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7.23 18:51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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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02 21:19

군인의 목표는 승리와 전진이며, 이는 이룩하기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바로 패배 수습과 질서있는 후퇴입니다.  나폴레옹도 '모든 문제는 승리하면 다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패배할 경우 없던 문제까지 수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5월 22일 11시, 부교가 수리 불가 상태까지 붕괴된 것이 확인되자, 나폴레옹은 공세에 나섰던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합니다.  그 명령에 의해 가장 곤란해진 것은 바로 란의 제2 군단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그들은 벌판으로 진격하지 않고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단 현 상황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란의 제2 군단은 중앙 전선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장 깊숙히 진격해 들어갔었지요.  이제 그들은 진격한 거리만큼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는데, 적에게 등을 보인 채로 허허벌판을 행군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뒤는 도나우강이 가로 막고 있었으므로, 이 후퇴 과정에서 대오가 무너지면 뒤를 쫓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글자 그대로 대학살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란에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은 그다지 거세지 않았습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카알 대공이 파악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린데다,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은 주로 포병에 의한 무자비한 포격에 의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에 거세게 시작되었던 란의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중앙부가 거의 붕괴된 상태였던지라,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의 후퇴를 깨닫고 추격을 할 때도 현장에 있던 호헨촐레른의 보병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의 친위 척탄병 부대를 불러와야 했으므로 추격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틈을 이용해 란의 제2 군단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일단 아침에 출발했던 밭두렁 뒤로 물러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후퇴 과정에서 말에서 내려 자신의 발로 보병들과 함께 걸으며, 호시탐탐 프랑스 보병 연대들의 붕괴를 꾀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했습니다.  란은 침착하게 웃으며 휘하 병사들에게, 9년전 마렝고 전투에서도 자신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해질녘 최후의 승자는 프랑스군이었다면서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중앙부와 에슬링을 방어해야 했던 란은 먼저 휘하 제2 군단의 대부분을 로바우 섬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부교 쪽으로 보낸 뒤, 지휘관을 잃은 생-일레르 사단 하나만 이끌고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를 연결하는 밭고랑을 끼고 방어선을 쳤습니다.  위태위태한 부교 하나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철수해야 하는 전체 프랑스군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아스페른과 에슬링으로 연결되는 전선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스페른은 마세나가 아침부터 틀어쥐고 있었고, 에슬링은 계속 부데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프랑스군을 도나우 강의 물결에 쳐박으려는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좌익인 아스페른의 마세나는 프랑스군 내 제2인자다운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역시 2대1의 수적 열세를 안고 싸웠는데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별로 밀리지 않은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열정과 투지가 보여준 결과였습니다.  그 전날의 일이긴 합니다만, 최근 징집된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유혈이 낭자한 살육전을 보고 겁에 질려 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벌컥 화를 내며 그 특유의 니스(Nice) 사투리로 '그럼 걔들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깃발을 보여줘라'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아군이 밀리는 현장에 귀신처럼 나타나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참된 현장 지휘관이란 어떤 것인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아스페른은 비록 조금씩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는 부분들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저녁 때까지도 프랑스군은 아스페른의 일부나마 끈질기게 붙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지휘를 받지 않고도 전쟁 자체를 지휘할 만한 역량이 있는 인물로서, 나폴레옹 휘하의 1.5인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왕국 소속이었던 니스의 어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상선의 심부름꾼으로서 남미까지 항해를 하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백일천하 때 그는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의 마세나의 모습입니다.)




