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5.28 23:55

사칠레 전투의 패배를 수습하며 의기소침 해있던 외젠에게 공화국 시절의 낡은 군복을 입고 나타난 장군은 그 군복만큼이나 이름도 독특했습니다.  막도날드(É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라는 이름이었거든요.  스당(Sedan) 출신으로 엄연한 프랑스인인 이 사람이 누가 봐도 스코틀랜드 계통의 이름을 가지게 된 사연은 간단했습니다.  그 가문은 실제로 스코틀랜드 서쪽 섬인 사우쓰 우이스트(South Uist)가 원래 고향으로서, 퇴출된 영국 및 스코틀랜드 연합 왕국의 카톨릭 왕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박해받는 그런 집안이 같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망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막도날드의 초상입니다.  그로 Gros의 작품입니다.)




그가 굳이 공화국 시절의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에도 그의 가문 내역처럼 사연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는 원래 뒤무리에(Charles François Dumouriez) 및 피슈그뤼(Jean-Charles Pichegru) 장군 밑에서 복무한 군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뒤무리에는 도중에 오스트리아 측으로 망명했고, 피슈그뤼는 반혁명 활동을 펼치다 투옥되어 암살된 사람입니다.  나폴레옹과는 줄을 댈 기회가 없었지요.  그러다 마침내 나폴레옹과 연을 맺을 기회가 왔습니다.  1797년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배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나폴레옹이 그 지역을 싹쓸이하여 오스트리아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맺은 뒤 파리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로마 점령이나 나폴리 왕국 점령 등 뒤치닥거리스러운 임무만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의 군 경력에서 결정적인 기회가 또 온 것은 1799년의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입니다.  중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막도날드는 3만6천의 병력을 이끌고 불과 2만2천의 병력을 가진 수보로프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북진했으나, 트레비아(Trebbia)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주베르(Barthélemy Catherine Joubert)나 마세나 같은 명장들도 이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이 패배의 치욕이 좀 희석되었다는 점이었지요.  아무튼 막도날드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계속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경력을 쌓았고, 나름 이탈리아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와 친하게 지냈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최대 정적이었던 모로가 투옥된 뒤 1804년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난 뒤, 막도날드도 모로파로 몰려 아무런 지휘권은 커녕 공직조차 맡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그가 가진 군복은 1804년 이전, 즉 나폴레옹이 황위에 오르기 이전의 공화국 시절의 낡은 군복 뿐이었던 것입니다.  


1809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외젠에게 '전쟁 발발시 일단 피아베 강 서쪽으로 후퇴하라'는 편지 외에도 쓸만한 야전 지휘관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세핀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특출날 것이 없었던 약관의 외젠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쓸만한 야전 지휘관은 다 자신의 그랑 다르메에서 한자리씩을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발탁된 것이 실업자로 있던 막도날드였습니다.  막도날드는 어쨌거나 방면군 하나를 통째로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고위 장교였고, 또 마침 이탈리아 방면의 전문가였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이 꺼려했던 것은 모로였지 막도날드 따위가 아니었고, 또 이제 황제 5년차로서 더 이상 그와 정치적인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기피 인물이었다는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막도날드의 참여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높여주는 효과를 냈습니다.  외젠은 휘하에 있는 3개 군단 중 가장 강력한 군단을 막도날드에게 맡겼는데, 막도날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한 지휘력으로 군단 편성과 병사들 사기 진작에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사기가 계속 오르고 있었습니다.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전면적인 퇴각 중이었거든요.  요한 대공은 어차피 병력도 부족한 마당에 본국으로부터 '이탈리아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본진이 털리고 있으니 빨리 돌아와 네 형을 도우라'는 급보를 받고 열심히 퇴각 중이었습니다.  그 뒤를 쫓는 외젠도 마냥 여유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임무는 이탈리아 왕국 방어가 아니라,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 본진과 합류하려는 요한 대공을 요격하여 어떻게든 그쪽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던 것이지요.  요한에게나 외젠에게나 성패의 제1 요건은 결국 스피드였습니다.


