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전투 내내 나폴레옹의 옆을 지키며 전투 현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던 사바리 장군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킬 정도로 잘 싸웠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전투의 승패는 어느 쪽의 사상자가 더 많았는가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꼬리를 말아쥐고 물러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데, 보통 등을 보이며 후퇴하는 측의 대오가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그 뒤를 추격하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패자의 사상자 수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바그람 전투에서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대오를 굳게 지켰고, 결국 프랑스군은 평소 하던 대로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재정난을 일으킬 정도로 군비를 투입하여 카알 대공이 열심히 육성한 상비군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굳센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대 스파르타에 전해지는 격언 중에 '한 국가와 반복하여 자주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유는 잦은 전쟁 경험은 상대국에게도 군사 역량의 강화를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겪은 바가 딱 그랬습니다.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에 의한 징집군의 편성, 기동력을 중시한 전술, 자율성과 유연성을 잘 살려주는 군단제 운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지고 있던 상대적 우월성은 어느 틈엔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어느 정도 복제되어 있었고, 이는 전투력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또 카알 대공의 근본적인 전략도 오스트리아군의 비교적 질서있는 후퇴에 일조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전쟁 시작 전부터 개전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요.  그는 어차피 오스트리아 혼자 싸우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꺾을 수는 없으며, 만약 싸우더라도 최후의 일인까지 다 죽어 쓰러지는 결전보다는 적당히 싸우다 패배가 분명해지면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더라도 군사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상태여야 나폴레옹과의 종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그런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2~3시 경에 이미 후퇴를 결정했고,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힘을 좀 남겨둔 채로 후퇴를 시작하여 군사력을 보존한 채, 심지어 프랑스군 포로 수천 명까지 끌고 후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 새벽, 나폴레옹이 혹시 오스트리아군이 어제에 이어 다시 도전해올 것인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건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그람 전투가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꽤 순한 전투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바그람 전투는 이긴 프랑스군이나 진 오스트리아군이나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상자 수를 낸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양측의 참전 병력이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17만, 오스트리아군도 요한 대공의 병력까지 합해서 약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되어 있지요.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군대는 언저리까지만 오고 총 한방 쏘지 않았으니 전투 참전 병력 수에서는 빼는 것이 맞겠고, 또 프랑스군도 로바우섬을 지키던 보병들은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일부 빠지겠습니다만, 아무튼 양측이 무려 3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는 유사 이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이 한 자리에 집결하여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참전 병력이 많으니 당연히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상자 수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고, 또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대내외 과시를 위해 적의 사상자 수를 부풀리고 아군의 사상자 수는 양심도 없이 작게 조작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 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서는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전사 1,500에 부상 3~4,000으로 경미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실제 사상자 수는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혹자는 4만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도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약 20% 가까운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승자 측의 사상율이 약 10%, 패자 측은 약 20%가 상식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바그람 전투는 양측 모두 패배였던 셈입니다.  


양측의 피해가 모두 컸던 이유는 이 바그람 전투는 유례없는 대규모 포격전을 동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488문, 오스트리아군도 414문이나 되는 전례없는 막강한 화력을 총동원했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특히 이 전투의 주무대였던 마르히펠트의 평원이 지형과 지질 탓이 컸습니다.  이곳은 땅 표면이 비교적 단단하고 매우 평평한 지역인지라, 대포알들이 땅에 처박히지 않고 통통 튀며 먼거리까지 날아가면서 많은 병사들의 팔다리와 허리를 꺾어놓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전투가 끝난 뒤, 이 전투는 포병에 의한 승리라며 휘하 포병들의 노고를 칭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병대에게 영광을 더해주고자 전체 포병단 총사령관인 라리부아지에르(Jean Ambroise Baston de Lariboisière) 장군의 아들 페르디낭(Ferdinand Baston de La Riboisière)을 뽑아 이 승전보를 파리로 전하게 했습니다. 





(이 그림이 드물게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이 한꺼번에 나온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초상입니다.  바그람 전투 당시 27세였던 페르디낭은 카라비니에, 즉 총기병대 소속 장교였는데, 역시 나폴레옹의 과도한 욕심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1812년 보르디노 전투에서 전사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너무나 슬픔에 젖은 나머지 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1812년 겨울을 못 넘기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낭이 들고간 승전보에는 파리 시민들이 기대했던 화려한 전과는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그런 전과는 노획한 적의 군기와 대포, 그리고 많은 포로의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이 좀 부실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10폭의 군기와 20문의 대포, 그리고 약 7,500의 포로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빼앗긴 것은 군기 12폭, 대포 21문에 포로도 약 7천 이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적자를 보았던 셈이지요.   그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이 계산서를 받아든 나폴레옹은 '전쟁이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노획한 대포도 포로도 거의 없구나, 아무 결과가 없군'이라며 한탄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전투 다음날인 7월 7일 아침 잠에서 깬 나폴레옹은 혹시 카알 대공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도전해오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날 아침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의 막사를 찾은 막도날드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주고는 그를 '프랑스 제국의 원수'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즉, 영광스러운 원수의 계급으로 승진을 시켜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디노와 마르몽에게도 원수 계급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병사들은 막도날과 우디노는 그렇다치고, 마르몽은 뭔일래냐 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파르퀑(Parquin)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아예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막도날은 프랑스가 지명했고, 우디노는 군이 지명했는데, 마르몽은 우정이 지명한거라네"

(La France a nommé Macdonald, l'armée a nommé Oudinot, l'amitié a nommé Marmont)


사실 마르몽 달마시아(Dalmatia) 군단을 이끌고 최후의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아무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원수 임명장과 함께 별도의 개인 편지를 함께 마르몽에게 보내,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지만, 넌 이 계급에 어울리는 전공을 올린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갈구기도 했습니다.





(마르몽은 배신의 대명사로서, 라구사 공작이었던 그를 따서 Raguser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현대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봐도 정말 raguser는 trahir, 즉 배신하다라는 말의 동의어라고 설명이 나옵니다.  당대에는 더 심해서, 1830년 7월 혁명 당시 그가 시위 진압을 주저하자, 부르봉 왕가의 앙굴렘 공작은 그에게 "그를 배신했듯이 우리도 배신하려는거냐 ?" 라며 맹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갈굼을 당한 마르몽에게 '승진을 정당화시켜줄 전공을 세우라'는 말과 함께 카알 대공을 추격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의 달마시아 군단은 1만1천 정도로 매우 빈약한 편이었지만 전날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아 체력 고갈이 없는 유일한 부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 마르몽은 3일 후인 7월 10일 츠나임(Znaim)에서 카알 대공의 잔존 병력 약 5만을 포착했습니다.   1만대 5만의 대결이었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마르몽은 바로 뒤를 나폴레옹의 본대가 따라올 것이므로 적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지는 전법을 썼습니다.  결국 양측이 하루를 넘겨가며 수천 명씩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다음날 저녁 무렵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하자, 카알 대공은 휴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카알 대공 인생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후 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는 이 휴전 협정을 맺으며 총사령관직을 비롯한 모든 관직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카알 대공은 이 휴전에 대해 월권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프란츠 황제의 승인없이 이렇게 휴전 요청을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병사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존을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과 그의 가족입니다.  그가 나폴레옹급의 천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현실 감각이 없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래도 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사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처음부터 옳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Jean_Ambroise_Baston_de_Lariboisi%C3%A8re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articles/oudinot-en-1809-1810-les-lauriers-de-la-gloire/

https://en.wikipedia.org/wiki/July_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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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loi 2017.11.11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라고 쓰셨는데 문장 배치를 잘못하신거 같아요

  2. 푸푸냐옹 2017.11.11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첫댓글의 영광이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3. 최홍락 2017.11.12 0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긴 전투가 끝난 것 같네요. 바그람도 밑에 작성하신글의 댓글란도...

