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10.14 12:56

생 도밍그의 혼란과 살육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아름답고 풍요로운 유럽 대륙으로 잠시 되돌아 오도록 하지요.  나폴레옹은 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기억들 하실려나 모르겠습닉다만, 1800년 12월의 호헨린덴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을 향한 암살 음모 등으로 무척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긴 했었지요.  아무튼 당시 아직도 프랑스와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나라는 영국이 유일했습니다.  그러던 1801년 2월, 영국에서 중요한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의 사임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은 1759년 생으로서 나폴레옹보다는 10살 많았습니다.  그는 1783년 2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수상이 되었고 재무부 장관도 겸임하면서 근대 세계 최초로 소득세를 도입하는 등, 많은 화제를 낳은 인물이었습니다.  가장 큰 화제거리는 불행히도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승전 소식을 듣고 쇼크사한 사건이었지요...)



원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나폴리 왕국보다는 영국과 러시아가 유럽 정치 외교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나라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몰타 섬을 둘러싸고 영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파벨 1세가 암살됨으로써 약간 맥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도 일단은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위협하는 유일한 외국 세력은 바로 영국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영국이 나폴레옹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대단한 상대였지요.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영국 침공은 도저히 불가능이라고 결론을 내렸었고, 그래서 이집트에서 돌아와 브뤼메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곧장 영국 외무 장관 그렌빌 경(William Grenville, 1st Baron Grenville)에게 화평 제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기지 못할 상대와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는 나폴레옹의 계산이었지요.  그러나 이 화평 제의는 제안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단번에 거절되었는데, 그렇게 거절한 사람이 바로 대불 강경파이자 영국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였습니다.  피트의 견해에 따르면, 저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는 영국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초강력 대륙 세력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좀 힘들더라도 초장에 밀어붙여 그 싹을 잘라버려야 했지요.  비록 그것이 영국 혼자만의 외롭고 힘든 싸움일지라 해도 말이지요.  결국 피트가 수상으로 있는 한 프랑스는 영국과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바다를 통한 통상 및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초록색 부분이 당시 프랑스가 넘겨 받은 루이지애나 땅덩어리입니다.  다만 당시 조약에서는 루이지애나라는 명칭만 씌여있었고 정확한 경계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서, 훗날 그 땅을 다시 넘겨받은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갈등의 소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1800년 10월의 산 일데폰소 조약 (Treaty of San Ildefonso)으로 더욱 안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주로 이탈리아의 부르봉 왕가의 운명을 두고 체결한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을 부르봉 왕가를 위한 영토로 양보받는 대신, 6척의 74문짜리 전함들과 함께, 저 멀리 북미 대륙의 루이지애나 지방을 프랑스에게 양보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왜 미국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양보하나요 ?  당시 루이지애나는 아직 미국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면 상상할 수 있듯이, 원래 루이 14세의 땅으로서, 프랑스가 식민지로 개척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서 영국에게 패배하여 북미 대륙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스페인에게 빼앗겼던 곳이었지요.  지금은 루이지애나 주가 멕시코 만에 붙은 작은 땅덩어리이지만, 당시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던 땅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는 물론, 오클라호마, 미주리, 캔자스, 아이오와, 네브라스카, 와이오밍, 몬태나 등등 사실상 지금의 미국 중앙부를 다 차지하는 엄청나게 넓은 땅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하던 당사자들도 이 땅이 대체 얼마나 넓은 땅인지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한 당시 스페인 국왕 샤를 4세, 스페인 식으로는 카를로스 4세입니다.  이 양반은 그 아들 페르난도와 함께 스페인을 말아먹은 대표적인 혼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뭔 소용이었겠습니까 ?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틀어막고 있으니 바다 건너 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시 나폴레옹의 정부를 압박하던 재정 파탄과 맞물려 더욱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게다가 한때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를 생산하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생 도밍그의 '사실상의 상실'도 못내 아까운 일이었지요.  이 모든 것이 다 빌어먹을 영국 해군 때문이었습니다.  





(피트의 사임을 풍자한 당시 만화입니다.  피트는 당시 전쟁과 중과세에 지친 국민들로부터 상당히 미움을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1801년 2월, 영국 수상 피트가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피트의 사임은 나폴레옹과는 전혀 무관한 영국 국내 정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피트는 아일랜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대부분이 카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인들에게 좀더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톨릭교도 해방령 (Catholic Emancipation)'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왕 조지 3세는 자신이 즉위할 때 맹세한 내용, 즉 영국 국교회를 수호하겠다는 맹세에 어긋난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것이 피트의 사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가톨릭교도 해방령은 1829년에 가서야 웰링턴 공작에 의해 통과됩니다.)  그리고 새 수상으로는 피트의 친구였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대불 온건파였던 헨리 애딩턴이 취임했습니다.  사실 애딩턴 자신은 국왕과 피트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또 수상 직위를 거절했지만, 피트의 추천에 의해 거의 억지로 수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애딩턴 수상의 위엄서린 모습입니다.  그의 취임은 피트와의 우정이 깃든 멋진 것이었으나, 그의 퇴임은 피트와의 갈등에 의한 보기 흉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애딩턴은 거의 취임과 동시에 나폴레옹에게 평화 회담을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을 보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사실 전쟁은 프랑스에게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오스트리아같은 굵직한 시장을 잃어버린 영국 경제도 휘청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요.  결정적으로 전쟁, 특히 해군은 돈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금태환을 거부할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게다가 하늘도 무심한지 2년 연속으로 흉작이 들어 식량난까지 가중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쟁 비용을 대느라 소득세(income tax)라는 당시로서는 듣도보도 못하던 새로운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던 영국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120% 활용했습니다.  '아하 이것들이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급했구나' 싶었던 나폴레옹은 평화 조약을 체결할 듯 말 듯 영국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밀땅 놀이를 즐겼고, 결국 1801년 9월 30일, 예비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양국 국민들의 환호와 축하 속에 공식적으로 공표합니다.  이것이 정식 조약으로 체결된 것이 바로 1802년 3월 25일의 아미엥 조약(Treaty of Amiens)입니다. 





(아미엥 조약을 풍자한 당시 영국 만화입니다.  제목은 the meeting of Britannia & Citizen Francois 입니다.  영국이 여자에요.)



