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2017.09.23 21:12

코크(Koch) 형제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석유 정제법을 발명하여 Koch Industries라는 석유 회사를 일으킨 Fred C. Koch라는 화학자이자 기업가의 아들들인 이 분들은 원래 4형제인데 자기들끼리의 이권 다툼으로 소송전을 벌인 끝에, 지금은 코크 인더스트리즈를 찰스(Charles G. Koch)와 데이빗(David H. Koch)이 각각 절반씩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두 형제를 흔히 코크 형제라고 일컫습니다.




코크 형제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아래 유튜브를 추천합니다.  뉴욕식으로 빠르게 말하는 여성분의 말을 제가 의외로 잘 알아듣길래 '내가 영어 실력이 늘었나'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영어 캡션이 달려 있어서 제가 무의식 중에 '들은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이더군요.  


https://youtu.be/HrDvW1Te2XY




이 분들은 굉장한 부자입니다.  이 두 형제가 소유한 코크 인더스트리즈는 상장되지 않은 사기업인데, 그런 사기업 중에서는 곡물기업인 카길(Cargill))사 다음으로 큰 기업이고, 2016년 포브스지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이 분들은 사업 못지 않게 정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직접 정치를 하거나 하지는 않고, 주로 보수 공화당 측에 선거 자금을 직접 대거나 선거 자금 모금 운동에 돈을 대고, 보수주의 씽크탱크 그룹에 자금을 대는 형식으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런데 최근 이 분들의 심기가 좋지 않답니다.  아래 가디언지의 보도에 따르면, 코크 재단의 회기 중 정치 및 정책 자금은 3억~4억 달러에 달하지만, 오바마케어의 폐지와 기업 및 부자들에 대한 감세가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돼지저금통(piggy bank)은 닫힐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코크 형제들이 지배하는 재단의 입장이라고 합니다.  이 형제들이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대통령과 상원, 하원이 모두 공화당 손아귀에 들어있는데, 어찌 오바마케어 폐지와 감세안 통과가 이렇게 지지부진하냐 라는 것이지요.


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17/jun/26/koch-network-piggy-banks-closed-republicans-healthcare-tax-reform




코크 형제들은 엄청난 부자이니 당연히 감세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부자 형제들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제도인 오바마케어 폐지를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일까요 ?  코크 형제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몇 안되는 정치가 중 하나인 버니 샌더스에 따르면, 코크 형제들은 정부 주도의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다 폐지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형제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미워할 만한 이유가 뭔가 있는 것일까요 ?


https://youtu.be/B5tAT6ciJ4s



(위동영상은 2014년 버니 샌더스가 상원에서 코크 형제들의 정책에 대해 연설하는 장면입니다.)


사실 코크 형제들이 정말 꽉 막힌 보수꼴통 악의 화신 노친네들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은 낙태와 동성혼을 지지하며, 흑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인 United Negro College Fund에 2천5백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9/11 사태 와중에 부시가 만든 미국판 국가보안법인 Patriat Act에 반대했고, 중동에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표적인 기후 변화 방지 정책 반대자(climate change deniers)들로서,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조약과 법안을 폐지하기 위한 단체에 돈을 대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오바마 정부가 추진했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요 ?  예, 당연히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최저임금을 없애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https://www.forbes.com/sites/clareoconnor/2013/08/08/as-obama-pushes-for-minimum-wage-increase-billionaire-charles-koch-rails-against-it-with-media-campaign/#33f8341856f5


https://thinkprogress.org/billionaire-koch-brother-says-eliminating-the-minimum-wage-will-help-the-poor-f1ef0d4ead7b/


결국 이 형제들은 매우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아주 솔직한 자유경제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안보나 번영, 이념 같은 것은 관심 밖이고, 관심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금전적 이익인 것이지요.  왜 이들이 오바마케어 같은 복지혜택을 폐지하거나 축소하려고 노력할까요 ?  표면적인 이유는 의료 및 복지 혜택의 확대는 국가 재정 부실과 의료 체계의 붕괴를 일으켜 결국 서민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간단합니다.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혜택이 늘어날 수록, 그 경제적 부담이 자기들 같은 부유층에게 결국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흔히 안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 즉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로 생각한다'라는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투표로 정권이 바뀌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적 복지 혜택은 늘이기는 쉬워도 줄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결국 정권 유지와 국가 재정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복지 축소보다는 세금을 늘려야 합니다.  세금은 돈에 붙는 것이므로, 결국 돈을 많이 가진 층에서 더 받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저소득층의 복지 비용은 부유층에서 부담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오바마케어는 부유층에 대한 세금 상승을 불러왔습니다.  연간 20만불 이상(결혼 가구의 경우 25만불 이상)의 소득에는 0.9%의 메디케어 세금이 더 붙었고, 2010년의 추가 법안에 의해 20만불 이상(결혼 가구의 경우 25만불 이상)의 투자 소득에 대해서는 3.8%의 소득이 추가로 더 붙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캐딜락 세금(Cadillac tax)이라는 것이 새로 생겨, 1년에 10,800불(가족의 경우 29,500불)을 초과하는 의료보험료에 대해서는 40%의 소비세가 붙게 되는데, 이는 여러가지 효과를 노린 세금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결국 기업들의 세금 우대조치를 감소시켜 기업들의 부담을 증가시키는 일이었습니다. 


https://www.cigna.com/health-care-reform/cadillac-tax


코크 형제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습니다.  각종 재단과 씽크 탱크에 자금을 지원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이론적 기반을 닦고, 언론과 정치인을 통해 끊임없이 국민 대중을 현혹하는 것입니다.  


코크 형제들 같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전경련은 이런저런 우익단체와 우익매체, 자유주의경제연구소 등에 자금을 지원하며 황당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거기에 국정원도 한몫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요.  이런 활동의 우리나라만의 특징은 자신들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집단은 무조건 종북 빨갱이로 몰아댄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통령도 김정은의 운전사 노릇을 자처하는 북한의 앞잡이입니다.  상식적으로 문재인 같은 제1 권력자가 뭐가 아쉬워서 자발적으로 김정은 부하 노릇을 하겠습니까 ?  아직 독재시대의 정권 유지용 반공 교육에 세뇌된 세대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수법이 먹힌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너무 유치하고 한심합니다.


저는 생산성 향상없이 단순히 복지 확대를 통해 모든 사람이 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당장의 생존을 위한 의료 혜택과, 내일의 희망을 위한 교육에는 나랏돈을 더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세금을 더 올려야 한다면 저는 더 낼 용의가 있고, 그것이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결과가 평등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회는 평등해야 하고, 집안에 아픈 사람 있을 경우 집안이 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격주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9.10 14:29

기독교는 명실상부 현재 전세계 1위 종교로서, 전체 인구의 31%가 믿는 종교입니다.  2위인 이슬람 22%를 훨씬 뛰어넘는 숫자이고, 인구수로 밀어붙이는 힌두교 14%도 가뿐히 제압하는 숫자입니다. 


저도 (열심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주 교회에 나가고 성경도 가끔 읽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부터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는 별의별 희한한 목사님과 신도들 덕분에 세간에 화제도 많이 뿌리고 비웃음도 많이 사는 종교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창조과학이니 요가를 금지해야 하느니 하는 사람들 덕분에 더욱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별 큰 영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이슬람이 국내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자는 선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물의는 바로 동성애에 대한 공개적인 적대감을 노출하며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저를 비롯한 많은 상식적인 사람들을 실망시킨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한가한 사람들이 세어보니, 하나님이 직접 죽이신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면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온 숫자만 세어도 2,821,364 명이고, 대략 추정치를 적용해보면 노아의 홍수 같은 재앙을 통해 대략 2천5백만명을 살해하셨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은 명시적으로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민족에 대해 명시적으로 남녀노소 심지어 가축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만큼 무시무시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절~3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런 무시무시한 신을 섬기는 종교가 어떻게 세계 제1의 종교가 되었을까요 ?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많이 다릅니다.  흔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맞을 겁니다.  저는 예전에 디씨인사이드 초장기 때부터 디씨 유저를 해왔고, 요즘은 잘 안 갑니다만 그래도 그 유쾌한 천박함과 얇팍함을 아직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을 살려 유대교와 기독교의 정수를 1줄로 요약해보겠습니다.


유대교 : 여호와만이 유일신이시며, 유대민족만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다.

기독교 : 닥치고 이웃사랑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2장 31절에서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명시적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피의 제물을 갈구하는 고대 유목민의 신(곡식을 바친 카인은 외면받고, 가축을 바친 아벨은 이쁨을 받았지요)을 섬기던 종교는 더 강대한 힘을 가진 주변 제국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유대인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을 거기에 두었으나, 선민의식과 증오를 버리고 사랑을 외치신 예수님의 종교는 전세계에 널리 퍼졌지요.


저는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가르치는 성서에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아래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45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는 이 윗 부분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지요.


그러나 '일부' 목사님들과 신자들은 동성애자들을 핍박하고 차별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께서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뭐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피에 굶주린 유목민의 신은 동성애자, 정확하게는 게이들을 증오하셨습니다.  반면에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또 동성애자 못지 않게 돼지고기와 장어, 홍합과 전복을 먹는 사람들을 증오하셨습니다.  또한 이 유목민들의 신은 남의 아내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아래 구절을 보시지요.


레위기 11장 3절 ~ 10절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레위기 18장 20절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레위기 18장 22절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



이렇게 고대 유목민의 신께서 돼지고기 및 장어 먹는 사람과 게이들을 똑같이 미워하셨는데 왜 예수님을 따르는 현대의 목사님과 신자들은 굳이 꼭 게이들을 미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식적으로 동성애자보다는 현대 도덕관념에도 매우 어긋나는 불륜남녀들이 훨씬 더 많쟎아요 ?  교회에서 차라리 기혼자들은 불륜하시면 안 됩니다 라는 캠페인이나 열심히 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기에 레즈비언도 끼워넣어서 미워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알고 보면 게이들만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도 똑같이 미워하셨다면서 아래 구절을 찾아내 들이대는 분도 계십니다.


로마서 1장 26절~27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러나 이는 바울의 말일 뿐, 예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상대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충실하느라 자신을 돕지 않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너의 이웃이 아니라, 비록 이단이더라도 착한 사마리아인이 너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유목민의 신, 즉 야훼의 가르침 중에도 좋은 것이 많습니다.  동성애자와 돼지고기 먹는 자들을 미워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처럼 자유주의 경제학을 신봉한다는 현대의 수구꼴통들이 보면 '이거 완전히 종북 빨갱이네'라고 분노할 내용들도 많습니다.   즉, 지나친 효율성을 추구하여 가난한 자들의 소득을 깎아먹지 말라고 하셨고, 심지어 일용직 노동자의 임금 체불을 하지 말라는 구체적인 명령까지 내리셨습니다.


레위기 19장 9절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장 13절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마돈나(정확하게는 원곡자인 돈 맥클린)가 'Miss American Pie'라는 명곡에서 'Book of Live'라고 불렀을 만큼, 성서에는 사랑이 넘칩니다.  그런데 현대의 일부 목사님들과 신자들은 왜 굳이 그런 책 속에서 증오 부분을 찾아내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 나이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고, 동성애자들은 차별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다음 만화나 두어편 소개드립니다.






예수님 : 천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 여기서 자넨 내 옆 자리에서 축복이 가득한 만족감 속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걸세.

신자 : 정말 신나요 !  저는 매우 기독교적인 삶을 살았거든요.


예수님 : 몇가지 자격 심사 질문이 있을건데, 그 뒤에 자넬 체크인 시켜줌세...  먼저, 자넨 다음 학문 분야에 있어서 성경 내용에 반하는 모든 증거를 거부했는가 ?


예수님 : 그러니까 인류학, 고고학, 천문한, 천체물리학, 생물학, 식물학, 화학, 우주학, 생리학, 발생학, 곤충학, 진화학, 유전학, 지질학, 파충류학, 수학, 고생물학, 판구조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동물학 말일세.

신자 : 그럼요 !


예수님 : 좋아 !  2번 질문으로 넘어가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넨 다음 내용들을 사실로 받아들였는가 ?  말하는 뱀 ?

신자 : 예, 창세기 3장 1절이요.

예수님 : 말하는 당나귀 ?

신자 : 민수기 22장 28절 !


예수님 : 인간을 임신시키는 신들 ?

신자 : 물론이지요 !

예수님 : 유니콘 ?

신자 : 민수기 23장 22절

예수님 : 용 ?

신자 : 물론이지요 !  신명기, 욥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와 말라기 모두 용 이야기를 하는걸요 !


예수님 : 귀신이 들려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자살하는 돼지는 ?

신자 : 마가복음 5장 13절에 씌여 있으니 믿지요.


예수님 : 마지막으로 내가 명한 대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는가 ?

신자 : 어... 잠깐만요, 뭘 하라고요 ?


예수님 : 어, 맞아.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33절,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18절에서 22질에 써놓았는 걸 !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야.


신자 : 정말인데요, 전 그게 다 은유적 말씀이라고 생각했지 말입니다. 




예수님 : 오케이.  내가 하나 알려줄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들을 사랑해라.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라고.  그러면 그들을 심판하는 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신자 : 하지만 그들이 게이거나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면 어떻게 하나요 ?

예수님 : 내가 말 더듬었니 ?  (= 아놔, 말 진짜 못 알아듣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8.21 21:23

6년전에 출장으로 두바이에 한달 정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1. 두바이 사람들과 일


휴일에 (여기는 금토가 휴일이랍니다) 두바이 시내를 지하철 및 시내 버스를 타고 그냥 막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철이나 버스에서 두바이 사람은 거의 못본 것 같아요.  대부분 인도인 또는 필리핀 사람들이고, 유럽계 사람들이 좀 섞여 있는 정도였습니다.




(대부분 인도-파키스탄 내지는 동남아 분들 같았습니다.)



두바이 지사에 출근하고 나서 더 놀랐습니다.  여기서 현지 고위 매니저인 오스트리아 여자분과 그 밑의 하위 매니저인 크로아티아 남자분과 커피 한잔 하면서 미팅을 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여기 두바이 지사에는 두바이 국적인이 전혀 없답니다.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두바이 사람들은 주로 공무원이나 은행 쪽에서 일을 구하기 때문이고, 또 아랍 사람들의 대학 교육은 주로 코란 경전 같은 인문학 쪽에만 치중해 있어서 IT 쪽과는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원래 여기에 설립되는 회사들은 모두 두바이 시민을 의무적으로 10%인가 고용해야 하는데, 이렇게 고용된 사람들은 일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월급은 나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 회사들은 그런 의무 고용을 일종의 '세금'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다만 지사가 위치한 두바이 internet city라는 곳은 자유 무역지대라서, 그런 의무 고용 조항이 없대요.  그래서 결국 두바이 지사에는 두바이 사람이 전혀 없답니다.



