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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전투 내내 나폴레옹의 옆을 지키며 전투 현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던 사바리 장군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킬 정도로 잘 싸웠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전투의 승패는 어느 쪽의 사상자가 더 많았는가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꼬리를 말아쥐고 물러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데, 보통 등을 보이며 후퇴하는 측의 대오가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그 뒤를 추격하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패자의 사상자 수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바그람 전투에서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대오를 굳게 지켰고, 결국 프랑스군은 평소 하던 대로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재정난을 일으킬 정도로 군비를 투입하여 카알 대공이 열심히 육성한 상비군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굳센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대 스파르타에 전해지는 격언 중에 '한 국가와 반복하여 자주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유는 잦은 전쟁 경험은 상대국에게도 군사 역량의 강화를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겪은 바가 딱 그랬습니다.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에 의한 징집군의 편성, 기동력을 중시한 전술, 자율성과 유연성을 잘 살려주는 군단제 운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지고 있던 상대적 우월성은 어느 틈엔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어느 정도 복제되어 있었고, 이는 전투력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또 카알 대공의 근본적인 전략도 오스트리아군의 비교적 질서있는 후퇴에 일조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전쟁 시작 전부터 개전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요.  그는 어차피 오스트리아 혼자 싸우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꺾을 수는 없으며, 만약 싸우더라도 최후의 일인까지 다 죽어 쓰러지는 결전보다는 적당히 싸우다 패배가 분명해지면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더라도 군사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상태여야 나폴레옹과의 종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그런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2~3시 경에 이미 후퇴를 결정했고,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힘을 좀 남겨둔 채로 후퇴를 시작하여 군사력을 보존한 채, 심지어 프랑스군 포로 수천 명까지 끌고 후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 새벽, 나폴레옹이 혹시 오스트리아군이 어제에 이어 다시 도전해올 것인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건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그람 전투가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꽤 순한 전투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바그람 전투는 이긴 프랑스군이나 진 오스트리아군이나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상자 수를 낸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양측의 참전 병력이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17만, 오스트리아군도 요한 대공의 병력까지 합해서 약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되어 있지요.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군대는 언저리까지만 오고 총 한방 쏘지 않았으니 전투 참전 병력 수에서는 빼는 것이 맞겠고, 또 프랑스군도 로바우섬을 지키던 보병들은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일부 빠지겠습니다만, 아무튼 양측이 무려 3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는 유사 이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이 한 자리에 집결하여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참전 병력이 많으니 당연히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상자 수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고, 또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대내외 과시를 위해 적의 사상자 수를 부풀리고 아군의 사상자 수는 양심도 없이 작게 조작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 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서는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전사 1,500에 부상 3~4,000으로 경미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실제 사상자 수는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혹자는 4만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도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약 20% 가까운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승자 측의 사상율이 약 10%, 패자 측은 약 20%가 상식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바그람 전투는 양측 모두 패배였던 셈입니다.  


양측의 피해가 모두 컸던 이유는 이 바그람 전투는 유례없는 대규모 포격전을 동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488문, 오스트리아군도 414문이나 되는 전례없는 막강한 화력을 총동원했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특히 이 전투의 주무대였던 마르히펠트의 평원이 지형과 지질 탓이 컸습니다.  이곳은 땅 표면이 비교적 단단하고 매우 평평한 지역인지라, 대포알들이 땅에 처박히지 않고 통통 튀며 먼거리까지 날아가면서 많은 병사들의 팔다리와 허리를 꺾어놓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전투가 끝난 뒤, 이 전투는 포병에 의한 승리라며 휘하 포병들의 노고를 칭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병대에게 영광을 더해주고자 전체 포병단 총사령관인 라리부아지에르(Jean Ambroise Baston de Lariboisière) 장군의 아들 페르디낭(Ferdinand Baston de La Riboisière)을 뽑아 이 승전보를 파리로 전하게 했습니다. 





