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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51

동장군을 만난 사람들 - 빌나로의 후퇴 (상) 러시아의 동장군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진격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던 최대 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1월 초까지도 나폴레옹이 그런 우려에 대해 '모두가 과장된 헛소문'이라며 비웃을 정도로 러시아의 날씨는 온화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은 러시아의 눈이 아니라 진흙이었습니다. 형편없는 도로 때문에 수송에 애를 먹었고 덕분에 보급이 안 되어 그랑다르메는 패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동장군에게 패배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아돌아온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의 끔찍한 추위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강추위는 그랑다르메가 베레지나를 건넌 다음에 시작되었습니다. (유명한 미나르(Charles Joseph Min.. 2021. 11. 1.
다리는 불타고 있는가? - 베레지나의 여인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을 막아내느라,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스투지엔카의 임시 교량 쪽을 일대를 살펴볼 수 있었던 빅토르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낙오병들과 피난민들이 아직도 다리를 건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도 서둘러 다리를 건너기보다는, 이제 어둠이 내려앉은 강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모닥불을 피우는 등 밤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9군단이 친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오전 일찍부터 그저 원거리에서 포격만 해대던 러시아군에 대해 방어 측이던 그랑다르메가 오히려 공격을 감행했던 것은 오로지 낙오병들과 피난민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희생을 치루면서 종일 고생했건만, 낙오병과 피난민들은 무엇.. 2021. 10. 11.
베레지나의 동쪽 - 비극과 투지 빅토르의 제9군단은 비교적 최근에 편성되어 보로디노 전투 이후인 9월 초에야 네만 강을 건넜던 약 3만 규모의 군단으로서, 대부분 바덴(Baden), 헤센(Hessen), 작센(Sachsen) 등 독일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일부 폴란드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도 물론 척박한 러시아 땅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베레지나 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1만2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추격을 뿌리치고 스투지엔카 외곽으로 달려온 빅토르 휘하엔 불과 8천명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4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들은 파르투노(Louis Partouneaux) 장군 휘하의 1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일종의 미끼로서 며칠 전부터 보리소프의.. 2021. 10. 4.
베레지나의 동과 서 - 러시아군의 등장 베레지나 강 위에 놓인 2개의 다리는 결코 근대 공학의 금자탑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단시간에 날림으로 만든 것이라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가끔씩 일부 구간이 무너져 끊어지기도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일부 구간은 축 늘어져서 상판이 강물에 약간 잠긴, 부분 잠수교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위태위태한 다리가 유일한 퇴각로라면 서로 먼저 가겠다고 난리가 날 것 같지만 26일 밤 ~ 27일 저녁까지 베레지나 양안은 매우 평온했고 질서정연한 도강이 이루어졌습니다. 간헐적으로 다리 일부 구간이 무너지거나 엉성한 상판 통나무 사이에 말 다리가 끼어 부러지는 등의 사고가 발생하여 교통 체증도 일어났는데도 그랬습니다. 이런 질서는 나폴레옹의 존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욕을 먹.. 2021. 9. 27.
네덜란드의 희생과 헌신 - 베레지나 강의 다리 이른 아침 베레지나 서쪽 강변에서 러시아군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지마자, 나폴레옹은 자끄미노(Jean-François Jacqueminot) 중령에게 명하여, 엽기병이 일부 섞인 폴란드 창기병 1개 중대에게 각각 안장 뒤에 유격병(Voltigeur, 펄쩍 뛰는 사람이라는 뜻) 1명씩을 태우고 강을 건너도록 했습니다. 스투지엔카 마을 앞은 여울목이라서 베레지나 강의 수심은 최대 2m 미만이었고 말을 타고 건널 경우 허리춤의 탄약포를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강을 건넌 뒤 유격병들을 내려놓고 부채살처럼 퍼져 그 일대에 아직 남은 소수의 코삭 기병들을 쫓아냈습니다. 유격병들은 그 일대에 배치되어 사방을 경계했습니다. (자끄미노 중령입니다.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그가 중령 계급.. 2021. 9. 20.
싸구려 미끼의 가성비 - 11월 26일 새벽의 눈치 작전 우디노의 제2군단 소속 공병 750명이 오브리(Aubry) 장군 지휘 하에 이미 전날인 11월 24일부터 현장에 도착하여 다리를 놓을 목제 구조물, 그러니까 지주(支柱, strut)와 가대(trestle) 등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재료는 스투지엔카 마을의 농가들이었습니다. 공병들은 농가들의 기둥과 대들보 등을 해체하여 재료로 썼습니다. 11월 25일 낮부터는 에블레 장군 휘하의 전문 부교병 400명이 도착하여 작업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장비들, 즉 마차 6대 분량의 각종 공사 도구들과 2기의 이동식 풀무, 그리고 그 풀무에 사용할 연료인 석탄까지 마차 2대분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체 이들은 어디서 이런 장비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이 장비들을 확.. 2021. 9. 13.
