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11.11 19:33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전투 내내 나폴레옹의 옆을 지키며 전투 현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던 사바리 장군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킬 정도로 잘 싸웠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전투의 승패는 어느 쪽의 사상자가 더 많았는가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꼬리를 말아쥐고 물러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데, 보통 등을 보이며 후퇴하는 측의 대오가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그 뒤를 추격하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패자의 사상자 수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바그람 전투에서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대오를 굳게 지켰고, 결국 프랑스군은 평소 하던 대로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재정난을 일으킬 정도로 군비를 투입하여 카알 대공이 열심히 육성한 상비군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굳센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대 스파르타에 전해지는 격언 중에 '한 국가와 반복하여 자주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유는 잦은 전쟁 경험은 상대국에게도 군사 역량의 강화를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겪은 바가 딱 그랬습니다.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에 의한 징집군의 편성, 기동력을 중시한 전술, 자율성과 유연성을 잘 살려주는 군단제 운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지고 있던 상대적 우월성은 어느 틈엔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어느 정도 복제되어 있었고, 이는 전투력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또 카알 대공의 근본적인 전략도 오스트리아군의 비교적 질서있는 후퇴에 일조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전쟁 시작 전부터 개전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요.  그는 어차피 오스트리아 혼자 싸우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꺾을 수는 없으며, 만약 싸우더라도 최후의 일인까지 다 죽어 쓰러지는 결전보다는 적당히 싸우다 패배가 분명해지면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더라도 군사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상태여야 나폴레옹과의 종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그런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2~3시 경에 이미 후퇴를 결정했고,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힘을 좀 남겨둔 채로 후퇴를 시작하여 군사력을 보존한 채, 심지어 프랑스군 포로 수천 명까지 끌고 후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 새벽, 나폴레옹이 혹시 오스트리아군이 어제에 이어 다시 도전해올 것인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건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그람 전투가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꽤 순한 전투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바그람 전투는 이긴 프랑스군이나 진 오스트리아군이나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상자 수를 낸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양측의 참전 병력이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17만, 오스트리아군도 요한 대공의 병력까지 합해서 약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되어 있지요.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군대는 언저리까지만 오고 총 한방 쏘지 않았으니 전투 참전 병력 수에서는 빼는 것이 맞겠고, 또 프랑스군도 로바우섬을 지키던 보병들은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일부 빠지겠습니다만, 아무튼 양측이 무려 3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는 유사 이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이 한 자리에 집결하여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참전 병력이 많으니 당연히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상자 수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고, 또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대내외 과시를 위해 적의 사상자 수를 부풀리고 아군의 사상자 수는 양심도 없이 작게 조작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 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서는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전사 1,500에 부상 3~4,000으로 경미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실제 사상자 수는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혹자는 4만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도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약 20% 가까운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승자 측의 사상율이 약 10%, 패자 측은 약 20%가 상식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바그람 전투는 양측 모두 패배였던 셈입니다.  


양측의 피해가 모두 컸던 이유는 이 바그람 전투는 유례없는 대규모 포격전을 동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488문, 오스트리아군도 414문이나 되는 전례없는 막강한 화력을 총동원했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특히 이 전투의 주무대였던 마르히펠트의 평원이 지형과 지질 탓이 컸습니다.  이곳은 땅 표면이 비교적 단단하고 매우 평평한 지역인지라, 대포알들이 땅에 처박히지 않고 통통 튀며 먼거리까지 날아가면서 많은 병사들의 팔다리와 허리를 꺾어놓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전투가 끝난 뒤, 이 전투는 포병에 의한 승리라며 휘하 포병들의 노고를 칭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병대에게 영광을 더해주고자 전체 포병단 총사령관인 라리부아지에르(Jean Ambroise Baston de Lariboisière) 장군의 아들 페르디낭(Ferdinand Baston de La Riboisière)을 뽑아 이 승전보를 파리로 전하게 했습니다. 





(이 그림이 드물게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이 한꺼번에 나온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초상입니다.  바그람 전투 당시 27세였던 페르디낭은 카라비니에, 즉 총기병대 소속 장교였는데, 역시 나폴레옹의 과도한 욕심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1812년 보르디노 전투에서 전사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너무나 슬픔에 젖은 나머지 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1812년 겨울을 못 넘기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낭이 들고간 승전보에는 파리 시민들이 기대했던 화려한 전과는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그런 전과는 노획한 적의 군기와 대포, 그리고 많은 포로의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이 좀 부실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10폭의 군기와 20문의 대포, 그리고 약 7,500의 포로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빼앗긴 것은 군기 12폭, 대포 21문에 포로도 약 7천 이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적자를 보았던 셈이지요.   그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이 계산서를 받아든 나폴레옹은 '전쟁이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노획한 대포도 포로도 거의 없구나, 아무 결과가 없군'이라며 한탄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전투 다음날인 7월 7일 아침 잠에서 깬 나폴레옹은 혹시 카알 대공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도전해오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날 아침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의 막사를 찾은 막도날드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주고는 그를 '프랑스 제국의 원수'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즉, 영광스러운 원수의 계급으로 승진을 시켜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디노와 마르몽에게도 원수 계급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병사들은 막도날과 우디노는 그렇다치고, 마르몽은 뭔일래냐 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파르퀑(Parquin)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아예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막도날은 프랑스가 지명했고, 우디노는 군이 지명했는데, 마르몽은 우정이 지명한거라네"

(La France a nommé Macdonald, l'armée a nommé Oudinot, l'amitié a nommé Marmont)


사실 마르몽 달마시아(Dalmatia) 군단을 이끌고 최후의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아무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원수 임명장과 함께 별도의 개인 편지를 함께 마르몽에게 보내,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지만, 넌 이 계급에 어울리는 전공을 올린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갈구기도 했습니다.





(마르몽은 배신의 대명사로서, 라구사 공작이었던 그를 따서 Raguser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현대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봐도 정말 raguser는 trahir, 즉 배신하다라는 말의 동의어라고 설명이 나옵니다.  당대에는 더 심해서, 1830년 7월 혁명 당시 그가 시위 진압을 주저하자, 부르봉 왕가의 앙굴렘 공작은 그에게 "그를 배신했듯이 우리도 배신하려는거냐 ?" 라며 맹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갈굼을 당한 마르몽에게 '승진을 정당화시켜줄 전공을 세우라'는 말과 함께 카알 대공을 추격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의 달마시아 군단은 1만1천 정도로 매우 빈약한 편이었지만 전날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아 체력 고갈이 없는 유일한 부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 마르몽은 3일 후인 7월 10일 츠나임(Znaim)에서 카알 대공의 잔존 병력 약 5만을 포착했습니다.   1만대 5만의 대결이었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마르몽은 바로 뒤를 나폴레옹의 본대가 따라올 것이므로 적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지는 전법을 썼습니다.  결국 양측이 하루를 넘겨가며 수천 명씩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다음날 저녁 무렵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하자, 카알 대공은 휴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카알 대공 인생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후 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는 이 휴전 협정을 맺으며 총사령관직을 비롯한 모든 관직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카알 대공은 이 휴전에 대해 월권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프란츠 황제의 승인없이 이렇게 휴전 요청을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병사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존을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과 그의 가족입니다.  그가 나폴레옹급의 천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현실 감각이 없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래도 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사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처음부터 옳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Jean_Ambroise_Baston_de_Lariboisi%C3%A8re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articles/oudinot-en-1809-1810-les-lauriers-de-la-gloire/

https://en.wikipedia.org/wiki/July_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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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10.29 17:41

2012년,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 영화 중에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은접시에 퍼주는 음식을 굶주린 장발장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체 저 음식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화면을 보면 뭔가 고기도 좀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그 음식이 당연히 원작 소설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는 아닙니다만,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는 원작 소설에 묘사가 되긴합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가정부 할머니인 마글루아 부인이 내놓는 미리엘 주교의 평범한 저녁 식사 메뉴가 나열됩니다.


Cependant madame Magloire avait servi le souper. Une soupe faite avec de l'eau, de l'huile, du pain et du sel, un peu de lard, un morceau de viande de mouton, des figues, un fromage frais, et un gros pain de seigle. Elle avait d'elle-même ajouté à l'ordinaire de M. l'évêque une bouteille de vieux vin de Mauves.


그러는 동안 마글루아 부인은 저녁을 차렸다.  물에 기름, 빵과 소금을 넣고 만든 수프, 돼지비계 조금, 양고기 한조각, 무화과, 생치즈, 그리고 큰 호밀 빵 한 덩어리였다.  마글루아 부인은 주교의 그런 평상시 식사에 모브 와인 한병을 보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주교는 매우 높은 직책이고, 또 상당히 고액 연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거의 대부분의 급료를 빈민구제에 써버리고, 정작 본인은 무척 소박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때문에 저런 음식을 먹었던 것이지요.  저 소박한 음식 중에 특히 저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저 수프였습니다.  빵과 기름과 소금과 물만으로 만든 수프라니 ?  그게 무슨 괴이한 음식이란 말입니까 ?


그런데 그 빵 수프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레미제라블 속 장면보다 약 10년 전인 1809년, 나폴레옹 관련 기록에도 나옵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한 뒤 그는 휘하 병사들 중 상당수를 비엔나 시내에 주둔시킵니다.  통상 이런 경우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가정 주택에서 먹고 잤습니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산적처럼 마음대로 아무 집에나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병참 장교가 미리 조사한 결과에 따라 주택의 크기와 가정 형편, 그리고 그 집 가장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어떤 집은 3~4명, 어떤 집은 10여명 씩 배정되었습니다.  이 점령군 병사들이 점잖은 비엔나 중산층 시민의 가정에서 깽판을 쳤을까요 ?  그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습니다.  귀족이나 부유한 중산층 시민의 저택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런 집에는 장교들이 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엔나 시민들도 대부분은 서민이었고, 그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사회적 계급 출신인 프랑스 병사들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병사들과 피점령 시민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비엔나식 돈가쓰인 슈니첼입니다.  드셔본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냥 우리나라 돈까스가 더 맛있다고...)



문제는 비엔나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뭘 먹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유명한 비엔나식 돈까스(Wiener Schnitzel)와 맥주를 대접받고 가난한 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말라비틀어진 빵과 물을 먹어야 했을까요 ?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현지 조달의 달인이라고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고, 달인은 일을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병참부는 배고픈 병사들을 떠맡은 비엔나 시민들에게 '적어도 1인당 이 정도씩을 먹여야 한다'라고 의무 배식량을 정해서 통보했습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빵 1.33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

고기 1 파운드

쌀 0.125 파운드 (2 온스)

말린 채소 0.25 파운드 (4 온스)



여기서 눈에 확 띄는 부분이 바로 저 매일 먹을 빵 1.33 파운드 이외에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라는 부분입니다.  그냥 먹는 빵과 수프에 넣을 빵이 따로 있었을까요 ?  그리고 저 말린 채소라는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  게다가 비엔나에서 쌀을 요구했다고요 ?  그것도 고작 2온스, 즉 56그램 정도의 쌀로 뭘 해먹었을까요 ?  요즘 한국인들이 먹는 쌀밥 1공기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쌀이 약 90그램인데, 한공기도 안되는 쌀인데 말입니다.  


저기서 말린 채소라는 것이 사실은 말린 콩을 뜻한다는 것을 아시면 대략 견적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냥 먹는 빵을 제외한 저 모든 재료는 결국 끓는 물 속에 들어가 뭔가 걸죽한 스튜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올렸던 포스팅에서,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 중 일부를 다시 보시면 좀더 분명해질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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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에서 일하던 소년인 쿠아녜는 징집 명령을 받고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나는 작은 꾸러미를 겨드랑이 밑에 끼고 출발하여, 첫번째 군사 주둔지인 로조이(Rozoy)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숙사 할당 명령서(ordre de cantonnement)를 받아다 집 주인에게 제시했는데, 집 주인은 날 본 척 만 척 하며 홀대했다.  그러고 난 뒤 난 뭔가 스튜를 만들 재료를 사러 밖에 나갔고, 푸주간에서 고기를 받았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고기 조각을 보니 몹시 처량했다.  그것을 들고와서 내 숙사로 정해진 집의 안주인에게 주며 스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한 뒤, 스튜에 넣을 채소거리를 구하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약간의 스튜가 만들어졌고, 그때 즈음에는 그 집 주인 식구들도 나를 어느 정도 좋게 봐주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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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서 보면, 고기는 분명히 돈을 내고 사왔는데, 양배추나 당근 등 채소류는 돈을 내고 사왔다는 것인지 밭에서 그냥 뽑아왔다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배급 식량 목록에는 빵과 밀가루, 와인과 식초는 기록되어도 배추나 양파 등 진짜 채소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런 부식거리는 그냥 '구하는' 것이지 주요 보급품 목록에 넣을 정도로 중요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말고 식이었지요.  또 당시 사람들은 채소를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전에 회사 교육 문제로 유쾌한 멕시코 친구 2명을 만나서 며칠간 잡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가 멕시코는 원래부터 가난한 나라여서, 어디서 친구가 방문하러 오겠다는 전화가 오면 저녁을 만들던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고 반농담반진담으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여보, 콩 수프에 물을 더 부어야겠는걸 ?"


이렇게, 원래 수프라는 것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요리입니다.  게다가 솥 하나만 있으면 여럿을 위한 요리도 적은 연료로 쉽고 빨리 할 수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군대를 위한 요리였지요.  그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요리가 콩소메(consommé)처럼 멀건 국물이라면 무척 실망스러웠겠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병사들은 국물을 뻑뻑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부재료를 넣었습니다.  있기만 하다면 하얀 밀가루가 제일 좋았겠지만 밀가루는 빵을 만들기에도 부족한 것이었고, 쌀이 가장 좋은 재료였습니다.   




(콩소메입니다.  요즘 고급 식당의 요리사들은 저런 콩소메의 국물을 맑게 하려고 계란 흰자를 쓰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정작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질색을 했겠지요.)



쌀은 국물을 잘 흡수하여 그 자체로도 맛이 풍부한 건데기가 될 뿐만 아니라, 전분을 국물에 풀어내어 국물을 진하게 만들어줬거든요.  지금도 치킨 수프 등에는 짧은 국수를 넣기도 하지만 쌀을 넣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삼계탕이 해외에 소개될 때는 스튜가 아니라 chicken soup으로 소개되는데, 닭과 쌀이 든 국물 요리이다보니 서양의 치킨 수프와 동일시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식의 간단한 chicken soup인줄 알고 삼계탕을 시켰다가 닭 한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요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Chicken soup with rice는 이런 거...)




