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8.15 15:22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모처럼 맞은 절호의 기회를 지휘부의 처절한 무능함 속에서 날려버리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머리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이미 끝났다고들 말했지만, 그의 클래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가 주저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텐데도, 그는 이런 위기 속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후방으로 침입한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를 막기 위해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등 허둥거렸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병력이 아주 많았습니다.  최우익의 다부 외에도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과 근위대 등 어제 밤에 장전해둔 탄약이 머스켓 약실에 그대로 들어 있는 병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폴레옹의 가장 큰 관심은 다부의 우익이었습니다.  이번 전투의 승패는 어떻게 적의 공격을 막아내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적의 이 기습 공격을 분쇄한다고 해도 그건 현상 유지일 뿐, 전쟁을 끝내려면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원래 의도했던대로 우익의 다부가 제대로 된 묵직한 공격을 퍼부어야 했습니다.  이번 전투의 정수는 다부 쪽에 있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큰 그림을 잃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공격을 서두르라'고 명령한 뒤, 놀랍게도 다른 모든 군단장들 대신 아더클라에서 악전고투 중인 마세나의 제4 군단에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쪽을 돌파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다른 군단들은 그대로 현 위치를 지키게 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아더클라에서 벨가르드의 부대와 교전 중이라서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습니다.  왜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가장 단순한 이유는 마세나가 클레나우와 가장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침착성과는 별도로, 상황은 정말 위급했습니다.  그러니 더 동쪽에 있던 우디노나 막도날의 군단을 이동시키는 것은 너무 시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이동시키면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꾼단 말입니까 ?  궁극의 예비대인 그의 근위대는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예비대로 아껴두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현 상황이 그렇게까지 급박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남는 옵션은 마세나로 하여금 아더클라에 집착하지 말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클레나우를 제압하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분명히 이미 교전 중인 적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질서있는 전술적 후퇴가 까딱 잘못하다간 진짜 패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솜씨 있는 지휘관이 숙련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더클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성공적으로 떨쳐내고 후퇴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새벽에 행군해 온 그 길을 다시 되짚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 길목에는 새벽에는 없었던 것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이었지요.  이들과 엉겨붙으면 또 끝장이었고, 또 이들을 어떻게든 신속하게 제압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 대책없이 마세나가 그대로 남쪽으로 달려가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맞붙는다면, 마세나와 아더클라 사이는 또 뼝 뚫린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콜로브라트가 밀고 들어오면 그것 또한 큰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대해서 간단한, 그러나 무책임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바로 대규모 기병대를 오스트리아군 얼굴에 냅다 집어던져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지요.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Eylau)에서도 위기에 처하자 뮈라의 대규모 기병대를 돌격시켜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뮈라의 기병대는 빽빽히 늘어선 러시아군 보병 대오를 관통하여 뚫고 들어갔다가 말을 돌려 다시 뚫고 돌아오는 장관을 연출하기는 했었으나, 정작 그 돌격으로 적에게 입힌 피해는 정신적 충격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벌긴 했지요.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같은 목적으로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무작정 기병 돌격은 기병들의 큰 피해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기병대를 맡을 지휘관도 적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기병 지휘관이었던 불꽃 남자 뮈라는 이런 위험천만한 돌격을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했고, 하일스베르크 전투의 경우 뮈라는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대포의 산탄에 말을 잃고 낙마하면서 장화 한짝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우습게 여기며 미친 듯한 돌격을 여러번 이끌면서도 부상은 거의 입지 않았지요.  그러나 뮈라는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담당할 사람은 예비 기병대 사령관인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ères)였습니다.




