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10.21 22:28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해있는 꽤 큼직한 예비 병력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의 아스페른-에슬링 공격이 실패했거나, 최소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지요.  클레나우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지금 나폴레옹 사령부에 저렇게 많은 예비대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대가 없었으므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패배가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이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버텼던 것은 아직 한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동생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었습니다.  


실제로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던 오후 4시 30분 경, 요한 대공의 전위대를 구성하는 일단의 기병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바로 동쪽인 운터지벤브룬(Untersiebenbrunn)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인마가 일으키는 먼지와 총포의 화약 연기로 인해 사방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마르히펠트 평원에는 프랑스군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모두가 두려워하던 요한의 군대가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스도르프의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난데 없이 동쪽 평원에서 벌어지는 소란 소리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참모 장교들은 물론이고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임시 사령부 밖으로 튀어나와 망원경을 들고 요한 대공의 병력을 포착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습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이번 전투의 승리가 요한 대공의 도래로 인해 막판에 패배로 둔갑하는 것이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전투 막판의 이 소동에는 꽤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요한 대공이 주둔하고 있던 브라티슬라바는 윗 그림 속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1741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가 즉위식을 올린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저 그림 속의 성은 브라티슬라바 성, 독일어로 Pressburger Schloss라는 곳인데, 아래 사진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브라티슬라바 성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1809년,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한 외젠의 군대가 결국 이 성에 포격을 가하는 등 이 성은 프랑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1811년, 이 성에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 성은 폐허가 되었지요.  지금의 이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건한 것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7월 4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카알 대공은 서둘러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Bratislava,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 Pressburg)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오스트리아 내부군을 이끌고 서둘러 마르헤크(Marchegg)로 달려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그는 상황이 급하므로 무거운 짐마차 등은 다 버려두고 최소한의 군장으로 강행군을 하라고 지시했지요.  마르헤크는 바그람으로부터 동쪽으로 대략 7시간 정도의 행군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 바그람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는 사람이 (쉬지 않고) 걸어서 가도 10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카알 대공은 그 정도면 충분히 일찍 전령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특별히 전령으로 제4 군단장 로젠베르크의 아들을 골라 보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대공이 있던 브라티슬라바부터 도이치-바그람까지의 거리는 현대적 도로를 따라 걸을 때 약 10시간 거리입니다.  물론 이건 전혀 쉬지 않고 빈 몸으로 가볍게 걸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을 넘던 7월 4일 밤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졌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랑스군은 그런 악천후에 대해 '잘 됐다 ! 오스트리아군이 모르는 사이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라며 재빨리 수만 명이 불안한 부교를 건넜지요.  그러나 로젠베르크의 아들은 같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무렵엔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 소환 명령은 카알 대공이 전령을 보낸지 무려 23시간 후인 7월 5일 아침 6시, 이미 나폴레옹의 대군이 마르히펠트 평원에 전개한 다음에야 요한 대공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자신의 늦은 명령서 전달로 인해 초조해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요한 대공은 그 급보를 받아들고도 반응이 무척이나 심드렁했습니다.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아니 뭐야, 뭐 브라티슬라바를 견제하고 있는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를 공격하라더니...'라는 불평이었습니다.  실제로 카알 대공은 바로 전에 전달한 명령서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외젠이 남겨두고 떠난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 즉 엔가라우(Engerau)에 주둔한 세베롤리(Severoli) 장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고, 요한 대공은 지엄하신 형님의 명령을 집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 앞에 위치한 적을 습격하는 것과 먼 지역으로 행군하는 것은 분명히 준비할 것이 다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 변경이 하루 종일 걸릴 일은 분명히 아닐 것 같은데, 요한 대공의 부대가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진영 밖으로 걸어나간 것은 무려 19시간 후인 7월 6일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이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느린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대공에게는 다 설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베롤리 장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여기저기에 배치시켜 놓았던 부대를 다시 다 불러들이고, 밤새 공격 대기를 기다리며 야전에서 대기한 병사들에게 행군용 배낭을 챙기게 하고, 긴 행군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하는 일에는 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가 백주대로에 보무도 당당하게 마르헤크로 출정하면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세베롤리가 그걸 목격하고는 재빨리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요한이 움직이니 대비하십쇼'라고 알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그는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든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행군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긴 그 덕분에, 나폴레옹은 감시를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7월 6일 저녁 무렵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출발이 늦었다고 해도,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거운 짐도 다 놓아둔 채 결연한 의지로 야간 행군을 했다면 7월 6일 오후 12시 경에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 도착하여 다부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 옆에서 함께 말을 몰았던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보기에, 요한 대공의 부대는 빨리 행군하려는 의지도, 싸움에 도움이 되려는 각오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시키니까 움직인다는 식의 천하태평한 행군이었던 모양입니다.  왜 요한 대공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다면 요한 대공은 군법회의에 회부감이었다는 것입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마르헤크까지는 불과 4시간 반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한 대공의 군대는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네요.)



