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3.26 21:14

5월 22일 오전 8시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의 안색은 상당히 침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영웅다운 침착함이다 아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을 못한 것이다 등등 말이 많습니다만, Harold Parker의 'Three Napoleonic Battles'라는 책의 주석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날 부교는 한번이 아니라 두번 끊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7시에 작은 규모로 끊어졌고 이는 곧 수리될 수 있었으나, 곧 이어 9시에는 도저히 그날 중으로는 수리가 안 될 지경으로 크게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전 8시 경 나폴레옹이 받은 보고는 그 첫번째의 대수롭지 않은 파손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책과 인터넷 사이트마다 몇 시 경에 다리가 끊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각기 다른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도 제각기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교, 정확하게는 프랑스군의 도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도나우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을 연결하는 긴 부교가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교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그다지 튼튼한 물건이 아닌데다, 든든한 부교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품, 즉 닻이 없는 상황에서 포도탄과 어부들의 통발로 대충 만든 대용품으로 건설한 부교이다보니, 그냥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슈바르츠발트에서 예년보다 일찍 눈이 녹으면서 평소라면 6월에나 있을 도나우 강의 범람이 일찍 시작되어 물결이 무척 거셌고, 또 뿌리 뽑힌 나무나 나무가지 더미 같은 잡동사니들도 많이 떠내려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닻이라는 물건은 자동차에서 브레이크처럼 중요한 물건입니다.  특히 부교처럼 항해보다는 정박이 중요한 임무인 보트에게 있어서, 닻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품이었습니다.  잔잔한 물결에서는 어부의 통발에 쇳덩이를 대충 쟁여 넣은 것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센 물결에서는 튼튼한 닻이 꼭 필요했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부교가 끊어진 것은 카알 대공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말려든 결과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적이 절반 정도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이 양분된 상태에서 각개격파하는 것은 모든 지휘관이 꿈꾸는 일인데, 강이 그렇게 적을 양분해주니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적이 부교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는 경우 그 부교를 끊어놓는다면 이미 강을 건넌 적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카알 대공이 일부러 도나우 강 좌안을 비워둔 뒤, 미리 준비해둔 통나무나 무거운 돌을 실은 보트들을 급류에 떠내려 보내서 부교를 파괴했다는 것이 무척 그럴싸한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5월 22일 운명의 아침에 부교가 크게 부서진 것은 확실히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대형 보트 때문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보트에 큼직한 물레방아를 통째로 실은 보트 하나가 급류에 떠내려 와 프랑스군의 부교를 들이 받았고, 이로 인해 부교를 구성하던 여러 척의 바지선이 떠내려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카알 대공의 작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부교를 끊어서 다부의 제3 군단이 도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카알 대공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 달갑지 않은 전쟁은 카알 대공이 애써 키워놓은 군단들을 재정 문제로 인해 해체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국 땅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불리한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에서 바라는 바는 나폴레옹과 건곤일척 후회없는 일전을 벌여 망하든 흥하든 추가적인 전투가 없도록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교가 끊어져 다부의 제3 군단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나폴레옹은 패배한다고 해도 부교 핑계를 대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다시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희생을 동반하는 제2, 제3의 전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을 텅 비워놓았던 것은 뭔가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폴레옹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안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설령 오스트리아군이 의도적으로 보트를 떠밀어 보냈다고 해도, 많은 섬이 얽혀 여러 개의 지류로 나누어지는 넓은 도나우강에서, 그것도 우안이 아니라 좌안에서 떠내려보낸 보트가 주변 섬 모래톱에 좌초하지 않고 정확하게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 사이의 지류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부교를 끊는 것에 전체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보트 한두 척만 떠내려 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당한 크기의 대형 보트를 대규모로 떠내려 보냈을텐데, 프랑스군의 기록에도 오스트리아군의 기록에도 그런 대형 보트의 대규모 함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상류에 있던 일부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부교를 보고 즉흥적으로 떠내려보낸 보트 몇 척 중 하나가 럭키 스트라이크를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좌안에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우안에서 보트 한 두척을 떠내려 보내면서 그것이 정확하게 로바우섬 서쪽 지류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요행수를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말이 있지요.  1931년에 발행된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라는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통계치에서 비롯된 이 법칙은, 산업 현장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생기는 큰 사고가 하나 생길 때, 평균적으로 300여건의 부상자없는 작은 사고와 29건의 작은 부상만 따르는 작은 사고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뭔가 작은 부주의와 소홀함이 쌓이고 쌓여 큰 재난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법칙이 1809년 5월 22일 아침의 부교 붕괴 사건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부교를 하나만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놓았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빈의 대장간에서 닻 수십개를 두들겨 만들었더라면, 여러 가닥의 긴 밧줄이나 목책 구조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방어물을 부교의 상류 쪽에 설치했더라면, 아니, 아예 다부가 로바우 섬으로 건너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했더라면, 이 날 프랑스군의 참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날의 비극은 날씨, 혹은 물결로 인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결국 나폴레옹의 안이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필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입니다.  인명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부교가 끊어진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작전 때문이든 도나우 강의 급류에 떠내려 온 통나무 때문이든,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접한 나폴레옹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의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겠다는 백업 플랜 따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그는 전령 둘을 불렀습니다.  한 명에게는 즉시 강변으로 나가 책임 공병 장교에게 부교 수리에 얼마나 걸릴지 알아보라고 했고, 나머지 하나에게는 란 원수에게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전령이 도착했을 때 란의 상황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일레르 사단을 앞세워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었는데, 카알 대공의 지원 부대가 나타나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난데 없이 나폴레옹의 전령이 나타나 다짜고짜 더 공격하지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 이건 지키기 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대포알이 채찍질처럼 날아드는 허허벌판에서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요 !


