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신문에서 읽었는데, 중국의 CCTV에는 중국 각지의 소수 민족을 찾아다니며 각 민족 고유의 풍습과 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꼭 나오는 장면이, 그 소수 민족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이 꼭 나온다고 하네요.  그 글을 쓴 필자는, 그것이 소수 민족이 흥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에게, '소수 민족들은 대개 음주가무에 빠져 지내는 열등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안하느냐는 일단 생각하지 말고,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말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도 드뭅니다.  사실 제가 볼 때는 조금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많이 즐깁니다.  우리 스스로가 못느낄 뿐이지, 우리나라는 음주 문제가 사실 심각한 나라입니다.  제가 카투사 시절에 (당연히 미군들하고 사이가 안좋았지요 !)  미군애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1인당 소주 소비량이 1주일에 1병이던가 2병이던가라면서, 한국인들은 모두 알콜중독자라고 씨부렁거리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갓난아기까지 포함한 평균 수치가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다 싶었는데, 찾아보니까 정말 한 1.8병 정도였습니다.  그것에 추가로 맥주도 한 2.3병 정도 소비하더군요.  대체 이 술을 다 누가 마시는 겁니까 ?   

 

(우리나라는 오른쪽 하단 부분에 있습니다.  순수 알콜의 섭취량인데, 우리나라는 딱 아일랜드와 동일하군요.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단연 탑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어떤가 하고 찾아보니까, 우리나라의 1인당 술 소비량은 아시아권에서는 단연 탑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에 속합니다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고 그냥 유럽 중간 정도 갑니다.  다만 유럽인들보다 우리가 체구가 좀 작은 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취하도록 마시는 편이라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특히 유럽인들은 식사 때마다 맥주나 와인 1~2잔을 항상 곁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알콜 섭취량이 많은 것이지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음주 문화가 다소 폭음 쪽으로 잘못 형성되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따지고 보면, 낮에는 멀쩡하게 직장에서 일 잘하고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인 사람이, 밤에 만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것이 별로 크게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는 나라가... 적어도 OECD 국가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폭력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이 오기 전에 소주를 벌컥벌컥 마셔두는 것이 변호사를 부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법적 대응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음주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법 만드는 국회의원들과 사법부 검찰 등에 계신 분들이 술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  저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서양인들은 술의 맛과 향을 즐기려고 마시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는, 경제 수준과도 상관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책에서 읽었는데, 우리나라 유치원에서는 전통적으로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키는 것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미술 교육을 많이 시킨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놓은 것이 약간 뜨아하면서도 그럴싸 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만, 노래 교육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것에 비해, 미술은 소모성 재료가 많이 들어가므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민 소득이 낮은 국가일 수록 미술 교육보다는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킨다고 하네요.  동의하십니까 ?  아무튼,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척박한 사회 환경에서 가장 저비용의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 그것도 소주이기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뭐 스포츠를 하려고 해도 돈이 많이 들고, 미국 애들처럼 집에서 뭔가 뚝딱뚝딱 만들어보려고 해도 차고와 각종 연장, 넓은 공간이 필요하쟎아요.  그러다보니 할 게 술마시는 것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정은, 지금은 그렇게까지 마셔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18~19세기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온 나라가  술에 쩔어 살았습니다.  물론 사회 최고위층 인사들이야 주정뱅이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소위 상류계층인 군 장교들만 하더라도, 주정뱅이가 많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사병은 하루에 1파인트 (0.56리터)의 포도주나 1/3 파인트의 럼주를 배급받게 되어있다고 했었습니다.  우습게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단순히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비토리아(Vittoria)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웰링턴 공작은 부하 병사들의 약탈 행위에 화가 났을 때, 공개적으로 자기 병사들을 '술이나 퍼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색히들'이라고 욕을 해댔다고 하지요.  


 

(1813년의 비토리아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약탈한 온갖 귀중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철수하던 프랑스군을 영국군이 따라잡아 공격한 이 전투는 특히 나폴레옹 전쟁 중의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노획물이 발생한 것으로 유명한데, 웰링턴이 화가 났던 이유는 그런 값진 노획물 중 상당수가 병사들의 배낭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해군 이야기를 그린 Hornblower 시리즈에서도, "Flying Colors" 편을 보면, Hornblower 함장은 긴 항해 끝에 식수가 다 떨어져 가지만, 혼블로워 함장은 물보다도 럼주가 다 떨어져 가는 것을 더 걱정합니다.  수병들은 럼주만 계속 배급이 되면, 식수가 다 떨어져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 맥주는 술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챨스 디킨즈의 "Great Expectations"라는 작품을 보더라도, 12살 정도의 어린 주인공에게 식사꺼리가 제공되는데, 물 대신 독한 ale이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워낙 식수 사정이 안좋아서, 영국인들은 대개 물은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런던의 주 식수원은 템즈 강이었는데, 여기서 물을 길어오면, 인간의 분뇨는 약과이고, 온갖 독성 물질과 가축의 분뇨 등이 다 나왔다고 합니다. 중산층은 샘에서 길어온 물을 사 마셨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이 강물을 식수로 썼습니다.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보더라도, 템즈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빠져죽지는 않았지만 그때 마시게 된 템즈강 물로인해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이미 1900년이었는데요 !   그래서 대신 맥주를 마셨고, 차가 널리 보급된 이후로는, 차를 마셨습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단어가 "영국인이 차와 흰빵을 먹는 동안, 아일랜드인은 물과 감자를 먹었다" 라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야기가 겉돌았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영국군에게 주어지는 술은 거의 100% 럼주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포도주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OTL) 그러므로 제일 값싼 술은 gin 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밀로 만드는 증류주인 진 이라는 술은, 그야말로 최하층 빈민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챨스 디킨즈도 "진을 마시는 것은 영국의 큰 해악이다."라고 썼겠습니까 ?  1730~1740년대에 발전한 진 문화는, 거의 현대 미국 도시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문제와도 맞먹었을 정도였습다.  진이 하류층에서 크게 유행하고, 또 사회악으로 번진 이유는, 너무 가격이 쌌기 때문이었습니다.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죽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통계치가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1740년대에 런던 인구가 마시는 진의 평균치가 1주일에 2파인트(1.12 리터)였습니다. 남자, 여자, 갓난아기 다 합해서요. 이 정도면 요즘 우리나라의 소주 소비량은 저리 가라지요 ?   당시 런던 시내 8가구마다 1곳씩 진을 파는 술집이 있었고, 시내 곳곳마다 진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답니다.  정부에서도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진 금지법을 1743년에 제정하려고 했는데, 폭동이 일어나서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극작가인 헨리 필딩은 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진이야말로, 대도시 인구 수십만명을 해치는 해악이다. 이 독한 술에 접한 사람들은, 지독한 주정뱅이가 되어, 이 술을 다시 사기 위한 돈조차 제대로 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모든 수치심과 공포심도 없애버려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와 뻔뻔스러움을 낳게 한다."

 

 

(윌리엄 호가쓰(William Horgath)의 유명한 1751년 그림입니다.  'Beer Street & Gin Lane'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음주에 찌든 영국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군대에도 진을 공급하는 것이 적당했겠지만, 정부는 이 지긋지긋한 술을 도저히 군대에 공급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다행히, 당시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활발하게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증류주인 럼주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육군이나 해군이나, 대부분 럼주를 공식 주류로 공급했습니다. 

 



럼주는 도수가 최고 75도까지 갑니다. (저는 한때 이게 알코올 농도를 말하는 것인줄 알았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더군요.)  엄청난 독주지요.  당시 공급되었던 럼주가 이렇게까지 정제된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아뭏든 너무 독주였으므로, 당시 해군 제독이던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별명 Old Grog)은 수병들에게 배급하는 럼주에 물을 절반 섞어서 주도록 했습니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록(grog)입니다.  권투에서 말하는 그로기(groggy) 상태라는 단어도, 바로 이 그록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영국 해군 내에서 럼주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에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채찍질 체벌이 있었습니다만, 이와 비슷한 레벨의 체벌은 바로 'grog 배급 중단'이었습니다.  육군은 육군이라는 특성상, 어떻게든 술을 손에 넣을 방법이 꽤 많았습니다만, 해군에서는 배라는 특성상, 배급되는 것 외에는 술을 구할 방법이 진짜 없었거든요.

 

(그록의 창시자이신 Edward Vernon 제독이십니다.  그는 평상시 그로그램(grogram)이라는 천으로 만들어진 코트를 자주 입어 '늙은 그록(Old Grog)'이라는 별명으로 수병들 사이에서 불렸는데, 그로 인해 럼반-물반의 희석 럼주 이름도 그록으로 굳어버렸습니다.) 



럼주는 Hornblower의 입을 빌리면, 그야말로 영국 육해군의 "Life Blood"였습니다. 어떤 인도 세포이 병사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군은 틀림없이 럼주 속에 뭔가 마법약을 집어넣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럼주만 마시면 영국군은 매우 사나와져서 두려움을 모르고 싸웠고, 또 심한 부상을 입고 다 죽어가는 병사도 럼주를 조금 마시면 금방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마법약'을 너무 많이 집어넣으면 병사들이 너무 흥분해서 제풀에 죽어버린다고도 '아주 잘' 관찰했더군요.

1780년에 런던에서,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군중이 가톨릭 수도원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고든 폭동이라는 이 사건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가톨릭 수도원 부속 진 증류장 습격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군중들은 수도원보다는 이 진 증류장을 노리고 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도들은 재빨리 이 증류장의 문을 부수고, 그 중에서 더욱 생각없는 일부 인간이 불을 질렀는데, 이 불길 속을 목숨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갔다고 합니다.  손에는 양동이와 주전자, 심지어 말구유를 들고서요. 곧 뜨거워진 증류기가 터지면서, 진 원액이 길바닥에 쏟아져 나와 하수 도랑으로 흘러들었는데, 군중들은 술에 만취하여 쓰러질 때까지, 이를 땅에 엎드려서 입을 대고 마셨습니다. 나중에 민병대가 출동해서 상황을 정리했는데, 이때 만취해서 쓰러진 사람들 중 4명의 여자를 포함해서 총 20명의 사람들이 과음으로 즉사했다고 하네요.  이 정도면 막장 인정입니까 ?

 

 

(제 글에서 인용된 영국의 당시 음주 행태 사례는 Mark Adkin이라는 현역 영국군 소령이 지은 'Sharpe Companion'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Sharpe 시리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해설서입니다.)

 

# 목요일에 올리는 과거 재탕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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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님 2019.08.29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1등이라니ㅠ 영광입니다~^^

  2. 수비니우스 2019.08.29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하면 정조대왕입죠. 정조대왕께서 정약용에게 보드카를 맥주잔에 부어주고 원샷하라고 시켜서 정약용이 속으로 으악 난 죽었다 했는데 마시고 살아서 다행이었다고 자식들에게 편지로 쓴바 있습니다. 물론 보드카와 맥주잔은 비유로 붓담는 커다란 필통에 40~50도 하는 삼중소주를 부어줬다고 하네요. 이렇게 술을 좋아하던 뎡됴대왕은 담배 또한 온몸의 기운을 뚫어준다고 예찬하실 정도였으니 50이 못되어 죽은게 절대 이상한게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쌀통에 담아서 보내버렸으니 술담배에 쩔어살수밖에 없긴 했지만요...

  3. ㅇㅇ 2019.08.29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 20명이나 과음으로 즉사했다니 정말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네요 ㄷㄷ

  4. 2/28일 입대 2019.08.29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하니까 저희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마리화나인가 위드인가가 합법인 나라여서 그런 얘기를 자주 했지요. 스위스, 미국, 프랑스 다 국적이 다른데 입을모아 말하더군요.
    한국에서 금지하는 약들은 문제를 안 일으키는데(그들 주장으로는 저걸 피면 그냥 주저앉아서 공상에 빠진답디다.담배보다 건강하다고ㅎㅎ), 그렇게 문제가 많은 술은 왜 무제한 허용이냐구요. (9시 지나면 아예 술을 못 산다던데요).
    음주감경 판결을 얘기할때마다 아주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더군요.

    • nasica 2019.08.29 1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 그 외국학생들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네요 ?

    • reinhardt100 2019.08.30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외로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아편문제에 워낙 민감하다보니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일본제국이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군수품 중 하나가 아편이었는데 일단 화북 등 중국에서 쓰는건 좋은데 이게 내지로 들어오면 골 때리는 겁니다. 아편중독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요. 이걸 막으려면 조선반도, 관동주부터 철저히 단속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죠. 이 때문에 총독부는 아편 등 마약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하게 나가게 되었고 이게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9.08.31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제로 저 말이 마리화나 합법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하고 술보다 사회적 해악이 덜한데 왜 막냐는거죠.

  5. ㄹㄹ 2019.08.29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주의 진짜 문제는 18세기 영국해군이 마시던 럼보다 더 저질 알콜로 만든 쓰레기 술이라는데 있습니다. 100퍼센트 주정에 물타서 만든거고 이 더러운 맛을 숨기려고 아스파탐이라는 감미료를 섞었는데 이게 해독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죠. 위정자들은 값싼 소주로 인한 사회적 해악을 알면서도 못본체 하는데에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거 보면 이 나라는 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 카를대공 2019.08.31 2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소주 맛있게 드시는 분들한테는 죄송하지만 근본이 질 나쁜 술인거 부정할 수는 없죠.
      똑똑한 엘리트 계층들이 이걸 모를리가 없는데 사실상 장기간 방치중인 대한민국의 병폐입니다.

  6. 수비니우스 2019.08.29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술을 잘 못하고 기껏해야 가끔 혼자 1리터 한병에 2280원하는 값싼 벨기에 밀맥주를 마시는 정도인데,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거다"라며 소주 아니면 안된다는 사람들 보면 정말 보기 안좋더군요.

  7. reinhardt100 2019.08.30 0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밀로 된 진이 미친듯이 공급된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대표적으로 동유럽, 특히 폴란드-리투이나아연방의 재판농노제 강화 및 경제와도 연결됩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연방은 네덜란드, 잉글랜드, 베네치아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잉여곡물 수출로 어느 정도 경제가 돌아갔지만 17세기 중반 대홍수 때문에 국가 경제가 제대로 박살나버립니다. 가뜩이나 재판농노제가 판치던 농촌에 불을 질러버린 겁니다. 마그나트건 슐라흐타건 간에 영지가 있던 7천명의 귀족들이 300만 농노를 효율적으로 쥐어짜야 하는데 기존의 곡물 수출로는 한계가 보이다보니 호밀 등을 원료로 하는 진을 대규모로 주조하여 수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만이면 다행인데 이 인간들이 더 벌자고 각 영지별로 1년에 1인당 몇십리터씩 강제구매 후 작업용 반주로 사용하게 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다보니 개판이 벌어집니다. 농노들이 술 먹고 일하니 당연히 효율이 떨어지는 겁니다.

    주류문제, 이 문제는 국가재정과도 직결 되어 있죠. 역사도 꽤 오래됩니다.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주요 수입 중 하나가 조선반도 철도운영수입과 주류세였던 건데 지나사변 이후 군사비 증액을 감당하려고 대규모 전시국공채 발행 및 주세율 증강을 감행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내지와 동시에 양조장 면허제까지 도입시켜버린건데 이 때문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죠. 그나마 일본은 나았습니다. 적어도 강제주류소비제만큼은 도입하진 않았거든요.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이 짓까지 해서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었죠. 한 때 인도지나 연방 연간 세수의 1/4을 주세가 차지할 정도로 개판이 났었습니다.

    해방이후 정부가 가장 확실하게 뽑을 수 있는 세원이 바로 토지세와 주세다 보니 주류에 대해서는 정말 관대해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쓰게 만들어야 정부수입이 늘어나니까요. 게다가 윗분들이 쓰신대로 물자 아끼려다보니 소주가 장려되는 것까지 겹치면서 말 그대로 술독에 전국민이 빠져사는 사태가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8. 샤르빌 2019.08.31 0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도 이젠 맥주 정도는 약간 술 취급 안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아요.. 소주는 품질도 너무 저질인데 그걸 죽을때까지 마시니 사람들 위장이고 간이고 남아날리가..

  9. 카를대공 2019.08.31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거 혹시 예전 블로그에 쓰셨던 글 아닌가요?
    중간에 프랑스 얘기를 보니 기억나네요.

    당시에 쓰셨던 기준으론 확실히 맞는 말씀이지만 최근 3년?정도 기준으로 하면 한국도 1인당 소득이 많이 올라서 꼭 옳은 얘기는 아닌거 같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수도권 정도면 세계적으로도 즐길거리 놀거리가 무척 많은 문화권이라서요.

  10. 카를대공 2019.08.31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의 폭음,만취 문화는 근본적인 면에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는 문제임은 분명한거 같습니다.
    저도 술 남들 정도는 마시고 술자리도 좋아하지만 술의 폐해는 부정할 수가 없네요.

    담배의 폐해는 끊임없이 강조되는데 술은 상대적으로 훨씬 덜하죠.

    제가 볼 때 담배보다 개개인 삶을 좀먹고 국가 전체적으로 사회를 악화시키는게 술입니다.

  11. 바다에산다 2019.09.07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난 글 항상 잘 보고 갑니다.
    음주가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해군에게는 멀미 치료약으로써도 기능했으리라 봅니다.
    해군 시절 원/상사 침실에 숨겨져 있던 커다란 소주 페트병들이 생각이 납니다.
    담배와 술이 전통적인 멀미 특효약이라고 하네요

  12. 라흐마니노프 2019.09.09 0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럼의 최대 도수가 75라고 하셨고, 이게 알코올 농도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무섭게도 절반은 원래 알고계시던게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뭔가 와전된건지 그렇게 하기로 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도수가 농도 백분위인거 처럼 쓰이고 있지만요, 영미권에서 사용하는 도수(proof)는 대략 1도=0.5%입니다. 표기도 그 각도 단위에 쓰는 작은 동그라미(모바일이라 직접 적기 어렵네요)죠. 지금 유통되는 럼 중에 제일 독한게 바카디 151도(75.5%)인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식으로 75도가 대충 맞습니다. 당연히 그냥 마시라고 만든게 아니라 칵테일이나 불쇼, 객기부리기용으로 의도적으로 독하게 만든 종류구요, 전통적인 럼은 진이나 위스키 같은 다른 증류주처럼 40%내외에 많이 높으면 50%조금 넘는 정도에요. 제가 알기론 그로그 비율이 절반(대충 우리 희석식 소주 수준)까지는 아니고 물4 럼1 정도(와인 맥주 막걸리 수준)라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배마다 달랐으려나...

  13. 무명씨13 2019.09.10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가볍게 맥주 1~2 잔 마시는 것으로 끝내는 문화가 더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14. 영국나치처칠 2019.10.24 2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명의 물인 아쿠아비트는 감자로 만든 술이고
    수술한 환자들이 상처를 아물기 위해 먹는 음식은 감자의 형제?인 토란이라네요

  15. Corsair F4U 2019.12.01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전 글에서는 진에 물을 탄 것을 그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 글에는 럼에 물을 탄 것이 그록이라고 되어있네요 제 기억이 잘못 된건가요? 아니면 내용이 바뀐 건가요?^^

    검색해보니 럼에서 나온 것이 그록이 맞긴한데..... 기억의 조작이 있었던걸까요 ㅋㅋ


그렇게 선주 입장에서는 포에닉스로 가지 못하면 배와 화물이 파손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때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당연히 화물선은 이때를 놓칠새라 당장 돛을 펴고 바다로 나섰습니다.  물론 이때도 먼 바다로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그냥 크레테 섬의 남해안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바다와 사람의 마음은 한치를 알 수 없는 것이라더니, 포에닉스로 가는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에 사단이 나고 맙니다.  당시 사람들이 에우로클리돈(유라굴로, Euraquilo, Euroclyd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거센 북동풍이 불어닥친 것입니다.  그러자 배는 해안선에서 떨어져 나가 속절없이 남서쪽으로 떠내려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원들은 역풍을 거스를 재주가 없었으므로 그냥 포기하고 배가 폭풍에 밀려 먼 바다로 표류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27:13 ~ 27:15)

 

(성경에 가우도스라고 표기된 섬의 위치입니다.)

 



바람이 거세어질 것 같으면 그때라도 재빨리 항로를 돌리든가 하면 되지 않았을까 라고들 생각하시겠지만 아마 당시 상황은 꽤 급박했던 모양입니다.  그 화물선에는 해안으로 짐을 옮기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할 쪽배를 한척 고물에 밧줄로 묶어서 끌고 다녔던 모양인데, 이 쪽배를 끌어들여 갑판에 올려놓을 틈도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거센 바람에 떠밀려 표류하던 화물선이 간신히 한숨 돌릴 계기는 원래 목적지인 포에닉스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가우도스(Clauda, Cauda, Gavdos)라는 작은 섬 남쪽까지 떠내려온 다음에야 생겼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그냥 '작은 섬 남쪽까지 밀려왔을 때'라고만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As we passed to the lee of a small island called Cauda...'라고 되어 있습니다.  Lee라는 단어는 항해 용어로서 '바람이 없는 곳' 또는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라는 단어인데, 당시 북동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는데 섬의 남쪽에 배가 있다는 것은 뱃사람들에게 2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먼저, 최소한 배가 섬과 그 인근 암초로 떠밀려가서 부딪힐 일은 없다는 뜻이고, 또한 섬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서 다소 바람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원래 육지 근처에 배가 떠있는데 바람이 바다 쪽에서 육지 쪽으로 불어가는 것, 즉 배가 섬의 windward(우리 말로는 풍상) 쪽에 있는 것은 뱃사람들에게는 바람이 순풍일 경우에조차 매우 신경쓰이는 일이었거든요.  아무튼 이 가우도스 섬의 lee에 들어가서 파도가 다소라도 잔잔해진 다음에야 선원들은 이 쪽배를 끌어당겨 갑판 위에 올려놓고는 쪽배가 다시 바다에 떨어질까봐 밧줄로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27:16)

 



그러나 그건 쪽배 하나를 구한 것일 뿐, 당장 화물선 자체는 여전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원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시르티스(Syrtis, 오늘날 리비아의 벵가지(Benghazi)와 트리폴리(Tripoli) 사이 해안가에 있는 암초와 모래톱이 많은 얉은 해역)까지 떠밀려가서 모래톱에 좌초라도 할까 전전긍긍했습니다.  거센 바람 속에서 좌초할 경우 배가 산산조각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배들도 종종 모래톱에 좌초되는 일이 가끔 발생합니다만, 같은 모래톱에 좌초하더라도 배가 천천히 항진하다가 좌초되는 것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좌초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인 18~19세기의 범선들만 해도 약한 바람 속에서 서서히 나아가다 부드럽게 좌초되면 별 피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배가 죄초된 건지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 https://nasica1.tistory.com/237 참조)  이런 경우는 그냥 노젓는 보트들을 내려서 배를 뒤로 잡아당겨 배를 다시 띄우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돛에 바람을 잔뜩 받으며 전속력으로 달리던 배가 갑자기 모래톱에 덜컥 걸리면 그 충격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로 큰 충격이 있게 됩니다.  18~19세기의 떡갈나무로 단단하게 만든 전열함이 그럴 정도라면 1세기 경의 조그만 화물선 따위는 아마 산산조각이 났을 겁니다.  언제 모래톱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원들은 어떻게든 배의 속도를 줄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문판 성경에는 꽤 전문적인 항해용어가 나옵니다.  Sea anchor, 또는 drag anchor라는 단어가 나오더라고요.  한글판 성경에는  "그대로 가다가는 모래톱에 걸릴까 두려워 돛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녔다"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정도로 간단히 번역을 해놓았는데, 영문판 성경에도 lower sea anchor나 lower drag anchor 대신 그냥 lower the sails (돛을 내리다) 라고 써놓은 버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문인 헬라어 버전도 한글판의 '연장'처럼 다소 애매모호하게 적은 모양입니다.  하긴 사도행전 원문을 적은 사람도 헬라어를 쓰던 유식한 유대인 의사 누가(Luke)라고 하니까 아마 뱃사람들의 용어나 전문 항해 용어를 정확히 적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sea anchor, 또는 drag anchor라는 것은 도저히 닻을 내려 배를 고정시킬 상황은 아니자만 어떻게든 배의 속도를 줄이고 배를 안정시켜야 할 상황에서 내리는 일종의 브레이크 같은 도구입니다.  이건 닻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일종의 물주머니 또는 낙하산처럼 생긴 물건인데, 배 뒤에 끌고 다니면 물에 저항을 일으켜 뭔가 큰 힘이 배를 뒤에서 끌어잡아당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화물선에도 이미 이와 비슷한 물건이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7:17)