(이 그림이 드물게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이 한꺼번에 나온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초상입니다.  바그람 전투 당시 27세였던 페르디낭은 카라비니에, 즉 총기병대 소속 장교였는데, 역시 나폴레옹의 과도한 욕심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1812년 보르디노 전투에서 전사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너무나 슬픔에 젖은 나머지 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1812년 겨울을 못 넘기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낭이 들고간 승전보에는 파리 시민들이 기대했던 화려한 전과는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그런 전과는 노획한 적의 군기와 대포, 그리고 많은 포로의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이 좀 부실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10폭의 군기와 20문의 대포, 그리고 약 7,500의 포로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빼앗긴 것은 군기 12폭, 대포 21문에 포로도 약 7천 이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적자를 보았던 셈이지요.   그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이 계산서를 받아든 나폴레옹은 '전쟁이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노획한 대포도 포로도 거의 없구나, 아무 결과가 없군'이라며 한탄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전투 다음날인 7월 7일 아침 잠에서 깬 나폴레옹은 혹시 카알 대공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도전해오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날 아침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의 막사를 찾은 막도날드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주고는 그를 '프랑스 제국의 원수'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즉, 영광스러운 원수의 계급으로 승진을 시켜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디노와 마르몽에게도 원수 계급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병사들은 막도날과 우디노는 그렇다치고, 마르몽은 뭔일래냐 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파르퀑(Parquin)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아예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막도날은 프랑스가 지명했고, 우디노는 군이 지명했는데, 마르몽은 우정이 지명한거라네"

(La France a nommé Macdonald, l'armée a nommé Oudinot, l'amitié a nommé Marmont)


사실 마르몽 달마시아(Dalmatia) 군단을 이끌고 최후의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아무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원수 임명장과 함께 별도의 개인 편지를 함께 마르몽에게 보내,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지만, 넌 이 계급에 어울리는 전공을 올린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갈구기도 했습니다.





(마르몽은 배신의 대명사로서, 라구사 공작이었던 그를 따서 Raguser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현대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봐도 정말 raguser는 trahir, 즉 배신하다라는 말의 동의어라고 설명이 나옵니다.  당대에는 더 심해서, 1830년 7월 혁명 당시 그가 시위 진압을 주저하자, 부르봉 왕가의 앙굴렘 공작은 그에게 "그를 배신했듯이 우리도 배신하려는거냐 ?" 라며 맹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갈굼을 당한 마르몽에게 '승진을 정당화시켜줄 전공을 세우라'는 말과 함께 카알 대공을 추격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의 달마시아 군단은 1만1천 정도로 매우 빈약한 편이었지만 전날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아 체력 고갈이 없는 유일한 부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 마르몽은 3일 후인 7월 10일 츠나임(Znaim)에서 카알 대공의 잔존 병력 약 5만을 포착했습니다.   1만대 5만의 대결이었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마르몽은 바로 뒤를 나폴레옹의 본대가 따라올 것이므로 적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지는 전법을 썼습니다.  결국 양측이 하루를 넘겨가며 수천 명씩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다음날 저녁 무렵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하자, 카알 대공은 휴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카알 대공 인생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후 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는 이 휴전 협정을 맺으며 총사령관직을 비롯한 모든 관직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카알 대공은 이 휴전에 대해 월권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프란츠 황제의 승인없이 이렇게 휴전 요청을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병사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존을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과 그의 가족입니다.  그가 나폴레옹급의 천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현실 감각이 없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래도 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사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처음부터 옳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Jean_Ambroise_Baston_de_Lariboisi%C3%A8re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articles/oudinot-en-1809-1810-les-lauriers-de-la-gloire/

