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9.17 01:42

양측의 모든 장군들이 다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만, 프랑스군의 맨 오른쪽을 담당한 다부(Louis-Nicolas Davout)도 새벽부터 바빴습니다.  사실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스타트를 끊은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이 다부의 프랑스군 제 3군단을 습격한 사건이었지요.  이 공격은 이미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해놓았던 다부에 의해 즉각 격퇴되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현장에 달려오는 등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중앙을 버려두고 맨 동쪽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요 ?  당시 39세로서 프랑스군 원수 중에서는 가장 어렸던 다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요 ?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그 능력에 있어서나 충성심에 있어서나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새벽의 그 소동이,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멀리서 당도한 것인지 걱정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이 루스바흐(Russbach) 고원의 지형적 우위를 버리고 평원으로 내려와 감히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지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이번 전투의 승패는 바로 다부의 제3 군단의 활약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은 완만한 반원형으로 굽은, 동서로 길게 뻗은 고지의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진형 때문에 프랑스군이 평야 저지대로부터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역이용하려 한 것이 바그람 전투의 핵심이었습니다.  평야에 배치된 프랑스 군단들이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망치 역할을 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측면에서 납작하게 때리는 역할을 할 것이 다부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부가 먼저 로젠베르크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이 포진한 루스바흐 고원의 동쪽 끝에 올라선 다음, 거기서부터 김밥 말듯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려야 했거든요.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면 두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저 멀리 프레스부르크에서 오고 있다는 요한 대공의 군대가 제때 나타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쪽에 배치해둔 정찰 병력이, 요한 대공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거든요.  둘째 조건은 다부의 측면 공격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측면을 찔러, 분산된 적군을 조금씩 분쇄하며 전진하는 것이 승리의 요소였는데, 만약 적군이 나폴레옹의 작전을 눈치채고 동쪽 고지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한다면 아무리 다부라고 해도 쉬운 승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벌어진 로젠베르크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기습의 요소가 망가져버리자, 나폴레옹은 전체 작전이 흔들릴까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물러가 또아리를 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 뒤, 기습이라는 잇점이 사라진 것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다부에게 하달했습니다.  즉, 공세를 두갈래로 나누어,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정면과 함께 측면으로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둘러본 그 일대 지형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바라보고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남서쪽면은 꽤 급한 경사면으로 되어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쪽 측면은 매우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어 진격이 꽤 수월해보였던 것입니다.  다만, 그 동쪽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력을 루스바흐(Russbach) 개천 너머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대포를 개천 너머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임시 가교를 놓는 등 꽤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습의 요건이 사라진 이상,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나폴레옹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항공 사진에 당시 다부의 공격 방향을 표시한 것입니다.  루스바흐 개천의 모습은 아마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공격 개시 시간이 2~3시간 늦어지더라도, 어차피 처음부터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프랑스 군단들 중 그야말로 최강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프랑스군의 각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포병 연대와 기병 연대까지 합해서 약 2~3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편제였고, 실제로는 전투에 나설 때 2만을 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1만7천 정도의 병력만 갖추고 있었고, 달마시아(Dalmatia) 방면군으로 형성된 마르몽(Marmont)의 제11 군단은 1만에 불과했습니다.  주요 지휘관이 거느린 군단은 규모가 좀더 컸습니다.  나폴레옹이 새벽부터 아스페른부터 아더클라까지의 약 8km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며 조자룡 헌창 쓰듯 부려먹은 마세나의 제4 군단도 2만8천의 병력에 86문의 대포를 갖춘 강력한 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다부의 손에 쥐어준 제3 군단은 무려 3만8천의 병력에 120문의 대포를 가진 진짜 전쟁 기계였습니다.  그에 비해 로젠베르크가 거느린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은 1만9천의 병력에 60문의 대포 뿐이었고, 전날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 장군의 전위대 잔존 세력 6천을 합해도 다부의 제3 군단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화력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나폴레옹은 새벽에 달려온 지원 병력 중 원래 기병 예비군단 소속이던 아리기(Jean-Toussaint Arrighi de Casanova) 장군의 흉갑기병 사단 약 2천을 다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애초에 로젠베르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리기 장군은 나폴레옹과 같은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조카사위 뻘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초기부터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이 전투 뒤에 '다부가 자신의 흉갑기병 부대를 터무니없는 지형 속에 쳐넣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쪼르르 나폴레옹에게 쫓아가 일러바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부가 아리기의 부대를 부적절한 지형에 투입한 것은 맞는 말이긴 했습니다.)