(베시에르입니다.  사실 그가 얌체에 기회주의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친이었다가 원수로 변한 란과 결국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베시에르는 분명히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전쟁터 최전선보다는 나폴레옹 주변을 알짱거리며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다 란(Lannes) 원수로부터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네 ?'라는 팩트폭력을, 그것도 나폴레옹 코 앞에서 당하고는 그와 결투 직전까지 갔던 바 있었습니다.  물론 열혈남아 란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베시에르도 위험 앞에서 꼬리를 말아쥐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한 바로 그 다음날 란이 최전선에서 지휘를 하다 적 포탄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자, 베시에르가 아무리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시에르가 이 명령을 받은 것은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그가 맡았던 프랑스군 예비 기병대에는 기병 사단이 3개 있었으나, 그 중 생-쉴피스(Saint-Sulpice)의 사단은 마세나를 지원하러 차출되었고, 아리기(Arrighi)의 사단은 새벽에 로젠베르크가 일으킨 소동 탓에 다부의 우익을 지원하러 간 상태였습니다.  남은 것은  제1 중기병 사단 하나 뿐이었는데, 그나마 여기에는 총 3개 여단 중 생-제르맹(Saint-Germain) 장군의 기병 여단이 후방으로 빠져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족한 기병대의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아끼고 아끼던 근위 기병대까지 차출해주었으나, 그 준비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 기병대가 돌격을 하는데, 그 준비에 시간이 걸려서야 되겠습니까 ?  결국 베시에르는 제1 중기병 사단의 2개 여단 2800명을 그 지휘관인 낭수티(Nansouty)의 지휘 하에 돌격시켰습니다.  본인은 일단 뒤에 남았습니다.  어쩌면 란의 영혼이 이 모습을 보며 '내 그럴 줄 알았다'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르지요.




(낭수티 장군입니다.  그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약탈 등으로 개인주머니를 채우지 않은 몇 안되는 청렴한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청렴했을 뿐 청빈하지는 않아서, 씀씀이는 계속 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패망 이후 루이 18세 치하에서 급료가 많이 깎이자,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고 합니다.)




낭수티가 돌격해 들어간 곳은 아더클라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과, 그 바로 남서쪽에 자리를 잡은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 사이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넓은 공간에는 프로하스카(Prochaska) 중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사단 1개만 얇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병대 수가 부족하다고 해도, 큰 말에 올라탄 덩치 큰 기병들로 구성된 중기병대가 큼직한 군도를 뽑아들고 두두두 달려들어가면 그 정도의 보병들은 쉽사리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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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8.12 09:55

맛없는 음식과 전투 본능으로 유명한 영국인들은 사람들이 '예술적 재능이 떨어진다'라고 비웃기는 해도 문화적 강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축구, 골프와 같은 스포츠는 물론이요, 대중음악과 영화 등 비교적 현대적인 문화 트렌드에서 특히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또 피쉬앤칩스와 장어파이로 쌓은 악명이 있기는 해도, 홍차와 더불어 펍(pub)의 맥주 문화도 영국의 존재감을 세계에 퍼뜨리고 있습니다.  


서머셋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na bondage)'에서 주인공 필립이 그의 아재 친구 아쎌니의 집을 일요일에 방문한 장면에서 영국 가정 음식 문화의 단편을 보여줍니다.  가족들과 함께 로스트비프(roast beef)와 요크셔푸딩(Yorkshire pudding)으로 오찬(dinner)을 먹고, 남자들끼리 잡담을 나누다가, 오후 늦게 빵과 버터를 곁들인 홍차까지 마시지요.  오찬이 차려지자 아쎌니는 6펜스(현재 가치로 대략 7천원) 짜리 은화를 하나 꺼내 딸에게 주며 맥주를 한주전자 사오도록 하지요.  아쎌니가 이것을 주석 맥주잔(pewter tankard)에 따라 마시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단언컨대(My word), 영국 맥주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  그는 말했다.  "로스트비프와 라이스푸딩, 왕성한 식욕과 맥주 같은 소박한 즐거움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세.  나도 한때는 숙녀와 결혼을 한 적이 있었다네.  세상에나 !  이 친구야, 절대 숙녀와 결혼하지는 말게나."




