포병대가 우박처럼 쏘아대는 포탄과 폭발탄에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은 곧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전진해오는 프랑스군 보병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위협을 가했으나, 이들도 훨씬 더 우세한 프랑스군 기병대에 곧 제압되었습니다.  특히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패전 이후 많은 군마를 나폴레옹에게 몰수당한 뒤 기병 양성에 애로사항이 많았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집단 기동에 무척이나 미숙했습니다.  로젠베르크에게 배속된 오스트리아 기병대도 숫자는 적지 않았습니다.  긴 횡대 진형의 끝 부분을 맡고 있는 로젠베르크 군단의 중요성과 취약성을 잘 알고 있던 카알 대공이 무려 5200명의 기병대를 배치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부가 거느린 약 8000의 기병대와 겨루어 볼만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중대(squad) 단위의 전술 정도만 익혔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랑스군 기병대처럼 연대 단위가 한덩어리로 돌격과 선회를 자유자재로 하는 적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의미없는 소규모 돌격을 거듭하다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보이는 곳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쓰러지는 바람에 함께 쓰러진 다부의 모습입니다.  이건 봉변이 아니라 상당한 명예였습니다.  당시 장군들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용담으로 '내가 탔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진짜든 거짓말이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정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다부 휘하에서 이 공격에 참여했던 제7 경보병 연대의 한 병사는 적의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자신도 전에는 한 전투에서 그렇게 많은 총탄을 쏘아댄 적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머스켓 소총이 너무 뜨거워져서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불타는 마을에서, 구댕+퓌토와 프리앙+모랑의 4개 사단이 양측에서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십자 사격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을은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무너지려는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전위대 사령관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참호 속에 빠졌는데, 황급히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고위급 장군마저 내버려둔 채 퇴각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프랑스군에 의해 발견된 노르드만은 그 날 49세의 한많은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아르만 폰 노르드만입니다.  그는 원래 프랑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알자스 출신으로서 독일어가 모국어였지요.  그는 프랑스군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 혁명 뒤에도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뒤무리에 장군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무리에가 망명한 이후 결국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거기서 프랑스군과 계속 싸웠습니다.  나폴레옹은 노르드만을 말할 때마다 '그 알자스 배신자'라고 부르며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은 비록 철저하게 밀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는 약간 서쪽으로 물러난 뒤, 다부가 더 이상 김밥말이를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 앞에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마침 그때 카알 대공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 예비대를 이끌고 황급히 달려와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미 고원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다부의 제3 군단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을의 돌담 뒤에서도 버티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이, 허허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일렬로 늘어선다고 버틸 수 있을리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몸으로 쌓은 방어벽은 프랑스군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후 1시 경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북서쪽으로 패퇴하고 그 자리를 다부의 군단이 차지하자, 상황은 나폴레옹이 바라던 모습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의 군단의 측면이 다부의 포병대에게 그대로 노출된 것입니다.  이제 오스트리아군에게 남은 것은 나폴레옹의 구상대로 돌돌 말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라데츠키(Radetzky) 장군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이미 "젠장, 이 전투는 졌구만"이라고 한탄한 바 있었습니다.  클레나우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이 프랑스군의 후방 아스페른과 에슬링를 공격할 때, 나폴레옹 주변의 젊은 참모 장교들은 후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성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나폴레옹에게 '배후를 습격당했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후방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를 보냈으니까요.  그는 계속 망원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부의 보병들과 포병들이 뿜어내는 불꽃과 연기가 마침내 탑을 지나쳐 진격하는 순간, 나폴레옹도 라데츠키처럼 "이 전투는 이긴 것이다"라고 주변의 참모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참모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려 마세나에게 공격을 계속 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다른 원수들에게도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특히, 막도날에게 아더클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막도날에게 드디어 화려한 무대 조명이 비추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막도날은 이 기회를 잘 살려냈을까요 ?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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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9.04 12:46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리였는데, 문제는 그 길이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대가 목숨을 던져가며 벌어들인 시간을 쓰는 것이니 만큼, 신속한 행군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속하게 행군을 하려면 보병 방진을 짜고 행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느슨하고 긴 종대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 행군 길의 오른쪽 측면, 즉 서쪽 측면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득실거렸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히도 콜로브라트가 지휘하는 이 오스트리아군은 무척 소극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그들의 포병대와 기병대가 그의 취약한 종대 행렬을 2시간 내내 두들길 것이 뻔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쪽 아스페른으로의 행군을 명령받자, 그 명령의 어려움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인근으로 몰려온 도망병들을 포함한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먼저 화끈하게 브랜디(brandy)부터 쫙 돌렸습니다.  그는 니스의 채소가게 아들 출신답게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번지르르한 연설보다는 술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목구멍이 화끈해진 병사들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향한 위험한 행군길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의 전성시대(?)였다는 박통 루이14세 치하에서 채소가게 아들 마세나가 사회 탓을 하지 않고 정말 뼈를 깎는 노오오오력을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  아마 대대 행보관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가 바뀐다고 모든 개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의 노오오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세나는 며칠 전에 낙마 사고를 겪는 바람에 발을 다쳐 원래 전장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도 '마차를 타고 진격하면 된다'라며 눈처럼 새하얀 2인승 무개마차를 타고 전장에 나섰고, 나폴레옹은 그런 그를 칭찬하며 '자네 옆에 탄 마부가 프랑스군 내에서 가장 용감한 병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눈 앞에 줄지어 행군해 내려가는 프랑스군의 대오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새하얀 2인승 마차에 탄 사람이 유명한 마세나라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의 흰색 마차를 향해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는 기록은 없거든요.  그러나 탁 트인 벌판에서 측면이 훤히 노출된 이 긴 종대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대로 띄엄띄엄 연습하듯이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병사들을 한두명씩 피떡으로 만들며 쓰러뜨렸습니다.  마세나의 흰색 마차는 아주 공평하게 병사들과 똑같이 적의 포탄에 노출된 채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나 말고 내 옆 친구를 쓰러뜨리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천천히 행군했습니다.


일렬 종대로 행군 중인 보병은 사실 포병보다는 기병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행동을 같이 하던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는 호시탐탐 이들의 측면을 따라오다 기회다 싶은 순간이 오면 바람처럼 달려들어 아장아장 걷는 프랑스 보병들에게 칼탕을 선물하고는 다시 우르르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기병대에 호기심 많은 지휘관이 있었는지, 한번은 그런 헝가리 기병대의 공격이 마세나의 흰색 마차를 향해 돌진해왔고 거의 마차에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마세나의 부관들이 군도를 뽑아들었는데, 다행히 측면을 스크린하는 역할을 하던 프랑스 기병대가 제때 앞을 가로 막아 요격해주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마세나의 행군길이 오스트리아군 기병대 때문에 무척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술피스(St. Sulpice) 장군의 흉갑기병대를 추가로 붙여줘 측면을 보호하도록 했거든요.


브랜디와 프랑스 기병대의 보호에 힘입어, 마세나의 제4 군단 병사들은 1시간 반만에 아스페른-에슬링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스페른은 물론 에슬링에서도 밀려나 힘겹게 고전 중인 부데(Boudet)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 6군단은 에슬링을 점거한 이후 그냥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포격을 가하는 등의 소극적 공격 외에는 별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클레나우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주저주저하는 것에도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측이 각각 십만 단위로 포진한 이런 거대한 장기판에서 자기들처럼 불과 1만5천 정도되는 작은 군단 하나만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와 버리고 나니 클레나우로서는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클레나우 장군입니다.  이 분은 1795년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령으로 승진한 이후, 불과 4년만인 1799년 역시 전공에 의해 합스부르크 육군 역대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나름 실력파였으며, 바그람 전투 당시 51세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클레나우에게 측면 돌파를 명했을 뿐, 이렇게 성공적인 돌파가 되리라 예상은 하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무전 통신이나 항공 정찰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전장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전투 상황에서, 전날 밤 작성되는 작전 명령서에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까지 어디까지 돌파한 뒤, 몇 시에 어느 위치에 있을 프랑스 XX 군단을 격파하라'는 식으로 세부적인 지시를 적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것이 당시의 전장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귀족 위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는 역시 실력으로 승진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보헤미아 귀족 출신이었던 클레나우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만큼 나름 뛰어난 인재였으나, 그건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는 귀족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출신 신분이나 학력에 상관없이 오로지 전과와 실력만으로 장교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다보니 마세나처럼 채소가게 아들 출신도 원수가 될 수 있는 프랑스군 앞에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포탄이나 기병 군도에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세나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냈습니다.  사실 마세나의 병력이나 클레나우의 병력이나 수적 우위가 크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고, 오히려 장시간 행군에 지친 것은 프랑스군 측이었을텐데도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는 마치 '내 이럴 줄 알고 후퇴 준비를 다 해놓았지롱~'하는 식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과 2시간 정도만에 마세나는 에슬링에 이어 아스페른까지 탈환하고 클레나우를 서쪽 저 멀리 쫓아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투가 종료된 이후, 클레나우는 보고서에 자기 쪽으로 지옥처럼 무시무시한 종대(la colonne infernale)가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에 후퇴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세나에 의해 프랑스군 좌익에서의 위기가 정리되는 동안, 정반대쪽 프랑스군 우익에서는 다부의 환상적인 무브먼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_von_Klenau

https://en.wikipedia.org/wiki/Andr%C3%A9_Mass%C3%A9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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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8.27 20:44

