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9.04 12:46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리였는데, 문제는 그 길이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대가 목숨을 던져가며 벌어들인 시간을 쓰는 것이니 만큼, 신속한 행군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속하게 행군을 하려면 보병 방진을 짜고 행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느슨하고 긴 종대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 행군 길의 오른쪽 측면, 즉 서쪽 측면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득실거렸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히도 콜로브라트가 지휘하는 이 오스트리아군은 무척 소극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그들의 포병대와 기병대가 그의 취약한 종대 행렬을 2시간 내내 두들길 것이 뻔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쪽 아스페른으로의 행군을 명령받자, 그 명령의 어려움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인근으로 몰려온 도망병들을 포함한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먼저 화끈하게 브랜디(brandy)부터 쫙 돌렸습니다.  그는 니스의 채소가게 아들 출신답게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번지르르한 연설보다는 술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목구멍이 화끈해진 병사들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향한 위험한 행군길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의 전성시대(?)였다는 박통 루이14세 치하에서 채소가게 아들 마세나가 사회 탓을 하지 않고 정말 뼈를 깎는 노오오오력을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  아마 대대 행보관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가 바뀐다고 모든 개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의 노오오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세나는 며칠 전에 낙마 사고를 겪는 바람에 발을 다쳐 원래 전장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도 '마차를 타고 진격하면 된다'라며 눈처럼 새하얀 2인승 무개마차를 타고 전장에 나섰고, 나폴레옹은 그런 그를 칭찬하며 '자네 옆에 탄 마부가 프랑스군 내에서 가장 용감한 병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눈 앞에 줄지어 행군해 내려가는 프랑스군의 대오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새하얀 2인승 마차에 탄 사람이 유명한 마세나라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의 흰색 마차를 향해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는 기록은 없거든요.  그러나 탁 트인 벌판에서 측면이 훤히 노출된 이 긴 종대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대로 띄엄띄엄 연습하듯이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병사들을 한두명씩 피떡으로 만들며 쓰러뜨렸습니다.  마세나의 흰색 마차는 아주 공평하게 병사들과 똑같이 적의 포탄에 노출된 채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나 말고 내 옆 친구를 쓰러뜨리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천천히 행군했습니다.


일렬 종대로 행군 중인 보병은 사실 포병보다는 기병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행동을 같이 하던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는 호시탐탐 이들의 측면을 따라오다 기회다 싶은 순간이 오면 바람처럼 달려들어 아장아장 걷는 프랑스 보병들에게 칼탕을 선물하고는 다시 우르르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기병대에 호기심 많은 지휘관이 있었는지, 한번은 그런 헝가리 기병대의 공격이 마세나의 흰색 마차를 향해 돌진해왔고 거의 마차에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마세나의 부관들이 군도를 뽑아들었는데, 다행히 측면을 스크린하는 역할을 하던 프랑스 기병대가 제때 앞을 가로 막아 요격해주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마세나의 행군길이 오스트리아군 기병대 때문에 무척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술피스(St. Sulpice) 장군의 흉갑기병대를 추가로 붙여줘 측면을 보호하도록 했거든요.


브랜디와 프랑스 기병대의 보호에 힘입어, 마세나의 제4 군단 병사들은 1시간 반만에 아스페른-에슬링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스페른은 물론 에슬링에서도 밀려나 힘겹게 고전 중인 부데(Boudet)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 6군단은 에슬링을 점거한 이후 그냥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포격을 가하는 등의 소극적 공격 외에는 별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클레나우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주저주저하는 것에도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측이 각각 십만 단위로 포진한 이런 거대한 장기판에서 자기들처럼 불과 1만5천 정도되는 작은 군단 하나만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와 버리고 나니 클레나우로서는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클레나우 장군입니다.  이 분은 1795년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령으로 승진한 이후, 불과 4년만인 1799년 역시 전공에 의해 합스부르크 육군 역대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나름 실력파였으며, 바그람 전투 당시 51세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클레나우에게 측면 돌파를 명했을 뿐, 이렇게 성공적인 돌파가 되리라 예상은 하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무전 통신이나 항공 정찰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전장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전투 상황에서, 전날 밤 작성되는 작전 명령서에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까지 어디까지 돌파한 뒤, 몇 시에 어느 위치에 있을 프랑스 XX 군단을 격파하라'는 식으로 세부적인 지시를 적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것이 당시의 전장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귀족 위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는 역시 실력으로 승진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보헤미아 귀족 출신이었던 클레나우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만큼 나름 뛰어난 인재였으나, 그건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는 귀족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출신 신분이나 학력에 상관없이 오로지 전과와 실력만으로 장교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다보니 마세나처럼 채소가게 아들 출신도 원수가 될 수 있는 프랑스군 앞에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포탄이나 기병 군도에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세나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냈습니다.  사실 마세나의 병력이나 클레나우의 병력이나 수적 우위가 크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고, 오히려 장시간 행군에 지친 것은 프랑스군 측이었을텐데도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는 마치 '내 이럴 줄 알고 후퇴 준비를 다 해놓았지롱~'하는 식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과 2시간 정도만에 마세나는 에슬링에 이어 아스페른까지 탈환하고 클레나우를 서쪽 저 멀리 쫓아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투가 종료된 이후, 클레나우는 보고서에 자기 쪽으로 지옥처럼 무시무시한 종대(la colonne infernale)가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에 후퇴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세나에 의해 프랑스군 좌익에서의 위기가 정리되는 동안, 정반대쪽 프랑스군 우익에서는 다부의 환상적인 무브먼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_von_Klenau

https://en.wikipedia.org/wiki/Andr%C3%A9_Mass%C3%A9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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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8.20 15:43

기세 좋게 달려들어간 낭수티의 제1 중기병사단이 첫번째로 맞이한 난관은 그 지대가 너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달리는데는 평평한 것이 좋지 않냐고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있는 평원이 기병 돌격에는 더 좋았습니다.  여기 아더클라 앞마당처럼 너무 평평하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시선과 대포에 노출되면 기병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동안,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square)을 구성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기병에 대항하여 보병 방진을 구성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1788년의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때의 모습입니다.  머스켓 소총과 함께 총검이 개발되고 대포의 기동성이 향상되면서부터는, 기병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위치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마 징기스칸의 몽골기병들이 와도 이젠 보병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기병으로는 보병 방진을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계산 방법은 이렇습니다.  돌격하는 기병들은 좌우로 최소 약 1.2미터의 폭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비해 방진의 보병들은 60cm의 폭만 있으면 되었고, 또 방진의 보병들은 대개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즉, 한자루의 기병 군도에 대해, 4 x 2 = 8발의 총탄과 8자루의 긴 총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보병의 총에 총알이 들어있지 않다고 해도, 말은 영리한 동물이라서 대개 그 빽빽한 총검의 숲으로는 돌격해들어가지 않고 끝에는 반드시 옆으로 머리를 돌리곤 했습니다.  물론 간혹 기병대가 보병 방진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 기병대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숙한 보병들이 엉성하게 보병 방진을 짰기 때문이거나 뭔가 사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포병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과 정확도를 자랑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도 저 멀리서 칼을 꼬나쥐고 달려오는 프랑스군 기병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쇳덩어리 포탄에 낭수티의 건장한 기병들이 픽픽 나가 떨어지며 그 대오에 뻥뻥 구멍이 뚫렸지만 프링스 기병들은 그저 성모 마리아를 입 속에 되뇌이며 계속 달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포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으며 헐레벌떡 달려들어간 곳에 기다리는 것은 총검을 고슴도치처럼 세우고 기다리는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기병 돌격은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은 보병들의 일제 사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지요.  당연히 낭수티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물러서는 기병대원들을 규합하여 다시 돌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집단 전술 훈련이 가장 뒤떨어진 그렌츠(Grenz) 대대의 방진 하나를 깨뜨리는 쾌거를 이뤄냅니다.





