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ica의 뜻은 ?



무협지나 소년 만화를 보면 열혈남아에게는 반드시 꽃미녀가 1명 이상 따라 붙게 되어 있고, 주인공 열혈남아는 아무리 주변의 유혹이 강해도 그 뜨거운 심장을 청순가련한 그녀에게만 바치지요.  실제로도 그럴까요 ?  역사상 실존하는 열혈남아 중 2번째라면 서러워할 프랑스군 원수이자 나폴레옹의 개인적 친구인 장 란(Jean Lannes)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시지요.


1793년 12월 25일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 인근 빌롱그(Villelongue)를 탈환한 공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소령으로 승진한 란은, 군의관으로 명령으로 후방인 항구 도시 페르피냥(Perpignan)으로 휴양을 떠나게 됩니다.  이 곳에서 란은 꽤 번듯한 집을 가지고 있던 메릭(Meric)이라는 은행가의 집에 숙사 배정(billeting)을 받았습니다.  메릭가의 가장인 은행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고, 이 집에는 남은 것이라고는 자존심 밖에 없던 미망인과 그 자식들 밖에 없었습니다.  





(페르피냥 시내의 모습입니다.)




그 집의 마님이신 메릭 부인의 눈에는 지저분한 군복 차림에 말투와 행동도 거칠었던 란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촌뜨기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혁명이 일어난지 불과 4~5년 밖에 경과되지 않았던 관계로, 농부나 날품팔이 등이 자기들끼리 위원이니 장군이니 하며 서로 추켜 세우는 모습들이 전통적인 귀족들과 부르조아의 눈에는 우습게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딸인 무척 활발하고 예쁜 19살짜리 아가씨 하나의 눈에는 어느 날 붕대를 감고 찾아온 이 우락부락하고 거친 상남자가 이야기 속의 기사나 용사 같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장 란은 꽃미남과는 거리가 먼, 작은 눈을 가진 평범한 얼굴의 사내였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24세의 약관의 나이에 스스로의 용기만으로 소령 계급까지 벼락 출세한 청년이었고, 나름 매력적인 사내였습니다.  이 아가씨의 정식 이름은 Jeanne-Josephine-Barbe, 보통 폴레트(Polette)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란도 이 폴레트라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최소한 란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작 란 본인이 정말 폴레트를 열렬히 사랑했는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당시 분위기 상, 열혈남아라면 귀여운 아가씨를 애인으로 두고 있어야 폼이 났는데, 20세 초반이라 다소 철이 좀 덜 들었던 청년이었던 란도 벼락 출세한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장식품을 달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이 아가씨에게 열심히 구애를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심이 드는 이유는 뭔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폴레트에게는 란이 매력적인 '나쁜 남자'로 보였을지 몰라도, 메릭 부인의 눈에는 무식한 상 퀼로트(sans-culotte)일 뿐이었습니다.  란은 자신이 결코 농부 출신이 아니며 (이건 사실입니다. 란은 결국 염색공 일을 배우다 때려치우고 군에 입대했으니까요) 나름 괜찮은 집안 출신이라고 자신의 배경에 MSG를 좀 지나치게 많이 쳐서 떠벌였습니다.  자신의 무공을 잔뜩 과장해서 늘어놓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요.  


거짓말과 과장 어느 중간에 위치한 이런 떠벌임은 아가씨를 꼬시려는 젊은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상이 많이 나아서 현역으로 복귀하고 나서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거의 1년 정도 폴레트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  어쩌면 자신의 엉터리 맞춤법과 삐뚤삐뚤한 글씨가 창피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요.  1794년 12월이 되어 피레네 전선이 프랑스군의 완승으로 마무리되면서 할 일이 없어지자, 란은 뻔뻔스럽게도 마치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오듯 다시 폴레트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말끔한 군복을 입고 오기는 했습니다만, 여전히 메릭 부인은 란 따위는 성에 차지 않는 사윗감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시대였다면 부르조아 집안에서 허락하지 않는 결혼이 이루어졌을지 의문이지만, 당시는 혁명 직후 사회 혼란기여서 1795년 3월 15일 란과 폴레트는 나름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메릭 부인과 폴레트의 오빠은 폴레트를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하고 이 결혼식에 불참했습니다.


처가 집에서는 대놓고 박대를 했으므로, 란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 곧 란의 부대로 함께 복귀했습니다.  군 부대에 와이프를 데리고 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군 주둔지에는 병사들과 장교들, 그리고 그 가족들 뿐만 아니라 군에 필요한 식료품이나 자재를 공급하는 많은 상인들이 들락거렸고, 이런 군 병영은 그 자체가 꽤 큼지막한 마을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을에는, 아무리 다른 장교 및 병사들의 부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젊고 멀쑥한 중산층 출신의 부인은 꽤 희소가치가 있는 존재였습니다.  


거기서 작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막 20세를 넘은 예쁜 용모의 란 부인은 그 병영의 장교들과 상인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평생 고향인 페르피냥 밖으로는 거의 나가보지 않았던 폴레트는 갑자기 인기가 폭발한 자신의 인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자신에게 과도한 친절과 관심을 베푸는 뭇 남성들과 즐겁게 노닥거렸습니다.  물론 그렇게 노닥거리는 것이 불륜을 뜻하지는 않았고 또 란은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 선언을 신봉하는 열혈 공화주의자였습니다만, 그런 와이프를 너그럽게 풀어 놓을 정도로 진보적인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몇 주 못 가 견디다 못한 란은 가기 싫어하는 폴레트를 처가댁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무식한 상 퀼로트 따위와 결혼을 했다고 대놓고 구박하는 친정집은 폴레트에게 결코 편히 있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전장에서 또 전공을 세우고 잠시 처가에 들린 란에게 폴레트는 아무 곳이라도 좋으니 여기서 눈칫밥 먹는 것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매달렸지요.  이제 곧 북부 이탈리아 침공 작전에 나서게 될 란은 거친 전투 현장에 도저히 와이프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럴 때 기댈 곳이라는 고향의 가족 밖에 없었습니다.  란은 결국 폴레트를 렉투르(Lectoure)의 초라한 자기 고향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폴레트는 (대략 짐작은 했겠지만) 란이 떠벌이던 나름 잘 사는 집안이라던 란 가문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어쨌거나 란은 고향 집에서 폴레트가 시댁 식구들과 단란하게(?) 살도록 배려를 해준 뒤,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떠났습니다.