베시에르, 아니 낭수티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기병집단으로 하여금 포병과 보병, 기병이 고슴도치처럼 대비를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 진영으로 돌격하도록 나폴레옹이 명령한 것은 기병대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 목적 뿐이었지요.  전쟁터에서 시간이란 수천명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더라도 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일까요 ?  어차피 마세나의 군단을 남쪽 에슬링으로 떠나 보내고나면 당장 무너져내리는 아더클라 방면 전선을 막아줄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주변에 병력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 최후의 비상 수단으로 아끼고 아끼던 근위대가 있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같은 대인배에게 있어서, 당시의 상황은 근위대를 끌어다 쓸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간만 조금 더 끌면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라이트 훅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라고 그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병대는 충분히 긴 시간을 버텨줄 만한 병종이 아니었고, 나폴레옹은 시작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은 시간을 끌어줄 어퍼컷을 날리기 전에 날린 잽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퍼컷으로 날릴 것으로 나폴레옹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여기서 나폴레옹은 당대에 보지 못한 기발한 전술을 펼칩니다.  제대로 된 군단 대신, 강력한 포병 화력을 동원하여 눈 앞의 오스트리아군을 제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포병 출신이기 때문에 해낸 생각이기도 했고, 프랑스 포병대의 실력을 믿고 잘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이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 빛났기 때문에 가능한 도박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포병만으로 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면 왜 전에 다른 곳에서는 그런 전술을 펼치지 않았겠습니까 ?  그 짧은 시간, 그 험악한 위기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지형과 오스트리아군의 포진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대는 약간의 높낮이로 인해 시야로부터 가려지는 움푹한 지대도 없는 정말 완전한 평야 지대여서 적이 항상 포병의 사선에 노출되어 있었고 지면도 탄탄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포병대의 주력 탄종인 구형탄(roundshot)은 직격으로 말과 사람을 으스러뜨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먼저 얕은 각도로 대지 위에 한번 떨어진 뒤 퉁퉁 튕겨 날아가며 그 비행 경로 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부러뜨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친구인 란 원수도 이런 포탄에 목숨을 잃었지요.  즉, 오스트리아군이 진격해오고 있는 아더클라 남쪽 평원은 포병의 살상 효과를 100%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점을 파악한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포병으로 제압하기로 합니다.





(프랑스 근위 포병대의 12-파운드 포 및 그 포병들입니다.  다만 바그람 전투 현장에서 동원된 것은 주로 6-파운드 및 8-파운드 포대였고, 일부 있던 12-파운드 포병들은 프랑스 근위대가 아니라 브레더 장군 휘하의 바이에른군 소속 포병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포병은 나름 엘리트 부대로서, 급료도 보병보다 약간 더 높았고 심지어 기병보다도 다소 높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에서조차, 보병은 징집했지만 포병은 모두 자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보병의 복무 연한이 6년인 것에 비해 포병은 14년이었습니다.  그만큼 숙련도가 중요한 당대 최첨단 병과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황실 근위대의 대포 60문 전체와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 방면군의 대포 38문, 그리고 브레더(Karl Philipp von Wrede) 장군의 바이에른군에 소속된 24문의 대포를 차출하여 임시로 대(大) 포병단(la grande batterie)을 급조할 것을 명했고, 그 지휘관으로는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이던 로리스통(Jacques Alexandre Bernard Law, marquis de Lauriston) 장군을 선발했습니다.  로리스통 장군은 1800년부터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포병 전문 지휘관이었는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을 책임지던 수석 포병 지휘관 송기(Nicolas-Marie Songis des Courbons) 장군이 최근 1달 사이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귀국했기 때문에 당시 현장에서는 포병 병과로는 가장 믿을 만한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리스통 장군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Jacques Alexandre Bernard Law로서, 로리스통이라는 이름은 뒤에 붙여진 marquis de Lauriston, 즉 로리스통 후작이라는 작위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프랑스인의 성씨가 로 Law 라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  이 분도 막도날처럼 스코틀랜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자리를 잡은 Law라는 성씨라... 어디서 들은 기억 안 나십니까 ?  예, 맞습니다.  프랑스 중앙은행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Banque Générale를 세우고 종이 돈을 대량으로 찍어냈다가 결국 미시시피 주식회사 거품을 일으켜 프랑스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 넣은 바 있는 존 로 John Law 바로 그 사람의 조카입니다.  로리스통은 프랑스령 인도 퐁디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거기 총독이었거든요.)




낭수티의 프랑스 기병대가 너덜너덜해진 채 퇴각하자,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이 그 뒤를 쫓아 서서히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앞을 가로 막은 것은 프랑스 기마 포병대의 대포 몇 문 뿐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저항은 충분히 예상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자신있게 계속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펑 펑 몇 방씩 쏟아지는 대포알을 견디며 나아가는 오스트리아군이 보는 가운데, 프랑스 포병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덜커덩 거리는 포가와 탄약차를 끌고 온 프랑스 포병들은 띄엄띄엄,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도착하여 1열 횡대로 전개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어어 저것들 봐라' 하는 사이에 어느 덧 122문의 대포들이 방열을 마쳤습니다.  무려 2km에 걸친 일렬 횡대였지만 대포의 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러다보니 불과 16m 당 1문씩, 오스트리아군의 전면을 전혀 빈틈없이 대포로 빽빽히 도배질을 한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방열을 마친 프랑스 포병들이 옆 포대와 경쟁이라도 하듯 포격을 시작하자 오스트리아군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진을 위해 빽빽한 밀집 대형으로 행군 중인 상태였으므로 이런 포격은 한발 한발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퉁퉁 튕겨 날아드는 대포알 한발에 20명이 허리가 잘리고 정강이가 꺾여 한꺼번에 쓰러졌습니다.  프랑스 포병들은 오스트리아군 선두로부터 약 300m ~ 500m 떨어진 곳에 방열을 하고 포격을 시작했는데,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해야 하는 전투 현장에서 이 정도의 거리는 약 6~8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포병들이 쓰던 6파운드 또는 8파운드 포는 숙련된 포병들의 경우 1분에 1발 꼴로 사격이 가능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머스켓 소총 사거리까지 접근하기 전에 대략 6~8발의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쏘았습니다.  전면에 16m 간격으로 늘어선 대포들이 이렇게 토해내는 쇳덩어리의 공포로 인해 오스트리아군 보병들이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고, 또 신이 난 프랑스 포병들의 재장전 속도가 평소보다 더 빨랐던 것입니다.  프랑스 포병들은 오히려 대포를 조금씩 전진시키며 포격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머스켓 소총 사거리 근처까지 접근하자 프랑스 포병들은 한방에 수십명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산탄(canister)을 쏘기 시작했고, 그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산탄, 즉 canister shot입니다.  통조림을 가리키는 영어 can은 저런 금속제 용기인 canister의 줄임말입니다.)