설상가상이라고, 란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 보병 사단이 무너지자, 카알 대공은 전술을 바꾸어 포병을 전면에 내세워 무차별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멈추려 했습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 전력은 프랑스군을 4배 정도로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란 휘하 사단장 중 가장 용맹했던 아우스테를리츠의 영웅 생-일레르 장군도 발목에 적 포탄을 직격 당하고 로바우 섬의 야전 병원으로 실려간 뒤였습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연상이었던 생-일레르의 full name은 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으로서, 기병 대위였던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후보생으로 군에 들어갔었고, 혁명 이후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승진을 할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29세의 나이에 이미 장군이었던 그는 1795년 북부 이탈리아의 로아노 전투에서 손가락 두개를 잃을 정도로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용기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발목을 잃은 그는 결국 괴저로 인해 15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어정쩡한 명령을 내린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교가 끊겼다면 다부의 지원 병력은 고사하고 탄약 부족으로 인해 마세나와 란은 당장 철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세나와 란의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즉각 로바우 섬으로 후퇴를 명령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위태위태했던 다리는 급류니 통나무니 하는 것들로 인해 여러번 끊겼었고, 그때마다 몇 시간 만에 수리가 된 바 있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한두 시간 안에 수리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대로 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한 공병 장교가 처음부터 '매우 심한 손상으로 인해 수리에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릴 듯'이라고 명쾌한 보고를 했다면 이렇게 상황 파악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하들은 상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자세히 보고하는 것을 꺼리기는 하지요.  덕분에 란과 그의 부하들은 1시간 동안 허허벌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격 연습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은 카알 대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프랑스군의 공격이 멈춰진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어쨌거나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반격을 위해 보병 사단들을 재규합했습니다.  또한 그는 포병을 내세운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하고는 보병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포병대를 더 전진시켜 프랑스군에게 집중 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당시 포병대는 1발 발사하는데 2~3분이 걸릴 정도로 발사 속도도 느렸고, 또 그렇게 애써서 쏜 포탄도 불꽃과 함께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폭발탄이 아니라 그냥 쇳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밀집 보병 대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날 중으로 부교 수리 불가능'이라는 현실적인 보고가 날아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철수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은, 도나우 남단의 이미 끊어진 부교보다 많이 짧긴 하지만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엉성한 부교 하나 뿐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과 란의 제2 군단 중 살아남은 병력 전체, 거의 4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이 다리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퇴하는 그들의 등 뒤로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의 오스트리아군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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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19 21:24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에슬링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느슨했는데, 그 두 마을 사이의 중앙 평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중앙을 돌파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항상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던 란이 다시 한번 그 중앙부를 돌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난 뒤, 란은 크게 좌향좌를 하여 오스트리아 주력인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3개 군단을 측면으로부터 돌돌 말아올릴 예정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란이 이끌고 돌격할 제2 군단이 강을 무사히 건너야 했는데, 새벽 3시가 되어 그 도강이 완료되었습니다.  즉, 작전 실행 준비가 끝난 셈이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머리 속에 그려지던 5월 22일, 둘째날 전투의 전개도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다부의 제3군단은 로바우 섬은 커녕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란이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릴 때, 란의 측면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가 역으로 들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즉, 이미 전날 밤 9시에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제3 군단을 도나우 강 우안의 부교 시작점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소환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밤새 행군하면 아침 나절에 거기에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도강시켜 란이 자리를 비운 중앙 지점으로 밀고 나가면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부의 군단은 란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과하여 란과는 반대 방향인 우향우를 한 뒤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의 옆구리를 들이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의 핵심인 란의 김밥말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군단들을 잘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뒤엉켜 있던 마세나의 제4 군단이 그들을 먼저 평원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 11시까지 아스페른을 손에 넣으려는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이다, 골목 하나를 경계로 지쳐 쓰러져 잠든 마세나의 병사들은 불과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다시 부사관들의 재촉을 받으며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 4시, 마세나의 병사들이 아스페른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두번째 날이 시작된 것이지요.  잠을 자다 기습을 당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는데, 그래도 아침 7시 경에는 결국 아스페른 마을 대부분에서 프랑스군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한편, 마침 자욱하게 안개까지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은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평원에 있는 밭두렁 뒤로 조용히 행군하여 포진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아스페른으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곧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전면 평원에 자리를 잡은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안개와 어둠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평원을 휩쓰는 포격을 개시한 것입니다.  란의 병사들은 밭두렁 뒤에 납작 엎드려 있긴 했습니다만, 점점 날이 밝아오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가려주던 안개마저 아침 7시가 되자 걷히기 시작하면서 슬슬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벌써 3시간 째 적의 포격에 노출된 채로 밤이슬을 맞으며 나폴레옹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자니 죽을 맛이었겠지요.  차라리 어떻게 되건 간에 빨리 돌격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습니다.


