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ica의 뜻은 ?

조제프와 함께 작전 회의 중이던 프랑스 장군들에게 전해진 소식 중 하나는 주르당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술트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술트가 보내온 장계의 내용은 그의 남쪽으로의 행군 현황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진척이 주르당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소식은 조제프와 주르당이 떠나온 마드리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술트의 소식보다 더 나빴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제4 군단과 대치하던 베네가스 장군의 스페인 라 만차(La Mancha) 군이 마드리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원래 베네가스의 임무는 세바스티아니가 탈라베라에서 빅토르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세바스티아니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에 보기 좋게 실패한 베네가스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신과 마드리드 사이에 프랑스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쪽 방향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조제프와 주르당이었습니다.  그들, 정확하게는 주르당이 주장했던 것이 '며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술트가 북쪽에 나타나면 영국군은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며칠이 아니라 10일 가까이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뭐 한가한 상황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텅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가 스페인 라 만차 군에게 위협받는 상황까지 겹치자, 술트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지요.  특히 빅토르나 세바스티아니가 굳이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스페인 국왕과 그의 군사 고문의 위엄을 세우겠다며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끌고 탈라베라로 달려온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이 위기는 바로 조제프와 주르당 본인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라 만차 La Mancha는 마드리드 바로 남쪽 지방으로서, 원래 라 만차라는 이름은 메마른 땅이라는 뜻의 아랍어 알 만샤 Al-mansh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라 만차는 나름대로 비옥한 축에 속하는 지역이라,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곡식을 제분하기 위한 풍차가 꽤 많았습니다.  라 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격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제프와 주르당은 빅토르가 주장하는 대로 공격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빅토르는 여전히 자신이 공을 독차지 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크게 4갈래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 3개 공격을 빅토르의 3개 사단이 각각 맡았고, 나머지 1개만 세바스티아니의 사단들이 맡았습니다.  어제 밤과 오늘 새벽에 영국군을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던 루팽 사단이 메데진 언덕과 세구리야 산맥 사이의 계곡을 공격하기로 했고, 빌라트(Eugene-Casimir Villatte) 사단이 그 왼쪽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라피스(Pierre Belon Lapisse) 사단이 그 왼쪽, 그러니까 메데진 언덕 남쪽 사면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메데진 언덕의 동쪽 경사면을 그대로 들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언덕의 북쪽과 남쪽의 양갈래로 공격해들어가 남북 양쪽 사면을 협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바스티아니 휘하에 있던 사단들은 영국군과 스페인군의 방어선이 맞닿는 연결부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공격은 빅토르가 요청했던 유인 공격에 불과했습니다.  즉, 세바스티아니의 사단들이 먼저 영국군 방어선 남쪽을 공격하여 소란을 일으켜주면, 빅토르의 사단들이 메데진 언덕을 집중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큰 그림이었습니다.


