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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7월 5일 저녁 6시 경, 나폴레옹의 군단들이 게라스도르프(Gerasdorf)-바그람(Wagram)-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방어선 앞에 전개하면서 나폴레옹은 이 날의 1차 목표, 즉 도나우 강을 건너 전체 병력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마르히펠트에 쓸데없이 포진해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제때에 포착, 쉴새없이 공격하여 6천이 넘는 피해를 입힌 것도 기분 좋은 시작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아군과 적군의 전개 모습을 보니 상황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에 주둔한 요한 대공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이미 자신의 지휘 하에 저렇게 전개되어 있는데 요한 대공의 군대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결정적인 우세가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의 주요 마을 명칭을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했습니다.  당시 마을의 위치가 지금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가령 저 에슬링 마을은 당시보다 훨씬 북쪽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내선이동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보니, 카알 대공은 게라스도르프-바그람의 비삼베르크 고지대와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루스바흐 고지대라는 완만하게 반원형으로 마르히펠트 평원을 감싼 두 능선에서 프랑스군을 집게로 죄듯이 양측에서 포위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이 보기에 매우 어설픈 포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오른쪽 끝, 즉 게라스도르프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끝,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까지의 거리는 약 12km의 먼 거리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대 경사면 바로 위쪽에 구축해둔 토루나 참호같은 방어 시설에 의존하여 싸울 생각인 모양이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이 중앙 공격을 한다면 양쪽 끝의 오스트리아군은 중앙부를 지원하기 위해 애써 만들어둔 고지대의 방어 시설을 포기하고 저지대의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좌우익이 각각 6km씩을 헐레벌떡 뛰어와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반원형의 안쪽 면에서, 어느 지점의 오스트리아 방어선을 뚫을지 여유있게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으로든 훨씬 짧은 거리만 이동하면 되었으므로 기동성에 있어 절대 유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 방어선에서 가장 방어하기 곤란한 형태의 공격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즉 맨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측면으로부터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나폴레옹은 갑자기 초초해졌습니다.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무엇이 나폴레옹을 불안하게 했을까요 ?  2가지였습니다.  첫째, 요한 대공의 병력이 언제 동쪽에서 짠 하고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아무래도 저지대에서 고지대 위쪽의 상황을 정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라, 대체 저 고지 위에 오스트리아의 전체 병력이 웅크리고 있는지 아니면 불과 1~2개 군단만 대기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카알 대공이 싸우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투를 거부하고 저 멀리 보헤미아로 또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빨리 결판을 내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으므로, 몸이 달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야간 전투를 꺼려했습니다.  원래 명장일 수록 운에 의존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계산에 넣고 제어해가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병력 통제는 커녕 피아 구별도 하기 힘든 야간 전투에서는 상당 부분이 운에 맡겨질 수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초조함이 나폴레옹에게 과욕을 부리게 합니다.  그는 어제 밤부터 잠도 못 자고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이제 슬슬 숙영 준비를 하려던 병사들에게 뜻 밖에도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도 당장 1~2시간 안에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휘하 군단장들을 놀라게 하기 전에, 당장 나폴레옹 직속 참모 장교들을 당황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의향대로 명령서를 받아적고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한 뒤 이제 막 어두워지는 이 넓은 마르히펠트 평원을 말을 달려 이 명령서를 받을 수신인, 즉 각 군단장들을 찾아 제때에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명령서들은 각 군단장들에게 제각각 시간 차를 두고 전달되었는데, 명령서 내용은 '즉각 공격하라'는 것이었으니 각 군단들의 공격은 전혀 동기화되지 못한 채 시간 차를 두고  뿔뿔이 분산된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군단들은 아직 휘하 사단들이 제 위치로 이동하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 개시가 더욱 늦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래 의도는 오스트리아군의 양쪽 날개 중 동쪽 날개, 즉 루스바흐 고지의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라인을 3개 군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 방어선 전체를 견제하면서, 결정타로는 다부의 제3 군단을 이용하여 맨 동쪽 끝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부터 서쪽으로 돌돌 말아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이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어 오스트리아군의 대혼란에 빠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전혀 타이밍을 못 맞춘 채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온갖 불운이 따르면서 오히려 프랑스군 측이 대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단, 시작은 우디노 제2 군단이 끊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위치로부터 가까운, 중앙부 쪽에 있던 우디노는 나폴레옹이 원하던 대로 저녁 7시 경에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디노의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고지에 보루를 구축하고 68문의 대포를 이용해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두들겼으나, 제2 군단은 호기있게 루스바흐(Russbach) 시냇물을 건너 루스바흐 고지의 경사면을 기어올라 바우머스도르프(Baumersdorf)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 마을은 목조 주택이 30여 채 정도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해 이 가옥들에 화재가 발생하여 꽤 많은 연기를 토해냈습니다.  이 연기와 화재에도 불구하고 호헨촐레른(Hozenzollern)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굳게 바우머스도르프를 지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너지지 않자, 우디노는 이 마을 측면에 프랑스군 전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고 소문난 제57 전열 연대, 별칭 '무시무시한 녀석들(Les Terribles)'까지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했고, 호헨촐레른 장군이 직접 기병대를 끌고 반격을 가하자 공격하던 프랑스군이 오히려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 만에 우디노의 공격은 큰 피해만 입은 채 지리멸렬한 추태를 보이며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바로 서쪽 측면에서는 우디노보다 조금 늦게, 제5 군단이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은 비삼베르크 능선과 루스바흐 능선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여기에 공격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보다 막도날드의 좌측, 즉 바로 서쪽 측면에서 공격을 하게 되어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으로부터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이 파견되어 막도날드 지휘 하에 이곳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대포를 버리고 달아나는 등 일부 전열이 무너지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벨가르드(Bellegarde) 장군의 최전선 독려에 힘입어 끝끝내 버텼습니다.  




