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6.06 12:58

피아베 전투에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막도날드 장군의 실질적인 지휘 하에 신속하게 북상하여 오스트리아 침공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행선지는 빈,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의 다시 한번 도나우 도강을 계획하고 있던 로바우 섬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나름 많았습니다.  곳곳의 고개길과 도시들을 지키는 요새들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이미 카알 대공과 요한 대공,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에 차출된 마당에 그런 요새들을 지키는 병력은 충분치 않았습니다.  가령 5월 17일 타르비스(Tarvis) 전투에서 말보르게토(Malborghetto) 요새는 방어하기 아주 좋은 고지에 위치한 튼튼한 요새였으나, 6천의 오스트리아군으로 2만의 이탈리아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5월 30일, 그라츠(Graz) 같은 도시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은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차마 도시와 그 주민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고 무저항으로 도시를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곳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쾌속 질주를 계속했습니다.  



(구글 맵에서 찾아본 피아베에서 타르비시오, 그라츠를 거쳐 노이슈타트까지 가는 길의 거리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행군 경로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마침내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와 합류한 것은 6월 4일, 빈 남쪽 50km 지점에 있는 노이슈타트(Neustadt)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라츠에서 노이슈타트까지 130km를 5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26km씩 행군한 셈이고, 이는 당시 그랑 다르메 본진의 수준에 비해서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장 빈과 로바우 섬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뒤를 쫓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곧장 카알 대공 쪽으로 가지 않고 옆 걸음질을 쳐 헝가리 쪽으로 빠졌거든요.  외젠은 강행군을 했던 자신의 군대를 노이슈타트에서 2일간 휴식 시킨 뒤, 다시 그 뒤를 계속 추격해야 했습니다.  외젠은 결국 6월 14일, 노이슈타트 동쪽 약 120km 떨어진 랍(Raab, 헝가리어로는 Győr)에서 요한 대공을 따라잡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둡니다.  패배한 요한 대공은 더 동쪽으로 후퇴한 뒤 도나우 강을 건너 카알 대공 쪽으로 향했고, 승리한 외젠도 다시 서북쪽, 즉 로바우 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외젠은 7월 5일 벌어지는 바그람 전투에 2만3천의 병력으로 참전할 수 있었으나, 요한은 고작 1만2천의 병력을 그것도 전투가 이미 끝난 뒤에나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젠이 곧장 로바우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군대는 여전히 랍 지역에서 요한 대공의 잔존 세력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랍 인근에 주둔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외젠과 막도날드가 나폴레옹의 소환 명령을 받은 것은 7월 1일이었고,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로바우 섬을 면한 도나우 강변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7월 4일 저녁 9시경이 되어서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이런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가장 큰 패착은 도나우 강을 건널 부교를 시간에 쫓겨 너무 부실하게 구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를 뽑자면 결국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 두 문제에 의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처럼 도강지점마다 다리를 한개씩 만들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끝난지 약 1주일 뒤인 6월 1일부터 시작된 이 다리 건설의 책임자는 지난 번에도 다리를 지었던 공병단 지휘관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장군이었습니다.  이는 나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데, 나폴레옹이 아스페른-에슬링 패전의 책임을 최소한 공병대 측에 떠넘기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을 패전이라고 적어도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난 번 다리가 끊어진 책임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요행을 바랐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란이 죽었을 때, 아마 모르긴 해도 베르트랑은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부교 건설의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요.  아마 스페인 세고비아(Segovia)에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 수도교보다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섬으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2개 지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롭그룬트(Lobgrund)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3개나 지었고, 롭그룬트에서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짧은 다리는 훨씬 더 많이 지었습니다.  지난번 끊어졌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아무래도 가장 긴 부분인 도나우 남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단순히 튼튼하게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지난번처럼 자연적으로 떠내려오거나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부목이나 보트 등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철저한 방비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이 부교들 상류 쪽에는 일련의 말뚝을 촘촘히 박아 넣어 일종의 부목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약 30척의 대형 보트에 소형 대포까지 장착하여 상류 쪽을 순찰했습니다.  무거운 보트를 떠내려 보내려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베르트랑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로바우에서 도나우 북안 쪽으로 이어지는 최종 다리 부분이었습니다.  