오스트리아군도 포병을 동원하여 대(對) 포병 포격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워낙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빠른 속도로 무력화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포병대도 결국 꽤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산탄을 쏜다고 해도 눈 앞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을 100% 모두 쓰러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적병들이 쏘아대는 머스켓 총탄에 많은 포병들이 쓰러졌고, 거기에 더해 저 멀리 1km가 넘는 바그람 언덕 위에 설치된 12파운드짜리 오스트리아군의 중포들에서 날아오는 포탄들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포병대는 무려 476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하나의 대포에 대략 20명의 포병이 딸려 있었으니 전체로 볼 때 거의 20%의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포병들은 현대전과는 달리 거의 보병들처럼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포병치고는 예외적으로 높은 사상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근위 포병대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보고를 받자 그의 근위대 보병들에게 쓰러진 포병 전우들의 자리를 메워줄 자원병을 뽑겠다고 즉석에서 외쳤는데, 필요한 보충병의 2배가 넘는 근위대 병사들이 자원했다고 합니다.   결국 프랑스 포병대는 치열한 포격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고, 각 대포당 평균 200발 정도를 발사할 정도로 뜨거운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불과 쇠의 폭풍 앞에서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의 진격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콜로브라트나 리히텐슈타인도 일단 후퇴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아더클라 마을 건물 속으로 숨어들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벨가르드 장군이 3개 포대 18문의 대포를 내세워 반격을 해보았으나, 이 역시 곧 꼬리를 말아쥐고 마을 건물 뒤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이 웅대한 포병 작전은 그 우렁찬 포성을 바그람 주변의 전장은 물론 비엔나까지 퍼지게 했습니다.  당시 우익인 다부 쪽을 지원하고 있던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 포병 노엘 대위(Jean Nicolas Auguste Noel)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시엔 전황을 알 수 없었으나 좌익 쪽에서 엄청난 포격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전투의 운명이 그 쪽 방면에서 결정되는 것이 확실했고, 황제께서도 그 쪽에 계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노엘 대위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전투의 운명은 바그람 주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있던 우익,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에서 결정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2015년 텍사스 오스틴에 몇 개월 출장가 있을 때 그쪽 헌책방에서 산 책입니다.  그때 사온 책 아직 거의 시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반성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www.histoire-empire.fr/articles/item/grande-batterie-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Grande_Arm%C3%A9e#Foot_arti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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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8.22 22:19

나폴레옹이 포병 전술의 귀재라고들 합니다만, 사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나폴레옹이라고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색다른 포병 전술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프랑스만 뛰어난 성능의 대포를 쓴 것도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뭔가 특별한 포병 전술을 직접 개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포병들은 집중된 포병대의 기동성 있는 운용을 꽤 중요시했습니다.  많은 대포를 집중시킨 포병단을 신속히 이동시키고 집중적인 화력을 퍼부어 적을 뒤흔들어놓고, 그래서 생긴 틈으로 또 다시 신속하게 이동하는 식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 전투가 2개의 포병단이 번갈아 가며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한 프리틀란트 전투입니다.  그러나 이건 나폴레옹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세나르몽 (Alexandre-Antoine Hureau de Sénarmont) 장군이 단독으로 벌인 작전이었고, 정작 적군에게 단독으로 돌격하는 포병들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저것들이 지금 러시아군에게 투항하는건가?'라며 놀랐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만이 기동력있는 포병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가 소위 말하는 '기동 포병'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던 것은 맞습니다.  그 이전 시대의 포병은, 워낙 대포가 크고 무겁다보니, 전투 내내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그 자리에서 꼼짝 안하고 그냥 쏘아대는, 앉은뱅이였습니다.  당시 대포가 그렇게 크고 무거웠던 것은 기술의 한계였습니다.  먼저 대포 포강을 주조 방식으로 만들다보니, 포 구경도 완벽하게 조정할 수가 없었고, 또 포탄의 구경도 그냥 되는 대로 포구 속에 들어가기만 주워다 쓰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유극(포강과 포탄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많은 양의 화약 폭발 가스가 새나갔기 때문에, 대포의 사정거리도 짧았고, 또 그만큼 더 많은 화약을 장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혹시라도 대포가 폭발할까봐, 대포 약실의 두께도 훨씬 더 두꺼워야 했었지요.  결국 이런 대형 대포는 주로 요새 공격에나 쓸 수 있는 물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발달하여 포강을 정밀하게 깎아내는 방식으로 만들게 되면서, 훨씬 정밀하게 포 구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포탄도 표준화되면서 유극도 예전보다 줄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포의 경량화가 가능해졌고, 비로소 보병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는 기동 포병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이전에, 18세기 중반 프랑스의 그리보발 장군이 이런 기동 포병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이렇게 경량화된 야포의 대표적인 것은, 영국군에서는 보통 galloper라고 불리웠던, 말이 이끄는 8파운드 짜리 대포알을 쏘는 경포였습니다.  Bernard Cornwell이라는 영국 작가가 쓴, Sharpe 시리즈라고 불리는 소설 시리즈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육군 장교의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숀빈 (반지의 제왕에서의 보로미르) 주연으로 BBC에서 드라마화되어 우리나라 유선 방송에서도 방영된 바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출판되지 않았고요.  이 소설 중 하나에서 이 galloper 경포의 운용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5년 벨기에) -----------------------------------------------

 

존 로젠데일 경은 혼란스러웠다. 원래 장교들이 자신감넘치는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은 그 명령에 따라야 했고, 그러면 적군은 당연히 그 행동에 따라 격퇴되는 것이 전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후퇴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병사들은 이 혼란 속에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경포병 한부대가 대포를 말에서 떼어내고 사격 준비를 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포병들은 뭘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도 아주 경쾌하고도 익숙하게 해냈다. 사격을 하고는 다시 대포를 말에 붙들어매고 다시 미친듯한 질주를 하며 빗속을 뚫고 나갔다.

 

한번은, 거의 홍수에 가깝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누군가 자기를 향해 '빌어먹을 엉덩이를 당장 치우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말을 길 옆으로 비켰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겨우 일개 하사관이었다. 1초 뒤에 말이 끄는 경포가 진흙탕을 튀기며 로젠데일 경이 서있던 자리에 정차했다.  10초 뒤에 포병들은 포를 발사했는데, 로젠데일 경은 그 포 소리가 하도 크고, 뒤로 튕겨져 나오는 포신의 동작이 너무 심해서 깜짝 놀랐다. 로젠데일 경이 여태까지 본 포격은 하이드 파크에서 행해지는 예식 사열이 전부였는데, 거기서는 반짝이는 대포들이 그저 펑하고 알맞은 소리를 내었고, 포신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었다. 물론 그 포에는 대포알도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더럽고 진흙투성이에 검게 그을린 무기는 폭음과 불꽃을 토해내며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 대포의 바퀴는 진흙바닥에서 껑충 튀어올랐고, 포가는 마치 쟁기처럼 바닥에 깊은 두렁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몇톤이나 되는 금속과 목재가 바닥에 콰당하고 떨어지자, 진흙으로 뒤덮인 포병들이 스폰지와 밀대로 이 연기나는 짐승에 재장전을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발포의 격렬함에 비해 대포가 입히는 손상은 너무 약소해보였다. 로젠데일 경은 대포알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저 진흙이 한무더기 튀어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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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렇게 위력이 형편없었을까요 ?  BBC에서 영화화된 Sharpe 시리즈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임진왜란 다룬 드라마를 보면, 대포알이 떨어지는 곳에서는 으례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주변의 적병들이 팝콘 튀듯 튕겨져 나가곤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대개 그런 장면은 잘못된 고증으로 그런 것입니다만, 꼭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당시 육군에서 사용되던 포탄은 크게 나누어 3가지였습니다. 

 

1. Roundshot 

 

이건 글자 그대로, 둥근 쇳덩어리였고, 성벽을 부수거나, 먼거리에 있는 적의 밀집 대형을 공격할 때 사용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포'알'이었습니다. 요즘 탄환을 셀 때, 영어로 round라고 표현을 하는데, (가령 6발이다 하면 six rounds) 바로 이 roundshot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2. Canister

 

우리말로는 산탄 정도가 됩니다.  적의 보병대가 포병대 가까운 곳까지 전진해오면, roundshot 대신 이 canister를 발사했습니다.  이 캐니스터라는 것은 얇은 깡통안에 쇳조각, 머스켓 총알, 잔돌조각 등을 잔뜩 채워놓은 것인데, 발사하면 그때의 충격으로 포구에서부터 깡통이 찢어져서 거대한 산탄총 역할을 했습니다. 

종종, double shot 이라는 것을 쓰기도 했습니다.  즉, 화약포는 하나만 집어넣되, 먼저 roundshot을 집어넣고 그 위에 canister를 또 장전하는 것입니다.  적이 아주 근접했을 때는, 비록 사정거리는 좀 떨어지더라도, 꽤 위력적이었겠네요.

