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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93

새로운 전쟁의 준비 (3) - 국민방위군(Landwehr)의 실상 여기서 잠깐, 국민방위군이란 정규군에 징집될 청년보다는 나이가 좀 더 많지만 중산층의 시민들이 자비로 무기와 군복을 마련하여 자발적으로 편성된 부대라고 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그랬습니다만 그건 평화시에 향토 방위 임무나 주어질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애초에 프로이센에 자비로 무기와 군복을 마련할 정도의 중산층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이제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 무시무시한 나폴레옹군의 총검 앞에 총알받이로 뛰어들어야 할 판국인데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자원하는 중산층의 중년 남자가 많을 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은 자원병도 아니었고 중산층도 아니었으며, 자비로 마련한 군복과 무기도 없었습니다. 현실의 이들은 그냥 누더기 같은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보병용 창을 든 .. 2023. 10. 30.
새로운 전쟁의 준비 (2) - 프로이센의 고민 원래 7월 20일까지였던 휴전 기간은 양측의 합의 하에 8월 10일로 연장되었고, 그때까지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전투가 재개되려면 6일 간의 유예기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투가 재개되는 것은 8월 17일 새벽 0시부터였습니다. 사실상 건성이었던 평화 협상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양측은 8월 17일의 전투 재개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양측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프로이센군은 전반적으로 사기가 높은 편이라고 다들 말했습니다. 비록 뤼첸-바우첸에서 2연패를 당했으므로 4월달에 처음 출정할 때처럼 희망만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무시.. 2023. 10. 23.
새로운 전쟁의 준비 (1) - 불만 가득한 연합군 기본적인 작전안이 합의되자, 러시아군은 약속대로 비트겐슈타인의 군단과 콘스탄틴 대공 휘하의 러시아 근위대와 예비대를 보헤미아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군도 클라이스트(Friedrich Graf Kleist von Nollendorf)의 제2 군단과 프로이센 근위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북방군을 편성하기 위해 러시아는 빈칭게로더의 군단을 북으로 보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이미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빌로의 제3 군단과 타우엔치엔의 제4 군단의 지휘권을 베르나도트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블뤼허도 프로이센 출신이 아니고 그나이제나우도 원래는 작센 출신이었지만, 나폴레옹보다 7살 연상이었던 클라이스트는 베를린 출신 전형적인 프로이센의 융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 역시 명문가 출신은 아니.. 2023. 10. 16.
휴전 (15) - 두 개의 작전안 베르나도트가 연합군의 제장들을 모아놓고 밝힌 기본 작전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연합군은 보헤미아군, 슐레지엔군, 북방군의 3개군으로 구성하며, 이들은 나폴레옹이 전군을 이끌고 어느 한 방면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협동작전을 펼친다. 2) 이를 위해 3개군은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작전을 펼치도록 근접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3) 만약 나폴레옹이 어느 한 방면군을 공격한다면, 그 목표가 된 방면군은 반드시 후퇴하고 다른 두 방면군은 나폴레옹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한다. 4) 3개군은 모두 결전을 피하고 적 부대의 소모를 노린다. 단, 만약 적이 분산되어 있을 경우 과감하게 공격해야 한다. 아마 나폴레옹이 이 작전안을 보았다면 식은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결전을 추구.. 2023. 10. 9.
휴전 (14) - 베르나도트의 운수 좋은 날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있어서 스웨덴의 도움이 절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웨덴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승리는 결국 누가 더 많은 총검과 대포를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구가 많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각각 3천만에 육박했던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하면 인구가 240만 정도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초라한 수준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영토를 절반 이상 빼앗긴 프로이센은 인구가 975만에서 450만으로 줄어드는 봉변을 당했지만, 그래도 스웨덴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장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인접한 작센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보니 일종의 .. 2023. 10. 2.
휴전 (13) - 작전이 정치에 휘둘리다 로마노프 왕가는 원래는 러시아 가문이었지만, 점차 독일계 귀족 가문과 결혼을 통해 점점 서구화되었고, 특히 독일 공작 가문 출신으로 짜르에 등극한 표트르 3세 이후로는 사실상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 인사들이 짜르에 등극했습니다. 남편안 표트르 3세를 쫓아내고 여황이 된 예카테리나 대제도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이었지요. 나폴레옹과 자웅을 겨루던 알렉산드르 1세가 바로 그 부부의 손자였는데,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내도 모두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알렉산드르는 19세 때 친구에게 자신은 아내와 함께 독일 라인 강변에 정차가여 자연 철학을 공부하며 행복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독일계 인사들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샤른호스트의 말이라면 뭐든 다 믿고 따른 것.. 2023. 9. 25.