https://en.wikipedia.org/wiki/July_Revolution


댓글
  • 프로필사진 Mloi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라고 쓰셨는데 문장 배치를 잘못하신거 같아요 2017.11.11 20:12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예 편집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2017.11.11 20:35 신고
  • 프로필사진 푸푸냐옹 와우 첫댓글의 영광이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7.11.11 20:20 신고
  • 프로필사진 최홍락 드디어 긴 전투가 끝난 것 같네요. 바그람도 밑에 작성하신글의 댓글란도... 2017.11.12 05:59 신고
  • 프로필사진 장세동 진리를 추구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2017.11.12 22:02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반란주동자를 닉네임으로 쓰시면서 진리를 추구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니 어떤 진리인지 궁금해지는군요. 2017.11.13 08:51 신고
  • 프로필사진 웃자웃어 제가 보기에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보다는 약하지만(프랑스가 능력위주로 장교나 지휘관을 임용하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귀족위주이니.....).
    이전에 비하면 많이 강해진건 사실인것 같습니다. 즉 프랑스군과 완전히 대등하지는 않아도, 어느정도 맞서 싸우는게 가능할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2017.11.12 14:01 신고
  • 프로필사진 유애경 페르디낭,잘 생겼네요^ ^.
    근데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그림은 부자지간 이라기보다 할아버지와 손자같은 느낌...결국 전쟁에 희생되고 아버지도 슬픔으로 쓰러진후 병사 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카알대공의 가족은 화목해 보입니다.
    그도 이어지는 전쟁으로 심신이 많이 지쳤었겠죠!
    전쟁은 정말 없어져야할 비극중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11.12 16:38 신고
  • 프로필사진 투팍아마르 "전투를 앞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라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말했다는데 나폴레옹은 개인의 영광(이라 쓰고 야망이라 읽음)과 프랑스의 위대함을 위해 전쟁을 서슴치 않았던 반면 카를대공은 비록 그에 맞서 싸워야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무의미한 학살극을 줄이려 애를 썼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2017.11.12 18:27 신고
  • 프로필사진 reinhardt100 사실 오스트리아의 경우, 헝가리,체코 민족 문제가 이 당시 정말 심각했습니다. 이 문제와 슐레지엔 상실이 겹쳐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 국력에 비해서 총력전 수행이 매우 어려웠으니까요.

    바그람 전투 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후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투사한 군사력의 최소 1/4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라는 게 간과됩니다만 그만큼 민족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흔히 1차 세계대전 당시 남슬라브 계열 군인들의 태업 및 보로실로프 공세 당시 러시아군에 집단투항하는 모습이 워낙 커서 그렇지, 1866년 대타협 이전만 해도 헝가리 민족은 반합스부르크의 대표주자였습니다. 인구 1/4 이상이 헝가리인이었는데 이들을 전장에 대량 투입시킬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상대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계를 대거 동원했는데, 아무래도 대 오스만 전선에서 싸우는 것 보다는 비효율적이었으니까요.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하게 두드러진게 프랑스 혁명 전쟁기에 오스트리아군이 보여준 전투력입니다. 북이탈리아에 투입된 오스트리아군 절반 이상이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계다 보니 라인 방면이나 플랑드르 방면에 투입된 독일계 병력에 비해 작전 수행에서 비효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2017.11.12 20:23 신고
  • 프로필사진 본토 헝가리계를 동원 못한 이유가 있었나요? 2017.11.15 16:55 신고
  • 프로필사진 reinhardt100 본토님께.

    제가 티스토리가 익숙치 않아서 좀 중구난방적으로 댓글 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 양해 구합니다.