요약하면, 빅토르가 하자고 하는 작전 그대로 하게 된 것입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이 이끄는 병력은 무엇을 하냐고요 ?  어떤 공격에서든 전병력을 일거에 쏟아붓는 일은 없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의 기병대 및 마드리드 수비대는 예비대로 남겨 두었다가 상황에 따라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7월 28일 오후 프랑스군의 제3차 공격의 초기 전개도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번에는 프랑스군도 긴 횡대로 전열을 짜고 공격했는데, 올리브 밭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야 했던 레발 사단에게 긴 횡대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오후 2시반 경에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공격에 나선 것은 세바스티아니 휘하에 있던 레발(Jean Francois Leval)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그의 사단은 독일군과 네덜란드군으로 이루어진 약 4500 규모의 부대였는데, 이들의 공격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사실 의도된 바가 아니라 일종의 작은 사고였습니다.  원래 그의 공격 순서는 두번째였는데, 웰슬리가 판단한 것처럼 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인 올리브 밭을 통과하느라 그의 사단은 다른 프랑스 사단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먼저 개활지로 나와 버렸던 것입니다.  개활지 앞에는 영국군 방어선과 스페인군 방어선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고, 거기에는 영국군이 구축해놓은 포병대 보루가 있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더 이상 공격을 늦출 수 없었던 레발 장군은 곧장 공격에 들어갔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올리브 밭을 통과하느라 대오도 헝클어져 있었고 특히 영국군 포병대 보루 정면으로 쳐들어간 것이 주요 패인이었습니다.  레발 사단의 우익은 영국군을, 좌익은 스페인군을 공격했는데, 우익과 중앙이 영국군에게 격파 당해 후퇴하자, 스페인군을 상대하던 좌익도 측면 노출을 우려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레발 사단은 약 7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우익에서 레발 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중앙을 맡은 세바스티아니와 라피스의 공격도 시작되었습니다.  약 1만5천 규모의 프랑스군 2개 사단은 제1파와 제2파로 나뉘어 간격을 두고 공격해들어갔습니다.  이들을 상대한 것은 약 6천 규모의 영국군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영국군은 특유의 침착성을 발휘하여 프랑스군 제1파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 45m 지점까지 다가오자 무자비한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파도는 지근거리에서 쏟아진 6천발의 총알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멈칫하자 셔브룩 사단은 총검 돌격을 감행했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총검 맛 보기를 사양하고 뒤돌아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영국군도 아직 실전 경험이 적어서 그랬는지, 그만 침착함을 잊고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대오도 갖추지 않고 무질서하게 추격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총 8개 대대 중 6개 대대가 이렇게 신이 나서 추격에 참여했다가 그만 뒤를 이어 다가오던 프랑스군 제2파와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영국군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영국군 방어선 중앙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가 이날 전투에서 영국군의 최대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영국군에 위기가 닥치자 아까 후퇴했던 레발 사단도 다시 중앙부로 진격해왔습니다.




(전투가 한창 뜨거워질 때의 모습입니다.  영국군 중앙부 셔브룩 장군 휘하 일부 여단들이 전선을 유지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앞으로 나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진한 여단 지휘관들의 이름이 로우 Low와 렝워쓰 Lengwerth라고 되어 있는데, 저 분들의 이름은 사실 뢰브(Sigismund von Löw)와 랑베르트(Ernst von Langwerth)입니다.  저렇게 전진한 여단들은 하노버 출신들로 이루어진 KGL 여단들이고 그 지휘관들도 독일인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랑베르트 장군의 제3 여단은 큰 피해를 입어 사상자가 거의 절반에 달했고, 랑베르트 장군도 전사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매켄지(Alexander Randoll Mackenzie) 사단이 재빨리 세바스티아니 사단을 막아섰으나, 라피스 사단을 막아설 예비대는 아예 없었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웰슬리는 메데진 언덕을 지키던 연대 하나를 내려보내 간신히 구멍을 메웠습니다.  이 사이 셔브룩 사단이 후퇴 및 재정비에 나섰고, 다시 방어에 투입되면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300명의 매켄지 사단이 8000명 규모의 세바스티아니 사단을 막으려니 영국군도 피해가 컸습니다.  매켄지 장군 자신이 전사했고, 그 사단도 전체의 1/4이 넘는 63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의 머스켓 사격 속도는 확실히 프랑스군보다 우세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사단도 피해가 막심하여 무려 2천이 넘는 사상자를 남기고 결국 후퇴해야 했던 것입니다.  라피스 사단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이들은 영국군과 평행선으로 나란히 늘어서 정지 상태에서 총격전을 벌였는데, 서로 비슷한 사상자를 낸 뒤 후퇴한 쪽은 라피스 사단 측이었습니다.  라피스 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다 총격을 받고 전사한데다, 측면에 있던 세바스티아니 사단이 후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약 1600명씩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웰슬리가 필사적으로 구멍을 틀어막는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메데진 언덕을 지키던 스튜워트(Richard Stewart) 장군의 부대가 헐레벌떡 내려가 라피스 사단을 막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덕분에, 메데진 언덕 북쪽의 계곡으로 들어오는 빌라트와 루팽의 프랑스군을 막을 부대가 부족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밥상에 숟가락을 슬며시 올려놓으려던 중앙부의 레발 사단은 입장이 더욱 난처해졌습니다.  결국 이들은 경멸해마지 않던 스페인군 기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걸음을 날살려라 도망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제프와 주르당도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이들은 약 5천 병력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들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명색이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예비대를 가지고 뭘 하고 있었나'라는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프랑스 좌익과 중앙에서의 공격이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자, 원래의 주공이었던 전선 북쪽 끝 빌라트와 루팽 사단의 공격은 매우 어정쩡해졌습니다.  원래는 메데진 언덕을 남북 양쪽에서 둘러싸며 공격하기로 했었는데, 남쪽에서 그렇게 해줄 라피스 사단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일단 메데진 언덕과 그 북쪽 세구리야 산맥 사이의 계곡으로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언덕 위에서 전황을 관측하던 웰슬리는 프랑스군이 자신의 방어선을 북쪽에서 우회하려는 것을 쉽게 알아챘습니다.  기병대 외에는 이 계곡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던 웰슬리는 쿠에스타 장군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군의 공격선상에서 벗어나 있던 스페인군은 그에 적극적으로 응해 기병대와 보병대를 급파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빌라트와 루팽 사단이 계곡 속으로 진입했을 때는 스페인 보병만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을 뿐 영국-스페인 기병대는 시퍼런 기병도를 뽑아들고 프랑스군을 요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의 밀집 보병 방진입니다.  기병대의 공격에 대해서는 견고했겠지만, 대신 포병대의 묵직한 대포알에는 세상 취약했습니다.  때문에 아군 기병이나 포병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적군의 기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에 걸리면 끝장이었지요.  그림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thread/1437964/beautiful-world-napoleonics)




