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rklaa'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7.30 바그람 전투 (제8편) - 아더클라의 혈전 (16)
  2. 2017.07.02 바그람 전투 (제5편) - 혼돈 속의 새벽 (5)
나폴레옹의 시대2017.07.30 19:37

새벽부터 동쪽의 포성을 듣고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인가 깜짝 놀라 병력을 이끌고 다부의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폴레옹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쪽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중앙부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말을 달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대노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베르나도트 저 허풍선이는 병신짓만 골라 하는구나 !"


다행히 그는 어제 밤 베르나도트 없이 열었던 작전 회의에서 베르나도트를 지원하기 위해 마세나의 병력을 좌익에서 중앙부로 이동시킨 바 있었습니다.  해가 밝아오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마세나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곧 이어 마세나의 눈처럼 하얀 색의 무개마차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 못지 않게 돈 욕심 많고 터무니없이 부풀어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베르나도트와는 달리 군사적 자질은 자신에 버금가는 실력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즉각 아더클라를 탈환하도록 했습니다.


마세나는 생-시르(Saint-Cyr)의 사단을 선두로 아더클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공격에 대해 오스트리아군도 꽤 솜씨있게 대응했습니다.  슈투터하임(Stutterheim)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마을 앞에 있던 도랑에 매복해 있다가 생-시르의 병사들이 지근거리에 근접하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 정도의 반격에 흔들리지 않았고, 전투는 곧 아더클라 마을의 벽과 가옥을 끼고 골목마다 벌어지는 혼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에서 밀려났습니다.  




(아더클라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는 생-시르 사단 휘하 제4 전열보병 연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아더클라 외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아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아더클라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그 마을을 비워놓고 있다가 반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영광의 순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휘하 작센 병사들을 이 공격에 가담시켰습니다.  특히 막도날에게 빌려주었던,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던 뒤파(Dupas)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의 동쪽 측면울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베르나도트는 기세를 타고 작센 병사들을 규합하여 기세 좋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이 아더클라를 관통하여 더 북쪽으로 뚫고 나가려하자, 아더클라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가르드의 예비 병력이 또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반격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알 대공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까지 쳐들어오자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르나도트의 작센군은 어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사기가 형편없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역경을 맞이하자 후퇴가 아니라 그야말로 무너져내려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시르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마세나는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이 무척 난감했습니다.  몰리토르가 진격해야 할 길을 이 작센 패잔병들이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별로 인품이 좋지 않고 오만하고 몰인정했던 마세나는 이 하찮은 방애물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발포를 명했고, 어제 밤에 이어 백주대로에 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작센군은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마르히펠트 평원을 가로질러 흩어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어지럽게 도주하던 작센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외곽까지 도망쳐왔고, 이들의 선두에는 베르나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스도르프 외곽에서 이 몰골의 베르나도트와 딱 마주친 나폴레옹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여 '이것이 네가 말하던 반석같은 지휘력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며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의 보직에서 해임해버렸다고 합니다.  




(프랑스군 원수 복장의 베르나도트입니다.  원래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 병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탐탁치 않은 작센인들로 구성된 제9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군단의 출정 준비에 대해 이런저런 눈에 보이지 않는 방해를 한다는 느낌을 받자 전장에 나서기 전부터 보직을 사임하겠다고 나폴레옹에게 청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원치 않는 베르나도트를 부득부득 전장으로 끌고 나갔고, 결국은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 뒤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가 이렇게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너무 극적이라서 100% 믿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의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날 공격을 위해 자신의 군단 소속이었던 뒤파(Dupas) 장군의 프랑스 사단에게 자신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나, 뜻 밖에도 뒤파는 '황제로부터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았다'라며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공격이 돈좌되고 많은 작센 병사들이 희생되자, 격분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만나자마자 '왜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단을 마음대로 묶어 두었는가'를 따지며 이럴 바에야 사직하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정말 베르나도트가 정말 이날 현장에서 해임되어 귀국 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끌던 제9 군단의 지휘권은 어떻게 되냐고요 ?  어차피 그의 제9 군단은 이미 다 녹아내려서 5천명 이하의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만 남아 있었으므로, 후임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이 몰리토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자는 오스트리아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등 대부분의 유럽 군대에서 척탄병들만이 쓸 수 있는 모자로서, 높이 솟은 모양에 털가죽이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척탄병 부대는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편성했는데, 키 큰 병사들이 그런 모자를 쓰면 더욱 덩치가 커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더클라는 이렇게 생-시르가 탈환했다가 다시 잃었다가 오전 10시 경 다시 몰리토르가 재탈환하는 등 혈전의 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카알 대공이 직접 이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프랑스군이 용감하고 숙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오 가까이 즈음해서는 혈전 끝에 결국 몰리토르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났고, 프랑스군은 중앙을 돌파당하는 일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언덕 위의 전선 전체에 걸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여 언덕 아래에 있던 프랑스군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지 위에서 내리 쏘는 포격은 확실히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어차피 전장의 병사들은 언제든 대포밥이 될 수 있는 신세였으므로 그 정도의 포격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전선 중앙부가 관통당해 자신들의 등 뒤에 펼쳐진 평원 위로 작센군과 프랑스군 패잔병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체 전선을 따라 말을 달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이 베르나도트가 마음대로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가장 약한 부대를 거느린 가장 못 믿을 부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또 아더클라가 나폴레옹에게 가장 중요한 위치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작전의 핵심은 다부가 공격 준비를 하던 동쪽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기가 공격할 생각만 했지 카알 대공이 먼저 치고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든 작전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무너지는 아더클라의 바로 동쪽 측면에는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 등의 군단이 대기 중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이 구멍만 틀어막으면 저 동쪽 끝에서 다부가 준비하던 나폴레옹의 진짜 주먹이 날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아직 패배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장의 주먹을 준비 중인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에게도 아더클라는 그저 견제구 또는 잽에 불과 했고, 그의 진짜 한방인 강력한 훅은 저 남서쪽 아스페른 쪽에서 날아들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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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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