에슬링에 대한 공격도 치열했습니다만, 거기를 지키는 부데 사단의 방언는 더욱 치열했습니다.  부데와 그의 병사들은 에슬링 마을의 서쪽 끝부분에 있던 거대한 곡물 창고를 주방어선으로 삼고 맹렬히 저항했습니다.  에슬링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로젠베르크가 이끌었는데, 그는 다스프레(Constantine D'Aspre) 장군의 헝가리 척탄병 4개 대대 (사실상 1개 사단)을 투입하여 5번이나 반복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기진맥진하고 수가 줄어든 부데 사단은 이를 5번 모두 격퇴해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헝가리 척탄병들이 공격 명령을 거부할 정도였지요.  결국 로젠베르크는 휘하 군단 전체를 동원해야 했는데, 이 공격에서도 에슬링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부데 사단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사단 하나가 군단 전체를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에슬링 마을 건물들은 하나 둘씩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넘어 갔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최후의 방어 거점이던 곡물 창고쪽으로 점점 밀리게 되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자 중앙부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의 맹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대포알을 신나게 날려보낸 뒤, 압도적인 수의 보병 대오를 파도처럼 흘려보냈습니다.  이를 맞이하는 란은 병력의 열세는 물론이고 탄약까지 충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작부터 열세였던 그의 포병대는 이미 포병들의 사망과 부상으로 와해된 상태였고, 어차피 탄약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밭두렁 뒤에서 침착하게 기다리다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뒤에 갑자기 일제 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했습니다.  그의 뒤 머지 않은 곳에는 나폴레옹 본인이 근위대 병력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란의 병사들은 나폴레옹 버프 효과를 보고 있었지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아마도 나폴레옹 근위대가 일렬로 늘어서서 지키고 있는 교두보 뒤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후퇴하고 있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페르낭 코르몽 Fernand Cormon이라는 화가가 그린 것인데, 이 분은 1845년 생으로서 이 그림은 실제 전투 이후 거의 70년이 지난 1878년에 그려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라는 인간은 자신이 패전한 전투에 대해 그림을 발주할 정도로 팩트를 존중하는 위인은 아니었지요.)




에슬링 마을이 거의 다 함락되고, 부데 사단의 잔여 병력이 마침내 곡물 창고 안에서 포위된 채로 농성 중인 상황이라는 보고가 들어오던 오후 3시 쯤, 엎친데 덮친 격의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과 로바우 섬을 연결해주던 짧은 부교까지도 무너졌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젠 마세나와 란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퇴로까지도 끊긴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침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별의별 경험을 다 겪어본 백전 노장이었으니까요.  그는 로바우 섬으로의 퇴로를 연결해줄 다리 수리는 부교병들에게 맡겼으므로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에슬링이었습니다.  지금 프랑스군이 버티고 있는 것은 부교의 교두보를 좌우에서 지켜주는 아스페른과 에슬링이라는 두 방어 거점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질 경우, 부교의 교두보 지점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자연스럽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에슬링이 무너진다면 부교가 돌다리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조르쥬 무통 장군입니다.  이 분은 그렇게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운 적은 없었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음 해인 1810년 이 양반을 로바우 백작(comte de Lobau)으로 봉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고, 백일천하 때도 나폴레옹 편에 섰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에슬링 구원에 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에슬링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그 쪽 방면의 병력이 질서있는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보통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두는 예비대인 친위대 중 5개 대대를 무통(Georges Mouton) 장군의 지휘 하에 에슬링으로 급파했습니다.  친위대 중 남은 것은 2개 대대 뿐이었으므로 이는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5개 대대라고 해봐야, 당시의 편제상으로 보면 1개 사단이 조금 넘는 병력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통 장군의 공격은 훨씬 수적으로 우세한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막혀 실패로 돌아갔고, 부데 사단은 곡물 창고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부데 사단의 구출은 고사하고, 이젠 무통 장군이 이끄는 친위대 대부분까지 로젠베르크와의 교전에 붙잡혀 철수가 어렵게 된 셈이었으니, 나폴레옹의 모험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습니다.





(루이-프랑수와 르죈 대령입니다.  르죈이라고 하면 '화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 맞습니다.  이 분은 화가이자 군인이었고, 나폴레옹의 후원한 많은 전쟁화 중 여러개가 이 양반 작품입니다.)





(르죈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라미드 전투입니다.  나중에 런던 피카딜리의 Egyptian Hall에서 이 작품을 포함한 그의 전쟁화 몇 편을 전시할 때 그림을 좀더 자세히 보고자하는 사람들이 하도 몰려들어 그림 보호를 위해 접근 제한 레일을 그림 앞에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남은 것은 정말 친위대 2개 대대 뿐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에슬링에 투입한다면 중앙부의 오스트리아군과 부교 사이에는 정말 탄약도 힘도 병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란의 생-일레르 사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겁에 질린 채 철수해온 란의 제2 군단 잔여 병력 중 아직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부 병력 뿐이지요.  나폴레옹은 란에게 르죈(Louis-François Lejeune) 대령을 보내 병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르죈이 란을 찾아냈을 때, 란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아직도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밭고랑 뒤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약 500명 가량의 병사들 뿐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말을 전하는 르죈에게 란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내게 남은 병력은 자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네.  그리고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최후의 1인이 쓰러질 때까지니까, 가서 황제께 그렇게 전하게."