('인간의 굴레'는 1934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베티 데이비스 아이즈'라는 팝송 제목으로도 유명한 베티 데이비스가 주연했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덴마크나 독일, 벨기에와 프랑스 맥주까지도 잘 알려져 있고 많이 팔립니다만, 영국 맥주에는 뭐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는 푸대접을 받고는 있지만, 영국인들은 자국 맥주를 사랑하고 나름 꽤 자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맥주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이 외국 전쟁터에 나가서는 그 나라 술을 마시며 영국 맥주는 잊었을까요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중심으로 14세기 네덜란드 및 이베리아 반도를 포함한 유럽사를 기록한 프루와사르(Jean Froissart)라는 분의 연대기에는 당시 스페인에서 싸운 영국군의 이야기가 씌여 있습니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영국군이 패배한 이유는 다름아닌 영국 맥주가 없어서였습니다.  영국인들은 몸에 습기를 유지시켜주는 든든하고 돗수가 높은 맥주(good heavy ale)을 마셔야 하는데, 그게 없다보니 단맛 대신 신맛이 나는 포도주(dry sharp wine)를 마셨기 때문에 간과 폐, 그리고 장을 바싹 태워버려 몸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많은 영국군이 열병과 이질 설사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 프루와사르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이런 현상이 하급 병졸들은 물론이고 영주나 기사, 견습기사(barons, knights and squires)까지 다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즉, 영국에서는 기사나 병졸이나 원래는 다 맥주를 즐겨마셨다는 것이지요.




(백년전쟁 중의 슬루이스 해전 모습입니다.  제가 읽었던 프르와사르 연대기 펭귄문고판 표지가 저거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맥주가 없으면 큰일이 나는 것은 영국 육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을 그린 책 개럿 매팅리(Garrett Mattingly)의 책 '아르마다'(The Armada)를 보면, 스페인 무적함대를 아일랜드 쪽으로 쫓아 보낸 뒤 영국 항구로 돌아온 영국 함대의 모습은 금의환향하는 영웅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습니다.  아마 스페인 함대와 싸우러 출항할 때는 적의 화승총이나 대포, 심지어 스페인군의 유명한 미늘창에 많은 사상자를 내리라고 비장한 각오로 나갔을텐데, 결국 그런 것에 죽은 선원은 거의 없었음에도 많은 선원들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영불 해협 인근에서 알짱거린 것이 전부였으니 그다지 긴 항해도 아니었는데도, 괴혈병으로 선원들이 픽픽 죽어넘어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항구로 돌아온 다음에도 급료는 커녕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제대로 받지 못한 선원들은 계속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이 참상의 원인에 대한 영국 함대 지휘부의 결론은 단순명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맥주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으로 원정을 간 영국 기사들이나 영불 해협에서 스페인 함대 뒤를 따라다니던 영국 함대의 선원들이 good heavy ale을 마시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맥주는 살균처리도 못 했고 또 알코올 돗수가 낮아 오래 보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외국으로 수송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 시대 영국 해군에서는 출항 직후에만 맥주를 배급했고, 저장해둔 맥주가 떨어진 이후에는 럼주에 물을 타서 배급했습니다.  럼주나 브랜디는 알코올 돗수가 높아서 절대 상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브랜디는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비싼 것이었으니 천한 선원들이나 졸병들에게 줄 물건이 아니었고,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럼주가 딱 적격이었지요.  나폴레옹 시대때만 해도, 위스키는 아직 영국에서조차 유행을 타기 전이었습니다.


한편, 인도 주둔 영국군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선원들의 경우 그래도 몇 개월마다 한번씩 그리운 영국 맥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으나, 지구 반대편에 배치된 인도 주둔 영국군은 본토로 귀환하기 전에는 전혀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당시의 범선으로는 영국에서 인도까지 4개월 이상 걸렸기 때문에 맥주가 상해버렸던 것이지요.  인도 현지의 화주인 아락(arrack)주나 럼주만 마실 수 있었던 병사들은 가끔씩이라도 맥주를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인도까지의 선박 운송 기간 중 맥주가 상하지 않도록 영국의 몇몇 양조장에서 특별히 좀더 홉을 많이 넣고 알코올 돗수를 높여서 빚은 맥주가 바로 IPA, 즉 India Pale Ale 입니다.  보우(Bow) 양조장에서 처음으로 IPA가 빚어진 것이 1787년인데, 인도 현지에 아예 영국 맥주 공장을 지은 것이 1830년이니 꽤 긴 세월 동안 인도 주둔 영국군은 맥주 부족에 시달렸을 것 같습니다.





