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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312

바우첸 전투 (5) - 1806년 아우어슈테트의 여파 오전 10시에 글레이나 언덕에서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손에 쥔 네에게는 당장 2만3천의 병력이 있었고, 바로 뒤에 약 2만의 추가 병력 4개 사단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글레이나에서 프라이티츠까지의 1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어이 없는 상황 전개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는데, 바우첸 전투가 종료된 이후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르티에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한 것은 바로 네의 참모인 조미니였습니다. 조미니는 이 일에 대해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클릭스(Klix)를 통해 우회하여 오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데다 작전 상황이 너무 순조로와 네가 글레이나를 너무 빨리 점령했다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변명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확실히.. 2023. 5. 8.
바우첸 전투 (4) - 높은 교회만 보고 간다 바클레이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뮈플링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원래 바클레이 휘하에 있던 병력 1만5천 중에서 1만을 여기저기 쪼개에 지원 병력으로 다 보내버렸기 때문에, 당장 글레이나를 지키기 위한 병력은 5천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이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2일 전인 19일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프랑스군과 격돌을 벌이고도 아무 대책없이 병력을 분산시켰다는 소리였으니까요. 이건 아마도 전체 전선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바클레이가 맡은 말슈비츠-글레이나 전선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 이유일 수 있습니다. 사실 9만에서 9만5천 정도였던 전체 연합군에서 1만5천이라는 병력은 상당한 규모였으니, 그 병력을 그대로 놀려두기가 아까웠을 것입니다... 2023. 5. 1.
바우첸 전투 (3) - 노란 제복의 정체 5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연합군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날 오후의 공격으로 슈프레 강을 성공적으로 건넜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과 멱살을 쥔 상태, 즉 연합군 최전선과 고작 200m 간격을 사이에 둔 채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는 뤼첸 전투 때처럼 밤 사이에 연합군이 몰래 후퇴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나폴레옹이 원하던 바였습니다.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열린 연합군 수뇌부의 작전 회의는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군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물론, 총사령관인 블뤼허가 참석하지 않고 그나이제나우와 국왕의 연락 장교인 뮈플링(Müffling)만 참석했습니다. 노령인 블뤼허는 피곤하여 쉬어야 했고, 어차피 프로이센군의 실세는 그나이제나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2023. 4. 24.
바우첸 전투 (2) - 프랑스군보다 더 미운 러시아군 오후 1시 경에 쿼티츠(Quatitz)에 나타난 술트의 프랑스군은 이런저런 마을에 분산되어 있던 프로이센군을 쉽게 분쇄한 뒤, 니더구리쉬에 배치되어 있던 클라이스트의 작은 군단을 사정없이 몰아붙였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천천히 밀려났지만 슈프레 강 건너 뵐라우와 키페른 등의 언덕들에서 쏘아대는 프로이센군의 포격 덕분에 3시간 동안이나 니더구리쉬 마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슈프레 강을 건너 후퇴한 뒤에도 프랑스군은 한참 동안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는데, 역시 강 건너 언덕에서 쏟아지는 치열한 포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목은 강 좌안의 고틀롭(Gottlobs) 언덕을 프랑스군이 장악한 뒤 거기에 중포들을 방열하여 강 건너 뵐라우 언덕의 프로이센 포병대들을 제압한 후에야 해결되었습니다. 프랑스군 보.. 2023. 4. 17.
바우첸 전투 (1) - 마침내 시작된 전투 당시 대부분의 전투는 새벽 일찍 동이 트기 직전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5월 20일 아침 해가 꽤 높이 올라와 사방을 비출 때까지도 바우첸 일대는 조용했습니다. 연합군의 전초선을 지키던 보초들은 오늘도 지난 1주일 넘게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9시가 좀 넘어서, 바우첸 시내의 교회탑에서 프랑스군 진영을 감시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 일부가 북동쪽을 향해 행군을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바우첸을 소개할 때 자주 사용되는 사진의 구도가 딱 이런 구도입니다. 바우첸은 탑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교회 첨탑이 많습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슈프레(Spree) 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에 대해 바트겐슈타인이 미리 작전계획을 .. 2023. 4. 10.
바우첸 전투 (0) - 복습편 : 짜르와 총사령관 이제 1813년 5월 20일, 바우첸 전투 당일 새벽이 되었으니 여기서 잠깐 복습을 하겠습니다. 바우첸 전투는 크게 보면 나폴레옹이 커다랗게 그린 그림에 연합군이 말려들어 벌어진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린 그림은 크게 2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베를린을 위협하여 프로이센군을 러시아군으로부터 이탈시키려 했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게 제대로 안 될 경우 베를린을 위협하던 네의 병력을 바우첸 뒤쪽에 투입하여 연합군의 퇴로를 끊기 위함이었습니다. 네의 병력을 바우첸 뒤쪽으로 투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 쓰던 '망치와 모루' 전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우첸 서쪽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연합군을 밀어 붙이면서 모루의 역할을 할 때, 북쪽에서 내려온 .. 2023. 4. 3.