(두바이의 평범한 구내 식당...  여러 회사가 그냥 공동으로 쓰는 식당이고, 푸드 코트 형태에요.)



사무실 내에는 유럽계가 반, 그리고 인도 계열이 반 정도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약간 있고요.  공통점은 모두 석유가 안나는 나라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가끔 사우디 출신 사람도 있다는데, 재미있는 경험은 사우디 출신의 어떤 여대생 구직자을 면접할 때였답니다.  면접장에서 너무 눈에 띄게 불안해하길래,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느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가족 이외의 남자들과 자기 혼자서 한방에 있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2. 음식


간단히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중동 음식 별로 맛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아랍 음식이라는 것은 없고, 주로 레바논 음식 또는 이란 음식이 주랍니다. 둘다 케밥 종류가 대세이고,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음...   제가 둘다 먹어 보았는데 둘다 별로입니다.  굳이 고르라면 레바논 음식이 좀더 맛있었습니다.


주로 케밥처럼 꼬치구이한 고기를 얇은 피타 빵 (난 빵 같은 것)에 싸서 먹던가 뭐 그런 모양인데, 크게 별 맛은 없어요.  다만 위암이 걱정될 정도로 고기 겉을 태워 먹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특히 레바논식 피클이나 레바논식 잠두콩 스튜는 왜 그리 짠지...  한 1주일 분 소금을 한끼에 다 먹은 것 같았습니다.




(이건 이란 음식...  거의 15,000원짜리인데... 맛은 별로.... 짐작하시다시피 저 쌀밥은 안남미고, 그 위에 노란것은 샤프란입니다.  저 까맣고 둥근것은 뭐냐고요 ?  토마토 구운 겁니다..  대체 왜 토마토를 태워먹을까요 ? )



여기도 중국음식점이나 (미국식 중국집이더군요) 서브웨이 샌드위치, 버거킹과 맥도날드 꽤 눈에 많이 띕니다.




(펠라펠이라고, 콩반죽을 튀겨 만든 오뎅 비슷한 것을 넣은 샌드위치입니다.  회사 사무실 입구에서 인도네시아 계통 아주머니가 가판대를 설치하고 파는 것인데 2,700원 정도입니다.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는 약 5,000 ~ 6,000원 해요.)



따라서 점심시간이라고 사무실이 비고 그런 일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는 1시~3시 사이 편한 시간에 그냥 각자 먹고 오는 모양이에요.  제 등뒤에서 사람들이 회의하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한명이 점심이나 먹으면서 더 이야기할까 ? 하니까 다른 사람이 '어 난 이미 먹었어'라며 거절하더군요.   나중에 거기에 최근 입사한 프랑스 아저씨와 같이 점심을 두어번 했는데, 왜 아름다운 프랑스를 놔두고 여기에 왔느냐고 물으니, 프랑스는 저성장이라서 기회가 별로 없다... 그리고 솔직히... 돈 때문에 왔다고 하더군요.




(마지막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의 고기를 둘러싼 허연 것은 hommus하고 하던데, 콩으로 만든 거라든가... 크림 맛이 나더군요.)




(중동의 흔한 푸드 코트)



그런 레바논 음식의 특징 중 하나가, 소금에 절인 피클을 많이 먹는다는 것인데, 우리 김치와 비교할 수 있는 식품입니다.  종류도 많습니다.  다만 고추가루는 물론 쓰지 않았고, 오로지 소금으로만 절인 것 같은데, 김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짭니다.  대체 이걸 어찌 먹으란 말인가 싶을 정도로 짭니다.  근데 이곳에서는 나름 인기가 있는지 카르푸 같은 곳에서 우리 김치를 팔 듯이 여기서는 레바논 피클을 팝니다.






(이건 전통 시장에 들렀다 사먹은 정말 인도인들이 만들고 인도인들이 사먹는 허름한 인도식당에서 먹은 양고기 카레.  보기엔 저래도 싸고 맛있었습니다.)  




(이건 지나가다 찍은 제과점의 레바논-시리아의 전통 과자들입니다.  원래 이쪽 지방의 과자류가 매우 유명하더군요.  대표적인 것이 터키의 Turkish Delight이지요.  저 사진 속의 과자 상자들은 너무 비싸서 - 약 5만원 - 못 샀습니다.  나중에 식당에서 한조각 먹어봤는데, 정말 달고 맛있었습니다.  저거 못 사온 것이 지금도 원통합니다.  돈 아껴서 뭐하겠다고...)




3. 화장실


공항에 내렸을 때 화장실가보고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바로 화장실 변기마다 샤워기 같은 것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 지방 사람들의 뒤처리 방식 대충 아시지요 ?  물론 휴지도 다 있긴 합니다.  호텔 화장실에도 따로 비데도 아닌 것이... 아무튼 물로 뒤처리를 할 수 있는 변기도 아니고 세면기도 아닌 그런 것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좀 망측하긴 하지만, 써보면 아주 위생적이고 편리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사실 종이만으로 뒤처리한다는 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찝찝한 거에요.






4. 날씨


당연히 안좋습니다 !!!  뭘 기대하셨습니까 ?  아침에도 밖에 나가면 아주 확 후덥지근합니다 한 35도?  휴일날 대중교통 수단으로 돌아다녀 보니까, 가끔씩 정말 숨이 약간 막힐 정도로 덥더군요.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보니, 제 회색 티셔츠에 소금이 맺혀 있을 정도입니다.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호텔 앞의 바닷가에 나가보았는데, 바닷물 온도가 미지근한 목욕탕 온도에요 T T   여기에는 정말 놀랐습니다.   사무실에 있는 화장실에는 수도꼭지가 찬물/더운물 2개가 아니라 1개뿐인데, 틀어보면 매우 따뜻한 물이 나옵니다.  옥상의 물탱크에서 햇빛에 덥혀진 물이 나오는 것인가 봅니다.  한번 해수욕장에도 가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바닷물도 온탕처럼 따뜻하더군요.


더운 건 당연하고, 바닷가라서 그런지 의외로 습합니다.  물론 장마철의 한국처럼 습하지는 않지만, 예, 습합니다.  두바이는 사막에 녹지를 좀 만들어 보겠다고 바닷물을 정제하여 엄청난 양의 물을 시내의 잔디와 숲에 뿌리고 있습니다.  도시 단위로는 세계에서 가장 물을 많이 쓴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대기는 좀 뿌옇습니다.  역시 사막인지라 모래 먼지가 대기 중에 많나 봅니다.




(두바이가 자랑하는 돈질의 결정판 실내 스키장)



(두바이가 자랑하는 두바이에만 있다는 그것... 금괴 자판기)




5.  두바이의 어두운 면


주말에는 전에 봐둔 버스를 타고 골드 숙 (금 시장)이라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근데 버스를 타니까, 이건 저조차도 '아 ㅆㅂ 잘못 탔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좀 안 좋았습니다.  노동자 분위기의 시커면 인도/파키 아저씨들만 잔뜩 탄 거에요.  근데 겉모습만 좀 그렇고 착한 아저씨들 같아요.  물론 안전하게 종점까지 갔었어요.  





종점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안산 (안산 사시는 분들께는 죄송) 같은 곳이었나 봐요.  내리니까, 그곳은 진짜 인도나 파키스탄 같더군요.  사람들도 모조리 그쪽 계열이고, 식당도 다 그렇고, 분위기는 우리 남대문 시장 비슷해보였습니다.   바로 근처에 두바이 강(Dubai creek)이 있었는데, 그 강가 쉼터에는 휴일에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노동계층의 인도/파키 아저씨들이 그 찌는 듯한 더위 속에 그냥 모여 앉아 있더군요.  제가 묵던 호텔 근처와는 무척...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두바이 인구의 80%는 정말 외국인라고 합니다.  20%만 두바이 국민들인데, 이들은 정말 진골 대접을 받는다고 합니다.  일단 세금 전혀 없고요 (이건 외국인도 마찬가지 !!), 집 공짜로 나오고요, 수도세 전기세 이런거 전혀 안낸답니다.  (외국인은 내야 함)  심지어 자동차 휘발유도 대폭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답니다.  최근까지는 외국인도 그랬는데, 이젠 외국인은 제대로 된 값을 내야 한대요.  그리고 두바이 국민이면 정부가 어떻게 해서든 직장을 구해준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한 직장에서, 두바이 국민들은 그냥 커피나 마시고 외국인들이 게으름 피우지 않는지 관리만 하면 된대요.


그게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좋은데, 그래도 국가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심지어 군대나 경찰도 오만 사람들을 주로 많이 쓴다는데, 글쎄요...  



(여긴 전통 시장...  약간 돌아다녀보니, 확실히 고급 쇼핑 몰보다는 이런 전통시장이 관광객 유치에 더 좋다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쇼핑 몰에 가보니 두바이 국민들은 눈에 많이 띕니다.  (전통 복장들 때문에... 얼굴로는 잘 구분이 아직 안가요.)  그런데, 교보 문고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대형 서점들에 들어가보면, 거기에는 일단 아랍어로 된 책이 거의 없고 다 영어책들이고, 또 두바이 현지인들은 거의 없고 유럽 계통 손님들만 눈에 띕니다.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봐요.  




6. 여성들의 복장


니캅이던가... 암튼 전통 아랍식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검은 천으로 둘러싼 여성들이 두바이 여성들입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저렇게 입고도 괜찮을까 싶은데, 괜찮은가 봅니다.  다만, 어떤 여자들은 정말 눈만 내놓고 다니는데, 어떤 여자들은 얼굴은 내놓고 다니더라고요.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눈도 안내놓고 다닙니다.  (눈 부분은 얇은 검은 천으로 가려서, 안에서는 밖이 보이나봐요.)  그 차이점이 뭔지 궁금했는데, 물론 아직 모르겠어요.  아마 좀더 가릴 수록 뼈대있는 가문이거나, 뭐 그런가 보지요 ?  보면 어떤 여자는 흰 천으로 머리만 가리고 있고 (그건 주로 인도네시아 여자들 같아요) 어떤 여자는 심지어 분홍색으로 머리만 감싸고 있던데 (얼굴은 중동 계통이던데... 레바논이나 시리아 여자인가 ?)  그런 사람들은 두바이가 아닌, 외국 여자들이거나 뼈대 없는 가문의 여자들인 모양입니다.



(두바이의 흔한 대형 몰의 한 장면)



그렇게 눈만 내놓고 다니는 여성들은 음식점에서 음식 먹을때는 어떻게 할까요 ?  간단하더군요.  그냥 얼굴 가렸던 베일을 벗고, 얼굴을 내놓고 먹더라구요.



(저렇게 검은 차도르 다 뒤집어 쓴 여자는 진골 두바이 시민이고, 흰 히잡만 쓴 여자는 아마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외국 '이모님' 인가봐요.)



저런 니캅 차림의 여성들은 니캅 밑에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요 ?  한번은 바람이 날려 니캅이 휘날리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그 밑의 옷차림을 보게 되었는데, 그냥 나이키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이더군요.


여자아이들은 그냥 서방 아이들처럼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닙니다.  12살인가 13살인가까지는 그게 허용이 되는데, 그 나이가 넘어가면 무조건 저렇게 외출할 때는 다 뒤집어 써야 한대요.  그런 여자 아이들보면 아주 예쁘게 생겼습니다.  코도 오똑하고 눈도 크고요.  그런데 일정 나이가 되면 그 검은 옷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니, 좀 슬프네요.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  뭐 알 수 없죠.  하긴 우리나라 여성들도, 젊어서는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 혹시 '뼈대있는' 가문에 들어가면 최소한 신혼초에 시집에 갈 때는 답답한 한복 입어야 하쟎아요 ?  뭐 그런것과 비슷하겠지요.


한번은 히잡인지 차도르인지를 눈만 드러낸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쓴 여자들 10여명이, 길가던 저에게 단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찍어주는 저도 'Smile ~' 하면서 셔터를 누르는데 정말 웃겼습니다.  대체 나중에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들 알아볼런지 ??





(이건 제가 찍은 사진이 아니라 구글링에서 niqab group photo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8.12 09:55

맛없는 음식과 전투 본능으로 유명한 영국인들은 사람들이 '예술적 재능이 떨어진다'라고 비웃기는 해도 문화적 강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축구, 골프와 같은 스포츠는 물론이요, 대중음악과 영화 등 비교적 현대적인 문화 트렌드에서 특히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또 피쉬앤칩스와 장어파이로 쌓은 악명이 있기는 해도, 홍차와 더불어 펍(pub)의 맥주 문화도 영국의 존재감을 세계에 퍼뜨리고 있습니다.  


서머셋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na bondage)'에서 주인공 필립이 그의 아재 친구 아쎌니의 집을 일요일에 방문한 장면에서 영국 가정 음식 문화의 단편을 보여줍니다.  가족들과 함께 로스트비프(roast beef)와 요크셔푸딩(Yorkshire pudding)으로 오찬(dinner)을 먹고, 남자들끼리 잡담을 나누다가, 오후 늦게 빵과 버터를 곁들인 홍차까지 마시지요.  오찬이 차려지자 아쎌니는 6펜스(현재 가치로 대략 7천원) 짜리 은화를 하나 꺼내 딸에게 주며 맥주를 한주전자 사오도록 하지요.  아쎌니가 이것을 주석 맥주잔(pewter tankard)에 따라 마시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단언컨대(My word), 영국 맥주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  그는 말했다.  "로스트비프와 라이스푸딩, 왕성한 식욕과 맥주 같은 소박한 즐거움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세.  나도 한때는 숙녀와 결혼을 한 적이 있었다네.  세상에나 !  이 친구야, 절대 숙녀와 결혼하지는 말게나."