 


 

 

3. Shell

 

이건 속에 화약이 들어있는 폭발탄입니다. 이때는 아직 충격신관이 없었으므로, 땅에 떨어질 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불붙인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폭발 시간이 정해졌습니다.  대개는 도화선 길이를 잘 잘라서, 적군의 바로 머리 위에서 폭발하도록 조절했습니다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짧게 자르면 허공에서 터져 버렸고,  너무 길게 자르면 흙에 파묻히면서 도화선의 불이 꺼져 폭발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특히 비오는 날에는 불발탄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 포탄은 주로 박격포나 곡사포 등 포물선을 크게 그리는 대포에서 사용되었으므로, 그리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곡사포라고 해도, 이 shell이라는 폭발탄은 절대 아군 보병 머리 위를 날아지나가도록 쏘지는 않았습니다.  폭발탄이 의도한 것보다 먼저 점화되어 아군 머리 위를 날아가는 동안 폭발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포병들은 아군 보병 저 멀리 뒤쪽에서 쏘기 보다는, 오히려 보병들 앞쪽 또는 어깨를 나란히 한 옆쪽에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 외에도, 몇가지 별종 포탄들이 있었습니다.

 

Grapeshot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말로는 포도탄이라고 합니다.  이건 캐니스터와 비슷한 포탄인데, 주로 해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걷는 보병들을 노리는 캐니스터와는 달리, 포도탄은 두꺼운 목재로 된 뱃전(gunwale)이나 해먹을 말아 만든 일종의 모래주머니 뒤에 숨은 적의 수병 및 해병들을 살상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런 엄폐물을 뚫기 위해 좀더 알이 굵었습니다.



 

또, 당시 영국군만이 가지고 있던 비밀 무기, shrapnel도 있습니다.  아마 shrapnel하면, 영어로 파편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 아니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그 shrapnel이라는 단어는, 영국군 포병 장교였던 Shrapnel이라는 사람에게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당시 폭발탄인 shell은, 속에 흑색 화약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폭발력도 뭐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았고, 또 파편도 몇개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캐니스터 탄은 최대 200~300m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질 뿐이었고요.  Shrapnel이라는 포병 장교는, 자기 돈을 쏟아 부어가며 shell 탄과 캐니스터 탄의 결합을 연구해서 파편 폭발탄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일반 shell 탄 속에 머스켓 총탄을 잔뜩 쟁여 넣어, 1km 이상되는 먼 거리를 날아가서 캐니스터 탄이 폭발하는, 사거리와 파편 효과를 다 가진 신형탄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때가 대략 1784년 정도였는데요, 정작 이것이 영국 육군에 정식으로 채택된 것은 1803년, Shrapnel이 육군 중장으로 승진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실전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08년,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일 때였습니다.  웰링턴 공작도 이 포탄의 위력에 무척이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래 구조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비격진천뢰와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비격진천뢰보다 약 200년 정도 늦은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나라의 앞선 기술력에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라며, 또 동시에 그런 앞선 기술을 계승 발전 시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합시다.   아무튼 Shrapnel은 이 발명으로 자기 가문의 이름이 영어 사전 보통 명사로 실리는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대포의 종류도 나름대로 다양했는데, 해군에서는 더 다양했습니다만 육군에서 사용되던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3가지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1. Cannon

 

그냥 대포입니다. roundshot과 canister를 쏠 수 있습니다. 주로 우리가 영화에서 많이 보는 것들이 이 종류입니다. 

 

 



 

 

2. Howitzer

 

곡사포입니다. 생김새가 cannon과는 좀 틀린데, cannon보다 좀 짧고, 포구는 크게 위를 향합니다. 구경이 꽤 큽니다. 주로 shell을 쏘았습니다.  공성전을 벌이거나 적의 밀집 대형에 shell을 정확히 집어던질 때 사용했습니다.

 


 

3. Mortar

 

박격포입니다.   역할은 howitzer와 비슷하여, 주로 shell을 쏘았습니다.  다만 생김새가 더 짧고 굵었습니다.  또, Mortar가 훨씬 더 높은 포물선을 그리기 때문에, 포탄이 떨어질 때는 거의 직각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적의 참호나 요새를 공격할 때 아주 효율적이었다고 합니다.  Howitzer는 주로 야전에서 보병을 공격하기 위한 대포였던 것에 비해, mortar는 주된 용도가 공성전을 위한 포격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예 바퀴도 없이, 땅을 파고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포격을 했습니다.  요즘의 박격포처럼 사람이 짊어지고 이동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요. 

 

사실 당시 병사들도 이 howitzer와 mortar를 잘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Sharpe 시리즈 중에서, "Sharpe's havoc" 편을 보면, 언덕 정상의 작은 망루에 농성 중인 샤프의 소대를 공격하기 위해 프랑스군이 대포를 불러옵니다.  이때 샤프는 그 모습을 보고, 저것이 howitzer면 자기들이 살 가능성이 있고, 만약 mortar면 우린 다 죽었다라고 걱정합니다.  밑에서도, 프랑스군 대령이 howitzer가 왔으니 이제 니들은 죽었다 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포를 끌고온 젊은 프랑스군 포병 장교는 "아, 이야기를 듣고 보니 대령께서 원하신 건 mortar지만, 이건 howitzer입니다."라고 말하여 대령을 헷갈리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대포를 운용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장비와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영국군의 경우, 보통 하나의 포대 (battery)는 6문의 대포로 구성되었는데, 이 6문의 대포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무려 172명의 병사와 164마리의 말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6문의 대포를 이용해서 1분 동안 발사할 수 있는 포탄의 수는 빨라야 겨우 12발, 즉 이미 장전되어 있던 것을 한발 쏜 뒤 1분간 재장전하여 다시 쏘는 정도였습니다.  영국군이 콘그리브스 대령의 제의에 따라 로켓 포대를 개발한 것도, 로켓 포대는 발사 가능한 화력에 비해 사람과 말의 필요숫자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콘그리브스 로켓은 결국 명중률이 너무 낮아서 많이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당시 대포는 발사 속도가 떨어지고, 또 많은 인원을 필요로 했을까요 ?  뭐 인원이 많은 것은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 무거운 대포와 포탄, 화약을 끌고 신속하게 움직이려면 많은 수의 말과 포가, 마차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 대포와 말, 포가, 마차를 운용하려면 사람 숫자가 많아집니다.  그 외에도, 당시 대포의 장전 및 발사 절차가 요즘보다는 많이 불편했습니다.



1.  원위치로 밀기 (Re-positioning)

 

당시 대포는 완충장치가 전혀 없었으므로, 한번 발사하고 나면 그때마다 포가가 뒤로 심하게 튕겨지듯 밀려나옵니다.  이걸 포병들이 달라붙어 원위치로 굴려가야 했습니다.  평상시에도 힘든 일이었지만, 특히나 비가 온 뒤 질퍽해진 진흙 바닥에서 이렇게 포를 굴리려면 정말 힘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2. 청소하기 (Swabbing)

 

전에 장전된 포탄을 발사하고 나면, 먼저 물에 적신 양털뭉치 등이 달린 장전봉(rammer)으로, 대포 포구로부터 약실 저 안쪽까지 한번 꾹 밀어줍니다.  전에 쏘았던 화약에 의해 대포가 뜨거워져 있고, 또 아직 폭발하지 않은 잔존 화약에 불씨가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식혀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물에 적신 장전봉으로 포강 내를 냉각시켜주지 않으면 다음번 화약을 밀어넣을 때 그 화약이 뜻하지 않게 폭발해버리는 수가 있었습니다.  이를 cook-off 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만약 한창 전투 중에 대포 옆에 놓인 나무 물통이 엎어지기라도 한다면, 누가 다시 물을 채워올 때까지 그 대포는 발사를 못할 정도로 저 나무 물통은 중요한 대포의 부품이었습니다.  




당시 보병들의 개인 화기였던 머스켓 소총도 당시 대포와 비슷한 구조였는데, 머스켓을 장전할 때는 물로 적신 장전봉을 쓰지 않았습니다.  머스켓 소총에서는 cook-off 현상이 없었을까요 ?  대개 없었는데, 이유는 머스켓 소총이 그렇게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연속 사격을 할 경우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가끔은 정말 그렇게 머스켓 소총이 뜨거워져 재장전을 못할 정도로 열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했냐고요 ?  당시 병사들의 수기를 보면 소변으로 식혔다고 합니다.  당시 병사들은 개인 수통을 휴대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거든요.


다시 대포 이야기로 돌아와, 이렇게 장전봉으로 포강 내를 식혀줄 때, 포수는 반드시 가죽 골무를 댄 엄지손가락으로, 점화구(touchhole)를 막아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포신 속에 남아있는 화약이, 아직 뜨거운 포신 속에서, 장전봉이 밀어내는 공기에 의해 점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폭발이 일어나면, 장전봉을 밀던 포병이 다치는 것은 물론, 청동으로 된 점화구를 손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청동제 점화구는 수명이 짧아서, 이 부분만 자주 교체해주어야 했습니다. 