(Sea anchor 또는 drag anchor라는 것은 이렇게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폭풍이 계속되는 가운데 드디어 선체에 물이 새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배들은 목재를 이어 만든 것이라서 당연히 물이 샜습니다.  목판과 목판 사이는 삼베 등의 섬유류 찌꺼기를 망치와 끌로 박아넣어 메웠는데, 이 정도의 방수 처리로는 평상시에도 물이 조금씩 샜지만 특히 파도가 거세어 선체에 무리가 가면 물이 콸콸 샜거든요.   선창에 물이 차면 배가 더 무거워지므로 침수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집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드디어 화물을 바다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폭풍이 계속 되자, 이젠 당장 불필요한 배의 장비들(tackle and rigging)까지도 내다버렸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비를 버렸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아마 돛의 가로 활대, 도르레, 예비 돛과 밧줄 등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27:18~27:19)

게다가 더 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어디쯤까지 떠밀려왔는지 현재 위치를 알 길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벌써 며칠 동안이나 해와 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엔 시계는 커녕 아직 나침반이나 육분의 등의 위치 계산을 위한 진보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시계와 육분위를 이용한 위도경도 계산에 대해서는 https://nasica1.tistory.com/118 참조)  그래도 대략 달력과 해의 높이, 별의 위치를 보면 대충이라도 배의 위치를 알 수 있었는데 먹구름 때문에 해와 별을 못 보니 이곳이 크레테 섬 남쪽인지 시칠리아 섬 남쪽인지 혹은 아예 리비아 해안가인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다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선원들은 이제 살 가망이 없다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27:20)

이때 다시 당대의 오지라퍼이자 투머취토커인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먼저 '내 말대로 했으면 이런 피해를 입지 않았을터인데 ㅉㅉ ㅋㅋㅋ' 라고 운을 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때 로마군이나 선원들에게 바울이 맞아죽지 않은 것이 정말 신의 돌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어젯밤 내 곁에 서서 '너는 로마에 가서 케사르 앞에 서야 하므로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리고 너와 항해하는 사람들도 모두 너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도 죽지 않고 배만 부서질 것이다, 우린 어느 섬에 가서 닿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또 맞아죽지 않은 것은 정말 신의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지중해 사람들은 이런저런 다양한 세계의 신들을 많이 접하고 있었으므로 신박한 이야기를 하는 예언자들이 그리 낯선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또 최소한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으니 '이 배의 모든 사람들은 이제 너의 것'이라는 소리만 애써 못들은 척 하면 꽤 기분 좋은 예언이었지요.  (27:21~27:26)

 

그러나 그 뒤로도 10일간 더 시련이 계속 되었습니다.  14일째 되던 날 밤에도 이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인 아드리아 해를 표류하고 있었는데, 이때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선원들은 육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럴 때 당장 해야 할 일은 수심을 재는 것입니다.  (음향 수심 측정기가 없던 시절의 수심 측정에 대해서는 https://nasica1.tistory.com/284 참조)  수심을 재어보니(took soundings) 약 120 피트(37m)가 나왔는데, 조금 후 다시 재어보니 90 피트(28m)가 나왔습니다.  즉 육지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육지 인근에는 암초나 모래톱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까딱 하다가는 그런 곳에 부딪히 배가 산산조각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선원들은 즉각 고물 쪽으로 닻을 4개나 던져 일단 배를 멈춰 세웠습니다.  날이 밝아야 육지가 어디쯤에 있는지 볼 수 있으므로 일단 새벽이 될 때까지는 정지해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27:28~27:29)

그런데 이때 왜 이물 쪽에는 닻을 던지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일부 선원들이 이물 쪽에서도 닻을 던지려 하면서 갑판 위에 있던 쪽배를 슬그머니 바다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던 이가 있었으니 그 배의 오지라퍼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 선원들은 닻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쪽배를 타고 육지로 달아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이 부분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쪽배를 타고 육지로 향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일이거든요.  제가 선원이라면 일단 그냥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바울의 눈에 그들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곧장 로마군에게 선원들의 행동을 고자질했습니다.  "저것들이 자기들끼리만 살려고 쪽배를 타고 도망치려 합니다.  저것들이 없으면 배를 몰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 모두 물에 빠져 죽습니다 !"  그 신고를 받은 로마군들은 선원들을 제압하고는 그 쪽배와 연결된 밧줄을 끊어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마 이때 선원들의 심정은 바울을 정말 찢어죽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27:30~32)

 



날이 밝을 때 즈음 바울은 또 나섰습니다.  벌써 14일쨰 다들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힘이 없는데, 이제 살아남으려면 다들 음식을 들라고 권하며 스스로도 빵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뒤 쪼개어 먹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무리 폭풍이 불어닥친다고 해도 왜 선원들 뿐만 아니라 승객들조차도 다들 아무 것도 안 먹고 쫄쫄 굶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없습니다.  당시 항해가 굉장히 긴 것도 아니었으므로 배에는 신선한 빵과 포도주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을 것이거든요.  가능한 설명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폭풍이 거세어 승객들이 뱃멀미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설명은 좀 더 복잡합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3단노선의 경우엔 배 위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좁은 배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므로 배에서는 취사를 하고 식사를 할 공간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이든 저녁이든 식사를 하려면 배를 해안가에 끌어올리고 그 옆에서 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3단노선이 아니라 돛으로 운항하는 화물선이었습니다.  아무튼 선상에 화덕을 갖추고 고기를 삶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빵과 포도주 정도의 간단한 식사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하루짜리 항해를 생각하고 빵을 넉넉히 싣지 않고 출항했다가 배가 폭풍에 떠내려가는 상황이 되자 얼마나 표류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선주나 키잡이가 '나중에 비상식량으로 먹을 수 있도록 빵을 먹지 말고 아껴두라'고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 성경 학자들은 바울이 파선을 앞두고 빵을 쪼개어 먹은 이 행위를 일종의 성찬식(eucharist)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여기서는 패스하겠습니다.  

 

또 약간 의아한 점은, 37절에야 비로소 이 배에 탑승한 인원의 수가 밝혀지는데 그 수가 무려 276명입니다.  이 정도 인원수는 19세기 초의 영국 해군 제5급 프리깃함, 즉 1000톤 급의 상당히 큰 군함에서나 가능한 인원수입니다.  그나마 원래 군함은 전투원과 예비 승조원 등 화물선에 비해 굉장히 많은 수의 인원을 태웠기 때문에 300명 가까이 태웠던 것이고, 민간 화물선의 선원 수는 훨씬 적었습니다.  훨씬 크기가 작은 로마 시대의 500톤급 화물선에 그렇게 많은 선원이 필요할 리는 없고, 또 설령 백인대장 휘하 병사 수가 정말 100명 꽉 채워서 다 있었다고 해도 너무 많은 인원수입니다.  아마도 이 화물선에는 로마군 이외의 승객들도 꽤 많이 태웠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것도 설명이 안 되는 것이, 걸어서 가도 되는 거리인 '아름다운 항구'에서 포에닉스로의 여행을 굳이 위험한 바닷길로 가고자 하는 승객이 100명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일부 헬라어 원전에서는 이 수를 69명 또는 70명이라고 기록한 것도 있는 모양이던데, 사실 이 숫자가 더 말이 되는 숫자이긴 합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누가복음 원전에서는 276명으로 나옵니다.  (27:33~27:38)

자, 이제 빵까지 먹은 이들의 눈 앞에 드디어 날이 샙니다.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요 ?  저는 뭐 더 재미있게 쓸 이야기가 없으므로 그 결말이 궁금하신 분들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27장 38절부터 44절까지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끝~!

 




Source :  https://www.simplybible.com/dmaps.htm
https://graceofourlord.com/tag/mysia/
https://www.conformingtojesus.com/charts-maps/en/paul%27s_journey_to_rome_map.htm
https://www.jw.org/en/publications/books/bearing-thorough-witness/preaching/paul-shipwreck/
https://www.jw.org/en/publications/magazines/watchtower-no5-2017-september/did-you-know/
https://www2.rgzm.de/navis/Themes/Commercio/CommerceEnglish.htm
https://en.wikipedia.org/wiki/Rating_system_of_the_Royal_Navy
https://en.wikipedia.org/wiki/Sea_anchor
http://bibleencyclopedia.com/goodsalt/Acts_27_Paul%27s_Shipwreck.htm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Acts+27&version=T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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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구자 2019.08.26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쨌든 그 섬에 도착했으니 예언-그냥 찍은 것으로 보이지만-은 이루어졌습니다. 저도 이만.

  2. 수비니우스 2019.08.26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개인적으로는 이때 로마군이나 선원들에게 바울이 맞아죽지 않은 것이 정말 신의 돌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재밌게 읽다가 이 부분에서 뻥터졌네요 ㅋㅋㅋ

  3. 푸른 2019.08.27 1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울이 안 맞아 죽은게 진짜 기적이네요 ㅋㅋㅋㅋ

  4. 오렌지훈 2019.08.28 1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울이 기적을 만났네요^^ 잘 보고 구독하고 갑니다.


Uncharted 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차트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령 의사들도 환자 기록을 보면서 '차트'라고 부르고, 저같은 직장인은 프리젠테이션용 도면이나 표를 차트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원래 차트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은 해도라는 뜻입니다.  즉, 육지에서의 지도는 map이라고 부르지만, 바다에서의 지도는 chart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uncharted라는 말의 뜻은 '해도가 작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흔히 미지의 영역을 뜻할 때 uncharted waters라고 합니다.  해도가 작성되지 않은 바다라...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경쟁이 전혀 없는 블루 오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uncharted라는 형용사는 기본적으로 '위험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는 겉에서 보면 그냥 끝없는 소금물로 이루어진, 평면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길도 없어 보이고, 당연히 지도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바닷물이 푸르다고 하지만, 사실 지역이나 날씨에 따라서 바닷물의 색깔은 다 다릅니다.  영어로 된 해양 소설을 보면, 바다를 표현할 때 grey sea (잿빛 바다)라든가 wine dark sea (검붉은 바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뜻하는 바는, 대부분의 바다는 몰디브같은 특수한 곳을 빼고는, 그 바닥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다 속이 다 저렇게 훤히 들여다보인다면 해도는 필요없겠지요)



위에서 말한 차트, 그러니까 해도에는, 해안이나 섬의 모습 뿐만 아니라, 주요 항로의 바닷속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해양 활동이 왕성하지 않은 곳에서는 이렇게 바닷속 깊이가 묘사된 해도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있는데 제가 모르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은 기껏해야 수면 아래 깊이가 1~2미터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라면, 굳이 해도가 없어도 어떤 곳은 위험한 항로인지 대략 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의 대양 항해선은 그보다 더 깊은 홀수선 아래의 깊이가 더 깊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전함인 74문의 함포를 장착한 3급 전함의 경우, 홀수선 아래 깊이가 약 7~9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간혹 가다 있을 수 있는 암초나 얕은 모래톱이 선박의 항해에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1913년에 최초로 특허 등록된 바 있는 음향 수심측정기(echo sounding) 등의 신기술을 이용하여 해도가 매우 정밀하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GPS를 이용해서 선박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의 대형 상용 선박이 얕은 모래톱에 덜컥 좌초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18~19세기의 군함에서는 어떻게 해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바다를 헤쳐나갔을까요 ?



(원래 echo sounding이라는 기법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막기 위해 독일에서 개발된 것인데, 결국 빙산 탐지에는 무용지물이었지만 수심 측정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증명되었고, 이미 1920년대에 대서양 해저 지도 작성에 이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인간 수심측정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름하여 leadsma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lead는 리드라고 읽는 것이 아니고 레드라고 읽습니다.  즉, 납덩어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수심측정원, 측연수(測鉛手)라고 번역됩니다.  이 leadsman은 힘든 군함 생활에서도 매우 힘든 역할이었습니다.  항해 중에 항상 수심 측정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므로, 따로 leadsman의 역할만 수행하는 병사가 따로 있지는 않았고, 주로 midshipman 같은 초급 장교나 믿을만한 수병 중에서 돌아가며 이 고역을 수행했습니다.

이 측연수라는 역할이 왜 고역인지는 혼블로워 시리즈 중 'The Commodore' 편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Commodore 초판본의 표지입니다)

 


Commodre by C.S. Forester (배경 1812년 발틱해) --------------

"깊은 14 (By the deep fourteen) !" 측연수가 외쳤다.

혼블로워는 측연수가  쇠사슬에 매달린 채 숙련된 강도로 납덩이를 저 앞으로 던지고는, 전함이 그 위를 통과하면서 거기에 달린 줄이 수직으로 될 때 깊이를 읽어내고, 줄을 끌어당겨 다시 새로 던질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작업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쉴 틈 없이 계속되는 고된 노동이었다.  게다가 측연수라는 직책은 100피트 (약 30m) 길이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밧줄을 계속 당겨야 했으므로, 온몸이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혼블로워는 하갑판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저 남자는 옷을 말릴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는 펠류 함장의 프리깃함 인디퍼티거블(Indefatigable)호가 비스케이(Biscay, 스페인의 대서양 쪽 만입니다 : 역주) 만의 거친 파도 속을 뚫고 들어가 프랑스 군함 드롸 드 롬므 (Driots de l'homme, 인권이라는 뜻입니다 : 역주) 호를 파괴하던 날 밤, 당시 사관후보생이던 자신이 수심 측정 작업을 하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뼈 속까지 얼어붙어 손가락에 감각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측정 밧줄에 묶어놓은 표시의 감촉, 그러니까 하얀 캘리코 면포나 구멍 뚫인 가죽, 그 밖의 직물들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젠 해보려고 해도 저렇게 납덩이를 던질 수 없을 것 같았고, 밧줄에 묶어놓은 표시의 임의적인 순서를 기억해낼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부시 함장에게 측연수를 적절한 간격으로 교대시켜 주고, 그들이 옷을 말릴 수 있도록 특별한 시설을 배려해 줄 정도의 인간미와 상식이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코모도어(임시 제독 정도의 계급입니다 역주)인 그가 그런 일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 전함의 내부 살림은 부시 함장의 개인적인 책임이었고, 누구라도 간섭한다면 부당하게 여길 것이 당연했다.  코모도어의 직책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10 (By the mark ten) !" 측연수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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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리깃함에서의 측연수의 작업. 1844년의 그림입니다)



당시에 측연수가 수심을 측정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항해 중인 배에서, 끝에 큼직한 납추를 매단 긴 밧줄을 배의 진행 방향으로 힘껏 집어던지고는 다시 슬슬 잡아 당겨 팽팽함을 유지시킵니다.  배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바닥에 가라앉은 납추에 달린 밧줄이 측연수의 손에서 수직이 되는 순간, 밧줄에 표시된 길이를 읽는 것입니다. 간단해 보이지요 ?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바닷속 지형은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저렇게 던지고 읽고 당기고 하는 중노동을 쉴 틈 없이 계속 해야 했습니다.  괜히 뱃밥 먹는게 힘들다는 것이 아니지요.

둘째, 밧줄이 수직이 되는 순간에 밧줄의 어디까지가 물에 잠겼는지 순간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줄자처럼 밧줄에 길이가 눈금과 숫자로 표시된 것도 아니고, 또 표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칠흑처럼 어두운 야간에는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 위에 혼블로워 회상 속에서 처럼, 길이 표시는 밧줄 중간중간에 특색있는 직물을 묶어서 했습니다.  즉 가죽, 캘리코 면포(calico), 서지(serge, 능직물의 일종)를 2, 3, 5, 7, 10, 13, 15, 17, 20 패덤(fathom, 약 1.83m)의 일정한 간격으로 묶어두어,  밧줄을 당기면서 표시 매듭을 만져보고 그 촉각으로 무슨 직물이 몇번째 간격으로 묶여 있는지만 알면, 지금의 깊이가 몇 패덤인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그 직물의 순서와 그 각각의 간격을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혼블로워가 지금은 못 외운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순서입니다.

 



그렇게 측정할 때, 만약 수심이 정확히 10 패덤이면 "By the mark 10 !" 이라고 외치고, 만약 13과 15 사이면 "By the deep 14 !" 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측연수는 몸도 힘들고, 젖고, 손바닥도 아픈데다 목청까지 아팠겠지요.  정말 고된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만화 기억들 나시는지... 저 뒤의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독특한 페리선에서도 수심 측정을 해야 했습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샙니다만, 미국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배에서는 이렇게 외치는 수심의 깊이 중 일부 숫자는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색다르게 불렀습니다.  마치 테니스 점수에서 0을 love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 숫자 2는 two라고 부르지 않고 twain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심이 정확히 2 패덤 (약 3.6m)일 경우, "By the mark twain")하고 외치는 소리가 강변까지 들렸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라는 것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 그 이름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아셨지요 ?



(우리가 양키 소년 문학 작가라고 무시하기 쉬운 마크 트웨인... 그러나 세계 문학사에서 정말 존경받는 인물이고, 또 다시 읽어봐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측연수가 나서야 할 때는 물론 바다 깊이가 얕다고 알려진 곳을 조심조심 통과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러자면 그래도 어느 정도 바다의 깊고 얕음이 표시된 해도가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드넓고 깊은 바다의 모든 곳에 대해 이런 식으로 해도를 만들 필요는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항구 주변이나 해협 주변, 강의 입구 등에 대해서는 세심한 해도 작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인공위성도 컴퓨터도 없는 시절에 그런 해도가 정확할리 만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수로안내인, 영어로는 파일럿(pilot), 요즘 명칭으로는 도선사입니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인 항구는 당연히 바닥이 얕고, 또 당연히 조석 간만의 차이가 있고, 또 언제 어느 정도까지 물이 차고 빠지는지도 항구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이야기지요.  여러분이 자동차 운전을 배우실 때도, 큰 대로를 운전하는 것보다 주차할 때가 더 위험하고 어렵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특히나 자기가 차를 세우려는 공간의 바로 옆에 엄청나게 비싼 마이바흐 같은 차가 주차되어 있다면 정말 주차할 때 식은 땀이 날 것 같습니다.  선박, 특히 큰 선박도 그렇습니다.  사실 망망대해에서야 바닥이건 다른 배건 걱정할 것 없이 그냥 항해만 하면 되지만, 항구에서는 바닥도 얕고, 예상치 못한 거센 해류가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다른 커다란 배들이 (망망대해에 비하면) 엄청난 밀도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모인 배들은 무척 비싼 것들이고, 배라는 물건에는 브레이크도 없고 선회도 쉽지 않으니까 까딱 잘못하면 대형 사고, 즉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항구에서는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배가 항내에 들어올 때는 의무적으로 수로안내인을 승선시켜 배를 안내하도록 했습니다.  이 수로안내인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아무나 시킬 수는 없었고, 그 항구에서 매우 긴 시간을 보내어 정말 항구 바닥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익숙한 뱃사람에게 면허를 주어 활동하게 했습니다.  수로안내인, 파일럿, 또는 도선사라고 불리는 직업은 자신이 담당하는 항구에 대해 전문가이기도 했지만, 항구를 드나드는 커다란 선박의 운항에 대해서도 전문가여야 했습니다.  작은 어선의 움직임과 커다란 전함의 움직임은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그 항구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정작 도선사 본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움직이는 작은 보트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선박으로 재주껏 올라타는 일이라고 하네요.  이는 18세기나 21세기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가끔 신문에 나오는 직업을 보면, 의사나 변호사가 연봉 킹이 아니고, 항상 변리사, 관세사들과 함께 도선사가 연봉 최상위 직업으로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영업을 하는 해당 사무소 전체의 연봉일 뿐 그 사무소에 고용된 변리사/관세사/도선사 개개인의 연봉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어쨌거나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의 연봉이 그렇게 높았을까요 ?  죄송합니다.  제목은 낚시였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개 도선사는 전직 선장, 그것도 경험 많은 선장 중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일단 분명히 신사 계급에 들어가는 중산층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콧대높은 영국 로열 네이비도 어느 항구건 외국 항구에 들어갈 때는 항상 해당 항구의 도선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고, 또 영국 해군 함장도 도선사에게 예의를 다해야 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 시대에도 상당히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끝으로 도선사에 대해서는 아주 유명한 만화, 즉 캐리커쳐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저런 역사책이나 심지어는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만화입니다.



이 만화는 영국의 전통있는 잡지인 펀치(Punch) 지에 실린 것으로, 기사 작위도 받은 정치 만화가인 존 테니엘(Sir  John Tenniel) 경이 그린 것입니다.  보시면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프러시아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황제 빌헬름 2세와 불화를 일으킨 끝에 재상직을 사임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선장인 빌헬름 1세를 도와 독일 제국이라는 거함을 만들고 운항해온 도선사인 비스마르크가, 철부지 신임 선장 빌헬름 2세의 지휘를 도저히 참지 못해 배에서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었지요.  도선사가 없는 배가 과연 어찌 되었는지는 제1차 세계대전 결과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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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재밌어욧!! 2019.08.22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탄

  2. hispe 2019.08.23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이제는 잊혀진 과거의 향취가 나는 생활, 문화사를 담은 이야기가 참 재밌단 말이죠. 뭔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상상만으로 막연히 그리운 느낌이 난달까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Uncharted water하면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영문명..ㅎㅎ 미지의 바다라...어울리는 타이틀이었네요.

  3. 루나미아 2019.08.24 0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측연수... 상상만 해도 힘들어보이네요

  4. 최홍락 2019.08.25 0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음향 측심기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처음 고안하고, 1922년 프랑스의 Pierre Langevin이 처음으로 개발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빙산 탐지까지는 모르겠으나 해상교통량이 많은 해협, 교차점 등에서 상대선박의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GPS를 이용하는 지금도 중요하게 쓰이는 장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가 연봉킹이었을지는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지금이야 1987년 제정된 영국 도선 업무 조례 등으로 진입 장벽 자체가 워낙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무면허로 템즈 강에서 도선 업무를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영국의 경우 헨리8세 당시 Trinity House (일종의 선원, 선장 공제회 내지는 조합)에 도선사 관리 업무를 맡기긴 했는데, 선장이나 선주의 절대적인 복종을 도출할 수 없었고 따라서 무면허도선사에 의한 불법 도선은 계속 되어왔다고 합니다.

    여기에 1800년부터 1914년 사이, 증기선의 출현, 선박 안정성의 발달, propeller 추진선의 출현으로 선박조선시의 안전성이 향상되면서 도선사들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하여 그 시기가 도선사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합니다.

    3. 그리고 도선사 연봉이 높은 것은 알려진 사실인데,(그중 40~50% 정도는 비용이 공제되서 순 연봉은 1억 5천 정도 된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역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힘든 업종입니다. 24시간 밤낮없이 악천후건 뭐건 선박의 안전한 입출항을 위해 선장의 도선요구가 있으면 항만외항까지 밤중에도 달려 나가야 하고. 조그만 Tug Boat는 파도와 풍랑에 언제 전복될 수 있으며 선박 본선 접안후 사다리를 타고 선박에 올라 가는 것도 빡세죠. 이 과정에서 안전사고로 강풍과 파도로 재해 사망하는 도선사들이 속출합니다. 무엇보다도 생사를 무릎쓰고 일하고 난후 작업시간 밤낮이 불규칙하고 업무의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은퇴한 도선사들의 30%가 암으로 사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선박 충돌 사고가 나면 함장과 더불어 도선사가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이 있고요.

  5. 유애경 2019.08.25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원에서 환자 진료 기록부를 일컫는 '차트'가 원래 그런 의미였군요!

    최홍락님//선박 충돌사고에 선장과 함께 책임을 뒤집어 쓰다니 도선사도 참 극한 스트레스에다 극한 직업 같네요!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굉장히 흥미진진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특히 신약의 경우 어떤 사건 발생 이후 10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의 사람들에 의해 씌여 당시의 일상이나 사회상 등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인구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주민들이 출생지로 되돌아가야 했다는 부분 등이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고 논쟁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재판을 위해 팔레스타인 땅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로 호송되던 바울이 난파를 겪은 이야기가 주 내용인 사도행전 27장은 당시 지중해 선박 항해에 대해 많은 부분이 정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만 성경 원저자 혹은 번역자가 너무 밋밋하고 불친절하게 서술을 해놓아서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품이 나올 수준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너무 아쉽지요.  그래서 제가 한번 (불경스러움을 무릅쓰고) 믿음 대신 흥미위주로 풀어서 써봤습니다.

