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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우어(Jauer)에서의 job interview 연합군의 후퇴 방향을 정할 때 안전하게 전통적 러시아군의 생명선인 칼리쉬로 정하느냐 건곤일척의 비장함을 가지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등진 슈바이트니츠로 정하느냐에 있어서, 정답은 없었습니다. 칼리쉬 안이나 슈바이트니츠 안이나 다 장단점이 있었고,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엄청난 비난과 반발이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연합군 수뇌부'라는 어정쩡한 집단이 아니라, 결국 총사령관 한 명이었습니다. 그 총사령관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비트겐슈타인은 결단력과 그에 따르는 카리스마가 결여된 인물인데다, 그런 그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알렉산드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생색은 낼 수 있는 실질적 총사령관 노릇을 자신이 하기 위해 일부러 비트겐슈타인을 .. 2023. 6. 12.
이제는 어디로? - 연합군의 고민 뒤록을 잃은 나폴레옹이 충격과 슬픔으로 잠시 주춤한 사이, 연합군 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은 후퇴를 계속 했습니다. 1차 후퇴 집결지였던 라이쉔바흐(Reichenbach)는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거기 멈춰서서 나폴레옹과 다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 본인도 나폴레옹만큼이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편이었습니다. 아무리 단 1문의 대포도 단 1기의 군기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해도, 후퇴하는 연합군의 사기가 좋을 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우첸 전투에서 패배가 확정되고 알렉산드르가 후퇴를 명한 뒤, 함께 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알렉산드르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후퇴길에 나섰습니다. 그 두 군주.. 2023. 6. 5.
바우첸 전투 (7) - 실패의 원인 패배가 확정되고 나서야 짜르 알렉산드르로부터 지휘권을 온전히 넘겨 받은 비운의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은 투덜거리며 후퇴를 지휘했습니다. 다소 지나치게 꼼꼼한 작전 계획을 짜기로 악명 높았던 그는 이미 후퇴 작전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가장 북동쪽에 위치했던 바클레이의 러시아군, 중앙부의 프로이센군, 그리고 남쪽의 러시아군 본대, 이렇게 크게 3개 집단으로 수행된 후퇴 작전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연합군은 꽤 질서정연하게 후퇴에 성공했습니다. 이 성공은 비트겐슈타인의 능력 덕분이라기 보다는 결국 추격자의 입장인 프랑스군의 문제 덕분이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프랑스군 자체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지형 탓이 좀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바우첸 동쪽에 방어선을 꾸민 이유가 그 쪽 지형이 동쪽으로 갈.. 2023. 5. 22.
바우첸 전투 (6) - 삼면초가 술트와 마르몽, 네의 3면 공격은 당연히 모조리 크렉비츠 언덕에 한꺼번에 집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전선은 크렉비츠(Kreckwitz)에서 도버쉬츠(Doberschütz)를 거쳐 플리스코비츠(Pließkowitz)까지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크렉비츠 언덕 쪽에 가장 가까왔던 것은 술트의 제4 군단이었고, 그 중에서도 프란커몬트 (Frederic von Franquemont) 장군의 뷔르템베르크 사단이 그 선봉에 나섰습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인들끼리 맞붙은 전투였으니 동족 상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남부 독일이자 카톨릭 배경인 뷔르템베르크와 북부 독일의 개신교 배경인 프로이센은 30년 전쟁 동안 온갖 적대감을 불태웠던 사이였으므로 정말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뷔르템베르크는 지.. 2023. 5. 15.
바우첸 전투 (5) - 1806년 아우어슈테트의 여파 오전 10시에 글레이나 언덕에서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손에 쥔 네에게는 당장 2만3천의 병력이 있었고, 바로 뒤에 약 2만의 추가 병력 4개 사단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글레이나에서 프라이티츠까지의 1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어이 없는 상황 전개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는데, 바우첸 전투가 종료된 이후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르티에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한 것은 바로 네의 참모인 조미니였습니다. 조미니는 이 일에 대해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클릭스(Klix)를 통해 우회하여 오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데다 작전 상황이 너무 순조로와 네가 글레이나를 너무 빨리 점령했다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변명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확실히.. 2023. 5. 8.
바우첸 전투 (4) - 높은 교회만 보고 간다 바클레이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뮈플링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원래 바클레이 휘하에 있던 병력 1만5천 중에서 1만을 여기저기 쪼개에 지원 병력으로 다 보내버렸기 때문에, 당장 글레이나를 지키기 위한 병력은 5천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이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2일 전인 19일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프랑스군과 격돌을 벌이고도 아무 대책없이 병력을 분산시켰다는 소리였으니까요. 이건 아마도 전체 전선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바클레이가 맡은 말슈비츠-글레이나 전선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 이유일 수 있습니다. 사실 9만에서 9만5천 정도였던 전체 연합군에서 1만5천이라는 병력은 상당한 규모였으니, 그 병력을 그대로 놀려두기가 아까웠을 것입니다... 2023. 5. 1.
