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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98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 탈라베라 전투 (제6편) 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2018. 4. 1.
혈전 - 탈라베라 전투 (제5편) 조제프와 함께 작전 회의 중이던 프랑스 장군들에게 전해진 소식 중 하나는 주르당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술트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술트가 보내온 장계의 내용은 그의 남쪽으로의 행군 현황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진척이 주르당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소식은 조제프와 주르당이 떠나온 마드리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술트의 소식보다 더 나빴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제4 군단과 대치하던 베네가스 장군의 스페인 라 만차(La Mancha) 군이 마드리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원래 베네가스의 임무는 세바스티아니가 탈라베라에서 빅토르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세바스티아니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에 보기 좋게 실패한 베네가스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 2018. 3. 25.
앙졸라와 싸운 자들은 누구인가 - 총기 규제와 국민방위군 이야기 미국이 잦은 총기 난사 사건을 겪으면서도 총기 규제를 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헌법 수정 제2조(The Second Amendment)입니다. 대개 이 조항이 미국 시민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불가침적인 권리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준다고 하지요. 그런데 최근 그런 해석은 틀린 것이며, 헌법 수정 제2조는 시민들에게 총기 소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실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s://www.marketwatch.com/story/what-americas-gun-fanatics-wont-tell-you-2016-06-14 원래 수정 제2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2018. 3. 21.
반보붕권 타편천하 - 탈라베라 전투 (제4편) 프랑스군 1개 연대 약 1600명이 메데진 언덕으로 달려들 때 이 언덕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KGL 여단의 규모는 고작 1200명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다 일어난 판국이라 KGL 여단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올린 프랑스군이 메데진 언덕의 정상 능선을 점령하고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나자, 영국군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능선 바로 너머 후사면에 영국군 2개 여단 약 380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가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2개 여단도 야습은 예상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쪽 경사면에서 야영을 하다, 능선 너머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 2018. 3. 17.
양측의 사정 - 탈라베라 전투 (3편)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를 몰아내고 기세를 탄 웰슬리의 영국군과는 달리, 쿠에스타의 스페인군, 좀 더 정확하게는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군은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인데다 무척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쿠에스타의 군대는 그해 3월 28일에 있었던 메데진(Medellin) 전투에서 빅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 군단과 격돌하여 총 2만2천 중에 약 7천5백의 사상자와 함께 2천에 가까운 포로를 내는 등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에스타가 거느린 3만6천은 그 이후 새로 끌어모은, 애국심만 있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쿠에스타의 스페인군은 빅토르의 뒤를 추격하다가 그가 세바스티아니와 합류하자 황급히 웰슬리가 자리를 잡고 있던 탈라베라로 허둥지둥 후퇴해온 상태.. 2018. 3. 10.
Sharpe's Eagle 중 - 탈라베라 전투 직전 상황 Sharpe's Eagle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9년 7월 27일 스페인 탈라베라) ---------- (웰슬리 휘하 영국군이 좌익, 쿠에스타 휘하 스페인군이 우익을 맡아 프랑스군과 탈라베라에서 대치합니다. 영국군 샤프 대위 일행이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 봅니다.) "저게 뭐야 ?" 3/4 마일 전방에서 프랑스군 용기병들이 기병총을 쏘아 대고 있었다. 샤프에게는 그들이 무엇에다 대고 쏘는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총에서 나오는 연기와 희미한 총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기병이요." "나도 그건 알아." 호건 소령이 말했다. "뭐에다 대고 쏘냐는 거지 ?" "글쎄, 뱀일까요 ?" 포르티나 강을 따라 걸어올라오면서, 샤프는 작고 검은 뱀들이 강 옆 짙은 수풀 속에서 .. 2018. 3. 7.
왕과 원수들 - 탈라베라 전투 (2편) 1809년 7월 27일, 탈라베라에 모인 프랑스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제1 군단장 빅토르 원수, 제4 군단장 세바스티아니 장군, 그리고 조제프 국왕을 보좌하는 주르당 원수의 3명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총사령관은 조제프 국왕 본인이었습니다만, 아무도 그에게서 전략이나 지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요. 세 명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빅토르 원수였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원수가 아니었으므로 계급도 낮았지만, 사실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및 행정 관료라고 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원수였습니다.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주르당은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고,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도 복무하는 등 험한 곳을 돌.. 2018. 3. 4.
아폴로 호는 왜 좌초했나 - 나폴레옹 시대의 GPS 최근 미군 소속 EA-18G 전자전 전투기가 2만5천 피트 상공에서 비행 중 환경제어시스템(environmental control system)의 고장으로 온도가 마이너스 34도까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답니다. 2명의 조종사들이 얼어죽을 정도로 추웠다는 점 외에도,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캐노피 유리의 안쪽은 물론 주요 계기판에 불투명한 얼음막이 잔뜩 끼어 계기 비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동상으로 인한 부상을 빼면 이 기체는 무사히 기지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 놀랍게도, 조종사들이 손목에 차고 있던 450달러짜리 Garmin Fenix 3 스마트 왓치 덕분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상 관제소도 도움이 되었지요. 이 스마트 왓치는 기압과 고도, 그리고 진행 방.. 2018. 2. 26.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 2018. 2. 25.
밥상의 사회 계급 - 바위로 만든 군함 이야기 제가 카투사로 미군들과 근무했을 때, 미군애들의 재미있는 습관이나 행동거지들 몇가지를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인종간의 갈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희 부대는 Finance 부대였습니다. 한마디로, 행정병들로 구성된 부대였지요. 또, 부대의 1/3 정도가 흑인, 1/3은 멕시칸, 나머지 1/3이 백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부대보다 소위 '유색인종'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는데, 고참 말에 따르면 특히 흑인들은 '사무실 근무'를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원래 흑인들은 육체 노동을 싫어하고,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는 직업을 꼭 얻고 싶어한다고요. 저도 그랬지만 제 고참도 당시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때이므로 뭐 그 이야기는 꼭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의외로, 어쩌면 당연히, 미군들.. 2018. 2. 21.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포로가 (당연히) 많이 생겼습니다. 동양적, 특히 일본식 사고 방식에서는 싸움에 졌는데 죽지 않고 생포되어 목숨을 구하는 것이 굉장히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럽에서는 싸우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항복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항복이라는 것은 그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항복에는 조건부 항복과 무조건 항복이 있었는데, 일단의 부대가 전장에서, 혹은 지키던 도시나 마을에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적과 조건부 항복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가장 유리한 항복 조건이란 지키고 있던 장소를 적에게 넘겨주는 대신, 항복하는 부대가 .. 2018. 2. 15.
어느 용자의 초상 -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탈출 1809년 5월 12일 포르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허겁지겁 산길로 후퇴해야 했고, 따라서 모든 짐은 물론 대포까지 다 버리고 가야 했습니다. 분노한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학살당할 것이 뻔한데도 부상병들을 버리고 감은 물론, 군자금까지 병사들에게 마구 나누어줄 상황이었습니다. 때는 이른 5월이라 차가운 비까지 계속 내려 후퇴하는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까지 축 적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 길 바쁜 프랑스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폰트 노바(Ponte Nova, 새 다리, 스페인어로는 Puento Nuevo)라는 이름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술트 원수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두개의 긴 대들보만 남기고 그 위를 가로지른 널판지는 다 해.. 2018.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