이 아미엥 조약은 해외 진출을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아메리카로 프랑스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고, 그러자면 먼저 그 기지로서 생 도밍그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무엇보다도 생 도밍그는 다시 잘 가꾸면 황금알을 낳아주는 캐쉬 카우 (cash cow)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생 도밍그를 장악하고 있는 투쌩 그 뭐라드라 하는 검둥이 노예를 손봐줄 필요가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이제 영국 해군의 봉쇄가 풀린 대서양으로 생 도밍그 원정대를 내보냅니다.  그 원정대의 규모는 약 2만명의 수병을 제외하고도 지상군만 대략 2만명으로서, 약 3만 5천의 병력을 동원했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보다는 약간 작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인구 6백만에 면적도 광대한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3만 5천이 필요했으니, 손바닥만한 면적에 총 인구도 40만명을 조금 넘는 생 도밍그를 정복하는데 2만명을 동원했다면 굉장히 많은 병력을 투입한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실어나르는 함대의 규모도 굉장했습니다.  1801년 12월 14일에 최초로 출발한 선발대는 35척의 전열함에 21척의 프리깃이 포함되었고, 여기에 약 8천의 지상군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맙소사, 35척의 전열함이라니 !  트라팔가 해전에 동원된 영국 함대의 전열함이 겨우 33척이었는데요 !  거기에다 다음해 2월까지 몇차례 함대가 추가로 파견되어 더 많은 병력을  생 도밍그로 실어날랐지요.  다만 이 원정대는 철저하게 2진급 부대로만 꾸며졌습니다.  일부 프랑스 사단에 덧붙여 투쌩에게 쫓겨난 뮬래토 장군인 리고 (André Rigaud)를 주축으로 한 뮬래토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네덜란드 사단과 폴란드 사단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총지휘관에는 나폴레옹의 매제, 즉 폴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의 남편인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가 임명되었지요. 





(르클레르 장군의 초상화입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어렸던 그는 꽤 미남이었고, 그래서 폴린과의 결혼전 스캔달이 났던 것 같습니다.)



이 르클레르라는 장군에 대해서는 사실 그 이전에 별로 언급된 바가 없었지요.  그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을 최초로 만났습니다만, 그 이후에는 라인 방면군에서 주로 복무했고 1797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폴레옹 밑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카스틸오네 전투와 리볼리 전투에 참전했고, 이때 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항복 조약이었던 레오벤(Leoben) 조약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이후, 나폴레옹의 제안에 따라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과 결혼했지요.  이후 그는 모로 밑에서 라인 방면군에서 복무하면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그 이후에는 역시 모로 밑에서 그 유명한 호헨린덴 전투에 참전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름 괜찮은 군 경력을 쌓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생 도밍그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뽑힌 것은 확실히 나폴레옹의 매제라는 사적인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아, 저 X두가 보이는 의상은... 폴린의 과감함을 엿보게 합니다.  폴린의 자유분방함에 대해서는 정말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도 있지요.  그녀가 어느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모델이 되어 주었는데, 문제는 나체 모델이었다는 것이었고, 더 나쁜 것은 나폴레옹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노발대발하자, 폴린은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스튜디오가 아주 따뜻하던 걸요." )



폴린과 르클레르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 둘이 소파에서 '붙어먹는' 장면을 나폴레옹이 목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이 결혼을 시켰다는 설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폴린이 나폴레옹의 여동생들 중에서는 가장 미모가 뛰어나서, 성적으로 꽤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은 맞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폴린은 마르세이유의 지사였던 스타니슬라스 (Louis-Marie Stanislas Fréron)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원래 이 스타니슬라스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과 연을 맺은 사람으로서, 나폴레옹은 원래 이 남자에게 여동생 폴린을 소개시켜주었고 결혼도 시키려 하였으나, 어머니 레티지아가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된 바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797년에도 마음이 스타니슬라스에게 있었으나, 오빠의 강권에 따라 르클레르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폴린은 결혼 이후에도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생 도밍그로 원정대 총사령관직을 맡게 된 것은 르클레르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승진이기도 했습니다만, 반대로 큰 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생 도밍그는 황열병의 본고장이었으니까요.  어찌 되었건 르클레르는 폴린과 어린 아들도 이 원정대에 함께 데려갑니다.  폴린 본인도 남편이 생 도밍그의 주지사가 되어 자신과 함께 떠나는 것에 대해 나름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르클레르와 폴린을 태우고 1801년 12월 중순 출항한 프랑스 함대는 약 6주 후인 1802년 1월말, 드디어 생 도밍그 인근 해역에 집결합니다.   과연 유럽 대륙을 제패한 프랑스 정예병들과 생 도밍그의 태양 아래서 단련된 노예 출신의 검은 병사들의 충돌 결과는 어땠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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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13 13:05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의 끝에서 (사실은 카리브 해였는데) 큰 섬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는 이 섬에 스페인어로  La Isla Espanola (라 이슬라 에스파뇰라)라는, 즉 스페인 섬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좀더 멋나게 Hispaniola 라고 고쳐불렀지요.  이 섬에는 원래 타이노 (Taino)라는 남미 인디오 계통의 부족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은 원래 수자가 적었는데다 스페인 사람들의 공격과 박해,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곧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집니다.  이 섬에는 자연스럽게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최초의 유럽식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가 있는 섬 동반부에 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도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에는 아이티가, 동쪽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블로그를 다음편까지 끝까지 다 읽고나시면 아시게 됩니다.)



17세기가 되자, 프랑스인들 (정확히 말하자면 해적에 가까운 종자들)이 카리브 해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감히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고, 그 서북쪽의 작은 섬 토르투가(Tortuga)를 근거지로 삼았지요.  이들은 출신 성분답게 평화로운 농부나 무역업자 생활보다는 히스파니올라 섬을 오가는 스페인 선박들에 대한 해적질을 주업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평상시 사냥한 짐승 고기를 훈제하여 비축 식량으로 삼았기에, 훈제한다는 타이노 족의 언어(Arawak어) buccan에서 유래된 boucanier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영어로는 이들을 buccaneer (버캐니어)라고 불렀지요.  그냥 카리브 해의 해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버캐니어라고 하면 일단은 프랑스 계통의 해적인 셈입니다.)



스페인 해군은 이들을 축출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으나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오히려 점차 커져, 급기야 히스파니올라섬의 서반부, 그러니까 스페인 사람들이 별로 정착하지 않았던 지역으로 넓어졌고, 1641년에는 아예 최초의 프랑스 주지사가 이곳에 파견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1664년에는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Colbert)는 이 지역을 프랑스 서인도 회사의 공식 관할 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다 9년 전쟁의 결과인 라이스빅 (Ryswick) 조약에서 마침내 스페인도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쪽 2/3는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 서쪽 1/3은 생 도밍그 (Saint Domingue)라는 "같은 이름 두 언어"로 불리게 된 것이지요.