프랑스군은 좁은 계곡 속에서 마주친 기병대에 맞서 방진(square)를 짜야 했는데, 이건 역으로 프랑스군이 사지 속으로 제발로 들어온 형국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보병 방진을 기병대에 대해서는 매우 튼튼한 방어진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약점이 2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방진 특성상 이동이 아무래도 어렵다는 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런 밀집 보병 대오는 포병대의 포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메데진 언덕 꼭대기에는 영국군 포병대가 있었고, 이들은 계곡 아래 프랑스군이 방진을 짜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대포알을 날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빌라트와 루팽의 프랑스 사단들은 이 좁은 계곡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대포밥이 될 신세였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바세쿠르트(L. A. Bassecourt)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보병 사단이 이 계곡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독안에 든 쥐 신세로 죽는 일만 남았던 프랑스군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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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잦은 총기 난사 사건을 겪으면서도 총기 규제를 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헌법 수정 제2조(The Second Amendment)입니다.  대개 이 조항이 미국 시민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불가침적인 권리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준다고 하지요.  그런데 최근 그런 해석은 틀린 것이며, 헌법 수정 제2조는 시민들에게 총기 소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실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s://www.marketwatch.com/story/what-americas-gun-fanatics-wont-tell-you-2016-06-14


원래 수정 제2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잘 정비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인민이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위 기사의 주장에 따르면, 헌법 수정 제2조에서 보장하는 것은 주 정부의 안보일 뿐 개인의 총기 소지가 아니며, 그 핵심은 연방 내에서의 각 주 정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well regulated Militia'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현대적 조직인 National Guard가 이미 주 정부마다 유지되고 있으므로 개인의 총기 소지는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여기서 말하는 National Guard는 보통 주방위군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예비군과는 또 다른 개념으로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미국의 National Guard는 대부분 따로 생업이 있으나 파트타임으로 급여를 받고 주방위군에서 복무하는, 일종의 민병대 병사들이니까요.  미국 주방위군의 경우 대부분은 민간 생업에 종사하지만 5년 복무 기간 중 1년은 현장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더군요.


National Guard라고 불리는 이런 희한한 조직의 시초는 프랑스 대혁명 때 만들어진 'Garde Bourgeoise'(시민방위군)입니다.  이는 원래  국민을 탄압하는 국왕의 군대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만든 무장 경비대로 탄생한 것이었는데, 곧 혁명과는 무관하게 다른 유럽 국가로도 전파됩니다.  국민 개병제에 의해 전례없이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던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에 고전하던 오스트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 제도를 본떠 Landwehr 등의 이름으로 유사 조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유럽에서의 National Guard는 국민방위군이라고 보통 번역하는데, 레미제라블 소설에도 나옵니다.  




2012년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일부 생략된 부분입니다만, 흔히 'ABC Cafe'라고 불리는 노래에서 앙졸라가 친구들과 무장봉기를 모의하며 부르는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time is near

So near it's stirring the blood in their veins!


때가 가까왔다

혈관 속에 피가 들끓을 정도야


And yet beware

Don't let the wine go to your brains!


