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7.23 18:51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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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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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6.25 22:02

이렇게 7월 5일 저녁 6시 경, 나폴레옹의 군단들이 게라스도르프(Gerasdorf)-바그람(Wagram)-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방어선 앞에 전개하면서 나폴레옹은 이 날의 1차 목표, 즉 도나우 강을 건너 전체 병력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마르히펠트에 쓸데없이 포진해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제때에 포착, 쉴새없이 공격하여 6천이 넘는 피해를 입힌 것도 기분 좋은 시작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아군과 적군의 전개 모습을 보니 상황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에 주둔한 요한 대공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이미 자신의 지휘 하에 저렇게 전개되어 있는데 요한 대공의 군대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결정적인 우세가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의 주요 마을 명칭을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했습니다.  당시 마을의 위치가 지금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가령 저 에슬링 마을은 당시보다 훨씬 북쪽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내선이동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보니, 카알 대공은 게라스도르프-바그람의 비삼베르크 고지대와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루스바흐 고지대라는 완만하게 반원형으로 마르히펠트 평원을 감싼 두 능선에서 프랑스군을 집게로 죄듯이 양측에서 포위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이 보기에 매우 어설픈 포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오른쪽 끝, 즉 게라스도르프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끝,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까지의 거리는 약 12km의 먼 거리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대 경사면 바로 위쪽에 구축해둔 토루나 참호같은 방어 시설에 의존하여 싸울 생각인 모양이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이 중앙 공격을 한다면 양쪽 끝의 오스트리아군은 중앙부를 지원하기 위해 애써 만들어둔 고지대의 방어 시설을 포기하고 저지대의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좌우익이 각각 6km씩을 헐레벌떡 뛰어와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반원형의 안쪽 면에서, 어느 지점의 오스트리아 방어선을 뚫을지 여유있게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으로든 훨씬 짧은 거리만 이동하면 되었으므로 기동성에 있어 절대 유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 방어선에서 가장 방어하기 곤란한 형태의 공격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즉 맨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측면으로부터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나폴레옹은 갑자기 초초해졌습니다.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무엇이 나폴레옹을 불안하게 했을까요 ?  2가지였습니다.  첫째, 요한 대공의 병력이 언제 동쪽에서 짠 하고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아무래도 저지대에서 고지대 위쪽의 상황을 정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라, 대체 저 고지 위에 오스트리아의 전체 병력이 웅크리고 있는지 아니면 불과 1~2개 군단만 대기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카알 대공이 싸우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투를 거부하고 저 멀리 보헤미아로 또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빨리 결판을 내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으므로, 몸이 달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야간 전투를 꺼려했습니다.  원래 명장일 수록 운에 의존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계산에 넣고 제어해가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병력 통제는 커녕 피아 구별도 하기 힘든 야간 전투에서는 상당 부분이 운에 맡겨질 수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초조함이 나폴레옹에게 과욕을 부리게 합니다.  그는 어제 밤부터 잠도 못 자고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이제 슬슬 숙영 준비를 하려던 병사들에게 뜻 밖에도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도 당장 1~2시간 안에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휘하 군단장들을 놀라게 하기 전에, 당장 나폴레옹 직속 참모 장교들을 당황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의향대로 명령서를 받아적고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한 뒤 이제 막 어두워지는 이 넓은 마르히펠트 평원을 말을 달려 이 명령서를 받을 수신인, 즉 각 군단장들을 찾아 제때에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명령서들은 각 군단장들에게 제각각 시간 차를 두고 전달되었는데, 명령서 내용은 '즉각 공격하라'는 것이었으니 각 군단들의 공격은 전혀 동기화되지 못한 채 시간 차를 두고  뿔뿔이 분산된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군단들은 아직 휘하 사단들이 제 위치로 이동하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 개시가 더욱 늦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래 의도는 오스트리아군의 양쪽 날개 중 동쪽 날개, 즉 루스바흐 고지의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라인을 3개 군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 방어선 전체를 견제하면서, 결정타로는 다부의 제3 군단을 이용하여 맨 동쪽 끝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부터 서쪽으로 돌돌 말아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이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어 오스트리아군의 대혼란에 빠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전혀 타이밍을 못 맞춘 채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온갖 불운이 따르면서 오히려 프랑스군 측이 대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단, 시작은 우디노 제2 군단이 끊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위치로부터 가까운, 중앙부 쪽에 있던 우디노는 나폴레옹이 원하던 대로 저녁 7시 경에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디노의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고지에 보루를 구축하고 68문의 대포를 이용해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두들겼으나, 제2 군단은 호기있게 루스바흐(Russbach) 시냇물을 건너 루스바흐 고지의 경사면을 기어올라 바우머스도르프(Baumersdorf)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 마을은 목조 주택이 30여 채 정도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해 이 가옥들에 화재가 발생하여 꽤 많은 연기를 토해냈습니다.  이 연기와 화재에도 불구하고 호헨촐레른(Hozenzollern)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굳게 바우머스도르프를 지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너지지 않자, 우디노는 이 마을 측면에 프랑스군 전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고 소문난 제57 전열 연대, 별칭 '무시무시한 녀석들(Les Terribles)'까지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했고, 호헨촐레른 장군이 직접 기병대를 끌고 반격을 가하자 공격하던 프랑스군이 오히려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 만에 우디노의 공격은 큰 피해만 입은 채 지리멸렬한 추태를 보이며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바로 서쪽 측면에서는 우디노보다 조금 늦게, 제5 군단이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은 비삼베르크 능선과 루스바흐 능선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여기에 공격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보다 막도날드의 좌측, 즉 바로 서쪽 측면에서 공격을 하게 되어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으로부터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이 파견되어 막도날드 지휘 하에 이곳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대포를 버리고 달아나는 등 일부 전열이 무너지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벨가르드(Bellegarde) 장군의 최전선 독려에 힘입어 끝끝내 버텼습니다.  