(네덜란드의 소도시인 라이스빅 (Ryswick, Rijswijk)에 세워져 있는 '라이스빅의 바늘'입니다.  바로 라이스빅 조약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무래도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가 직접 다스리는 땅이 된 만큼, 이후로는 해적질은 점차 잦아들고 프랑스도 플랜테이션 농장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담배, 인디고, 코코아 등을 재배했으나, 곧 주요 재배 작물이 커피, 목화, 그리고 무엇보다 사탕수수로 바뀌면서 생 도밍그의 번영이 시작됩니다.  전에 설탕과 카리브해 편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설탕은 하얀 황금이었거든요.  황금이야 캐다보면 언젠가는 폐광이 되기 마련이지만, 이 하얀 황금은 생 도밍그의 태양과 풍토 덕분에 글자 그대로 밭에서 열리는 황금이었으니 이 설탕 플랜테이션이 가져다주는 부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18세기 말이 되면 이 생 도밍그에서 생산되는 설탕이 유럽에서 소비되는 전체 양의 40%에 달했고, 또 커피 생산량도 유럽 소비량의 60%에 달했습니다.   그야말로 영국에게는 인도가 있고, 프랑스에게는 생 도밍그가 있다고 할 정도였지요.




(사탕수수입니다.  글자 그대로 슈가 슈가 ...)



문제는 사탕수수 재배에 안성마춤이었던 이 곳의 기후가, 사람에게는, 특히 유럽인들에게는 별로 쾌적한 편이 못되어, 유럽의 농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사정이 안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바로 이 지역의 풍토병인 황열병이었습니다.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열병인 황열병 (Yellow Fever)은 당시 예방책도 치료법도 없는, 치사율이 사람에 따라 15~50% 정도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지요.  덕분에 생 도밍그에 정착하는 유럽인들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몫 크게 번 농장주들은 되도록 서둘러 프랑스 본토로 돌아가곤 했지요.  무더운 기후도 기후지만, 무엇보다 황열병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형태의 노동이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18세기에 아프리카에서 생-도밍그로 끌려온 흑인 노예의 수자만도 연인원 총 80만명에 달한다고 하니까 정말 대단한 규모였지요.  이렇게 많은 인원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별로 크지도 않은 섬으로 끌려오다보니 인류학적으로 다소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백인들 눈에야 다같은 '흑인 노예'에 불과하겠지만, 사실 넓은 아프리카 서해안 곳곳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서로 언어가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인 농장주들과는 물론이고, 동료 노예들과도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기에 이릅니다.  크레올 (Creole) 어라고 하는, 프랑스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부 아프리카어도 아닌 혼합 언어가 생겨난 것이지요.  아프리카에서 이제 막 끌려온 신규 노예들은 낯설고 험악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 새로운 언어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다기보다는 이 새로운 언어의 생성 및 발전에 몸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크레올 어는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이들과 그래도 의사소통이 필요했던 농장 감독들이나 뮬래토(mulatto)들도 따라 배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아이티 공화국의 공식 언어는 2가지인데 하나는 프랑스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크레올 어라고 합니다.) 




(두 단어 모두 아이티 크레올어라는 뜻입니다.  저거 Haitian을 영어로는 헤이시안으로 읽지만 프랑스어로는 아이시앙 haïtien 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불어에는 H 발음이 거의 없어요.)



또 생 도밍그의 사회 계층은 그냥 딱 백인과 흑인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필연적으로 혼혈인들, 그러니까 뮬래토(mulatto)들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지요.  미국의 백인 농장주는 이렇게 생긴 혼혈 아이를 그냥 노예로 부려 먹었다고 하지요. (따지고 보면 자기 아들 딸인데 말입니다 !)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대개 이렇게 생긴 혼혈 아이들을 자유인으로서 적절한 교육을 시켰고, 이들은 생 도밍그 현지 군대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재산을 모아 작은 농장을 경영하기도 하는 등 자신들만의 사회 계층을 따로 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뮬래토 농장주가 아프리카에서 막 끌려온 흑인 노예들에게 잔인하게 채찍질을 하는 것이 뭐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흑인 노예들 자신도 하나의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흑인 노예도 이제 막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1세대 노예가 있었고, 또 생 도밍그에서 태어난 2세대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들끼리도 서로 사이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생 도밍그에서 태어나 좀더 '순화된' 노예들은 좀더 덜 힘든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또 순수 흑인들 중에도 어렵게 자유를 얻은 자유민도 있었고, 또 산악지대로 도망쳐 산적질로 연명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산적화된 도망 노예들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했으므로 주로 허술한 흑인 노예들의 숙소를 털었고, 그 과정에서 흑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도 잦았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전체 인구 구성에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오는 1세대 노예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생 도밍그의 사탕수수밭 노예 생활이 그리 목가적인 생활 환경이 안되다 보니, 많은 흑인 노예들이 도중에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데다, 노동 특성상 여자 노예의 수자가 크게 적었기 때문에 생 도밍그에서 태어나는 2세대 노예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 도밍그는 저 멀리 대서양 너무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흑인들을 마치 개미 지옥처럼 빨아들이는 마의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크레올 언어가 쓰이는 저 빨간 곳들은 예전에 프랑스 애들이 나쁜 일을 아주 많이 저질렀던 곳들입니다.)



이런 생태계가 100년 정도 유지된 결과는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1788년에 행해진 생 도밍그의 인구 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인구 조사가 얼마나 정확했겠습니까마는) 백인은 27,717명으로 5.5%, 자유민으로 풀려난 흑인 및 뮬래토 (mulatto, 혼혈) 등 자유 유색인들(gens de couleur)이 21,808명으로 4.3%, 그리고 455,089명의 흑인 노예가 전체 인구의 90.2%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글쎄요, 러시아의 농노들과 러시아 귀족층 간의 인구 비율이 이 정도일지는 모르겠으나, 러시아의 농노들과 러시아 귀족층 간의 관계가 생 도밍그의 농장주 및 흑인 노예들 사이만큼 험악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자동화기나 기갑 장비, 항공기 등도 없던 시절에 기껏해야 플린트락(flintlock) 머스켓으로 무장을 한 1명의 주인이 90명의 노예들을 마구 학대하면서도 그 질서가 유지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정치가로서보다는 문필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미라보 백작이십니다.)



18세기 말의 프랑스의 유명 정치가이자 문필가인 미라보 백작 (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이 생 도밍그의 프랑스인들은 "(폼페이 멸망의 원인이었던) 베수비오 (Vesuvius) 화산 기슭에서 잠을 자고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상황을 두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농장주들도 이런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더욱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공포였지요.  반항하는 노예들에게는 사형 정도의 간단한 (?) 처벌이 아니라 거세, 화형 등의 끔찍한 고문이나 처형이 가해졌습니다.  이런 폭력의 난무가 과연 노예들을 고분고분 길들이는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1791년 마침내 드러나게 됩니다.




(지옥을 그린 그림이냐고요 ?  아닙니다.  정열과 낭만이 살아 숨쉬는 카리브 해의 어느 흔한 하루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건 스페인사람들이 카리브해 정복 초기에 타이노족들에게 행했던 모습들입니다만...)



1789년 마침내 터진 프랑스 대혁명은 언듯 생각하면 노예들에게 자유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던졌다고 상상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혁명과 함께 선포된 인권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엄연히 생 도밍그도 프랑스 땅이니,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실제 영향은 매우 복잡 미묘했습니다.


