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2017.10.29 17:41

2012년,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 영화 중에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은접시에 퍼주는 음식을 굶주린 장발장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체 저 음식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화면을 보면 뭔가 고기도 좀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그 음식이 당연히 원작 소설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는 아닙니다만,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는 원작 소설에 묘사가 되긴합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가정부 할머니인 마글루아 부인이 내놓는 미리엘 주교의 평범한 저녁 식사 메뉴가 나열됩니다.


Cependant madame Magloire avait servi le souper. Une soupe faite avec de l'eau, de l'huile, du pain et du sel, un peu de lard, un morceau de viande de mouton, des figues, un fromage frais, et un gros pain de seigle. Elle avait d'elle-même ajouté à l'ordinaire de M. l'évêque une bouteille de vieux vin de Mauves.


그러는 동안 마글루아 부인은 저녁을 차렸다.  물에 기름, 빵과 소금을 넣고 만든 수프, 돼지비계 조금, 양고기 한조각, 무화과, 생치즈, 그리고 큰 호밀 빵 한 덩어리였다.  마글루아 부인은 주교의 그런 평상시 식사에 모브 와인 한병을 보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주교는 매우 높은 직책이고, 또 상당히 고액 연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거의 대부분의 급료를 빈민구제에 써버리고, 정작 본인은 무척 소박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때문에 저런 음식을 먹었던 것이지요.  저 소박한 음식 중에 특히 저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저 수프였습니다.  빵과 기름과 소금과 물만으로 만든 수프라니 ?  그게 무슨 괴이한 음식이란 말입니까 ?


그런데 그 빵 수프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레미제라블 속 장면보다 약 10년 전인 1809년, 나폴레옹 관련 기록에도 나옵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한 뒤 그는 휘하 병사들 중 상당수를 비엔나 시내에 주둔시킵니다.  통상 이런 경우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가정 주택에서 먹고 잤습니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산적처럼 마음대로 아무 집에나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병참 장교가 미리 조사한 결과에 따라 주택의 크기와 가정 형편, 그리고 그 집 가장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어떤 집은 3~4명, 어떤 집은 10여명 씩 배정되었습니다.  이 점령군 병사들이 점잖은 비엔나 중산층 시민의 가정에서 깽판을 쳤을까요 ?  그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습니다.  귀족이나 부유한 중산층 시민의 저택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런 집에는 장교들이 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엔나 시민들도 대부분은 서민이었고, 그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사회적 계급 출신인 프랑스 병사들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병사들과 피점령 시민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비엔나식 돈가쓰인 슈니첼입니다.  드셔본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냥 우리나라 돈까스가 더 맛있다고...)



문제는 비엔나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뭘 먹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유명한 비엔나식 돈까스(Wiener Schnitzel)와 맥주를 대접받고 가난한 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말라비틀어진 빵과 물을 먹어야 했을까요 ?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현지 조달의 달인이라고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고, 달인은 일을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병참부는 배고픈 병사들을 떠맡은 비엔나 시민들에게 '적어도 1인당 이 정도씩을 먹여야 한다'라고 의무 배식량을 정해서 통보했습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빵 1.33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

고기 1 파운드

쌀 0.125 파운드 (2 온스)

말린 채소 0.25 파운드 (4 온스)



여기서 눈에 확 띄는 부분이 바로 저 매일 먹을 빵 1.33 파운드 이외에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라는 부분입니다.  그냥 먹는 빵과 수프에 넣을 빵이 따로 있었을까요 ?  그리고 저 말린 채소라는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  게다가 비엔나에서 쌀을 요구했다고요 ?  그것도 고작 2온스, 즉 56그램 정도의 쌀로 뭘 해먹었을까요 ?  요즘 한국인들이 먹는 쌀밥 1공기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쌀이 약 90그램인데, 한공기도 안되는 쌀인데 말입니다.  


저기서 말린 채소라는 것이 사실은 말린 콩을 뜻한다는 것을 아시면 대략 견적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냥 먹는 빵을 제외한 저 모든 재료는 결국 끓는 물 속에 들어가 뭔가 걸죽한 스튜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올렸던 포스팅에서,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 중 일부를 다시 보시면 좀더 분명해질 것 입니다.


-----------------------------

(목장에서 일하던 소년인 쿠아녜는 징집 명령을 받고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나는 작은 꾸러미를 겨드랑이 밑에 끼고 출발하여, 첫번째 군사 주둔지인 로조이(Rozoy)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숙사 할당 명령서(ordre de cantonnement)를 받아다 집 주인에게 제시했는데, 집 주인은 날 본 척 만 척 하며 홀대했다.  그러고 난 뒤 난 뭔가 스튜를 만들 재료를 사러 밖에 나갔고, 푸주간에서 고기를 받았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고기 조각을 보니 몹시 처량했다.  그것을 들고와서 내 숙사로 정해진 집의 안주인에게 주며 스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한 뒤, 스튜에 넣을 채소거리를 구하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약간의 스튜가 만들어졌고, 그때 즈음에는 그 집 주인 식구들도 나를 어느 정도 좋게 봐주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윗 글에서 보면, 고기는 분명히 돈을 내고 사왔는데, 양배추나 당근 등 채소류는 돈을 내고 사왔다는 것인지 밭에서 그냥 뽑아왔다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배급 식량 목록에는 빵과 밀가루, 와인과 식초는 기록되어도 배추나 양파 등 진짜 채소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런 부식거리는 그냥 '구하는' 것이지 주요 보급품 목록에 넣을 정도로 중요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말고 식이었지요.  또 당시 사람들은 채소를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전에 회사 교육 문제로 유쾌한 멕시코 친구 2명을 만나서 며칠간 잡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가 멕시코는 원래부터 가난한 나라여서, 어디서 친구가 방문하러 오겠다는 전화가 오면 저녁을 만들던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고 반농담반진담으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여보, 콩 수프에 물을 더 부어야겠는걸 ?"


이렇게, 원래 수프라는 것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요리입니다.  게다가 솥 하나만 있으면 여럿을 위한 요리도 적은 연료로 쉽고 빨리 할 수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군대를 위한 요리였지요.  그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요리가 콩소메(consommé)처럼 멀건 국물이라면 무척 실망스러웠겠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병사들은 국물을 뻑뻑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부재료를 넣었습니다.  있기만 하다면 하얀 밀가루가 제일 좋았겠지만 밀가루는 빵을 만들기에도 부족한 것이었고, 쌀이 가장 좋은 재료였습니다.   




(콩소메입니다.  요즘 고급 식당의 요리사들은 저런 콩소메의 국물을 맑게 하려고 계란 흰자를 쓰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정작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질색을 했겠지요.)



쌀은 국물을 잘 흡수하여 그 자체로도 맛이 풍부한 건데기가 될 뿐만 아니라, 전분을 국물에 풀어내어 국물을 진하게 만들어줬거든요.  지금도 치킨 수프 등에는 짧은 국수를 넣기도 하지만 쌀을 넣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삼계탕이 해외에 소개될 때는 스튜가 아니라 chicken soup으로 소개되는데, 닭과 쌀이 든 국물 요리이다보니 서양의 치킨 수프와 동일시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식의 간단한 chicken soup인줄 알고 삼계탕을 시켰다가 닭 한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요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Chicken soup with rice는 이런 거...)