하지만 신중해야해

아직 승리에 도취할 때는 아니지


For the army we fight is a dangerous foe

With the men and the arms that we never can match


우리가 싸울 군대는 위험한 적수야

그들의 병력과 무기는 우리가 상대할 수조차 없어


It is easy to sit here and swat 'em like flies

But the national guard will be harder to catch.


여기 앉아서 말로만 그들을 파리처럼 때려잡는 건 쉽지

하지만 '국민방위군'은 파리보다는 잡기 어려워


We need a sign

To rally the people

To call them to arms

To bring them in line!


우리에겐 필요해

민중들을 모을,

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설,

그들을 규합할 신호가 !




(Red & Black 바로 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이 무력으로 맞싸울 상대는 경찰도 프랑스 육군도 아닌 '국민방위군'라는 존재입니다.  대체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은 어떤 군대였을까요 ?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발장이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있는 바리케이드로 찾아갈 때, 길바닥에 쓰러진 정부군 병사의 옷을 벗겨 그 옷을 입고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고 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약간 다르게 나옵니다.  즉, 원래 장발장이 '국민방위군' (la Garde Nationale, National Guard) 소속인 관계로, 집에 있던 자기 군복을 입고 자기 소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찾아가는 것으로 나오지요.  또 당시 나이가 60대였고 도망자 신분이라서 주민등록번호도 없었을 장발장이 국민방위군 소속이라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  이건 빅토르 위고가 설정상의 실수를 한 것 아닐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이후, 외국과의 전쟁을 위해 1798년 징집제를 실시한 것이 근대 유럽 사회에서 최초의 징집제였습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군 입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니를 뽑는 등 온갖 방법을 다써서 군대를 빠지려고 했지요.  당시 머스켓 소총을 장전할 때는 종이 탄약포를 앞니로 물어 뜯어야 했으므로 앞니가 없으면 병사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징집제가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이후 전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징집제는 철폐되었고, 다시 혁명전처럼 모병제에 의한 지원병들 그리고 스위스 및 독일 용병들로 군대를 채웠습니다.  그래서 마리우스나 앙졸라 등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당시 그런 정규군 사단은 시내, 특히 파리 시내에 주둔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군대라는 것은 외국군에 맞서기 위한 것이니까 국경 부근에 주둔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파리 시내에는 주로 외국 용병들로 이루어진 왕실 근위대 정도만 있었지요.  하지만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도 경찰력만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폭동과 혁명이었지요.  그런 사태를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이란 일종의 예비군 같은 것으로서, 평소에는 민간인 생활을 하다가 폭동이나 내란 같은 비상 사태에 소집되어 질서를 유지시키고 지역을 방위하는 군대였습니다.  원래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때의 무질서를 제어하기 위해, 주로 중산층 시민들이 자원병으로 나서서 결성된 조직이었습니다.  민병대와는 달리 제대로 된 군복도 갖추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겉으로 봐서는 정규군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군대였지요.  이런 국민방위군에도 장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국왕이나 시장에 의해 임관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 방위대원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국민방위군은 평상시 해당 지역의 방위에만 활용되었고 또 평상시 집에서 먹고 자고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순번을 정하여 시청 등 공공 건물에서 경비를 서는 일이었습니다.  왜 중산층들만 이 조직에 끼워주었냐고요 ?  원래 하층민들은 사실 지킬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산층 이상되는 양반들만 사실 지켜야 할 재산이 있으므로 스스로 총을 들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또 중산층 이상만 끼워줄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총과 군복도 자비로 마련했기 때문에, 애초에 재산이 어느 정도 있지 않으면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또 그렇게 자비로 마련한 소총이다보니, 평소 그 보관도 무기고가 아니라 각자 자기 집에 보관했습니다.  이 점이 나중에 격동기 프랑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위는 레미제라블 당시 인물인 르느와르 (Philippe Lenoir, 1785-1867, 그 유명한 르느와르 아님)라는 화가의 국민방위군복을 입은 모습입니다.  아래는 1870년 당시의 국민방위군의 모습입니다.)