원래 유럽에서 쌀을 가장 많이 먹는 지역이 스페인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지요.  덕분에 남부 프랑스에서도 쌀 요리를 꽤 먹었다는데, 아마 비엔나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쌀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굶주린 병사들을 맞이한 비엔나 시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겠지요.  


하지만 쌀은 유럽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은 아니었습니다.  쌀이 없을 때 대용으로 사용되던 것이 바로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이었습니다.  당시 빵은 버터나 쇼트닝이 들어가지 않은, 갓 구운 상태에서도 꽤 딱딱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구운지 2~3주가 지나거나 잘라 먹다 껍질부분이 남은 빵조각 남은 것들은 정말 딱딱했을 겁니다.  레미제라블 후반부에, 마리우스의 하숙방에서 노닥거리던 에포닌이 방을 나가면서 마리우스의 찬장에 놓여있던 마른 빵조각을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입에 넣고 씹다가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부러졌다고 투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2012년 영화 속에 나온 에포닌은 아주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레미제라블 원작 소설 속의 에포닌은 어린 나이에 이빨도 한두 개 빠진, 정말 헐벗고 병약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게 훨씬 더 현실적인 이야기지요.)




그렇게 마르고 굳은 오래된 빵을 그나마 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수프에 넣어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빵 수프 요리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습니다. 리볼리타(Ribollita)라든가 아콰코타(Acquacotta) 등이 모두 빵을 넣고 끓인 수프 요리이며, 하나같이 가난한 농부들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아콰코타입니다.  이탈리아식 빵 수프입니다.)



마른 빵보다 더 나쁜 것이 원양 항해나 군대에서 많이 먹던 비스킷, 즉 건빵이었습니다.  비스킷을 부수기 위해 돌로 내리치면 가끔씩 비스킷 대신 돌이 부서졌다는 그 공포의 비스킷으로도 수프를 만들어 먹었을까요 ?  예, 그렇게 많이 먹었습니다.  버구(burgoo)라는 것은 염장쇠고기와 잘게 부순 비스킷으로 만든 대표적인 영국 해군 요리(?)입니다.  그나마 부유한 함장인 잭 오브리(Jack Aubrey)를 주인공으로 한 Aubrey & Maturin 시리즈에서는 이 버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가난뱅이 함장이 주인공인 Hornblower 시리즈에서는 수병들 뿐만 아니라 함장실에서 혼블로워가 혼자 앉아 버구를 먹고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결국 미리엘 주교가 먹던 저 빵 수프라는 것은 결코 주교님이 드실 만한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원작에서도 장발장이 '동네 짐마차꾼들이 이거보다는 더 잘 먹는다'라고 말할 정도지요.  미리엘 주교는 '그 사람들 일이 더 힘드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장발장은 눈치도 없이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돈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라고 팩트 폭력을 행사하지요.


이 빵 수프 이야기는 나폴레옹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809년 7월 7일 밤,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지친 나폴레옹은 사령부로 마련한 농가 앞 짚단 위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당대 어느 유럽 군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 군대에서는 종종 벌어지던 일이고,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군대를 강군으로 만들었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그 앞을 지나가던 어느 유격병(voltigeur) 상병 하나가 황제가 그렇게 지쳐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무의 제재도 받지 않고 감히 말을 걸었습니다.  


"폐하, 우리가 끓인 수프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


그러자 잠에서 깬 나폴레옹도 짜증내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지요.  "잘 익었나 ?"


이 상병은 나폴레옹을 자기와 그 동료들이 끓여놓은 수프 남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잘게 부순 마른 빵조각(crouton)까지 넣어 아주 걸죽한 수프가 은으로 된 작은 단지에서 끓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걸 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흰빵과 은단지를 구했나 ?  훔쳤나 ?"


그때 나폴레옹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그 상병은 약탈죄로 즉결처분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병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빵은 의무 마차에서 샀고, 은단지는 어느 죽은 장교의 몸에서 찾은 겁니다."


나폴레옹은 그 죽은 장교가 프랑스군이었는지 오스트리아군이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렇게 나폴레옹과 상병 및 그 동료들은 고된 하루 끝에 든든한 저녁을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  





(보통 시저스 샐러드에 딸려 나오는 사각형 튀긴 빵조각을 크루통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원래 croûton이라는 단어의 뜻은 긴 빵의 껍질이 많은 양쪽 끝부분 또는 굳은 빵조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Source : Napoleon Conquers Austria: The 1809 Campaign for Vienna By James R. Arnold

Les cahiers du capitaine Coignet by Jean-Roch Coignet

Les Miserables by Victor Hugo

https://en.wikipedia.org/wiki/Acquacotta

https://en.wikipedia.org/wiki/Riboll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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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21 22:28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해있는 꽤 큼직한 예비 병력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의 아스페른-에슬링 공격이 실패했거나, 최소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지요.  클레나우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지금 나폴레옹 사령부에 저렇게 많은 예비대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대가 없었으므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패배가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이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버텼던 것은 아직 한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동생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었습니다.  


실제로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던 오후 4시 30분 경, 요한 대공의 전위대를 구성하는 일단의 기병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바로 동쪽인 운터지벤브룬(Untersiebenbrunn)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인마가 일으키는 먼지와 총포의 화약 연기로 인해 사방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마르히펠트 평원에는 프랑스군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모두가 두려워하던 요한의 군대가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스도르프의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난데 없이 동쪽 평원에서 벌어지는 소란 소리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참모 장교들은 물론이고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임시 사령부 밖으로 튀어나와 망원경을 들고 요한 대공의 병력을 포착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습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이번 전투의 승리가 요한 대공의 도래로 인해 막판에 패배로 둔갑하는 것이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전투 막판의 이 소동에는 꽤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요한 대공이 주둔하고 있던 브라티슬라바는 윗 그림 속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1741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가 즉위식을 올린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저 그림 속의 성은 브라티슬라바 성, 독일어로 Pressburger Schloss라는 곳인데, 아래 사진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브라티슬라바 성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1809년,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한 외젠의 군대가 결국 이 성에 포격을 가하는 등 이 성은 프랑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1811년, 이 성에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 성은 폐허가 되었지요.  지금의 이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건한 것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7월 4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카알 대공은 서둘러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Bratislava,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 Pressburg)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오스트리아 내부군을 이끌고 서둘러 마르헤크(Marchegg)로 달려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그는 상황이 급하므로 무거운 짐마차 등은 다 버려두고 최소한의 군장으로 강행군을 하라고 지시했지요.  마르헤크는 바그람으로부터 동쪽으로 대략 7시간 정도의 행군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 바그람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는 사람이 (쉬지 않고) 걸어서 가도 10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카알 대공은 그 정도면 충분히 일찍 전령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특별히 전령으로 제4 군단장 로젠베르크의 아들을 골라 보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대공이 있던 브라티슬라바부터 도이치-바그람까지의 거리는 현대적 도로를 따라 걸을 때 약 10시간 거리입니다.  물론 이건 전혀 쉬지 않고 빈 몸으로 가볍게 걸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을 넘던 7월 4일 밤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졌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랑스군은 그런 악천후에 대해 '잘 됐다 ! 오스트리아군이 모르는 사이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라며 재빨리 수만 명이 불안한 부교를 건넜지요.  그러나 로젠베르크의 아들은 같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무렵엔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 소환 명령은 카알 대공이 전령을 보낸지 무려 23시간 후인 7월 5일 아침 6시, 이미 나폴레옹의 대군이 마르히펠트 평원에 전개한 다음에야 요한 대공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자신의 늦은 명령서 전달로 인해 초조해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요한 대공은 그 급보를 받아들고도 반응이 무척이나 심드렁했습니다.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아니 뭐야, 뭐 브라티슬라바를 견제하고 있는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를 공격하라더니...'라는 불평이었습니다.  실제로 카알 대공은 바로 전에 전달한 명령서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외젠이 남겨두고 떠난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 즉 엔가라우(Engerau)에 주둔한 세베롤리(Severoli) 장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고, 요한 대공은 지엄하신 형님의 명령을 집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 앞에 위치한 적을 습격하는 것과 먼 지역으로 행군하는 것은 분명히 준비할 것이 다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 변경이 하루 종일 걸릴 일은 분명히 아닐 것 같은데, 요한 대공의 부대가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진영 밖으로 걸어나간 것은 무려 19시간 후인 7월 6일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이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느린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대공에게는 다 설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베롤리 장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여기저기에 배치시켜 놓았던 부대를 다시 다 불러들이고, 밤새 공격 대기를 기다리며 야전에서 대기한 병사들에게 행군용 배낭을 챙기게 하고, 긴 행군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하는 일에는 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가 백주대로에 보무도 당당하게 마르헤크로 출정하면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세베롤리가 그걸 목격하고는 재빨리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요한이 움직이니 대비하십쇼'라고 알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그는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든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행군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긴 그 덕분에, 나폴레옹은 감시를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7월 6일 저녁 무렵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출발이 늦었다고 해도,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거운 짐도 다 놓아둔 채 결연한 의지로 야간 행군을 했다면 7월 6일 오후 12시 경에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 도착하여 다부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 옆에서 함께 말을 몰았던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보기에, 요한 대공의 부대는 빨리 행군하려는 의지도, 싸움에 도움이 되려는 각오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시키니까 움직인다는 식의 천하태평한 행군이었던 모양입니다.  왜 요한 대공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다면 요한 대공은 군법회의에 회부감이었다는 것입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마르헤크까지는 불과 4시간 반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한 대공의 군대는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네요.)



결국 사방에서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며 초조하게 요한 대공의 군대를 기다리던 카알 대공에게, 오후 2시경 날아온 소식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10시 30분에 씌여진 요한 대공의 편지가 카알 대공의 손에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강행군을 한 끝에 명령대로 마르헤크에 도착했고, 지친 병사들을 좀 쉬게 한 뒤에 다시 오후 1시경에 행군을 다시 시작할테니 늦어도 오후 5시까지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 남동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인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라니 !  그것도 바그람도 아니고 레오폴즈도르프라니 !  새벽 1시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핑계를 댈 폭풍우도 없었으니 정상적으로 행군을 해도 아침 7시에는 마르헤크에 무리없이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릿느릿 도착한 뒤에도 쉬었다가 점심 먹고 오후 1시에 출발하겠다 ?  그래서 오후 5시에 도착할 것 같다 ?  오후 5시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시간이면 프랑스군이 저항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둘러싸고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없어진 카알 대공은 2시 30분경 결국 후퇴 명령서를 작성하여 각 군단장에게 뿌렸습니다.


각지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며 조금씩 밀려나던 오스트리아 군단장들에게는 이 후퇴 명령서가 꼭 가뭄 끝에 단비 같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승리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달려드는 적군과 싸우면서 무너지지 않고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것입니다.  후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자칫하면 공포에 질려 진형을 깨고 무질서하게 패주해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적의 기병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알 대공이 지난 3년간 개혁해놓은 오스트리아군은 확실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군단들이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뒤에 바짝 붙은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포병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괴롭혔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포탄과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에서도 끝내 대오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 배후 깊숙이 침투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그 뒤를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대의 용감무쌍 광기병 라살(Antoine Charles Louis de Lasalle) 장군이 오스트리아 보병 방진을 공격하다 머스켓 총탄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라살의 뒤를 이어 기병대를 지휘하던 마륄라즈(Marulaz)도 치열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저녁 8시 경 그의 말이 죽고 자신도 부상을 입으면서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광기병 라살 장군입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르고 항상 기병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렸는데, 종종 검이 아닌 긴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쥐고 돌격을 지휘하곤 했답니다.  이 그림에서도 큼직한 파이프를 쥐고 있지요.  그런 라살도, 이번 전투에서는 뭔가 군인 특유의 직감이 있었나 봅니다.  로바우 섬에서 도강할 때, 주변 인물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군이 혈투를 벌이며 전선은 조금씩 북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원래의 전장이던 마르히펠트와 루스바흐 언덕에는 전사자들의 시신,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낙오병들, 그리고 그들을 약탈하려는, 또는 도우려는 종군 상인들 및 군인 가족 등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되었지요.  요한 대공의 선두 부대에 딸린 정찰 기병들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 즉 오후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서쪽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나자, 이제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던 프랑스군 낙오병들과 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오스트리아 정찰병들의 눈에 들어온 대혼란은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현장 상황이 한눈에 잘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찰병들은 저 멀리 북서쪽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 소리를 통해, 이미 전선은 저 먼 쪽으로 밀려난 상황이고, 뜨거웠던 전투 현장에 프랑스군 낙오병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된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대로 돌아가 요한 대공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요한 대공은 카알 대공과 연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쿨하게 그냥 마르헤크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되돌아가면서 요한 대공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  조금 더 서두를 걸 하는 후회였을까요 ?  이제 패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을까요 ?  다 아니었습니다.  참모진들에게 투덜거린 요한 대공의 푸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카알 형님은 이 패배의 원인을 내게 뒤집어 씌우시겠구만."


이 소동에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주변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전투 태세를 취했고, 즉각 여러 장교들이 요한 대공의 정세를 탐지하러 말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곧 튀렌느(Henri Amedee Mercure de Turrenne)라는 장교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습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것처럼 2~3만의 병력이 아니라 고작 1만 몇천의 수준이고, 그나마 마르헤크 쪽으로 후퇴 중이라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굳이 그들을 추격하려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바그람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바그람 전투의 에필로그 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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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10.14 13:37

지난편에서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가 1802년 1월말, 생 도밍그 인근 사마나 만에 집결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원정대의 임무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나폴레옹이 르클레르에게 준 임무는 생 도밍그를 다시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 밑으로 복귀시키라는 다소 고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  투쌩을 죽이라는 말인가요 ?  왜요 ?  투쌩은 한번도 프랑스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거나, 반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명분으로 투쌩을 잡아들이나요 ?  사실 이 원정대의 목적은 생 도밍그의 반란 노예들과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공식적인 임무는 새로운 주지사(Captain general)의 안전한 부임이었지요.  나폴레옹은 투쌩과 구태여 툭탁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화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탄약과 무기를 소모시킬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몇 년 전부터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투쌩의 두 아들을 이 원정대에 포함시켜 투쌩에게 프랑스 중앙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즉, 투쌩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두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한 것입니다.