원래 유럽에서 쌀을 가장 많이 먹는 지역이 스페인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지요.  덕분에 남부 프랑스에서도 쌀 요리를 꽤 먹었다는데, 아마 비엔나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쌀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굶주린 병사들을 맞이한 비엔나 시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겠지요.  


하지만 쌀은 유럽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은 아니었습니다.  쌀이 없을 때 대용으로 사용되던 것이 바로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이었습니다.  당시 빵은 버터나 쇼트닝이 들어가지 않은, 갓 구운 상태에서도 꽤 딱딱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구운지 2~3주가 지나거나 잘라 먹다 껍질부분이 남은 빵조각 남은 것들은 정말 딱딱했을 겁니다.  레미제라블 후반부에, 마리우스의 하숙방에서 노닥거리던 에포닌이 방을 나가면서 마리우스의 찬장에 놓여있던 마른 빵조각을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입에 넣고 씹다가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부러졌다고 투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2012년 영화 속에 나온 에포닌은 아주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레미제라블 원작 소설 속의 에포닌은 어린 나이에 이빨도 한두 개 빠진, 정말 헐벗고 병약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게 훨씬 더 현실적인 이야기지요.)




그렇게 마르고 굳은 오래된 빵을 그나마 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수프에 넣어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빵 수프 요리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습니다. 리볼리타(Ribollita)라든가 아콰코타(Acquacotta) 등이 모두 빵을 넣고 끓인 수프 요리이며, 하나같이 가난한 농부들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아콰코타입니다.  이탈리아식 빵 수프입니다.)



마른 빵보다 더 나쁜 것이 원양 항해나 군대에서 많이 먹던 비스킷, 즉 건빵이었습니다.  비스킷을 부수기 위해 돌로 내리치면 가끔씩 비스킷 대신 돌이 부서졌다는 그 공포의 비스킷으로도 수프를 만들어 먹었을까요 ?  예, 그렇게 많이 먹었습니다.  버구(burgoo)라는 것은 염장쇠고기와 잘게 부순 비스킷으로 만든 대표적인 영국 해군 요리(?)입니다.  그나마 부유한 함장인 잭 오브리(Jack Aubrey)를 주인공으로 한 Aubrey & Maturin 시리즈에서는 이 버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가난뱅이 함장이 주인공인 Hornblower 시리즈에서는 수병들 뿐만 아니라 함장실에서 혼블로워가 혼자 앉아 버구를 먹고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결국 미리엘 주교가 먹던 저 빵 수프라는 것은 결코 주교님이 드실 만한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원작에서도 장발장이 '동네 짐마차꾼들이 이거보다는 더 잘 먹는다'라고 말할 정도지요.  미리엘 주교는 '그 사람들 일이 더 힘드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장발장은 눈치도 없이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돈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라고 팩트 폭력을 행사하지요.


이 빵 수프 이야기는 나폴레옹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809년 7월 7일 밤,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지친 나폴레옹은 사령부로 마련한 농가 앞 짚단 위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당대 어느 유럽 군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 군대에서는 종종 벌어지던 일이고,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군대를 강군으로 만들었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그 앞을 지나가던 어느 유격병(voltigeur) 상병 하나가 황제가 그렇게 지쳐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무의 제재도 받지 않고 감히 말을 걸었습니다.  


"폐하, 우리가 끓인 수프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


그러자 잠에서 깬 나폴레옹도 짜증내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지요.  "잘 익었나 ?"


이 상병은 나폴레옹을 자기와 그 동료들이 끓여놓은 수프 남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잘게 부순 마른 빵조각(crouton)까지 넣어 아주 걸죽한 수프가 은으로 된 작은 단지에서 끓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걸 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흰빵과 은단지를 구했나 ?  훔쳤나 ?"


그때 나폴레옹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그 상병은 약탈죄로 즉결처분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병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빵은 의무 마차에서 샀고, 은단지는 어느 죽은 장교의 몸에서 찾은 겁니다."


나폴레옹은 그 죽은 장교가 프랑스군이었는지 오스트리아군이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렇게 나폴레옹과 상병 및 그 동료들은 고된 하루 끝에 든든한 저녁을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  





(보통 시저스 샐러드에 딸려 나오는 사각형 튀긴 빵조각을 크루통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원래 croûton이라는 단어의 뜻은 긴 빵의 껍질이 많은 양쪽 끝부분 또는 굳은 빵조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Source : Napoleon Conquers Austria: The 1809 Campaign for Vienna By James R. Arnold

Les cahiers du capitaine Coignet by Jean-Roch Coignet

Les Miserables by Victor Hugo

https://en.wikipedia.org/wiki/Acquacotta

https://en.wikipedia.org/wiki/Ribollita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21 22:28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해있는 꽤 큼직한 예비 병력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의 아스페른-에슬링 공격이 실패했거나, 최소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지요.  클레나우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지금 나폴레옹 사령부에 저렇게 많은 예비대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대가 없었으므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패배가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이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버텼던 것은 아직 한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동생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었습니다.  