    • 장세동 2017.11.12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리를 추구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 수비니우스 2017.11.13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란주동자를 닉네임으로 쓰시면서 진리를 추구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니 어떤 진리인지 궁금해지는군요.

  4. 웃자웃어 2017.11.12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보기에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보다는 약하지만(프랑스가 능력위주로 장교나 지휘관을 임용하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귀족위주이니.....).
    이전에 비하면 많이 강해진건 사실인것 같습니다. 즉 프랑스군과 완전히 대등하지는 않아도, 어느정도 맞서 싸우는게 가능할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5. 유애경 2017.11.12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페르디낭,잘 생겼네요^ ^.
    근데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그림은 부자지간 이라기보다 할아버지와 손자같은 느낌...결국 전쟁에 희생되고 아버지도 슬픔으로 쓰러진후 병사 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카알대공의 가족은 화목해 보입니다.
    그도 이어지는 전쟁으로 심신이 많이 지쳤었겠죠!
    전쟁은 정말 없어져야할 비극중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6. 투팍아마르 2017.11.12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를 앞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라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말했다는데 나폴레옹은 개인의 영광(이라 쓰고 야망이라 읽음)과 프랑스의 위대함을 위해 전쟁을 서슴치 않았던 반면 카를대공은 비록 그에 맞서 싸워야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무의미한 학살극을 줄이려 애를 썼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7. reinhardt100 2017.11.12 2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오스트리아의 경우, 헝가리,체코 민족 문제가 이 당시 정말 심각했습니다. 이 문제와 슐레지엔 상실이 겹쳐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 국력에 비해서 총력전 수행이 매우 어려웠으니까요.

    바그람 전투 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후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투사한 군사력의 최소 1/4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라는 게 간과됩니다만 그만큼 민족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흔히 1차 세계대전 당시 남슬라브 계열 군인들의 태업 및 보로실로프 공세 당시 러시아군에 집단투항하는 모습이 워낙 커서 그렇지, 1866년 대타협 이전만 해도 헝가리 민족은 반합스부르크의 대표주자였습니다. 인구 1/4 이상이 헝가리인이었는데 이들을 전장에 대량 투입시킬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상대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계를 대거 동원했는데, 아무래도 대 오스만 전선에서 싸우는 것 보다는 비효율적이었으니까요.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하게 두드러진게 프랑스 혁명 전쟁기에 오스트리아군이 보여준 전투력입니다. 북이탈리아에 투입된 오스트리아군 절반 이상이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계다 보니 라인 방면이나 플랑드르 방면에 투입된 독일계 병력에 비해 작전 수행에서 비효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 본토 2017.11.15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헝가리계를 동원 못한 이유가 있었나요?

    • reinhardt100 2017.11.15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토님께.

      제가 티스토리가 익숙치 않아서 좀 중구난방적으로 댓글 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 양해 구합니다.

      헝가리나 체코 민족 문제는 크게 몇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통성 문제가 있었습니다. 헝가리 같은 경우, 서기 1000년에 맞추어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책봉을 받아서 기독교 유럽 세계에 편입되었다는 자부심이 꽤나 강했습니다. 그리고 11-15세기 내내 동부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카로이 1세 때인 14세기 후반에는 폴란드-헝가리-크로아티아-왈라키아-몰다비아-보스니아 까지 장악했던 나라입니다. 체코, 이 당시는 보헤미아 왕국인데 이 지역도 13세기 대공위시대에는 합스부르크 따위는 명함 못 내밀 신성로마제국 내 최대 제후, 게다가 당시 독일왕-이탈리아왕-보헤미아왕의 3왕 체제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반면 합스부르크는? 스위스 아르가우의 촌동네 백작에서 겨우 벗어나서 스위스와 상 오스트리아 정도만 간신히 확보한 말 그대로 동네 왕초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가문이 결혼 몇 번 잘 하고 줄타기 몇 번 잘 해서 자신들의 상전으로 올라갔으니 헝가리나 체코 민족 입장에서는 '근본도 없는 벼락출세한 가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헝가리 같은 경우, 마챠시 1세 시절인 1485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신 없을 때, 빈을 함락시켰고 그 전에도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가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헝가리 같은 경우, 1593년부터 시작된 13년 전쟁에서 기껏 왈라키아, 몰다비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했음에도 무능한 황제였던 루돌프 2세가 케네베레츠 평원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독립의 희망을 꺼 버리는 짓만 하니 1606년도에 보스트카이 이슈트반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트란실바니아공국을 만들어 오스만 제국에 투항했는데도 헝가리인들 누구도 반대는 커녕 잘했다 분위기였죠. 이걸 시작으로 해서 헝가리 민족은 17,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에 문제만 터지면 반란을 일으켰는데, 유일한 예외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때였습니다. 체코 같은 경우도 30년 전쟁에서 강제로 재카톨릭화된 것에 대한 반감 및 합스부르크령이라는 이유로 스웨덴군의 집중적인 수탈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이후 17-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해 준 것도 없이 제국 내에서 공업이 발달했다는 이유로 중과세를 집중적으로 부과, '부유한 체코 지역을 쥐어짜서 못 사는 동네, 특히 오스트리아와 티롤, 크로아티아 지역 변경 군관구를 경영할 자금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백년도 더 진행됩니다. 이게 슐레지엔을 최종적으로 상실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는 더 이상 세금 쥐어짤 동네가 체코와 북이탈리아밖에 남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고, 그 중 북이탈리아는 베네치아공화국이나 사보이아 왕국등의 경쟁국가들과의 세율 경쟁 문제까지 겹치면서 쥐어짤 수도 없었고, 결국 체코만 더 쥐어짜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악화됩니다. 이건 19세기, 아니 20세기 초반까지 완화되기는커녕 계속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20세기 초반 이중제국이 붕괴되는 결정적 신호탄으로 작용합니다.

      세번째, 당시,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스만제국 국경지대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덕분에 한때 구 헝가리 왕국 전체, 베오그라드와 보이보디나 지역까지 합스부르크가 차지하긴 했지만, 1737-1739년에 있었던 7차 터키-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한 번에 싹 다 말아먹어버립니다. 이 때 오스트리아가 넘긴 영토가 왈라키아 전역, 서부의 바나트(티미쇼아라)를 제외한 트란실바니아 남부 및 중부, 베오그라드, 보이보디나 등 한 마디로 기껏 40년동안 빼앗아 온 영토를 이거 하나로 싹 다 날린겁니다. 특히, 베오그라드 상실이 치명적이었는데, 베오그라드가 발칸 반도 서부에서 도하하기 가장 유리한 위치로써 터키 제국 북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죠. 그런데 터키가 이곳을 가지게 되면서 언제든지 밀고 올라올 수 있다는 공포감이 그 당시까지는 현존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7차 전쟁 당시, 베오그라드 공방전이 끝나자마자 터키는 대규모 원정군을 추가로 동원 제3차 빈 포위를 하려고 했지만, 러시아 전선이 급박해지면서 중단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에, 1770년대 후반, 바이에른 선제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대터키방어를 무시하고 모든 병력을 바이에른에다가 투입했는데, 당시 헝가리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죠. '그러다가 터키가 북진하면 너네가 책임질거냐?'였고 당연한 걱정이지만, 합스부르크는 그건 우리와 상관없다 식으로 무책임하게 넘겨버렸죠. 다행히도 당시, 터키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완패를 하는 바람에 군대 재건에 집중해야 해서 기우에 그쳤지만,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를 그저 쓰고 버리는 말 정도로 본다는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번째로, 헝가리 병력의 구성문제입니다. 헝가리나 폴란드 같은 국가는 기병이 주력인데, 이 당시 서구권 군대는 기본이 전열 보병전술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헝가리 인들하고는 그리 맞을 리 없었죠.

