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7.23 18:51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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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16 22:27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밑, 공작보다는 위인 대공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들을 총 3개부대로 편성하여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을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1개 부대는 6개 대대로 작게 편성되어 프랑스군 수중에 있던 그로스호펜(Grosshofen) 마을을 공격하기로 했고, 무려 16개 대대로 강력하게 편성된 다른 1개 부대는 글린첸도르프(Glinzendorf)를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글린첸도르프로 향하는 부대에는 나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음악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라데츠키 백작(Joseph Radetzky von Radetz)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모두 기병대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멀찍이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를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나름 굉장히 머리를 쓴 작전이었고, 전날 헛된 공격으로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에게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로젠베르크의 공세에는 무려 60문의 대포가 딸려 있었으므로, 새벽 하늘에 엄청난 포성을 울려 나폴레옹의 시선을 잡아 끌게 되어 있었습니다.




(붉은색 원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역이고, 푸른색 원은 오스트리아군 주요 거점입니다.  푸른색 화살표가 로젠베르크의 공세 방향입니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게는 재수가 없게도, 그의 앞에 있던 부대는 바로 프랑스군 최고의 지장이라고 할 수 있던 다부(Davout)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무려 3만2천의 보병과 6천2백의 기병, 그리고 무려 12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어서 프랑스군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로젠베르크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습이라도 성공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다부는 전날의 야간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공격을 걷어들인 바 있었지요.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로 지치지도 않았고, 새벽에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을 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로젠베르크는 공세에 나서면서 '절대 엄숙'을 지시했으나, 이 군단에는 반쯤은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소음을 내며 행군을 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무척 놀라긴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새벽 5시 경,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선봉대가 그로스호펜을 습격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이어서 글린첸도르프에도 오스트리군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1개 연대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로스호펜은 곧장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넘어갔으나, 다부는 당황하지 않고 곧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호펜에서 밀려난 프랑스군의 퓌토(Puthod) 장군이 그로스호펜을 탈환하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동안 구댕(Gudin) 장군의 강력한 사단이 그 측면을 들이쳤습니다.  프리앙 장군과 모랑 장군의 2개 사단이 주둔하고있던 글린첸도르프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잘 버텨주었고, 그루시(Grouchy) 장군과 몽브렁(Montbrun) 장군의 프랑스군 기병대는 측면을 돌아 레오폴즈도르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를 오히려 다시 우회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로젠베르크와 다부가 새벽에 혈투를 벌이며 낸 포성과 총성은 새벽 하늘을 가로질러 라스도르프(Raasdorf)에서 이른 아침식사 중이던 나폴레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다부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을리도 없으니, 그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이었지요.  당시 프레스부르크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는 고작 1만3천 정도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이 좀 부풀려 보고를 했는지, 나폴레옹은 요한 대공의 군세를 약 3만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병력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마당에 적에게 3만이 더 가세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비 기병대로부터 낭수티(Nansouty)와 아리기(Arrighi) 장군의 중장 기병대를 다부 쪽으로 파견했고, 이어서 황실 근위대까지 그쪽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마저 끝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낭수티 장군의 기병대 중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마 포병대가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첫 포탄을 발사할 때 즈음에는 이미 나폴레옹도 현장에 도착하여 다부와 함께 반격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습을 해온 오스트리아군 측이었습니다.  작전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던 카알 대공은 어차피 프랑스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쪽 전선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로젠베르크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고 있는 적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어느 한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순간이었거든요.  이 때 병력 통제가 안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후퇴를 기술적으로 잘 해내는 것은 뛰어난 지휘관과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병사들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것을 해냈습니다.  순식간에 전위대에서 후위대로 임무가 바뀐 라데츠키 장군의 부대는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이 원래 출발선이었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퇴각할 때까지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잘 억눌렀고, 결국 아침 6시가 되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1천1백명 정도로 심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말년의 라데츠키입니다.  그는 원래 보헤미아, 즉 체코의 귀족이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그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1848년 쿠스토자(Custoza)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군을 격파한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 즉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맥없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걱정한 것은 그가 의도했던 기습이 이 새벽의 전투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다부의 공격이 그의 주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잃어보린 기습 효과를 어느 정도 벌충하기 위해 다부에게 일부 병력을 더 동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후방으로부터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다부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부에게 이렇게 감놔라 배놔라 참견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가슴을 정말로 철렁하게 만드는 사건이 전선 중앙부 아더클라(Aderklaa)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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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7.09 22:54