결국 사방에서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며 초조하게 요한 대공의 군대를 기다리던 카알 대공에게, 오후 2시경 날아온 소식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10시 30분에 씌여진 요한 대공의 편지가 카알 대공의 손에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강행군을 한 끝에 명령대로 마르헤크에 도착했고, 지친 병사들을 좀 쉬게 한 뒤에 다시 오후 1시경에 행군을 다시 시작할테니 늦어도 오후 5시까지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 남동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인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라니 !  그것도 바그람도 아니고 레오폴즈도르프라니 !  새벽 1시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핑계를 댈 폭풍우도 없었으니 정상적으로 행군을 해도 아침 7시에는 마르헤크에 무리없이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릿느릿 도착한 뒤에도 쉬었다가 점심 먹고 오후 1시에 출발하겠다 ?  그래서 오후 5시에 도착할 것 같다 ?  오후 5시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시간이면 프랑스군이 저항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둘러싸고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없어진 카알 대공은 2시 30분경 결국 후퇴 명령서를 작성하여 각 군단장에게 뿌렸습니다.


각지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며 조금씩 밀려나던 오스트리아 군단장들에게는 이 후퇴 명령서가 꼭 가뭄 끝에 단비 같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승리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달려드는 적군과 싸우면서 무너지지 않고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것입니다.  후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자칫하면 공포에 질려 진형을 깨고 무질서하게 패주해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적의 기병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알 대공이 지난 3년간 개혁해놓은 오스트리아군은 확실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군단들이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뒤에 바짝 붙은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포병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괴롭혔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포탄과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에서도 끝내 대오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 배후 깊숙이 침투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그 뒤를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대의 용감무쌍 광기병 라살(Antoine Charles Louis de Lasalle) 장군이 오스트리아 보병 방진을 공격하다 머스켓 총탄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라살의 뒤를 이어 기병대를 지휘하던 마륄라즈(Marulaz)도 치열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저녁 8시 경 그의 말이 죽고 자신도 부상을 입으면서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광기병 라살 장군입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르고 항상 기병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렸는데, 종종 검이 아닌 긴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쥐고 돌격을 지휘하곤 했답니다.  이 그림에서도 큼직한 파이프를 쥐고 있지요.  그런 라살도, 이번 전투에서는 뭔가 군인 특유의 직감이 있었나 봅니다.  로바우 섬에서 도강할 때, 주변 인물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군이 혈투를 벌이며 전선은 조금씩 북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원래의 전장이던 마르히펠트와 루스바흐 언덕에는 전사자들의 시신,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낙오병들, 그리고 그들을 약탈하려는, 또는 도우려는 종군 상인들 및 군인 가족 등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되었지요.  요한 대공의 선두 부대에 딸린 정찰 기병들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 즉 오후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서쪽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나자, 이제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던 프랑스군 낙오병들과 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오스트리아 정찰병들의 눈에 들어온 대혼란은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현장 상황이 한눈에 잘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찰병들은 저 멀리 북서쪽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 소리를 통해, 이미 전선은 저 먼 쪽으로 밀려난 상황이고, 뜨거웠던 전투 현장에 프랑스군 낙오병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된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대로 돌아가 요한 대공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요한 대공은 카알 대공과 연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쿨하게 그냥 마르헤크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되돌아가면서 요한 대공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  조금 더 서두를 걸 하는 후회였을까요 ?  이제 패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을까요 ?  다 아니었습니다.  참모진들에게 투덜거린 요한 대공의 푸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카알 형님은 이 패배의 원인을 내게 뒤집어 씌우시겠구만."


이 소동에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주변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전투 태세를 취했고, 즉각 여러 장교들이 요한 대공의 정세를 탐지하러 말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곧 튀렌느(Henri Amedee Mercure de Turrenne)라는 장교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습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것처럼 2~3만의 병력이 아니라 고작 1만 몇천의 수준이고, 그나마 마르헤크 쪽으로 후퇴 중이라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굳이 그들을 추격하려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바그람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바그람 전투의 에필로그 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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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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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6.06 12:58

피아베 전투에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막도날드 장군의 실질적인 지휘 하에 신속하게 북상하여 오스트리아 침공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행선지는 빈,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의 다시 한번 도나우 도강을 계획하고 있던 로바우 섬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나름 많았습니다.  곳곳의 고개길과 도시들을 지키는 요새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이미 카알 대공과 요한 대공,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에 차출된 마당에 그런 요새들을 지키는 병력은 충분치 않았습니다.  가령 5월 17일 타르비스(Tarvis) 전투에서 말보르게토(Malborghetto) 요새는 방어하기 아주 좋은 고지에 위치한 튼튼한 요새였으나, 6천의 오스트리아군으로 2만의 이탈리아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5월 30일, 그라츠(Graz) 같은 도시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은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차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고 무저항으로 도시를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곳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쾌속 질주를 계속했습니다.  