로바우 섬까지는 이미 프랑스군이 확보한 지역이었으나, 도나우 북안은 오스트리아군 장악 지역이었으므로, 도강 순간에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신속하게 다리를 놓은 뒤 일제히 대군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도 지난 번 전투에서 한번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퇴로가 막히는 아찔한 상황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르트랑은 이 부분을 위해 미리 구축된 조립식 부교를 무려 4개나 준비했습니다.  그 4개의 다리 중 하나는 이음매 없이 전체가 단 하나의 통판으로 만들어진 다리로서, 결전의 날이 되면 로바우 섬 강안에 한쪽을 고정시킨 뒤, 강물에 이 다리를 띄워 보내 90도 회전시켜 도나우 북안에 철컥 이어지도록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강습용 다리였지요.  이런 준비는 6월 말일 경 완료되었고, 나폴레옹은 7월 2일자 대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자랑스럽게 '프랑스군에게 도나우 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병력 동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리 건설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취했습니다.  즉,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더라도 거의 돌다리 수준으로 튼튼한 다리를 만반의 준비를 갖춰 준비한 것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는 모든 위험 부담을 다 끌어 안았습니다.  병력 동원을 적게 했냐는 뜻이냐 하면 전혀 반대로서, 다른 전선이 지나치게 취약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이번 전투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는 서쪽, 즉 본국과의 통신로 확보를 위해 후방에 배치해놓았던 병력을 모조리 소환하여 집결시켰습니다.  가령 빈 서쪽,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는 교통의 요지로서 프랑스군이 본국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주요 후방 근거지였습니다.  여기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전에도 한번 카알 대공이 병력을 보내 공격한 바 있고, 또 아스페른-에슬링 이후에도 오스트리아군이 재공격을 고려한 바 있을 정도의 요충지였지요.  이렇게 중요한 이 곳은 베르나도트(Bernadotte)의 제9 군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 제9 군단조차 불러 들였습니다.  라구사(Ragusa) 공작으로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몽(Marmont)에게도 1만의 병력을 끌고 올라오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군 이야기는 이미 들으셨지요.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모든 조심성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린츠 같은 곳은 너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지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한창 반란이 진행 중이던 티롤의 진압을 위해 투입했던 단치히 공작 르페브르(Lefebvre)의 제7 군단, 사실상 거의 전원이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진 바이에른(Bayern) 군단을 린츠로 소환했습니다.  이 덕분에 티롤 반란의 수장 호퍼(Hoffer)와 티롤 반란군은 티롤의 수도 인스부르크(Innsbruck)를 재탈환하고 기세를 올렸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산골짝 촌놈들이 기세를 올리건 말건, 모든 상황은 바로 이 곳, 도나우 강 건너 마르히펠트(Marchfeld) 평원에서 결판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폴레옹은 6월 중순 경까지 빈 주변에 무려 24만의 병력을 끌어모았습니다.  물론 이들을 모조리 공세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이중 로바우 섬으로부터 도나우 강을 건너 공세에 나설 병력은 14만 보병에 2만8천의 기병, 그리고 488문의 대포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평생 최대의 병력 규모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준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동안,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탄탄한 기지가 없어서 궁지에 몰린 바가 있었지요.  그 기억을 되살려, 나폴레옹은 대-오스트리아 전선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 전체를 철옹성으로 중무장시키기로 합니다.  6월 말경, 부교들이 준비 완료될 즈음해서는 로바우 섬에는 무려 14개소의 포대가 구축되었고 거기에는 도나우 강 북안으로 건너갈 488문의 대포 외에도 124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설치되었습니다.  여기 뿐만 아니라 도나우 강 내에 있는 이런저런 작은 섬들에도 적절한 위치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중무장을 통해 최악의 경우에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진입로이자 퇴각로가 될 로바우 섬 근처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한 것이지요.  이 조치가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나폴레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국 큰 역할을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런 대대적인 준비를 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바우 섬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 작업을 펼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왜 카알 대공이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의 이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나우 강 북안에서 로바우 섬 대부분의 위치가 포 사정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대포를 대규모로 끌고 나와 화끈한 대포알 세례를 퍼부었다면 로바우 섬을 한폭의 지옥도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그런 방해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병력을 도나우 강 북단에서 후방 멀찍이 후퇴시켰습니다.  로바우 섬에 면한 도나우 강 북단에도 일부 진지선을 구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로바우 섬의 북쪽 강안에만 그랬을 뿐이고, 넓은 로바우 섬을 면하고 있는 다른 측면 대부분은 아무 진지 구축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적을 공격할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때라는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바로 지난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폴레옹을 그런 방법으로 패배시킨 바 있는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불가라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카알 대공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건 추정이 아니라 팩트인데, 카알 대공은 더 이상의 전투를 원치 않았고, 이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체면도 적절한 선에서 살려줘야 했고, 구태어 불필요한 도발을 걸어 확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황제 프란츠 1세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정의 대부분은 철없는 