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750

바우첸 전투 (7) - 실패의 원인 패배가 확정되고 나서야 짜르 알렉산드르로부터 지휘권을 온전히 넘겨 받은 비운의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은 투덜거리며 후퇴를 지휘했습니다. 다소 지나치게 꼼꼼한 작전 계획을 짜기로 악명 높았던 그는 이미 후퇴 작전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가장 북동쪽에 위치했던 바클레이의 러시아군, 중앙부의 프로이센군, 그리고 남쪽의 러시아군 본대, 이렇게 크게 3개 집단으로 수행된 후퇴 작전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연합군은 꽤 질서정연하게 후퇴에 성공했습니다. 이 성공은 비트겐슈타인의 능력 덕분이라기 보다는 결국 추격자의 입장인 프랑스군의 문제 덕분이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프랑스군 자체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지형 탓이 좀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바우첸 동쪽에 방어선을 꾸민 이유가 그 쪽 지형이 동쪽으로 갈.. 2023. 5. 22.
레이더 개발 이야기 (34) - Orfordness의 등대 WW2 중 독일의 전파를 이용한 항법 기술은 사악한 영국놈들의 jamming을 당해서 망했을 뿐, 기술 혁신의 산물. 그런데 왜 영국애들은 왜 그런 기술 혁신을 못 이루었을까?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영국애들도 전파를 이용한 항법은 그 전부터 연구했고 실제로 구현도 했음. Loop antenna를 이용한 전파 방향 탐지(radio direction finding, RDF)는 무선통신 초기 때부터 있었던 기술이었고, 따라서 이걸 이용하여 초장거리 등대로 사용하려는 계획은 예전부터 있었음. 그러나 잘 안 되었던 이유는 필요한 고리형 안테나의 크기 때문. 정확한 방향을 잡으려면 고리형 안테나가 커야 했는데, 5미터짜리 대형 loop antenna는 선박에서도 부담스러운 물건이었으므로 항공기에서는 더더욱 불가.. 2023. 5. 18.
바우첸 전투 (6) - 삼면초가 술트와 마르몽, 네의 3면 공격은 당연히 모조리 크렉비츠 언덕에 한꺼번에 집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전선은 크렉비츠(Kreckwitz)에서 도버쉬츠(Doberschütz)를 거쳐 플리스코비츠(Pließkowitz)까지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크렉비츠 언덕 쪽에 가장 가까왔던 것은 술트의 제4 군단이었고, 그 중에서도 프란커몬트 (Frederic von Franquemont) 장군의 뷔르템베르크 사단이 그 선봉에 나섰습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인들끼리 맞붙은 전투였으니 동족 상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남부 독일이자 카톨릭 배경인 뷔르템베르크와 북부 독일의 개신교 배경인 프로이센은 30년 전쟁 동안 온갖 적대감을 불태웠던 사이였으므로 정말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뷔르템베르크는 지.. 2023. 5. 15.
레이더 개발 이야기 (33) - 농락 당한 애꾸눈 신 코벤트리 폭격 이후 익스거레트조차 영국놈들의 전파 방해에 막히게 되자 루프트바페는 준비하고 있던 비장의 마지막 카드를 내밈. 이건 X-Gerät의 뒤를 잇는 Y-Gerät. 영국이 이 입실론거레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역시나 독일의 암호 체계 Enigma를 해독했기 때문. 입실론거레트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자주 나오기 시작하고 영국의 전파 방해에 지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폭격 사례들이 등장하기 시작. 로열 에어포스는 대체 이번에는 어떤 원리를 이용한 전파 항법이길래 재밍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를 고민. 그런데 이니그마를 자세히 분석해보니, 입실론거레트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자주 등장. 그 이름은 보탄(Wotan). 고대 독일 신화에 등장하는 보탄은 스칸디나비아의 오딘에 해당하는 신. 그런데 입.. 2023. 5. 11.
바우첸 전투 (5) - 1806년 아우어슈테트의 여파 오전 10시에 글레이나 언덕에서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손에 쥔 네에게는 당장 2만3천의 병력이 있었고, 바로 뒤에 약 2만의 추가 병력 4개 사단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글레이나에서 프라이티츠까지의 1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어이 없는 상황 전개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는데, 바우첸 전투가 종료된 이후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르티에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한 것은 바로 네의 참모인 조미니였습니다. 조미니는 이 일에 대해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클릭스(Klix)를 통해 우회하여 오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데다 작전 상황이 너무 순조로와 네가 글레이나를 너무 빨리 점령했다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변명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확실히.. 2023. 5. 8.
레이더 개발 이야기 (32) - The Reich strikes back 전파 항법 시스템인 크니커바인(knickebein)이 영국놈들에 의해 재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루프트바페는 전쟁 전부터 준비해오던 비장의 무기 X-Gerät (익스거레트, X-기구, X-apparatus)를 서둘러 실전 배치. 기존 크니커바인에 비해 2배 더 높은 주파수인 60 MHz로 운용되어 훨씬 더 좁고 정밀한 전파 beam을 쏜다는 것도 차이였고, 단지 2개의 빔을 교차시키는 것이 아니라 Weser라는 항법용 전파에 Rhein, Oder, Elbe라는 강 이름을 딴 3개의 평행 전파를 교차시키는 것도 차이였지만, 가장 큰 차이는 저렇게 교차 전파 신호를 받으면 폭탄이 자동으로 투하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 크니커바인이 쉽게 재밍되었던 것은 그 원형인 로렌츠 시스템부터 나타났던 문제. 민간용 .. 2023. 5. 4.