바우첸 전투 (3) - 노란 제복의 정체 5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연합군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날 오후의 공격으로 슈프레 강을 성공적으로 건넜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과 멱살을 쥔 상태, 즉 연합군 최전선과 고작 200m 간격을 사이에 둔 채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는 뤼첸 전투 때처럼 밤 사이에 연합군이 몰래 후퇴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나폴레옹이 원하던 바였습니다.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열린 연합군 수뇌부의 작전 회의는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군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물론, 총사령관인 블뤼허가 참석하지 않고 그나이제나우와 국왕의 연락 장교인 뮈플링(Müffling)만 참석했습니다. 노령인 블뤼허는 피곤하여 쉬어야 했고, 어차피 프로이센군의 실세는 그나이제나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2023. 4. 24.
바우첸 전투 (2) - 프랑스군보다 더 미운 러시아군 오후 1시 경에 쿼티츠(Quatitz)에 나타난 술트의 프랑스군은 이런저런 마을에 분산되어 있던 프로이센군을 쉽게 분쇄한 뒤, 니더구리쉬에 배치되어 있던 클라이스트의 작은 군단을 사정없이 몰아붙였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천천히 밀려났지만 슈프레 강 건너 뵐라우와 키페른 등의 언덕들에서 쏘아대는 프로이센군의 포격 덕분에 3시간 동안이나 니더구리쉬 마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슈프레 강을 건너 후퇴한 뒤에도 프랑스군은 한참 동안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는데, 역시 강 건너 언덕에서 쏟아지는 치열한 포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목은 강 좌안의 고틀롭(Gottlobs) 언덕을 프랑스군이 장악한 뒤 거기에 중포들을 방열하여 강 건너 뵐라우 언덕의 프로이센 포병대들을 제압한 후에야 해결되었습니다. 프랑스군 보.. 2023. 4. 17.
바우첸 전투 (1) - 마침내 시작된 전투 당시 대부분의 전투는 새벽 일찍 동이 트기 직전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5월 20일 아침 해가 꽤 높이 올라와 사방을 비출 때까지도 바우첸 일대는 조용했습니다. 연합군의 전초선을 지키던 보초들은 오늘도 지난 1주일 넘게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9시가 좀 넘어서, 바우첸 시내의 교회탑에서 프랑스군 진영을 감시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 일부가 북동쪽을 향해 행군을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바우첸을 소개할 때 자주 사용되는 사진의 구도가 딱 이런 구도입니다. 바우첸은 탑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교회 첨탑이 많습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슈프레(Spree) 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에 대해 바트겐슈타인이 미리 작전계획을 .. 2023. 4. 10.
바우첸 전투 (0) - 복습편 : 짜르와 총사령관 이제 1813년 5월 20일, 바우첸 전투 당일 새벽이 되었으니 여기서 잠깐 복습을 하겠습니다. 바우첸 전투는 크게 보면 나폴레옹이 커다랗게 그린 그림에 연합군이 말려들어 벌어진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린 그림은 크게 2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베를린을 위협하여 프로이센군을 러시아군으로부터 이탈시키려 했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게 제대로 안 될 경우 베를린을 위협하던 네의 병력을 바우첸 뒤쪽에 투입하여 연합군의 퇴로를 끊기 위함이었습니다. 네의 병력을 바우첸 뒤쪽으로 투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 쓰던 '망치와 모루' 전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우첸 서쪽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연합군을 밀어 붙이면서 모루의 역할을 할 때, 북쪽에서 내려온 .. 2023. 4. 3.
바우첸을 향하여 (16) - 헛도는 톱니바퀴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요크는 바클레이의 어처구니 없는 지원군 요청에 아무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정말로 자신의 부대 중 제2 여단을 떼내어 숲길을 통해 바클레이가 있는 쾨니히스바르타로 보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크가 정말 제대로 된 군인 정신의 지휘관인지 정반대로 관료주의에 빠져 현실 파악을 못하는 인간인지 헷갈립니다만, 직후의 행동을 보면 요크가 닳을 대로 닳은 늙은 여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크는 2시간 정도 싸운 끝에 어차피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황 파악을 못한 바클레이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자 요크는 후퇴할 명분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바클레이의 명령대로 지원군을 보내면서 '지원군을 보내고 .. 2023. 3. 27.
바우첸을 향하여 (15) - 오해는 오해를 낳고 군내 서열에 있어서 훨씬 선임이자 바로 작년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바클레이의 존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습니다. 과거에 바클레이가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경직된 서열 문화에서 작년의 직속 상관이 지금 자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중요 전장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던 좌익의 정반대쪽인 우익, 그것도 프로이센군이 지키는 우익보다 더 오른쪽 맨 끝 부분인 크렉비츠(Kreckwitz) 마을 쪽에 바클레이를 배치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우익쪽, 즉 북쪽에서 로리스통의 프랑스군 1개 군단이 내려오고 있다는 첩보는 바클레이를 아예 멀리 보내버려 자신의 전장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 좋은 .. 2023.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