Against all odds - 베레지나 강변에서 팔렌(Pahlen) 장군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가 보리소프를 지키던 돔브로프스키의 폴란드군을 비교적 손쉽게 격퇴한 것은 저녁 때였는데, 그는 보리소프 시내를 정리한 뒤 병사들에게 숙사를 배정하여 쉬게 하고 자신도 기분 좋게 근사한 늦은 저녁 식사를 대령하게 하여 이제 막 한입 먹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난데없는 총성과 함께 함성소리가 들여왔고, 팔렌은 그 식사를 끝내 마치지 못했습니다. 바로 몇십분 전, 팔렌이 이끄는 압도적인 1만의 러시아군에게 밀려 퇴각했던 돔브로프스키의 폴란드 사단은 후퇴하다가 우디노의 제2군단 선봉으로 전진하던 마르보(Jean-Baptiste Antoine Marcelin Marbot) 대령의 제23 기병 연대를 마주쳤습니다. 연대라고는 해도 이들도 숫자가 대폭 줄어 .. 2021. 9. 6.
꿈의 도시 스몰렌스크 - 그리고 현실 11월 6일 급습해온 동장군의 위력 앞에서는 나폴레옹도 한낱 뚱뚱한 프랑스 아저씨에 불과했습니다. 여태까지 '러시아의 추위가 무시무시하다더니 프랑스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날씨 아닌가?'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떠들었던 것도 어쩌면 러시아의 추위에는 정말 답이 없었고 또 정말 두려워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거는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입방정은 11월 6일 이후 즉각 고쳐졌고, 추위를 견디지 못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회색 프록코트와 삼각모(tricorn)를 포기하고 두툼한 털로 안을 댄 폴란드식 초록색 외투와 군고구마 장수 같은 방한모를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걸어서 후퇴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Vasily Vereshchagin라는.. 2021. 8. 2.
연애 편지와 엄마 - 포로들의 운명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이렇게 식량 부족과 추위로 부서져 내리면서 당연히 많은 낙오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글을 보시면서 낙오병이라는 단어는 많이 보셨지만 탈영병이라는 표현이 별로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랑다르메 중에서도 지배층에 속하는 프랑스군은 그렇다치고,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 이탈리아군 중에는 쫄쫄 굶다 못해 그냥 탈영해서 스스로 러시아군으로 넘어간 병사들이 많지 않았을까요 ?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러시아군이었고, 이렇게 포로가 된 이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아직 제네바 조약 같은 포로에 대한 국제 협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때였습니다만, 대신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귀족 내지는 .. 2021. 7. 26.
눈과 편자, 그리고 협동조합 - 후툇길의 명암 빈약한 정규 외투는 갑작스러운 추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의 노련함은 온갖 꼼수를 쥐어 짜냈습니다. 많은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고향의 애인에게 선물하기 위한, 혹은 비싼 값에 팔기 위한 털가죽 등의 여성용 의류가 꽤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애인 생각 돈 생각에 그냥 추위를 견뎌보려했던 병사들도 결국엔 배낭에서 온갖 여성복을 꺼내어 입었습니다. 의외로 풍성한 여성복은 품 안에 공기가 많이 들어있어 추위 단열 효과를 냈습니다. 얇은 바지만으로는 다리의 추위를 막을 수가 없었던 어떤 병사는 양가죽 자켓을 거꾸로 다리에 꿰어 입고 허리춤에서 그 아랫단을 묶는 기발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병사들은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여성복.. 2021. 7. 19.
11월 6일에 생긴 일 - 동장군의 습격 비아즈마 전투가 있기 5일 전인 10월 30일, 그루시(Grouchy)가 이끄는 군단 소속 포병 장교인 그리와(Lubin Griois) 대령은 병사들이 행군하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습니다. 병사들이 행군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기 면에서 아직 염려할 것이 없다는 표시이므로 무척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와 대령이 놀란 이유는 그가 생각해보니 요 며칠 동안 병사들이 전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은 사건은 2가지를 뜻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병사들의 사기는 좋지 않았고, 또 적어도 10월 30일에는 그런 병사들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인 10월 31.. 2021. 7. 12.
러시아의 트라팔가 - 비아즈마(Vyazma) 전투 쿠투조프가 이런저런 욕을 많이 먹지만 나폴레옹 추격 전위대 지휘관으로 밀로라도비치(Mikhail Miloradovich)를 임명한 것은 무척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는 나폴레옹보다 2살 어린 세르비아 출신의 귀족으로서,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 장군이 수행했던 1799년 스위스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고, 무엇보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러시아의 뮈라(Murat)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운이 무척 좋은 편이라는 점에서도 뮈라를 쏙 빼닮았습니다. 그는 항상 자랑하기를 50번 넘는 전투 속에서 단 한번도 부상은 커녕 생채기도 입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결코 안.. 2021.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