이미 노년이었던 장발장이 국민방위군에 들어가게 된 사연도 레미제라블 원작 소설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1831년 파리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했는데, 플뤼메(Plumet) 거리에 살고 있던 장발장도 거기에는 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장발장은 이때 이미 60세가 넘었으므로 법적으로 면제될 수 있었으나, 장발장은 나이를 50대로 속이고 국민방위군의 소집에 일부러 자원합니다.  국민방위군 소속이라는 것은 건실한 중산층 시민이라는 반증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 댓가로는 1년에 3~4번 소집되어 시청에서 보초를 서는 것이었으니 도망자 신분으로서 최대한 자신을 일반인으로 꾸며야 했던 장발장으로서는 남는 장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앙졸라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을 때, 장발장은 국민방위군 소집령에 응하여 그를 진압하러 가야 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테나르디에의 습격을 경찰로 오인한 장발장이 이미 플뤼메 거리의 집을 버리고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소집 영장이 닿지 않았겠지요. 




(이보게 친구들, 진정하게. 영화와는 달리 사실 이거 내 군복에 내 총이라네.  훔친 것이 아니라네.)



프랑스 정규군의 주력 부대는 대부분 지방에 주둔했기 때문에, 루이 필립 시대에 잦았던 폭동과 무장 봉기를 진압하는 것은 주로 이 국민방위군의 몫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 구성원들의 출신 때문에라도, 국민방위군은 서민들의 편이라기보다는 주로 중산층 시민 계급(부르조아)의 편이었습니다.  가령 1793년, 총재 정부가 선거법을 교묘히 조작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굳히려 하자, 1795년 10월 5일, 약 3만명에 달하는 파리 시내의 국민방위군은 이에 반발하여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왕당파 편으로 돌아섭니다.  이때 파리 시내에서 총재 정부를 지지하는 정규군 병력은 고작 5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6대1의 불리함을 간단히 극복하고 국민방위군을 포병대로 산산조각낸 불세출의 영웅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지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를 !  반란군들에게는 대포알을 !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자비란 없습니다.)




나폴레옹과 국민방위군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부터 좋지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국민방위군을 믿지 않았지요.  나중에 1809년과 1814년에 잠깐 소집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면서 징집제를 폐지한 뒤에는 부족한 병력을 보완하기 위해 이 국민방위군 제도가 재활성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의 정치가 점점 '절대 왕정'으로 퇴보하는 방향으로 향하자, 부르조아 시민층의 왕정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런 움직임은 샤를 10세로 하여금 국민방위군이 유사시 왕정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1827년, 샤를 10세는 국민방위군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이때 샤를 10세는 실수를 하나 저지릅니다.  국민방위군 조직만 해체했을 뿐 국민방위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류는 압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은 압수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 그 소총과 탄약 등은 국가에서 지급한 정부 자산이 아니라 중산층 출신인 국민방위군 병사 개인이 사비로 구입한 사유물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불과 3년 뒤 터져나온 1830년 7월 혁명에서, 거리로 뛰어나온 수많은 부르조아 시민들의 손에는 국민방위군 시절 사용하던 머스켓 소총이 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1830년 7월 혁명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민간인들에게 왜 이렇게 총이 많은거냐 ?")



1830년 7월 혁명 이후 세워진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립 1세는 그러니까 사실 온건한 입헌 군주제를 원했던 부르조아 시민들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앙졸라가 이끄는 'ABC의 벗들', 즉 과격 공화파가 일으킨 1832년 6월 봉기는 부르조아 시민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사건이었고, 따라서 국민방위군은 이 봉기를 적극적으로 진압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루이 필립의 정치가 점점 도시 부르조아 시민들의 이익에서 멀어지게 되자, 결국 터져나온 1848년 2월 혁명 때는 국민방위군은 혁명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19세기 초반 혁명의 시대에는 국민방위군의 민심이 프랑스의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병사들이 진압은 안하고 'Do you hear people sing' 노래를 부르면서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면 독재자에게는 큰일 나는 거에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도 그렇게 죽었지요.)




제 지난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는 항상 모병제보다는 징집제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다만 현재의 노예같은 군대 생활은 결사 반대입니다.  징집된 군인들의 생활 환경과 급료는 미군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지금보다는 대폭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제가 진보 좌익인 척 하는 보수 우익이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반드시 국민 대다수와 이해 관계가 같아야 합니다.  스파르타나 로마가 강했던 것은 소규모 자작농이 곧 정규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사회주의적 경제체계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스파르타 시민들이 부자와 빈민으로 나뉘게 되면서, 또 로마 공화정의 군대가 마리우스나 술라, 케사르나 폼페이우스 개인을 따르는 직업 군대로 변모하면서부터 그 몰락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군단병들은 원래 자작농들로 구성된 시민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직업 군인화되면서 특정 장군을 따르는 사병화되는데, 그런 변질의 시초는 일반적으로 킴브리족을 격파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개혁이었습니다.)