몇 달 전에 토르 3, 라그나로크(Thor Ragnarok)의 티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습니다.


https://youtu.be/v7MGUNV8MxU




무척 재미있어 보이는 이 티저 영상의 배경 음악은 1970년대의 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펠린(Led Zeppelin)의 히트곡인 '이민자의 노래'(Immigrant Song)입니다.  이민자라고 하니까 뭔가 애달프고 핍박받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데, 요즘 구미 선진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이민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멋진 노래가 묘사하는 이민자 역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바이킹에 대한 노래이거든요.  저 토르 3 티저 영상을 만든 프로듀서가 정말 기가 막히게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낸 것이지요.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The hammer of the gods

신들의 망치가

Will drive our ships to new lands

우리의 배를 새로운 땅으로 밀어내

To fight the horde, and sing and cry

적의 대군과 싸우고 이렇게 노래하며 외치게 만들지

Valhalla, I am coming!

발할라여, 내가 간다 !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

너희의 초록빛 평야는 정말 부드럽구나

Can whisper tales of gore

선혈이 낭자한 이야기를 속삭여주마

Of how we calmed the tides of war

우리가 어떻게 전쟁의 물결을 잠재웠는지 말이야 

We are your overlords

우리가 너희의 주인이다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So now you'd better stop and rebuild all your ruins

그러니 너희는 이제 저항을 멈추고 너희의 폐허를 다시 짓는게 낫노라

For peace and trust can win the day despite of all your losing

너희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신의가 세상을 지배할테니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레드 제펠린.  70년대 이런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지금의 60~70대 노인이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이 노래 가사 중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가사에서도 암시되듯이, 아마도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에 살던 바이킹들이 굳이 거친 바다와 험한 싸움을 무릅쓰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이유 중 하나는 자기네들 땅이 그다지 살기 좋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8세기 말엽부터 약 300년 동안 맹위를 떨치던 바이킹의 침략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스칸디나비아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이 침략 행위를 주도했다고도 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팽창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해외 침탈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경제에 여유가 생기자 그로 인해 인구가 늘어난 것이지, 인구가 늘어나서 침략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설 중 하나는 바이킹이 해외 침략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나 영국이 일찍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것이 모두 장자 상속제(primogeniture)와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모든 것을 다 상속받고 차남이나 삼남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던 차남 삼남들이 목숨을 걸고 해외로 강도질을 나섰다는 것이지요.  미국 역사가 슬로안(Sloan)은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프랑스는 장자 상속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킹의 침략 행위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도 그랬고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저 멀리 러시아에서도 그랬듯이, 바이킹들은 따뜻한 땅에 정착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환영받지 못한 이민자 바이킹들의 정착 성공 지역)



바이킹들이 초록빛으로 뒤덮힌 부드러운 대지를 찾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난 이유는 누가 생각해도 간단할 것 같습니다.  따뜻한 곳이 좀더 농사 짓기에 좋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바이킹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릴 때, 커다란 멧돼지 통구이에 넘치는 벌꿀술과 맥주 등 아주 풍요로운 식탁을 생각합니다.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보리죽을 먹는 모습을 그리면 너무 초라해보일테니까 그렇게 고기를 먹는 것으로 묘사했겠지요.  그러나 스칸디나비아가 돼지 먹이를 풍부하게 생산하는 땅도 아니니, 돼지고기는 축제 때나 먹는 특식일 뿐 바이킹들이 365일 먹는 주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연 바이킹들은 평소에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  일년의 절반이 얼음과 눈,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둠으로 뒤덮힌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농사를 지었을까요 ?




(노르웨이의 얼음과 눈으로 덮힌... 농촌입니다.)