바우첸을 향하여 (16) - 헛도는 톱니바퀴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요크는 바클레이의 어처구니 없는 지원군 요청에 아무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정말로 자신의 부대 중 제2 여단을 떼내어 숲길을 통해 바클레이가 있는 쾨니히스바르타로 보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크가 정말 제대로 된 군인 정신의 지휘관인지 정반대로 관료주의에 빠져 현실 파악을 못하는 인간인지 헷갈립니다만, 직후의 행동을 보면 요크가 닳을 대로 닳은 늙은 여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크는 2시간 정도 싸운 끝에 어차피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황 파악을 못한 바클레이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자 요크는 후퇴할 명분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바클레이의 명령대로 지원군을 보내면서 '지원군을 보내고 .. 2023. 3. 27.
바우첸을 향하여 (15) - 오해는 오해를 낳고 군내 서열에 있어서 훨씬 선임이자 바로 작년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바클레이의 존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습니다. 과거에 바클레이가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경직된 서열 문화에서 작년의 직속 상관이 지금 자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중요 전장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던 좌익의 정반대쪽인 우익, 그것도 프로이센군이 지키는 우익보다 더 오른쪽 맨 끝 부분인 크렉비츠(Kreckwitz) 마을 쪽에 바클레이를 배치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우익쪽, 즉 북쪽에서 로리스통의 프랑스군 1개 군단이 내려오고 있다는 첩보는 바클레이를 아예 멀리 보내버려 자신의 전장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 좋은 .. 2023. 3. 20.
바우첸을 향하여 (14) -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 5월 19일 오전, 네슈비츠(Neschwitz)로 가던 로리스통이 뜻하지 않게 길 위에서 맞닥뜨린 사람은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전날인 18일 오전 10시, 베르티에가 보낸 명령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명령서에서 베르티에는 비로소 나폴레옹의 의도를 촘촘히 적었는데, 더욱 바람직했던 것은 여러 통의 암호화된 사본을 만들어 보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중 한 통을 가지고 네의 사령부를 찾아나섰던 것이 그루시였지요. 이렇게 그루시를 길 위에서 만난 덕분에 네는 나폴레옹의 본진 위치가 생각보다 더 서쪽이며, 나폴레옹이 네가 21일까지는 연합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위치인 드레사(Drehsa)에 도착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Within cannon-sho.. 2023. 3. 13.
바우첸을 향하여 (13) - 혼란은 전선을 넘어 바우첸 앞에 이미 도착해있던 기존 군단들, 즉 막도날의 제11, 베르트랑의 제4, 마르몽의 제6 군단은 별 다른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디노의 제12 군단이 새로 바우첸에 더 접근하여 코삭 기병들을 쫓아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신참 근위대와 제1 예비기병군단은 나폴레옹과 함께 5월 18일 바우첸에 도착했고, 최후까지 드레스덴에 남아있던 고참 근위대와 근위 포병대, 공병대 등도 18일 아침 바우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왜 바우첸에서 대치한 양군은 그렇게 조용했을까요? 프랑스군 측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네의 병력이 북쪽에서 나타나길 기다렸으니까요. 그러나 연합군 측에서는 아직 병력 집결이 완료되지 않은 프랑스군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그냥 내버려 둔 것은 꽤 이상한.. 2023. 3. 6.
바우첸을 향하여 (12) - 큰 일은 작은 실수에서 현대화된 전쟁일 수록 기술의 차이가 승패를 결정짓는다고 하지만 전쟁이란 많은 수가 적은 수를 이기는 게임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나 현대전에 있어서나 병법의 기초는 적은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결시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 전장을 휩쓴 이유도 바로 그것을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813년 5월, 바우첸 전투를 앞둔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의 1/3 정도를 뚝 떼어 네에게 베를린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하여 스스로를 분산시켰습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은 바우첸에 집결했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왜 이런 악수를 둔 것일까요? 나폴레옹이 네의 군단들을 베를린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은 연합군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프로이센군의 이탈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덫.. 2023. 2. 27.
바우첸을 향하여 (10) - 정보와 평화 연합군이 바우첸 동쪽에서 땅을 파며 방어선을 준비하는 동안 프랑스군의 각 군단은 속속 엘베 강을 넘어 진격했지만, 정작 총사령관인 나폴레옹은 강을 건너지 않고 드레스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보급 물자 확보를 하고, 이제 의미가 없어진 2개 군 즉 엘베 방면군과 마인 방면군을 통합한 뒤 엘베 방면군 사령관이던 외젠을 자신의 이탈리아 왕국으로 돌려보내는 등 처리해야 할 각종 행정 업무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2가지, 정보와 평화였습니다. 첫째, 나폴레옹은 엘베 강 동쪽으로 철수한 연합군의 행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병대의 부족으로 인한 정찰의 어려움은 여전하여, 연합군이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기대한 대로 연합군이 찢어.. 2023.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