주전파였고, 카알 대공의 이런 계획은 쓸데없이 나폴레옹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또 카알 대공은 이번에도 나폴레옹이 반드시 로바우 섬 쪽에서 지난번처럼 도강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쪽 방면에서 허장성세를 일으켜 오스트리아군을 집중시킨 뒤 다른 지점에서 도하는 것에도 대비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강변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아 고착화된 진지에 대군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더 먼 후방에서 내선 기동의 우위를 유지하며 어느 쪽에서 도강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에 대부대를 유지하지 않으려 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병사들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강가는 필연적으로 습한 지역이었고, 모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는 전투에서 총이나 대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 병사들보다는 이질과 열병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카알 대공의 이런 배려는 꽤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로바우 섬의 진지 구축을 위한 병사들 외에는 대부분의 병력은 빈 인근 3일 행군 거리 내에 포진시켰을 뿐, 강변에 대군을 몇 주씩 주둔시키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카알 대공이 힘을 기울인 것은 병력 집결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된 지역인 보헤미아(체코) 지역을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owrat) 장군의 제3 군단을 소환하고, 제국 내 각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국민방위군(Landwehr, 일종의 예비군 내지는 민병대)까지 휘하로 소집했습니다.  이건 사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젖먹던 힘까지 짜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원래 30~50대의 중산층 시민들을 비상근 형태로 훈련시키고 조직시킨 뒤 어디까지나 거주 지역의 수비대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서, 이들에게 대포알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횡대-종대의 복잡한 대열 변경이나 하루 30km의 강행군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당시 카알 대공의 병력은 약 9만이었는데, 이중 2만 정도가 전사-부상-포로 및 행방불명으로 상실되었으므로 7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3군단 약 1만8천과 국민방위군 등을 끌어모아 약 13만7천, 414문의 대포를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이럴 때 두 동생이 거느린 5만의 병력이었습니다.  개전 초기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뜻하지 않게 완강히 저항하는 폴란드인들 때문에 별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폴란드에서 밀려나 오스트리아령 갈리시아(Galici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3만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마르히펠트에 나타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폴란드라는 벌집을 잘못 건드린 탓에, 바르샤바 공국의 포니아토프스키 왕자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오히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침범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별로 적극적인 공격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동맹국인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국경 인근에 대기 중이었으므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곳을 텅 비워두고 마르히펠트로 내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Inner army of Austria)였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던 이 군대는 원래부터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피아베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군세가 더 축소되었고, 결정적으로 요한 대공이 뭔 생각에서였는지 이 군대를 구성하는 2개 군단 중 하나를 그 군단의 본거지인 류블랴나(오늘날의 슬로베니아)로 되돌려 보내는 바람에 2만 정도로 크게 축소된 상태로 헝가리로 되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저 먼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Dalmatia)의 마르몽에게도 '1만명이라도 좋으니 다 끌고 올라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온갖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고 있는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결코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이랍시고 군단 하나를 그쪽으로 떼놓고 온 것은 정말 아쉬운 행동이었습니다.  어차피 류블랴나를 위협할 프랑스군은 외젠의 이탈리아군과 마르몽의 달마시아군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폴레옹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나마 요한 대공의 잔존 2만 병력이라도 무척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요한 대공은 결국 형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군이 바그람에서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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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3.26 21:14

5월 22일 오전 8시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의 안색은 상당히 침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영웅다운 침착함이다 아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을 못한 것이다 등등 말이 많습니다만, Harold Parker의 'Three Napoleonic Battles'라는 책의 주석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날 부교는 한번이 아니라 두번 끊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7시에 작은 규모로 끊어졌고 이는 곧 수리될 수 있었으나, 곧 이어 9시에는 도저히 그날 중으로는 수리가 안 될 지경으로 크게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전 8시 경 나폴레옹이 받은 보고는 그 첫번째의 대수롭지 않은 파손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책과 인터넷 사이트마다 몇 시 경에 다리가 끊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각기 다른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도 제각기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교, 정확하게는 프랑스군의 도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도나우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을 연결하는 긴 부교가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교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그다지 튼튼한 물건이 아닌데다, 든든한 부교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품, 즉 닻이 없는 상황에서 포도탄과 어부들의 통발로 대충 만든 대용품으로 건설한 부교이다보니, 그냥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슈바르츠발트에서 예년보다 일찍 눈이 녹으면서 평소라면 6월에나 있을 도나우 강의 범람이 일찍 시작되어 물결이 무척 거셌고, 또 뿌리 뽑힌 나무나 나무가지 더미 같은 잡동사니들도 많이 떠내려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닻이라는 물건은 자동차에서 브레이크처럼 중요한 물건입니다.  