아래는 사도행전 27장을 저처럼 그리스-로마식 표기가 더 익숙한 분들을 위해 인명과 지명을 그리스 역사책에 흔히 나오는 식으로 수정하고 (가령 율리오 --> 율리우스,  아드라뭇데노 --> 아드라미티움) 좀더 이야기식으로 제 임의로 풀어 쓴 것입니다.  사도행전 27 원본은 https://www.bible.com/ko/bible/86/ACT.27.KLB 에서 '현대인의 성경' 버전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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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로마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죄수 몇몇과 함께 로마로 압송되게 됩니다.  로마로 가자면 선박편을 이용해야 했는데, 바울과 죄수들을 로마로 압송할 근위대(the Augustan cohort) 소속 로마군 백인대장(centurion)인 율리우스(Julius)는 케사레아(Caesarea Maritima)에서 배편을 구했습니다.  당시 백인대장 휘하 80여명 정도의 군부대가 이동할 때에는 전세 수송선을 이용하지 않고 그냥 부대장이 알아서 구한 배편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나 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해변의 케사레아는 그다지 번화한 항구는 아니었고, 그래서 이탈리아로 곧장 가는 배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율리우스는 일단 좀더 많은 선박편이 집결하는 에페수스(Ephesus)나 밀레투스(Miletus) 등의 주요 항구가 즐비한 소아시아 쪽으로 가서 배편을 구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구한 것이 아드라미티움(Adramyttium) 시에서 온 어떤 선박이었습니다.  율리우스와 그의 부대는 바울과 죄수들을 이 배에 태우고 출항했습니다.  (27:1 ~ 27:2)

 

(성서에는 '아드라뭇데노'라는 이름으로 나온 Adramyttium의 위치는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 터키 서해안 북쪽 지역입니다.  페르가뭄 바로 위에 있습니다.  다만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바울이 탔던 첫 배인 저 아드라미티움 선박은 거기서 온 배일 뿐 바울이 거기서 출항을 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성서에 '가이사랴'라고 나온 팔레스타인 해안 도시인 케사레아에서 출항했습니다.)

 

 


케사레아에서 시돈(Sidon)까지는 하루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율리우스는 바울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풉니다.  이 항구에 바울을 잠시 내려주고 바울의 친구들을 방문하도록 허락해준 것입니다.  시돈 항에서 출항하여 소아시아 해안, 그러니까 지금의 터키 서해안으로 향하던 이 배는 역풍을 만나게 되어 키프로스 섬과 킬리시아(Cilicia)와 팜필리아(Pamphylia) 앞 바다를 지나 리키아(Lycia) 지방의 미라(Myra) 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백인대장 율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하던 화물선 한 척을 발견합니다.  이 화물선에는 곡물이 실려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나날이 늘어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지중해의 곡창지대인 이집트에서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화물선들이 꽤 많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이집트는 로마에 14만톤의 곡물을 공급했는데, 네로 시대에는 그 양이 42만톤까지 늘어났습니다.  율리우스는 자신의 부대와 바울 등의 죄수를 이 알렉산드리아 곡물 수송선에 옮겨 태웁니다.  (27:3 ~ 27:6)

 

(밤에는 항해를 안 하고 그냥 하루에 12시간만 항해를 한다고 해도, 3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 화물선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범선은 빨라야 5~6노트(약 시속 10km)에 불과했거든요.  이 배는 며칠 동안을 천천히 항진하고 난 뒤에야 고작 300km 떨어진 크니두스(Cnidus) 섬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그나마 여기서 바람이 맞지 않아 곧장 에게 해를 건너 서쪽의 그리스로 향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습니다.  즉 삼모니움(Salmone, Sammonium) 앞을 지나 크레테 섬 남해안의 라사이아(Lasaea, Lasaia, Lisia)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항구’(Kaloi Limenes, Fair Havens)라는 곳에 겨우 닿았습니다.  (27:7 ~ 27:8)


바울과 로마군을 태운 화물선은 여기서 며칠을 보내며 바람의 방향이 유리해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시기가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속죄일(Yom Kippur, the Day of Atonement, 유대인들에게 신성한 날로서 25시간 금식을 행했습니다)까지도 지나버린 다음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지중해는 늦가을부터 겨우내 바다가 거칠어 당시의 원시적인 범선은 항해가 불가능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도 겨울에는 해상 작전이 완전히 중단되곤 했습니다.  4세기 경의 로마인 베게티우스(Vegetius)의 기록에 따르면 지중해는 '몇 달간은 항해하기 매우 좋고, 몇 달간은 위험하며, 나머지는 완전히 불가능'했습니다.  베게티우스에 따르면 항해하기 좋은 기간은 5월 27일부터 9월 14일까지, 그리고 항해하기 위험한 기간은 9월 15일부터 11월 11일까지, 그리고 다음해 3월 11일부터 5월 26일까지였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의 속죄일은 현대적 달력에 따르면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화물선이 '아름다운 항구'에 발이 묶여있던 저 시기는 항해가 불가능한 기간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항해하기 위험한 기간이었습니다.  (27:9)

 

(한글 성경에는 그냥 '금식하는 때도 이미 끝난 시기'라고만 나와 있어서 대체 뭔소리인가 싶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the Day of Atonement, 즉 속죄일이라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욤 키푸르(Yom Kippur)라고 한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달력을 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달력으로는 마치 음력처럼 9월 중순이 되었다 10월 중순이 되었다 왔다갔다 합니다.)

 

 

(당시 지중해를 항행하던 화물선의 모습을 그린 부조입니다.  저렇게 사각돛 1개와 선수돛만 가지고는 바람을 거슬러 항행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위의 부조를 참조하여 복원한 당시 화물선의 모습입니다.  특히 고물 쪽에 양쪽으로 늘어선 노는 전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기 위한 키 역할을 하는 노입니다.  요즘 같은 방향타는 이때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뜬금없이 오지라퍼가 됩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학자였고, 생업으로 배운 기술은 텐트 직공이었습니다.  항해와는 전혀 무관한 landsman, 즉 뭍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지방으로의 전도 여행을 통해 지중해 바다의 특성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승객으로서의 경험이었을 뿐 바울은 전혀 seaman, 즉 뱃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신분은 한낱 죄수였지요.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호송을 책임진 백인대장 율리우스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지금은 바다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배와 화물은 물론 우리 목숨까지 위험하다'라고 경고했습니다.  (27:10)

하지만 백인대장 율리우스도 로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올 때 걸어온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평생 바다에서 밥벌이를 한 선원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은 확실히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쓴 것이긴 했습니다.  율리우스는 당연히 전문가인 키잡이(pilot, helmsman, kybernetes, kubernetes)와 결정권을 가진 선주(captain, shipowner, naukleros)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이들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짧은 거리의 항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했고, 율리우스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키잡이를 한글 성경에는 '선장'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건 번역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서양 문물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말 잘 된 번역이라고 박수를 칠 만한 번역입니다.  원래 그리스 시대부터 당시 선박들에는 두 명의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의 최종 지휘권을 가진 사람은 보통 '선장'이라고 번역되는 나우클레로스(naukleros)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사실 뱃사람이 아니라 그냥 돈이 많은 사업가로서 그 배의 소유주였습니다.  그에 비해 보통 '키잡이'라고 번역되는 쿠베르네테스(kubernetes)라는 사람은 당시 선박의 방향을 조종하는 선미 방향타를 젓는 뱃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기술적 측면에서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이 키잡이가 요즘 기준으로 볼 때 선장이 맞습니다.  (27:11)

 

(요즘 가장 핫한 컨테이너 기술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구글의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인 쿠버네티스의 이름도 바로 이 키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입니다.   구글에서는 쿠버네티스의 로고를 저런 조타륜으로 정했지만, 실제 그리스의 키잡이들에게 저런 조타륜은 전혀 낯선 물건이었습니다.  저런 조타륜은 훨씬 후대에 발명된 것이고 그리스의 키잡이들은 방향을 바꾸기 위해 고물에 장착된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아름다운 항구'에서 출항하여 포에닉스(Phoenix) 항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성경만 보면 키잡이와 선주가 마치 어리석거나 욕심이 많아서 현명한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기가 쉽습니다만, 사실 키잡이와 선주로서는 매우 합리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은 현재도 큰 항구로 발전하지 못한 그야말로 어촌 정도되는 항구에 불과했습니다.  배가 항구에서 안전하게 있으려면 배를 해변 마른 땅 위에 끌어올려두든가 천연적인 것이든 인공으로 쌓은 것이든 거친 파도를 막아줄 방파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은 현재도 큰 항구로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런 천연 방파제가 없는, 작은 어촌 정도되는 항구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겠습니다만 바울이 탄 화물선에는 많은 곡물 외에도 선원과 승객이 모두 합해 276명이라고 된 것으로 보아, 꽤 큰 배였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18세기 영국 해군 기준으로도 200~300명의 승조원을 태운 배는 적어도 700톤에서 1400톤 정도 되는 제5급함, 즉 대형 프리깃함에 해당하는 배였거든요.  물론 수십 문의 쇳덩이 대포들을 싣고 무보급으로 6개월 이상 대양에서의 작전이 가능했던 18세기 프리깃함과 기껏해야 지중해 연안만을 간신히 기어다녔던 기원후 1세기 경의 화물선을 비교해서는 안 되겠지요.  당시 지중해를 항해하던 화물선들은 대개 배수량이 70톤에서 150톤 정도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큰 배는 “10,000개의 암포라(amphora,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담는 토기 항아리) 수송선” 즉 500톤 정도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탔던 화물선의 배수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뭍 위로 끌어올릴 정도의 작고 가벼운 배는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즉, 겨울의 거친 파도에 그대로 노출된 '아름다운 항구'에 그 배를 놓아둔 채 겨울을 난다는 것은 그 선주에게는 그냥 망하라는 이야기나 똑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키잡이와 선주는 그 근처에서 가장 가깝고 또 그나마 안전한 항구인 포에닉스로 배를 몰고 가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 두 항구 사이의 거리는 고작 160km 정도로서, 바람만 괜찮으면 해안에 바싹 붙어서 가도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27:12)

 

(설마 이 하루짜리 항해에서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얼마나 큰 사고가 생기겠습니까...만은,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결혼을 할 때는 세번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결혼이 그렇게 위험... 헙 !)

(계속)


Source :  https://www.simplybible.com/dmaps.htm
https://graceofourlord.com/tag/mysia/
https://www.conformingtojesus.com/charts-maps/en/paul%27s_journey_to_rome_map.htm
https://www.jw.org/en/publications/books/bearing-thorough-witness/preaching/paul-shipwreck/
https://www.jw.org/en/publications/magazines/watchtower-no5-2017-september/did-you-know/
https://www2.rgzm.de/navis/Themes/Commercio/CommerceEnglis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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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구자 2019.08.19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저기 가려다가 그 섬까지 간건가요. 역시 뱃길은 위험하네요.

  2. Spitfire 2019.08.19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경시대를 에피소드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소설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름 원작도 있고 애독자도 많으니 재밌게만 풀어내면 흥행은 따놓은 당상 같은데 말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을 기피하는데, 역시 인류는 진화하고 있는게 맞는가 봅니다.

  3. 연습장 2019.08.20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싫어하는 분들도 많지만 어찌되었든 저에겐 로마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준 로마인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중 하나가 전란시대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자 상류계층에선 독신주의와 출산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로마황제들은 다산을 하면 공직에 가산점을 주는 등 대책을 세우는 장면이죠.


오늘은 번외편으로,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아래 댓글과 함께 거기에 대한 제 짧은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절대 '원인'님 생각이 틀렸고 제 생각이 맞다는 내용이 아니며, 그냥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글 중 핵심 부분은 아래 부분입니다.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분이 영국 해군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댓글을 다셨고, 거기에 대해 다시 '원인'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일단 다부가 해상 운송에 의존하여 리보니아(Livonia), 즉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하고 거기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원인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다부가 그런 의견을 개진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는 그것이 바다 경험이 없는 뭍사람인 다부가 뭘 잘 몰라서 내놓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다부의 수륙 병진 작전 계획안을 거부한 것은 이집트에 직접 상륙해보고 또 영국 침공 작전을 끝까지 추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육상부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고, 그와 발맞추어 연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는 수송선단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면 보급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

바다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나 파도의 세기가 제멋대로 변할 수 있으므로, 수송선단이 육상부대와 연락을 유지하며 병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 육상부대와 항상 병진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간중간 적절한 지점에서 랑데부하여 보급품을 하역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

접안 시설이 없는 해변이나 작은 어촌 등에 보급품을 내려놓는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말먹이를 빼고도 20만 대군은 하루에 200톤씩의 보급품이 필요했는데, 한번에 1주일치 씩만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1400톤의 물자를 론치(launch) 보트 등의 대형 보트를 이용해 하역해야 합니다.  론치 보트에 3톤의 짐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해도, 1400톤을 내려놓으려면 배와 해안 사이를 467회 왕복을 해야 했습니다.  20척의 수송선단에서 40척의 론치 보트를 이용해서 하역을 한다고 해도, 보트 1척당 12회 왕복해야 합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수송선 선창에 들어있던 3톤의 짐을 보트에 내려놓고, 그걸 다시 해안까지 300~400m를 노를 저어간 뒤 다시 모래톱 해안에 내려놓으려면 2시간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20척이라는 꽤 큼직한 선단이 하루 종일 정지 상태로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영국 해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  더 큰 문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200km가 넘는 항로에 걸쳐서, 이 짓거리를 7번 이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수십 척으로 구성된 대형 선단 대신, 개별적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하루에 2~3척씩 끊임없이 내보내면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국 해군에는 74문짜리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나 28문짜리 프리깃(frigate)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룹(sloop)함, 브릭(brig)함, 커터(cutter)함 등 다수의 소형 함선도 잔뜩 거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형 함선의 주임무가 적국의 연안을 감시하면서 그런 화물선을 나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치히 항구에 프랑스군이 백여 척의 수송선을 모은다는 소식, 그리고 프랑스군이 해안선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은 반드시 간첩 등을 통해 영국 해군에게 알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영국 해군은 당연히 단치히 항구 근처에 그런 소형 함선으로 레이드 파티를 짜놓고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4.  해안가에 기마 포병대를 다수 포진시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지원하게 하면 영국 해군 소형함 정도는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기마 포병대가 수송선을 따라 해안선을 이동해가며 호위해주는 것은 애초에 도로 사정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기마 포병대가 원활히 이동할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존재한다면, 애초에 굳이 수송선을 띄울 필요없이 그냥 그 도로를 따라 보병대와 치중대를 이동시키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시 포병 기술로는 수백 m 떨어진 바다에 떠있는 소형 함선을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명중시킨다고 해도 당시 기마 포병대가 사용한 8파운드 포 정도로는 소형 함선조차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뛰어난 속도로 적함에 근접하여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적의 군함이나 수송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지 원거리 포격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5. 어쨌거나 해안선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항해한다면 영국 해군을 겁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

 

(1807년 이후 본의 아니게 덴마크 해군의 주력함이 된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 즉 포함(gun boat)입니다.)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소위 '포함 전쟁'(Gunboat War)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1807년의 제2차 코펜하겐 전투 이후, 덴마크와 '포함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소규모 해전은 1807년 영국에게 당한 이후 대형 함정을 모두 잃은 덴마크 해군이 탑승 인원수 70~80명 정도의 대형 포함(gunboat)를 대량으로 만들어 영국 해군 소속의 브릭(brig)함이나 커터(cutter)함 등 소형 함정들과 싸웠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투 중 일부는 거포로 중무장된 해안 요새의 사정거리 안쪽에서 벌어졌는데, 그런 와중에도 영국 해군은 꽤 짭짤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가령 스완(Swan)이라는 이름의 커터함은 원래 정규 영국 해군함정이 아니라 민간에서 임대한, 소위 HMH(His Majesty's Hired) 무장 커터함(armed cutter)이었습니다.  이 배는 12문의 4파운드 포와 2문의 9파운드 캐로네이드 포(carronade, 사정거리가 짧은 대구경 저압포)를 갖춘 배수향 약 130톤 가량의 소형함이었습니다.  스완 호는 1808년 5월 24일 덴마크 보른헬름(Bornholm) 섬 인근에서 덴마크 해군의 130톤짜리 커터 사략선 하벳(Habet) 호와 대결을 벌었는데, 이때 스완 호는 하벳 호 뿐만 아니라 보른헬름 섬의 해안포들로부터도 맹렬한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 해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하벳 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한 것에 비해, 스완 호는 부상자 한 명 내지 않았습니다.  1809년 8월 12일에는 영국 해군 브릭함인 멍키(HMS Monkey) 호와 대형 론치 보트가 덴마크 무장 소형선박들 3척이 수심이 얕은 해안에 얼쩡거리는 것을 것을 습격했습니다.  덴마크 무장 선박들은 아예 배를 모래 해안에 좌초시키며 육지로 탈출했고, 영국 해군은 3척을 모두 나포했습니다.  

 

 

(물론 반대로 영국 브릭함이 다수의 덴마크 포함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위의 그림은 덴마크 측에서 그린 것이지요.)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Gunboat_War
https://en.wikipedia.org/wiki/Hired_armed_cutter_Swan#The_second_S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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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9.08.15 0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결국 모스크바로 직행한 것이 그나마 가장 가망이 있는 길이였기 때문이었다는 뜻인가요...?

    • 원인 2019.08.15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스크바 직행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입니다.
      이 시나리오는 나폴레옹의 "빨리 성과를 보고 싶다."는 조급함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심사숙고해서 나온 거라고는 볼 수 없죠.

      첫째 보급문제 + 코사크 기병의 습격문제

      둘째로는 전쟁의 기본원칙인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싸운다에 위배되기 때문이죠.

  2. ㅇㅇㅇ 2019.08.15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을 안하는게 가장 좋은 길이었겠지요. 비스마르크하고 빌헬름2세가 지금 독일에서 각각 어떤 대접을 받을까 생각해보면...

    • Spitfire 2019.08.15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 침공을 안했으면 다시 대불동맹의 무한 반복이죠. 러시아가 떨어져나가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언제든 등돌릴 수 있는거고, 제국은 지속되는 전쟁으로 불안정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황제 입장에서는 시범케이스로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도 좋은 최선책이라 여겼다고 생각됩니다.

  3. nasica 2019.08.15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폴레옹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은, 저 개인적으로는 그냥 러시아 원정을 안 떠나는 것이 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꼭 쳐들어가야만 했다면, 차라리 그냥 리가(Riga)와 레발(Revel, 오늘날의 탈린) 등의 항구도시들만 정복한 뒤에 장기적으로 눌러앉기를 시도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 원인 2019.08.1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가, 탈린에 눌러앉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가 개발된 곳이라고는 해도 경제력이 독일-폴란드처럼 풍족하진 않기 때문에, 눌러앉을 만큼 보장해 주진 않죠.

      그래서 독일-폴란드에서 해상보급을 해 줘야 오랜 시간동안 작전이 가능합니다. 만약에 해상보급이 안 되면 리보니아의 경제력 한도내에서 한 차례 정도만 작전을 수행해야 됩니다.
      즉 볼가강을 따라 모스크바까지 진격해서 짜르잡기를 시도하고 그 시도가 실패하면 리보니아는 재편성용으로만 쓰고 즉시 철수해야 되는 거죠.

      해상보급에 성공하면 다시 2차 3차로 짜르잡기를 시도할 수 있겠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시도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너무 오래 있으면 본국을 비운 사이에 반란이 일어나거나 대불동맹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돌아가는 게 맞죠.

    • nasica 2019.08.15 14: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 예,상책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만, 그래도 중책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요새화된 주요 항구 도시를 점령하면 비교적 소수 병력으로도 지킬 수 있을테니 최소한 영국과의 교역은 방해할 수 있을테니 차라리 리가와 레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킨다고 해도 해마다 봄이면 그거 탈환하려고 포위 공격하는 러시아군과의 소모전이 벌어질테니 그것도 결코 상책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상책은 안 쳐들어가는 것이 역시...

  4. 빅터 2019.08.15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편적인 지식만 알고있는저는 참 궁금한게.
    러시아도 사람사는데고, 그래서 군대도 있는데 - 즉, 수비군이 있다면 그 수비군이 먹을게 있다는 소리이고,
    먹을게 없다면 수비군도 그만큼 많이 없을건데
    먹을건없지만 (수십만 대군이 필요할 만큼) 수비군이 있다라는 역사적 결론이 있어 신기합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싸우러 군대를 보낼 수 는 있지만 나폴레옹은 그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낼 수 없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원인 2019.08.15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러시아군도 인간이라 먹지 못하면 아사하고 겨울에 동사도 합니다.

      문제는 2가지에서 옵니다.

      첫째는 러시아군은 퇴각중이라 보급선이 짧아집니다. 프랑스군이 보급선이 길어지는 것과 반대인 거죠.

      러시아군이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게 아닙니다.
      러시아군도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죠.

      1차대전 때에도 러시아군이 식량부족으로 애를 먹다가 결국 러시아혁명이 터진 게 식량생산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식량수송이 안 되어서 발생한 겁니다.
      여기는 굶주리고 있어도 어딘가는 식량이 풍족한 곳이 있게 마련인데, 이걸 빨리 연결하기란 어렵죠.
      기차가 발명된 1차대전때에도 이 지경인데, 나폴레옹 전쟁때는 보급로의 길이차이가 치명적입니다.


      둘째는 러시아는 단순히 농경민족만 다뤄 온 게 아니라 기마술에 뛰어난 유목민족도 다루어 온 노하우가 많기 때문에, 시베리아쪽으로 철수하더라도 그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지만, 프랑스는 그런 게 전혀 없죠.

      실제로 러시아원정에서 나폴레옹을 실질적으로 격파한 건 러시아군이 아니라 코사크기병입니다. 코사크 기병 때문에 보급이 차단되고, 전초진지가 계속 습격당하고 정찰병이 계속 소모되면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지고 , 철수중에도 재편성을 할 수가 없었고, 피해가 급격히 불어났죠.

      그래서 코사크 기병에 대한 대책이 최우선시 되어야 되는데, 모스크바 직공 시나리오 자체가 코사크 기병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시나리오죠.

      만약에 이 시기가 폴란드가 좀 잘나가던 시기였다면 폴란드가 가진 코사크 지배력을 이용해서 포니아토프스키가 맹활약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때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체가 러시아에 넘어간 시대라서 코사크는 일단 러시아의 전력이 된 상태죠.

    • nasica 2019.08.15 1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님 말씀처럼 자국 영토 안쪽으로 후퇴하는 군대의 유일한 장점이 보급선이 짧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쳐들어가는 것은 어려운데 러시아가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은 쉬운가라는 점은, 2가지로 설명됩니다.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로 진격할 때처럼 인구가 밀집된 곡창지대로 진격할 때는 현지 보급(징발)이 쉽습니다. 또한 러시아가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때도, 아일라우 전투 때도 러시아군은 중부 유럽으로 전진할 때 언제나 너무 느렸습니다. 결국 보급이 모든 군대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5. 원인 2019.08.15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의 건의는 예전에 폴란드 역사학자와 이야기 할 때 들은 이야기 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기록에 아마 나와 있었던 듯 한데 다부가
    포니아토프스키와 친분이 있어서 최대한 폴란드와 밀착된 작전을 짜서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쪽 헤게모니를 찾는 방향과
    러시아원정의 성공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향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프랑스 원수들 중에서 폴란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게 다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징발도 다부가 지시하는 쪽이 폴란드인들도 거부감이 적었을 테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해서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다시 폴란드 휘하로 가져오는 것보단
    훨씬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을 듯 합니다.( 주민들의 심리적 저항의 강도가 다름 )
    다부는 다부대로 자기 나와바리(?)였던 독일-폴란드를 최대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게 포니아토프스키의 자기 계산과 맞은 거죠.

    그리고 "병진"의 의미를 잘 이해를 못 하고 제 의견을 왜곡시키는 듯 한데..
    병진이란 나란히 같이 동기화 된 상태로 진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운은 육운대로 하고 해운은 해운대로 비동기화된 상태로 이동하는 거죠.
    해운이 실패하면 육운으로 하고 해운이 성공하면 해운으로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리투아니아부터는 아무래도 육운의 비중이 커질 거라고 했는데,
    이 말은 리투아니아 근처에서 죄다 육운으로 바꾼다는 이야기가 아니죠.
    육운으로 가야 될 상황이 아무래도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구요.
    실제로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영국해군이라고 해서 항상 나포작전에 우세하다?
    이것도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변수는 항상 달라집니다.
    넬슨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아부키르만에서 똑같이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뭐 백번양보해서 영국해군 지휘관이 죄다 우수하다 해도 그 전제는
    이 시나리오에서 치명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면 리보니아 시나리오에서 해운이 치명적으로 필수 불가격한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해운이 있어야 비교할 수 없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없어도 아예 안 되는 문제는 아니죠.
    그 대신에 병력수를 더 줄이고 작전가능한 시기가 줄어드니까 매우 불리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수로보급은 리보니아-발틱볼가운하-볼가강 경로를 말하는 겁니다.
    독일-폴란드-리보니아 경로도 물론 아주 필요하긴 하지만 없다고 해서 원정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죠. 대신에 한 번 원정으로 끝내고 철수해야 할 겁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해상보급인데, 영국해군이라는 변수가 반드시 치명타를 가할 지 아닐지는 실제 상황에 닥쳐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해안을 따라 육운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 못하신 듯 한데,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이유는 포병대로 수송선을 엄호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이유는 마차보급의 최대적인 경기병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기병의 전투력은 돌격할 때의 속도에서 나오고 최대한 습지를 따라 이동해야
    경기병이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제한된 환경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마차도 습지에서는 애를 먹지만 그 대신에 속도를 크게 낼 수 없는 경기병들을
    마차 호위병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저격할 수가 있죠.