(렉투르 전경입니다.  뭐 나름 아름답습니다만, 항구 도시 페르피냥에 비하면 확실히 작네요.)




그 이후는 란에게는 정말 폭풍의 나날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처음 만나 드디어 인생의 기회를 잡은 것이니까요.  란은 거의 언제나 선두에서 나폴레옹의 롬바르디아 침공 작전을 이끌었습니다.  한번은 이미 두번이나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의 천막에 누워 있다가, 근처에서 들리는 포성을 듣고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 군의관을 뿌리치고 홀로 전장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 달려간 곳이 바로 아르콜레 다리의 치열한 전투 현장이었고, 여기서 란은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군의 총탄을 얻어 맞고 뻗어 버립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이미 란을 눈여겨 보던 나폴레옹은 여기서 란에게 완전히 꽂혀, 파리 총재 정부로 보내는 보고서에서도 란에 대해 칭찬을 늘어 놓았으니까요.


나폴레옹이 파리에 써대는 편지의 반의 반만이라도 란이 폴레트에게 연락을 보냈다면 좋았겠으나, 란은 굉장히 적은 수의 편지만을 집에 보냈습니다.  그나마 편지 내용은 온통 전투 이야기 뿐이었고, 폴레트에 대한 다정한 애정 표현 같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생사확인이나 하는' 수준이었지요.


란이 롬바르디아에서 역사를 쓰는 동안, 폴레트는 '란이 자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옹색한' 란씨 집안에서 무척 불행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폴레트의 고향인 페르피냥도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었으나 란의 고향인 렉투르는 그야말로 시골이라서, 도시 여자였던 폴레트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고상한 부르조아 아가씨였던 폴레트의 행동거지는 시골뜨기 란씨 집안에서는 험담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란은 가끔씩 오가는 편지를 통해서, 폴레트와 시댁 식구들의 불화를 진정시키려 노력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전장에서 란은 두려운 것이 없었으나, 이런 와이프와 시댁 식구들 간의 싸움은 란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란의 젊은 부인 폴레트가 시댁 식구들에게 미움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시댁 식구들을 무시하고 좁디 좁은 시골 마을인 렉투르에서 부르조아적인 사교 활동을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당시 프랑스 중산층 사회에서 결코 스캔달이나 불륜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시골 마을 렉투르에서는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특히 란의 형이자 성직자였던 베르나르가 그런 공격에 앞장 섰는데, 그는 '남편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느라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 안사람은 시골 마을에서 퇴폐적임 모임을 가지고 시시덕거린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란은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조국을 위해서 싸우기는 했습니다만, 그냥 계속 고생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밀라노를 점령하고 난 뒤인 1796년 5월, 그는 프랑스군에 반기를 든 이탈리아 농민들로부터 파비아(Pavia)라는 작고 멋진 도시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 임무야 당연히 순식간에 완수되었습니다.  그러나 란은 이 도시에 의외로 오래 머물렀는데, 이유는 자신의 사령부로 삼은 파비아 시내의 어느 부잣집 따님이 엄청난 미인이었기 떄문이었습니다.  다만 란은 난폭한 점령군처럼 '네 이년 수청을 들라'는 식의 무자비함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27살짜리 젊은 대령이었던 란은 쭈삣쭈삣 이 아름다운 이탈리아 아가씨에게 접근했으나, 이 아가씨가 '실은 전 당신네들과 싸우다 부상당한 뒤 우리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친해진 오스트리아 장교와 사랑하는 사이랍니다'라고 고백을 하자 깨끗이 물러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란은 이탈리아 미녀들에 대한 열망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6월달에는 마사-카레라(Massa-Carrera)라는 곳에 도착해서는 펠리치아(Felizia) 부인이라는 유부녀에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그는 마침 펠리치아 집안에 숙사 배정을 받은 자기 부대의 보급관이자 친구이던 알베르 페르몽(Albert Permon)에게 그 여자에게 반했으며, 어떻게든 유혹해내겠다고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란의 애정운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이 페르몽이라는 친구는 이탈리아어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잘 불렀고, 란 못지 않게 혈기 왕성한 수컷이었던 것입니다.  펠리치아 부인은 란이 본격적으로 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그만 페르몽에게 넘어가버렸고, 이 두 불륜남녀는 그 늙은 남편을 피해 인근 도시 리보르노(Livorno)로 사랑의 야반도주를 해버렸습니다.  와이프를 빼앗긴 남편은 이 프랑스군 부대의 지휘관인 란을 찾아가 와이프를 찾아달라고 호소했는데, 어쩐지 자신보다 이 프랑스군 지휘관이 더 화가 났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란은 연대 병력을 이끌고 다음날 아침 당장 대대적인 추격전을 펼쳤고,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추격 및 수색을 한 결과, 그날 밤이 가기 전에 두 년놈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이야기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은 저 불륜 이야기의 주인공인 알베르 페르몽의 예쁜 여동생 덕분이었습니다.  그 여동생의 이름은 마르텡 드 페르몽(Martin de Permon,  혹은 Permond)으로서, 훗날 나폴레옹의 부하인 장 안도슈 쥐노(Jean-Andoche Junot)와 결혼하면서 로르 쥐노(Laure Junot)로 알려진 당대의 유명 사교계 인사였습니다.  이 여자는 특히 나폴레옹 몰락 후 온갖 뒷담화로 가득한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을 썼기 때문인데, 로르 쥐노에 따르면 이 사건 때 자기 오빠 알베르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고, 남편 펠리치아보다 분노에 가득찬 란을 더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쥐노의 와이프인 로르 쥐노입니다.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녀는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이 자기에게도 집적거렸다고 썼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탈리아의 미녀들에 대한 란의 모험이 이렇게 다 실패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결국 고향 렉투르에서 시댁 식구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폴레트의 귀에까지 뭔가 소문이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1797년 4월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레오벤(Leoben)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굴복한 뒤 란을 비롯한 나폴레옹 일행은 밀라노 인근 몸벨로(Mombello)에 꽤 화려한 사령부를 차려 놓고 잦은 연회와 무도회를 가지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이때 란에게 폴레트의 분노에 찬 편지가 날아온 것입니다.  폴레트는 이 편지에서 란의 불륜과 외도를 맹비난하며 공격했고, 란은 전장에서와는 달리 이 공격에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정말로 드러 누워버렸습니다.  란은 평소와는 달리 끙끙대며 폴레트에게 '아 그게 아니고요...'라는 식의 편지를 연달아 보내며 와이프를 달래려 노력했고, 나폴레옹에게 '심각한 가정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휴가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폴레트는 란의 사탕발림 편지에 이끌려 몸벨로의 프랑스군 사령부를 찾아왔고, 란은 오랜만에 보는 와이프에게 온갖 장신구와 화려한 드레스 등의 선물로 융단 폭격을 가하며 전세 회복을 꾀했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  화려한 몸벨로의 사령부는 렉투르의 구질구질함에 질려 있던 폴레트를 크게 만족시켰고, 란이 합법적/불법적으로 구해 바친 금은보석들은 폴레트를 귀부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하긴 프랑스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 장군의 와이프라면 귀부인이지요.   일주일간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폴레트는 올 때보다 크게 무거워진 가방을 들고 웃는 얼굴로 렉투르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아슬아슬한 결혼 관계는 오래 가지 못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군인이라는 직업상, 란과 폴레트는 너무 자주,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물론 다부처럼 그렇게 떨어져 지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살짝 감동할 정도로 부인과 애특한 애정을 이어간 사람도 있으니, 그저 직업 탓만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러나 란도 폴레트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다소 철없이 결혼한데다, 란이 그다지 다정다감한 가정적인 인물도 아니었던지라, 적대적인 시댁 식구들에게 둘러싸인 폴레트도 쉽게 유혹에 흔들렸을 것 같기는 합니다. 