원래 맥주하면 독일이지요.  그래서인지 1898년 독일이 청나라의 팔을 비틀어 청도(칭따오)를 99년간 조차하는데 성공하자, 고작 5년 뒤인 1903년에 독일은 철도와 전신 전화 등 식민지 경영에 필수적인 기간 시설과 함께 맥주 공장을 지었습니다.  라오산 지역에서 발견된 맑은 지하수 외에는 홉과 심지어 보리까지 모조리 독일에서 수입하여 만든 이 맥주가 오늘날에도 양꼬치엔 칭따오라는 그 칭따오 맥주입니다.  이 칭따오 맥주는 첫 맥주가 출하된지 2년 만인 1906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높은 품질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이렇게 건설한 칭따오를 불과 20년도 안되어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잃게 되는데, 이 지역을 공격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당시 연합국 소속이었던 일본군이었습니다.  당시 칭따오 포위전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던 독일군은 최소한 제대로 된 맥주가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1903년 칭따오 맥주의 건립자들 모습입니다.  사실 칭따오 맥주는 100% 독일계는 아니고, 영국과 독일의 합작 회사였습니다.)



영국인들의 맥주 사랑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서 큰 타격을 입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총동원 상태의 전시에도 맥주를 빚어 마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여론이 많았거든요.  가령 1916년 영국 수상이 된 데이빗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독일 잠수함보다 영국인들이 음주가 군수 체제에 끼치는 폐해가 더 크다'라고 공격했고, 결국 영국 전통 맥주집인 펍(pub)의 영업 시간을 단축시키고 양조장을 폐쇄하는 등 맥주 탄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맥주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서 가격을 2배로 올려버렸지요.  그 결과, 1917년 맥주 생산량은 19만 배럴로서, 전쟁 발발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보급품에서 맥주가 빠진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국 육해군의 피라고도 할 수 있는 럼주까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럼주는 참호전의 추위와 습기에 노출된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조금씩이라도 배급되었으나, 식량과 탄약을 수송하기도 힘든 마당에 부피와 무게가 상당한 맥주를 실어나르는 것은 정말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럼주 대신 맥주가 배급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래 배식량은 모두 전쟁 초기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이고, 실제 배급된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프랑스군은 와인을 병사들에게 꾸준히 배급했고, 이를 본 영국군은 '왜 우리에겐 럼이나 맥주를 주지 않는가?'라며 투덜댔다고 합니다.  영국군에게도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프랑스산 와인이 배급되기는 했으나, 대개 품질이 좋지 않은 백포도주였고, 이를 영국군은 vin blong (프랑스어로 백포도주인 vin blanc에서 나온 말인데, 실제 blanc의 프랑스어 발음도 불랑이 아니라 블롱에 가깝습니다)이라고 부르며 투덜거렸습니다.  일부 프랑스산 라거(lager) 맥주가 배급되기도 했지만, 영국산 포터나 에일 맥주에 비해 약하고 밋밋한 프랑스 라거 맥주는 영국 병사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국군 1914년 1일 배식량 :


신선육/냉동육 1.25 파운드 또는 보존육/염장육 1 파운드

빵 1.25 파운드 또는 건빵/밀가루 1 파운드

베이컨 4 온스

치즈 3 온스

홍차 0.625 온스

잼 4 온스

설탕 3 온스

소금 0.5 온스

후추 0.028 온스

겨자 0.05 온스

신선채소 8 온스 혹은 건조채소 2 온스 혹은 라임주스 0.1 온스 

(지휘 장성의 재량에 따라) 럼주 0.06 리터 또는 포터맥주(porter) 0.57 리터

담배 0.29 온스



독일군 1914년 1일 배식량 :


