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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가우3

바우첸을 향하여 (1) - 나폴레옹의 꽃놀이패 아무리 잘 싸운 뒤에 수행된 전략적 후퇴이고 아무리 추격자가 없다고 해도, 후퇴하는 군대의 사기가 드높다면 매우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뤼첸 전투로부터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던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 싸운 뒤에 하는 후퇴라서 두 나라 군대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잘 싸웠는데 왜 후퇴를 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 남탓을 하기 마련입니다. 보통은 사회의 소수 약자가 그런 비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유태인 탓을 했고 1812년 후퇴하던 러시아군에서는 러시아군 내의 발트 연안 독일계 장교들 탓을 했지요. 이 경우에는 비난 대상을 찾는 것이 아주.. 2022. 12. 12.
누가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히나 - 손무의 일화 비트겐슈타인의 작전안은 매우 뛰어난 분석과 예측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 핵심은 현재까지 포착된 프랑스군의 이동 및 집결 상황으로 볼 때, 나폴레옹의 의도는 라이프치히를 거쳐 토르가우(Torgau)로 진격하여 그 곳의 포위를 푸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려 할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보았습니다.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갈지 연합군의 근거지인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로 갈지는 사실 당시 나폴레옹도 결심을 굳히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의 진격 방향이 라이프치히라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1650년 경의 토르가우의 전경입니다. 엘베 강변의 주요 요새도시 중 하나로서, 그 앞의 다리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여기를 장악하면 엘.. 2022. 8. 22.
끊어진 다리, 흔들리는 동맹 -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의미 이미 베를린이 비트겐슈타인 휘하의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고 드레스덴도 곧 빈칭게로더 손에 들어갈 것이 명약관화했던 3월 중순 즈음, 외젠에게는 6만이 채 안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다부 지휘 하에 드레스덴에 있던 7천5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단들 중에서도 언제나 병력 3만 이상의 특별히 강력한 군단만을 거느리던 다부가 1개 사단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만을 이끌고 있던 것은 당시 약화된 그랑다르메의 신세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다부는 특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레이니에(Reynier) 장군이 러시아군에 쫓겨 드레스덴에서 철수하는 것은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에크뮐 대공(prince d'Eckmühl, 즉 다부)이 그런 모욕.. 2022.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