('인간의 굴레'는 1934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베티 데이비스 아이즈'라는 팝송 제목으로도 유명한 베티 데이비스가 주연했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덴마크나 독일, 벨기에와 프랑스 맥주까지도 잘 알려져 있고 많이 팔립니다만, 영국 맥주에는 뭐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는 푸대접을 받고는 있지만, 영국인들은 자국 맥주를 사랑하고 나름 꽤 자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맥주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이 외국 전쟁터에 나가서는 그 나라 술을 마시며 영국 맥주는 잊었을까요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중심으로 14세기 네덜란드 및 이베리아 반도를 포함한 유럽사를 기록한 프루와사르(Jean Froissart)라는 분의 연대기에는 당시 스페인에서 싸운 영국군의 이야기가 씌여 있습니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영국군이 패배한 이유는 다름아닌 영국 맥주가 없어서였습니다.  영국인들은 몸에 습기를 유지시켜주는 든든하고 돗수가 높은 맥주(good heavy ale)을 마셔야 하는데, 그게 없다보니 단맛 대신 신맛이 나는 포도주(dry sharp wine)를 마셨기 때문에 간과 폐, 그리고 장을 바싹 태워버려 몸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많은 영국군이 열병과 이질 설사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 프루와사르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이런 현상이 하급 병졸들은 물론이고 영주나 기사, 견습기사(barons, knights and squires)까지 다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즉, 영국에서는 기사나 병졸이나 원래는 다 맥주를 즐겨마셨다는 것이지요.




(백년전쟁 중의 슬루이스 해전 모습입니다.  제가 읽었던 프르와사르 연대기 펭귄문고판 표지가 저거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맥주가 없으면 큰일이 나는 것은 영국 육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을 그린 책 개럿 매팅리(Garrett Mattingly)의 책 '아르마다'(The Armada)를 보면, 스페인 무적함대를 아일랜드 쪽으로 쫓아 보낸 뒤 영국 항구로 돌아온 영국 함대의 모습은 금의환향하는 영웅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습니다.  아마 스페인 함대와 싸우러 출항할 때는 적의 화승총이나 대포, 심지어 스페인군의 유명한 미늘창에 많은 사상자를 내리라고 비장한 각오로 나갔을텐데, 결국 그런 것에 죽은 선원은 거의 없었음에도 많은 선원들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영불 해협 인근에서 알짱거린 것이 전부였으니 그다지 긴 항해도 아니었는데도, 괴혈병으로 선원들이 픽픽 죽어넘어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항구로 돌아온 다음에도 급료는 커녕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제대로 받지 못한 선원들은 계속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이 참상의 원인에 대한 영국 함대 지휘부의 결론은 단순명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맥주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으로 원정을 간 영국 기사들이나 영불 해협에서 스페인 함대 뒤를 따라다니던 영국 함대의 선원들이 good heavy ale을 마시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맥주는 살균처리도 못 했고 또 알코올 돗수가 낮아 오래 보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외국으로 수송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 시대 영국 해군에서는 출항 직후에만 맥주를 배급했고, 저장해둔 맥주가 떨어진 이후에는 럼주에 물을 타서 배급했습니다.  럼주나 브랜디는 알코올 돗수가 높아서 절대 상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브랜디는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비싼 것이었으니 천한 선원들이나 졸병들에게 줄 물건이 아니었고,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럼주가 딱 적격이었지요.  나폴레옹 시대때만 해도, 위스키는 아직 영국에서조차 유행을 타기 전이었습니다.


한편, 인도 주둔 영국군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선원들의 경우 그래도 몇 개월마다 한번씩 그리운 영국 맥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으나, 지구 반대편에 배치된 인도 주둔 영국군은 본토로 귀환하기 전에는 전혀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당시의 범선으로는 영국에서 인도까지 4개월 이상 걸렸기 때문에 맥주가 상해버렸던 것이지요.  인도 현지의 화주인 아락(arrack)주나 럼주만 마실 수 있었던 병사들은 가끔씩이라도 맥주를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인도까지의 선박 운송 기간 중 맥주가 상하지 않도록 영국의 몇몇 양조장에서 특별히 좀더 홉을 많이 넣고 알코올 돗수를 높여서 빚은 맥주가 바로 IPA, 즉 India Pale Ale 입니다.  보우(Bow) 양조장에서 처음으로 IPA가 빚어진 것이 1787년인데, 인도 현지에 아예 영국 맥주 공장을 지은 것이 1830년이니 꽤 긴 세월 동안 인도 주둔 영국군은 맥주 부족에 시달렸을 것 같습니다.





원래 맥주하면 독일이지요.  그래서인지 1898년 독일이 청나라의 팔을 비틀어 청도(칭따오)를 99년간 조차하는데 성공하자, 고작 5년 뒤인 1903년에 독일은 철도와 전신 전화 등 식민지 경영에 필수적인 기간 시설과 함께 맥주 공장을 지었습니다.  라오산 지역에서 발견된 맑은 지하수 외에는 홉과 심지어 보리까지 모조리 독일에서 수입하여 만든 이 맥주가 오늘날에도 양꼬치엔 칭따오라는 그 칭따오 맥주입니다.  이 칭따오 맥주는 첫 맥주가 출하된지 2년 만인 1906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높은 품질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이렇게 건설한 칭따오를 불과 20년도 안되어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잃게 되는데, 이 지역을 공격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당시 연합국 소속이었던 일본군이었습니다.  당시 칭따오 포위전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던 독일군은 최소한 제대로 된 맥주가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1903년 칭따오 맥주의 건립자들 모습입니다.  사실 칭따오 맥주는 100% 독일계는 아니고, 영국과 독일의 합작 회사였습니다.)



영국인들의 맥주 사랑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서 큰 타격을 입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총동원 상태의 전시에도 맥주를 빚어 마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여론이 많았거든요.  가령 1916년 영국 수상이 된 데이빗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독일 잠수함보다 영국인들이 음주가 군수 체제에 끼치는 폐해가 더 크다'라고 공격했고, 결국 영국 전통 맥주집인 펍(pub)의 영업 시간을 단축시키고 양조장을 폐쇄하는 등 맥주 탄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맥주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서 가격을 2배로 올려버렸지요.  그 결과, 1917년 맥주 생산량은 19만 배럴로서, 전쟁 발발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보급품에서 맥주가 빠진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국 육해군의 피라고도 할 수 있는 럼주까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럼주는 참호전의 추위와 습기에 노출된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조금씩이라도 배급되었으나, 식량과 탄약을 수송하기도 힘든 마당에 부피와 무게가 상당한 맥주를 실어나르는 것은 정말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럼주 대신 맥주가 배급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래 배식량은 모두 전쟁 초기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이고, 실제 배급된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프랑스군은 와인을 병사들에게 꾸준히 배급했고, 이를 본 영국군은 '왜 우리에겐 럼이나 맥주를 주지 않는가?'라며 투덜댔다고 합니다.  영국군에게도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프랑스산 와인이 배급되기는 했으나, 대개 품질이 좋지 않은 백포도주였고, 이를 영국군은 vin blong (프랑스어로 백포도주인 vin blanc에서 나온 말인데, 실제 blanc의 프랑스어 발음도 불랑이 아니라 블롱에 가깝습니다)이라고 부르며 투덜거렸습니다.  일부 프랑스산 라거(lager) 맥주가 배급되기도 했지만, 영국산 포터나 에일 맥주에 비해 약하고 밋밋한 프랑스 라거 맥주는 영국 병사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국군 1914년 1일 배식량 :


신선육/냉동육 1.25 파운드 또는 보존육/염장육 1 파운드

빵 1.25 파운드 또는 건빵/밀가루 1 파운드

베이컨 4 온스

치즈 3 온스

홍차 0.625 온스

잼 4 온스

설탕 3 온스

소금 0.5 온스

후추 0.028 온스

겨자 0.05 온스

신선채소 8 온스 혹은 건조채소 2 온스 혹은 라임주스 0.1 온스 

(지휘 장성의 재량에 따라) 럼주 0.06 리터 또는 포터맥주(porter) 0.57 리터

담배 0.29 온스



독일군 1914년 1일 배식량 :


빵 1.66 파운드 또는 건빵 1.09 파운드 또는 계란비스킷 0.88 파운드

신선육 또는 냉동육 0.81 파운드 또는 보존육 0.44 파운드

감자 53 온스(3.3 파운드)  또는 신선채소 4.5~9 온스 또는 건조채소 2 온스 혹은 감자와 건조채소 혼합물 21 온스

커피 0.9 온스 또는 홍차 0.1 온스

설탕 0.7 온스

소금 0.9 온스

시가 또는 담배 2 개피 또는 파이프 담배 1 온스 또는 코담배 0.2 온스

(지휘 장성의 재량에 따라) 증류주 0.097 리터 또는 와인 0.25 리터 또는 맥주 0.5 리터




(이 사진은 영국군의 포탄과 럼주병을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럼주는 저런 커다란 도자기 병에 넣어서 공급되었습니다.  저 도자기 병의 바닥에는 보급창(Supply Reserve Depot)을 뜻하는 S.R.D가 찍혀 있었으나, 병사들은 이를 '군납 럼에 물을 탔네'(Service Rum Diluted) 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은 거의 없네'(Seldom Reaches Destination)라고 부르며 조롱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술이 병사들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반영되었는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병참부는 맥주에 대해서 다소 완화된 입장이었습니다.  가령 1940년에 식량부 장관이던 울스턴 경(Lord Woolston)은 정부 각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맥주 한 잔은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리고 영국의 맥주 양조장은 '소중한 식량을 낭비하는 퇴폐 업종'이라는 오명 대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소중한 맥주 생산에 힘쓰는 산업 전사'라는 포지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942년에는 '군부대를 위한 맥주'(beer for troops)라는 위원회까지 결성되어, '병사들의 식사에 맥주를 공급하는 것은 국가적 의무'라는 구호까지 외쳤습니다.  하지만 특히 대전 초기에는 독일 U보트의 기세가 등등했으므로 해외의 영국군에게 맥주를 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력과 탄약,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는 것도 힘들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멜 장군에게 함락 직전이던 북아프리카 토브룩(Tobruk)에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500 상자의 맥주를 보냈고, 이것이 무사히 하역되자 당시 병사들이 뛸 듯이 기뻐했고 그 뒤로로 이 날을 꽤 오래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맥주업체들의 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래 사진입니다.  이건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 내에 활주로를 확보하자, 영국 맥주업체들이 전선의 병사들을 위문하고자 본토에서 프랑스로 날아가는 스핏파이어(Spitfire Mk IX) 전투기 날개 밑에 맥주통을 매달아 보낸 것입니다.  2천 피트 상공을 고속으로 날아 배달된 맥주통은 딱 알맞은 온도로 냉각되어 이를 받은 병사들을 정말 기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핏파이어 전투기의 이런 생산적인 활동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곧 영국 관세청(Customs and Excise)이 이 사실을 알아냈고, 세금 납부 없이 맥주를 반출하는 것은 위법이라며 금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본토를 오가는 공군기들은 조종석 남는 공간이나 사물함 등에 맥주병을 몰래 가져와 나눠 마셨고, 심지어 외부 연료 탱크(drop tank)에 맥주를 실어 왔습니다.  그렇게 맥주를 실은 연료통을 달고 오는 전투기가 착륙할 때면 전체 공군 기지의 병사들이 다 몰려나와 그 착륙을 노심초사하며 구경했고, 조종사가 미숙하여 거칠게 착륙하는 경우 야유를 보냈다고 합니다.  영국군의 지상 공격기인 타이푼(Typhoon) 조종사였던 데즈먼드 스캇(Desmond Scott)이라는 양반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렇게 연료 탱크에 채워온 맥주에서는 쇠맛이 나서 사실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Source : 서머셋 모옴 '인간의 굴레'

개럿 매팅리 '아르마다'

프루와사르 '연대기'

http://www.urbanghostsmedia.com/2014/08/beer-keg-carrying-spitfires-world-war-two/

http://allaboutbeer.com/article/beer-goes-to-war/

https://archive.org/stream/chroniclesoffroi00froi/chroniclesoffroi00froi_djvu.txt

https://warontherocks.com/2015/06/a-farewell-to-sobriety-part-two-drinking-during-world-war-ii/

https://en.wikipedia.org/wiki/Tsingtao_Brewery

https://en.wikipedia.org/wiki/India_pale_ale

https://yesterdaysshadow.wordpress.com/qingdao-germanys-chinese-colony/

https://en.wikipedia.org/wiki/Beer_in_India

http://net.lib.byu.edu/estu/wwi/memoir/ration.html

https://pointsadhsblog.wordpress.com/2014/05/29/world-war-i-part-2-the-british-rum-ration/

https://www.diffordsguide.com/encyclopedia/475/bws/booze-in-wwi

http://ww2talk.com/index.php?threads/unorthodox-use-of-spitfire-in-normandy-beer.37477/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7.27 01:24

영화 덩케르크 개봉 기념으로, 영화 보면서 궁금했던 점 몇가지 정리했습니다.  (주의 : 일부 약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1.  톰 하디의 스핏파이어 전투기에는 총알이 몇 발이나 들어 있었을까요 ?


어설프게 만든 전쟁 영화 또는 드라마의 특징이 총에 화수분 탄약이 들어 있는지 총알이 떨어지는 일 없이 아주 무한정 쏟아지는 것입니다.  톰 하디가 몰던 스핏파이어에는 몇 발의 총알이 들어 있었을까요 ?


스핏파이어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A wing 타입의 기체에는 0.303 구경 (7.7mm) 브라우닝 마크 2 기관총이 날개당 4정씩, 총 8정 장착되어 있었고, 정당 장탄수는 350발씩이었습니다.  이 브라우닝 마크 2 기관총은 초당 발사 속도가 약 7발 정도이므로, 톰 하디가 쏜 것처럼 약 2초씩 끊어서 쏜다면 총 50초, 즉 25번을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화 보면서 대충 세어보니 정말 25번 정도 쏘더군요.  놀란 감독 철저합니다.


우리나라 공군이 보유한 F-15 전투기의 경우 6개의 총신으로 구성된 20mm 개틀링 벌칸포가 장착되어 있는데, 총 장탄수는 940발입니다.  이 벌칸포는 초당 발사 속도가 약 100발이므로, 한번에 2초씩 끊어서 쏘면 대략 4~5번 사격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전투기 영화에서 여러번 드르륵 드르륵 긁어대는 것은 알고 보면 다 잘못된 설정인 셈입니다.






2.  왜 톰 하디는 영국군 지역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고 독일군 지역으로 날아가 불시착을 했을까요 ?


다음 URL은 양키들이 이 덩케르크 영화를 보고 서로 토론하는 레딧 쓰레드인데, 여기서도 왜 톰 하디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굳이 불시착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택했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https://www.reddit.com/r/Dunkirk/comments/6ol611/spoilers_discussion_thread_dunkirk/


토론 초반에 세를 얻은 썰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1) 슈투카를 격추시킨 것에 대해 지상군이 환호를 올리는 상황에서,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지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2) 그냥 추락시킬 경우 독일군이 부서진 기체를 손에 넣어 군사 기밀인 전투기 정보를 넘겨주게 되므로, 확실히 소각처분하기 위해 불시착한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자신이 항공 관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와 간단히 정리를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3) 고도가 너무 낮으면 낙하산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왜 영국군 지역에 불시착하지 않았느냐고 ?  엔진이 멈춘 비행기는 약간만 선회해도 곧장 실속(stalling)하여 땅에 쳐박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1941년 6월,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몰다가 구름 속에서 아군기끼리 충돌하여 탈출해야 했던 John Gillespie Magee라는 조종사는 120m 상공에서 탈출했으나 낙하산이 펴지기 전에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  콜린스(톰 하디의 동료 조종사)는 왜 바다 위에 불시착을 선택했나요 ?


