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6.12.18 03:50

IV


병사들의 사격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시민들도 약 15분간 응사하고 있었는데, 양측 모두 사상자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먼저 보병대에서, 이어서 기병대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위협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부대들이 갑자기 뒤돌아 선 것이다.


쿠데타를 기록한 역사편찬가들은 상티에 가(Rue du Sentier) 모퉁이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병사들에게 총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노트르-담-드-르쿠브랭스 가(Rue Notre-Dame-de-Recouvrance)와 푸와소니에르 가(Rue Poissonnière)의 어떤 집 지붕으로부터 발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자그랑 가(Rue Mazagran)의 모퉁이의 높은 집 지붕에서 발사된 권총 사격이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총탄의 발사 장소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은 이 문제의 탄환, 어쩌면 문을 꽝 닫는 정도의 소음을 냈던 이 탄환이 옆 집에 살던 치과의사에게 맞았다는 점이다.  질문은 결국 이것으로 귀결된다.  그 대로변 집들 중 하나에서 발사된 권총이나 머스켓 소총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가 ?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  많은 증인들은 그 점을 부인한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주요 도로명입니다.)




만약 총탄이 정말 발사되었다면,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그것이 원인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신호였는가 ?


어쨌건 간에, 이미 언급한 대로, 갑자기 기병과 보병, 포병들이 길가 인도에 늘어선 구경꾼 인파들을 향해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고 또 예상하지 못 했지만, 아무런 동기 없이, 아침의 그 악명 높은 경고장에 쓰인 것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육은 짐나즈 극장(Gymnase Theatre)으로부터 뱅 시누아(Bains Chinois, 중국 목욕탕이라는 뜻)까지, 그러니까 파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파도 많은, 가장 번화한 거리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뱅 시누아(Bains Chinois)는 1787년 지어진 파리의 유명 공중 목욕탕입니다.  1852년에 매각된 뒤, 그 다음해에 다른 투자용 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습니다.)




군대는 시민들을 근접 거리에서 쏘아 쓰러뜨렸다.


그건 무시무시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비명소리, 하늘을 향해 치켜든 팔들, 그 경악과 공포, 사방으로 달아나는 군중, 보도에 부딪힌 뒤 집 지붕까지 튀어 오르는 수많은 총알들, 순식간에 거리에 가득 쓰러진 시체들, 입에 시가를 문 채로 쓰러지는 젊은이들과 벨벳 가운을 입은 채 총을 맞은 여자들...  서적 판매원 두명은 자신들의 서점 문간에서 자신들이 뭔 일을 저질렀길래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해되었다.  그 속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죽어버리라고 지하실 환기창에 대고도 사격이 가해졌으며, 시장은 포탄과 총알로 난장판이 되었다.  살랑드루즈 호텔(Hôtel Sallandrouze)은 폭발탄 포격을 받았고, 메종 도르(Maison d'Or, 황금의 집이라는 뜻)는 포도탄 포격을 받았으며,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병사들이 난입했다.  대로에는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리셜리외 가(Rue de Richelieu)에는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카페 Tortoni는 당시 파리 시내 문인들과 멋장이들이 모이던 명소였습니다.)




나레이터는 여기서 이야기를 잠깐 멈춰야겠다.


이 이름없는 행위들의 존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을 기록관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범죄를 기록하고, 사건의 당사자를 호명한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나는 루이 보나파르트를 소환한다.  나는 생-타르노(Saint-Arnaud), 모파(Maupas), 모레(Moray), 마냥(Magnan), 카를레(Carrelet), 캉로베르(Canrobert), 그리고 레벨(Reybell), 즉 보나파르트의 공모자들을 소환한다.  나는 그 처형자들, 그 살인자들, 그 증인들과 희생자들, 달아오른 대포와 김이 나는 군도, 술에 취한 병사들과 유족들, 죽어가던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 그 공포, 그 유혈, 그리고 그 눈물들을 모두 문명 사회의 법정으로 나오라고 소환한다.


단지 나레이터일 뿐인 이 사람의 말을, 그 나레이터가 누구이든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생한 사실들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사실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하게 하자.  우리는 그 증언을 듣도록 하자.





(생-타르노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습니다.  권력 장악을 위해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이 반란 공모자는 불과 3년 뒤 크리미아 전쟁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다 위암으로 병사했습니다.)