다부의 공격은 오전 10시 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부는 나폴레옹이 명령한 대로 병력과 대포를 반으로 나눠 정면, 즉 그로스호펜(Grosshofen) 쪽으로부터는 구댕(Gudin)과 퓌토(Puthod) 사단을 진격시켰고, 동쪽 측면으로부터는 미리 동쪽에서 루스바흐 개천을 건너 위치를 잡은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나폴레옹 머리 속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프리앙과 모랑의 사단들이 측면을 우회하느라 이동하는 모습을 로젠베르크는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확실히 고지를 점거한 측이 전투 현장에서의 정보 파악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에는 랜드마크 격인 꽤 높은 탑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모두 훤히 보였습니다.  당연히 정면으로 도전해온 구댕과 퓌토은 물론, 측면으로 들어온 프리앙과 모랑 모두가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지금도 서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입니다.  교회는 아니고... 무슨 목적의 탑인지 못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사기만 충천할 뿐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포병대와 기병대의 전력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새벽에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의 선제 공격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숙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훨씬 많았던 프랑스군의 포병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이미 많은 수의 대포를 파괴당한 상태였습니다.  압도적인 프랑스 포병대가 우박처럼 쏘아대는 포탄과 폭발탄에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은 곧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전진해오는 프랑스군 보병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위협을 가했으나, 이들도 훨씬 더 우세한 프랑스군 기병대에 곧 제압되었습니다.  특히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패전 이후 많은 군마를 나폴레옹에게 몰수당한 뒤 기병 양성에 애로사항이 많았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집단 기동에 무척이나 미숙했습니다.  로젠베르크에게 배속된 오스트리아 기병대도 숫자는 적지 않았습니다.  긴 횡대 진형의 끝 부분을 맡고 있는 로젠베르크 군단의 중요성과 취약성을 잘 알고 있던 카알 대공이 무려 5200명의 기병대를 배치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부가 거느린 약 8000의 기병대와 겨루어 볼만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중대(squad) 단위의 전술 정도만 익혔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랑스군 기병대처럼 연대 단위가 한덩어리로 돌격과 선회를 자유자재로 하는 적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의미없는 소규모 돌격을 거듭하다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보이는 곳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쓰러지는 바람에 함께 쓰러진 다부의 모습입니다.  이건 봉변이 아니라 상당한 명예였습니다.  당시 장군들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용담으로 '내가 탔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진짜든 거짓말이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정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다부 휘하에서 이 공격에 참여했던 제7 경보병 연대의 한 병사는 적의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자신도 전에는 한 전투에서 그렇게 많은 총탄을 쏘아댄 적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머스켓 소총이 너무 뜨거워져서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불타는 마을에서, 구댕+퓌토와 프리앙+모랑의 4개 사단이 양측에서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십자 사격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을은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무너지려는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전위대 사령관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참호 속에 빠졌는데, 황급히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고위급 장군마저 내버려둔 채 퇴각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프랑스군에 의해 발견된 노르드만은 그 날 49세의 한많은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아르만 폰 노르드만입니다.  그는 원래 프랑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알자스 출신으로서 독일어가 모국어였지요.  그는 프랑스군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 혁명 뒤에도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뒤무리에 장군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무리에가 망명한 이후 결국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거기서 프랑스군과 계속 싸웠습니다.  나폴레옹은 노르드만을 말할 때마다 '그 알자스 배신자'라고 부르며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은 비록 철저하게 밀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는 약간 서쪽으로 물러난 뒤, 다부가 더 이상 김밥말이를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 앞에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마침 그때 카알 대공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 예비대를 이끌고 황급히 달려와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미 고원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다부의 제3 군단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을의 돌담 뒤에서도 버티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이, 허허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일렬로 늘어선다고 버틸 수 있을리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몸으로 쌓은 방어벽은 프랑스군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후 1시 경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북서쪽으로 패퇴하고 그 자리를 다부의 군단이 차지하자, 상황은 나폴레옹이 바라던 모습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의 군단의 측면이 다부의 포병대에게 그대로 노출된 것입니다.  이제 오스트리아군에게 남은 것은 나폴레옹의 구상대로 돌돌 말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라데츠키(Radetzky) 장군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이미 "젠장, 이 전투는 졌구만"이라고 한탄한 바 있었습니다.  