이들의 결혼이 파탄난 것은 란이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에 간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렸다시피, 1799년 5월 란은 아크레 포위전에서 무너진 성벽을 향해 언제나처럼 앞장서 돌격해 들어가다 적탄에 목이 꿰뚫리는 중상을 입었고, 많은 이들이 란이 전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부키르 해전에서 넬슨에게 함대를 잃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프랑스군은 본국과의 연락이 뚝 끊긴 상태였는데, 용케 가끔씩 선박을 통해 본국과 연락이 닿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오는 소식이나 가는 소식이나 매우 우울한 소식만 지중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영국 해군이 일부러 안 좋은 소식만 통과시켰을 수도 있지요.  아무튼 프랑스에는 란 장군이 아크레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7월에 전해졌고, 이 소식은 자나깨나 자식 걱정 뿐이던 란의 어머니 세실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버립니다.  이에 비해 란의 전사 소문을 들은 폴레트는 국방부에 편지를 써 남편의 전사로 인한 연금 수령이 가능한지 문의를 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 란도 고향에 대해 매우 안 좋은 소식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머니의 사망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그해 2월 폴레트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입니다.  란이 출항한 것이 1년 전 5월이었으므로, 어떻게 생각하면 그 아이는 란의 아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란은 당시 리옹과 툴롱 등지에서 출정 준비를 하느라 3월부터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때 폴레트를 만났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어떤지는 사실 란 본인과 폴레트 당사자들만이 아는 사정일텐데, 확실한 건 란 본인은 폴레트의 출산 소식을 듣고 매우 화를 내고 침울해 했다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군을 내팽개치다시피 버려두고 란을 비롯한 소수의 심복 부하들만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와 쿠데타를 성공시키자마자, 란은 '불륜'을 이유로 이혼 소송에 들어갔습니다.  귀국한 이후 폴레트와 그 아이는 전혀 만나지 않았지요.  폴레트의 태도는 남편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이 바람을 피워 애까지 낳은 불륜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변호사들이 '신군부의 잘 나가는 장군'과 맞서야 한다는 부담에 다들 꼬리를 빼는 와중에도 꿋꿋이 그 아이는 란의 아이이며 자신은 아무 불륜도 저지른 바 없다고 떳떳 또는 뻔뻔하게 나섰습니다.  