V


우리는 증인들의 이름을 인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이미 밝혔다.  하지만 독자들은 진실의 진지하고 신랄한 억양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증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인도 위를 세 발자욱 걷기도 전에, 그 옆으로 행군해가던 부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남쪽을 향해 돌아섰고, 머스켓 소총을 들어올리고는 즉각 공포에 질린 군중들에게 발포했어요.


그 사격은 20분 정도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가끔씩 훨씬 더 우렁찬 대포 포성도 울렸어요.


첫번째 일제 사격 때, 저는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는 인도 위를 마치 뱀처럼 기어서 아무 문이나 열려 있는 첫번째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건 와인 가게였어요.  산업 시장(Bazaar de l'Industrie) 바로 옆의 180번지였지요.  저는 거기 들어간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사격은 계속 되고 있었고요.


거기에는 약 5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자 5~6명과 아이 2~3명도 있었고요.  세명의 불쌍한 친구들은 들어올 때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중 2명은 약 15분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고, 나머지 1명은 제가 4시에 가게를 나올 때도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결국 그 남자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군 부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발포한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가게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엔 여자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 중 2명은 그 구역에 저녁거리를 사려고 나온 것이었어요.  변호사의 어린 서기도 있었는데, 그는 고용인의 심부름을 나왔다가 거기 오게 된 것이었지요.  증권거래소(Bourse)의 주식 중개인 2~3명, 그리고 집 주인도 2~3명 있었습니다.  초라한 셔츠 차림이거나, 혹은 아무 셔츠도 입지 못한 일꾼 몇 명도 있었습니다.  그 가게로 대피한 불행한 사람들 중 하나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약 30세 정도 되는, 회색의 짧은 외투를 입은 금발의 남자였습니다.  그는 포부르 몽마르트르(Faubourg Montmartre)에 있는 그의 가족과 식사를 하러 그의 아내와 함께 가던 중에 군 부대가 거리를 가로질러 행군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었지요.  처음에 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와 그의 아내 둘 다 쓰러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그 와인 가게로 끌려 들어왔지만, 그의 아내는 옆에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달래봐도 그는 계속 아내를 찾으러 달려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고집했지요.  밖의 거리는 포도탄 포격이 휩쓸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1시간 동안 그를 우리와 함께 있도록 붙잡아 두는 것 뿐이었어요.  다음 날, 저는 그 사람의 아내가 결국 살해되었고 그 시신은 시테 베르제르(Cité Bergère)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약 20일 뒤에, 저는 그 불쌍한 남편이 보나파르트에게 복수하겠다고 협박했다가 체포되어 브레스트(Brest) 항구로 보내진 뒤, 결국 카이엔(Cayenne)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와인 가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왕정주의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저는 공화주의자라고 밝힌 사람은 딱 2명을 보았는데, 하나는 전에 레폼(la Réforme, 개혁이라는 뜻)이라는 곡을 작곡한 므니에르(Meunier)라는 나이든 작곡가와 그의 친구 딱 둘이었습니다.  약 4시 쯤 되어, 저는 그 가게를 나왔습니다."






(카이엔은 적도 인근 남미 프랑스령 식민지인 기아나에 있는 일종의 감옥섬으로서, 흔히 악마의 섬(Île du Diable)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한 1852년,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개설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의 그 드레퓌스 대위도 여기서 복역했습니다.  사진 속의 오두막이 드레퓌스가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영화 빠삐용의 배경도 바로 카이엔입니다.)




마자그랑 가(Rue de Mazagran)에서 권총 발사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증인 하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 권총 소리는 병사들에게 모든 가옥과 그 창문에 일제 사격을 퍼부으라는 신호였습니다.  그 무차별 사격은 최소한 30분간 계속 되었어요.  사격은 생-드니 대문(Porte Saint-Denis)부터 카페 그랑 발콩(Café du Grand Balcon)까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곧 포격도 시작되었지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3시 15분 경,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생-드니 대문을 향하고 서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짐나즈 쪽 집들과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 철교의 집이라는 뜻), 그리고 생-파르 호텔(Hôtel Saint-Phar)을 향하더니, 생-드니 가(rue Saint-Denis)부터 리셜리외 가(rue Richelieu)까지의 반대 편에 있는 군중들에게 즉각 연속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불과 몇 분만에 인도 위는 시체들로 가득했어요.  가옥들은 총알 구멍이 무수히 나 있었고, 군 부대는 약 45분간 미친 듯이 계속 총을 쏘아댔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첫번째 포격은 본느-누벨(Bonne-Nouvelle)의 바리케이드에 가해졌는데, 이것이 다른 부대들에 대한 신호가 되었어요.  군 부대들은 머스켓 소총 사정거리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어떤 말로도 그런 야만적 행동을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말로 표현 못 할 행위의 진실에 대해 증언하려면 그 현장을 목격했어야만 해요.