르죈의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란을 믿었나 봅니다.  그는 참모들 중 랍(Jean Rapp) 장군에게 남은 2개 대대의 친위대를 맡기며 에슬링에 가서 거기 묶인 부데 사단과 무통 장군의 친위대를 빼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남은 패잔병들과 함께 그야말로 도나우 강변 좁은 돌출부에 옹기종기 몰린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합니다만, 전투가 종료된 이후 카알 대공은 프란츠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생애 처음으로 전투에서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발버둥쳤다'라고 썼는데, 최소한 이때의 상황에서는 카알 대공의 과장된 보고도 그렇게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s://en.wikipedia.org/wiki/Louis-Fran%C3%A7ois_Leje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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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12 21:34

5월 21일 오전,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2개 마을에 포진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8만4천의 보병과 1만4천이 넘는 기병, 그리고 무려 292문의 대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고작 2만2천의 보병과  3천이 채 안되는 기병, 그리고 고작 52문의 대포를 도나우 강 좌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오스트리아군은 그러나 다소 어정쩡한 진형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즉, 힐러(Hiller)와 벨가르드(Bellegarde), 그리고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이 각각 이끄는 3개 군단이 북쪽으로부터 아스페른을 향했고, 에슬링으로는 데도비히(Dedovich)가 대리 지휘하는 로젠베르크(Rosenberg)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본인은 본인의 군단 중 일부 사단을 이끌고 에슬링 동쪽에 있는 좀더 큰 마을인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는 아예 프랑스군이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병력을 분산시켜 공격해들어간 이유는 카알 대공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부교가 끊어져 프랑스군 대부분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몰랐던 그는 여전히 프랑스군의 본진은 아스페른에서 북진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주된 공세를 3개의 강력한 군단으로 틀어막고, 그 사이 로젠베르크의 군단을 프랑스군의 옆구리인 에슬링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 꽂아넣어 그 부교를 노리겠다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습니다.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사실상 마세나의 제4 군단 하나에,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예비 기병대 뿐이었습니다.  란 본인은 에슬링에 있었으나, 그의 제2 군단은 아직 로바우 섬에 있었으므로 란은 원래 마세나 휘하였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빌려서 에슬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군단 대부분은 아스페른 마을 남쪽에 위치했고,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 1개만 마을 안에 쏙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을이 너무 작았던 것입니다.  몰리토르의 병사들은 마을 건물들과 돌담 뒤에 재주껏 숨어 적의 내습을 기다렸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상태도 비슷했고, 이 두 마을 사이는 사실상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지킬 병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유일한 생명선인 부교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부교 자체는 신참 근위대(Jeune Garde)가 지키도록 하고,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이 두 마을 사이의 평원에 배치했습니다.  여기서 작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란 휘하에는 부데 장군의 1개 사단 밖에 없었는데, 이건 군단장인 란에게는 너무 적은 병력을 준 셈이었습니다.  괜히 부데 사단에 지휘관이 2명 있게 되는 셈이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평원을 방어하는 베시에르의 기병대를 란 밑에 배속시켜 버렸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 란이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을 뻔히 봤으면서도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나폴레옹이 란과 베시에르의 성숙함을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나폴레옹은 역시 란의 편을 들어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건 결국 또 하나의 작은 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정말 느렸습니다.   오전부터 시작한 공격이 아스페른 마을에 당도한 것이 거의 3시가 다 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마을 안에서 강력하게 저항한 몰리토르의 사단에 의해 금방 격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도 자신들의 진격에 맞서 뛰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조심스럽게 전진을 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주공을 맡은 3개 군단이 마을 북쪽에 완전히 포진을 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되어서였습니다.  아스페른 서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마세나의 군단은 용감하게 맞섰고, 오스트리아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마을 안쪽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의 전투는 농가들 사이에서의 밀고 밀리는 혈투가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 되었습니다.  마세나는 그 사이에 증원된 생-시르(Carra Saint-Cyr) 장군의 사단의 도움을 받아 집요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적의 우세가 막강했으므로, 마을의 절반 정도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밤이 되어 전투가 일단락 될 때는 마을의 북쪽 절반은 오스트리아군이, 남쪽 절반은 프랑스군이 점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첫날은 기본적으로 치열한 시가전이었습니다.  그림은 아스페른이 아니라 에슬링에서의 시가전의 모습입니다.)





