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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16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들었을까 - Bridge Over Troubled Water 가사 해석 (16)


제가 올해 들어 '사람은 왜 태어났고 인생에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즘은 뉴스도 거의 보지 않고, 중독된 것처럼 열심히 하던 게임도 끊고, 페북도 거의 하지 않고, 체중도 꽤 줄였습니다.  심지어 이 블로그도 접을까 하다가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그냥 당분간은 번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요.  사실 인생이란 무엇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은 모든 사람들이 한두번쯤, 어쩌면 평생 고민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의 끝판왕은 철학이고 철학을 하다보면 결국 신학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소리를 와이프가 하던데, 저도 거기에는 꽤 공감하는 편입니다.

성경에서도 삶은 참으로 허망하고 헛된 것이라고 나옵니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출근하던 어느날 아침, 매일 보던 아파트 화단의 흙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또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어요. 

"저 흙 한줌 속에도 많은 벌레들과 미생물이 가득할 것이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소중한 생명인데, 과연 그 많은 생명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나의 삶이 그것들과 비교할 때 과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점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

거기에 대해 기독교에서는 분명히 더 나은 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영원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임에 비해, 동물들은 (혼만 있고 영이 없다든가 혹은 그 반대든가) 영생도 없을 뿐더러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들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이 천지창조에 대해서 빅뱅 이론은 비교적 순순히 '하나님의 기적'이라며 받아들이지만, 유독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더라고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돌연변이에 의해 새로운 종의 탄생이 가능하도록 DNA를 coding하신 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진화론이라는 것이 굳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이고 오로지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진화론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런 점에서 불교는 입장이 꽤 다릅니다.  불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서 원전을 인용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신필 김용 선생의 '사조영웅전'에서 읽었습니다) 아래의 불교 설화가 인간과 동물의 생명에 대한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왕자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와 왕자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고, 그 뒤를 쫓아 매 한마리가 나타났다.  매는 왕자에게 그 비둘기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는데, 왕자는 비둘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거절했다.  그러자 매는 '그 비둘기를 당장 먹지 못하면 내가 굶어죽는다.   비둘기의 생명만 소중한가 ?  나의 생명도 소중하지 않은가 ?' 라고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왕자는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제안했다.  '비둘기의 무게만큼 나의 살점을 떼어줄테니 그것을 먹고 대신 비둘기를 살려달라.'  그래서 정말 저울을 가져놓고 한쪽 접시에는 비둘기를 올려놓고, 다른쪽 접시에는 왕자의 살점을 조금씩 잘라 올려놓기 시작했는데, 팔과 다리, 가슴에서 아무리 살점을 많이 떼어 올려놓아도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운 채 도통 올라오지 않았다..."

사조영웅전에는 여기까지만 나오고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읽어도,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무게는 동일하다고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고 인간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와 몇 분만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앉아있어도 개나 사람이나 똑같이 희노애락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물론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끼리 서로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허망한 삶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최근 제가 고등학교 때 정말 좋아했던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뭔가 울컥하는 것이 있더라고요.  저는 노래에서 가사를 꽤 중요하게 보는 편인데, 이 노래의 가사는 특히 뭔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정말 위안에 되는 노래입니다.  삶이 그렇게 덧없고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 정말 아무 조건없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살아갈 힘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또 만약 제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도움을 받는 것 못지 않게 정말 큰 삶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항상 하나님은 왜 자력으로 살 수 있는 식물까지만 만드시지 않고, 꼭 다른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을 해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도 만드셨을까 하고 궁금해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인간을 만드신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이라고 내려주신 것이, 바로 서로를 사랑하라는 단순한 것이었지요.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실제로 이 노래는 폴 사이먼이 복음성가에서 영감을 받아 작사작곡한 곡이고, 제목도 다른 복음가수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노래는 전반부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마침내 그 사람의 상황이 잘 풀려 순풍에 돛을 단 듯 좋은 상황이 되는 그런 희망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노래 들으면서 울컥했던 부분은 (항상 그렇지만) 전체 노래의 80% 정도가 지난 부분에서 나오는 아래 부분이에요.