      일단 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결론은?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나 체코 민족에게는 압제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 수비니우스 2017.11.16 0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이 언제인가요?? 신성로마제국 황제목록을 봐도 잘 모르겠어서요...

    • 본토 2017.11.16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흥미로운 내용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궁금한게 해결됬어요 ㅎㅎ 혹시 나시카님처럼 관련 내용 블로그 같은데 올리시나요?

    • 수비니우스 2017.11.16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사례 좀 부탁드려요.

  8. Guillaumet 2017.11.13 0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에 오스트리아 여행가서 본 카알대공 동상이 생각나네요. 확실히 동상이 세워질 만한 인물이였던거 같습니다

  9. 수비니우스 2017.11.14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을 주춤하게 만든 카를 대공이 더이상 오스트리아군을 이끌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전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시카님 글 읽고나니까 이해가 잘되네요 ㅎㅎ

  10. jager 2017.11.14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카를 대공이 천수는 누린 거 같은데, 만약 계속 군을 지휘했으면 끝이 안좋았을겁니다

  11. reinhardt100 2017.11.16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토님 블로그 같은거는 하지 않습니다. 해봐야 헛소리하는 사람들 와서 헛소리 늘어놓는거 문제와 저작권법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일이 각주 다는게 귀찮아서요. 댓글달아주고 처리하는게 더 편하기도 합니다.

    • 수비니우스 2017.11.16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느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거에요?? 이건 헛소리도 아니고 저작권의 문제도 상관없는것 같은데요

    • reinhardt100 2017.11.16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보기 싫다. 황당하다. 불쾌하다. 어설프게 댓글달지 말라. 그 밖에도 표현들 많이도 달아놓았었죠? 그리고 꼬박꼬박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보기
      싫은 댓글 다는 사람한테 궁금하니까 질문? 앞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변? 기대하지 마세요.

    • 수비니우스 2017.11.17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꼬박꼬박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보기싫은 댓글 다는 사람한테 궁금하니까 질문? 앞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변? 기대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황당하네요.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님의 주장의 근거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겁니다. 이걸 얘기 안하는건 님의 주장의 근거만 약화시키는게 될겁니다. 뭐 하고싶은 말만 학술적인 모양의 포장으로 말씀하실거면 답변 안하셔도 됩니다. 맞는지 안맞는지 근거제시 안할것이니 검증하지 말라는 말은 무적이니까요.

      어느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건지를 말해달라는건 님의 주장의 근거를 확실히 해달라는 것이고, 이전에 님의 댓글이 보기 싫었던건 분위기를 망치거나 지금처럼 근거를 밝혀달라고 할때 밝히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인건데, 지난번 것은 개인의 일이니까 안밝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순수하게 학술적인 거잖아요? 말못할 사정이 있나요?

      그리고 전 "어설프게" 댓글달지 말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있으면 해당부분을 복붙하고 해당댓글의 날짜를 옆에 적어주세요. 댓글보기 싫다, 황당하다, 불쾌하다는 지난번의 댓글들 얘기고 이번 댓글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는데 끌어오는 것은 당황스럽네요.

    • ㅇㅇ 2017.11.17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사회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A%B8%B0%EC%8A%A4%EB%AC%B8%ED%8A%B8_(%EC%8B%A0%EC%84%B1_%EB%A1%9C%EB%A7%88_%EC%A0%9C%EA%B5%AD)
      여기 예시 하나 있네요.
      이거 찾는거 하나도 안 어렵고 구글에 헝가리 왕 신성로마제국 하나 치면 바로 나옵니다.
      님 같은 분들보고 핑프라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찾아보면 쉽게 되는걸 꼭 남한테
      난리를 피우는 핑거 프린세스라고...
      자기가 하는 짓을 학술적인 근거 제시 요구라고 포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는데, 학자가 근거 제시를 포함한 확술 활동을 제대로 하면 학술적 권위, 명예, 직위, 금전 등등을 얻죠. 님은 저분한테 뭘 줍니까? 대빵만한 스트레스?

    • 수비니우스 2017.11.17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전에도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도 있습니다."라고 해서 헝가리 왕이 다른 독일 왕가 가문처럼 여러명을 몇백년에 걸쳐서 황제를 겸임했던 건가 했는데 구구레카스의 정신으로 구글링했더니만 링크의 딱 한명 뿐이었고, 심지어 그 한명은 친아빠가 룩셈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자식이 딸밖에 없던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도 좋게 할겸 해서 양자이자 사위로 데려가서 헝가리 왕에 앉혀준 것으로 헝가리 사람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 왕가로 구분되는 사람이었네요. 참 많군요! 다른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은 죄다 1500년대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이고...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분석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 ㅇㅇ 2017.11.17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분은 많다고 한 적이 없으니까요. 26년정도면 한동안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별 문제가 없고. 그걸 뭐 수백년 했다고 상상한건 님 자유니 그거야 남이 신경쓸 일은 아니고...
      그 문단의 요지는 그 시점에 합스부르크에 비해서 헝가리 왕가의 역사적 권위가 훨씬 높았다는 거 아닌가요? 그럼 요지에 어긋나는 얘기도 아니죠. 제국 황제 가문쯤 되면 웬만큼 권위 없는 집안으로 아들을 양자나 사위 보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그리고 저도 "친아빠가 룩셈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자식이 딸밖에 없던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도 좋게 할겸 해서 양자이자 사위로 데려가서 헝가리 왕에 앉혀준 것으로 헝가리 사람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 왕가로 구분되는 사람" 관련된 내용 궁금한데 출처 좀 알려주세요.

    • 수비니우스 2017.11.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거 님이 링크단 위키피디아에서 링크만 몇번 타면 나오는데... 뭐 제가 문의한거에 카운터 같으니까 전 "님 같은 분들보고 핑프라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찾아보면 쉽게 되는걸 꼭 남한테 난리를 피우는 핑거 프린세스라고..."라고는 안할께요.
      26년이면 한동안인게 맞는데 그마저도 독일출신 빨인거지 헝가리왕빨은 아닌거잖아요. 헝가리왕빨이면 이전이나 이후에도 헝가리왕들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요. 사실 저기가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 황제 중 마지막이긴 하지만요.

    • ㅇㅇ 2017.11.17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아채시니 다행이네요.
      여튼 저 문단의 핵심은 헝가리 왕가가 합스부르크에 비해서 역사적 권위가 높았다는 거지 지기스문드가 신롬 황제가 되는데 헝가리 왕빨이 얼마나 먹어줬는지가 아니죠? 그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동시대에 합스부르크 가가 신롬 황제가문과 통혼하거나 양자로 들이거나 하는 예를 가져오셔야죠. 그러면 이 봐라 헝가리 왕가가 합스부르크 가에 비해서 당시 권위가 별로 나을것도 없었다 주장할 수 있죠. 핵심 논지가 아닌 부분에서 자존심 싸움에 너무 시간 들일 필요는 없어보이네요.

