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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 침묵 이야기 (1) - 항모에서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흔히 현대적인 미해군 항모전단 하나는 어지간한 국가의 공군력 전체와 상대해도 완승을 거둔다고들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소리일 뿐이고, 실제로 항모가 적 공군기지 근처에 접근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  짧은 비행갑판에서 이착함해야 하는 제약조건이 주어진 함재기는, 그런 조건 없이 연료와 폭장량을 한도까지 마음껏 실을 수 있는 지상발진 전폭기에 비하면 아무래도 성능과 작전 반경에서 불리하기 때문.   게다가 지상 공군기지에 폭탄 몇 방 명중했다고 그 공군기지 전체가 사용불능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좁은 공간에 항공유 탱크와 탄약고, 복잡하고도 예민한 각종 전자장비 등을 구겨 넣은 항모에는 폭탄이 한두 방만 명중해도 작전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음.  항모의 유용함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항공전력을 .. 2024. 7. 25.
덴너비츠 전투 (3) - 남자가 한을 품으면 잔나(Zahna)를 지나 위터보그(Jüterbog)로 가는 길은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의 국경 지대였는데, 이 일대는 그야말로 평야 지대로서 간간히 나타나는 낮은 언덕, 시냇물과 습지 외에는 거의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원래 군대가 행군할 때는 소규모 정찰대를 앞세워 지형과 함께 적의 출현을 경계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찰대로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 바로 기병대였습니다.  그런데 위터보그를 향해 진격하던 네의 베를린 방면군은 희한하게도 그런 정찰기병대를 두지 않고 행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코삭 기병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규모 기병대를 앞세웠다가 혹시라도 코삭들과 마주치.. 2024. 7. 22.
밀리터리 잡담 - 이란을 폭격한 이스라엘 조종사의 운명 무장을 탑재한 F-35의 내부 연료탱크만을 이용한 전투반경은 약 1200km.  이스라엘과 이스파한 사이의 거리는 약 1500km.  약 300km 모자라기는 하지만 JASSM 같은 장거리 미쓸을 이용하면 충분히 타격은 가능.  이스라엘이 JASSM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뭐 상대는 이스라엘과 미국이니.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미 1981년 6월에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의 핵시설을 폭격한 사례가 있음.  소위 Operation Opera.  스텔스도 아닌 F-16A 8대에 비유도 폭탄과 외부 연료탱크를 잔뜩 달고, 엄호용 F-15A 6대를 대동하여 수행한 작전.  공중 재급유 없이 요르단과 사우디 국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어 갔고, 이라크 영공에 들어가서는 30m 초저고도로 침투.  투하된.. 2024. 7. 18.
덴너비츠 전투 (2) - 인사가 만사 네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확인한 베를린 방면군의 병력과 장비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로스베어런에서의 패배는 우디노가 지나치게 각 군단을 분산시킨 채 전진하는 바람에 병력 집결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겪은 것이었고, 베를린 방면군의 사상자 숫자도 3천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후퇴하는 우디노에 대한 추격이 거의 없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원래 프로이센군의 뷜로는 가열찬 추격전을 벌이려 했으나 소심했던 총사령관 베르나도트가 추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를린 방면군은 병력도 6~7만으로 크게 줄지 않았고 포병대도 고작 14문의 야포만 상실하여 아직 190문 이상의 야포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다만 병사들, 특히 작센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 2024. 7. 15.
밀리터리 잡담 - 항복, grappa, 잠수함과 기계학습 '남자들의 시대'인 16~19세기에 있어 육군이든 해군이든 열심히 싸우다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결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음.  그 어떤 경우에도 '침몰하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라는 너무나 비상식적인 개념은 없었음.   그렇게 항복을 하자면 상호 인식되는 항복 신호가 분명해야 했음.  흔히 백기를 항복 신호로 인식하는데, 해전의 경우 백기를 올리는 것 외에도, 돛대에 올린 깃발을 내리는 (strike colors) 것을 항복 신호로 받아들임.   그런데 대포알을 쏘아대다 보면 돛대가 부러지는 일도 종종 발생.  그럴 때 깃발도 당연히 함께 내려감.  이러면 저게 항복 신호인지 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간단함.  보트를 내려서 상대 군함으로 저어간 뒤, 말로 물어 봄.  "선생님, 지금 .. 2024. 7. 11.
덴너비츠 전투 (1) - 러시아 땅의 마지막 프랑스인 결국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만약 막도날이 바우첸까지도 블뤼허에게 내준다면, 자신이 북쪽 베를린 원정을 간 사이 드레스덴까지도 블뤼허의 위협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작전은 도시와 요새에 연연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적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은 이야기가 좀 달랐습니다.  이 곳은 연합군의 3개 방면군과 대치하는 중심 거점이자 보급창 역할을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당장 주전장이 된 주요 동맹국 작센의 수도였습니다.  여기를 잃으면 통신선과 보급선이 모두 끊어질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 축적된 많은 군수 물자와 함께 동맹국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9월 2일, 나폴레옹은 자신 대신 그랑 다르메의 2인자.. 2024. 7. 8.