흔히들 오해하시는 것 중 하나가, 나폴레옹이 생 도밍그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인데, 나폴레옹은 적어도 드러내놓고 그렇게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현지에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흑인 장교들의 직위를 박탈하라는 명령은 분명히 내렸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꼭 노예제를 부활시키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흑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흑인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생 도밍그의 설탕 생산이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노예제든 임금 노동제건 상관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또한 그는 이런 조건들을 관철시키려면, 현지 흑인 군대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2만 명이 넘는 병력과 전열함만 해도 35척인 대함대를 동원했던 것이지요.  또한 나폴레옹은 단순히 무력만으로 생 도밍그를 장악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생 도밍그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투쌩에 의해 프랑스로 쫓겨와있던 뮬래토 장군인 리고 (Andre Rigaud)와 그의 뮬래토 부대도 이 원정대에 포함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들이 현지 뮬래토 엘리트들을 규합하여 투쌩의 권력 기반을 잠식하기를 바랬습니다.





(트레빌 제독은 그다지 잘 알려진 제독은 아닙니다만, 미국독립 전쟁에도 참전했고, 특히 1801년 8월 두차례에 걸쳐 불로뉴 항구를 습격한 넬슨의 소함대를 (비록 육상에서 반격하기는 했지만) 격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은 7척의 배를 잃었고 44명 전사, 126명 부상에 3명의 포로를낸 것에 비해, 프랑스 측은 1척의 배를 나포당하고 8명 전사, 12명 실종, 34명 부상으로서, 기록으로만 보면 프랑스의 승리라고 할만 했습니다.)





(불로뉴 항구 습격 사건입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잃은 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놀라셨을 겁니다.  사실 그렇게 잃은 것들은 대개 이런 대형 보트였지요.)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는 하나의 대선단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함대는 조유즈(Villaret de Joyeuse) 제독 지휘 하에 브레스트(Brest)에서, 어떤 함대는 트레빌 (Louis-René Levassor de Latouche Tréville) 제독 지휘 하에 로슈포르(Rochefort)에서, 또 그 외에도 강톰(Ganteaume) 제독과 리느와(Linois) 제독이 각각 함대를 이끌고 약간씩 시차를 두고 출발했지요.  원래 계획은 이들이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 그러니까 스페인 식민지 쪽인 도미니카 북동쪽 해안의 사마나(Samana) 만에서 집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톰과 리느와의 함대가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르클레르는 결정을 내려야 했지요. 




(조유즈 제독입니다.  그의 활동이 이후 별로 없었던 이유는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그가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단 병력 수송이 끝나고 난 이후에는 그런 대함대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요.)



아마 여러분은 초강대국인 프랑스의 대원정군에 맞선 노예 출신의 어중이떠중이 흑인들로 구성된 군대의 운명은 뻔한 것이라고들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르클레르 자신은 본인의 처지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했습니다.  당시 생 도밍그의 흑인 정규군은 약 2만명으로서, 프랑스 원정군과 거의 비슷한 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아직 집결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고, 상당수가 아직 대서양을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엔 아직 상륙 주정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상륙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만약 흑인 부대들이 주요 항구와 해안을 굳게 지키고 있다면 성공적인 상륙전이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흑인 부대들은 이미 주요 요충지를 지키는 유리한 입장인 것에 비해, 자신들은 낯선 열대의 섬에 상륙하여 공격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또 막연히 흑인 부대들이 무장이 빈약할 것이라고들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이들도 모두 제대로 된 플린트락 머스켓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고 많지는 않지만 포병대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기와 탄약들은 어디서 났던 것일까요 ?  생 도밍그에 주둔했던 프랑스 식민지 수비대의 장비들이나 백인 농장주들의 무기를 빼앗거나 넘겨받은 것도 있었습니다만, 특히 미국에서 들여온 무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는 꽤 노련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투쌩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2년전 뮬래토들의 장군인 리고와 싸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존 아담스 (John Adams)에게 프랑스가 향후 북미 지역에 세력 확장을 꾀할 때 생 도밍그를 기지로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무기 지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 무기들 덕택에 생 도밍그 흑인 부대의 무장 수준은 그다지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포병대가 숫자나 숙련도 면에서 크게 열세이긴 했지만, 생 도밍그 흑인 병사들은 최근 많은 전투를 치루었으므로 전투 훈련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었지요.  무엇보다도, 이들은 어중이떠중이 게릴라 부대나 민병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규 상비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장교 조직도 갖추고 있었고요.  생각해보면 40만 정도되는 생 도밍그에 상비군만 무려 2만이라고 하면, 인구 대비 병사 비율이 5%로서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우리나라도 겨우 1.5%이고, 심지어 북한도 약 3% 수준인데 말입니다.  투쌩은 이제 막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생 도밍그가 영국이건 스페인이건 또는 본국 프랑스이건 유럽 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런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인 존 아담스입니다.  생 도밍그의 반란 사건은 미국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아담스로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생 도밍그에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했습니다.  가장 큰 영향은 뒤에 말씀드릴 루이지애나 매각 조약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생 도밍그에서 도망쳐 온 프랑스계 주민들로 인해 남동부 해안에 프랑스 계통의 크레올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특히 이들이 데리고 온 노예들이 혹시 미국내 노예들에게 반란의 불씨를 번지게 하지 않을까 하고 미국 노예주들은 매우 긴장했었지요.)



하지만 바로 이 제대로 된 정규군 조직이 투쌩의 몰락을 부르게 됩니다.  이런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전 인구의 5%를 병사로 만들자면, 그들에게 (우리나라 군대처럼 애들 과자값이 아닌) 최소한 농장 노동자만큼의 급료를 줘야했고, 장교들에게는 더 많이 줘야 했습니다.  게다가 탄약이나 무기를 미국에서 계속 사와야 했지요.  하지만 최근 10년간 피로 얼룩진 노예 반란 탓에, 한때 그토록 많은 부를 낳아주었던 사탕수수 농장이나 설탕 공장 등은 완전히 피폐되어 있었으므로, 생 도밍그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직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투쌩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즉, 전직 노예들을 원래 소속되었던 농장으로 돌려보내 강제로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효율적인 농장 경영을 위해, 자메이카나 뉴 오올리언즈 등으로 도망쳤던 백인 농장주들을 다시 불러들여 그 전직 노예들을 관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흑인 농부들은 노예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급료를 받는 농장 노동자로서 일하는 것이었지만, 그 원수같던 백인 농장주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농장으로 내몰려 뙤약볕 밑에서 힘든 사탕수수 농사를 지어야 했던 흑인들은 이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원래 사탕수수 농사는 커피 농사 등에 비해 몹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자메이카에서 돈을 벌어오려면 역시 사탕수수가 가장 적합했으므로 투쌩은 사탕수수 농사를 강요했습니다.  이런 강제 조치는 1801년 10월, 즉 프랑스 원정대 도착 직전에 투쌩의 조카인 모이즈(Moïse) 장군 주도하의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잔혹한 무력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사마나 만에 프랑스 함대가 나타났을 때, 투쌩의 정치적 입지는 많이 흔들리는 편이었습니다.  사실 생 도밍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신식 머스켓 소총보다는 자유를 향한 흑인들의 열망과 단결이 어쩌면 더 중요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라를 지키는데는 국민들의 단합이 더 중요할까요 이런 머스켓 소총이 더 중요할까요 ?  글쎄요... 정답은 둘다 !)



르클레르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십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에게는 있지만 투쌩은 가지지 못한 것이 2가지 있었는데, 그것들은 생 도밍그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습니다.


1) 중앙 정부의 권위

누가 뭐래도 르클레르와 그의 원정대는 투쌩이 충성을 맹세한 프랑스 중앙 정부가 파견한 정식 관원들이었습니다.  투쌩은 물론이고, 특히 투쌩의 부하 장교들도 그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특히 투쌩의 전직 노예 출신 부하 장교들은 자신들의 지위, 심지어 자유조차도 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중앙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들은 다시 사탕수수 밭의 검둥이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마음 속으로는 프랑스 중앙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바라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 기동력

전에 나폴레옹이 리볼리 전투에서 부족한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내선이동의 잇점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지요.  투쌩의 병력들은 히스파니올라 섬을 지키고 있고, 르클레르는 그 섬을 침공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투쌩이 그 전선의 안쪽에, 르클레르는 바깥 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동성의 잇점은 투쌩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 있었지요.  히스파니올라 섬은 이탈리아 리볼리와는 달리 빽빽한 밀림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섬이었고, 따라서 투쌩은 (히스파니올라는 실상 꽤 넓은 섬이었으므로) 여러 해안 요충지에 분산된 부하들과의 교신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르클레르의 병력은 함대에 분승하고 있었으므로, 바람만 괜찮다면 오히려 투쌩보다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르클레르는 이 두가지 점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는 섬의 요충지 여러 곳을 동시에 들이치면서, 이를 침공이 아닌 중앙 정부의 권력 인수 인계로 포장을 합니다.  즉 케르베르소(Kerverseau) 장군의 함대는 동쪽의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 나타났고, 부데 (Jean Boudet) 장군은 트레빌 제독의 함대와 함께 산 도밍그의 신흥 수도인 포르토 프랭스(Port-au-Prince, 지금도 아이티의 수도지요)에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자신과 조유즈 제독의 함대는 산 도밍그 최대 도시이자 예전 수도인 캅 프랑셰 (Cap Francais, 프랑스 곶이라는 뜻입니다만, 지금은 이름을 캅 아이시앵 Cap-Haitien, 즉 아이티 곶으로 바꾸었습니다)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흑인과 뮬래토들을 미워하기로 유명했던 로샹보(Donatien-Marie-Joseph de Vimeur, vicomte de Rochambeau) 장군은 캅 프랑셰 약간 동쪽의 요충지인 포르 리베르떼 (Fort Liberte)를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해 투쌩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  사실 프랑스 함대가 사마나 만에 정박했을 때 이미 투쌩은 그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각지를 지키고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만약 프랑스 함대가 흑인 부대장을 불러 회담을 요청하면 반드시 그에 응할 것을 명하고, 혹시 회담 요청이 없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회담 요청을 하라고 했습니다.  르클레르의 예상대로, 말만 잘 통할 것 같다면 투쌩은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에 정면 도전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아무 대화 없이 그냥 상륙을 시도한다면 맞서 싸우지 말고 도시와 농장을 불태우고 산 속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일설에는 후퇴하기 전에 생 도밍그의 백인들을 학살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건 투쌩답지 않은 조치라서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투쌩의 기본적인 전략은 프랑스 중앙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영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황열병에 의해 프랑스군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산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좋은 계획이었습니다.  딱 한가지만 빼고요.  바로 부하들에 대한 통신과 장악력이었지요.





(훗날 앙리 1세로 아이티 국왕으로 즉위한 크리스토프입니다.  그의 자손은 계속 아이티의 권력계에 남았고, 그의 손자도 아이티 대통령직에 오릅니다.)



1802년 2월 3일 캅 프랑셰 항구에 나타나 상륙 허가를 요청하는 르클레르에 대해, 그곳을 지키던 흑인 장군 크리스토프 (Henri Christophe)는 투쌩의 지시대로 협상 전에는 상륙을 허가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2월 5일 바로 옆 동네인 포르 리베르떼 (Fort Liberte)에 로샹보가 갑자기 상륙하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크리스토프는 투쌩의 계획대로 시가지와 농장들에 불을 지르고는 산 쪽으로 퇴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토 도밍고를 지키고 있던 투쌩의 동생 폴 루베르튀르 (Paul Louverture)는 가짜 편지에 속아 순순히 프랑스군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협력했고, 남쪽의 포르토 프랭스를 지키던 라플륌(Laplume)도 부데(Budet)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주요 도시와 마을에서도 교전 회피, 초토화 작전 이후 후퇴라는 대전략을 따르지 않고, 격렬한 저항전이 펼쳐지거나 그냥 프랑스군을 받아들이는 모습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역시 최근 투쌩의 강압적인 정책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또 일부 흑인 장교들이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에 굴복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르클레르는 '모든 흑인들의 자유와 기존 직위, 재산과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주겠다'라고 선언을 했으니, 그런 르클레르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흑인 지휘관들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데살린은 대체 투쌩이 이런 인물을 부하로 거느렸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포악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상륙 초기에 르클레르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프랑스군은 당시 전황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40만의 흑인으로 가득찬 섬에 불과 1만 몇 천 되는 병력으로 상륙했으니 그럴만도 했겠지요.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사정 때문에, 불과 10일 만에 프랑스군은 주요 항구와 도시, 주요 경작지들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르클레르 본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지요.  한편 투쌩은 자신의 충복인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훗날 아이티의 왕이 됩니다)와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훗날 아이티의 황제가 됩니다)와 함께, 불과 수천 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북부 산악지대에 숨어 있었지요.  르클레르는 이런 초기의 성공을 투쌩에게도 적용하고자 그의 두 아들을 투쌩에게 보내주며 '항복하면 투쌩을 르클레르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그의 장군직과 재산 등을 모두 인정해주겠다'는 나폴레옹의 편지까지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투쌩은 르클레르의 제안을 거절했지요.  아무리 그 말이 달콤하다고 할지라도, 정말 선의로 왔다면 저렇게 전함과 2만이 넘는 병력을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러는 사이에 강톰 제독과 리느와 제독이 이끄는 함대들이 도착하여 병력이 증원되자, 르클레르는 2월 17일, 투쌩을 잡기 위해 토끼몰이식의 광대한 작전을 시작합니다.  로샹보가 포르-리베르떼로부터  남서쪽 방향의 생-미셀 (Saint Michel)로 밀어붙였고, 또 아르디(Hardy) 장군이 카프 프랑셰로부터 남쪽의 마르멜라드(Marmelade)로, 데푸르노(Desfourneaux) 장군이 플레상스(Plaisance)로 진격했습니다.  동시에 윔베르(Humbert) 장군이 포르 데 페 (Port-de-Paix)에 상륙하여 트롸-리비에르(Trois-Rivières) 협곡으로 진격했고, 남쪽에서는 부데 장군이 뽀르또 프랭스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사방에서 투쌩의 저항 세력을 위협하여 그들을 중서부 해안인 고나이브(Les Gonaïves) 지역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잘 먹혀들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은 병력의 우위보다도, 르클레르 측이 바다를 통해 손쉽게 통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지요.





(상륙 이후 프랑스군의 진격 방향입니다.)



투쌩의 병력은 여기저기서 고립되어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크레따-피에로(Crête-à-Pierrot) 요새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면서 거기에 비축해두었던 무기와 탄약을 상실한 것이 큰 타격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투쌩에게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거 영국군과 싸울 때도 이런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르클레르의 위협은 당시 영국군과의 전쟁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해안가의 도시들과 경작지를 점유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이번 르클레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목적은 투쌩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므로, 집요한 추격이 산속까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흑인 부대를 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으로 꼬여냈습니다.  이는 영국군과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일이었지요.  특히 이미 항복했던 라플륌이나 모레파(Jacques Maurepas) 등의 흑인 장교들을 르클레르가 상당히 우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쫓기는 흑인 병사들, 특히 장교들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투쌩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습니다.  먼저 크리스토프가 항복을 했고, 곧 이어 데살린도 프랑스군에게 투항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홀로 남은 투쌩도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도 결국 르클레르에게 항복해야 했지요.