빵 1.66 파운드 또는 건빵 1.09 파운드 또는 계란비스킷 0.88 파운드

신선육 또는 냉동육 0.81 파운드 또는 보존육 0.44 파운드

감자 53 온스(3.3 파운드)  또는 신선채소 4.5~9 온스 또는 건조채소 2 온스 혹은 감자와 건조채소 혼합물 21 온스

커피 0.9 온스 또는 홍차 0.1 온스

설탕 0.7 온스

소금 0.9 온스

시가 또는 담배 2 개피 또는 파이프 담배 1 온스 또는 코담배 0.2 온스

(지휘 장성의 재량에 따라) 증류주 0.097 리터 또는 와인 0.25 리터 또는 맥주 0.5 리터




(이 사진은 영국군의 포탄과 럼주병을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럼주는 저런 커다란 도자기 병에 넣어서 공급되었습니다.  저 도자기 병의 바닥에는 보급창(Supply Reserve Depot)을 뜻하는 S.R.D가 찍혀 있었으나, 병사들은 이를 '군납 럼에 물을 탔네'(Service Rum Diluted) 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은 거의 없네'(Seldom Reaches Destination)라고 부르며 조롱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술이 병사들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반영되었는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병참부는 맥주에 대해서 다소 완화된 입장이었습니다.  가령 1940년에 식량부 장관이던 울스턴 경(Lord Woolston)은 정부 각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맥주 한 잔은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리고 영국의 맥주 양조장은 '소중한 식량을 낭비하는 퇴폐 업종'이라는 오명 대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소중한 맥주 생산에 힘쓰는 산업 전사'라는 포지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942년에는 '군부대를 위한 맥주'(beer for troops)라는 위원회까지 결성되어, '병사들의 식사에 맥주를 공급하는 것은 국가적 의무'라는 구호까지 외쳤습니다.  하지만 특히 대전 초기에는 독일 U보트의 기세가 등등했으므로 해외의 영국군에게 맥주를 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력과 탄약,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는 것도 힘들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멜 장군에게 함락 직전이던 북아프리카 토브룩(Tobruk)에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500 상자의 맥주를 보냈고, 이것이 무사히 하역되자 당시 병사들이 뛸 듯이 기뻐했고 그 뒤로로 이 날을 꽤 오래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맥주업체들의 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래 사진입니다.  이건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 내에 활주로를 확보하자, 영국 맥주업체들이 전선의 병사들을 위문하고자 본토에서 프랑스로 날아가는 스핏파이어(Spitfire Mk IX) 전투기 날개 밑에 맥주통을 매달아 보낸 것입니다.  2천 피트 상공을 고속으로 날아 배달된 맥주통은 딱 알맞은 온도로 냉각되어 이를 받은 병사들을 정말 기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핏파이어 전투기의 이런 생산적인 활동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곧 영국 관세청(Customs and Excise)이 이 사실을 알아냈고, 세금 납부 없이 맥주를 반출하는 것은 위법이라며 금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본토를 오가는 공군기들은 조종석 남는 공간이나 사물함 등에 맥주병을 몰래 가져와 나눠 마셨고, 심지어 외부 연료 탱크(drop tank)에 맥주를 실어 왔습니다.  그렇게 맥주를 실은 연료통을 달고 오는 전투기가 착륙할 때면 전체 공군 기지의 병사들이 다 몰려나와 그 착륙을 노심초사하며 구경했고, 조종사가 미숙하여 거칠게 착륙하는 경우 야유를 보냈다고 합니다.  영국군의 지상 공격기인 타이푼(Typhoon) 조종사였던 데즈먼드 스캇(Desmond Scott)이라는 양반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렇게 연료 탱크에 채워온 맥주에서는 쇠맛이 나서 사실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Source : 서머셋 모옴 '인간의 굴레'

개럿 매팅리 '아르마다'

프루와사르 '연대기'

http://www.urbanghostsmedia.com/2014/08/beer-keg-carrying-spitfires-world-war-two/

http://allaboutbeer.com/article/beer-goes-to-war/

https://archive.org/stream/chroniclesoffroi00froi/chroniclesoffroi00froi_djvu.txt

https://warontherocks.com/2015/06/a-farewell-to-sobriety-part-two-drinking-during-world-war-ii/

https://en.wikipedia.org/wiki/Tsingtao_Brewery

https://en.wikipedia.org/wiki/India_pale_ale

https://yesterdaysshadow.wordpress.com/qingdao-germanys-chinese-colony/

https://en.wikipedia.org/wiki/Beer_in_India

http://net.lib.byu.edu/estu/wwi/memoir/ration.html

https://pointsadhsblog.wordpress.com/2014/05/29/world-war-i-part-2-the-british-rum-ration/

https://www.diffordsguide.com/encyclopedia/475/bws/booze-in-wwi

http://ww2talk.com/index.php?threads/unorthodox-use-of-spitfire-in-normandy-beer.37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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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8.06 16:56