    • 수비니우스 2017.11.18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핵심 논지가 아닌 부분에 질문 하나 한 것을 제3자가 끼어들어서 자존심 싸움으로 몰아가는 데에 제가 시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 안해서 그냥 알려달라고 한건데 말이죠. 그걸 끼어들어서 핑프다 뭐다 할 자격이 누군가에게는 있는 걸까요.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독해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양측의 모든 장군들이 다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만, 프랑스군의 맨 오른쪽을 담당한 다부(Louis-Nicolas Davout)도 새벽부터 바빴습니다.  사실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스타트를 끊은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이 다부의 프랑스군 제 3군단을 습격한 사건이었지요.  이 공격은 이미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해놓았던 다부에 의해 즉각 격퇴되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현장에 달려오는 등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중앙을 버려두고 맨 동쪽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요 ?  당시 39세로서 프랑스군 원수 중에서는 가장 어렸던 다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요 ?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그 능력에 있어서나 충성심에 있어서나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새벽의 그 소동이,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멀리서 당도한 것인지 걱정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이 루스바흐(Russbach) 고원의 지형적 우위를 버리고 평원으로 내려와 감히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지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이번 전투의 승패는 바로 다부의 제3 군단의 활약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은 완만한 반원형으로 굽은, 동서로 길게 뻗은 고지의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진형 때문에 프랑스군이 평야 저지대로부터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역이용하려 한 것이 바그람 전투의 핵심이었습니다.  평야에 배치된 프랑스 군단들이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망치 역할을 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측면에서 납작하게 때리는 역할을 할 것이 다부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부가 먼저 로젠베르크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이 포진한 루스바흐 고원의 동쪽 끝에 올라선 다음, 거기서부터 김밥 말듯 오스트리아군을 돌돌 말아올려야 했거든요.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면 두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저 멀리 프레스부르크에서 오고 있다는 요한 대공의 군대가 제때 나타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쪽에 배치해둔 정찰 병력이, 요한 대공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거든요.  둘째 조건은 다부의 측면 공격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측면을 찔러, 분산된 적군을 조금씩 분쇄하며 전진하는 것이 승리의 요소였는데, 만약 적군이 나폴레옹의 작전을 눈치채고 동쪽 고지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한다면 아무리 다부라고 해도 쉬운 승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벌어진 로젠베르크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기습의 요소가 망가져버리자, 나폴레옹은 전체 작전이 흔들릴까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물러가 또아리를 튼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 뒤, 기습이라는 잇점이 사라진 것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다부에게 하달했습니다.  즉, 공세를 두갈래로 나누어,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정면과 함께 측면으로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둘러본 그 일대 지형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바라보고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남서쪽면은 꽤 급한 경사면으로 되어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쪽 측면은 매우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어 진격이 꽤 수월해보였던 것입니다.  다만, 그 동쪽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력을 루스바흐(Russbach) 개천 너머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대포를 개천 너머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임시 가교를 놓는 등 꽤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습의 요건이 사라진 이상,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나폴레옹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항공 사진에 당시 다부의 공격 방향을 표시한 것입니다.  루스바흐 개천의 모습은 아마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공격 개시 시간이 2~3시간 늦어지더라도, 어차피 처음부터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프랑스 군단들 중 그야말로 최강의 군단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프랑스군의 각 군단은 4개 보병 사단에 포병 연대와 기병 연대까지 합해서 약 2~3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편제였고, 실제로는 전투에 나설 때 2만을 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1만7천 정도의 병력만 갖추고 있었고, 달마시아(Dalmatia) 방면군으로 형성된 마르몽(Marmont)의 제11 군단은 1만에 불과했습니다.  주요 지휘관이 거느린 군단은 규모가 좀더 컸습니다.  나폴레옹이 새벽부터 아스페른부터 아더클라까지의 약 8km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며 조자룡 헌창 쓰듯 부려먹은 마세나의 제4 군단도 2만8천의 병력에 86문의 대포를 갖춘 강력한 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다부의 손에 쥐어준 제3 군단은 무려 3만8천의 병력에 120문의 대포를 가진 진짜 전쟁 기계였습니다.  그에 비해 로젠베르크가 거느린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은 1만9천의 병력에 60문의 대포 뿐이었고, 전날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 장군의 전위대 잔존 세력 6천을 합해도 다부의 제3 군단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화력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나폴레옹은 새벽에 달려온 지원 병력 중 원래 기병 예비군단 소속이던 아리기(Jean-Toussaint Arrighi de Casanova) 장군의 흉갑기병 사단 약 2천을 다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애초에 로젠베르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리기 장군은 나폴레옹과 같은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조카사위 뻘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초기부터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이 전투 뒤에 '다부가 자신의 흉갑기병 부대를 터무니없는 지형 속에 쳐넣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쪼르르 나폴레옹에게 쫓아가 일러바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부가 아리기의 부대를 부적절한 지형에 투입한 것은 맞는 말이긴 했습니다.)




다부의 공격은 오전 10시 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부는 나폴레옹이 명령한 대로 병력과 대포를 반으로 나눠 정면, 즉 그로스호펜(Grosshofen) 쪽으로부터는 구댕(Gudin)과 퓌토(Puthod) 사단을 진격시켰고, 동쪽 측면으로부터는 미리 동쪽에서 루스바흐 개천을 건너 위치를 잡은 프리앙(Friant)과 모랑(Morand) 사단이 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나폴레옹 머리 속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프리앙과 모랑의 사단들이 측면을 우회하느라 이동하는 모습을 로젠베르크는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거든요.  확실히 고지를 점거한 측이 전투 현장에서의 정보 파악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에는 랜드마크 격인 꽤 높은 탑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모두 훤히 보였습니다.  당연히 정면으로 도전해온 구댕과 퓌토은 물론, 측면으로 들어온 프리앙과 모랑 모두가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지금도 서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입니다.  교회는 아니고... 무슨 목적의 탑인지 못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사기만 충천할 뿐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포병대와 기병대의 전력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새벽에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의 선제 공격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숙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훨씬 많았던 프랑스군의 포병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이미 많은 수의 대포를 파괴당한 상태였습니다.  압도적인 프랑스 포병대가 우박처럼 쏘아대는 포탄과 폭발탄에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은 곧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전진해오는 프랑스군 보병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위협을 가했으나, 이들도 훨씬 더 우세한 프랑스군 기병대에 곧 제압되었습니다.  특히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패전 이후 많은 군마를 나폴레옹에게 몰수당한 뒤 기병 양성에 애로사항이 많았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집단 기동에 무척이나 미숙했습니다.  로젠베르크에게 배속된 오스트리아 기병대도 숫자는 적지 않았습니다.  긴 횡대 진형의 끝 부분을 맡고 있는 로젠베르크 군단의 중요성과 취약성을 잘 알고 있던 카알 대공이 무려 5200명의 기병대를 배치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부가 거느린 약 8000의 기병대와 겨루어 볼만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중대(squad) 단위의 전술 정도만 익혔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랑스군 기병대처럼 연대 단위가 한덩어리로 돌격과 선회를 자유자재로 하는 적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의미없는 소규모 돌격을 거듭하다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보이는 곳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쓰러지는 바람에 함께 쓰러진 다부의 모습입니다.  이건 봉변이 아니라 상당한 명예였습니다.  당시 장군들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용담으로 '내가 탔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진짜든 거짓말이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정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다부 휘하에서 이 공격에 참여했던 제7 경보병 연대의 한 병사는 적의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자신도 전에는 한 전투에서 그렇게 많은 총탄을 쏘아댄 적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머스켓 소총이 너무 뜨거워져서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불타는 마을에서, 구댕+퓌토와 프리앙+모랑의 4개 사단이 양측에서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십자 사격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을은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무너지려는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전위대 사령관 노르드만(Armand von Nordmann)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참호 속에 빠졌는데, 황급히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이런 고위급 장군마저 내버려둔 채 퇴각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프랑스군에 의해 발견된 노르드만은 그 날 49세의 한많은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아르만 폰 노르드만입니다.  그는 원래 프랑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알자스 출신으로서 독일어가 모국어였지요.  그는 프랑스군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 혁명 뒤에도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뒤무리에 장군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무리에가 망명한 이후 결국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거기서 프랑스군과 계속 싸웠습니다.  나폴레옹은 노르드만을 말할 때마다 '그 알자스 배신자'라고 부르며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은 비록 철저하게 밀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로젠베르크는 약간 서쪽으로 물러난 뒤, 다부가 더 이상 김밥말이를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 앞에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마침 그때 카알 대공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 예비대를 이끌고 황급히 달려와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미 고원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다부의 제3 군단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을의 돌담 뒤에서도 버티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이, 허허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일렬로 늘어선다고 버틸 수 있을리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몸으로 쌓은 방어벽은 프랑스군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후 1시 경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북서쪽으로 패퇴하고 그 자리를 다부의 군단이 차지하자, 상황은 나폴레옹이 바라던 모습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의 군단의 측면이 다부의 포병대에게 그대로 노출된 것입니다.  이제 오스트리아군에게 남은 것은 나폴레옹의 구상대로 돌돌 말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라데츠키(Radetzky) 장군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이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이미 "젠장, 이 전투는 졌구만"이라고 한탄한 바 있었습니다.  클레나우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이 프랑스군의 후방 아스페른과 에슬링를 공격할 때, 나폴레옹 주변의 젊은 참모 장교들은 후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성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나폴레옹에게 '배후를 습격당했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후방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를 보냈으니까요.  그는 계속 망원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부의 보병들과 포병들이 뿜어내는 불꽃과 연기가 마침내 탑을 지나쳐 진격하는 순간, 나폴레옹도 라데츠키처럼 "이 전투는 이긴 것이다"라고 주변의 참모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참모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려 마세나에게 공격을 계속 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다른 원수들에게도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특히, 막도날에게 아더클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막도날에게 드디어 화려한 무대 조명이 비추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막도날은 이 기회를 잘 살려냈을까요 ?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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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잡지식 98 2017.09.17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은 나폴레옹의 구상대로 흘러같지만 오스티리아도 꽤나 선전한 전투였네요. 그런데 혹시 라데츠키 장군이면 라데츠키 행진곡과 무슨 관련이 있는 사람이려나요?