(구글 맵에서 찾아본 피아베에서 타르비시오, 그라츠를 거쳐 노이슈타트까지 가는 길의 거리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행군 경로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마침내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와 합류한 것은 6월 4일, 빈 남쪽 50km 지점에 있는 노이슈타트(Neustadt)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라츠에서 노이슈타트까지 130km를 5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26km씩 행군한 셈이고, 이는 당시 그랑 다르메 본진의 수준에 비해서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장 빈과 로바우 섬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뒤를 쫓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곧장 카알 대공 쪽으로 가지 않고 옆 걸음질을 쳐 헝가리 쪽으로 빠졌거든요.  외젠은 강행군을 했던 자신의 군대를 노이슈타트에서 2일간 휴식 시킨 뒤, 다시 그 뒤를 계속 추격해야 했습니다.  외젠은 결국 6월 14일, 노이슈타트 동쪽 약 120km 떨어진 랍(Raab, 헝가리어로는 Győr)에서 요한 대공을 따라잡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둡니다.  패배한 요한 대공은 더 동쪽으로 후퇴한 뒤 도나우 강을 건너 카알 대공 쪽으로 향했고, 승리한 외젠도 다시 서북쪽, 즉 로바우 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외젠은 7월 5일 벌어지는 바그람 전투에 2만3천의 병력으로 참전할 수 있었으나, 요한은 고작 1만2천의 병력을 그것도 전투가 이미 끝난 뒤에나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젠이 곧장 로바우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군대는 여전히 랍 지역에서 요한 대공의 잔존 세력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랍 인근에 주둔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외젠과 막도날드가 나폴레옹의 소환 명령을 받은 것은 7월 1일이었고,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로바우 섬을 면한 도나우 강변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7월 4일 저녁 9시경이 되어서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이런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가장 큰 패착은 도나우 강을 건널 부교를 시간에 쫓겨 너무 부실하게 구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를 뽑자면 결국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 두 문제에 의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처럼 도강지점마다 다리를 한개씩 만들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끝난지 약 1주일 뒤인 6월 1일부터 시작된 이 다리 건설의 책임자는 지난 번에도 다리를 지었던 공병단 지휘관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장군이었습니다.  이는 나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데, 나폴레옹이 아스페른-에슬링 패전의 책임을 최소한 공병대 측에 떠넘기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을 패전이라고 적어도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난 번 다리가 끊어진 책임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요행을 바랐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란이 죽었을 때, 아마 모르긴 해도 베르트랑은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부교 건설의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요.  아마 스페인 세고비아(Segovia)에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 수도교보다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섬으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2개 지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롭그룬트(Lobgrund)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3개나 지었고, 롭그룬트에서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짧은 다리는 훨씬 더 많이 지었습니다.  지난번 끊어졌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아무래도 가장 긴 부분인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단순히 튼튼하게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지난번처럼 자연적으로 떠내려오거나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부목이나 보트 등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철저한 방비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이 부교들 상류 쪽에는 일련의 말뚝을 촘촘히 박아 넣어 일종의 부목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약 30척의 대형 보트에 소형 대포까지 장착하여 상류 쪽을 순찰했습니다.  무거운 보트를 떠내려 보내려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베르트랑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로바우에서 도나우 북안 쪽으로 이어지는 최종 다리 부분이었습니다.  로바우 섬까지는 이미 프랑스군이 확보한 지역이었으나, 도나우 북안은 오스트리아군 장악 지역이었으므로, 도강 순간에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신속하게 다리를 놓은 뒤 일제히 대군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도 지난 번 전투에서 한번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퇴로가 막히는 아찔한 상황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르트랑은 이 부분을 위해 미리 구축된 조립식 부교를 무려 4개나 준비했습니다.  그 4개의 다리 중 하나는 이음매 없이 전체가 단 하나의 통판으로 만들어진 다리로서, 결전의 날이 되면 로바우 섬 강안에 한쪽을 고정시킨 뒤, 강물에 이 다리를 띄워 보내 90도 회전시켜 도나우 북안에 철컥 이어지도록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강습용 다리였지요.  이런 준비는 6월 말일 경 완료되었고, 나폴레옹은 7월 2일자 대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자랑스럽게 '프랑스군에게 도나우 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병력 동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리 건설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취했습니다.  즉,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더라도 거의 돌다리 수준으로 튼튼한 다리를 만반의 준비를 갖춰 준비한 것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는 모든 위험 부담을 다 끌어 안았습니다.  병력 동원을 적게 했냐는 뜻이냐 하면 전혀 반대로서, 다른 전선이 지나치게 취약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이번 전투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는 서쪽, 즉 본국과의 통신로 확보를 위해 후방에 배치해놓았던 병력을 모조리 소환하여 집결시켰습니다.  가령 빈 서쪽,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는 교통의 요지로서 프랑스군이 본국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주요 후방 근거지였습니다.  여기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전에도 한번 카알 대공이 병력을 보내 공격한 바 있고, 또 아스페른-에슬링 이후에도 오스트리아군이 재공격을 고려한 바 있을 정도의 요충지였지요.  이렇게 중요한 이 곳은 베르나도트(Bernadotte)의 제9 군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제9 군단조차 불러 들였습니다.  라구사(Ragusa) 공작으로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몽(Marmont)에게도 1만의 병력을 끌고 올라오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 이야기는 이미 들으셨지요.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모든 조심성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린츠 같은 곳은 너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지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한창 반란이 진행 중이던 티롤의 진압을 위해 투입했던 단치히 공작 르페브르(Lefebvre)의 제7 군단, 사실상 거의 전원이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진 바이에른(Bayern) 군단을 린츠로 소환했습니다.  이 덕분에 티롤 반란의 수장 호퍼(Hoffer)와 티롤 반란군은 티롤의 수도 인스부르크(Innsbruck)를 재탈환하고 기세를 올렸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산골짝 촌놈들이 기세를 올리건 말건, 모든 상황은 바로 이 곳, 도나우 강 건너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서 결판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은 6월 중순 경까지 빈 주변에 무려 24만의 병력을 끌어모았습니다.  