(그렌츠 보병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지대에서 차출된 발칸 반도 출신 보병들로서 주로 프랑스군의 볼티저(voltigeur)처럼 산개하여 싸우는 유격병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전열 보병처럼 싸우는 것은 원래 그들의 몫이 아니었지요.  그림 속의 2번 병사가 그렌츠 보병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좌우로 빽빽히 들어선 오스트리아 척탄병 대대들의 방진은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낭수티는 당혹감과 혼란, 무엇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우왕좌왕하는 기병들을 이끌고 보병 방진 사이를 뚫고 오스트리아군 후방으로 나온 뒤, 방향을 휙 틀어 자신들을 괴롭힌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향해 돌격했고, 포대 하나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지친 이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기병대의 무기는 사실 칼도 창도 권총도 아닌 속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기병대는 현대의 공군과 비슷했습니다.  아무리 공군이 강력해도, 공군으로 전장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연료가 떨어지면 현장에서 물러가야 하니까요.  아무리 강력한 전폭기라고 해도, 지상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쉬운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당시 낭수티의 기병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여러차례 전력 질주를 하여 말도 사람도 지친 기병대로는 전선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대는 이제 완전히 붕괴되어 무질서하게 우르르 본진으로 후퇴했고,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낭수티는 아무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와 함께 출격했던 2800명의 기병 중 되돌아온 것은 고작 1600명으로서, 무려 42%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궤멸적 타격이었습니다.


여기서 베시에르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그도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낭수티를 먼저 보낸 뒤, 서둘러 황실 근위 기병들을 편성한 뒤 낭수티가 그렌츠 보병 대대의 방진을 깨뜨릴 즈음해서는 2천의 근위 기병들을 이끌고 막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란에게 당한 모욕도 떨쳐낼 겸, 정말 맨 앞에 나서서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특히 바로 뒤에서 나폴레옹이 그의 돌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비장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얼마 가지도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 하나가 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습니다.  그 대포알은 그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뒤 그가 탄 말의 엉덩이를 강타했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그는 덕분에 땅바닥에 엄청난 세기로 처박히며 정신을 잃었고, 그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근위 기병대 지휘관을 역임하며 근위대 병사들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가 쓰러지자 많은 근위대 병사들이 통곡을 하며 슬퍼했는데, 이 모습을 나폴레옹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은 정신을 차린 그에게 '근위대 병사들을 울게 만들다니 대단하네.  그러나 전과는 왜 그 모양인가 ?'라며 칭찬과 조롱을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쫓겨온 낭수티는 이제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근위 기병대까지 합해 3천이 넘는 기병들을 모으게 되었으나, 이제 다시 돌격한다고 해도 도저히 눈 앞의 오스트리아군을 깨뜨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풀이 죽은 채로 큰 피해를 입은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낭수티의 악전고투 덕분에 마세나는 무사히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세나가 떠난 빈자리는 텅 빈 마르히펠트 평원 뿐이었습니다.  그 곳으로 오스트리아군이 몰려 나올텐데, 낭수티의 기병대까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물러났으니 그걸 틀어막을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어쩌자고 이런 식의 작전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설마 나폴레옹처럼 경험 많은 지휘관이 기병 사단 하나면 적의 군단 하나쯤 충분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요 ?  물론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가 낭수티에게 바랐던 것은 오직 하나 시간을 버는 것 뿐이었고, 실제로 그것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낭수티가 물러난 빈자리로 오스트리아군이 몰려오자,  나폴레옹은 그들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깜짝 선물을 내놓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www.histoire-empire.fr/articles/item/grande-batterie-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Bessi%C3%A8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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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8.15 15:22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모처럼 맞은 절호의 기회를 지휘부의 처절한 무능함 속에서 날려버리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머리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이미 끝났다고들 말했지만, 그의 클래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가 주저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텐데도, 그는 이런 위기 속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후방으로 침입한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를 막기 위해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등 허둥거렸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병력이 아주 많았습니다.  최우익의 다부 외에도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과 근위대 등 어제 밤에 장전해둔 탄약이 머스켓 약실에 그대로 들어 있는 병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폴레옹의 가장 큰 관심은 다부의 우익이었습니다.  이번 전투의 승패는 어떻게 적의 공격을 막아내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적의 이 기습 공격을 분쇄한다고 해도 그건 현상 유지일 뿐, 전쟁을 끝내려면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원래 의도했던대로 우익의 다부가 제대로 된 묵직한 공격을 퍼부어야 했습니다.  이번 전투의 정수는 다부 쪽에 있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큰 그림을 잃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공격을 서두르라'고 명령한 뒤, 놀랍게도 다른 모든 군단장들 대신 아더클라에서 악전고투 중인 마세나의 제4 군단에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쪽을 돌파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다른 군단들은 그대로 현 위치를 지키게 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아더클라에서 벨가르드의 부대와 교전 중이라서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습니다.  왜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가장 단순한 이유는 마세나가 클레나우와 가장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침착성과는 별도로, 상황은 정말 위급했습니다.  그러니 더 동쪽에 있던 우디노나 막도날의 군단을 이동시키는 것은 너무 시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이동시키면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꾼단 말입니까 ?  궁극의 예비대인 그의 근위대는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예비대로 아껴두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현 상황이 그렇게까지 급박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남는 옵션은 마세나로 하여금 아더클라에 집착하지 말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클레나우를 제압하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분명히 이미 교전 중인 적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질서있는 전술적 후퇴가 까딱 잘못하다간 진짜 패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솜씨 있는 지휘관이 숙련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더클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성공적으로 떨쳐내고 후퇴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새벽에 행군해 온 그 길을 다시 되짚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 길목에는 새벽에는 없었던 것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이었지요.  이들과 엉겨붙으면 또 끝장이었고, 또 이들을 어떻게든 신속하게 제압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 대책없이 마세나가 그대로 남쪽으로 달려가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맞붙는다면, 마세나와 아더클라 사이는 또 뼝 뚫린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콜로브라트가 밀고 들어오면 그것 또한 큰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대해서 간단한, 그러나 무책임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바로 대규모 기병대를 오스트리아군 얼굴에 냅다 집어던져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지요.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Eylau)에서도 위기에 처하자 뮈라의 대규모 기병대를 돌격시켜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뮈라의 기병대는 빽빽히 늘어선 러시아군 보병 대오를 관통하여 뚫고 들어갔다가 말을 돌려 다시 뚫고 돌아오는 장관을 연출하기는 했었으나, 정작 그 돌격으로 적에게 입힌 피해는 정신적 충격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벌긴 했지요.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같은 목적으로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무작정 기병 돌격은 기병들의 큰 피해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기병대를 맡을 지휘관도 적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기병 지휘관이었던 불꽃 남자 뮈라는 이런 위험천만한 돌격을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했고, 하일스베르크 전투의 경우 뮈라는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대포의 산탄에 말을 잃고 낙마하면서 장화 한짝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우습게 여기며 미친 듯한 돌격을 여러번 이끌면서도 부상은 거의 입지 않았지요.  그러나 뮈라는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담당할 사람은 예비 기병대 사령관인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ères)였습니다.




(베시에르입니다.  사실 그가 얌체에 기회주의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친이었다가 원수로 변한 란과 결국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베시에르는 분명히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전쟁터 최전선보다는 나폴레옹 주변을 알짱거리며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다 란(Lannes) 원수로부터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네 ?'라는 팩트폭력을, 그것도 나폴레옹 코 앞에서 당하고는 그와 결투 직전까지 갔던 바 있었습니다.  물론 열혈남아 란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베시에르도 위험 앞에서 꼬리를 말아쥐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한 바로 그 다음날 란이 최전선에서 지휘를 하다 적 포탄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자, 베시에르가 아무리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시에르가 이 명령을 받은 것은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그가 맡았던 프랑스군 예비 기병대에는 기병 사단이 3개 있었으나, 그 중 생-쉴피스(Saint-Sulpice)의 사단은 마세나를 지원하러 차출되었고, 아리기(Arrighi)의 사단은 새벽에 로젠베르크가 일으킨 소동 탓에 다부의 우익을 지원하러 간 상태였습니다.  남은 것은  제1 중기병 사단 하나 뿐이었는데, 그나마 여기에는 총 3개 여단 중 생-제르맹(Saint-Germain) 장군의 기병 여단이 후방으로 빠져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족한 기병대의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아끼고 아끼던 근위 기병대까지 차출해주었으나, 그 준비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 기병대가 돌격을 하는데, 그 준비에 시간이 걸려서야 되겠습니까 ?  결국 베시에르는 제1 중기병 사단의 2개 여단 2800명을 그 지휘관인 낭수티(Nansouty)의 지휘 하에 돌격시켰습니다.  본인은 일단 뒤에 남았습니다.  어쩌면 란의 영혼이 이 모습을 보며 '내 그럴 줄 알았다'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르지요.




(낭수티 장군입니다.  그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약탈 등으로 개인주머니를 채우지 않은 몇 안되는 청렴한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청렴했을 뿐 청빈하지는 않아서, 씀씀이는 계속 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패망 이후 루이 18세 치하에서 급료가 많이 깎이자,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고 합니다.)