예나 지금이나, 추락하는 비행기에서의 낙하산 탈출(bailing out)은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전투기에는 조종석 밑에 로켓이 달린 자동 사출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습니다.  가장 흔한 사고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직후 자기 자신의 비행기의 꼬리 날개에 부딪히거나, 낙하산 줄이 꼬리 날개에 엉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사실상 죽음을 뜻했지요.  바다 위에서 낙하산을 펴는 것은 더욱 위험했습니다.  물 위에 떨어진 다음에 낙하산과 낙하산 줄에 엉키면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도 익사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체 상태가 양호하다면 조종사 개인적으로 바다 위에 불시착(ditching)하는 것을 택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4.  그렇다면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들은 '웬만하면 낙하산 펴지 말고 바다 위에 불시착하라'고 훈련 받았나요 ?


아닙니다.  특히 영화 속에 나오는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의 경우 공식 매뉴얼에서 "낙하산 탈출을 권고하며, 바다 위에 ditching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허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스핏파이어의 특성, 즉 ditching quality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Ditching quality가 나쁘다는 것은 물 위에 불시착하는 경우, 전투기가 기수를 바다 속으로 쳐박으며 물 속으로 급격히 가라앉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스핏파이어의 매뉴얼에는 불가피하여 ditching할 경우엔 반드시 물결(swell)을 따라 착륙할 것을 권고하며, 절대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으로 불시착을 시도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5.  콜린스는 왜 조종석 덮개 유리창(canopy)을 닫고 불시착했나요 ?  그렇게 덮개를 닫고 불시착하는 것이 당시의 표준 절차였나요 ?


역시 아닙니다.  역시 저 매뉴얼에는 불시착시에는 덮개를 열고 착륙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캐노피라고 불리는 덮개 유리는 (영화 속에서 콜린스가 겪었던 것처럼) 적탄이든 결빙이든 여러가지 이유로 걸림이 발생하여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런 경우 때문인지, 스핏파이어 조종석 옆에는 crowbar(흔히 빠루라고 부르는 쇠지렛대)가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기체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는 최후의 순간까지 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행 중에 캐노피를 열면 화염이 조종석 안으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많았으니까요.  






6.  톰 하디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을 것이고, 대접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톰 하디처럼 전투기 조종사는 그나마 나았는데,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의 경우는 재수없으면 전쟁 포로가 아닌, 전범 또는 간첩으로 분류되어 SS(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도의 수용소에 갇혀 취조와 고문, 심지어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폭격기들의 공격 대상은 군대가 아니라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였거든요.  그래서 Terrorflieger (영어로는 terror flier), 즉 일종의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었습니다.   라마슨(Phil Lamason)이라는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군 조종사는 랭카스터 폭격기로 임무 수행 중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SS에게 넘겨져 열악하고 잔인한 SS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라마슨을 포함한 약 168명의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 및 승무원 포로들은 결국 집단 처형될 운명이었는데, 그렇게 되기 직전 어떻게 사정을 전해들은 독일 공군이 '그런 짓을 용납할 수는 없다'라고 개입하여 간신히 일반 전쟁 포로 수용소로 옮겨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육군도 그랬지만, 독일 공군도 SS라면 영 질색을 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레딧 쓰레드에 톰 하디가 포로 수용소에 간 뒤 탈출하는 속편 영화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리더군요.


He gets attacked in the POW camp while protecting a child - no ordinary child.. a child born in hell !

톰 하디는 포로 수용소에서 어떤 아이를 보호하다가 다구리를 맞게 되지 -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어...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였지 !







7.  영어로는 '덩커크'라고 읽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Dunkirk가 프랑스어로 '덩케르크'라고 읽히는 것인지요 ?


간단합니다.  Dunkirk는 영국인들이 이 도시를 가리키는 영어식 이름일 뿐이고, 원래 프랑스어로는 Dunquerque라고 쓰고 '됭께흐끄' 정도로 읽습니다.   일본섬 쓰시마를 한국어로는 대마도라고 표기하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국인들은 유럽 곳곳에 현지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엇비슷한 발음의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네치아(Venezia)를 베니스(Venice)라고 부른다던가, 피렌체(Firenze)를 플로렌스(Florence)라고 부르는 것 등입니다.  


한국어로는 덩케르크라고 표기되는 이 작은 도시에는 네덜란드어 이름도 있는데 Duinkerke(됭케르커)라고 하고, 원래 뜻은 모래(dun) 교회(kerke)라는 뜻이랍니다.  실제로 이 도시는 원래 네덜란드 땅이었는데, 네덜란드가 통째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영국-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 독립군 사이에서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에 영국왕 찰스 2세가 프랑스에게 이 도시를 32만 파운드에 매각하면서 지금처럼 프랑스 땅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도시는 프랑스어권 도시로는 세계 최북단에 있는 도시라고 합니다.






8.  구조되어 구축함에 승선한 병사들에게 주어진 홍차에는 우유와 설탕이 들어 있었을까요, 레몬이 들어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아무 것도 넣지 않은 straight tea였을까요 ?


알 수 없습니다만 우유와 설탕이 들어 있었을 확률이 훨~씬 큽니다.  지금은 좀더 다양해졌다고 합니다만 (저 영국 가 본 적 아직 없습니다), 당시 영국인들이 마시던 차는 대개 우유와 설탕이 든 것이었습니다.  


왜 영국인들이 녹차가 아닌 홍차를 마시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1) 홍차의 보존 기간이 좀더 길기 때문에 중국에서 느린 범선으로 실어나르던 차는 일부러 홍차를 골라 실었다는 것  (2) 영국인들은 커피나 코코아에 이미 설탕을 넣어 마시고 있었는데, 설탕을 넣어 마시기에는 녹차보다는 홍차가 좀더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는 것 등입니다.  아마 2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홍차에 우유를 넣는 것은 고대부터 중국과 거래하여 차를 마셔왔던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도 흔히 차를 마시던 방법입니다.  심지어 버터를 넣기도 한답니다.  특히 원래 싸구려 독주인 진(gin)을 진탕 마셔 술주정뱅이의 나라로 유명했던 영국이 산업 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장 노동자들에게 진과 맥주 대신 설탕과 우유를 넣은 차를 마시도록 유도했습니다.  원래 홍차는 전량 중국에서 직수입하던 고급품이었다가, 수입량이 늘어나고 특히 식민지 인도에서 차 플랜테이션이 성공하면서 일반 노동자들도 쉽게 마실 수 있게 된 기호품이었습니다.  노동자들도 그런 고급 기호품을 마시게 되어 기뻐했고, 공장주들은 이제 노동자들이 술을 적게 마셔 생산성이 늘어나니 좋았습니다.  특히 설탕과 우유를 넣은 차, 그리고 잼을 바른 빵 한조각은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열량을 공급해주는 좋은 새참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홍차에도 당연히 설탕과 우유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지급된 인스턴트 홍차 분말 깡통인데, 차와 함께 설탕과 분유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진짜 찻잎이 든 깡통이 배급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홍차를 공급하느라, 1942년 영국은 유럽 대륙 전체에서 유통되던 홍차를 모조리 사들여 사재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Spitfire

https://www.reddit.com/r/Dunkirk/comments/6ol611/spoilers_discussion_thread_dunkirk/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ccidents_and_incidents_involving_military_aircraft_(1940%E2%80%9344)

http://www.armchairgeneral.com/forums/showthread.php?t=77451

http://www.techsupportforum.com/forums/f36/survival-rate-of-shot-down-pilots-during-world-war-ii-366842.html

http://spitfireforums.com/index.php?action=printpage;topic=297.0

http://www.avialogs.com/index.php/en/aircraft/uk/supermarine/spitfire/ap-1565i-pilots-notes-for-spitfire-ixxi-xvi.html

https://en.wikipedia.org/wiki/Dunkirk

https://reprorations.com/Britain%20WW2/WW2-Britain%20page%202.htm

https://www.thevintagenews.com/2017/06/02/during-wwii-the-british-government-bought-the-worlds-entire-supply-of-tea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7.09 22:54

몇 달 전에 토르 3, 라그나로크(Thor Ragnarok)의 티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습니다.


https://youtu.be/v7MGUNV8MxU




무척 재미있어 보이는 이 티저 영상의 배경 음악은 1970년대의 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펠린(Led Zeppelin)의 히트곡인 '이민자의 노래'(Immigrant Song)입니다.  이민자라고 하니까 뭔가 애달프고 핍박받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데, 요즘 구미 선진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이민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멋진 노래가 묘사하는 이민자 역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바이킹에 대한 노래이거든요.  저 토르 3 티저 영상을 만든 프로듀서가 정말 기가 막히게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낸 것이지요.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The hammer of the gods

신들의 망치가

Will drive our ships to new lands

우리의 배를 새로운 땅으로 밀어내

To fight the horde, and sing and cry

적의 대군과 싸우고 이렇게 노래하며 외치게 만들지

Valhalla, I am coming!

발할라여, 내가 간다 !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

너희의 초록빛 평야는 정말 부드럽구나

Can whisper tales of gore

선혈이 낭자한 이야기를 속삭여주마

Of how we calmed the tides of war

우리가 어떻게 전쟁의 물결을 잠재웠는지 말이야 

We are your overlords

우리가 너희의 주인이다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So now you'd better stop and rebuild all your ruins

그러니 너희는 이제 저항을 멈추고 너희의 폐허를 다시 짓는게 낫노라

For peace and trust can win the day despite of all your losing

너희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신의가 세상을 지배할테니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레드 제펠린.  70년대 이런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지금의 60~70대 노인이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이 노래 가사 중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가사에서도 암시되듯이, 아마도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에 살던 바이킹들이 굳이 거친 바다와 험한 싸움을 무릅쓰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이유 중 하나는 자기네들 땅이 그다지 살기 좋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8세기 말엽부터 약 300년 동안 맹위를 떨치던 바이킹의 침략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스칸디나비아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이 침략 행위를 주도했다고도 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팽창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해외 침탈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경제에 여유가 생기자 그로 인해 인구가 늘어난 것이지, 인구가 늘어나서 침략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설 중 하나는 바이킹이 해외 침략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나 영국이 일찍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것이 모두 장자 상속제(primogeniture)와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모든 것을 다 상속받고 차남이나 삼남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던 차남 삼남들이 목숨을 걸고 해외로 강도질을 나섰다는 것이지요.  미국 역사가 슬로안(Sloan)은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프랑스는 장자 상속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킹의 침략 행위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도 그랬고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저 멀리 러시아에서도 그랬듯이, 바이킹들은 따뜻한 땅에 정착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환영받지 못한 이민자 바이킹들의 정착 성공 지역)



바이킹들이 초록빛으로 뒤덮힌 부드러운 대지를 찾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난 이유는 누가 생각해도 간단할 것 같습니다.  따뜻한 곳이 좀더 농사 짓기에 좋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바이킹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릴 때, 커다란 멧돼지 통구이에 넘치는 벌꿀술과 맥주 등 아주 풍요로운 식탁을 생각합니다.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보리죽을 먹는 모습을 그리면 너무 초라해보일테니까 그렇게 고기를 먹는 것으로 묘사했겠지요.  그러나 스칸디나비아가 돼지 먹이를 풍부하게 생산하는 땅도 아니니, 돼지고기는 축제 때나 먹는 특식일 뿐 바이킹들이 365일 먹는 주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연 바이킹들은 평소에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  일년의 절반이 얼음과 눈,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둠으로 뒤덮힌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농사를 지었을까요 ?




(노르웨이의 얼음과 눈으로 덮힌... 농촌입니다.)



아시다시피 덴마크나 스웨덴, 노르웨이가 1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힌 곳은 아닙니다.  거기서도 여름은 따뜻하고 사람들 반팔 입습니다.  따라서 농사도 활발히 지었는데, 그래도 역시 춥고 척박한 땅이다보니 밀 농사는 어려웠고 주로 보리와 호밀, 귀리를 재배했습니다.  그러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꿈꾸던 하얀 밀빵은 먹기 어려웠겠지요.  이런 거친 곡식으로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스코틀랜드 사람들처럼 죽을 끓여 먹었을까요 ?  아마 그런 죽도 먹었을 것입니다.  특히 바이킹들은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통구이 바베큐가 아니라 주로 고기를 채소와 함께 삶은 스튜를 즐겨 먹었다고 하니까, 죽도 잘 먹었을 것 같습니다.  죽이든 스튜든 대표적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서, 적은 재료로 여러 사람들이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었지요.  그러나 바이킹도 분명히 빵을 만들어 먹었고, 그 특유의 척박한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의 개성있는 소박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을 가서 뭔가 교육을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교외에 있는 Xerox Document University라는 시설에서 이루어진 이 교육 과정에는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직원들 약 20여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숙식을 다 이 시설에서 제공했습니다.  카페테리아 형태의 식당은 음식의 질이 꽤 훌륭했습니다.  그 때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같이 교육을 받던 덴마크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하고 키가 비슷했으니 덴마크인치고는 꽤 작은 키였던 그 청년은 무척 지적인 이미지였는데, 아침식사를 같은 테이블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남는데, 그 청년은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난 귀국하면 지금 같이 사는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라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 금발머리 청년의 표정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그때 그 청년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뭔가 크래커 비슷한 것이었는데, 색깔과 재질이 보통의 크래커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밀겨 같은 것이 촘촘히 박힌 얇은 사각형의 과자 같은 모양이었는데, 그 친구는 거기에 버터를 발라 먹더군요.  저는 (실은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그런 부페식 공짜 식당에 가면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입에 쑤셔 넣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달걀과 베이컨 등등을 잔뜩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와 이 맛있는 것을 놔두고 저런 걸 먹다니'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상한 크래커 같은 음식을 다시 본 것이 거의 20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영어 원제 :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이라는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영화였지요.  잡지사 일을 하는 마이클 역으로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주인공 리스베트와 한겨울 눈으로 덮힌 오두막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뭔가를 심각하게 의논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뭔가를 바삭하고 베어 무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것이 그 덴마크 청년이 먹던 그 크래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찾아 유튜브와 구글을 열심히 뒤져 보았으나 못 찾았습니다.  원작 소설 속에서도 그 아침식사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더군요.  그러나 그 크래커 같은 빵이 확실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나중에 웹을 뒤져보니, 그건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많이 먹는 크내커브로(knäckebröd, 덴마크어로는 knækbrød, 영어로는 crispbread)라는 빵이었습니다.  바이킹들이 문헌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으므로 이 빵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대략 기원 후 500년 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러니 바이킹들도 아마 항해시에는 이 빵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바삭바삭한 빵을 굽기 위해서는 오븐도 필요없고 평평한 돌이나 번철에서 그냥 귀리나 호밀 반죽을 굽기만 하면 되고, 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한번 만들어 놓으면 수개월씩 보관할 수 있었으므로 바이킹들의 항해에 딱 좋았을 것입니다.