  2. IserveGodofJew 2017.09.17 0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차 세계대전사 책에서 호헨촐레른이라는 이름을 본 적 있습니다.그 이름이 이 시절에도 있었군요.왕가의 이름입니까?

    • 최홍락 2017.09.17 07: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로이센의 왕가를 호엔촐레른 왕조라고 부르기도 해요.

    • IserveGodofJew 2017.09.17 0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지그마링겐은 또 무엇입니까? 호엔촐레른 뒤에 하이픈 하나 붙이고 따라붙는 것이었습니다.

    • 최홍락 2017.09.17 0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나중에 프로이센에 흡수된 독일 남서부의 소규모 백작령 내지는 공국을 가리키는 것 같네요. 지그마링겐은 바덴 뷔르템부르크주의 도시이고요.

    • nasica 2017.09.17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헨촐레른은 최홍락님 말씀대로 프로이센 왕가 이름이고, 원래 그 가문의 근거지였던 슈바빙-알프스 인근의 호헨촐레른 성채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다만 저 양반이 프로이센 왕족은 아닐 것이고, 그냥 저런 지역 이름의 작위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찾아보니 원래 이름은 Friedrich Franz Xaver네요.

  3. 2017.09.17 0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IserveGodofJew 2017.09.17 0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강철 폭풍 속에서'를 보면 양 군이 포격과 총격을 주고받다가 소강 상태가 되면 슬그머니 기어나와서 벼룩시장 같은 물물교환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바그람 전투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5. IserveGodofJew 2017.09.17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병은 도망가는 적병을 쫒을때 투입하는줄 알았는데,약간 놀랐습니다.

    • nasica 2017.09.17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 말대로, 기병은 전투 전에, 전투 중에, 전투 후에 모두 유용했습니다. 저 전투에서는 양군 모두 주력 부대의 측면을 노리고 또 보호하느라 기병대를 많이 활용했습니다만, 아리기의 흉갑기병은 다소 울퉁불퉁하고 장애물이 많은 지형 너머에 진형을 갖춘 오스트리아 보병들을 공격하는데 투입되었습니다. 당연히 피해만 입고 물러나야 했으니, 아리기가 화가 날만도 했지요.

  6. 수비니우스 2017.09.17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르드만이 프랑스에게 배신자긴 하지만 그래도 적군의 고위 장교인데 현장에서 일반 병사처럼 살해당한 건가요??

  7. 오리오리 2017.09.17 2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에서 저런탑은 세금 뜯는 곳이라고 어디서 얼핏 들은 얘기가......

  8. 석공 2017.09.17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9. 지크레이 2017.09.17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10. 아기사자 2017.09.18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림은 길은데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이처럼 짧은게 아쉽네요ㅎㅎ

  11. 카를대공 2017.09.24 0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데츠키 장군도 후대에 이름을 날린 인물답게 혜안이 있었군요

  12. 양헌모 2018.02.10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중 마르크그라이노프의 탑의 정체를 궁금해 하셨는데 아마도 마르크그라이노프의 탑은 원형 금속을 제작하는 Shot tower --- 그니까 대부분 총알을 만들때 쓴건데 ...... 녹은 납을 높은곳에서 자유낙하 시켜 탑하부의 물에 떨어 트리면 별다른 가공없이 완전한 원형의 금속을 얻을수 있어 저 당시 유럽의 각 도시에 영어로 '샷 타워(Shot tower)'라 불리는 탑들이 있었습니다.
    흔하게 교회의 첨탑을 개조해 쓰였지만 완전히 총알제조를 목적으로 건립된 탑들은 유럽, 미국과 호주에 남아 있습니다

  13. 양헌모 2018.02.12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정합니다.
    shot tower가 아니 였습니다 . 교회 유적이네요
    출처:http://bruckissammelsurium.blogspot.kr/2017/07/markgrafneusiedl.html
    저는 건축전공자라 방어목적과 교회를 겸한 건축에 대해서 배워본적이 없는데 희안하게도 이탑은 두가지 목적을 다 가지고 건립 되었다네요
    역시 자료는 많이 찾아 봐야 겠어요

    In Markgrafneusiedl im niederösterreichischen Marchfeld wurde ein Fußballspiel besucht. 833 Menschen leben hier.
    Die Ruine der einstigen Martinskirche steht auf einer Anhöhe über der Ortschaft. Die ehemalige Wehrkirche wurde Ende des 12.Jh. als religiöses und militärisches Bauwerk auf dieser Höhenlage erbaut. 1368 wurde es nicht mehr als Kirche sondern als „Feste“ (Burg) mit Martinskapelle bezeichnet. Diese Adelsburg diente im Krieg als Zufluchtsstätte, zum letzten Mal 1645 im Dreißigjährigen Krieg. Die schwedischen Truppen eroberten zum Unglück ihrer Insassen jedoch die Burg. 1683 wird sie bereits als Ruine bezeichnet. Bei der Schlacht am Wagram am 5. Juli 1809 versuchten sich 157.500 französische und 136.200 österreichische Soldaten gegenseitig umzubringen, da ihre Kaiser wissen wollten wer von ihnen wichtiger ist und das anschafften. Die Ruine diente dabei dem habsburgischen Erzherzog Karl als Kommandositz. 1817 wurde sie zu einer Windmühle umgebaut, wofür wurde dem Rest des Ostturms ein teilweise auskragender Rundturm aufgesetzt wurde.