낭수티가 돌격해 들어간 곳은 아더클라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과, 그 바로 남서쪽에 자리를 잡은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 사이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넓은 공간에는 프로하스카(Prochaska) 중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사단 1개만 얇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병대 수가 부족하다고 해도, 큰 말에 올라탄 덩치 큰 기병들로 구성된 중기병대가 큼직한 군도를 뽑아들고 두두두 달려들어가면 그 정도의 보병들은 쉽사리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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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8.06 16:56

전날 밤 카알 대공도 나폴레옹과 생각하는 것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좌익과 중앙에서 잽을 날리며 적의 시선을 끈 뒤, 강력한 우익의 우회 진격을 통해 적의 측면을 관통하여 끝장을 본다는 것이었지요.  차이는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공격자였던 나폴레옹은 방어자 입장인 오스트리아 측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카알 대공이 한두 시간 먼저 공격을 해들어온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이 베르나도트의 아더클라 무단 이탈과 마세나가 지휘하는 제4 군단의 아더클라 쪽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준비한 회심의 라이트 훅, 클레나우의 진격 방향이 파란색 화살표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와 직각을 이루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붉은색 화살표가 프랑스군 마세나의 제4 군단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이루고 있던 것은 전날 낮에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클레나우(Klenau)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삼베르크(Bisamberg)로 이어지는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의 새벽 작전에 대한 지시를 너무 늦게 통보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출격은 카알 대공이 의도한 것보다 무려 3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어, 공격 시작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아침 8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늦어진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이때 즈음 마세나의 주력 사단들은 모두 아더클라 방면으로 몰려간 뒤였던 것입니다.  특히 르그랑(Legrand)의 사단은 아더클라로의 행군 도중 측면에서 들이닥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의 습격을 받고 대경실색 했습니다.


하지만 르그랑의 사단보다 더 큰일이 난 것은 마세나가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두 마을을 지키라고 남겨두고 간 부데(Boudet)의 사단이었습니다.  마세나는 '뭐 어차피 이쪽은 별 일이 없을테니까'라며 태평하게 달랑 부데의 1개 사단만 남겨두고 갔고, 어쩌면 그렇게 뒤에 남겨진 부데와 그의 부하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을지도 몰랐겠습니다.  부데 사단은 약 한달 전의 에슬링 전투에서 에슬링의 곡물 창고를 지키며 그야말로 혈전을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었고, 그 수도 고작 5천명 정도로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아마 한숨 돌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궃게도, 부데의 사단을 다시 그 곡물 창고로 쳐박아 넣게 됩니다.


아스페른으로 진격을 개시한 클레나우의 제6 군단 약 1만4천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갔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포병대를 전개시켜 포격을 가하자 부데도 10문의 포병대를 동원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 경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프랑스 포병들을 베어넘기고 대포들을 나포했습니다.  이대로 대포들을 잃을 수 없었던 프랑스 보병들이 우르르 물려나와 오스트리아 기병들을 쫓아내고 이 대포들을 다시 탈환했지만, 그 사이에 방열을 마친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해 다시 프랑스군의 대포들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전으로 시작된 부데의 방어전은 결국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대포들을 잃고 버티기가 어려웠던 부데는 결국 아스페른을 포기하고 정들었던(?) 에슬링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슬링으로 물러난다고 해서 뭐 딱히 사정이 더 좋아질 것도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허둥지둥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아주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요하게 추격해왔고, 에슬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려 애쓰던 부데는 결국 오전 10시 경, 거기서도 밀려나야 했습니다.




(부데 사단에 딸린 프랑스군 포병대를 유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모습입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후퇴하는 부데의 사단이 밀려난 곳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였습니다.  여기 다음은 어제 새벽 프랑스군이 대거 도나우강을 건넌 교두보였습니다.  즉, 여기에서마저 밀려나면 이제 16만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기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대포를 방열하고 로바우섬으로부터 보급품을 나르고 있던 종군 민간 상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으나, 그러나 병력도 화력도 미약했던 부데 사단은 뭘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던 부데 사단을 향해 마침내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그람 전투 내내 프랑스군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북쪽 아더클라에서는 전선 중앙을 돌파당한데다, 남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교두보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뜻 밖의 방향으로부터 왔습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해 들어오던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로바우 섬으로부터 불벼락이 날아온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이후 약 1달 넘게 나폴레옹은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지요.  그 준비 중 하나가 로바우 섬 전체의 요새화였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에는 약 124문의 각종 대포 및 박격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1급 전함 1척이 강변에 닻을 내린 것 같은 효과였습니다.  아니, 전함은 양측에 포를 나눠 설치해야 했으므로 그에 비해 모든 포를 북쪽 강변으로 향해 놓을 수 있었던 로바우 섬은 1급 전함 2척이 나란히 강변에 정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일제히 오스트리아군을 강타했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대포가 조잡한 화력만을 낼 수 있다고 해도, 탁 트인 강변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밀집 대형으로 행군하는 보병대에게 날아든 무지막지한 대포알들은 끔찍한 살육을 일으켰습니다.  로바우 섬의 포병대는 신나게 대포알을 날려보냈고,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공포에 질려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밀려난 클레나우는 일단 숨을 돌리고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로바우 섬의 프랑스 포병대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재빨리 진격하여 몇 천 밖에 안 되는 프랑스 보병들을 밀어낸다면 최소한 프랑스군의 소중한 다리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방향을 이제 북쪽으로 틀어 프랑스군의 노출된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레나우는 두가지 방안 모두 택하지 않고,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결정합니다.  왜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은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는 것이었을까요 ?


클레나우가 멈추기로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오스트리아군의 경직성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카알 대공은 물론이고 클레나우 본인도 이렇게 쉽게 프랑스군 교두보까지 일사천리로 돌파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기고 있는 편이 약간 당황한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운좋게 적의 중앙부 뒤쪽까지 잘 뚫고 왔다고 해도,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고작 1만4천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10만 단위의 대군이 밀집한 적진 한 가운데에 막상 뛰어들고나니, 불안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왜 달랑 1개 군단을 적진 뒤쪽으로 찔러 넣었느냐고요 ?  그러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분명히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을 찔러 넣었거든요.  클레나우도 바로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  


클레나우보다 좀더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던 콜로브라트는 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더클라를 향해 북진하던 르그랑의 프랑스 사단과 딱 마주쳤습니다.  군단 대 사단의 만남인데다 공격 준비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행군 중에 생각하지 않은 내습을 당한 셈이어서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유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콜로브라트의 행동은 복장이 터질 정도로 굼뜨고 느린데다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의 임무가 프랑스군 후방으로의 기습 침투라는 것을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헷갈릴 정도의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일단 원래의 진지인 비삼베르크 언덕에 1개 여단을 뚝 떼어놓고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르그랑 사단을 가볍게 밀어내고 로바우 섬이건 마세나의 뒤통수이건 심지어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까지도 별 저항 없이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전면은 탁 트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르그랑 사단과 마주치자 콜로브라트가 첫번째로 내린 명령은 공격 명령이 아니라 후방 퇴로 확보였습니다.  그나마 빈약한 르그랑 사단에게조차 과감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먼저 포병대를 내세워 대포알만 날려보내는 소극적인 지휘로 초지일관 했습니다.  




(이 분이 콜로브라트 백작 Johann Karl, Graf von Kolowrat-Krakowsky 이십니다.  이분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패전인 호헨린덴 전투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등에서 모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그의 빛나는 승리가 100% 자신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라고는 말 못 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분의 무능함은 빛났는데, 그럼에도 이 분이 연달아 주요 군단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 오스트리아가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패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양반이 혁혁한(?) 활약을 한 바그람 전투 직후, 이 60이 넘은 노장은 무려 원수(Feldmarschall)로 승진합니다.)




아무리 카알 대공이 작전이 훌륭하다고 해도 무엇하겠습니까 ?  그의 작전을 수행할 장군들은 여전히 낡은 교리에 묶인,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 없던 무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능한 귀족들이 핵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운 좋게 손에 들어온 승리의 기회를 날려 먹고 말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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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16 22:27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밑, 공작보다는 위인 대공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들을 총 3개부대로 편성하여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을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1개 부대는 6개 대대로 작게 편성되어 프랑스군 수중에 있던 그로스호펜(Grosshofen) 마을을 공격하기로 했고, 무려 16개 대대로 강력하게 편성된 다른 1개 부대는 글린첸도르프(Glinzendorf)를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글린첸도르프로 향하는 부대에는 나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음악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라데츠키 백작(Joseph Radetzky von Radetz)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모두 기병대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멀찍이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를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나름 굉장히 머리를 쓴 작전이었고, 전날 헛된 공격으로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에게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로젠베르크의 공세에는 무려 60문의 대포가 딸려 있었으므로, 새벽 하늘에 엄청난 포성을 울려 나폴레옹의 시선을 잡아 끌게 되어 있었습니다.