그 덴마크 청년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이 크내커브로는 지금도 북부 유럽에서 꽤 먹는 음식입니다.  아마 스웨덴이라는 이국적인 특성을 보여주려고 그 밀레니엄 영화에서도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크내커브로를 먹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건 맛이 있을 턱이 없는 음식이므로 전통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인식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건강과 전통의 관점에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알고 보면 바이킹들도 레드 제펠린의 저 노래에 나온 것 같은 무적의 전사들이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어 목숨을 걸고 부자집 담을 넘어야 했던 강도들 같은 존재였고, 크내커브로도 그런 절박한 이민자의 애환이 깃든 음식인 셈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7.01 11:32

이 글은 뉴욕 타임즈의 아래 기사 중 일부를 번역하고 사진을 옮긴 옛날 글인데, 주말 오전에 읽기 좋을 것 같아 다시 올립니다.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08/magazine/eaters-all-over.html?_r=3



1.  일본 도쿄, 사키


사키가 처음으로 나또를 먹었을 때는 이 여자애가 생후 7개월 되었을 때였는데, 먹자마자 토했다.  엄마인 아사까는 아마 냄새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냄새는 마치 깡통제 고양이 사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츰 이 끈적끈적한 발효콩은 사키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고, 전통적인 일본식 아침식사에 빠지지 않는 일부가 되었다.  다른 메뉴는 흰쌀밥, 미소된장국, 간장과 청주로 요리한 으깬 호박, 오이 장아찌 (사키가 제일 싫어하는 반찬), 계란말이, 그리고 연어구이이다.




2.  터키 이스탄불, 도가


도가 앞에 펼쳐진 화려한 토요일 아침식사에는 카이막(꿀과 엉긴 크림)을 얹은 토스트, 그린/블랙 올리브, 수쿡이라는 이름의 매운 소시지, 삶은 달걀, 타히니(참깨를 갈은 것)를 얹은 뻑뻑한 포도 시럽 (페크메즈), 양/염소/젖소 우유로 만든 여러가지 종류의 치즈, 모과잼과 블랙베리 잼, 패스트리와 빵, 토마토, 오이, 흰 무와 여러가지 신선 채소, 구운 고추로 만든 페이스트인 kahvaltilik biber salcasi, 그리고 디저트로는 헤이즐넛으로 향을 낸 할바(halvah) 과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유와 오렌지 쥬스도 있다.  확실히 평일날 아침식사보다는 화려한 편인데, 이 가족은 여러가지를 먹는 터키식 아침식사 전통을 따르고 있다.





3.  프랑스 파리, 나타나엘


나타나엘이 아빠집에 묵을 때의 평일날 아침식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준비해주는데, 항상 키위 한개, 타르틴 (빵위에 고기나 치즈, 채소를 얹은 것), 바게트에 버터와 잼을 바른 것, 그리고 우유와 시리얼, 갓 짠 오렌지 쥬스이다.  나타나엘은 크레페와 코코아를 더 좋아하고, 많은 프랑스 꼬마애들이 이걸 더 좋아하지만 아빠인 세드릭은 건강을 더 생각하는 편이다.  주말에는 크롸상을 먹고, 빠띠쉐인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정 그대로, 자기가 만든 디저트를 먹는다.





4.  말라위 치텟제, 에밀리


에밀리는 할머니 에텔과 함께 말라위의 수도인 릴롱궤 외곽에 사는데, 할머니가 다른집 파출부를 하기 때문에 이 아홉 식구는 6시 이전에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에밀리의 아침식사는 팔라라고 불리는 콩가루와 너트가루를 섞은 밀가루 죽과, 밀가루/양파/양파/고추 반죽 튀김, 그리고 삶은 감자와 호박, 그리고 꽃과 설탕으로 만든 검붉은 색의 쥬스를 마신다.  에밀리는 운이 좋은 편이고, 다른 말라위 어린이들은 영양 실조 상태인 경우가 많다.  가끔은 아침에 에밀리도 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신다.





5.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비르타


비르타의 귀리죽은 hafragrautur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아이슬란드의 기본 아침식사이다.  이 귀리죽은 물 또는 우유로 끓이는데, 종종 갈색설탕, 메이플시럽, 버터, 과일, 그리고 신 우유인 surmjolk를 곁들인다.  비르타는 또 lysi라고 부르는, 대구 간 기름을 마신다.  아이슬란드의 긴 겨울에는 햇빛이 부족하여 비타민 D가 부족하기 쉬운데, 이 대구 간 기름에는 비타민 D가 풍부하다.  비르타의 엄마인 스바나는 4명의 아이들에게 생후 6개월부터 이것을 마시게 했는데, 지금은 모두들 불평없이 잘 마신다.  아이슬란드의 많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이 lysi를 아침마다 마시게 한다.





6.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비브


비브에게 아침식사는 우유와 함께, 버터를 바르고 (가장 중요한) 달콤한 스프링클을 뿌린 빵이다.  이 스프링클은 초콜렛, 바닐라, 과일 등 다양한 맛과 크고 작은 다양한 사이즈로 나온다.  정부가 운영하는 관광 관련 사이트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는 매일 75만 조각의 빵이 hagelslag (싸락눈 폭풍)이라고 불리는 초콜렛 스프링클과 함께 소비된다고 한다.  비브는 특히 vruchtenhagel (과일 싸락눈)이라는 이름의 여러가지 혼합맛 스프링클을 좋아한다.





7.  브라질 상 파울루, 아리시아와 하킴


아리시아의 분홍색 컵에는 초콜렛 우유가 담겨 있지만, 동생인 하킴의 컵에는 라떼 커피가 들어있다.  많은 브라질 부모들에게 있어, 아이에게 커피를 주는 것은 문화적 전통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커피가 비타민과 항산화물질이 풍부하며, 우유와 섞어 아침식사로 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중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아빠인 헤지날도도 하킴이 그걸 마시고 나면 더 들뜨는 것 같긴 하다고 인정하지만, 적당히 마시면 괜찮다 소아과 의사도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빵과 버터와 함께 햄과 치즈도 먹는다.





8.  말라위 치텟제, 필립과 셀린


필립과 그의 쌍동이 여동생인 셀린은 chikondamoyo라는 달콤한 옥수수빵 비슷한 케익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건 할머니인 도로시가 알루미늄 냄비로 만든 것이다.  이 쌍동이는 아침식사로 그것과 함께 삶은 감자와 설탕을 넣은 홍차도 든다.





9.  일본 토쿄, 코끼


코끼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미국식 아침식사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가끔은 엄마 후미가 시리얼과 도우넛도 주지만, 엄마는 아이들이 일본식 식사에 더 익숙하기를 바란다.  이 식사에는 간장과 참깨를 넣어 멸치와 함께 볶은 풋고추, 뜨거운 밥에 비빈 간장을 넣고 비빈 날계란, 그리고 연근과 우엉, 당근을 참기름과 간장, 정종으로 조린 반찬, 미소 된장국, 포도, 배 한조각, 우유가 포함되어 있다.





10.  터키 이스탄불, 오이쿠


4학년인 오이쿠의 아침식사의 중심은 갈색 빵이다.  여기에 그린/블랙 올리브와 누텔라 잼, 토마토, 삶은 달걀, 딸기잼과 꿀에 절인 버터, 여러가지 종류의 터키 치즈가 덧붙여진다. 





11.  브라질 상 파울루, 티아고


티아고는 초콜렛 우유를 좋아하고 또 일어나자마자 그걸 달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미 엄마가 직장에 나간 뒤이고 빨리 일어나 유치원에 가야하는 평일날 아침 7시에는 기분이 좋지 않다.  시리얼이 제일 좋아하는 아침식사인데, 여기에 바나나 케익과, 브라질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달콤한 빵인 bisnaguinha를 requeijão라는 부드러운 크림 치즈와 함께 먹는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5.10 20:54

전에 EBS에서 해주는 영화를 봤는데, 독특하게도 18세기 덴마크 왕실을 배경을 한 시대극이었습니다.  제목은 로열 어페어 (A Royal Affair. 덴마크 어로는 En kongelig affære)   그래서 왕실 치정극인가 싶었지요.  주인공은 007 카지노 로열에서 악당으로 나왔던 메즈 미켈슨이라고 덴마크 사람이더군요.   알고보니까 이 영화 자체가 덴마크 영화였습니다.   왕비, 즉 여주인공은 제이슨 본 최종편에서 젊고 똑똑한 CIA 사이버전 전문가로 나왔던 알리시아 비칸더(Alicia Vikander)였습니다.  

이 영화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가감없이 그대로 따라 갑니다.  영국의 공주이자,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을 치루어낸 조지 3세의 여동생인 캐롤라인 마틸다 (Caroline Matilda) 가 15세의 나이에 덴마크로 시집을 가서 크리스티안 7세 (Christian VII )의 여왕이 됩니다.  당시 크리스티안 7세도 결혼하던 1766년 1월에야 즉위를 한, 17살의 미성년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병이 좀 있어서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와이프인 캐롤라인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곤 했지요.  




(이 양반이 크리스티안 7세...  저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못 봤습니다만, 이렇게 보니까 잘 생겼는데요 ?)



알고 보면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은 서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의 어머니인 루이즈는 캐롤라인의 이모였거든요.  당시 덴마크 뿐만이 아니라 영국 왕 조지 3세 본인도 정신병을 앓았는데, 이런 병력은 거듭되는 근친혼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  아무튼 어린 캐롤라인은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 사정에 무척 상심이 컸고 인생의 낙도 없었습니다.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가 영국 공주 시절의 캐롤라인 공주입니다.  지긋지긋한 외모 지상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여쭙습니다만... 누가 더 예쁜가요 ?  암만 봐도 왼쪽에 앉은 동생 루이자 공주가 훨씬 더 미인인데요 ?  불행히도 병약했던 루이자 공주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이런 덴마크 왕실에 프로이센 출신의 의사 하나가 들어옵니다.  크리스티안 7세가 외국을 순방할 때 그를 모실 주치의를 채용했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1769년 1월에 귀국할 때도 데려온 것이지요.  이 의사의 이름은 요한 스트루엔제 (Johann Friedrich Struensee), 왕비보다 14살 연상인 32세의 독신남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글자 그대로 기술직종으로서, 귀족들에게는 하인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였습니다.  이 양반은 지식을 쌓은 시민층답게, 당시 유럽 시민 사회에서 떠오르던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스트루엔자와 캐롤라인 왕비의 건전했던 한때)


도도한 영국 공주이자 쓸쓸한 덴마크 왕비였던 캐롤라인은 바보 남편이 총애하던 이 무뚝뚝한 독일인 의사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트루엔제는 크리스티안에게 왕비를 저렇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충언하는 등 국왕과 왕비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노력했고, 귀족들이 장악한 왕실에서 외로운 생활에 지친 왕비도 조금씩 이 총명하고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외국인 의사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둘은 1770년 봄 즈음에는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가 됩니다.




(실제 스트루엔제의 초상화입니다.  매즈 미켈슨도 미남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양반에 비하면 매력남.)



캐롤라인 왕비와 스트루엔제는 낙후된 덴마크 사회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반에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왕비와 스트루엔제가 아직 연인으로 발전되기 전에, 시골길을 따라 말을 달리다가 울타리에 묶인 채 참혹하게 고문받다 죽은 어떤 농부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스트루엔제는 놀라는 왕비에게 덴마크의 법규상 지주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불경죄를 저지른 농노를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요.





(불안한 삼각관계...  국왕은 별 애정도 없는 왕비보다는 스트루엔제를 훨씬 더 총애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왕비는 스트루엔제에게 '네가 국왕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을 이용하라'고 조언하지요.  실제로 스트루엔제는 국왕 크리스티안에게 '전하가 훌륭한 업적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며 이런저런 사소한 개혁 조치를 권고하지요.  당시 덴마크의 실권은 귀족들의 연합체인 국무회의에 있었고, 왔다갔다 하는 정신병으로 인해 철없는 아이 또는 저능아 취급을 받던 국왕은 회의석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은 스트루엔제에게 등을 떠밀려 떨리는 목소리로 '귀족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코펜하겐 거리의 인분 등 오물을 청소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자' 라고 주장을 하고, 귀족들은 '저 병신이 왕 노릇하고 싶은 모양이다' 라고 코웃음을 치며 그 법안을 통과시켜 줍니다.




(영화 내내 크리스티안 7세는 미치광이보다는 주로 약간 천진난만한 저능아스럽게 나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국왕과 스트루엔제는 점점 더 개혁적인 법안들을 하나씩 둘씩 통과시킵니다.  처음에는 멍청이 왕의 장난 정도로 여겼던 귀족들은 이런 법안들이 점점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갉아 먹자, 그 뒤에 스트루엔제가 있음을 마침내 파악하고, 외국인인 그를 원로 회의실에서 내치려 합니다.  하지만 이때 국왕이 용기를 내어 그를 제지하고 국무회의를 해산시킨 뒤, 스트루엔제에게 사실상 권력을 맡겨 버립니다.  사실 제대로 된 정권 이양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요.  이것이 1770년 9월 15일의 일이었고, 이때부터 약 16개월 동안 덴마크 역사상 "스트루엔제의 시대"라고 불리는 기간이 시작됩니다.