 

이 점화구는 당시 대포 중에서는 정말 핵심 부품이었습니다.  당시의 기병대는 안장 가방에 작은 망치와 구리로 된 못을 휴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적의 대포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즉, 기병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전방에 노출된 적의 포병대를 유린한 경우, 적의 예비 병력이 몰려오기 전에 지친 말을 끌고 퇴각을 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즉, 적의 대포를 못쓰게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  당시 대포는 워낙 구조가 간단하다보니, 망가뜨리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때 망치와 못이 필요합니다.  즉, 구리로 만든 무른 못을 점화구에 틀어막고 망치질을 해서 못이 점화구를 꽉 틀어막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리벳질을 해놓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점화구가 막힌 대포는, 정말 환장할 정도로 쓸 모가 없었습니다.  여러가지 공구를 써서 그 무른 구리못을 뽑아내기 전에는요.  최소한 그날 반나절 그 대포는 전장에서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3. 장전 (Loading)

 

그러고나면, 미리 캔버스 천으로 된 주머니에 정량을 담아둔 화약을 장전봉으로 밀어넣습니다.  이어서 지푸라기같은 섬유질로 된 마개(wadding)를 역시 밀대로 집어넣고, 그 다음에 포탄을 밀어넣습니다.  이 wadding은, 당시 포탄은 대포 구경과 딱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이에 약간의 틈(유극)이 생기기 마련이었는데,  화약의 폭발가스가 그 틈을 통해 헛되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개 이 wadding은 불이 붙은 채 포 전방 얼마 안되는 거리에 떨어졌으므로, 앞에 마른 잔디가 있는 경우 작은 들불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4. 점화용 뇌관 장착 (Priming)

 

이어서, 스파이크라는 길고 날카로운 송곳같은 것을 점화구 속으로 찔러넣어서, 약실에 들어간 화약포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리고 속에 화약을 채운 갈대줄기를 점화구에 박아넣어서, 아까 스파이크로 낸 화약주머니의 구멍까지 닿게 합니다.

 

 

5. 발사 (Fire !)

 

이제 포수가 가진 slow match(천천히 타는 도화선)로 이 갈대줄기로 된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됩니다.  물론 그 전에 조준을 해야지요.  조준은 대포와 포가 사이에 달린 나사못을 조절하여 했습니다.  



(위 사진에서는 점화구로 일부 역류하는 화약 불꽃도 보이네요.  관광객들 모아놓고 한번 제대로 고증해서 사격 시범을 보이는 모양인데요.) 


 

이렇게 힘들게 쏘았는데, 저 위에 Sharpe 소설 속의 인물인 로젠데일 경이 본 것처럼 맥없이 진흙만 한무더기 튕기고 끝나면 정말 허무할 겁니다.  당시의 roundshot, 즉 폭발하지도 않는 쇳덩어리 포탄이 무슨 위력일까 싶지만, 당시의 전투 대형인 밀집 보병대에는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마치 볼링 레인에 오밀조밀 몰려있는 볼링핀을 볼링공으로 쳐내는 것 같은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대포알들은 볼링공처럼 병사들을 쓰러뜨렸습니다.  즉, 공중을 날아가며 병사들을 두동강 내놓는 것이 아니라, 땅에 부딪혀 퉁퉁 튕겨나가며 사람을 잡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사실 그럴 것이, 저 멀리 1km 떨어진 1.7m 짜리 표적을 노 바운드로 맞춘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테니까요.  그래서 특히 부드러운 진흙이 많은 전쟁터는 포병대가 활동하기에는 영 좋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포격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적병들을 오밀조밀하게 밀집시켜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군처럼 2열 횡대로 진격해오는 적병들에게는, 이런 대포 공격이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 맞춰도, 고작 2명을 잡을 뿐이니까요.  적군은 당연히 적 포병 앞에서는 횡대로 전개할 겁니다.  적군이 횡대로 전개하려고 하면, 그걸 강제로라도 뭉쳐놓고 나서 대포알로 요절을 내야 합니다. 

 

이렇게 산개한 적 보병들을 볼링핀처럼 모아놓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기병이었습니다.  머스켓 소총을 들고 산개한 보병들은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바람처럼 달려드는 기병들의 밥이었습니다.  당시처럼 분당 발사 속도 3발에, 사정거리도 짧은 머스켓 소총을 든 병사들이 기병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사격형의 밀집 방진으로 뭉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뭉치면, 그때 포병들이 볼링공을 들고 레인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병과 보병과 포병은 서로 유기적으로 도와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종말을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 과정을 보면, 전날 내린 폭우로 인해 땅이 질척거려서 프랑스 포병의 활동이 제약되었고, 네이 원수의 판단 착오로 포병의 지원도 없이 기병 단독의 돌격이 이루어지는 등, 기/보/포병이 다 따로 놀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나폴레옹의 장기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천하의 나폴레옹도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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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8.20 15:43

기세 좋게 달려들어간 낭수티의 제1 중기병사단이 첫번째로 맞이한 난관은 그 지대가 너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달리는데는 평평한 것이 좋지 않냐고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있는 평원이 기병 돌격에는 더 좋았습니다.  여기 아더클라 앞마당처럼 너무 평평하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시선과 대포에 노출되면 기병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동안,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square)을 구성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기병에 대항하여 보병 방진을 구성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1788년의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때의 모습입니다.  머스켓 소총과 함께 총검이 개발되고 대포의 기동성이 향상되면서부터는, 기병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위치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마 징기스칸의 몽골기병들이 와도 이젠 보병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기병으로는 보병 방진을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계산 방법은 이렇습니다.  돌격하는 기병들은 좌우로 최소 약 1.2미터의 폭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비해 방진의 보병들은 60cm의 폭만 있으면 되었고, 또 방진의 보병들은 대개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즉, 한자루의 기병 군도에 대해, 4 x 2 = 8발의 총탄과 8자루의 긴 총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보병의 총에 총알이 들어있지 않다고 해도, 말은 영리한 동물이라서 대개 그 빽빽한 총검의 숲으로는 돌격해들어가지 않고 끝에는 반드시 옆으로 머리를 돌리곤 했습니다.  물론 간혹 기병대가 보병 방진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 기병대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숙한 보병들이 엉성하게 보병 방진을 짰기 때문이거나 뭔가 사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포병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과 정확도를 자랑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도 저 멀리서 칼을 꼬나쥐고 달려오는 프랑스군 기병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쇳덩어리 포탄에 낭수티의 건장한 기병들이 픽픽 나가 떨어지며 그 대오에 뻥뻥 구멍이 뚫렸지만 프링스 기병들은 그저 성모 마리아를 입 속에 되뇌이며 계속 달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포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으며 헐레벌떡 달려들어간 곳에 기다리는 것은 총검을 고슴도치처럼 세우고 기다리는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기병 돌격은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은 보병들의 일제 사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지요.  당연히 낭수티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물러서는 기병대원들을 규합하여 다시 돌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집단 전술 훈련이 가장 뒤떨어진 그렌츠(Grenz) 대대의 방진 하나를 깨뜨리는 쾌거를 이뤄냅니다.





(그렌츠 보병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지대에서 차출된 발칸 반도 출신 보병들로서 주로 프랑스군의 볼티저(voltigeur)처럼 산개하여 싸우는 유격병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전열 보병처럼 싸우는 것은 원래 그들의 몫이 아니었지요.  그림 속의 2번 병사가 그렌츠 보병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좌우로 빽빽히 들어선 오스트리아 척탄병 대대들의 방진은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낭수티는 당혹감과 혼란, 무엇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우왕좌왕하는 기병들을 이끌고 보병 방진 사이를 뚫고 오스트리아군 후방으로 나온 뒤, 방향을 휙 틀어 자신들을 괴롭힌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향해 돌격했고, 포대 하나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지친 이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기병대의 무기는 사실 칼도 창도 권총도 아닌 속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기병대는 현대의 공군과 비슷했습니다.  아무리 공군이 강력해도, 공군으로 전장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연료가 떨어지면 현장에서 물러가야 하니까요.  아무리 강력한 전폭기라고 해도, 지상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쉬운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당시 낭수티의 기병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여러차례 전력 질주를 하여 말도 사람도 지친 기병대로는 전선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대는 이제 완전히 붕괴되어 무질서하게 우르르 본진으로 후퇴했고,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낭수티는 아무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와 함께 출격했던 2800명의 기병 중 되돌아온 것은 고작 1600명으로서, 무려 42%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궤멸적 타격이었습니다.