특히 부교처럼 항해보다는 정박이 중요한 임무인 보트에게 있어서, 닻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품이었습니다.  잔잔한 물결에서는 어부의 통발에 쇳덩이를 대충 쟁여 넣은 것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센 물결에서는 튼튼한 닻이 꼭 필요했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부교가 끊어진 것은 카알 대공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말려든 결과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적이 절반 정도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이 양분된 상태에서 각개격파하는 것은 모든 지휘관이 꿈꾸는 일인데, 강이 그렇게 적을 양분해주니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적이 부교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는 경우 그 부교를 끊어놓는다면 이미 강을 건넌 적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카알 대공이 일부러 도나우 강 좌안을 비워둔 뒤, 미리 준비해둔 통나무나 무거운 돌을 실은 보트들을 급류에 떠내려 보내서 부교를 파괴했다는 것이 무척 그럴싸한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5월 22일 운명의 아침에 부교가 크게 부서진 것은 확실히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떠내려보낸 대형 보트 때문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보트에 큼직한 물레방아를 통째로 실은 보트 하나가 급류에 떠내려 와 프랑스군의 부교를 들이 받았고, 이로 인해 부교를 구성하던 여러 척의 바지선이 떠내려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카알 대공의 작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부교를 끊어서 다부의 제3 군단이 도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카알 대공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 달갑지 않은 전쟁은 카알 대공이 애써 키워놓은 군단들을 재정 문제로 인해 해체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국 땅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불리한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에서 바라는 바는 나폴레옹과 건곤일척 후회없는 일전을 벌여 망하든 흥하든 추가적인 전투가 없도록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교가 끊어져 다부의 제3 군단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나폴레옹은 패배한다고 해도 부교 핑계를 대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다시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희생을 동반하는 제2, 제3의 전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강변을 텅 비워놓았던 것은 뭔가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폴레옹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안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설령 오스트리아군이 의도적으로 보트를 떠밀어 보냈다고 해도, 많은 섬이 얽혀 여러 개의 지류로 나누어지는 넓은 도나우강에서, 그것도 우안이 아니라 좌안에서 떠내려보낸 보트가 주변 섬 모래톱에 좌초하지 않고 정확하게 카이저에버스도르프와 롭그룬트 섬 사이의 지류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부교를 끊는 것에 전체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보트 한두 척만 떠내려 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당한 크기의 대형 보트를 대규모로 떠내려 보냈을텐데, 프랑스군의 기록에도 오스트리아군의 기록에도 그런 대형 보트의 대규모 함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상류에 있던 일부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부교를 보고 즉흥적으로 떠내려보낸 보트 몇 척 중 하나가 럭키 스트라이크를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좌안에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우안에서 보트 한 두척을 떠내려 보내면서 그것이 정확하게 로바우섬 서쪽 지류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요행수를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말이 있지요.  1931년에 발행된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라는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통계치에서 비롯된 이 법칙은, 산업 현장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생기는 큰 사고가 하나 생길 때, 평균적으로 300여건의 부상자없는 작은 사고와 29건의 작은 부상만 따르는 작은 사고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뭔가 작은 부주의와 소홀함이 쌓이고 쌓여 큰 재난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법칙이 1809년 5월 22일 아침의 부교 붕괴 사건에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부교를 하나만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놓았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빈의 대장간에서 닻 수십개를 두들겨 만들었더라면, 여러 가닥의 긴 밧줄이나 목책 구조물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방어물을 부교의 상류 쪽에 설치했더라면, 아니, 아예 다부가 로바우 섬으로 건너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했더라면, 이 날 프랑스군의 참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날의 비극은 날씨, 혹은 물결로 인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결국 나폴레옹의 안이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필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입니다.  인명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부교가 끊어진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작전 때문이든 도나우 강의 급류에 떠내려 온 통나무 때문이든,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접한 나폴레옹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의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겠다는 백업 플랜 따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그는 전령 둘을 불렀습니다.  한 명에게는 즉시 강변으로 나가 책임 공병 장교에게 부교 수리에 얼마나 걸릴지 알아보라고 했고, 나머지 하나에게는 란 원수에게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전령이 도착했을 때 란의 상황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일레르 사단을 앞세워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었는데, 카알 대공의 지원 부대가 나타나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난데 없이 나폴레옹의 전령이 나타나 다짜고짜 더 공격하지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 이건 지키기 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대포알이 채찍질처럼 날아드는 허허벌판에서 현 위치를 고수하라니요 !