일단 당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에도 본국과 동일한 법과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나 모두 노예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모두 '모든 노예는 본토에 발을 딛는 순간 자유'라는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본토가 아닌 식민지에 있는 노예들은 본토에서 인권선언을 하건 말건 그냥 그대로 노예라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윽 시발 - 제목과 포장은 요란하더니 결국 그냥 얼굴 하얀 애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였어 ?)



당시 생 도밍그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던 백인 농장주들 (grands blancs)은 오히려 프랑스 대혁명을 반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들은 노예 해방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존 왕정이 노예들의 처우에 대해 이런저런 '실정에 어두운 탁상공론적인' 규정을 만들어 노예들의 기본권을 지켜주려 했던 것을 원망하고 있던 차였지요.  또 무엇보다 더 돈많은 고객인 영국과의 거래를 제한했던 프랑스 왕정이 무너진 것에 대해 쾌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기회에 아예 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좀더 많은 자율권과 그에 따른 좀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고자 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차라리 왕당파와 그를 지지해주는 영국의 세력에 막연히 뭔가를 기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들과는 또 전혀 무관하게, 주로 뮬래토로 구성된 생 도밍그의 자유 유색인들(gens de couleur)은 이번 기회에 자신들에게도 백인들과 동일한 프랑스 시민권을 달라고 주장하는 등, 한마디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생 도밍그는 완전 사분오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와중에서도 역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돈이라고, 1791년 5월, 프랑스 혁명 정부에서는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갖춘 부유한 유색인에게는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다' 라는 결정을 내렸고, 백인 농장주들은 이를 거부하는 등 혼란만 가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1791년 8월 21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합니다.  즉 생 도밍그의 흑인 노예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체 섬이 일제히 반란에 돌입했던 것은 (사실 전체 섬이 일제히 반란에 돌입했던 것은 또 아닙니다만) 더티 부크만 (Dutty Boukman)이라는, 도망친 노예 (Maroon slave)이자 부두(Vodou)교 술사였던 남자의 카리스마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더티 부크만이라는 이름은 영어로 Dirty Bookman (지저분한 책쟁이)라는 것이 영어 발음 그대로 넘어온 것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자메이카 태생의 영국 흑인 노예였는데 프랑스령인 생 도밍그로 팔려온 사람이었지요.  이 양반은 스스로 공부를 하여 bookman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가 되었지요.  아무튼 이 양반은 1791년 8월 14일, 보아 카이만 (Bois Caïman)이라는 곳에서 부두교 의식을 치루면서 곧 있을 노예 대반란과 그 해방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이 양반은 반란 시작 이후 3개월만인 11월에 프랑스인들에게 살해되어 그 목이 효시되는 수난을 당했습니다만, 이 양반이 뿌린 씨는 결국 세계 최초로 성공한 흑인 노예 반란 및 독립이라는 꽃을 피우게 됩니다.   다만 이 양반이 부두교 술사였다는 사실과 부두교 의식에서 아이티 독립이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최근 아이티 대지진 이후, '아이티에 이렇게 재난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 섬나라는 시작부터가 악마와의 계약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계통 언론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언론인/종교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에게 있어 지진보다 더 큰 재난인 것 같습니다.




(부두교는 지금도 카리브해 지역에서 널리 믿어지는 종교 의식입니다.  좀비 흑마술 같은 건 안나온다는데요 ?)



아무튼 일단 대반란이 시작되자, 그 기세는 전체 인구의 5% 정도 밖에 안되는 백인들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백인들도 이런 대규모 반란을 항상 걱정하고 있었으므로 평소에도 거주지를 요새화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해두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일부 요새화된 거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이 곧 흑인들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많은 백인들과 그 가족이 흑인 노예들 수중에 떨어졌고, 이들에게는 흑인들의 잔혹한 보복, 그러니까 약탈, 관광, 고문, 사지절단, 살해 등이 저질러졌습니다.  반란 시작 2개월만에 약 4천명의 백인들이 살해되고 약 180개에 달하는 농장들이 불에 타버렸다고 하니, 전체 백인 인구의 약 1/7이 한순간에 살해된 셈입니다.  많은 백인들은 아무 배편이나 구해지는 대로 행선지를 가리지 않고 올라타고는 생 도밍그를 떠났습니다.  이들은 대개 영국령인 자메이카나 스페인령인 쿠바, 또는 미국 동해안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생 도밍그의 운명과 또 미국 남동부 지역의 크레올-프랑스 계통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백인들이 생 도밍그에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생 도밍그에 있던 백인들이라고 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당장 생 도밍그를 떠나면 삶의 터전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또 배편을 구하지 못해 발이 묶인 사람들도 꽤 있어서, 반란 초기의 광기에 어린 살육을 피한 백인들은 흑인 반란군들에게 일종의 인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원 밧줄에 묶여 감방에 갇힌 것은 아니었고요... 뒤에 보시겠습니다만 상황이 매우 복잡했습니다.




(1791년의 흑인 노예 반란입니다.  암튼 이럴 때는 누가 애초에 뭘 잘못했느니 따지지 말고, 일단 튀어야 합니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비록 자신들도 혼란에 빠져있었으나 파리의 혁명 정부에서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 6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생 도밍그의 프랑스인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이 병력의 수와 질은 전면적인 노예 반란을 막기에는 택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생 도밍그의 흑인 노예들을 위협했던 것은 프랑스 본국이 아니라 자메이카의 영국군이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생 도밍그의 사탕수수 농장을 내버려둔 채 몸만 빠져 나와야 했던 프랑스 백인 농장주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재산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혼란에 빠진 본국 혁명 정부보다는 당장 근처에 있는 자메이카의 영국군이 더욱 의지할 만한 대상이었습니다.  왜 바로 옆, 그러니까 같은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에 있는 산토 도밍고의 스페인군에게는 의지하지 않았냐고요 ?  사실 스페인군은 이미 생 도밍그를 침공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매우 복잡해서, 이들은 프랑스 백인 농장주 편이 아니라 흑인 노예 반란군과 협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스페인에게 생 도밍그는 프랑스 해적들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세력의 침공 결과로 태어난 원수의 땅이었거든요.  무법 상태였던 생 도밍그에서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여 스페인의 세력을 넓히려면 일단 프랑스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흑인 노예들을 지원해야 했던 것이 스페인의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랬던지라, 도망친 프랑스 백인 농장주들(grands blancs)은 생 도밍그의 번영에 군침을 삼키고 있던 자메이카의 영국군을 꼬드겼습니다.  그러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영국 및 기타 유럽 국가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아예 잘 되었다고 판단한 프랑스 백인 농장주들은 자기들끼리 멋대로 자메이카의 영국군과 협약을 맺고 '이제부터 생 도밍그는 프랑스 땅이 아니라 영국 왕의 영토이다' 라고 선언을 했고, 그에 따라 자메이카 주둔 영국군이 생 도밍그에 상륙했습니다.   영국군은 생 도밍그의 북쪽 해안에 있는 프랑스 곶 (Cap Francaise)에 순조롭게 상륙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스페인군과도 협조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정말로 복잡했습니다.  영국군이 상륙하면서 싸워야 했던 적은 파리 혁명 정부에서 파견한 프랑스군이기도 했지만, 정작 그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흑인 노예 부대들도 영국군의 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즈음해서는 전체 섬에 불과 350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던 프랑스군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흑인 반란군들과 싸우기도 어려운데 이젠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도 싸워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해군의 지원을 받는 영국군은 순조롭게 해안 도시들을 접수했고 흑인 반란군들은 산지와 정글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무장도 변변치 못한 흑인 반란군이 무적의 레드코트들 앞에서 승산이 있을리 만무했지요.