란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억울한 심정 외에도, 자신이 작년 4~5월 사이에 폴레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줄 증인이었는데, 사실 그에 대한 증인을 내세우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란은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 즉 제1통령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부탁하여 당시 란이 폴레트를 만난 일이 없다라는 증언을 서면으로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란의 거듭된 부탁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이 마지 못해 써준 증언서의 내용은 매우 간단 명료하면서도 란의 '순결'을 입증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즉, "장 란은 몇몇 특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1798년 5월 중순까지 툴롱에 머무르며 보나파르트의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라는 것이었지요.  란은 좀더 확실한 증언서를 써달라고 나폴레옹은 졸라댔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허용한 것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결국 이혼 소송은 다소 난항을 겪으며 삐걱대다, 란이 30여명의 증인을 내세우고 법무장관에게 강력한 편지를 연달아 보내는 등 대소동을 벌인 끝에야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은 폴레트가 낳은 아이를 자신의 상속자 목록에서 지우지 않음으로써 많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과연 그 아이는 란의 아이였을까요, 불륜의 결과였을까요 ?  본인들만 알겠지요.


란은 나폴레옹의 배려로 비교적 빨리 재혼을 했습니다.  이혼 한지 대략 1년 후인 1800년 마렝고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심복 부하들이 제대로 된 귀족 흉내를 내려면 근사한 결혼을 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리고는, 어느 중급 공무원의 아름답고 교양 있는 18살짜리 딸을 란의 배필로 중매를 서주었습니다.  란은 자신의 친구 2명, 즉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eres, 예 나중에 계급으로도 관계에서도 원수가 되는 그 베시에르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시에르와 란은 꽤 친한 사이였습니다.)와 프레르(Georges Frere)를 보내 이 아가씨를 미리 만나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어보았지요.  


"예쁘냐 ?"





(란의 두번째 부인, 루이즈 앙투아네트 게누엑입니다.)




그 대답이 "응 예쁘더라"였기 때문에, 란은 이 결혼에 응했습니다.  이름이 루이즈(Louise-Antoinette Guehenuec)였던 이 아가씨는 확실히 란에게는 딱 어울리는 조신하고 교양 있고 아름다운 부인이었습니다.  루이즈의 가치는 나중에 란이 포르투갈에 전권 대사로 부임했을 때였는데, 당시 란은 영국 대사였던 피츠제랄드(Lord Robert Stephen Fitzgerald)와 맞대결을 해야 했는데, 그런 외교 대결에서 란과 루이즈는 환상의 팀이었습니다.  란이 거침없고 난폭한 언행으로 포르투갈 섭정공 조아오 6세(João VI)을 윽박지르면 그 와이프인 루이즈가 파티 석상에서 그 우아함과 교양으로 포르투갈 귀족들의 호감을 사는 형식이었지요.  특히 피츠제랄드의 부인은 외모도 영 아니었는데, 거기에 교양과 눈치와 예의범절까지 없어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란이 남자들이 바라는 그런 이상적인 와이프는 아니었습니다.  루이즈는 자녀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이자 시댁이 있는 렉투르를 방문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너무 멀고, 너무 시골이고 가봐야 할 일도 없으니 당신 혼자 가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자기 친정집을 위해 마른(Marne) 강가에 남편의 재물로 새로 마련한 샤또에는 남편을 데려갔습니다.  여기는 가깝고, 아름답고, 또 자기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으니까요.  란은 제4차 대불 동맹 전쟁 중인 풀투스크 전투에서 적탄에 부상을 입고도 루이즈가 걱정할까봐 편지에 자신의 부상 이야기를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란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전사해버리자, 루이즈는 생전에 남편에게 주어졌으나 남편이 웃기지도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브르 대공(Prince de Sievres)의 영지인 폴란드 지에비어츠(Siewiercz) 땅의 세수를 자기가 받을 수 있는지 나폴레옹에게 문의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거절했고요.


원래부터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루이즈와 재혼을 하자 마리-루이즈의 친구로서 도움을 주는 궁정 레이디(dame d'honneur, 영어로 lady of honour)의 역할을 기쁜 마음으로 맡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아끼는 친구의 미망인에게 은혜를 베푼 셈이었으나, 정작 루이즈는 자신을 진짜 친구로 여기는 마리-루이즈와 나폴레옹의 사이가 벌어지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울러,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하여 퇴위하자 재빨리 부르봉 왕가 편에 붙었고, 웰링턴 공작이 파리에 들어왔을 때는 자신의 집을 영국군 사령부로 쓰라고 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특히 나중에 세 아들 중 둘은 영국 여자와 결혼시켰고, 하나는 망명 귀족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란이 생전에 가장 증오하던 대상이 바로 부르봉 왕가와 영국인들과 망명 귀족이었는데, 아마 란은 무덤에서 여러 번 뒤척거렸을 것 같습니다. 




출처 : Margaret Chrisawn의 'Emperor's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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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기구 중대의 역사적 시작이 주르당과 함께였던 것처럼, 그 몰락의 시작에도 주르당이 있었습니다.  