설상가상이라고, 란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 보병 사단이 무너지자, 카알 대공은 전술을 바꾸어 포병을 전면에 내세워 무차별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멈추려 했습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 전력은 프랑스군을 4배 정도로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란 휘하 사단장 중 가장 용맹했던 아우스테를리츠의 영웅 생-일레르 장군도 발목에 적 포탄을 직격 당하고 로바우 섬의 야전 병원으로 실려간 뒤였습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연상이었던 생-일레르의 full name은 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으로서, 기병 대위였던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후보생으로 군에 들어갔었고, 혁명 이후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승진을 할 정도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29세의 나이에 이미 장군이었던 그는 1795년 북부 이탈리아의 로아노 전투에서 손가락 두개를 잃을 정도로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용기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발목을 잃은 그는 결국 괴저로 인해 15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어정쩡한 명령을 내린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교가 끊겼다면 다부의 지원 병력은 고사하고 탄약 부족으로 인해 마세나와 란은 당장 철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세나와 란의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즉각 로바우 섬으로 후퇴를 명령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위태위태했던 다리는 급류니 통나무니 하는 것들로 인해 여러번 끊겼었고, 그때마다 몇 시간 만에 수리가 된 바 있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한두 시간 안에 수리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대로 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부교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한 공병 장교가 처음부터 '매우 심한 손상으로 인해 수리에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릴 듯'이라고 명쾌한 보고를 했다면 이렇게 상황 파악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하들은 상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자세히 보고하는 것을 꺼리기는 하지요.  덕분에 란과 그의 부하들은 1시간 동안 허허벌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격 연습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은 카알 대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프랑스군의 공격이 멈춰진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어쨌거나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반격을 위해 보병 사단들을 재규합했습니다.  또한 그는 포병을 내세운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하고는 보병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포병대를 더 전진시켜 프랑스군에게 집중 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당시 포병대는 1발 발사하는데 2~3분이 걸릴 정도로 발사 속도도 느렸고, 또 그렇게 애써서 쏜 포탄도 불꽃과 함께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폭발탄이 아니라 그냥 쇳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밀집 보병 대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날 중으로 부교 수리 불가능'이라는 현실적인 보고가 날아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철수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로바우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은, 도나우 남단의 이미 끊어진 부교보다 많이 짧긴 하지만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엉성한 부교 하나 뿐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과 란의 제2 군단 중 살아남은 병력 전체, 거의 4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이 다리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퇴하는 그들의 등 뒤로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의 오스트리아군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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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3.19 21:24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에슬링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느슨했는데, 그 두 마을 사이의 중앙 평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중앙을 돌파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항상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던 란이 다시 한번 그 중앙부를 돌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난 뒤, 란은 크게 좌향좌를 하여 오스트리아 주력인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3개 군단을 측면으로부터 돌돌 말아올릴 예정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란이 이끌고 돌격할 제2 군단이 강을 무사히 건너야 했는데, 새벽 3시가 되어 그 도강이 완료되었습니다.  