물론 이들을 모조리 공세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이중 로바우 섬으로부터 도나우 강을 건너 공세에 나설 병력은 14만 보병에 2만8천의 기병, 그리고 488문의 대포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평생 최대의 병력 규모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준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동안,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탄탄한 기지가 없어서 궁지에 몰린 바가 있었지요.  그 기억을 되살려, 나폴레옹은 대-오스트리아 전선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 전체를 철옹성으로 중무장시키기로 합니다.  6월 말경, 부교들이 준비 완료될 즈음해서는 로바우 섬에는 무려 14개소의 포대가 구축되었고 거기에는 도나우 강 북안으로 건너갈 488문의 대포 외에도 124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설치되었습니다.  여기 뿐만 아니라 도나우 강 내에 있는 이런저런 작은 섬들에도 적절한 위치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중무장을 통해 최악의 경우에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진입로이자 퇴각로가 될 로바우 섬 근처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한 것이지요.  이 조치가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나폴레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국 큰 역할을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런 대대적인 준비를 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바우 섬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 작업을 펼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왜 카알 대공이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의 이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나우 강 북안에서 로바우 섬 대부분의 위치가 포 사정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대포를 대규모로 끌고 나와 화끈한 대포알 세례를 퍼부었다면 로바우 섬을 한폭의 지옥도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그런 방해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병력을 도나우 강 북단에서 후방 멀찍이 후퇴시켰습니다.  로바우 섬에 면한 도나우 강 북단에도 일부 진지선을 구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로바우 섬의 북쪽 강안에만 그랬을 뿐이고, 넓은 로바우 섬을 면하고 있는 다른 측면 대부분은 아무 진지 구축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적을 공격할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때라는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바로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폴레옹을 그런 방법으로 패배시킨 바 있는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불가라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건 추정이 아니라 팩트인데, 카알 대공은 더 이상의 전투를 원치 않았고, 이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체면도 적절한 선에서 살려줘야 했고, 구태어 불필요한 도발을 걸어 확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황제 프란츠 1세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정의 대부분은 철없는 주전파였고, 카알 대공의 이런 계획은 쓸데없이 나폴레옹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또 카알 대공은 이번에도 나폴레옹이 반드시 로바우 섬 쪽에서 지난번처럼 도강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쪽 방면에서 허장성세를 일으켜 오스트리아군을 집중시킨 뒤 다른 지점에서 도하는 것에도 대비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강변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아 고착화된 진지에 대군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더 먼 후방에서 내선 기동의 우위를 유지하며 어느 쪽에서 도강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에 대부대를 유지하지 않으려 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병사들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강가는 필연적으로 습한 지역이었고, 모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는 전투에서 총이나 대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 병사들보다는 이질과 열병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카알 대공의 이런 배려는 꽤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로바우 섬의 진지 구축을 위한 병사들 외에는 대부분의 병력은 빈 인근 3일 행군 거리 내에 포진시켰을 뿐, 강변에 대군을 몇 주씩 주둔시키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카알 대공이 힘을 기울인 것은 병력 집결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된 지역인 보헤미아(체코) 지역을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owrat) 장군의 제3 군단을 소환하고, 제국 내 각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국민방위군(Landwehr, 일종의 예비군 내지는 민병대)까지 휘하로 소집했습니다.  이건 사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젖먹던 힘까지 짜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원래 30~50대의 중산층 시민들을 비상근 형태로 훈련시키고 조직시킨 뒤 어디까지나 거주 지역의 수비대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서, 이들에게 대포알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횡대-종대의 복잡한 대열 변경이나 하루 30km의 강행군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당시 카알 대공의 병력은 약 9만이었는데, 이중 2만 정도가 전사-부상-포로 및 행방불명으로 상실되었으므로 7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3군단 약 1만8천과 국민방위군 등을 끌어모아 약 13만7천, 414문의 대포를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이럴 때 두 동생이 거느린 5만의 병력이었습니다.  개전 초기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뜻하지 않게 완강히 저항하는 폴란드인들 때문에 별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폴란드에서 밀려나 오스트리아령 갈리시아(Galici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3만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마르히펠트에 나타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폴란드라는 벌집을 잘못 건드린 탓에, 바르샤바 공국의 포니아토프스키 왕자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오히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침범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별로 적극적인 공격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동맹국인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국경 인근에 대기 중이었으므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곳을 텅 비워두고 마르히펠트로 내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Inner army of Austria)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던 이 군대는 원래부터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피아베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군세가 더 축소되었고, 결정적으로 요한 대공이 뭔 생각에서였는지 이 군대를 구성하는 2개 군단 중 하나를 그 군단의 본거지인 류블랴나(오늘날의 슬로베니아)로 되돌려 보내는 바람에 2만 정도로 크게 축소된 상태로 헝가리로 되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저 먼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Dalmatia)의 마르몽에게도 '1만명이라도 좋으니 다 끌고 올라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온갖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고 있는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결코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이랍시고 군단 하나를 그쪽으로 떼놓고 온 것은 정말 아쉬운 행동이었습니다.  어차피 류블랴나를 위협할 프랑스군은 외젠의 이탈리아군과 마르몽의 달마시아군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폴레옹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요한 대공의 잔존 2만 병력이라도 무척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요한 대공은 결국 형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군이 바그람에서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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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5.28 23:55