    헝가리나 체코 민족 문제는 크게 몇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통성 문제가 있었습니다. 헝가리 같은 경우, 서기 1000년에 맞추어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책봉을 받아서 기독교 유럽 세계에 편입되었다는 자부심이 꽤나 강했습니다. 그리고 11-15세기 내내 동부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카로이 1세 때인 14세기 후반에는 폴란드-헝가리-크로아티아-왈라키아-몰다비아-보스니아 까지 장악했던 나라입니다. 체코, 이 당시는 보헤미아 왕국인데 이 지역도 13세기 대공위시대에는 합스부르크 따위는 명함 못 내밀 신성로마제국 내 최대 제후, 게다가 당시 독일왕-이탈리아왕-보헤미아왕의 3왕 체제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반면 합스부르크는? 스위스 아르가우의 촌동네 백작에서 겨우 벗어나서 스위스와 상 오스트리아 정도만 간신히 확보한 말 그대로 동네 왕초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가문이 결혼 몇 번 잘 하고 줄타기 몇 번 잘 해서 자신들의 상전으로 올라갔으니 헝가리나 체코 민족 입장에서는 '근본도 없는 벼락출세한 가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헝가리 같은 경우, 마챠시 1세 시절인 1485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신 없을 때, 빈을 함락시켰고 그 전에도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가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헝가리 같은 경우, 1593년부터 시작된 13년 전쟁에서 기껏 왈라키아, 몰다비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했음에도 무능한 황제였던 루돌프 2세가 케네베레츠 평원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독립의 희망을 꺼 버리는 짓만 하니 1606년도에 보스트카이 이슈트반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트란실바니아공국을 만들어 오스만 제국에 투항했는데도 헝가리인들 누구도 반대는 커녕 잘했다 분위기였죠. 이걸 시작으로 해서 헝가리 민족은 17,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에 문제만 터지면 반란을 일으켰는데, 유일한 예외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때였습니다. 체코 같은 경우도 30년 전쟁에서 강제로 재카톨릭화된 것에 대한 반감 및 합스부르크령이라는 이유로 스웨덴군의 집중적인 수탈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이후 17-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해 준 것도 없이 제국 내에서 공업이 발달했다는 이유로 중과세를 집중적으로 부과, '부유한 체코 지역을 쥐어짜서 못 사는 동네, 특히 오스트리아와 티롤, 크로아티아 지역 변경 군관구를 경영할 자금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백년도 더 진행됩니다. 이게 슐레지엔을 최종적으로 상실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는 더 이상 세금 쥐어짤 동네가 체코와 북이탈리아밖에 남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고, 그 중 북이탈리아는 베네치아공화국이나 사보이아 왕국등의 경쟁국가들과의 세율 경쟁 문제까지 겹치면서 쥐어짤 수도 없었고, 결국 체코만 더 쥐어짜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악화됩니다. 이건 19세기, 아니 20세기 초반까지 완화되기는커녕 계속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20세기 초반 이중제국이 붕괴되는 결정적 신호탄으로 작용합니다.

    세번째, 당시,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스만제국 국경지대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덕분에 한때 구 헝가리 왕국 전체, 베오그라드와 보이보디나 지역까지 합스부르크가 차지하긴 했지만, 1737-1739년에 있었던 7차 터키-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한 번에 싹 다 말아먹어버립니다. 이 때 오스트리아가 넘긴 영토가 왈라키아 전역, 서부의 바나트(티미쇼아라)를 제외한 트란실바니아 남부 및 중부, 베오그라드, 보이보디나 등 한 마디로 기껏 40년동안 빼앗아 온 영토를 이거 하나로 싹 다 날린겁니다. 특히, 베오그라드 상실이 치명적이었는데, 베오그라드가 발칸 반도 서부에서 도하하기 가장 유리한 위치로써 터키 제국 북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죠. 그런데 터키가 이곳을 가지게 되면서 언제든지 밀고 올라올 수 있다는 공포감이 그 당시까지는 현존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7차 전쟁 당시, 베오그라드 공방전이 끝나자마자 터키는 대규모 원정군을 추가로 동원 제3차 빈 포위를 하려고 했지만, 러시아 전선이 급박해지면서 중단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에, 1770년대 후반, 바이에른 선제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대터키방어를 무시하고 모든 병력을 바이에른에다가 투입했는데, 당시 헝가리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죠. '그러다가 터키가 북진하면 너네가 책임질거냐?'였고 당연한 걱정이지만, 합스부르크는 그건 우리와 상관없다 식으로 무책임하게 넘겨버렸죠. 다행히도 당시, 터키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완패를 하는 바람에 군대 재건에 집중해야 해서 기우에 그쳤지만,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를 그저 쓰고 버리는 말 정도로 본다는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번째로, 헝가리 병력의 구성문제입니다. 헝가리나 폴란드 같은 국가는 기병이 주력인데, 이 당시 서구권 군대는 기본이 전열 보병전술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헝가리 인들하고는 그리 맞을 리 없었죠.