(우린 19세기초의 미군이다 !  다 덤벼 !)



그런데 뜻밖에도 승산이 있었습니다.  기세등등하게 생 도밍그를 침공했던 레드코트들은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했으나, 왠일이지 제풀에 지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황열병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지요.  실제로 영국군은 1793년에서 1798년까지 5년 동안 생 도밍그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고 행정부까지 운영하는 등, 사실상 생 도밍그를 지배했으나, 결국 흑인 반란군의 게릴라식 공격과, 무엇보다도 황열병의 맹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1798년 다시 꼬리를 말아쥐고 자메이카로 도주해버립니다. 




(이 작은 모기가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동물로 선정된 바 있다는 거 다들 아시지요 ?)



여기서 잠깐, 자메이카에는 황열병이 없었나요 ?  물론 있었습니다.  전에 설탕과 카리브해 편에서도 인용했듯이, 영국군에서 이 자메이카 주둔군으로 발령을 내는 것은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메이카에서도 견디던 영국군이 왜 바다 건너 생 도밍그에 왔다고 맥을 못 추었을까요 ?  이는 황열병이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병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은 자메이카 내부에서도, 영국군이 계속 산이며 정글을 헤집고 다니는 야전 생활을 했다면 황열병 환자들이 크게 늘었을 것입니다.  황열병을 옮기는 매체인 황열병 모기 (Aedes aegypti, 학명에 이집트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정작 이집트에는 이 모기가 없습니다)가 주로 정글이나 습지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시 내의 모기보다는 산모기 바다모기들이 더 악랄하다고 하지요.  이렇게 흑인 반란군을 쫓아 정글 지대를 헤매야 했던 영국군은 황열병의 공격에 큰 병력 손실을 보아야 했습니다.  흑인들은 황열병에 내성이라도 있나요 ?  그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황열병은 한번 앓고 나면 정말 평생 면역력이 생겼으므로, 어려서부터 황열병에 노출되며 살았던 토착민들 (황열병은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따라 건너온 병이었습니다) 은 좀더 면역력이 강했을 것입니다.  


영국군의 침공은 시작만 요란했을 뿐 결국 별 소득 없이 끝났는데, 이 영국군의 침공이 생 도밍그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하나 만듭니다.  바로 투쌩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의 등장이지요.




(지금의 아이티 공화국 지폐에 나오는 투쌩의 모습입니다.  사실 보면 그림마다 얼굴이 천양지차로 다 달라요.)



이 투쌩 루베르튀르라는 양반은 당연히 흑인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1743년 정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루베르튀르라는 성은 사실 나중에 붙여진 것이고, 처음 이름은 그냥 투쌩이었습니다.  그 이름 Toussaint은 영어로 all saints, 즉 '모든 성인'을 뜻하는 것인데, 뭔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붙인 것은 아니고 그냥 11월 1일, 즉 만성절 (All Saints Day)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뒤에 생겨난 성인 루베르튀르(Louverture)는 영어로 the overture, the opening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훗날 그가 반란 전쟁을 지휘할 때 그가 전투를 이끄는 모습을 본 프랑스 관리가 '저 자가 향하는 적진에는 항상 구멍이 생기는군 !' 하고 감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간단히, 그냥 그의 앞니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투쌩은 생 도밍그에서 노예로 태어난, 즉 2세대 노예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서부 아프리카 베넹의 왕자였는데 그만 노예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생 도밍그로 끌려온 사람이라고 전해집니다만, 그 말에는 사실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당나라 황제와 용녀의 자손이라는 설과 비슷한 것 같아요.  투쌩은 2세대 노예답게, 자신이 속한 브레다 (Breda)라는 지역의 농장에서 중간 보스 역할을 하는 착실한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유까지 허락받았고, 월급을 받는 농장 감독으로 계속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돈을 모아 작은 커피 농장을 임차하여 커피 농사도 지었다고 하네요.  그 커피 농장에서도 노예를 썼냐고요 ?  예 당연하지요.  노예가 약 12명 정도 딸린 작은 농장이었다고 합니다. 




(투쌩의 또다른 그림입니다.)