여기서 베시에르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그도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낭수티를 먼저 보낸 뒤, 서둘러 황실 근위 기병들을 편성한 뒤 낭수티가 그렌츠 보병 대대의 방진을 깨뜨릴 즈음해서는 2천의 근위 기병들을 이끌고 막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란에게 당한 모욕도 떨쳐낼 겸, 정말 맨 앞에 나서서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특히 바로 뒤에서 나폴레옹이 그의 돌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비장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얼마 가지도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 하나가 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습니다.  그 대포알은 그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뒤 그가 탄 말의 엉덩이를 강타했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그는 덕분에 땅바닥에 엄청난 세기로 처박히며 정신을 잃었고, 그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근위 기병대 지휘관을 역임하며 근위대 병사들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가 쓰러지자 많은 근위대 병사들이 통곡을 하며 슬퍼했는데, 이 모습을 나폴레옹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은 정신을 차린 그에게 '근위대 병사들을 울게 만들다니 대단하네.  그러나 전과는 왜 그 모양인가 ?'라며 칭찬과 조롱을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쫓겨온 낭수티는 이제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근위 기병대까지 합해 3천이 넘는 기병들을 모으게 되었으나, 이제 다시 돌격한다고 해도 도저히 눈 앞의 오스트리아군을 깨뜨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풀이 죽은 채로 큰 피해를 입은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낭수티의 악전고투 덕분에 마세나는 무사히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세나가 떠난 빈자리는 텅 빈 마르히펠트 평원 뿐이었습니다.  그 곳으로 오스트리아군이 몰려 나올텐데, 낭수티의 기병대까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물러났으니 그걸 틀어막을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어쩌자고 이런 식의 작전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설마 나폴레옹처럼 경험 많은 지휘관이 기병 사단 하나면 적의 군단 하나쯤 충분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요 ?  물론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가 낭수티에게 바랐던 것은 오직 하나 시간을 버는 것 뿐이었고, 실제로 그것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낭수티가 물러난 빈자리로 오스트리아군이 몰려오자,  나폴레옹은 그들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깜짝 선물을 내놓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www.histoire-empire.fr/articles/item/grande-batterie-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Bessi%C3%A8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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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8.15 15:22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모처럼 맞은 절호의 기회를 지휘부의 처절한 무능함 속에서 날려버리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머리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이미 끝났다고들 말했지만, 그의 클래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가 주저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텐데도, 그는 이런 위기 속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후방으로 침입한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를 막기 위해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등 허둥거렸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병력이 아주 많았습니다.  최우익의 다부 외에도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과 근위대 등 어제 밤에 장전해둔 탄약이 머스켓 약실에 그대로 들어 있는 병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폴레옹의 가장 큰 관심은 다부의 우익이었습니다.  이번 전투의 승패는 어떻게 적의 공격을 막아내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적의 이 기습 공격을 분쇄한다고 해도 그건 현상 유지일 뿐, 전쟁을 끝내려면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원래 의도했던대로 우익의 다부가 제대로 된 묵직한 공격을 퍼부어야 했습니다.  이번 전투의 정수는 다부 쪽에 있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큰 그림을 잃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공격을 서두르라'고 명령한 뒤, 놀랍게도 다른 모든 군단장들 대신 아더클라에서 악전고투 중인 마세나의 제4 군단에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쪽을 돌파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다른 군단들은 그대로 현 위치를 지키게 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아더클라에서 벨가르드의 부대와 교전 중이라서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습니다.  왜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가장 단순한 이유는 마세나가 클레나우와 가장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침착성과는 별도로, 상황은 정말 위급했습니다.  그러니 더 동쪽에 있던 우디노나 막도날의 군단을 이동시키는 것은 너무 시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이동시키면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꾼단 말입니까 ?  궁극의 예비대인 그의 근위대는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예비대로 아껴두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현 상황이 그렇게까지 급박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남는 옵션은 마세나로 하여금 아더클라에 집착하지 말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클레나우를 제압하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분명히 이미 교전 중인 적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질서있는 전술적 후퇴가 까딱 잘못하다간 진짜 패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솜씨 있는 지휘관이 숙련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더클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성공적으로 떨쳐내고 후퇴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새벽에 행군해 온 그 길을 다시 되짚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 길목에는 새벽에는 없었던 것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이었지요.  이들과 엉겨붙으면 또 끝장이었고, 또 이들을 어떻게든 신속하게 제압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 대책없이 마세나가 그대로 남쪽으로 달려가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맞붙는다면, 마세나와 아더클라 사이는 또 뼝 뚫린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콜로브라트가 밀고 들어오면 그것 또한 큰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대해서 간단한, 그러나 무책임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바로 대규모 기병대를 오스트리아군 얼굴에 냅다 집어던져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지요.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Eylau)에서도 위기에 처하자 뮈라의 대규모 기병대를 돌격시켜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뮈라의 기병대는 빽빽히 늘어선 러시아군 보병 대오를 관통하여 뚫고 들어갔다가 말을 돌려 다시 뚫고 돌아오는 장관을 연출하기는 했었으나, 정작 그 돌격으로 적에게 입힌 피해는 정신적 충격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벌긴 했지요.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같은 목적으로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무작정 기병 돌격은 기병들의 큰 피해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기병대를 맡을 지휘관도 적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기병 지휘관이었던 불꽃 남자 뮈라는 이런 위험천만한 돌격을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했고, 하일스베르크 전투의 경우 뮈라는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대포의 산탄에 말을 잃고 낙마하면서 장화 한짝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우습게 여기며 미친 듯한 돌격을 여러번 이끌면서도 부상은 거의 입지 않았지요.  그러나 뮈라는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담당할 사람은 예비 기병대 사령관인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ères)였습니다.




(베시에르입니다.  사실 그가 얌체에 기회주의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친이었다가 원수로 변한 란과 결국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베시에르는 분명히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전쟁터 최전선보다는 나폴레옹 주변을 알짱거리며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다 란(Lannes) 원수로부터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네 ?'라는 팩트폭력을, 그것도 나폴레옹 코 앞에서 당하고는 그와 결투 직전까지 갔던 바 있었습니다.  물론 열혈남아 란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베시에르도 위험 앞에서 꼬리를 말아쥐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한 바로 그 다음날 란이 최전선에서 지휘를 하다 적 포탄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자, 베시에르가 아무리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시에르가 이 명령을 받은 것은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그가 맡았던 프랑스군 예비 기병대에는 기병 사단이 3개 있었으나, 그 중 생-쉴피스(Saint-Sulpice)의 사단은 마세나를 지원하러 차출되었고, 아리기(Arrighi)의 사단은 새벽에 로젠베르크가 일으킨 소동 탓에 다부의 우익을 지원하러 간 상태였습니다.  남은 것은  제1 중기병 사단 하나 뿐이었는데, 그나마 여기에는 총 3개 여단 중 생-제르맹(Saint-Germain) 장군의 기병 여단이 후방으로 빠져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족한 기병대의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아끼고 아끼던 근위 기병대까지 차출해주었으나, 그 준비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 기병대가 돌격을 하는데, 그 준비에 시간이 걸려서야 되겠습니까 ?  결국 베시에르는 제1 중기병 사단의 2개 여단 2800명을 그 지휘관인 낭수티(Nansouty)의 지휘 하에 돌격시켰습니다.  본인은 일단 뒤에 남았습니다.  어쩌면 란의 영혼이 이 모습을 보며 '내 그럴 줄 알았다'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르지요.




(낭수티 장군입니다.  그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약탈 등으로 개인주머니를 채우지 않은 몇 안되는 청렴한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청렴했을 뿐 청빈하지는 않아서, 씀씀이는 계속 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패망 이후 루이 18세 치하에서 급료가 많이 깎이자,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고 합니다.)




낭수티가 돌격해 들어간 곳은 아더클라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과, 그 바로 남서쪽에 자리를 잡은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 사이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넓은 공간에는 프로하스카(Prochaska) 중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사단 1개만 얇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병대 수가 부족하다고 해도, 큰 말에 올라탄 덩치 큰 기병들로 구성된 중기병대가 큼직한 군도를 뽑아들고 두두두 달려들어가면 그 정도의 보병들은 쉽사리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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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8.06 16:56

전날 밤 카알 대공도 나폴레옹과 생각하는 것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좌익과 중앙에서 잽을 날리며 적의 시선을 끈 뒤, 강력한 우익의 우회 진격을 통해 적의 측면을 관통하여 끝장을 본다는 것이었지요.  차이는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공격자였던 나폴레옹은 방어자 입장인 오스트리아 측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카알 대공이 한두 시간 먼저 공격을 해들어온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이 베르나도트의 아더클라 무단 이탈과 마세나가 지휘하는 제4 군단의 아더클라 쪽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준비한 회심의 라이트 훅, 클레나우의 진격 방향이 파란색 화살표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와 직각을 이루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붉은색 화살표가 프랑스군 마세나의 제4 군단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이루고 있던 것은 전날 낮에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클레나우(Klenau)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삼베르크(Bisamberg)로 이어지는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의 새벽 작전에 대한 지시를 너무 늦게 통보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출격은 카알 대공이 의도한 것보다 무려 3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어, 공격 시작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아침 8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늦어진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이때 즈음 마세나의 주력 사단들은 모두 아더클라 방면으로 몰려간 뒤였던 것입니다.  특히 르그랑(Legrand)의 사단은 아더클라로의 행군 도중 측면에서 들이닥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의 습격을 받고 대경실색 했습니다.