(붉은색 원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역이고, 푸른색 원은 오스트리아군 주요 거점입니다.  푸른색 화살표가 로젠베르크의 공세 방향입니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게는 재수가 없게도, 그의 앞에 있던 부대는 바로 프랑스군 최고의 지장이라고 할 수 있던 다부(Davout)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무려 3만2천의 보병과 6천2백의 기병, 그리고 무려 12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어서 프랑스군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로젠베르크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습이라도 성공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다부는 전날의 야간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공격을 걷어들인 바 있었지요.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로 지치지도 않았고, 새벽에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을 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로젠베르크는 공세에 나서면서 '절대 엄숙'을 지시했으나, 이 군단에는 반쯤은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소음을 내며 행군을 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무척 놀라긴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새벽 5시 경,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선봉대가 그로스호펜을 습격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이어서 글린첸도르프에도 오스트리군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1개 연대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로스호펜은 곧장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넘어갔으나, 다부는 당황하지 않고 곧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호펜에서 밀려난 프랑스군의 퓌토(Puthod) 장군이 그로스호펜을 탈환하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동안 구댕(Gudin) 장군의 강력한 사단이 그 측면을 들이쳤습니다.  프리앙 장군과 모랑 장군의 2개 사단이 주둔하고있던 글린첸도르프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잘 버텨주었고, 그루시(Grouchy) 장군과 몽브렁(Montbrun) 장군의 프랑스군 기병대는 측면을 돌아 레오폴즈도르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를 오히려 다시 우회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로젠베르크와 다부가 새벽에 혈투를 벌이며 낸 포성과 총성은 새벽 하늘을 가로질러 라스도르프(Raasdorf)에서 이른 아침식사 중이던 나폴레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다부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을리도 없으니, 그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이었지요.  당시 프레스부르크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는 고작 1만3천 정도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이 좀 부풀려 보고를 했는지, 나폴레옹은 요한 대공의 군세를 약 3만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병력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마당에 적에게 3만이 더 가세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비 기병대로부터 낭수티(Nansouty)와 아리기(Arrighi) 장군의 중장 기병대를 다부 쪽으로 파견했고, 이어서 황실 근위대까지 그쪽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마저 끝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낭수티 장군의 기병대 중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마 포병대가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첫 포탄을 발사할 때 즈음에는 이미 나폴레옹도 현장에 도착하여 다부와 함께 반격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습을 해온 오스트리아군 측이었습니다.  작전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던 카알 대공은 어차피 프랑스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쪽 전선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로젠베르크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고 있는 적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어느 한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순간이었거든요.  이 때 병력 통제가 안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후퇴를 기술적으로 잘 해내는 것은 뛰어난 지휘관과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병사들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것을 해냈습니다.  순식간에 전위대에서 후위대로 임무가 바뀐 라데츠키 장군의 부대는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이 원래 출발선이었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퇴각할 때까지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잘 억눌렀고, 결국 아침 6시가 되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1천1백명 정도로 심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말년의 라데츠키입니다.  그는 원래 보헤미아, 즉 체코의 귀족이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그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1848년 쿠스토자(Custoza)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군을 격파한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 즉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맥없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걱정한 것은 그가 의도했던 기습이 이 새벽의 전투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다부의 공격이 그의 주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잃어보린 기습 효과를 어느 정도 벌충하기 위해 다부에게 일부 병력을 더 동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후방으로부터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다부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부에게 이렇게 감놔라 배놔라 참견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가슴을 정말로 철렁하게 만드는 사건이 전선 중앙부 아더클라(Aderklaa)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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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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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25 22:02

이렇게 7월 5일 저녁 6시 경, 나폴레옹의 군단들이 게라스도르프(Gerasdorf)-바그람(Wagram)-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방어선 앞에 전개하면서 나폴레옹은 이 날의 1차 목표, 즉 도나우 강을 건너 전체 병력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마르히펠트에 쓸데없이 포진해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제때에 포착, 쉴새없이 공격하여 6천이 넘는 피해를 입힌 것도 기분 좋은 시작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아군과 적군의 전개 모습을 보니 상황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에 주둔한 요한 대공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이미 자신의 지휘 하에 저렇게 전개되어 있는데 요한 대공의 군대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결정적인 우세가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의 주요 마을 명칭을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했습니다.  당시 마을의 위치가 지금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가령 저 에슬링 마을은 당시보다 훨씬 북쪽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내선이동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보니, 카알 대공은 게라스도르프-바그람의 비삼베르크 고지대와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루스바흐 고지대라는 완만하게 반원형으로 마르히펠트 평원을 감싼 두 능선에서 프랑스군을 집게로 죄듯이 양측에서 포위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이 보기에 매우 어설픈 포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오른쪽 끝, 즉 게라스도르프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끝,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까지의 거리는 약 12km의 먼 거리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대 경사면 바로 위쪽에 구축해둔 토루나 참호같은 방어 시설에 의존하여 싸울 생각인 모양이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이 중앙 공격을 한다면 양쪽 끝의 오스트리아군은 중앙부를 지원하기 위해 애써 만들어둔 고지대의 방어 시설을 포기하고 저지대의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좌우익이 각각 6km씩을 헐레벌떡 뛰어와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반원형의 안쪽 면에서, 어느 지점의 오스트리아 방어선을 뚫을지 여유있게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으로든 훨씬 짧은 거리만 이동하면 되었으므로 기동성에 있어 절대 유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 방어선에서 가장 방어하기 곤란한 형태의 공격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즉 맨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측면으로부터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나폴레옹은 갑자기 초초해졌습니다.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무엇이 나폴레옹을 불안하게 했을까요 ?  2가지였습니다.  첫째, 요한 대공의 병력이 언제 동쪽에서 짠 하고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아무래도 저지대에서 고지대 위쪽의 상황을 정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라, 대체 저 고지 위에 오스트리아의 전체 병력이 웅크리고 있는지 아니면 불과 1~2개 군단만 대기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카알 대공이 싸우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투를 거부하고 저 멀리 보헤미아로 또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빨리 결판을 내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으므로, 몸이 달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야간 전투를 꺼려했습니다.  원래 명장일 수록 운에 의존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계산에 넣고 제어해가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병력 통제는 커녕 피아 구별도 하기 힘든 야간 전투에서는 상당 부분이 운에 맡겨질 수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초조함이 나폴레옹에게 과욕을 부리게 합니다.  그는 어제 밤부터 잠도 못 자고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이제 슬슬 숙영 준비를 하려던 병사들에게 뜻 밖에도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도 당장 1~2시간 안에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휘하 군단장들을 놀라게 하기 전에, 당장 나폴레옹 직속 참모 장교들을 당황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의향대로 명령서를 받아적고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한 뒤 이제 막 어두워지는 이 넓은 마르히펠트 평원을 말을 달려 이 명령서를 받을 수신인, 즉 각 군단장들을 찾아 제때에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명령서들은 각 군단장들에게 제각각 시간 차를 두고 전달되었는데, 명령서 내용은 '즉각 공격하라'는 것이었으니 각 군단들의 공격은 전혀 동기화되지 못한 채 시간 차를 두고  뿔뿔이 분산된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군단들은 아직 휘하 사단들이 제 위치로 이동하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 개시가 더욱 늦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래 의도는 오스트리아군의 양쪽 날개 중 동쪽 날개, 즉 루스바흐 고지의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라인을 3개 군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 방어선 전체를 견제하면서, 결정타로는 다부의 제3 군단을 이용하여 맨 동쪽 끝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부터 서쪽으로 돌돌 말아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이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어 오스트리아군의 대혼란에 빠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전혀 타이밍을 못 맞춘 채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온갖 불운이 따르면서 오히려 프랑스군 측이 대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단, 시작은 우디노 제2 군단이 끊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위치로부터 가까운, 중앙부 쪽에 있던 우디노는 나폴레옹이 원하던 대로 저녁 7시 경에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디노의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고지에 보루를 구축하고 68문의 대포를 이용해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두들겼으나, 제2 군단은 호기있게 루스바흐(Russbach) 시냇물을 건너 루스바흐 고지의 경사면을 기어올라 바우머스도르프(Baumersdorf)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 마을은 목조 주택이 30여 채 정도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해 이 가옥들에 화재가 발생하여 꽤 많은 연기를 토해냈습니다.  이 연기와 화재에도 불구하고 호헨촐레른(Hozenzollern)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굳게 바우머스도르프를 지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너지지 않자, 우디노는 이 마을 측면에 프랑스군 전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고 소문난 제57 전열 연대, 별칭 '무시무시한 녀석들(Les Terribles)'까지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했고, 호헨촐레른 장군이 직접 기병대를 끌고 반격을 가하자 공격하던 프랑스군이 오히려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 만에 우디노의 공격은 큰 피해만 입은 채 지리멸렬한 추태를 보이며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바로 서쪽 측면에서는 우디노보다 조금 늦게, 제5 군단이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은 비삼베르크 능선과 루스바흐 능선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여기에 공격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보다 막도날드의 좌측, 즉 바로 서쪽 측면에서 공격을 하게 되어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으로부터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이 파견되어 막도날드 지휘 하에 이곳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대포를 버리고 달아나는 등 일부 전열이 무너지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벨가르드(Bellegarde) 장군의 최전선 독려에 힘입어 끝끝내 버텼습니다.  