5월 6일, 투쌩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이제 프랑스군의 본거지가 된 캅 프랑셰로 걸어들어가 르클레르와 회담 후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조건은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투쌩은 장군으로서 직위를 모두 인정받았고 앞으로도 그에 따른 예우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에너리(Ennery) 지역의 농장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일부 직속 경호 병력을 제외하고는 실제 권력은 모두 양도해야 했고,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집니다.  그에 비해 크리스토프와 데살린은 항복 이후에도 흑인 병력들에 대한 지휘권을 맡아서 현역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르클레르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르클레르가 받은 명령은 흑인 부대들을 모두 해체하고 그 장교들도 모두 퇴역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만, 현장에서 보니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프랑스군만큼이나 수가 많은 흑인 병사들을 당장 해산시켜 농장 노동자로 돌려보내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생 도밍그의 전투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규모의 산적화된 흑인들이 아직도 각지에서 프랑스인들을 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현실과 타협하여 일부 흑인 장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그 병력을 자신의 휘하에서 운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지요.





(색칠된 부분이 황열병 발생 지역입니다.  저쪽 동네에 갈 때는 반드시 황열병 백신을 맞고 가셔야 합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원래 황열병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따라 온 병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그 무서운 손님이 프랑스군의 병영을 방문했습니다.  바로 황열병, 그분이셨지요.  한 1~2주 만에 곳곳에서 병사들이 쓰러져갔습니다.  이 황열병이라는 것은 사실 걸리기만 하면 100% 다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열병 바이러스를 가진 모기가 사람을 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황열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었고, 모기 침 속에 어느 농도 이상의 바이러스가 축적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또 황열병이 발병을 한다고 해도, 그 중에서 약 15% 정도의 사람만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다 그 중 반이 죽음에 이르는, 진짜 황열병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나머지 85%는 그냥 열병을 앓다가 낫는 정도로서, 이들은 실제로는 황열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였습니다.  아무튼 이 황열병이 프랑스군을 덮치자, 병사들이 정말 신속하게 죽어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계속 황열병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던 흑인들보다 이제 막 프랑스에서 도착한 원정군이 황열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르클레르는 크게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는 황열병의 창궐까지는 몰라도, 이를 틈타 흑인 반란군들이 극성을 부리며 습격을 해오는 상황 뒤에는 투쌩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은 나폴레옹으로부터 흑인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결국 투쌩을 잡아들여야만 했겠지요.  그는 투쌩을 체포하는 명분으로, 투쌩이 썼다는 2통의 편지를 제시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프랑스군의 황열병 상태를 잘 주시할 것과, 르클레르의 건강이 나빠지면 거사를 개시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투쌩은 그런 편지를 썼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만, 사실 그 필체나 맞춤법이 틀린 것, 무엇보다 그 문맥 속에 흐르는 기백과 정신은 누가 봐도 투쌩이 쓴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사실이야 어찌되었건 이를 명분으로, 르클레르는 투쌩을 체포하기로 합니다.





(투쌩의 초상화는 사실 모두 엉터리입니다.  아무도 투쌩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사람은 없고, 그냥 생김새 이야기를 대충 듣고 그린 것이라네요.)




투쌩의 체포는 프랑스군으로서는 다소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혹시 투쌩의 농장으로 병력을 보내 체포하려다가 투쌩이 다시 산악 지방으로 도주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하게 될까봐, 초소 배치 문제를 논의하자는 핑계로 투쌩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던 브뤼네(Brunet) 장군의 사령부로 투쌩을 초청했습니다.  투쌩과 만나 처음에는 다정하게 포옹으로 인사해야 했던 브뤼네 장군은 입장이 난처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회의 도중에 갑자기 브뤼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무장 병사들이 방에 난입하여 투쌩을 포박했습니다.  이런 식의 비겁한 속임수로 투쌩을 체포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프랑스군이 투쌩을 신사로 인정하지 않았거나, 프랑스군 자신이 신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요.  아무래도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투쌩의 언행이나 그의 작전 능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감시한 프랑스측 인사들이 기록한 체포된 투쌩의 말들을 보면 정말 투쌩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합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투쌩은 몸집이 왜소한 편이었으나, 그의 기지와 언변, 그리고 신비감을 동반한 카리스마에 대해서는 프랑스측 인사들도 모두들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잡혀온 투쌩을 맞이한 어느 프랑스 장교가 '하, 드디어 널 잡았구나, 투쌩 ?' 하고 놀리자)


"그래, 너희들이 내 머리를 잡았지.  하지만 내 꼬리는 못 잡았어."


(그를 프랑스로 호송한 사바리(Savary) 장군이 '이젠 검둥이 나폴레옹 역할을 못하게 생겼군, 안그런가 ?' 하고 놀리자)


"나를 제거하는 것은 생 도밍그 자유의 줄기를 자르는 것에 불과하다.  자유의 나무는 다시 자랄 것이다.  그 뿌리는 깊고 넓으니까."


(그의 14살짜리 아들이 사슬에 묶여 끌려온 투쌩을 보고 울며 그의 품에 안기자)


"내 아들은 울어서는 안된다.  내 아들이라면 불행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또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멋진 말들을 할 수 있으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겠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 자체에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프랑스로 잡혀간 투쌩은 쥐라(Jurat) 산맥의 포르 드 죽(Fort de Joux)의 차가운 감방에서 방치되어 있다가, 약 1년도 안되어 백인들의 속임수에 대한 분노와 울분 속에서 폐렴과 뇌졸증으로 인해 1803년 4월 7일 사망하고 맙니다.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나폴레옹에게 누군가가 '그 프랑스에게 배신을 당해 감방에서 죽은 투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나폴레옹은 그저 '불쌍한 검둥이 노예 하나가 죽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투쌩이 숨을 거둔 포르 드 죽 성채입니다.)



한편, 투쌩을 비겁한 수로 잡아들인 르클레르도 두발 쭉 뻗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투쌩을 잡아들인 것에 더해, 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흑인들로부터 무기를 수거해 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산속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들조차도 공공연한 반란에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생 도밍그에 노예 해방 선언을 했던 프랑스인 관료 손쏘낙스(Sonthonax)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투쌩을 도와 흑인 병사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면서 만약 백인들이 다시 이 무기들을 거두어들이려 한다면, 그건 너희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예언아닌 예언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르클레르는 이제 그의 부하가 된 크리스토프와 데살린 등 과거 투쌩의 흑인 부하 장군들을 동원하여 이런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흑인들끼리도 이해 관계와 질투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원수지간이 많았거든요.  이 와중에 블레어(Charles Belair)나 모레파(Jacques Maurepas), 폴 루베르튀르(Paul Louverture) 등 과거 투쌩의 부하 장교들이 많이 희생됩니다.  특히 난폭한 성격이었던 데살린은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과거의 동료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타는 이웃 섬이자 같은 프랑스 식민지인 과달루프(Guadeloupe)에서 날아옵니다.  과거 호엔린덴에서 영웅적인 전과를 보여주었던 리슈팡스(Antoine Richepanse)가 본국의 훈령에 따라 과달루프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 소식이 생 도밍그에 도착하자 생 도밍그는 거의 공공연한 반란에 빠져듭니다.  노예제의 부활이 곧 생 도밍그에서도 선언될 것이라는 것이 쉽게 예상되었고, 이는 생 도밍그의 흑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슈팡스는 호헨린덴에서의 활약이 빛을 잃을 정도로 무자비한 통치를 과달루프에서 펼쳤습니다.  천벌을 받았는지 그도 황열병에 걸려 죽었지요.  모두 22명의 프랑스 장군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모기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르클레르는 광적이다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흑인 토벌에 나섭니다.  전에도 언급되었습니다만, etouffoir(질식)라는 이름의 일종의 가스선을 만들어 유황 연기로 흑인들을 대량으로 질식사시킨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  이때 르클레르가 본국의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르클레르가 거의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제 내게 남은 수단이라고는 공포 밖에 없으니, 그걸 쓰겠습니다."


"산속의 흑인들은 남자건 여자건 12살 이하의 아이들을 빼고는 모두 죽여야 합니다.  평야 지대의 흑인들도 절반은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르클레르는 끝까지 노예제를 생 도밍그에 다시 선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럴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흑인들이 공연히 오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때가 무르익기 전에는 노예제를 다시 선포할 생각하지 마십시요... 정부의 선포에 따라 제 후계자가 노예제를 수립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제가 흑인들을 달래기 위해 전에 그토록 많은 약속과 선언을 했는데, 이제 와서 제가 과거 약속을 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이런 내용들도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데살린과 크리스토프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그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는지, 또 나폴레옹이 확실히 돈 문제에는 인색했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아직까지는 데살린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안 하고 있었으나, 이제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아직 형식적으로나마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흑인 병사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프에게는 그나마 좀더 믿음이 갑니다.  하지만 이들을 체포하려한다면 동시에 둘다 잡아야만 합니다."


"약속하신 1만2천의 증원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6,723명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곧장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젠 모조리 죽어버렸습니다.  내 위치는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손실은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한 달 전 도착한 증원군은 이미 모두 다 죽었습니다.  현재 바다를 건너오는 증원 병력 외에도 1만 명을 더 보내주십시요.  그리고 약속 어음 말고 현금으로 2백만 프랑도 함께 보내주십시요.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내면 제1통령께서는 답장을 안하시더군요.  제 입장이 되어 보십시요... 저는 이 섬을 떠날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입니다.  생 도밍그를 유지하려면 정예병력 7만 명을 현지에 유지해야 합니다."





(생 도밍그에서의 전투는 양측 모두 야만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는 잔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백인 군대의 군모가 꽤 특이하지요 ?  맞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폴란드군입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해방시켜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던 폴란드군에 대해, 나폴레옹은 조국의 해방 대신 보답으로 낭만적인 카리브해 여행권을 끊어주었습니다.  강대국에 의존하는 독립운동은 항상 끝이 좋지 않습니다.)



8월이 되어 전황이 나빠지자 르클레르는 현지에 와있던 폴린과 그의 아들 데르미드(Dermide Louis Napoleon)를 프랑스로 돌려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여기서는 조세핀처럼 군림한다, 여기서는 내가 1인자다'라며 일종의 왕비 생활을 즐기던 폴린은 '품위 유지비로 10만 프랑을 주기 전에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땡깡을 부려 그렇쟎아도 기진맥진한 르클레르의 복장을 터지게 했습니다.  10만 프랑이면 현재 가치로 약 12억 정도의 돈인데, 르클레르가 본국 노벨라라(Novellara) 인근에 가지고 있던 부동산 가격이 고작 16만 프랑이었므로, 르클레르에게는 그런 큰 돈이 있을리 없었습니다.  남편이 돈을 내놓지 못하자 폴린은 그냥 남기로 합니다.  문제는 폴린의 방종한 생활은 여기서도 이어져,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말단 병사 몇 명과도 대담한 정사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날 작전 회의 중 르클레르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게 됩니다.  이는 황열병의 시작을 알리는 증상이었지요.  폴린은 이때서야 아내 역할을 다하여 성심껏 르클레르를 간호했는데,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고, 11월 1일, 르클레르는 투쌩보다도 오히려 먼저 저승길을 떠납니다.  폴린과 그 아들은 르클레르의 화장한 유해와, 따로 떼어낸 그의 심장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메리카 쪽에 발을 담그게 된 로샹보 자작입니다.  르클레르와 함께 못된 짓을 아주 많이 저질렀습니다.)



르클레르의 후임은 로샹보 장군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흑인과 뮬래토들을 증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로샹보가 사령관이 되자 전부터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흑인 장군들인 데살린과 크리스토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백인 측에 붙었던 뮬래토 장군인 페티옹(Alexandre Petion)까지 반란군 측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타격은 바로 생 도밍그 원정을 가능하게 했던 아미앵 평화 조약의 붕괴였습니다.  즉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다시 프랑스의 항구들을 봉쇄한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실상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되었습니다.  결국 1803년 11월 베르티에르(Vertières) 전투에서 흑인 반란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한 로샹보는 결국 생 도밍그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라하게 돌아가던 로샹보는 그나마 도중에 타고 있던 프리깃 라 쉬르베이앙트(La Surveillante) 호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는 바람에, 전쟁 포로로 영국에 무려 9년간이나 잡혀 있다가 1811년, 포로 교환에 의해 겨우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최종적인 패배를 결정지은 1803년 베르티에르 전투의 모습입니다.)



이후 아이티(Haiti, Ayiti, 아메리카 타이노 족의 언어나 아프리카 언어로나 모두 집 또는 성스러운 대지를 뜻한다고 합니다)로 이름을 바꾸면서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생 도밍그의 그 후 이야기는 그다지 밝고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먼저, 정권을 잡은 데살린은 황제로 즉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생 도밍그에 아직 남아있던 백인 중 흑인과 결혼하기로 약속한 백인 여자만 빼고 모두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정상적인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온순한 주인 밑에서 그런대로 무난한 노예 생활을 했던 투쌩과는 달리, 포악한 주인 밑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데살린은 백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흑인들과 뮬래토들도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결국 그는 1806년 암살되고 말았지요.





(데살린의 동상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데살린의 암살은 (물론 황제인 자기 자신을 빼고는) 1인1표제의 만민 평등을 주창한 데살린의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뮬래토들 및 그와 결탁한 외국 세력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독재자는 그냥 독재자에요.)



그 뒤를 이은 것은 남북 분단의 시대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캅 프랑셰를 기반으로 한 앙리 크리스토프가 앙리 1세 (Henri I)로서, 황제가 아닌 왕으로 즉위했고, 남쪽에서는 포르토 프랭스를 기반으로 뮬래토 장군인 페티옹(Alexandre Petion)이 종신 통령으로 지배하는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이 두 분단국의 정치는 각기 특색이 있었는데, 크리스토프, 아니 앙리 1세는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과거 투쌩처럼 흑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물론 노예제는 아니고 임금제 노동이었지요.  반면에 페티옹은 싼 값에 토지를 국민들에게 매각하여 각자 마음대로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뮬래토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페시옹입니다.  그의 정치는 흑인보다는 뮬래토 엘리트들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이티 경제에 매우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화했던 그의 정치로 인해, 국민들은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치는 양국의 모습을 상당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북쪽의 앙리 1세의 국민들은 사탕수수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물질적으로는 꽤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 있었으나, 노예 생활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강제 노역으로 인해 불만이 컸습니다.  그에 비해 자유방임적인 경제 생활을 허락한 남부 공화국은 국민 대다수가 힘든 사탕수수 농사보다는 당장 먹을 곡식과 좀더 쉬운 커피 농사에 치중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는 매우 쪼들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자꾸 탈출하여 앙리 1세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병으로 신체 마비까지 온 앙리 1세는 1820년 자살을 택했고, 결국 아이티는 페티옹의 후계자인 부아예(Jean-Pierre Boyer)에 의해 다시 통일됩니다.  부아예는 내친 김에 스페인령 산토 도밍고까지 완전 정복하여, 드디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지요.  그러나 온화한 페티옹과는 달리 잔혹했던 독재자 부아예의 정치는 산토 도밍고(지금의 도미니카) 주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결국 다시 아이티와 도미니카는 분할을 맞게 됩니다.  지금도 도미니카 사람들은 아이티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페시옹의 뒤를 이은 부아예도 당연히 뮬래토 출신입니다.)