하지만 르그랑의 사단보다 더 큰일이 난 것은 마세나가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두 마을을 지키라고 남겨두고 간 부데(Boudet)의 사단이었습니다.  마세나는 '뭐 어차피 이쪽은 별 일이 없을테니까'라며 태평하게 달랑 부데의 1개 사단만 남겨두고 갔고, 어쩌면 그렇게 뒤에 남겨진 부데와 그의 부하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을지도 몰랐겠습니다.  부데 사단은 약 한달 전의 에슬링 전투에서 에슬링의 곡물 창고를 지키며 그야말로 혈전을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었고, 그 수도 고작 5천명 정도로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아마 한숨 돌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궃게도, 부데의 사단을 다시 그 곡물 창고로 쳐박아 넣게 됩니다.


아스페른으로 진격을 개시한 클레나우의 제6 군단 약 1만4천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갔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포병대를 전개시켜 포격을 가하자 부데도 10문의 포병대를 동원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 경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프랑스 포병들을 베어넘기고 대포들을 나포했습니다.  이대로 대포들을 잃을 수 없었던 프랑스 보병들이 우르르 물려나와 오스트리아 기병들을 쫓아내고 이 대포들을 다시 탈환했지만, 그 사이에 방열을 마친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해 다시 프랑스군의 대포들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전으로 시작된 부데의 방어전은 결국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대포들을 잃고 버티기가 어려웠던 부데는 결국 아스페른을 포기하고 정들었던(?) 에슬링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슬링으로 물러난다고 해서 뭐 딱히 사정이 더 좋아질 것도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허둥지둥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아주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요하게 추격해왔고, 에슬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려 애쓰던 부데는 결국 오전 10시 경, 거기서도 밀려나야 했습니다.




(부데 사단에 딸린 프랑스군 포병대를 유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모습입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후퇴하는 부데의 사단이 밀려난 곳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였습니다.  여기 다음은 어제 새벽 프랑스군이 대거 도나우강을 건넌 교두보였습니다.  즉, 여기에서마저 밀려나면 이제 16만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기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대포를 방열하고 로바우섬으로부터 보급품을 나르고 있던 종군 민간 상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으나, 그러나 병력도 화력도 미약했던 부데 사단은 뭘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던 부데 사단을 향해 마침내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그람 전투 내내 프랑스군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북쪽 아더클라에서는 전선 중앙을 돌파당한데다, 남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교두보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뜻 밖의 방향으로부터 왔습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해 들어오던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로바우 섬으로부터 불벼락이 날아온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이후 약 1달 넘게 나폴레옹은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지요.  그 준비 중 하나가 로바우 섬 전체의 요새화였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에는 약 124문의 각종 대포 및 박격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1급 전함 1척이 강변에 닻을 내린 것 같은 효과였습니다.  아니, 전함은 양측에 포를 나눠 설치해야 했으므로 그에 비해 모든 포를 북쪽 강변으로 향해 놓을 수 있었던 로바우 섬은 1급 전함 2척이 나란히 강변에 정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일제히 오스트리아군을 강타했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대포가 조잡한 화력만을 낼 수 있다고 해도, 탁 트인 강변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밀집 대형으로 행군하는 보병대에게 날아든 무지막지한 대포알들은 끔찍한 살육을 일으켰습니다.  로바우 섬의 포병대는 신나게 대포알을 날려보냈고,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공포에 질려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밀려난 클레나우는 일단 숨을 돌리고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로바우 섬의 프랑스 포병대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재빨리 진격하여 몇 천 밖에 안 되는 프랑스 보병들을 밀어낸다면 최소한 프랑스군의 소중한 다리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방향을 이제 북쪽으로 틀어 프랑스군의 노출된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레나우는 두가지 방안 모두 택하지 않고,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결정합니다.  왜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은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는 것이었을까요 ?


클레나우가 멈추기로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오스트리아군의 경직성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카알 대공은 물론이고 클레나우 본인도 이렇게 쉽게 프랑스군 교두보까지 일사천리로 돌파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기고 있는 편이 약간 당황한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운좋게 적의 중앙부 뒤쪽까지 잘 뚫고 왔다고 해도,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고작 1만4천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10만 단위의 대군이 밀집한 적진 한 가운데에 막상 뛰어들고나니, 불안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왜 달랑 1개 군단을 적진 뒤쪽으로 찔러 넣었느냐고요 ?  그러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분명히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을 찔러 넣었거든요.  클레나우도 바로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  


클레나우보다 좀더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던 콜로브라트는 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더클라를 향해 북진하던 르그랑의 프랑스 사단과 딱 마주쳤습니다.  군단 대 사단의 만남인데다 공격 준비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행군 중에 생각하지 않은 내습을 당한 셈이어서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유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콜로브라트의 행동은 복장이 터질 정도로 굼뜨고 느린데다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의 임무가 프랑스군 후방으로의 기습 침투라는 것을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헷갈릴 정도의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일단 원래의 진지인 비삼베르크 언덕에 1개 여단을 뚝 떼어놓고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르그랑 사단을 가볍게 밀어내고 로바우 섬이건 마세나의 뒤통수이건 심지어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까지도 별 저항 없이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전면은 탁 트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르그랑 사단과 마주치자 콜로브라트가 첫번째로 내린 명령은 공격 명령이 아니라 후방 퇴로 확보였습니다.  그나마 빈약한 르그랑 사단에게조차 과감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먼저 포병대를 내세워 대포알만 날려보내는 소극적인 지휘로 초지일관 했습니다.  




(이 분이 콜로브라트 백작 Johann Karl, Graf von Kolowrat-Krakowsky 이십니다.  이분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패전인 호헨린덴 전투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등에서 모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그의 빛나는 승리가 100% 자신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라고는 말 못 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분의 무능함은 빛났는데, 그럼에도 이 분이 연달아 주요 군단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 오스트리아가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패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양반이 혁혁한(?) 활약을 한 바그람 전투 직후, 이 60이 넘은 노장은 무려 원수(Feldmarschall)로 승진합니다.)




아무리 카알 대공이 작전이 훌륭하다고 해도 무엇하겠습니까 ?  그의 작전을 수행할 장군들은 여전히 낡은 교리에 묶인,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 없던 무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능한 귀족들이 핵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운 좋게 손에 들어온 승리의 기회를 날려 먹고 말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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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30 19:37

새벽부터 동쪽의 포성을 듣고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인가 깜짝 놀라 병력을 이끌고 다부의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폴레옹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쪽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중앙부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말을 달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대노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베르나도트 저 허풍선이는 병신짓만 골라 하는구나 !"


다행히 그는 어제 밤 베르나도트 없이 열었던 작전 회의에서 베르나도트를 지원하기 위해 마세나의 병력을 좌익에서 중앙부로 이동시킨 바 있었습니다.  해가 밝아오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마세나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곧 이어 마세나의 눈처럼 하얀 색의 무개마차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 못지 않게 돈 욕심 많고 터무니없이 부풀어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베르나도트와는 달리 군사적 자질은 자신에 버금가는 실력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즉각 아더클라를 탈환하도록 했습니다.


마세나는 생-시르(Saint-Cyr)의 사단을 선두로 아더클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공격에 대해 오스트리아군도 꽤 솜씨있게 대응했습니다.  슈투터하임(Stutterheim)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마을 앞에 있던 도랑에 매복해 있다가 생-시르의 병사들이 지근거리에 근접하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 정도의 반격에 흔들리지 않았고, 전투는 곧 아더클라 마을의 벽과 가옥을 끼고 골목마다 벌어지는 혼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에서 밀려났습니다.  