도둑과 경찰이 추격전을 벌일 때는 도망치는 쪽이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수만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대끼리 추격전을 벌일 때는 대부분 도망치는 쪽보다 추격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군대가 진격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후퇴할 때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므로, 도망치는 쪽의 발걸음이 더 느린 경우가 많거든요.  가령 부상병들의 처리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진격할 때는 그냥 부상병을 후방에 버려두고 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부상병을 두고 간다는 것은 곧장 포로가 된다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데려가자니 행군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지요.  결정적으로, 강과 같은 장애물을 건너느라 지체할 수 밖에 없을 때, 뒷덜미를 잡히기 딱 좋았습니다.  


막 후퇴가 시작된 4월말, 가장 먼저 만난 큰 강인 아디제(Adige) 강가에서 당장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진 칼디에로(Caldiero)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대는 이탈리아군 선발대를 효과적으로 뿌리치고 도강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결국 요한 대공은 피아베(Piave) 강 근처에서 다시 따라잡히고 맙니다.  5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이 선까지 후퇴하라고 지시했던 피아베 강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강을 건넌 뒤 다리를 다 태워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나 현지 지리에 밝은 쪽은 당연히 이탈리아군 쪽이었습니다.  외젠은 다리 없이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여러 곳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군 본진은 이미 꽤 멀리까지 도망쳤고 강 건너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은 소수의 후위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칼디에로 전투에서 지나치게 서두르다 오스트리아군을 놓친 바 있던 외젠은 이번에는 병력을 다 모은 뒤 대규모로 강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이 외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줍니다.


외젠이 파악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본진도 강가에서 불과 4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요한 대공 입장에서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쫓기며 빈까지 갈 수는 없다고 보고, 이 곳에서 외젠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가겠다는 계획이었거든요.  오스트리아군은 약 2만8천, 이탈리아군은 약 4만4천으로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습니다만, 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피아베 강이었지요.


외젠의 계획은 먼저 드세 백작(Comte Dessaix, Joseph Marie, 마렝고의 드제 Desaix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이 이끄는 강력한 전위대가 여울목을 건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막도날드의 군단부터 시작해서 병력을 투입할 생각이었습니다.  동시에 다른 여울목을 통해서 기병 사단들을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훗날 워털루의 그루시 맞습니다) 지휘 하에 투입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위치를 파악해둔 다른 여러 여울목을 통해서도 다른 군단들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7시부터 드세 휘하의 전위대 5천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어렵게 강을 건너자마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군도를 휘두르며 그들을 반겼습니다.  드세는 당황하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전위대를 2개의 커다란 방진(square)로 만들어 적 기병에 대항했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도 결코 아마추어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보병들이 방진을 만들자, 정말 교과서처럼 오스트리아군에서는 포병대가 나섰습니다.  


당시 병종간의 천적 관계는 대충 이랬습니다.  보병끼리 싸울 때는 넓게 횡대로 펼쳐진 진형이 좋았습니다.  소총의 일제 투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또 적 포격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펼쳐진 횡대는 군도를 뽑아든 기병들의 돌격에 완전 취약했습니다.  기병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병들은 3열 또는 4열로 밀집하여 직사각형의 방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말은 빽뺵히 늘어선 총검 대오를 결코 뚫을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이런 보병 밀집 방진은 또 포병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감이었습니다.  대포알 한방에 6~7명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지니까요.


