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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95

휴전 (8) - 대(大)외교관 메테르니히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1813년 춘계 작전을 벌이면서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애걸복걸할 때, 오스트리아는 짐짓 점잖은 척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서 기묘한 요구를 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평화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칼리쉬 조약을 맺고 반(反)나폴레옹 전쟁을 시작할 때 양국은 절대 개별적으로 나폴레옹과 협상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라는 제3국을 중재국으로 두는 것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에 동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건 당대의 외교계의 거물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절묘한 한수였습니다. 그가 그런 독특한 요구를 관철시킨 것은 그가 프랑스 못지 않게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정.. 2023. 8. 21.
휴전 (7) - 메테르니히의 조건 아직 정식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6월 3일부터 나흘 동안, 러시아 외교관 네셀로더(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란츠 1세(Franz I)와 메테르니히,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와 일련의 회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연합군 사령부로 되돌아간 네셀로더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다음 조건들을 제시하며 종전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 2023. 8. 14.
휴전 (6) -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훗날인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아직 엘바 섬에 있을 무렵, 러시아군의 랑제론은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티에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르티에는 이 때의 휴전협정에 대해 '그 휴전협정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었다,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1812년 이후 나폴레옹은 결코 자신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싸우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이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휴전협정을 맺은 것은 나폴레옹 혼자의 결정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는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나폴레옹이 휴전을 제의할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건 베르티에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전협정이 .. 2023. 8. 7.
휴전 (5) - 차가운 남자의 함박웃음 휴전이 되자 바클레이는 즉각 오데르 강을 넘어 후퇴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바클레이는 재빨리 슈바이트니츠에서 더 서쪽인 상(上) 슐레지엔의 슈트렐렌(Strehlen, 폴란드어로는 스첼린 Strzelin)으로 이동하려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휴전까지 되었는데 뭐가 무서워 자꾸 도망치려고 드냐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바클레이는 절대 나폴레옹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휴전은 시간 벌기용 위장일 뿐이고, 나폴레옹이 그 사이에 오데르 강 상류쪽으로 행군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가 워낙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모두 후퇴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정식 조약이 서명되기도 전인 6월 3일 즉각 부대를 동쪽으로 행군시.. 2023. 7. 31.
휴전 (4) - 땅을 치고 후회할 결정 그나이제나우는 5월 31일 이같은 생각을 바클레이에게 펼쳐놓고는, 자기가 생각해봐도 완벽한 자신의 논리와 작전안에 스스로 감동하여 바클레이가 이 작전안에 찬성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하고는 자신의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곧 전투가 벌어진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클레이의 대답은 단호하게 일관적이었습니다. 즉, 러시아군은 결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이번 기회에 오데르 강을 건너 후퇴해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짜르의 명령 때문에 슈바이트니츠에 발이 묶인 상태이다보니, 바클레이가 내세운 계획은 최대한 버티면서 시간을 끌되, 만약 나폴레옹이 공격해오면 그 일대의 구릉 지대에서 메뚜기 뛰듯 옮겨다니며 계속 농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는 나.. 2023. 7. 24.
휴전 (3) -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 러시아 공사삼일! 이 때 즈음 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습니다. 바클레이로 대변되는 러시아군은 오데르 강을 넘어 폴란드로 후퇴하고 싶어했으나 프로이센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지나 다름 없는 슈바이트니츠로 끌려간다는 불만이 있었고, 그나이제나우로 대변되는 프로이센군은 온갖 핑계를 대고 폴란드로 후퇴하려는 러시아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나폴레옹의 휴전 요구에 대해서 러시아나 프로이센이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지요. 애초에 연합군에게 종전이 아닌 임시 휴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2연패를 당한 지금,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만족할 조건으로 나폴레옹이 종전 협정을 맺을 가능성은 전혀.. 2023. 7. 17.
휴전 (2) - Uti Possidetis란 무엇인가? 나폴레옹이 현상 타개책으로 내놓은 것은 휴전 제안이었습니다. 보통 휴전을 제안하는 것은 패배한 측이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이 이렇게 휴전 제안을 한 것은 프랑스군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보다야 좀 나을지 몰라도, 대부분 불과 4~5개월 전에 징집된 신병인 그의 병사들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된 행군과 격렬한 전투에 지쳐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에 비하면 물자가 풍부하고 길도 잘 닦인 곳이라고 해도, 뤼첸 전투를 위해 건넜던 잘러(Saale) 강으로부터 이제 건너야 할 오데르(Oder) 강까지는 400km 떨어진 먼거리였으므로 보급은 역시나 시원치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지치고 배가 고픈 것은 늘상 있는 일이라고 쳐도, 당장 각 연대에는 뤼첸-.. 2023. 7. 10.