    키르홀름 전투에서도 스웨덴군이 습지를 따라 이동중에는 폴란드군이 공격하지 않았죠
    물론 이 경우는 대규모 전투기동인 경우지만, 불과 해안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으로
    유인된 그 순간에 스웨덴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걸 생각해 보면
    습지의 상태와 기병의 속도간에 상관관계가 얼마나 강한 지를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리보니아 그 자체이지, 해운으로 연결하는 것 자체도 부차적이고
    해운실패시에 육운으로 연결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부차적입니다.
    리보니아 현지보급까지 다 생각한 이후의 작전이죠.

    그래서 리보니아 일시부양 경제력에 맞게 다부가 생각했던 병력수인 20만 정도로 줄여야
    되는데, 러시아의 총병력이 많으니까 프랑스도 그에 맞게 45만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린말입니다. 이건 나시카 님이 언급한 대로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간 숫자이고
    (이른바 위세보여주기) 애초에 모스크바 진공이라는 시나리오 자체의 한계때문에
    발생한 숫자이지, 시나리오 자체를 바꾸면 필요없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진격한 것이 패착인 이유의 핵심은 전쟁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기본원칙 =>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상대한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털린 것도 바로 이 이유때문이죠.
    남한산성이라는 조선이 원치 않는 장소로 갔기 때문에 근왕병들이 국왕을 구조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고, 근왕병들 역시 원치 않는 시간 장소에서 격파당했죠.
    물론 금화전투처럼 끈기있게 원하는 시간, 장소를 선점한 경우에는 승리했죠.

    러시아 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면 짜르는 당연히 시베리아쪽으로
    철수할 것이고 그 상황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소유한 건 짜르 쪽이죠
    짜르가 시베리아로 철수할 경우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시나리오가 애초에 성립한 겁니다

    반면에 리보니아로 진격하면 안전한 근거지를 배후에 두고 뻬쩨르부르크를 공략할 수
    있는데, 뻬쩨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여기는 수도이고
    러시아군이 어떻게든 그냥 멀뚱히 보고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처럼 침공군쪽이 방어포지션을 갖고 침공당한 쪽의 공세를 앉아서
    적은 병력으로 효율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위치가 되어 모스크바 때와는 상황이 달라지죠.

    괜히 쓸데없이 병력이 많아 봐야 오히려 나폴레옹의 작전술은 무뎌집니다.
    적은 병력으로 원하는 시나리오에서 적을 요격했던 6일전투를 보면 알 수 있죠.

    모스크바 시나리오에서 조차도 보로디노 전투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리보니아 시나리오
    에서는 당연히 그에 준하거나 이상의 회전으로 붙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 경우에는 전장을 프랑스쪽에서 고를 수 있기 때문에 보로디노처럼 무승부에 가까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약에 실패할 경우에는 리보니아로 돌아가서 재편성한 뒤에 철수하면 그만입니다.
    짜르를 잡지 못해도 대육군이 살아있으면 "다음 차례의 대불동맹"이 오판한 사이에
    다시 한번 나폴레옹의 작전술로 격파하면 되는 수순이니까요.

    나폴레옹 전쟁을 대국적으로 보면 대영제국의 경제포위망 때문에 질 수 밖에 없었다.
    ==> 남이 해 놓은 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적극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발전하기 위함이죠. 숙명론적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론을 넘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 nasica 2019.08.15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원인님 의견의 원래 뜻을 곡해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와는 무관하게,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이유가 적의 경기병 습격으로부터 치중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저로서는 고개를 좀 갸우뚱거리게 하네요. 진격할 때 보급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도로 사정 그 자체 때문이지 적의 경기병 때문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콩콩이 2019.08.15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적극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발전하기 위함이죠. 숙명론적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론을 넘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물론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진짜 싸나이라면, 본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적당한 타협책'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차라리 누르하치가 그랬듯 때를 기다려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때'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러시아 원정보다 손실은 덜하지 않겠습니까. 꼭 완벽한 승리, 완벽한 유럽 제패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냥 좀 어중간한 승리나 적당한 성과에 만족하는 것도 사람 사는 방법입니다.

      사실 근본적으로, 말씀해 주신 모든 방안은 '전술적'인 측면이 짙습니다. 그런데 전략 단위의 불리함을 전술 단위에서 극복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카지노의 도박사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길입니다. 하물며 나폴레옹은 '다수로 소수를 치기 위한 작전술과 전략'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대불동맹전쟁의 무한반복을 수용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프랑스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또 나폴레옹의 몰락에서 드러나듯, 이빨이 반쯤 꺾인 상황인데도 동맹군은 평화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단지 프랑스 영토의 원상복귀를 나폴레옹이 거부했을 뿐이지요. 결코 동맹군도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6. 진충보국 2019.08.16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개인적으로는 해상보급안은 좋은것 같습니다, 예전에 화물 혹은 보급품의 적화 및 양하는 선박이 묘박하고 부선을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보급품의 적양하에 시간과 노력이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해상운송의 기본은 대량의 화물을 저렴한 비용으로 한번에 수송이 가능합니다, 또한 하역시설이 완비된 항구의 안벽이나 부두에 선박이 접안한다면 하역 작업은 더욱 신속하게 이뤄집니다 이러한 거점 항구의 확보와 물자집적소, 보급창들의 적극적 운용으로 육군의 진군에 맞는 보급 수송선대의 운용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정책이나 전략이든 결정권자의 의견이 젤 중요합니다 나팔륜의 경우 오로지 육전 지휘관이고 또 아부키르, 트라팔가등의 해전에서 박살난 경험이 있기에 해상 병진은 처음부터 채택되는것이 어렵지 않았나 추측 합니다 첨언하면 이러한 작전수행과 보급, 전략차원에서 국가자원의 운송을 신속하고 숙련되게 하기 위하여 국적상선대를 보유해야하고 자국 선원들을 유지해야 된다고 할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 아직도 자국 상선대를 Merchant Navy라고 부르고, 전통적인 해운/해군강국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해군예비원제도를 운영하는 이유이기도 할것입니다.

  7. 흠흠흠 2019.08.16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말고 그냥 스페인으로 진격해서,
    스페인 잔당과 웰링턴 아주 요절을 내버리고,
    반항은 꿈도 못 꿀 만큼 완전히 장악한 다음,
    적당히 영국과 휴전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아일라우, 하일스베르크, 아슬린 아스페른, 바그람, 보로디노...
    사람들이 하도 대포알에 요절나다 보니 글만 읽어도,
    나폴레옹 뭐 하는 인간인가 싶네요.

    • 0_- 2019.08.1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유럽이라는 체스판에 놓인 기물 1, 2, ... , N 정도 아니었을까요?
      거대 군사쿠데타 CEO가 창립 멤버도 아닌 임원이 모가지가 날아가건 말건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나마 다리를 자르니 죽으니 할때 울었다는 장란 정도 되어야 사람대 사람이었겠죠...

  8. 바다에산다 2019.08.1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가장 좋은 대안은 전쟁을 안 하는 거였다는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9. starlight 2019.08.16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경우의 수를 산정하며 여러 가정을 해볼수 있고 각각의 경우가 타당성과 가능성.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나폴레옹의 강점은 신속한 기동.개별 기동후 결정타를 날릴 대회전에서 한번에 제때 집결해 전력 극대화. 현지 보급을 통한 작전의 수월성. 황제가 직접 원정을 함께하는 무형의 사기 진작. 빠른 의사결정. 전략 거점을 정복해 대외에 성공을 과시하는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모든 요인들이 한계 효용에 다다른게 러시아 원정의 패착이었다 봅니다. 차라리 스몰렌스크 정도까지 영토 확장을 해놓고 상당한 병력을 폴란드에서 차출해 명분과 실리를 쌓고 보급도 충당했다면 어땠을까요?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을 조속히 끝내려는 조급함과 조바심이 보이는데, 러시아만큼은 장기전을 도모해봤다면 권좌를 잃는 비극은 막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해로를 통한 보급은 저는 사실 상상도 못했네요.이래서 사람은 견문을 넓혀야하나 봅니다.

  10. 포세이돈 2019.08.16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이 당대 기술력으론 제일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러기엔 두 가지 조건이 미비하지않나요?
    첫번째는 나폴레옹의 해상보급에 대한 신뢰
    둘째는 발트해 제해권이요.
    나폴레옹 일생의 프로젝트인데 해상보급은 트라팔가르 해전 악몽이 있는 나폴레옹으로서는 쓰기 두려운 카드였을거고, 해상보급을 1이라도 생각했다면 나폴레옹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스웨덴을 포섭했어야합니다. 그러나 나시카님 지난번 글을 되짚어보면 프랑스는 스웨덴 포섭에 실패했죠. 베르나도트 에게 자기 약점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을겁니다.

  11. k886860 2019.08.17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지하게 책을 출판하셔야 될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쓰신글 묶으면 분량이 충분히 될듯... 저는 그중에서도 장 란 원수의 일대기가 정말 감명깊었습니다.

  12. 샤르빌 2019.08.18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동맹군 편에 붙어버린 것도 좀 곤란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또 결과를 놓고보는 웹상에서야 다들 내가 나폴레옹이고 제갈공명이라 이런저런 훈수를 두지만 뭐 원균급의 인물이라면 몰라도 누가 되었든 당시의 지도자들 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달리 '역사에 만약은 없다' 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니까용


나폴레옹의 기존 작전들의 특징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딱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문어입니다.  그는 휘하 군단들을 문어발처럼 넓게 펼친채 전진하다가, 적 주력부대의 존재가 그 촉수 중 하나에 걸려들면 정말 먹잇감을 건드린 문어처럼 다른 촉수들이 벼락같이 그 방향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멋있어 보이지만, 이런 작전 형태에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분산된 채 전진하다가 강력한 적을 만날 경우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넓게 펼쳐진 촉수들이 정말 재빨리 움츠러들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각 군단들의 기동력이 매우 좋아야 했지요.  원래 나폴레옹 군단들의 행군 속도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습니다만, 그런 그들에게도 이런 작전은 힘에 겨운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의 전투에서도 주요 부대들이 밤새 행군하여 전투 시작 직전에야 전투 현장에 간신히 도착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약점을 무릅쓰면서 촉수를 펼친 문어처럼 휘하 병력을 넓게 전개한 채 전진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정찰기가 없는 시대에는 적 주력 부대의 위치를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나폴레옹처럼 식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것도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전법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주로 활약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비교적 농업 생산성이 좋은 동네라서 식량이 풍부했다고 해도, 10만 대군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어지간한 동네는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로 전날 우디노의 군단이 한 동네의 빵과 밀가루를 탈탈 털어먹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빅토르의 군단이 또 밀어닥쳐서 먹을 것이 없나 뒤진다면, 그건 단순히 그 동네 주민들만의 분노로 끝나지 않고 빅토르 군단의 굶주림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각 부대가 거쳐가는 주요 마을과 도시로부터 비교적 손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군단별로 세심하게 진격로를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812년 여름, 러시아 침공에 나선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뭉쳐진 모습으로 같은 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군단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중앙군을 형성한 채 무리를 지어 진격했습니다.  그 외에는 단일 군단으로는 가장 컸던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약 7만2천과,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Jérôme)이 이끈 베스트팔렌, 폴란드, 작센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4개 보조 군단 총 7만9천이 서로 다른 길로 남쪽 민스크(Minsk)를 향했습니다.  그나마 이들도 결국은 스몰렌스크(Smolensk)부터는 나폴레옹의 중앙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주로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 병사들로 이루어진 막도날(Macdonald)의 제10 군단 3만2천이 좌측 날개를 맡았고,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정도가 우측 날개를 맡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전과 달리 이렇게 밀집된 형태로 행군하게 된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상대해야 할 적의 주력이 바클레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의 제1 서부군과 바그라티온(Bagration)의 제2 서부군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미 나폴레옹이 파악하고 있던 대로, 어차피 러시아 평원에서는 아무 식량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에 따라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두 독일과 폴란드에서 마차로 실어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정말 유명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궤멸 과정을 시각화시킨 미니아르의 도표 원본입니다.  이 도표는 1896년에 처음 나온 것이지요.  미니아르는 프랑스의 토목 기사로서 현대적인 인포그래픽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 쓰인 프랑스어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12~1813년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 병력의 연속적인 손실에 대한 산술적 지도
1869년 11월 20일, 파리, 교량 및 도로 감사관(은퇴)인 M. 미니아르(M. Miniard)가 작성.

병력 수는 색칠된 구역선의 폭, 즉 10만명당 1mm로 표시했으며, 구역선 가로질러서도 명기했다.  붉은 색은 러시아에 진입한 병력 수를 뜻하고 검은 색은 빠져나온 수를 뜻한다.  이 지도를 그리는데 사용된 정보는 M. M. Thiers, de Ségur, de Fezensac, de Chambray 및 10월 28일부터 프랑스군 약제사로 일한 야콥(Jacob)의 미출간 일지 등에서 얻었다.   원정군의 궤멸 과정을 눈으로 좀더 잘 파악하기 위해, 제롬(Jérôme) 대공과 다부(Davout) 원수의 병력은 실제로는 민스크(Minsk)와 모길레프(Mogilev)에서 갈라졌다가 오르샤(Orsha)와 비텝스크(Vitebsk) 인근에서 재합류했지만, 항상 주력 부대와 함께 행군한 것으로 가정했다.)

 

(위 지도는 미니아르의 도표와 실제 지도를 합성한 것입니다.  미니아르의 도표도 실제 나폴레옹 원정군의 위도 경도를 반영하여 만든 것이므로 잘 들어맞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편에서 설명드렸다시피, 나폴레옹의 수송 계획은 기술의 한계와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빗나갈 운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수송 엔진은 말이었으므로 그 연료는 사료였는데, 나폴레옹은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말 사료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이 무섭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여유있게 작전을 하려면 봄부터 러시아 침공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6월 하순까지 기다렸던 것은 사람이 먹을 곡물 뿐만 아니라 말이 뜯어먹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콩이나 곡물도 아니고 그냥 풀이라면 말은 깜짝 놀랄 만큼의 양을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 부대가 지나간 자리는 정말 메뚜기떼가 지나간 흔적처럼, 사람이 먹을 것은 물론 말이 먹을 풀도 금세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후속 프랑스군의 사람과 말은 정말 그냥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병력의 진격로를 좀더 넓게 분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치중부대에 의한 보급이 어려웠는데, 그렇게 병력을 분산시키면 보급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집결된 적의 주력 야전군을 바싹 추격하는 마당에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실패했던 러시아 정복을 너무나 간단히 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투가 이끈 몽골군이었지요.  믿을 만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몽골군은 대략 4~5만의 순수 기병으로 러시아 전역을 평정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처럼 마차를 주요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식량은 함께 몰고다니는 가축에 의존했습니다.  원정군 전원이 유목민 출신 기병이다보니 넓은 지역에 걸쳐 가축들과 말에게 풀을 뜯게 하면서 장기간 작전을 펼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흉내낼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소수 정예로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군이 무서운 이유는 그 활이 강력함보다도 기동력과 보급에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군대가 저런 활동량을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폴레옹이 병력의 수를 확 줄여서 러시아 침공을 개시했다면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유럽 최강의 무적 군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조금씩 질적으로 하향되어갔습니다.  특히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후로는 그 질적 하향세가 매우 뚜렸했습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는 패배한 오스트리아군 못지 않게 프랑스군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 외에 프랑스군의 질적 저하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고 휘하 병력의 대부분이 어린 신병으로 이루어져 있던 부대 전체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자 분개한 마세나가 '저 풋내기들에게 브랜디를 잔뜩 마시게 하고 군기를 보여줘라' 라고 외친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겁에 질렸던 신병들이 마세나의 그런 지휘에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해 결국 승리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제 40만이 넘는 대군이 된 러시아 침공군은 과연 어떤 병사들로 이루어졌을까요 ?  상당수는 다년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대군을 끌어모으다보니 아무래도 신병들의 비율도 매우 높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내의 인적 자원도 많이 고갈되어, 키나 건강 상태, 나이 등에서 1805년이라면 탈락시켰을 젊은이들까지도 마구 입대시켜 충당한 신병들에 대해 많은 지휘관들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40만 대군 중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 중에는 폴란드인처럼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인들처럼 죽지 못해 끌려나온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같은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도 북부인 이탈리아 왕국 병사들은 상당히 우수한 자원으로 평가받았지만 뮈라의 신민들인 나폴리인들은 프랑스 지휘관들으로부터 '애초에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악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축낼 뿐 실제 전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병력은 제외시키고 알짜배기 정예병력만 투입했다면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일단 바투가 상대해야 했던 러시아는 그야말로 동구의 후진국으로서 인구 8~9백만에 무장 병력도 5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알고보면 바투도 소수 정예로 다수의 러시아군을 무찌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인구 4천만이 넘고 20만이 넘는 야전군을 거느린 강대국이었습니다.  바투의 몽골군은 전원이 경기병이라는 특색이라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남들 다 쓰는 머스켓 소총과 그리보발식 야포를 사용하는 평범한 군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검의 숫자가 승패를 판가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과거에 거두었던 승리는 거의 언제나 전투 현장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기기묘묘한 전법을 사용하는 소수 정예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소수 정예에 의한 결전은 나폴레옹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기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초에 러시아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는 정복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런 황량한 나라를 정복해봐야 딱히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부터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대륙 봉쇄령에 다시 참여하여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걸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필요도 없었고 러시아 야전군과 피투성이 살육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낼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고 협상을 하도록 강요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얼마나 되어있건 충성심이 있건 없건 동원가능한 병력은 다 동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한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그런 대군을 먹여살리기에는 자신의 보급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정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개전 이후 3주 안에 러시아군을 크게 꺾어놓고 평화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원정군에게는 24일치의 식량을 지급하여 3일치는 병사들이 몸에 지니고 나머지 21일치는 마차에 싣고 가도록 하되, 네만 강을 건너기 전에는 절대 그 식량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러시아인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병참 준비에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http://www.historyofwar.org/Maps/maps_russia_1812_to_moscow.html
https://www.reddit.com/r/dataisbeautiful/comments/26jy3t/a_rework_of_minards_map_the_first_data/
https://www.awesomestories.com/asset/view/A-Map-of-the-Great-Retreat-from-Russia//1
http://www.historyhome.co.uk/c-eight/france/moscow.ht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Joseph_Minard
https://patrimoine.enpc.fr/document/ENPC01_Fol_10975?image=54#bibnum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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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민주주의 2019.08.12 0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공산주의적 계획경제를 미화한 사회적 경제를 구현하겠답시고 눈감아도 눈꺼풀 위를 뚫고 들어오는 태양빛같은 시장의 완벽함을 무시한채 국가주도로 뭐든 추친하는 선단독재경영을 꿈꾸다 그런 공산독재로 인한 각 경제주체들의 좌절로 실패하지 않았을지

  2. keiway 2019.08.12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흥미진진하군요.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달은 좀 가혹하긴 합니다만 ㅎㅎ

  3. 바다에산다 2019.08.12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이 가능한 구간으로 작전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제해권 탓일까요?
    나팔륜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만 이유가 궁금하네요.

  4. reinahrdt100 2019.08.12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몽골군의 경우, 유럽 정복을 위한 준비기간이 당장 프랑스군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유럽 정복을 결정한 1235년 경부터 진격로 주변에는 유목행위를 금지했고 1237년과 1238년에 걸쳐 볼가 불가르 족을 격파 이들을 강제징병하였습니다. 이 때 강제로 동원된 볼가 불가르 족과 주변 제민족이 투멘으로 편성된 몽골굴과 거의 비슷한 수였다고 합니다. 즉, 흔히 말하는 10만~12만, 좀 과장되면 20만 몽골군 중에서 몽골 본토에서 파견된 투멘 편제의 몽골군은 약 6만~7만 정도였고 나머지는 진격 도중에 합류시킨 유목민족들이었다고 합니다.

    볼가 불가르 족을 격파한 후, 마침 헝가리에서 볼가 불가르 족을 머저르 평원으로 초빙하기 위해 도착해있던 율리아누스 수도사에서 최후통첩을 했죠. 자신들의 향도 및 병력 지원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유럽 공격에 지원하면 대칸에게 종속된 칸국의 지도적 위치를 보장함과 동시에 전리품의 어느 정도를 할당해주겠다고요

    약간 예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몽골군은 1235년경부터 계산한다고 해도 1241년까지 약 6년 동안 유럽 공격을 위한 제반 준비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년 이상이 아닌 점에서 차원이 달랐죠. 물론, 몽골 본국과의 거리를 계산한다면 비슷하다고 보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준비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몽골군이 모두 경기병인 건 아닙니다. 물론 전원이 경기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몽골군의 편제에서 '중장기병 2:경기병 5' 이상의 비율로 중장기병 편제가 나름 충실했습니다. 이건 금나라와의 전투 경험상 몽골굴의 지속성과 금군의 충격력이 서로를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웠다는 경험 때문입니다. 금군이 몽골군을 기병전에서 이긴 경우가 꽤 되는데 대표적으로 완완진화상이 이끈 금나라 최후의 전략부대격인 충효군은 대체적으로 경기병과 중기병 모두를 중시한 편제였다고 합니다. 몽골군 역시, 충효군에게 몇번이나 박살날 정도로 겪어보다보니 초기 칭기즈칸 시절과 달리 나름 중장기병 전력을 충실하게 갖춘 군대로 변모하게 됩니다.

    물론, 몽골군의 경우, 중장기병이든 경기병인든 간에 기병 1기당 평균 5~6필의 마필을 지급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정도면 마필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렵게 되면서 몽골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 쇠퇴하게 됩니다. 몇몇 예를 들면 1285년~1286년의 몽골-헝가리 전쟁에서 3만의 헝가리 군에 맞서 몽골은 최소 10만이 넘는 기병을 동원했지만 이 시기 몽골군은 예전과 달리 기병 1기당 기껏해야 평균 1~3필 수준의 말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3세기 중엽과 달리 13세기 중후반 내내 헝가리는 전국을 말 그대로 요새화 했죠.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중 '전 국토의 요새화'를 정말 실천했죠. 막말로 100개 이상의 서유럽식 성채를 전국토에 깔아버린 겁니다. 몽골과 헝가리가 격전을 벌인 결과는? 헝가리군이 압승을 했습니다. 이 전쟁 이후 다시는 몽골은 헝가리나 폴란드는 생각도 못하고 좀 약체라고 생각했던 러시아와 리투아니아를 건드립니다만 그것도 리투아니아가 거대해지면서 계속 두들겨 맞아댔고 보르스쿨라 전투 (제1차 폴타바 전투)에서 겨우 리투아니아의 거센 공세를 꺾어버리는 수준으로 몰리게 됩니다.

    좀 길게 썼습니다만, 당시 몽골군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5. 나무꾼 2019.08.12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 동계 피복 아닐까요 ?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면 동계 작전 준비가 필요없을테고...
    실제로는 겨울 추위에 시달렸고...

  6. 루나미아 2019.08.13 1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니아토프스키가 모스크바 아닌 우크라이나 쪽으로 진군하는 걸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나폴레옹은 러시아도 프오처럼 주력을 격파해서 금방 제압될거라 믿었기때문에 안 그랬지만, 그쪽으로 천천히 갔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쪽엔 식량이 풍부했고, 오스만이 이스탄불을 확실히 막아준다면 다뉴브~흑해~드네프르&돈강이란 안정적인 수상보급로도 가능했을 테니까요.

    • 원인 2019.08.13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인이니까 폴란드의 세력권이었던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쪽을 선택했겠죠. 폴란드 애국주의자의 발상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오스트리아군과 대결했을 때에도 최대한 많은 도시를 확보해서 전역이 마무리 될 때 점령지를 폴란드 세력권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걸 우선시한 것처럼, 러시아 원정에서도 폴란드 지주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우크라이나를 일단 점령지로 확보하게 만들면 나중에 전선이 고착될 경우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의 세력권으로 인정하도록 조약에 넣는다거나 하는 가능성까지 생각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서 폴란드를 부활시키는 계략이죠.