병사들은 수천발을 -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지만 - 아무 짓도 하고 있지 않던 군중들에게 쏘았어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요.  아주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지요.  그게 전부였어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전반적인 흥분이 고조에 달했을 때, 전열 보병대에 이어 기병대와 포병대가 대로에 도착했어요.  부대 중 누군가가 머스켓 소총을 발사했는데, 화약 연기가 수직으로 솟은 것으로 보아 그것이 공중을 향해 발사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 경고없이 군중들에게 발포하고 총검으로 찌르라는 신호였습니다.  이것은 군부가 학살을 시작하는 계기를 원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 다른 증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포도탄(mitraille, 산탄)이 장전된 대포가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예언자라는 뜻)라는 상점부터 몽마르트르 가(Rue Montmartre)까지의 상가 전면을 찢어놓았습니다.  본느-누벨 대로로부터 메종 비으코크(Maison Billecoq)에도 포격을 가한 것이 틀림없었어요.  포탄이 오뷔송(Aubusson) 쪽의 벽 모퉁이를 때리고 벽을 관통한 뒤 집 내부까지 뚫었거든요."






(포도탄 또는 캐니스터탄이라고 불리는 이 대포알은 사진처럼 깡통 속에 작은 쇠구슬 수십개를 담은 것입니다.  대포에서 발사하면 마치 대형 산탄총을 쏜 것처럼 그 앞에 있는 적군 수십명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런 증언들이 끝도 없이 계속 됩니다...)


"계속 가세요." 보호를 요청한 선량한 시민들에게 장교들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시민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가던 길을 재빨리 걸어갔지요.  하지만 그건 죽음을 뜻하는 암호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총에 맞아 쓰러졌거든요."


다른 증인이 말한다.  "대로에서 사격이 시작되던 순간에, 카펫 창고 근처에 있던 한 서점 주인이 서둘러 서점 문을 닫고 있었어요.  그때 피할 곳을 찾던 몇 명의 군중들이 거기로 들어가려 했고, 전열 보병인지 헌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쏜 사람이 그 중에 있지 않나 의심했어요.  군인들은 서점에 난입했고, 서점 주인은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는 혼자 그의 서점 바로 앞으로 끌려 나왔고, 그의 아내와 딸은 그가 막 총에 맞아 쓰러질 때에야 그와 군인들 사이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고, 그 딸은 코르셋의 살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그의 아내는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들었어요."


이제 소름 없이는 묘사할 수 없는 세 건의 증언으로 마무리를 짓자.


"이 공포스러운 사건의 시작 부분의 15분간, 사격의 격렬함이 잠깐 다소 느슨해졌는데, 이때 부상당해 쓰러진 사람들 중 몇몇은 일어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앞에 쓰러진 사람들 중 2명이 일어났습니다.  한 명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상티에 가(Rue du Sentier)를 통해 달아났어요.  그가 달아나는 중에도 총알이 빗발쳐서 그 중 하나는 그의 모자를 날려버렸지요.  다른 한 사람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만 성공했습니다.  그는 손을 꼭 쥐고 병사들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요.  하지만 그는 즉각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음날, 르 프로페트의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베란다 옆면에 1백발 이상의 총알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출처 : http://www.napoleontrois.fr/dotclear/index.php?post/2006/04/04/115-le-coup-d-etat )




"샘이 있는 몽마르트르 가의 끝 부분에서 약 60보 정도 떨어진 곳에, 남자와 여자, 엄마와 아이들, 어린 소녀들의 시체가 60구 정도 있었어요.  이 불행한 시신들은 대로 맞은 편에 배치된 군 부대와 헌병들이 발사한 첫번째 일제 사격의 희생자들이었지요.  그들은 첫번째 사격이 시작되자마자 모두 달아났지만, 불과 몇 발자욱 못 가서 쓰러졌지요.  젊은 남자 하나는 관문 안으로 피해서 대로 쪽으로 튀어나온 벽 뒤에 숨으려고 했어요.  그는 몸을 꼿꼿이 세워 몸이 벽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최소화하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약 10분 정도 조준이 형편없는 사격을 받던 끝에, 그도 결국 총에 맞고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또 다른 증인이다.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의 판유리와 창문은 모두 깨졌습니다.  그 마당에는 공포에 질려 미쳐버린 남자 하나가 있었어요.  지하실에는 거기로 대피한 여자들이 가득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가게와 지하실 환풍창에 대고 총을 쐈습니다.  토르토니(Tortoni)부터 짐나즈(Gymnase) 극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1시간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짐나즈 극장(Théâtre du Gymnase Marie-Bell)은 1820년 설립된 파리의 유서깊은 극장입니다.  지금도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고 합니다.)