(이 분이 뒤파 장군입니다.  그는 Evian 생수로 유명한 에비앙 태생으로서, 사보이 공국의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태생이 그렇다보니 14세 때 프랑스군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왕국군에 입대했다가, 나중에는 역시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제노바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 흘러흘러 파리로 들어왔다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를 습격한 폭도 중의 한명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요.  그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간 용감한 군인이었는데, 너무 용감한 군인이 흔히 그렇듯이 많은 부상을 입어 결국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제대하게 됩니다.)



이러는 사이 화재 연기와 어둠 속에서 도이치 바그람 마을 안의 시계는 무척 나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는데,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즉 작센군도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휘하였던 뒤파 장군의 사단 병사들도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막도날드 휘하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다른 방향에서 진격해온 뒤파 휘하의 작센군과 혼전 속의 바그람 마을 안에서 마주쳤는데, 이들은 그만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착각하고 일제히 발포해버렸습니다.  바이에른군과는 달리 작센군은 가뜩이나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와 사기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오인 사격은 그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습니다.  작센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며 그 일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 카알 대공 본인이 직접 달려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더욱 열정적으로 덤벼 들었고, 결국 막도날드의 이탈리아 방면군도 무질서하게 후퇴해버렸습니다.  


한편, 그 왼편, 즉 더 서쪽에서는 작센군으로 이루어진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9 군단이 역시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와 베르나도트의 2개 군단이 바그람을 양쪽에서 집중 공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나폴레옹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무척 삐져있었습니다.  일단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프랑스 군단이 아닌 작센 군단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 화가 나 있었는데, 이번 공격 직전에 그나마 있던 3개 작센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주라는 명령을 받고 더욱 분개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의 2개 사단 중 제쥬비츠(Zezschwitz) 장군의 사단은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므로, 베르나도트는 막도날드와 함께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르코크(Lecoq) 장군의 1개 사단만이라도 동원해서 막도날드와 함께 동시에 공격을 시작해야만 했었는데, 베르나도트는 심통이 단단히 났는지 나폴레옹의 터무니 없이 조급한 명령 탓만 하며 제쥬비츠 사단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제쥬비츠 사단이 도착한 9시 경에야 베르나도트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바그람 마을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쳐들어간 바그람 마을은 연기와 어둠 속에서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였습니다.  그곳으로 쳐들어갔던 하르티쉬(Hartizsch) 장군은 그곳에 이미 뒤파 장군의 작센 사단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용감하게 뛰어든 것인데, 가보니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병사들이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독일어로 고함을 치며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르티쉬 장군의 작센군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총격전을 벌였고, 급기야 백병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서로가 같은 작센군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양측 병사들은 모두 맥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색 군복을 입은 오스트리아군이 이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으므로, 가뜩이나 사기가 좋지 않았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병사들은 우르르 무너져 보기 흉한 패주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궤멸 상태에 빠져, 마르히펠트 평원 언저리의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까지 후퇴했는데, 여기서도 재집결을 하지 않고 더 도망치는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군단을 다시 모으고 재편성하느라 베르나도트는 그날 밤 소집된 나폴레옹의 군단장 회의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가장 동쪽 끝에 있던 다부의 제3 군단이 사실상 이 공격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군단들이 3개 보병 사단 약 2~3만명 수준의 병력을 갖춘 것에 비해, 다부의 제3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4만2천의 병력을 갖춘, 그야말로 튼실한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의중대로라면 이런 병력을 갖춘 다부가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루스바흐 능선을 따라 돌돌 말아올리며 서쪽으로 진격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범생 다부조차도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늦게 받았는지 준비가 덜 된 상태라서 그랬는지, 베르나도트보다 더 늦게 밤 9시가 넘어서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다부는 모범생답게 구댕(Gudin)과 퓌토(Puthd) 사단의 정면 공격과 함께 측면에서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측면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무너뜨리도록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군의 투지와 방어태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탄 속에 휘하 사단들이 고지 위로 전진을 못하는 것을 보자, 다부는 '이건 이미 망한 전투'라고 결론을 내고 1시간 만인 밤 10시 경에 공격 명령을 취소시키고 병력을 후퇴시켰습니다.  


이렇게 7월 5일 밤, 나폴레옹의 호기로운 공격은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군은 근 6km가 넘는 전선에서 약 1만1천의 사상자를 내며 물러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패배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낮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그 징조가 보였지요.  노르드만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를 하루종일 그토록 괴롭히며 무려 50%의 사상자가 날 정도의 피해를 입혔는데도 노르드만 부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1805년 당시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마 몇 시간 못 버티고 무너져 부대 전체가 항복하거나 완전 궤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끝내 버티며 결국 절반이라도 살아서 오스트리아군 방어선에 합류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의 국방 개혁은 확실히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은 1805년 당시의 투지 없고 미숙한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의 수준은 과거보다 확실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 징집된 신병들이 잔뜩 섞인데다 작센 병사들과 이탈리아 병사들이 많이 포함된 군대는, 과거처럼 혁명 정신에 불타는 프랑스 고참 병사들로 구성된 과거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그다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 전투를 통해 루스바흐 고원 위에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 주력군 전체를 이끌고 결전을 벌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큰 그림, 즉 동쪽부터 서쪽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김밥말이하겠다는 작전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확신했습니다.  비록 오늘밤의 공격은 '불운'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날이 밝은 상태에서 제대로 공격한다면 성공하리라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의 상황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했습니다.  뜻 밖에도, 오히려 카알 대공이 밀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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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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