(1809년 5월 21일, 드디어 격돌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첫날의 상황입니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중앙부의 베시에르도 상황에 비해서는 무척 분전했습니다.  오후 3시반 경 적의 기병대가 몰려오자 몇차례 돌격을 감행하며 꽤 잘 싸웠고, 덕분에 중앙부가 적의 기병대에 의해 돌파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에슬링을 노리는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느릿느릿 나타나자 비로소 베시에르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도랑 뒤편으로 물러났습니다.


에슬링에서의 형편이 어떻게 보면 가장 좋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면 로젠베르크 1개 군단이 2개 대오로 나뉘어 오는 것이었습니다만) 2개 군단급의 오스트리아군을 고작 1개 보병 사단만으로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1대3의 열세였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은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 미숙했습니다.  오후 느직히 에슬링 앞에 나타난 데도비히의 병력만으로도 란의 1개 사단 정도는 가뿐히 제압이 가능했지만, 데도비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스-엔저스도르프를 거쳐 올 예정이었던 로젠베르크의 부대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로젠베르크는 아무 적군도 없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서 꾸물거리다 저녁 6시 30분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이렇게 두 부대가 모였음에도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에슬링 안에 포진한 프랑스군의 병력수를 잘 모르다보니 좋은 말로 조심스러웠고, 막말로 겁이 났던 것이지요.  이들의 공격은 7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는데, 그나마 따로따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데도비히의 공격은 7시에, 로젠베르크의 공격은 8시에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공격을 시작한 이유도 한심했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전황을 파악한 카알 대공이 '뭘 기다리는 것인가 ?  당장 공격 !'이라는 명령을 전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어설픈 공격이라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호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두꺼운 석벽을 가진 곡물 창고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의 돌담 뒤에 숨어 에슬링 전체를 요새화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적의 압도적인 포격에 무척이나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은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를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중앙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에슬링의 거대한 곡물 창고로 돌격하는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의 모습입니다.)



카알 대공은 오후 늦게서야 비로소 프랑스군이 기어나올 생각이 전혀 없고, 정말 아스페른과 에슬링을 사수하며 버틸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카알 대공도 나름 명장이었으므로, 그렇게 프랑스군이 수비에 치중한다면 좁은 아스페른 정면에 3개 군단이나 집중시켜봐야 효율적인 부대 운용이 안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병을 상대적으로 텅빈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부로 진격시켰습니다.  그 곳은 에슬링에서 고군분투 중인 란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그에게는 따로 병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있긴 있었는데, 그게 베시에르의 기병대였습니다.  란은 오후 한때 잠깐 싸우는 척 하더니 도랑 뒤에 숨어 있는 베시에르에 대한 증오심이 새삼 솟아 올랐나 봅니다.  그는 부관을 베시에르에게 보내면서 "지금 당장 돌격할 것, 그리고 제대로 할 것"이라고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비록 욕설은 섞여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장교 집단이란 신사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급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때도 예의를 갖추어 권고형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독이 일개 중위 하나를 당장 오라고 소환할 때도 연락 장교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The admiral's compliments, sir, and he'd like Mr Hornblower's presence on board the flagship as soon as is convenient."

(제독님께서 안부와 함께 여쭙습니다만, 혼블로워 중위께서 시간이 나시는 대로 기함에 와주셨으면 하십니다.)  