(주르당 원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주르당 법 덕분인데, 그게 또 몹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안이었습니다.  즉, 그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참패를 겪고 그 책임을 진답시고 군에서 물러난 뒤, 정계에 입문하여 만든 법이 바로 주르당 법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르당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얻은 명성은 프랑스 징병제 법안인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에 의한 것일 뿐이며, 정작 그가 독일 전선에서 활약할 때 자주 참패를 겪었다고 했지요.  1795년, 프랑스 기구 제1 중대는 주르당이 사령관으로 있던 상브레-뮤즈(Sambre-et-Meuse) 방면군에 배속되었습니다.  주르당은 이 기구 중대에 대해 조롱과 의심으로 일관된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거둔 승리 중 가장 크고 결정적인 승리가 바로 플뢰뤼스 전투였고, 이 승리는 상당 부분 기구의 정찰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도 그랬습니다.  주르당에게 전입 보고하러 가던 기구 중대원들의 마음은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르당은 이때 즈음해서 기구 중대에 대해 생각이 좀 바뀐 상태였습니다.  전술적 효과는 몰라도 최소한 적에 대한 심리적, 그리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꽤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샹브레-뮤즈 방면군 공식 통신문에 자신의 군대 모습을 프린트할 때 그 위에 기구가 떠 있는 모습을 넣기도 했습니다.  기구 중대원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구 중대의 최후를 가져온 것은 주르당의 편견이 아니라 그의 무능이었습니다.  다음 해인 1796년 8월 24일 독일 바이에른의 암베르크(Amberg)에서 주르당은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관이 바로 명장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주르당은 여기서 속절없이 탈탈 털려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계속 후퇴하던 주르당은 이대로 끝까지 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반격을 꾀했습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Wurzburg) 인근에서 마인(Main) 강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사단 하나가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분리된 상태임을 포착했습니다.  다수의 프랑스군으로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주르당은 9월 3일 자신있게 공격을 개시했으나, 상대는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짙은 안개를 틈타 신속히 부교를 놓고 주르당 몰래 지원 병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주르당은 여기서 다시 한번 참패를 당하고 허겁지겁 후퇴해야 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나폴레옹이라고 할 수 있는 카알 대공입니다.  원래 세습 귀족 가문 사람들 중에 출중한 인물이 나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입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약 2천의 사상자를 냈고, 추가로 7문의 대포와 함께 1천의 포로까지 오스트리아군에게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1천의 포로 중에는 기구 중대원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일망타진 당하여 기구 앵트레피드(L'Intrepide) 호까지 고스란히 오스트리아군에게 나포되었던 것입니다.  주르당의 삽질과 카알의 명지휘의 절묘한 조화가 빛났던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매우 뜻깊은 전투였습니다.  그동안 기세등등한 프랑스 혁명군에게 계속 밀리기만 했으나, 이 전투들을 기점으로 전세가 오스트리아군 쪽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주르당이 속절없이 후퇴하는 바람에 그 우익을 맡아 전진하던 모로(Moreau) 장군도 고립을 우려하여 후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쁜 승전에 프랑스군이 가지고 다니던 악마의 풍선 앵트레피드 호는 아주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이 기구는 오늘날에도 빈에 있는 히에레스게쉬히틀리헤스(Heeresgeschichtliches)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구는 직경이 거의 10m에 달하는데, 나무로 만든 곤돌라 본체는 매우 작아서 직경이 75cm 밖에 안되고 난간 높이도 고작 1m 간신히 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구를 타고 두 명의 장교가 무려 9시간이나 플뢰뤼스 상공을 지켰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사진 속의 기구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비행체 바로 앵트레피드 호입니다.  이건 사실 복제품이고, 진품은 유리 상자 속에 넣어져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참사 속에서도 기구 중대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직 무사한, 쿠텔이 지휘하던 제2 기구 중대가 재편성된 상브레-뮤즈 방면군으로 배속된 것입니다. 상브레-뮤즈 방면군에 도착한 제2 기구 중대에게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은 정말 처절하게 무능하던 주르당이 매우 유능한 장군이던 오슈(Lazare Hoche)로 교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엄격한데다 무자비하고 유능한 군인이었던 오슈가 제2 기구 중대를 정말 풍선쟁이들로 취급하여 자신의 작전 지역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중대장 쿠텔까지 열병으로 인해 중대장직을 내놓고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오슈 장군의 동상입니다.  열병으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 분이 나폴레옹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었을지 참 궁금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구 중대의 최후는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총재 정부의 주전선은 어디까지나 독일 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와의 긴 전쟁을 결판낸 것은 이 독일 전선이 아니었습니다.  총재 정부는 어떤 애송이 장군의 열렬한 청원을 받아들여 제2 전선 정도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 애송이를 이탈리아 전선에 파견했었는데, 그 애송이의 이름이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맹활약에 힘입어 결국 오스트리아는 굴복했고, 그 결과로 맺어진 것이 1797년 레오벤(Leoben) 조약이었지요.  이 조약 후에야 비로소 지난 해에 포로가 되었던 제1 기구 중대가 프랑스로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약 8개월 만에 프랑스로 돌아온 기구 중대원들은 여전히 최첨단 과학 특수 부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몰락한 기구 중대를 되살릴 적임자는 기구 전문가인 쿠텔'이라며, 쿠텔을 다시 중대장으로 임명해달라는 청원을 넣었습니다.  총재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쿠텔을 대령으로, 기존 중대장이던 로몽을 소령으로 승진시키며 다시 기구 중대 지휘관으로 배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포로 신세에서 풀려난 것은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이들이 활약할 무대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실업자 신세가 될 뻔한 이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원래 3편으로 생각했으나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주에 마지막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27Intr%C3%A9pide

https://en.wikipedia.org/wiki/Observation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leurus_(1794)

https://en.wikipedia.org/wiki/Hot_air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ilitary_ballooning

https://vistaballoon.com/blog/2014/10/the-history-of-ballooning/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gas-vs-hot-air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history-2

http://www.pbs.org/wgbh/nova/space/short-history-of-ballooning.html

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25354/http://www.centennialofflight.gov/essay/Lighter_than_air/Napoleon%27s_wars/LTA3.htm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Jacques_Cont%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Louis-S%C3%A9bastien_Lenormand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Cont%C3%A9,_Nicolas_Jac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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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표 상남자와 그들의 여자 이야기를 각각 1편씩 재업 합니다.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약간 매부리 코인데요 ?)


