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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나7

뮈라, 모래, 그리고 금화 - 빌나에서의 후퇴 모든 군사 작전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이 후퇴입니다. 빵집 솜씨는 바게뜨를, 중국집 솜씨는 짜장면을 맛보면 알 수 있듯이, 지휘관의 역량은 후퇴 작전을 시켜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든 스몰렌스크에서든 철수할 때마다 어느 부대가 앞장 서서 후퇴를 시작하고, 첫 부대가 다 떠난 뒤 간격을 얼마나 두고 두번 째 부대가 후퇴를 시작하는지 등등에 대해 꼼꼼한 명령서를 베르티에를 통해 발부했습니다. 그러나 남아대장부 뮈라는 달랐습니다. 그는 베르티에 따위는 찾지도 않고 그냥 '전군, 코브노로 후퇴'라는 짧고 간결한 명령만 날린 뒤,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앞장 서서 후퇴에 나섰습니다. 덕분에 빌나에서 철수한다는 명령은 매우 아마추어스럽게 전달되었습니.. 2021. 12. 13.
12월 6일의 비극 -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다 나폴레옹과 그랑다르메가 베레지나에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약 250km, 그러니까 6~7일 정도 행군거리에 있던 빌나는 꽤 평온했습니다. 빌나에 있던 마레와 호겐도르프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병력과 보급품과 말을 보내라는 독촉을 계속 받고 있었지만 그거야 나폴레옹이 떠난 이후 계속 된 것이었고, 그들은 나폴레옹이 적절한 겨울 숙영지를 찾아 약간 후퇴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로 나빠졌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기념일인 12월 2일에는 성대한 만찬과 함께 무도회도 열렸습니다. 베레지나에서 간신히 강을 건넌 나폴레옹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의 편지를 들고 온 아브라모비츠(Abramowicz)라는 빌나 거주 폴란드 귀족이 마레를 찾아온 것도.. 2021. 11. 29.
떠나는 자와 남는 자 - 빌나 앞에서 나폴레옹이 12월 5일 스모르곤(Smarhonʹ 또는 Smorgon)에 도착하여 어떤 농가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그를 찾아 서쪽에서 온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동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의 주지사로서 빌나에서 각종 행정 업무를 보고 있던 호겐도르프(Dirk van Hogendorp)였습니다. 호겐도르프는 나폴레옹이 빌나의 마레(Maret)에게 주문했던 사항, 즉 10만 병력이 3달간 먹을 식량과 5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머스켓 소총과 탄약, 군복, 군화, 기타 장비류는 물론, 많지는 않지만 보충용 군마들도 준비되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더 반가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호겐도르프는 독일에서 새로 편성된 2개 사단이 막 빌나에 도착했는데, 이들을 빌나 외곽에 부채 모양으로 전개.. 2021. 11. 22.
러시아군의 사정 - '똑게' 쿠투조프 나폴레옹은 강추위에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군대를 보며 무척이나 화를 냈습니다. 그는 나름 잘 싸웠던 빅토르에게도 '형편없는 소극적 태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며 화를 냈고 자신이 무관심과 혹사로 기병대를 날려먹어 놓고서는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에도 코삭 기병이 있던데 왜 그들을 대규모로 미리 준비해놓지 않았는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당연히 자신을 배신하고 혼자서 도망친 슈바르첸베르크 대공과 그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그리고 강추위에 대해서도 화를 냈습니다. 보통 남탓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는 '그러니까 내 잘못은 아니야'라고 강조하는 것인데, 이 점에 있어서 쿠투조프는 나폴레옹급의 인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부러 저런다는 티가 날 정도로 천천히, 정말 천천히 추격해오느라 나폴레옹의 뒤꿈치.. 2021. 11. 15.
빌나를 향하여 - 나폴레옹의 잔머리 베레지나를 빠져나온 나폴레옹은 이제 어디로 향했을까요? 애초에 보리소프의 불타버린 다리 앞에 갈 때까지도 나폴레옹의 다음 행선지는 민스크였습니다. 여기는 좀더 많은 보급품이 쌓여 있었고 폴란드보다는 러시아에 좀더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정치적으로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민스크가 이미 치차고프의 손아귀에 있다고 하더라도, 싸워서 빼앗으면 되니까요. 이 행선지는 대부분의 정규군이 베레지나의 다리를 건넌 뒤인 11월 28일 밤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1월 28일 베레지나 서쪽 강변에서 치차고프의 선봉과 전투를 치루어본 결과, 나폴레옹은 이제 그랑다르메가 도저히 치차고프의 본대를 꺾을 힘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우디노와 네가 비록 치차고프에게 패배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2021. 10. 25.
Go back ! Go back ! - 모스크바 철수 계획 (1) 흩날리는 첫눈을 보며 갑자기 정신을 차린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두르자. 20일 안에 겨울 숙영지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겨울 숙영지라니, 그게 어디였을까요? 파리와의 연락망을 유지할 수 없는 모스크바가 겨울 숙영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 이전, 나폴레옹이 생각하던 겨울 숙영지는 크게 3곳이었습니다. 스몰렌스크, 빌나, 그리고 민스크였습니다. 그 중 스몰렌스크는 벨로루시(백러시아)와 러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러시아 본토의 관문으로서, 아직 여기에는 겨울 숙영을 위한 물자 비축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만, 모스크바에서 불과 12일 정도만 행군하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위치였습니다. 그에 비해 빌나와 민스크는 사실상 원정 출발점에 해당하는 지점으로서, 스몰렌스크부터 다시.. 2021. 4. 5.
잘못된 시작 - 빌나(Vilna)에서의 프랑스군 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 2019.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