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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308

휴전 (14) - 베르나도트의 운수 좋은 날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있어서 스웨덴의 도움이 절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웨덴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승리는 결국 누가 더 많은 총검과 대포를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구가 많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각각 3천만에 육박했던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하면 인구가 240만 정도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초라한 수준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영토를 절반 이상 빼앗긴 프로이센은 인구가 975만에서 450만으로 줄어드는 봉변을 당했지만, 그래도 스웨덴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장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인접한 작센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보니 일종의 .. 2023. 10. 2.
휴전 (13) - 작전이 정치에 휘둘리다 로마노프 왕가는 원래는 러시아 가문이었지만, 점차 독일계 귀족 가문과 결혼을 통해 점점 서구화되었고, 특히 독일 공작 가문 출신으로 짜르에 등극한 표트르 3세 이후로는 사실상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 인사들이 짜르에 등극했습니다. 남편안 표트르 3세를 쫓아내고 여황이 된 예카테리나 대제도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이었지요. 나폴레옹과 자웅을 겨루던 알렉산드르 1세가 바로 그 부부의 손자였는데,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내도 모두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알렉산드르는 19세 때 친구에게 자신은 아내와 함께 독일 라인 강변에 정차가여 자연 철학을 공부하며 행복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독일계 인사들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샤른호스트의 말이라면 뭐든 다 믿고 따른 것.. 2023. 9. 25.
휴전 (12) - 오스트리아의 준비 상황 6월 27일의 드레스덴 회견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오스트리아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의 임기응변으로 일단 나폴레옹을 7월 5일의 프라하 회담에 끌어들임으로써 당장 파국은 피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에 불과했습니다. 당장 연합국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은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제 오스트리아도 전쟁에 뛰어들어 피를 보게 되었는데, 아직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가 재개되면, 나폴레옹의 주된 공격 방향은 바로 오스트리아를 향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가 드레스덴으로 떠나기 훨씬 이전부터,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장군들은 이미 전투 재개를 가정하고 이런저런 작전안을 논의하고.. 2023. 9. 18.
휴전 (11) - 나폴레옹 대폭발 6월 27일 드레스덴으로 메테르니히를 불러 면담을 한 나폴레옹이 무려 무려 9시간이 넘는 이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뭔가 할 말이 많긴 많았을 것 같은데 정말 아무도 배석시키지 않고 1대1로만 면담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를 명확하게 기록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폴레옹도 메테르니히도 각각 회고록을 남겼습니다만, 당대의 모든 회고록이 그렇듯이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써놓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도 9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시시콜콜 녹취록을 적어 놓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많은 정보를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메테르니히가 그 회담이 있었던 날 밤 자신의 주군인 프란.. 2023. 9. 11.
휴전 (10) - 메테르니히, 드레스덴을 향하다 영국은 여기저기 돈을 뿌려대며 연합군 진영 내에서 영국의 입지를 다지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당장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돈보다는 총칼이 더 소중한 법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6월 중순, 라이헨바흐(Reichenbach) 조약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6월 하순,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만나자는 나폴레옹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 초대에 응해 드레스덴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폴레옹과의 회담에서 제시할 조건들에 대해 러시아 및 프로이센 측과 최종 합의를 보기 위해 라이헨바흐의 연합군 진영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라인 연방 해체나 프로이센의 영토 회복 등에 대한 요구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메테르니히의 4개 요구 조건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메테르니히의 조건이 그대로 통과되었습니다. 대신 만약 나폴레옹이 .. 2023. 9. 4.
휴전 (9) - 우리한테 병력이 없지 돈이 없겠나? 오스트리아의 이런 움직임은 연합군 사령부에 와 있던 영국인들에게도 결국 포착되었습니다. 주프로이센 대사 자격으로 현장에 있던 스튜어트 장군은 6월 6일, 이런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본국에 보냈고, 외무부 장관인 캐슬레이는 한참 말을 달려 북부 독일의 항구를 통해 전달된 이 편지를 6월 22일에야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3대 런던데리(Londonderry) 후작 스튜어트(Charles William Stewart)의 초상화입니다. 1813년 이후 프로이센 주재 영국 대사로서, 이후 오스트리아 주재 영국 대사로 활약하며 나폴레옹의 몰락에 한몫 했습니다.) (윗 그림 속 스튜어트가 입고 있는 자켓은 영화 MI7 Dead Reckoning에서 맨티스가 입고 설친 자켓이기도 합니다. 이 자켓을 부르는 일반 명.. 2023. 8. 28.