사칠레 전투의 패배를 수습하며 의기소침 해있던 외젠에게 공화국 시절의 낡은 군복을 입고 나타난 장군은 그 군복만큼이나 이름도 독특했습니다.  막도날드(É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라는 이름이었거든요.  스당(Sedan) 출신으로 엄연한 프랑스인인 이 사람이 누가 봐도 스코틀랜드 계통의 이름을 가지게 된 사연은 간단했습니다.  그 가문은 실제로 스코틀랜드 서쪽 섬인 사우쓰 우이스트(South Uist)가 원래 고향으로서, 퇴출된 영국 및 스코틀랜드 연합 왕국의 카톨릭 왕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박해받는 그런 집안이 같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망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막도날드의 초상입니다.  그로 Gros의 작품입니다.)




그가 굳이 공화국 시절의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에도 그의 가문 내역처럼 사연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는 원래 뒤무리에(Charles François Dumouriez) 및 피슈그뤼(Jean-Charles Pichegru) 장군 밑에서 복무한 군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뒤무리에는 도중에 오스트리아 측으로 망명했고, 피슈그뤼는 반혁명 활동을 펼치다 투옥되어 암살된 사람입니다.  나폴레옹과는 줄을 댈 기회가 없었지요.  그러다 마침내 나폴레옹과 연을 맺을 기회가 왔습니다.  1797년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배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나폴레옹이 그 지역을 싹쓸이하여 오스트리아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맺은 뒤 파리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로마 점령이나 나폴리 왕국 점령 등 뒤치닥거리스러운 임무만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의 군 경력에서 결정적인 기회가 또 온 것은 1799년의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입니다.  중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막도날드는 3만6천의 병력을 이끌고 불과 2만2천의 병력을 가진 수보로프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북진했으나, 트레비아(Trebbia)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주베르(Barthélemy Catherine Joubert)나 마세나 같은 명장들도 이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이 패배의 치욕이 좀 희석되었다는 점이었지요.  아무튼 막도날드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계속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경력을 쌓았고, 나름 이탈리아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와 친하게 지냈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최대 정적이었던 모로가 투옥된 뒤 1804년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난 뒤, 막도날드도 모로파로 몰려 아무런 지휘권은 커녕 공직조차 맡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그가 가진 군복은 1804년 이전, 즉 나폴레옹이 황위에 오르기 이전의 공화국 시절의 낡은 군복 뿐이었던 것입니다.  


1809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외젠에게 '전쟁 발발시 일단 피아베 강 서쪽으로 후퇴하라'는 편지 외에도 쓸만한 야전 지휘관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세핀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특출날 것이 없었던 약관의 외젠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쓸만한 야전 지휘관은 다 자신의 그랑 다르메에서 한자리씩을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발탁된 것이 실업자로 있던 막도날드였습니다.  막도날드는 어쨌거나 방면군 하나를 통째로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고위 장교였고, 또 마침 이탈리아 방면의 전문가였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이 꺼려했던 것은 모로였지 막도날드 따위가 아니었고, 또 이제 황제 5년차로서 더 이상 그와 정치적인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기피 인물이었다는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막도날드의 참여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높여주는 효과를 냈습니다.  외젠은 휘하에 있는 3개 군단 중 가장 강력한 군단을 막도날드에게 맡겼는데, 막도날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한 지휘력으로 군단 편성과 병사들 사기 진작에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사기가 계속 오르고 있었습니다.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전면적인 퇴각 중이었거든요.  요한 대공은 어차피 병력도 부족한 마당에 본국으로부터 '이탈리아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본진이 털리고 있으니 빨리 돌아와 네 형을 도우라'는 급보를 받고 열심히 퇴각 중이었습니다.  그 뒤를 쫓는 외젠도 마냥 여유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임무는 이탈리아 왕국 방어가 아니라,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 본진과 합류하려는 요한 대공을 요격하여 어떻게든 그쪽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던 것이지요.  요한에게나 외젠에게나 성패의 제1 요건은 결국 스피드였습니다.


도둑과 경찰이 추격전을 벌일 때는 도망치는 쪽이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수만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대끼리 추격전을 벌일 때는 대부분 도망치는 쪽보다 추격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군대가 진격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후퇴할 때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므로, 도망치는 쪽의 발걸음이 더 느린 경우가 많거든요.  가령 부상병들의 처리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진격할 때는 그냥 부상병을 후방에 버려두고 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부상병을 두고 간다는 것은 곧장 포로가 된다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데려가자니 행군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지요.  결정적으로, 강과 같은 장애물을 건너느라 지체할 수 밖에 없을 때, 뒷덜미를 잡히기 딱 좋았습니다.  


막 후퇴가 시작된 4월말, 가장 먼저 만난 큰 강인 아디제(Adige) 강가에서 당장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진 칼디에로(Caldiero)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대는 이탈리아군 선발대를 효과적으로 뿌리치고 도강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결국 요한 대공은 피아베(Piave) 강 근처에서 다시 따라잡히고 맙니다.  5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이 선까지 후퇴하라고 지시했던 피아베 강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강을 건넌 뒤 다리를 다 태워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나 현지 지리에 밝은 쪽은 당연히 이탈리아군 쪽이었습니다.  외젠은 다리 없이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여러 곳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군 본진은 이미 꽤 멀리까지 도망쳤고 강 건너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은 소수의 후위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칼디에로 전투에서 지나치게 서두르다 오스트리아군을 놓친 바 있던 외젠은 이번에는 병력을 다 모은 뒤 대규모로 강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이 외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줍니다.


