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312

인사가 만사 - 쿠투조프의 후임 1813년 4월 25일, 러시아군 사령부와 동행 중이던 영국군 윌슨 장군은 일지에 연합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병세에 대해 차가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원수께서는 적군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당도하자 아주 시의적절하게도 병석에 드러누우셨다. 아마도 이건 카멘스키 전략(Kamenski stratagem)일 것이다." 여기서 카멘스키 전략이라는 것은 제4차 대불동맹전쟁 때인 1806년 12월,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군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뒤 부대를 점검해본 결과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카멘스키 백작(Mikhail Fedotovich Kamenski)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윌슨 장군은 사흘 뒤에 쿠투조프가 정말 죽어버리자 '어? 꾀병이 아니었어?' 라.. 2022. 8. 15.
상책과 하책 - 두 천재 참모의 작전안 나폴레옹이 잘러 강 서쪽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프로이센군 수뇌부를 걱정시켰다기 보다는 흥분과 전율을 넘어 기대감에 차오르게 했습니다. 가장 흥분한 사람은 블뤼허 본인이었는데, 사실 블뤼허는 이 희대의 괴물과 어떻게 싸워야 하겠다는 작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의 모든 작전은 블뤼허가 아니라 그의 참모들인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도맡아 짜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블뤼허가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른호스트는 블뤼허를 매우 존중하고 있었는데, 블뤼허의 진짜 가치는 비상한 머리로 기가 막힌 작전안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적과의 싸움에 임했을 때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부하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불어넣고 사기를 고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용기와 투지가 넘쳐나는 프로.. 2022. 8. 8.
잘러 (Saale) 강 뒤에서 - 나폴레옹의 고민 샤른호스트가 '과연 나폴레옹이 어느 쪽 길로 쳐들어올 것인가'에 대해 골머리를 앓는 동안, 나폴레옹은 4월 13일 조용히 자신의 출정을 자신의 장인 어른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편지로 알렸습니다. 이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원래 1주일 뒤에나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적군이 엘베 강 서안까지 넘어왔다는 이야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계획보다 출정을 앞당긴다고 담담히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2~3일 뒤에 마인츠(Mainz)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통보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의 출정은 굉장한 기밀 정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편지에 공공연하게 써서 어느 쪽에 붙을지 모르는 오스트리아 궁정에 보내는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혹시 나폴레옹은 그 특유의 자아도취 때문에 이제 처가댁이 된 오스트.. 2022. 8. 1.
한자 동맹의 영광 - 함부르크를 둘러싼 소동 나폴레옹은 3월초 마인 방면군의 편성에 열중하면서도 외젠에게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편지를 보내며 함부르크의 중요성에 대해 두번 세번 반복했습니다. 외젠으로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함부르크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버렸고, 당연히 나폴레옹은 크게 노발대발했습니다. 다소 나중의 일입니다만, 나폴레옹이 마인 방면군을 이끌고 진격을 시작할 때 다시 외젠에게 편지를 보내 강조한 이번 작전의 2가지 1차 목표는 잘러(Saale) 강 방어선의 확보와 함부르크의 탈환일 정도로 나폴레옹은 함부르크를 중요시했습니다. 함부르크는 훨씬 나중인 5월 30일, 작센에서의 패배를 접한 연합군이 스스로 함부르크에서 철수하면서 다시 나폴레.. 2022. 7. 18.
연합군 내부의 상호 불신 - 엘베 강과 튀링겐 숲 사이에서 샤른호스트가 아무 설명없이 다짜고짜 블뤼허에게 '뮐베르크에 다리를 놓으십시요'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사시 드레스덴을 거치지 않고도 즉각 엘베 강 동쪽으로 퇴각할 수 있는 탈출로를 확보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드레스덴 북쪽, 그러니까 엘베 강의 더 하류 쪽에 새로운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아울러, 너무 서쪽으로 진격하면 고립되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커진다고도 경고했습니다. 샤른호스트의 이런 조바심을 이해하려면 북부 독일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4개 도로 중 라이프치히 경로와 드레스덴 경로의 위치를 보셔야 합니다. (호프에서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최남 도로의 바로 남쪽은 오스트리아 영토인 보헤미아, 즉 체코였는데, 그 국경은 바로 얼츠 산맥이었습니다. 영어로 오어(Ore) 산맥이라고 하.. 2022. 7. 11.
네 갈래의 도로 - 샤른호스트의 고뇌 3월 30일, 드레스덴에 도착한 블뤼허는 하르덴베르크에게 엘베 강을 건너 진격을 시작하겠으며, 베를린 점령 이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던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도 함께 움직여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바로 이때 4일 전에 비트겐슈타인이 보내온 편지가 비로소 도착했습니다. 그 내용은 자신이 베를린과 마그데부르크 사이의 딱 중간 위치인 벨지히(Belzig)에 사령부를 차렸는데, 여기서 샤른호스트와 만나 향후 작전계획을 논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좋게 말하면 그런 것이었고 공손한 표현 뒤의 실질적인 내용은 샤른호스트와 향후 작전 계획을 논의하기 전에는 한발자욱도 더 전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샤른호스트는 당장 말을 달려 하룻만에 벨.. 2022. 7. 4.