클레나우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이 프랑스군의 후방 아스페른과 에슬링를 공격할 때, 나폴레옹 주변의 젊은 참모 장교들은 후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성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나폴레옹에게 '배후를 습격당했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후방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를 보냈으니까요.  그는 계속 망원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부의 보병들과 포병들이 뿜어내는 불꽃과 연기가 마침내 탑을 지나쳐 진격하는 순간, 나폴레옹도 라데츠키처럼 "이 전투는 이긴 것이다"라고 주변의 참모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참모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려 마세나에게 공격을 계속 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다른 원수들에게도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특히, 막도날에게 아더클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막도날에게 드디어 화려한 무대 조명이 비추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막도날은 이 기회를 잘 살려냈을까요 ?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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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16 22:27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밑, 공작보다는 위인 대공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들을 총 3개부대로 편성하여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을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1개 부대는 6개 대대로 작게 편성되어 프랑스군 수중에 있던 그로스호펜(Grosshofen) 마을을 공격하기로 했고, 무려 16개 대대로 강력하게 편성된 다른 1개 부대는 글린첸도르프(Glinzendorf)를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글린첸도르프로 향하는 부대에는 나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음악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라데츠키 백작(Joseph Radetzky von Radetz)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모두 기병대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멀찍이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를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나름 굉장히 머리를 쓴 작전이었고, 전날 헛된 공격으로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에게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로젠베르크의 공세에는 무려 60문의 대포가 딸려 있었으므로, 새벽 하늘에 엄청난 포성을 울려 나폴레옹의 시선을 잡아 끌게 되어 있었습니다.




(붉은색 원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역이고, 푸른색 원은 오스트리아군 주요 거점입니다.  푸른색 화살표가 로젠베르크의 공세 방향입니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게는 재수가 없게도, 그의 앞에 있던 부대는 바로 프랑스군 최고의 지장이라고 할 수 있던 다부(Davout)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무려 3만2천의 보병과 6천2백의 기병, 그리고 무려 12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어서 프랑스군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로젠베르크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습이라도 성공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다부는 전날의 야간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공격을 걷어들인 바 있었지요.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로 지치지도 않았고, 새벽에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을 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로젠베르크는 공세에 나서면서 '절대 엄숙'을 지시했으나, 이 군단에는 반쯤은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소음을 내며 행군을 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무척 놀라긴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새벽 5시 경,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선봉대가 그로스호펜을 습격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이어서 글린첸도르프에도 오스트리군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1개 연대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로스호펜은 곧장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넘어갔으나, 다부는 당황하지 않고 곧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호펜에서 밀려난 프랑스군의 퓌토(Puthod) 장군이 그로스호펜을 탈환하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동안 구댕(Gudin) 장군의 강력한 사단이 그 측면을 들이쳤습니다.  프리앙 장군과 모랑 장군의 2개 사단이 주둔하고있던 글린첸도르프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잘 버텨주었고, 그루시(Grouchy) 장군과 몽브렁(Montbrun) 장군의 프랑스군 기병대는 측면을 돌아 레오폴즈도르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를 오히려 다시 우회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로젠베르크와 다부가 새벽에 혈투를 벌이며 낸 포성과 총성은 새벽 하늘을 가로질러 라스도르프(Raasdorf)에서 이른 아침식사 중이던 나폴레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다부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을리도 없으니, 그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이었지요.  당시 프레스부르크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는 고작 1만3천 정도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이 좀 부풀려 보고를 했는지, 나폴레옹은 요한 대공의 군세를 약 3만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병력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마당에 적에게 3만이 더 가세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비 기병대로부터 낭수티(Nansouty)와 아리기(Arrighi) 장군의 중장 기병대를 다부 쪽으로 파견했고, 이어서 황실 근위대까지 그쪽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마저 끝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낭수티 장군의 기병대 중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마 포병대가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첫 포탄을 발사할 때 즈음에는 이미 나폴레옹도 현장에 도착하여 다부와 함께 반격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습을 해온 오스트리아군 측이었습니다.  