휴전 (8) - 대(大)외교관 메테르니히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1813년 춘계 작전을 벌이면서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애걸복걸할 때, 오스트리아는 짐짓 점잖은 척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서 기묘한 요구를 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평화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칼리쉬 조약을 맺고 반(反)나폴레옹 전쟁을 시작할 때 양국은 절대 개별적으로 나폴레옹과 협상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라는 제3국을 중재국으로 두는 것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에 동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건 당대의 외교계의 거물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절묘한 한수였습니다. 그가 그런 독특한 요구를 관철시킨 것은 그가 프랑스 못지 않게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정.. 2023. 8. 21.
휴전 (7) - 메테르니히의 조건 아직 정식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6월 3일부터 나흘 동안, 러시아 외교관 네셀로더(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란츠 1세(Franz I)와 메테르니히,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와 일련의 회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연합군 사령부로 되돌아간 네셀로더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다음 조건들을 제시하며 종전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 2023. 8. 14.
휴전 (6) -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훗날인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아직 엘바 섬에 있을 무렵, 러시아군의 랑제론은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티에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르티에는 이 때의 휴전협정에 대해 '그 휴전협정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었다,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1812년 이후 나폴레옹은 결코 자신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싸우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이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휴전협정을 맺은 것은 나폴레옹 혼자의 결정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는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나폴레옹이 휴전을 제의할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건 베르티에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전협정이 .. 2023. 8. 7.
휴전 (5) - 차가운 남자의 함박웃음 휴전이 되자 바클레이는 즉각 오데르 강을 넘어 후퇴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바클레이는 재빨리 슈바이트니츠에서 더 서쪽인 상(上) 슐레지엔의 슈트렐렌(Strehlen, 폴란드어로는 스첼린 Strzelin)으로 이동하려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휴전까지 되었는데 뭐가 무서워 자꾸 도망치려고 드냐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바클레이는 절대 나폴레옹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휴전은 시간 벌기용 위장일 뿐이고, 나폴레옹이 그 사이에 오데르 강 상류쪽으로 행군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가 워낙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모두 후퇴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정식 조약이 서명되기도 전인 6월 3일 즉각 부대를 동쪽으로 행군시.. 2023. 7. 31.
휴전 (4) - 땅을 치고 후회할 결정 그나이제나우는 5월 31일 이같은 생각을 바클레이에게 펼쳐놓고는, 자기가 생각해봐도 완벽한 자신의 논리와 작전안에 스스로 감동하여 바클레이가 이 작전안에 찬성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하고는 자신의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곧 전투가 벌어진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클레이의 대답은 단호하게 일관적이었습니다. 즉, 러시아군은 결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이번 기회에 오데르 강을 건너 후퇴해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짜르의 명령 때문에 슈바이트니츠에 발이 묶인 상태이다보니, 바클레이가 내세운 계획은 최대한 버티면서 시간을 끌되, 만약 나폴레옹이 공격해오면 그 일대의 구릉 지대에서 메뚜기 뛰듯 옮겨다니며 계속 농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는 나.. 2023. 7. 24.
휴전 (3) -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 러시아 공사삼일! 이 때 즈음 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습니다. 바클레이로 대변되는 러시아군은 오데르 강을 넘어 폴란드로 후퇴하고 싶어했으나 프로이센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지나 다름 없는 슈바이트니츠로 끌려간다는 불만이 있었고, 그나이제나우로 대변되는 프로이센군은 온갖 핑계를 대고 폴란드로 후퇴하려는 러시아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나폴레옹의 휴전 요구에 대해서 러시아나 프로이센이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지요. 애초에 연합군에게 종전이 아닌 임시 휴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2연패를 당한 지금,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만족할 조건으로 나폴레옹이 종전 협정을 맺을 가능성은 전혀.. 2023.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