외젠이 파악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본진도 강가에서 불과 4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요한 대공 입장에서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쫓기며 빈까지 갈 수는 없다고 보고, 이 곳에서 외젠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가겠다는 계획이었거든요.  오스트리아군은 약 2만8천, 이탈리아군은 약 4만4천으로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습니다만, 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피아베 강이었지요.


외젠의 계획은 먼저 드세 백작(Comte Dessaix, Joseph Marie, 마렝고의 드제 Desaix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이 이끄는 강력한 전위대가 여울목을 건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막도날드의 군단부터 시작해서 병력을 투입할 생각이었습니다.  동시에 다른 여울목을 통해서 기병 사단들을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훗날 워털루의 그루시 맞습니다) 지휘 하에 투입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위치를 파악해둔 다른 여러 여울목을 통해서도 다른 군단들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7시부터 드세 휘하의 전위대 5천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어렵게 강을 건너자마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군도를 휘두르며 그들을 반겼습니다.  드세는 당황하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전위대를 2개의 커다란 방진(square)로 만들어 적 기병에 대항했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도 결코 아마추어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보병들이 방진을 만들자, 정말 교과서처럼 오스트리아군에서는 포병대가 나섰습니다.  


당시 병종간의 천적 관계는 대충 이랬습니다.  보병끼리 싸울 때는 넓게 횡대로 펼쳐진 진형이 좋았습니다.  소총의 일제 투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또 적 포격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펼쳐진 횡대는 군도를 뽑아든 기병들의 돌격에 완전 취약했습니다.  기병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병들은 3열 또는 4열로 밀집하여 직사각형의 방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말은 빽뺵히 늘어선 총검 대오를 결코 뚫을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이런 보병 밀집 방진은 또 포병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감이었습니다.  대포알 한방에 6~7명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지니까요.


이렇게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이탈리아 보병들을 위협하여 방진을 만들자마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나선 것은 정말 기가 막힌 기-포병의 콜라보레이션이었지요.  밀집된 이탈리아 보병들은 곧 불을 뿜은 오스트리아 대포에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세는 이번에는 당황하여 외젠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외젠은 도강 순서를 급히 변경하여 포병대를 급파, 드세의 전위대를 지원했습니다.  전투는 곧 포병끼리의 치열한 포격전으로 전개되었고, 드세는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세의 안도도 잠시였습니다.  이탈리아군 포병들은 너무 급히 여울목을 건너느라 탄약을 별로 못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 포탄이 떨어진 포대들은 하나둘씩 슬그머니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다른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넌 이탈리아 기병대가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덮쳤습니다.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기병대들도 다시 일제히 뛰어나왔고, 곧 혼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이탈리아 기병대의 완승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들은 그 지휘관까지 전사해버렸고, 전체 24문의 대포 중 14문이 이탈리아군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러는 사이 막도날드의 군단이 꾸준히 강을 건넜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도나우 강 부교를 끊어 놓은 것이 궁극적으로는 평년보다 일찍 시작된 검은 숲의 눈 녹은 물에 의한 수위 증가였듯이,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피아베 강은 이날 하루 중 꾸준히 유속과 수위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너다 물살에 떠내려가 결국 익사하는 병사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오후 3시 경이 되자 물살이 너무 거세져, 결국 외젠은 여울목을 통한 도강을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이미 정오 무렵, 막도날드는 휘하 군단 병력의 약 3/4 정도를 건너게 한 뒤였거든요.  요한 대공은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이탈리아군의 공격이 거세게 나오자 당황했는지 휘하 병력을 시원시원하게 투입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사이, 막도날드는 포병들의 맹렬한 포격을 시작으로 정석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뒤늦게나마 예비대인 정예 척탄병 여단을 투입하며 반격했으나 이미 전세는 이탈리아군 측으로 완전히 기운 뒤였습니다.  전체적인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으나, 오후 1시 경에 이미 전투의 절정은 지난 상태가 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나마 진형을 유지한 채 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약 14%의 사상률인 약 1200의 사상자와 약 2700의 포로 및 행방불명자를 내며 대패했으나, 완전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젠의 패기에 질린 요한이 초심과는 달리 소극적인 공세를 펼쳤던 덕분에 패배 이후에도 나름 수습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로는 요한 대공은 감히 외젠의 추격에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 후퇴만 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칠레에 이르러서는 휘하 2개 군단을 둘로 나누어 원래의 각각의 근거지로 되돌려 보냅니다.  즉, 제9 군단은 원래 카르니올라(Carniola, 현재의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서 출발했었고, 제8 군단은 오스트리아 카린티아(Carinthia) 지방의 주도인 빌라흐(Villach)에서 편성된 부대였는데, 이들을 각각 류블랴나와 빌라흐로 나누어 보낸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9 군단을 그쪽으로 보낸 것인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그 뒤를 추격하는 외젠은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며 아주 쉽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나폴레옹 쪽으로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요한과 외젠은 소규모의 전투를 계속 벌이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북진하여 결국 카알 대공과 나폴레옹에게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그람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되고, 요한 대공의 병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그람 전투 시리즈에서 보시겠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aldiero_(1809)

https://en.wikipedia.org/wiki/Jacques_MacDonal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rebbia_(1799)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Piave_River_(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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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5.21 19:11

여기서 잠시 시간을 약 2달 전으로 되돌려 1809년 4월 경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은 크게 3갈래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주력을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하는 동안, 페르디난트 대공은 바르샤바 공국을 들이치고, 셋 중 가장 어렸던 요한 대공은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을 향했지요.  이 삼형제의 능력치는 정확하게 나이 순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장이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적 역량보다도 그 온후하고 공정한 성격을 기반으로 한 리더쉽으로 군의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27세의 약관이었던 요한 대공이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17살이던 1799년 그려진 그의 초상화입니다.)