(아더클라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는 생-시르 사단 휘하 제4 전열보병 연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아더클라 외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아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아더클라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그 마을을 비워놓고 있다가 반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영광의 순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휘하 작센 병사들을 이 공격에 가담시켰습니다.  특히 막도날에게 빌려주었던,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던 뒤파(Dupas)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의 동쪽 측면울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베르나도트는 기세를 타고 작센 병사들을 규합하여 기세 좋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이 아더클라를 관통하여 더 북쪽으로 뚫고 나가려하자, 아더클라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가르드의 예비 병력이 또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반격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알 대공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까지 쳐들어오자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르나도트의 작센군은 어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사기가 형편없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역경을 맞이하자 후퇴가 아니라 그야말로 무너져내려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시르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마세나는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이 무척 난감했습니다.  몰리토르가 진격해야 할 길을 이 작센 패잔병들이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별로 인품이 좋지 않고 오만하고 몰인정했던 마세나는 이 하찮은 방애물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발포를 명했고, 어제 밤에 이어 백주대로에 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작센군은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마르히펠트 평원을 가로질러 흩어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어지럽게 도주하던 작센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외곽까지 도망쳐왔고, 이들의 선두에는 베르나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스도르프 외곽에서 이 몰골의 베르나도트와 딱 마주친 나폴레옹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여 '이것이 네가 말하던 반석같은 지휘력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며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의 보직에서 해임해버렸다고 합니다.  




(프랑스군 원수 복장의 베르나도트입니다.  원래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 병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탐탁치 않은 작센인들로 구성된 제9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군단의 출정 준비에 대해 이런저런 눈에 보이지 않는 방해를 한다는 느낌을 받자 전장에 나서기 전부터 보직을 사임하겠다고 나폴레옹에게 청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원치 않는 베르나도트를 부득부득 전장으로 끌고 나갔고, 결국은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 뒤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가 이렇게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너무 극적이라서 100% 믿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의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날 공격을 위해 자신의 군단 소속이었던 뒤파(Dupas) 장군의 프랑스 사단에게 자신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나, 뜻 밖에도 뒤파는 '황제로부터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았다'라며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공격이 돈좌되고 많은 작센 병사들이 희생되자, 격분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만나자마자 '왜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단을 마음대로 묶어 두었는가'를 따지며 이럴 바에야 사직하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정말 베르나도트가 정말 이날 현장에서 해임되어 귀국 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끌던 제9 군단의 지휘권은 어떻게 되냐고요 ?  어차피 그의 제9 군단은 이미 다 녹아내려서 5천명 이하의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만 남아 있었으므로, 후임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이 몰리토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자는 오스트리아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등 대부분의 유럽 군대에서 척탄병들만이 쓸 수 있는 모자로서, 높이 솟은 모양에 털가죽이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척탄병 부대는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편성했는데, 키 큰 병사들이 그런 모자를 쓰면 더욱 덩치가 커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더클라는 이렇게 생-시르가 탈환했다가 다시 잃었다가 오전 10시 경 다시 몰리토르가 재탈환하는 등 혈전의 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카알 대공이 직접 이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프랑스군이 용감하고 숙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오 가까이 즈음해서는 혈전 끝에 결국 몰리토르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났고, 프랑스군은 중앙을 돌파당하는 일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언덕 위의 전선 전체에 걸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여 언덕 아래에 있던 프랑스군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지 위에서 내리 쏘는 포격은 확실히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어차피 전장의 병사들은 언제든 대포밥이 될 수 있는 신세였으므로 그 정도의 포격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전선 중앙부가 관통당해 자신들의 등 뒤에 펼쳐진 평원 위로 작센군과 프랑스군 패잔병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체 전선을 따라 말을 달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이 베르나도트가 마음대로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가장 약한 부대를 거느린 가장 못 믿을 부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또 아더클라가 나폴레옹에게 가장 중요한 위치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작전의 핵심은 다부가 공격 준비를 하던 동쪽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기가 공격할 생각만 했지 카알 대공이 먼저 치고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든 작전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무너지는 아더클라의 바로 동쪽 측면에는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 등의 군단이 대기 중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이 구멍만 틀어막으면 저 동쪽 끝에서 다부가 준비하던 나폴레옹의 진짜 주먹이 날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아직 패배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장의 주먹을 준비 중인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에게도 아더클라는 그저 견제구 또는 잽에 불과 했고, 그의 진짜 한방인 강력한 훅은 저 남서쪽 아스페른 쪽에서 날아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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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23 18:51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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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16 22:27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밑, 공작보다는 위인 대공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들을 총 3개부대로 편성하여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을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1개 부대는 6개 대대로 작게 편성되어 프랑스군 수중에 있던 그로스호펜(Grosshofen) 마을을 공격하기로 했고, 무려 16개 대대로 강력하게 편성된 다른 1개 부대는 글린첸도르프(Glinzendorf)를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글린첸도르프로 향하는 부대에는 나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음악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라데츠키 백작(Joseph Radetzky von Radetz)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모두 기병대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멀찍이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를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나름 굉장히 머리를 쓴 작전이었고, 전날 헛된 공격으로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에게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로젠베르크의 공세에는 무려 60문의 대포가 딸려 있었으므로, 새벽 하늘에 엄청난 포성을 울려 나폴레옹의 시선을 잡아 끌게 되어 있었습니다.




(붉은색 원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역이고, 푸른색 원은 오스트리아군 주요 거점입니다.  푸른색 화살표가 로젠베르크의 공세 방향입니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게는 재수가 없게도, 그의 앞에 있던 부대는 바로 프랑스군 최고의 지장이라고 할 수 있던 다부(Davout)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무려 3만2천의 보병과 6천2백의 기병, 그리고 무려 12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어서 프랑스군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로젠베르크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습이라도 성공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다부는 전날의 야간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공격을 걷어들인 바 있었지요.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로 지치지도 않았고, 새벽에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을 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로젠베르크는 공세에 나서면서 '절대 엄숙'을 지시했으나, 이 군단에는 반쯤은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소음을 내며 행군을 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무척 놀라긴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새벽 5시 경,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선봉대가 그로스호펜을 습격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이어서 글린첸도르프에도 오스트리군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1개 연대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로스호펜은 곧장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넘어갔으나, 다부는 당황하지 않고 곧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호펜에서 밀려난 프랑스군의 퓌토(Puthod) 장군이 그로스호펜을 탈환하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동안 구댕(Gudin) 장군의 강력한 사단이 그 측면을 들이쳤습니다.  프리앙 장군과 모랑 장군의 2개 사단이 주둔하고있던 글린첸도르프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잘 버텨주었고, 그루시(Grouchy) 장군과 몽브렁(Montbrun) 장군의 프랑스군 기병대는 측면을 돌아 레오폴즈도르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를 오히려 다시 우회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로젠베르크와 다부가 새벽에 혈투를 벌이며 낸 포성과 총성은 새벽 하늘을 가로질러 라스도르프(Raasdorf)에서 이른 아침식사 중이던 나폴레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다부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을리도 없으니, 그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이었지요.  당시 프레스부르크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는 고작 1만3천 정도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이 좀 부풀려 보고를 했는지, 나폴레옹은 요한 대공의 군세를 약 3만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병력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마당에 적에게 3만이 더 가세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비 기병대로부터 낭수티(Nansouty)와 아리기(Arrighi) 장군의 중장 기병대를 다부 쪽으로 파견했고, 이어서 황실 근위대까지 그쪽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마저 끝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낭수티 장군의 기병대 중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마 포병대가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첫 포탄을 발사할 때 즈음에는 이미 나폴레옹도 현장에 도착하여 다부와 함께 반격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습을 해온 오스트리아군 측이었습니다.  작전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던 카알 대공은 어차피 프랑스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쪽 전선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로젠베르크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고 있는 적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어느 한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순간이었거든요.  이 때 병력 통제가 안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후퇴를 기술적으로 잘 해내는 것은 뛰어난 지휘관과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병사들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것을 해냈습니다.  순식간에 전위대에서 후위대로 임무가 바뀐 라데츠키 장군의 부대는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이 원래 출발선이었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퇴각할 때까지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잘 억눌렀고, 결국 아침 6시가 되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1천1백명 정도로 심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말년의 라데츠키입니다.  그는 원래 보헤미아, 즉 체코의 귀족이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그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1848년 쿠스토자(Custoza)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군을 격파한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 즉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맥없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걱정한 것은 그가 의도했던 기습이 이 새벽의 전투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다부의 공격이 그의 주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잃어보린 기습 효과를 어느 정도 벌충하기 위해 다부에게 일부 병력을 더 동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후방으로부터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다부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부에게 이렇게 감놔라 배놔라 참견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가슴을 정말로 철렁하게 만드는 사건이 전선 중앙부 아더클라(Aderklaa)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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