전날 밤 카알 대공도 나폴레옹과 생각하는 것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좌익과 중앙에서 잽을 날리며 적의 시선을 끈 뒤, 강력한 우익의 우회 진격을 통해 적의 측면을 관통하여 끝장을 본다는 것이었지요.  차이는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공격자였던 나폴레옹은 방어자 입장인 오스트리아 측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카알 대공이 한두 시간 먼저 공격을 해들어온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이 베르나도트의 아더클라 무단 이탈과 마세나가 지휘하는 제4 군단의 아더클라 쪽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준비한 회심의 라이트 훅, 클레나우의 진격 방향이 파란색 화살표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와 직각을 이루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붉은색 화살표가 프랑스군 마세나의 제4 군단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이루고 있던 것은 전날 낮에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클레나우(Klenau)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삼베르크(Bisamberg)로 이어지는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의 새벽 작전에 대한 지시를 너무 늦게 통보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출격은 카알 대공이 의도한 것보다 무려 3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어, 공격 시작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아침 8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늦어진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이때 즈음 마세나의 주력 사단들은 모두 아더클라 방면으로 몰려간 뒤였던 것입니다.  특히 르그랑(Legrand)의 사단은 아더클라로의 행군 도중 측면에서 들이닥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의 습격을 받고 대경실색 했습니다.


하지만 르그랑의 사단보다 더 큰일이 난 것은 마세나가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두 마을을 지키라고 남겨두고 간 부데(Boudet)의 사단이었습니다.  마세나는 '뭐 어차피 이쪽은 별 일이 없을테니까'라며 태평하게 달랑 부데의 1개 사단만 남겨두고 갔고, 어쩌면 그렇게 뒤에 남겨진 부데와 그의 부하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을지도 몰랐겠습니다.  부데 사단은 약 한달 전의 에슬링 전투에서 에슬링의 곡물 창고를 지키며 그야말로 혈전을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었고, 그 수도 고작 5천명 정도로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아마 한숨 돌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궃게도, 부데의 사단을 다시 그 곡물 창고로 쳐박아 넣게 됩니다.


아스페른으로 진격을 개시한 클레나우의 제6 군단 약 1만4천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갔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포병대를 전개시켜 포격을 가하자 부데도 10문의 포병대를 동원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 경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프랑스 포병들을 베어넘기고 대포들을 나포했습니다.  이대로 대포들을 잃을 수 없었던 프랑스 보병들이 우르르 물려나와 오스트리아 기병들을 쫓아내고 이 대포들을 다시 탈환했지만, 그 사이에 방열을 마친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해 다시 프랑스군의 대포들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전으로 시작된 부데의 방어전은 결국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대포들을 잃고 버티기가 어려웠던 부데는 결국 아스페른을 포기하고 정들었던(?) 에슬링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슬링으로 물러난다고 해서 뭐 딱히 사정이 더 좋아질 것도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허둥지둥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아주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요하게 추격해왔고, 에슬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려 애쓰던 부데는 결국 오전 10시 경, 거기서도 밀려나야 했습니다.




