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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에르6

뤼첸 전투 하루 전 상황 - 나폴레옹, 퍽치기 위기 일발 나폴레옹은 4월 24일 마인츠를 떠나 약 250km의 길을 밤에도 쉬지 않고 마차로 달려 그 다음 날인 25일 저녁 9시에 에르푸르트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집결한 근위대와 합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동쪽 약 20km 지점에 있는 바이마르(Weimar) 주변에는 4만5천의 막강 병력을 자랑하는 네 원수의 제3 군단이 포진해 있었고, 에르푸르트 남동쪽 약 50km 지점의 잘펠트(Saalfeld) 일대에는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의 1만8천에 달하는 제4 군단이 있었습니다. 2만4천이 배속된 우디노의 제12 군단도 에르푸르트 남쪽 90km 지점인 코부르크(Coburg)에 주둔했고, 역시 2만4천인 마르몽의 제6 군단은 에르푸르트 서쪽 약 25km 지점인 고타(Gotha)에 도착해 .. 2022. 8. 29.
보로디노 전투 (12) - 허무한 결말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을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3시간은 러시아군에게는 정말 소중한 재정비 기회였습니다. 쿠투조프는 여전히 고르키 마을에서 참모들과 노닥거리고 있었지만 바클레이는 러시아 방어선 우익에 포진되어 있던 병력을 대거 중앙과 좌익 쪽으로 옮겨 허물어진 방어선을 재구성했습니다. 특히 러시아군의 맹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이 라에프스키 보루 앞에 정렬했으므로 그 쪽으로 강력한 공격이 가해질 것이 뻔했으므로, 라에프스키 보루의 양 옆에도 보병들을 포진시켰고, 보루 뒤 800m 후방에는 보병과 포병으로 제2 방어선도 든든히 구축해놓았습니다. 콜랭쿠르가 목숨을 버려가며 점령한 라에프스키 보루는 그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트 페체르부르그 카잔 성당 인근에 있는 바클레이의 동상입니다. 분명히 그.. 2020. 10. 12.
바그람 전투 (제11편) - 기병대의 궤멸 기세 좋게 달려들어간 낭수티의 제1 중기병사단이 첫번째로 맞이한 난관은 그 지대가 너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달리는데는 평평한 것이 좋지 않냐고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있는 평원이 기병 돌격에는 더 좋았습니다. 여기 아더클라 앞마당처럼 너무 평평하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시선과 대포에 노출되면 기병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동안,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square)을 구성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기병에 대항하여 보병 방진을 구성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1788년의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때의 모습입니다. 머스켓 소총과 함께 총검이 개발되고 대포의 기동성이 향상되면서부터는,.. 2017. 8. 20.
바그람 전투 (제10편) - 초심을 지키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모처럼 맞은 절호의 기회를 지휘부의 처절한 무능함 속에서 날려버리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머리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이미 끝났다고들 말했지만, 그의 클래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가 주저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텐데도, 그는 이런 위기 속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후방으로 침입한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를 막기 위해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등 허둥거렸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병력이 아주 많았습니다. 최우익의 다부 외에도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과 근위대 등 어제 밤에 장전해둔 탄약이 머스켓 약실에 그대로 들어 있는 병력이 대부분이.. 2017. 8. 15.
아스페른-에슬링 6편 - 격돌 5월 21일 오전,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2개 마을에 포진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8만4천의 보병과 1만4천이 넘는 기병, 그리고 무려 292문의 대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고작 2만2천의 보병과 3천이 채 안되는 기병, 그리고 고작 52문의 대포를 도나우 강 좌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오스트리아군은 그러나 다소 어정쩡한 진형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즉, 힐러(Hiller)와 벨가르드(Bellegarde), 그리고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이 각각 이끄는 3개 군단이 북쪽으로부터 아스페른을 향했고, 에슬링으로는 데도비히(Dedovich)가 대리 지휘하는 로젠베르크(Rosenberg)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본인은 본.. 2017. 3. 12.
아스페른-에슬링 5편 - 한밤의 멱살잡이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도나우 강 좌안에 발을 내딛은 5월 20일 밤,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저항이 있을까 두려워하던 프랑스 지휘관들은 의외로 조용한 주변의 동정에 다소 놀랐고, 일단 안심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기병대를 이끌고 주변을 한바퀴 돌았던 베시에르는 주변에 적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란은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아마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후위대로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밤중에 아스페른 교회 종탑까지 직접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적의 존재는 감지할 수가 없었던 마세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머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위급 지휘관 3명의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므로, 이들은 21일 새벽 2시 일단 로바우 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이 거.. 2017.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