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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다리, 흔들리는 동맹 -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의미 이미 베를린이 비트겐슈타인 휘하의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고 드레스덴도 곧 빈칭게로더 손에 들어갈 것이 명약관화했던 3월 중순 즈음, 외젠에게는 6만이 채 안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다부 지휘 하에 드레스덴에 있던 7천5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단들 중에서도 언제나 병력 3만 이상의 특별히 강력한 군단만을 거느리던 다부가 1개 사단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만을 이끌고 있던 것은 당시 약화된 그랑다르메의 신세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다부는 특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레이니에(Reynier) 장군이 러시아군에 쫓겨 드레스덴에서 철수하는 것은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에크뮐 대공(prince d'Eckmühl, 즉 다부)이 그런 모욕.. 2022. 6. 20.
1813년, 작센을 둘러싼 갈등 3월 24일, 블뤼허가 드디어 작센 영토인, 아니 이제 프로이센 영토라고 선언된 코트부스로 들어갈 때 블뤼허의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칼리쉬의 쿠투조프는 기분이 팍 상해버렸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프로이센군이 러시아군을 젖히고 코트부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당장 보급물자를 챙겼다는 것이었지만, 총사령관이자 연합군 사령관으로 쿠투조프는 그런 소소한 문제를 지적할 수는 없었습니다. 쿠투조프가 문제를 삼은 부분은 블뤼허의 포고문에 '동맹국'이라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만 씌여있을 뿐, 러시아라는 단어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블뤼허의 조치에 대해 화가 난 작센 관리들이 러시아 사령부에까지 '코트부스가 프로이센 영토가 되는 것이 정말 짜르의 뜻 맞느냐'라며 항의를 해오자, 그에 대.. 2022. 6. 13.
진격의 러시아, 뒤쳐진 프로이센 - 갈등의 작은 시작 당시 연합군의 최고 권력자는 당연히 짜르 알렉산드르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다 통틀어서 최고의 브레인은 바로 샤른호스트였습니다. 적어도 알렉산드르가 볼 때는 그랬습니다. 누가 봐도 멍게, 즉 멍청하고 게으른 성향의 지휘관인 쿠투조프에게 질렸던 알렉산드르는 샤른호스트와 만나서 이야기해본 뒤 그의 성실과 명석, 치밀한 논리에 홀딱 넘어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한 칭송을 늘어 놓았습니다. 평민 출신의 직업 군인 주제에, 군무에 필요하다 싶으면 가끔씩 국왕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까지 서슴치 않는 샤른호스트에 대해 내심 벼르고 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감히 샤른호스트를 어쩌지 못한 것은 사실 알렉산드르의 그런 호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 2022. 6. 6.
드레스덴(Dresden)을 향하여 - 지킬 것과 버릴 것 나폴레옹은 자신이 새로운 군대, 즉 마인 방면군(Armée du Main)을 연성하는 동안 외젠이 기존 그랑다르메의 잔존부대를 지휘하여 어떻게 해서든 오데르 강, 적어도 엘베 강에서 러시아군의 침공을 막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외젠이 아니라 외젠의 아버지, 즉 나폴레옹 본인이 와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폴레옹도 그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월 2일에 외젠에게 편지를 보내어 '곧 내가 30만 대군을 몰고 갈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라'라고 위문 편지를 보내면서도, 같은 날 동생 제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외젠은 엘베 강을 포기하고 물러서면 베저(Weser) 강과 카셀(Kassel)에서 적을 막아낼 것'이라고 썼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러시아군은 틀림없이 오데르 강과 엘베 강을 건너.. 2022. 5. 30.
대영제국의 그림자 - 1813년 영국의 군수품 지원 프랑스는 애초에 땅도 넓고 산업 기반이 탄탄해서 새로 30만 대군을 무장시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만,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와 인구가 반토막 나기 이전에도 산업 기반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프로이센은 10만군을 무장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할 때도, 프로이센군이 가지고 있던 머스켓 소총은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 사용되던 것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런 낡은 소총은 격발시 가끔씩 폭발 사고를 일으켰으므로, 당시 프로이센 군에서는 '사격 훈련시에는 화약을 정량대로 다 채우지 말고 조금 덜 넣을 것'을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군수품 문제는 물론 프로이센 개혁파의 주요 관심사였고, 이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으로 생산된 1.. 2022. 5. 23.
최초의 민족 전쟁? - "나의 국민에게"(An mein Volk) 먼저, 언제나 문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본인이었습니다. 러시아와의 동맹 체결을 위해 2월 26일 칼리쉬로 떠나면서 샤른호스트는 한시가 급한 프로이센군 병력 증강안을 세세히 마련해두었습니다. 그 요지는 대국민 호소에 따른 국민방위군(landwehr)의 대대적인 증강이었습니다. 그러나 샤른호스트가 칼리쉬로 떠나자마자 그런 모병 움직임은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나폴레옹에 대한 선전포고를 최대한 늦추고 싶어했고, 또 지엄하신 호헨촐레른 왕가의 수호를 귀족들이 아닌 평민들에게 호소하여 국민방위군을 모집한다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이런 마음가짐은 재빠른 병력 증강을 위해서는 프랑스식으로 국민군을 모병해야 한다는 개혁파 관료들의 염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습.. 2022. 5. 9.