밀리터리 잡담 - 왜 인적 없는 계곡이 핵공격 대상일까? 경항모의 미래는 유인 함재기가 아닌 UAV (unmanned aerial vehicle) 경항모인 것처럼, 잠수함의 미래도 수중 드론인 UUV (Unmanned underwater vehicle). 그런데 UUV는 UAV에 비해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바로 통신 및 제어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부분.  진짜 자율 항행 및 자율 공격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 어느 지역의 적함을 공격하라 아니다 하지 마라 정도의 명령은 전달해야 할 거 아닌가?  전파도 안 통하는 짠물 속의 UUV에게 어떻게 명령을 전달하나? 극저주파(Extremely Low Frequency)를 사용하면 수심 아래 수십 m까지도 전파가 뚫고 들어감.  실제로 핵잠 강국들은 모두 이런 ELF 통신을 통해 유사시 아군 핵잠에게 송신을 함.   대신.. 2024. 7. 4.
나폴레옹의 고민 - 동쪽 남쪽 북쪽 중 어디로? 나폴레옹이 후퇴하는 보헤미아 방면군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드레스덴으로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쿨름 전투의 참극이 벌어졌다고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기병대도 부족한데다, 그로스비어런에서 우디노의 베를린 방면군이 패배한 상황에서 별다른 준비도 없이 다짜고짜 보헤미아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8월 28일 나폴레옹이 드레스덴으로 돌아간 것은 전해지는 것처럼 그의 건강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 앞으로 어디를 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은 계속 병상에 드러누워있던 것은 아니었고, 이틀만에 'Note sur la situation générale de mes affaires'(내 문제들에 대한 전.. 2024. 7. 1.
남태평양의 밤 하늘 - 과달카날에서의 야간 요격 과달카날 전투는 결국 헨더슨 항공기지를 차지하기 위해 미일 양군의 수많은 생명들이 덧없이 스러진 일련의 육-해-공 전투.  그만큼 헨더슨 기지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했다는 것인데, 일본해군의 제해권 장악이 여의치 않자 자연스럽게 일본육군의 지상전도 보급 및 병력 충원 문제로 패배로 끝났음.  하지만 일본군은 라바울에 이미 강력한 항공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원거리에서 끊임없이 헨더슨 기지에 대한 폭격이 가능.  하지만 그마저도 헨더슨 기지의 레이더 지원을 받은 미해병대 전투기들의 분전으로 1942년 말까지 일본기 570대가 격추되며 결국 좌절. 하지만 일본군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포기를 모르고 질척거린다는 점.  주간 폭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자, 1942년 11월부터 일본군은 별 효과도 없는 야간 폭.. 2024. 6. 27.
쿨름 전투 에필로그 - 다시 트라헨베르크 흔히 쿨름 전투에 대해, 방담이 무분별하게 연합군의 퇴각을 추격하다 벌어진 패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당시 드레스덴에 있었던 근위포병대의 노엘(Jean-Nicolas-Auguste Noël) 대령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군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방담 장군에게만 물어야 할까?  사람들은 원래 그가 산 속에 남아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저지해야 했는데, 워낙 성격이 과감했던 방담이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산 밑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이런 패전을 겪었다고들 했다.  또는 그게 아니라, 방담이 토플리츠(Toplitz)까지 추격전을 벌였던 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부합하는 것이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비난을 건성으로 추격에 나섰던 구비옹 생시르(.. 2024. 6. 24.
미해병대의 레이더 이야기 (2) -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더 1942년 8월 20일, 드디어 과달카날 섬의 Henderson 활주로가 준비되고, 곧 항모로 실어온 미해병대의 와일드캣과 돈틀리스 폭격기 등이 여기에 착륙.  흔히 항공기지가 있는 섬을 '불침항모'라고 부르는데, 섬이 침몰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항모보다 몹시 취약한 부분이 있었음.  항모라면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계속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면 되지만, 지상에 만든 활주로는 어디로 숨지도 도망가지도 못함.  헨더슨 기지도 일본군의 강력한 항공기지가 있는 라바울 바로 인근에 만든 활주로이다보니, 언제 공습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음.   이렇게 전진배치된 항공기지를 지키는 것은 대공포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역시 그 기지에서 출격하는 전투기.  문제는 항모에서 하듯이 하루종일 상공에서 CAP .. 2024. 6. 20.
쿨름 전투 (7) - 방담과 짜르 쿨름 전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담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방담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최후까지 전방의 러시아군을 막아내던 포병대를 지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들을 지휘하느라 결국 프로이센군을 뚫고 포위망을 빠져나간 1만여 명의 무리 속에는 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프랑스측의 기록에 따르면 짜르 앞에 끌려간 그는 알렉산드르로부터 약탈을 일삼는 불한당이라는 꾸짖음을 듣자, '난 최소한 지 애비를 죽인 자식이라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라고 말대꾸를 했다고 합니다.(쿨름 전투에서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잡히는 방담의 모습입니다.) 이건 거친 성격 탓에 술트와 제롬 보나파르트 등 자신의 상관들과 끊임없이 알력을 빚던 방담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그.. 2024.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