이렇게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이탈리아 보병들을 위협하여 방진을 만들자마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나선 것은 정말 기가 막힌 기-포병의 콜라보레이션이었지요.  밀집된 이탈리아 보병들은 곧 불을 뿜은 오스트리아 대포에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세는 이번에는 당황하여 외젠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외젠은 도강 순서를 급히 변경하여 포병대를 급파, 드세의 전위대를 지원했습니다.  전투는 곧 포병끼리의 치열한 포격전으로 전개되었고, 드세는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세의 안도도 잠시였습니다.  이탈리아군 포병들은 너무 급히 여울목을 건너느라 탄약을 별로 못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 포탄이 떨어진 포대들은 하나둘씩 슬그머니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다른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넌 이탈리아 기병대가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덮쳤습니다.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기병대들도 다시 일제히 뛰어나왔고, 곧 혼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이탈리아 기병대의 완승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들은 그 지휘관까지 전사해버렸고, 전체 24문의 대포 중 14문이 이탈리아군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러는 사이 막도날드의 군단이 꾸준히 강을 건넜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도나우 강 부교를 끊어 놓은 것이 궁극적으로는 평년보다 일찍 시작된 검은 숲의 눈 녹은 물에 의한 수위 증가였듯이,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피아베 강은 이날 하루 중 꾸준히 유속과 수위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너다 물살에 떠내려가 결국 익사하는 병사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오후 3시 경이 되자 물살이 너무 거세져, 결국 외젠은 여울목을 통한 도강을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이미 정오 무렵, 막도날드는 휘하 군단 병력의 약 3/4 정도를 건너게 한 뒤였거든요.  요한 대공은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이탈리아군의 공격이 거세게 나오자 당황했는지 휘하 병력을 시원시원하게 투입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사이, 막도날드는 포병들의 맹렬한 포격을 시작으로 정석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뒤늦게나마 예비대인 정예 척탄병 여단을 투입하며 반격했으나 이미 전세는 이탈리아군 측으로 완전히 기운 뒤였습니다.  전체적인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으나, 오후 1시 경에 이미 전투의 절정은 지난 상태가 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나마 진형을 유지한 채 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약 14%의 사상률인 약 1200의 사상자와 약 2700의 포로 및 행방불명자를 내며 대패했으나, 완전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젠의 패기에 질린 요한이 초심과는 달리 소극적인 공세를 펼쳤던 덕분에 패배 이후에도 나름 수습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로는 요한 대공은 감히 외젠의 추격에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 후퇴만 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칠레에 이르러서는 휘하 2개 군단을 둘로 나누어 원래의 각각의 근거지로 되돌려 보냅니다.  즉, 제9 군단은 원래 카르니올라(Carniola, 현재의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서 출발했었고, 제8 군단은 오스트리아 카린티아(Carinthia) 지방의 주도인 빌라흐(Villach)에서 편성된 부대였는데, 이들을 각각 류블랴나와 빌라흐로 나누어 보낸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9 군단을 그쪽으로 보낸 것인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그 뒤를 추격하는 외젠은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며 아주 쉽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나폴레옹 쪽으로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요한과 외젠은 소규모의 전투를 계속 벌이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북진하여 결국 카알 대공과 나폴레옹에게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그람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되고, 요한 대공의 병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그람 전투 시리즈에서 보시겠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aldiero_(1809)

https://en.wikipedia.org/wiki/Jacques_MacDonal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rebbia_(1799)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Piave_River_(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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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5.21 19:11

여기서 잠시 시간을 약 2달 전으로 되돌려 1809년 4월 경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은 크게 3갈래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주력을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하는 동안, 페르디난트 대공은 바르샤바 공국을 들이치고, 셋 중 가장 어렸던 요한 대공은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을 향했지요.  이 삼형제의 능력치는 정확하게 나이 순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장이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적 역량보다도 그 온후하고 공정한 성격을 기반으로 한 리더쉽으로 군의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27세의 약관이었던 요한 대공이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17살이던 1799년 그려진 그의 초상화입니다.)


요한 대공은 이 두 형에 비해 훨씬 더 굉장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전투 경험이 있었습니다.  상대는 프랑스의 명장이자 나폴레옹의 정적이었던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였고 오스트리아의 국운을 건 매우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비극적인 부분은 이 1800년 12월 호헨린덴(Hohenlinden) 전투의 처참한 패배자가 바로 요한 대공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처음에는 기세 좋게 프랑스군을 밀어붙였으나, 프랑스군의 유인에 말려 아무 대책없이 숲 속으로 뛰어들어간 요한 대공의 철부지 지휘 덕분에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참패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투 결과 2달 뒤 오스트리아는 1801년 2월 9일 굴욕적인 루네빌(Lunéville) 조약으로 제2차 대불동맹전쟁을 종결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대공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자였으므로 다시 이 중대한 침공 작전의 지휘관이 된 것입니다.