실제로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던 오후 4시 30분 경, 요한 대공의 전위대를 구성하는 일단의 기병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바로 동쪽인 운터지벤브룬(Untersiebenbrunn)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인마가 일으키는 먼지와 총포의 화약 연기로 인해 사방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마르히펠트 평원에는 프랑스군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모두가 두려워하던 요한의 군대가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스도르프의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난데 없이 동쪽 평원에서 벌어지는 소란 소리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참모 장교들은 물론이고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임시 사령부 밖으로 튀어나와 망원경을 들고 요한 대공의 병력을 포착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습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이번 전투의 승리가 요한 대공의 도래로 인해 막판에 패배로 둔갑하는 것이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전투 막판의 이 소동에는 꽤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요한 대공이 주둔하고 있던 브라티슬라바는 윗 그림 속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1741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가 즉위식을 올린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저 그림 속의 성은 브라티슬라바 성, 독일어로 Pressburger Schloss라는 곳인데, 아래 사진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브라티슬라바 성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1809년,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한 외젠의 군대가 결국 이 성에 포격을 가하는 등 이 성은 프랑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1811년, 이 성에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 성은 폐허가 되었지요.  지금의 이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건한 것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7월 4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카알 대공은 서둘러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Bratislava,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 Pressburg)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오스트리아 내부군을 이끌고 서둘러 마르헤크(Marchegg)로 달려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그는 상황이 급하므로 무거운 짐마차 등은 다 버려두고 최소한의 군장으로 강행군을 하라고 지시했지요.  마르헤크는 바그람으로부터 동쪽으로 대략 7시간 정도의 행군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 바그람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는 사람이 (쉬지 않고) 걸어서 가도 10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카알 대공은 그 정도면 충분히 일찍 전령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특별히 전령으로 제4 군단장 로젠베르크의 아들을 골라 보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대공이 있던 브라티슬라바부터 도이치-바그람까지의 거리는 현대적 도로를 따라 걸을 때 약 10시간 거리입니다.  물론 이건 전혀 쉬지 않고 빈 몸으로 가볍게 걸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을 넘던 7월 4일 밤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졌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랑스군은 그런 악천후에 대해 '잘 됐다 ! 오스트리아군이 모르는 사이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라며 재빨리 수만 명이 불안한 부교를 건넜지요.  그러나 로젠베르크의 아들은 같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무렵엔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 소환 명령은 카알 대공이 전령을 보낸지 무려 23시간 후인 7월 5일 아침 6시, 이미 나폴레옹의 대군이 마르히펠트 평원에 전개한 다음에야 요한 대공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자신의 늦은 명령서 전달로 인해 초조해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요한 대공은 그 급보를 받아들고도 반응이 무척이나 심드렁했습니다.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아니 뭐야, 뭐 브라티슬라바를 견제하고 있는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를 공격하라더니...'라는 불평이었습니다.  실제로 카알 대공은 바로 전에 전달한 명령서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외젠이 남겨두고 떠난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 즉 엔가라우(Engerau)에 주둔한 세베롤리(Severoli) 장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고, 요한 대공은 지엄하신 형님의 명령을 집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 앞에 위치한 적을 습격하는 것과 먼 지역으로 행군하는 것은 분명히 준비할 것이 다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 변경이 하루 종일 걸릴 일은 분명히 아닐 것 같은데, 요한 대공의 부대가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진영 밖으로 걸어나간 것은 무려 19시간 후인 7월 6일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이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느린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대공에게는 다 설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베롤리 장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여기저기에 배치시켜 놓았던 부대를 다시 다 불러들이고, 밤새 공격 대기를 기다리며 야전에서 대기한 병사들에게 행군용 배낭을 챙기게 하고, 긴 행군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하는 일에는 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가 백주대로에 보무도 당당하게 마르헤크로 출정하면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세베롤리가 그걸 목격하고는 재빨리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요한이 움직이니 대비하십쇼'라고 알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그는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든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행군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긴 그 덕분에, 나폴레옹은 감시를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7월 6일 저녁 무렵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출발이 늦었다고 해도,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거운 짐도 다 놓아둔 채 결연한 의지로 야간 행군을 했다면 7월 6일 오후 12시 경에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 도착하여 다부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 옆에서 함께 말을 몰았던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보기에, 요한 대공의 부대는 빨리 행군하려는 의지도, 싸움에 도움이 되려는 각오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시키니까 움직인다는 식의 천하태평한 행군이었던 모양입니다.  왜 요한 대공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다면 요한 대공은 군법회의에 회부감이었다는 것입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마르헤크까지는 불과 4시간 반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한 대공의 군대는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네요.)



결국 사방에서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며 초조하게 요한 대공의 군대를 기다리던 카알 대공에게, 오후 2시경 날아온 소식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10시 30분에 씌여진 요한 대공의 편지가 카알 대공의 손에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강행군을 한 끝에 명령대로 마르헤크에 도착했고, 지친 병사들을 좀 쉬게 한 뒤에 다시 오후 1시경에 행군을 다시 시작할테니 늦어도 오후 5시까지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 남동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인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라니 !  그것도 바그람도 아니고 레오폴즈도르프라니 !  새벽 1시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핑계를 댈 폭풍우도 없었으니 정상적으로 행군을 해도 아침 7시에는 마르헤크에 무리없이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릿느릿 도착한 뒤에도 쉬었다가 점심 먹고 오후 1시에 출발하겠다 ?  그래서 오후 5시에 도착할 것 같다 ?  오후 5시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시간이면 프랑스군이 저항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둘러싸고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없어진 카알 대공은 2시 30분경 결국 후퇴 명령서를 작성하여 각 군단장에게 뿌렸습니다.


각지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며 조금씩 밀려나던 오스트리아 군단장들에게는 이 후퇴 명령서가 꼭 가뭄 끝에 단비 같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승리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달려드는 적군과 싸우면서 무너지지 않고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것입니다.  후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자칫하면 공포에 질려 진형을 깨고 무질서하게 패주해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적의 기병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알 대공이 지난 3년간 개혁해놓은 오스트리아군은 확실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군단들이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뒤에 바짝 붙은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포병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괴롭혔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포탄과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에서도 끝내 대오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 배후 깊숙이 침투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그 뒤를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대의 용감무쌍 광기병 라살(Antoine Charles Louis de Lasalle) 장군이 오스트리아 보병 방진을 공격하다 머스켓 총탄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라살의 뒤를 이어 기병대를 지휘하던 마륄라즈(Marulaz)도 치열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저녁 8시 경 그의 말이 죽고 자신도 부상을 입으면서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광기병 라살 장군입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르고 항상 기병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렸는데, 종종 검이 아닌 긴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쥐고 돌격을 지휘하곤 했답니다.  이 그림에서도 큼직한 파이프를 쥐고 있지요.  그런 라살도, 이번 전투에서는 뭔가 군인 특유의 직감이 있었나 봅니다.  로바우 섬에서 도강할 때, 주변 인물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군이 혈투를 벌이며 전선은 조금씩 북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원래의 전장이던 마르히펠트와 루스바흐 언덕에는 전사자들의 시신,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낙오병들, 그리고 그들을 약탈하려는, 또는 도우려는 종군 상인들 및 군인 가족 등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되었지요.  요한 대공의 선두 부대에 딸린 정찰 기병들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 즉 오후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서쪽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나자, 이제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던 프랑스군 낙오병들과 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오스트리아 정찰병들의 눈에 들어온 대혼란은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현장 상황이 한눈에 잘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찰병들은 저 멀리 북서쪽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 소리를 통해, 이미 전선은 저 먼 쪽으로 밀려난 상황이고, 뜨거웠던 전투 현장에 프랑스군 낙오병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된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대로 돌아가 요한 대공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요한 대공은 카알 대공과 연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쿨하게 그냥 마르헤크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되돌아가면서 요한 대공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  조금 더 서두를 걸 하는 후회였을까요 ?  이제 패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을까요 ?  다 아니었습니다.  참모진들에게 투덜거린 요한 대공의 푸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카알 형님은 이 패배의 원인을 내게 뒤집어 씌우시겠구만."


이 소동에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주변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전투 태세를 취했고, 즉각 여러 장교들이 요한 대공의 정세를 탐지하러 말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곧 튀렌느(Henri Amedee Mercure de Turrenne)라는 장교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습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것처럼 2~3만의 병력이 아니라 고작 1만 몇천의 수준이고, 그나마 마르헤크 쪽으로 후퇴 중이라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굳이 그들을 추격하려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바그람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바그람 전투의 에필로그 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10.14 13:37

지난편에서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가 1802년 1월말, 생 도밍그 인근 사마나 만에 집결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원정대의 임무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나폴레옹이 르클레르에게 준 임무는 생 도밍그를 다시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 밑으로 복귀시키라는 다소 고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  투쌩을 죽이라는 말인가요 ?  왜요 ?  투쌩은 한번도 프랑스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거나, 반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명분으로 투쌩을 잡아들이나요 ?  사실 이 원정대의 목적은 생 도밍그의 반란 노예들과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공식적인 임무는 새로운 주지사(Captain general)의 안전한 부임이었지요.  나폴레옹은 투쌩과 구태여 툭탁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화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탄약과 무기를 소모시킬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몇 년 전부터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투쌩의 두 아들을 이 원정대에 포함시켜 투쌩에게 프랑스 중앙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즉, 투쌩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두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한 것입니다.