한편, 이들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로바우 섬에 자리잡고 앉아 망원경으로 전장을 지켜보면서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전령들의 보고를 받고 있던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란의 제2 군단이 진격하고 나면 텅 비게 되는 그 자리를 채워줄 이들이 도착해야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부의 군단은 항상 쾌속 행군으로 유명했는데, 과연 아침 7시가 되자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다부의 군단이 집결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 3만에 달하는 다부의 군단이 3km가 넘는 부교와 섬을 건너 도나우 강 좌안으로 넘어오려면 최소 3시간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저 길고 좁은 위태위태한 부교를 군단 전체가 건너려면 엄청난 병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세나와 란의 병사들이 사용할 예비 탄약도 아직 강의 우안에 그대로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차에 이 포탄과 탄약 상자들을 싣고 부교를 건너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는, 다부의 군단과 예비 탄약이 강 좌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로바우 섬까지는 건너와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다부의 군단이 이제 막 도강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란에게 진격 명령을 전달한 것입니다.  3개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연결된 부교 중 특히 우안과 롭그룬트 섬 사이를 잇는 긴 부교는 이미 두어 차례 끊어진 바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추가 병력과 예비 탄약이 강을 건너지 못한 채로 공격을 시작했다가 부교가 다시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였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그냥 몇 시간만 더 기다려 병력과 탄약이 로바우 섬으로 넘어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전투 현장에서 안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의 비결 중 하나는 '적보다 반박자 빠른 행동'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을 거둘 때도, 전체 작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다부의 군단은 당일 전투 직전까지도 전투 현장을 향해 맹렬히 행군 중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다부의 도착 이후까지 전투를 미루었다면 아우스테를리츠의 완벽한 대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렝고에서도, 프리틀란트에서도,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과감히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반박자 빠른 작전에 대해 그의 적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강점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다음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폴레옹의 원대한 전략은 빌뇌브의 영국 침공 함대로 하여금 도버 해협이 아니라 먼저 대서양 너머의 카리브해로 가서 그 곳의 영국 식민지를 휘젓게 했습니다.  위 그림은 그 중 일환이었던 카리브해의 다이아몬드 암초 공략 작전입니다.  실제로 이때 당시 카리브해에서의 영국 해군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만약 빌뇌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자메이카 공략까지도 가능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저 보잘것 없는 암초 하나를 공략하고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짠 작전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국 트라팔가 해전으로 이어졌던 빌뇌브 제독의 도버 해협 제압 작전이었지요.  이 해군 작전도 오리지널 원작자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는데, 그는 바다에서의 항해는 지휘관의 의지와 병사들과의 다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따라 엄청난 변수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표를 정했지요.  그 결과, 넬슨 함대를 유인한답시고 카리브 해를 향해 대서양을 두 번이나 횡단했던 이 원대한 기만 작전은 결국 트라팔가 해전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이 도나우 강 작전에서도 나폴레옹의 의지와 그의 부하들의 다리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대서양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Schwarzwald)의 눈 녹은 물로 인해 시시각각 물결이 거세지던 도나우 강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런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부의 도강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 개시를 명했습니다.  이 결정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혀 쌍방이 서로의 움직임을 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란의 제2 군단이 상대적으로 텅 빈 중앙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를 오스트리아군도 눈치챌 것이 뻔했습니다.  벌판에 포진한 란의 제2 군단에 대해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그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집중 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공격이 더 늦어지면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대응하여 중앙부로 병력을 집중 배치할 것이고, 그럴 경우 나폴레옹의 작전 전체가 엎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는 아침 7시, 다부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란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대대로 유서 깊은 군사 가문 출신도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전투 지휘 경험은 이미 그를 유럽 제1급 야전 지휘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날 아침 공격 떄 3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좌측부터 타로(Tharreau), 클라파레드(Claparede), 그리고 생-일레르(Saint-Hilaire)의 사단을 포진시켰고, 나폴레옹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장 경험도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생-일레르 사단부터 시간 차를 두고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란의 공격선은 적 전선에 대해 평행선이 아닌, 맨 오른쪽의 생-일레르의 사단이 삐죽 튀어나온 사선 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적 전선 돌파 뒤 크게 좌로 선회하여 적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하려는 제2차 작전까지 감안한 공격 대형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격이었지요.


하지만 란이 뚫으려던 정면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알 대공이 있었습니다.  란의 묵직한 공격을 받고 막 무너져 내리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의 존재와, 그가 끌고 온 지원군의 도움을 받고 간신히 붕괴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저항으로 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란은 생-일레르 사단의 뒤를 따르던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딱 적절한 순간에 투입시켰습니다.  생-일레르 사단과의 총격전을 위해 긴 횡대로 포진했던 오스트리아군 연대들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정예 흉갑기병(cuirassiers)의 돌격에 혼비백산 했습니다.  보병대가 기병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긴 횡대가 아니라 치밀한 방진을 짜고 저항해야 했는데, 허를 찔린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흉갑기병의 갑옷과 장비입니다.  실제로는 흉갑기병이라고 해서 꼭 흉갑을 갖춰 입지는 않았고, 키가 큰 병사와 큰 말을 뽑아 흉갑기병대를 편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보병대에서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척탄병 부대를 편성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림 출처는 https://kr.pinterest.com/marnics/french-cuirassiers-napoleonic/ )



그러나 이때 다시 카알 대공이 나섰습니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연대 쪽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는 기수로부터 그 연대의 군기를 빼앗아들고 병사들의 도주를 제지했습니다.  아무리 패주하는 상황에서라도, 하늘같은 왕족 대공님이 직접 자신이 속한 연대 깃발을 들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다는 것은 당시 병사들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카알 대공의 뒤를 따라 다시 프랑스군을 향해 돌아섰고, 막 무너질 듯 하던 오스트리아 전선은 간신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란의 공격은 여전히 기세등등 했습니다.  카알 대공의 솔선수범이라는 원맨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란이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은 우르르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공격 개시 약 1시간이 지난 아침 8시 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주저하는 유리 멘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날 이 순간만큼은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솔선수범을 통해 그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만천하에 입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몇 km 떨어진 로바우 섬의 나폴레옹에게는 끊임없이 전령들이 오가며 각지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령들 중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짧은 메시지를 전하자, 나폴레옹의 눈썹이 살짝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고, 나폴레옹 주변의 참모들은 방금 나폴레옹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었는지 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전령이 전한 소식은 부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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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2.19 18:43

