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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디노16

보로디노 에필로그 (4) - 자기 모순 한편, 프랑스군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적게는 2만8천부터 많게는 4만까지 피해 추정치는 다양한데, 여기서는 대략 3만5천이라고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의 전력을 대략 14만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5%의 피해였습니다. 거의 40%의 손실을 낸 러시아군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었지만, 어지간한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나 내던 손실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의 피해를 4만5천이라고 가정하면 하루 아침에 양측이 무려 9만5천의 피해를 낸 셈이었습니다. 이는 당대 유럽 전사상 단 하루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고, 이 기록은 제1차 세계대전 1916년 7월 1일 솜므(Somme) 전투 때까지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솜므 전투는 영불 연합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전투입니다. 약 140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2020. 11. 9.
보로디노 에필로그 (3) - 쿠투조프, 러시아를 구원하다 비아젬스키 대공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군 대부분이 전설 속의 영웅 나폴레옹을 상대로 잘 싸웠다고 스스로 우쭐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젊은 장교들과 최전선에 서지 않았던 부대들의 병사들 상당수가 정말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군은 괴멸상태였습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대략 3만8천에서 5만8천 정도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병력을 12만으로 추정하고 약 4만5천의 병력이 전사나 부상으로 손실되었다고 가정하면 37.5%의 손실을 낸 셈입니다. 보통 당시 전투에서 승자의 손실률이 10%, 패자는 20%였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참패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정말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손실률은 각각 14%와 2.. 2020. 11. 2.
보로디노 에필로그 (2) - 위풍당당 쿠투조프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이 끔찍했던 하루의 의미에 대해 곱씹으며 우울한 밤을 보내는 동안, 러시아군 진영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별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며칠 동안 삽질을 하며 구축해놓은 방어선을 버리고 후퇴했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는 것을 쿠투조프부터 맨바닥의 농민병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즉, 모두가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분위기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지만 러시아군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라는 역설적인 것이었습니다. 축구 약소국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 감정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독일이나 브라질과 치열하게 싸운 결과 7대8로 아쉽게 졌다면 분위기가 침통하겠습니까 ? 러시아군의 분위기가 딱 그랬습니다. 전투 직전까지 쿠투조.. 2020. 10. 26.
보로디노 에필로그 (1) - 우울한 승자 전투가 끝난 어두운 보로디노 벌판은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온 들판에 말과 사람의 시체와 부서진 장비들이 가득했는데, 대부분의 사상자는 포격에 의해 발생했기 때문에 그 시체들의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창자가 빠져나온 채로 비틀거리며 자꾸 일어서려는 말, 두동강이 난 병사들, 머리가 없는 시신들... 아직 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들이 내는 비명 소리와 신음소리는 살아남은 병사들의 신경을 긁었습니다. 먹을 것도 가져오지 못한 군대에게 붕대와 의약품, 들것 등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심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대부분 긴 고문에 의한 사형 선고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어떤 부상병들은 자기를 총으로 쏘아 죽여달라고 흐느끼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어떻게든 살겠다고 피를.. 2020. 10. 19.
보로디노 전투 (12) - 허무한 결말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을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3시간은 러시아군에게는 정말 소중한 재정비 기회였습니다. 쿠투조프는 여전히 고르키 마을에서 참모들과 노닥거리고 있었지만 바클레이는 러시아 방어선 우익에 포진되어 있던 병력을 대거 중앙과 좌익 쪽으로 옮겨 허물어진 방어선을 재구성했습니다. 특히 러시아군의 맹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이 라에프스키 보루 앞에 정렬했으므로 그 쪽으로 강력한 공격이 가해질 것이 뻔했으므로, 라에프스키 보루의 양 옆에도 보병들을 포진시켰고, 보루 뒤 800m 후방에는 보병과 포병으로 제2 방어선도 든든히 구축해놓았습니다. 콜랭쿠르가 목숨을 버려가며 점령한 라에프스키 보루는 그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트 페체르부르그 카잔 성당 인근에 있는 바클레이의 동상입니다. 분명히 그.. 2020. 10. 12.
보로디노 전투 (10) - 빵껍질에 묻은 것 오전 12시 즈음 프랑스군 좌익 뒤쪽에서 벌어진 러시아 기병대의 별 효과도 없던 돌격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이 전황을 다시 계산하느라 꾸물거리는 동안, 이때부터 거의 2시간 가량 본의 아니게 전투는 잠시 멈춤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전력을 다했던 프랑스군은 더 이상 공세를 계속할 힘이 없었고, 러시아군도 완전히 허물어진 중앙과 좌익 방어선을 재편성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양군 모두, 한가지 병종만 쉬지 않고 전투를 계속 했습니다. 바로 포병대였습니다. 양군의 포병대는 멈춰서서 도열한 적군을 향해 열심히 포격을 가했습니다. 이 포격전에 있어서는 프랑스군이 러시아군보다는 더 우위에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근위대는 거의 전투 현장에 투입하지 않았지만 근위 포병대 일부는 이 포격전에 투입했고 .. 2020. 9. 28.