휴전 (1) - 나폴레옹의 축지법, 그게 될까? 앞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추격 작전은 기병대 부족으로 인해 심각한 지연을 겪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후퇴하면서도 꽤 강력한 후위대를 남겨 두었는데, 주로 강력한 포병대와 기병대 위주로 구성된 연합군 후위대를 기병 없이 상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연합군 후위대는 주로 나지막한 언덕 위에 포병대를 방열하여 방어진을 구축했는데, 포병대 뿐이라면 추격하는 프랑스군이 별로 개의치 않고 쾌속으로 진격하여 제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포병대 옆에는 꽤 큰 규모의 기병대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원래 보병-포병-기병은 화수목금토 오행과 같은 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병은 밀집 보병대를 상대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횡대로 얇고 길게 늘어서서 진격하는 보병대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인 존.. 2023. 7. 3.
소령 나부랭이의 패기 프로이센군이 1813년 바우첸 패배 이후 슈바이트니츠로 향하자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요새 때문이었습니다. 7년 전쟁 중이던 1761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가난한 촌마을인 분첼비츠(Bunzelwitz)에 참호로 강화된 진지를 구축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리한 지형과 함께 분첼비츠 바로 남쪽에 위치한 슈바이트비츠 요새의 지원에 의지하여 버틴 것이었는데, 실제로 오스트리아군은 그 진지를 3면에서 포위만 했을 뿐 감히 적극적인 공격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프로이센 측이 러시아에게 슈바이트비츠에서 수데텐 산맥을 등지고 나폴레옹과 대치하자고 주장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역사를 가진 슈바이트비츠의 요새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라면 오스트리아가 준비를 마치.. 2023. 6. 26.
산으로 가려는 프로이센군, 강으로 가려는 러시아군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클레이의 현 상황 진단과 향후에 대한 계획이 옳으니 바클레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바클레이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진행할 경우 당장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프로이센군은 절대 자국 영토인 슐레지엔을 버리고 러시아군을 따라 오데르 강을 건너 폴란드로 도망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프로이센군이 연합군 전체 전력의 1/3 이하라고 해도, 러시아는 프로이센 없이 나폴레옹과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는 또 다시 못된 버릇을 바클레이에게도 시전했습니다. 바클레이의 의도는 브레슬라우로 직행하여 거기서 오데르 강을 건넌다는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는 그의 팔을 비틀어 무조건 일단 슈바이트니츠로 가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비로.. 2023. 6. 19.
야우어(Jauer)에서의 job interview 연합군의 후퇴 방향을 정할 때 안전하게 전통적 러시아군의 생명선인 칼리쉬로 정하느냐 건곤일척의 비장함을 가지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등진 슈바이트니츠로 정하느냐에 있어서, 정답은 없었습니다. 칼리쉬 안이나 슈바이트니츠 안이나 다 장단점이 있었고,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엄청난 비난과 반발이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연합군 수뇌부'라는 어정쩡한 집단이 아니라, 결국 총사령관 한 명이었습니다. 그 총사령관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비트겐슈타인은 결단력과 그에 따르는 카리스마가 결여된 인물인데다, 그런 그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알렉산드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생색은 낼 수 있는 실질적 총사령관 노릇을 자신이 하기 위해 일부러 비트겐슈타인을 .. 2023. 6. 12.
이제는 어디로? - 연합군의 고민 뒤록을 잃은 나폴레옹이 충격과 슬픔으로 잠시 주춤한 사이, 연합군 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은 후퇴를 계속 했습니다. 1차 후퇴 집결지였던 라이쉔바흐(Reichenbach)는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거기 멈춰서서 나폴레옹과 다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 본인도 나폴레옹만큼이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편이었습니다. 아무리 단 1문의 대포도 단 1기의 군기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해도, 후퇴하는 연합군의 사기가 좋을 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우첸 전투에서 패배가 확정되고 알렉산드르가 후퇴를 명한 뒤, 함께 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알렉산드르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후퇴길에 나섰습니다. 그 두 군주.. 2023.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