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gram'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7.02 바그람 전투 (제5편) - 혼돈 속의 새벽 (5)
  2. 2017.06.18 바그람 전투 (3편) - 도강 (14)
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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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6.18 23:41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레옹 섬(L'ile de Napoleon)이라고 별명을 붙인 로바우 섬에서의 준비는 6월 말 다리가 준비되면서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회전 부교(pivoting bridge), 즉 작전이 시작되면 로바우 섬의 강변에 고정된 한쪽 끝을 축으로 회전하여 도나우 강 좌안에 붙게 되어 있던 다리는 나폴레옹의 공병단장 베르트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서, 약 800m에 달하는 긴 다리가 놀랍게도 하나의 통판(single span)으로 만들어진 걸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작센 왕에게 이 회전 부교가 엘베 강변의 작센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다리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다리'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끝났는데 시간을 더 끌 나폴레옹이 아니었지요.  그는 7월 5일을 도강 날짜로 잡고, 7월 3일 쇤브룬 궁을 떠나 로바우 섬으로 향했고, 보급과 숙영 등의 문제로 인해 주변에 분산 배치했던 각 군단들에게도 이 날짜에 맞춰 로바우 섬 맞은 편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는 장면입니다.)



로바우 섬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도강을 하리라는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명약관화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로바우 섬이 꽤 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넓은 강변 중 어느 쪽을 통해 강을 건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실은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이 구축한 방어 진지도 로바우 섬의 북안 쪽에만 펼쳐진, 상당히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넓은 강변을 다 지킬 수 없었으니까요.  이때 즈음해서는 카알 대공은 마르히펠트에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미 루스바흐 고원 지대로 물러난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평원을 텅텅 비워두고 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봤는지, 클레나우(Johann von Klenau)의 제6 군단과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의 2개 부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조치는 그다지 좋은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들이닥칠 나폴레옹의 공세를 막거나 시간을 끌기에는 너무 작은 병력이었고, 나폴레옹군의 병력 이동을 감시 및 보고하기 위한 정찰 병력으로는 너무 많은 병력이었던 것입니다.  좀더 규모가 큰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아스페른-에슬링 지역에 전개했고, 더 작은 규모였던 전위대는 에슬링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의 예측으로는, 아무래도 나폴레옹이 지난번과 동일하게 로바우 섬의 북안을 통해 넘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의 예측을 정반대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7월 2일 르그랑(Legrand) 장군의 지휘 하에 소규모의 부대를 로바우 섬 바로 북쪽의 도나우 강 좌안에 상륙시켜 오스트리아군을 긴장시켰습니다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진지가 없던 로바우 섬 동쪽을 통해 도나우 강을 건널 생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7월 4일 밤 10시, 보트를 이용해 로바우 섬 동쪽을 마주한 도나우 강 좌안의 돌출부인 한젤-그룬트(Hansel-Grund)를 점령하고 준비한 부교 3개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북쪽으로도 마세나 휘하의 병력이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넌 뒤, 재빨리 5분만에 회전 부교를 놓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내려준 폭우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고, 한젤-그룬트를 점령했던 프랑스군은 새벽 2시 경 부교를 완성하고 제2, 제3 군단을 도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7월 5일 오후에 이 부교를 건넜던, 외젠의 이탈리아군 소속 프랑스군 포병 대위인 노엘(Jean-Nicolas-Auguste Noel)에 따르면 이 다리 위로 대포가 지나갈 때 그 무게에 짓눌려 다리의 판자가 무려 50cm나 가라앉았다고 하니, 여전히 부교는 불안했고 또 따라서 대군이 그 많은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강을 건너는데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추가적인 부교도 몇 개를 동시에 놓도록 하여, 7월 5일 아침 7시 경에는 이미 마세나(André Masséna)의 제4군단과 다부(Louis-Nicolas Davout)의 제3 군단은 이미 도강을 완료한 상태였고, 우디노(Nicolas-Charles Oudinot)의 제2 군단이 다리를 한창 건너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들의 도강을 밤 사이에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몰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기에 대해서 변명거리가 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으로도 귀로도 이 대부대의 이동을 포착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로바우 섬 일대에 설치된 프랑스군의 포대가 아스페른과 에슬링 방향으로 빗발 같은 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이 곧 로바우 섬 북쪽 강변으로 건너올 모양이라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이미 로바우 섬 동쪽으로 프랑스군이 개미떼처럼 넘어 온 상황이라는 것을 해가 뜨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우디노의 제2 군단이 강변에서 정비를 마칠 때 즈음에는 비가 그치고 상쾌한 태양이 떠올라 병사들의 군복을 말려주기 시작했고, 우디노는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로막고 선 오스트리아군은 재수없게 이 쪽을 맡고 있던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 장군의 전위대 뿐이었습니다.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던 노르드만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는데, 작센강(Sachsengang)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 마을에 배치해 두었던 수비대는 그냥 내버려 둔 채 후퇴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체시키는 임무를 준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도 그다지 오래 버티지는 못했습니다.