    일단 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결론은?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나 체코 민족에게는 압제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017.11.15 22:29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이 언제인가요?? 신성로마제국 황제목록을 봐도 잘 모르겠어서요... 2017.11.16 06:52 신고
  • 프로필사진 본토 흥미로운 내용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궁금한게 해결됬어요 ㅎㅎ 혹시 나시카님처럼 관련 내용 블로그 같은데 올리시나요? 2017.11.16 16:50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사례 좀 부탁드려요. 2017.11.16 17:08 신고
  • 프로필사진 Guillaumet 재밌게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에 오스트리아 여행가서 본 카알대공 동상이 생각나네요. 확실히 동상이 세워질 만한 인물이였던거 같습니다 2017.11.13 03:46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나폴레옹을 주춤하게 만든 카를 대공이 더이상 오스트리아군을 이끌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전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시카님 글 읽고나니까 이해가 잘되네요 ㅎㅎ 2017.11.14 08:07 신고
  • 프로필사진 jager 그래도 카를 대공이 천수는 누린 거 같은데, 만약 계속 군을 지휘했으면 끝이 안좋았을겁니다 2017.11.14 09:49 신고
  • 프로필사진 reinhardt100 본토님 블로그 같은거는 하지 않습니다. 해봐야 헛소리하는 사람들 와서 헛소리 늘어놓는거 문제와 저작권법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일이 각주 다는게 귀찮아서요. 댓글달아주고 처리하는게 더 편하기도 합니다. 2017.11.16 17:29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어느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거에요?? 이건 헛소리도 아니고 저작권의 문제도 상관없는것 같은데요 2017.11.16 17:46 신고
  • 프로필사진 reinhardt100 댓글 보기 싫다. 황당하다. 불쾌하다. 어설프게 댓글달지 말라. 그 밖에도 표현들 많이도 달아놓았었죠? 그리고 꼬박꼬박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보기
    싫은 댓글 다는 사람한테 궁금하니까 질문? 앞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변? 기대하지 마세요.
    2017.11.16 23:56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꼬박꼬박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보기싫은 댓글 다는 사람한테 궁금하니까 질문? 앞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변? 기대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황당하네요.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님의 주장의 근거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겁니다. 이걸 얘기 안하는건 님의 주장의 근거만 약화시키는게 될겁니다. 뭐 하고싶은 말만 학술적인 모양의 포장으로 말씀하실거면 답변 안하셔도 됩니다. 맞는지 안맞는지 근거제시 안할것이니 검증하지 말라는 말은 무적이니까요.

    어느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건지를 말해달라는건 님의 주장의 근거를 확실히 해달라는 것이고, 이전에 님의 댓글이 보기 싫었던건 분위기를 망치거나 지금처럼 근거를 밝혀달라고 할때 밝히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인건데, 지난번 것은 개인의 일이니까 안밝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순수하게 학술적인 거잖아요? 말못할 사정이 있나요?