***

파리 같은 세계 문명의 중심 도시에서도 저런 흉악하고 야만적인 쿠데타와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진상을 숨기려는 음모도 뻔뻔스럽게 실행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저런 비극을 겪었고, 그 진상을 왜곡하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런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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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6.12.02 13:20

II


아침 이른 시간부터 - 여기서는 미리 획책된 것이 분명한데 - 모든 거리의 모퉁이마다 이상한 플래카드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플래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옮겨적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걸 기억할 것이다.  가끔씩 파리 시내에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부가 아주 절박한 조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60년 동안에도, 이런 플래카드는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집회는 아무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무력으로 해산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문명의 대도시인 파리 시민들은 인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그런 극단적인 선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고문은 그저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협박용이라고 간주되었고,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들 얕보았다.


하지만 대중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체 계획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 경고는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12월의 인간에 의해 준비되고 저질러진, 이 전대미문의 드라마의 무대가 된 장소에 대해서 한마디 첨언하겠다.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글자 그대로 성 마틴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듯이,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 북쪽에 있습니다.)



마들렌(Madeleine)에서 포부르 푸아소니에르(Faubourg Poissonniere)에 이르는 대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짐나즈(Gymnase) 극장에서 포르트 생-마르텡(Porte Saint-Martin)까지의 부분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고, 봉디 가(Rue de Bondy), 네슬레 가(Rue Neslay), 륀 가(Rue de la Lune)도 마찬가지였으며, 생-드니(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에 접하거나 연결된 모든 거리가 다 막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틴 너머의 대로는 샤또 도(Chateau d'Eau) 반대편에서 시작된 바리케이드 하나만 빼고는 다시 바스티유(Bastile)까지 그냥 뚫려 있었다.  포르트 생-드니(Porte 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7~8개의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텡의 위치를 보여주는 구글 지도입니다.  그 바로 서쪽으로 포르트 생-드니가 있습니다.) 






(구글 덕분에 앉아서도 파리 시내 구경이 가능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길 한복판의 두 대문 중, 왼쪽의 좀더 큰 것이 포르트 생-드니, 오른쪽 것이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때, 포르트 생-드니 주변 4개 도로가 모두 시민들이 쌓은 바리케이드로 막혔습니다.)




포르트 생-드니는 사면이 4개의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 4개의 바리케이드 중 마들렌 쪽을 향한 것은 진압군의 첫번째 공격을 받을 운명이었는데, 그 거리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져 있었고, 그 왼쪽 끝은 륀 가, 오른쪽 끝은 마자그랑(Mazagran)에 접하고 있었다.  4대의 합승마차(omnibus), 그리고 5대의 가구 운반마차, 내던져진 전세 마차(hackney coach) 감독관 초소, 그리고 부서진 간이 공중화장실(Vespasian column), 대로변의 공공 벤치, 륀 가의 계단 판석, 군중들이 통째로 뜯어낸 쇠로 된 인도 가드레일 등이 이 요새의 재료였다.  이런 바리케이드로는 그 넓은 대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도로는 매커덤(macadam) 방식으로 포장된 것이라서, 보도블럭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 바리케이드는 대로 양쪽 끝까지 뻗어 있지도 않아서, 마자그랑 가로 향한 집 한 채를 짓고 있던 쪽으로는 큰 빈 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빈 틈을 본 어느 잘 차려 입은 젊은이가 공사용 비계에 올라가, 혼자 힘으로, 입에 담배도 그대로 문 채로 아주 여유있게, 그 비계의 밧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인근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웃으며 이 청년에게 박수를 보냈다.  한 순간 뒤 이 비계는 큰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틈을 막았고, 이로써 바리케이드가 완성했다.