      우크라이나로 진군시에 기대되는 지원전력은 오스만투르크, 크림타타르,코사크 총 3가지인데...
      오스만 투르크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동맹이라곤 하지만 이미 슐레이만 이후에 구조적인 한계에 도달해서 술탄의 친정군 조차도 믿을 게 못 되는 상황인데다가, 이미 몇년전에 러시아한테 박살나기도 했으니 그 이전부터 항상 그랬듯이 크림타타르나 코사크를 대타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은데,

      우선 크림타타르는 약삭빠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이라 전역이 유리하게 돌아갈 경우에는 협조적이지만 전역이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즉시 배신하던 전력이 있죠. 그리고 코사크는 근시안적인 이합집산이라는 고질병이 있어서 전부터 그래왔듯이 최소한 2개이상의 세력으로 쪼개져서 러시아편, 폴란드편, 그 외 타타르나 오스만 편 등등으로 나뉘어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예카쩨리나2세 즈음 가면 이미 러시아의 통치체계가 견고해 져서 자유코사크의 범주에 들어가는 코사크들도 많이 줄어서 그닥 기대할 여지가 없죠.

      돈강으로 북상하면 상대적으로 반러시아성향이 강한 돈 코사크들의 "협조적이지는 않아도 방관적인 태도"에 힘입어서 큰 위협을 당하지 않고 모스크바 아래의 툴라까지 수로로 진격할 수 있긴 한데, 문제는 프랑스에서 돈강까지 가는 길이 확보가 안 되어 있는 게 문제죠.

      발틱해 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미 독일과 폴란드가 나폴레옹에게 제압당한 상태이고, 리보니아 지역도 독일,덴마크,스웨덴, 폴란드, 러시아가 돌아가면서 지배하던 곳이라서 현지세력이 배신할 경우에도 큰 문제가 안 되지만...
      프랑스에서 돈강으로 가려면 우선 다뉴브강을 따라서 흑해로 들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문제는 이 다뉴브 강변이 아직도 주로 오스만 세력권이 대부분인 상태인데, 오스만이 꺾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강대국이라서 유사시에 러시아와 협정을 맺고 프랑스의 뒤통수를 칠 경우에 문제가 심각해 지죠.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을 막아주면 좋겠지만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최대적은 프랑스인지라 오히려 둘이 합세해서 발칸반도 지리에 어두운 프랑스군을 협공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발틱해-볼가강 경로가 다뉴브강-흑해-돈강 경로보다는 낫다는 거죠.

      무엇보다도 알렉상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경우에 안전하게 퇴각해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다뉴브강-흑해-돈강 경로는 길이도 길고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 reinhardt100 2019.08.13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 제가 해 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써 주셨네요.

      볼가강이나 우크라이나 루트로 진격한 사례가 실제로 있긴 있었습니다. 1571년 및 1572년에 오스만 제국군이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을 따라 진격했는데 당시 러시아는 이반 뇌제의 원조 대숙청으로 나라가 개판나버린 상태였습니다. 나라 제2, 제3 도시인 노브고르드, 프스코프에서 학살이 벌어진데다가 오프리치니크들의 전횡, 잇따른 황후 교체 및 고두노프, 로마노프, 슈이스키 등 보야르 가문의 점진적인 대두까지 겹치면서 개판이었죠.

      1572년 8월에 오스만 제국군과 모스크바 대공국 군이 모스크바 남쪽 교외인 몰로니에서 격돌했는데 이 때 오스만군이 대패했습니다. 전년에 모스크바를 약탈해서 최소 수만의 노예를 끌고 갈 때와 정반대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 이 전훈을 고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7. 제이슨 2019.08.13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간 집적소가 아니였을까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돌아오다 아사했다는데
    실제로 어디까지 가면 음식과 술이있다고 말해 좀비처럼 갔는데
    거기도 텅 비어었다고 하지요
    그럼 희망을 잃은 병사들은 무수히 죽어나가고
    그리고 계속 그런일이 반복되고...

  8. 2019.08.14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하고 동맹맺어서 양 방향으로
    진격했으면 승산이있지않았을까 그런
    궁금증도 생깁니다.


2015년도에 개봉한 '빅쇼트'(The Big Shor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크게 돈 버는 이야기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저처럼 돈 없는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2007년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 때 미국 주택시장 대폭락에 베팅해서 큰 돈을 번 사람들에 대한 반쯤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반쯤 다큐멘터리 영화인 이유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는 있지만 실명이 아니라 가명을 쓰고 또 일부 사실은 적절히 각색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크리스천 베일이나 라이언 고슬링 등의 쟁쟁한 주연들이 맡은 거물들 이야기 대신, 어쩌다 주워들은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부실함에 베팅하여 큰 돈을 번 두 젊은 전업 투자자 이야기에 특히 매료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B급 감성에 충실한 B급 인생이라서 그런가봐요.)  영화 속에서는 찰리 겔러(Charlie Geller)와 제이미 쉬플리(Jamie Shipley)라고 나오는 이 젊은이들은 콜로라도의 시골 동네에서 11만 달러(약 1억3천만원)의 조촐한 자기 자본을 가지고 자기 집 차고에 회사 사무실을 차려놓고 전업 투자 생활을 합니다.  말이 좋아서 투자 회사를 세운 젊은 투자자이지, 흔히 저런 젊은이들을 우린 '백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이 11만 달러를 몇년 안에 무려 3천만 달러로 불려놓습니다.  무려 273배입니다 !   이 영화는 이 젊은이들이 서브프라임 사태를 이용해서 그걸 다시 1억3천만 달러로 불려놓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줍니디만, 사실 저는 1억3천만 달러 필요없습니다.  저는 그냥 3천만 달러, 아니 그냥 3백만 달러만 있어도 너무너무 충분할 정도로 소박(?)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11만 달러를 3천만 달러로 불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  거기에 대해서도 영화는 짧게나마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한글 자막을 읽어보니 대체 뭘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설명이 굉장히 짧게 나왔거든요.  TV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때, 자막에 의존하지 않고 원어로 들어보려고 하니 제 영어가 짧아서 잘 못알아듣겠더군요.  결국 인터넷에서 영화 스크립트를 찾아보니 대략 이런 설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전략은 단순하고도 기발했습니다.  제이미와 찰리가 알아차린 것은 이랬어요.  유가증권 시장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옵션 상품을 아주 싼 값에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판단이 틀렸다면 잃는 것도 작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맞았을 때는 아주 크게 벌었지요.  불과 몇년 안에 그들은 11만 달러를 3천만 달러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뉴욕으로 갈 때가 되었지요."

 

 



이 젊은이들의 실제 모델은 Jamie Mai와 Charlie Ledley라는 두 사람으로서, 이들은 서브프라임 위기 이전에 이미 11만불을 (영화와는 달리) 1천2백만불로 불려놓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  영화 속 설명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한 옵션이라면 정말 싼 값으로 살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옵션은 결국 휴지조각이 되고 맙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옵션이란 그냥 로또입니다.  정말 운이 좋아서 옵션으로 한두 번 큰 돈을 버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투자 회사 전체의 원금을 273배로 불리는 것은 운만으로는 불가능할 일일 것입니다.  아마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역시 거기에 대해 설명한 글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지만) 두어건 있었습니다.  

https://www.timelessinvestor.com/2016/06/29/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using-value-investment/

위 포스팅에 따르면, 이들이 11만불을 불려나갈 때 첫번째 기회는 신용카드 회사인 캐피털원(Capital One Financial)의 옵션 매수였습니다.  아마 당시 캐피털원은 뭔가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어서 주가 전망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이들은 캐피털원에 대해 상세히 조사를 하고 캐피털원의 부사장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에, 캐피털원 주식을 2년 뒤에 40달러에 매입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한 장기옵션(LEAPS)을 3달러에 구입했습니다.  이때 투자한 돈은 전체 자금 11만불의 거의 1/4인 2만6천불이었지요.  당시 캐피털원의 주가가 30불 정도였으므로, 2년 후에 캐피털원의 주가가 최소 43불 이상으로 올라있어야 (2년간의 이자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본전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모험적인 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캐피털원은 당국 조사 결과 혐의없음이 밝혀졌고, 결국 이들의 투자 2만6천불은 52만6천불로 뻥튀기 되었습니다.  무려 20배의 수익이었습니다.

이들의 두번째 기회도 비슷한 장기옵션이었습니다.  United Pan-European Cable(UPC)라는 회사의 장기옵션을 무려 50만불어치 구입을 했는데, 이것이 대박을 쳐서 550만불이 되었습니다.  세번째 기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정용 환자 산소 공급기 회사에 2만불어치 옵션을 투자한 것이 300만불이 되었지요.  

이렇게만 보면 너도나도 옵션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옵션은 좀 심하게 이야기해서 해당 회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로또입니다.  어떤 권리증이 2년 뒤에 그렇게 큰 가치를 가진 유가증권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애초에 그런 낮은 가격에 팔 리가 없지요.  돈을 딸 확률이 50%나 된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한 사람은 거기에 전재산의 1/4은 커녕 1/40도 넣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체 저 두 사람은 캐피털원이 혐의를 벗고 주가가 크게 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예측했던 것일까요 ?  또 차고에 사무실을 차린 고작 11만불짜리 애송이 투자자를 왜 캐피털원 부사장이 만나주었을까요 ?

여기에 대해 가장 그럴 듯 해보이는 설명은 아래에 나와 있더군요.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그대로 직역한 것은 아니고 주요 부분만 제맘대로 발췌 편집 덧붙이기한 거에요.

https://www.quora.com/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and-then-130-million-by-using-the-value-investment-method

질문 : Jamie Mai와 Charlie Ledley는 대체 어떻게 서브프라임 이전에 11만불을 1천2백만불로 늘렸던 거지 ?

답 : 그거야 Michael Lewis(영화 The Big Short의 원본이 된 'The Big Short: Inside the Doomsday Machine'라는 책을 쓴 작가입니다)가 그렇게 포장을 한 것 뿐이야.  그 사람 글만 읽으면 차고에 사무실 차려놓고 11만불을 그렇게 뻥튀기하는 것이 쉬워보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Jamie Mai는 뉴욕주립대에서 회계석사학위를 받고 컨설팅 회사인 Ernst & Young에 취직한 뒤 대형 투자은행 감사일을 했어.  그 친구 아빠는 미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투자인수 회사들 중 하나를 20년 이상 운영한 사람이고, 그 다음에 리먼(Lehman) 브라더스 경영진에서 일하기도 했어. 그러니까 Jamie는 부잣집 아들이고 그냥 가족들의 돈 일부로 투자를 했던 거야.  초기 투자금 11만불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좁은 의미에서만 맞는' 이야기라구.  그런 푼돈 날려도 후속 투자금 걱정은 없는 거였어.  그러니까 11만불 어쩌고하는 것은 최초 VaR (Value at Risk, 어떤 투자에 대한 risk 산정을 할 때 Monte Carlo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수치 계산을 하는데 그때 초기 투자금으로 정하는 금액) 같은 거였다구.  Charlie Ledely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걔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거야.

 

(VaR 시뮬레이션의 결과입니다.  1년 후에 대략... 최저 -60%에서 최대 +290% 정도의 수익이 예상된다는군요.  저런 수많은 시나리오에 따른 수많은 반복 계산을 하기 위해 투자금융사에서도 컴퓨팅 파워가 많이 필요합니다.  여태까지는 blade server 형태로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해외에서는 GPU를 이용한 CUDA computing으로 훨씬 싸고 빠르게 처리한다는군요.  그러나 국내 퀀트 분들은 여전히 CPU 방식을 선호하신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과감한 옵션 투자는 혹시 투자가 잘못되어 알량한 자본금을 다 날려도 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설명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특히 저 위에서 언급한 이들의 2번째 기회 때문입니다.  캐피털원 옵션에서 벌어들인 50만불을 모조리 UPC 옵션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은 할 수 없는 투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좀 과장하자면 옵션은 정말 로또거든요.  로또처럼 만기라는 것이 있으니 장기 가치 투자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진 전 재산 50만불, 그러니까 5억원어치 로또를 산다 ?  이건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이 실력은 없고 그냥 집이 부자였던 금수저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금수저라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 돈을 순식간에 다 말아먹는 금수저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들은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매우 훌륭한 옵션 투자를 한 것은 확실하고,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출신에 무관하게 매우 훌륭한 투자자입니다.  

이상이 제가 매우 궁금해하던 영화 빅 쇼트에서의 두 젋은이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좀 시시하지요 ?

 

# 결론 :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개백수 젊은이가 옵션 투자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집안이 부자라면 공부 열심히 하고, 집안이 가난하면 공부 열심히 하는거에 플러스로 돈 아껴서 저축하자.



Source : https://www.springfieldspringfield.co.uk/movie_script.php?movie=the-big-short
https://en.wikipedia.org/wiki/The_Big_Short_(film)
https://www.timelessinvestor.com/2016/06/29/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using-value-investment/
https://www.quora.com/How-did-Jamie-Mai-and-Charlie-Ledley-turn-110-000-into-12-million-and-then-130-million-by-using-the-value-investment-meth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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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08.08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옵션이라. 저야 에널리스트가 아니라 함부로 이야기 못하지만 일단 숫자를 매일 다루는 직업을 하다보니 '숫자 자체는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다. 숫자를 다루는 사람이 누굴까?' 것을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옵션 같은거야 워낙 다양하게 설계된 거니 개인이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으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높아지긴 하죠. 다만, 그걸 공부하는 것 또한 각 개인의 몫입니다.

  2. 카를대공 2019.08.08 14: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빅쇼트 봤는데 워낙 짧게 지나가는 두 젊은이라 처음엔 응 누구지?하다 기억을 되살렸네요.

    전 그 영화속에서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마크 바움이 도덕적으로 이런 사태를 이용해서 돈 벌어도 되나......고민하던 장면이 기억에 남더군요.

    일반인은 주식만 잘못 건드려도 수천씩 날리는데 옵션은......글에서도 인용하셨지만 전업 투자자 아니면 꿈도 못 꿀거 같습니다.

    적어도 직장인이 재테크하면서 건드리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 같네요.

  3. Spitfire 2019.08.08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쇼트의 예시는 한국에서 바꿔말하면 상속세 대책이나 경영승계 대책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내부 정보 없으면 몰빵은 힘들지요. 50%를 넣는 것도 쉽지 않은데 몰빵을 했다는건 정보를 준 정도가 아니라 투자의 결과를 담보해 준 것입니다. 삼성이나 부자들이 주로 해서 비판받는 여러방법 중 하나지요.

    그런데 요즘 한국에선 정치인들도 이런걸 잘 하더라구요. 중요한 정보를 얻어서 땅을 사거나 정부입찰 건을 무리없이 따 내고 말입니다. 그래서 다들 정치 하려나 봅니다. 뭐하러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4. 빅터 2019.08.09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ig short : Truth is like poetry. And most people f***ing hate poetry
    Inside job : 어째서 금융엔지니어들이 진짜 엔지니어들보다 4배에서 100배나 더 많은 돈을 받아야만 합니까? 진짜 엔지니어들은 다리를 만듭니다. 금융엔지니어들은 꿈을 만들죠. 그리고 그 꿈이 악몽으로 판명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릅니다.

  5. 빅터 2019.08.10 0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수는 부가가치를 낼 수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고, 금융과 산업은 서로를 발전시키지만, 제가 issue하는건 리먼사태때의 NINjA 대출같은 (대부분 그렇듯) Risk는 국민이 지고, 이익만을 챙기는 경우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나 국민의 예금으로 Risk 높은 도박을 하는데 이기면 이익을 가져가고, 지면 국민이 대신 책임지는 상황이 문제이지 않을까합니다..

  6. 2019.08.10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생판(선물 옵션)에 내려오는 오래된 얘기가 있죠

    '원수한테 복수하고 싶으면 원수의 자식한테 선물 옵션을 가르쳐줘라'라는 유명한 말입니다

    보통분들은 근처에도 안 가는 게 좋습니다

  7. 2/28일 입대 2019.08.12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브래드 피트가 저 두 젊은이들한테 소리지르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누군가는 집을 잃고, 누군가는 퇴직연금을 잃었다고.
    I smell money~하던 라이언 고슬링의 경지가 아니라면. 저쪽은 정말 관심조차 가져서는 안되겠더라구요...

  8. Spitfire 2019.08.19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지순례 왔습니다.

  9. 자유민주주의 2019.08.21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결론 :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개백수 젊은이가 옵션 투자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집안이 부자라면 공부 열심히 하고, 집안이 가난하면 공부 열심히 하는거에 플러스로 돈 아껴서 저축하자.



    이분은 아무래도 토착왜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문재인 민족해방대각하의 총애를 입으신 대 조국 대교수께선 개천에서 용나지 않고 붕어 개구리 가재가 하늘 바라보고 안빈낙도하는 사는 세상이 바른 세상이라고 하는데 공부와 저축을 논하다니...

    아무래도 적폐고 적폐니까 자한당이고 그러하니 토착왜구 친일파일듯?


대체 이렇게 병참을 막대한 규모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도 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보급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요 ?  이것도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 때문에 나폴레옹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일까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보급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는 억울한 누명이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준비에 있어서 무엇보다 보급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다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면 혹시 보급품 쌓아놓을 생각만 했지 운송 수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냐고요 ?  여러분도 생각하시는 것을 나폴레옹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그는 의붓아들인 외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폴란드 전쟁(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오스트리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운송 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데 왜 망했냐고요 ?  결국은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단치히에 쌓아놓았다는 식량이 말을 위한 사료를 제외하고도 40만 대군이 50일간 먹을 분량이라고 했지요.  즉 2천만 명분의 식량을 비축해놓은 셈이었는데, 이게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었을까요 ?  원래 원정 작전에 나선 병사들에게 제대로 보급이 안되는 것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보급이 잘 된다는 영국군에게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1인분에 대해서 규정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원래 하루에 건빵 550g, 쌀 30g (또는 건조 채소 60g 여기서 건조 채소란 주로 콩류), 염장 고기 200g, 그리고 포도주 1/4리터 (또는 브랜디 1/6 리터)를 지급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식당 기준으로 삼겹살 1인분이 200g 정도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의 배도 채우지 못해서 결국 1인분 더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결코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요즘 식빵 1봉지가 대략 450g이니, 바싹 말린 건빵 550g이면 그걸로 배는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까지 생각하면 병사 한명이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하루 1kg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단치히 항구에만 2만 톤의 건빵과 밀가루, 염장 고기 및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병사들의 모습입니다만, 건빵, 그러니까 비스킷(biscuit)의 모양새나 맛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스킷을 먹으며 웃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비현실적이네요.  그림 출처는 https://www.artofmanliness.com/articles/how-to-make-civil-war-era-hardtack/ 입니다.  여기 보면 비스킷을 어떻게 굽는지 레시피가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송하느냐인데, 러시아에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강력한 디젤 엔진을 갖춘 트럭들이 즐비하다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은 트럭과 고속도로가 있다고 해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하면 2만 톤의 식량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3.5톤 마이티 트럭이 5,714대 필요합니다.  이 트럭의 길이는 대략 6.7m인데 앞뒤 차간 거리를 1.3m씩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 트럭들이 주욱 한 줄로 주욱 늘어서면 맨 앞차부터 맨 뒷차까지의 거리는 거의 46km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트럭들을 위한 디젤 연료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또 당연히 있게 마련인 고장에 대비해서 수리 차량도 끌고 가야 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니라 진흙구덩이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군대에게는 정말 현대 3.5톤 트럭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입니다.  디젤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기술이 없다면 물량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난 편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치중대를 편성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총 20개 치중대대의 7,848대 마차(문헌에 따라서는 26개 대대 약 9,300대)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4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의 경우 대략 1.36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7~8천대의 마차가 모두 대형은 아니었지만 그냥 모두 4두 대형 마차라고 가정하고, 또 준비된 마차도 7,848대가 아니라 9,300대라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이 치중대가 실어나를 수 있는 무게는 총 12,648톤에 이릅니다.  40만 대군이 50일 먹을 식량의 최소치인 2만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략 필요량의 60%에 달하는 막대한 수송량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러시아가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틀림없이 식량을 일부라도 현지 조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24일에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침공을 시작한 것에는 날씨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곡물 추수기가 대략 8월~10월이라는 것도 고려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전히 프랑스군 병사들은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그래도 굶주림으로 궤멸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의 경우 연료 탱크에 150리터의 경유가 들어가고, 연비는 (적재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빈 차인 경우 대략 7km/리터이니,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조건이면 대략 4km/리터로 잡겠습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쾌속으로 하루 30km씩 진군한다고 하면 하루 8리터의 연료를 써야 합니다.  연료 탱크에 들어있는 연료만으로도 18일간 작전이 가능하고, 나폴레옹이 진격을 시작한지 83일 만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니, 5번의 연료 보급를 더 받으면 됩니다. 이 5번의 보급을 위해서는 약 3560톤의 디젤유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트럭이 1,017대 더 필요합니다.  전체 트럭 5714대의 18%에 해당하는 오버헤드입니다.  생각보다 많기는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디젤을 먹는 트럭 대신 풀과 곡물을 먹는 말의 경우로 계산해보면, 화석 연료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은 하루에 대략 9kg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9,300대의 마차에 딱 4마리씩 37,200마리의 말만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시지요.  (현실적으로는 예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치중대에는 4두 마차 외에도 2두 마차가 꽤 있어서 전체 마차 수는 9,336대, 말은 약 32,500마리가 있었고 예비마가 6천마리 더 있었습니다.)  이 말들은 하루에 335톤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83일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27,788톤의 사료입니다.  잠깐만요.  이 마차들이 실어나를 보급품의 총량이 얼마라고 했지요 ?  예, 맞습니다.  12,648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자신이 실어날라야 하는 무게의 2배가 훨씬 넘는 무게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과제입니다.  게다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저 12,648톤의 보급품은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정량의 60%에 불과한 양입니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식량이라는 짐은 사람이나 말이나 계속 먹어치우는 것이므로 여행을 가면 갈 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젤 엔진으로는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를 사료를 먹는 말로 해결하려 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Sharpe 시리즈 중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면 더욱 공감이 가실 겁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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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났냐 ?"라며 말 사료는 대폭 줄이고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짐승입니다.  인간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도 쉽게 죽지 않고, 원래 걸어야 할 거리의 2배를 무리해서 행군해도 잘 버팁니다.  그러나 말은 먹이 부족과 과로에 견디지 못하고 픽픽 죽어 넘어집니다.  보통 전쟁에 나서는 인간은 지든 이기든 80%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만, 말은 6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인간과는 달리 말은 그냥 들판에 널린 풀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훨씬 이른 시기인 봄에 작전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풀이 잘 자란 여름에 작전을 해야 말의 사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모든 기병대원에게는 말 먹이 풀을 벨 수 있도록 낫이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원래 풀을 뜯어먹는 짐승이니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하루종일 정말 풀만 뜯을 때나 통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강제로 걷게 하다가 길가의 풀을 약간 뜯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하루 종일 중노동 시킨 뒤에 얇은 식빵 2조각 던져주고 '사람은 원래 빵을 먹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나마 수만 마리의 말이 통과하는 길이라면, 그 길가의 풀은 순식간에 씨가 마르게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넌지 1달 만에 별다른 큰 전투도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1만 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 소속의 마부 병사와 말입니다.  병사도 불쌍하지만 말은 더 불쌍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치중부대는 언제나 진흙탕이나 다름 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보병 부대를 따라잡는데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동부 유럽은 사정이 훨씬 나빴습니다.  역사가 리엔(Richard K. Riehn)에 따르면 이런 수준이었답니다.

"24일의 폭풍우는 폭우로 바뀌었다.  덕분에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리투아니아의 통행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짐마차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바퀴 축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말들은 지쳐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군화를 잃었다.  이렇게 퍼져버린 짐마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그 둘레를 빙 돌아가야 했고 보급품 마차와 포병대는 아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 진흙구덩이 속의 바퀴자국들은 햇빛에 바싹 마르자 아주 단단한 계곡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말들의 다리가 부러졌고 짐마차들의 바퀴가 깨졌다."

 

(영어로는 이런 진창 길에 난 바퀴 자국은 rut이라고 하던데, 한자어에 나오는 '전철을 밟는다'라는 단어의 전철(前轍)이 바로 앞서 간 마차의 바퀴 자국을 뜻하는 것이지요.  왠지 130년 뒤에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던 어떤 오스트리아 화가 지망생 생각이 나는 한자어네요.)

 

 

이런 진흙탕 도로 위에 1.36톤의 짐을 싣는 4두 마차를 끌고 가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좀더 가벼운 2두 마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두 마차의 수송량은 4두 마차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더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당 수송량이 떨어지면 그렇지않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료 문제는 더욱 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2두 마차 대신 4두 마차 위주로 마차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의 말과 마차, 사료를 다 끌어모았다고 하더라도 치중부대가 나폴레옹의 배고픈 보병부대에게 건빵을 제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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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타카 2019.08.05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러시아는 말도 안되는 곳이군요ㅜㅜ 말이 작전하기 이리 어려운 동네에서 도대체 그럼 몽골군은 어떻게 러시아 정벌을 해낸 걸까요??