아이티의 미래를 크게 어둡게 한 것은 이런 정치적 불안정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력으로 독립한 아이티는 항상 전 주인인 프랑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프랑스에는 아이티의 토지와 농장 뿐만 아니라, 아이티 국민 전체가 노예로서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부자들이 있었고, 프랑스는 이런 부자들의 입김에 좌우되는 나라였으니까요.  부아예는 이 문제를 결국 돈으로 해결하기로 합니다.  즉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대신, 과거 주인들이 입은 경제적 피해를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1825년 7월 11일, 보이에르는 프랑스에게 1억5천만 프랑을 5년 안에 지불하겠다는 조약을 맺습니다.  이건 아이티의 낙후된 경제력을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결국 이 금액은 1838년에 가서 9천만 프랑으로 감축되었으나, 그래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으므로, 결국 아이티는 이 돈을 프랑스 은행에서 꿔서 프랑스 정부에 갚아야 했습니다.  즉, 아이티는 시작부터 그 미래를 프랑스에게 담보로 잡힌 상태였던 것이지요.  원리금 상환에 짖눌린 나라가 잘 돌아갈 리가 없었고, 지금도 아이티는 무척 빈곤한 나라로 남아있습니다.  아, 참고로 부아예는 1843년에 성난 빈민들에게 쫓겨나 결국 프랑스에 정착했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아이티는 빚에 허덕이는 나라입니다.  지금은 물론 프랑스 빚보다는 미국과 IMF에 진 빚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런 훗날 이야기말고도, 생 도밍그의 반란과 독립은 나폴레옹과 대서양을 둘러싼 나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생 도밍그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제국을 신대륙으로 뻗치려 했던 나폴레옹은, 돈을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병력과 돈을 잡아먹기만 하는 생 도밍그의 현실을 보고는 입맛이 싹 가셨습니다.  그는 예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손바닥만한 생 도밍그 하나를 재정복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저 넓은 루이지애나를 경영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게다가 말타나 이집트 등을 둘러싸고 영국과의 교섭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나폴레옹은 곧 영국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밖에 없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1803년 4월 30일, 미국과 루이지애나 매각 협정을 맺습니다.  가격은 현금 6천만 프랑에 그 동안 미국에 지고 있던 빚 1천8백만 프랑의 상계, 그러니까 총 7천8백만 프랑이었습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억3천3백만 달러, 그러니까 2650억원 정도입니다.  엄청난 헐값이었지요.  게다가 손바닥만한 생 도밍그의 독립을 인정해주고 받아낸 돈이 무려 9천만 프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부동산 장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투쌩과 생 도밍그 노예 반란이 없었다면, 어쩌면 북아메리카 지도는 매우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미국에서 발행된 루이지애나 매각 기념 우표입니다.  저기에 보이듯이 프랑스측에서는 마르부아가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투쌩이 시작한 아이티 독립 사건의 가장 중대한 의미는 바로 흑인에 의한 흑인의 구원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노예 반란 사건이나 탈출 사건 등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반란이 바로 이 아이티의 독립입니다.  특히 이 사건은 백인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불쌍한 흑인을 구원해준 것이 아니라, 흑인이 총칼을 들고 백인과 싸워 이겨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흔히 흑인 노예가 해방된 것은 영국의 인권 단체의 활동이나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에 의한 것이라고 역사에 씌여 있습니다.  반면 이렇게 흑인 스스로가 흑인을 구원한 사실은 구미 위주의 역사에서 매우 등한시되는 사건입니다.  흑인이 백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백인들 위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한 사실이고, 또 투쌩은 백인 사회에서는 무척 불편한 영웅인 셈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흑인인 이 시대에도,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흑인 이야기는 대부분이 백인이 흑인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투쌩과 생 도밍그의 반란이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투쌩의 흉상도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쿠바에 세워진 것입니다.  백인들에게 투쌩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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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14 12:56

생 도밍그의 혼란과 살육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아름답고 풍요로운 유럽 대륙으로 잠시 되돌아 오도록 하지요.  나폴레옹은 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기억들 하실려나 모르겠습닉다만, 1800년 12월의 호헨린덴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을 향한 암살 음모 등으로 무척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긴 했었지요.  아무튼 당시 아직도 프랑스와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나라는 영국이 유일했습니다.  그러던 1801년 2월, 영국에서 중요한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의 사임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은 1759년 생으로서 나폴레옹보다는 10살 많았습니다.  그는 1783년 2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수상이 되었고 재무부 장관도 겸임하면서 근대 세계 최초로 소득세를 도입하는 등, 많은 화제를 낳은 인물이었습니다.  가장 큰 화제거리는 불행히도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승전 소식을 듣고 쇼크사한 사건이었지요...)



원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나폴리 왕국보다는 영국과 러시아가 유럽 정치 외교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나라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몰타 섬을 둘러싸고 영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파벨 1세가 암살됨으로써 약간 맥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도 일단은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위협하는 유일한 외국 세력은 바로 영국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영국이 나폴레옹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대단한 상대였지요.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영국 침공은 도저히 불가능이라고 결론을 내렸었고, 그래서 이집트에서 돌아와 브뤼메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곧장 영국 외무 장관 그렌빌 경(William Grenville, 1st Baron Grenville)에게 화평 제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기지 못할 상대와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는 나폴레옹의 계산이었지요.  그러나 이 화평 제의는 제안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단번에 거절되었는데, 그렇게 거절한 사람이 바로 대불 강경파이자 영국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였습니다.  피트의 견해에 따르면, 저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는 영국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초강력 대륙 세력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좀 힘들더라도 초장에 밀어붙여 그 싹을 잘라버려야 했지요.  비록 그것이 영국 혼자만의 외롭고 힘든 싸움일지라 해도 말이지요.  결국 피트가 수상으로 있는 한 프랑스는 영국과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바다를 통한 통상 및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초록색 부분이 당시 프랑스가 넘겨 받은 루이지애나 땅덩어리입니다.  다만 당시 조약에서는 루이지애나라는 명칭만 씌여있었고 정확한 경계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서, 훗날 그 땅을 다시 넘겨받은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갈등의 소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1800년 10월의 산 일데폰소 조약 (Treaty of San Ildefonso)으로 더욱 안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주로 이탈리아의 부르봉 왕가의 운명을 두고 체결한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을 부르봉 왕가를 위한 영토로 양보받는 대신, 6척의 74문짜리 전함들과 함께, 저 멀리 북미 대륙의 루이지애나 지방을 프랑스에게 양보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왜 미국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양보하나요 ?  당시 루이지애나는 아직 미국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면 상상할 수 있듯이, 원래 루이 14세의 땅으로서, 프랑스가 식민지로 개척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서 영국에게 패배하여 북미 대륙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스페인에게 빼앗겼던 곳이었지요.  지금은 루이지애나 주가 멕시코 만에 붙은 작은 땅덩어리이지만, 당시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던 땅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는 물론, 오클라호마, 미주리, 캔자스, 아이오와, 네브라스카, 와이오밍, 몬태나 등등 사실상 지금의 미국 중앙부를 다 차지하는 엄청나게 넓은 땅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하던 당사자들도 이 땅이 대체 얼마나 넓은 땅인지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한 당시 스페인 국왕 샤를 4세, 스페인 식으로는 카를로스 4세입니다.  이 양반은 그 아들 페르난도와 함께 스페인을 말아먹은 대표적인 혼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뭔 소용이었겠습니까 ?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틀어막고 있으니 바다 건너 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시 나폴레옹의 정부를 압박하던 재정 파탄과 맞물려 더욱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게다가 한때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를 생산하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생 도밍그의 '사실상의 상실'도 못내 아까운 일이었지요.  이 모든 것이 다 빌어먹을 영국 해군 때문이었습니다.  





(피트의 사임을 풍자한 당시 만화입니다.  피트는 당시 전쟁과 중과세에 지친 국민들로부터 상당히 미움을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1801년 2월, 영국 수상 피트가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피트의 사임은 나폴레옹과는 전혀 무관한 영국 국내 정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피트는 아일랜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대부분이 카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인들에게 좀더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톨릭교도 해방령 (Catholic Emancipation)'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왕 조지 3세는 자신이 즉위할 때 맹세한 내용, 즉 영국 국교회를 수호하겠다는 맹세에 어긋난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것이 피트의 사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가톨릭교도 해방령은 1829년에 가서야 웰링턴 공작에 의해 통과됩니다.)  그리고 새 수상으로는 피트의 친구였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대불 온건파였던 헨리 애딩턴이 취임했습니다.  사실 애딩턴 자신은 국왕과 피트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또 수상 직위를 거절했지만, 피트의 추천에 의해 거의 억지로 수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애딩턴 수상의 위엄서린 모습입니다.  그의 취임은 피트와의 우정이 깃든 멋진 것이었으나, 그의 퇴임은 피트와의 갈등에 의한 보기 흉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애딩턴은 거의 취임과 동시에 나폴레옹에게 평화 회담을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을 보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사실 전쟁은 프랑스에게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오스트리아같은 굵직한 시장을 잃어버린 영국 경제도 휘청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요.  결정적으로 전쟁, 특히 해군은 돈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금태환을 거부할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게다가 하늘도 무심한지 2년 연속으로 흉작이 들어 식량난까지 가중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쟁 비용을 대느라 소득세(income tax)라는 당시로서는 듣도보도 못하던 새로운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던 영국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120% 활용했습니다.  '아하 이것들이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급했구나' 싶었던 나폴레옹은 평화 조약을 체결할 듯 말 듯 영국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밀땅 놀이를 즐겼고, 결국 1801년 9월 30일, 예비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양국 국민들의 환호와 축하 속에 공식적으로 공표합니다.  이것이 정식 조약으로 체결된 것이 바로 1802년 3월 25일의 아미엥 조약(Treaty of Amiens)입니다. 





(아미엥 조약을 풍자한 당시 영국 만화입니다.  제목은 the meeting of Britannia & Citizen Francois 입니다.  영국이 여자에요.)



이 아미엥 조약은 해외 진출을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아메리카로 프랑스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고, 그러자면 먼저 그 기지로서 생 도밍그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무엇보다도 생 도밍그는 다시 잘 가꾸면 황금알을 낳아주는 캐쉬 카우 (cash cow)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생 도밍그를 장악하고 있는 투쌩 그 뭐라드라 하는 검둥이 노예를 손봐줄 필요가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이제 영국 해군의 봉쇄가 풀린 대서양으로 생 도밍그 원정대를 내보냅니다.  그 원정대의 규모는 약 2만명의 수병을 제외하고도 지상군만 대략 2만명으로서, 약 3만 5천의 병력을 동원했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보다는 약간 작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인구 6백만에 면적도 광대한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3만 5천이 필요했으니, 손바닥만한 면적에 총 인구도 40만명을 조금 넘는 생 도밍그를 정복하는데 2만명을 동원했다면 굉장히 많은 병력을 투입한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실어나르는 함대의 규모도 굉장했습니다.  1801년 12월 14일에 최초로 출발한 선발대는 35척의 전열함에 21척의 프리깃이 포함되었고, 여기에 약 8천의 지상군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맙소사, 35척의 전열함이라니 !  트라팔가 해전에 동원된 영국 함대의 전열함이 겨우 33척이었는데요 !  거기에다 다음해 2월까지 몇차례 함대가 추가로 파견되어 더 많은 병력을  생 도밍그로 실어날랐지요.  다만 이 원정대는 철저하게 2진급 부대로만 꾸며졌습니다.  일부 프랑스 사단에 덧붙여 투쌩에게 쫓겨난 뮬래토 장군인 리고 (André Rigaud)를 주축으로 한 뮬래토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네덜란드 사단과 폴란드 사단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총지휘관에는 나폴레옹의 매제, 즉 폴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의 남편인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가 임명되었지요. 





(르클레르 장군의 초상화입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어렸던 그는 꽤 미남이었고, 그래서 폴린과의 결혼전 스캔달이 났던 것 같습니다.)