(이제 그의 독무대가 시작된다)



스트루엔제는 제대로 된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이 장악한 국무회나 각 부서 장관직을 빼앗아야 한다고 판단하고는 이들 모두를 해직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온갖 개혁 법안들을 공표하기 시작합니다.  권력을 잃기까지 약 2년 동안 그가 만들어 공표한 법안은 무려 1069개로서, 하루에 3개 꼴이었습니다.   법안 내용은 사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가령 고문의 금지, 강제 노역제의 폐지, 언론 검열 폐지, 공직 및 세제에 있어서 귀족 특권의 폐지,  노예제의 폐지, 뇌물의 금지 및 형사 처벌, 농부들에게의 농토 할양, 곡물가 안정을 위한 국가 곡물 창고의 도입 등등이었지요.  이런 조치들은 유럽 사회 전역의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냈습니다.  스트루엔제와 왕비가 국왕에게 올라오는 이런저런 서류들을 처리하다가 그 유명한 볼테르로부터 덴마크의 선진 정치에 대해 '북방의 태양'이라며 찬사하는 편지를 받고는 서로 감격하여 말을 못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국왕에게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스트루엔제)



문제는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런 법안들은 간단히 말해서 귀족들의 부와 권력을 제한하고 빼앗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거든요.  당시 귀족들에게는 (당시에는 아직 그런 단어조차 없었겠습니다만) 완전 빨갱이 수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미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은 궁정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거든요.  왕비가 외국에서 들어온 독일 의사 나부랭이와 붙어먹는다 ?  이건 독일에 대한 국민 감정이 나쁘던 덴마크 국민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재료였습니다.  영화 속에는 이렇게 반격 준비를 하던 귀족 하나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역설적이게도, 스트루엔제를 공격할 아주 좋은 무기를 스트루엔제 본인이 우리들에게 쥐여주었습니다.  바로 검열의 폐지입니다."




(쉴드를 쳐주려고 해도, 뭐 불륜은 불륜이쟎아요 ?)



귀족들은 사람을 풀어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을 외설스럽고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비아냥거리는 출판물과 인형극의 형태로 민간에 퍼뜨립니다.  또한 스트루엔제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공격하며, '어디서 굴러먹던 독일놈이 기어들어와 아름다운 덴마크의 관습법을 다 훼손하고 있다'며 덴마크의 국민 감정에 호소합니다.   스트루엔제와 그의 동지들은 검열을 다시 부활시킬 수도 없고 해서 속수무책으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어쨌거나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은 사실로서, 왕비가 낳은 딸인 아우구스타 (Louise Augusta) 공주는 스트루엔자의 딸임을 모두가, 심지어 국왕 크리스티안까지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또 역사적으로도 스트루엔제의 개혁은 무척 어설픈 면이 꽤 많았습니다.  가령 스트루엔제 본인 자신도 덴마크 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가 귀족들을 내쫓고 임명한 자신의 심복들도 덴마크 현지 사정은 물론, 자신들이 수립해 갈 계몽주의 사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이때 역사적으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영화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보여준 갈등 연기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처음에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스트루엔제가 (비록 별 관심은 없었지만) 자신의 왕비와 놀아났다는 소문에 분노한 왕은 소란을 피우다가 스트루엔제 본인에게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사실 여부를 묻는데,  스트루엔제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크리스티안 국왕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의심은 의심을 낳아, 궁정 식솔들이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광기가 도져 '여기 이 프로이센 왕 (스트루엔제를 지칭)이 공주의 아빠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추태를 부리지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이렇게 미쳐 날뛰는 크리스티안을 스트루엔제가 끌어앉고 '내가 실은 거짓말을 했다, 내 딸이 맞다' 라고 고백하자 크리스티안은 반쯤 흐느끼며 '그냥 우리 이렇게 지내자' 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 국왕이 보여준 모습은 병신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애절한 면이 있는 것이, 아주 좋은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스트루엔제가 벌였던 여러가지 사회 사업, 가령 고아원의 설립이나 빈민 구제 등은 당연히 많은 돈을 필요로 했는데, 그는 귀족들에게 이런 비용을 부담시키다가 결국에는 '어차피 전쟁도 없는데'라며 상비군을 축소하면서까지 예산을 확보합니다.  이런 조치들은 사실 그의 빈약한 정권을 지지해줄 모든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습니다.  귀족파였던 태왕후 (크리스티안의 어머니)는 이런 점을 이용해, 왕실 경비대장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반 스트루엔제' 폭동을 궁 내부로까지 끌어들이며 스트루엔제를 압박했습니다. 





(박사모 애국지사들이 몰려와서 외국 불륜남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데, 왕궁 경비병은 대장의 지시로 문을 열어주고...)



스트루엔제가 덴마크에 처음 왔을 때 그와 매우 친했던 귀족 하나가 이제 정권을 손에 쥔 스트루엔제에게 자신의 빚을 변제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를 스트루엔제가 거절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는데, 귀족들은 그를 부추겨 스트루엔제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누명을 씌우는데 성공합니다.  심약한 국왕 크리스티안은 한밤중에 자신의 침실로 쳐들어와 스트루엔제의 체포 명령서에 서명하라는 귀족들에게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호통 속에 억지로 그의 체포 명령서에 서명을 하게 되지요.  그는 결국 다시 국무회의에서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거기 흑인 꼬마 시종하고나 노시오' 라는 조롱을 귀족들로부터 듣는 신세가 됩니다.


스트루엔제와 그의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립니다.  왕비 캐롤라이나도 공범으로 함께 체포되어 외딴 곳으로 유배됩니다.  스트루엔제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귀족 하나는 스트루엔제가 갇힌 감방에 직접 들어와  스트루엔제가 고문 당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그에게 '이젠 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고문이 합법화 되었다' 며 비아냥거리지요. 


오랫동안 고문에 시달린 스트루엔제가 뻗어있는 감방에 성직자 한명이 들어서자 '또 고문하러 왔구나' 라고 생각한 스트루엔제가 겁에 질려 비굴하게 감방 구석에 웅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연기도 참 좋았어요.  스트루엔제를 안중근 같은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에 굴복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했거든요.  스트루엔제의 아버지는 원래 목사였는데, 그의 아버지를 잘 안다는 이 성직자는 '모든 것을 시인하면 목숨은 살려주기로 했다'며 그에게 '왕비와의 불륜 및 반역 모의'를 시인하라고 설득하고, 스트루엔제는 결국 그에 동의합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지요.  또 굶는데도 장사 없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스트루엔제는 깨끗한 셔츠 차림으로, 그의 개혁 동지였던 브란트와 함께 형장으로 가는 마차를 타고 갑니다.  함께 처형 직전에 사면 받기로 되어 있던 브란트는 '대체 왜 이렇게 형 집행 직전에야 사면을 해주는 것인지' 라며 투덜거리고 스트루엔제는 '그것이 덴마크의 전통이라는군' 이라고 설명하지요.  같은 시각, 크리스티안도 귀족들과 히히덕거리며 '내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사면해주면 스트루엔제가 무척 놀라면서 기뻐하겠지 ?' 라며 즐거워 합니다.   하지만 같은 마차를 타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라던 그 성직자가 십자가를 매만지며 안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스트루엔제는 '처형 직전 사면'이라는 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챕니다.  그러나 브란트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국왕의 명령은 안 통하는 세상이었거든요.




(나는 너희들 편이다.... 나는 너희들 편이다 !)



먼저 가벼운 마음으로 마차 밖으로 나가 높이 쌓아올린 단두대 (프랑스 식 길로틴이 아니라, 집행인이 큰 도끼를 든 구식 단두대)로 올라갔던 브란트가 먼저 처형된 후, 스트루엔제도 마차 밖으로 끌려나갑니다.  그가 나가니 단두대 주변을 둘러싼 덴마크 농민들이 그를 향해 돌과 채소 부스러기 등을 던지며 그를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수치심, 배신감 등에 몸을 떨며 스트루엔제가 군중들에게 '나는 너희들 편이다, 나는 너희들 편이다'라고 외쳐보지만, 군중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브란트의 피에 젖은 단두대 계단에서 떨리는 무릎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군중들을 더 즐겁게 해준 뒤, 결국 목이 잘립니다.


영화는 왕비가 이제 10대 청소년이 된 그녀의 자녀인 프레데릭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배경을 끝이 납니다.  영화 속에서는 프레데릭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가 왕비를 찾아가는 듯이 표현했습니다만, 사실 영화 속에서도 끝내 이들이 왕비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캐롤라인 왕비는 스트루엔제가 처형된지 3년 후인 1775년 유배지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거든요.  그러니까 왕비가 그녀의 자녀들에게 쓴 편지는 역사적으로는 실제하지 않는 문서입니다.  아무튼 영화 속 그 편지에서, 왕비는 자신과 스트루엔제가 저지른 불륜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개혁을 위해 가졌던 열정과 꿈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자막을 통해서, 결국 프레데릭 왕자가 쿠데타로 귀족들로부터 정권을 되찾고, 스트루엔제와 캐롤라인 왕비가 만들었던 개혁 법안들을 다시 부활시켰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리면서 조용히 끝납니다.





(프레데릭 6세입니다.  스트루엔제가 그의 어린 시절 훈육을 맡았지요. 이 양반이 덴마크 최초로 백신을 맞은 아기였는데, 그것 역시 스트루엔제가 놓아준 것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프레데릭 왕자는 아직 16살이던 1784년, 아직 정신병으로 투병 중이던 크리스티안 7세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감행, 당시 섭정이던 그의 숙부와 할머니로 대표되는 귀족 연합체로부터 정권을 되찾고 섭정이 됩니다.  심약한 국왕이던 크리스티안 7세는 1808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때까지는 섭정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프레데릭 6세 국왕으로서 덴마크를 다스리지요.  그러니까 1801년의 제1차 코펜하겐 전투, 그리고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전투 모두 이 왕자가 사실상의 국왕으로써 영국군과 싸웠던 것이지요.  그가 코펜하겐 성벽에서 넬슨의 영국 함대와 혈전을 벌이던 자국 해군을 응원하던 모습은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편 http://blog.daum.net/nasica/6862508 을 참조하세요.




(아마 당시 왕세자의 눈에 들어왔을, 코펜하겐 시내에서 본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포연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아무튼 왕세자를 포함한 코펜하겐 시민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프레데릭 왕자는 스트루엔제조차 없애지 못했던 농노제를 1788년 마침내 폐지하는 등 진보사상으로 덴마크를 당대 제1의 계몽국가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폭풍 속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측에 붙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원래 덴마크 영토이던 노르웨이를 상실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후 덴마크 경제가 침체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계몽 사상에 영향에 받은 법안을 다시 폐지하는 등 반동적인 정치를 펴기도 했으나, 다시 경제가 살아나면서 다시 진보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등 진보와 보수를 오가는 통치를 했지요.


이 영화를 보고 주연 배우라든가 역사적 배경에 대해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블로그들도 많이 살펴 보았는데, 많은 분들이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도덕성부터 닦아야 한다' 라든가 '결국 이거 로맨스 영화인지 뭔지 헷갈린다' 라든가 식으로, 왕실의 불륜 비극 로맨스 영화 정도로 보시는 분들이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그때 이 영화를 와이프하고 같이 봤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와이프가 한마디 하더군요.  "그러게 둘이서 불륜만 안했어도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지" 라고요.  그래서 저도 한마디 했지요.  "불륜 안 했으면 저 개혁 성공했을 것 같아 ?"  





(스트루엔제 : "우리 둘의 개인적인 사랑 불륜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개혁은 성공했었을까요 ?" )



스트루엔제의 개혁은 유부녀와 놀아나는 불륜남의 빨갱이 짓에 불과했고, 결국 귀족들이 잘 살아야 일반 서민들도 조금이나마 떨어지는 국물이라도 받아먹으며 연명할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거부하는 미치광이 짓이었을까요 ?  스트루엔제가 '난 너희들 편이다'라고 외쳤던 상대인 덴마크 국민들 대다수는 스트루엔제에게 등을 돌렸지요.  스트루엔제가 목이 잘리면서 그런 개혁은 후퇴하는 것이었을까요 ?  글쎄요.  원래 역사의 진보는 한번에 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진보 측 인사 몇몇의 과오가 진보의 행진을 막지도 못하고요.  전에 인용했던 에밀 졸라의 명언처럼,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즉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5.09 00:06

마크롱이 프랑스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크롱이 소속된 정당의 이름은 En Mache ! (앙 마르슈) 라고 합니다.  이는 '행진 중인', '전진 앞으로' 정도의 뜻입니다.   마크롱이 이 정당 이름을 어디서 따온 것인지 조금 구글링 해보았는데, 특별히 무엇에서 따왔다는 정보는 못 찾았습니다.  저는 이 이름을 보고 생각나는 문장이 있었어요.  저는 불어 실력이 고딩 때 2년 정도 배운 게 전부인데, 그래도 인상 깊었거든요.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진실은 전진 중이며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이는 에밀 졸라(Émile Zola)가 그 유명한 드레퓌스(Dreyfus) 사건 당시 한 말입니다.  아래 글은 예전 국정원 댓글 사건과 그에 따른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사건을 보고 울컥해서 썼던 글인데, 마크롱 대통령 당선을 기념하여 다시 올립니다.  우리나라 현상황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발생한 독일 스파이 사건이며, 이는 프랑스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제3 공화국은 혼란 속에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의 뼈아픈 참패와 1871년 파리 코뮌 사건으로 인한 쓰라린 기억들, 그리고 특히 1894년 카르노 (Carnot) 대통령이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프랑스 국민들은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정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새로 구성된 정부는 군부와 카톨릭 등 우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군부 세력은 아직 나폴레옹 3세 시절의 귀족적인 전통 속에서 살고 있었고, 평민들로 구성된 무능한 공화국 정부를 내심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아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상류층 출신 군 장교들은 대부분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창건한 생 시르 사관학교 (E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실력파 폴리테니크 사관학교 (École polytechnique) 출신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신경이 거슬리던 상황이었습니다. 

 



(현대의 생-시르 사관학교.  샤를 드 골도 여기 출신입니다.)

 

시절이 어수선하고 살기가 팍팍하면 보통 사람들은 누구 탓할 사람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때 타겟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태인이었습니다.  반유태주의자인 드루몽 (Édouard Drumont)이 1886년에 출판한 '유태인들의 프랑스'라는 책은 무려 15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는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고, 주요 언론들도 모두 유태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언론의 중심에는 드루몽이 이끄는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 이라는 신문이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많은 신문들이 이런 반유태주의에 공공연히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정부와 카톨릭 교회는 내심 부추기고 있었지요.  누군가 증오할 대상을 던져주면, 정부와 교회 등 사회 지도층에 대한 불만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고, 또 국민들이 보수화되는 것을 촉진시키게 되었거든요.




 

(드루몽과 그의 신문입니다.  제목은 "반역자 유죄 선고를 받다!"  물론 여기서는 드레퓌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밑에 씌인 A BAS LES JUIFS는 Down with the Jews, 즉 유태인들을 타도하라 뭐 그런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현재 저런 매체를 운영하는 저런 사람들 꽤 있습니다.)