(이 분이 뒤파 장군입니다.  그는 Evian 생수로 유명한 에비앙 태생으로서, 사보이 공국의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태생이 그렇다보니 14세 때 프랑스군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왕국군에 입대했다가, 나중에는 역시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제노바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 흘러흘러 파리로 들어왔다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를 습격한 폭도 중의 한명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요.  그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간 용감한 군인이었는데, 너무 용감한 군인이 흔히 그렇듯이 많은 부상을 입어 결국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제대하게 됩니다.)



이러는 사이 화재 연기와 어둠 속에서 도이치 바그람 마을 안의 시계는 무척 나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는데,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즉 작센군도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휘하였던 뒤파 장군의 사단 병사들도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막도날드 휘하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다른 방향에서 진격해온 뒤파 휘하의 작센군과 혼전 속의 바그람 마을 안에서 마주쳤는데, 이들은 그만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착각하고 일제히 발포해버렸습니다.  바이에른군과는 달리 작센군은 가뜩이나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와 사기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오인 사격은 그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습니다.  작센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며 그 일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 카알 대공 본인이 직접 달려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더욱 열정적으로 덤벼 들었고, 결국 막도날드의 이탈리아 방면군도 무질서하게 후퇴해버렸습니다.  


한편, 그 왼편, 즉 더 서쪽에서는 작센군으로 이루어진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9 군단이 역시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와 베르나도트의 2개 군단이 바그람을 양쪽에서 집중 공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나폴레옹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무척 삐져있었습니다.  일단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프랑스 군단이 아닌 작센 군단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 화가 나 있었는데, 이번 공격 직전에 그나마 있던 3개 작센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주라는 명령을 받고 더욱 분개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의 2개 사단 중 제쥬비츠(Zezschwitz) 장군의 사단은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므로, 베르나도트는 막도날드와 함께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르코크(Lecoq) 장군의 1개 사단만이라도 동원해서 막도날드와 함께 동시에 공격을 시작해야만 했었는데, 베르나도트는 심통이 단단히 났는지 나폴레옹의 터무니 없이 조급한 명령 탓만 하며 제쥬비츠 사단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제쥬비츠 사단이 도착한 9시 경에야 베르나도트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바그람 마을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쳐들어간 바그람 마을은 연기와 어둠 속에서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였습니다.  그곳으로 쳐들어갔던 하르티쉬(Hartizsch) 장군은 그곳에 이미 뒤파 장군의 작센 사단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용감하게 뛰어든 것인데, 가보니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병사들이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독일어로 고함을 치며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르티쉬 장군의 작센군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총격전을 벌였고, 급기야 백병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서로가 같은 작센군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양측 병사들은 모두 맥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색 군복을 입은 오스트리아군이 이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으므로, 가뜩이나 사기가 좋지 않았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병사들은 우르르 무너져 보기 흉한 패주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궤멸 상태에 빠져, 마르히펠트 평원 언저리의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까지 후퇴했는데, 여기서도 재집결을 하지 않고 더 도망치는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군단을 다시 모으고 재편성하느라 베르나도트는 그날 밤 소집된 나폴레옹의 군단장 회의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가장 동쪽 끝에 있던 다부의 제3 군단이 사실상 이 공격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군단들이 3개 보병 사단 약 2~3만명 수준의 병력을 갖춘 것에 비해, 다부의 제3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4만2천의 병력을 갖춘, 그야말로 튼실한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의중대로라면 이런 병력을 갖춘 다부가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루스바흐 능선을 따라 돌돌 말아올리며 서쪽으로 진격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범생 다부조차도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늦게 받았는지 준비가 덜 된 상태라서 그랬는지, 베르나도트보다 더 늦게 밤 9시가 넘어서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다부는 모범생답게 구댕(Gudin)과 퓌토(Puthd) 사단의 정면 공격과 함께 측면에서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측면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무너뜨리도록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군의 투지와 방어태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탄 속에 휘하 사단들이 고지 위로 전진을 못하는 것을 보자, 다부는 '이건 이미 망한 전투'라고 결론을 내고 1시간 만인 밤 10시 경에 공격 명령을 취소시키고 병력을 후퇴시켰습니다.  


이렇게 7월 5일 밤, 나폴레옹의 호기로운 공격은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군은 근 6km가 넘는 전선에서 약 1만1천의 사상자를 내며 물러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패배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낮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그 징조가 보였지요.  노르드만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를 하루종일 그토록 괴롭히며 무려 50%의 사상자가 날 정도의 피해를 입혔는데도 노르드만 부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1805년 당시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마 몇 시간 못 버티고 무너져 부대 전체가 항복하거나 완전 궤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끝내 버티며 결국 절반이라도 살아서 오스트리아군 방어선에 합류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의 국방 개혁은 확실히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은 1805년 당시의 투지 없고 미숙한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의 수준은 과거보다 확실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 징집된 신병들이 잔뜩 섞인데다 작센 병사들과 이탈리아 병사들이 많이 포함된 군대는, 과거처럼 혁명 정신에 불타는 프랑스 고참 병사들로 구성된 과거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그다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 전투를 통해 루스바흐 고원 위에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 주력군 전체를 이끌고 결전을 벌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큰 그림, 즉 동쪽부터 서쪽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김밥말이하겠다는 작전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확신했습니다.  비록 오늘밤의 공격은 '불운'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날이 밝은 상태에서 제대로 공격한다면 성공하리라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의 상황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했습니다.  뜻 밖에도, 오히려 카알 대공이 밀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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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18 23:41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레옹 섬(L'ile de Napoleon)이라고 별명을 붙인 로바우 섬에서의 준비는 6월 말 다리가 준비되면서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회전 부교(pivoting bridge), 즉 작전이 시작되면 로바우 섬의 강변에 고정된 한쪽 끝을 축으로 회전하여 도나우 강 좌안에 붙게 되어 있던 다리는 나폴레옹의 공병단장 베르트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서, 약 800m에 달하는 긴 다리가 놀랍게도 하나의 통판(single span)으로 만들어진 걸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작센 왕에게 이 회전 부교가 엘베 강변의 작센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다리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다리'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끝났는데 시간을 더 끌 나폴레옹이 아니었지요.  그는 7월 5일을 도강 날짜로 잡고,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으로 향했고, 보급과 숙영 등의 문제로 인해 주변에 분산 배치했던 각 군단들에게도 이 날짜에 맞춰 로바우 섬 맞은 편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는 장면입니다.)