베시에르, 아니 낭수티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기병집단으로 하여금 포병과 보병, 기병이 고슴도치처럼 대비를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 진영으로 돌격하도록 나폴레옹이 명령한 것은 기병대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 목적 뿐이었지요.  전쟁터에서 시간이란 수천명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더라도 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일까요 ?  어차피 마세나의 군단을 남쪽 에슬링으로 떠나 보내고나면 당장 무너져내리는 아더클라 방면 전선을 막아줄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주변에 병력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 최후의 비상 수단으로 아끼고 아끼던 근위대가 있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같은 대인배에게 있어서, 당시의 상황은 근위대를 끌어다 쓸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간만 조금 더 끌면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라이트 훅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라고 그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병대는 충분히 긴 시간을 버텨줄 만한 병종이 아니었고, 나폴레옹은 시작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은 시간을 끌어줄 어퍼컷을 날리기 전에 날린 잽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퍼컷으로 날릴 것으로 나폴레옹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여기서 나폴레옹은 당대에 보지 못한 기발한 전술을 펼칩니다.  제대로 된 군단 대신, 강력한 포병 화력을 동원하여 눈 앞의 오스트리아군을 제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포병 출신이기 때문에 해낸 생각이기도 했고, 프랑스 포병대의 실력을 믿고 잘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이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 빛났기 때문에 가능한 도박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포병만으로 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면 왜 전에 다른 곳에서는 그런 전술을 펼치지 않았겠습니까 ?  그 짧은 시간, 그 험악한 위기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지형과 오스트리아군의 포진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대는 약간의 높낮이로 인해 시야로부터 가려지는 움푹한 지대도 없는 정말 완전한 평야 지대여서 적이 항상 포병의 사선에 노출되어 있었고 지면도 탄탄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포병대의 주력 탄종인 구형탄(roundshot)은 직격으로 말과 사람을 으스러뜨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먼저 얕은 각도로 대지 위에 한번 떨어진 뒤 퉁퉁 튕겨 날아가며 그 비행 경로 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부러뜨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친구인 란 원수도 이런 포탄에 목숨을 잃었지요.  즉, 오스트리아군이 진격해오고 있는 아더클라 남쪽 평원은 포병의 살상 효과를 100%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점을 파악한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포병으로 제압하기로 합니다.





(프랑스 근위 포병대의 12-파운드 포 및 그 포병들입니다.  다만 바그람 전투 현장에서 동원된 것은 주로 6-파운드 및 8-파운드 포대였고, 일부 있던 12-파운드 포병들은 프랑스 근위대가 아니라 브레더 장군 휘하의 바이에른군 소속 포병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포병은 나름 엘리트 부대로서, 급료도 보병보다 약간 더 높았고 심지어 기병보다도 다소 높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에서조차, 보병은 징집했지만 포병은 모두 자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보병의 복무 연한이 6년인 것에 비해 포병은 14년이었습니다.  그만큼 숙련도가 중요한 당대 최첨단 병과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황실 근위대의 대포 60문 전체와 외젠이 끌고 온 이탈리아 방면군의 대포 38문, 그리고 브레더(Karl Philipp von Wrede) 장군의 바이에른군에 소속된 24문의 대포를 차출하여 임시로 대(大) 포병단(la grande batterie)을 급조할 것을 명했고, 그 지휘관으로는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이던 로리스통(Jacques Alexandre Bernard Law, marquis de Lauriston) 장군을 선발했습니다.  로리스통 장군은 1800년부터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포병 전문 지휘관이었는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을 책임지던 수석 포병 지휘관 송기(Nicolas-Marie Songis des Courbons) 장군이 최근 1달 사이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귀국했기 때문에 당시 현장에서는 포병 병과로는 가장 믿을 만한 지휘관이었습니다.




(로리스통 장군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Jacques Alexandre Bernard Law로서, 로리스통이라는 이름은 뒤에 붙여진 marquis de Lauriston, 즉 로리스통 후작이라는 작위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프랑스인의 성씨가 로 Law 라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  이 분도 막도날처럼 스코틀랜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자리를 잡은 Law라는 성씨라... 어디서 들은 기억 안 나십니까 ?  예, 맞습니다.  프랑스 중앙은행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Banque Générale를 세우고 종이 돈을 대량으로 찍어냈다가 결국 미시시피 주식회사 거품을 일으켜 프랑스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 넣은 바 있는 존 로 John Law 바로 그 사람의 조카입니다.  로리스통은 프랑스령 인도 퐁디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거기 총독이었거든요.)




낭수티의 프랑스 기병대가 너덜너덜해진 채 퇴각하자,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이 그 뒤를 쫓아 서서히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앞을 가로 막은 것은 프랑스 기마 포병대의 대포 몇 문 뿐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저항은 충분히 예상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자신있게 계속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펑 펑 몇 방씩 쏟아지는 대포알을 견디며 나아가는 오스트리아군이 보는 가운데, 프랑스 포병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덜커덩 거리는 포가와 탄약차를 끌고 온 프랑스 포병들은 띄엄띄엄,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도착하여 1열 횡대로 전개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어어 저것들 봐라' 하는 사이에 어느 덧 122문의 대포들이 방열을 마쳤습니다.  무려 2km에 걸친 일렬 횡대였지만 대포의 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러다보니 불과 16m 당 1문씩, 오스트리아군의 전면을 전혀 빈틈없이 대포로 빽빽히 도배질을 한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방열을 마친 프랑스 포병들이 옆 포대와 경쟁이라도 하듯 포격을 시작하자 오스트리아군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진을 위해 빽빽한 밀집 대형으로 행군 중인 상태였으므로 이런 포격은 한발 한발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퉁퉁 튕겨 날아드는 대포알 한발에 20명이 허리가 잘리고 정강이가 꺾여 한꺼번에 쓰러졌습니다.  프랑스 포병들은 오스트리아군 선두로부터 약 300m ~ 500m 떨어진 곳에 방열을 하고 포격을 시작했는데,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해야 하는 전투 현장에서 이 정도의 거리는 약 6~8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포병들이 쓰던 6파운드 또는 8파운드 포는 숙련된 포병들의 경우 1분에 1발 꼴로 사격이 가능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머스켓 소총 사거리까지 접근하기 전에 대략 6~8발의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쏘았습니다.  전면에 16m 간격으로 늘어선 대포들이 이렇게 토해내는 쇳덩어리의 공포로 인해 오스트리아군 보병들이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고, 또 신이 난 프랑스 포병들의 재장전 속도가 평소보다 더 빨랐던 것입니다.  프랑스 포병들은 오히려 대포를 조금씩 전진시키며 포격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머스켓 소총 사거리 근처까지 접근하자 프랑스 포병들은 한방에 수십명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산탄(canister)을 쏘기 시작했고, 그 앞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산탄, 즉 canister shot입니다.  통조림을 가리키는 영어 can은 저런 금속제 용기인 canister의 줄임말입니다.)