 

그러던 1894년 9월 26일, 프랑스 첩보부를 위해 일하던 독일 대사관 내 청소부 하녀가 쓰레기 통에서 6조각으로 찢겨진 편지 한장을 프랑스 첩보부에 보내 옵니다.  그 내용은 프랑스 육군 참모 본부의 기밀 문서 목록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매우 유명해져서 보통 bordereau (보드로, "명세서")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군부를 긴장시킵니다.  참모 본부 안의 누군가가 프랑스 기밀 문서들을 독일에게 팔아넘기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그들은 즉각 간첩 색출에 나섭니다.  다만, 단서라고는 이 "명세서" 한 장 뿐이었는데, 워낙 상부의 간첩 색출에 대한 압박이 심했으므로, 이들은 되든대로 억측을 섞어가며 무리한 추정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그 결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라고 하는 포병 대위였습니다. 

 



 (이 문서가 그 유명한 '명세서' 즉 bodereau 입니다.  필기체라서 저는 거의 못 알아 보겠네요.)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용의자로 지목된 이유는 다소 어이가 없는데, 일단 기밀 문서 목록으로 보아 그 간첩은 아마도 포병 장교일 것이라고 판단이 내려졌고 (나중에 밝혀진 실제 범인 에스테라지 Esterhazy 소령은 보병 장교였습니다), 또 독일하고 친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원래 독일어 계통인데다 최근의 보불 전쟁의 패배로 인해 독일에 빼앗긴 지역인) 알사스 (Alsace) 출신일 것이다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헝가리 출신이었지요) 라는 조건에 들어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최근 참모 본부에 배속된 유일한 유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필체는 그 '명세서'의 필체와는 다소 달랐습니다. 





(이 양반이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입니다.  이 양반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증거가 필요했던 참모부는 드레퓌스를 체포하여 자백을 강요했지만 드레퓌스가 결백을 주장하자, 그의 자택에도 압수 수색을 하면서 그 부인에게도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라며 협박했습니다.  결국 별의별 수단을 다 썼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자,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가 모든 증거를 다 없애버렸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라는 희한한 이론과 함께, '드레퓌스의 필체가 명세서의 필체와 다소 다른 것은 교활한 드레퓌스가 일부러 방첩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필체를 쓴 것' 이라는 설명과 함께 비공개 재판을 실시했습니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당연히 공개 재판을 요구했으나, 군부는 이 재판이 공개 재판으로 열릴 경우 '독일과 전쟁이 벌어져 국가의 안보가 위태롭게 된다'는 명분으로 끝내 비공개 재판을 실시했습니다.  사실 재판이 비공개일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군부가 내놓은 증거물 파일이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은 군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군부는 '프랑스의 안보가 바로 이 재판에 달려있다.  프랑스 군부를 믿지 않고 저 유태인 간첩의 변명을 믿겠다는 말인가 ?' 라는 호소로 배심원들을 압박했습니다.  이 압박을 좀더 강하게 하기 위해, 군부는 원래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떠들던 드레퓌스의 체포와 재판에 대해 슬쩍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에 정보를 흘립니다.  당연히 자유 언론의 주필인 반유태주의자 드루몽은 온갖 나팔을 불어대며 이 사건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했습니다. 

 

"거 봐라, 유태인들은 뒤통수를 치는 놈들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  이런 위험천만한 작자들이 프랑스 정부와 군대 요직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이번 기회에 이들을 몰아내자 !"

 




(1894년의 1차 재판입니다.  물론 군법회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원의 배심원들이 워낙 빈약한 증거 때문에 유죄 선고에 대해 망설이자, 프랑스 군부에서는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이 "D"라는 이니셜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장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지만 그 증거물을 보자는 변호인단의 요구는 '국가 보안상의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프랑스 령 적도 기아나(Guyana)의 '악마의 섬'이라는 곳으로 이송되고 맙니다.  항소를 제기했지만 재판부에 의해 '이유없다'며 기각되고 말았지요.  그리고 프랑스 대중은 '유태인 = 뒤통수'라는 것만을 기억했고 드레퓌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차츰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등식은 나폴레옹이 졸업한 파리의 Ecole Militaire에서 벌어졌습니다.  생도들이 도열한 가운데, 차렷자세로 선 그의 제복에서 금단추를 하나씩 거칠게 다 뜯어내고, 그의 계급장도 뜯어낸 뒤, 그의 칼을 빼앗아 부러뜨려 그 앞에 내동댕이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때 드레퓌스는 차렷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으나 분노와 수치로 부들부들 몸이 떨리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히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레퓌스가 기아나로 끌려간지 1년이 훨씬 넘은 뒤인 1896년 3월, 또 다른 기밀 편지가 독일 대사관으로 가던 중에 프랑스 첩보부에게 입수됩니다.  그리고 그 필적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만든 그 '명세서'의 필적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당시 방첩 부대의 책임자였던 피카르 (Georges Picquart) 중령이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 결국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은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피카르는 이 사실을 프랑스 참모본부장인 봐드프르 (Raoul Le Mouton de Boisdeffre) 장군에게 알렸습니다.  이제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





(잊혀질 뻔한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되살린 장본인이자 프랑스 육군의 양심인 피카르 중령입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온갖 곤경에 처합니다만, 결국 군에 복직되어 장군까지, 또 최종적으로 전쟁성 장관으로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봐드프르 장군 및 프랑스 군 수뇌부에게 '알고보니 우리가 2년전 실수를 저질렀네요'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군 수뇌부에게 국가 안보보다는 자신들의 체면과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방첩 부대에서 해직되어 일반 연대 지휘관으로 보직 변경되었습니다.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1년 뒤에야 '그냥 건강상의 이유로' 조용히 제대하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드레퓌스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뒤 파티 (Armand du Paty de Clam) 소령이 그를 따로 만나 '반드시 너를 보호해줄테니 입다물고 얌전히 있으라'는 약속과 당부를 할 정도였습니다.




 

(드레퓌스를 체포한 장본인인 뒤 파티 소령)

 

상황은 드레퓌스에게 점점 더 안 좋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외딴 열대 섬에서 이미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탈출이 염려된다며 밤에는 감방에서 쇠고랑을 차는 곤욕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또 참모본부에서는 보수파 신문들에게 슬쩍슬쩍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흘렸고, 그런 신문들에서는 그런 사실들을 보도하며 '역시 믿지 못할 유태인놈들'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절대 기밀이라던 그 '명세서'의 카피본까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될 정도였고, 신문에서는 이것만 보더라도 (사실 뭐 볼 것이 없었는데) 드레퓌스가 명백한 반역자라고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가족들과 그 변호사는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지식인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의 대문호인 에밀 졸라를 1897년 말 경에 찾아갑니다.  에밀 졸라가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와 차별이 위대한 프랑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을 썼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졸라조차도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무죄에 대해 무척이나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도 접하는 것이 주로 그런 신문들과 여론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드레퓌스의 변호인들이 보여준 명백한 증거들에 의해 졸라도 결국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드디어 졸라 등장.  괜찮아, 졸라님이 다 해결해 주실거야, 그럴거야, 그럴거야.....?)

 

사실 졸라로서는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고, 또 여태까지 쌓아놓은 문학적 업적과 명성을 다 허물어뜨릴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애국주의와 반유태주의가 기세등등한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까지 진실이 은폐되고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보고 참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섰던 것입니다.  그는 피가로 (Le Figaro) 지를 통해 드레퓌스 구명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898년 1월, 드디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진실이 이길 수 있었을까요 ?  어림없는 소리였지요.  프랑스 군부는 이번 재판에 대해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무려 3명의 필적 전문가가 나와 '명세서'의 필적은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을 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에스테라지 소령에 대한 기소조차 필요없다는 의견이었으나, 오히려 그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 그에 대한 군법 회의가 열렸고, 바로 그 다음날 만장일치로 그를 무죄 방면하는 쇼우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그렇게 얌전히 끝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대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피카르 중령에 대해 손을 봐주어야 했지요.   그는 '군 기밀 문서를 민간인에게 유출'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몽 발레리앙 (Mont-Valérien) 군 교도소에 수감시켰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한 기밀 문서가 우익 신문에게 계속 유출된 것에 대한 수사나 추궁은 전혀 없었지요.





(나는 규탄한다 !)

 

에스타르지 소령이 무죄방면된 다음날인 1월 13일, 훗날 제1차 대전 때 호랑이로 불리게 되는 클레망소(Clemanceau)가 출판하던 오로르 (L'Aurore, 오로라) 지의 제1면에 졸라의 기고문이 실립니다.  엄청나게 큰 활자로 찍힌 제목은 바로 J'accuse !  원래 졸라는 '프랑스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라고 제목을 지으려 했으나, 클레망소가 그것을 좀더 자극적이고 함축적인 J'accuse !로 바꾸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에서 졸라는 강한 언사로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과 명백한 증거들을 나열하고, 프랑스 정부가 이런 반유태주의에 대해 방관하고 있는 것을 규탄했습니다.  이 기사의 반향은 엄청났습니다.  에밀 졸라의 열정어린 문장을 보고 프랑스 인들의 양심이 살아났느냐고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그동안 보수 언론과 종교계에 의해 철저히 세뇌된 반유태주의가 오히려 더 폭발했습니다.  파리와 프랑스령 알제리 등에서는 '이런 괘씸한 유태놈들과 그 추종자들(이하 종유세력)이 감히 위대한 프랑스를 모욕해 ?' 라며 폭동이 일어나 유태인들의 가게가 불에 타고 사람이 다쳤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읽어보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라며 드레퓌스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느리고 활동은 조용했습니다.  당장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었고, 특히 졸라에 의해 거짓말장이가 되어 버린 그 세 명의 필적 감정 전문가들이 따로 졸라를 고소했습니다.  불과 1달 정도 후에, 졸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법정 최고형인 1년 징역에 3천 프랑의 벌금형에 처해졌습니다.  졸라는 항소를 했고, 결국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데, 졸라는 유죄 판결이 나기 직전에 비밀리에 영국 런던으로 도주했습니다. 





(재판장에서 나가는 졸라를 비난하며 달려드는 박사모 보수측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졸라의 도주는 보수층의 승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주요 언론에서는 '거봐라, 자기가 유죄라는 것을 아니까 야반도주한 거 아니겠냐' 라며 더욱 큰 소리로 졸라를 비난했지요.  특히 주데 (Ernest Judet)가 발행하는 "Le Petit Journal"이라는 신문에서는 졸라의 개인적인 내용, 즉 원래 이탈리아 계였던 그의 아버지가 1830년 대에 프랑스 외인부대의 건설 공사 관련하여 뇌물을 받았다가 결국 쫓겨났다는, 졸라조차도 모르고 있던 가정사까지 들춰내가며 졸라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비방에 열을 올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런 아버지니까 저런 아들이 나왔지'라는 비아냥이었지요.  졸라는 많은 팬을 잃었고, 이전에 받았던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박탈당했으며, 또한 금전적으로도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의 도주에 대해 정부는 그의 재산을 압수하여 헐값에 공매에 붙이는 보복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출판된 졸라를 비난하는 그림입니다.  돼지 졸라가 프랑스 지도에 '국제적 똥'을 칠하고 있습니다.  좌우측 상단의 큰 글씨는 '혐오의 박물관' '돼지들의 왕'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진실은 승리하는 법입니다.  졸라는 1897년 11월에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즉 "진실은 행진하고 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라고 쓴 바 있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1898년 한해 거의 전 프랑스가 드레퓌스 반대파와 드레퓌스 옹호파로 나뉘어 토론과 논쟁, 심지어 결투 (권총으로 하는 진짜 결투)를 벌였고,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이 썼다는 'D' 이니셜 어쩌고 하는 편지를 위조했던 수사 담당자 앙리 중령 (Hubert-Joseph Henry)은 결국 '그 편지는 자기가 위조해낸 것'이라고 자백하고는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면도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par Emile Zola


 

이후로도 진실 규명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1899년 좀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지방인 렌느(Rennes)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다시 한번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때 에스테라지 소령은 이미 외국으로 도망친지 오래 뒤였지요.  하지만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유죄인 드레퓌스를 국민 화합을 위해 사면'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지요.  드레퓌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패배를 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단 유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많은 진보파에서는 그가 그 사면을 거부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는 진보파 인사들은 매일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포근한 침대에서 자는 사람들이었으나, 당사자인 드레퓌스는 벌써 6년째 적도의 끔찍한 섬에서 쇠고랑을 차고 중노동을 하는 신세였습니다.  더 이상의 육체적 고통을 이기기 힘들었던 그는 그 사면을 받아들입니다.  그가 완전히 누명을 벗은 것은 1906년이나 되어서였습니다.  한편, 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1899년의 재심에서도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선언하는 프랑스 군사법원) 

 

당대 유럽 제일의 문호이자 대단히 유명한 인사였던 졸라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그는 1902년 9월 29일, 자택에서 자다가 어이없게도 일산화탄소 중독 (흔히 말하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이미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 등 우파로부터 많은 암살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검사 결과 그의 침실 굴뚝이 매우 부적절하게 막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굴뚝을 그렇게 막았는지에 대해서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십년 뒤, 어떤 지붕 공사기술자가 '정치적 이유로 졸라의 굴뚝을 내가 막았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진실이야 모르지요.  어쨌거나 우파는 그의 죽음에 대해 신이 났습니다.  가령 로슈로프 (Henri Rochefort)는 신문 기고를 통해 '드레퓌스가 진짜 간첩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졸라가 죄책감에 자살을 한 것'이라며 선전에 열을 올렸지요.





(물론 이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며 모인 조문객도 수천명에 달했습니다.  그림은 그의 장례식 모습입니다.)


아까 잠깐 언급한, 이탈리아 대사관 편지를 위조했다가 자살한 앙리 중령의 죽음은 우파에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  처음에는 드루몽 등 우파는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럼 정말 드레퓌스가 무죄냐' 라고 당혹해했으나, 곧 '자기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바쳐 조국의 안보를 지키려 했던 영웅'으로 포장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조가 국가 안보를 위해 수행한 성스러운 작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의 유가족을 위해 우파에서는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펼쳤는데 무려 13만 프랑이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앙리 중령이 조작해서 법원에 증거물로 제출한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의 편지입니다.  조작이건 은폐건 모두 조국의 안보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라는 거지요.)