로바우 섬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도강을 하리라는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명약관화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로바우 섬이 꽤 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넓은 강변 중 어느 쪽을 통해 강을 건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실은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이 구축한 방어 진지도 로바우 섬의 북안 쪽에만 펼쳐진, 상당히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넓은 강변을 다 지킬 수 없었으니까요.  이때 즈음해서는 카알 대공은 마르히펠트에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미 루스바흐 고원 지대로 물러난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평원을 텅텅 비워두고 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봤는지, 클레나우(Johann von Klenau)의 제6 군단과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의 2개 부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조치는 그다지 좋은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들이닥칠 나폴레옹의 공세를 막거나 시간을 끌기에는 너무 작은 병력이었고, 나폴레옹군의 병력 이동을 감시 및 보고하기 위한 정찰 병력으로는 너무 많은 병력이었던 것입니다.  좀더 규모가 큰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아스페른-에슬링 지역에 전개했고, 더 작은 규모였던 전위대는 에슬링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의 예측으로는, 아무래도 나폴레옹이 지난번과 동일하게 로바우 섬의 북안을 통해 넘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의 예측을 정반대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7월 2일 르그랑(Legrand) 장군의 지휘 하에 소규모의 부대를 로바우 섬 바로 북쪽의 도나우 강 좌안에 상륙시켜 오스트리아군을 긴장시켰습니다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진지가 없던 로바우 섬 동쪽을 통해 도나우 강을 건널 생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7월 4일 밤 10시, 보트를 이용해 로바우 섬 동쪽을 마주한 도나우 강 좌안의 돌출부인 한젤-그룬트(Hansel-Grund)를 점령하고 준비한 부교 3개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북쪽으로도 마세나 휘하의 병력이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넌 뒤, 재빨리 5분만에 회전 부교를 놓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내려준 폭우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고, 한젤-그룬트를 점령했던 프랑스군은 새벽 2시 경 부교를 완성하고 제2, 제3 군단을 도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7월 5일 오후에 이 부교를 건넜던, 외젠의 이탈리아군 소속 프랑스군 포병 대위인 노엘(Jean-Nicolas-Auguste Noel)에 따르면 이 다리 위로 대포가 지나갈 때 그 무게에 짓눌려 다리의 판자가 무려 50cm나 가라앉았다고 하니, 여전히 부교는 불안했고 또 따라서 대군이 그 많은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강을 건너는데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추가적인 부교도 몇 개를 동시에 놓도록 하여, 7월 5일 아침 7시 경에는 이미 마세나(André Masséna)의 제4군단과 다부(Louis-Nicolas Davout)의 제3 군단은 이미 도강을 완료한 상태였고, 우디노(Nicolas-Charles Oudinot)의 제2 군단이 다리를 한창 건너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들의 도강을 밤 사이에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몰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기에 대해서 변명거리가 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으로도 귀로도 이 대부대의 이동을 포착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로바우 섬 일대에 설치된 프랑스군의 포대가 아스페른과 에슬링 방향으로 빗발 같은 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이 곧 로바우 섬 북쪽 강변으로 건너올 모양이라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이미 로바우 섬 동쪽으로 프랑스군이 개미떼처럼 넘어 온 상황이라는 것을 해가 뜨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우디노의 제2 군단이 강변에서 정비를 마칠 때 즈음에는 비가 그치고 상쾌한 태양이 떠올라 병사들의 군복을 말려주기 시작했고, 우디노는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로막고 선 오스트리아군은 재수없게 이 쪽을 맡고 있던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 뿐이었습니다.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던 노르드만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는데, 작센강(Sachsengang)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 마을에 배치해 두었던 수비대는 그냥 내버려 둔 채 후퇴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체시키는 임무를 준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도 그다지 오래 버티지는 못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그 바로 동쪽에 있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 마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직접 현장에 도착해 오스트리아군 2개 대대, 즉 1천이 넘는 병력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이 마을을 둘러 본 뒤, 로바우 섬에 설치된 22문의 대포와 14문의 박격포, 10문의 곡사포에게 이 마을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입니다.  이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약 1천발의 포탄과 폭발탄을 퍼붓자 이 마을은 화재에 휩싸였고, 이들은 400명의 포로를 내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난 1달간 로바우 섬을 중무장 요새로 변모시킨 보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클레나우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제6 군단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 수비대를 지원하려 했으나 마세나의 제4 군단 소속 기병대에게 저지당했고, 결국 그들도 미리 정해진 제2 수비선인 북서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오전 10시 경, 프랑스군은 상륙 지점과 그 인근 마을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도강 자체는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패인이었던 어설픈 도강을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끝낸 나폴레옹이 스스로 뿌듯해 하는 동안, 프랑스군에게 밀려 북쪽과 북서쪽으로 각각 후퇴하던 노르드만과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입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작센강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수비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고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보병이었던 이들은 프랑스군의 추격에서 충분히 빨리 후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와 이들을 위협했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병대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보병 방진을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 상태로 후퇴하자니 후퇴는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 프랑스군의 보병과 포병이 이들을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밀집 대형의 보병 방진 앞에 적 포병이 나타나면 그건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애초에 카알 대공이 마르히펠트 평원을 포기하고 루스바흐 고원에 방어선을 친 주된 이유가 프랑스군의 강력한 기병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5개 군단, 약 2만5천의 보병을 그 넓은 마르히펠트에 경계 병력으로 남겨둔 것은 결국 과히 좋은 판단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경계 병력을 둘 것이었다면 차라리 소수의 기병대만 배치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따라 잡은 프랑스 포병대에게,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는 정말 최상의 타겟이었습니다.  아군 기병대가 주변을 맴돌며 이들을 위협하여 한덩어리로 잘 뭉쳐주고 있었으며, 혹시 적 보병들이 포병들을 향해 돌격해 올 위협에 대해서는 바로 옆에는 아군 보병들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요.  이들은 신나게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속절없이 볼링 핀처럼 뭉텅이로 쓰러져야 했습니다.  오후 1시 경이 되자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이미 많은 보병들이 쓰러졌는데, 이젠 아예 적에게 퇴로까지 끊길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모습을 고원 지대의 방어선 뒤에 있던 카알 대공은 모두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루스바흐 고원의 저지선 밖으로 나가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는 일은 피하겠다고 작정했던 카알 대공조차도, 눈 앞에서 2만의 아군이 전멸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심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도 무척 존중했던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군이 강력한 보-기-포병의 조합을 완성한 모습을 보자, 그도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군은 좌익은 마세나의 제4 군단, 중앙은 우디노의 제2 군단, 우익은 다부의 제3 군단을 제 1진으로 하여 마르히펠트에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이어 제2진으로는 좌측에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중앙에 마르몽의 제11 군단과 근위대, 그리고 우측에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전개되었고요.   제1진의 군단들이 2만명 이상의 규모로 강력했던 것에 비해 제2진의 군단들은 1만명 정도로 상당히 약한 편이었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은 여기저기에 휘하 사단을 다 떼어주고 고작 1개 사단 9천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제2진까지도 노르드만의 전위대를 따라 잡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3시가 넘자,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이판사판의 정신으로 후퇴를 멈추고 프랑스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들을 도우러 프랑스 망명 귀족 출신인 두르발(Nicolas-François Roussel d'Hurbal)이 약 1천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뛰어 나왔으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기병대의 요격을 받고 혼전 끝에 결국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 끝에, 결국 원래 1만2천으로 시작했던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무려 절반인 6천의 전사, 부상, 포로를 내고서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의 방어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나우의 군단은 비교적 적은 피해만을 입고 카알 대공의 방어선 중 서쪽 측면인 바그람-게라스도르프(Wagram-Gerasdorf) 전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투의 시작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무척이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카알 대공의 원대한 계획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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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6.11 14:14

손자병법에 따르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었습니다.  이건 결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시기과 지형과 병력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은 서로 이 세가지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병력은 양측 모두 최선을 다해 끌어 모아서 얼추 쌍방이 비슷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시기와 지형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도권이 뚜렷했습니다.  시기는 카알 대공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반대로 지형은 카알 대공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투 시기를 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격은 나폴레옹이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공격을 나폴레옹이 한다고 해서 전투 시기를 꼭 나폴레옹이 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다른 곳, 그러니까 보헤미아나 헝가리로 또 후퇴한다면 전투 시기는 카알 대공이 원하는 시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입장에서 빨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으므로, 그렇게 카알 대공이 더 깊숙한 후방으로 후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도 더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전쟁에 승산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 그도 이기든 지든 빨리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더 유리하다고 보았거든요.


그에 비해 어디서 싸우느냐는 카알 대공의 결정 사항이었습니다.  쳐들어오는 나폴레옹을 어느 지점에서 막아서느냐의 문제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과연 카알 대공이 그 위치를 어디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훗날 사람들은 카알 대공이 멍청하게도 강변에서 도강을 막지 않았다고 떠들어댔지만 카알과 그의 참모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나름 신중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의 어느 곳에서 도강할 지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전체 병력을 강변 가까이에 바싹 붙여 놓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랬다가 나폴레옹이 엉뚱한 곳에서 도강한다면 제대로 대응을 못할 뿐더러, 강변 옆의 막사는 병사들의 건강에도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도나우 강변 뒤로 펼쳐진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여긴 강변에서 가까우니까 나폴레옹이 강변 어느 쪽에 상륙하든지 신속성과 공간적 유연성의 잇점을 모두 가지고 프랑스군을 요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도 여기서 싸워서 마침내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바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과 그의 참모들은 여기도 병력 전개의 적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싸워보니, 일단 마르히펠트는 평원답게 기병대가 활약하기에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지금도, 기병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크게 우위에 있는 병종이었습니다.  바로 4년 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완패한 오스트리아는 전쟁 배상금의 일부로 많은 수의 말을 빼앗겼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크게 강해졌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만큼 약해졌던 것입니다.  덕분에 지난 전투에서도,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 공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막혀 전과 확대를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마르히펠트 평원은 완전히 탁 트인 벌판은 아니었고, 여러 마을과 작은 숲, 그리고 시냇물이 얽혀 있는 곳이어서, 대규모의 보병대가 밀집 진형을 이루며 싸우기엔 다소 까다로운 곳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보병들은 부분적으로 산개하여 전투를 벌여야 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숙련된 프랑스 보병들의 장기였고, 경직된 밀집 전열에 대한 훈련만을 받아온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그런 산개 전투에서 무척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문에 에슬링에서 고작 1개 사단에 불과한 부데 사단이 에슬링의 커다란 곡물 창고를 근거지로 저항하자, 무려 3대1의 숫적 우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이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었지요.  