흔히들 오해하시는 것 중 하나가, 나폴레옹이 생 도밍그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인데, 나폴레옹은 적어도 드러내놓고 그렇게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현지에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흑인 장교들의 직위를 박탈하라는 명령은 분명히 내렸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꼭 노예제를 부활시키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흑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흑인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생 도밍그의 설탕 생산이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노예제든 임금 노동제건 상관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또한 그는 이런 조건들을 관철시키려면, 현지 흑인 군대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2만 명이 넘는 병력과 전열함만 해도 35척인 대함대를 동원했던 것이지요.  또한 나폴레옹은 단순히 무력만으로 생 도밍그를 장악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생 도밍그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투쌩에 의해 프랑스로 쫓겨와있던 뮬래토 장군인 리고 (Andre Rigaud)와 그의 뮬래토 부대도 이 원정대에 포함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들이 현지 뮬래토 엘리트들을 규합하여 투쌩의 권력 기반을 잠식하기를 바랬습니다.





(트레빌 제독은 그다지 잘 알려진 제독은 아닙니다만, 미국독립 전쟁에도 참전했고, 특히 1801년 8월 두차례에 걸쳐 불로뉴 항구를 습격한 넬슨의 소함대를 (비록 육상에서 반격하기는 했지만) 격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은 7척의 배를 잃었고 44명 전사, 126명 부상에 3명의 포로를낸 것에 비해, 프랑스 측은 1척의 배를 나포당하고 8명 전사, 12명 실종, 34명 부상으로서, 기록으로만 보면 프랑스의 승리라고 할만 했습니다.)





(불로뉴 항구 습격 사건입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잃은 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놀라셨을 겁니다.  사실 그렇게 잃은 것들은 대개 이런 대형 보트였지요.)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는 하나의 대선단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함대는 조유즈(Villaret de Joyeuse) 제독 지휘 하에 브레스트(Brest)에서, 어떤 함대는 트레빌 (Louis-René Levassor de Latouche Tréville) 제독 지휘 하에 로슈포르(Rochefort)에서, 또 그 외에도 강톰(Ganteaume) 제독과 리느와(Linois) 제독이 각각 함대를 이끌고 약간씩 시차를 두고 출발했지요.  원래 계획은 이들이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 그러니까 스페인 식민지 쪽인 도미니카 북동쪽 해안의 사마나(Samana) 만에서 집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톰과 리느와의 함대가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르클레르는 결정을 내려야 했지요. 




(조유즈 제독입니다.  그의 활동이 이후 별로 없었던 이유는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그가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단 병력 수송이 끝나고 난 이후에는 그런 대함대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요.)



아마 여러분은 초강대국인 프랑스의 대원정군에 맞선 노예 출신의 어중이떠중이 흑인들로 구성된 군대의 운명은 뻔한 것이라고들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르클레르 자신은 본인의 처지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했습니다.  당시 생 도밍그의 흑인 정규군은 약 2만명으로서, 프랑스 원정군과 거의 비슷한 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아직 집결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고, 상당수가 아직 대서양을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엔 아직 상륙 주정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상륙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만약 흑인 부대들이 주요 항구와 해안을 굳게 지키고 있다면 성공적인 상륙전이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흑인 부대들은 이미 주요 요충지를 지키는 유리한 입장인 것에 비해, 자신들은 낯선 열대의 섬에 상륙하여 공격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또 막연히 흑인 부대들이 무장이 빈약할 것이라고들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이들도 모두 제대로 된 플린트락 머스켓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고 많지는 않지만 포병대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기와 탄약들은 어디서 났던 것일까요 ?  생 도밍그에 주둔했던 프랑스 식민지 수비대의 장비들이나 백인 농장주들의 무기를 빼앗거나 넘겨받은 것도 있었습니다만, 특히 미국에서 들여온 무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는 꽤 노련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투쌩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2년전 뮬래토들의 장군인 리고와 싸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존 아담스 (John Adams)에게 프랑스가 향후 북미 지역에 세력 확장을 꾀할 때 생 도밍그를 기지로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무기 지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 무기들 덕택에 생 도밍그 흑인 부대의 무장 수준은 그다지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포병대가 숫자나 숙련도 면에서 크게 열세이긴 했지만, 생 도밍그 흑인 병사들은 최근 많은 전투를 치루었으므로 전투 훈련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었지요.  무엇보다도, 이들은 어중이떠중이 게릴라 부대나 민병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규 상비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장교 조직도 갖추고 있었고요.  생각해보면 40만 정도되는 생 도밍그에 상비군만 무려 2만이라고 하면, 인구 대비 병사 비율이 5%로서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우리나라도 겨우 1.5%이고, 심지어 북한도 약 3% 수준인데 말입니다.  투쌩은 이제 막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생 도밍그가 영국이건 스페인이건 또는 본국 프랑스이건 유럽 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런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인 존 아담스입니다.  생 도밍그의 반란 사건은 미국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아담스로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생 도밍그에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했습니다.  가장 큰 영향은 뒤에 말씀드릴 루이지애나 매각 조약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생 도밍그에서 도망쳐 온 프랑스계 주민들로 인해 남동부 해안에 프랑스 계통의 크레올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특히 이들이 데리고 온 노예들이 혹시 미국내 노예들에게 반란의 불씨를 번지게 하지 않을까 하고 미국 노예주들은 매우 긴장했었지요.)



하지만 바로 이 제대로 된 정규군 조직이 투쌩의 몰락을 부르게 됩니다.  이런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전 인구의 5%를 병사로 만들자면, 그들에게 (우리나라 군대처럼 애들 과자값이 아닌) 최소한 농장 노동자만큼의 급료를 줘야했고, 장교들에게는 더 많이 줘야 했습니다.  게다가 탄약이나 무기를 미국에서 계속 사와야 했지요.  하지만 최근 10년간 피로 얼룩진 노예 반란 탓에, 한때 그토록 많은 부를 낳아주었던 사탕수수 농장이나 설탕 공장 등은 완전히 피폐되어 있었으므로, 생 도밍그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직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투쌩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즉, 전직 노예들을 원래 소속되었던 농장으로 돌려보내 강제로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효율적인 농장 경영을 위해, 자메이카나 뉴 오올리언즈 등으로 도망쳤던 백인 농장주들을 다시 불러들여 그 전직 노예들을 관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흑인 농부들은 노예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급료를 받는 농장 노동자로서 일하는 것이었지만, 그 원수같던 백인 농장주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농장으로 내몰려 뙤약볕 밑에서 힘든 사탕수수 농사를 지어야 했던 흑인들은 이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원래 사탕수수 농사는 커피 농사 등에 비해 몹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자메이카에서 돈을 벌어오려면 역시 사탕수수가 가장 적합했으므로 투쌩은 사탕수수 농사를 강요했습니다.  이런 강제 조치는 1801년 10월, 즉 프랑스 원정대 도착 직전에 투쌩의 조카인 모이즈(Moïse) 장군 주도하의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잔혹한 무력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사마나 만에 프랑스 함대가 나타났을 때, 투쌩의 정치적 입지는 많이 흔들리는 편이었습니다.  사실 생 도밍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신식 머스켓 소총보다는 자유를 향한 흑인들의 열망과 단결이 어쩌면 더 중요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라를 지키는데는 국민들의 단합이 더 중요할까요 이런 머스켓 소총이 더 중요할까요 ?  글쎄요... 정답은 둘다 !)