휴전 (12) - 오스트리아의 준비 상황 6월 27일의 드레스덴 회견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오스트리아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의 임기응변으로 일단 나폴레옹을 7월 5일의 프라하 회담에 끌어들임으로써 당장 파국은 피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에 불과했습니다. 당장 연합국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은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제 오스트리아도 전쟁에 뛰어들어 피를 보게 되었는데, 아직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가 재개되면, 나폴레옹의 주된 공격 방향은 바로 오스트리아를 향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가 드레스덴으로 떠나기 훨씬 이전부터,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장군들은 이미 전투 재개를 가정하고 이런저런 작전안을 논의하고.. 2023. 9. 18.
휴전 (11) - 나폴레옹 대폭발 6월 27일 드레스덴으로 메테르니히를 불러 면담을 한 나폴레옹이 무려 무려 9시간이 넘는 이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뭔가 할 말이 많긴 많았을 것 같은데 정말 아무도 배석시키지 않고 1대1로만 면담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를 명확하게 기록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폴레옹도 메테르니히도 각각 회고록을 남겼습니다만, 당대의 모든 회고록이 그렇듯이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써놓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도 9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시시콜콜 녹취록을 적어 놓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많은 정보를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메테르니히가 그 회담이 있었던 날 밤 자신의 주군인 프란.. 2023. 9. 11.
휴전 (10) - 메테르니히, 드레스덴을 향하다 영국은 여기저기 돈을 뿌려대며 연합군 진영 내에서 영국의 입지를 다지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당장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돈보다는 총칼이 더 소중한 법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6월 중순, 라이헨바흐(Reichenbach) 조약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6월 하순,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만나자는 나폴레옹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 초대에 응해 드레스덴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폴레옹과의 회담에서 제시할 조건들에 대해 러시아 및 프로이센 측과 최종 합의를 보기 위해 라이헨바흐의 연합군 진영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라인 연방 해체나 프로이센의 영토 회복 등에 대한 요구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메테르니히의 4개 요구 조건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메테르니히의 조건이 그대로 통과되었습니다. 대신 만약 나폴레옹이 .. 2023. 9. 4.
휴전 (9) - 우리한테 병력이 없지 돈이 없겠나? 오스트리아의 이런 움직임은 연합군 사령부에 와 있던 영국인들에게도 결국 포착되었습니다. 주프로이센 대사 자격으로 현장에 있던 스튜어트 장군은 6월 6일, 이런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본국에 보냈고, 외무부 장관인 캐슬레이는 한참 말을 달려 북부 독일의 항구를 통해 전달된 이 편지를 6월 22일에야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3대 런던데리(Londonderry) 후작 스튜어트(Charles William Stewart)의 초상화입니다. 1813년 이후 프로이센 주재 영국 대사로서, 이후 오스트리아 주재 영국 대사로 활약하며 나폴레옹의 몰락에 한몫 했습니다.) (윗 그림 속 스튜어트가 입고 있는 자켓은 영화 MI7 Dead Reckoning에서 맨티스가 입고 설친 자켓이기도 합니다. 이 자켓을 부르는 일반 명.. 2023. 8. 28.
휴전 (8) - 대(大)외교관 메테르니히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1813년 춘계 작전을 벌이면서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애걸복걸할 때, 오스트리아는 짐짓 점잖은 척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서 기묘한 요구를 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평화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칼리쉬 조약을 맺고 반(反)나폴레옹 전쟁을 시작할 때 양국은 절대 개별적으로 나폴레옹과 협상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라는 제3국을 중재국으로 두는 것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에 동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건 당대의 외교계의 거물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절묘한 한수였습니다. 그가 그런 독특한 요구를 관철시킨 것은 그가 프랑스 못지 않게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정.. 2023. 8. 21.
휴전 (7) - 메테르니히의 조건 아직 정식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6월 3일부터 나흘 동안, 러시아 외교관 네셀로더(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란츠 1세(Franz I)와 메테르니히,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와 일련의 회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연합군 사령부로 되돌아간 네셀로더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다음 조건들을 제시하며 종전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 2023.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