여기도 안된다 저기도 곤란하다... 그러면 결국 어디에서 싸워야 한단 말입니까 ?  거기에 대해 카알 대공의 참모인 빔펜(Maximilian von Wimpffen) 장군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과 비삼베르크(Bisamberg) 언덕을 추천했고, 긴 고민 끝에 카알 대공도 그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르히펠트를 위에서 틀어막는 두 고지대, 북서쪽의 비삼베르크와 북동쪽의 루스바흐입니다.)



카알 대공은 선택한 루스바흐 고원은 마르히펠트 평원의 북동쪽에, 그리고 비삼베르크는 북서쪽에 있었고, 마르히펠트 평원을 북쪽에서 감싸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지막한 높이에 불과하여, 루스바흐 고원은 고원이라는 명칭이 부끄럽게도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고작 10m 정도 더 높은 평원 지대로서, 마르히펠트와는 나름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경사면 경계선을 따라 고원과 같은 이름인 루스바흐 시냇물이 흘렀는데, 이 경사면 지대의 이름이 바그람(Wagram)이었고, 이 고원의 남쪽 경계면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이었습니다.  이 루스바흐 고원 지대에는 마르히펠트처럼 마을이 많았습니다.  도이치-바그람 남동쪽으로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이 있었고 고원의 동쪽 끝 부분에는 레오폴츠도르프(Leopoldsdorf)가 있었습니다.  이 루스바흐 고원 지대와 마르히펠트 평원과의 경사면을 따라서는 고원과 같은 이름인 루스바흐라는 이름의 시냇물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루스바흐의 고지대는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기점으로 해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비삼베르크 언덕과 연결되었는데, 그 연결 부위는 고지대가 아니라 평지였습니다.  


루스바흐 고원은 길쭉한 북서쪽의 비삼베르크 언덕과 함께 마르히펠트 평원 북쪽을 대략 반원형으로 감싸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고지대면을 점거한다면 남쪽에서 올라올 프랑스군을  크게 벌어진 집게 모양으로 양측에서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루스바흐 쪽을 공격한다면 비삼베르크 쪽의 오스트리아군에게 측면을 노출하게 되고, 비삼베르크를 쳐도 루스바흐 쪽에서 위협받게 되는 것이지요.  결정적으로, 평평한 도나우 강변에서, 비록 10m 높이지만 루스바흐나 비삼베르크의 높이는 결정적인 전술적 잇점을 주었습니다.  항공기가 없는 시대에 10m 높이를 점거한다는 것은 3가지 측면에서 크게 유리했습니다.  먼저, 인간은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인지라, 보병이든 기병이든 아래에서 위로 돌격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둘째, 고지에 위치한 보병이나 포병은 아래쪽에서 쏘아붙이는 사격과 포격으로부터 엄폐될 수 있었습니다.  세째, 아군은 아래 쪽의 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적의 관측으로부터는 완전히 은폐될 수 있었습니다.    


이 여러가지 잇점 중에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세번째 것이었습니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휘관이 적과 아군의 위치 및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필요한 곳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때도 나폴레옹은 전황 파악에 큰 애로 사항을 겪었습니다.  도나우 강변이 모두 평지이다 보니, 좀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아스페른의 교회 탑에서 그게 가능했는데, 그 지점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그럴 수도 없었지요.  결국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의 큰 나무가지에 줄사다리를 걸고 거기에 임시로 만든 그네 같은 것에 앉아서 전황을 파악하려고 애 썼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큰 나무가 필요한 지점마다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그 점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묵고 있던 쇤브룬(Schönbrunn) 궁전 정원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냅니다.  정원사가 높은 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때 사용하는 A자 모양의 사다리였지요.  실제로 나폴레옹이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에 사령부를 설치할 때, 그의 짐 중에는 정원사의 사다리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다리 높이는 기껏해야 2m 정도였고, 카알 대공 이하 전체 오스트리아군이 누릴 10m 높이가 주는 잇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지인 중에 하늘(시기)과 사람(병력)의 잇점은 나폴레옹이, 땅(지형)의 잇점은 카알 대공이 가진 상황에서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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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06 12:58

피아베 전투에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막도날드 장군의 실질적인 지휘 하에 신속하게 북상하여 오스트리아 침공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행선지는 빈,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의 다시 한번 도나우 도강을 계획하고 있던 로바우 섬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나름 많았습니다.  곳곳의 고개길과 도시들을 지키는 요새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이미 카알 대공과 요한 대공,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에 차출된 마당에 그런 요새들을 지키는 병력은 충분치 않았습니다.  가령 5월 17일 타르비스(Tarvis) 전투에서 말보르게토(Malborghetto) 요새는 방어하기 아주 좋은 고지에 위치한 튼튼한 요새였으나, 6천의 오스트리아군으로 2만의 이탈리아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5월 30일, 그라츠(Graz) 같은 도시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은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차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고 무저항으로 도시를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곳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쾌속 질주를 계속했습니다.  