즉, 작전 실행 준비가 끝난 셈이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머리 속에 그려지던 5월 22일, 둘째날 전투의 전개도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다부의 제3군단은 로바우 섬은 커녕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란이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릴 때, 란의 측면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가 역으로 들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즉, 이미 전날 밤 9시에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제3 군단을 도나우 강 우안의 부교 시작점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소환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밤새 행군하면 아침 나절에 거기에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도강시켜 란이 자리를 비운 중앙 지점으로 밀고 나가면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부의 군단은 란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과하여 란과는 반대 방향인 우향우를 한 뒤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의 옆구리를 들이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의 핵심인 란의 김밥말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힐러, 벨가르드, 호헨촐레른의 군단들을 잘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뒤엉켜 있던 마세나의 제4 군단이 그들을 먼저 평원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 11시까지 아스페른을 손에 넣으려는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이다, 골목 하나를 경계로 지쳐 쓰러져 잠든 마세나의 병사들은 불과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다시 부사관들의 재촉을 받으며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 4시, 마세나의 병사들이 아스페른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두번째 날이 시작된 것이지요.  잠을 자다 기습을 당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는데, 그래도 아침 7시 경에는 결국 아스페른 마을 대부분에서 프랑스군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한편, 마침 자욱하게 안개까지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은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평원에 있는 밭두렁 뒤로 조용히 행군하여 포진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아스페른으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곧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전면 평원에 자리를 잡은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안개와 어둠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평원을 휩쓰는 포격을 개시한 것입니다.  란의 병사들은 밭두렁 뒤에 납작 엎드려 있긴 했습니다만, 점점 날이 밝아오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가려주던 안개마저 아침 7시가 되자 걷히기 시작하면서 슬슬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벌써 3시간 째 적의 포격에 노출된 채로 밤이슬을 맞으며 나폴레옹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자니 죽을 맛이었겠지요.  차라리 어떻게 되건 간에 빨리 돌격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습니다.


한편, 이들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로바우 섬에 자리잡고 앉아 망원경으로 전장을 지켜보면서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전령들의 보고를 받고 있던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란의 제2 군단이 진격하고 나면 텅 비게 되는 그 자리를 채워줄 이들이 도착해야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부의 군단은 항상 쾌속 행군으로 유명했는데, 과연 아침 7시가 되자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다부의 군단이 집결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 3만에 달하는 다부의 군단이 3km가 넘는 부교와 섬을 건너 도나우 강 좌안으로 넘어오려면 최소 3시간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저 길고 좁은 위태위태한 부교를 군단 전체가 건너려면 엄청난 병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세나와 란의 병사들이 사용할 예비 탄약도 아직 강의 우안에 그대로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차에 이 포탄과 탄약 상자들을 싣고 부교를 건너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는, 다부의 군단과 예비 탄약이 강 좌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로바우 섬까지는 건너와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다부의 군단이 이제 막 도강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란에게 진격 명령을 전달한 것입니다.  3개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연결된 부교 중 특히 우안과 롭그룬트 섬 사이를 잇는 긴 부교는 이미 두어 차례 끊어진 바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추가 병력과 예비 탄약이 강을 건너지 못한 채로 공격을 시작했다가 부교가 다시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였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그냥 몇 시간만 더 기다려 병력과 탄약이 로바우 섬으로 넘어온 다음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전투 현장에서 안전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의 비결 중 하나는 '적보다 반박자 빠른 행동'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을 거둘 때도, 전체 작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다부의 군단은 당일 전투 직전까지도 전투 현장을 향해 맹렬히 행군 중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다부의 도착 이후까지 전투를 미루었다면 아우스테를리츠의 완벽한 대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렝고에서도, 프리틀란트에서도,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과감히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반박자 빠른 작전에 대해 그의 적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강점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다음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폴레옹의 원대한 전략은 빌뇌브의 영국 침공 함대로 하여금 도버 해협이 아니라 먼저 대서양 너머의 카리브해로 가서 그 곳의 영국 식민지를 휘젓게 했습니다.  위 그림은 그 중 일환이었던 카리브해의 다이아몬드 암초 공략 작전입니다.  