그런데 일개 대위 나부랭이가, 아무리 더 높은 란 원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베시에르 원수에게 '지금 당장, 그것도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전갈을 가지고 간 것은 루이 드 비리(Louis de Viry) 대위였는데, 당연히 무척 순화된 버전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돌아온 드 비리 대위에게 란은 그가 전달한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읊게 했고, 그 내용이 무척 순화되어 전달된 것을 안 란은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는 다시 샤를 라베도예르(Charles LaBedoyere) 대위를 보냈으나, 이 대위도 베시에르 앞에서는 겁을 먹고 드 비리 대위와 비슷한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부하들에게 화가 난 란은, 때마침 도착한 마르보(Marbot) 대위에게 '오쥬로 원수께서 자넨 믿어도 된다고 했네, 그러니 그 말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보게'라는 말과 함께 다시 또박또박 명령을 불러주며 반드시 그 말 그대로 전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르보는 정말로 '지금 당장,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고 베시에르에게 전달했고, 베시에르에게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대위 나부랭이를 봤나'라며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란에 대한 베시에르의 분노는 나름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돌격으로 승화시킨 그는 즉각 도랑을 넘어 중앙부로 몰려오는 적을 향해 돌격하여, 적의 포병대를 제압하고 밀집 대오를 구성한 보병대를 한바퀴 돈 뒤 복귀했습니다.  비록 적 보병대를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기병만으로 적 밀집 보병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의 용감무쌍한 돌격만으로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 공격은 돈좌된 셈이었으므로 상당한 공을 세운 셈이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일대의 전투는 밤 11시까지 진행되다, 양군 모두 병사들이 지치는 바람에 정식 휴전없이 소강상태로 빠져 들게 됩니다.  에슬링에서는 란의 분전, 그리고 베시에르의 분노의 돌격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이 발을 못 붙였으나,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이 시가지 내에서 혈투를 벌이던 아스페른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새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지쳐 쓰러졌지만 지휘관들은 또 다시 모여야 했습니다.  마세나의 사령부로 모인 베시에르와 란은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또 으르렁거렸습니다.  이 둘은 서로 모욕을 퍼붓다 결국 검을 뽑아들었는데,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더 상관이었던 마세나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결투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로바우 섬에서 부교의 수리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이 날의 전황 보고를 받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1대3 이상의 우세를 가지고도 프랑스군을 축출하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은 서툴고 느린 예전 그 모습 그대로임이 틀림없었고, 자신의 공세를 막고 있던 후방의 부교가 마침내 수리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다부의 군단에게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집결하여 도강 준비를 하라고 명령서를 날리고, 란의 제2 군단을 밤새 도나우 강 좌안으로 계속 이동시켰습니다.  그는 란의 제2 군단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취약한 적의 중앙부를 돌파한 뒤 아스페른 쪽으로 선회하여 적의 주력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달콤한 꿈에 젖어 제2 군단 병사들을 밤새도록 도강시키던 5월 22일 새벽, 병사들이 밟고 건너던 그 부교 및의 도나우 강의 물결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Lieutenant Hornblower by C. S. For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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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05 18:45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도나우 강 좌안에 발을 내딛은 5월 20일 밤,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저항이 있을까 두려워하던 프랑스 지휘관들은 의외로 조용한 주변의 동정에 다소 놀랐고, 일단 안심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기병대를 이끌고 주변을 한바퀴 돌았던 베시에르는 주변에 적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란은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아마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후위대로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밤중에 아스페른 교회 종탑까지 직접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적의 존재는 감지할 수가 없었던 마세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머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위급 지휘관 3명의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므로, 이들은 21일 새벽 2시 일단 로바우 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모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긴 당장 몇 시간 후면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여야 할 수도 있는데, 그 새벽 늦게까지 잠도 못 잤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 했으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란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입니다.  그는 당시 이미 구식 패션으로 치부되던 '흰 가루를 뿌린 긴 장발'을 고집할 정도로 귀족적인 외모를 고집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는 평민 출신에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고, 비록 란처럼 가스코뉴까지는 아니어도 그 근처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덕분에 처음에는 란과 꽤 친한 사이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장이었던 콩스탕(Constant)에 따르면, 이때 작은 난동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앞에서 이 세 원수들이 서로 자기 짐작이 옳을 것이라고 티격태격했는데, 결론이 날 수 없는 이 입씨름에 짜증이 났던 란은 나폴레옹과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마세나와 베시에르를 버려두고 나폴레옹 쪽으로 성큼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때 베시에르가 거의 반사적으로 란과 나폴레옹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황제 폐하께 불손하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나폴레옹은 외모와 옷차림도 근사하고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던 아부꾼 베시에르를 가까이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1807년 러시아 짜르와 만나던 틸지트(Tilsit) 회담 때도 란 대신 베시에르를 데려갈 정도였지요.  란이나 베시에르나 둘다 자신이 나폴레옹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충돌은 시간의 문제였을 뿐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이야기하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다니 !  이걸 참고 넘길 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뜸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꺼져 ! 폐하께서는 너 따위의 호위는 필요 없으시다 !  아주 희한하네 ?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니 말이야 !"