(구글 맵에서 찾아본 피아베에서 타르비시오, 그라츠를 거쳐 노이슈타트까지 가는 길의 거리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행군 경로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마침내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와 합류한 것은 6월 4일, 빈 남쪽 50km 지점에 있는 노이슈타트(Neustadt)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라츠에서 노이슈타트까지 130km를 5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26km씩 행군한 셈이고, 이는 당시 그랑 다르메 본진의 수준에 비해서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장 빈과 로바우 섬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뒤를 쫓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곧장 카알 대공 쪽으로 가지 않고 옆 걸음질을 쳐 헝가리 쪽으로 빠졌거든요.  외젠은 강행군을 했던 자신의 군대를 노이슈타트에서 2일간 휴식 시킨 뒤, 다시 그 뒤를 계속 추격해야 했습니다.  외젠은 결국 6월 14일, 노이슈타트 동쪽 약 120km 떨어진 랍(Raab, 헝가리어로는 Győr)에서 요한 대공을 따라잡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둡니다.  패배한 요한 대공은 더 동쪽으로 후퇴한 뒤 도나우 강을 건너 카알 대공 쪽으로 향했고, 승리한 외젠도 다시 서북쪽, 즉 로바우 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외젠은 7월 5일 벌어지는 바그람 전투에 2만3천의 병력으로 참전할 수 있었으나, 요한은 고작 1만2천의 병력을 그것도 전투가 이미 끝난 뒤에나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젠이 곧장 로바우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군대는 여전히 랍 지역에서 요한 대공의 잔존 세력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랍 인근에 주둔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외젠과 막도날드가 나폴레옹의 소환 명령을 받은 것은 7월 1일이었고,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로바우 섬을 면한 도나우 강변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7월 4일 저녁 9시경이 되어서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이런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가장 큰 패착은 도나우 강을 건널 부교를 시간에 쫓겨 너무 부실하게 구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를 뽑자면 결국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 두 문제에 의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처럼 도강지점마다 다리를 한개씩 만들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끝난지 약 1주일 뒤인 6월 1일부터 시작된 이 다리 건설의 책임자는 지난 번에도 다리를 지었던 공병단 지휘관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장군이었습니다.  이는 나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데, 나폴레옹이 아스페른-에슬링 패전의 책임을 최소한 공병대 측에 떠넘기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을 패전이라고 적어도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난 번 다리가 끊어진 책임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요행을 바랐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란이 죽었을 때, 아마 모르긴 해도 베르트랑은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부교 건설의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요.  아마 스페인 세고비아(Segovia)에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 수도교보다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섬으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2개 지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롭그룬트(Lobgrund)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3개나 지었고, 롭그룬트에서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짧은 다리는 훨씬 더 많이 지었습니다.  지난번 끊어졌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아무래도 가장 긴 부분인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단순히 튼튼하게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지난번처럼 자연적으로 떠내려오거나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부목이나 보트 등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철저한 방비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이 부교들 상류 쪽에는 일련의 말뚝을 촘촘히 박아 넣어 일종의 부목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약 30척의 대형 보트에 소형 대포까지 장착하여 상류 쪽을 순찰했습니다.  무거운 보트를 떠내려 보내려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베르트랑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로바우에서 도나우 북안 쪽으로 이어지는 최종 다리 부분이었습니다.  로바우 섬까지는 이미 프랑스군이 확보한 지역이었으나, 도나우 북안은 오스트리아군 장악 지역이었으므로, 도강 순간에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신속하게 다리를 놓은 뒤 일제히 대군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도 지난 번 전투에서 한번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퇴로가 막히는 아찔한 상황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르트랑은 이 부분을 위해 미리 구축된 조립식 부교를 무려 4개나 준비했습니다.  그 4개의 다리 중 하나는 이음매 없이 전체가 단 하나의 통판으로 만들어진 다리로서, 결전의 날이 되면 로바우 섬 강안에 한쪽을 고정시킨 뒤, 강물에 이 다리를 띄워 보내 90도 회전시켜 도나우 북안에 철컥 이어지도록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강습용 다리였지요.  이런 준비는 6월 말일 경 완료되었고, 나폴레옹은 7월 2일자 대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자랑스럽게 '프랑스군에게 도나우 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병력 동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리 건설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취했습니다.  즉,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더라도 거의 돌다리 수준으로 튼튼한 다리를 만반의 준비를 갖춰 준비한 것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는 모든 위험 부담을 다 끌어 안았습니다.  병력 동원을 적게 했냐는 뜻이냐 하면 전혀 반대로서, 다른 전선이 지나치게 취약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이번 전투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는 서쪽, 즉 본국과의 통신로 확보를 위해 후방에 배치해놓았던 병력을 모조리 소환하여 집결시켰습니다.  가령 빈 서쪽,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는 교통의 요지로서 프랑스군이 본국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주요 후방 근거지였습니다.  여기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전에도 한번 카알 대공이 병력을 보내 공격한 바 있고, 또 아스페른-에슬링 이후에도 오스트리아군이 재공격을 고려한 바 있을 정도의 요충지였지요.  이렇게 중요한 이 곳은 베르나도트(Bernadotte)의 제9 군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제9 군단조차 불러 들였습니다.  라구사(Ragusa) 공작으로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몽(Marmont)에게도 1만의 병력을 끌고 올라오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 이야기는 이미 들으셨지요.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모든 조심성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린츠 같은 곳은 너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지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한창 반란이 진행 중이던 티롤의 진압을 위해 투입했던 단치히 공작 르페브르(Lefebvre)의 제7 군단, 사실상 거의 전원이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진 바이에른(Bayern) 군단을 린츠로 소환했습니다.  이 덕분에 티롤 반란의 수장 호퍼(Hoffer)와 티롤 반란군은 티롤의 수도 인스부르크(Innsbruck)를 재탈환하고 기세를 올렸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산골짝 촌놈들이 기세를 올리건 말건, 모든 상황은 바로 이 곳, 도나우 강 건너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서 결판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은 6월 중순 경까지 빈 주변에 무려 24만의 병력을 끌어모았습니다.  물론 이들을 모조리 공세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이중 로바우 섬으로부터 도나우 강을 건너 공세에 나설 병력은 14만 보병에 2만8천의 기병, 그리고 488문의 대포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평생 최대의 병력 규모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준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동안,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탄탄한 기지가 없어서 궁지에 몰린 바가 있었지요.  그 기억을 되살려, 나폴레옹은 대-오스트리아 전선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 전체를 철옹성으로 중무장시키기로 합니다.  6월 말경, 부교들이 준비 완료될 즈음해서는 로바우 섬에는 무려 14개소의 포대가 구축되었고 거기에는 도나우 강 북안으로 건너갈 488문의 대포 외에도 124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설치되었습니다.  여기 뿐만 아니라 도나우 강 내에 있는 이런저런 작은 섬들에도 적절한 위치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중무장을 통해 최악의 경우에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진입로이자 퇴각로가 될 로바우 섬 근처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한 것이지요.  이 조치가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나폴레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국 큰 역할을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런 대대적인 준비를 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바우 섬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 작업을 펼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왜 카알 대공이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의 이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나우 강 북안에서 로바우 섬 대부분의 위치가 포 사정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대포를 대규모로 끌고 나와 화끈한 대포알 세례를 퍼부었다면 로바우 섬을 한폭의 지옥도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그런 방해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병력을 도나우 강 북단에서 후방 멀찍이 후퇴시켰습니다.  로바우 섬에 면한 도나우 강 북단에도 일부 진지선을 구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로바우 섬의 북쪽 강안에만 그랬을 뿐이고, 넓은 로바우 섬을 면하고 있는 다른 측면 대부분은 아무 진지 구축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적을 공격할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때라는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바로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폴레옹을 그런 방법으로 패배시킨 바 있는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불가라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건 추정이 아니라 팩트인데, 카알 대공은 더 이상의 전투를 원치 않았고, 이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체면도 적절한 선에서 살려줘야 했고, 구태어 불필요한 도발을 걸어 확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황제 프란츠 1세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정의 대부분은 철없는 주전파였고, 카알 대공의 이런 계획은 쓸데없이 나폴레옹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또 카알 대공은 이번에도 나폴레옹이 반드시 로바우 섬 쪽에서 지난번처럼 도강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쪽 방면에서 허장성세를 일으켜 오스트리아군을 집중시킨 뒤 다른 지점에서 도하는 것에도 대비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강변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아 고착화된 진지에 대군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더 먼 후방에서 내선 기동의 우위를 유지하며 어느 쪽에서 도강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에 대부대를 유지하지 않으려 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병사들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강가는 필연적으로 습한 지역이었고, 모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는 전투에서 총이나 대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 병사들보다는 이질과 열병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카알 대공의 이런 배려는 꽤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로바우 섬의 진지 구축을 위한 병사들 외에는 대부분의 병력은 빈 인근 3일 행군 거리 내에 포진시켰을 뿐, 강변에 대군을 몇 주씩 주둔시키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카알 대공이 힘을 기울인 것은 병력 집결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된 지역인 보헤미아(체코) 지역을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owrat) 장군의 제3 군단을 소환하고, 제국 내 각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국민방위군(Landwehr, 일종의 예비군 내지는 민병대)까지 휘하로 소집했습니다.  이건 사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젖먹던 힘까지 짜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원래 30~50대의 중산층 시민들을 비상근 형태로 훈련시키고 조직시킨 뒤 어디까지나 거주 지역의 수비대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서, 이들에게 대포알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횡대-종대의 복잡한 대열 변경이나 하루 30km의 강행군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당시 카알 대공의 병력은 약 9만이었는데, 이중 2만 정도가 전사-부상-포로 및 행방불명으로 상실되었으므로 7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3군단 약 1만8천과 국민방위군 등을 끌어모아 약 13만7천, 414문의 대포를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이럴 때 두 동생이 거느린 5만의 병력이었습니다.  개전 초기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뜻하지 않게 완강히 저항하는 폴란드인들 때문에 별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폴란드에서 밀려나 오스트리아령 갈리시아(Galici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3만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마르히펠트에 나타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폴란드라는 벌집을 잘못 건드린 탓에, 바르샤바 공국의 포니아토프스키 왕자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오히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침범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별로 적극적인 공격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동맹국인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국경 인근에 대기 중이었으므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곳을 텅 비워두고 마르히펠트로 내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Inner army of Austria)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던 이 군대는 원래부터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피아베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군세가 더 축소되었고, 결정적으로 요한 대공이 뭔 생각에서였는지 이 군대를 구성하는 2개 군단 중 하나를 그 군단의 본거지인 류블랴나(오늘날의 슬로베니아)로 되돌려 보내는 바람에 2만 정도로 크게 축소된 상태로 헝가리로 되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저 먼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Dalmatia)의 마르몽에게도 '1만명이라도 좋으니 다 끌고 올라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온갖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고 있는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결코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이랍시고 군단 하나를 그쪽으로 떼놓고 온 것은 정말 아쉬운 행동이었습니다.  어차피 류블랴나를 위협할 프랑스군은 외젠의 이탈리아군과 마르몽의 달마시아군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폴레옹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요한 대공의 잔존 2만 병력이라도 무척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요한 대공은 결국 형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군이 바그람에서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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