포병 전문가인 베르트랑 장군의 계산에 따르면 대포가 건널만 한 부교를 짓기 위해서는 20피트, 즉 약 18미터마다 한 척의 보트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자면 최소 80척의 보트가 필요했는데, 비엔나 일대를 나흘 동안 미친 듯 뒤지니 90척의 보트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부교 건설에 사용될 만한 상태인 것은 70척 뿐이었고 그나마 부교를 위해 보트를 고정시키는데 꼭 필요했던 닻은 정말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속이 탔습니다.  그는 작업 현장에 계속 참모를 파견하여 널빤지가 어쩌고 로프가 어쩌고 하는 지극히 잡다한 보고를 일일이 직접 챙기며 부교 건설을 위한 자재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충분한 수의 보트를 확보하여 5월 19일부터는 부교 건설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닻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도나우 강을 건너는데 쓰이거나 낚시질 등에 쓰이는 보트들이다 보니, 바다와는 달리 평소에 닻이 필요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임시 방편으로 어부들이 쓰는 통발에 포도탄을 재워 넣은 무게추를 닻 대신 쓰기로 했습니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부교병들이 사용하던 평저선, 즉 bateau입니다.  프랑스군이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기 위한 마지막 부교는 바로 이 오스트리아군의 평저선을 사용하여 건설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5월 18일 쇤브룬 궁을 떠나 직접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의 강변으로 갔습니다. 늦은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그는 6척의 대형 보트에 수백 명의 병사와 2문의 대포를 실어 도나우 강 속에 있는 첫번째 섬인 롭그룬트(Lobgrund) 섬에 보낼 때, 병사들에게 탄약이 분배되는 것을 직접 관리 감독하면서 거의 모든 병사 하나하나에게 일일이 격려의 말을 전할 정도로 작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저녁 6시 경에 섬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섬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부교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은 순조로운 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건너야 했던 징검다리 섬들은 정확하게는 2개가 아니라 3개였고, 30m짜리 짧은 다리까지 합하면 총 4개의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롭그룬트 섬과 로바우 섬은 불과 30m 폭의 강줄기로 갈라져 있었으므로, 그 사이의 다리는 매우 짧았습니다.  


도나우 강의 우안 

- 450m -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 225m - 

롭그룬트(Lobgrund) 섬 

- 30m - 

로바우(Lobau)섬 

- 80m - 

도나우 강 좌안  






(지도 아래 부분의 복잡한 섬 그림 중 가장 큰 것이 로바우 섬입니다.  5월 21일의 상황입니다.)



로바우 섬이 상당히 큰 섬이었으므로 좌안에서 우안까지는 총 2.5km 정도에 가까왔습니다.  프랑스군은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을 앞세워 로바우 섬을 지키던 소규모 오스트리아군을 내쫓은 뒤, 로바우 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지키는 좌안까지의 마지막 4번째를 제외한 3개의 다리를 5월 19일 밤 사이에 다 놓고, 5월 20일 새벽에 마세나의 군단을 선두로 병력을 강 좌안으로 쏟아 부을 계획이었습니다.  로바우 섬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적의 대포알이 휩쓸 수 있는 평탄한 섬에 대군을 밀집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베시에르의 기병사단들과 란의 군단은 강의 우안 저 너머에서 대기하다가 5월 20일 아침까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그에 덧붙여, 상크트-푈텐(Sankt-Poelten)에 있던 다부의 군단도 비엔나를 거쳐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달려오도록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4개의 다리는 프랑스 부교 건설대에 의해 밤을 새워가며 동시에 놓아지고 있었습니다.  슈나이더그룬트에서 롭그룬트까지의 두번째 다리는 예정대로 5월 20일 아침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지만, 정작 도나우 좌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까지의 첫번째 다리는 정오가 되어서야 완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병들이 죽을 힘을 다해 놓은 다리들은 여전히 내재된 위험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닻 대신, 포도탄으로 대충 만든 무게추를 대신 써서 고정시킨 것이다보니, 무척이나 불안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첫번쨰 다리가 완성된 5월 20일 이른 오후에 휘하 원수들과 함께 일련의 부교를 건너 로바우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오후 3시쯤 그는 몰리토르가 좌안으로 건너갈 최후의 다리를 놓을 위치를 확인한 뒤, 즉각 부교 건설을 지시했습니다.  다리는 저녁 6시까지는 완료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사이 프랑스군 병력들은 강의 우안, 즉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속속 모여 차례로 부교를 건너 롭그룬트, 이어서 로바우 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교를 건너는 병사들은 불과 하루 사이에 강물이 눈에 띄게 불어난 것과, 부교가 상당히 부실해 보인다는 점을 걱정했습니다.  기병들은 말을 타고 건너지 않고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조심스레 부교를 건너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이런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좌안으로의 최종 부교가 완성되기도 전인 오후 5시 30분 경,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온 무엇인가에 우안에서 롭스그룬트로 이어진 부교 일부가 끊어진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통나무 등의 부유물이라고도 하고, 어떤 기록에는 보트라고도 하고, 또 오스트리아군이 고의로 떠내려보낸 보트라고도 합니다만, 어찌 되었건 이 사고에서 몇 척의 보트가 하류로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부교병(pontonnier)들이 서둘러 수리를 했으나, 임시방편이었던 이 수리조차도 완료되는데 다음날인 5월 21일 새벽 3시까지 걸렸습니다.  보트 등의 자재가 부족하여 이런저런 재료를 임시방편으로 조합해야 했었고, 물살이 점점 거세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살이 거세졌던 것은 1809년 봄, 유난히 따뜻했던 날씨 때문이었습니다.  도나우 강의 수원지라고 할 수 있는 저 서쪽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검은숲)에 쌓인 눈이 평소보다 빨리 녹았던 것이지요.  도나우 강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평년처럼 6월에나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한 나폴레옹에게는 아직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와 닿지 않았겠습니다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후방에서 이런 난리가 벌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저녁 6시 경 좌안으로의 다리가 완료되어 라살(Lasalle)의 지휘 하에 경기병대가 드디어 좌안의 평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규모 정찰대였던 이들은 곧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가로 막혔고, 별 다른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좌안 교두보 바로 코 앞에 오스트리아군이 대규모 포병대를 방열하고 캐니스터탄을 쏘아대며 도하를 막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일단 그런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로바우섬을 통해 도하한다는 것을 오스트리아군이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당장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우안의 부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5월 20일 저녁부터 5월 21일 새벽까지 근 9시간 동안이나 프랑스군의 도하가 중단된 상태라서,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한다면 좌안으로 건너간 소수의 프랑스군은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비잠베르크 Bisamberg 산입니다.  이 비잠베르크는 약 350m 정도의 높이로서, 서울 인왕산 정도입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므로, 카알 대공은 이 곳에 오스트리아군을 주둔시키고 관측병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도하 지점의 좌측에 있던 작은 마을인 아스페른(Aspern)으로 마세나의 부대를 보내 점령하게 했습니다.  마세나는 밤 12시 경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었던 아스페른 교회탑에 올라가 정찰을 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의 캠프 불빛은 저 멀리 비잠베르크(Bisamberg) 산 쪽에서만 보였고, 그 아래부터 펼쳐진 마르쉐펠트의 넓은 평원 어디에도 군대의 숙영 불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평원에 오스트리아군은 없다'라고 나폴레옹에게 보고했고, 나폴레옹은 쾌재를 올렸습니다.