이 배경만 보면 투쌩은 흑인 노예 반란을 지휘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투쌩은 초기 반란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족과 함께, 브레다 농장의 백인 주인 가족을 서둘러 배에 태워 스페인령인 산토 도밍고로 피신 보내줄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는 노예 출신치고는 꽤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약간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크레올 어 외에도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그리스 철학자 이야기나 마키아벨리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글을 쓸 줄도 알았는데, 불행히도 맞춤법은 철저히 엉터리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의 얇팍한 지식만으로도 그는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는 지식인으로 통할 수 있었고, 특히 어려서부터 배운 아프리카 민간 요법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의학 지식으로 인해, 그는 의사로서 흑인 반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주로 프랑스 관리들과 흑인 반란군 사이의 협상 등에서 활약했는데, 주로 온건파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관리들과 흑인 반란군은 전쟁 상태였으므로, 흑인 반란군은 프랑스와 대립하는 스페인군과 손을 잡은 상태였는데, 투쌩도 역시 스페인군과 협력하여 프랑스 관리들을 공격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그의 지휘나 부대 운용이 차츰 두각을 드러내면서 그의 휘하에 흑인 병사들이 많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아이티에서도 여러가지 평가를 받고 있는 손쏘낙스입니다.  투쌩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프랑스에 보내진 뒤, 그냥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1791년 시작된 흑인 노예 반란은 2년이 흐르도록 수습되지 못하고 있었고, 특히 위에서 언급한 영국군의 침공으로 인해 더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인 프랑스 관리 손쏘낙스(Léger-Félicité Sonthonax)는, 이 꽉 막힌 상황에 돌파구를 만들고자 1793년 8월 과감한 조치를 하나 취합니다.  즉, 손쏘낙스는 일개 지방 관리임에 불구했으므로 이런 일을 할 권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임하에 생 도밍그의 모든 노예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준다는 노예 해방 선언을 해버린 것입니다.  마치 남북 전쟁 때의 링컨 대통령처럼 말이지요.  그 결과도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투쌩을 비롯한 흑인들은 이 조치에 별로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궁지에 몰리니까 내놓은 궁여지책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 실제로 그럴 권리와 힘도 없는 하급 관리 주제에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는 평판이었지요.  그러나 몇개월 뒤, 파리 혁명 정부에서도 '모든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들은 이제부터 자유인'이라는 노예 해방 선언이 선포되자,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특히 스페인군도 점점 세력이 커지는 투쌩의 부대에 대해 견제를 해오던 터라, 투쌩은 노예 해방을 선언한 쪽을 위해 싸우겠다며 스페인군 쪽에서 프랑스군 쪽으로 전향을 선언해버린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백인 농장주들이 조국이고 이념이고 내 돈을 되찾아야겠다며 영국군을 끌어들인 것이 결국 프랑스의 노예 해방 선언을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투쌩이 자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결국 생 도밍그, 즉 훗날의 아이티 공화국으로 하여금 세계 최초로 백인 국가의 압제에서 벗어난 흑인 노예들의 성공적인 독립국가 창설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당장 투쌩은 삽시간에 유리한 입장에서 사면초가의 프랑스 정부군 입장으로 바뀌면서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일단 스페인군의 공격은 물론이고, 여태까지 같이 스페인 측에서 싸워온 동료 흑인 부대들의 공격도 받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프랑스 정부군을 공격하는 영국군의 공격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좀 버티다보니 사태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일단 1795년 바젤 (Basel) 조약에서, 스페인 본국 정부는 파리 혁명 정부에게 생 도밍그는 물론이고 히스파니올라 섬 동부 지역인 산토 도밍고까지 다 넘겨주기로 협약을 맺습니다.  식민지 현지 상태와는 무관하게, 스페인 본국 정부의 사정이 궁했거든요.  또 투쌩의 이상과 리더쉽에 끌린 흑인 반란군 병사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면서,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흑인 군벌들과의 싸움에서도 승기를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멋대로 노예 해방을 선언한 프랑스 관리 손쏘낙스와의 관계도 좋아서, 손쏘낙스는 투쌩의 두 아들이 프랑스 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까지 보내줍니다.




(1795년 바젤 조약의 핵심은 파리 국민공회가 스페인 및 프로이센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영국군이었습니다.  그는 영국군을 생 도밍그에서 정면 승부로 몰아내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했고, 방법을 바꾸어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을 괴롭혔습니다.  이것이 주효했습니다.  영국군도 정글에서 치고 빠지는 투쌩의 부대를 어찌하지 못하고 황열병에 픽픽 자꾸 쓰러지기만 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투쌩은 본국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동료 흑인 지휘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많은 굴곡을 겪습니다만, 결국 그와는 상관없이 영국군으로 하여금 '생 도밍그는 지옥'이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영국군을 몰아 붙이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황열병의 공로가 컸지요.  결국 1798년 4월 30일, 투쌩은 영국군 메이틀랜드 (Thomas Maitland) 장군과 종전 협정을 맺습니다.  




(메이틀랜드와 협약을 맺는 투쌩. 투쌩이 젊어서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때, 어디 감히 영국 귀족과 눈을 맞출 생각이라도 했었겠습니까 ?)



조건은 영국군이 철수하는 대신, 그동안 프랑스 혁명에 반대 활동을 해왔던 프랑스인들을 사면해준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투쌩의 완승이었습니다.  콧대 높은 영국 귀족 출신 장군이었던 메이틀랜드는 한낱 아프리카 흑인 노예 출신과 이런 굴욕적인 협약을 맺으려니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메이틀랜드는 자메이카로 흑인 노예 반란을 전파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에, 생 도밍그에 대한 해상 봉쇄까지 다 풀어줍니다.  메이틀랜드가 프랑스에서 파견된 백인 관리인 에두빌(Gabriel Hédouville)을 배제하고 투쌩과 직접 대화한 것도 사실은 투쌩과 프랑스 본국 정부와의 사이를 틀어놓으려는 계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셈이었지요.  


그런데 그게 잘 먹혔습니다.  원래 프랑스 본국에서도 (비록 노예 해방이네 뭐네 떠들었지만) 한낱 노예 출신 검둥이가 생 도밍그같은 부유한 식민지의 정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1798년 3월 본국에서 파견나온 에두빌은 이미 올 때부터 투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온 것이었습니다.  에두빌은 뮬라토 장군이자 투쌩의 라이벌이었던 리고 (André Rigaud)를 부추김으로써 이이제이의 전략을 펼치려 하였으나, 결국 투쌩은 이 정치 및 군사 분쟁에서 승리하여 에두빌과 리고 모두를 프랑스로 축출해버리고 명실상부한 섬의 1인자가 됩니다.




(리고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농장주였던 백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교육도 잘 받았습니다.  그는 두발은 흑인처럼 검고 곱슬곱슬했으나, 피부색은 거의 백인처럼 밝은 편이었다고 하며, 좀더 백인처럼 보이고자 부드러운 머리털로 된 가발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뮬래토가 흑인보다는 우수한 사회적 지위에 있다고 주장했으므로, 투쌩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투쌩의 정치는 한마디로 중도 보수파 정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노예제 폐지가 유지되는 한, 독립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이 전혀 없었고, 그가 만든 생 도밍그 자체 헌법에도 생 도밍그는 프랑스의 영토이며 생 도밍그의 모든 사람들은 프랑스 국민이라고 명기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생 도밍그 혁명 자체가 부두교 의식에서 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통 카톨릭을 생 도밍그의 국교로 내세웠습니다.  또한 그는 경제 부흥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당연히 노예 노동은 금지했으나, 그는 전직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다시 사탕수수 농장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농사를 지으라고 강요했습니다.  여기서 과거 고된 노동의 악몽을 떠올린 많은 흑인들이 반발했습니다만, 그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그의 군대는 무너질 것이고, 그럴 경우 다시 노예제를 확립하러 영국이든 프랑스든 스페인이든 백인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바로 1799년,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새 헌법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터져 나왔습니다.   나폴레옹이 발표한 이 헌법에서, '식민지는 별도의 법에 의한 통제를 받는다'라는 구절을 넣었던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노예제를 부활하겠다'라는 선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때문에 나폴레옹과 투쌩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다지 좋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에 투쌩에게 내려졌던 프랑스 군대의 장군직을 그대로 인정해주었으나, 당시 투쌩이 계획 중이던 산토 도밍고로의 원정을 금지시켰습니다.  당시 산토 도밍고는 명목상으로는 1795년 바젤 조약에 따라 프랑스 땅이 되었으나, 여전히 스페인 총독이 노예제를 유지하며 지배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이 원정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투쌩은 나폴레옹의 명을 어기고 그대로 침공을 감행, 마침내 전체 히스파니올라 섬을 완전히 정복해버립니다.  투쌩은 명실상부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릴만 했습니다.