보로디노 전투 (9) - 우연 또는 필연 오전 11시 정도에 고리키 마을 동쪽으로 사령부를 더 후퇴시킨 쿠투조프는 무척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건 결코 모든 전황을 통제하고 있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한 나태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군 참모 장교 하나는 당시 쿠투조프의 모습에 대해 '러시아 최고 가문들 출신의 우아하게 차려 입은 장교들과 함께 여유롭게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런 목가적인 신사분들에게 보기 흉하게 피를 철철 흘리는 프랑스군 보나미 장군이 끌려오자, 쿠투조프는 완벽하고 우아한 프랑스어로 접견하며 치료를 받고 쉬라고 권한 뒤, 마치 이미 승리하기라도 한 듯이 휘하 참모 장교들과 계속 노닥거렸습니다. 쿠투조프의 소풍 분위기를 해친 것은 피투성이 보나미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보나미가 부축을.. 2020. 9. 21.
보로디노 전투 (8) - 양파 쿠투조프의 지휘는 확실히 일관성도 없고 너무 무성의했습니다. 그러나 쿠투조프의 기본 전략이 괜찮았던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먼저, 분명히 쿠투조프는 러시아군은 프랑스군과 기동전을 벌일 실력이 안된다고 정확하게 평가하고 무조건 좁은 지형에서의 방어전으로 전략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국의 웰링턴과 확실히 비슷했지요. 그러나 웰링턴과는 다른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웰링턴은 영국군을 향상 2~3줄의 얇은 횡대로 펼쳐서 최대한의 화력을 전진하는 프랑스군에게 퍼붓는 전술을 썼습니다. 필요시에는 반원 모양으로 대오를 수축시켜 종대로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의 선두 부분을 집중 사격하는 세심함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사회 밑바닥 층을 모병제로 끌어모아 만든 영국군 특성상 이해력은 떨어져도 장기간에 걸쳐 실.. 2020. 9. 14.
보로디노 전투 (7) - 쿠투조프의 미친 듯한 지휘 이렇게 프랑스군이 오전 10시경에 이미 주요 전장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 일보 직전인 상황 속에서, 러시아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쿠투조프의 활약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셰바르디노 언덕 위에 접이식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망원경으로 전황을 직접 살펴 보았다고 했지요. 그에 비해 쿠투조프는 고르키(Gorki) 마을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의 주공격 방향이 될 거라고 예상한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대로변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주전장이 될 러시아군 좌익과는 거리도 꽤 멀었지만 무엇보다 대로변이라는 낮은 지형 특성상 쿠투조프는 여기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전날부터 프랑스군이 "우리는 러시아군의 좌익을 남쪽으로부터 공격해들어갈 거다아아아"라고 .. 2020. 9. 7.
보로디노 전투 (6) - 압승 전투가 시작된지 4시간 만인 오전 10시, 다시 3개의 철각보가 모두 프랑스군 손에 떨어진 뒤, 바그라티온은 그에 굴하지 않고 다시 철각보를 뺴앗기 위해 병력을 모아 쳐들어갔습니다. 러시아 사내들의 용기도 만만치 않아서 끝내 이들은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다시 철각보들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포탄 파편이 날아와 바그라티온의 다리를 때리며 부러뜨렸습니다. 바그라티온은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며 계속 전투를 지휘했지만 곧 기력을 잃고 주저 앉았고, 부하들에 의해 전장 밖으로 실려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기 위해 나왔던 바클레이의 부관이자 바그라티온이 싫어하던 독일인 로벤슈테른(Karl Fedorovich Lowenstern) 장군이 마침 거기에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왔.. 2020. 8. 31.
보로디노 전투 (5) - 바그라티온의 철각보 전투는 오전 6시에 프랑스군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러시아군 포병대도 사격을 시작하며 보로디노 일대는 포성과 화약 연기로 뒤덮였습니다. 이때 러시아군의 대포 수는 637문, 프랑스군은 587문이었는데 특히 프랑스 포병대는 비교적 작은 구경의 경포들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군의 포격이 훨씬 더 위력적이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신중한 쿠투조프는 약 300문의 대포를 전황에 따라 전개하겠다면서 후방에 예비대로 묶어 놓고 있었고, 전개된 337문의 대포도 아무런 공격이 진행되고 있지 않던 러시아 우익에 많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약 150문의 러시아 대포만 열심히 대응 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군도 109문의 대포는 근위 포병.. 2020. 8. 24.
보로디노 전투 (4) - 아우스테를리츠의 기억 9월 6일 밤, 나폴레옹의 천막에서 당직을 설 장군은 용감하고 충직한 랍(Jean Rapp)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날 밤 잠들기 전에 근처를 흐르는 모스크바 강의 이름을 따서 내일 있을 전투의 이름을 'la Moskowa'라고 미리 지어놓을 정도로 이 전투의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3시에 일어나 펀치주 한잔의 조촐한 아침 식사를 랍과 함께 한 나폴레옹의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습니다. 그는 랍에게 오늘 전세가 어떨 것 같으냐고 물은 뒤, 당연히 돌아온 낙관적인 대답에 대해 '행운의 여신은 변덕스러운 매춘부인데 이제 그걸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매우 냉소적인 혼잣말을 했습니다. 랍은 그 풀이 죽은 듯한 나폴레옹의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모스크바가 멀지 않았고 먹.. 2020.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