이 르클레르라는 장군에 대해서는 사실 그 이전에 별로 언급된 바가 없었지요.  그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을 최초로 만났습니다만, 그 이후에는 라인 방면군에서 주로 복무했고 1797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폴레옹 밑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카스틸오네 전투와 리볼리 전투에 참전했고, 이때 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항복 조약이었던 레오벤(Leoben) 조약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이후, 나폴레옹의 제안에 따라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과 결혼했지요.  이후 그는 모로 밑에서 라인 방면군에서 복무하면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그 이후에는 역시 모로 밑에서 그 유명한 호헨린덴 전투에 참전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름 괜찮은 군 경력을 쌓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생 도밍그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뽑힌 것은 확실히 나폴레옹의 매제라는 사적인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아, 저 X두가 보이는 의상은... 폴린의 과감함을 엿보게 합니다.  폴린의 자유분방함에 대해서는 정말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도 있지요.  그녀가 어느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모델이 되어 주었는데, 문제는 나체 모델이었다는 것이었고, 더 나쁜 것은 나폴레옹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노발대발하자, 폴린은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스튜디오가 아주 따뜻하던 걸요." )



폴린과 르클레르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 둘이 소파에서 '붙어먹는' 장면을 나폴레옹이 목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이 결혼을 시켰다는 설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폴린이 나폴레옹의 여동생들 중에서는 가장 미모가 뛰어나서, 성적으로 꽤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은 맞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폴린은 마르세이유의 지사였던 스타니슬라스 (Louis-Marie Stanislas Fréron)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원래 이 스타니슬라스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과 연을 맺은 사람으로서, 나폴레옹은 원래 이 남자에게 여동생 폴린을 소개시켜주었고 결혼도 시키려 하였으나, 어머니 레티지아가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된 바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797년에도 마음이 스타니슬라스에게 있었으나, 오빠의 강권에 따라 르클레르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폴린은 결혼 이후에도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생 도밍그로 원정대 총사령관직을 맡게 된 것은 르클레르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승진이기도 했습니다만, 반대로 큰 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생 도밍그는 황열병의 본고장이었으니까요.  어찌 되었건 르클레르는 폴린과 어린 아들도 이 원정대에 함께 데려갑니다.  폴린 본인도 남편이 생 도밍그의 주지사가 되어 자신과 함께 떠나는 것에 대해 나름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르클레르와 폴린을 태우고 1801년 12월 중순 출항한 프랑스 함대는 약 6주 후인 1802년 1월말, 드디어 생 도밍그 인근 해역에 집결합니다.   과연 유럽 대륙을 제패한 프랑스 정예병들과 생 도밍그의 태양 아래서 단련된 노예 출신의 검은 병사들의 충돌 결과는 어땠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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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10.04 18:35

막도날의 제5 군단에는 원래 완편과는 거리가 먼 허약한 보병 2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라마르크(Jean Maximilien Lamarque) 장군이, 다른 하나는 브루지에(Jean-Baptiste Broussier) 장군이 지휘했지요.  거기에 나폴레옹이 붙여준 제6 군단 소속 모로 장군이 지휘하는 스라 장군의 사단까지 붙여서 총 1만1천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특히 모로 장군의 사단은 방금 지휘권을 받은 것이다보니 아무래도 모로와 그의 사단에 대해서는 믿음이 덜 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로 장군과 긴밀하게 작전 회의를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막도날에게는 정답이 적혀있는 문제 풀이집도 없었습니다만, 특히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명령을 받은 그가 어떤 대형을 짜느냐에 따라 적진을 시원하게 돌파하여 등 뒤에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을 나폴레옹의 입이 귓가에 걸리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만, 반대로 자신을 포함한 전군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막도날은 여태껏 그 누구도 해보지 않은 진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적군은 물론 아군까지도 눈을 휘둥그레 커지게 만든 혼종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생-스베에 있는 라마르크 장군의 동상입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 복귀 이후에도 앙시앵-레짐을 반대하고 인권 보호, 심지어 폴란드 독립 운동 지원에도 찬성하는 등 정말 진보적인 인물이어서 민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1832년 6월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어디서 들어본 소리 같다고요 ?  예, 맞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이름만 등장하는 라마르크 장군이 바로 이 분입니다.)




막도날은 라마르크와 브루지에의 사단을 좌우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앞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먼저, 각 사단마다 4개씩의 대대를 2줄로 늘어세워 총 8개 대대로 이루어진 긴 전면 횡대를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잔여 대대들의 진형이 아주 걸작이었는데, 이 대대들은 이 긴 전면 횡대의 양쪽 끝부분 뒤로 긴 종대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즉, 거대한 ㄷ자 모양을 만들어 진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나마 왼쪽을 맡은 라마르크의 사단에 병력이 더 많았으므로 왼쪽 측면에는 8개 대대가 늘어섰고, 오른쪽 측면에는 불과 4개 대대만 있어서, 좌우 대칭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전쟁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진형인 '막도날의 기둥'(la colonne de Macdonald)입니다.  


막도날은 그렇게 밑변이 열린 사각형의 뒤를 왈더(Frédéric Henri Walther)가 지휘하는 근위 기병총(carabiniers-à-cheval) 연대에게 맡겼습니다.  이 중기병 연대는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으면 그 속으로 파고 들어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뒤를 쫓으며 무자비한 칼탕을 먹여줄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모로의 보병 사단은 돌파가 제대로 안 될 경우 예비대로 쓰기 위해 이 ㄷ자 진형에 포함시키지 않고 따로 집단을 이룬채 뒤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Column은 기둥이라기보다는 종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막도날의 기둥이라기보다는 막도날의 방진(Macdonald's square)라고 부르는 것이 제대로 된 묘사일 것입니다.)




막도날이 이런 희한한 진형을 만든 목적은 간단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포병과 기병의 위협으로부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가장 빨리 거친 전장을 가로질러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바로 이런 ㄷ자 진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면이 약 550m, 측면이 약 800m로 길쭉한 이 장방형 진형은 횡대의 장점과 종대의 장점을 가장 잘 결합한 물건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단점이라면 그 크기가 몹시 커서 적의 포병에게 빗맛추기도 어려운 타겟을 제공한다는 점이었습니다만, 어차피 속이 텅 비어있었으므로 한방의 포탄에 여러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또 측면을 노리는 적의 기병들의 돌격에 대해서도 촘촘한 방어망으로 맞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장점은 그냥 좌우로 긴 횡대보다 훨씬 더 탄탄한 진형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더 빨리 진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지요.  이건 적의 기병에 맞서기 위한 보병 방진의 모바일 버전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진과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굳이 방진의 밑변에 보병 전열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공격을 위한 대오였으므로 후면에도 긴 보병 전열을 배치하는 것은 낭비였고, 또 후면을 노리는 적의 기병은 그 뒤를 따르는 아군 기병대가 요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자는 막도날이 이런 변종 방진, 횡대와 종대의 끔찍한 혼종으로 전진한 것이 과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때와는 달리 질적으로 저하된 프랑스 보병들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해 전장에서 복잡한 전열 기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꼼수였다고 평가절하합니다만, '1809: Thunder on the Danube -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라는 책을 쓴 Jack Gill이라는 National Defense University 교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판에 박힌 전술만을 고집하지 않고 당면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전술을 채택할 수 있고 또 그런 임기응변을 유연하게 수행해낼 수 있었던 막도날과 그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막도날이 지휘하던 이탈리아 방면군 병사들이 과거 아우스테를리츠의 프라첸 언덕을 기어오르던 병사들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막도날이 목표했던 것은 대부분 이루어냈습니다.  그런 사실은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곧 드러났습니다.


이 거대한 방진이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과 1군단 사이의 연결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이 방진의 측면을 노렸습니다.  대포알에는 아무도 견딜 수 없습니다.  막도날의 방진은 곧 이빠진 참빗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병사 1~2명이 대포알에 직격되어 나가 떨어지면서 생긴 그런 구멍은 곧 뒤따르던 병사들이 걸음을 빨리 하여 곧 메워졌습니다.  시퍼런 검을 뽑아들고 측면으로 달려들던 오스트리아 기병들도 기세만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침착하게 기다리다 확실한 유효사거리 내로 들어오자마자 일제 사격을 퍼붓는 막도날의 병사들은 기병들이 파고들 빈틈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척척 걸어들어가는 막도날의 방진은 분명히 납으로 만든 머스켓볼과 무쇠로 만든 대포알이 회오리치는 무시무시한 화약 연기 속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고원이라는 결정적인 지리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막도날이 희한한 ㄷ자로 병력을 배치하며 진격할 준비를 하는 것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포에 포탄을 쟁여두고 기다렸습니다.  특히 전체 전선에서 오직 막도날의 부대만 망치 역할을 하기 위해 다른 프랑스군 전선 앞으로 유별나게 튀어나오는 것이니, 그쪽으로 오스트리아군의 화력이 집중되었습니다.  막도날의 병사들은 끝까지 침착하게 진격했지만 그들이 큰 피해를 피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특히 막도날 부대의 임무를 눈치챈 콜로브라트 장군이 자신의 좌익 전선을 살짝 뒤로 빼서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제1군단 사이에 텅 빈 공간을 일부러 만들어주면서 막도날드 군단의 피해가 더욱 커졌습니다.  그 빈 공간으로 밀고들어가자마자 양 측면을 에워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불벼락같은 십자 사격이 날아와 좁은 공간에 갇힌 막도날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제84 연대의 라코르드(Larcorde) 중위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에는 "우리가 줄지어 선 곳, 특히 방진을 구성한 곳에서는 우리 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씌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도날의 병사들은 버텨냈습니다.  동료들이 포탄과 탄환에 쓰러질 때마다 남은 병사들이 그 빈자리를 서둘러 메웠고, 기진맥진한 이 방진을 깨뜨리려는 오스트리아 기병들의 돌격을 침착한 일제 사격으로 좌절시켰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제 적과 머스켓 사격을 주고받을 거리까지 왔으니 막도날의 변형 방진의 임무는 끝난 것인데, 오스트리아군도 끝까지 돌파되지 않고 버텼습니다.  오히려 막도날의 방진은 3면이 포위된 상태로 그야말로 불과 납의 세례를 받고 있었지요.  이런 와중에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에게도 혼란과 빈틈이 생겼습니다.  가령 이렇게 3면이 포위되기 직전, 막도날의 눈에는 우측 오스트리아 제1 군단 전열에 25~30문의 대포가 버려진 채 방치된 것이 보였고, 왼쪽 제3 군단 쪽도 엉망진창의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막도날의 방진이 끔찍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전진했던 것이었고, 이제 기병대들이 그 벌어진 틈으로 칼을 꼬나쥐고 달려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끼가 적진을 쪼개다가... 박힌 채로 그만 멈춰버린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군의 기병들은 희한할 정도로 굼뜨고 소극적이었습니다.  막도날이 만들어놓은 오스트리아 전열의 빈틈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순간적인 것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프랑스 기병대는 돌격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기회를 날려먹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급작스럽게 결정된 공격의 본질적인 문제였습니다.  막도날의 진격이 시작될 때, 그 후방을 따라오는 기병대는 왈더 장군이 이끄는 기병총 연대 일부 뿐이었고, 낭수티 장군 휘하 기병 예비대 및 기타 타 군단 소속의 기병대들은 ;막도날이 공격을 시작하니 그 뒤를 지원하라'는 긴급 명령서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묘한 ㄷ자 전열이 서서히 진격을 시작하고 그 뒤로 여기저기 사방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뒤늦게 모여드는 모습은 아마 루스바흐 언덕 위의 오스트리아군 눈에 꽤 장관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급하게 띄엄띄엄 모여든 기병대들은 빽빽히 늘어서서 멱살을 쥐고 뒹굴고 있는 막도날과 오스트리아군의 전투 현장에 선뜻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렇게 모여든 여러 기병대의 주도권을 쥐고 본보기를 보이는 역할은 근위 기병총 연대를 이끌고 처음부터 뒤를 따랐던 왈더 장군이 맡아야 했습니다.  막도날도 나중에 왈더 장군을 콕 찍어 '왜 돌격하지 않았느냐'라며 비난했으나, 왈더는 막도날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면서도 '제가 공격하려면 반드시 베시에르 원수의 명령이 있거나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을 받아야 합니다'라며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시 베시에르는 기절한 상태로 실려나간 뒤였지요.  애초에 그런 제약 조건이 있다면 왜 막도날의 방진 뒤를 졸졸 따라왔단 말입니까 ?  




(이름만 보면 발터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이 분은 역시 알자스 출신입니다만, 그래도 프랑스 분이기 때문에 왈더라고 읽어야 합니다.  이 분은 계속 나폴레옹 근위대에 계시다가, 1813년 무너져 내리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합니다.) 




결국 막도날과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이 장관은 뜻하는 목표, 즉 오스트리아 전열 돌파 후 추격 섬멸에는 실패한 채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비난은 기병대에 떨어졌습니다.  사바리(Savary) 장군은 '그토록 막강한 기병대는 단 하나의 포로도 잡지 못했다'라고 한탄했고, 나폴레옹 본인도 오후 2시경 망원경으로 이 상황을 보면서 '기병대가 나를 이렇게 실망시킨 적이 없었는데 ! 저것들 때문에 오늘 아무 전과가 없을 지경인 걸 !'이라고 격분했습니다.  


물론 이건 과장이자, 모든 잘못을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나폴레옹의 못된 버릇일 뿐이었습니다.  정작 나폴레옹 본인도 신참 근위대를 지휘하는 라이유(Honoré Charles Reille) 장군에게 막도날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이제 남은 것이 고참 근위대 2개 연대 뿐이니 너무 위험을 무릅쓰지는 말게'라며 소극적인 지시를 내린 바 있었습니다.  사실 다부의 우측 공격으로 인해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었으니, 어쩌면 막도날의 방진은 많은 포로를 잡겠다는 나폴레옹의 과욕에서 나온 쓸데없는 희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나기 전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요.  아직 오스트리아 측에는 판세를 뒤집을 비장의 카드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카드로 인해 불과 2~3시간 뒤에 나폴레옹의 참모진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Fr%C3%A9d%C3%A9ric_Henri_Walther

https://en.wikipedia.org/wiki/Jean_Maximilien_Lamar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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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01 03:34