 

Oh, if you need a friend 
I'm sailing right behind 

 

그러니까,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silver girl이 고난에 처했을 때는 몸을 던져 silver girl을 돕는데, 이 silver girl이 이제 제자리를 잡고 잘 나갈 때에도 굳이 나서지 않고 옆이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기만 합니다.  혹시 silver girl에게 도움이 필요할 경우가 또 생길 것에 대비해서요.  그야말로 아무 조건이 붙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경우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give & take의 관계에 불과합니다.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아끼고 돕는 관계는 흔치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보는 관계, 그리고 신이 인간을 보는 관계 정도지요.  그래서 이 노래의 가사가 복음성가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떄 저 노래에서 'Sail on silver girl' 이라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은빛으로 빛나는 여자가 키를 잡고 석양이 지는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고 낭만적으로 들렸거든요.  그런데 뭐든 마약과 연관지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저 'silver girl'이라는 부분에 대해 헤로인 주사 바늘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물론 그렇지 않았고, 당시 폴 사이먼와 막 결혼했던 Peggy Harper가 그때 즈음 머리칼에서 첫번째 흰머리를 발견하고 약간 우울해 했던 것을 위로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우스운 부분은 이 노래 전체는 언제나 그렇듯이 폴 사이먼이 작사 작곡을 다 알아서 한 것인데, 이 'Sail on silver girl' 부분만은 아트 가펑클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고, 정작 폴 사이먼은 이 부분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들은 모두 폴 사이먼이 작사작곡한 것이지만, 이 노래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가펑클이 솔로로 불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이 노래는 가펑클의 작사작곡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최대 히트곡인 이 노래를 가펑클이 웅장한 피날레와 함께 부르고나면 청중들이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하곤 했는데, 이 노래에서 맡은 파트가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도 다른 사람이 연주함...) 한쪽에 찌그러져 있던 폴 사이먼은 속으로 '이봐들, 그건 내 노래인데 !' 라며 질투를 느끼곤 했다네요.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제목은 보통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라고 번역되었는데, 사실 그 번역이 더 좋긴 합니다만 여기서는 그냥 원문에 충실하게 강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노래 감상은 아래 유튜브에서 하세요.

https://youtu.be/4G-YQA_bsOU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강물 너머 다리가 되어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all)

당신이 지치고 하찮게 느껴질때
눈물이 흘러넘치면 

내가 닦아줄게요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난 당신 편이에요 

거친 시절이 찾아와
친구들이 다 사라졌을 때에도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험한 강물 위 다리처럼
나를 밟고 가면 돼요

When you're down and out
When you're on the street

당신이 낙심하고 좌절할 때
당신이 거리에 내몰렸을 때

When evening falls so hard
I will comfort you (ooo)

저녁이 너무 힘겹게 느껴질 때
내가 당신을 위로해줄게요

I'll take your part, oh, 

when darkness comes
And pain is all around

내가 당신 몫을 맡아줄게요  

어둠이 찾아오고
사방이 고통 뿐이라고 해도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험한 강물 위 다리처럼
나를 밟고 가면 돼요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은빛 그대여 돛을 올려요
거침없이 나아가세요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이제 당신이 빛날 때가 왔어요
계획대로 나아가는 당신의 모든 꿈들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보세요

Oh, if you need a friend
I'm sailing right behind

혹시 당신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면
내가 당신 바로 뒤에 따라가고 있어요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ease your m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ease your mind

험한 강물 위 다리처럼
제가 당신에게 위안이 될게요


작사: Paul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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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지니 2019.05.16 0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와 나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셨군요. 저같은 경우는 갱년기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몸도 마음도 요샌 뭐가 이리 복잡한지, 왜 이러고 있는지 싶습니다 ㅎㅎ. 가정과 생계가 있으니 쉴수도 없고, 딱히 무언가에 대한 의욕도 없고, 퀸의 Somebody to love나 Under Pressure 들으면서 덩달아 울적해 지던 작년 가을이 떠오르네요..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과 애정, 관심과 배려가 살 이유를 만들어주는거 같습니다만.... ㅎ

  2. ㅇㅇ 2019.05.16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나시카님 글을 보고 힘을 내어 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3. keiway 2019.05.16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삶의 의미와 사후세계, 영혼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불교의 윤회 사상이 깊이있게 다가오더군요.
    나라는 존재는 전생에 나무였을수도, 다음생에는 동물일수도 있고
    내가 먹은 음식이 내가 되고 나는 또 죽어서 자연이 되고...
    계속 생각하다보면 무섭고 그러다보면 허무하고...
    깊은 사색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 허무를 탈출하기는 참으로 어려우니
    결국 가족이든 일이든 현실을 보며 외면하게 되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나시카님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삶의 본질을 찾느라 허무의 바다에 너무 깊게 빠지시진 않길 바래봅니다.