바우첸 전투 (4) - 높은 교회만 보고 간다 바클레이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뮈플링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원래 바클레이 휘하에 있던 병력 1만5천 중에서 1만을 여기저기 쪼개에 지원 병력으로 다 보내버렸기 때문에, 당장 글레이나를 지키기 위한 병력은 5천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이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2일 전인 19일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프랑스군과 격돌을 벌이고도 아무 대책없이 병력을 분산시켰다는 소리였으니까요. 이건 아마도 전체 전선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바클레이가 맡은 말슈비츠-글레이나 전선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 이유일 수 있습니다. 사실 9만에서 9만5천 정도였던 전체 연합군에서 1만5천이라는 병력은 상당한 규모였으니, 그 병력을 그대로 놀려두기가 아까웠을 것입니다... 2023. 5. 1.
레이더 개발 이야기 (31) - 다리가 굽은 까마귀의 비상과 추락 당시 영국군은 이름까지는 모르고 있었으나, WW2 초기 루프트바페가 사용하던 전파 항법 시스템의 이름은 Knickebein (크니커바인, '굽은 다리'라는 뜻으로 북구 신화에 나오는 까마귀의 이름). 이 시스템은 31 MHz라는 당시로서는 꽤 높은 주파수의 전파를 커다란 야기(Yagi-Uda) 안테나를 이용하여 좁은 각도의 지향성 전파로 쏘는 것이 핵심. 하나의 source에서 발생시킨 전파를 두 대의 안테나로 duplexer switch를 통해 분기시켜 쏘았으므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다보니 그 안테나 모양은 약간 굽은 형태를 띠게 되었음. 또한 앞서 설명한 사정거리 50km 정도의 Lorentz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형상만 커다랗게 하여 사정거리를 늘린 것이다보니, 안테나가 엄청나게 커졌음. 그러.. 2023. 4. 27.
바우첸 전투 (3) - 노란 제복의 정체 5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연합군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날 오후의 공격으로 슈프레 강을 성공적으로 건넜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과 멱살을 쥔 상태, 즉 연합군 최전선과 고작 200m 간격을 사이에 둔 채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는 뤼첸 전투 때처럼 밤 사이에 연합군이 몰래 후퇴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나폴레옹이 원하던 바였습니다.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열린 연합군 수뇌부의 작전 회의는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군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물론, 총사령관인 블뤼허가 참석하지 않고 그나이제나우와 국왕의 연락 장교인 뮈플링(Müffling)만 참석했습니다. 노령인 블뤼허는 피곤하여 쉬어야 했고, 어차피 프로이센군의 실세는 그나이제나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2023. 4. 24.
레이더 개발 이야기 (30) - 독일 공군의 비밀 Butt 보고서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처칠부터 데본셔의 농부 아저씨까지 영국인들 모두가 로열 에어포스 폭격기들이 독일 주요 공장 지대를 다 때려부수고 있다고 믿었음. 로열 에어포스의 폭격기 사령부 (Bomber Command)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도 이유였지만, 당장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이 영국의 주요 공장과 도시를 야밤 중에도 잘만 때려 부수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 독일 애들이 하는 것을 영국인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루프트바페의 폭격 패턴을 보면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했음. 대부분 엉뚱한 곳에 폭탄을 떨구긴 하는데, 가끔씩 일부 폭격기 편대는 아주 정확하게 폭탄을 떨구는 것. 처음에는 그냥 '저 편대에는 수학 잘하는 항법사가 있었고 저 편대 항법사는 수학을 잘 못하는 모양.. 2023. 4. 20.
바우첸 전투 (2) - 프랑스군보다 더 미운 러시아군 오후 1시 경에 쿼티츠(Quatitz)에 나타난 술트의 프랑스군은 이런저런 마을에 분산되어 있던 프로이센군을 쉽게 분쇄한 뒤, 니더구리쉬에 배치되어 있던 클라이스트의 작은 군단을 사정없이 몰아붙였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천천히 밀려났지만 슈프레 강 건너 뵐라우와 키페른 등의 언덕들에서 쏘아대는 프로이센군의 포격 덕분에 3시간 동안이나 니더구리쉬 마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슈프레 강을 건너 후퇴한 뒤에도 프랑스군은 한참 동안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는데, 역시 강 건너 언덕에서 쏟아지는 치열한 포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목은 강 좌안의 고틀롭(Gottlobs) 언덕을 프랑스군이 장악한 뒤 거기에 중포들을 방열하여 강 건너 뵐라우 언덕의 프로이센 포병대들을 제압한 후에야 해결되었습니다. 프랑스군 보.. 2023. 4. 17.
레이더 개발 이야기 (29) - 한밤중의 길찾기 소위 Battle of Britain이라고 불리는 싸움은 1940년 9월부터 1941년 6월까지 루프트바페의 영국 폭격 및 그에 대한 로열 에어포스의 요격이 주된 양상이었지만, 그 이전부터도 로열 에어포스도 당하고만 산 것은 아니었고 바다를 건너 독일군 목표물에 대해 폭격을 단행. 1939년 말까지만 해도 로열 에어포스의 폭격기들은 (아직 프랑스 항복 이전이었으므로) 프랑스 동부의 전선이나 네덜란드, 그리고 발트 해 연안의 각종 섬과 독일 해군 기지 등에 대해 과감한 폭격 작전을 주간에 실시. 이유는 유럽 대륙은 넓고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는 한정적이었으므로 로열 에어포스 폭격기들에 대한 요격이 그다지 조직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했기 때문. 그러나 1939년 12월 18일, 22대의 Vickers Welli.. 2023.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