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그 바로 동쪽에 있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 마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직접 현장에 도착해 오스트리아군 2개 대대, 즉 1천이 넘는 병력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이 마을을 둘러 본 뒤, 로바우 섬에 설치된 22문의 대포와 14문의 박격포, 10문의 곡사포에게 이 마을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입니다.  이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약 1천발의 포탄과 폭발탄을 퍼붓자 이 마을은 화재에 휩싸였고, 이들은 400명의 포로를 내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난 1달간 로바우 섬을 중무장 요새로 변모시킨 보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클레나우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제6 군단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 수비대를 지원하려 했으나 마세나의 제4 군단 소속 기병대에게 저지당했고, 결국 그들도 미리 정해진 제2 수비선인 북서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오전 10시 경, 프랑스군은 상륙 지점과 그 인근 마을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도강 자체는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지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패인이었던 어설픈 도강을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끝낸 나폴레옹이 스스로 뿌듯해 하는 동안, 프랑스군에게 밀려 북쪽과 북서쪽으로 각각 후퇴하던 노르드만과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입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작센강 성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수비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고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보병이었던 이들은 프랑스군의 추격에서 충분히 빨리 후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와 이들을 위협했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병대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보병 방진을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 상태로 후퇴하자니 후퇴는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 프랑스군의 보병과 포병이 이들을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밀집 대형의 보병 방진 앞에 적 포병이 나타나면 그건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애초에 카알 대공이 마르히펠트 평원을 포기하고 루스바흐 고원에 방어선을 친 주된 이유가 프랑스군의 강력한 기병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5개 군단, 약 2만5천의 보병을 그 넓은 마르히펠트에 경계 병력으로 남겨둔 것은 결국 과히 좋은 판단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경계 병력을 둘 것이었다면 차라리 소수의 기병대만 배치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따라 잡은 프랑스 포병대에게,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는 정말 최상의 타겟이었습니다.  아군 기병대가 주변을 맴돌며 이들을 위협하여 한덩어리로 잘 뭉쳐주고 있었으며, 혹시 적 보병들이 포병들을 향해 돌격해 올 위협에 대해서는 바로 옆에는 아군 보병들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요.  이들은 신나게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속절없이 볼링 핀처럼 뭉텅이로 쓰러져야 했습니다.  오후 1시 경이 되자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이미 많은 보병들이 쓰러졌는데, 이젠 아예 적에게 퇴로까지 끊길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모습을 고원 지대의 방어선 뒤에 있던 카알 대공은 모두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루스바흐 고원의 저지선 밖으로 나가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는 일은 피하겠다고 작정했던 카알 대공조차도, 눈 앞에서 2만의 아군이 전멸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심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도 무척 존중했던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군이 강력한 보-기-포병의 조합을 완성한 모습을 보자, 그도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군은 좌익은 마세나의 제4 군단, 중앙은 우디노의 제2 군단, 우익은 다부의 제3 군단을 제 1진으로 하여 마르히펠트에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이어 제2진으로는 좌측에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 중앙에 마르몽의 제11 군단과 근위대, 그리고 우측에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전개되었고요.   제1진의 군단들이 2만명 이상의 규모로 강력했던 것에 비해 제2진의 군단들은 1만명 정도로 상당히 약한 편이었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은 여기저기에 휘하 사단을 다 떼어주고 고작 1개 사단 9천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제2진까지도 노르드만의 전위대를 따라 잡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3시가 넘자,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이판사판의 정신으로 후퇴를 멈추고 프랑스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들을 도우러 프랑스 망명 귀족 출신인 두르발(Nicolas-François Roussel d'Hurbal)이 약 1천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뛰어 나왔으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기병대의 요격을 받고 혼전 끝에 결국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 끝에, 결국 원래 1만2천으로 시작했던 노르드만의 전위대는 무려 절반인 6천의 전사, 부상, 포로를 내고서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의 방어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나우의 군단은 비교적 적은 피해만을 입고 카알 대공의 방어선 중 서쪽 측면인 바그람-게라스도르프(Wagram-Gerasdorf) 전선으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투의 시작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무척이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카알 대공의 원대한 계획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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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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