군인에게 있어 최대의 모욕은 싸움을 회피하는 겁장이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나폴레옹 면전에서 그런 비난을 당하다니 !  베시에르는 란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나폴레옹 앞에서 란과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재빨리 나폴레옹이 끼어들어 직접 란의 손목을 꽉 잡으며 말렸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이게 무슨 짓인가, 란 원수"라고 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영리한 그는 "진정하게, 장"이라며 부드럽게 말렸기에 란도 베시에르를 내팽개치고 일단 싸움을 그쳤습니다.  물론 베시에르는 혼자 밤새도록 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분을 삭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란과 베시에르의 마지막 충돌은 아니었습니다.




(5월 21일 아침의 상황입니다.  당시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좌안으로 이어진 부교는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에 딱 1개 있었습니다.)




그 소동이 있은 뒤에도 마세나가 밤새도록 병력을 이동시켰지만, 몇 시간 뒤인 21일 새벽에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온 프랑스군은 마세나의 제4 군단 뿐이었습니다.  워낙 병력이 적었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은 부교 좌우 쪽으로 1.6km 정도씩 떨어진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 두 마을을 점거하고 더 많은 병력이 넘어올 때까지 버티기로 합니다.  아스페른과 에슬링은 둘다 농가 백여채 정도가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어서, 사실 대단한 방어거점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방어 거점으로 쓸만 한 것은 아스페른에 있던 교회와 그에 딸린 돌담으로 둘러싸인 묘지, 그리고 에슬링에 있던 돌로 지은 큼직한 곡물 창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을 모루로 삼고 에슬링으로부터 공격의 쐐기를 박아넣을 생각이었으므로, 마세나로 하여금 부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지키도록 하고 란은 에슬링에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그나마 아직 란의 제2 군단은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 있었으므로, 일단 마세나 휘하에 있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란에게 빌려주고, 그 병력만으로 에슬링을 지키게 했습니다.  





(Jean Boudet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동갑으로서, 혁명 발발 이전에 어린 나이에 소위부터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그는 방데 지방에서의 반란 진압 뿐만 아니라, 황열병으로 인해 모두가 꺼리는 카리브해 식민섬에서의 작전 등 험하고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임무를 잘 수행해낸 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렝고 전투가 있던 1800년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나폴레옹 바로 밑에서 싸웠는데, 그의 가장 빛나는 전공은 바로 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그도 냉정한 나폴레옹 밑에서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과의 전설에 남을 대회전을 꿈꾸며 마르쉐펠트(Marchfeld) 평원으로 전군을 이끌고 나왔던 카알 대공을 기다리던 것은 그저 텅 빈 평원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금쯤은 다 건너와 결전 준비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던 카알 대공은 당황했습니다.  척후들로부터 '병력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프랑스군은 아스페른과 에슬링 두 마을을 점거한 채 웅크리고 있다' 라는 보고를 받은 카알 대공은 혀를 찼습니다.  그렇게 마을 건물 등 복잡한 방어물을 끼고 싸우는 것은, 대부분이 신규로 편성된 연대로 구성되어있다 보니 투지와 용기만 있을 뿐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전술적 융통성이 풍부했던 프랑스군이 선호하는 형태의 전투였지요.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에게 마음껏 도강하시라고 강변을 활짝 열어줬던 것도 오스트리아군이 선호하는, 탁 트인 평원에서 잔재주없이 남자다운 전투를 하고자 함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진을 보니 괜히 강변만 열어줬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작한 공격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좀더 많은 병력이 포진한 것으로 보이는 아스페른 쪽으로 3개 군단을, 에슬링에는 2개 군단을 보내 공격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포성이 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란은 적 2개 군단을 고작 빌려온 1개 사단으로 막아내야 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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