오스트리아군도 포병을 동원하여 대(對) 포병 포격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워낙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빠른 속도로 무력화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포병대도 결국 꽤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산탄을 쏜다고 해도 눈 앞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을 100% 모두 쓰러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적병들이 쏘아대는 머스켓 총탄에 많은 포병들이 쓰러졌고, 거기에 더해 저 멀리 1km가 넘는 바그람 언덕 위에 설치된 12파운드짜리 오스트리아군의 중포들에서 날아오는 포탄들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포병대는 무려 476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하나의 대포에 대략 20명의 포병이 딸려 있었으니 전체로 볼 때 거의 20%의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포병들은 현대전과는 달리 거의 보병들처럼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포병치고는 예외적으로 높은 사상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근위 포병대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보고를 받자 그의 근위대 보병들에게 쓰러진 포병 전우들의 자리를 메워줄 자원병을 뽑겠다고 즉석에서 외쳤는데, 필요한 보충병의 2배가 넘는 근위대 병사들이 자원했다고 합니다.   결국 프랑스 포병대는 치열한 포격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고, 각 대포당 평균 200발 정도를 발사할 정도로 뜨거운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불과 쇠의 폭풍 앞에서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의 진격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콜로브라트나 리히텐슈타인도 일단 후퇴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아더클라 마을 건물 속으로 숨어들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벨가르드 장군이 3개 포대 18문의 대포를 내세워 반격을 해보았으나, 이 역시 곧 꼬리를 말아쥐고 마을 건물 뒤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이 웅대한 포병 작전은 그 우렁찬 포성을 바그람 주변의 전장은 물론 비엔나까지 퍼지게 했습니다.  당시 우익인 다부 쪽을 지원하고 있던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 포병 노엘 대위(Jean Nicolas Auguste Noel)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시엔 전황을 알 수 없었으나 좌익 쪽에서 엄청난 포격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전투의 운명이 그 쪽 방면에서 결정되는 것이 확실했고, 황제께서도 그 쪽에 계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노엘 대위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전투의 운명은 바그람 주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있던 우익, 즉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에서 결정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2015년 텍사스 오스틴에 몇 개월 출장가 있을 때 그쪽 헌책방에서 산 책입니다.  그때 사온 책 아직 거의 시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반성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www.histoire-empire.fr/articles/item/grande-batterie-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Grande_Arm%C3%A9e#Foot_arti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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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GOO 2017.08.27 2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싸 1등 몇년간 꾸진히 보고 있는 애독자입니다
    1등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2. pangpang 2017.08.27 2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대인들이 흔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 바그람 전투를 '나폴레옹 천재성 쇠퇴의 시작점'으로 보는 근거 중 하나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엄청난 포격전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의외로 이런 점들이 있었군요.
    그리고 근위대 보병들이 포병들의 빈 자리를 메울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평소에 근위대 보병들이 포병 훈련도 좀 받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높은 숙련도가 요구되는 포병대의 빈자리를 메우다니..

  3. GGOO 2017.08.27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혹시 책이나 E북으로 출판하신다면 구매해서 소장 하겠습니다.
    그리고 궁금한게 있었는데 나폴레옹 당시 보병들은 방탄복? 흉갑기병 처럼 철판 갑옷등을 왜 입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총이 개발되면서 갑옷이 도태됐지만, 번쩍번쩍하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특히 근위대)가 갑옷을 입고 전진해온다면 엄청난 위압갑이 들텐데 나폴레옹 근위대처럼 소수 자원이고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논 자원들은 마차로 물자를 이동하더라도 가치가 있었을것 같은데 이러한 사례는 없는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nasica 2017.08.27 2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병들에게까지 흉갑을 입히기는 곤란한 것이 (1) 비싸고 (2) 무겁고 (3)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말을 타고 칼싸움을 했던 기병들에게는 2,3번 항목은 해당이 안 되었지요.

  4. GGOO 2017.08.28 0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ㅎㅎ 그렇다면 그 당시 보병들 특히 마지막 순간에 적 전열을 파괴하는 근위대 등은 정말 강심장이었을것 같습니다. 보호장구 없이 모직옷만 입고 총알을 뚫고 총검을 상대해야 하다니.. 으 생각만 해도 후덜덜 합니다.

    제가 나시카님의 블로그를 처음 봤을때가 23살이었는데 벌써 30이 넘었네요ㅎㅎ 항상 건승하십시요~~

  5. 오오 2017.08.28 0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기병이 패퇴했더라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을 테니까 오스트리아가 냅다 기병으로 포병을 공격하지도 못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6. 수비니우스 2017.08.28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근위 포병대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보고를 받자 그의 근위대 보병들에게 쓰러진 포병 전우들의 자리를 메워줄 자원병을 뽑겠다고 즉석에서 외쳤는데, 필요한 보충병의 2배가 넘는 근위대 병사들이 자원했다고 합니다."
    우와...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네요

  7. 과객 2017.08.29 1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저 시대 보병들은 무슨 심정으로 전열에 서서 전진을 했을까요. 옆에서 야구공만 날아와도 움츠러드는게 사람인데 바로 옆에서 수십명씩 피떡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계속 나아간다는게.. 그래도 후퇴하면 처형당하니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갔을 그들을 생각하니 처연합니다. 전쟁이란 다 그런거겠지만요..

  8. 유애경 2017.08.29 2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표지의 나폴레옹 뭔가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네요^ ^.

  9. 잡지식 98 2017.08.29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전 포스팅에서 포병을 다루신건 주인장님의 큰그림이셨군요

  10. 석공 2017.09.03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새벽부터 동쪽의 포성을 듣고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인가 깜짝 놀라 병력을 이끌고 다부의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폴레옹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쪽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중앙부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말을 달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대노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베르나도트 저 허풍선이는 병신짓만 골라 하는구나 !"


다행히 그는 어제 밤 베르나도트 없이 열었던 작전 회의에서 베르나도트를 지원하기 위해 마세나의 병력을 좌익에서 중앙부로 이동시킨 바 있었습니다.  해가 밝아오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마세나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곧 이어 마세나의 눈처럼 하얀 색의 무개마차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 못지 않게 돈 욕심 많고 터무니없이 부풀어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베르나도트와는 달리 군사적 자질은 자신에 버금가는 실력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즉각 아더클라를 탈환하도록 했습니다.


마세나는 생-시르(Saint-Cyr)의 사단을 선두로 아더클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공격에 대해 오스트리아군도 꽤 솜씨있게 대응했습니다.  슈투터하임(Stutterheim)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마을 앞에 있던 도랑에 매복해 있다가 생-시르의 병사들이 지근거리에 근접하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 정도의 반격에 흔들리지 않았고, 전투는 곧 아더클라 마을의 벽과 가옥을 끼고 골목마다 벌어지는 혼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에서 밀려났습니다.  




(아더클라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는 생-시르 사단 휘하 제4 전열보병 연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아더클라 외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아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아더클라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그 마을을 비워놓고 있다가 반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영광의 순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휘하 작센 병사들을 이 공격에 가담시켰습니다.  특히 막도날에게 빌려주었던,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던 뒤파(Dupas)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의 동쪽 측면울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베르나도트는 기세를 타고 작센 병사들을 규합하여 기세 좋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이 아더클라를 관통하여 더 북쪽으로 뚫고 나가려하자, 아더클라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가르드의 예비 병력이 또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반격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알 대공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까지 쳐들어오자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르나도트의 작센군은 어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사기가 형편없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역경을 맞이하자 후퇴가 아니라 그야말로 무너져내려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시르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마세나는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이 무척 난감했습니다.  몰리토르가 진격해야 할 길을 이 작센 패잔병들이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별로 인품이 좋지 않고 오만하고 몰인정했던 마세나는 이 하찮은 방애물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발포를 명했고, 어제 밤에 이어 백주대로에 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작센군은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마르히펠트 평원을 가로질러 흩어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어지럽게 도주하던 작센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외곽까지 도망쳐왔고, 이들의 선두에는 베르나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스도르프 외곽에서 이 몰골의 베르나도트와 딱 마주친 나폴레옹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여 '이것이 네가 말하던 반석같은 지휘력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며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의 보직에서 해임해버렸다고 합니다.  