(마카담(macadam)으로 포장된 도로입니다.  일정한 크기로 잘게 부순 돌을 깐 도로입니다.  그 이름이 혹시 마카다미아 견과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고, 이런 도로 포장법을 최초로 만든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 이름이 존 매커덤(John McAdam)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도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뜯어다 경찰에게 던졌기 때문에, 대학 주변의 도로에서 보도 블럭을 모두 없애고 인도까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원래 공중화장실이라는 것이 파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1770년 경 '신사들을 위한 소변기' 수준이었습니다.  형태도 정말 나무통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30년 경 파리 시 장관이었던 랑뷔토 백작(comte de Rambuteau)이 칸막이가 달린 소변기를 도입했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이를 비웃어 이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랑뷔토 기둥'(la colonne Rambuteau)이라고 불렀는데, 랑뷔토 백작은 이를 맞받아쳐 로마 시내에 최초의 공중 소변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베스파시아누스 기둥'(la colonne vespasien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굳어져, 이런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누스 기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 보루가 완성되는 동안,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대 문을 통해 짐나즈 극장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거기의 옷장에서 찾은 머스켓 소총 몇 자루와 북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은 극장 용어로 '소도구'라 불리던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북을 쥐고 전투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뒤집어 놓은 간이 화장실들과 옆으로 넘어뜨린 마차, 뜯어낸 블라인드와 셔터, 낡은 무대배경 등으로 본느-누벨 대로(Boulevard Bonne-Nouvelle)의 초소 반대편에 일종의 전초진지 같은 작은 바리케이드, 아니 작은 반달 모양의 진지를 지었다.  여기서는 푸아소니에르 대로와 몽마르트르 대로 뿐만 아니라 오뜨빌 가(Rue Hauteville)까지도 관측이 가능했다.  군 부대는 아침에 그 초소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그들은 그 초소의 깃발을 뽑아와 바리케이드에 꽂았다.  그 깃발이 나중에 쿠데타의 신문들이 '붉은 깃발'로 부른 그 깃발이었다.


약 15명의 사람들이 이 전초 진지에 위치를 잡았다.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은 있었으나 탄약이 없었고, 있더라도 매우 적은 양이었다.  그들 뒤에는 포르트 생-드니를 커버하는 큰 바리케이드를 약 100여 명의 전투원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2명의 여자와 한 명의 백발 노인도 목격되었다.  그 노인은 왼손에 든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쥐고 있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어깨에 군도(sabre)를 맨 채로 길 옆 보도의 가드 레일을 뜯어내는 것을 돕다가 쇠막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오른손의 손가락 3개를 베었다.  그 여자는 군중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며 외쳤다.  "공화국 만세 ! (Vive la Republique!)"  다른 여자는 바리케이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위에 꽂힌 깃대에 몸을 기대고는, 머스켓으로 무장한 셔츠 차림의 두 남자가 받들어 총을 해주는 사이 좌익 대표단이 발행한 무장 봉기 호소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군중들은 박수를 쳤다.  


이 모든 일들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일었났다.  바리케이드 이 쪽에서는 대로 양쪽의 보도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곳은 조용했고, 어떤 곳에서는 "술루크 타도 ! 배신자 타도! (à bas Soulouque! à bas le traître!)"를 외치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것은 수염난 남정네가 아니라 저렇게 서민들이 쓰는 붉은 고깔 모자를 쓴 마리안느라는 여성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입니다.) 




가끔씩 애도 행렬이 군중 속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 행렬은 병원 직원들과 군인들이 나르는 밀폐형 가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선두에는 긴 막대를 든 남자들이 행진했다.   그 막대 끝에는 큰 글씨로 '군 병원 활동'이라고 적힌 파란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가마를 덮은 커튼에는 '부상자, 앰뷸런스'라고 적혀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이때 파리 증권 거래소(la Bourse)에는 많은 군중이 있었다.  모든 벽에는 벽보 붙이는 사람들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공문을 붙이고 있었는데, 시장 상승세를 바라던 주식 중개인들조차도 이런 벽보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갑자기, 지난 2일 간 쿠테타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던 잘 알려진 투기꾼이 마치 도망자처럼 하얗게 질리고 숨이 찬 모습으로 나타나 소리쳤다.  "저들이 대로에서 발포하고 있어요 !"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파리의 증권 거래소인 부르즈(Bourse de Paris)입니다.  브롱냐르 궁(Palais Brongniart)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원래 캥캉푸아(Quincampoix) 등 몇몇 곳에서 벌어지던 증권 거래를 통합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가 알렉상드르 브롱냐르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 건물 디자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데, 정작 건축가들의 비평은 고리타분하다는 등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관련 source : http://carolineld.blogspot.kr/2016/08/last-relief.html 

https://en.wikipedia.org/wiki/Macadam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B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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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6.11.23 21:44


(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편지 내용입니다.)