 


프랑스의 상남자라면 저는 단연 장 란(Jean Lannes)을 뽑습니다만, 러시아에도 상남자로 불릴 만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동향 사람인 스탈린이 나중에 히틀러에 대한 대반격 작전 이름을 바로 이 장군의 이름으로 붙였었지요.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정식 명칭은 Prince Pyotr Ivanovich Bagration, 즉 바그라티온 왕자였습니다.  왕자라니, 바그라티온이 로마노프 왕가의 아들이었나요 ?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prince라는 명칭은 왕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공작(duke)보다는 더 높으나 왕(king)보다는 더 낮은 직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prince라고 해서 꼭 왕의 아들이거나 나중에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오스트리아의 외교관 메테르니히도 prince의 작위를 받았고,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도 prince가 됩니다.  우리 말로는 '왕자'가 아니라 그냥 '대공' 정도가 좋은 번역으로 보이지만, 사실 prince 바로 밑의 직위에 archduke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공 (대공작)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왕공'이라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단어 외에는 적절한 단어가 없습니다.  아무튼, 바그라티온은 분명히 왕가의 자제였습니다.




(현재의 그루지아, 아니 이젠 영어식으로 조지아의 지도입니다.  2008년도 남 오세아티아와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러시아와 전쟁을 치룬 나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 지도 중앙의 고리(Gori)라는 도시까지 러시아 군이 점령했엇지요.  원래부터 그루지아는 영어로는 Georgia인데, 당시 조지아 주에 사는 어떤 멍청한 미국인이 '러시아 군이 조지아를 침공했다는데 나 피난가야 하는 거냐 ?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냐 ?'라고 게시판에 올린 것이 유머 코너의 인기 기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키즐라(Kizlyar)라는 곳으로서, 지금은 러시아 내 다게스탄(Dagestan) 공화국의 카스피 해 연안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그 곳은 그루지아(영어로는 Georgia) 땅이었고, 그루지아를 지배하던 바그라티오니(Bagrationi) 가문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루지아는 7세기 무렵 아랍 세력에게 정복당하기도 했으나, 9세기에 아쇼트 1세(Ashot Kurapalat)가 최초의 바그라티오니 왕조를 설립하면서 그 번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유럽에 그루지아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제1차 십자군이 벌어지던 11세기 무렵이었는데, 이때 그루지아와 대적하던 페르시아 인들이 그루지아를 '늑대의 땅'이라고 부르던 것이 유럽인들에게 '구륵(Gurg)'이라고 불리면서 이름이 그렇게 굳어졌다는 말도 있고, 용을 무찔렀다는 성 게오르기우스 (St. Georgius)를 숭배하는 땅이라고 해서 십자군들에게서 Georgia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것들은 다 외국이 그루지아를 부르는 이름(exonym)이고, 정작 그루지아 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Sakartvelo, 즉 사카르트벨로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저 위의 꼬부랑 글씨가 그루지아 글자로 쓴 표트르 바그라티온이라는 글자입니다.  아래는 러시아 키릴 문자로 쓴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이라는 글자입니다.  저 대학 다닐 때 교양 러시아어 한 학기 들었습니다.)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던 그루지아 왕국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신의 채찍, 즉 몽골 제국의 침입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후 뒤를 이어 나타난 오스만 투르크 및 페르시아 왕국의 거듭된 침략으로 쇠약해졌습니다.  게다가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내분까지 겹쳐 왕국이 여러 개의 소왕국으로 조각나기도 했지요.  1783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견디다 못한 동부 그루지아의 왕은 러시아와 방위 협정을 맺습니다만, 정작 1785년과 1795년에 페르시아의 대대적 침공으로 그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가 함락되고 많은 주민들이 학살될 때 러시아는 그저 팔짱만 끼고 구경을 할 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1800년 12월 러시아는 아예 조약을 깨고 동부 그루지아를 합병하고 바그라티오니 왕조를 폐지해버렸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짜르는 바로 알렉상드르의 아버지이자 곧이어 암살당하는 파벨 1세(Pavel I) 였습니다.  그가 그루지아를 합병한 것은 어디까지나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왕 그루지아 12세(George XII)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핑계를 달았지요.  그루지아의 귀족들은 이 조치에 강경하게 반항했으나, 러시아의 짜르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귀족들을 모조리 체포함으로써 이 저항도 곧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부 그루지아도 몇년 후에 병합되어 버렸습니다.   




(동부 그루지아의 마지막 왕 그루지아 12세입니다.)


 


결국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왕족들은 러시아의 하급 귀족으로 통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에 대해서는 눈에 확 띄는 대우를 해주어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었지요.  그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표트르 바그라티온이었습니다.   


바그라티온은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적자 같은 귀한 신분은 아니었고, 선대 그루지아 왕의 사생아였던 이샤크 벡(Ishaq Beg,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알렉산더로 개명)의 손자였습니다.  아샤크, 아니 알렉산더는 본국에서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로 달아나, 러시아 군 장교로 생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자 바그라티온의 아버지인 이반(Ivan Alexandrovich Bagration)도 러시아 군에서 대령 계급까지 지냈습니다.  이런 배경 덕분에,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그저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1782년 17세의 나이에 러시아 남부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연대에 하사관으로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남부의 이런저런 소규모 전투에 참전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는 10년 후인 1792년 비로소 대위 계급으로 임관했는데, 이때부터는 정신이 핑핑 돌 정도로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2년 뒤 소령 에 이어 같은 해에 중령까지 진급했고, 다시 4년 뒤인 1798년에는 대령, 바로 또 1년 뒤에는 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사실 바그라티온이 뭐 별로 전공을 쌓은 것도 없는데 이런 초고속 승진을 시켜 주었던 것은 러시아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호적수 제1 후보였을 만큼 당대의 명장이었던 러시아의 수보로프 장군입니다.  그는 러시아 인들 뿐만 아니라, 당시 스위스 맟 이탈리아 등의 현지인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1799년에는 수보로프(Suvorov) 장군의 이탈리아-스위스 원정에 참전하면서, 수보로프 장군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비로소 군 내에 실력으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6년의 1차 이탈리아 침공 때 근거지로 삼았던 도시 브레시아(Brescia) 점령 작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러시아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전혀 뜻 밖의 이유에서였습니다. 