나폴레옹을 잡을 작전 - 샤른호스트의 비책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손잡고 나폴레옹과 전쟁을 하기로 했으니 먼저 총사령관을 선정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프로이센 내부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크네제벡과 같은 인물은 러시아군과의 협력이 최우선이니 러시아 짜르의 신임을 받고 있는 타우엔치엔(Bogislav Friedrich von Tauentzien) 장군이 적절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크네제벡이 아무리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측근이라고 해도 그는 중령에 불과했고 인사권자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국방부 장관 샤른호스트는 바로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를 천거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프로이센 장군들 중에서 오직 블뤼허만이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타우엔치엔 장군입니다. 그는 18.. 2022. 5. 2.
정의 같은 소리하고 있네 - 마침내 맺은 칼리쉬 (Kalisch) 조약 레이니에의 군단이 글로가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알렉산드르의 긴급 요청에 대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쓴 편지의 내용은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긴 문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슐레지엔은 나폴레옹이 인정한 중립지대이다. 레이니에에게도 그 중립 존중과 함께 글로가우에 들어가지 말라고 요청했으니, 러시아군도 슐레지엔의 중립을 존중해주시길 바란다. 2)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게 러시아와 싸워줄 것을 요청했고, 국왕인 나는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 9,800만 프랑과 영토 회복을 요구했는데 거절당했다. 3)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다 하는 것은 내가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하더라도 정당성은 내게 있다는 것과 내가 러시아 측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알렉산드르는 이 한심한 편지.. 2022. 4. 25.
강들과 요새들 - 러시아군의 고민 1813년 1월, 그랑다르메는 요크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배신으로 인해 속절없는 후퇴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지장이었으므로 후방의 방어도 공고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1차 방어선은 당연히 폴란드 한 가운데를 흐르는 비스와 강이었습니다. 비스와 강에는 토룬(Torun), 모들린(Modlin) 등 바르샤바부터 단치히까지 일련의 견고한 요새들이 있었고, 나폴레옹은 이런 요새들에 수비대를 배치해두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군이 워낙 크게 궤멸된 지라, 긴 비스와 강변을 따라 드문드문 박힌 요새들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고, 뮈라는 속절없이 비스와 방어선을 버리고 일단 포젠(Posen, 폴란드어로는 포즈나니 Poznań)으로 후퇴했습니다. (오데르 강변이나 비스와 강변의 많은 .. 2022. 4. 18.
결정을 못하는 리더 - 못난이 프리드리히 1812년 12월 14일, 원정군을 버려두고 파리로 달리던 나폴레옹의 썰매는 프로이센이 그토록 반환을 간청하던 글로가우 요새를 통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홀로 파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나폴레옹의 원정군이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프로이센 일대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프로이센의 열혈 애국자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나폴레옹을 끝장내고 프로이센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운명에 대해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불확실하고 불안했습니다. 200년이 지난 지금에야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가 결국 나폴레옹의 패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 2022. 4. 4.
지도와 공약(空約) - 프로이센 장교들의 이탈 안실리온(Friedrich Ancillon)의 조언은 꽤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국적에 상관없이 귀족이나 신사라면 모두가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당대의 지식인답게, 야만스러운 러시아보다는 문명국인 프랑스 친화적인 노선을 취하기를 권고하며 러시아 장군들의 무능력 등을 비난하기도 하고, 스페인 민중과는 달리 프로이센 국민들에게는 종교적인 광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스페인식 민중 투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럴싸한 이유도 내놓았습니다. 바로 러시아와 프랑스의 지리적 위치였습니다. 기동력이 좋은 군대를 가진 프랑스는 바로 지척에 있는데 러시아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지요. 또한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전투에서 승리해도 유럽 .. 2022. 3. 28.
치욕의 프로이센 -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외줄타기 1812년 말 그랑 다르메의 일원으로 리가(Riga) 방면에서 러시아군과 대치 중이던 요크 대공이 본국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러시아군과 강화 조약을 맺을 때만 해도, 프로이센이 정말 1813년 러시아 편에 붙어 나폴레옹에 대적한다는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프로이센 전체는 반(反)프랑스 정서로 들끓고 있었고 나폴레옹에 저항하여 들고 일어날 이유야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만으로 반(反)나폴레옹 전선에 뛰어들 것이라면 훨씬 이전에 그랬어야 했습니다. (C.S. Forester의 명작 소설인 Hornblower 시리즈 중 'The Commodore' 편에서는 혼블로워가 소함대의 제독으로서 발트 해에서 활약하며 짜르 알렉산드르를 만나기도 하고 리가(Riga)를 포위 공격하는 프랑스군과 .. 2022.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