"조카여, 프랑스 국민들의 피가 흘렀구나.  그 확산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렴.  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국민투표에 대해 언급했던 너의 두번째 선언문을 국민들은 보통 선거권의 재확립이라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에 기여할 의회가 없다면 자유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단다.  군대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제야말로 도덕적인 승리로서 실질적 승리를 완성할 순간이다.  패배한 경우엔 할 수 없는 것을 승리했을 때 해야 한다.  과거 정당들을 해체한 뒤에 국민 전체를 복권시키렴.  보통 선거권이 진지하고 자유롭게 행사되어, 공화국을 구할 대통령과 제헌 의회를 선출할 거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 편지를 너에게 쓰는 것은 내가 형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그가 내전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공감하기 때문이란다.  내 오랜 경험을 믿으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후세가 너의 행동을 평가할 거라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너를 사랑하는 숙부, 제롬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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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Nicolas Fabvier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장교로서 페르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에 사절로 가기도 했습니다.  1851년 쿠데타 당시는 이미 퇴역한 상태였고,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보수파 정당의 일원이었습니다.)

 



마들렌 광장(Place de la Madeleine)에서는 두 대표 파비에(Fabvier)와 크레스텡(Crestin)이 만나 대화했다.  파비에 장군은 크레스텡에게 4문의 대포가 원래와는 반대 방향으로 포구가 돌려져 있는 것을 지적하고는, 즉각 그 대로를 떠나 엘리제 궁으로 말을 달렸다.  "엘리제 궁이 이미 방어 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 장군이 말했다.  크레스텡은 레볼뤼시옹 광장(Place de la Revolution, 혁명 광장,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의 다른 쪽에 있는 의회 의사당의 전면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장군, 내일이면 우린 저기에 있을 겁니다."  엘리제 궁의 마굿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몇몇 다락방에서는 3대의 여행 마차가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싣고 말들을 정렬시킨 뒤, 좌마기수까지 이미 안장 위에 오른 채로 대기 중인 것이 목격되었다.  





(여기서 레볼뤼시옹 광장으로 불린 콩코르드 광장입니다.  광장 북서쪽에는 저 너머에는 대통령 궁인 엘리제 궁이, 그리고 남쪽의 센느 강 너머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의회 의사당이 된 부르봉 궁 Palais Bourbon이 있습니다.)




실제로 충격이 대단했고, 분노와 증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하나만 더 터진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몰락할 판국이었다.  그저 그 날 하루가 그대로 끝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쿠데타는 절망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과연 그는 무얼 할 생각이었을까 ?  그는 뭔가 큼직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것으로 반격을 해야 했다.  그는 이대로 망해버리거나, 공포의 수단을 써서 위기를 벗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엘리제 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두번째 퇴위가 있었던 웅장한 응접실 근처에 있는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가끔 문이 조금 열리고 그의 부관인 로게(Roguet) 장군이 흰머리칼이 무성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이 장군이 문을 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군은 점점 더 경악스러워지는 소식을 들고 왔고, 하던 말을 자주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또는 '일이 꼬이고 있습니다' 등의 말로 끝맺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벽난로를 활활 피워놓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장착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앉아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계속 다음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내 명령대로 실행하라 전하게."  






(Faustin Soulouque는 당시 아이티의 황제였습니다.  184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군이었던 그는 이 시건 바로 2년 전인 1849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독재자였고, 프랑스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로게 장군이 나쁜 소식을 들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선 것은 거의 1시 경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로게 장군 자신이,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침착함과 함께 직접 세세히 묘사를 했다.  그는 왕자(Prince President를 공식 호칭으로 썼던 루이 나폴레옹을 가리킴)에게 파리 중심부의 바리케이드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오히려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거리마다 '독재자 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감히 실제로 외쳐지던 '술루크(Soulouque) 타도'라는 구호를 보고하진 못했다.  그리고 군 부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힐난하는 고함소리가 그들을 맞았고, 주프롸 회랑(Galerie Jouffroy)에서는 어느 소령 하나가 군중들에게 쫓겨다녔으며, 카디날 카페(Cafe Cardinal)에서는 참모 대위 하나가 말에서 끌어내려졌다고도 보고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네 !  생-타르노(Saint-Arnaud) 장군에게 내 명령을 전하게."








(Galerie Jouffroy는 지금도 유명한 파리 시내의 지붕 덮힌 140m 정도 되는 통로입니다.   쿠데타 6년 전인 1845년에 만들어진 이 길은 최초로 유리와 강철로만 만들어진 지붕 회랑으로 유명합니다.) 