르클레르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십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에게는 있지만 투쌩은 가지지 못한 것이 2가지 있었는데, 그것들은 생 도밍그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습니다.


1) 중앙 정부의 권위

누가 뭐래도 르클레르와 그의 원정대는 투쌩이 충성을 맹세한 프랑스 중앙 정부가 파견한 정식 관원들이었습니다.  투쌩은 물론이고, 특히 투쌩의 부하 장교들도 그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특히 투쌩의 전직 노예 출신 부하 장교들은 자신들의 지위, 심지어 자유조차도 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중앙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들은 다시 사탕수수 밭의 검둥이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마음 속으로는 프랑스 중앙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바라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 기동력

전에 나폴레옹이 리볼리 전투에서 부족한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내선이동의 잇점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지요.  투쌩의 병력들은 히스파니올라 섬을 지키고 있고, 르클레르는 그 섬을 침공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투쌩이 그 전선의 안쪽에, 르클레르는 바깥 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동성의 잇점은 투쌩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 있었지요.  히스파니올라 섬은 이탈리아 리볼리와는 달리 빽빽한 밀림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섬이었고, 따라서 투쌩은 (히스파니올라는 실상 꽤 넓은 섬이었으므로) 여러 해안 요충지에 분산된 부하들과의 교신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르클레르의 병력은 함대에 분승하고 있었으므로, 바람만 괜찮다면 오히려 투쌩보다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르클레르는 이 두가지 점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는 섬의 요충지 여러 곳을 동시에 들이치면서, 이를 침공이 아닌 중앙 정부의 권력 인수 인계로 포장을 합니다.  즉 케르베르소(Kerverseau) 장군의 함대는 동쪽의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 나타났고, 부데 (Jean Boudet) 장군은 트레빌 제독의 함대와 함께 산 도밍그의 신흥 수도인 포르토 프랭스(Port-au-Prince, 지금도 아이티의 수도지요)에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자신과 조유즈 제독의 함대는 산 도밍그 최대 도시이자 예전 수도인 캅 프랑셰 (Cap Francais, 프랑스 곶이라는 뜻입니다만, 지금은 이름을 캅 아이시앵 Cap-Haitien, 즉 아이티 곶으로 바꾸었습니다)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흑인과 뮬래토들을 미워하기로 유명했던 로샹보(Donatien-Marie-Joseph de Vimeur, vicomte de Rochambeau) 장군은 캅 프랑셰 약간 동쪽의 요충지인 포르 리베르떼 (Fort Liberte)를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해 투쌩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  사실 프랑스 함대가 사마나 만에 정박했을 때 이미 투쌩은 그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각지를 지키고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만약 프랑스 함대가 흑인 부대장을 불러 회담을 요청하면 반드시 그에 응할 것을 명하고, 혹시 회담 요청이 없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회담 요청을 하라고 했습니다.  르클레르의 예상대로, 말만 잘 통할 것 같다면 투쌩은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에 정면 도전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아무 대화 없이 그냥 상륙을 시도한다면 맞서 싸우지 말고 도시와 농장을 불태우고 산 속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일설에는 후퇴하기 전에 생 도밍그의 백인들을 학살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건 투쌩답지 않은 조치라서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투쌩의 기본적인 전략은 프랑스 중앙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영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황열병에 의해 프랑스군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산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좋은 계획이었습니다.  딱 한가지만 빼고요.  바로 부하들에 대한 통신과 장악력이었지요.





(훗날 앙리 1세로 아이티 국왕으로 즉위한 크리스토프입니다.  그의 자손은 계속 아이티의 권력계에 남았고, 그의 손자도 아이티 대통령직에 오릅니다.)



1802년 2월 3일 캅 프랑셰 항구에 나타나 상륙 허가를 요청하는 르클레르에 대해, 그곳을 지키던 흑인 장군 크리스토프 (Henri Christophe)는 투쌩의 지시대로 협상 전에는 상륙을 허가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2월 5일 바로 옆 동네인 포르 리베르떼 (Fort Liberte)에 로샹보가 갑자기 상륙하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크리스토프는 투쌩의 계획대로 시가지와 농장들에 불을 지르고는 산 쪽으로 퇴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토 도밍고를 지키고 있던 투쌩의 동생 폴 루베르튀르 (Paul Louverture)는 가짜 편지에 속아 순순히 프랑스군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협력했고, 남쪽의 포르토 프랭스를 지키던 라플륌(Laplume)도 부데(Budet)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주요 도시와 마을에서도 교전 회피, 초토화 작전 이후 후퇴라는 대전략을 따르지 않고, 격렬한 저항전이 펼쳐지거나 그냥 프랑스군을 받아들이는 모습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역시 최근 투쌩의 강압적인 정책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또 일부 흑인 장교들이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에 굴복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르클레르는 '모든 흑인들의 자유와 기존 직위, 재산과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주겠다'라고 선언을 했으니, 그런 르클레르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흑인 지휘관들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데살린은 대체 투쌩이 이런 인물을 부하로 거느렸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포악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상륙 초기에 르클레르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프랑스군은 당시 전황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40만의 흑인으로 가득찬 섬에 불과 1만 몇 천 되는 병력으로 상륙했으니 그럴만도 했겠지요.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사정 때문에, 불과 10일 만에 프랑스군은 주요 항구와 도시, 주요 경작지들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르클레르 본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지요.  한편 투쌩은 자신의 충복인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훗날 아이티의 왕이 됩니다)와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훗날 아이티의 황제가 됩니다)와 함께, 불과 수천 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북부 산악지대에 숨어 있었지요.  르클레르는 이런 초기의 성공을 투쌩에게도 적용하고자 그의 두 아들을 투쌩에게 보내주며 '항복하면 투쌩을 르클레르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그의 장군직과 재산 등을 모두 인정해주겠다'는 나폴레옹의 편지까지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투쌩은 르클레르의 제안을 거절했지요.  아무리 그 말이 달콤하다고 할지라도, 정말 선의로 왔다면 저렇게 전함과 2만이 넘는 병력을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러는 사이에 강톰 제독과 리느와 제독이 이끄는 함대들이 도착하여 병력이 증원되자, 르클레르는 2월 17일, 투쌩을 잡기 위해 토끼몰이식의 광대한 작전을 시작합니다.  로샹보가 포르-리베르떼로부터  남서쪽 방향의 생-미셀 (Saint Michel)로 밀어붙였고, 또 아르디(Hardy) 장군이 카프 프랑셰로부터 남쪽의 마르멜라드(Marmelade)로, 데푸르노(Desfourneaux) 장군이 플레상스(Plaisance)로 진격했습니다.  동시에 윔베르(Humbert) 장군이 포르 데 페 (Port-de-Paix)에 상륙하여 트롸-리비에르(Trois-Rivières) 협곡으로 진격했고, 남쪽에서는 부데 장군이 뽀르또 프랭스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사방에서 투쌩의 저항 세력을 위협하여 그들을 중서부 해안인 고나이브(Les Gonaïves) 지역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잘 먹혀들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은 병력의 우위보다도, 르클레르 측이 바다를 통해 손쉽게 통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지요.