실제로 이때 당시 카리브해에서의 영국 해군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만약 빌뇌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자메이카 공략까지도 가능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저 보잘것 없는 암초 하나를 공략하고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짠 작전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국 트라팔가 해전으로 이어졌던 빌뇌브 제독의 도버 해협 제압 작전이었지요.  이 해군 작전도 오리지널 원작자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는데, 그는 바다에서의 항해는 지휘관의 의지와 병사들과의 다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따라 엄청난 변수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표를 정했지요.  그 결과, 넬슨 함대를 유인한답시고 카리브 해를 향해 대서양을 두 번이나 횡단했던 이 원대한 기만 작전은 결국 트라팔가 해전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이 도나우 강 작전에서도 나폴레옹의 의지와 그의 부하들의 다리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대서양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Schwarzwald)의 눈 녹은 물로 인해 시시각각 물결이 거세지던 도나우 강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런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부의 도강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 개시를 명했습니다.  이 결정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혀 쌍방이 서로의 움직임을 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란의 제2 군단이 상대적으로 텅 빈 중앙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를 오스트리아군도 눈치챌 것이 뻔했습니다.  벌판에 포진한 란의 제2 군단에 대해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그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집중 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공격이 더 늦어지면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대응하여 중앙부로 병력을 집중 배치할 것이고, 그럴 경우 나폴레옹의 작전 전체가 엎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는 아침 7시, 다부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란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대대로 유서 깊은 군사 가문 출신도 아니었지만, 다년간의 전투 지휘 경험은 이미 그를 유럽 제1급 야전 지휘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날 아침 공격 떄 3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좌측부터 타로(Tharreau), 클라파레드(Claparede), 그리고 생-일레르(Saint-Hilaire)의 사단을 포진시켰고, 나폴레옹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장 경험도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생-일레르 사단부터 시간 차를 두고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란의 공격선은 적 전선에 대해 평행선이 아닌, 맨 오른쪽의 생-일레르의 사단이 삐죽 튀어나온 사선 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적 전선 돌파 뒤 크게 좌로 선회하여 적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하려는 제2차 작전까지 감안한 공격 대형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격이었지요.


하지만 란이 뚫으려던 정면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알 대공이 있었습니다.  란의 묵직한 공격을 받고 막 무너져 내리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의 존재와, 그가 끌고 온 지원군의 도움을 받고 간신히 붕괴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저항으로 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란은 생-일레르 사단의 뒤를 따르던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딱 적절한 순간에 투입시켰습니다.  생-일레르 사단과의 총격전을 위해 긴 횡대로 포진했던 오스트리아군 연대들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정예 흉갑기병(cuirassiers)의 돌격에 혼비백산 했습니다.  보병대가 기병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긴 횡대가 아니라 치밀한 방진을 짜고 저항해야 했는데, 허를 찔린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흉갑기병의 갑옷과 장비입니다.  실제로는 흉갑기병이라고 해서 꼭 흉갑을 갖춰 입지는 않았고, 키가 큰 병사와 큰 말을 뽑아 흉갑기병대를 편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보병대에서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척탄병 부대를 편성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림 출처는 https://kr.pinterest.com/marnics/french-cuirassiers-napoleonic/ )



그러나 이때 다시 카알 대공이 나섰습니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연대 쪽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는 기수로부터 그 연대의 군기를 빼앗아들고 병사들의 도주를 제지했습니다.  아무리 패주하는 상황에서라도, 하늘같은 왕족 대공님이 직접 자신이 속한 연대 깃발을 들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다는 것은 당시 병사들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카알 대공의 뒤를 따라 다시 프랑스군을 향해 돌아섰고, 막 무너질 듯 하던 오스트리아 전선은 간신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란의 공격은 여전히 기세등등 했습니다.  카알 대공의 솔선수범이라는 원맨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란이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은 우르르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공격 개시 약 1시간이 지난 아침 8시 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주저하는 유리 멘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날 이 순간만큼은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솔선수범을 통해 그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만천하에 입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몇 km 떨어진 로바우 섬의 나폴레옹에게는 끊임없이 전령들이 오가며 각지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령들 중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짧은 메시지를 전하자, 나폴레옹의 눈썹이 살짝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고, 나폴레옹 주변의 참모들은 방금 나폴레옹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었는지 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전령이 전한 소식은 부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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