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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레이2

대영제국의 그림자 - 1813년 영국의 군수품 지원 프랑스는 애초에 땅도 넓고 산업 기반이 탄탄해서 새로 30만 대군을 무장시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만,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와 인구가 반토막 나기 이전에도 산업 기반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프로이센은 10만군을 무장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할 때도, 프로이센군이 가지고 있던 머스켓 소총은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 사용되던 것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런 낡은 소총은 격발시 가끔씩 폭발 사고를 일으켰으므로, 당시 프로이센 군에서는 '사격 훈련시에는 화약을 정량대로 다 채우지 말고 조금 덜 넣을 것'을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군수품 문제는 물론 프로이센 개혁파의 주요 관심사였고, 이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으로 생산된 1.. 2022. 5. 23.
1810년 포르투갈 침공의 서막 - 봉쇄와 결투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 2018.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