(상륙 이후 프랑스군의 진격 방향입니다.)



투쌩의 병력은 여기저기서 고립되어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크레따-피에로(Crête-à-Pierrot) 요새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면서 거기에 비축해두었던 무기와 탄약을 상실한 것이 큰 타격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투쌩에게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거 영국군과 싸울 때도 이런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르클레르의 위협은 당시 영국군과의 전쟁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해안가의 도시들과 경작지를 점유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이번 르클레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목적은 투쌩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므로, 집요한 추격이 산속까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흑인 부대를 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으로 꼬여냈습니다.  이는 영국군과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일이었지요.  특히 이미 항복했던 라플륌이나 모레파(Jacques Maurepas) 등의 흑인 장교들을 르클레르가 상당히 우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쫓기는 흑인 병사들, 특히 장교들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투쌩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습니다.  먼저 크리스토프가 항복을 했고, 곧 이어 데살린도 프랑스군에게 투항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홀로 남은 투쌩도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도 결국 르클레르에게 항복해야 했지요.


5월 6일, 투쌩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이제 프랑스군의 본거지가 된 캅 프랑셰로 걸어들어가 르클레르와 회담 후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조건은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투쌩은 장군으로서 직위를 모두 인정받았고 앞으로도 그에 따른 예우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에너리(Ennery) 지역의 농장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일부 직속 경호 병력을 제외하고는 실제 권력은 모두 양도해야 했고,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집니다.  그에 비해 크리스토프와 데살린은 항복 이후에도 흑인 병력들에 대한 지휘권을 맡아서 현역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르클레르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르클레르가 받은 명령은 흑인 부대들을 모두 해체하고 그 장교들도 모두 퇴역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만, 현장에서 보니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프랑스군만큼이나 수가 많은 흑인 병사들을 당장 해산시켜 농장 노동자로 돌려보내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생 도밍그의 전투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규모의 산적화된 흑인들이 아직도 각지에서 프랑스인들을 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현실과 타협하여 일부 흑인 장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그 병력을 자신의 휘하에서 운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지요.





(색칠된 부분이 황열병 발생 지역입니다.  저쪽 동네에 갈 때는 반드시 황열병 백신을 맞고 가셔야 합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원래 황열병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따라 온 병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그 무서운 손님이 프랑스군의 병영을 방문했습니다.  바로 황열병, 그분이셨지요.  한 1~2주 만에 곳곳에서 병사들이 쓰러져갔습니다.  이 황열병이라는 것은 사실 걸리기만 하면 100% 다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열병 바이러스를 가진 모기가 사람을 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황열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었고, 모기 침 속에 어느 농도 이상의 바이러스가 축적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또 황열병이 발병을 한다고 해도, 그 중에서 약 15% 정도의 사람만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다 그 중 반이 죽음에 이르는, 진짜 황열병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나머지 85%는 그냥 열병을 앓다가 낫는 정도로서, 이들은 실제로는 황열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였습니다.  아무튼 이 황열병이 프랑스군을 덮치자, 병사들이 정말 신속하게 죽어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계속 황열병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던 흑인들보다 이제 막 프랑스에서 도착한 원정군이 황열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르클레르는 크게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는 황열병의 창궐까지는 몰라도, 이를 틈타 흑인 반란군들이 극성을 부리며 습격을 해오는 상황 뒤에는 투쌩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은 나폴레옹으로부터 흑인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결국 투쌩을 잡아들여야만 했겠지요.  그는 투쌩을 체포하는 명분으로, 투쌩이 썼다는 2통의 편지를 제시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프랑스군의 황열병 상태를 잘 주시할 것과, 르클레르의 건강이 나빠지면 거사를 개시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투쌩은 그런 편지를 썼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만, 사실 그 필체나 맞춤법이 틀린 것, 무엇보다 그 문맥 속에 흐르는 기백과 정신은 누가 봐도 투쌩이 쓴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사실이야 어찌되었건 이를 명분으로, 르클레르는 투쌩을 체포하기로 합니다.





(투쌩의 초상화는 사실 모두 엉터리입니다.  아무도 투쌩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사람은 없고, 그냥 생김새 이야기를 대충 듣고 그린 것이라네요.)




투쌩의 체포는 프랑스군으로서는 다소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혹시 투쌩의 농장으로 병력을 보내 체포하려다가 투쌩이 다시 산악 지방으로 도주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하게 될까봐, 초소 배치 문제를 논의하자는 핑계로 투쌩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던 브뤼네(Brunet) 장군의 사령부로 투쌩을 초청했습니다.  투쌩과 만나 처음에는 다정하게 포옹으로 인사해야 했던 브뤼네 장군은 입장이 난처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회의 도중에 갑자기 브뤼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무장 병사들이 방에 난입하여 투쌩을 포박했습니다.  이런 식의 비겁한 속임수로 투쌩을 체포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프랑스군이 투쌩을 신사로 인정하지 않았거나, 프랑스군 자신이 신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요.  아무래도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투쌩의 언행이나 그의 작전 능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감시한 프랑스측 인사들이 기록한 체포된 투쌩의 말들을 보면 정말 투쌩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합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투쌩은 몸집이 왜소한 편이었으나, 그의 기지와 언변, 그리고 신비감을 동반한 카리스마에 대해서는 프랑스측 인사들도 모두들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잡혀온 투쌩을 맞이한 어느 프랑스 장교가 '하, 드디어 널 잡았구나, 투쌩 ?' 하고 놀리자)


"그래, 너희들이 내 머리를 잡았지.  하지만 내 꼬리는 못 잡았어."


(그를 프랑스로 호송한 사바리(Savary) 장군이 '이젠 검둥이 나폴레옹 역할을 못하게 생겼군, 안그런가 ?' 하고 놀리자)


"나를 제거하는 것은 생 도밍그 자유의 줄기를 자르는 것에 불과하다.  자유의 나무는 다시 자랄 것이다.  그 뿌리는 깊고 넓으니까."