작전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던 카알 대공은 어차피 프랑스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쪽 전선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로젠베르크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고 있는 적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어느 한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순간이었거든요.  이 때 병력 통제가 안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후퇴를 기술적으로 잘 해내는 것은 뛰어난 지휘관과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병사들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것을 해냈습니다.  순식간에 전위대에서 후위대로 임무가 바뀐 라데츠키 장군의 부대는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이 원래 출발선이었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퇴각할 때까지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잘 억눌렀고, 결국 아침 6시가 되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1천1백명 정도로 심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말년의 라데츠키입니다.  그는 원래 보헤미아, 즉 체코의 귀족이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그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1848년 쿠스토자(Custoza)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군을 격파한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 즉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맥없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걱정한 것은 그가 의도했던 기습이 이 새벽의 전투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다부의 공격이 그의 주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잃어보린 기습 효과를 어느 정도 벌충하기 위해 다부에게 일부 병력을 더 동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후방으로부터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다부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부에게 이렇게 감놔라 배놔라 참견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가슴을 정말로 철렁하게 만드는 사건이 전선 중앙부 아더클라(Aderklaa)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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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25 22:02

이렇게 7월 5일 저녁 6시 경, 나폴레옹의 군단들이 게라스도르프(Gerasdorf)-바그람(Wagram)-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방어선 앞에 전개하면서 나폴레옹은 이 날의 1차 목표, 즉 도나우 강을 건너 전체 병력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마르히펠트에 쓸데없이 포진해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제때에 포착, 쉴새없이 공격하여 6천이 넘는 피해를 입힌 것도 기분 좋은 시작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아군과 적군의 전개 모습을 보니 상황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에 주둔한 요한 대공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이미 자신의 지휘 하에 저렇게 전개되어 있는데 요한 대공의 군대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결정적인 우세가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의 주요 마을 명칭을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했습니다.  당시 마을의 위치가 지금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가령 저 에슬링 마을은 당시보다 훨씬 북쪽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내선이동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보니, 카알 대공은 게라스도르프-바그람의 비삼베르크 고지대와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루스바흐 고지대라는 완만하게 반원형으로 마르히펠트 평원을 감싼 두 능선에서 프랑스군을 집게로 죄듯이 양측에서 포위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이 보기에 매우 어설픈 포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오른쪽 끝, 즉 게라스도르프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끝,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까지의 거리는 약 12km의 먼 거리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대 경사면 바로 위쪽에 구축해둔 토루나 참호같은 방어 시설에 의존하여 싸울 생각인 모양이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이 중앙 공격을 한다면 양쪽 끝의 오스트리아군은 중앙부를 지원하기 위해 애써 만들어둔 고지대의 방어 시설을 포기하고 저지대의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좌우익이 각각 6km씩을 헐레벌떡 뛰어와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반원형의 안쪽 면에서, 어느 지점의 오스트리아 방어선을 뚫을지 여유있게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으로든 훨씬 짧은 거리만 이동하면 되었으므로 기동성에 있어 절대 유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 방어선에서 가장 방어하기 곤란한 형태의 공격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즉 맨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측면으로부터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나폴레옹은 갑자기 초초해졌습니다.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무엇이 나폴레옹을 불안하게 했을까요 ?  2가지였습니다.  첫째, 요한 대공의 병력이 언제 동쪽에서 짠 하고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아무래도 저지대에서 고지대 위쪽의 상황을 정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라, 대체 저 고지 위에 오스트리아의 전체 병력이 웅크리고 있는지 아니면 불과 1~2개 군단만 대기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카알 대공이 싸우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투를 거부하고 저 멀리 보헤미아로 또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빨리 결판을 내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으므로, 몸이 달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야간 전투를 꺼려했습니다.  