(모로 장군을 나폴레옹의 최대 라이벌로 만들어 준 회심의 쾌승, 호헨린덴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요한 대공이 포로가 되는 망신을 면한 것은 오직 그가 타고 있던 명마 덕분이었습니다.  덕분에 부하들을 다 팽개치고 정말 전속력으로 달아날 수 있었거든요.)



최소한 요한 대공에게 북부 이탈리아 전선을 맡긴 것은 나름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이었던 레오폴트 2세가 아직 황위에 오르기 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국어가 이탈리아어일 정도로 이탈리아 사정에 나름 훤했습니다.  또 그는 바로 4년 전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티롤 지방의 방어를 맡으며 개인적으로 티롤 지방민들과 유대감을 쌓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탈리아 침공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티롤의 반란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2명의 쥴라이 형제(Ignaz Gyulai, Albert Gyulai)가 이끄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과연 이탈리아 왕국에서 그의 침공에 맞서 싸울 용사는 누구였을까요 ?





(이그나즈 쥴라이 장군입니다.  그와 그의 동생 알베르트 쥴라이는 헝가리 태생의 귀족들로서, 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었지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입니다.  수도는 패션의 도시이자 롬바르디아의 주도였던 밀라노입니다.)



잠깐 잊으신 분들을 위해 상기시켜드리자면, 이탈리아 왕국(Royaume d'Italie)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결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뜯어낸 북부 이탈리아 영토로 만든 것으로서, 과거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모데나 공국 및 로마 교황청의 영토 일부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이니까 왕이 있을텐데 그게 누구냐고요 ?  누구겠습니까 ?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제국의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바빴습니다.  그는 파리를 가꾸고 마드리드와 비엔나를 때려부수느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밀라노에 머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대통령이 없을 때 써먹을 수 있는 부통령(vice-president)을 만들듯이, 나폴레옹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할 부왕(vice-roi, 영어로는 viceroy)을 임명해 두었습니다.  바로 조세핀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아들인 외젠(Eugène de Beauharnais)이었습니다.  





(외젠이 19살이던 1800년에 그려진 그의 초상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탈모인 연합에 가입할 징조가...)




1809년 당시 그의 나이는 약관 28세로서, 요한 대공보다 겨우 1살 많은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며 밥만 축내던 요한 대공에 비하면 나폴레옹을 따라 다니며 훨씬 더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습니다.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는 시리아의 생-장-다크레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고, 마렝고 전투에서 통령 근위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절반에 속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실전에 참여했던 것이 저 마렝고 전투였었고, 당시 계급은 기병 대위였으며, 지휘해본 최대 규모의 부대는 중대 단위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군 생활을 나폴레옹의 하는 일 없는 참모로 보냈으며, 의붓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군 생활을 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이집트 시절에 아름다운 흑인 여자 노예를 정부로 사들여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시켜 데리고 다니며 주변 젊은 장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몸에 받기도 했습니다만, 작전 지휘로 주변 장교들의 인정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의붓아들에 대해 염려가 되는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고 1809년 1월 급히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이탈리아 왕국의 방어 계획에 대해 자세한 지침을 보냈습니다.  이 일련의 편지들에서 나폴레옹이 지시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딱 2줄이었습니다.


1)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미리 병력을 집결시켜 괜히 오스트리아를 먼저 도발하지 말라.

2) 만약 오스트리아가 침공해온다면 일단 피아베(Piave) 강 서쪽으로 후퇴한 뒤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킨 뒤 반격하라.