당장은 더 훈련이 잘되어 있고 더 전문적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모병제가 더 효율적이고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병제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 중산층과 군대의 사이를 벌어지게 합니다.  중산층 출신 자제 중에서 군대로 가는 비율은 매우, 매우 적은 것이 정상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점은 그 사회의 정치 안정성을 크게 떨어지게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일 같지는 않거든요.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은 나라에서는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통에 의한 쿠데타나 전땅크에 의한 쿠데타가 그리 오랜 옛날 이야기가 아닌 사회, 그리고 광주사태가 아직도 북괴의 공작에 의한 무장 반란 사건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벌여질 정도로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모병제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처럼 사회 지도자 계층에서 군대 제대로 마치고 온 아들 찾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은  정말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거 보면 진짜 우리나라에는 보수는 거의 없어요.  그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욕심꾸러기들을 사회 지도층으로 모시고 사는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 젊은이들이 뛰쳐나오는 것이 문제라고요 ?  아닙니다.  그들이 뛰쳐나오도록 만든 사회 지도층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처럼 노인분들이 이스라엘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을 보니 측은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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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1개 연대 약 1600명이 메데진 언덕으로 달려들 때 이 언덕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KGL 여단의 규모는 고작 1200명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다 일어난 판국이라 KGL 여단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올린 프랑스군이 메데진 언덕의 정상 능선을 점령하고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나자, 영국군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능선 바로 너머 후사면에 영국군 2개 여단 약 380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가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2개 여단도 야습은 예상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쪽 경사면에서 야영을 하다, 능선 너머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이 언덕 능선 뒤에 숨어있다가 들이칠 줄은 몰랐던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다시 언덕을 탈환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7월 27일 밤, 프랑스군의 첫번째 공격 상황도입니다.)



이렇게 언덕 후사면에 병력을 감추어 뒀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온 적군을 능선 정상에서 반격하는 수비 전법이 바로 웰슬리의 주특기였습니다.  알고 보면 주특기라기보다는, 이것이 웰슬리가 제대로 갈고 닦은 유일한 필살기였습니다.  웰슬리는 어디서 이런 못된 전술을 배워왔는지, 바로 1년 전 비메이루(Vimeiro) 전투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쥐노(Junot)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부사쿠(Bussaco) 전투 등 이후 전투에서도 똑같은 전법으로 프랑스군을 상대했고, 종국엔 워털루 전투에서 이 전술로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웰슬리는 나중에 '전투란 능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예측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항공 정찰이 없던 시절에는 낮은 능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뒤에서 어느 정도의 예비 병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능선이라는 지형은 방어전에 매우 유용했습니다.  다만 이 전술은 어디까지나 수비용이었을 뿐, 결코 공격용은 아니었습니다.  웰슬리는 어떻게 그런 반쪽짜리 전술 하나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




(제가 군대있을 때 아마 저 '권법소년'이라는 만화를 보고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저도 형의권의 대가가 되겠다고 형의권 교본까지 교보문고에서 샀었습니다.  아... 그 책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  책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네요.)