(프랑스군 원수 복장의 베르나도트입니다.  원래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 병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탐탁치 않은 작센인들로 구성된 제9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군단의 출정 준비에 대해 이런저런 눈에 보이지 않는 방해를 한다는 느낌을 받자 전장에 나서기 전부터 보직을 사임하겠다고 나폴레옹에게 청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원치 않는 베르나도트를 부득부득 전장으로 끌고 나갔고, 결국은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 뒤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가 이렇게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너무 극적이라서 100% 믿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의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날 공격을 위해 자신의 군단 소속이었던 뒤파(Dupas) 장군의 프랑스 사단에게 자신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나, 뜻 밖에도 뒤파는 '황제로부터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았다'라며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공격이 돈좌되고 많은 작센 병사들이 희생되자, 격분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만나자마자 '왜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단을 마음대로 묶어 두었는가'를 따지며 이럴 바에야 사직하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정말 베르나도트가 정말 이날 현장에서 해임되어 귀국 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끌던 제9 군단의 지휘권은 어떻게 되냐고요 ?  어차피 그의 제9 군단은 이미 다 녹아내려서 5천명 이하의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만 남아 있었으므로, 후임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이 몰리토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자는 오스트리아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등 대부분의 유럽 군대에서 척탄병들만이 쓸 수 있는 모자로서, 높이 솟은 모양에 털가죽이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척탄병 부대는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편성했는데, 키 큰 병사들이 그런 모자를 쓰면 더욱 덩치가 커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더클라는 이렇게 생-시르가 탈환했다가 다시 잃었다가 오전 10시 경 다시 몰리토르가 재탈환하는 등 혈전의 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카알 대공이 직접 이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프랑스군이 용감하고 숙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오 가까이 즈음해서는 혈전 끝에 결국 몰리토르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났고, 프랑스군은 중앙을 돌파당하는 일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언덕 위의 전선 전체에 걸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여 언덕 아래에 있던 프랑스군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지 위에서 내리 쏘는 포격은 확실히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어차피 전장의 병사들은 언제든 대포밥이 될 수 있는 신세였으므로 그 정도의 포격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전선 중앙부가 관통당해 자신들의 등 뒤에 펼쳐진 평원 위로 작센군과 프랑스군 패잔병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체 전선을 따라 말을 달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이 베르나도트가 마음대로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가장 약한 부대를 거느린 가장 못 믿을 부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또 아더클라가 나폴레옹에게 가장 중요한 위치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작전의 핵심은 다부가 공격 준비를 하던 동쪽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기가 공격할 생각만 했지 카알 대공이 먼저 치고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든 작전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무너지는 아더클라의 바로 동쪽 측면에는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 등의 군단이 대기 중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이 구멍만 틀어막으면 저 동쪽 끝에서 다부가 준비하던 나폴레옹의 진짜 주먹이 날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아직 패배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장의 주먹을 준비 중인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에게도 아더클라는 그저 견제구 또는 잽에 불과 했고, 그의 진짜 한방인 강력한 훅은 저 남서쪽 아스페른 쪽에서 날아들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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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등?? 2017.07.30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광입니다 하하하

  2. 그런남자 2017.07.30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첫 댓글의 영애가...ㅋㅋ
    재밌네요. 비엔나에 가보니 칼대공의 기마상이 있던데 나폴레옹이랑 맞짱떠서 저 정도 싸울 정도면 자격이 있을 듯하네요

  3. pangpang 2017.07.3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 녀석. 오래도 살았던데 사진 한 장이라도 남겨뒀으면 좋았을 것을...
    위키백과 영문판을 보니, 데지레 클라리의 유일한(?) 사진이 있더군요. 죽어서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 한 장이었는데, 실제로 본다는 것이 상당히 놀라웠던지라 한참을 보고 있었죠. 1860년에 사망했는데 사진이 한 장밖에 검색되지 않았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4. gg9811 2017.08.01 0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블로그 글에서부터 며칠을 걸쳐서 정주행한 끝에 가장 최신 글까지 읽었네요. 음식 관련 이야기 때문에 블로그 보게 됬는데 어느 순간 장기 연재 중이신 나폴레옹 글을 읽으면서 근대의 기묘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이렇게 재밌는 글을 열심히 연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5. 유애경 2017.08.01 0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인연(?)은 재밌게(?)얽혀 있는것 같아요.후에 스웨덴 왕이 되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배신(?)하게 되지만 이미 스웨덴의 왕인 그가 자기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건 어쩔수 없는것 같구요...
    그나저나 하트가 안눌러 지네요!
    일시적인건가...
    잘보고 갑니다.

  6. 잘 보았습니다^^ 2017.08.01 1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기와 군율이 떨어지는 군대라면 물러났다 공격하기보다는 안전한 수비벽에 의지하며 수비하기가 나았을 것 같은데 베르나토트는 병사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써주시는 연재 언제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7. 카를대공 2017.08.01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그렇지만 이번 편도 한창 흥미진진 할 때 딱!끊으시는군요.

    지난편부터 나폴레옹의 베르나도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신게 저런 이유가 있어서였군요.

    이렇게 군단장 자리를 잃고도 왕까지 되는거 보면 될놈될입니다.

  8. 에어메딕 2017.08.01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 보고 있습니다! 점점 클라이막스로 향해가네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9. 구릉구릉 2017.08.05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자신이 반석같은 지휘력을 가졌다고 자찬한적이 있나보죠?

  10. 석공 2017.08.06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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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ger 2017.07.23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무책임하게 명령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고(타당한지는 별론으로), 무엇보다 이 시점에는 나폴레옹과 서로 거의 신뢰가 없었네요.

    • 카를대공 2017.07.28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즈음엔 둘 사이에 신뢰란게 아예 없었던거 같습니다.
      어떤식으로든 파탄은 예고되어 있었던거 같네요.

  2. 괴도뤼팽2 2017.07.2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토탈워 했었는데 사실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몰랐었.. 글을 정주행해봐야겠네요 ㅎㅎ

  3. pangpang 2017.07.24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막스갈로의 나폴레옹을 봤는데, 바그람 전투 후 베르나도트가 '내가 지휘했다면 현명한 작전을 구사해, 큰 피해가 없이 승리했을 텐데.'라는 식의 주장을 했고, 분노한 보나파르트가 '저 놈을 군에서 추방하라!!'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왔던 게 기억나네요.
    실제 바그람 전투에서 녀석이 얼마나 현명했는지 곧 드러나겠네요. 기대됩니다~

  4. 폴리틱스 2017.07.25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필력이 엄청나시군요. 빠르게 읽어버렸습니다. 모르던 내용들 하나씩 읽어가는 재미가 있네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

  5. 최홍락 2017.07.25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phaeton이라는 마차는 꽤 비싼 수준의 마차인 듯 하네요. 폭스바겐 차량인 phaeton같은 경우 임원급 손님 오실 때 동원되는 수준의 차인데 그 이미지와 흡사해 보입니다.

  6. 오리오리 2017.07.25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맥도날드를 프랑스선 마크도날이라고 한거처럼 벨가르드 역시 독일식으로 읽지 않았을까요?

  7. 석공 2017.08.06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