이 명령이란 무엇이었을까 ?  우린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필자는 고통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펜을 내려둔다.  이제 우리는 그 서러운 날, 12월 4일의 혐오스러운 위기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쿠데타의 성공을 낳은 그 괴물 같은 행위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미리 획책했던 음모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을 밝히려 한다.  12월 2일을 기록했던 모든 사료 편찬자들이 숨겨왔고, 마냥(Magnan) 장군이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 파리에서조차도 목격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것을 폭로하고, 서술하고, 묘사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무시무시한 것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12월 2일은 어둠으로 덮힌 범죄이고, 침묵 속에 뚜껑이 닫힌 관이며, 그 틈 사이로는 피가 솟구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관 뚜껑을 열려고 한다.





(5.18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네요...  당시에도 그런 학살 사건을 은폐하고 그걸 밝히려는 노력을 탄압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게른제 섬으로 망명가서 쓴 이 '꼬마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반입되어 숨어서들 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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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6.11.20 22:42

요즘 시국에 편승하여,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즉 '꼬마 나폴레옹'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몇 편에 걸쳐 올립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건 보쥬 광장 거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서 제가 찍은 당시 풍자화 사진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오를레앙 왕조가 무너지자, 프랑스는 공화국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동안 억눌린 각계 각층의 요구 폭발로 인한 대혼란에 빠져 듭니다.  이 와중에, 기존 정치인들의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좀 덜 떨어진 인물로 보았던 루이 나폴레옹이 위대한 나폴레옹의 후광을 업고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당시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의 재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1852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851년 말 루이 나폴레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꾀하지만, 의회를 장악한 자신의 정적들이 그를 좌절시키자, 치밀한 준비 하에, 백부인 나폴레옹 1세가 황제에 등극한 날이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벌어졌던 날인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이 저항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수백명의 사망자를 내며 봉기는 실패했고, 1년 후인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폐지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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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의 범죄


"12월 4일"


저항은 예상과는 다른 대규모가 되어 버렸다.  


전투는 매우 위협적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라, 아예 대규모 전투가 되어 버렸고, 사방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엘리제(Élysée)와 다른 지역구에서,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쌓아 올렸다.


파리 중심부는 임시로 만든 보루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길을 막은 구역들은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을 형성했다.  알르(Halles)와 랑뷔토 가(Rue Rambuteau)를 한쪽으로 하고, 대로들을 다른 쪽으로 했으며, 동쪽으로는 탕플 가(Rue du Temple)를, 서쪽으로는 몽마르트르(Rue Montmartre)를 경계로 했다.  그물망처럼 엮인 이 거대한 거리들은 모든 방면에서 보루와 참호로 차단되어 있었고, 매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점점 더 무시무시한 모습을 띠었고, 요새처럼 변해갔다.  바리케이드의 전투원들은 센느 강 부두까지 전초병들을 내보냈다.  


이 사다리꼴 구역 밖에서는 바리케이드가 포부르 생-마르텡(Faubourg Saint-Martin)과 운하 인근까지 뻗어 있었다.  저항 위원회에서 대표자로 드 플로트(Paul de Flotte)를 보내온 학교 구역은 그 전날 저녁 때보다도 더 보편적으로 봉기에 나선 상태였다.  교외 지역에도 불이 붙고 있었다.  바티뇰(Batignolles)에서는 '무기를 들라'는 북소리가 울려퍼졌고, 마디에 드 몽조(Madier de Montjau)가 벨빌(Belleville) 지역을 일깨우고 있었다.  샤펠-생-드니(Chapelle-Saint-Denis)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중이었다.  상업 지구에서 남자들은 머스켓 소총을 날랐고, 여자들은 붕대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  파리가 봉기했어 !"  B---가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저항 위원회에 들어서며 외쳤다.  





(사진 속의 인물은 마디에 드 몽조 Noël Madier de Montjau 입니다.  이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도 이 무장 봉기 이후 망명을 해야 했고,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는 1870년 이전에는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 위원회는 쿠데타가 발생한 12월 2일 밤에 조직된 것으로, Carnot, de Flotte, Jules Favre, Madier de Montjau, Michel de Bourges, Schœlcher, 그리고 Victor Hugo가 대표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각기 다른 지역구의 모든 위원회가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저항 위원회의 위원들은 심사숙고하며 사방의 전투에 대해 명령과 지시를 전달했다.   시민들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던 이 모든 사람들이 열정과 기쁨에 가득차 서로 포옹하기도 했다.  