(피아베 강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은 자신이 상대하게 될 것이므로, 이탈리아 왕국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곁가지 부대는 이 정도의 전략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외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방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4월 10일,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왕국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오스트리아군이 침공을 개시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나폴레옹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준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외젠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군을 증강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크게 이탈리아군과 프랑스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실 프랑스군도 거의 모조리 이탈리아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쓰는 진짜 프랑스인 중 입대 연령이 되는 장정들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e Armee)로 징집되는 형편이었거든요.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 최근 프랑스로 강제 합병된 과거 피에몬테와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에서 징집된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에 주둔하는 프랑스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젠은 자신의 군대가 집결만 된다면 꽤 잘 싸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피아베 강 서쪽으로 꼴사납게 도망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 병력을 내보내 요한 대공의 진격을 잠시라도 지체시키도록 한 뒤, 6개 사단을 베네치아 인근 리벤자(Livenza) 강가의 사칠레(Sacile)에 모아 거기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로 합니다.  그는 '국경 내로 침범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데는 하루면 충분하다'라고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빨간 위치 표시가 된 부분이 사칠레의 위치입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는 크게 북쪽의 빌라흐(Villach)와 동쪽의 류블랴나(Ljubljana)에서 각각 1개 군단씩이 쳐들어왔습니다.  류블랴나는 지금 슬로베니아의 수도입니다.)



그러나 자신감과 역량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외젠은 병력의 집결에는 꽤 신속함을 발휘해보였으나, 정찰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어설펐습니다.  그는 포르데노네(Pordenone)까지 진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약 2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고, 사칠레에 집결시킨 6개 사단 3만7천이면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한 대공 휘하에는 거의 4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해 있었고, 요한 대공은 활발한 정찰을 통해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외젠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제 무덤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리벤자 강과 논첼로 강 사이에서 벌어진 4월 16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은 병력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그 지휘관 외젠의 미숙한 지휘 하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가 자신의 것보다 우월한 것을 보고는 자기 딴에는 머리를 쓴답시고, 기병대가 활동하기 좋지 않은 논첼로 강변에 접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승부처로 삼고 그 쪽으로 병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느라 중앙 전선이 얇아질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이 바로 그 얇아진 부분을 들이쳤습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물러서야 했습니다.  그나마 외젠의 사단들이 물러나면서 방진을 구축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며 질서정연하게 퇴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외젠은 총병력 3만7천 중 3천의 사상자와 3천5백의 포로를 내며 큰 피해를 입었고, 요한 대공은 약 3천의 사상자와 5백의 포로를 냈습니다.  황제의 동생과 황제의 의붓아들의 1차전은 황제의 동생이 완승을 거둔 셈이었습니다.





(사칠레 전투의 상황도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도 대단한 지휘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라면 이렇게 잡은 승기를 어떻게든 살려내 적을 무자비하게 추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10%도 안되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별로 치열하지도 않았던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재정비한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외젠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지시한 대로 피아베 강 서쪽 너머 저 멀리 후퇴하여 나폴레옹이 소싯적 수없이 넘나든 아디제(Adige) 강까지 후퇴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탈리아 왕국 곳곳에서 모여드는 병력을 모았습니다.  4월 28일, 마침내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디제 강에 면한 베로나(Verona) 근처까지 왔을 때, 이미 외젠은 6만의 병력을 모으고 강력한 수비 진영을 갖춘 뒤였습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곳저곳 점령지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티롤의 반란군에게도 지원군을 보내주느라 더 줄어든 형편이었지요.  불과 10일 만의 전세 역전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지시대로 싸우지 않고 후퇴했더라면 훨씬 더 쉽게 요한 대공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베로나의 위치입니다.  그 옆에 보이는 삼각형의 호수는 가르다 호수로서, 나폴레옹이 1796년 그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 있지요.)