(좀더 젊은 시절의 파벨 1세의 모습입니다.  저 맹한 8시 20분 스타일의 눈꼬리가 저 양반 얼굴의 특색인 모양입니다.  모든 그림에서 그런 모습으로 그려졌네요.)




제2차 대불 동맹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그는 러시아 궁정 내에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인물이 되었고, 특히 파벨 1세가 그루지아 병합을 획책하고 있는 마당에 그루지아 망명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입지가 올라가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1800년 당시 바그라티온 장군은 35세의 한창 나이였는데, 그 나이 때의 상남자가 가장 관심을 가질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  예, 바로 여자, 그것도 예쁜 여자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문과 재산이 화려한 여자라면 더욱 좋았겠지요.  당시 러시아 상류 사회에서 최고의 신부감으로 이름을 떨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카테리나 스카브론스카(Ekaterina Skavronska)였습니다.  당시 방년 17세였던 이 귀족 아가씨는 나폴리 전권 대사였던 스카브론스키(Pavel Martinovich Skavronsky) 공작의 딸이자 포템킨 (Potemkin) 왕공의 조카 딸로서 으리으리한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미모의 아가씨였다는 점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상트 페테르부르그 사교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예카테리나 2세 여제가 세운 학교에서 서구적인 교육까지 받은, 당대의 엄친딸이었습니다.  당연히 바그라티온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던 여자는 바로 이 아가씨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입니다.  이쁜가요 ?  흠... 금발이라던데 여기서는 흑발이네요 ?)




당시 파벨 1세는 뜬금없이 말타 기사단장의 직위를 맡는 등 그 괴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바그라티온이 예카테리나를 흠모하고 있다는 별로 놀랍지 않은 (당시 이 아가씨에게 혹하지 않은 남자가 없었으니까요) 사실을 알고는, 어느날 갑자기 바그라티온 장군과 예카테리나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리고는 1800년 9월 2일 이 둘을 결혼시켜 버립니다.  이 조치는 아무리 파벨 1세가 괴짜라고 해도 너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바그라티온조차도 깜짝 놀라고 황당해 했다고 합니다.  또 한명의 당사자인 예카테리나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 아가씨는 팔렌 공작(Peter von der Pahlen)이라는 중년의 미남과 사랑에 빠진 상태였거든요.   팔렌 공작보다 20살이나 젊은 그루지아산 종마 바그라티온이 예카테리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을까요 ?  예, 결정적으로 바그라티온은 상남자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못 생긴 편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을 피해 러시아에 망명을 해온 프랑스 귀족 장군이던 랑게론 공작(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éron)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부유하고 윤기가 흐르는 아가씨는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바그라티온은 그저 일개 군인일 뿐이라서 말투나 행동거지도 촌티가 난다.  게다가 그는 매우 못 생겼다. 그의 아내가 되는 아가씨의 얼굴이 하얀 만큼, 그의 얼굴은 시커멓다.  그 아가씨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미녀들 중 가장 활발한 미녀이다.  그녀는 결코 이런 남편과 행복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랑게론 장군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도 활약했고, 부르봉 왕가 복위 이후에도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 군에서 주로 투르크 군과 싸웠습니다.  1831년에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




속내야 어쨌건 간에,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제일의 미녀를 와이프로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 1달 뒤인 1800년 10월 15일에는 러시아 제국의 왕자(prince, Kniaz)라는 작위까지 부여받았습니다.  바로 그 두달 뒤인 12월에 파벨 1세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바그라티온의 고향인 동부 그루지아를 병합해버리지요.  어찌 보면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엘프 미녀를 한명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어 버린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그 누구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일단 파벨 1세는 목숨으로서 그 댓가를 치렀습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애인을 빼앗겼기 때문은 아니었겠습니다만, 팔렌 공작이 주요 역할을 맡아서 자행된 암살 사건에서 파벨 1세가 1801년 3월에 살해된 것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한 결혼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여사를 오래 붙들어 매지 못했습니다.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은 1805년 예카테리나가 특수 제작한 마차를 타고 서유럽으로 훌쩍 떠나버리면서 끝장이 났습니다.  상남자 바그라티온이 대번에 홀아비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812년, 29세가 된 바그라티온 왕녀의 초상입니다.  여기서는 금발로 그려졌네요.)




남편 덕에 왕녀 타이틀이 붙은 이 아름다운 20대 초반의 여인은 가는 곳곳마다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미모와 재치, 교양은 물론이고, 특히 그 의상이 대단히 센세이셔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각종 파티에 속옷도 입지 않은 채 거의 속이 비쳐보이는 얇은 모슬린으로 된 시-쓰루 의상을 즐겨 입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는 Le Bel Ange Nu, 즉 아름다운 누드 천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설마 점잖은 19세기 초 유럽 상류 사회에서 그런 옷을 입고 다녔을까 싶겠습니다만, 사실 당시에 그런 누드 톤의 시-쓰루 의상이 상당히 유행했습니다.  1802년~1803년의 짧은 아미앵 평화 기간 중 파리를 방문한 영국인들은 일부 파리 여성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여자들이 벌거벗고 다닌다' 며 놀라워 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Bernard Cornwell의 역사 소설 Sharpe's Waterloo 편을 보면, 주인공 샤프 중령의 와이프인 제인이 파티에 가기 위해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으면서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젖꼭지에 붉은 루즈를 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 당시의 여성 패션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이지요.   훗날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영국 수상을 지냈던 팔머스톤 경도 젊은 시절 이 바그라티온 왕녀를 만나 보았는데, 그 인상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투명한 인도제 모슬린 옷만 입고 있었는데, 몸에 착 달라붙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천사같은 얼굴에 백옥같은 피부, 푸른 눈, 탐스러운 금발 머리를 가졌고, 30대의 나이에도 15살 짜리 소녀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1802년, 당시 18살이던 팔머스톤 경의 모습입니다.  팔머스톤 경은 바그라티온 왕녀보다 1살 어린 나이였습니다.)