요한 대공은 이 두 형에 비해 훨씬 더 굉장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전투 경험이 있었습니다.  상대는 프랑스의 명장이자 나폴레옹의 정적이었던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였고 오스트리아의 국운을 건 매우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비극적인 부분은 이 1800년 12월 호헨린덴(Hohenlinden) 전투의 처참한 패배자가 바로 요한 대공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처음에는 기세 좋게 프랑스군을 밀어붙였으나, 프랑스군의 유인에 말려 아무 대책없이 숲 속으로 뛰어들어간 요한 대공의 철부지 지휘 덕분에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참패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투 결과 2달 뒤 오스트리아는 1801년 2월 9일 굴욕적인 루네빌(Lunéville) 조약으로 제2차 대불동맹전쟁을 종결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대공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자였으므로 다시 이 중대한 침공 작전의 지휘관이 된 것입니다.




(모로 장군을 나폴레옹의 최대 라이벌로 만들어 준 회심의 쾌승, 호헨린덴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요한 대공이 포로가 되는 망신을 면한 것은 오직 그가 타고 있던 명마 덕분이었습니다.  덕분에 부하들을 다 팽개치고 정말 전속력으로 달아날 수 있었거든요.)



최소한 요한 대공에게 북부 이탈리아 전선을 맡긴 것은 나름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이었던 레오폴트 2세가 아직 황위에 오르기 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국어가 이탈리아어일 정도로 이탈리아 사정에 나름 훤했습니다.  또 그는 바로 4년 전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티롤 지방의 방어를 맡으며 개인적으로 티롤 지방민들과 유대감을 쌓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탈리아 침공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티롤의 반란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2명의 쥴라이 형제(Ignaz Gyulai, Albert Gyulai)가 이끄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과연 이탈리아 왕국에서 그의 침공에 맞서 싸울 용사는 누구였을까요 ?





(이그나즈 쥴라이 장군입니다.  그와 그의 동생 알베르트 쥴라이는 헝가리 태생의 귀족들로서, 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었지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입니다.  수도는 패션의 도시이자 롬바르디아의 주도였던 밀라노입니다.)



잠깐 잊으신 분들을 위해 상기시켜드리자면, 이탈리아 왕국(Royaume d'Italie)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결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뜯어낸 북부 이탈리아 영토로 만든 것으로서, 과거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모데나 공국 및 로마 교황청의 영토 일부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이니까 왕이 있을텐데 그게 누구냐고요 ?  누구겠습니까 ?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제국의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바빴습니다.  그는 파리를 가꾸고 마드리드와 비엔나를 때려부수느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밀라노에 머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대통령이 없을 때 써먹을 수 있는 부통령(vice-president)을 만들듯이, 나폴레옹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할 부왕(vice-roi, 영어로는 viceroy)을 임명해 두었습니다.  바로 조세핀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아들인 외젠(Eugène de Beauharnais)이었습니다.  





(외젠이 19살이던 1800년에 그려진 그의 초상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탈모인 연합에 가입할 징조가...)




1809년 당시 그의 나이는 약관 28세로서, 요한 대공보다 겨우 1살 많은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며 밥만 축내던 요한 대공에 비하면 나폴레옹을 따라 다니며 훨씬 더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습니다.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는 시리아의 생-장-다크레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고, 마렝고 전투에서 통령 근위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절반에 속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실전에 참여했던 것이 저 마렝고 전투였었고, 당시 계급은 기병 대위였으며, 지휘해본 최대 규모의 부대는 중대 단위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군 생활을 나폴레옹의 하는 일 없는 참모로 보냈으며, 의붓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군 생활을 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이집트 시절에 아름다운 흑인 여자 노예를 정부로 사들여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시켜 데리고 다니며 주변 젊은 장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몸에 받기도 했습니다만, 작전 지휘로 주변 장교들의 인정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의붓아들에 대해 염려가 되는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고 1809년 1월 급히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이탈리아 왕국의 방어 계획에 대해 자세한 지침을 보냈습니다.  이 일련의 편지들에서 나폴레옹이 지시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딱 2줄이었습니다.


1)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미리 병력을 집결시켜 괜히 오스트리아를 먼저 도발하지 말라.

2) 만약 오스트리아가 침공해온다면 일단 피아베(Piave) 강 서쪽으로 후퇴한 뒤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킨 뒤 반격하라.