    • nasica 2019.08.05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 그 이야기는 간단하게라도 다음 편에 나올 예정입니다만... (누가 보면 짜고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 ㅋ)

    • reinhardt100 2019.08.05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나시카님께서 쓰실테니 이쯤에서 ㅋ

    • 원인 2019.08.05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하죠.
      몽고군은 땅이 굳기 전에 공격해서 라스푸티챠에 당한 것이 아니라 땅이 굳은 뒤인 겨울에 공격해 와서 오히려 러시아를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죠. 추위는 몽고가 더 심하기 때문에 몽고군에게 겨울이 더 알맞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죠.

      라스푸티챠는 몽고군도 두려워 하는 무서운 지리조건이죠.
      몽고군이 헝가리 침공때에도 때마침 다뉴브강이 범람해서 늪지대가 되는 바람에
      헝가리에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죠.
      역사책에는 우구데이칸이 죽어서 철수했다고 하지만 다뉴브강 범람의 원인이 큽니다.

      만약에 다뉴브강이 범람하지 않았다면 ? 여전히 몽고군은 기동에 제약이 없었을 것이고..
      설사 우구데이칸이 죽었다고 해도 2선급 부대를 남겨놔서 헝가리를 초토화 시켰겠죠.
      마치 훌레구가 키트부카를 시켜서 맘루크를 공격하게 한 것처럼 행동했겠지만
      현실은 늪지대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더 이상 작전하는 게 무익했던 겁니다.

    • 이타카 2019.08.05 2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독자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해하시면서 글을 쓰시는군요! 저는 지금 유럽 여행 중인데 내일 파리로 이동합니다ㅎㅎ 나시카님 애독자로서 앵발리드를 다녀오면 느낌이 유별날거 같네요 :)

  2. 고로 2019.08.05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나폴레옹 지시대로 그 많은 보급물자가 진짜로 구축되었을까?? 분명 허수가 많았을거라 본다.. 그리고 러시아 땅이 너무 넓은게 문제지.. 거리만 가까우면 어케든 해결이 되는데..

  3. 2/28일 입대 2019.08.05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광복군의 최후의 비밀병기 무다구치 렌야 장군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요ㅎㅎㅎ

  4. 원인 2019.08.05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 이 대목에 나와 있듯이 나폴레옹은 작전에 있어서 다부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러시아 원정 건에 있어서도 다부와 함께 할 때
    보급의 중요성은 동의했지만 다부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죠.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 원인 2019.08.05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정서의 차이가 크겠죠.
      다부는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서 사소한 인명,물자 손실에도 민감한 성격인 반면에
      나폴레옹은 대담하고 자신만만해서 상당한 인명, 물자 손실을 아랑곳하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러시아 원정에서 "보급선상의 손실"을 "머리속에서 체감하는 가상적인 고통의 크기"가 달랐을 겁니다.

      다부의 가상체감으로는 사소한 인명,물자손실도 심각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가상체감으로는 상당한 인명,물자손실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겠죠
      전쟁이라는 게 생각외로 수행하는 주체의 정서적인 차이에 따라서도 많이 갈리거든요

    • 빅터 2019.08.05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상은 영국이 잡고 있지 않나요?

    • 카를대공 2019.08.07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로를 통한 보급,거점을 만든다는 생각은 과연 탁월한 전략안이네요.
      그런데 윗분들 말씀처럼 영국이 해상은 꽉 잡고 있는데 보급이 가능 했을까요?
      2차 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롬멜한테 물자 대주려다 수많은 배들이 가라앉았었죠.

    • 원인 2019.08.07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빅터, 알타리무,카를대공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5. 원인 2019.08.05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초에 러시아인들이 몽고인들을 몰아낼 때 자주 사용한 수법이 바로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이었음을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강을 따라서 기동하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죠.
    공격부대뿐 아니라 보급부대도 강을 따라서 기동시켜야 되는 거죠.
    러시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생각외로 강이 크고 숫자도 많아서 활용의 여지가 크죠.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수로기동으로 후방기습을 자주한 것도 이런 지리적인 유리함 때문입니다.

    수로를 사용한 공격, 수로를 사용한 보급을 1차적으로 고려했어야
    러시아 원정이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똑같은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인이 침공군을 물리치는 거나 침공군이 러시아인들을 물리치는 거나 원리는 같은 법인데,
    왜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몰아낼 때 사용한 수단인 수로공격, 수로보급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던 것일까 싶네요.

  6. 원인 2019.08.05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VS게르만족이죠.
    토이토부르크에서 게르만족의 기습으로 개박살난 로마제국이 보복공격으로
    처음에 육로직공을 선택했으나 늪지대로 변한 게르마니아에서 다시 박살났죠.
    그 다음에는 라인강을 따라 수로공격을 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라인강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게르만족이 로마군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급로에서 손실이 전혀 없었고 아울러 기습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었죠.
    서유럽에서 조차도 이럴진데, 더욱 광대하고 습한 동유럽에서는 당연히 수로를
    위주로 작전을 짜는 게 맞는데, 로마 매니아인 나폴레용이 왜 이건 참고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의 주요 정책, 군략은 로마역사에서 가져온 것이 많은데, 왜 이 대목은 참고하지 않았을까 ? 의문이 듭니다.

  7. 수비니우스 2019.08.05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사극 엑스트라 알바 했을때 말이 길바닥에 똥을 싸대는걸 자주 봤는데 엄청 많이 싸더군요 ㄷㄷ 그만큼 많이 먹었다는 얘기겠죠

  8. 2019.08.05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삑! 정답!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아닙니까? 물론 해군을 맨땅에서 건설하는 것도 방법이고, 기술 개발도 방법이고, 길을 닦아도 해결은 가능하고, 방법 자체야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성, 효율성, 기대 편익, 기대 손실을 고려할 때 뭘 어떻게 해도 그 '한정된 자원'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원래 체면값, 자존심값이라는 게 생각보다 비싸잖습니까? 프랑스 상공인의 이익을 조금 덜 지켜도 나폴레옹의 권좌 자체는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 위신이 떨어지고 참 견디기 힘들 수 있고 이런저런 머리 아픈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묻지 마 러시아 원정'보다는 덜 나쁜 선택이었을 거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 nasica 2019.08.05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돼지조무사 2019.08.0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 장구벌레님, nasica님이 아드님한테도 주입한다던 하이쿠를 여기서 들으면 민망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딱잘라 돌려드리면 너무 뼈아프시지 않겠어요? :-)

  9. 2019.08.05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자병법을 보면,

    "적이 승리하지 못할 상황은 내게 있다. 내가 승리할 상황은 적에게 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지 않을 상황은 직접 만들기 쉬워도, 나폴레옹이 이길 가능성은 실수든 근본적 한계든 다른 무엇이든, 꼭 자의가 아니더라도 러시아 쪽에서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도 북벌의 조건 중 하나를 대강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방 유목민의 침략이든 내분이든 다른 무엇이든)위나라의 상황이 어지러울 때 치고 올라간다."

    아쉽게도 완벽한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지요.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회도 안타깝게 날려 버렸고요. 하지만 정답이 안 보인다고 해서 일부러 오답을 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러시아가 기회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안 만들어 주면 그냥 원정 자체를 때려치워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 reinhardt100 2019.08.05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하는건 사실 무리였습니다.

    우선, 수로의 연속성이 없다는 겁니다. 네만강, 드네프르강, 돈강, 볼가강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하천 구간까지는 하천용 선박을 운용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 사이가 문제였죠. 18세기 내내 러시아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경작지 확대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고대와 키예프 루시 시대만 해도 광활하게 펼쳐졌던 늪지와 습지들이 상당부분 개간되어 사라졌죠.

    선박도 문제입니다. 45만 대군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최소 수백척의 상선단 및 그만한 수의 하천용 선박이 필요한데 프랑스군은 그걸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18세기 중엽에 영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톤수로 전열함급 수준의 상선이 수백척 이상 날아가버리면서 해운력의 기초까지 완벽히 박살난게 이 시대까지 복구가 안 되었습니다. 또한 스웨덴이나 덴마크가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가담했다고 해도 양국의 해운력은 도저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독소전쟁 당시, 독일 국방군은 24개 대대의 철도 대대를 운용했지만 보급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철도 설비도 심각했지만 더 큰 문제는 보급품 집적지로부터 전선까진 대체적으로 6두 마차로 수송했는데 이게 엄청나게 문제였죠. 소련 파르티잔도 문제였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거든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143개 사단에 배속된 수송용 마필이 총 60만두였는데 작전 개시 2달만에 50%이상의 손실이 발생해서 태풍작전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시간이 안 맞는 사태가 벌어졌죠.

    • 원인 2019.08.05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육로운송보다는 수로 운송이 맞는 선택이죠. 러시아 침공에 필요한 건 볼가강 하나뿐이니까 나머지 수로의 연속성은 필요 없습니다. 주요목표는 리보니아와 상트뻬쩨르부르크, 모스크바이지 그 외의 내륙지역이 아니니까요.

      설령 육로로 대군을 들여 보내고 육로보급에 어느정도 의존한다 해도 수로보급은 반드시 해 놔야 원정군의 편의를 보장할 수 있죠.
      2차대전때 미군이 200만대군을 상륙시킨 뒤에 노르망디 보급선에 의존해서 개고생하다가 앤트워프 항구를 확보해서 원정군의 부담을 크게 덜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2차대전 미군처럼 해운력을 가진 건 아니라 해도 마필운송에 의존하다가 차례차례 죽어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다부는 원정군 규모 45만은 너무 크고 20만 정도가 적당하다고 봄. )

      스웨덴이 영국과 결탁해서 영국해군을 발틱해로 들여보낼 경우에 영국해군의 위협도 있을 수 있으니 해상운송, 해군력이동은 당연히 연안항해를 해야겠죠. 넬슨이 아부키르 만에서 연안방어태세에 있던 프랑스해군을 격파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니까요. 또한 병력수송은 선박승선과 해안선 행군 이동을 병행합니다.

      단순무식하게 공세만 따져 봤을 때.. 우선 리보니아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에 전력을 집중하고 나서...
      우선 뻬쩨르 부르크는 리보니아로부터 바로 바다에서 접근 가능합니다. 물론 요새화 되어 있으니까 바로 도시에 상륙할 수는 없고 그 옆에 상륙해서 일단 교두보를 구축해서 유리한 위치를 장악한 뒤에 해안선을 따라 육로로 보낸 전력을 증원해서 공략해야 되겠죠.
      해안선을 따라서 육로로 접근하는 것도 허허벌판에 가까운 내륙경로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합니다. 스웨덴-폴란드 전쟁때도 스웨덴 군이 이런 식으로 습한 해안땅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서 폴란드군의 기습을 피했죠. ( 물론 괜히 폴란드군의 도발에 넘어가서 선빵날리다가 결국 털렸지만 )
      그 다음 모스크바가 문제인데,
      발틱-볼가 수로가 나폴레옹 침공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뻬쩨르부르크쪽에서 모스크바 북쪽으로 흐르는 볼가로 진입할 수 있죠. 물론 이 때에도 강을 따라서 하천선박운송과 강기슭을 따라서 행군하기를 병행합니다. 강기슭의 습한 토질로 코사크 기병의 기습에 대한 안전함과 유사시 식량, 목초등의 확보에도 황량한 내륙지역 행군과는 비교가 안 되게 유리하죠
      물론 볼가강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토목공사로 파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모스크바 방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죠. (이미 만든 운하를 매립해 봐야 주민들 동원해서 다시 파내면 됨 )

      해운선박은 예전 한자동맹 도시가 주류였던 발틱해 연안 도시에서 징발해서 씁니다. 선박 손실율은 그 당시 마비저( 말에 감염되는 박테리아 질명)으로 국경선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마필손실에 비할 바가 아니죠.
      또한 선박이 부족하다 해도 마필수송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죠. 현대기술로도 열차수송과 선박수송이 말도 안 되게 차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원정이라는 본래 전략 목표에 좀 더 입각해서 고찰하자면...
      리보니아를 해상보급으로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원정군의 최초 공세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로마군단이 원정에서 대부분 성공한 근본 원인이 바로 최전선 바로 뒤에 근거지 구축을 먼저 하고 최초 공세가 실패한 뒤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지 않고 재차 공세를 가하거나 퇴각할 경우에도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퇴각했기 때문이죠.
      하물며 리보니아는 로마군 보급진지처럼 허허벌판도 아니고 수백년 동안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의 식민통치로 개발이 된 곳이죠.
      모스크바에서 철퇴하더라도 리보니아에 근거지를 구축해 놨다면 정신없이 쫓기다가 동사,병사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개털린 이유도 칼 12세가 리보니아에서 재보급하자는 신하의 말을 무시하고 육로직공을 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스웨덴이 북방전쟁으로 개털리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유럽대륙에 힘을 투사하고 러시아를 통제하는 데 성공한 건 바로 리보니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는 또한 동아시아에서 만주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요동반도를 갖고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위상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침공이 무모한 건 맞지만 일단 원정을 성공시키기로 결심했다면 B플랜, C플랜까지도 철저히 준비하는 게 맞죠. 그리고 B플랜의 1순위는 수로운송과 리보니아 확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원정의 진짜 의미가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사실 보다는 프랑스제국의 전쟁수행역량 그 자체에 치명타를 주어 결국 대불동맹의 압박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렉산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때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이 극히 중요했다는 겁니다.

  11. Spitfire 2019.08.05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병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사의 if가 가능했을까 기대했는데, 말 사료 이야기 나오는 순간 ‘아..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돌아보니 표트르 대제의 발트해 진출과 서구화는 어찌보면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업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말 대제로 불릴만한거 같아요.

  12. apils 2019.08.07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이 먹는 거 무시하면 안되지요. 예전에 동호회 분들이 말 몰고 다니다 오셨는데, 말 세마리가 수백평 잔디밭을 30분 안에 아작을 내놓더군요. 다행히 뿌리까지 파먹지는 않았지만 왜 말먹이 건초가 필요한 지 생생히 보고 느꼈습니다.

  13. 카를대공 2019.08.07 1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 건초가 부족했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긴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써놓으시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 새삼 실감이 되네요.
    이래서 화석연료가 짱입니다.

  14. 롬. 2019.08.07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그냥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해서 몰락했다 책 한줄로만 알았고 우연히 본 화학책에서 단추 소재 때문에 금방 떨어져서 외투를 여밀 수가 없었다 라고만 알았는데..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었군요.

    인터넷인가 다큐멘터리에서 줏어듣기로 러시아원정을 하느냐 마냐도 몇달동안 심각하게 내린 번복을 하며 고민 끝에 결정했다고 들었었는데.. 아 준비과정이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했고 그럼에도 불구, 그 치밀한 준비로도 안된거였네요. 현대의 트럭 기술로도 아슬아슬한 거였다니... 어마어마했네요...

  15. 롬. 2019.08.07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소에게 먹이를 주셨기에 소도 말이랑 먹는량 비슷하겠지 싶어서 여쭈어봤더니

    소가 풀을 먹는다지만 그건 소를 풀 많은 곳에 아침에 등교하며 풀어두고 나중에 하교하며 찾는등 정말 소가 일도 안하고 하루종일 제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만. 뜯었을 때나 그렇다 하시더군요...

    또 농번기엔 일을 많이 시키니까 하루종일 풀 뜯도록 놔둘 수가 없어서 여물을 먹이는데 이것도 그냥 지푸라기 막 주는게 아니라, 현대 군인들이 고칼로리 음식으로 식단을 채우듯 콩잎이나 호박잎 등등

    소취향에 맞는+소가 먹고 탈 안나는 종류의 + 그러면서 내가 구하기 쉬운 종류의 + 고칼로리의 풀을 섞어야 하는데다, 소화 되기 쉽게 끓여야 하는등 (그냥 풀이면 막 다먹는게 아니라 의외로 소도 취향이 있다 하시던...하긴 개•고양이도 사료 취향이 있는데 소라고 없을까 싶습니다...)

    말 그대로 고칼로리+소화가 잘되는 쑨 죽은 말그대로 요리 과정이더군요...

    하루종일 노동하는 말이 먹을 고칼로리의 풀을 자연에서 그것도 몇 천 마리가 동시에,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고 모레도 먹을 양을 구하기란 당연히 불가능이고... 싸들고 간다친들 어마어마하겠네요

    한 마리가 말려서 가볍디 가벼운 그 풀을 킬로그램단위로 먹던데.... 무게도 무게지만 가벼운 풀을 킬로, 톤 단위로 모아야 하니 그 부피가 정말...

  16. 샤르빌 2019.08.08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대 보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다수의 사람들한테 나눠줄 물품이나 먹을것 등등 계획하고 계산하는데도 환장할 정도로 머리아프더라고요.. 변수도 워낙 많아 아주그냥 난리 납니다..

  17. ㅁㄴㅁㄴ 2019.08.10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나 크림반도 깨부시는거 외엔 러시아원정은 당시 기술론 불가능의 영역이군요

  18. PANDA 2019.08.29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에 차관을 빌려줘서 포장도로를 깔수 있도록 해 주면 됩니다


(한 4년 전에 썼던 글인데, 이번 일본과의 외교 갈등과 연관된 내용이라서 다시 올립니다.  지금 진행 중인 일본과의 외교 갈등의 시작은 강제 징용 당한 개인이 일제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해 개인적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벌어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한국 대법원은 개인이 소송을 걸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고요.  아래 내용 중 '이제 세계 질서가 무너질텐데 그건 다 저 할머니 때문이라는 이야기냐' 라며 재판정이 웃음바다가 되는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이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는 영화는 아무 사전 지식 없이 보면 몇단계의 오해를 거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술 영화인가?' 라고 시작을 했다가 '알고 보니 법정 영화로군!'이라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비로소 이 영화가 '나찌의 희생양인 척 했던 오스트리아의 추악한 과거를 어떤 식으로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즉 과거 청산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2차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던 유태인 가문의 딸인 마리아는 나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탈출해서 미국인으로 40년간 살아 왔습니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녀는, 역시 오스트리아의 유태인의 후손 출신이자 집안 친구의 아들인 젊은 랜디가 변호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부탁을 하나 합니다.  클림트의 유명한 그림인 'Woman in gold'는 사실 자기 집 거실에 걸려있던 자기 집안의 물건으로서, 자신의 백모를 그린 것인데, 나찌에게 강탈당한 것이니 반환 받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부탁하는 쪽이나 부탁받는 쪽이나 지나가다 무심코 꺼낸 이야기에서 시작했다가, 그림 반환을 둘러싼 오스트리아 정부의 태도와 그 과정에서 되짚게 되는 오스트리아와 나찌의 관계 등에서 랜디가 흥분하게 되면서 집요한 법률 공방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몇년 간의 긴 공방 끝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림을 되찾아 오는 것이 결말입니다.

 



이 영화는 제국주의 시절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입니다.  모든 국가와 단체, 그리고 저를 포함한 개개인 모두에게는 감추고 싶은 어두운 과거가 있습니다.  작은 것도 있겠고 엄청난 것이 있을 수도 있지요.  나찌 독일이나 제국주의 일본의 경우처럼, 그 규모의 정도가 크고 심할 수록 그런 추악한 과거를 그 후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제 어설픈 글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보다는, 영화 중간중간의 인상적 대사를 몇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베로 대표되는, 현재의 일본인들이 과거사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한번씩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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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나찌 약탈 예술품 반환에 대해 비엔나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클림트의 초상화에 관련된 연설을 한 뒤 건물을 나오는데, 어느 오스트리아 중년 남자가 다가와 말을 겁니다.

"알트만 부인, 아주 박력있는 연설을 하셨네요.  그런데 말이죠,  그냥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시는 것이 어때요 ?  당신네 민족은 포기란 걸 모르죠, 그렇죠 ?  모든 일이 홀로코스트로만 귀결되는 아닌데 말이죠."


(젊은 시절, 나찌의 추격을 피해 출국하는 마리아와 그의 남편입니다.)



(어쩌다 클림트가 그린 마리아의 백모 아델의 초상화가 비엔나 벨베데어(Belvedere)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그림들은 당신 집의 벽에서 떼어져 조심스럽게 벨베데어 궁으로 옮겨졌어요.  
몇가지 사실은 고쳐져야 했지요.  당신 백모의 이름과 유태인이라는 배경 같은 것들이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지나, 그녀는 그저 단순히, "황금의 여인 (Woman in Gold)"으로만 알려졌지요.
그러니까 그녀의 정체성도 함께 도둑맞은 거에요.  당신네 가족을 강탈하고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지요."

 

(클림트가 아델 백모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델 백모는 1925년 젊은 나이에 병사하여, 오스트리아가 나찌판이 되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재판이 과연 미국 법정에서 열리는 것이 절차적으로 옳은 일인가에 대한 심리가 미국 대법원에서 열리게 됩니다.  이 심리에 미국 정부 대표가 출석하여, '이런 과거사에 대한 재판을 소급적용하여 하게 되면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일본 등 많은 외국 정부와 소송이 빈발할 것이므로 미국의 외교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며 각하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거기에 대해 대법원 판사가 조롱조로 이야기합니다.)

판사 : "그러니까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알트만 부인이 그림 반환 소송을 하게 되면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그 소송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
미국 정부 대표 : "예, 그런 결과도 가능합니다."
판사 : "알트만 부인, 그러니까 부인의 소송이 제기되면, 세계 외교 관계가 붕괴될 것인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부인이 져야 한다는군요."
(판사, 마리아, 방청객 모두 웃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은 고령인 마리아가 늙어죽을 때까지 소송을 질질 끌 작정입니다.)

랜디 : "그들은 절차적인 이유를 들어 이 사건을 기각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그건 '질질 끄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라는 것을 포장해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마리아 : "이 소송건이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내가 늙어죽기를 바라고 말이지 ?"
랜디 : "바로 그거지요."
마리아 : "흠, 그렇다면 아주 장수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보답해야겠네."


(긴 소송에 지친 랜디와 마리아가 오스트리아 박물관 측에 '협상'을 요청합니다.  내용은 적절한 보상과 함께, 그 그림이 강탈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박물관 측 박사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보상금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비엔나에서 열린 최종 심의회에서, 랜디가 마리아에게 그림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오스트리아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이 나라를 몇차례 방문하는 동안, 저는 2개의 오스트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찌 희생자들에게로의 반환을 거부하는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 내 유태인들에게 저질러진 불의를 인정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오스트리아가 있습니다.
(중략)
신사숙녀 여러분, 그러므로 이 자체로서, 이 순간이 역사의 한 장면이 됩니다.  과거가 현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순간이지요.
오랜 과거에, 바로 이 벽 밖에서, 끔찍한 일들이 행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로 다루지 않고,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아넣고, 전가족을 몰살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훔쳤지요.  재산과, 생명과, 그들에게 소중했던 것들을요.  
그 희생자들 중에는 여기 제 소중한 친구의 가족인 블로흐-바우어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오스트리아 국민이자 인간으로서의 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과거의 과오를 인정해주십시요.  
단지 마리아 알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오스트리아를 위해서요."


(오스트리아의 양심파 기자 후베르투스 역을 맡은 배우는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전에 소개드린 바스터즈 영화에서 여주인공 쇼샤나를 짝사랑하는 독일군 저격병이더군요.  원래 진짜 독일 배우인가봐요.  나중에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제모라는 비운의 악당으로도 출연하지요.)



(후베르투스(Hubertus)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 1인 잡지사 기자가 이 소송 내내 마리아와 랜디를 자원하여 돕습니다.  왜 이렇게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제1급 국보라고 할 수 있는 클림트의 'Woman in glod'를 가져가려고 하는 유태계 미국인들인 자신들을 돕는지에 대해, 후베르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 아버지는 아주 대단한 분이셨어요.  제가 어릴 때, 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배했지요.  커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어요.
제가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나찌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제3 제국의 열렬한 추종자였어요.  
저는 평생,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을 보상하려고 애쓰며 살았어요.  
매일, 제 자신에게 묻지요.  그는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요.  그리고 매일,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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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가 친일파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의 잘못일 뿐, 그 후손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추악한 과거를 감추려 드는 것을 넘어서,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건 마치,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외세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동아 전쟁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 동원 따위는 없었다, 일본은 희생자다' 이런 말들은 일본인 자신들을 당장은 기쁘게 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반성을 모르고 미래를 같이 할 수 없는 믿지 못할 족속이라는 인식을 주변국들에게 주는 자살골이라는 사실을 일본인들도 인식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추악한 일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밝히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추악한 우리의 과거도, 분명히 우리의 일부입니다.  감추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두번 다시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제대로 교육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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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카리우스 2019.08.01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은 맞는말이지만 한국과 아주 다른게 몇개있죠 일단 한국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거 거기에 최강대국 미국시민이라는 사실이죠 ㅋ 미국과 오스트리아의 차이 일본과 한국의 차이죠 ㅋㅋ

  3. Spitfire 2019.08.02 1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먼인골드는 ‘일본은 나쁘다’ 예시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햐면 일본은 이미 보상을 했으니까요. 마리아가 나치와 오스트리아의 부당행위에 대한 배상을 추가로 요구했다면 현재의 한일분쟁과 관련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보상과 배상은 전 민정수석 조국 폴리페서님께서 직접 정의하신 겁니다.)