팔머스톤 경이 바그라티온 왕녀의 미모에 혹했던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당대의 지성인 괴테도 이 왕녀를 만나보고는 그 미모에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바그라티온 왕녀가 이런 옷차림을 하고 유럽의 지성들과 철학과 정치만을 논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곳마다 공공연하게 스캔달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작센의 외교관인 폰 슐렌베르크 공작(Friedrich von Schulenberg), 뷔르템베르크의 왕자, 영국 귀족 스튜어트 경(Charles Stewart), 바이에른의 루드비히(Ludwig) 왕자 등 으리으리한 사람들의 그녀의 침대를 거쳐갔는데,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메테르니히(von Metternich)와 사실혼 관계에 들어가서 딸까지 두었습니다.  메테르니히와 그녀 사이에서 난 이 딸은 메테르니히 가문에서 키워 시집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을 물먹인 남자 메테르니히입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집요하게 괴롭힌 배경에는 바그라티온 왕녀가 있었습니다.)




와이프가 이렇게 그야말로 유럽을 뒤집어 놓고 다니는 동안, 남편인 바그라티온은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 와이프에게 돌아올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도 애절한 편지를 하도 많이 보내는 바람에 유럽에서 그녀와 있던 친구들조차 '나 같으면 돌아간다' 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나, 이 아름다운 왕녀는 시커먼 얼굴의 그루지아 상남자에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여자는 남편에게 꼬박꼬박 소식을 보내기는 했습니다.  그 내용은 100% 청구서였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 인기로 돈을 벌 수는 없었고, 오히려 그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생활비와 유흥비를 써대야 했습니다.  그 비용 청구서만 꼬박꼬박 남편에게 날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남자=호구였는지, 바그라티온 장군은 이 청구서를 성실히 지불하여 와이프가 돈 때문에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죽하면 바그라티온 왕녀의 친모조차도 자기 딸의 뻔뻔스러움과 낭비를 비난했는데, 이 우직한 그루지아 상남자는 자신의 장모에게 '내 와이프를 비난하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과의 전투가 일단락된 1808년, 그 동안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부인에게 훈장이 주어졌는데, 이때 바그라티온 왕녀에게는 훈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남남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바그라티온은 밸도 없이 "내 와이프인데 왜 훈장을 못 받나" 라며 항의를 했습니다.




(정식 부인을 두고 바그라티온 왕녀와 놀아난 메테르니히가 부도덕하다고요 ?  당시 귀족 사회에서 그런 일은 아주 많았습니다.  이 여자는 당시 메테르니히의 또다른 러시아 출신 정부였던 도로테아 리벤 Dorothea von Lieven 입니다.  이 여자도 귀족 가문의 유부녀로서 러시아의 런던 대사의 와이프였는데, 런던에서 메테르니히와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저 위에서 언급한 팔머스톤 경과도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이 여자가 훨씬 더 현대적인 러시아 엘프녀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비극이라고, 이런 호구같은 남자 바그라티온을 사랑하는 여인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짜르 알렉상드르의 여동생이자, 바그라티온 왕녀와 동명이인인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 공주였습니다.  그녀는 이 듬직한 장군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는데, 바그라티온은 이 공주님의 구애를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의 적법한 아내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심지어 나폴레옹도 (물론 정치적 이유에서였지만) 이 예카테리나 공주에게 구혼을 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바그라티온이 완강하게 구애를 거부하자, 결국 예카테리나 공주는 자신의 사촌뻘이자 뷔르템베르크의 왕자이자 나중에 왕이 되는 빌헬름 1세 (Wilhelm I)와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초상입니다.  흠... 바그라티온이 그녀의 애정 공세를 거절한 이유가 짐작이 가는데요...저 위에 나온 다른 러시아 여자들과는 확실히 좀 차이가 나네요.)




자신의 매정함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그라티온 왕녀는 아예 비엔나에 둥지를 틀고 바그라티온 장군의 주머니로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살롱은 반-나폴레옹 인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결국 오스트리아가 다시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제5차 대불 동맹 전쟁에 뛰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남편 바그라티온의 전사, 그리고 나폴레옹의 패망 이후에도 그녀는 화려한 삶을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패망 이후 그녀는 거처를 비엔나에서 파리로 옮겼고, 발작(Balzac)이나 스탕달(Stendahl) 등의 대문호들과도 사귀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명작 레미제라블 끝부분에, 테나르디에가 마리우스로부터 돈을 뜯어내려고 귀족으로 변장을 하고 찾아왔을 때, 테나르디에가 허세를 부리며 '아마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그라시옹 공작 부인의 살롱에서였나요 ?' 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바그라시옹 공작 부인이 바로 이 여자입니다.  바그라티온 왕녀는 이후에도 잘 먹고 잘 살다가 결국 1857년 74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베네치아에서 죽었습니다.  아마 된장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삶이었겠지요.


 


(베네치아에 있는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의 묘비입니다.  이름도 아예 서구식으로 캐서린이라고 써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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