한편, 나폴레옹은 그렇잖아도 바쁜 와중에 외젠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섣부른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의 왕이던 그의 매제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로 외젠을 교체해버리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그 편지가 베로나로 날아들 때 이미 외젠은 거기 없었습니다.  그는 아디제 강을 다시 건너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 중이었습니다.  이미 병력의 우열이 뒤집힌데다, 바이에른 전선에서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통해 카알 대공의 본진을 완전히 패주시켰다는 소식이 요한 대공에게도 날아든 것입니다.  요한 대공은 전속력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나폴레옹을 막는데 일조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젠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요한 대공의 군대를 어떻게든 붙잡아 격파해야 나폴레옹을 돕는 길이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외젠이나 요한이나 이 북부 이탈리아는 어떻게 되든 중요치 않았고 어느 쪽이 최대한의 병력을 이끌고 더 빨리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에게 합류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외젠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군이 제 몫을 다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사칠레 전투에서 외젠과 요한이 주거니받거니하며 보여준 삽질을 볼 때, 아무리 상황이 유리해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다면 설령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애꿎은 병사들만 희생될 뿐 전쟁의 승패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에 만들어진, 낡은 공화국 시절의 군복을 입은 40대 초반의 장군 하나가 외젠의 진영에 합류합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시절부터 종군했던 나이든 고참 병사들은 그 군복을 보고 크게 반가와 했으나,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했던 젊은 장교들은 그의 군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장군은 누구였을까요 ?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Eug%C3%A8n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cile

https://en.wikipedia.org/wiki/Ign%C3%A1c_Gyulay

https://en.wikipedia.org/wiki/Iron_Crown_of_Lombardy

https://en.wikipedia.org/wiki/Piave_(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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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5.14 23:24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 같은 괴물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전투가 끝난 다음날부터 무려 36시간 동안 아무런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나선 그에게는 어지간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패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인 5월 23일 아침부터 나폴레옹은 이미 이 처참한 패배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된 선전 도구인 육군 회보(Le 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실릴 전투 결과에 대해,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 가야 했고, 프랑스군이 전장의 지배자로 남았다'라고 뻔뻔스럽게 구술했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꽤 먼 선언문이었지요.


휘하 장군들은 아예 비엔나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군단들을 재정비하고 패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단칼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일단 철수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이 비엔나로 철수하면 카알 대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를 것이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비엔나에 집착하지 않고 아예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 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은 둑이 무너지듯 프랑스-독일의 경계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는 그렇게 프랑스군의 후방을 끊는 작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보헤미아(체코)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에 기각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슨 생각을 하건 나폴레옹은 철수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답게 식량과 탄약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프랑스군은 여유있게 재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빈과 린츠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기 전에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 후방을 끊을 목적으로 이미 린츠 점령 작전을 시도한 바 있었지요.  물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군은 당연히 큰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행복과 기쁨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알 대공의 참모들은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 이전과 동일한 상태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알 대공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깔끔하지 않은 승리를 분석해볼 수록 프랑스군과 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군의 수적 우세가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격멸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카알 대공은 이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나폴레옹과의 평화 협상을 벌이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변변한 동맹도 없이 감히 혼자서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것은 혼자 힘으로도 나폴레옹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일단 자신이 불을 당기기만 하면 프랑스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바이에른과 작센, 뷔르템베르크 및 프로이센의 독일 민족이 대거 봉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굳은 동맹인 러시아도 내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이 첫 패배를 겪게 된다면 반-나폴레옹 연합전선에 러시아도 뛰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의 변변한 동맹국이라고는 저 멀리 떨어진 섬나라 영국 하나였는데, 영국은 네덜란드나 북부 독일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켜 프랑스의 뒤통수를 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모두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대로 반-프랑스의 깃발 하에 봉기한 것은 저 티롤 산골짜기 촌놈들 뿐이었습니다.  이 산골짜기 촌사람들은 놀랍게도 잘 싸워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을 묶어두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바이에른이나 작센은 여전히 나폴레옹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그의 깃발 아래 오스트리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프로이센은 드디어 찾아온 복수 기회 앞에서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원래부터 좀 덜 떨어진 편이었던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여전히 기가 죽어 있었지만, 그의 각료들은 모두 이런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되며 당장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심지어 프로이센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까지 던졌습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서 참전해준다면 과거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폴란드 바르샤바 공국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힘이 아직 건재한데다, 설령 오스트리아가 이긴다고 해도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가 기세등등해질텐데, 그건 독일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프로이센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상륙이요 ?  언제나 그렇지만 영국은 세치 혓바닥과 기니 금화만 뿌려댈 뿐, 자신들이 피를 흘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는 그 알량한 기니 금화조차 충분히 뿌리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간곡히 요청한 추가적 전쟁 보조금 지급조차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라인 연방의 지도입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위성국가 베스트팔렌 왕국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계 주민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기대가 완전히 헛된 망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학수고대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땅과 이런저런 독일계 소공국들을 모아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에서는 그 허수아비 왕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Jerome)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베스트팔렌에서도 병력이 대거 징집되어 나폴레옹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파병되자, 무력의 공백 상황에서 반-나폴레옹 정서가 심각하게 무르익었습니다.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 불을 지른 것은 뜻 밖에도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정규 경기병 연대였습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소위로 참전했던 쉴(Ferdinand von Schill) 소령은 당시 베를린에서 경기병 연대 하나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쉴 소령은 제4차 동맹전쟁의 패배 이후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 등의 개혁론자들과 함께 프로이센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 운동이 빌헬름 3세에 의해 불법화되자, 아예 애국적 무장 봉기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5월 초 부대 기동 훈련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경기병 연대를 통째로 끌고 베스트팔렌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규모 베스트팔렌 수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오히려 현지 주민들로부터 자원병을 추가 모집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한 빌헬름 3세가 기대와는 달리 쉴 소령과 그의 경기병 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자 기가 죽었고, 프랑스에 충성하는 네덜란드군과 덴마크군이 쳐들어오자 속절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쉴 소령의 반란군은 5월 말 결국 항구 도시인 스트랄순트(Stralsund)에서 패배했고, 쉴 소령도 전사해버렸습니다.   