(피아베 강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은 자신이 상대하게 될 것이므로, 이탈리아 왕국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곁가지 부대는 이 정도의 전략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외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방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4월 10일,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왕국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오스트리아군이 침공을 개시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나폴레옹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준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외젠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군을 증강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크게 이탈리아군과 프랑스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실 프랑스군도 거의 모조리 이탈리아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쓰는 진짜 프랑스인 중 입대 연령이 되는 장정들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e Armee)로 징집되는 형편이었거든요.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 최근 프랑스로 강제 합병된 과거 피에몬테와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에서 징집된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에 주둔하는 프랑스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젠은 자신의 군대가 집결만 된다면 꽤 잘 싸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피아베 강 서쪽으로 꼴사납게 도망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 병력을 내보내 요한 대공의 진격을 잠시라도 지체시키도록 한 뒤, 6개 사단을 베네치아 인근 리벤자(Livenza) 강가의 사칠레(Sacile)에 모아 거기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로 합니다.  그는 '국경 내로 침범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데는 하루면 충분하다'라고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빨간 위치 표시가 된 부분이 사칠레의 위치입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는 크게 북쪽의 빌라흐(Villach)와 동쪽의 류블랴나(Ljubljana)에서 각각 1개 군단씩이 쳐들어왔습니다.  류블랴나는 지금 슬로베니아의 수도입니다.)



그러나 자신감과 역량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외젠은 병력의 집결에는 꽤 신속함을 발휘해보였으나, 정찰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어설펐습니다.  그는 포르데노네(Pordenone)까지 진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약 2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고, 사칠레에 집결시킨 6개 사단 3만7천이면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한 대공 휘하에는 거의 4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해 있었고, 요한 대공은 활발한 정찰을 통해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외젠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제 무덤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리벤자 강과 논첼로 강 사이에서 벌어진 4월 16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은 병력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그 지휘관 외젠의 미숙한 지휘 하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가 자신의 것보다 우월한 것을 보고는 자기 딴에는 머리를 쓴답시고, 기병대가 활동하기 좋지 않은 논첼로 강변에 접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승부처로 삼고 그 쪽으로 병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느라 중앙 전선이 얇아질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이 바로 그 얇아진 부분을 들이쳤습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물러서야 했습니다.  그나마 외젠의 사단들이 물러나면서 방진을 구축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며 질서정연하게 퇴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외젠은 총병력 3만7천 중 3천의 사상자와 3천5백의 포로를 내며 큰 피해를 입었고, 요한 대공은 약 3천의 사상자와 5백의 포로를 냈습니다.  황제의 동생과 황제의 의붓아들의 1차전은 황제의 동생이 완승을 거둔 셈이었습니다.





(사칠레 전투의 상황도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도 대단한 지휘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라면 이렇게 잡은 승기를 어떻게든 살려내 적을 무자비하게 추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10%도 안되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별로 치열하지도 않았던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재정비한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외젠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지시한 대로 피아베 강 서쪽 너머 저 멀리 후퇴하여 나폴레옹이 소싯적 수없이 넘나든 아디제(Adige) 강까지 후퇴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탈리아 왕국 곳곳에서 모여드는 병력을 모았습니다.  4월 28일, 마침내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디제 강에 면한 베로나(Verona) 근처까지 왔을 때, 이미 외젠은 6만의 병력을 모으고 강력한 수비 진영을 갖춘 뒤였습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곳저곳 점령지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티롤의 반란군에게도 지원군을 보내주느라 더 줄어든 형편이었지요.  불과 10일 만의 전세 역전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지시대로 싸우지 않고 후퇴했더라면 훨씬 더 쉽게 요한 대공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베로나의 위치입니다.  그 옆에 보이는 삼각형의 호수는 가르다 호수로서, 나폴레옹이 1796년 그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 있지요.)



한편, 나폴레옹은 그렇잖아도 바쁜 와중에 외젠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섣부른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의 왕이던 그의 매제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로 외젠을 교체해버리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그 편지가 베로나로 날아들 때 이미 외젠은 거기 없었습니다.  그는 아디제 강을 다시 건너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 중이었습니다.  이미 병력의 우열이 뒤집힌데다, 바이에른 전선에서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통해 카알 대공의 본진을 완전히 패주시켰다는 소식이 요한 대공에게도 날아든 것입니다.  요한 대공은 전속력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나폴레옹을 막는데 일조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젠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요한 대공의 군대를 어떻게든 붙잡아 격파해야 나폴레옹을 돕는 길이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외젠이나 요한이나 이 북부 이탈리아는 어떻게 되든 중요치 않았고 어느 쪽이 최대한의 병력을 이끌고 더 빨리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에게 합류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외젠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군이 제 몫을 다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사칠레 전투에서 외젠과 요한이 주거니받거니하며 보여준 삽질을 볼 때, 아무리 상황이 유리해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다면 설령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애꿎은 병사들만 희생될 뿐 전쟁의 승패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에 만들어진, 낡은 공화국 시절의 군복을 입은 40대 초반의 장군 하나가 외젠의 진영에 합류합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시절부터 종군했던 나이든 고참 병사들은 그 군복을 보고 크게 반가와 했으나,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했던 젊은 장교들은 그의 군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장군은 누구였을까요 ?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Eug%C3%A8n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cile

https://en.wikipedia.org/wiki/Ign%C3%A1c_Gyulay

https://en.wikipedia.org/wiki/Iron_Crown_of_Lombardy

https://en.wikipedia.org/wiki/Piave_(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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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