  4. Spitfire 2019.05.16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명제에 부딪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시카님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요.. 저는 유일신을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신교나 다른 종교를 부정하지도 않지만) 사후세계는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옥불에 오천만번 불타다보면 적응하는게 인간이라고 생각해서요. 천국의 풍요로움도 언젠가는 질려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이구요.

    그러다보니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천국도 지옥도 안간다면 남 눈치보면서 열심히 살아야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송세월하나 아둥바둥 사나 어차피 시간은 가고 죽음은 올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사람이 참 방탕해졌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고, 좋은 것만 찾고 싶고.. 이렇게요..

    그래도 지금은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 다시 활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사는 인생을 재밌게 살고 싶어서요. 방탕하게->신나게로 바뀌었다랄까요. 시간에 쫒기진 않지만 시간을 아깝게 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디 하루빨리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활기를 찾으시길 빕니다!

  5. 유애경 2019.05.16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전에 아는분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그분은 코믹하고 유쾌한 성격에다 항상 밝은 분위기 였기에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을 처음엔 다들 농담으로 넘길정도로 죽음 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분 이었기에 특히나 허무 했었더랬죠.
    그러면서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아야 겠다고 겸허해 지다가도 또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왜 나로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등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번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회 안나가니까 죽으면 지옥,까지는 생각하고 싶지않네요.
    나시카님 빨리 활력을 되찾았음 합니다!

  6. ian 2019.05.16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의 블로그 애독자로서 나시카님께서 빨리 마음을 추스리시길 바랍니다.

  7. 카를대공 2019.05.16 1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에 나시카님께서 글 올리시는걸 보고 신변에 심상찮은 일이 있겠구나 짐작은 했습니다.

    인간에게 시련이란 나이를 가리지 않고,횟수 역시 사정없이 찾아오는거 같습니다.

    가까운 지인도 아니고 나시카님 사생활을 알지도 못 하는 저로서는 "극복 가능한 일"이길 바라겠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늘 시련을 견뎌내고 일어서지만 현실은 역시 다르더라고요.

    결국은 극복 못 하고 무너지는 경우도 많이 봐서......심경에 큰 타격만 아니길 빌겠습니다.

  8. 화약짱짱 2019.05.16 1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합니다.
    삶 그자체가 목적이며 동기고 의미라고요.
    사람이 어떤 삶을 살든, 그 삶의 과정인 오늘 내일 자체가 태어난 의미이며 동기고 또한 목적인거죠.
    저도 가끔 인생에 회의가 들긴 합니다만 이렇게 순간순간이 최대의 목적이며 동기라는 생각을 하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보이더라고요.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해치는건 그 다른 사람이 태어난 최대 목적이자 동기, 의미인 삶 그자체를 파괴하는것이기 때문에 씻을수 없는 죄이죠. 박애사상도 그런 소중한 의미와 동기를 지키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개인적으로 남에게 피해만 안주면 그 삶들은 동등하게 무한적으로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9. Eugen 2019.05.16 2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존재는 존재하기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부모가 나를 낳았을 때 나의 의도(개입) 있었을까요? 그냥 낳음당한 거지요. 태어난 이상 사는거고 이왕 낳음당한 인생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후회는 최악의 선택이니까요.

  10. ㅎㅎ 2019.05.16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댓글을 답니다만 불교얘기가 나와서 또 댓글을 달게 되네요. ㅎㅎ
    말씀하신 것처럼 부처님이, 불교라는 게 결국 부처님의 사상이지만, 생물에 대해서 단순히 동등하다고만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르침에 인간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거죠. 괴로움은 우리가 인식하는 거니까요.

    좀 더 나아가서는 괴로움의 소멸을 해탈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재밌는 얘기가 나옵니다.
    바로 인간의 특별함에 대해서 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은 인간만이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동물은 의식이나 이런 부분에서 깨달을 수 있는 형상이 갖춰지 있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천신이나 등등은 그들의 신성으로 인해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의 과정이 없다고
    할 수 있겠네요.

