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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315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 2018. 2. 25.
어느 용자의 초상 -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탈출 1809년 5월 12일 포르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허겁지겁 산길로 후퇴해야 했고, 따라서 모든 짐은 물론 대포까지 다 버리고 가야 했습니다. 분노한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학살당할 것이 뻔한데도 부상병들을 버리고 감은 물론, 군자금까지 병사들에게 마구 나누어줄 상황이었습니다. 때는 이른 5월이라 차가운 비까지 계속 내려 후퇴하는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까지 축 적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 길 바쁜 프랑스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폰트 노바(Ponte Nova, 새 다리, 스페인어로는 Puento Nuevo)라는 이름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술트 원수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두개의 긴 대들보만 남기고 그 위를 가로지른 널판지는 다 해.. 2018. 2. 10.
교황과 무역 - 포르투갈의 전운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바친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칭호는 단지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나폴레옹에게 공치사로서만 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로마는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로마 및 그 주변은 원래 세속 군주로서의 로마 교황이 가지는 교황국(the Papal States)에 속하는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눈 앞에는 고양이는 커녕 생쥐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오 7세(Pius VII)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다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1809년 5월 17일, 나폴레옹은 빈에서 칙령을 내려 로마 교황의 세속 군주로.. 2018. 1. 7.
[재탕] 나폴레옹의 출세 과정 - 툴롱 (Toulon) 포위전 3줄 요약 : 1) 일단 기본 실력은 키우자 - 아주 탄탄히 키우자2) 인맥을 만들자 - 나폴레옹 같은 천재조차 인맥 없이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었다3) 가장 중요한 것은 '출세를 위한 집념과 의지'이다 -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하면 충실한 하인이 될 뿐이다 시대가 위인을 만드는가 또는 위인이 시대를 만드는가 하는 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떡밥이고, 예전에 '불멸의 이순신'을 연기했던 김명민 본좌는 '시대가 위인을 만드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지요. 제 생각에는 위인될 만한 인물이 시대를 잘 만나야 위인과 시대가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사람 그릇이 그저 그렇다면 말짱 헛것이고 (저 같은 경우는 IMF와 리먼사태를 둘다 겪었습니다만 떼돈을 벌 이 두번의 기회에서 얻은 것이 아.. 2017. 12. 29.
브랜드 가치와 실속 - 나폴레옹의 재혼 성공한 남자가 이혼을 하는 이유는 조강지처와의 성격 차이나 식어버린 애정 문제가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새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세핀과의 이혼이 공식 발표되기 한 달 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인 콜랭쿠르는 본국으로부터 지시문을 받습니다. 나폴레옹과 로마노프 가문과의 혼인을 추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상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둘째 여동생, 안나(Anna Pavlovna)였습니다. 안나는 당시 14세로서 사실 결혼하기는 너무 이른 나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생일이 1월이었으므로 불과 몇 달 뒤면 15세가 되었고, 15세면 당시로서는 혼인이 불가능한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과 무려 26세 차이가 나는 이 어린 소녀에게 혼인 의사를 밝힌 것이지요. (안나 파블로브나입니다. .. 2017. 12. 17.
사랑과 이별 - 조세핀과의 이혼 오스트리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것은 아스페른-에슬링보다 더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나폴레옹 본인이 시작한 싸움이었습니다. 바로 이혼이었지요. 보통 남자였다면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조세핀은 결코 이상적인 배우자가 아니었습니다. 황후에 걸맞은 품위와 교양 대신 허세와 낭비가 심했고,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동안 젊은 미남자들과 바람을 피운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조세핀은 시댁 식구들과의 사이도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보나파르트 가족들은 처음부터 조세핀을 싫어했습니다. 그건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보기에 이제 막 출세를 시작한 집안의 대들보 나폴레옹이 나이도 많고 애까지 .. 2017. 12. 10.
누가 누굴 봉쇄한 것일까 - 나폴레옹과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 최근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해상 봉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지요. 해상 봉쇄란 사실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는 구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령 유니세프에서 북한 아기들을 위해서 보내주는 백신 등 의약품도 막을까요 ?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또는 태국이 북한으로 수출하는 쌀을 압류할까요 ? 그럼으로써 손해를 보는 태국 곡물 회사의 손해는 누가 보상해주나요 ? 쌀은 식량이니까 봐준다고 쳐도, 가령 몰리브덴(molybdenum)은 어떤가요 ? 이건 대륙간 탄도탄의 탄두 부분(nose cone)에 꼭 필요한 합금 재료이기도 하지만, 공구강 등 일반 산업용으로도 많이 쓰이는 금속입니다. 페루에서 북한에 수출하는 이 금속 자원을 미해군이 마음대로 몰수할 국제법적 근거가 있을까요 ? 이것이 해적 행위와 무엇이 다른.. 2017. 12. 3.
나폴레옹과 인공지능의 체스 대결 - Mechanical Turk 이야기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빈을 두번째로 점령했을 때의 일입니다. 참혹했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와 바그람 전투를 치르고 난 뒤 심신이 피폐했던 나폴레옹이 머물고 있던 쇤브룬 궁전에 색다른 여흥거리 하나가 찾아옵니다. 독일어로 Schachtürke(영어로는 chess turk, 또는 mechanical turk라고 알려졌습니다)라고 불리던 체스 두는 인공지능 기계였습니다. 맬젤(Johann Nepomuk Maelzel)이라는 독일 발명가가 가져온 이 기계는 39년 전인 1770년 만들어진 물건이며, 당시 그 첫번째 체스 상대는 나폴레옹도 잘 알고 있던 코벤츨(Ludwig von Cobenzl) 백작이었다고 했습니다. 코벤츨 백작은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마렝고 전투 이후 제2차 대불동맹전쟁을 끝내면서.. 2017. 11. 26.
땅과 돈과 피의 평화 - 쇤브룬 (Schönbrunn) 조약 7월 11일 츠나임 휴전이 이루어지자, 전투 현장에 있던 장교들과 병사들은 양측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불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단 프랑스 측에서는 나폴레옹의 참모들, 특히 참모장 베르티에(Berthier)가 이 휴전에 반대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 배은망덕한 합스부르크 왕가를 완전히 권좌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요. 놀랍게도 오스트리아 측, 즉 합스부르크 궁정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는데 왜 패배를 인정하고 휴전하느냐는 것이었지요. 양측의 불만은 다 근거가 있었습니다. 프랑스로서야 이기고 있는데 왜 그만 하느냐는 불만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도 비록 물러서기는 했.. 2017. 11. 18.
바그람 전투 (제18편) - 통쾌하지 않은 승리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 2017. 11. 11.
장발장이 먹은 미리엘 주교의 수프 이야기 2012년,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 영화 중에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은접시에 퍼주는 음식을 굶주린 장발장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체 저 음식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화면을 보면 뭔가 고기도 좀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그 음식이 당연히 원작 소설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는 아닙니다만,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는 원작 소설에 묘사가 되긴합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가정부 할머니인 마글루아 부인이 내놓는 미리엘 주교의 평범한 저녁 식사 메뉴가 나열됩니다. Cependant madame Magloire avait servi le souper. Une soupe faite avec de l'eau, de l'huile, du pain .. 2017. 10. 29.
바그람 전투 (제17편) - 요한이 왔다 !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 2017.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