나폴레옹은 전투 내내 전장 한가운데 위치인 라스도르프(Raasdorf)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높은 곳인 루스바흐 고원 위에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의 전황을 양군의 전열이 뿜어내는 머스켓 소총의 화약 연기를 보며 파악하고 있었지요.  그 연기의 긴 횡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높은 석탑을 통과하는 보고, 그는 이제 승리의 때가 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다부를 돕기 위해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명했습니다.  마세나는 남쪽 에슬링에서 클레나우를, 우디노는 고원 위의 호헨촐레른을 공격하면 되었지요.  그리고 막도날에게는 특별히 따로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바그람 전투 현장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나폴레옹입니다.  무전기가 없던 당시 전투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권이 매우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장군들이 적탄이 빗발치는 곳까지 직접 나가 현장을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래 막도날은 전날 밤에 공격했던 바그람을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바그람 마을에 대한 공격은 외젠이 그르니에(Paul Grenier) 장군의 제6 군단을 이끌고 공격하도록 하고, 막도날에게는 새로운 임무를 주었습니다.  아더클라(Aderklaa)와 브라이텐리(Breitenlee) 사이 공간, 즉 서쪽 방향으로의 진격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무단 이탈에 이어, 마세나를 아스페른 쪽으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텅 비게 된 이 공간을, 나폴레옹은 일단 대포병단을 동원하여 무지막지한 화력으로 틀어막아 놓은 바 있었지요.  그러나 포병만으로 적진에 돌격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포병 화력전으로 대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에도 쐐기를 박아넣을 묵직한 한방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막도날을 투입하기로 한 것입니다.  막도날에게 이 임무가 맡겨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마세나가 에슬링 쪽으로 이동하고나자, 아더클라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군단이 바로 막도날의 제5 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날 밤에 막도날이 공격했던 바그람을 지키던 부대가 바로 지금 아더클라를 점거한 벨가르드 장군의  제1 군단의 일부였으니, 어제 못 끝낸 승부를 마저 끝내는 주인공이 막도날인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르니에 장군입니다.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도 프랑스 대혁명이었지요.  그는 막도날보다 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결국 원수 계급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만나기 전에 모로의 휘하에서 주로 싸웠고 호헨린덴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나폴레옹파로 분류되지 못했던 것이 원수로 진급을 못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전날 밤에는 거기 없던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이 브라이텐리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도날이 지휘하는 제5 군단은 바그람 전투가 시작될 때 고작 7천의 병력을 가진 사실상 사단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워낙 빈약했기 때문에 전날 밤 바그람을 공격할 때도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으로부터 뒤파의 사단을 빌려 병력을 충원한 다음에야 공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뒤파 사단도 원대 복귀한 마당에 막도날의 병력만으로 2개 군단이 포진한 적 진형 한 가운데로 뛰어들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요.  그걸 이해했던 나폴레옹은 같은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 그르니에 장군의 제6 군단 휘하 2개 사단 중 스라(Seras) 사단을 떼어 막도날에게 임시로 붙여주었습니다.  그나마 스라 장군 자신은 부상 중이어서 모로(Moreau) 장군이 대신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봐야 막도날이 지휘할 병력은 보병 1만1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막도날에게 진격을 명한 것은 승산이 있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공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단, 이 공격은 적의 집단군 정면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기보다는 벨가르드와 콜로브라트의 2개 오스트리아 군단의 이음새를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포병단과 다부의 활약으로 적 진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 약한 이음새를 공략하면 오스트리아군 전선에 구명을 뚫을 수 있고,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프랑스 기병대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실제로, 비록 막도날의 지휘권 밑에 직접 붙여주지는 않았으나, 나폴레옹이 아끼고 아끼던 황실 근위대의 기병총(carabiniers-à-cheval) 연대 약 3800기를 딸려보냈습니다.  이 기병총 연대는 흉갑기병보다 더 덩치 큰 병사들을 더 키 큰 말에 골라태운, 최정예 기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번 전투의 승부는 다부의 라이트 훅으로 결판짓되, 적의 숨통을 끊는 타격, 즉 패퇴하는 적군을 추격 섬멸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끝장을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막도날의 병력 뒤를 따르던 부대가 기마 척탄병 연대라고 되어 있고, 어떤 기록에는 기병총 부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마 척탄병이라면 곰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을 것이고 기병총 부대라면 흉갑 기병과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기병총 부대원의 모습인데, 사실 기병총을 주무기로 삼는 부대는 아니었습니다.  하긴, 척탄병도 수류탄을 휴대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기병총 연대가 지리멸렬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등 뒤에 칼을 내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오스트리아군이 뒤돌아 도망치게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에 큰 구멍을 뚫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대하고 어려운 임무는 바로 막도날의 어깨 위에 떨어진 것이었고요.  막도날은 무척 흥분되고도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모로와의 관계 때문에 지난 5년간 좌천당해 실의의 나날을 보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중대한 임무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입신양명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 성공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훨씬 더 우세한 적을 향해 먼 거리를 진격해야 했는데, 그렇게 진격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막도날의 공격부대를 두들겨 팰 것이 뻔했습니다.  막도날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부족한 병력이 적과 총검을 맞댈 때까지 어떻게 하면 적군의 대포와 총격으로부터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느냐였습니다.  이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였고, 막도날에게는 기술적인 선택지가 여러개 있었는데, 정답이 무엇인지는 당시 아무도 몰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진을 향해 공격할 때는 적절한 두께, 즉 3열 또는 4열의 긴 횡대(line)를 이루어 공격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정면으로부터 날아오는 적의 무자비한 대포알로부터 입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또 반대로 한꺼번에 적에게 최대한의 머스켓 화력을 쏟아부어 반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공격과 방어 모두에 있어 가장 뛰어난 대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형으로 먼거리를 진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개의 전장은 넓직한 평원에서 벌어졌지만, 그런 평원도 크고작은 나무와 바위, 도랑과 관목 등의 크고 작은 장애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 장애물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제각각 걷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긴 직선 횡대로 출발한다고 해도 걷다보면 결국 일부는 앞으로 튀어나오고 일부는 뒤로 쳐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먼거리를 그렇게 횡대로 진격하면 적 앞에 도착할 때 긴 횡대는 토막토막 끊긴 흐트러진 모습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는 밀집된 형태로 기다리는 적군에게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지요.  뛰어난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 긴 횡대가 직선을 유지하며 진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전체 횡대의 진격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건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적의 일방적인 사격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횡대의 이런 단점을 매우 잘 극복할 수 있는 대형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종대(column)였습니다.  대략 5~6열의 종대로 진격하면 거친 지형에도 불구하고 부대 전체가 한덩어리를 유지하면서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대신 횡대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깡그리 날려먹는 것이 바로 이 종대였습니다.  적의 대포알 단 한 발에도 수십명의 허리와 발목이 부러질 수 밖에 없었고, 어렵게 적의 코 앞에 당도한다고 해도 그 상태로는 적에게 사격할 수 있는 인원은 맨 앞줄의 2열 10~12명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야 빠른 속도로 이동함으로써 얻는 잇점을 다 날려 먹는 셈이었지요.  가장 좋은 것은 가변 대형이었습니다.  즉, 먼거리를 이동할 때는 종대로 이동하다가 머스켓 유효사거리에 근접해서는 대형을 횡대로 변경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게 말은 쉬워도 적의 대포알과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화약연기가 자욱한 상태에서 대오를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까딱하다간 적의 코 앞에서 우왕좌왕하다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방식을 택해도 잇점과 단점이 명백한 상황에서, 과연 막도날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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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9.17 01:42

양측의 모든 장군들이 다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만, 프랑스군의 맨 오른쪽을 담당한 다부(Louis-Nicolas Davout)도 새벽부터 바빴습니다.  사실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스타트를 끊은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이 다부의 프랑스군 제 3군단을 습격한 사건이었지요.  이 공격은 이미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해놓았던 다부에 의해 즉각 격퇴되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현장에 달려오는 등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중앙을 버려두고 맨 동쪽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요 ?  당시 39세로서 프랑스군 원수 중에서는 가장 어렸던 다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요 ?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그 능력에 있어서나 충성심에 있어서나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새벽의 그 소동이,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멀리서 당도한 것인지 걱정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이 루스바흐(Russbach) 고원의 지형적 우위를 버리고 평원으로 내려와 감히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지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이번 전투의 승패는 바로 다부의 제3 군단의 활약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은 완만한 반원형으로 굽은, 동서로 길게 뻗은 고지의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진형 때문에 프랑스군이 평야 저지대로부터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역이용하려 한 것이 바그람 전투의 핵심이었습니다.  평야에 배치된 프랑스 군단들이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망치 역할을 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측면에서 납작하게 때리는 역할을 할 것이 다부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부가 먼저 로젠베르크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이 포진한 루스바흐 고원의 동쪽 끝에 올라선 다음, 거기서부터 김밥 말듯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려야 했거든요.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면 두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저 멀리 프레스부르크에서 오고 있다는 요한 대공의 군대가 제때 나타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쪽에 배치해둔 정찰 병력이, 요한 대공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거든요.  둘째 조건은 다부의 측면 공격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측면을 찔러, 분산된 적군을 조금씩 분쇄하며 전진하는 것이 승리의 요소였는데, 만약 적군이 나폴레옹의 작전을 눈치채고 동쪽 고지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한다면 아무리 다부라고 해도 쉬운 승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벌어진 로젠베르크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기습의 요소가 망가져버리자, 나폴레옹은 전체 작전이 흔들릴까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물러가 또아리를 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 뒤, 기습이라는 잇점이 사라진 것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다부에게 하달했습니다.  즉, 공세를 두갈래로 나누어,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정면과 함께 측면으로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둘러본 그 일대 지형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바라보고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남서쪽면은 꽤 급한 경사면으로 되어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쪽 측면은 매우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어 진격이 꽤 수월해보였던 것입니다.  다만, 그 동쪽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력을 루스바흐(Russbach) 개천 너머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대포를 개천 너머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임시 가교를 놓는 등 꽤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습의 요건이 사라진 이상,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나폴레옹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항공 사진에 당시 다부의 공격 방향을 표시한 것입니다.  루스바흐 개천의 모습은 아마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공격 개시 시간이 2~3시간 늦어지더라도, 어차피 처음부터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프랑스 군단들 중 그야말로 최강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프랑스군의 각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포병 연대와 기병 연대까지 합해서 약 2~3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편제였고, 실제로는 전투에 나설 때 2만을 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1만7천 정도의 병력만 갖추고 있었고, 달마시아(Dalmatia) 방면군으로 형성된 마르몽(Marmont)의 제11 군단은 1만에 불과했습니다.  주요 지휘관이 거느린 군단은 규모가 좀더 컸습니다.  나폴레옹이 새벽부터 아스페른부터 아더클라까지의 약 8km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며 조자룡 헌창 쓰듯 부려먹은 마세나의 제4 군단도 2만8천의 병력에 86문의 대포를 갖춘 강력한 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다부의 손에 쥐어준 제3 군단은 무려 3만8천의 병력에 120문의 대포를 가진 진짜 전쟁 기계였습니다.  그에 비해 로젠베르크가 거느린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은 1만9천의 병력에 60문의 대포 뿐이었고, 전날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 장군의 전위대 잔존 세력 6천을 합해도 다부의 제3 군단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화력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나폴레옹은 새벽에 달려온 지원 병력 중 원래 기병 예비군단 소속이던 아리기(Jean-Toussaint Arrighi de Casanova) 장군의 흉갑기병 사단 약 2천을 다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애초에 로젠베르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리기 장군은 나폴레옹과 같은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조카사위 뻘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초기부터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이 전투 뒤에 '다부가 자신의 흉갑기병 부대를 터무니없는 지형 속에 쳐넣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쪼르르 나폴레옹에게 쫓아가 일러바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부가 아리기의 부대를 부적절한 지형에 투입한 것은 맞는 말이긴 했습니다.)




다부의 공격은 오전 10시 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부는 나폴레옹이 명령한 대로 병력과 대포를 반으로 나눠 정면, 즉 그로스호펜(Grosshofen) 쪽으로부터는 구댕(Gudin)과 퓌토(Puthod) 사단을 진격시켰고, 동쪽 측면으로부터는 미리 동쪽에서 루스바흐 개천을 건너 위치를 잡은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나폴레옹 머리 속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프리앙과 모랑의 사단들이 측면을 우회하느라 이동하는 모습을 로젠베르크는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확실히 고지를 점거한 측이 전투 현장에서의 정보 파악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에는 랜드마크 격인 꽤 높은 탑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모두 훤히 보였습니다.  당연히 정면으로 도전해온 구댕과 퓌토은 물론, 측면으로 들어온 프리앙과 모랑 모두가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지금도 서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입니다.  교회는 아니고... 무슨 목적의 탑인지 못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사기만 충천할 뿐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포병대와 기병대의 전력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새벽에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의 선제 공격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숙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훨씬 많았던 프랑스군의 포병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이미 많은 수의 대포를 파괴당한 상태였습니다.  압도적인 프랑스 포병대가 우박처럼 쏘아대는 포탄과 폭발탄에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은 곧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전진해오는 프랑스군 보병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위협을 가했으나, 이들도 훨씬 더 우세한 프랑스군 기병대에 곧 제압되었습니다.  특히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패전 이후 많은 군마를 나폴레옹에게 몰수당한 뒤 기병 양성에 애로사항이 많았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집단 기동에 무척이나 미숙했습니다.  로젠베르크에게 배속된 오스트리아 기병대도 숫자는 적지 않았습니다.  긴 횡대 진형의 끝 부분을 맡고 있는 로젠베르크 군단의 중요성과 취약성을 잘 알고 있던 카알 대공이 무려 5200명의 기병대를 배치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부가 거느린 약 8000의 기병대와 겨루어 볼만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중대(squad) 단위의 전술 정도만 익혔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랑스군 기병대처럼 연대 단위가 한덩어리로 돌격과 선회를 자유자재로 하는 적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의미없는 소규모 돌격을 거듭하다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보이는 곳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쓰러지는 바람에 함께 쓰러진 다부의 모습입니다.  이건 봉변이 아니라 상당한 명예였습니다.  당시 장군들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용담으로 '내가 탔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진짜든 거짓말이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정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다부 휘하에서 이 공격에 참여했던 제7 경보병 연대의 한 병사는 적의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자신도 전에는 한 전투에서 그렇게 많은 총탄을 쏘아댄 적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머스켓 소총이 너무 뜨거워져서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불타는 마을에서, 구댕+퓌토와 프리앙+모랑의 4개 사단이 양측에서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십자 사격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을은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무너지려는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전위대 사령관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참호 속에 빠졌는데, 황급히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고위급 장군마저 내버려둔 채 퇴각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프랑스군에 의해 발견된 노르드만은 그 날 49세의 한많은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아르만 폰 노르드만입니다.  그는 원래 프랑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알자스 출신으로서 독일어가 모국어였지요.  그는 프랑스군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 혁명 뒤에도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뒤무리에 장군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무리에가 망명한 이후 결국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거기서 프랑스군과 계속 싸웠습니다.  나폴레옹은 노르드만을 말할 때마다 '그 알자스 배신자'라고 부르며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은 비록 철저하게 밀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는 약간 서쪽으로 물러난 뒤, 다부가 더 이상 김밥말이를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 앞에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마침 그때 카알 대공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 예비대를 이끌고 황급히 달려와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미 고원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다부의 제3 군단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을의 돌담 뒤에서도 버티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이, 허허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일렬로 늘어선다고 버틸 수 있을리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몸으로 쌓은 방어벽은 프랑스군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후 1시 경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북서쪽으로 패퇴하고 그 자리를 다부의 군단이 차지하자, 상황은 나폴레옹이 바라던 모습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의 군단의 측면이 다부의 포병대에게 그대로 노출된 것입니다.  이제 오스트리아군에게 남은 것은 나폴레옹의 구상대로 돌돌 말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라데츠키(Radetzky) 장군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이미 "젠장, 이 전투는 졌구만"이라고 한탄한 바 있었습니다.  클레나우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이 프랑스군의 후방 아스페른과 에슬링를 공격할 때, 나폴레옹 주변의 젊은 참모 장교들은 후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성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나폴레옹에게 '배후를 습격당했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후방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를 보냈으니까요.  그는 계속 망원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부의 보병들과 포병들이 뿜어내는 불꽃과 연기가 마침내 탑을 지나쳐 진격하는 순간, 나폴레옹도 라데츠키처럼 "이 전투는 이긴 것이다"라고 주변의 참모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참모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려 마세나에게 공격을 계속 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다른 원수들에게도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특히, 막도날에게 아더클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막도날에게 드디어 화려한 무대 조명이 비추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막도날은 이 기회를 잘 살려냈을까요 ?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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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9.04 12:46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리였는데, 문제는 그 길이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대가 목숨을 던져가며 벌어들인 시간을 쓰는 것이니 만큼, 신속한 행군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속하게 행군을 하려면 보병 방진을 짜고 행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느슨하고 긴 종대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 행군 길의 오른쪽 측면, 즉 서쪽 측면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득실거렸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히도 콜로브라트가 지휘하는 이 오스트리아군은 무척 소극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그들의 포병대와 기병대가 그의 취약한 종대 행렬을 2시간 내내 두들길 것이 뻔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쪽 아스페른으로의 행군을 명령받자, 그 명령의 어려움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인근으로 몰려온 도망병들을 포함한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먼저 화끈하게 브랜디(brandy)부터 쫙 돌렸습니다.  그는 니스의 채소가게 아들 출신답게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번지르르한 연설보다는 술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목구멍이 화끈해진 병사들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향한 위험한 행군길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의 전성시대(?)였다는 박통 루이14세 치하에서 채소가게 아들 마세나가 사회 탓을 하지 않고 정말 뼈를 깎는 노오오오력을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  아마 대대 행보관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가 바뀐다고 모든 개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의 노오오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세나는 며칠 전에 낙마 사고를 겪는 바람에 발을 다쳐 원래 전장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도 '마차를 타고 진격하면 된다'라며 눈처럼 새하얀 2인승 무개마차를 타고 전장에 나섰고, 나폴레옹은 그런 그를 칭찬하며 '자네 옆에 탄 마부가 프랑스군 내에서 가장 용감한 병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눈 앞에 줄지어 행군해 내려가는 프랑스군의 대오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새하얀 2인승 마차에 탄 사람이 유명한 마세나라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의 흰색 마차를 향해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는 기록은 없거든요.  그러나 탁 트인 벌판에서 측면이 훤히 노출된 이 긴 종대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대로 띄엄띄엄 연습하듯이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병사들을 한두명씩 피떡으로 만들며 쓰러뜨렸습니다.  마세나의 흰색 마차는 아주 공평하게 병사들과 똑같이 적의 포탄에 노출된 채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나 말고 내 옆 친구를 쓰러뜨리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천천히 행군했습니다.