(이 분이 뒤파 장군입니다.  그는 Evian 생수로 유명한 에비앙 태생으로서, 사보이 공국의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태생이 그렇다보니 14세 때 프랑스군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왕국군에 입대했다가, 나중에는 역시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제노바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 흘러흘러 파리로 들어왔다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를 습격한 폭도 중의 한명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요.  그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간 용감한 군인이었는데, 너무 용감한 군인이 흔히 그렇듯이 많은 부상을 입어 결국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제대하게 됩니다.)



이러는 사이 화재 연기와 어둠 속에서 도이치 바그람 마을 안의 시계는 무척 나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는데,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즉 작센군도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휘하였던 뒤파 장군의 사단 병사들도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막도날드 휘하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다른 방향에서 진격해온 뒤파 휘하의 작센군과 혼전 속의 바그람 마을 안에서 마주쳤는데, 이들은 그만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착각하고 일제히 발포해버렸습니다.  바이에른군과는 달리 작센군은 가뜩이나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와 사기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오인 사격은 그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습니다.  작센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며 그 일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 카알 대공 본인이 직접 달려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더욱 열정적으로 덤벼 들었고, 결국 막도날드의 이탈리아 방면군도 무질서하게 후퇴해버렸습니다.  


한편, 그 왼편, 즉 더 서쪽에서는 작센군으로 이루어진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9 군단이 역시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와 베르나도트의 2개 군단이 바그람을 양쪽에서 집중 공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나폴레옹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무척 삐져있었습니다.  일단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프랑스 군단이 아닌 작센 군단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 화가 나 있었는데, 이번 공격 직전에 그나마 있던 3개 작센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주라는 명령을 받고 더욱 분개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의 2개 사단 중 제쥬비츠(Zezschwitz) 장군의 사단은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므로, 베르나도트는 막도날드와 함께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르코크(Lecoq) 장군의 1개 사단만이라도 동원해서 막도날드와 함께 동시에 공격을 시작해야만 했었는데, 베르나도트는 심통이 단단히 났는지 나폴레옹의 터무니 없이 조급한 명령 탓만 하며 제쥬비츠 사단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제쥬비츠 사단이 도착한 9시 경에야 베르나도트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바그람 마을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쳐들어간 바그람 마을은 연기와 어둠 속에서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였습니다.  그곳으로 쳐들어갔던 하르티쉬(Hartizsch) 장군은 그곳에 이미 뒤파 장군의 작센 사단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용감하게 뛰어든 것인데, 가보니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병사들이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독일어로 고함을 치며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르티쉬 장군의 작센군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총격전을 벌였고, 급기야 백병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서로가 같은 작센군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양측 병사들은 모두 맥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색 군복을 입은 오스트리아군이 이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으므로, 가뜩이나 사기가 좋지 않았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병사들은 우르르 무너져 보기 흉한 패주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궤멸 상태에 빠져, 마르히펠트 평원 언저리의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까지 