프랑스군이 방해도 받지 않고 도나우 좌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대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AustrianWar/bridges/c_danube.html

https://de.wikipedia.org/wiki/Bisamberg_(Berg)

https://en.wikipedia.org/wiki/Antoine_Charles_Louis_de_Lasal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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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2.12 21:47


가스코뉴의 열혈남아 장 란(Jean Lannes)에게 있어 나폴레옹을 따라 전투에 나간다는 것은 새로운 공로와 그에 따르는 영광을 얻을 좋은 기회였고, 그는 한번도 그런 기회 앞에서 머뭇거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809년 4월 19일 밤, 노이슈타트(Neustadt)의 나폴레옹 앞에 나타난 란은 몹시 의기소침하고 심란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스코뉴 출신의 유명한 남자라고 하면 달타냥이 1순위이고, 란이 2순위입니다.  몰랐는데, 달타냥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라는 역사 소설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총사대 소속의 풍운아로 유명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하네요.)




나폴레옹도 란을 보자마자 평소 보아오던 란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그는 란이 긴 포위전에도 끈질기게 버티던 스페인 사라고사(Zaragossa)를 마침내 함락시키고 난 뒤 쉴 틈도 없이 바이에른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저런 아부성 발언으로 그의 기분을 북돋아주려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지요.  


"자네 말고 비엔나로 가는 길을 누가 더 잘 알겠나 ?"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이렇게 입에 발린 아부를 늘어놓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란의 울적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폐하께서 명령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내겠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말만을 남기고 당장 다음날 새벽 전투에 나가기 위해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란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모습은 이미 앞선 포스팅에서 보신 바 있습니다.


왜 열혈남아 란이 이렇게 울적했을까요 ?  란 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일단 너무나도 처절했던 사라고사 포위전이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부관인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에 따르면 전체 사라고사 시민들이 핏대를 세우고 항전했던 그 포위전은 여태까지 란이 경험했던 이탈리아나 독일에서의 전투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사라고사의 항복 직후,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거행된 승리 축하 미사에서, 란은 우울하고 무척이나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열혈 자코뱅 답게 성직자나 귀족이라면 대놓고 무시하고 비웃던 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요.


그는 소규모의 부관들만 데리고 바이에른의 나폴레옹으로 가는 길에 고향 마을인 렉튀르(Lectoure)에도 잠깐 들렀는데, 그 작은 마을에 있는 4개의 성당을 모두 들러 큰 액수의 기부금을 냈습니다.  그 고향 마을 신부들은 악동 란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평소와는 달리 절제되고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파리 도착 몇시간 전, 굳이 도르도뉴(Dordogne)라는 별 볼일 없는 시골 마을에 들렀습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원래 그는 임지를 오갈 때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마을에서 쉬어가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예전 시리아의 생-장-다크레(Saint Jean-d'Acre)의 무너진 성벽으로 돌격하다 목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란을 (비록 발목을 잡고 거칠게 끌고 오느라 머리통에 크고 작은 혹과 멍을 많이 남기기는 했지만) 구해줬던 대위가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란은 깨어나자마자 머리통의 상처에 대해 툴툴거리면서도, 그 대위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주었었고, 그 대위는 예편한 뒤 그 돈으로 고향인 도르도뉴에 여관을 매입했던 것입니다.  이 재회는 나름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란의 부관 마르보는 회고록에 기록했습니다.