일렬 종대로 행군 중인 보병은 사실 포병보다는 기병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행동을 같이 하던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는 호시탐탐 이들의 측면을 따라오다 기회다 싶은 순간이 오면 바람처럼 달려들어 아장아장 걷는 프랑스 보병들에게 칼탕을 선물하고는 다시 우르르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기병대에 호기심 많은 지휘관이 있었는지, 한번은 그런 헝가리 기병대의 공격이 마세나의 흰색 마차를 향해 돌진해왔고 거의 마차에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마세나의 부관들이 군도를 뽑아들었는데, 다행히 측면을 스크린하는 역할을 하던 프랑스 기병대가 제때 앞을 가로 막아 요격해주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마세나의 행군길이 오스트리아군 기병대 때문에 무척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술피스(St. Sulpice) 장군의 흉갑기병대를 추가로 붙여줘 측면을 보호하도록 했거든요.


브랜디와 프랑스 기병대의 보호에 힘입어, 마세나의 제4 군단 병사들은 1시간 반만에 아스페른-에슬링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스페른은 물론 에슬링에서도 밀려나 힘겹게 고전 중인 부데(Boudet)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 6군단은 에슬링을 점거한 이후 그냥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포격을 가하는 등의 소극적 공격 외에는 별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클레나우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주저주저하는 것에도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측이 각각 십만 단위로 포진한 이런 거대한 장기판에서 자기들처럼 불과 1만5천 정도되는 작은 군단 하나만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와 버리고 나니 클레나우로서는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클레나우 장군입니다.  이 분은 1795년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령으로 승진한 이후, 불과 4년만인 1799년 역시 전공에 의해 합스부르크 육군 역대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나름 실력파였으며, 바그람 전투 당시 51세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클레나우에게 측면 돌파를 명했을 뿐, 이렇게 성공적인 돌파가 되리라 예상은 하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무전 통신이나 항공 정찰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전장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전투 상황에서, 전날 밤 작성되는 작전 명령서에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까지 어디까지 돌파한 뒤, 몇 시에 어느 위치에 있을 프랑스 XX 군단을 격파하라'는 식으로 세부적인 지시를 적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것이 당시의 전장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귀족 위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는 역시 실력으로 승진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보헤미아 귀족 출신이었던 클레나우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만큼 나름 뛰어난 인재였으나, 그건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는 귀족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출신 신분이나 학력에 상관없이 오로지 전과와 실력만으로 장교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다보니 마세나처럼 채소가게 아들 출신도 원수가 될 수 있는 프랑스군 앞에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포탄이나 기병 군도에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세나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냈습니다.  사실 마세나의 병력이나 클레나우의 병력이나 수적 우위가 크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고, 오히려 장시간 행군에 지친 것은 프랑스군 측이었을텐데도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는 마치 '내 이럴 줄 알고 후퇴 준비를 다 해놓았지롱~'하는 식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과 2시간 정도만에 마세나는 에슬링에 이어 아스페른까지 탈환하고 클레나우를 서쪽 저 멀리 쫓아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투가 종료된 이후, 클레나우는 보고서에 자기 쪽으로 지옥처럼 무시무시한 종대(la colonne infernale)가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에 후퇴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세나에 의해 프랑스군 좌익에서의 위기가 정리되는 동안, 정반대쪽 프랑스군 우익에서는 다부의 환상적인 무브먼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_von_Klenau

https://en.wikipedia.org/wiki/Andr%C3%A9_Mass%C3%A9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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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8.27 20:44

베시에르, 아니 낭수티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기병집단으로 하여금 포병과 보병, 기병이 고슴도치처럼 대비를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 진영으로 돌격하도록 나폴레옹이 명령한 것은 기병대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 목적 뿐이었지요.  전쟁터에서 시간이란 수천명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더라도 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일까요 ?  어차피 마세나의 군단을 남쪽 에슬링으로 떠나 보내고나면 당장 무너져내리는 아더클라 방면 전선을 막아줄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주변에 병력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 최후의 비상 수단으로 아끼고 아끼던 근위대가 있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같은 대인배에게 있어서, 당시의 상황은 근위대를 끌어다 쓸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간만 조금 더 끌면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라이트 훅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라고 그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병대는 충분히 긴 시간을 버텨줄 만한 병종이 아니었고, 나폴레옹은 시작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은 시간을 끌어줄 어퍼컷을 날리기 전에 날린 잽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퍼컷으로 날릴 것으로 나폴레옹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여기서 나폴레옹은 당대에 보지 못한 기발한 전술을 펼칩니다.  제대로 된 군단 대신, 강력한 포병 화력을 동원하여 눈 앞의 오스트리아군을 제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포병 출신이기 때문에 해낸 생각이기도 했고, 프랑스 포병대의 실력을 믿고 잘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이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 빛났기 때문에 가능한 도박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포병만으로 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면 왜 전에 다른 곳에서는 그런 전술을 펼치지 않았겠습니까 ?  그 짧은 시간, 그 험악한 위기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지형과 오스트리아군의 포진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대는 약간의 높낮이로 인해 시야로부터 가려지는 움푹한 지대도 없는 정말 완전한 평야 지대여서 적이 항상 포병의 사선에 노출되어 있었고 지면도 탄탄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포병대의 주력 탄종인 구형탄(roundshot)은 직격으로 말과 사람을 으스러뜨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먼저 얕은 각도로 대지 위에 한번 떨어진 뒤 퉁퉁 튕겨 날아가며 그 비행 경로 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부러뜨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친구인 란 원수도 이런 포탄에 목숨을 잃었지요.  즉, 오스트리아군이 진격해오고 있는 아더클라 남쪽 평원은 포병의 살상 효과를 100%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점을 파악한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포병으로 제압하기로 합니다.





(프랑스 근위 포병대의 12-파운드 포 및 그 포병들입니다.  다만 바그람 전투 현장에서 동원된 것은 주로 6-파운드 및 8-파운드 포대였고, 일부 있던 12-파운드 포병들은 프랑스 근위대가 아니라 브레더 장군 휘하의 바이에른군 소속 포병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포병은 나름 엘리트 부대로서, 급료도 보병보다 약간 더 높았고 심지어 기병보다도 다소 높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에서조차, 보병은 징집했지만 포병은 모두 자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보병의 복무 연한이 6년인 것에 비해 포병은 14년이었습니다.  그만큼 숙련도가 중요한 당대 최첨단 병과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황실 근위대의 대포 60문 전체와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 방면군의 대포 38문, 그리고 브레더(Karl Philipp von Wrede) 장군의 바이에른군에 소속된 24문의 대포를 차출하여 임시로 대(大) 포병단(la grande batterie)을 급조할 것을 명했고, 그 지휘관으로는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이던 로리스통(Jacques Alexandre Bernard Law, marquis de Lauriston) 장군을 선발했습니다.  로리스통 장군은 1800년부터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포병 전문 지휘관이었는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을 책임지던 수석 포병 지휘관 송기(Nicolas-Marie Songis des Courbons) 장군이 최근 1달 사이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귀국했기 때문에 당시 현장에서는 포병 병과로는 가장 믿을 만한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리스통 장군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Jacques Alexandre Bernard Law로서, 로리스통이라는 이름은 뒤에 붙여진 marquis de Lauriston, 즉 로리스통 후작이라는 작위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프랑스인의 성씨가 로 Law 라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  이 분도 막도날처럼 스코틀랜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자리를 잡은 Law라는 성씨라... 어디서 들은 기억 안 나십니까 ?  예, 맞습니다.  프랑스 중앙은행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Banque Générale를 세우고 종이 돈을 대량으로 찍어냈다가 결국 미시시피 주식회사 거품을 일으켜 프랑스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 넣은 바 있는 존 로 John Law 바로 그 사람의 조카입니다.  로리스통은 프랑스령 인도 퐁디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거기 총독이었거든요.)




낭수티의 프랑스 기병대가 너덜너덜해진 채 퇴각하자,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이 그 뒤를 쫓아 서서히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앞을 가로 막은 것은 프랑스 기마 포병대의 대포 몇 문 뿐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저항은 충분히 예상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자신있게 계속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펑 펑 몇 방씩 쏟아지는 대포알을 견디며 나아가는 오스트리아군이 보는 가운데, 프랑스 포병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덜커덩 거리는 포가와 탄약차를 끌고 온 프랑스 포병들은 띄엄띄엄,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도착하여 1열 횡대로 전개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어어 저것들 봐라' 하는 사이에 어느 덧 122문의 대포들이 방열을 마쳤습니다.  무려 2km에 걸친 일렬 횡대였지만 대포의 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러다보니 불과 16m 당 1문씩, 오스트리아군의 전면을 전혀 빈틈없이 대포로 빽빽히 도배질을 한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방열을 마친 프랑스 포병들이 옆 포대와 경쟁이라도 하듯 포격을 시작하자 오스트리아군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진을 위해 빽빽한 밀집 대형으로 행군 중인 상태였으므로 이런 포격은 한발 한발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퉁퉁 튕겨 날아드는 대포알 한발에 20명이 허리가 잘리고 정강이가 꺾여 한꺼번에 쓰러졌습니다.  프랑스 포병들은 오스트리아군 선두로부터 약 300m ~ 500m 떨어진 곳에 방열을 하고 포격을 시작했는데,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해야 하는 전투 현장에서 이 정도의 거리는 약 6~8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포병들이 쓰던 6파운드 또는 8파운드 포는 숙련된 포병들의 경우 1분에 1발 꼴로 사격이 가능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머스켓 소총 사거리까지 접근하기 전에 대략 6~8발의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쏘았습니다.  전면에 16m 간격으로 늘어선 대포들이 이렇게 토해내는 쇳덩어리의 공포로 인해 오스트리아군 보병들이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고, 또 신이 난 프랑스 포병들의 재장전 속도가 평소보다 더 빨랐던 것입니다.  프랑스 포병들은 오히려 대포를 조금씩 전진시키며 포격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머스켓 소총 사거리 근처까지 접근하자 프랑스 포병들은 한방에 수십명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산탄(canister)을 쏘기 시작했고, 그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산탄, 즉 canister shot입니다.  통조림을 가리키는 영어 can은 저런 금속제 용기인 canister의 줄임말입니다.)




오스트리아군도 포병을 동원하여 대(對) 포병 포격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워낙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빠른 속도로 무력화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포병대도 결국 꽤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산탄을 쏜다고 해도 눈 앞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을 100% 모두 쓰러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적병들이 쏘아대는 머스켓 총탄에 많은 포병들이 쓰러졌고, 거기에 더해 저 멀리 1km가 넘는 바그람 언덕 위에 설치된 12파운드짜리 오스트리아군의 중포들에서 날아오는 포탄들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포병대는 무려 476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하나의 대포에 대략 20명의 포병이 딸려 있었으니 전체로 볼 때 거의 20%의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포병들은 현대전과는 달리 거의 보병들처럼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포병치고는 예외적으로 높은 사상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근위 포병대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보고를 받자 그의 근위대 보병들에게 쓰러진 포병 전우들의 자리를 메워줄 자원병을 뽑겠다고 즉석에서 외쳤는데, 필요한 보충병의 2배가 넘는 근위대 병사들이 자원했다고 합니다.   결국 프랑스 포병대는 치열한 포격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고, 각 대포당 평균 200발 정도를 발사할 정도로 뜨거운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불과 쇠의 폭풍 앞에서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의 진격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콜로브라트나 리히텐슈타인도 일단 후퇴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아더클라 마을 건물 속으로 숨어들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벨가르드 장군이 3개 포대 18문의 대포를 내세워 반격을 해보았으나, 이 역시 곧 꼬리를 말아쥐고 마을 건물 뒤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이 웅대한 포병 작전은 그 우렁찬 포성을 바그람 주변의 전장은 물론 비엔나까지 퍼지게 했습니다.  당시 우익인 다부 쪽을 지원하고 있던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 포병 노엘 대위(Jean Nicolas Auguste Noel)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시엔 전황을 알 수 없었으나 좌익 쪽에서 엄청난 포격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전투의 운명이 그 쪽 방면에서 결정되는 것이 확실했고, 황제께서도 그 쪽에 계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노엘 대위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전투의 운명은 바그람 주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있던 우익,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에서 결정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2015년 텍사스 오스틴에 몇 개월 출장가 있을 때 그쪽 헌책방에서 산 책입니다.  그때 사온 책 아직 거의 시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반성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www.histoire-empire.fr/articles/item/grande-batterie-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Grande_Arm%C3%A9e#Foot_arti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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