원래 명장일 수록 운에 의존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계산에 넣고 제어해가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병력 통제는 커녕 피아 구별도 하기 힘든 야간 전투에서는 상당 부분이 운에 맡겨질 수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초조함이 나폴레옹에게 과욕을 부리게 합니다.  그는 어제 밤부터 잠도 못 자고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이제 슬슬 숙영 준비를 하려던 병사들에게 뜻 밖에도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도 당장 1~2시간 안에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휘하 군단장들을 놀라게 하기 전에, 당장 나폴레옹 직속 참모 장교들을 당황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의향대로 명령서를 받아적고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한 뒤 이제 막 어두워지는 이 넓은 마르히펠트 평원을 말을 달려 이 명령서를 받을 수신인, 즉 각 군단장들을 찾아 제때에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명령서들은 각 군단장들에게 제각각 시간 차를 두고 전달되었는데, 명령서 내용은 '즉각 공격하라'는 것이었으니 각 군단들의 공격은 전혀 동기화되지 못한 채 시간 차를 두고  뿔뿔이 분산된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군단들은 아직 휘하 사단들이 제 위치로 이동하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 개시가 더욱 늦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래 의도는 오스트리아군의 양쪽 날개 중 동쪽 날개, 즉 루스바흐 고지의 바그람-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라인을 3개 군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 방어선 전체를 견제하면서, 결정타로는 다부의 제3 군단을 이용하여 맨 동쪽 끝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부터 서쪽으로 돌돌 말아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이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어 오스트리아군의 대혼란에 빠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전혀 타이밍을 못 맞춘 채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온갖 불운이 따르면서 오히려 프랑스군 측이 대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단, 시작은 우디노 제2 군단이 끊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위치로부터 가까운, 중앙부 쪽에 있던 우디노는 나폴레옹이 원하던 대로 저녁 7시 경에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디노의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고지에 보루를 구축하고 68문의 대포를 이용해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두들겼으나, 제2 군단은 호기있게 루스바흐(Russbach) 시냇물을 건너 루스바흐 고지의 경사면을 기어올라 바우머스도르프(Baumersdorf)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이 마을은 목조 주택이 30여 채 정도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해 이 가옥들에 화재가 발생하여 꽤 많은 연기를 토해냈습니다.  이 연기와 화재에도 불구하고 호헨촐레른(Hozenzollern)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굳게 바우머스도르프를 지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너지지 않자, 우디노는 이 마을 측면에 프랑스군 전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고 소문난 제57 전열 연대, 별칭 '무시무시한 녀석들(Les Terribles)'까지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했고, 호헨촐레른 장군이 직접 기병대를 끌고 반격을 가하자 공격하던 프랑스군이 오히려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 만에 우디노의 공격은 큰 피해만 입은 채 지리멸렬한 추태를 보이며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바로 서쪽 측면에서는 우디노보다 조금 늦게, 제5 군단이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은 비삼베르크 능선과 루스바흐 능선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여기에 공격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보다 막도날드의 좌측, 즉 바로 서쪽 측면에서 공격을 하게 되어 있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으로부터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이 파견되어 막도날드 지휘 하에 이곳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대포를 버리고 달아나는 등 일부 전열이 무너지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벨가르드(Bellegarde) 장군의 최전선 독려에 힘입어 끝끝내 버텼습니다.  




(이 분이 뒤파 장군입니다.  그는 Evian 생수로 유명한 에비앙 태생으로서, 사보이 공국의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태생이 그렇다보니 14세 때 프랑스군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왕국군에 입대했다가, 나중에는 역시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제노바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 흘러흘러 파리로 들어왔다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를 습격한 폭도 중의 한명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요.  그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간 용감한 군인이었는데, 너무 용감한 군인이 흔히 그렇듯이 많은 부상을 입어 결국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제대하게 됩니다.)



이러는 사이 화재 연기와 어둠 속에서 도이치 바그람 마을 안의 시계는 무척 나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는데,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즉 작센군도 전통적으로 흰색 군복 차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휘하였던 뒤파 장군의 사단 병사들도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막도날드 휘하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다른 방향에서 진격해온 뒤파 휘하의 작센군과 혼전 속의 바그람 마을 안에서 마주쳤는데, 이들은 그만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착각하고 일제히 발포해버렸습니다.  바이에른군과는 달리 작센군은 가뜩이나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와 사기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오인 사격은 그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습니다.  작센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며 그 일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 카알 대공 본인이 직접 달려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더욱 열정적으로 덤벼 들었고, 결국 막도날드의 이탈리아 방면군도 무질서하게 후퇴해버렸습니다.  