청나라 말기 형의권의 대가로 유명했던 곽운심이라는 권법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할 때 배움이 느리고 서툴러, 형의권의 기본기 중 반걸음 내딛으며 주먹을 지르는 기본기 중 기본기인 붕권만 3년 동안 연마했답니다.  그런데 워낙 철저하게 수련하다보니, 이 단순한 붕권 하나만으로 모든 상대를 꺾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라고 하지요.  웰슬리가 즐겨 썼던 이 전술을 영어로 reverse slope defense 즉 후사면 방어라고 하는데, 이는 무척 단순하고 뻔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이 단순한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이 전법에 꼭 맞는 언덕을 찾아 느림보 영국군을 끌고 수없이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고, 이 전법을 쓸 수 없는 곳에서는 굴욕과 비난을 감내하고 후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에겐 이런 전술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영국군 특유의 풍부한 보급망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군의 기라성같은 장군들은 웰슬리의 이 얄미운 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파해법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이 전술에 당한 빅토르 원수도 결국 1812년 베레지나(Beresina)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동일한 수법을 써서 효과를 봤다고 하니, 그야말로 반보붕권 타편천하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밤의 큰 전투는 이렇게 프랑스군의 패퇴로 마무리되었지만, 호되게 놀란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어둠을 타고 또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비웃었던 스페인군처럼, 영국군 초병들도 겁에 질려 어둠 속에서 헛것을 보고 허위 경보를 울려 여러 차례 비상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 측도 긴장이 팽팽했습니다.  빅토르가 우려하던 일, 즉 아직 영국군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조제프 국왕과 주르당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한밤중에 세바스티아니까지 참석한 프랑스군 수뇌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주르당은 빅토르에게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쓰레기같은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냥 제자리를 지키고 수비를 하며 시간을 때우자는 것이었습니다 !  세상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수비를 하다니 !  그것도 이런 야전에서, 병력 수도 비슷한 상황에서 수비라니 !  나폴레옹이 현장에 있었다면 기가 막혀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르당의 설명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술트의 제2 군단이 북쪽에서 탈라베라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웰슬리의 연합군과 대치한 상태로 며칠 더 버티면, 술트까지 가세하여 손쉽게 웰슬리를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전에 상황을 파악한 웰슬리가 꽁무니를 내빼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한 셈이 되니까요.  그러나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빅토르였습니다.  그는 전투의 목표는 적 병력의 궤멸이며, 적을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조제프 국왕이 금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군단 전체를 동원하여 영국군을 새벽에 들이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패기 앞에서 조제프는 물론이고 주르당까지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빅토르는 새벽 무렵 두번째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빅토르의 두번째 공격도 전면적 총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데진 언덕만 탈취하면 영국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생각에 휘하 3개 사단 중 루팽(Ruffin)의 1개 사단 약 5천명만 동원했고, 이들을 긴 영국군 방어선 중 일부에 집중시켜 구멍을 뚫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팽 사단의 3개 연대를 각각 긴 종대로 편성하여 3개의 송곳 형태로 다시 메데진 언덕에 돌격시켰습니다.  루팽 사단에 딸린 8문의 대포로 편성된 포병대가 사전 지원 사격을 해줬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노출된 메데진 언덕 동쪽 사면에는 영국군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번에도 이들은 언덕의 능선 바로 코 앞까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7월 28일 새벽의 프랑스군 제2차 전투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능선 약 90m 앞까지 전진했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해 능선 뒤에 숨어있던 힐(Hill) 장군 휘하 영국군 1개 사단 4천명이 긴 횡대로 일제히 튀어나와 위력적인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오르막길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리가던 프랑스군의 3개 종대 앞 부분에 집중된 4천발의 머스켓볼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종대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군은 대부분 쓰려졌고, 덕분에 진격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렸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머스켓 연사 속도에서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신속하게 머스켓 소총을 재장전하여 머뭇거리는 프랑스군 3개 종대의 앞부분과 옆부분에 다시 4천발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프랑스군 측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군은 돌격을 위한 좁고 긴 종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응 사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국군의 thin red line과 프랑스군의 thick blue column의 충돌은 스페인 전역 내내 반복되던 일입니다.)




이때 루팽 장군은 사격보다는 과감한 총검 돌격을 명해야 했고,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태까지 상대했던 스페인군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긴 영국군 방어선 중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힐 장군의 오른쪽을 담당하고 있던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영국군 사단이 가만히 있지 않고 튀어나와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렇게 전면과 좌측 2개 방면에서 공격을 받자, 프랑스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면의 영국군도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돌격을 했고, 프랑스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했습니다.  현명하게도, 영국군은 언덕 아래 평원까지 그들을 추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측의 피해는 1300명, 영국군은 75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럽지 못한 전투 결과를 받아든 빅토르는 다소 풀이 죽은 상태로 다시 조제프 및 주르당, 세바스티아니와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거보라는 듯이 다시 술트를 기다리며 방어전을 펼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비해 빅토르는 조제프가 영국군과 스페인군 연결부, 즉 연합군 방어선의 중앙부를 공격해준다면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이 다시 메데진 언덕을 탈취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2가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둘다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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