후퇴했는데, 여기서도 재집결을 하지 않고 더 도망치는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군단을 다시 모으고 재편성하느라 베르나도트는 그날 밤 소집된 나폴레옹의 군단장 회의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가장 동쪽 끝에 있던 다부의 제3 군단이 사실상 이 공격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군단들이 3개 보병 사단 약 2~3만명 수준의 병력을 갖춘 것에 비해, 다부의 제3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4만2천의 병력을 갖춘, 그야말로 튼실한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의중대로라면 이런 병력을 갖춘 다부가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루스바흐 능선을 따라 돌돌 말아올리며 서쪽으로 진격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범생 다부조차도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늦게 받았는지 준비가 덜 된 상태라서 그랬는지, 베르나도트보다 더 늦게 밤 9시가 넘어서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다부는 모범생답게 구댕(Gudin)과 퓌토(Puthd) 사단의 정면 공격과 함께 측면에서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측면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무너뜨리도록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군의 투지와 방어태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탄 속에 휘하 사단들이 고지 위로 전진을 못하는 것을 보자, 다부는 '이건 이미 망한 전투'라고 결론을 내고 1시간 만인 밤 10시 경에 공격 명령을 취소시키고 병력을 후퇴시켰습니다.  


이렇게 7월 5일 밤, 나폴레옹의 호기로운 공격은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군은 근 6km가 넘는 전선에서 약 1만1천의 사상자를 내며 물러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패배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낮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그 징조가 보였지요.  노르드만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를 하루종일 그토록 괴롭히며 무려 50%의 사상자가 날 정도의 피해를 입혔는데도 노르드만 부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1805년 당시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마 몇 시간 못 버티고 무너져 부대 전체가 항복하거나 완전 궤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끝내 버티며 결국 절반이라도 살아서 오스트리아군 방어선에 합류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의 국방 개혁은 확실히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은 1805년 당시의 투지 없고 미숙한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의 수준은 과거보다 확실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 징집된 신병들이 잔뜩 섞인데다 작센 병사들과 이탈리아 병사들이 많이 포함된 군대는, 과거처럼 혁명 정신에 불타는 프랑스 고참 병사들로 구성된 과거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그다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 전투를 통해 루스바흐 고원 위에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 주력군 전체를 이끌고 결전을 벌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큰 그림, 즉 동쪽부터 서쪽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김밥말이하겠다는 작전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확신했습니다.  비록 오늘밤의 공격은 '불운'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날이 밝은 상태에서 제대로 공격한다면 성공하리라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의 상황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했습니다.  뜻 밖에도, 오히려 카알 대공이 밀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댓글
  • 프로필사진 CU 예전부터 열심히 읽던 애독자입니다! 첫 댓글이라니 영광이네요.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7.06.25 22:26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제가 고맙지요 2017.06.25 22:29 신고
  • 프로필사진 이민규 페친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글을 읽으며 내내 이런 해박한 지식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경탄할 뿐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7.06.25 23:30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어우, 별 거 아닙니다. 저 위에 표시한 소스에 다 나오는 내용이고, 위키피디아 등에 아주 소상히 다 나와 있는 내용을 제 입맛에 따라 정리한 것 뿐입니다. 2017.06.25 23:53 신고
  • 프로필사진 카를대공 바그람 전투 중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게 호되게 욕 얻어 먹었다는게 이 때인가 보군요.