    결국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우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더운 여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11. 지나가던 사람 2019.05.18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조영웅전의 이야기는 시비왕의 본생이라는 설화입니다. 제석천이 자비롭다는 시비왕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비둘기로, 자신은 매로 변해 저런 일을 꾸민(?) 거죠. 결국 시비왕은 살을 떼주다 못해 저울 위로 올라갔고, 그제서야 저울은 균형을 찾았습니다. 제석천은 본 모습을 보이고 왕의 몸을 회복시켜주었고, 이 시비왕이 싯다르타의 전생이라는 게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시비왕의(혹은 부처의) 자비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소설상에선 복수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로 기억합니다.

  12. 딸꾹 2019.05.18 1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교적인 이야기, 성경 구절을 보면 지레 진저리를 치며 꺼려하곤 했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합리화하고 강요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랄까요.
    하지만 나시카님께서 성경 구절을 언급하는 경우에는 다시 읽어보며 그 내용에 대해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평소 쓰신 글에서 제가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겠죠.
    알고 보이는 만큼 그 생각의 넓이도 다르니 그 크기는 비록 작으나마 다르겠지만 저도 우주에서의 나라는 사람의 크기나 생명의 이어짐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에 미칠 때가 있습니다. 그저 화학적 조성일 약 몇 알에 몸의 상태가, 나 자신의 생각과 태도가 완전히 바뀔 때도 그렇고..
    그러다보면 대부분의 것은 결국 의미를 부여함과 만족의 범주에 있어 그것을 어디에 두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무르곤 합니다.

    댓글을 자주 남기거나 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하는, 쓰시는 글들을 항상 감사히 또 즐거이 보고 있습니다. 어떤 식이어도 좋으니 부디 닫지 마시고 살살 이어가시다 다시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운내시란 말이 썩 어울리진 않지만 모쪼록 기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13. 이타카 2019.05.18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블로그부터 애독자였는데 댓글은 거의 처음 남겨보네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크기의 우주에서 억겁의 세월을 존재해 왔고 계속 억겁의 시간을 이어나갈 세상에서 끽해야 백년 정도 사는 한 사람의 머리 속의 전기가 찌릿찌릿해서 내린 결론이 절대적인 의미가 사실상 있을까요?
    역설적이지만 그런만큼 개개인이 결정한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차피 절대적인 정답도 그 정답의 의미도 없는데 진정 나에게 의미있는 삶과 존재의 뜻을 찾아가고 채워나가는 것이 진정하게 의미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아직 어려서 지킬것이 적어서 그런지 '이렇게 절대적으로 의미 없는 삶에서 나에게는 의미 있는 것을 남기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임종 직전에 돌이켜 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하루하루 내가 하는 일에 당위성을 주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카뮈는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거 같습니다.. 허허)
    무한한 시공간의 좌표가 우연히 겹쳐서 이렇게 인연이 되어 늘 insight있으신 글들이나 나폴레옹 뒷 이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적어도 주 2회 연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같은 애독자들이 있다는 점 기억해주시고 힘내셔서 꾸준히 좋은 글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도 내주세요..ㅋㅋ) 감사합니다!

  14. reinhardt100 2019.05.20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삶의 문제. 대단히 복잡할 겁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한 때 방황할 때 이것저것 몇년을 고민해보니 드는 생각은 '자살하는 것은 정말 용기가 있어야 하는 거다.'라는 결론이 들더군요. 그 정도 용기 있으면 살아남는 것이 먼저라는 결론이 도출되고요.

    나시카님께서 뭔가 큰 일이 있으신 듯 한데 지금은 그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골이 깊으면 그만큼 봉우리도 크니까요.

  15. 풀풀주스 2019.05.20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오기 전부터 몇년동안 너무 잘보고 있었는데 아니되옵니다 ㅠㅠ 바빠서 그러신가보다 했었는데, 독자로서 회의감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시길 바라겠습니다.

  16. ................ 2019.05.25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칼세이건이 창백한 푸른점을 언급하였지요. 사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에서 탄핵이 안일어나든, 미국이
    미쳐서 전세계에 핵을 떨구던 아무의미가 없지요. 그런대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의미가 없나요?
    각각의 생물은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만큼에 가치를 부여 합니다. 개미는 오늘 과자 함줌 더 발견하는데 의미를 둘거고,
    언급하신 매는 비둘기 한마리 더 잡아먹는데 가치를 부여하것죠. 그런대 그거 우리가 보기에 뭔 가치가 있나요? 없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우주적 존재가 보기에 지구에서 뭔일이 일어나든 알게 뭡니까?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잖아요.
    실제론 같지 않아요. 같다고 생각하면 그거 허무주의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