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311

외젠의 기묘한 모험 - 크라스니(Krasny) 전투 (1)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에서 4일간 머물며 뒤에서 따라오는 군단들이 집결하기를 기다린 뒤, 11월 13일 서쪽으로 후퇴를 재개했습니다. 이제는 군단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든 쥐노와 포니아토프스키의 군단들을 먼저 출발시킨 그는 11월 14일 모르티에가 지휘하는 근위대와 함께 자신이 출발했으며, 그 다음날 외젠의 제4군단, 그 다음날은 다부의 제1군단, 마지막날엔 네의 군단이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띄엄띄엄 분산하여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큰 취약점이 되었습니다. 11월 3일의 비아즈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허리를 잘리고 고전했던 것도 길게 늘어진 상태로 행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루 단위로 군단들이 하나씩 출발한 것은 여전히 나폴레.. 2021. 8. 9.
꿈의 도시 스몰렌스크 - 그리고 현실 11월 6일 급습해온 동장군의 위력 앞에서는 나폴레옹도 한낱 뚱뚱한 프랑스 아저씨에 불과했습니다. 여태까지 '러시아의 추위가 무시무시하다더니 프랑스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날씨 아닌가?'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떠들었던 것도 어쩌면 러시아의 추위에는 정말 답이 없었고 또 정말 두려워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거는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입방정은 11월 6일 이후 즉각 고쳐졌고, 추위를 견디지 못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회색 프록코트와 삼각모(tricorn)를 포기하고 두툼한 털로 안을 댄 폴란드식 초록색 외투와 군고구마 장수 같은 방한모를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걸어서 후퇴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Vasily Vereshchagin라는.. 2021. 8. 2.
연애 편지와 엄마 - 포로들의 운명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이렇게 식량 부족과 추위로 부서져 내리면서 당연히 많은 낙오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글을 보시면서 낙오병이라는 단어는 많이 보셨지만 탈영병이라는 표현이 별로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랑다르메 중에서도 지배층에 속하는 프랑스군은 그렇다치고,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 이탈리아군 중에는 쫄쫄 굶다 못해 그냥 탈영해서 스스로 러시아군으로 넘어간 병사들이 많지 않았을까요 ?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러시아군이었고, 이렇게 포로가 된 이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아직 제네바 조약 같은 포로에 대한 국제 협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때였습니다만, 대신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귀족 내지는 .. 2021. 7. 26.
눈과 편자, 그리고 협동조합 - 후툇길의 명암 빈약한 정규 외투는 갑작스러운 추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의 노련함은 온갖 꼼수를 쥐어 짜냈습니다. 많은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고향의 애인에게 선물하기 위한, 혹은 비싼 값에 팔기 위한 털가죽 등의 여성용 의류가 꽤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애인 생각 돈 생각에 그냥 추위를 견뎌보려했던 병사들도 결국엔 배낭에서 온갖 여성복을 꺼내어 입었습니다. 의외로 풍성한 여성복은 품 안에 공기가 많이 들어있어 추위 단열 효과를 냈습니다. 얇은 바지만으로는 다리의 추위를 막을 수가 없었던 어떤 병사는 양가죽 자켓을 거꾸로 다리에 꿰어 입고 허리춤에서 그 아랫단을 묶는 기발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병사들은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여성복.. 2021. 7. 19.
11월 6일에 생긴 일 - 동장군의 습격 비아즈마 전투가 있기 5일 전인 10월 30일, 그루시(Grouchy)가 이끄는 군단 소속 포병 장교인 그리와(Lubin Griois) 대령은 병사들이 행군하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습니다. 병사들이 행군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기 면에서 아직 염려할 것이 없다는 표시이므로 무척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와 대령이 놀란 이유는 그가 생각해보니 요 며칠 동안 병사들이 전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은 사건은 2가지를 뜻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병사들의 사기는 좋지 않았고, 또 적어도 10월 30일에는 그런 병사들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인 10월 31.. 2021. 7. 12.
러시아의 트라팔가 - 비아즈마(Vyazma) 전투 쿠투조프가 이런저런 욕을 많이 먹지만 나폴레옹 추격 전위대 지휘관으로 밀로라도비치(Mikhail Miloradovich)를 임명한 것은 무척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는 나폴레옹보다 2살 어린 세르비아 출신의 귀족으로서,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 장군이 수행했던 1799년 스위스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고, 무엇보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러시아의 뮈라(Murat)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운이 무척 좋은 편이라는 점에서도 뮈라를 쏙 빼닮았습니다. 그는 항상 자랑하기를 50번 넘는 전투 속에서 단 한번도 부상은 커녕 생채기도 입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결코 안.. 2021. 7. 5.
