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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94

에필로그 - 나폴레옹 3세의 망명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의 최후는 1871년 보불전쟁, 즉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시작됩니다. (보불전쟁의 여러 광경입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열정이나 애국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들들의 목숨, 그리고 여러분 가족들의 눈물로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찬성할 자격이 있는 분들은 그런 것들을 기꺼이 바칠 용자들 뿐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높았으나, 바로 4년 전인 1866년 보오전쟁, 즉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경험을 쌓은 프로이센군과는 병력 동원 자체가 달랐습니다. 프랑스군은 독일과의 국경 지역 약 250km에 걸쳐 약 20만명을 동원하는데에도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습니.. 2016. 12. 18.
쿠데타의 학살 -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중에서 (마지막편) IV 병사들의 사격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시민들도 약 15분간 응사하고 있었는데, 양측 모두 사상자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먼저 보병대에서, 이어서 기병대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위협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부대들이 갑자기 뒤돌아 선 것이다. 쿠데타를 기록한 역사편찬가들은 상티에 가(Rue du Sentier) 모퉁이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병사들에게 총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노트르-담-드-르쿠브랭스 가(Rue Notre-Dame-de-Recouvrance)와 푸와소니에르 가(Rue Poissonnière)의 어떤 집 지붕으로부터 발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자그랑 가(Rue Mazagran)의 모퉁이의 높은.. 2016. 12. 18.
학살의 시작 -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중에서 (4편) III 오후 1시 조금 지나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로게(Roguet) 장군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약 15분 뒤에, 마들렌(Madeleine)부터 뻗은 전체 길이를 따라 온 거리가 갑자기 기병대와 보병대로 뒤덮였다. 코트(Cotte), 부르공(Bourgon), 캉로베르(Canrobert), 뒬락(Dulac), 그리고 레벨(Reibell)의 5개 여단으로 이루어진 카를레(Carrelet)의 사단 거의 전부, 총 16,410명의 병력이 페 가(Rue de la Paix)에서 포부르 푸아소니에르(Faubourg Poissonniere)에 걸친 사다리꼴로 포진했다. 각 여단은 포병대도 갖추고 있었다. 푸아소니에르 대로에만도 11문의 대포가 목격되었다. 그것들 중 2문의 대포는 포구를 몽마르트르 가(Rue M.. 2016. 12. 3.
쿠테타를 대하는 파리 시민들의 자세 -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중에서 (3편) II 아침 이른 시간부터 - 여기서는 미리 획책된 것이 분명한데 - 모든 거리의 모퉁이마다 이상한 플래카드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플래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옮겨적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걸 기억할 것이다. 가끔씩 파리 시내에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부가 아주 절박한 조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60년 동안에도, 이런 플래카드는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집회는 아무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무력으로 해산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문명의 대도시인 파리 시민들은 인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그런 극단적인 선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고문은 그저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협박용이라고 간주되었고,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들.. 2016. 12. 2.
위기에 처한 쿠데타 -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중에서 (2편) (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편지 내용입니다.) "조카여, 프랑스 국민들의 피가 흘렀구나. 그 확산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렴. 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국민투표에 대해 언급했던 너의 두번째 선언문을 국민들은 보통 선거권의 재확립이라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에 기여할 의회가 없다면 자유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단다. 군대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제야말로 도덕적인 승리로서 실질적 승리를 완성할 순간이다. 패배한 경우엔 할 수 없는 것을 승리했을 때 해야 한다. 과거 정당들을 해체한 뒤에 국민 전체를 복권시키렴. 보통 선거권이 진지하고 자유롭게 행사되어, 공화국을 구할 대통령과 제헌 의회를 선출할 거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 편지를 .. 2016. 11. 23.
친위 쿠데타를 저지하라 -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중에서 (1편) 요즘 시국에 편승하여,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즉 '꼬마 나폴레옹'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몇 편에 걸쳐 올립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건 보쥬 광장 거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서 제가 찍은 당시 풍자화 사진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오.. 2016. 11. 20.
무엇이 전열함을 죽였는가? - 나폴레옹 시대 군함의 수명 이야기 현대적인 군함들의 수명은 대략 몇년일까요 ? 저도 고딩 시절에 한때 해군사관학교 진학이 꿈이라서 관심이 좀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함인 구축함들은 미군이 2차세계대전 이후 쓰던 것을 60년대에 한국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중 인상적인 부분이, 그 통로나 선실의 쇠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으로 원래 격자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구축함들은 그 격자 무늬가 다 닳아서 매끈매끈 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관학교 안 갔거든요. 네이버 같은 곳을 찾아보니, 돈많은 미국같은 나라는 대개 군함의 수명을 30~40년으로 잡는 모양입니다. 아마 더 오래 쓸 수도 있지만, 유지 보수비도 많이 들고, 또 30~40년전의.. 2016. 10. 28.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잘 먹었을까 ? - 나폴레옹 시대의 군대밥 이야기 최근 영국이 노후된 뱅가드급 핵잠수함을 대체할 드레드노트급 핵잠수함의 건조를 발표했습니다. 그 사양을 보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가 130명의 승조원에 1명의 의사와 3명의 요리사(chef)가 포함되어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쉐프를 3명이나 태우다니 잠수함 승조원들을 정말 잘 먹이려나 보다 싶지만, 그래봐야 영국인 조리병를 태울테니 드레드노트 승조원들은 암울한 식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때도 영국 요리는 유명했을까요 ? 예, 유명했습니다. 몇가지 관련 부분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서양 무협지 Sharpe 시리즈에서 발췌해 보았습니다. -- Sharpe's Enemy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 2016. 10. 23.
나폴레옹 시대의 해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함대라고 하면 16세기 말의 스페인 무적 함대 또는 20세기 초의 러시아 발틱 함대 정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스페인 무적 함대가 더 유명하겠지요. 결론적으로는 이 두 함대 모두 기대와는 달리 풍비박산이 났습니다만, 사실 당시에도 그 '기대'는 현실감이 없는 지배층의 기대였고, 실제 항해를 떠나는 두 함대 실무자들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준비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입니다. 한글판도 있고, 저는 한글판으로 읽었습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퓰리처 상도 받은 명작입니다.) 아뭏든, 당시 개박살이 난 스페인 무적 함대의 경과를 그린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스페인 함대가 진 이유가 결코 영국군.. 2016. 10. 20.
빵과 금화 - 나폴레옹 시대의 징발 이야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던 1805년 11월, 린츠(Linz)로부터 빈(Wien)을 향해 전진하던 란의 제5 군단은 (전투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심각한 보급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진흙투성이 길로 강행군을 하는데다 추운 늦가을에 노숙을 하는 것도 고달픈데, 먹을 것까지 부족하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지요. 그때 란의 개인적인 형편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아팠거든요. 란은 아픈 상태에서도 부하들이 겪고 있던 보급 부족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이런 것이었지요. "어떤 병사 또는 부대라도, 약탈, 사사로운 싸움 및 위협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장교를 구타할 경우 즉각 총살될 것이다. 집행 권한은 사단장이 행사한다." 이에 .. 2016.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