한편, 그 왼편, 즉 더 서쪽에서는 작센군으로 이루어진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9 군단이 역시 도이치-바그람 마을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와 베르나도트의 2개 군단이 바그람을 양쪽에서 집중 공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나폴레옹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무척 삐져있었습니다.  일단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프랑스 군단이 아닌 작센 군단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 화가 나 있었는데, 이번 공격 직전에 그나마 있던 3개 작센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주라는 명령을 받고 더욱 분개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의 2개 사단 중 제쥬비츠(Zezschwitz) 장군의 사단은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므로, 베르나도트는 막도날드와 함께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르코크(Lecoq) 장군의 1개 사단만이라도 동원해서 막도날드와 함께 동시에 공격을 시작해야만 했었는데, 베르나도트는 심통이 단단히 났는지 나폴레옹의 터무니 없이 조급한 명령 탓만 하며 제쥬비츠 사단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제쥬비츠 사단이 도착한 9시 경에야 베르나도트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바그람 마을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쳐들어간 바그람 마을은 연기와 어둠 속에서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였습니다.  그곳으로 쳐들어갔던 하르티쉬(Hartizsch) 장군은 그곳에 이미 뒤파 장군의 작센 사단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용감하게 뛰어든 것인데, 가보니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병사들이 모두 흰색 군복을 입고 독일어로 고함을 치며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르티쉬 장군의 작센군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총격전을 벌였고, 급기야 백병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서로가 같은 작센군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양측 병사들은 모두 맥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색 군복을 입은 오스트리아군이 이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으므로, 가뜩이나 사기가 좋지 않았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병사들은 우르르 무너져 보기 흉한 패주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궤멸 상태에 빠져, 마르히펠트 평원 언저리의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까지 후퇴했는데, 여기서도 재집결을 하지 않고 더 도망치는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군단을 다시 모으고 재편성하느라 베르나도트는 그날 밤 소집된 나폴레옹의 군단장 회의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가장 동쪽 끝에 있던 다부의 제3 군단이 사실상 이 공격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군단들이 3개 보병 사단 약 2~3만명 수준의 병력을 갖춘 것에 비해, 다부의 제3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4만2천의 병력을 갖춘, 그야말로 튼실한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의중대로라면 이런 병력을 갖춘 다부가 동쪽 끝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루스바흐 능선을 따라 돌돌 말아올리며 서쪽으로 진격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범생 다부조차도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늦게 받았는지 준비가 덜 된 상태라서 그랬는지, 베르나도트보다 더 늦게 밤 9시가 넘어서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다부는 모범생답게 구댕(Gudin)과 퓌토(Puthd) 사단의 정면 공격과 함께 측면에서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측면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무너뜨리도록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군의 투지와 방어태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탄 속에 휘하 사단들이 고지 위로 전진을 못하는 것을 보자, 다부는 '이건 이미 망한 전투'라고 결론을 내고 1시간 만인 밤 10시 경에 공격 명령을 취소시키고 병력을 후퇴시켰습니다.  


이렇게 7월 5일 밤, 나폴레옹의 호기로운 공격은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군은 근 6km가 넘는 전선에서 약 1만1천의 사상자를 내며 물러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패배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낮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그 징조가 보였지요.  노르드만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를 하루종일 그토록 괴롭히며 무려 50%의 사상자가 날 정도의 피해를 입혔는데도 노르드만 부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1805년 당시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마 몇 시간 못 버티고 무너져 부대 전체가 항복하거나 완전 궤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끝내 버티며 결국 절반이라도 살아서 오스트리아군 방어선에 합류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의 국방 개혁은 확실히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은 1805년 당시의 투지 없고 미숙한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의 수준은 과거보다 확실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 징집된 신병들이 잔뜩 섞인데다 작센 병사들과 이탈리아 병사들이 많이 포함된 군대는, 과거처럼 혁명 정신에 불타는 프랑스 고참 병사들로 구성된 과거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그다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 전투를 통해 루스바흐 고원 위에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 주력군 전체를 이끌고 결전을 벌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큰 그림, 즉 동쪽부터 서쪽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김밥말이하겠다는 작전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확신했습니다.  비록 오늘밤의 공격은 '불운'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날이 밝은 상태에서 제대로 공격한다면 성공하리라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의 상황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했습니다.  뜻 밖에도, 오히려 카알 대공이 밀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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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19 21:24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에슬링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느슨했는데, 그 두 마을 사이의 중앙 평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중앙을 돌파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항상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던 란이 다시 한번 그 중앙부를 돌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난 뒤, 란은 크게 좌향좌를 하여 오스트리아 주력인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3개 군단을 측면으로부터 돌돌 말아올릴 예정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란이 이끌고 돌격할 제2 군단이 강을 무사히 건너야 했는데, 새벽 3시가 되어 그 도강이 완료되었습니다.  