(그의 14살짜리 아들이 사슬에 묶여 끌려온 투쌩을 보고 울며 그의 품에 안기자)


"내 아들은 울어서는 안된다.  내 아들이라면 불행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또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멋진 말들을 할 수 있으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겠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 자체에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프랑스로 잡혀간 투쌩은 쥐라(Jurat) 산맥의 포르 드 죽(Fort de Joux)의 차가운 감방에서 방치되어 있다가, 약 1년도 안되어 백인들의 속임수에 대한 분노와 울분 속에서 폐렴과 뇌졸증으로 인해 1803년 4월 7일 사망하고 맙니다.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나폴레옹에게 누군가가 '그 프랑스에게 배신을 당해 감방에서 죽은 투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나폴레옹은 그저 '불쌍한 검둥이 노예 하나가 죽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투쌩이 숨을 거둔 포르 드 죽 성채입니다.)



한편, 투쌩을 비겁한 수로 잡아들인 르클레르도 두발 쭉 뻗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투쌩을 잡아들인 것에 더해, 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흑인들로부터 무기를 수거해 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산속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들조차도 공공연한 반란에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생 도밍그에 노예 해방 선언을 했던 프랑스인 관료 손쏘낙스(Sonthonax)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투쌩을 도와 흑인 병사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면서 만약 백인들이 다시 이 무기들을 거두어들이려 한다면, 그건 너희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예언아닌 예언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르클레르는 이제 그의 부하가 된 크리스토프와 데살린 등 과거 투쌩의 흑인 부하 장군들을 동원하여 이런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흑인들끼리도 이해 관계와 질투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원수지간이 많았거든요.  이 와중에 블레어(Charles Belair)나 모레파(Jacques Maurepas), 폴 루베르튀르(Paul Louverture) 등 과거 투쌩의 부하 장교들이 많이 희생됩니다.  특히 난폭한 성격이었던 데살린은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과거의 동료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타는 이웃 섬이자 같은 프랑스 식민지인 과달루프(Guadeloupe)에서 날아옵니다.  과거 호엔린덴에서 영웅적인 전과를 보여주었던 리슈팡스(Antoine Richepanse)가 본국의 훈령에 따라 과달루프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 소식이 생 도밍그에 도착하자 생 도밍그는 거의 공공연한 반란에 빠져듭니다.  노예제의 부활이 곧 생 도밍그에서도 선언될 것이라는 것이 쉽게 예상되었고, 이는 생 도밍그의 흑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슈팡스는 호헨린덴에서의 활약이 빛을 잃을 정도로 무자비한 통치를 과달루프에서 펼쳤습니다.  천벌을 받았는지 그도 황열병에 걸려 죽었지요.  모두 22명의 프랑스 장군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모기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르클레르는 광적이다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흑인 토벌에 나섭니다.  전에도 언급되었습니다만, etouffoir(질식)라는 이름의 일종의 가스선을 만들어 유황 연기로 흑인들을 대량으로 질식사시킨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  이때 르클레르가 본국의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르클레르가 거의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제 내게 남은 수단이라고는 공포 밖에 없으니, 그걸 쓰겠습니다."


"산속의 흑인들은 남자건 여자건 12살 이하의 아이들을 빼고는 모두 죽여야 합니다.  평야 지대의 흑인들도 절반은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르클레르는 끝까지 노예제를 생 도밍그에 다시 선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럴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흑인들이 공연히 오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때가 무르익기 전에는 노예제를 다시 선포할 생각하지 마십시요... 정부의 선포에 따라 제 후계자가 노예제를 수립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제가 흑인들을 달래기 위해 전에 그토록 많은 약속과 선언을 했는데, 이제 와서 제가 과거 약속을 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이런 내용들도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데살린과 크리스토프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그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는지, 또 나폴레옹이 확실히 돈 문제에는 인색했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아직까지는 데살린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안 하고 있었으나, 이제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아직 형식적으로나마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흑인 병사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프에게는 그나마 좀더 믿음이 갑니다.  하지만 이들을 체포하려한다면 동시에 둘다 잡아야만 합니다."


"약속하신 1만2천의 증원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6,723명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곧장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젠 모조리 죽어버렸습니다.  내 위치는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손실은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한 달 전 도착한 증원군은 이미 모두 다 죽었습니다.  현재 바다를 건너오는 증원 병력 외에도 1만 명을 더 보내주십시요.  그리고 약속 어음 말고 현금으로 2백만 프랑도 함께 보내주십시요.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내면 제1통령께서는 답장을 안하시더군요.  제 입장이 되어 보십시요... 저는 이 섬을 떠날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입니다.  생 도밍그를 유지하려면 정예병력 7만 명을 현지에 유지해야 합니다."





(생 도밍그에서의 전투는 양측 모두 야만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는 잔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백인 군대의 군모가 꽤 특이하지요 ?  맞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폴란드군입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해방시켜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던 폴란드군에 대해, 나폴레옹은 조국의 해방 대신 보답으로 낭만적인 카리브해 여행권을 끊어주었습니다.  강대국에 의존하는 독립운동은 항상 끝이 좋지 않습니다.)



8월이 되어 전황이 나빠지자 르클레르는 현지에 와있던 폴린과 그의 아들 데르미드(Dermide Louis Napoleon)를 프랑스로 돌려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여기서는 조세핀처럼 군림한다, 여기서는 내가 1인자다'라며 일종의 왕비 생활을 즐기던 폴린은 '품위 유지비로 10만 프랑을 주기 전에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땡깡을 부려 그렇쟎아도 기진맥진한 르클레르의 복장을 터지게 했습니다.  10만 프랑이면 현재 가치로 약 12억 정도의 돈인데, 르클레르가 본국 노벨라라(Novellara) 인근에 가지고 있던 부동산 가격이 고작 16만 프랑이었므로, 르클레르에게는 그런 큰 돈이 있을리 없었습니다.  남편이 돈을 내놓지 못하자 폴린은 그냥 남기로 합니다.  문제는 폴린의 방종한 생활은 여기서도 이어져,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말단 병사 몇 명과도 대담한 정사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날 작전 회의 중 르클레르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게 됩니다.  이는 황열병의 시작을 알리는 증상이었지요.  폴린은 이때서야 아내 역할을 다하여 성심껏 르클레르를 간호했는데,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고, 11월 1일, 르클레르는 투쌩보다도 오히려 먼저 저승길을 떠납니다.  폴린과 그 아들은 르클레르의 화장한 유해와, 따로 떼어낸 그의 심장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메리카 쪽에 발을 담그게 된 로샹보 자작입니다.  르클레르와 함께 못된 짓을 아주 많이 저질렀습니다.)



르클레르의 후임은 로샹보 장군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흑인과 뮬래토들을 증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로샹보가 사령관이 되자 전부터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흑인 장군들인 데살린과 크리스토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백인 측에 붙었던 뮬래토 장군인 페티옹(Alexandre Petion)까지 반란군 측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타격은 바로 생 도밍그 원정을 가능하게 했던 아미앵 평화 조약의 붕괴였습니다.  즉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다시 프랑스의 항구들을 봉쇄한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실상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되었습니다.  결국 1803년 11월 베르티에르(Vertières) 전투에서 흑인 반란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한 로샹보는 결국 생 도밍그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라하게 돌아가던 로샹보는 그나마 도중에 타고 있던 프리깃 라 쉬르베이앙트(La Surveillante) 호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는 바람에, 전쟁 포로로 영국에 무려 9년간이나 잡혀 있다가 1811년, 포로 교환에 의해 겨우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최종적인 패배를 결정지은 1803년 베르티에르 전투의 모습입니다.)