아시다시피 덴마크나 스웨덴, 노르웨이가 1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힌 곳은 아닙니다.  거기서도 여름은 따뜻하고 사람들 반팔 입습니다.  따라서 농사도 활발히 지었는데, 그래도 역시 춥고 척박한 땅이다보니 밀 농사는 어려웠고 주로 보리와 호밀, 귀리를 재배했습니다.  그러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꿈꾸던 하얀 밀빵은 먹기 어려웠겠지요.  이런 거친 곡식으로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스코틀랜드 사람들처럼 죽을 끓여 먹었을까요 ?  아마 그런 죽도 먹었을 것입니다.  특히 바이킹들은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통구이 바베큐가 아니라 주로 고기를 채소와 함께 삶은 스튜를 즐겨 먹었다고 하니까, 죽도 잘 먹었을 것 같습니다.  죽이든 스튜든 대표적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서, 적은 재료로 여러 사람들이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었지요.  그러나 바이킹도 분명히 빵을 만들어 먹었고, 그 특유의 척박한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의 개성있는 소박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을 가서 뭔가 교육을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교외에 있는 Xerox Document University라는 시설에서 이루어진 이 교육 과정에는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직원들 약 20여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숙식을 다 이 시설에서 제공했습니다.  카페테리아 형태의 식당은 음식의 질이 꽤 훌륭했습니다.  그 때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같이 교육을 받던 덴마크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하고 키가 비슷했으니 덴마크인치고는 꽤 작은 키였던 그 청년은 무척 지적인 이미지였는데, 아침식사를 같은 테이블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남는데, 그 청년은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난 귀국하면 지금 같이 사는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라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 금발머리 청년의 표정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그때 그 청년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뭔가 크래커 비슷한 것이었는데, 색깔과 재질이 보통의 크래커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밀겨 같은 것이 촘촘히 박힌 얇은 사각형의 과자 같은 모양이었는데, 그 친구는 거기에 버터를 발라 먹더군요.  저는 (실은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그런 부페식 공짜 식당에 가면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입에 쑤셔 넣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달걀과 베이컨 등등을 잔뜩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와 이 맛있는 것을 놔두고 저런 걸 먹다니'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상한 크래커 같은 음식을 다시 본 것이 거의 20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영어 원제 :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이라는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영화였지요.  잡지사 일을 하는 마이클 역으로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주인공 리스베트와 한겨울 눈으로 덮힌 오두막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뭔가를 심각하게 의논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뭔가를 바삭하고 베어 무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것이 그 덴마크 청년이 먹던 그 크래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찾아 유튜브와 구글을 열심히 뒤져 보았으나 못 찾았습니다.  원작 소설 속에서도 그 아침식사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더군요.  그러나 그 크래커 같은 빵이 확실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나중에 웹을 뒤져보니, 그건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많이 먹는 크내커브로(knäckebröd, 덴마크어로는 knækbrød, 영어로는 crispbread)라는 빵이었습니다.  바이킹들이 문헌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으므로 이 빵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대략 기원 후 500년 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러니 바이킹들도 아마 항해시에는 이 빵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바삭바삭한 빵을 굽기 위해서는 오븐도 필요없고 평평한 돌이나 번철에서 그냥 귀리나 호밀 반죽을 굽기만 하면 되고, 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한번 만들어 놓으면 수개월씩 보관할 수 있었으므로 바이킹들의 항해에 딱 좋았을 것입니다.


그 덴마크 청년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이 크내커브로는 지금도 북부 유럽에서 꽤 먹는 음식입니다.  아마 스웨덴이라는 이국적인 특성을 보여주려고 그 밀레니엄 영화에서도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크내커브로를 먹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건 맛이 있을 턱이 없는 음식이므로 전통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인식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건강과 전통의 관점에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알고 보면 바이킹들도 레드 제펠린의 저 노래에 나온 것 같은 무적의 전사들이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어 목숨을 걸고 부자집 담을 넘어야 했던 강도들 같은 존재였고, 크내커브로도 그런 절박한 이민자의 애환이 깃든 음식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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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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