 

프랑스가 위대한 것은 1908년 6월 4일, 처음에는 몽마르트 묘지에 묻혔던 그의 시신을 조국을 빛낸 위인들을 모시는 장소인 팡테옹으로 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도 '뭐가 어찌 되었건 드레퓌스는 간첩이고 유태놈들은 뒤통수치는 놈들이다'라며 이를 갈던 우파들이 군부나 종교계에 많았으나, 결국 프랑스 대중의 합의된 의지는 '진실을 위해 노력하여 프랑스의 명예를 드높인 지성인'으로서 졸라를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수치입니다.  아마 드레퓌스가 그대로 기아나에서 죽어 잊혀졌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구린 구석이 드러나더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프랑스 지성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졸라와 그의 동료들은 보여주었고, 비록 때늦은 감은 있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팡테옹에 이장함으로써 그에 대한 예의를 표했습니다.   제가 프랑스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Zola au Pantheon !   졸라를 팡테옹으로 !)

 

팡테옹을 나서면서 중앙의 군상 조각상을 유심히 보다보니, 국민공회 (La Convention Nationale)라는 글씨 위에 흐린 색으로 다른 글자도 씌여 있더군요.

 

"VIVRE LIBRE OU MOURIR"





(다시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이에요.)

 

제가 비록 고딩 때 잠깐 배우다 만 불어지만 금방 알아보겠더군요.  "Live free or die", 그러니까 "자유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글귀였습니다.  에밀 졸라의 무덤을 보고 나오면서 그 글귀를 보니까 마음이 찡하더군요.   프랑스 인들은 이렇게 많은 투쟁과 희생,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20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이룩했는데, 우리는 미국에 의해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선물받아서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또 그래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얕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
잡상2017.05.06 17:58

제가 직접 만들어본 최초의 원두커피는 회사 들어와서 본 종이필터로 거르게 되어 있는(drip brewing) 커피메이커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두커피가 인스턴트 커피보다 훨씬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는 마치 숭늉처럼 묽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건 확실히 여태까지 마시던 커피와는 달랐습니다.  이걸 마셔보니 전에 마시던 드립 원두 커피의 맛이 형편없게 느껴졌습니다.  전에 존 그리셤의 법정 쓰릴러를 읽다가 변호사가 증인을 만나러 들린 싸구려 식당에서 'bad coffee'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맛이 어떤 맛인지 마치 알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 이후로는 (아마 제가 배때지에 기름기가 껴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인스턴트 커피나 드립 원두 커피는 거의 마실 일이 없었습니다.  최근에 마셔본 덧치 커피는 또 다른 맛이더군요.





(바로 이런 커피메이커...  이런 전기 드립 커피메이커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2000년대까지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많은 회사 사무실에서는 이런 것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차에 비해 커피는 볶고 빻고 가는 것도 성가신 일이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고 또 힘든 과정입니다.  제가 즐겨 읽는 나폴레옹 시대 영국 해군의 모험담인 Aubrey - Maturin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와 스티븐 머투어린은 커피를 매우 즐기는 캐릭터입니다.  이들이 커피를 볶거나 갈거나 마시는 장면은 제법 자주 나오는데 비해, 커피를 내리는(brew) 장면은 딱 한군데에 나옵니다.  볶은 커피 콩을 갈아서 고운 천 위에 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리는 방식으로 나오더군요.  그러니 드립 원두 커피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커피 만드는 방법은 나라와 시대별로 매우 달라서,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193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 콩 갈은 것을 직접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인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BIG TWO-HEARTED RIVER) 중에,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주인공 닉이 캠핑에서 커피를 끓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


닉은 큰 못을 하나 더 나무에 박고 물이 가득찬 양동이를 거기에 걸었다.  그는 커피 포트를 거기에 담가 절반 정도 물을 채우고 나무조각을 불판 아래의 불에 좀더 집어 넣은 뒤, 그 위에 커피 포트를 올려 놓았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홉킨스와 커피 만드는 방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것은 기억이 났지만, 결국 어느 쪽 방법을 택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커피가 끓어 오르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자 비로소 그게 홉킨스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는 한때 모든 면에 있어서 홉킨스와 논쟁을 벌이곤 했다.


(중략)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커피가 끓어올랐다.  뚜껑이 들리더니 커피와 커피찌끼가 포트 옆으로 흘러내렸다.  닉은 커피 포트를 불판에서 꺼내 들었다.  그건 홉킨스를 위한 승리였다.  그는 통조림 살구를 덜어먹던 컵에 설탕을 넣고는 커피를 좀 따른 뒤 식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따르기엔 너무 뜨거워서 그는 커피 포트 손잡이를 쥐기 위해 모자를 써야 했다.  그는 커피가 포트 안에서 우려지기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첫 잔은 아니었다.  그건 제대로 된 홉킨스 방식이어야 했고, 홉킨스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는 닉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지한 사람이었다.  


(중략)


닉은 커피를 마셨다.  홉킨스 방식에 따른 커피였다.  맛을 보니 썼다.  닉은 웃었다.  그건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훌륭한 결말이었다.


-------------------


여기에 묘사된 것처럼 간 커피 콩을 직접 물에 넣고 끓이는 방식을 카우보이 커피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미국이나 중동에서 유행하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헤밍웨이 소설 속에서 결말이 나와 있듯이, 커피 콩을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은 맛이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커피 특유의 향을 담은 기름 성분은 섭씨 96도에서 커피 콩으로부터 추출되는데, 이건 물의 끓는 점에서 아슬아슬하게 낮은 온도입니다.  문제는 물이 끓는 점 100도에 이르게 되면 커피 콩에서는 그 향유 뿐만이 아니라 쓴 맛을 내는 산 성분까지 추출이 된다는 점이지요.  




(퍼콜레이터입니다.  저도 90년대 후반 회사 사무실에서 저런 거 썼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잭 오브리처럼 뜨거운 물을 간 커피 콩 위에 뿌리는 식의 커피를 즐겨 마셨나 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일손이 너무 많이 갔으므로, 퍼콜레이터(percolator, 여과식 커피 포트)라는 독특한 형태의 커피 포트가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퍼콜레이터는 영국 군인이자 군인인 럼포드 백작(Count Rumford, Sir Benjamin Thompson)이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10년~1814년 사이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대적인 방식, 즉 커피 포트 가운데에 끓는 물을 뿜어 올리는 금속 관이 내장된 형태의 퍼콜레이터는 1819년 로랑(Laurens)이라는 파리 사람이 만들었고, 이 발명품은 여러 단계를 거쳐 1889년 미국에서 굿리치(Hanson Goodrich)라는 이름의 농부가 특허를 받았습니다.  이 퍼콜레이터는 나중에 전기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대용량화되었고, 1970년대까지 미국의 대형 식당 등에서는 그런 전기 퍼콜레이터를 이용해서 드립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간편한 종이 필터를 이용하는 가정용 전기 드립 커피 메이커가 도입되면서 퍼콜레이터의 인기가 급격히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 화면은 1970년에 General Foods에서 내놓은 Max-Pax 커피 카트리지의 TV 광고입니다.  Max-Pax는 도넛 모양의 필터 속에 그라운드 커피를 일정량 포장한 것으로서, 이걸 퍼콜레이터 안에 넣으면 커피가 만들어지는 형태의 제품입니다.  그라운드 커피 찌꺼기를 긁어낼 필요가 없으니 매우 편리했지요.  그러나 불과 6년 후인 1976년에 전기 드립 커피 메이커에 밀려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전체 광고 영상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7m8JJ_7jw  )





(저희 집에서 소비하는 일리 캡슐 커피입니다.  플라스틱 캡슐이 지구를 더럽히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저 아름다운 알루미늄 깡통을 버릴 때마다 정말 아깝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일리(Illy) 커피 캡슐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십니다.  편리하고 빠르고 게다가 맛도 아주 훌륭한데, 단지 제가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낭비되는 이 플라스틱 캡슐 포장들을 보면 지구에게 미안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TV에서 방영되는 알 파치노 -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갱 영화 'Heat'를 보다보니, 평범한 형사 반장인 알 파치노의 작은 집 주방에도 캡슐 커피 머신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이 영화는 1995년 작인데, 이미 당시 미국에서는 캡슐 커피가 일반적이었나 봅니다.  최초의 캡슐 커피는 스위스 회사인 네슬레(Nestlé)에서 근무하던 스위스 엔지니어 에릭 파브르(Eric Favre)가 1976년에 최초로 발명하고 특허도 냈습니다.  그러나 흥행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가  약 10년 뒤에야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요.  





(남자의 영화, Heat)


캡슐 커피에서 만드는 커피는 한마디로 에스프레소(Espresso)입니다.  에스프레소는 끓는 물과 고압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기 때문에 고형분까지 콜로이드(colloid, 현탁액)의 형태로 일부 뽑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잔의 바닥에는 일부 찌꺼기가 남고 또 그 콜로이드가 크레마(crema)로 잔 위에 뜨게 되는 것이지요.  이 크레마는 오직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크레마가 없는 커피는 왠지 맛없게 느껴지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이 크레마는 지방 성분 위주이다보니, 콜레스테롤 함유량이 높아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저 크레마는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프레소는 커피를 뽑아내는데 필요한 고압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기구가 필요하므로,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1884년에 모리온도(Angelo Moriondo)라는 이탈리아인이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에 대한 특허를 냈는데, 그 이후 20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는 1950년대에야 에스프레소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하고, 미국에 본격적으로 에스프레소가 활성화된 것은 스타벅스 제2의 창업자인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가 1980년대 밀라노 출장 중에 에스프레소 바를 보고 미국 스타벅스 매장에 도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미국인들 입맛은 에스프레소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물이나 우유를 탄 아메리카노나 라떼 같은 것이 많이 팔렸지요.


지금 세계는 이 캡슐 커피 또는 별다방 콩다방 등에서 파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가 대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전세계 통계치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커피의 형태는 바로... 인스턴트 커피입니다.  그것도 고급 커피에 계속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라운드 커피나 원두 형태로 판매되는 커피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말을 들으시면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커피를 안 마시던 그쪽 나라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그렇게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것도 사실이긴 한데, 우아한 유럽인들도 인스턴트 커피를 의외로 많이 마십니다.  특이한 것은 호주인데, 호주는 아시아보다 오히려 더 인스턴트 커피 비율이 더 큽니다.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것은 또 영국입니다.  영국은 아시아 국가들처럼 인스턴트 커피를 절대적으로 더 많이 마십니다.  영국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즐겨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오랫동안 미군이 주둔했던 관계로, 그때 미군들이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에 익숙해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못지 않게 미군이 오래 주둔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인스턴트 커피가 그렇게까지 유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설명에 쉽게 납득이 가진 않습니다.




(무섭게 성장하는 인스턴트 커피 시장입니다.  중국 및 인도의 성장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맞네요.)


정작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한 것은 프랑스인이었습니다.  흔히 일본계 미국인인 사토리 가토가 1901년 전미 박람회에서 발표한 것이 최초라고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1881년 알레(Alphonse Allais)라는 프랑스인이 이미 프랑스에서 특허를 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성공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인스턴트 커피도 유럽인 스위스에서 네스카페(Nescafé) 브랜드로 193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의 인스턴트 커피 대명사인 맥스웰 하우스 인스턴트 커피(Maxwell House Instant Coffee)는 1945년에야 나왔는데, 이는 그 모기업인 제네럴 푸드(General Foods Corporation)가 1942년부터 미군에 납품하기 위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맥스웰 하우스 인스턴트 커피의 TV 광고입니다.  바쁜 아침,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 줄 커피가 마침 딱 떨어져 당황하는 주부의 모습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인가 일요일에, 월트 디즈니 만화 또는 영화가 했었습니다.  그날 나온 단막 TV용 영화는, 시골 깡촌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사는 어떤 꼬마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가난한 가족이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셔서, 결국 몸져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가, 나름대로 다 컸다고 침대에 누운 할아버지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 가져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토스트를 먹으려고 보니, 새카맣게 탄 거에요.  꼬마가 미안하다는 듯 조금 태웠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는 입맛을 다시더니 지금은 생각이 없다면서 그 토스트를 내려놓고, 커피만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꼬마가 또 미안하다는 듯이, '진짜 커피를 끓일 줄 몰라서 인스턴트 커피를 끓였다' 고 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그 커피를 조금 마셔 보고는 다시 내려놓으면서, 나중에 마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  그때 그 어린 나이에 제가 받은 충격은, 나름대로 컸습니다.  당시 제가 보던 모든 커피는 다 인스턴트 커피였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시골의 가난한 할아버지조차도 '인스턴트 커피는 차라리 안마시고 만다'라고 하다니 !!! 




(세계 각 지역별 소비되는 커피 형태입니다.  진한 녹색이 인스턴트 커피입니다.)




(국가별로 신선원두를 더 소비하느냐 인스턴트 커피를 더 소비하느냐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언듯 보면 잘 사는 나라는 신선원두를, 못 사는 나라는 인스턴트 커피를 주로 소비하는 것 같지만, 영국과 호주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차를 많이 마시는 일본과 인도가 신선원두를 더 많이 선호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이 나라들은 차를 하도 많이 마셔서 인스턴트 커피를 아예 마실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결국 원래 커피를 마시던 나라들은 신선 원두를 선호하는데 비해, 영국이나 호주, 그리고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처럼 차를 더 선호하던 나라들은 인스턴트 커피도 '뭐 나쁘지 않네'하며 잘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을 겪은 미국은 원래부터 커피를 더 선호하는 나라이긴 합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모든 먹을 것을 빨리빨리 대충 간편하게 때우려는 미국인들이 정작 커피에 있어서만큼은 그 편하고 빠른 인스턴트 커피를 극혐한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현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는데, 누군가 따로 연구 좀 해줬으면 합니다.




(미국내 커피 브랜드 별 판매량입니다.  Keurig 커리그 라는 브랜드는 제게는 듣보잡인데 미국내 독보적인 1위네요.  어느 기계에서나 호환되는 K-cup이라는 캡슐 커피 시스템이 그 비결의 하나라고 합니다.  조지 클루니를 곁들인 네스프레소를 거느린 네스카페는 생각보다 너무 하위네요.)




원본 : 

https://en.wikipedia.org/wiki/Coffee_preparation

https://en.wikipedia.org/wiki/Instant_coffee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wp/2014/07/14/almost-half-of-the-world-actually-prefers-instant-coffee/?utm_term=.11a5b8733d4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403544&cid=58364&categoryId=58364

https://en.wikipedia.org/wiki/Maxwell_House

https://en.wikipedia.org/wiki/Nespresso

https://en.wikipedia.org/wiki/Coffeemaker

https://en.wikipedia.org/wiki/Espresso

https://en.wikipedia.org/wiki/Espresso_machine

https://en.wikipedia.org/wiki/Starbucks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