    게다가 저 사건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로 해당 미술작품에 대한 확실한 상속 증거가 있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지, 다른 대부분의 유대인 학대와 재산몰수에 대한 보상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운도 매우 좋은 케이스입니다. 법원에 소송을 걸어 성공한 것이 아닌 중재를 통해 얻어낸 결과입니다. 중재를 한 이유는 소송은 도저히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시도한 것이구요. 중재로 가면 우리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주장해도 승패를 예측할 수가 없는데, 한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한 배상을 중재로 끌고가지 않을 것입니다. 패했을 경우 정치적 파장이 너무 크니까요.

    오히려 우먼인골드 사건이 법조계에서 인상깊게 평가받는 점은, 중재인으로 선임된 사람이 오스트리아인임에도 자국에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진국과 선진시민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한번 곱씹어볼 수 있는 사건이고 영화입니다. 저같은 이야기한다고 토착왜구라고 비난하는 그런 나라와 국민들 말구요.

    • 최홍락 2019.08.04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재라는게 보통 상거래 간의 계약 문제로 발생하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문제도 중재로 갔다니 매우 흥미롭네요.

      중재로 들어가면 보통 중재인을 3명 선정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피고측 1명, 원고측 1명, 그2명이 선정하는 제3자 1명으로요. 그래서 중재인으로 선정된 제3자가 오스트리아인인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것 같아요.

    • Spitfire 2019.08.04 0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그러니까 '우먼 인 골드'의 중재 건은 나치의 범죄에 대한 배상이나 단죄였다기 보다는 그림의 소유권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구한말 외세의 문화재 약탈 건을 해결하는 문제와 유사하지,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한 보상하고는 비교하기가 애매합니다.

      나치가 훔쳐간 것을 되돌려 받아 엄청난 가격을 받고 팔았으니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에게 받은 돈으로 스스로 경제를 이만큼 일으켰으니 이제 그만 됐다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결국 마리아 알트만이 나치에게 겪은 고초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상이 되지 않았지요. 구미 선진국조차도 식민시대에 저지른 악행에 대한 배상은 절대 쉽게 해결해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만약 한국정부가 한일 무역분쟁을 해결하고 배상까지 받아낸다면 역대 최고의 정부가 되겠지만 그게 과연 현상황에서 가능할지는 다들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참고로 저는 뼛속까지 반일이다 보니, 어떻게든 일본을 이길 방법을 찾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반일운동은 사실 승산이 없는 싸움이고 그냥 감정적 분노의 표출 그 이상도 아니죠. 저라면 힘도 안되는데 큰소리를 치면서 허세를 부리기 보다는 방심한 틈에 급소를 노려 한방에 때려눕히는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으니까요.

    • 최홍락 2019.08.04 0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승산을 이야기하고자 해도 어떤 상태가 승리인건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그냥 전쟁이다 라고만 하니 출구전략을 짜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라ᆢ양쪽이 모두 감정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실로 처음 보는중이라 계속 의외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어요.

    • Spitfire 2019.08.04 09: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통계나 자료에 정통하신 분께서 한국이 일본에 대항해서 승산이나 승리에 대한 목표설정이 불분명하다 하시니 좀 의외입니다. '정신승리'같은 선비논리 빼고는 국력이 어느 하나 수치적으로라도 앞선다면 일본이 한국에 이렇게 거칠게 대하지는 않겠지요. 인구,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 등등 아직 일본을 넘어서지 못한 부문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현재로선 최악의 상황에서 무력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승산이 없는 상황이다보니, 저는 일단 뭐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놓고 다툴지를 봐야한다는 입장입니다.

      양국이 감정적으로 나오는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불행히도 한국입니다. 박근혜의 앞뒤없는 위안부 합의나, 문재인의 지속적인 대일 자극 행동(일본은 우방이 아니다, 축하 케잌 거절 등) 같은 한국의 대응은 고려하지 않고 일본이 감정적으로 나오는게 의아하다고 하시면, 그동안 일본이 한국을 참 친절하고 이성적으로 대해줬다는 이야기를하시는거나 다름 없습니다. 친구한테 이랬다저랬다 야료를 부려놓고 막상 화나니까 '니가 화난건 다 너로 인한 것이야'같은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댄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미국한테도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놓고 한일문제 해결해달라고 빌붙는 것도 정말 뻔뻔하지요. (지소미아가 실상 누구를 위한건지도 모르고 탈퇴하겠다고 하는건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걸 모른척 하시고 의외라고 하시니 제가 정말 의외네요.

    • 최홍락 2019.08.04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을 제가 어떻게 이해했고 Spitfire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신건지는 모르겠으나ᆢ

      1. 저는 정부나 시민들이 일본의 경제 침략이다. 경제 전쟁이다라는 표현이 좀 마뜩찮았던것이 그동안 일본이 철강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조선업에 대한 WTO 제소 등 갖가지 제재가 부과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번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아니 이건 수출을 막겠다는 것이 아니고 절차를 예전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건데도ᆢ)에 대해서 이렇게 폭발적으로 나오는게 좀 그렇더라고요. 똑같이 주력산업인 철강과 조선이 규제를 당할 때는 이런적이 없었으니ᆢ

      그리고 전쟁 중인것 치고 양쪽 산업의 협력이 정상적으로가동되는것도 더 웃기는 일이죠. 가수 공연 등 문화 행사가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도 그렇고 해운산업의 경우 몇일전 현대상선과 일본 ONE(기존 일본 대형 선사인 MOL, K LINE, NYK)이 같은 해운 동맹을 체결하기도 했고요. 양국이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협력을 하는 부분이 아직도 멀쩡히 돌아가는 부분이 있어서 이게 무슨 전쟁상황이냐는 생각이 들어서요.

      2. 이런 상황인지라 전쟁이라고 하니 그럼 전쟁에서 승리라 할 수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이 남는겁니다. 정부가 전쟁상황이라고 주지시킨 것도 문제지만 전쟁의 목표가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인지,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인지 (막말로 이건 지금도 미쓰비시 내 한국 자산에 직접 행사할 수 있는데ᆢ)아니면 더 나아가 일본의 정권교체인지ᆢ알 수가 없어요. 상황에 따라서는 이 분위기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게 더 문제이기도 하고요.

      3. 2011년부터 수치와 통계를 보다보니 일본 경제에 대한 위험성을 경험하며 깜짝 놀라긴 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부채규모가 GDP 대비 2배가 넘어가는 수준인지라ᆢ

      이번에 통계를 다시 보면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양국의 차이가 상당부분 완화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습니다.

      우선 인구와 GDP는 2.4배 정도 차이가 있으나

      1인당 국민소득은 33,000달러 대 39,000달러 구매력 지수인 PPP로 계산을 하면 한국 42,000달러 일본 43,000달러 차이가 거의 없더라고요.

      연간경제성장율 일본 최근 0.7 - 0.9%대 대비 한국은 2.5 - 2.9%대이고 한국은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무역수지가 5,500억달러 흑자이고 일본은 동기간 중 2,800억달러 적자를 기록해왔지요.

      개별 산업별로는 그토록 우리의 약점이라고 주장되어왔던 소재부품 산업의 경우 2000년 93억달러에서 2017년 1100달러 흑자로 확장되었고, 대 일본 적자의 경우 242억달러 적자를 피크로 2017년 160억 달러로 감소했고요. (소재부품 대일 의존도 25%에서 15%로 감소한 것이 원인이겠네요.)

      일본이 유리한 점은 대외 순자산 규모에 있어 일본과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건 맞는데 (일본 4,500조원. 한국 460조원) 그래서 분쟁의 장기화에 견딜 수 있는 내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원사이드 게임이라고 하기엔 양국 격차가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길 수 있다고 하기엔 아직은 추월하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 예측이 불투명하네요.

      4. 그리고 제가 한일간 무역분쟁 장기화를 바라지 않는건 무역전쟁의 승리는 그냥 피로스의 승리 그 자체라고 생각해서...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 Spitfire 2019.08.04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저도 댓글을 쓰고 나서 최홍락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부연설명을 해주셨네요. 언제나 제가 이야기하는데 부족한 수치와 통계로 팩트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작금의 한일 간 진흙탕 싸움은 우리에게도 일본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제가 기대하는건 현 정부가 꼬아놓은 실타래를 그들 스스로 조용히 결자해지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치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여론을 들썩이게 하지 말고 말입니다.

    • 최홍락 2019.08.04 15: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이미 일본 입장에서 한국은 같이 하기에는 위협적인 나라라는 인식이 이미 지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번에 갈등을 어찌어찌 봉합한다 하더라도 백기항복을 받을때까지 다른 이슈를 계속 들고올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2015년 일본 외무성 외교청서에서 “한국은 일본과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 국가”라는 구절을 삭제했고 이 상태를 2019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걸 봐서는 정권이 어떻든 한국이 어떤 액션을 취하든 이미 그렇게밖에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경제적으로 교역 비중이 감소하고 있는 현실도 그러하거니와 과거에 한국 지도층들이 일본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던것과 달리 지금의 한국의 앨리트들은 미국 유학파로 세대교체가 되서 물밑에서 중재할만한 소위 통들을 찾기 힘든것도 그렇고요. 오로지 교역 문제만 푸는 정도를 목표로 하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4. A 2019.08.03 04: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답게 말을 해 줘도 일본제국주의가 계획한 대로 짐승 수준으로 세뇌되어 사람 말은 못알아듣는 짐승들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써 살아계신 분들은 너무 힘빼지 마시길.

    • Spitfire 2019.08.03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부도 안하고 듣기 싫은 말 하면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70년도 더 전이라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나 성행하던 일본제국주의에 세뇌당했다고 매도당하는 사람이 더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5. 유애경 2019.08.03 0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국민감정도 그렇고 일반 여론도 이번에는 꽤 강경한 편입니다. 벌써 몇십년전에 보상 내지 배상문제가 끝났는데 왜 한국은 대통령이 버뀔때마다 끝난 얘기를 들고 나오느냐,한국에선 대통령 인기가 떨어질때면 인기회복 정책으로 한일문제를 들고 나온다-이건 중국도 마찬가지?-이런 분위기가 대세네요.

    일본제품 불매 운동이나 일본여행 자제등으로 인해 특히 대마도는 한국여행객이 격감해서 그 타격이 꽤 크다고 합니다.하지만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어떨까요?


  6. 아즈라엘 2019.08.03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모 저친구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바스터즈에 나왔었군요
    시빌워에서 계속 어디서 봤더라 갸웃갸웃 했었는데

  7. 나삼 2019.08.03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양사에는 그렇게 통달하신 분이 좌익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피해의식의 역사관을 가지신것이 의아스럽네요.

    우선 한국과 일본은 독일 - 유태인 같은 관계로 보신다는것이 실망스럽습니다. 한국은 오히려 독일 - 오스트리아 같은 관계였지요. 일본이 한국인을 수용소에 넣고 학살했나요? 이판능 사건을 한번 알아보세요. 일제시대 조선인이 홧김에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들을 살해 했어도 합병국의 여론까지 생각한 숙고의 재판끝에 사형판결도 빗겨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태인이 독일인을 살해했어도 그런 판결이 나왔을까요? 오히려 조선인은 일본군의 장군이나 국회의원까지 진출할수 있었습니다. 어디 식민지 국가나 유태인 수준의 처우였다면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일본군의 장성까지 조선인이 진출했었고 수백명의 조선인이 전범으로 사형당한 사실은 조금만 알아보아도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미화는 평소 나시카님의 정치관과 증오심을 보았을때 누구를 저격하는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허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보는 것과 '미화'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심지어 나시카님이 증오하시는 그 '무리'들은 요새 여론에 휩쓸려 여당과 같은 스탠스를 취하던데요??

    일본이 과거를 미화하고 사죄를 안하지만 한국은 베트남에 사죄하는 착한 국가~ 라는 자위적인 역사관은 좌익들이 전부터 밀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베트남가서 사죄하고 일본에는 떵떵 거리는 거죠. 자신들이 정의고 착하다를 마음속에서 정해놓고 그런 양심적이고 숭고한 모습에 스스로 심취한 모양새입니다.
    그래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궂이 베트남 가서 사죄를 하려고 하는것입니다. 실상 알고 보면 전쟁은 잔인한 것이고 좌파들에게 과장되던 그들표현에 의하면 남한 군인의 학살은 북베트남군의 만행이나 통일 베트남후에 벌어진 일에도 불구하고 강조되었죠.

    게다가 일본이 사죄를 안한것도 아닙니다. 이제까지 수차례 사죄를 하고 일본교과서에도 위안부 문제가 명시 되고 수차례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나시카님은 이번일본의 경제 보복과 관련해 이글을 올리신것 같은데 보복이 뭡니까? 한국의 공격에 대한 일본의 반격이라 보복 아닌가요?
    한국의 공격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 지적하는 일부 언론 빼면 선동된 메이져 언론도 없어 보이더군요. 소득주도성장 - 대북정책의 잇다른 실패로 총선위기가 다가오자 민주당 내부문건에서도 드러났듯이 반일선동으로 판세를 뒤엎자라는 판단한에 일제히 동원된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몇달전까지 이런기류가 있었나요? 아베가 준 케잌을 면전에서 단걸 싫어한단 이유로 입도 안되는 외교적 결례를 범하고 김정은이 준 케잌은 맛있게 먹더군요.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면전에다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고 내뱉기도 했고요.
    거기에다가 징용공 판결은 문재인 본인이 노무현 정권때 2차 지급까지 완료해놓고 '위로금' 이라는 이유를 만들어 중복 지급하도록 판결을 유도했습니다. 세상 어디 법에 위로금 지급까지 명시하는 곳이 있을까요? 그것도 국가간에 배상이 끝난일에 더불어서 말이죠.
    유시민도 그러더라고요 아베가 화낼만 했다.

    저는 근세 유럽역사를 보면서 항상 부러워 했습니다. 영프 신성로마제국 로시아 북방국가들...수많이 얽히고 얽혀서 그렇게 싸우고 동맹맺고 하면서도 지금은 그 큰틀 아래서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프랑스가 백년전쟁 떠올리면서 영국에게 시도없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떼를 부리나요? 프랑스 독일관계는 또 어떤가요? 도길하고 오스트리아는???
    한국도 이제 일본하고 맨 과거 이야기를 수도없이 떠와서 다투는거 너무 비효율적 아닌가요? 지금은 17 18세기 유럽이나 2차대전 시기가 아닌데 말이죠. 21세기 한일관계는 어때야 할까.
    저는 말이죠 중국을 러시아에 대입하고 싶습니다. 중국과 그 앞잡이 북한에게 당한 피해가 더 많은데도 ..아니 오늘도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도 전혀 언급도 안하고 눈에 핏줄만 세워서 일본에 경마용 경주마에 시선 가림막을 쳐놓은 것처럼 쳐다보는것이
    근세 유럽사를 좋아하고 관심있어하는 저희가...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는 ..

    • 터키는 강하다 2019.08.03 1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건 몰라도 일제강점기 미화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스트리아인들,특히 독일계는 동등한 시민 대접을 받았지만 일제가 언제 한국인들을 동등하게 대접했다는겁니까? 일본인들이 다 행사하던 투표권도 없었고,심지어는 더럽고 유약하다고 간주해 징병조차 전쟁 말기에야 했습니다.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이 뭔지 알기는 하세요? 나치 치하 오스트리아에서 독일군이 여자들을 성노리개로 쓰려고 대량으로 끌어간 적이 있기는 한가요? 나치 치하 독일에서 대지진의 원흉이라며 오스트리아계 독일인들을 학살하는걸 독일 군경이 방조한 적이 있기는 합니까? 히틀러의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을 동등한 독일 국민으로 간주했지만,일제는 한국인을 노예 민족으로 간주했습니다.히틀러 제국식 기준으로는 폴란드인 내지 우크라이나인 정도죠.지극히 일부 친일파들이나 극소수의 한국인들(대한제국 황가 출신들이 아니라면 홍사익 준장이 제가 알기로는 유일하죠)이나 출세했지..일부 우크라이나계나 폴란드계도 독일제국에서 그정도 승진은 할 수 있었습니다.에리히 폰-뎀 바흐 첼레프스키가 대표적이죠..토착왜구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닌 것 같네요.신화화된 김구 선생은 물론이오 좌파들이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승만 대통령조차도 해방 후 혼란한 정국때 친일파들이랑 손을 잡았을지언정 독립운동가 시절 자신을 고문하고 박해한 일본에는 학을 땠는데,도대체 역사를 어디서 배우신겁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긋고 자위대의 한국 파병시 한국군을 시켜 발포하겠다고 한 건 괜히 하신게 아닙니다. 그만큼 당한게 있고 그만큼 위험하니까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거지요.

    • 나삼 2019.08.03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화는 안햇습니다만...소위 이런게 문제 입니다. 한일양국은 역사적으로 비슷한 크기 문화력 경제를 유지해 왔기야 양국간 자존심이 아주 셉니다. 프랑스 독일이라고 해두죠. 따라서 양국간 자극적인 언어로 상대를 비하하면 그게 선동이 되고 증오심의 에스컬레이터가 일어나는겁니다. 일제가 조선인을 '노예 민족'으로 간주한 예시좀 부탁드립니다. 조선인을 '더럽고 유약'하다고 여겨서 징병을 안햇다니요..좀 역사좀 알아보시고 말씁드리길 당부드립니다. 홍사익 중장을 아실 정도면 아주 모르시는것은 아니실텐데... 저런 자극 적인 말들을 사실인양 말씁하시는걸 보면..

    • 터키는 강하다 2019.08.03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처음부터 일본인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 무작정 쇠♬매로 두들겨패던 무단 헌병 통치로 시작해서 토지 조사 사업이랍시고 자영농들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이주 일본인들의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고,산미 증산 계획이랍시고 늘어난 쌀보다 더 많은 쌀을 공출해가서 한국 전체를 기아로 내몰았는데,이게 전국민의 노예화지 동등한 대우입니까? 일상생활에서도 더럽고 게으른 '요보'(1908년 경성일보 기자 우스다 잔운이라는 일인이 처음 쓰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이 쓰던 표현입니다)라고 멸시한 사례가 차고 넘칩니다.요보라고 검색만 해 보셔도 알 수 있으실 겁니다.지금도 일본에서는 한국계면 일본화되었더라도 공직이나 대기업에서 취직시켜주지도 않습니다.일본이 아직도 우리를 멸시한다는 진실을 보기 싫으신겁니까 아니면 보고도 모른채 하시는겁니까? 일본인은 우리를 프랑스인이 독일인 보듯 하지 않습니다.프랑스인이 알제리인 보듯 한다고 해도 곱게 봐준거지요.

    • 나삼 2019.08.03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이 쌀을 공출 했다고요? 일제시대 조선인 부농들은 그럼 어떻게 생겻나요? 아직도 수탈론 믿고 계신분이 잇네...낙성대연구소 가셔서 통계나 지표부터 보고 오시져

    • 최홍락 2019.08.04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낙성대연구소 통계에 대해서는 허수열 교수 등 실증분석을 통한 반박도 있습니다. 그 연구가 통계나 지표를 외면한건 아닙니다.

    • 나삼 2019.08.04 0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허수열 교수의 반박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반박이지 수탈론을 인정하는 것은 아닌것으로 아는데요

    • 개돼지조무사 2019.08.04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삼님, nasica1님은 "질 싸움도 얻을게 있다면 싸워야 한다" 고 아들한테 가르친다면서 하이쿠를 쓰는 분입니다. 그러고 묘하게 한국이 이 싸움에서 얻을게 뭔지, 손해가 더 크진 않을지는 죽어도 말안하는 분인데 아마 이런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연상케하는 발언을 하는걸로 보면 아마 친노종북잔당과 친문공산도당들의 주체사상에 경도된 분으로 보입니다. 뭘 바라십니까.

  8. 유애경 2019.08.04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는 강하다님, 여기 일본인데요.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일본화된 교포분들 많이 계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 나삼 2019.08.04 0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늘 조국의 트위터만 봐도 이해찬의 귀족 사케 식사를 옹호하면서 일식집에 종사하는 한국인 직원을 옹호하던데요. 몇일전까지 유니클로 를 그렇게 죽일려고 했던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일까요?

    • 아즈라엘 2019.08.04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화수복을 사케라고 허위선동하는 가짜뉴스 살포하는 벌레가 여기도 있네요

    • 개돼지조무사 2019.08.04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문을 사케로 넣었는데 나온건 백화수복이니 이해찬이가 사케를 시킨게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가짜뉴스 타령을 하는 좌익공산친노종북잔당이 여기도 있네요 ^^

    • Spitfire 2019.08.05 0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좀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일식집을 자주 다녀본 입장에서 백화수복을 파는 일식집을 본 기억이 없네요. 도쿠리로 판다면 백화수복 같이 비싼술 보다는 간바레 오또상 같은 싸구려 술을 이용할거고, 병으로 판다면 당연히 백화수복 보다는 비싼 사케를 들여놓는게 도움이 되지요. 민주당에서 핑계라고 댔지만 현실 경제에서는 등장하기 어려운게 일식집의 백화수복입니다.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반일을 선동하는 여당 대표가 일식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문제겠지요. 유니클로도 일본기업이지만 전범기업도 아니고 한국의 하청업체를 많이 활용하는데도 불구하고 불매운동 타겟이 되었다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식집의 운영이 걱정되더라도 가지 말았어야죠. 조국씨나 몇몇분들이 쓴 옹호글은 내로남불의 표본 그 이상도 아닙니다.

    • 아즈라엘 2019.08.05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핏파이어///일식집에서 백화수복이라고밝혔는데 아직도 ...ㅉㅉ

    • 스핏파이어 2019.08.05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즈라엘/ 저 사건의 핵심은 백화수복이 아니라고 썼는데 백화수복 이야기만 나오면 우루루 달려와 혀를 차시니...ㅉㅉ

      이건 가짜뉴스 아닌가요? 요새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가짜뉴스에 조작이라고 하니 무작정 믿지만 말고 팩트체크를 해보는게 맞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 물론 저는 그런 팩트체크를 하는 것보단 여당대표가 이 시국에 일식집을 드나든거 자체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일단 사과라도 하는게 맞다고 보는데, 고개 빳빳하게 들고 국산술 먹어서 괜찮아 같은 소리를 하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네요. 아예 일제시대에 일본 앞잡이도 ‘국내산’이라 같은 한국인들 괴롭혔어도 괜찮다고 하시죠~ㅎ

  9. 한심함 2019.08.04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솔직히 이번 문제는 문재인 정권에서 자초한 일이죠.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걸 종이장 뒤집듯 뒤집어 엎어버리니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과의 약속은 5년짜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죠.

    물론, 역대 정권 및 박정희 정권의 한일 기본 협약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체결된 이상 존중하여야 하는데,그걸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으니..

    정작 문대통령은 친일파 재산 환수에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변호사로 활동했고, 원내 대표 역임자 할아버지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친일파이면서 토착 왜구 등으로 국론 분열시키고, 조국이라는 인물은 죽창가나 외치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좀 더 크게 보자면 러시아는 사상 최초 영공 침입, 중국은 사드 재거론 및 보복조치 유지 중, 북한은 허구한날 미사일 발사, 미국은 방관..

    일본 쪽 여론은 지금 한국은 사방팔방이 적이라서 가만히 놓아두면 망하듯 무릎 꿇듯 둘 중 하나라는 생각에 느긋합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중일 신밀월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중국과 관계가 급격히 개선되었고

    • 기리스 2019.08.13 0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할 줄 아는게 남 흉내내는게 전부시네 ㅎ

      이궁 흉내를 내려거든 변주라도 좀 하시지 그대로 베끼시나 싸구려 틱하게 ㅋ

      -> 할 줄 아는 게 비아냥밖에 없는 싸구려가 하실 말인지^^

      이궁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관심을 줫나보네요 답글 한번 못 받아본 불쌍한 분한테 ㅋㅋㅋ

      -> 자기가 댓글 고프다고 남도 그런 줄 아시나 봐요^^ 에효 불쌍한 분^^

      이제 먹이는 그만 던저줍니다 ㅎㅎㅎ

      -> 남이 던져 주는 먹이 징허게 쪽쪽 빨아먹으면서 쫀심은 지켜야 하니 "니가 불쌍해서 먹어준다"며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부류들 많이 봤는데, 여기서도 보네요^^ 그네들과 달리 공약 준수하시는지 함 지켜보죠^^

  10. 2019.08.04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이 추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안다는 옛말이 있는데

    역시 한일 갈등의 순간이 오니 반족발들이 궐기를 하네요

    ㅋㅋㅋ

    • 2019.08.04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 님을 볼 때마다 느끼는게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명석하시지도 못한 것 같은데
      말은 항상 부처님이나 예수님 말하듯이 짧고 단정적으로 하시던데

      혹시 님의 근거없는 자신감의 근원이?