이후 아이티(Haiti, Ayiti, 아메리카 타이노 족의 언어나 아프리카 언어로나 모두 집 또는 성스러운 대지를 뜻한다고 합니다)로 이름을 바꾸면서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생 도밍그의 그 후 이야기는 그다지 밝고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먼저, 정권을 잡은 데살린은 황제로 즉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생 도밍그에 아직 남아있던 백인 중 흑인과 결혼하기로 약속한 백인 여자만 빼고 모두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정상적인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온순한 주인 밑에서 그런대로 무난한 노예 생활을 했던 투쌩과는 달리, 포악한 주인 밑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데살린은 백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흑인들과 뮬래토들도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결국 그는 1806년 암살되고 말았지요.





(데살린의 동상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데살린의 암살은 (물론 황제인 자기 자신을 빼고는) 1인1표제의 만민 평등을 주창한 데살린의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뮬래토들 및 그와 결탁한 외국 세력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독재자는 그냥 독재자에요.)



그 뒤를 이은 것은 남북 분단의 시대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캅 프랑셰를 기반으로 한 앙리 크리스토프가 앙리 1세 (Henri I)로서, 황제가 아닌 왕으로 즉위했고, 남쪽에서는 포르토 프랭스를 기반으로 뮬래토 장군인 페티옹(Alexandre Petion)이 종신 통령으로 지배하는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이 두 분단국의 정치는 각기 특색이 있었는데, 크리스토프, 아니 앙리 1세는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과거 투쌩처럼 흑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물론 노예제는 아니고 임금제 노동이었지요.  반면에 페티옹은 싼 값에 토지를 국민들에게 매각하여 각자 마음대로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뮬래토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페시옹입니다.  그의 정치는 흑인보다는 뮬래토 엘리트들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이티 경제에 매우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화했던 그의 정치로 인해, 국민들은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치는 양국의 모습을 상당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북쪽의 앙리 1세의 국민들은 사탕수수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물질적으로는 꽤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 있었으나, 노예 생활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강제 노역으로 인해 불만이 컸습니다.  그에 비해 자유방임적인 경제 생활을 허락한 남부 공화국은 국민 대다수가 힘든 사탕수수 농사보다는 당장 먹을 곡식과 좀더 쉬운 커피 농사에 치중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는 매우 쪼들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자꾸 탈출하여 앙리 1세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병으로 신체 마비까지 온 앙리 1세는 1820년 자살을 택했고, 결국 아이티는 페티옹의 후계자인 부아예(Jean-Pierre Boyer)에 의해 다시 통일됩니다.  부아예는 내친 김에 스페인령 산토 도밍고까지 완전 정복하여, 드디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지요.  그러나 온화한 페티옹과는 달리 잔혹했던 독재자 부아예의 정치는 산토 도밍고(지금의 도미니카) 주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결국 다시 아이티와 도미니카는 분할을 맞게 됩니다.  지금도 도미니카 사람들은 아이티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페시옹의 뒤를 이은 부아예도 당연히 뮬래토 출신입니다.)



아이티의 미래를 크게 어둡게 한 것은 이런 정치적 불안정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력으로 독립한 아이티는 항상 전 주인인 프랑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프랑스에는 아이티의 토지와 농장 뿐만 아니라, 아이티 국민 전체가 노예로서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부자들이 있었고, 프랑스는 이런 부자들의 입김에 좌우되는 나라였으니까요.  부아예는 이 문제를 결국 돈으로 해결하기로 합니다.  즉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대신, 과거 주인들이 입은 경제적 피해를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1825년 7월 11일, 보이에르는 프랑스에게 1억5천만 프랑을 5년 안에 지불하겠다는 조약을 맺습니다.  이건 아이티의 낙후된 경제력을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결국 이 금액은 1838년에 가서 9천만 프랑으로 감축되었으나, 그래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으므로, 결국 아이티는 이 돈을 프랑스 은행에서 꿔서 프랑스 정부에 갚아야 했습니다.  즉, 아이티는 시작부터 그 미래를 프랑스에게 담보로 잡힌 상태였던 것이지요.  원리금 상환에 짖눌린 나라가 잘 돌아갈 리가 없었고, 지금도 아이티는 무척 빈곤한 나라로 남아있습니다.  아, 참고로 부아예는 1843년에 성난 빈민들에게 쫓겨나 결국 프랑스에 정착했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아이티는 빚에 허덕이는 나라입니다.  지금은 물론 프랑스 빚보다는 미국과 IMF에 진 빚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런 훗날 이야기말고도, 생 도밍그의 반란과 독립은 나폴레옹과 대서양을 둘러싼 나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생 도밍그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제국을 신대륙으로 뻗치려 했던 나폴레옹은, 돈을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병력과 돈을 잡아먹기만 하는 생 도밍그의 현실을 보고는 입맛이 싹 가셨습니다.  그는 예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손바닥만한 생 도밍그 하나를 재정복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저 넓은 루이지애나를 경영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게다가 말타나 이집트 등을 둘러싸고 영국과의 교섭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나폴레옹은 곧 영국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밖에 없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1803년 4월 30일, 미국과 루이지애나 매각 협정을 맺습니다.  가격은 현금 6천만 프랑에 그 동안 미국에 지고 있던 빚 1천8백만 프랑의 상계, 그러니까 총 7천8백만 프랑이었습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억3천3백만 달러, 그러니까 2650억원 정도입니다.  엄청난 헐값이었지요.  게다가 손바닥만한 생 도밍그의 독립을 인정해주고 받아낸 돈이 무려 9천만 프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부동산 장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투쌩과 생 도밍그 노예 반란이 없었다면, 어쩌면 북아메리카 지도는 매우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미국에서 발행된 루이지애나 매각 기념 우표입니다.  저기에 보이듯이 프랑스측에서는 마르부아가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투쌩이 시작한 아이티 독립 사건의 가장 중대한 의미는 바로 흑인에 의한 흑인의 구원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노예 반란 사건이나 탈출 사건 등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반란이 바로 이 아이티의 독립입니다.  특히 이 사건은 백인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불쌍한 흑인을 구원해준 것이 아니라, 흑인이 총칼을 들고 백인과 싸워 이겨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흔히 흑인 노예가 해방된 것은 영국의 인권 단체의 활동이나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에 의한 것이라고 역사에 씌여 있습니다.  반면 이렇게 흑인 스스로가 흑인을 구원한 사실은 구미 위주의 역사에서 매우 등한시되는 사건입니다.  흑인이 백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백인들 위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한 사실이고, 또 투쌩은 백인 사회에서는 무척 불편한 영웅인 셈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흑인인 이 시대에도,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흑인 이야기는 대부분이 백인이 흑인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투쌩과 생 도밍그의 반란이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투쌩의 흉상도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쿠바에 세워진 것입니다.  백인들에게 투쌩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인가 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