즉, 작전 실행 준비가 끝난 셈이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머리 속에 그려지던 5월 22일, 둘째날 전투의 전개도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다부의 제3군단은 로바우 섬은 커녕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란이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릴 때, 란의 측면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가 역으로 들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즉, 이미 전날 밤 9시에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제3 군단을 도나우 강 우안의 부교 시작점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소환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밤새 행군하면 아침 나절에 거기에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도강시켜 란이 자리를 비운 중앙 지점으로 밀고 나가면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부의 군단은 란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과하여 란과는 반대 방향인 우향우를 한 뒤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의 옆구리를 들이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의 핵심인 란의 김밥말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군단들을 잘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뒤엉켜 있던 마세나의 제4 군단이 그들을 먼저 평원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 11시까지 아스페른을 손에 넣으려는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이다, 골목 하나를 경계로 지쳐 쓰러져 잠든 마세나의 병사들은 불과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다시 부사관들의 재촉을 받으며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 4시, 마세나의 병사들이 아스페른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두번째 날이 시작된 것이지요.  잠을 자다 기습을 당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는데, 그래도 아침 7시 경에는 결국 아스페른 마을 대부분에서 프랑스군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한편, 마침 자욱하게 안개까지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은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평원에 있는 밭두렁 뒤로 조용히 행군하여 포진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아스페른으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곧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전면 평원에 자리를 잡은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안개와 어둠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평원을 휩쓰는 포격을 개시한 것입니다.  란의 병사들은 밭두렁 뒤에 납작 엎드려 있긴 했습니다만, 점점 날이 밝아오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가려주던 안개마저 아침 7시가 되자 걷히기 시작하면서 슬슬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벌써 3시간 째 적의 포격에 노출된 채로 밤이슬을 맞으며 나폴레옹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자니 죽을 맛이었겠지요.  차라리 어떻게 되건 간에 빨리 돌격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습니다.


한편, 이들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로바우 섬에 자리잡고 앉아 망원경으로 전장을 지켜보면서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전령들의 보고를 받고 있던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란의 제2 군단이 진격하고 나면 텅 비게 되는 그 자리를 채워줄 이들이 도착해야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부의 군단은 항상 쾌속 행군으로 유명했는데, 과연 아침 7시가 되자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다부의 군단이 집결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 3만에 달하는 다부의 군단이 3km가 넘는 부교와 섬을 건너 도나우 강 좌안으로 넘어오려면 최소 3시간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저 길고 좁은 위태위태한 부교를 군단 전체가 건너려면 엄청난 병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세나와 란의 병사들이 사용할 예비 탄약도 아직 강의 우안에 그대로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차에 이 포탄과 탄약 상자들을 싣고 부교를 건너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는, 다부의 군단과 예비 탄약이 강 좌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로바우 섬까지는 건너와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다부의 군단이 이제 막 도강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란에게 진격 명령을 전달한 것입니다.  3개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연결된 부교 중 특히 우안과 롭그룬트 섬 사이를 잇는 긴 부교는 이미 두어 차례 끊어진 바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추가 병력과 예비 탄약이 강을 건너지 못한 채로 공격을 시작했다가 부교가 다시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였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그냥 몇 시간만 더 기다려 병력과 탄약이 로바우 섬으로 넘어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전투 현장에서 안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의 비결 중 하나는 '적보다 반박자 빠른 행동'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을 거둘 때도, 전체 작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다부의 군단은 당일 전투 직전까지도 전투 현장을 향해 맹렬히 행군 중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다부의 도착 이후까지 전투를 미루었다면 아우스테를리츠의 완벽한 대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렝고에서도, 프리틀란트에서도,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과감히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반박자 빠른 작전에 대해 그의 적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강점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다음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폴레옹의 원대한 전략은 빌뇌브의 영국 침공 함대로 하여금 도버 해협이 아니라 먼저 대서양 너머의 카리브해로 가서 그 곳의 영국 식민지를 휘젓게 했습니다.  