스페인 모델의 실패 - 냉정한 작센 사람들 3월 30일, 드레스덴의 강북 신도시 노이슈타트(Neustadt)에 들어온 블뤼허는 브레슬라우 사령부에 있던 하르덴베르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서 블뤼허는 노이슈타트와 드레스덴 구도심지 알트슈타트(Altstadt)를 연결하는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폭파에 대해 언급하며 이로 인해 작센인들의 반(反)프랑스 감정이 악화되었다고 썼습니다. 실제로 드레스덴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드레스덴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나폴레옹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체제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그냥 불만 가득한 침묵을 지켰을 뿐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도 엄정한 군기를 준수하여, 드레스덴은 물론 모든 작센 주민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에 입성한 이후 블뤼허가 자신의 부.. 2022. 6. 27.
끊어진 다리, 흔들리는 동맹 -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의미 이미 베를린이 비트겐슈타인 휘하의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고 드레스덴도 곧 빈칭게로더 손에 들어갈 것이 명약관화했던 3월 중순 즈음, 외젠에게는 6만이 채 안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다부 지휘 하에 드레스덴에 있던 7천5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단들 중에서도 언제나 병력 3만 이상의 특별히 강력한 군단만을 거느리던 다부가 1개 사단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만을 이끌고 있던 것은 당시 약화된 그랑다르메의 신세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다부는 특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레이니에(Reynier) 장군이 러시아군에 쫓겨 드레스덴에서 철수하는 것은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에크뮐 대공(prince d'Eckmühl, 즉 다부)이 그런 모욕.. 2022. 6. 20.
1813년, 작센을 둘러싼 갈등 3월 24일, 블뤼허가 드디어 작센 영토인, 아니 이제 프로이센 영토라고 선언된 코트부스로 들어갈 때 블뤼허의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칼리쉬의 쿠투조프는 기분이 팍 상해버렸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프로이센군이 러시아군을 젖히고 코트부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당장 보급물자를 챙겼다는 것이었지만, 총사령관이자 연합군 사령관으로 쿠투조프는 그런 소소한 문제를 지적할 수는 없었습니다. 쿠투조프가 문제를 삼은 부분은 블뤼허의 포고문에 '동맹국'이라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만 씌여있을 뿐, 러시아라는 단어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블뤼허의 조치에 대해 화가 난 작센 관리들이 러시아 사령부에까지 '코트부스가 프로이센 영토가 되는 것이 정말 짜르의 뜻 맞느냐'라며 항의를 해오자, 그에 대.. 2022. 6. 13.
진격의 러시아, 뒤쳐진 프로이센 - 갈등의 작은 시작 당시 연합군의 최고 권력자는 당연히 짜르 알렉산드르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다 통틀어서 최고의 브레인은 바로 샤른호스트였습니다. 적어도 알렉산드르가 볼 때는 그랬습니다. 누가 봐도 멍게, 즉 멍청하고 게으른 성향의 지휘관인 쿠투조프에게 질렸던 알렉산드르는 샤른호스트와 만나서 이야기해본 뒤 그의 성실과 명석, 치밀한 논리에 홀딱 넘어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한 칭송을 늘어 놓았습니다. 평민 출신의 직업 군인 주제에, 군무에 필요하다 싶으면 가끔씩 국왕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까지 서슴치 않는 샤른호스트에 대해 내심 벼르고 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감히 샤른호스트를 어쩌지 못한 것은 사실 알렉산드르의 그런 호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 2022. 6. 6.
드레스덴(Dresden)을 향하여 - 지킬 것과 버릴 것 나폴레옹은 자신이 새로운 군대, 즉 마인 방면군(Armée du Main)을 연성하는 동안 외젠이 기존 그랑다르메의 잔존부대를 지휘하여 어떻게 해서든 오데르 강, 적어도 엘베 강에서 러시아군의 침공을 막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외젠이 아니라 외젠의 아버지, 즉 나폴레옹 본인이 와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폴레옹도 그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월 2일에 외젠에게 편지를 보내어 '곧 내가 30만 대군을 몰고 갈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라'라고 위문 편지를 보내면서도, 같은 날 동생 제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외젠은 엘베 강을 포기하고 물러서면 베저(Weser) 강과 카셀(Kassel)에서 적을 막아낼 것'이라고 썼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러시아군은 틀림없이 오데르 강과 엘베 강을 건너.. 2022. 5. 30.
대영제국의 그림자 - 1813년 영국의 군수품 지원 프랑스는 애초에 땅도 넓고 산업 기반이 탄탄해서 새로 30만 대군을 무장시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만,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와 인구가 반토막 나기 이전에도 산업 기반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프로이센은 10만군을 무장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할 때도, 프로이센군이 가지고 있던 머스켓 소총은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 사용되던 것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런 낡은 소총은 격발시 가끔씩 폭발 사고를 일으켰으므로, 당시 프로이센 군에서는 '사격 훈련시에는 화약을 정량대로 다 채우지 말고 조금 덜 넣을 것'을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군수품 문제는 물론 프로이센 개혁파의 주요 관심사였고, 이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으로 생산된 1.. 2022.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