    이 둘은 참 상극인거 같은데 꾸준히 원수 자리 지킨거 보면 베르나도트 능력 하나는 무시 못할만 한거 같기도 합니다.
    2017.06.26 01:23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예. 베르나도트가 투덜이에 질투쟁이이긴 해도, 멍청이는 아니지 말입니다. 2017.06.26 22:05 신고
  • 프로필사진 유애경 나폴레옹이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배르나도트 장군도 꽤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2017.07.03 21:53 신고
  • 프로필사진 starlight 나폴레옹같은 불세출의 명장이 굳이 피아식별이 어려운 야간작전을 명령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가용자원이 많고 경우의 수가 많을때 물량으로 승부하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탈리아 원정때처럼 재기넘치고 필사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지휘는 갈수록 쇠퇴하는듯 싶네요. 바그람 전투가 국가간 전쟁에서는 나폴레옹이 승리한 마지막 전투로 아는데요. 이때쯤부터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좀더 전향적인 태도와 개방적인 정책을 실현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2017.06.26 01:51 신고
  • 프로필사진 ㅇㅇㄴ 참 의문이네요. 오스트리아 또한 잦은 전쟁으로 국가의 역량이 상당히 후퇴했을텐데, 게다가 예전에 배상금도 한번 뜯어먹히고

    근데, 왜 프랑스군의 역량은 후퇴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역량은 상승하는건지.. 참 아이러니합니다.

    나시카님 글을 보니까, 확실히 프랑스는 1809년의 오스트리아 전쟁을 마치고 제국화, 프랑스화 작업에만 전념하고 더이상의 전쟁은 치르지 않는것이 나았습니다. 러시아와는 폴란드의 여러 강들을 방어선 삼아서 대치를 하고, 영국과의 적대관계를 중단하여 영국이 마음껏 물건을 팔 수있게끔 교역과 경제를 다시 활성화 시켜서 그에 따라 군대의 역량도 강화하면서, 스페인을 우선 정리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스페인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러시아로 간건 확실히 재앙이었던듯.. 아니면 태생적으로 프랑스가 유럽을 통일시키는 제국은 역량상 한계가 있었던걸까요?
    2017.06.26 08:10 신고
  • 프로필사진 ㅇㅇㄴ 아 그리고 나시카님 블로그 팬으로서, 또 궁금한게 바그람 전투와 쇤브룬 조약 다음은 어디 이야기로 넘어가나요? 다시 이베리아 전쟁인가요?

    아니면 1812년 러시아 원정 직전까지 다룬 다음에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는건가요??
    2017.06.26 08:12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일단은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으로 대표되는 외교전 이야기를 좀 하고, 다시 스페인으로 가려고요. 2017.06.26 21:59 신고
  • 프로필사진 Jager 나폴레옹이 이 무렵 초심을 잃고 안이하게 지휘했다며 바그람 전투를 그 사례로 들기도 하는데, 현재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건지 방심하는 건지 초조한 건지 헤깔리네요, 2017.06.26 10:36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저도 이것저것 자료를 보다가 점점 드는 생각이, 나폴레옹의 총기가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너무 잦은 전쟁으로 프랑스의 국력이 소진되고, 반대로 적국들은 프랑스군 편제의 장점을 적극 수용한 것이 나폴레옹 패망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도 그런 취지의 가르침을 남긴 바 있지요, 2017.06.26 22:02 신고
  • 프로필사진 꾸릉꾸릉 이때 개인용 시계가 없었나요? 군단장들에게 지금 공격하라 대신 몇 시에 공격하라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첫날 전투는 거의 주먹구구식이었네요...
    2017.06.26 12:21 신고
  • 프로필사진 오리오리 시계는 존재했지만 군단장들끼리 가지고 있는 시계끼리 오차가 나서 밤 9시에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어도 나폴레옹 시계는 9시인데 다부는 막 8시 45분이고 베르나도트는 이미 10시고 이런식이었을지도...... 2017.06.26 13:11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당시 이미 대부분의 장교들은 회중시계(fob watch)를 가지고 있었고, 일부 부유한 장교는 초침이 달린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저때 왜 저리 조율이 안된 오합지졸 공격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습디다. 확실한 것은 시계가 없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2017.06.26 21:57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7.06.26 19:33
  • 프로필사진 nasica 정중한 말씀 고맙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갈리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고 또 유익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배질이나 욕설, 저속한 표현만 자제해주신다면 어떤 댓글도 환영하니, 부담 느끼지 않고 마음껏 쓰셔도 좋습니다. 참고로, 저는 광해군빠도, 문빠도 아닙니다. 2017.06.26 21:54 신고
  • 프로필사진 검은불길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큰 영향을 끼쳤던 글 둘과 블로그 하나를 미리 제시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atena02/220094764986
    http://blog.naver.com/atena02/220795701120
    http://blog.naver.com/lord2345