      혹시 정규재 티비?

      ㅋㅋㅋ

    • 2019.08.04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
      네 알겟사옵니다
      님의 고결하신 뜻을 미천한 중생이 미처 몰랏사옵니다
      ㅋㅋㅋ

      근데 여기 주인장은 비록 식견은 허접해도 글재주라도 있지만 님은 이것 저것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것 같구려

      장가도 못가시고 돈벌이도 못 하시는 분이 어른타령을 하시니 설득력이 참으로 철철 넘치옵니다
      ㅋㅋㅋ

      부디 이 블로그에서 정신적 자위라도 충만히 하시길 바라옵니다

    • Spitfire 2019.08.05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ㅠ/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절개가 드러나는 것은 역사에도 많이 나오지요. 병자호란 때 항복협상을 주도해서 두고두고 욕을 먹었던 최명길이 역적이지요. 김상헌이 주장한대로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명예를 지키고 옥쇄해서 나라가 없어졌다면, 지금처럼 힘들게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 중국의 일개 성이 되어서 대국의 국민이 되었겠지요. 그렇다면 일본의 침략을 받았을지언정 결국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일부가 되어 소수민족이라는 타이틀을 받고 한글을 쓰면서 계속 편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강대국의 일부가 되지 못한게 천추의 한입니다. 절개를 지켰다면 가능했을텐데 말이죠~

    • 2019.08.05 0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Spit/
      최명길은 애국자죠

      천박한 잘난척과 야비한 매국행위에 핑계거리로 본인이름이 거론되는걸 알면 최명길은 지하에서 땅을 칠겁니다

      참고로 앞으로 잘난척 하실때는 최명길보다 을사오적 중 아무나 하나 골라서 들고오십시오 그나마 그 게 님글의 논지와 맞을 것 같네요

      ㅋㅋㅋ



    • 기리스 2019.08.05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족발 운운하는 시점에서 이 분이 최명길 운운할 자격을 잃은 건 확실하네요. 알타리무님 깔 자격이야 물론....

    • 2019.08.05 1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리스
      반족발이란 말에 발끈하는 분들이 참 많네

      ㅋㅋㅋ

      족발2까면 최명길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희안한 논리에 감탄합니다

      그냥 내의견과 다르면 무조건 친노 종북이라고 우기시는 어떤 분 따라하는 방법을 권합니다

      ㅋㅋㅋ

    • Spit 2019.08.05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ㅠ/ 아~네~ 뭐 그 애국자라고 빠시는 최명길도 병자호란 당시에는 목이 여러번 떨어졌다 붙은 역적이자 매국노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님같은 사람에게 듣는 욕이야 뭐 대수롭지도 않네요. 사실 극렬하게 욕을 먹을수록 저도 언젠간 님같은 후손에게 애국자 칭호를 받을지도 모르니 더욱 힘이 나네요!ㅋㅋㅋ

      저야 이번 사태로 조금 피해야 보겠지만 먹고사는덴 지장이 없고 님도 부디 그런 분이길 바라지만, 그냥 그러지 못할 많은 사람들이 걱정되서 그럽니다. 나혼자 편히 살면 또 누군가 욕을 하더라고요. 힘든 사람들 생각도 안해준다고... 주가도 빠지고 날도 더운데 힘내세요~

    • 2019.08.05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spit

      난 누굴 빤적이 없는데요 다만 나름대로 평가만 할 뿐입니다^^ 님이 일본 빠는게 생활화되다보니 남들도 다 빠는 사람으로 보이나 보죠 ㅋㅋㅋ

      그리고 어설프게 아는 척, 있는 척 하지 마시길,,, 세상은 넓고 유식한 사람도, 부자도 많답니다.

      그리고 본인의 에고를 위해서 일본편 드시면서 없는 사람들 위해서 걱적하시는 척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좀 얼굴이 간질거리실 것 같은데 ㅎㅎㅎ

    • /spit 2019.08.06 0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ㅠ/ 녜~녜~ 의견 잘 들었습니다~ 저를 일본 편드는 사람으로 주장하시는데 대한 아무런 근거도 들을 수 없었지만 말이죠. 초등학생들이 주로 하는 ‘우리 아빠가 더 대단해’ 수준의 말로 본인의 수준은 감추고 만나보시기나 했을까 싶은 분들을 언급하시는데, 사실 그정도로 대단하신 분들이 님의 편에 설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네요. 게다가 고작 하시는 말이 ‘나랑 다르면 친일파!’라는 주장만 주구장창 앵무새처럼 하시니, 그닥 신선하지도 않구요.

      그리고 안전모 꼭 착용하세요!*^^*

    • 2019.08.06 18:37  댓글주소  수정/삭제

      /spit

      네 ~~
      잘난척 안통하니 삐지셧나

      결국은 협박질이시네^^

      에이

      아는척 잘난척 시작햇으면 끝까지 아는 척 잘난척으로척 일관해야지 협박질로 방향바꾸면 우습죠^^ 센스가 없으셔

      아 맞다 아는척 잘난척도 기본 머리는 되야 하는 하는거엿지 ㅋㅋㅋ

    • 기리스 2019.08.07 0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난 파시스트가 아니라서 반족발 거리는 거에 민주시민답게 분노하는 건데 뭐 문제라도 있나 보죠?^^

    • 2019.08.07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리스
      관심 하나 던져 드립니다

      딴데 가서 노세요 ㅋㅋㅋ

    • 기리스 2019.08.08 0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찔리는데 반박은 몬하겠으니 비아냥대는 것밖에 못 하죠?^^

    • 2019.08.08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리스
      반족발들을 싫어하면 최명길을 운운하면 안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ㅋㅋㅋ

      님이 여기 저기 달라붙어서 관심 좀 달라고 징징거리는게안쓰러워서 관심 하나 던져 주었더니
      관심 하나론 부족햇나보네요 ㅎㅎㅎ

      그쪽사람들 한테나 관심달라고 해보시지 ㅋㅋ

      하긴 님은 그쪽사람들 한테도 아오안인게 확 티가나네 ^^

    • 기리스 2019.08.12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족발이 궐기한다는 근거는?^^

      님이 관종이라고 남도 관종이라 생각하니 반족발 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겠죠?^^

      사안마다 옳은 소리 한다 생각하는 쪽 지지하는 상식인이 님들 눈엔 박쥐마냥 여기저기 달라붙는 관종처럼 보였나 보네요^^

      그쪽 사람들?^^ 님이랑 하는 짓이 똑같은 닭사모 말인가요?^^ 관심 고프신 님이나 열심히 시비 걸고 사시죠? 그래야 슬람이들한테 팽이라도 좀 늦게 당하지^^

      하긴 님은 어느 쪽에 가든 금방 팽당할 피래미인 게 확 티가 나네^^

    • 2019.08.12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리스

      ㅋㅋㅋ

      할 줄 아는게 남 흉내내는게 전부시네 ㅎ

      이궁 흉내를 내려거든 변주라도 좀 하시지 그대로 베끼시나 싸구려 틱하게 ㅋ

      이궁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관심을 줫나보네요 답글 한번 못 받아본 불쌍한 분한테 ㅋㅋㅋ

      이제 먹이는 그만 던저줍니다 ㅎㅎㅎ

      Ps
      /기리스

      아 ㅋㅋㅋ
      댓글을 달려면 이 밑에 달아야지 왜 저위에 다셧어 ~~

      부들 부들거리느라 댓글 위치도 못 잡네

      실시간 생쑈 잼나게 봅니다^^

  11. 개돼지조무사 2019.08.04 18: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 님, 님은 클만큼 크고 자식도 낳고 서양사도 알만큼 알고 나폴레옹으로 지적허영도 누리면서 후빨러들 모아다가 뽐내는 분이 블로그로 이런 정신적 자위로 분비물 갈기면서 일본놈들한테 훈수두면 일본놈들이 이 글 보고 감동 감화될것같아서 이런 뻘글 쓰는거 아니죠? 그냥 이런건 안쓰는게 체면유지될것 같지 않나요? 체통 지킬 생각 없으세요?

    • nasica 2019.08.04 2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치매걸린" 등의 욕설에 해당하는 표현은 삭제합니다.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기리스 2019.08.05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 옳으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반족발 어쩌고 하는 욕설에 해당하는 품위없는 표현도 공평하게 날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12. 수비니우스 2019.08.04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 댓글중에 nasica님에 대해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하는 것은 법적 조치를 하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 A 2019.08.05 0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감입니다. 정도가 넘어도 한참 넘었네요

    • nasica 2019.08.05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런 댓글에 관심 주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 개돼지조무사 2019.08.05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런... 이제 눈막고 귀막고 생각까지 포기하고 사시려고 그러세요?? 제가 체통을 지키라고 했던 조언은 나폴레옹 칼럼연재로 벌어놓고 지키실 위신이 있어보여서 드린 케언데 ^^

  13. 2/28일 입대 2019.08.05 0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 다시 한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다만 댓글들이 너무 격해서 혹시나 상처받거나 하지는 않으실지 걱정이네요;;;

  14. A 2019.08.05 0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사랑 가득한 팬은 그가 성공, 성장할 때 거들고 최의 팬은 그가 가장 성공할 때 가장 크게 그를 괴롭힌다고 합니다.
    지금 누가 키보드에 버그를 sjdms 건ㅁ지ahfmrpTwl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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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DAZason 2019.08.05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은 스스로 고민도 많고 방황도 많이 한다고 하시지만 세상의 진리 하나를 깨우치고 스스로 행하신다는 점이 존경스럽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에 신경쓰지 않고 관심 줄 필요가 없다는 것, 말이 쉽지 실제로 행하긴 어렵더라구요. 제 일도 아닌 걸 한 소리 하고 싶어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항상 좋은 글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16. 그저 2019.08.05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께서 댓글들에 신물이 나서 절필하시게 될까 두려울 따름이네요.
    갈수록 그 수위를 넘는다 싶더니 이제는 아주 주인장 님에 대한 인신모독에 종북 몰이까지 나오는군요.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읽지 않으면 될 뿐이고 주인장 님의 정치적 성향이 본인과 맞지 않다면 블로그에 오지 않으면 될 일인데
    구태여 글이 올라올 때마다 찾아와서 본인의 말이 진리인 양 떠들고 있는 양반들은
    기어코 주인장 님의 "편향된" 사상이 들어간 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네요.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nasica님께서 본인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 대고 도를 넘은 발언을 일삼는 건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들 해보세요.

    • 개돼지조무사 2019.08.05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이, 인신모독이라뇨, 왜 그런 편향된 인식을 가지고 계시죠?

      그저님은 안 안타깝습니까? 친노종북잔당,친문공산도당이 어부지리로 혁명을 찬탈하고 민족과 민중이란 환상에 빠져서 무능으로 2년 반만에 나라를 도탄과 전쟁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귀막고 눈감고 그래도 얻을게 있으니 싸우다 옥쇄해야 돼고 세상엔 여러가지 인종이 있으니 남들 말은 듣지 않겠다 하시며 19세기초 유럽으로 퇴행하시는 nasica님 꼬락서니가

      nasica님께서 이런 하찮은 분이 아니라고 믿는 저는 그저님하고 다르게 뼈를 깍는 직언 한마디 드린 겁니다,

      실제론 nasica님도 지금같으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바른 말만 골라서 하며 민주적 풍토를 조성하고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는 나나 여러 작성자한테 고마워하고 계실듯 하지 않나요? 그럴것 같지요? ^^


  17. apils 2019.08.06 0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휴.....이런 덧글전쟁 좀 끝났으면 좋겠네요

  18. 기리스 2019.08.08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반족발 등의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에 대한 욕설은 그냥 놔두시는군요.

  19. 펱로스 2019.08.22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넷플릭스에서 보고 다시 왔습니다.

    마리아 알트만 처럼 살고 싶네요.

  20. 2019.08.22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글은 신경쓰지마셔요. 좋은글 잘봤습니다

  21. Eugen 2019.09.06 0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긴 말 안합니다. 국제법을 어기는 쪽은 한국입니다.

    • Eugen 2019.09.06 0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약간 덧 붙이자면 진짜 일뽕은 문슬람이라길래 제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마이너 갤러리에 가서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사실이였습니다. 문재인이 한국을 망친다고 아주 좋아하던데요.


1810년 마지막 날에 영국 상품의 입항을 허용하고 반대로 프랑스 상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부가하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칙령(ukaz)이 내려지자, 이제 전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유럽 전체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문제로 1810년 중반부터 아웅다웅하고 있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말로만 툭탁거리지 않았고, 서로 병력을 바르샤바 공국 접경 지역으로 증강 배치하면서 상호간의 긴장감을 키워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전쟁 때 점령한 뒤 계속 움켜쥐고 있던 슈테틴(Stettin)과 단치히(Danzig) 등 프로이센의 주요 요새들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내의 병력들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등 동부 지대로 조금씩 이동시켰습니다.  

 

(오늘날 폴란드 영토가 된 슈테틴, 폴란드어로는 슈체친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하고 있는 도시로서, 베를린으로부터는 14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이며 원래 프로이센 영토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게 동부 영토를 빼앗긴 폴란드에게 보상 형식으로 주어졌지요.)

 



1811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11년 4월에는 긴 꼬리가 달린 혜성이 관측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혜성은 큰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좋지 않은 대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여졌는데, 모스크바부터 마르세이유까지 유럽 전역에서 이 불길한 혜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알렉산드르 본인도 이 혜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과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국 대사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혜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나폴레옹은 정말 바빴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기존의 전쟁과는 규모와 성격면에서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남긴 편지를 보면, 나폴레옹은 연대 번호만 들어도 그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고 어디에 배치되어있으며 편성된 전력이 어떤 수준인지 또 그 과거 전적이 어땠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세세한 점까지 신경을 쓰면서 새로 병력을 뽑고 새 부대를 편성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로 무척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대략 68만, 그 중에서 실제로 네만(Nieman) 강을 건너 러시아로 동진할 인원은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대략 40만에 달헸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준비를 하면서 러시아군을 무찌를 신무기나 새로운 전술 등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군사 기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이번 전쟁 준비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바로 병참이었습니다.  그는 1807년 삭막한 폴란드 땅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동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확연하게 다른 곳이라서 기존처럼 현지 조달에 의존해서 싸우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역대급의 보급망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비스툴라(Vistula, 폴란드어로는 Wisła 비스와) 강을 따라 대규모의 보급창을 건설했습니다.   비스툴라 강은 바르샤바는 물론 모들린(Modlin)과 토른(Thorn) 등의 주요 요새 및 도시를 거쳐 항구 도시 단치히(Danzig, 현재의 그단스크 Gdansk)에서 발트 해로 흘러가는 폴란드의 대표적 수로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영토와 직접 맞닿아 있는 라인 강과 이 비스툴라 강 사이에 총 5개의 수송로를 설정하고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긁어모은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유럽 대륙의 주요 하천입니다.  템즈 강 같은 것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비스툴라 강은 당당히 표시될 정도로 꽤 중요한 강입니다.)

 

(브레슬라우, 즉 보르츠와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812년 1월까지 나폴레옹은 단치히에만 40만 명의 병사들과 5만 마리의 말이 50일 간 먹을 식량과 사료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40만 명 x 50일 = 2000만 명분의 식량을 쌓아놓은 것이지요.  이 외에도 오데르(Oder) 강에 접한 프로이센의 도시 퀴스트린(Küstrin, 폴란드어로는 Kostrzyn 코스트신)과 슈테틴(Stettin, 폴란드어로는 Szczecin 슈체친)에도 별도로 수백만 명분의 식량을 축적했습니다.  역시 오데르 강에 접한 프로이센 도시 브레슬라우(Breslau, 폴란드어로는 Wrocław 브로츠와프)와 비스툴라 강에 면한 프오츠크(Płock) 및 비소그루트(Wyszogród) 등에는 거대한 곡물 창고와 제분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밀가루는 비스툴라 강을 통해 배 편으로 토른에 보내져 하루에 6만개씩의 큼직한 야전용 건빵이 구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각 부대의 뒤를 따라 가도록 걸어다니는 푸줏간인 가축떼를 5만마리나 모아두었습니다.  

 

(베를린과 슈테틴, 즉 슈체친과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원래 슈테틴은 독일 영토일 때 베를린의 외항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비스툴라 강변을 따라 늘어선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과의 거리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주요 물자 수송로 역할을 한 비스툴라 강, 즉 비스와 강입니다.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은 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쌓아만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쾌속으로 진군하는 부대들의 속도에 맞춰 러시아 내륙으로 수송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위해 치중대대(train battalion) 20개를 편성했습니다.  여기에는 7,848대의 마차가 배속되어 배고픈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실어나르도록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하면, 스페인 전역을 위해 나폴레옹이 조직한 치중대대의 규모를 보시면 됩니다.  1810년 10월, 나폴레옹은 총 12개 치중대대를 편성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마차의 수가 1,700대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스페인 방면군에는 5개 대대를, 포르투갈 방면군에는 2개 대대를, 그리고 프랑스 국내에서 5개 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1810년 당시에는 스페인에 배치된 프랑스군의 수가 20만을 훌쩍 넘었는데, 거기에 고작 5개 대대 약 710대의 마차가 할당된 것입니다.  그런데 40만의 러시아 방면군을 위해 10배가 넘는 수의 마차를 준비한 것을 보면, 확실히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오를 가지고 수송에도 매우 신경을 쓴 것입니다.  

 

 

(한번도 하일라이트를 받지 못한 부대가 바로 치중대이지요.  하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보병과 포병, 기병일지 몰라도, 전쟁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치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평소에 등한시하던 식량 문제에도 이렇게 신경을 썼으니 탄약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지 조달을 중시하던 나폴레옹조차도 무기와 탄약은 항상 본국으로부터의 수송에 의존했었거든요.  바르샤바에는 큼직한 무기고가 건설되어 각종 탄약과 무기가 집적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주요 식량 집적소인 단치히, 슈테틴, 퀴스트린 등에는 식량 뿐만 아니라 각종 야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동원된 나폴레옹의 7개 군단이 보유했던 대포의 수는 총 300문을 넘지 않았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당일날은 훨씬 더 적은 수의 대포가 동원되었습니다.  러시아 원정 이전까지는 유럽 최대의 전투였다는 바그람 전투에 동원된 프랑스군의 전체 대포 수는 488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마그데부르크(Madeburg)에 집결시킨 탄약과 포병대의 규모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곳의 무기고에는 135톤의 화약과 함꼐 2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가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포 462문과 공성용 중포 100문이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슈테틴에는 263문의 야포, 1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 90톤의 화약을, 퀴스트린에는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를, 그리고 글로가우(Glogau)에도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 45톤의 화약을 축적해놓았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806문의 야포와 761,801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야포 1문당 거의 1,000발에 가까운 포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사상 최대이기도 하고 또 유례없이 격렬한 포병전이었던 바그람 전투 40시간 동안 프랑스군 포병대의 488문은 약 10만발을 발사했는데,  이는 1문당 200발 정도를 쏘아댄 것이었습니다.  이런 격렬하고 대규모였던 전투는 나폴레옹 인생 전체에서도 흔치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충분한 양의 탄약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준비를 했지만,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결국 병참 문제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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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9.07.29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 육군의 병력대비 전쟁비용이 프랑스군보다 높은 이유가 보급을 직접하거나 현지조달을 해도 현찰로 따박따박 지급해서 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원정도 병력대비 전쟁비용이 많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러시아 원정의 전쟁비용은 얼마이며 이는 비유적으로 어느정도의 규모인가요?

  2. 동겸좀비 2019.07.29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대전 독일군의 병참한계선도 드리나-드네프르 강까지 였는데, 나폴레옹이라고 무슨 재주가 있었을까요.
    독일은 침공군의 규모가 400만이었으니 나폴레옹의 러시아 방면군 보다 10배나 많았네요.

  3. 터키는 강하다 2019.07.29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굉장한 양의 화약과 포탄을 저장했군요.아무래도 밀이나 감자랑 다르게 포탄과 화약은 러시아 농촌을 약탈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저리 준비한걸까요.

  4. 웃자웃어 2019.07.29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러시아군이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고전시킨 이유가 뭘까요?

    • 원인 2019.07.3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이 몸이 좋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지 못했죠.
      다부가 크게 우회기동하자고 건의했는데, 나폴레옹이 각하시킴.
      프랑스군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이 바로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이 몸이 아프면 패하는 경우가 많죠. 보로디노, 워털루 등.

    • reinhardt100 2019.07.30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로디노 전투가 중요한 이유가 소련식 군사학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포병전을 쌍방이 한치의 실수 없이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포병전력에서 프랑스군 587문, 러시아군 640문이었는데 쌍방의 공세 상당부분을 포병으로 틀어막아버리면서 격전이 되어 버린 겁니다. 후반부 양군의 포병 화력 밀도에서 프랑스군이 앞서버리면서 전투가 프랑스측으로 전세가 기울어버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담이지만 이 때 경험부터 러시아 및 소련은 포병사단, 포병군단 개념을 자신들의 군사학에 도입했고 냉전기 서방권이 가장 무서워한 동구권의 재래식 전력인 포병전력이 적극적으로 확충됩니다. 절대 기갑전력이 아닙니다. 서방권이 MLRS니 통합화력이니 하는 거로 막으려던 건 어디서 쏟아질지 모르는 동구권의 압도적인 포병전력에서 쏟아질 '전선 그 자체를 뭉개버릴 수준의 화력'이었습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상의 화력으로 맞불 놓는 것이었으니까요.

  5. 프로이센 2019.07.29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봤습니다. 말이 먹을 건초가 부족했던 걸까요

  6. 동장군 2019.07.30 0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의 수호신인 그 분을 너무 얕본것 아닐가요.
    주석페스트도 있고

    • 비우 2019.08.29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표적으로 잘못알려진 사실 입니다 나폴레옹은 겨울이 되기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였고 겨울이 되기전에 떠났습니다 이때까지만 봐도 프랑스군의 비전투 손실은 엄청난 규모 였습니다

  7. 돌격대장 2019.07.30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자면
    보급선이 길어짐에 따라 수송에 어려움이생긴것
    아닐까요.러시아군의 청야전술에 현지조달도
    어려워져서 병참이 터졌을거같군요.

  8. 원인 2019.07.30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원정 실패는 몇가지 원인이 있죠.
    (1) 육로보급 그 자체
    (2) 군마의 마비저 박테리아 감염
    (3) 인간의 티푸스 감염
    (3) 주석으로 된 외투단추가 추위에 파쇄

  9. reinhardt100 2019.07.30 2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평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초부터 9월까지 얼마나 진격하냐?' 입니다. 물론 보급이 더 중요하죠.

    역사상 러시아 평원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를 장기전으로 이긴 나라는 폴란드 하나입니다. 대동란 시절, 즉 1605년~1618년 전쟁기인데 이 시기 폴란드군을 나폴레옹이 꽤 참고했다는 알 수 있습니다. 폴란드군은 당시 핵심 전력인 윙드후사르는 보로디노 전투와 같은 수준의 중요한 쿠쉰 전투 같은 전투에서 주력으로 활용했고, 스몰렌스크 공성전 같은 경우는 포병전력이 상대적으로 충실했던 서유럽 출신의 용병대를 주로 활용했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보로디노 전투에서 최정예인 제국근위대는 일단 한번 더 쓰기 위해(?) 아꼈지만 그 외 주전력은 모조리 쏟아부었죠. 즉, 폴란드군처럼 단 한번의 결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붕괴, 알렉산드르 1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보급이 뒷받침되야 이게 가능한데 폴란드군은 가능했지만 프랑스군은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당시 폴란드 정규군은 모스크바에서 퇴각한 1612년부터 연방 역사상 최대 콘페라데치아(이익을 위한 연맹집단)을 결성해서 세임(연방 의회)와 국왕인 지그문트 3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죠. 이 때문에 용병대인 '묵시록의 기사들'인 리소브치치가 국가 방위 및 러시아 침공전을 도맡았죠. 이들은 보급은 '당연히 러시아에서 현지조달한다'였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리소브치치는 소수 기병(6개 부대 약 2만)이었다는 점, 러시아 서부 전역을 보급조달지역으로 보고 무차별적인 약탈로 충분한 보급을 할 수 있었다는 거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단 하나만 노린 40만 이상의 공격군이 리소브치치처럼 광역 원정을 할 수 없었고 현지조달이 이미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후대 독소전쟁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참고해 3개 집단군으로 분리, 광역 섬멸전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을 진행했지만 이 판국에도 후방 정리가 안 되서 개판된 걸 보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이미 무리수가 여기저기서 보였던 겁니다.