(뭐 ? 검은 나폴레옹 ?  새로 나온 짝퉁인가 ?  말만 들어도 불쾌하군.)



이렇게 검은 나폴레옹과 하얀 나폴레옹의 관계는 시작부터가 삐그덕이었습니다.  특히 투쌩이 1801년, 위에서 이미 언급한 생 도밍그의 자체 헌법을 제정하여 나폴레옹에게 전달하자, 나폴레옹은 그 사절로 온 뱅상(Vincent) 대령을 그대로 엘바섬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불쾌감을 명백하게 표시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불쾌하게 여길 만도 했던 것이, 투쌩의 서신이 이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흑인들의 1인자가 백인들의 1인자에게"   (공손하게 1.5인자라고 표현해야 했었을까요 ?)


물론 투쌩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은 받지 못했지요.  아, 답장이 오기는 왔는데, 편지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1802년,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 (Charles Emmanuel Leclerc) 장군이 약 2만명의 병력을 끌고 카리브 해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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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10.07 04:08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해킹이라는 말의 뜻은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대한 인가되지 않은 침입'을 뜻합니다.  당연히 해킹이라는 범죄는 컴퓨터가 발명된 이후에 나왔을 것 같지만, 실은 최초의 해킹 범죄는 1834년 프랑스에서 벌어졌고, 그로 인해 범인은 꽤 상당한 금전적 이익도 챙겼으며, 결국 체포되어 재판까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재판 결과는 무죄였고, 이 사건 때문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지요.  19세기 전반에 해킹이라니 !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


때는 17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화도 무선통신도 없던 시절 가장 확실하면서도 빠른 통신 수단은 촛농으로 봉인한 편지를 쾌마를 탄 전령이 직접 들고 뛰는 파발마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이 빨라도 이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었지요.  특히 빠르고 신뢰성 있는 통신 수단은 군사적으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더 빠른 통신 수단에 대해 유럽 각국은 별의별 방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봉화나 전서구 등이 다 그런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만, 이것들은 복잡한 내용을 전하지 못하거나 신뢰성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1792년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라는 프랑스인이 높은 탑에 막대기로 연결된 신호봉을 이용한 신호 전달 체계를 발명하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 획기적인 통신 혁명이 일어납니다.  





(텔레그라프의 단면도입니다.  아래 기계실에 있는 작은 가로대와 신호봉은 그 위에 있는 진짜 가로대와 신호봉이 취하는 각도와 동일한 모습을 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영 요원이 굳이 밖에 나가서 그 모양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조작이 가능했습니다.)




클로드 샤프가 발명한 것은 전부터 사용되던 세마포어(semaphore) 신호 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신호 장치탑과 거기서 사용될 코드였습니다.  2~3층짜리 탑 위에 높은 장대를 세우고, 그 끝에 좌우로 기울일 수 있는 가로대를 얹은 뒤, 그 가로대 양쪽 끝에 역시 회전하는 신호봉을 붙인 것이 신호 장치탑이었고, 이 가로대와 양쪽 신호봉들의 위치와 각도를 통해 약 12~25km 떨어진 다른 신호탑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 기본 원리였습니다.  가로대와 신호봉의 각도 조합을 통해 196개 조합의 신호를 보낼 수 있었는데, 알파벳과 숫자 등이 모두 가능했고 심지어 실수로 전달된 신호를 취소하는 백스페이스 기능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이를 응용하여 암호화된 전문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이 장치로 실제 원거리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최초로 증명된 것은 1791년 3월이었습니다.  샤프 형제들이 16km의 거리에서 성공적으로 짧은 문장을 송수신한 것입니다.  이때 샤프 형제들이 주고 받은 최초의 문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si vous réussissez, vous serez bientôt couverts de gloire” 

(성공한다면 그대들은 곧 영광으로 뒤덮히리라)


이 혁신적인 통신 네트워크에 대해 클로드 샤프는 처음엔 '빠른 글쓰기'라는 뜻의 타키그라프(tachygraphe)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친구 중 하나가 그보다는 '원격 글쓰기'라는 뜻의 텔레그라프(télégraphe)를 제안했고, 이것이 그대로 채용되었습니다.  예, 전보 또는 전신이라고 해석되는 이 텔레그래프라는 단어는 전기 신호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인 1791년에 탄생한 것입니다.





(클로드 샤프의 초상입니다.  그의 발명품은 진짜 전기 전신기가 발명된 1849년 이후로도 몇 년간 더 쓰이다가 1850년 중반 경에야 퇴역할 정도로 19세기 전반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1880년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때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인데, 그 소란통에 그런 발명품을 구현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  실은 그 혁명 덕분에 구현이 쉬웠습니다.  호전적인 혁명정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더 나아가 프로이센과 영국에게도 선전포고를 했고 당장 오스트리아의 속국인 네덜란드에서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혁명정부는 당장 네덜란드 전선의 시시각각 상황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덕분에 1792년 네덜란드와의 국경 쪽인 릴(Lille)과 파리 사이에 샤프의 텔레그라프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덕분에 2년 후인 1794년에는 릴 바로 남서쪽에 있는 국경 도시 콩데-쉬르-레스코(Condé-sur-l'Escaut)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빼앗았을 때 그 소식을 파리 혁명정부는 불과 1시간 뒤에 통보받을 수 있었습니다.  1798년에는 독일과의 국경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쪽으로도 이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등 곧 다른 방향으로도 텔레그라프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덕분에 나중에 황위를 차지한 나폴레옹은 멀리 떨어진 프랑스 주요 도시들로부터의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 같은 다른 국가들도 이 요긴한 발명품을 곧 복제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너무 요긴했거든요.  


이 시스템의 단점이라면 야간에는 통신이 불가능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신호봉 양쪽 끝에 등불을 달면 밤에도 전문 송수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시험도 해보았으나, 10km가 넘는 거리에서 등불 따위는 식별이 불가능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전신기 및 거기에 쓸 모르스 부호를 만든 모르스(Samuel Morse)가 자신의 발명품인 전기 전신기를 팔러 다닐때, 각국 기관들은 기존의 이 샤프 텔레그라프가 워낙 훌륭하여 굳이 전기 전신기로 바꾸려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모르스의 전기 전신기가 팔리기 시작한 것은 '밤에도 송수신이 가능하다'라는 점이었다고 하네요.



(프랑스 전역을 연결한 연도별 텔레그라프 네트워크입니다.)