위 그림은 그 중 일환이었던 카리브해의 다이아몬드 암초 공략 작전입니다.  실제로 이때 당시 카리브해에서의 영국 해군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만약 빌뇌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자메이카 공략까지도 가능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저 보잘것 없는 암초 하나를 공략하고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짠 작전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국 트라팔가 해전으로 이어졌던 빌뇌브 제독의 도버 해협 제압 작전이었지요.  이 해군 작전도 오리지널 원작자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는데, 그는 바다에서의 항해는 지휘관의 의지와 병사들과의 다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따라 엄청난 변수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표를 정했지요.  그 결과, 넬슨 함대를 유인한답시고 카리브 해를 향해 대서양을 두 번이나 횡단했던 이 원대한 기만 작전은 결국 트라팔가 해전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이 도나우 강 작전에서도 나폴레옹의 의지와 그의 부하들의 다리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대서양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Schwarzwald)의 눈 녹은 물로 인해 시시각각 물결이 거세지던 도나우 강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런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부의 도강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 개시를 명했습니다.  이 결정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혀 쌍방이 서로의 움직임을 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란의 제2 군단이 상대적으로 텅 빈 중앙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를 오스트리아군도 눈치챌 것이 뻔했습니다.  벌판에 포진한 란의 제2 군단에 대해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그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집중 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공격이 더 늦어지면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대응하여 중앙부로 병력을 집중 배치할 것이고, 그럴 경우 나폴레옹의 작전 전체가 엎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는 아침 7시, 다부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란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대대로 유서 깊은 군사 가문 출신도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전투 지휘 경험은 이미 그를 유럽 제1급 야전 지휘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날 아침 공격 떄 3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좌측부터 타로(Tharreau), 클라파레드(Claparede), 그리고 생-일레르(Saint-Hilaire)의 사단을 포진시켰고, 나폴레옹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장 경험도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생-일레르 사단부터 시간 차를 두고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란의 공격선은 적 전선에 대해 평행선이 아닌, 맨 오른쪽의 생-일레르의 사단이 삐죽 튀어나온 사선 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적 전선 돌파 뒤 크게 좌로 선회하여 적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하려는 제2차 작전까지 감안한 공격 대형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격이었지요.


하지만 란이 뚫으려던 정면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알 대공이 있었습니다.  란의 묵직한 공격을 받고 막 무너져 내리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의 존재와, 그가 끌고 온 지원군의 도움을 받고 간신히 붕괴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저항으로 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란은 생-일레르 사단의 뒤를 따르던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딱 적절한 순간에 투입시켰습니다.  생-일레르 사단과의 총격전을 위해 긴 횡대로 포진했던 오스트리아군 연대들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정예 흉갑기병(cuirassiers)의 돌격에 혼비백산 했습니다.  보병대가 기병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긴 횡대가 아니라 치밀한 방진을 짜고 저항해야 했는데, 허를 찔린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흉갑기병의 갑옷과 장비입니다.  실제로는 흉갑기병이라고 해서 꼭 흉갑을 갖춰 입지는 않았고, 키가 큰 병사와 큰 말을 뽑아 흉갑기병대를 편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보병대에서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척탄병 부대를 편성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림 출처는 https://kr.pinterest.com/marnics/french-cuirassiers-napoleonic/ )



그러나 이때 다시 카알 대공이 나섰습니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연대 쪽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는 기수로부터 그 연대의 군기를 빼앗아들고 병사들의 도주를 제지했습니다.  아무리 패주하는 상황에서라도, 하늘같은 왕족 대공님이 직접 자신이 속한 연대 깃발을 들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다는 것은 당시 병사들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카알 대공의 뒤를 따라 다시 프랑스군을 향해 돌아섰고, 막 무너질 듯 하던 오스트리아 전선은 간신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란의 공격은 여전히 기세등등 했습니다.  카알 대공의 솔선수범이라는 원맨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란이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은 우르르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공격 개시 약 1시간이 지난 아침 8시 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주저하는 유리 멘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날 이 순간만큼은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솔선수범을 통해 그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만천하에 입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몇 km 떨어진 로바우 섬의 나폴레옹에게는 끊임없이 전령들이 오가며 각지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령들 중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짧은 메시지를 전하자, 나폴레옹의 눈썹이 살짝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고, 나폴레옹 주변의 참모들은 방금 나폴레옹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었는지 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전령이 전한 소식은 부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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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