    저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한계를 몇 가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 우선 광해군의 장점부터 서술하겠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분조를 이끌고 사실상 전쟁 중 임시 수반에 가까운 위치를 가졌으며 그 덕에 엄청난 현장 겸험과 실무 경험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경험 많은 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견제와 영창대군의 존재로 인해 권력 기반이 취약해진 상태에서도 취임과 동시에 어렵지 않게 반대세력들을 정리하여 정략적인 술수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외교, 특히 정보전에 있어 광해군의 관심과 역량은 대단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이 청나라가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한 [청사]보다 정보량이 풍부할 정도라 청나라 초기 특히 후금시절 연구에 실록이 꼭 필요할 정도입니다.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통신사 한 번 보낸 것 이외에는 정찰에 극히 소홀했던(전쟁 준비 자체는 상당히 있었으나 규모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습니다.)것과 비교하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첫째도 아니고 좀 눈에 띄던 홍타이지의 조선에 대한 적대감과 유능함을 미리 파악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왕자를 지지하는걸 고려할 만큼 외교적 식견은 빼어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도 러시아와 스페인에 상당한 식견을 보이고는 최악의 결과를 선택하거나,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듯 광해군 역시 외교적 식견을 현실에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랬듯 광해군도 자업자득인 점이 컸는데, 왕권이 애초에 취약했던 광해군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대북파를 지나치게 강화시켜 도리어 거기 끌려다닐 수 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외교적 역량은 내치에서 나오는 것인데 광해군은 조선 왕조 통틀어서도 지나치게 높은 궁궐 건설 횟수를 자랑해서 내부 역량을 소모했습니다. 일부 궁궐이야 왕실의 권위와 정부의 행정력을 위해 필요하다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왕이 직접 국방비를 빼내 궁궐 건설에 쓰라고 할 정도면 도를 넘었으며 그 외교적 식견이 다 무의미해질 뿐입니다.

    또한 중립외교라고 하지만 자국내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명나라에 대해서도 입을 열기 힘들었던(광해군은 불안정한 왕위의 안정을 위해 명나라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야했습니다.) 광해군은 최정예 1만 3천을 파병했는데 임진왜란으로 극악히 피폐해진 조선입장에서는 온 힘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도리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는 광해군은 파병까지 해줘서 친명이라고 인식했는데 왜 쫓아냈는지 의아하게 여겼을 정도였습니다.

    흔히 밀지를 내려 싸움을 하지 않고 투항했다고 하지만 사실 조선군은 명군의 일부로서 사르후 전투 최종전 때 처참히 괴멸했으며 좌군과 우군이 전멸하고 좌우군 사령관들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했습니다. 사실 강홍립은 밀지고 뭐고 더 이상 수단이 없어 항복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고 봐야하며, 이 때 포로로 잡힌 병사들도 대부분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이게 중립외교의 성과라면 아우스터리츠 후의 오스트라아도 성과를 냈다고 주장할 말이 있지 않을까요.

    또한 후금이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광해군의 태도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후금의 군주인 누르하치와 후계자인 홍타이지의 성향 차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 상당히 온건파였던 반면 홍타이지는 광해군이 걱정할정도로 조선에대해 강경파였습니다.

    또한 정묘/병자 호란 당시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단되며 경제적으로 거의 붕괴 직전의 인플레를 겪던(제 기억으로 10배는 넘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거의 굴복에 가까운 복속을 하거나 약탈하여 물자를 빼앗는 수단밖에 남지 않았으며 조선의 강경태도만큼이나 청의 경제 사정역시 호란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해군과 인조의 태도만을 가지고 호란의 원인을 따지지만 2차 대전에서 폴란드의 태도만 따지고 히틀러의 성향을 무시할 수 없듯 양대 호란에서 청의 입장과 홍타이지의 성향도 무시할 수 없다 봅니다.