이 텔레그라프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도 파리와 지방 간의 공문 송수신에 활발히 잘 사용되었습니다.  1844년 발표된 알렉상드르 뒤마의 장편 소설 '몽테 크리스토 백작'에서도 이 텔레그라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Edmond Dantès)가 이 텔레그라프 송신 요원을 매수하여 가짜 전문을 보내 주식 시장을 조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텔레그라프는 국가 기간 통신망이었기 때문에 주기적인 감사 및 교차 확인이 계속 되었고, 만약 허위 정보가 텔레그라프를 통해 송수신될 경우 어느 기지에서 그런 허위 정보가 흘렀는지 금새 들통이 나서 관련자가 엄벌에 처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텔레그라프 가로대와 신호봉의 각도에 따른 전송 문자입니다.  물론 이것 외에 다양한 조합이 있었는데, 최대 4가지 모양을 하나로 하여 여러가지 지정단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4가지 이상의 조합은 너무 복잡해서 비실용적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발표되기 훨씬 1834년, 블랑 형제(François Blanc, Louis Blanc)라는 쌍동이 형제가 보르도(Bordeaux)에서 이 텔레그라프 네트워크를 해킹하여 금융 시장에서 꽤 큰 돈을 버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고도 2년간이나 발각되지 않았지요.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


이 블랑 형제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마을에 온 유랑극단의 카드놀이 야바위꾼이 어리숙한 마을 아저씨들의 돈을 싹쓸이해가는 것을 보고 그 길로 유랑극단을 따라 가출한 이후 흘러흘러 지방 도시인 보르도로 흘러들어온 28세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이 형제는 보르도에 정착하면서 그 도시의 유가증권 시장에서 국채 등을 매매했는데, 무슨 재주를 피웠는지 놀라운 수익률을 냈습니다.  알고보면 이 형제는 파리에서 보르도로 이어지는 텔레그라프 네트워크를 해킹한 것이었는데, 그 방법이 매우 기발하면서도 매우 간단했습니다.  




(노년의 프랑수아 블랑입니다.)




당시 보르도와 같은 지방 도시의 유가증권 시장에서 국채 가격은 파리 시장에서의 국채 가격이 내리거나 올랐다는 소식이 날아오면 당연히 그에 따라 내리거나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장 정보는 정기 우편마차를 통해 보르도까지 오는데 보통 2~3일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불과 몇 시간만이라도 빨리 파리의 유가증권 시장 정보를 받아보는 것이 지방 금융시장에서의 성공 여부였고, 다른 경쟁자들은 이를 위해 별도로 고용한 파발마 또는 전서구 같은 것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블랑 형제는 기발한 방법을 썼습니다.  파리에서 보르도로 이어지는 여러 텔레그라프 기지국 중 중간 지점인 투르(Tour)의 운영 요원 한명을 매수하여 파리의 국채 가격이 올랐는지 내렸는지를 표시하는 신호 하나를 전문 속에 끼워넣은 것이었습니다.  그 신호 뒤에는 곧바로 '백스페이스', 즉 방금 보낸 신호는 실수이니 무시하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전문의 최종 수신자가 받아보는 종이 위에 적히는 평문 메시지에는 아무런 비정상 기호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블랑 형제가 보르도에서 고용한 별도 감시원이 보르도 텔레그라프 기지 근처에서 마지막 중계 기지의 신호를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있다가, 백스페이스 신호 바로 전의 이상 신호 하나를 잡아내어 블랑 형제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블랑 형제는 파리 국채 가격이 올랐는지 내렸는지의 최소한의 정보를 누구보다 더 빨리 받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형제는 이런 식으로 2년 동안 국채 거래를 통해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세자였던 오를레앙 공작 Louis Philippe Albert d'Orléans의 탄생을 알리는 1838년 전문입니다.  이 전문은 파리에서 툴루즈로 텔레그라프 네트워크를 통해 2시간 30분만에 전달된 것인데, 이렇게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최종 수신자에게는 당연히 종이 위에 깔끔하게 평문으로 필사되어 전달되었습니다.  중간 기지국에서 신호 오타를 내고 그걸 백스페이스 신호로 지웠다고 해서 최종 문장 위에까지 오타와 백스페이스 기호까지 올릴 이유는 없었지요.)




결국 이 형제의 해킹 실력의 비결은 가장 고전적인 해킹 기법인 소셜 엔지니어링(social engineering, 내부자를 매수하거나 설득하여 비밀번호 등을 알아내는 기법), 즉 사람 관리였던 셈입니다.  1836년 이 형제의 해킹 행각이 드러난 것도 결국 사람 관리에서 비롯된 문제였습니다.  투르의 그 매수된 텔레그라프 운영 요원이 그만 병에 걸려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블랑 형제로부터 매달 받던 뇌물이 끊기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후임으로 온 요원에게 블랑 형제와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그 뇌물을 나눠가지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모든 공무원이 다 그렇게 돈만 밝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후임 요원은 이 이야기를 듣고 관계 당국에 그대로 보고했고, 블랑 형제는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블랑 형제는 다음해 벌어진 공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기간 통신망에 대한 해킹에 대한 법률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블랑 형제의 범죄(?)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이 없다는 점도 고려가 되었지요.  그 후 당국은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통신 시설은 전적으로 정부 업무에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블랑 형제는 두둑해진 돈지갑을 가지고 자유의 몸으로 보르도를 뜰 수 있었습니다.  이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블랑 형제는 유럽 이곳저곳에서 도박장 운영을 하며 돈과 명성을 쌓은 뒤, 당시 경영상의 어려움에 빠져있던 모나코(Monaco)의 몬테 카를로 카지노(Monte Carlo Casino)를 인수하고 그 주변 도로와 철도에도 투자하여 유럽 각국의 귀족들에게 편리하게 올 수 있는 고급 도박 시설을 제공, 오늘날의 유럽 최고의 도박장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두 형제 중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프랑수아 블랑은 71세의 나이로 스위스의 휴양지에서 죽었는데, 남긴 유산이 무려 7천2백만 프랑에 달했다고 합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해커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 것이지요.





(모나코에 있는 몬테 카를로 카지노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해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




여담으로, 해커인 블랑 형제의 성공이 있게 한 기반이 된, 당대의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는 텔레그라프 네트워크를 발명한 클로드 샤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전인 1805년, 자살로 짧은 생을 비극으로 마쳤습니다.  지병에 대한 비관도 있었으나, 그의 발명을 시기한 경쟁자들이 그의 발명은 기존에 육해군에서 사용하던 신호 체계를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방을 집요하게 계속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씁쓸한 마무리지요 ?




Source : https://www.techopedia.com/definition/26361/hacking

https://www.1843magazine.com/technology/rewind/the-crooked-timber-of-humanity

https://en.wikipedia.org/wiki/Semaphore_line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Chappe

https://fr.wikipedia.org/wiki/François_Blanc

https://fr.wikipedia.org/wiki/Code_Chap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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