(란의 부관이자,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으로 유명한 마르보 장군입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란과 함께 하는 마차 여행은 꽤 고역스러운 것이었는데, 여행길에 잘 쉬어가지 않으면서도 부관들이 마차 안에서 뭔가 먹는 것을 엄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란은 전장에서의 용기와는 또 달리 매우 깔끔한 편이라서, 마차 안에서 누가 먹는 것을 역겹게 생각했고, 특히 젊은 부관들이 닭뼈 등을 마차 창 밖으로 던지는 행위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합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가족과 보낼 시간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전쟁터로 이동하는 몸이었고, 황제 나폴레옹이 이미 2주전에 전장으로 출발한 상태에서 도저히 양심상 오래 집에 머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바이에른으로 출발하기 전, 의전상의 이유로 황후 조세핀을 예방했는데, 평소 란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세핀조차도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냐'라고 물을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서 (란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조세핀처럼 나이 많은 과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거든요) 말을 꺼리던 란은 조세핀이 집요하게 묻자 '이번 원정에 대한 느낌이 매우 좋지 않고, 가족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지극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 대답을 했습니다.


또 파리에서 만난 어느 신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게재된 란의 '빛나는 승리'인 사라고사 함락에 대해 치하를 하며 '볼테르가 칭송할 만한, 광신자들에 대한 합리주의의 승리'라고 말을 하자, 볼테르를 단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란은 씁쓸하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던 당신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사제들... 굉장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자신의 군사 활동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의 이념을 유럽 대륙으로 전파한다는 순진한 란의 믿음을 산산조각 냈던 잔혹한 포위전의 결말, 사라고사의 항복입니다.  사라고사의 수비대와 민간인들이 굶주리고 병든 몸에 누더기를 걸친 채로도 당당하게 성문을 걸어나와 무기를 내려놓을 때, 란은 휘하 프랑스군에게 '똑바로 차렷 자세를 유지하라'라고만 했을 뿐 아무 격려사도 하지 않았고, 스페인군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고 합니다.  란은 수비대 사령관인 팔라폭스도 석방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압송해야 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또 다른 지인 하나가 '이번에도 쾌승을 거두고 빨리 돌아오시길 바란다'고 인사를 하자, 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돌아올수 있을지 잘 모르겠소.  뭐 돌아온다고 해도 금방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겠지요.  전쟁을 하는 것이 황제의 운명이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내 운명이요.  언젠가는 우리 둘 다 죽겠지요.  지금이든 나중이든.  난 그저 우리 둘 다 다시 소년이 되었으면 좋겠소."


종합해보면, 란은 이번 원정이 자신의 마지막 원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군인들이 가지는 뭔가 알 수 없는 본능에 의해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저 모험과 영광을 좇아 따르던 나폴레옹의 전쟁이 남기는 상처와 폐허를 스페인에서야 비로소 통감했고, 더 이상 그런 참극을 빚어내기가 꺼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꺼림직해서였을까요 ?  란츠후트와 레겐스부르크에서 큰 공을 세우며 잘 싸웠던 란은 비엔나 점령 이후 도나우 강 도하 작전에서 큰 실수를 하나 저지릅니다.  


빈 점령 전에 타보르(Tabor)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도나우 도강에 어려움을 겪던 나폴레옹은 부교를 놓고 도강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빈 주변에서 부교를 놓기에 적절한 위치를 찾도록 베르트랑 장군에게 명했고, 베르트랑은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를 그 지점으로 제시했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바 있지요.  


그러나 적이 지키는 강변을 도하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부교를 놓고 도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기만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포병 장교인 송기(Nicolas-Marie Songis des Courbons) 장군이 별도로 제시했던 뉘스도르프(Nussdorf)는 빈에서 상류쪽으로 몇 km 떨어진 곳이었는데, 여기에도 부교를 놓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오스트리아군의 시선을 끌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고, 주공은 어디까지나 에버스도르프 쪽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기만 작전을 란에게 맡깁니다.





(송기 장군입니다.  나폴레옹처럼 포병 장교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은 물론 이집트 원정까지 나폴레옹을 따라다녔습니다.  뉘스도르프를 도하 지점으로 선택한 것을 보면 기술적으로 정말 우수한 장교였고 나폴레옹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 출범과 함께 귀족 작위도 받았습니다.  다만, 이과 출신의 한계였는지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있고, 바로 이 사건 다음해인 1810년 병사하고 맙니다.)




이런 기만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두 다리를 거의 동시에 놓아야 했고, 나폴레옹도 란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공 방향인 에버스도르프에도 부교를 놓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뒤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부교 건설에 필요한 자재가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란이 뉘스도르프 현장에 와서 보니, 송기 장군이 이 자리를 부교를 놓을 최적지라는 것이 이해가 갔을 뿐만 아니라, 부교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뉘스도르프 건너편에는 슈바르처-라켄(Schwarze-Laken)이라는 작은 섬이 있었는데, 그 섬과 도나우 강의 좌안 사이는 무척 짧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리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안으로부터 그 섬까지는 도나우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아서, 기습적으로 섬을 점령하기만 하면 다리를 놓기도 쉬워 보였습니다.  바로 인근인 스피츠(Spitz)에는 오스트리아군 진지가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게 되면 기습 효과가 사라진다고 란은 생각했습니다.  실은 프랑스군이 이쪽으로 부교를 놓을 계획이다라고 기만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깜빡했던 모양이지요.





(뉘스도르프는 지도 왼쪽 중단에 보입니다.  중앙 하단에 보이는 로바우 섬이 실제 주공이 이루어진 방향입니다.)