(그가 전사한 스트랄순트에 건립되어 있는 쉴 소령의 동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희망은 뜻하지 않은 패배에 나폴레옹이 시무룩해진 이 순간에 재빨리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는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판단했습니다.  이건 아마 옳은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카알 대공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체면을 완전히 구긴 상태에서 누군가와 화평을 맺을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화평할 생각이 전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평을 원하지 않는 중요 인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카알 대공의 형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1세였습니다.  


(이건 23년 후인 1832년 그려진 프란츠 1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시민 계급의 혁명으로 끓어오르던 19세기 초 유럽에서 개혁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꼽힙니다.)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있어 카알 대공은 밥만 축내는 여러 동생들 중 믿을 만한 능력을 갖춘 유일한 형제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의 인기를 갉아먹는 잠재적 경쟁자였습니다.  일찌기 조카 프란츠 1세의 교육을 맡았던 전임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는 어린 프란츠 1세에 대해 '자기 한몸 보존이 무엇보다 소중한, 전형적인 마마 보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 프란츠 1세에게 있어 나폴레옹 못지 않게 견제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그는 카알 대공을 오스트리아 전군의 원수(generalissimus)로 임명해놓고도, 카알 대공을 젖히고 그 참모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내리는 등 카알 대공의 군내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었습니다.  


프란츠 1세의 입장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나폴레옹과 화평할 생각을 하지말고 싸워 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다 거기서 죽만 쑤던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가 거기서 물러나 카알 대공과 합류하고, 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도 돌아오면,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에게 맞설 충분한 병력을 갖추게 되는데 왜 화평을 하냐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프로이센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양보하겠다는 등의 굉장한 제안까지 해놓았으므로, 결국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것이 프란츠 1세의 여전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카알 대공의 다소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매파 장군들은 카알 대공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프란츠 1세의 그런 강경한 입장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뜩이나 비관적이었던 카알 대공의 기분을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제 정신 박힌 사람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궁정과 군 수뇌부를 휩쓸고 있던 과도한 자아도취와 근거없는 자신감에 자신까지 휩쓸린다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를 앞두고 있던 6월 말, 그의 삼촌인 테쉔(Teschen) 공작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쓸 정도로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저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왕조를 위태롭게 할 만한 모험은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원래 싸움은 기 싸움이 절반이라고 하는데,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의 2차전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카알이 절반은 지고 들어가는 경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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