(부데 사단에 딸린 프랑스군 포병대를 유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모습입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후퇴하는 부데의 사단이 밀려난 곳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였습니다.  여기 다음은 어제 새벽 프랑스군이 대거 도나우강을 건넌 교두보였습니다.  즉, 여기에서마저 밀려나면 이제 16만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기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대포를 방열하고 로바우섬으로부터 보급품을 나르고 있던 종군 민간 상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으나, 그러나 병력도 화력도 미약했던 부데 사단은 뭘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던 부데 사단을 향해 마침내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그람 전투 내내 프랑스군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북쪽 아더클라에서는 전선 중앙을 돌파당한데다, 남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교두보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뜻 밖의 방향으로부터 왔습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해 들어오던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로바우 섬으로부터 불벼락이 날아온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이후 약 1달 넘게 나폴레옹은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지요.  그 준비 중 하나가 로바우 섬 전체의 요새화였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에는 약 124문의 각종 대포 및 박격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1급 전함 1척이 강변에 닻을 내린 것 같은 효과였습니다.  아니, 전함은 양측에 포를 나눠 설치해야 했으므로 그에 비해 모든 포를 북쪽 강변으로 향해 놓을 수 있었던 로바우 섬은 1급 전함 2척이 나란히 강변에 정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일제히 오스트리아군을 강타했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대포가 조잡한 화력만을 낼 수 있다고 해도, 탁 트인 강변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밀집 대형으로 행군하는 보병대에게 날아든 무지막지한 대포알들은 끔찍한 살육을 일으켰습니다.  로바우 섬의 포병대는 신나게 대포알을 날려보냈고,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공포에 질려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밀려난 클레나우는 일단 숨을 돌리고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로바우 섬의 프랑스 포병대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재빨리 진격하여 몇 천 밖에 안 되는 프랑스 보병들을 밀어낸다면 최소한 프랑스군의 소중한 다리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방향을 이제 북쪽으로 틀어 프랑스군의 노출된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레나우는 두가지 방안 모두 택하지 않고,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결정합니다.  왜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은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는 것이었을까요 ?


클레나우가 멈추기로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오스트리아군의 경직성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카알 대공은 물론이고 클레나우 본인도 이렇게 쉽게 프랑스군 교두보까지 일사천리로 돌파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기고 있는 편이 약간 당황한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운좋게 적의 중앙부 뒤쪽까지 잘 뚫고 왔다고 해도,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고작 1만4천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10만 단위의 대군이 밀집한 적진 한 가운데에 막상 뛰어들고나니, 불안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왜 달랑 1개 군단을 적진 뒤쪽으로 찔러 넣었느냐고요 ?  그러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분명히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을 찔러 넣었거든요.  클레나우도 바로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  


클레나우보다 좀더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던 콜로브라트는 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더클라를 향해 북진하던 르그랑의 프랑스 사단과 딱 마주쳤습니다.  군단 대 사단의 만남인데다 공격 준비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행군 중에 생각하지 않은 내습을 당한 셈이어서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유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콜로브라트의 행동은 복장이 터질 정도로 굼뜨고 느린데다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의 임무가 프랑스군 후방으로의 기습 침투라는 것을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헷갈릴 정도의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일단 원래의 진지인 비삼베르크 언덕에 1개 여단을 뚝 떼어놓고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르그랑 사단을 가볍게 밀어내고 로바우 섬이건 마세나의 뒤통수이건 심지어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까지도 별 저항 없이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전면은 탁 트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르그랑 사단과 마주치자 콜로브라트가 첫번째로 내린 명령은 공격 명령이 아니라 후방 퇴로 확보였습니다.  그나마 빈약한 르그랑 사단에게조차 과감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먼저 포병대를 내세워 대포알만 날려보내는 소극적인 지휘로 초지일관 했습니다.  




(이 분이 콜로브라트 백작 Johann Karl, Graf von Kolowrat-Krakowsky 이십니다.  이분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패전인 호헨린덴 전투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등에서 모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그의 빛나는 승리가 100% 자신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라고는 말 못 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분의 무능함은 빛났는데, 그럼에도 이 분이 연달아 주요 군단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 오스트리아가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패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양반이 혁혁한(?) 활약을 한 바그람 전투 직후, 이 60이 넘은 노장은 무려 원수(Feldmarschall)로 승진합니다.)




아무리 카알 대공이 작전이 훌륭하다고 해도 무엇하겠습니까 ?  그의 작전을 수행할 장군들은 여전히 낡은 교리에 묶인,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 없던 무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능한 귀족들이 핵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운 좋게 손에 들어온 승리의 기회를 날려 먹고 말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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