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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16

드레스덴을 향하여 (1) - 단 한 명의 프랑스군을 찾아서 슐레지엔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블뤼허와 그나이제나우에게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임무를 가로막는 중립지대의 존재였습니다. 슐레지엔 방면군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습니다. 보헤미아로 쳐들어갈 것이 분명한 그랑다르메의 측면에 붙어 감시하며 괴롭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먼저 적과 접촉을 해야 했는데, 적과 자신의 사이에는 하루 이상의 행군거리인 수십 km의 중립지대가 있다보니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연합군 모두가 전투가 재개되자마자 나폴레옹은 보헤미아, 그러니까 남서쪽으로 쳐들어갈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블뤼허는 더욱 애가 탔습니다. 원래 휴전이 종료되는 8월 10일 새벽부터 양측은 병력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고, 전투는 적.. 2023. 12. 11.
새로운 전쟁의 준비 (8) - 수프와 은화 6월 말, 사실상 평화의 희망이 사실상 날아가버린 상황에서 나폴레옹측과 연합군측은 각자 맹렬한 전쟁 준비에 들어 갔습니다. 전쟁 준비는 공허한 애국심으로 관료들의 책상 위에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프랑스는 물론 독일 전체가 공유해야 했습니다. 약 20만의 러시아-프로이센 병력이 주둔하던 슐레지엔도 그 대군을 먹이기 위해 주민들이 큰 고초를 겪고 손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이미 몇 개월 전, 이번에야말로 나폴레옹을 몰락시키겠다면서 프로이센 출정군에게 거창하게 전쟁 준비를 시켜주느라 많은 물자와 돈을 갖다 바쳐야 했던 주민들로서는 이미 맞은 곳을 다시 얻어 맞는 꼴이어습니다. 이때 즈음 프로이센 총리 하르덴베르크는 공황 상태를 겪고 있었습니다.. 2023. 12. 4.
새로운 전쟁의 준비 (7) - 4만의 사나이 여태까지 보신 연합군 사정 중에서 핵심을 고른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향해 침공을 개시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연합국 모두의 의견이 일치 2) 3개군을 편성하되, 예상되는 나폴레옹의 침공 방향에 따라 그 중 보헤미아 방면군에 주력을 집중 3) 연합국 누구도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3개 방면군 각각을 여러 국가의 혼성 부대로 편성 4) 군복과 장비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야전군 병력은 51만으로 충분했으며, 군량은 비교적 넉넉한 상황 이와 대비하여, 나폴레옹의 준비 상황은 어땠을까요? 먼저, 나폴레옹이 8월 중순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던 병력은 약 44만이었습니다. 여기에는 37만2천의 보병과 3만의 포병 및 공병, 그리고 그토록 애타게 원했던 기병대가 .. 2023. 11. 27.
새로운 전쟁의 준비 (6) - 빵을 굽는 군대와 굽지 않는 군대 랑제론을 비롯한 슐레지엔 방면군 소속 러시아군 장교들의 감정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금방 러시아군 총사령관 바클레이에게까지 들어갔습니다. 바클레이도 보헤미아 방면군 소속으로서 오스트리아 슈바르첸베르크의 밑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그게 싫어서 휘하 병력이 보헤미아로 들어간 뒤에도 끝까지 현지로 떠나지 않고 최대한 라이헨바흐에서 버티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바클레이는 동병상련의 감정도 있고 해서, 보헤미아로 떠나기 직전 랑제론을 불러 '짜르께서는 랑제론 당신의 능력과 역할을 주목하고 계신다'라는 정도의 격려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뜻밖의 효과를 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랑제론은 바클레이와의 인터뷰 이후 자신이 블뤼허의 부하라기보다는 일종의 감시인으로 슐.. 2023. 11. 20.
새로운 전쟁의 준비 (2) - 프로이센의 고민 원래 7월 20일까지였던 휴전 기간은 양측의 합의 하에 8월 10일로 연장되었고, 그때까지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전투가 재개되려면 6일 간의 유예기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투가 재개되는 것은 8월 17일 새벽 0시부터였습니다. 사실상 건성이었던 평화 협상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양측은 8월 17일의 전투 재개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양측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프로이센군은 전반적으로 사기가 높은 편이라고 다들 말했습니다. 비록 뤼첸-바우첸에서 2연패를 당했으므로 4월달에 처음 출정할 때처럼 희망만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무시.. 2023. 10. 23.