쥴 파브르(Jules Favre)가 말했다.  "자, 이제 정규군 연대 하나만 우리 편으로 넘어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끝장이야."  미쉘 드 부르쥬(Michel de Bourges)도 말했다.  "내일이면 공화국이 시청(Hotel de Ville)을 접수할 걸세."  모든 것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장 조용한 지역구에서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포고문이 찢겨져 나갔고, 법령 발표문이 훼손되었다.  보부르 가(Rue Beaubourg)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창문에서 "용기를 내세요 !"라고 소리쳤다.  소요 사태는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까지 퍼졌다.  파리 경찰 조직의 중심부였던 제뤼살렘 가(Rue de Jerusalem)의 경찰청 본부는 전체가 벌벌 떨고 있었다.  공화국이 승리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경찰의 고민은 엄청났다.  경찰청 안마당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복도에서, 서기들과 경관들(sergents-de-ville)은 코시디에르(Caussidiere)에 대해 애정어린 후회를 마음에 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Marc Caussidière는 언론인으로서 1848년 7월 혁명 때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다 경찰 본부를 점령한 뒤 임시 정부에 의해 경찰 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 경찰 총장인 모파(Charlemagne de Maupas)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쿠데타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봉기에 대해 험악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그가 뒷걸음질치며 꼬리를 내렸다.  아마도 그는 겁에 질려 거리의 소란과 차오르는 반란, 정의의 편이 일으킨 성스럽고 적법한 반란 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허둥거리며 주저하는 동안 그의 명령도 슬슬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전임자이던 카알리에(Carlier)는 그런 그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저 불쌍한 젊은 친구가 배탈이 난 모양이군."





(Charlemagne de Maupas는 당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 밑에서 경찰 총장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쿠데타의 주요 계획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비상 사태 속에서 모파는 모르니(duc de Morny, 당시 내무부 장관)에게 달라 붙었다.  당시 경찰청과 내무부는 전신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모든 긴박한 소식과 공포와 혼란에 질린 신호들이 경찰청장으로부터 내무부 장관에게 날아들었는데, 모르니는 담대한 인물로서 좀더 침착한 편이었고,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 모든 충격적인 소식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겁에 질린 소식이 처음 날아들자, 모르니는 그저 '모파가 아픈 모양이군'이라고 말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신으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질문이 날아오자, 그는 다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고, 세번째로 같은 질문이 오자, 그도 평정심을 잃고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잠이나 자라니까' 






(Charles de Morny는 탈레랑의 아들과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로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동복 형제였습니다.  당시 내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의 열의도 아주 빠른 속도로 식어 갔고 편을 바꾸기 시작했다.  포부르 생-마르소(Faubourg Saint-Marceau) 구역을 봉기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저항 위원회에서 파견된 어느 용감한 남자가 주머니에 좌익의 선언문과 포고문을 잔뜩 담은 채로 포세-생-빅토르 가(Rue des Fossés-Saint-Victor)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즉각 경찰청 방향으로 끌려갔다.  그는 총살당할 것을 각오했다.  그를 끌고 가던 호송대가 케-생-미쉘(Quai-Saint-Michel)에 있는 시체 안치소를 지나치자, 시테(Cité) 섬 쪽에서 머스켓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초소로 돌아가게.  이 죄수는 내가 처리하겠네."  병사들이 가버리자, 그는 죄수를 묶은 포승을 끊더니 말했다.  "가게나.  내가 자네 목숨을 살려주지.  자네에게 자유를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날 잘 봐 둬.  다시 날 봐도 알아 볼 수 있게 말일세."







(시테 Cité 섬은 파리 한 가운데 있는 센느 강 속의 섬으로서, 노트르담이 여기에 있고 각종 관공서도 있습니다.)




군의 주요 쿠데타 공모자들은 회합을 가졌다.  주요 의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포부르 생-오노레(Faubourg Saint-Honoré)를 즉각 떠나서 엘리제보다는 방어에 더 용이한 두 전략 요충지인 앵밸리드(Invalides) 또는 뤽상부르 궁(Palais du Luxembourg)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앵밸리드를 선호했고, 다른 이들은 뤽상부르 궁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베스트팔렌(Westphalia) 전(前) 국왕이던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가 쿠데타가 실패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다음 날을 걱정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편지를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보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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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또 시간 날 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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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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