란과 그 휘하의 생틸레르(Saint-Hilaire) 장군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끌어 모은 큰 보트 몇 척에 병력을 실어 슈바르처-라켄 섬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약 2개 연대 병력인 1500명을 몇차례에 걸쳐 투입했는데, 이것이 대실수였습니다.  이 섬에 있던 소규모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즉각 경보를 울리며 스피츠의 본대를 불러왔고, 큰 보트 몇 척으로 조금씩 축차 투입되던 프랑스군은 그 수비대를 즉각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다리를 통해 대거 대포까지 갖춘 대규모 지원군을 투입한 오스트리아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프랑스군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다시 보트를 이용해 병력을 빼내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엄청나서 사망자만 5백에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뿐만 아니라, 퇴로가 끊긴 수백명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참패였습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것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강변으로 달려온 나폴레옹의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어이없는 실수에 격노했고, 차마 란에게 야단을 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란의 부하인 생틸레르를 격렬하게 질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패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란은 비록 자신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분노에 움찔하여 슬금슬금 뒷걸음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발이 로프에 걸렸고, 란은 그만 그대로 뒤로 넘어져 강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비극적인 패전 속에서 벌어진 뜻하지 않은 코미디같은 상황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직접 강물 속에 뛰어들어 란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이 두 친구는 물과 진흙에 흠뻑 젖은 상태로 한동안 말없이 서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쓸데없는 경고만 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원래 5월 초 카알 대공의 주력 부대는 빈 북서쪽 훨씬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맞은 편에는 고작 1개 군단만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뉘스도르프에서 란의 어설픈 도강 시도가 참패로 끝나자 카알 대공은 나폴레옹이 빈 일대에서 도강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력을 이동시켜 나폴레옹과 도나우 강을 끼고 맞서는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라도 도강이 이루어졌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폴레옹은 아직도 에버스도르프에서 도강을 시도할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대 프랑스 제국 황제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매우 하찮은 물건, 바로 닻이었습니다. 


--계속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Marie_Songis_des_Courbons

https://en.wikipedia.org/wiki/Jean_Baptiste_Antoine_Marcellin_de_Marb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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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2.05 22:56

(ㄹ혜와 가족 여행 때문에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제5차 대불동맹전쟁 다시 시작됩니다.  짧더라도 매주 연재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에서는 1809년 5월 13일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을 다시 정복하는 모습과, 5월 17일 카알 대공이 린츠(Linz)에서 반격을 꾀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운명의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 전장을 향해 달려갑니다.


1809년 5월, 모든 상황은 나폴레옹의 최종 승리를 낙관하게 했습니다.  적국의 수도도 점령했고, 군의 보급과 사기도 매우 양호했으며, 병력도 프랑스군이 더 우세했습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앞둔 상황도 지금처럼 유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엔 물러난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저항을 준비했으나, 지금의 오스트리아군은 아무도 도와줄 동맹이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였습니다.  또 1805년 당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프로이센의 존재가 나폴레옹의 뒤를 위협하고 있었지만 지금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제국들은 나폴레옹에게 협력하고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1809년 5월 12일 뮈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내 군대가 이토록 잘 정비되고 숫자가 많았던 적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나폴레옹 휘하 독일 방면군의 준비 태세는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을 주축으로 한 오스트리아군의 반격 준비는 1805년 당시에 비해 훨씬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준비를 해놓은 군단들이 아직 대부분 건재했습니다.  그리고 타보르(Tabor) 다리가 끊긴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숨통을 틔워 주었습니다.  1805년 당시에는 11월 13일 비엔나 점령 직후 도나우 강을 건널 유일한 다리인 타보르(Tabor) 다리를 란과 뮈라가 기만작전으로 무사히 손에 넣었기 떄문에, 프랑스군은 사람과 말, 대포와 물자를 매우 손쉽게 도나우 강 좌안, 즉 동쪽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던 오스트리아군이 이번에는 다리를 파괴했기 때문에, 카알 대공과 나폴레옹 사이에는 볼가 강을 빼면 유럽 최대의 강인 도나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브렉(Breg) 강의 수원지이라고 합니다.  저는 큰 강의 시작점은 어떤 모양인지 항상 궁금했는데, 이렇게 잘 정의되고 보존되는 곳도 있긴 있네요.)






(사진 속 오른쪽 뒤에 보이는 브리가흐(Brigach) 강이 왼쪽의 브렉(Breg) 강과 합류하여 사진 아래 오른쪽의 도나우 강이 되는 지점입니다.  독일의 양수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도나우 강은 남부 독일 지방인 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에서 시작하여 바이에른(Bayern)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을 거쳐 흑해로 흘러가는 큰 강입니다.  도나우 강의 수원지는 '검은 숲'(Schwarzwald) 지대인데, 이 곳은 독일 지역 특유의 춥고 습기찬 겨울 덕분에 겨우내 많은 눈이 쌓이는 지역입니다.  봄이 되면 이 눈들이 조금씩 녹아 흘러 내리므로 도나우 강의 수위는 여름으로 갈 수록 점점 높아지는데, 이 때문에 당시 빈 지역은 많은 경우, 6월이 되면 도나우 강이 범람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내곤 했습니다.  





(눈에 덮힌 검은 숲 슈바르츠발트입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그렇게 쌓인 눈이 봄 내내 조금씩 녹아내리면서 저 아래 평원을 비옥하게 적셔 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여름에 비가 몰아서 오고 겨울이 건조한 편인 경우, 여름에 홍수가 날 뿐 봄 가뭄에 시달리기가 쉽지요.)




지리와 역사에 대한 독서량도 많았고, 또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6월이 되기 전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이 전쟁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보르 다리가 파괴된 것이 더더욱 아쉬웠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은 과거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의 저항을 앞에 두고도 포(Po) 강이나 아디제(Adige) 강을 보트를 이용해 잘도 건넜고, 또 그럴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도나우 강은 너비 80m 정도의 아디제 강과는 차원이 다른 큰 강이었고, 또 움직여야 하는 병력도 당시의 수천 명 단위가 아닌, 수만 명이었으니까요.  나폴레옹은 결코 '안 되면 되게 하라'식의 무책임한 정신력 신봉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번 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다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병대 사령관인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에게 빈 근처에서 도하에 가장 적절한 곳을 찾아 다리를 놓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베르트랑 장군입니다.  유복한 부르주와 가정 출신의 그는 일찍부터 군문에 들어가기 위해 예비 사관학교를 다니던 중 프랑스 혁명을 맞았습니다.  그는 자원병으로 군에 입대했고, 이집트 원정에 종군하면서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 대령으로, 이어서 준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엔지니어는 아니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결과적으로 훌륭한 성과를 내지는 못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을 따라 세인트 헬레나 섬까지 갔었고, 나중에 그곳에서 나폴레옹의 유해를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온 것도 그였습니다.)