대포와 낙오병 - 혼란 속의 후퇴 나폴레옹은 후퇴할 때 각 부대가 제형(梯形, echelon, 사다리꼴)으로 행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에셜란 진형은 한자로나 한글로나 사다리꼴 모양이라고 해석이 됩니다만 실은 이건 사다리꼴 모양이 아니라 사선 대형을 말하는 군사용어입니다. 즉 부대들이 횡대나 종대가 아니라 비스듬하게 사선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이런 에셜란은 육군 부대 뿐만 아니라 해군 함대나 공군 편대들도 많이 사용하는 진형입니다. 이렇게 육해공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똑바로 횡대나 종대를 이룰 때에 비해 각 부대/군함/항공기에서 훨씬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똑같은 수의 병력이 이동할 때 훨씬 더 넓은 범위의 구역을 훑으며 지나가게 된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이는 적을 수색하며 .. 2021. 6. 21.
승자의 번민, 패자의 고뇌 - 3개의 선택지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의 승리였으나 나폴레옹은 꼭 웃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랑다르메는 약 6천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당시 말로야로슬라베츠 인근에 모인 그랑다르메 병력은 약 7만이었는데, 그 중 10% 정도를 잃은 것이었고 전투에 투입된 2만7천 중 20%를 넘는 사상자를 낸 셈이었습니다. 점점 격렬해지는 전투 양상 때문에 특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로는 승전한 군대의 사상률도 그 정도 나오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지만 1806년 프로이센 원정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패전할 때나 나오던 사상률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군은 더 큰 피해를 입어 약 8천 정도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계속 증원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이 이 전투에 동원한 354문이라는 막대.. 2021. 5. 31.
이탈리아 사내들의 열정 -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말로야로슬라베츠를 선점당한 독투로프는 아차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외젠의 이탈리아 군단 주력 부대는 아직 말로야로슬라베츠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약 2개 대대 정도만이 마을을 점거하고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부대는 루즈하 강의 건너편인 북쪽 강변에 캠프를 치고 있었습니다. 루즈하 강은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북쪽이 열린 반원형을 그리며 크게 휘어 북서쪽을 향해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말로야로슬라베츠는 그 반원호의 정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나폴레옹이 메딘(Medyn)을 거쳐 서쪽 스몰렌스크로 가려면 루즈하 강을 건너야만 했고, 그러기에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여기 말로야로슬라베츠에 놓인 다리였습니다. (루즈하 강의 대략적인 지도입니다. 우하단의 만곡부에 말로야로슬라베츠가 있습.. 2021. 5. 24.
상대는 "쿠투조프+나폴레옹" - 말로야로슬라베츠를 향하여 나폴레옹이 10월 18일 저녁부터 모스크바에서 병력을 빼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불과 10시간도 안되어 타루티노의 쿠투조프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한 것은 볼고프스키(Bolgovsky)라는 이름의 중위였는데, 새벽에 말을 달려온 그는 참모들에 의해 쿠투조프의 침실로 직접 안내되었습니다. 침실에 가보니 자다 일어나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프록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침대에 앉은 노친네가 '말해보게 친구'라며 소식을 재촉했는데,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쿠투조프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흐느끼며 방 한구석의 성상을 향해 "주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이제 러시아는 구원받았습니다!" 라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쿠투조프와의 착각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적.. 2021. 5. 17.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그 놀라운 유사성 최근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 나폴레옹을 추모하며 '그의 공과 과를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라고 했다지요?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어지간하면 회피합니다. 그만큼 기피 인물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나폴레옹은 사실상 당대에는 히틀러급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배웁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중요 교과목에는 반드시 역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요. 실제로 많은 역사가 되풀이되었고, 이는 특히 주식 시장에서 그렇습니다. 에드워드 챈슬러라는 영국 기자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정말 놀랍다. 어떻게 똑같은 덫에 한번도 빼먹지 않고 걸.. 2021. 5. 13.
욕망의 무게 - 배낭과 수레 모스크바를 떠나는 그랑다르메의 모습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사람과 말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병사들의 혈색이 붉그스레 건강해 보이는 것에 비해, 마차와 포가를 끄는 말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마르고 병약해보였습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특히 기병대의 손실이 컸을 뿐만 아니라 원정 내내 고질적이던 사료 부족 문제가 모스크바에서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차와 수레가 너무 많았습니다. 포병대에 딸린 포가와 탄약 수송차, 그리고 대대마다 딸린 솥단지와 머스켓 탄약포 등의 짐을 실은 마차 등 규정된 군용 마차 외에 어중이떠중이 민간용 마차와 수레가 최저 1만5천대에서 최대 4만대까지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총병력수가 10만도 안되는데 마차와 수레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 2021.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