새로운 전쟁의 준비 (1) - 불만 가득한 연합군 기본적인 작전안이 합의되자, 러시아군은 약속대로 비트겐슈타인의 군단과 콘스탄틴 대공 휘하의 러시아 근위대와 예비대를 보헤미아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군도 클라이스트(Friedrich Graf Kleist von Nollendorf)의 제2 군단과 프로이센 근위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북방군을 편성하기 위해 러시아는 빈칭게로더의 군단을 북으로 보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이미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빌로의 제3 군단과 타우엔치엔의 제4 군단의 지휘권을 베르나도트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블뤼허도 프로이센 출신이 아니고 그나이제나우도 원래는 작센 출신이었지만, 나폴레옹보다 7살 연상이었던 클라이스트는 베를린 출신 전형적인 프로이센의 융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 역시 명문가 출신은 아니.. 2023. 10. 16.
휴전 (15) - 두 개의 작전안 베르나도트가 연합군의 제장들을 모아놓고 밝힌 기본 작전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연합군은 보헤미아군, 슐레지엔군, 북방군의 3개군으로 구성하며, 이들은 나폴레옹이 전군을 이끌고 어느 한 방면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협동작전을 펼친다. 2) 이를 위해 3개군은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작전을 펼치도록 근접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3) 만약 나폴레옹이 어느 한 방면군을 공격한다면, 그 목표가 된 방면군은 반드시 후퇴하고 다른 두 방면군은 나폴레옹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한다. 4) 3개군은 모두 결전을 피하고 적 부대의 소모를 노린다. 단, 만약 적이 분산되어 있을 경우 과감하게 공격해야 한다. 아마 나폴레옹이 이 작전안을 보았다면 식은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결전을 추구.. 2023. 10. 9.
휴전 (14) - 베르나도트의 운수 좋은 날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있어서 스웨덴의 도움이 절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웨덴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승리는 결국 누가 더 많은 총검과 대포를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구가 많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각각 3천만에 육박했던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하면 인구가 240만 정도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초라한 수준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영토를 절반 이상 빼앗긴 프로이센은 인구가 975만에서 450만으로 줄어드는 봉변을 당했지만, 그래도 스웨덴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장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인접한 작센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보니 일종의 .. 2023. 10. 2.
휴전 (12) - 오스트리아의 준비 상황 6월 27일의 드레스덴 회견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오스트리아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의 임기응변으로 일단 나폴레옹을 7월 5일의 프라하 회담에 끌어들임으로써 당장 파국은 피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에 불과했습니다. 당장 연합국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은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제 오스트리아도 전쟁에 뛰어들어 피를 보게 되었는데, 아직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가 재개되면, 나폴레옹의 주된 공격 방향은 바로 오스트리아를 향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가 드레스덴으로 떠나기 훨씬 이전부터,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장군들은 이미 전투 재개를 가정하고 이런저런 작전안을 논의하고.. 2023. 9. 18.
휴전 (10) - 메테르니히, 드레스덴을 향하다 영국은 여기저기 돈을 뿌려대며 연합군 진영 내에서 영국의 입지를 다지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당장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돈보다는 총칼이 더 소중한 법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6월 중순, 라이헨바흐(Reichenbach) 조약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6월 하순,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만나자는 나폴레옹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 초대에 응해 드레스덴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폴레옹과의 회담에서 제시할 조건들에 대해 러시아 및 프로이센 측과 최종 합의를 보기 위해 라이헨바흐의 연합군 진영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라인 연방 해체나 프로이센의 영토 회복 등에 대한 요구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메테르니히의 4개 요구 조건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메테르니히의 조건이 그대로 통과되었습니다. 대신 만약 나폴레옹이 .. 2023. 9. 4.
휴전 (7) - 메테르니히의 조건 아직 정식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6월 3일부터 나흘 동안, 러시아 외교관 네셀로더(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란츠 1세(Franz I)와 메테르니히,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와 일련의 회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연합군 사령부로 되돌아간 네셀로더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다음 조건들을 제시하며 종전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 2023. 8. 14.
휴전 (6) -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훗날인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아직 엘바 섬에 있을 무렵, 러시아군의 랑제론은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티에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르티에는 이 때의 휴전협정에 대해 '그 휴전협정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었다,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1812년 이후 나폴레옹은 결코 자신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싸우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이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휴전협정을 맺은 것은 나폴레옹 혼자의 결정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는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나폴레옹이 휴전을 제의할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건 베르티에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전협정이 .. 2023.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