    종합적으로 광해군이 외교적인 식견과 판단력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정작 과한 궁궐 공사에 드는 비용으로 내치를 사실상 붕괴시키며, 특정 당파를 지나치게 키웠다 휘둘린 것은 스스로의 외교적 역량의 팔다리를 자른 것에 가까우며, 어느 정도는 후금-청의 경제적 사정의 악화와 지도자의 성향의 도움도 적지 않게 받았기에 중립외교의 의미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중립외교의 광해군을 최초로 높게 평가한 것은 일제시대였으며 이에 대해서 조선은 무능한 국가였고 만주와 조선은 같은 국가권이며 따라서 조선을 차지한 일본은 만주도 차지해야 한다는 일본 제국주의 논리가 들어가지 않았나 의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 시간이 적어 조금 난잡하게 적긴 했는데 링크한 글들이나 블로그에서 훨씬 다채로운 자료나 의견을 보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일단 이만 줄이겠습니다.
    2017.06.26 23:00 신고
  • 프로필사진 검은불길 이 모든 내용은 전문가가 아닌 제 의견이고 나시카님께서 다른 입장과 정보, 의견이 있으시면 겸손히 받겠습니다. 2017.06.26 23:53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저도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7.06.27 00:01 신고
  • 프로필사진 검은불길 감사합니다. 혹여 제 글에서 문제점이나 모순, 미흡하거나 의문인 점이 있으면 마음껏 지적해주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블로그 방문하겠습니다.
    2017.06.27 00:15 신고
  • 프로필사진 SHMOON 안녕하세요, 일주일 전 이 블로그를 찾고 지금까지 쭉 시간 날 때마다 정주행한 애독자(?) 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나시카님의 글을 기반으로 다시 정리한 글을 여타 커뮤니티에 올려도 될지 묻고 싶었습니다.
    미니어쳐 워게임 판에서 나폴레오닉의 지분을 조금이나마 늘려 보고자 이런 무리한 부탁 드립니다.
    2017.06.26 23:14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제가 영광이지요. 그러셔도 됩니다. 2017.06.27 00:02 신고
  • 프로필사진 서형석 나시카님 안녕하세요. 항상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변함없이 훌륭한 필력이십니다. 크킹2연재물을 한번 읽고 나시카님 연재를 다시 읽으니 이해도가 더욱 빨라지더군요. 서양 중세-근세사에 대해서 나시카님께 참 배우는 게 많습니다. 2017.06.27 00:01 신고
  • 프로필사진 nasica 저같은 사문난적한테 배우시면 곤란하고 역시 책을 읽으셔야... 2017.06.27 00:03 신고
  • 프로필사진 mip 사문난적이라니요 나시카님..!! ㅋㅋㅋㅋㅋㅋㅋㅋ 2017.06.28 17:13 신고
  • 프로필사진 legerescis 나폴레옹의 삶은 어떤 의미에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겁지겁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능력(?)이건, 전쟁기계로 불릴 정도로 딱딱 병력을 옮겨 적과 싸울 시점에는 항상 우위를 점했던 능력이건, 이러한 젊어서나 가능했던 능력을 마치 평생 가는것인양 하다가,
    이제 나이도 들고 충분히 먹었는데도 젊을 때 생각해서 똑같은 것을 하려해도 몸도 머리도 안 따라주는데 유럽이 되었건 음식이 되었건 괜히 충분히 얻을 것 얻었음에도 욕심을 내고 더 해쳐먹으려다가 결국은 탈이나서
    개인으로서의 나폴레옹은 배도 나온데다 만성복통에 시달리는 중년이 되었고, 국가원수로서의 나폴레옹은 노른자는 다 차지한 유럽에서 더 욕심내다 쓸모도 없는 러시아 땅 쳐들어가다 최종적으로는 실권이고 뭐고 다 잃고 유배지 섬에서 마누라 아들 타령만하다 처량하게 죽고...

    화무십일홍이오, 권불십년이니 항상 조심해서 살아야 겠습니다. (-ㅅ-)
    2017.07.02 14: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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