    그리고 전 "어설프게" 댓글달지 말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있으면 해당부분을 복붙하고 해당댓글의 날짜를 옆에 적어주세요. 댓글보기 싫다, 황당하다, 불쾌하다는 지난번의 댓글들 얘기고 이번 댓글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는데 끌어오는 것은 당황스럽네요.
    2017.11.17 06:35 신고
  • 프로필사진 ㅇㅇ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사회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A%B8%B0%EC%8A%A4%EB%AC%B8%ED%8A%B8_(%EC%8B%A0%EC%84%B1_%EB%A1%9C%EB%A7%88_%EC%A0%9C%EA%B5%AD)
    여기 예시 하나 있네요.
    이거 찾는거 하나도 안 어렵고 구글에 헝가리 왕 신성로마제국 하나 치면 바로 나옵니다.
    님 같은 분들보고 핑프라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찾아보면 쉽게 되는걸 꼭 남한테
    난리를 피우는 핑거 프린세스라고...
    자기가 하는 짓을 학술적인 근거 제시 요구라고 포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는데, 학자가 근거 제시를 포함한 확술 활동을 제대로 하면 학술적 권위, 명예, 직위, 금전 등등을 얻죠. 님은 저분한테 뭘 줍니까? 대빵만한 스트레스?
    2017.11.17 17:07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그 전에도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도 있습니다."라고 해서 헝가리 왕이 다른 독일 왕가 가문처럼 여러명을 몇백년에 걸쳐서 황제를 겸임했던 건가 했는데 구구레카스의 정신으로 구글링했더니만 링크의 딱 한명 뿐이었고, 심지어 그 한명은 친아빠가 룩셈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자식이 딸밖에 없던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도 좋게 할겸 해서 양자이자 사위로 데려가서 헝가리 왕에 앉혀준 것으로 헝가리 사람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 왕가로 구분되는 사람이었네요. 참 많군요! 다른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은 죄다 1500년대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이고...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분석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2017.11.17 17:37 신고
  • 프로필사진 ㅇㅇ 저분은 많다고 한 적이 없으니까요. 26년정도면 한동안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별 문제가 없고. 그걸 뭐 수백년 했다고 상상한건 님 자유니 그거야 남이 신경쓸 일은 아니고...
    그 문단의 요지는 그 시점에 합스부르크에 비해서 헝가리 왕가의 역사적 권위가 훨씬 높았다는 거 아닌가요? 그럼 요지에 어긋나는 얘기도 아니죠. 제국 황제 가문쯤 되면 웬만큼 권위 없는 집안으로 아들을 양자나 사위 보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그리고 저도 "친아빠가 룩셈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자식이 딸밖에 없던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도 좋게 할겸 해서 양자이자 사위로 데려가서 헝가리 왕에 앉혀준 것으로 헝가리 사람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 왕가로 구분되는 사람" 관련된 내용 궁금한데 출처 좀 알려주세요.
    2017.11.17 19:22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그거 님이 링크단 위키피디아에서 링크만 몇번 타면 나오는데... 뭐 제가 문의한거에 카운터 같으니까 전 "님 같은 분들보고 핑프라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찾아보면 쉽게 되는걸 꼭 남한테 난리를 피우는 핑거 프린세스라고..."라고는 안할께요.
    26년이면 한동안인게 맞는데 그마저도 독일출신 빨인거지 헝가리왕빨은 아닌거잖아요. 헝가리왕빨이면 이전이나 이후에도 헝가리왕들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요. 사실 저기가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 황제 중 마지막이긴 하지만요.
    2017.11.17 19:45 신고
  • 프로필사진 ㅇㅇ 알아채시니 다행이네요.
    여튼 저 문단의 핵심은 헝가리 왕가가 합스부르크에 비해서 역사적 권위가 높았다는 거지 지기스문드가 신롬 황제가 되는데 헝가리 왕빨이 얼마나 먹어줬는지가 아니죠? 그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동시대에 합스부르크 가가 신롬 황제가문과 통혼하거나 양자로 들이거나 하는 예를 가져오셔야죠. 그러면 이 봐라 헝가리 왕가가 합스부르크 가에 비해서 당시 권위가 별로 나을것도 없었다 주장할 수 있죠. 핵심 논지가 아닌 부분에서 자존심 싸움에 너무 시간 들일 필요는 없어보이네요.
    2017.11.17 22:48 신고
  • 프로필사진 수비니우스 핵심 논지가 아닌 부분에 질문 하나 한 것을 제3자가 끼어들어서 자존심 싸움으로 몰아가는 데에 제가 시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 안해서 그냥 알려달라고 한건데 말이죠. 그걸 끼어들어서 핑프다 뭐다 할 자격이 누군가에게는 있는 걸까요.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독해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2017.11.18 12: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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