베르트랑이 찾아낸 곳은 비엔나에서 하류 쪽으로 약 8km 떨어진 지점인 에베르스도르프(Ebersdorf)라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넓은 도나우 강은 두 개의 섬에 의해 3개의 물길로 갈라졌습니다.  강의 우안, 즉 에베르스도르프에서 첫번째 섬 사이를 흐르는 첫번째 강 폭은 약 450m 폭이었습니다.  두 섬 사이의 강폭은 약 225m, 그리고 두번째 섬과 강의 좌안 사이의 강 폭은 약 135m였습니다.  꽤 큰 섬이었는데, 이렇게 징검다리 삼아 건널 섬이 두 개나 있다고 해도, 여전히 도나우 강은 너무 넓고 너무 깊었습니다.  이런 곳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더군다나 적의 저항 하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도나우 강의 빈 주변 평원은 전형적인 범람원이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계속 지형이 변해왔습니다.  그림 소스 및 도나우 강 정리의 역사에 대해서는 https://seeingthewoods.org/2013/06/05/danube-floods-present-and-past-exploring-historic-precedents-through-the-arcadia-project/  참조...)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교(pontoon)이라는 대안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전쟁에서 부교가 사용된 것은 꽤 오래된 일입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때 크세륵세스도 헬레스폰트 해협에 2km가 넘는 부교를 놓고 소위 백만대군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시켰고, 나폴레옹이 건너야 하는 도나우 강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로마군이 부교를 놓고 건넌 바 있었습니다.  거의 2천년 전의 사람들이 해낸 것을 19세기 초의 문명인들이 못 해낼 리가 없다고 나폴레옹은 믿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에 새겨진 부조입니다.  도나우 강에 부교를 놓고 건너는 로마 군단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포병 출신답게, 공병 부대에도 많은 신경을 쓴 편이었습니다.  특히 전투 공병대(sapeurs) 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부교를 만드는 부대를 폰토니에르(pontonniers)라는 이름으로 별도 편성해놓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군대에는 공병대하면 요새 공략에 쓰이는 전투 공병대를 생각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에서는 오히려 전투 공병대의 활약보다는 이 부교 건설대의 활약이 훨씬 더 컸습니다.  나폴레옹의 작전 스타일이 농성하는 요새에 대한 포위전보다는 기동전을 선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강이 많았던 유럽의 지형상, 그런 기동전을 위해서는 부교 건설대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에는 부교 건설대가 무려 14개 중대나 있었고, 그들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 수준과 다양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교 건설대 1개 중대는 약 80척의 보트를 이용해 약 120~150m의 부교를 7시간 이내에 놓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뜻 밖의 횡재도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을 제외하면, 당시 유럽 군대에서 그래도 가장 부교 건설대가 잘 구비된 부대는 바로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발칸 반도 등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자주 싸워야 했기 때문에 역시 부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 후퇴할 때도 오스트리아군은 원래의 다리 옆에 부교를 추가로 놓고 강을 건넜지요.  그런 오스트리아군을 바로 직전인 4월 21일 란츠후트(Landshut)에서 격파하면서, 나폴레옹은 30문의 대포와 9천의 포로, 수천 대의 수송 마차와 함께 3개 중대 분량의 '매우 뛰어난' 부교 세트를 노획한 바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에베르스베르크 앞에 놓인 두 섬, 특히 꽤 큰 편이었던 두번째  로바우(Lobau) 섬에는 숲이 무성하여, 이곳에서 부교 건설 준비 작업을 할 때 오스트리아군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스트리아 공병부대의 유니폼입니다.  확실히 전투부대에 비해서는 무척 소박한 것이... 영광의 선두에 서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이공계의 운명이지요.)



나폴레옹은 부교에 의한 도하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5월 19일 밤, 에베르스베르크에서 부교의 건설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물론, 카알 대공도 처음에는 별로 인식하지 못했던 요소 하나가 뜻하지 않게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됩니다.  바로 1809년 봄 날씨가 평년보다 더 따뜻했다는 점입니다.  저 동쪽 하류에서 하찮은 인간들이 부질없는 싸움질을 하기 위해 부산을 떠는 동안, 도도한 도나우 강의 상류에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눈 녹은 물이 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고, 일부 강변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그 거센 물결에 실려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계속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https://seeingthewoods.org/2013/06/05/danube-floods-present-and-past-exploring-historic-precedents-through-the-arcadia-project/

https://en.wikipedia.org/wiki/Danube

https://en.wikipedia.org/wiki/Breg_(river)

https://en.wikipedia.org/wiki/Grande_Arm%C3%A9e#Engineers

https://books.google.co.kr/books?id=3yrDCwAAQBAJ&pg=PT51&lpg=PT51&dq=napoleon+pontooneers&source=bl&ots=W6Rua_ProE&sig=KzjNFQaOaSy3h2OW7zBKEA_kp_Y&hl=en&sa=X&ved=0ahUKEwjElLKI9vjRAhUCjJQKHRO-CC0Q6AEILzAF#v=onepage&q&f=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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